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영조실록45권, 영조 13년 1737년 9월

싸라리리 2025. 9. 19. 10: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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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1일 병술

임금이 상참(常參)과 주강(晝講)을 행하였다. 영의정 이광좌가 청하기를,
"밖에 있는 사람으로 광유(廣諭)에 참여하지 않은 자는 3일 노정(路程)을 한정하여 파직하소서."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이광좌가 또 청하기를,
"아주 늙은 신하와 염퇴(恬退)한 자는 너그러이 면제해 주소서."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아주 늙은 사람 및 유일(遺逸)은 본디 논할 것이 없지만, 염퇴(恬退)한 사람에 이르러서는 군부(君父)가 유시하고자 하는데 어찌 올라오지 않았는가? 또 과목(科目)이 있는 자도 유일이라 일컬으니 용서하기 어렵다."
하였다. 이광좌가 말하기를,
"재작일 이후는 개벽(開闢)한 격이니, 기강을 진작시키려면 마땅히 전조(銓曹)부터 먼저 해야 합니다. 이조 판서 이덕수(李德壽)는 신과 교분이 두터워 평소 그의 순후 질박(淳厚質朴)함을 알지만 처음 정사에서 침랑(寢郞)284)  에 먼저 인아(姻婭)를 의망(擬望)하였으니, 칙려(飭勵)한 성상의 뜻을 어겼고, 또 잗단 일에도 우상(右相)의 말을 따르지 아니하여 체통에 관계됨이 있으니, 마땅히 체직해야 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이덕수는 사람됨이 질박하고 정직하여 인아를 피하지 않은 것 역시 순실(淳實)한 소치이다. 그러나 아뢴 바가 이러하니, 체직함이 옳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지난번 개벽의 하교를 하였는데, 여러 신하의 마음이 과연 개벽이 되었는가?"
하니, 지사 조현명(趙顯命)이 말하기를,
"지난날의 일은 실로 지나친 거조였으나, 이로 인해 조정이 화평하게 되면 영웅 호걸의 임금이 되기에 해롭지 않습니다. 그러나 혹시 또 효과가 없다면 장차 어떻게 하겠습니까? 원하건대, 더욱 면려하소서."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나는 나라를 지키려는 고심일 뿐이니 어느 겨를에 영웅의 임금이 되기를 스스로 기약하겠는가? 참으로 당습을 버리어 위망(危亡)의 지경에 이르지 않으면 다행이다."
하였다. 사간 조상명(趙尙命)이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이행민(李行敏)이 전계를 거듭 아뢰고 또 송성명(宋成明)을 문외 출송(門外黜送)하기를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9월 2일 정해

조현명(趙顯命)을 이조 판서로, 김시형(金始炯)을 대사헌으로, 이덕수(李德壽)를 좌부빈객(左副賓客)으로, 김유경(金有慶)을 우부빈객(右副賓客)으로, 윤심형(尹心衡)을 부응교로, 홍창한(洪昌漢)을 교리로 삼았다.

 

임금이 대신과 비국 당상(備局堂上)을 인견하였다. 영의정 이광좌(李光佐)가 아뢰기를,
"재용(財用)을 절약하고, 영작(營作)을 파하며, 사여(賜與)를 신중히 하고 복식(服飾)을 검소하게 하기를 우러러 힘쓰소서."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지금 나라의 저축이 가난한 집의 살림살이와 같아 나에게도 세탁한 옷이 있고 매양 상사(賞賜)할 일을 당해도 혹은 참고서 중지하기도 한다."
하였다. 이종성(李宗城)이 말하기를,
"나라를 다스리는 방도는 입지(立志)가 굳은가 굳지 않은가에 달려 있으니, 이제 만약 당을 깨뜨릴 수 없다면 도리어 난망(亂亡)을 재촉하게 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옛사람이 말하기를, ‘거(莒)에 있었던 때를 잊지 말라285)  .’ 하였으니, 나는 마땅히 밥을 먹지 않았던 일을 생각해야 하고, 여러 신하들은 어선(御膳)을 물리쳤을 때를 잊지 말아야 한다."
하였다. 이광좌가 청하기를,
"원경하(元景夏)를 호남 별견 어사(湖南別遣御史)로 삼으소서."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공조 판서 이병상(李秉常)이 말하기를,
"신의 정세(情勢)는 전에 이미 우러러 진달하였는데, 전하께서 비록 이미 선천(先天)에 붙이셨으나 천지(天地)는 같은 천지이고 사람 역시 같은 사람인데 어찌 선천(先天)·후천(後天)의 다름이 있겠습니까? 조정에 가득한 사람들이 또한 어찌 같은 마음과 같은 의논으로 거취를 함께 할 이치가 있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중지하라. 공조 판서는 아주 그르다."
하고, 인하여 전교하기를,
"내가 공조 판서의 말을 듣고는 나도 모르는 사리에 오랫동안 눈을 감고 있었던 것은 대개 진정(鎭定)하고자 해서이다. 그는 사람이 매우 고집스럽고 막혀 있다. 참으로 물러가고자 하면 광유(廣諭)했을 때에 술을 마시지 않았으면 되었는데, 어찌 같은 천지요 같은 개인이라는 말로 스스로 당수(黨首)가 되어 군부에게 대항하는가? 이후에 만약 옛 습관을 이루려고 하는 자가 있으면 내가 문(門)에 임해 고가(藁街)에 목을 베어 달겠으니, 경들은 지나치다고 말하지 말라."
하니, 이광좌가 말하기를,
"말씀을 어찌 그렇게 해야 하겠습니까?"
하였다. 정언(正言) 유언협(兪彦協)이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고, 조태언(趙泰彦)을 섬에 위리 안치[栫棘]하라는 명을 환수하라는 데 이르러서는 답하기를,
"혼돈(混沌)과 개벽(開闢)은 흑(黑)과 백(白)처럼 판이(判異)하게 틀린데 사람은 개벽하지 않는다는 말이 전에 조태언에게서 있었으니, 빨리 정지하여 번거롭게 하지 말도록 하라."
하였다.

 

9월 3일 무자

임금이 조강(朝講)을 행하였다. 영부사(領府事) 송인명(宋寅明)이 말하기를,
"근일 전하께서 위벌(威罰)로써 여러 신하를 내친 것은 예로 신하를 부리는 도리가 아닌 듯싶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조선(朝鮮)에는 한 임금만 있을 뿐인데, 이미 ‘신하가 임금을 가린다.[臣擇君]’라는 전교를 들었고, 또 후일을 기다리는 뜻이 있었으니, 이는 마음이 서로 연관된 것이다. 내가 마땅히 거기에 대해 각주(脚註)를 달아 말하겠다. 이른바, ‘신하가 임금을 가린다.’라고 한 것은 다른 뜻이 아니라 가릴 임금에게 은혜를 맺고 덕을 베풀어 그 임금을 농락하고 장악한다는 것이니 이 어찌 신하의 절조이겠으며, 이른바 ‘후일을 기다리라.[待他日]’고 한 것은 대개 그때 억울한 마음을 신설(伸雪)하지 못한 자는 장차 후일을 기다려 그 억울함을 신설하고자 한다는 것이다. 나의 한결같은 괴로운 마음이 어찌 그 사람을 덕스럽게 여겨 그 임금을 업신여기는 마음을 용서하겠는가? 이병상(李秉常)이 정세라고 말한 것은 세도(世道)를 위해 크게 해를 끼치는 것이니, 경들은 공심(公心)으로 시비를 논해야 한다."
하니, 송인명이 말하기를,
"이번 성상의 하교는 의리(義理)로서는 그렇습니다. 3자 하교(三字下敎) 후에 누가 감히 옹호하는 자가 있겠습니까? 이병상이 이른바 정세라고 한 것은 그 말을 다하지 못했는데, 어찌 그 언외(言外)의 뜻을 억측하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만약 이를 이병상에게 물으면 이는 영원히 그 사람을 버리게 되니, 내가 애석하게 여기는 바이다. 부자(夫子)286)  가 소정묘(少正卯)287)  를 죽임에 있어 어찌 일찍이 그가 정사를 어지럽힌 이유를 말했던가?"
하니, 송인명이 말하기를,
"이병상이 만약 그 사람을 구하려 했다면 죄를 주어도 마땅하지만 이제 그의 마음이 환정(宦情)이 담담(淡淡)한 데에서 나온 것인 줄 어찌 알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정세(情勢)로 치사(致仕)하는 것은 가하지만 만약 그 사람이 억울하다고 조정에 변호한다면 비록 윤혁(尹㴒) 같은 광생(狂生)이라 하더라도 내가 반드시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하였다. 사간 조상명(趙尙命)이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장령 신겸제(申兼濟)가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까닭 없이 광유(廣諭) 때에 참석하지 않았던 자는 파직하소서."
하니, 그대로 윤허하였다. 송성명(宋成命)에 대한 일은 정계(停啓)하였는데, 지평 김낙증(金樂曾)이 인혐하여 아뢰기를,
"신은 이행민(李行敏)·신겸제와 송성명에 대한 계사를 연명(聯名)하여 냈는데, 이제 신겸제가 신에게 편지로 묻지 않았습니다. 처음에는 일단의 공심(公心)에서 나온 것이라 하여 반대하지 않았는데 끝에 가서는 이에 사의(私意)에 끌려 움직여 몰래 정계하기에 이르렀습니다."
하니, 예사 비답을 내렸다.

