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영조실록46권, 영조 13년 1737년 10월

싸라리리 2025. 9. 19. 10: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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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1일 을유

임금이 상참(常參)과 조강(朝講)을 행하였다. 영의정 이광좌(李光佐)가 이뢰기를,
"이병상(李秉常)이 비록 당쟁에 병들기는 하였지만 이는 이병상 한 사람만 그러한 것이 아니며, 그 사람이 벼슬에 욕심이 없어서 종사(從仕)하기를 즐겨하지 않았는데 지금 그 사직소(辭職疏)의 말씨가 좋지 않았다고 하여 오랫동안 귀양지에 버려두는 것은 끝내 지나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돌이켜보면 지금 우리 조정을 어지럽힌 자는 바로 이병상인데, 경은 어찌하여 지나치다고 하는가?"
하였다. 이광좌가 노쇠와 질병을 이유로 정승의 직임을 힘써 사직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효종께서는 일찍이 고(故) 상신(相臣) 송시열(宋時烈)에게, ‘나를 위해 몇 년만 더 있어 달라.’는 하교가 있으셨는데, 나는 매양 이 하교를 되뇌이며 경을 면려하였다. 지금 경에게 도움을 구하고 있는데, 이는 경이 반드시 옛사람에 미칠 수 있다고 하여 그런 것이 아니다. 그러나 경은 뜻이 매우 크고 근력도 아직 왕성하니, 오직 나와 국사를 함께 하기를 바란다."
하니, 이광좌가 아뢰기를,
"오늘날 당론이 헤아릴 수 없는 지경에 이르러 나라를 망치는 근저가 되었는데, 대고(大誥)한 후에 뭇신하들이 진실로 이를 벽 위에 붙여 놓고 항상 임금의 위엄을 어길 수 없음과 같이 하고 상제(上帝)께서 친히 살피고 계신 것같이 하여 마음을 참으로 진실되게 가지고 항상 잊지 않는다면, 거의 크게 바뀌어 작은 것을 흩어서 큰 것을 이루는 효과가 있을 것이니, 이는 성상께서 정성을 쌓아 가르치고 인도하시는 데 달려 있습니다. 또 만약 언로(言路)를 활짝 열어 놓고 마음을 비워 받아 들이고는 근거가 없는 일은 너그럽게 용서하시고 진실되고 바른 말을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고치신다면, 성상의 덕이 날로 빛나고 세도(世道)가 크게 변하는 데 무슨 어려움이 있겠습니까? 옛말에, ‘백척 간두(百尺竿頭)에서 다시 한걸음 나아간다.’는 말이 있는데, 성상의 마음이 이와 같다면 뭇신하들이 어찌 감히 어길 수 있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내가 평소 정성과 신의가 부족하여 끝내 사람들로 하여금 믿고 따르게 하지 못하였다. 전(傳)에 이르기를, ‘마음에 거슬리면 도(道)에서 구하라.’고 하였는데, 뭇신하의 말이 나의 병통을 찌르는 것이 있으면 마음이 자못 겸연쩍고, 또 간혹 인내하지 못할 때가 있으니, 이것은 나의 마음 다스리는 공부가 아직 지극하지 못한 것이다. 재상으로서 돕는 길이 어찌 근력에만 있겠는가마는, 경이 만약 너무 늙어서 직무를 감당할 수 없다면 반드시 대신할 만한 사람을 천거하고 나서 물러날 것을 고하는 것이 마땅하다. 나는 경의 마음과 기력이 모두 쇠약해질 때까지 기다렸다가 그 뒤에 청하는 바를 들어줄 것이다."
하였다. 이광좌가 아뢰기를,
"금년 흉년이 이와 같은데 만약 혹시라도 기근이 거듭된다면 구제할 방책은 생각만 해도 아득합니다. 신은 10여 년 전에 기수(氣數)를 옮긴다는 설로써 힘쓰실 것을 우러러 면려한 바 있었는데, 그 뒤 원자(元子)가 탄생하여 신민의 마음이 매인 데가 있으니 사방 수천 리에 가뭄과 수해가 있다 하더라도 어찌 구제할 방법이 없겠습니까? 성상의 마음이 진실로 위로 저 하늘과 통하여 하늘에 기도하여 나라의 명운(命運)을 길게 하는 근본으로 삼는다면, 천심(天心)도 기뻐하고 즐거워하여 해마다 기근이 거듭되지는 않을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재난을 구제하는 데에는 재물을 절약하는 것만한 것이 없고, 재물을 절약하는 데에는 검소함을 숭상하는 것만한 것이 없는데, 나의 뜻은 원자에게서 이루어질 수 있을 것이다. 그가 어린 나이로서 사치와 검소를 어찌 구분할 줄 알겠는가마는, 지난번 붓을 들어 ‘사치할 치(侈)’ 자를 써 달라고 하기에 내가 그 까닭을 물었더니, 대답하기를, ‘벽에 붙여 두려고 합니다.’ 하였다. 그래서 내가 비단과 면포를 가리키며 ‘어떤 것이 사치한 것이고 어떤 것이 검소한 것인가?’ 하고 물었더니, 비단을 가리키며 사치한 것이라 대답하였다. 나는 이로써 나의 뜻이 그에게서 이루어지리라는 것을 알았다."
하였다.

 

10월 2일 병술

유성(流星)이 오거성(吳車星) 아래에서 나와 서쪽으로 들어갔는데, 모양은 주먹 같았고 꼬리는 길이가 3,4척이었으며, 빛깔은 황색이었다.

 

주강(晝講)을 행하였다.