 

9월 4일 기축

비변사에서 아뢰기를,
"보장(保障)의 중지(重地) 및 변새(邊塞) 관방(關防)의 감사(監司)·병사(兵使)·수령(守令)은 묘당에서 의논해 천거함이 많았는데, 중년(中年) 이래로 양남 감사(兩南監司)를 또 문의(問議)하게 하였고, 근래에는 호서 감사(湖西監司) 및 육진(六鎭)의 강변읍(江邊邑)마저도 또 문의하게 하여 점차 관권(官權)을 침해하는 데로 돌아갔으니, 자못 전조(銓曹)에 위임하는 뜻이 아닙니다. 양남(兩南)은 문의한 지가 또한 이미 오래 되었으니, 우선은 전례에 의하여 시행할 것이며, 호서 감사 및 육진·강변의 수령은 지금부터 전조에서 직접 차출하게 하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임금이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는데 원임 대신(原任大臣)도 함께 들어왔으니, 구제(舊制)를 복구하는 것이었다. 영의정 이광좌가 청하기를,
"기유년288)  에 별도로 천거한 사람인 민익수(閔翼洙)·한덕필(韓德弼)을 추장해서 임용하고, 유순장(柳純章)·이성윤(李成允)·윤광신(尹光莘)·임훤(林萱) 역시 조용(調用)하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모두 허락하였다. 좌의정 김재로(金在魯)가 말하기를,
"삼가 들으니 이병상(李秉常)이 주대(奏對)한 나머지 심지어, ‘문에 임해 현수(縣首)하겠다.’라는 전교가 계셨다 하는데, 이는 예(禮)로써 신하를 부리는 도리가 아닙니다. 어제 하교에서는 더욱 차마 들을 수 없는 것이 있었고 심지어는 각주(脚註)를 달아 하교까지 하셨습니다. 전하께서 만약 확실하게 이러한 신하를 보셨다면 어찌 일각인들 용서하시겠습니까? 이병상의 충정(忠情)을 미처 굽어 살피시지 못한 듯싶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그때 사기(辭氣)가 지나쳤음은 나 역시 후회하고 있다. 그러나 여러 신하로 하여금 일제히 모이도록 한 것은 단지 술을 마시자는 것이 아니었고 군부(君父)가 다시 임어함을 알도록 한 것뿐이었는데, ‘같은 천지이고, 같은 사람이다.’라는 말을 어찌 감히 마음에 싹을 틔울 수가 있겠는가? 내가 묻지 않은 것은 대개 그 사람을 아껴서인데 왕법(王法)에는 사(私)가 없다고 전교하였다. 대개 당시에는 3당(黨)이 각기 임금을 가렸었는데, ‘초(楚)가 아니면 제(齊)이다289)  .’라는 말이 내 귀에 들어왔었다. 참으로 삼종(三宗)의 혈맥(血脈)을 부호하고자 했다면 어찌 이런 말을 하였겠는가? 이는 나에게 덕색(德色)을 보여 각기 그 당을 굳히고자 한 것이지 범진(笵鎭)이 수염과 머리털이 모조리 희어진 뜻290)  이 아니었다. 이병상이 만약 이런 말을 들었다면 반드시 임금을 가리는 당에 들어가지 않았을 것이다. 그때 민진후(閔鎭厚)가 만약 있었더라면 어찌 신축년291)   임금을 가리는 거조가 있었겠는가? 경술년292)   후에 그 사람들이 모조리 탄로났다. 내 뜻은 임금은 임금답고 신하는 신하답게 되는 뜻을 밝히고자 한 것이다."
하고, 김재로가 말하기를,
"이병상은 실로 당심(黨心)이 없으니, 그가 나라를 위하여 죽지 않을 것인지 어찌 알겠습니까? 원하건대, 전하께서는 그에게 속히 효과를 이루기를 책임지우지 마소서."
하였다. 대사헌 김시형(金始炯)이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경연관(經筵官)을 돈소(敦召)하여 강석(講席)에 참여하게 하고, 양전(兩銓)293)  을 엄히 신칙하여 조경(躁競)294)  을 억제하게 하소서. 대계(臺啓)는 지엄하니, 가부간(可否間)에 마땅히 성상의 뜻을 분명히 보여야 하는데, 윤허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단지 입시(入侍)할 때 하교하겠다고 전교하였는데도 예대(詣臺)한 신하는 말없이 물러났으니, 파직해야 마땅합니다."
하니, 그대로 윤허하였다. 사간 조상명(趙尙命)이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9월 7일 임진

김유경(金有慶)을 이조 참판으로, 김상로(金尙魯)를 이조 좌랑으로, 심성진(沈星鎭)을 보덕으로, 조상명(趙尙命)을 겸필선(兼弼善)으로, 홍봉조(洪鳳祚)를 필선으로, 박필재(朴弼載)·이우하(李宇夏)를 장령으로, 조영국(趙榮國)을 지평으로, 이정보(李鼎輔)·홍창한(洪昌漢)을 정언으로, 오광운(吳光運)을 대사간으로, 박필정(朴弼鼎)을 예조 참의로, 오원(吳瑗)을 대사성으로, 이종성(李宗城)을 도승지로, 송수형(宋秀衡)을 승지로, 윤순(尹淳)을 수어사(守禦使)로, 정석오(鄭錫五)를 공조 참판으로 삼았다.

 

9월 8일 계사

소대(召對)를 행하였다.

 

9월 9일 갑오

왕세자(王世子)가 사·부(師傅)와 상견례(相見禮)를 행하였는데, 계단을 내려가 자리에 가서 재배(再拜)한 의식이 모두 예(禮)에 맞아 어긋남이 없었으며, 사(師) 이광좌(李光佐)와 부(傅) 김재로(金在魯)가 의식대로 예를 행하였다.

 

호군(護軍) 이덕수(李德壽)가 상소하여 말하기를,
"정신검(鄭愼儉)을 신은 매양 기특하게 여겼는데, 인재를 등용하는 뜻은 무겁고 연혼(連婚)한 혐의는 적기 때문에 드디어 검의(檢擬)하였던 것입니다. 대신(大臣)이 고구(故舊)의 정을 버리고 이처럼 공(公)을 먼저 하고 사(私)를 뒤로 하는 거조를 하였으니, 이는 바로 공조(公朝)의 다행입니다. 서제(書題)로 차출한 것은 본디 잗단 일에 속하여 변명하여도 대신의 노여움을 풀기에 부족하니 변명하지 않겠습니다."
하니, 예사 비답을 내리고, 인하여 상견례에 들어와 참석하라고 명하였다.

 

9월 10일 을미

임금이 대신과 비국 당상(備局堂上)을 인견하였다. 영의정 이광좌가 말하기를,
"신들이 어제 동궁(東宮)을 뵈었는데 어린 나이에 예모(禮貌)가 조금도 어긋남이 없었으니, 경사스럽고 다행함이 어찌 끝이 있겠습니까? 3세에 진강(進講)함은 너무 이른 것을 면치 못하니, 오직 바라건대, 빨리 덕성을 함양해 온화하고 문아(文雅)함이 날로 성취되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경의 말이 옳다. 근일에 문왕장(文王章)을 읽을 수 있게 되었고, 일찍이 명주와 무명베를 보고 사치와 검소를 구분하여 무명옷 입기를 청했으니, 매우 기특하다. 만약 잘 인도한다면 성취할 것을 바라겠으나, 나는 본래 학문이 없으니 오직 보도(輔導)하는 사람에게 기대할 뿐이다."
하였다. 우의정 송인명(宋寅明)이 유술(儒術)을 돈독히 숭상하기를 우러러 권면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유술이 어찌 치도(治道)에 도움이 되지 않겠는가만, 근래에는 한갓 부박(浮薄)한 문장만 숭상하고 있다. 양득중(梁得中)은 순박하고 진실하니 바로 유자(儒者)이며, 윤봉구(尹鳳九)는 아주 조용하고, 윤동수(尹東洙)는 외모가 야(野)한 듯하며 부박한 문장은 없다."
하였다. 송인명이 말하기를,
"박필부(朴弼傅)는 바로 박세채(朴世采)의 손자인데 이미 대직(臺職)에 있고, 서명순(徐命純)·조귀명(趙龜命)은 청결하여 쓸 만하며, 민우수(閔遇洙)·유숙기(兪肅基)는 모두 학식이 있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조귀명·유숙기가 누구인가?"
하니, 이조 판서 조현명(趙顯命)이 말하기를,
"조귀명은 바로 신의 재종제(再從弟)이며, 유숙기는 고(故) 판서(判書) 유명웅(兪命雄)의 아들입니다."
하였으며, 이광좌가 말하기를,
"유숙기는 바로 김창흡(金昌翕)의 문인(門人)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김창흡은 내가 이름을 익히 들었는데 대대로 모두 절고(絶高)한 사람이다."
하였다. 대사헌 김시형(金始炯)이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금천 군수(金川郡守) 민진정(閔鎭廷)은 백성들의 일을 폐기해 버려 아전들이 농간을 부리고 있으니, 파직해야 마땅합니다."
하니, 윤허하였다.

 

석강(夕講)을 행하였다.

 

공조 판서(工曹判書) 이병상(李秉常)이 상소하여 이르기를,
"10년 동안 폐치(廢置)되어 있는 사람의 종적이 시론(時論)과 관계될 것이 무엇이기에 도리어 형적이 없는 의심을 받아서 전하께서는 시상(時象)으로 돌리시고, 대신은 극론(極論)으로 몰아붙입니까? 근일 연석에서 하신 전교는 신하로서 감히 들을 수 없는 바가 많습니다. 근년의 한 소(疏)는 한때 자처(自處)하는 사사로운 의리에 불과했고 지난번 성상께서 개유(開諭)하심으로 인해 장차 남은 소회(所懷)를 이어서 진달하려고 하였으나 우상(右相)이 갑자기 가로막았으니, 실로 뜻밖이었고, 말을 다 마치기 전에 엄교(嚴敎)가 잇따라 내려 죄의 흔단(釁端)이 낭자하고 정세가 궁박하게 되었습니다. 바라건대, 엄중히 감죄(勘罪)하여 신하의 분수를 격려하소서."
하니, 전교하기를,
"지난날 진달한 일이 이미 여러 해가 되었으니, 마땅히 혼돈(混沌)에 붙여야 한다. 군신(君臣)의 큰 의리는 천지 사이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법인데 대고(大誥)한 후에 어찌 감히 다시 제기하는가? 이미 내린 술잔을 받았는데 감히 고향으로 돌아갈 생각만 하여 스스로 힘쓸 줄을 모르고 이처럼 번거롭게 진달하는가? 도로 돌려주도록 하라."
하였다.

 

9월 11일 병신

윤혜교(尹惠敎)를 홍문관 제학으로, 박필부(朴弼傅)를 지평으로, 정이검(鄭履儉)을 사서(司書)로, 민익수(閔翼洙)를 군자감 정(軍資監正)으로 삼았다. 민익수는 고(故) 판서(判書) 민진후(閔鎭厚)의 아들로 일찍이 별천(別薦)에 들었기 때문에 음직(蔭職)으로 이 관직에 제수된 것이었다.

 

부호군(副護軍) 이목(李穆)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우리 나라의 군제(軍制)는 처음에 전지(田地)를 준 일이 없었고, 1부(夫)에게 1년에 받아들이는 포(布)가 2필, 쌀이 12두(斗), 돈은 4백여 전(錢)이어서 백성들의 곤핍이 실로 이에 말미암았으니, 헐한 역(役)으로 투속(投屬)하려고 머리를 깎고 중이 되기도 합니다. 영남(嶺南)의 한 도(道)로 말하더라도 큰 사찰(寺刹)이 3백여 개이며 절마다 각기 중이 4,5백 명이나 되니, 여러 도를 통틀어 논하면 포를 바치는 군사에 비하여 도리어 많습니다. 대저 우리 나라는 군역의 총 숫자가 1백여 만 명에 불과한데 양군(良軍)에게서 받아들이는 포는 그 반을 감하니, 남아 있는 것은 35만 필이요, 모자라는 것 역시 그와 같은데 이를 보충하자면 계책이 있습니다. 우리 나라의 전지가 1백 40만 결(結)인데 달리 감면(減免)할 것을 제한다면 실제는 90여만 결입니다. 비록 하등(下等)의 전지라 하더라도 매결(每結)에서 수확되는 것이 4,50석(石) 곡식에 밑돌지 않으니, 만약 매결마다 세(稅)를 1두씩만 더 거두어도 쌀 6만 석은 얻을 수 있으며, 조정에서도 해마다 매결에 쌀 1두를 덜어내어 보태면 30여만 필을 바꿀 수 있으니, 1년간에 소요되는 경비(經費)에 어찌 이것을 다 쓰겠습니까? 또 각 고을로 하여금 소속된 시장(市場)의 세를 받고 번(番)을 제하여 주고받아들이는 것을 혁파하며, 영아(營衙)·교원(校院)에 사사로이 투속한 자와 토호(土豪)와 촌락(村落)의 빈들거리며 한가로이 노는 자를 모두 찾아내면 양역(良役)을 줄일 수가 있습니다. 신은 본디 천품(賤品)으로 막부(幕府)에서 남을 따르고 있지만 자급이 2품에 이르고 군문(軍門)에 종사하고 있어 대략을 알기 때문에 감히 죽음을 무릅쓰고 우러러 진달합니다."
하니, 대답하기를,
"응지(應旨)하여 조목으로 진달하니 그 정성을 알 수 있다. 비국으로 하여금 아뢰어 처리하게 하라."
하였다.

 

주강(晝講)을 행하였다.

 

9월 12일 정유

밤에 금성(金星)이 헌원성(軒轅星)으로 들어갔다.

 

임금이 주강을 행하였다. 민우수(閔遇洙)·조귀명(趙龜命)·서명순(徐命純)·유숙기(兪肅基)를 먼저 외읍(外邑)에 시험할 것을 명하니, 지사(知事) 조현명(趙顯命)이 아뢰기를,
"유숙기는 참하(參下)에 있습니다."
하니, 6품으로 올리라고 명하였다.

 

9월 13일 무술

2품 이상이 문안하였으니, 대전(大殿)의 탄일(誕日)이기 때문이었다. 임금이 하례(賀禮)를 받지 않았다.

 

반궁(泮宮)에서 구일제(九日製)를 설행하였는데, 수석(首席)을 차지한 진사(進士) 박춘보(朴春普)에게 직부 전시(直赴殿試)할 것을 명하였다.

 

9월 14일 기해

임금이 주강을 행하였다. 영부사(領府事) 송인명(宋寅明)이 말하기를,
"이덕수(李德壽)는 문장이 같은 무리에서 뛰어나니, 경악(經幄)에 이런 사람이 없어서는 안 됩니다. 이제 곧 시골로 아주 돌아가려고 하니, 머물게 하기를 청합니다."
하니, 임금이 특별히 서용(敍用)하여 하향(下鄕)하지 못하도록 하라고 명하였다.

 

우윤(右尹) 이진순(李眞淳)이 상소하기를,
"일전 성상께서 절재(節財)하는 방도를 물으시면서 해방(海防)에 미쳤으니, 신이 청컨대 한 가지 일을 말씀드려 전체를 알도록 하겠습니다. 대개 병조(兵曹) 내금위보(內禁衛保)와 유청 기보포(有廳騎步布)가 으레 1년에 바치는 것을 합치면 16만 4천 5백 필이 되며 1년 동안 쓰고 남은 것이 마땅히 3만 7천 5백여 필이 됩니다. 이 남은 포를 매년 적치(積置)해 나가면 마땅히 노적(露積)이 차서 넘쳐야 하는데도 여유가 이전보다 더 많아졌다는 말을 듣지 못하니, 이는 무슨 까닭입니까? 영수해 온 아전이 포를 조(曹)의 서리(胥吏) 집에 쌓고는 관절(關節)295)  을 만들어 주면 아전은 그 고을로 돌아가고 포는 창고로 들어가지 않습니다. 대개 수당상(首堂上)에게 서명(署名)을 받고 입직 당상(入直堂上)에게서 인장(印章)을 찍은 데서 말미암아 진위(眞僞)를 알 수가 없으니, 갖가지로 소모되고 줄어들게 됩니다. 신의 생각으로는 쓰고 남아 있는 것은 별고(別庫)로 옮겨 두고 연말에 숫자를 계산해 입계(入啓)하고, 또 별도로 인장 하나를 수당상(首堂上)이 있는 곳에 두어 낭관(郞官)이 포를 받아 입고(入庫)했다는 보고에 의거하여 비로소 고을의 장계(狀啓)에 손수 서명(署名)하고 인장을 찍게 한다면 간사한 길이 저절로 막혀 창고의 저축이 점차 늘어가게 될 것입니다. 지부(地部)296)  ·선혜청(宣惠廳) 및 각 군문(軍門)의 전포(錢布)가 있는 곳은 모두 이 방법을 써서 그 나머지로써 혹은 재해(災害)가 있는 해 견감(蠲減)해 주는 수용(需用)이나 갑자기 쓰이는 경비의 밑천으로 삼는다면, 재물이 넉넉하지 못함을 어찌 걱정하겠습니까? 해방(海防)에 대해 말하면 황당선(荒唐船)297)  이 고기를 잡는다고 핑계대고 전에 비해 깊숙이 들어와 금년에는 등산진(登山鎭)에서 심지어 부녀자를 겁탈한 일까지 있었습니다. 신의 생각으로는 은율(殷栗)·장연(長淵)·해주(海州)·강령(康翎) 등의 고을은 어떤 군병(軍兵)인가를 논하지 말고 부근에 있는 자로써 해방 별대(海防別隊)를 편성해서 지방관(地方官)으로 하여금 편리한 대로 금하게 하되 혹 활과 창으로 쫓기도 하고 혹은 총포(銃砲)로 위협하면, 저들이 어찌 감히 전처럼 가볍게 보고 업신여기겠습니까?"
하니, 비답하기를,
"묘당으로 하여금 품처하게 하라."
하였다.

 

대사헌 김시형(金始炯)이 상소하기를,
"전관(銓官)298)  은 겸함(兼銜)299)  에 비할 바가 아니고 장신(將臣)은 다른 직책과 다름이 있는데 한갓 자신의 염치만 지키고 조정의 사체는 돌보지 않으니, 수어사(守禦使) 윤순(尹淳), 이조 참판 김유경(金有慶)은 마땅히 파직해야 합니다. 서추(西樞)300)  의 정함(正銜)은 바로 경재(卿宰)를 으레 소속시키는 직책인데 어제 정사(政事)의 다섯 의망(擬望)은 모두 한산(閑散)하고 용잡(冗雜)한 무리들이니, 서전(西銓)301)  의 해당 당상을 엄중히 추고할 것이며, 그날 차임된 자는 일찍이 무곤(武閫)을 지낸 이외에는 개차(改差)함이 마땅합니다. 널리 유시한 후에 조신(朝臣)으로서 휴가의 기한을 넘겼거나 파직됨을 기회로 하향(下鄕)한 자는 또한 정원(政院)으로 하여금 품지(稟旨)해 별도로 유시해야 합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중신(重臣)·재신(宰臣) 및 서전(西銓)의 추고는 아뢴 대로 시행하고, 서추(西樞)의 개차는 갑진년302)   순장(巡將)을 도태시킨 것과 같다. 상공(賞功)의 노직(老職)을 서로 뒤섞어 의차(擬差)한 것도 역시 구례(舊例)가 있다. 아! 우로(雨露)가 내리는 곳에는 조습(燥濕)을 가리지 않는 법인데, 우리 나라의 제도는 사람을 위해 관직을 가리니, 마음으로 항상 개탄해 왔다. 이로 인해 혁파해 버린다면 어찌 후(厚)한 풍습이라 하겠는가? 시종(侍從)에게 별도로 유시함은 일이 매우 설만(屑慢)하다. 처음 정사 때 신칙했는데도 이처럼 만홀하게 하니, 모두 엄중히 추고하고 정원으로 하여금 신칙하게 하라."
하였다.

 

주강을 행하였다.

 

9월 15일 경자

임금이 선정전(宣政殿)에 나아가 친히 도정(都政)을 행하였다. 이덕수(李德壽)를 좌부빈객(左副賓客)으로, 이양신(李亮臣)·이석표(李錫杓)를 이조 좌랑(吏曹佐郞)으로, 정익하(鄭益河)를 사서(司書)로, 이종적(李宗迪)을 겸설서(兼說書)로, 박문수(朴文秀)를 공조 참판(工曹參判)으로, 한덕필(韓德弼)을 장악원 정(掌樂院正)으로 삼았다. 한덕필은 고(故) 감사(監司) 한지(韓祉)의 아들인데 음직(蔭職)으로 정(正)이 되었으니, 곧 별천(別薦)이기 때문이었다.

 

9월 16일 신축

임금이 희정당(熙政堂)에 나아가 그대로 친정(親政)을 행하였다. 민응수(閔應洙)를 판윤(判尹)으로, 이진순(李眞淳)을 동돈녕(同敦寧)으로, 정이검(鄭履儉)을 교리(校理)로, 정익하(鄭益河)를 수찬(修撰)으로, 윤순(尹淳)을 좌빈객(左賓客)으로, 이창의(李昌誼)를 정언으로, 오원(吳瑗)을 대사성(大司成)으로, 김상구(金尙耉)를 사서로, 서명신(徐命臣)을 부교리(副校理)로 삼았는데, 이조 판서 조현명(趙顯命), 병조 판서 김성응(金聖應)의 정사(政事)였다. 조현명을 수어사(守禦使)로 삼았으니, 비국(備局)의 천거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효렴(孝廉)을 만약 잘못 천거함이 있으면 도신(道臣)의 잘못인데 이번 친정(親政)을 당해 전혀 천거해 의망(擬望)하지 않았으니, 전관(銓官)을 추고하도록 하라."
하였다. 정사를 마치고 선온(宣醞)하였다.

 

9월 17일 임인

좌의정 김재로(金在魯)가 정사(呈辭)하니, 윤허하지 않는다는 비답을 내렸다.

 

헌부(憲府) 【장령 이우하(李宇夏)이다.】 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어의동(於義洞) 효종(孝宗) 잠저(潛邸)에 하마비(下馬碑)를 세우기를 청합니다."
하니, 그대로 따랐다. 또 아뢰기를,
"병조 판서 김성응은 사적(仕籍)에 오른 지 5년에 승진이 너무 빠릅니다. 이번 대정(大政)은 보고 듣기에 너무 놀라우니, 개정해야 마땅합니다."
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대사간 오광운(吳光運)이 상소하기를,
"삼가 생각하건대, 우리 전하께서 당속(黨俗)을 한 번 변화시킨 것은 개벽(開闢)에 비교할 수 있으니, 성려(聖慮)가 장원(長遠)하고 역량(力量) 역시 큽니다. 그러나 개창(開創)하는 훈공(勳功)은 교령(敎令)을 세우고 제도를 정하는 데 있으니, 덕업(德業)이 인심(人心)을 맺고 풍기(風紀)가 세도(世道)를 바로잡아야만 천만년 동안 족히 믿을 바가 있을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 군신(君臣) 상하가 화해(和解)하고 보합(保合)하는 한 가지 일에 골몰하고 부서(簿書)·기회(期會)의 소절(小節)만을 일삼아 큰 공으로 여기고 그친다면, 개벽이란 이름이 천하 후세에 비웃음을 사지 않겠습니까? 오늘날의 급선무는 다섯 가지가 있으니, 규모를 세워 치체(治體)를 정하고, 기교(機巧)를 버리고 성실(誠實)로 돌아가며, 인욕(人慾)을 막아 풍화(風化)를 바로잡고, 언로(言路)를 넓혀 비익(裨益)을 구하며, 성학(聖學)에 힘써 황극(皇極)303)  을 세우는 일입니다.
예로부터 나라를 세우면 모두 규모가 있었으니, 삼대(三代)304)   때의 충(忠)·질(質)·문(文)이 그것입니다. 한(漢)·당(唐)의 임금에 이르러서도 모두 일대(一代)의 규모가 있었는데, 전하께서도 역시 일정한 규모가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신은 그윽이 생각하건대, 관대(寬大)로써 발하고 강의(剛毅)로써 행하며, 정고(貞固)로써 지켜나간 연후에야 세상을 구하고 후손을 유족하게 할 수 있다고 여깁니다. 전하의 전일 다스림은 종핵(綜核)305)  을 숭상하고자 하였기 때문에 유폐(流弊)가 쉽게 번쇄(煩碎)한 데로 흐르고, 기상(氣像)은 더러 급박한 데 가까우며, 습속은 미미(靡靡)306)  함을 숭상하여 공리(功利)로 치달았으니, 관대함이 아니면 이런 폐단을 구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한갓 관대라는 이름만을 사모하면 범연(泛然)하여 간절하게 하지 않으며, 느슨하고 팽팽하게 되지 않으니 반드시 강의(剛毅)로써 행한 연후에야 관대한 규모를 볼 수가 있습니다. 예리하게 나아가고 빨리 물러남은 잘하는 일에서도 경계할 바요, 처음만 있고 끝이 없는 것은 승평 세대(昇平世代)에도 근심할 바이니, 반드시 정고(貞固)로써 지킨 연후에 사람에 있어서는 책성(責成)의 효과가 있고 일을 하는 데에 응적(凝績)의 아름다움이 있을 것입니다.
전(傳)에 이르기를, ‘정성(精誠)이 없으면 물(物)이 없다.’라고 하였는데, 오늘날의 공경하고 협력하는 것은 과연 정성이 있다고 하겠습니까, 정성이 없다고 하겠습니까? 외면으로만 하고 마음에 두지 않으면 정성이라고 할 수 없으니, 정성으로써 나랏일을 하지 않는다면 가엾게도 고통받는 우리 백성들은 장차 헛된 물거품 같은 세계 속에 곤란을 받게 됩니다. 정성이 없으면 오히려 나라를 이룰 수가 없는데, 더군다나 이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기교(機巧)의 근심이 있는 것이겠습니까? 태평하고 무사하여 사대부의 정신(精神)과 지술(智術)을 득실(得失)의 장소에 모조리 쓰니, 그 기교 역시 지극합니다. 전하께서 걱정하시어 혹 탕평(蕩平)이라 부르고, 혹은 개벽(開闢)이라 일컬어 측달(惻怛)한 정성을 지극히 하지 않음이 없으셨으나, 어찌 여러 신하들의 해묵은 옛날 근성을 하루아침의 서서 말하는 사이에 소멸시키기를 보장하겠습니까? 권력이 돌아가는 바이면 다투고 이익이 있는 곳이면 다투어, 가볍고 무거움을 비교해서 저쪽보다 가벼우면 화를 내고, 많고 적음을 헤아려서 털끝만큼이라도 나보다 많으면 시기합니다. 천위(天威)가 억누르고 있어 비록 마음대로 행하지는 못하나, 감추어진 기밀이 지극히 치밀하여 진짜 장물(贓物)은 포착하기가 어렵습니다. 동(東)에 뜻을 두고는 서(西)를 말하고 공(公)을 빙자해 사(私)를 도모하여, 어두운 곳에서 찌르고 쏘아대며 허공에서 번쩍거려 공교한 역법가(曆法家)도 그 숫자를 알지 못하고 귀신도 그 단서를 엿보지 못할 것이니, 이런 마음을 고치지 않는다면 하루 사이에 강둑이 터지듯 할 형세가 반드시 이를 것입니다. 높은 반열(班列)과 중한 직질(職秩)에 있는 사람은 친히 성상의 하교를 받들은 사람인데 어찌 이에 이르겠습니까마는 특별히 그 마음이 공화(共和)하지 못하고 그 정성이 서로 미덥지 못하면 일을 좋아하는 부박(浮薄)한 무리들이 장차 그 기미를 엿보고 기교를 부려도 막을 수 없을 것이니, 탕평책이 이미 그러했던 자취를 미루어 볼 수 있습니다. 개벽 이후에도 또다시 전과 같다면 천하 후세에서 오늘날을 어떻다고 말하겠습니까? 여러 신하를 별도로 신칙해 임금을 아버지처럼 사랑하고 동료를 형제처럼 보아 털끝만큼의 거짓된 마음이 그 사이에 뒤섞임이 없으면 달마다 없어지고 해마다 소멸되어 기교가 스스로 다 없어지고 태화(泰和)의 지역을 이룰 것입니다.
아! 인심(人心)이 교칠(膠漆)의 동이[盆] 가운데 빠진 지 오래입니다. 욕심 중에서 큰 것이 셋이니, 재물과 여색(女色)과 작록(爵祿)입니다. 재물과 여색은 비록 두 가지이기는 하지만 뇌물이 행해짐은 오로지 희첩(姬妾)을 거느리는 데서 말미암았으니, 실제는 하나입니다. 작록에 이르러서는 이보다 더 커서 사람마다 바라고 사모하는 것은 왜 그렇습니까? 천금(千金)이 저자에 있어도 지나가는 자가 돌아보지 않는 것은 분수가 정해져 있기 때문인데, 토끼 한 마리가 들판에 있으면 백 사람이 서로 잡으려 쫓는 것은 분수가 정해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제 기국(器局)과 식견이 있는 자를 묘당(廟堂)에 있게 하면 기국과 식견이 없는 자는 감히 바라지 않게 되고, 경학(經學)이 있는 자를 경연(經筵)에 두면 경학이 없는 자는 감히 바라지 않게 되는데, 대각(臺閣)의 풍절(風節)이나 유사(有司)의 조구(條具)에 이르기까지 모두 다 그러하다면 온 세상의 분수가 정해질 것입니다. 근래에는 그렇지 않아서 남이 승진하는 것을 보면 사람들이 모두, ‘나는 어찌 그에 미치지 못하는가?’ 하면서 요행을 바라는 문호가 크게 열려 망상(妄想)이 다투어 일어나서 분경(奔競)307)  하는 자는 얻고 염정(恬靜)한 자는 얻지 못하며, 간진(干進)한 자는 앞서고 자호(自好)하는 자는 뒤쳐집니다. 사람마다 자기의 재주와 분수는 생각하지 않고 낱낱이 그 의욕(意慾)을 채우고자 하는데, 그중 혹 구하다가 얻지 못하거나 얻고도 만족스럽지 못하면 기교를 부리는 자가 없으리라는 것을 어찌 알며, 하늘에 닿는 물이나 벌판을 태우는 불의 기세가 어느 지경에서 그치겠습니까? 재물과 여색의 근본을 뽑는 것은 부끄러움을 부끄럽게 여기는 것보다 나은 것이 없으니, 조정의 귀근(貴近)부터 시작해야 하고, 명리(名利)의 근원을 막는 것은 공(公)을 공으로 하는 것만 한 것이 없으니, 인재(人才)의 분수를 밝히는 데 있습니다.
후세의 언로(言路)는 오로지 대각(臺閣)에 달려 있는데 대각의 잇따른 계사(啓辭)를 정계(停啓)하고 피혐(避嫌)을 처치함이 있었으니, 어느 시대에 시작된 것인지 모르나 전고(前古)에는 이런 일이 없었습니다. 한 계사가 나오면 사람들이 모두 물색(物色)하여 말하기를, ‘갑(甲)이 반드시 연계(連啓)하고, 을(乙)이 반드시 정계(停啓)할 것이다.’ 하며, 한 사람이 피혐하면 또 말하기를, ‘출사(出仕)할 자는 반드시 갑이고, 떨어지는 자는 반드시 을이다.’라고 하여, 대각에 발을 붙였다 하면 명목(名目)이 시끄러우니, 대각이 되는 자도 역시 어렵습니다. 군자(君子)의 한 마디 말이나 명령은 반드시 자기의 견해를 위주로 해야 합니다. 만약 사람으로 하여금 각기 진계(陳啓)하게 하여 그 사람이 체직되면 그 계사도 중지되어, 정계(停啓)하거나 연계(連啓)함이 없이 후에 오는 자가 스스로 알아서 하게 한다면, 실로 충익(忠益)을 넓히고 분분한 시끄러움을 지식(止息)시키는 방법이 됩니다. 그러나 인순(因循)함이 예(例)로 이루어진 것이 이제 이미 몇백 년이 되었으니, 어찌 감히 가벼이 변개(變改)하겠습니까? 단지 원하건대, 더욱 너그럽게 용납하여 습속으로서 조절하지 말고 뜻 있는 선비로 하여금 사체(四體)를 펴고 자기의 소견을 행하게 해야 합니다. 당(唐)나라 태종(太宗)이 말하기를, ‘한 자[尺]의 안개가 하늘을 가리어도 그 큼은 훼손되지 않고, 한 치[寸]의 구름이 해를 가리는 것이 그 밝음에 무슨 손상이 되겠는가?’라고 하였습니다. 인주(人主)가 이런 마음을 가지고 천하의 미운 자와 더러운 자를 모두 용납한다면 마침내 언자(言者)의 무망(誣妄)을 드러낼 뿐일 것입니다. 우리 성상께서는 요(堯)·순(舜)에 뜻을 두고 한(漢)·당(唐)이 되기를 부끄럽게 여기시는데 관용(寬容)의 도량이 도리어 대당(大唐)의 아래에 나옴은 무슨 까닭입니까? 삼가 원하건대, 성총(聖聰)을 확장하여 이이(訑訑)308)  한 성색(聲色)이 기미의 즈음에 나타나지 말게 하소서.
이 네 가지는 절목(節目)이니, 그 강령(綱領)은 황극(皇極)에 있습니다. 극(極)이란 천리(天理)와 물칙(物則)의 지정(至精)의 극이니, 불편 불의(不偏不倚)와 천하의 중(中)이 여기에 있습니다. 요(堯)·순(舜), 우·탕(禹湯)의 집중(執中)은 지공(至公)이며 자막(子莫)의 집중(執中)309)  은 사의(私意)이니, 천리(天理)와 물칙(物則)의 극을 세운다면 천하의 편벽된 자와 사악(邪惡)한 자가 이것을 보고서 표준을 삼게 됩니다. 저 양·묵(楊墨)의 편사(偏邪)310)  한 중(中)을 본받아 집착하는 자는 천리와 물칙과 떨어진 거리가 먼데, 후세의 편사(偏邪)한 당론은 또 어찌 한갓 양·묵에 비교할 뿐이겠습니까? 우(牛)·이(李)의 중(中)을 잡고서 우·이를 조제(調劑)하고, 삭(朔)·촉(蜀)의 중을 잡고서 삭·촉을 화협(和協)시키는 것은 마땅히 인정(人情)에 가깝겠으나 그것이 어긋나서 어려운 것은 그 중이라고 여기는 것이 중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요(堯)·순(舜), 우(禹)·탕(湯)의 중을 당론이 있는 세상에 세움은 우원(迂遠)한 듯하나, 오늘날 극(極)을 세우면 내일 당이 없게 되어 손을 마주잡고 합계(合契)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공장(工匠)에게 비교할 수 있으니 물건의 굽은 것을 자기의 먹줄에 맞추어 하면 그 공(功)이 쉽게 이룩되지만 자기의 먹줄을 변경시켜 굽은 물건에 따르면 한갓 수고만 할 뿐 공이 없게 되는 것입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그 조진(條陳)한 바가 모두 오늘날의 급선무이다. 인용한 《중용(中庸)》 역시 마음을 다스리는 요점이니, 깊이 반성하지 않겠는가?"
하였다.

 

9월 18일 계묘

윤득화(尹得和)를 승지로, 김정윤(金廷潤)을 헌납으로, 김상구(金尙耉)를 정언으로, 이석표(李錫杓)를 겸문학(兼文學)으로 삼았다.

 

임금이 주강(晝講)을 행하였다. 장령(掌令) 이우하(李宇夏)가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연안 부사(延安府使) 김호(金浩)의 팔순(八旬) 노모(老母)가 바야흐로 그 형 김유(金濰)의 금성(錦城) 임소(任所)에 가 있어 거리가 거의 천 리나 되는데도 법에 의거해 정체(呈遞)하지 않았으니, 파직해야 마땅합니다."
하니, 그대로 윤허하였다. 또 아뢰기를,
"각 군문(軍門)의 대장(大將)을 새로 제수하면 문득 수백 냥 은전(銀錢)으로써 집이 가까운 곳에 군교(軍校)가 거처할 장소를 사들이니, 비용의 소모가 매우 많습니다. 청컨대 각영(各營) 근처에 큰 집 한 채를 사들여 새로 대장이 임명될 때마다 가속(家屬)을 데리고 가게 해야 합니다."
하니, 답하기를,
"군교가 장수를 따라 가야 하는가, 대장이 군교를 따라가야 하는가? 일이 잗단데 가까우니, 윤허하지 않는다."
하였다.

 

석강(夕講)을 행하였다.

 

9월 19일 갑진

밤에 달이 필성(畢星)을 범하였다.

 

공홍도 어사(公洪道御史) 박사창(朴師昌)이 장계(狀啓)하여 말하기를,
"재해를 더욱 심하게 입은 18개 고을의 농사 형편의 놀랍고 참혹한 것과 민생(民生)의 굶주려 쓰러짐이 거의 임자년311)  ·계축년312)  보다 심하니, 청컨대 신해년313)  ·임자년의 예에 의해 군역(軍役), 신포(身布)를 아울러 반감(半減)해 불쌍히 여기는 뜻을 보이고 안집(安集)시키는 방법을 삼도록 하소서."
하였는데, 비국에서 복계(復啓)해 시행하기를 청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영의정 이광좌가 차자를 올려 병을 끌어대니, 비답을 내려 이르기를,
"보국(輔國)의 직임에 어찌 근력(筋力)을 말하며, 육순(六旬)의 나이를 어찌 몹시 늙었다 하겠는가? 이제 만약 경을 버리려면 처음에 어찌 은근하게 하였겠으며, 만약 나를 버리려 했다면 경은 어찌하여 합문(閤門)을 밀치고 들어왔던가? 옛날 두 조정의 은혜를 생각하고 의지하는 뜻을 본받아, 안심하여 사직하지 말고 백성을 널리 구제하도록 하라."
하였다.

 

9월 20일 을사

밤에 유성(流星)이 여성(女星) 아래에서 나와 남방(南方)으로 들어갔는데, 모양은 주먹만 하였고, 꼬리의 길이는 3,4척 남짓이었으며, 빛깔은 흰색이었다.

 

장령 이우하(李宇夏)가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예조 판서 김취로(金取魯)의 추잡하고 패악한 성품과 탐욕하고 음란한 정상은 온 세상이 모두 놀라고 분하게 여기지 않음이 없습니다. 그가 신임하는 사나운 종 사봉(四奉)이란 자가 세도를 끼고 포학을 도와 함부로 폐를 끼치기 때문에 신이 형리(刑吏)를 보내어 잡아오게 했는데, 김취로가 옹호하여 숨기고는 끝내 내주지 않았습니다. 신은 동선(董宣)314)  과 이응(李膺)315)  의 풍력(風力)에 미치지 못함을 스스로 부끄럽게 여기며 어리석게 분노가 치밀어 나열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김취로는 본디 무뢰(無賴)하여 사람 가운데 끼지 못했으며, 추려(麤廬)함이 습관이 되고, 비패(鄙悖)가 성품을 이루어 탐장(貪贓)이 낭자해 원통함을 호소하는 소리가 길에 가득했습니다. 젊은 날에는 관서(關西)에서 아비의 정사를 더럽혀 악취를 풍겼고, 중년에는 옥서(玉署)316)  에서 공의(公議)를 거스르다가 저지를 당했습니다. 연줄을 타고 요행한 기회로 외람되게 숭반(崇班)에 올라 양전(兩銓)의 장(長)을 지내면서 호사스러움을 점차 멋대로 하고 탐욕스러움이 끝이 없었습니다. 이웃 집들을 모조리 차지하였고, 그의 사나운 종을 시켜서 뇌물받는 문호(門戶)의 관건(關鍵)으로 삼았으며, 심지어는 혜청(惠廳)의 이례(吏隷)가 30민(緍)의 돈을 거두어 사봉(四奉)의 집에 주는 것이 매월의 상례(常例)가 되었습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까닭 없이 일을 만들어 죄제(罪除)가 서로 잇달았으며, 여러 소관(所管)의 이례(吏隷) 역시 모두 이를 본받아 예채(例債)라 이름하였습니다. 곤수(閫帥)317)   이하에 대하여 심지어 그의 자(字)를 부르고 뇌물이 공공연히 행하여지니, 도로에 소문(所聞)이 파다하였습니다. 여염의 과부(寡婦)가 술을 팔아 부자가 되었는데 김취로는 재물이 많음을 이롭게 여겨 간통(姦通)하였으며, 그의 양자(養子)를 뽑아 장교(將校)로 삼았고, 역환(逆宦)의 호숫가 정자를 억지로 사들였으며, 고양(高陽)의 옥토(沃土) 15석(石)의 세(稅)를 백급(白給)해 ‘수통 과부(水桶寡婦)’라는 이름이 이미 동요(童謠)가 되었습니다. 태복시(太僕寺)의 말을 많은 숫자로 제급(題給)하고는 모두 사유(私有)로 돌렸으며, 또 그 집안에다 별도로 하나의 곡방(曲房)을 설치해 모든 기완(奇玩)의 물건을 모조리 쌓아두지 않음이 없었고, 나이 어린 미녀(美女)를 그 안에 많이 두고는 나이 20세가 넘으면 문득 문을 열어 내보냈으며 내보내는 대로 대신을 채워 욕망을 채운 후에야 그만 두었습니다. 그러나 이런 것들은 그에게 있어서는 오히려 작은 일입니다. 분원(分院)의 어공(御供) 어선(漁船)을 사사로이 함부로 차지하였는데, 숫자가 매우 많은데도 주랑(廚郞)이 세금을 받지 못하였습니다. 지난날 견책(譴責)을 받고 귀양을 갔을 때는 태복시의 아전을 불러 교마(轎馬)를 책출(責出)하였는데, 여러 차례 퇴짜를 놓으니, 아전이 위령(威令)에 겁을 먹고 몰래 어승(御乘)의 교마(轎馬) 한 필을 바치자 비로소 안연(晏然)히 받았습니다. 부처(付處)하라는 명이 내린 후에도 성문 밖에서 머뭇거리면서 나라를 원망하는 말을 많이 하였으며, 금오랑(金吾郞)이 먼저 과천(果川)으로 가면서 즉시 따라오도록 했으나 끝내 들은 척도 하지 않았습니다. 사유(赦宥)를 입기에 이르러서는 비로소 교외의 별장(別庄)으로 가면서 교자를 타고 사람을 물리치기를 조금도 황송하여 조심하는 기색이 없음을 눈이 있는 자는 모두 보고 분개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신의 생각에는 빨리 삭적(削籍)하고, 또 즉시 병출(屛黜)하여 서울에서 함께 살 수 없는 뜻을 보이시고, 사봉(四奉)의 네 곳 사실(私室) 또한 적몰(績沒)해 들일 것이며, 유사(攸司)로 하여금 잡아들여 엄형(嚴刑)하고 절도(絶島)로 보내어 종을 삼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비답을 내리지 않고, 정원에 머물러 두라고 명하였다.

 

임금이 대신(大臣)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고 이우하(李宇夏)의 소를 보이며 이르기를,
"지금 언관(言官)들이 한 사람도 감히 예조 판서를 논박한 사람이 없었는데, 경종(景宗)이 대리(代理)할 때와 내가 즉위한 후 일찍이 예조 판서를 논한 자가 누구였던가?"
하니, 우의정 송인명(宋寅明)이 말하기를,
"정택하(鄭宅夏)·조적명(趙迪命)이 일찍이 논박하였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어제 처음으로 이우하의 얼굴을 보았는데 그의 거조가 아주 이상하였으니, 경들은 명백히 구별하여 말하라. 범인(凡人)의 어려서의 일은 본디 이상하게 여길 것이 없는데, 이제 이빨이 빠지고 머리털이 쇠한 후에 어찌 이런 일이 있겠는가? 참으로 대간의 상소와 같다면 이는 바로 거활(巨猾)이었으니, 무슨 짓인들 못하겠는가?"
하니, 송인명이 말하기를,
"김취로가 젊어서 그 몸을 단속(團束)하지 않아 뜬 비방이 세상에 가득찼었습니다. 신은 평소 교분은 없었으나, 들으니, ‘그가 관직에 있으면서 염백(廉白)하고, 조정에 있으면서는 당론(黨論)을 좋아하지 않았으며 19일 하교(十九日下敎)를 홀로 받들었다.’고 하였습니다. 그 본말이 이러한데 탐묵(貪墨)하다고 지목해서는 불가하며, 음란한 일은 신이 알 바가 아닙니다. 어승(御乘)의 교마(轎馬)와 〈분원(分院)의〉 어공(御供) 어선(漁船)에 대해서는 관계가 중대하니 사핵(査覈)함이 마땅합니다."
하고, 대사헌 김시형(金始炯)은 말하기를,
"그 사람은 성품이 본디 호걸스러워 관직에 있으면서 매우 엄격하고 사나웠기 때문에 자못 원망과 비방이 많았으나, 어찌 그런 일들이 있었겠습니까? 대신(臺臣)이 70세에 석갈(釋褐)318)  하여 항상 그 선조를 더럽힐까 염려하였으니, 어찌 시상(時象)에 참여했겠습니까? 그리고 여항(閭巷)의 이치에 맞지 않은 비방을 가지고 중신(重臣)을 논박함은 참으로 옳지 않습니다."
하였다. 대사헌 김시형이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사신은 말한다. 이우하(李宇夏)는 나이 70세가 된 늙은 대신(臺臣)으로서 당로(當路)에 있는 김취로(金取魯)를 논박한 것이 어찌 구하는 바가 있어서 그러했겠는가? 그 소에서 논박한 바가 반드시 말마다 모두 사실(事實)이라고 볼 수는 없으나, 세상에 전파된 원망과 비방 같은 것은 저 대신과 중신들도 역시 익히 들었을 것이다. 그런데도 지척(咫尺)의 임금 앞에서 혹은 사랑하고 아끼어 영호(營護)하고, 혹은 두려워하여 모호(糢糊)하게 말하였으니, 이것이 어찌 임금을 섬기는 충성된 도리이겠는가? 다만 그 가운데, ‘아비의 정사(政事)에 악취를 풍겼다.’는 말은 이미 독후(篤厚)함이 부족하였고 ‘수통 과부(水桶寡婦)’라는 지칭은 끝내 번거롭고 설만(褻慢)한 데에 관계되는데, 어찌 이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었겠는가?.


【태백산사고본】 34책 45권 23장 B면【국편영인본】 42책 570면
【분류】왕실-국왕(國王) / 사법-탄핵(彈劾) / 역사-사학(史學) / 정론-간쟁(諫諍) / 변란-민란(民亂) / 교통-수운(水運)


[註 318] 석갈(釋褐) : 과거에 급제해 처음으로 벼슬함.
사신은 말한다. 이우하(李宇夏)는 나이 70세가 된 늙은 대신(臺臣)으로서 당로(當路)에 있는 김취로(金取魯)를 논박한 것이 어찌 구하는 바가 있어서 그러했겠는가? 그 소에서 논박한 바가 반드시 말마다 모두 사실(事實)이라고 볼 수는 없으나, 세상에 전파된 원망과 비방 같은 것은 저 대신과 중신들도 역시 익히 들었을 것이다. 그런데도 지척(咫尺)의 임금 앞에서 혹은 사랑하고 아끼어 영호(營護)하고, 혹은 두려워하여 모호(糢糊)하게 말하였으니, 이것이 어찌 임금을 섬기는 충성된 도리이겠는가? 다만 그 가운데, ‘아비의 정사(政事)에 악취를 풍겼다.’는 말은 이미 독후(篤厚)함이 부족하였고 ‘수통 과부(水桶寡婦)’라는 지칭은 끝내 번거롭고 설만(褻慢)한 데에 관계되는데, 어찌 이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었겠는가?.

 

9월 21일 병오

이진순(李眞淳)을 우윤(右尹)으로, 오언주(吳彦胄)를 사간으로, 정희보(鄭熙普)를 장령으로, 오수채(吳遂采)를 부교리(副校理)로, 김상중(金尙重)을 수찬(修撰)으로, 조명리(趙明履)를 사서(司書)로, 이양신(李亮臣)을 겸사서(兼司書)로, 이성중(李成中)을 설서(說書)로 삼았다.

 

임금이 석강(夕講)을 행하였다. 이때 우의정 송인명이 차자를 올려 청하기를,
"김취로(金取魯)의 일은 단지 해당 서리(胥吏)를 가두어 조사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장차 헤아려 처분하겠다."
하였다. 임금이 묻기를,
"우상(右相)이 중신(重臣)을 가두려 하지 않으니, 이런 예(例)가 있는가?"
하니, 시독관(侍讀官) 서명신(徐命臣)이 말하기를,
"고(故) 상신(相臣) 윤두수(尹斗壽)가 참의(參議)로 있을 때에 뇌물을 받았다고 논박을 받았으나 일찍이 잡아들이지는 않았고 단지 조사만 행하였었으며, 고(故) 판서(判書) 이일상(李一相) 역시 그러했습니다."
하였다.

 

9월 22일 정미

하교하기를,
"이목(耳目)의 관원을 둔 것은 대개 백관을 규찰(糾察)하기 위해서인데, 어찌 감히 털끝만큼이라도 옛 마음을 품겠는가? 조정의 신하에 만약 탐욕스럽고 교활하며 방자한 사람이 있으면 이목의 관원은 마땅히 배척하고 논박해야 마땅하니, 위에 있는 자가 어찌 억제하겠는가? 아! 예조 판서는 신임(信任)이 깊은데, 잗단 일을 임금이 어찌 알겠는가? 풍릉(豐陵)319)  의 변함 없는 마음으로서 결코 어사(御史)로 천진(薦進)하지 않았을 것이었다. 지난번 털을 불어가며 흠을 찾듯 할 때에는 어찌 지금까지 조용히 있다가 옛날의 의심된 일을 가지고 오늘에야 망측(罔測)한 죄과로 몰아넣으니, 이미 말할 나위도 없다. 태복시의 말을 타고 주원(廚院)의 어선(漁船)을 취했다면 비단 탐활(貪猾)할 뿐만 아니라 불경(不敬)에 해당되니, 마땅히 법(法)으로써 청해야 되는데, 어찌 이처럼 허술하게 하였는가? 어찌 의심스러운 것을 가지고 망측한 데로 몰아넣는 것이 아니겠는가? 마땅히 피혐해야 할 것을 피혐하지 않고 협잡(挾雜)으로 사람을 배척하니, 어찌 신칙하지 않겠는가? 우선 사핵(査覈)하기를 기다려 처리하겠으나 대각의 체모를 손상시켰으니, 장령 이우하를 먼저 체직하도록 하라. 예조 판서는 어찌 개석(開釋)하는 하교가 없겠는가마는 이미 조사하는 일이 있으니, 비록 하교하지 않더라도 외람되이 가교(駕轎)의 말을 타고 사사로이 어공(御供)의 배를 취했다고 하니, 관계된 바가 가볍지 않다. 원소(原疏)를 해조에 내려 엄중히 조사하여 아뢰도록 하라. 부처(付處)한 후에 머뭇거리고 출발하지 않아 도사(都事)가 먼저 갔다고 하는데, 이 또한 감추지 못할 것이니, 그때의 도사 역시 해조로 하여금 조사해서 아뢰도록 하라."
하니, 도승지 이종성(李宗城)과 승지 유건기(兪健基)·이익정(李益炡) 등이 계청하기를,
"이우하를 체차하라는 명을 환수하소서."
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임금이 소대(召對)를 행하고, 우의정 송인명의 입시(入侍)를 명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내가 이우하를 처분한 것은 성기(聲氣)를 허비하지 않았다고 할 수 있다. 내일 여러 신하를 소견(召見)할 것인데 만약 다시 옛 습관을 따르게 되면 내가 장차 그 자취를 면치 못할 것이다."
하니, 송인명이 말하기를,
"연못의 고기를 살펴보듯 함은 상서롭지 못합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예조 판서를 오랫동안 애매한 가운데 두어서는 안 된다."
하니, 송인명이 말하기를,
"사봉(四奉)의 일은 매우 잗단 것입니다."
하고, 시독관 오수채(吳遂采)는 말하기를,
"만약 과연 숨겼다면 대신(臺臣)이 반드시 이에 대해 격노했을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남의 종이 곤수(閫帥)의 자(字)를 부르는 것은 실로 기강(紀綱)에 관계되니, 해조로 하여금 엄중히 조사하게 하라."
하였다.

 

9월 23일 무신

이병상(李秉常)을 극변(極邊)으로 찬축하였다. 하교하기를,
"지난날의 고집스럽고 막힌 것은 비록 혹 어두워서 그랬다지만, 이미 하교를 받들고도 오히려 옛날 마음이 있었다. 혼돈(混沌) 이전이라면 그런 대로 참작하겠지만, 개벽(開闢)한 후에 또한 어찌 용서하겠는가? 불경(不敬)의 율(律)은 비록 갑자기 시행하기는 어렵지만, 군강(君綱)이 날로 떨어지고 의리가 날로 어두워지고 있으니, 마땅히 우선 투비(投畀)320)  하여 나랏일에 참여치 못하게 하라."
하였다.

 

임금이 대신(大臣)과 비국 당상(備局堂上)을 인견하였다. 우의정 송인명(宋寅明)이 말하기를,
"신이 작년에 진달하여 각도 수령으로 하여금 곡물(穀物)을 모으도록 했는데, 그 숫자가 장차 10여만 석에 이르고 있습니다. 금년에 그 효과를 거두게 되었는데 전혀 상벌(賞罰)이 없으면 권선 징악(勸善懲惡)을 할 수 없으니, 청컨대 각도의 수위를 차지한 자[居首者]와 하위를 차지한 자[居末者]를 상벌하여야 합니다. 은진 현감(恩津縣監) 이도선(李道善)은 스스로 쌀을 비축한 것이 1천 1백여 석에 이른다고 하니, 마땅히 별도로 논상(論賞)해야 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각도의 수위를 차지한 자는 승서(陞敍)하고, 하위를 차지한 자는 월봉 3등(越俸三等)321)  을 하고 하위 가운데 10석이 차지 못한 자는 월봉 5등을 하며, 전혀 비축하지 못한 자는 월봉 7등을 하도록 하라. 그리고 이도선은 준직(準職)을 제수하도록 하라."
하였다. 송인명이 말하기를,
"이병상은 그 언외(言外)의 뜻을 억측하여 극변의 땅에 투비(投畀)하였으니, 너무 과중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천하에 어찌 오늘날과 같은 당(黨)이 있겠는가? 여러 신하들이 만약 칼로 베듯이 끊어 버린다면 어찌 쾌하지 않겠는가? 그러나 이병상이 이른바 사람이 어찌 개벽하겠는가 하는 설은 비단 야속(野俗)할 뿐만이 아니다. 그의 뜻은 내가 비록 밥을 먹지 않더라도 오히려 눈을 뜨고 다시 앉아 있겠다는 것이다. 을사년322)  에 소(疏)를 이미 진달했다는 설은 더욱 놀랍다. 을사년 봄은 바로 그 무리들이 말을 함부로 할 때인데, 이병상이 옳다면 내가 장차 신하를 무함하는 죄과(罪科)로 돌아가게 되니, 여러 신하들이 어찌 의리 없는 임금을 섬기겠는가? 이번에 멀리 찬축한 것은 대개 그 사람을 아껴서 깊이 참은 것인데 어찌 지나치다고 하겠는가?"
하고, 송인명이 말하기를,
"이병상이 오늘 들어오지 않음이 어찌 실제 병이 아닌지 알겠습니까? 그 그림자를 보고서 죄줄 필요는 없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을사년의 소를 내가 만약 가져다 보면 죽이지 않을 수 없기 때문에 보지 않은 것이니, 경들은 시험삼아 보도록 하라."
하였다. 송인명이 말하기를,
"중신(重臣)과 대관(臺官)에 관한 죄의 유무(有無)와 말의 허실을 단지 이례(吏隷)와 겸복(傔僕) 무리의 말에 의거하여 조사하는 것은 사체를 손상함이 있으니, 태복시와 주원(廚院)의 낭관(郞官)을 왕부(王府)에서 잡아다가 조사해 아뢰어야 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경의 말이 매우 옳다. 두 낭관을 해부로 하여금 잡아다 조사하고, 이례(吏隷)는 추조(秋曹)323)  에서 취초(取招)하게 하라."
하였다.

 

창녕(昌寧)의 여자 문옥이(文玉伊)의 정려(旌閭)를 명하였다. 문옥이는 그의 팔촌(八寸) 문중갑(文仲甲)과 함께 나이가 17세인데, 함께 나무를 하다가 문중갑이 음란한 행위를 하려 하였다. 문옥이가 동성(同姓)인 것으로써 꾸짖고 옷 소매를 떨치고 돌아와 울면서 그 상황을 형에게 말하고는 몰래 독약을 구해 마시고 죽었으니, 도신(道臣)이 주문(奏聞)해 이런 명이 있게 된 것이다. 문중갑은 율에 의거하면 강간(强奸) 미수(未遂)에 해당되어 장류(杖流)해야 하나 너무 가볍기 때문에 감사 도배(減死島配)하라고 명하였다.

 

9월 24일 기유

좌의정 김재로(金在魯)가 네 번 정사(呈辭)하니, 승지에게 돈유(敦諭)하라고 명하였다.

 

오광운(吳光運)을 도승지로, 박문수(朴文秀)를 대사헌으로, 송징계(宋徵啓)·이행민(李行敏)을 장령으로, 박필재(朴弼載)를 헌납으로, 홍정명(洪廷命)을 정언으로, 윤순(尹淳)을 공조 판서로, 조현명(趙顯命)을 우빈객(右賓客)으로, 황재(黃梓)를 겸필선(兼弼善)으로, 김상성(金尙星)을 대사간으로, 이종적(李宗迪)을 검열(檢閱)로 삼았다.

 

정언(正言) 김상구(金尙耉)가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일전의 헌소(憲疏)는 탄핵(彈劾)이 있은 이래로 보기 드문 바입니다. 참으로 중신(重臣)의 한 일이 과연 대언(臺言)과 같다면 그 가운데에서 태복마(太僕馬)와 어공선(御供船)의 일은 관계가 지극히 중대하니, 평일의 예우(禮遇)로써는 용서할 수가 없습니다. 대언이 혹 백지(白地)에 무함을 얽었다면 그 죄 역시 어찌 체차(遞差)에 그칠 뿐이겠습니까? 한편으로는 조사를 행하고 한편으로는 체차함이 마땅한데, 비답이 없이 소를 돌려줌은 국체(國體)에 손상됨이 있으니, 특별히 반한(反汗)을 명하소서."
하니, 임금이 이미 참작하여 처리했다고 답하였다.

 

임금이 소대(召對)를 행하였다. 공씨(孔氏)의 후손(後孫)을 여러 도(道)에서 찾아내어 조용(調用)하라고 명하였으니, 유신(儒臣)의 말을 따른 것이었다.

 

9월 25일 경술

밤에 유성(流星)이 삼태성(三台星) 아래에서 나와 손방(巽方)으로 들어갔는데, 모양이 주먹만하였고 꼬리의 길이가 3,4척이며 빛깔은 붉은 색이었다.

 

임금이 대신(大臣)과 비국 당상(備局堂上)을 인견하였다. 사간(司諫) 오언주(吳彦胄)가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고, 김성탁(金聖鐸)의 일은 정계(停啓)하였다.

 

석강(夕講)을 행하였다.

 

9월 26일 신해

밤에 유성(流星)이 천원성(天苑星) 아래에서 나와 손방(巽方)으로 들어갔는데, 모양은 주먹만하였고 꼬리의 길이는 2척 남짓하였다.

 

이석표(李錫杓)를 헌납으로, 이유신(李裕身)을 장령으로, 김시형(金始炯)을 형조 판서로, 홍경보(洪景輔)를 공조 참판으로, 송징계(宋徵啓)를 부응교(副應敎)로, 조명리(趙明履)를 부수찬(副修撰)으로, 이종성(李宗城)을 예문관 제학(藝文館提學)으로 삼았다.

 

장령 이행민(李行敏)이 상소하여 청하기를,
"올 봄 향유(鄕儒)의 별정시(別庭試) 방(榜)에서 빼버린 사람에게 모두 급제를 내리소서."
하였으나, 따르지 않았다.

 

간원(諫院) 【정언(正言) 김상구(金尙耉)이다.】 에서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은혜를 간구하는 청(請)은 한갓 요행의 문을 열어 주는 것인데 사정(私情)에 끌리어 복과(復科)를 소청(疏請)했으니, 장령 이행민은 파직해야 마땅합니다. 해서 황당선(荒唐船)에서 표류해 온 사람이 심지어 시골 여자를 붙잡아 가기까지 하였는데, 덮어두고 보고하지 않았으니, 그 지방관과 도신(道臣)을 잡아다 문초하소서. 면천 군수(沔川郡守) 유업기(兪業基)는 멍청하고 어리석으며, 양천 현령(陽川縣令) 윤사도(尹師道)는 유약하여 다스리지 못하며, 서천 군수(舒川郡守) 박종성(朴宗城)은 집이 가깝다는 비난을 받고 있으니, 모두 파직하소서."
하니, 아뢴 대로 하라 하고, 황당선의 일은 다만 먼저 지방관에게 묻도록 하였다.

 

9월 27일 임자

밤에 천둥하고 번개가 쳤다.

 

임금이 주강을 행하였다. 영부사(領府事) 이광좌(李光佐)가 말하기를,
"이병상은 나이가 많아 멀리 유배하면 살아서 돌아오기가 어려우니, 청컨대 관대히 용서하소서."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이병상은 나라를 어지럽힌 일이 세 가지가 있으니, 하나는 여러 신하로 하여금 서로 본받게 한 것이요, 하나는 나를 의거할 바가 없게 한 것이요, 하나는 조정의 기상을 어지럽힌 것이다. 이런 세 가지 어지럽힌 죄가 어찌 찬배(竄配)에만 그치겠는가?"
하니, 이광좌가 말하기를,
"비록 성상의 하교와 같지만 한 사람이라도 포용(包容)하면 어찌 거룩한 덕의(德義)가 아니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어찌 한낱 이병상 때문에 매사를 구차스럽게 하겠는가? 후에 만약 그 마음을 씻으면 내가 마땅히 다시 서용하겠으나, 그 병이 이미 고황(膏肓)324)  에 들어서 어려울 것이다."
하였다.

 

호군(護軍) 이우하(李宇夏)가 상소하여 이르기를,
"신이 망령되게 한 소를 올려 김취로(金取魯)의 세 가지 일을 비방해 논한 데 대하여 엄히 조사하라는 명이 계셨습니다. 그러나 태복시(太僕寺)와 주원(廚院)의 두 낭관은 모두 김취로의 인척(姻戚)이어서 그 위세를 두려워해 곧바로 진술하지 못하였으니, 아! 어찌 감히 이럴 수가 있겠습니까? 어공선(御供船) 한 조항은 신이 일찍이 위어소(葦魚所)325)   어부(漁夫)들에게 직접 들었는데 이제 그가 공초한 바는 분명 정상을 숨김이 있으니, 만약 다시 임자년326)   이후의 어관(漁官)에게 조사해 물으면 그 실상을 알 수 있습니다. 가교마(駕轎馬) 한 조항은 신이 상소를 할 때 마적리(馬籍吏) 이유창(李裕昌)을 불러서 물으니, ‘변마(邊馬) 1필을 곧바로 김포(金浦) 늑방교(勒防橋) 가에서 바쳤는데 변마는 교마(轎馬)와 서로 교대해 어승(御乘)에 쓴다.’고 하였으니, 다른 아전과 헌부의 노복(奴僕)들도 모두 참여해 들었습니다. 그러니 이제 복마(卜馬)의 첩(帖)을 주었다는 말은 어찌 속인 것이 아니겠습니까? 태복마는 한번 나가면 원래 들어오는 규정이 없으니, 다시 바쳤다는 말 역시 아주 근거가 없습니다. 금오랑(金吾郞)의 공초에 이르러서는 바로 김취로의 전번 소 가운데 있는, ‘말에서 떨어졌다.’는 등의 말을 가지고 부합시켰습니다마는, 김취로는 성문 밖에서 유숙하여 원래 말을 탄 일이 없으니, 어찌 말에서 떨어져 다칠 수 있겠습니까? 아! 신의 전번 상소가 올려지기 전에 먼저 누설되어 김취로가 당로(當路)에 애걸하여 만류하고 두 번씩이나 그 집 사람을 보내어 조용히 말하였으니, 그의 방자하고 곤궁에 처한 정상은 사람을 부끄럽게 했습니다. 신의 이 소를 내려 다시 그 실상을 구핵하게 하소서."
하니, 전교하기를,
"이우하가 진달한 이유창을 해조로 하여금 사문(査問)하여 아뢰도록 하라. 예조 판서가 성문 밖에 나갈 때 말을 탔는지 가마를 탔는지도 나졸(羅卒)을 사문(査問)하여 아뢰고, 원소(原疏)는 정원에 머물러 두도록 하라."
하였다.

 

승지 윤득화(尹得和)가 상소하여 이르기를,
"김취로는 바로 신의 외종형(外從兄)이며, 이우하의 상소 가운데 말한 주원(廚院)의 낭관은 바로 신의 동당형(同堂兄)327) 윤득귀(尹得龜)입니다. 인척·친척에게 견제되었다고 말하니, 감히 출납하는 자리에 그대로 무릅쓰고 있을 수가 없습니다."
하니, 사직하지 말라고 비답하였다.

 

9월 28일 계축

천둥하고 번개가 치며 우박이 내렸다.

 

간원 【사간(司諫) 오언주(吳彦胄)이다.】 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고, 또 아뢰기를,
"해서(海西) 황당선(荒唐船)의 일은 지방관(地方官)은 이미 논죄(論罪)하였으니, 수사(水使) 이우(李玗)를 먼저 파직한 후 잡아오고, 감사(監司) 이성룡(李聖龍)은 실상을 조사하기를 기다린 후에 잡아다 문초하여 정죄하기를 청합니다."
하였으나, 모두 윤허하지 않았다.

 

공조 참판(工曹參判) 홍경보(洪景輔)가 상소하기를,
"신이 망령되게 한마디 말을 하여 당시의 노여움을 거듭 촉발하고 이름이 간서(簡書)에 올랐으며 감삭(勘削)하는 벌에 이르렀습니다. 신이 상소한 뜻은 성지(聖旨)에 응하여 과실을 책망한 데에 지나지 않는데, 저들은 곧 자신이 대관(臺官)의 자리에 있으면서 스스로 언로(言路)를 막아 신이 국옥(鞫獄)을 저패(沮敗)시켰다고 지목하였습니다. 이는 대각(臺閣)의 말이 묘당에 미치면 죄를 주기가 어려우나 국옥을 저패시켰다고 하면 자중(藉重)하기가 쉬운 데 지나지 않습니다."
하니, 예사 비답을 내렸다.

 

9월 29일 갑인

초저녁에 번개가 쳤다.

 

대사간 김상성(金尙星)이 상소하여 맨 먼저 지난번 군덕(君德)의 잘못을 말하고 또 말하기를,
"이병상(李秉常)을 변방에 찬축함은 과중하며, 헌부의 소(疏)를 조사한 후 대신(臺臣)이 체직되고 낭리(郞吏)가 나추(拿推)되었는데 중신(重臣)은 처음부터 아무런 문책이 없었으니, 국체(鞫體)가 구차하게 되었습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힘쓰기를 진달하였으니, 어찌 깊이 반성하지 않겠는가? 이병상의 일은 이미 대신(大臣)에게 유시하였으며, 김취로의 일은 또한 옛 규례가 있다."
하였다.

 

조상명(趙尙命)을 장령으로, 남취명(南就明)을 동돈녕(同敦寧)으로, 정준일(鄭俊一)을 사서(司書)로 삼았다.

 

9월 30일 을묘

임금이 희정당(熙政堂)에 나아가 성균관 유생(成均館儒生)을 친강(親講)하였는데, 유생 이성운(李聖運)·조처로(趙處魯)·문봉수(文鳳壽)가 입격(入格)하니, 모두 급제를 내렸다.

 

정언(正言) 홍정명(洪廷命)이 상소하기를,
"이병상의 처분이 과중하니 청컨대 반한(反汗)하시고, 탁지(度支)의 장(長)은 중비(中批)328)  로 제수하셨는데, 청컨대 바꾸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이병상의 일은 처분을 참작했다고 말할 수 있으며, 호조 판서의 일은 그 사람됨이 착
실하여 이 직임을 감당할 수 있으니, 진달한 바가 몹시 지나치다."
하였는데, 호조 판서는 바로 윤양래(尹陽來)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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