 

병조에 명하여 위군(衛軍) 3백 70인에게 동옷을 지어 나누어 주게 하였으니, 날씨가 추운 까닭이었다.

 

홍상빈(洪尙賓)을 형조 참판(刑曹參判)으로, 이정보(李鼎輔)를 수찬(修撰)으로 삼았다.

 

10월 3일 정해

주강을 행하였다.

 

10월 4일 무자

이주진(李周鎭)을 대사간으로, 김유경(金有慶)을 부제학으로, 정익하(鄭益河)를 교리로, 신치근(申致謹)을 부수찬으로, 박사정(朴師正)을 정언으로 삼았다.

 

임금이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이때 일본 관백(關伯)이 손자를 보았다하여 차왜(差倭)를 보내어 고경(告慶)하니, 변신(邊臣)이 급히 계문하였다. 임금이 대신에게 접대해야 옳은지의 여부를 물으니, 영의정 이광좌가 아뢰기를,
"우리 나라는 문헌이 부족하여 널리 상고할 수 없으나, 《통문관지(通文館志)》를 가지고 상고해 보면 왜국이 고경(告慶)한 예는 관백(關伯)이 아들을 낳거나 후계자를 세울 때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일찍이 아들을 낳았을 때 마땅히 통신사(通信使)를 청하여야 하는데도 저들이 드러내 놓고 말하지 않고 그러한 뜻만 조금 비쳤으므로 인조(仁祖)께서는 위무하는 뜻으로 특별히 통신사를 파견한 바 있었고, 후계자를 세울 때에는 단지 접위관(接慰官)만 보냈으며, 손자를 보았다는 고경은 이미 전례가 없습니다. 변신은 더욱 변경을 엄중히 하여야 하는데 그들이 청하는 대로 쉽게 진달(陳達)하니, 교린(交隣)하는 예로서는 비록 접대하지 아니할 수 없으나, 훈도(訓導)·별차(別差)의 무리들이 엄중히 이를 막지 못하였으니, 나문(拿問)하여 곤장을 쳐야 하고, 수신(守臣) 역시 추고(推考)해야 마땅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한편으로는 접대를 허락하고 한편으로 변신을 죄준다면, 저들은 필시 기뻐하지 않을 것이다. 관백(關伯)이 아들을 낳은 것이 아들의 승습(承襲) 이전에 있었으니, 손자를 보았다는 고경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또 8대 만에 처음 있는 경사라고 말하니, 이웃 나라를 대접하는 도리로도 허락하지 아니할 수 없다."
하고, 명하여 대차왜(大差倭)가 나온 뒤에는 을사년360)  의 예(例)에 의거하여 접대하게 하였다.

 

주강을 행하였다.

 

10월 5일 기축

달이 우성(牛星)을 범하였다.

 

10월 7일 신묘

주강과 석강을 행하였다.

 

강화 유수(江華留守) 조명익(趙明翼)이 졸(卒)하였다. 조명익은 천성이 야비하고 더러웠으며 행동도 검속(檢束)하지 않음이 많았는데 요로(要路)에 빌붙어 외람되이 경대부(卿大夫)의 반열에 올랐으므로, 당시 사람들이 비루하게 여기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서종급(徐宗伋)을 대사헌으로, 김상로(金尙魯)를 부응교로, 이석표(李錫杓)를 부교리로 삼았다.

 

10월 9일 계사

홍경보(洪景輔)를 도승지로, 이춘제(李春躋)를 예조 참판으로 삼았다.

 

종신(宗臣) 낭제군(琅瑅君) 섬(燂) 등이 상소하여 아뢰기를,
"서성군(西城君) 작(焯)의 사위 홍익해(洪益海)가 선전관(宣傳官)으로 합당한지의 여부를 심사하는 과정에서 저지당하였는데 취처(娶妻)가 분명하지 않다는 것이 핑계였다고 하니, 선파(璿派)는 장차 길이 막힐 것입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두 글자의 제목이 매우 통탄스럽고 놀랍다. 행수 장무관(行首掌務官)을 엄중 처벌하도록 하라."
하였다.

 

10월 10일 갑오

부교리 이석표(李錫杓)가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신이 고난을 당한 것은 전적으로 과명(科名)361)  에 있으며, 대료(大僚)의 말은 백성의 말과 비할 바가 아니니, 말이 비록 번거롭고 잗달더라도 신은 이 일의 발단부터 모두 아뢰고자 합니다. 신은 지금의 봉산 군수(鳳山郡守) 조윤성(曹允成)과 더불어 20년간 함께 문필을 연마하였는데, 그날 장중(場中)에서 시각이 매우 촉박하여 각자 먼저 채운 구절을 따라 서로 베끼거나 바꾸어 쓰는 방식을 써서 마침내 한 편씩을 만들었는데 서로 엇비슷하였습니다. 특히 신이 조윤성에게서 도움을 받은 것이 조윤성이 신에게서 받은 것보다 조금 많았는데도 신은 장원을 하고 조윤성은 낙방을 하였으니, 신의 마음에 부끄럽고 수치스럽기가 남의 물건을 훔친 것과 다름이 없었습니다. 하물며 저 대신(大臣)은 그 때 과거를 관장하는 명관(命官)으로서 방을 걸던 날 급제를 취소하자고 곧바로 청하지 않고, 그 뒤 망령된 말이 있은 후에 도리어 늦게 물리친 것은 그 역시 신을 대접함이 후하였던 것입니다. 만약 이로 인하여 노여움을 품고 보복의 손길을 몰래 뻗쳤다고 한다면, 신이 비록 편협하고 천박하지만 어찌 차마 그렇게 할 수 있겠습니까?"
하니, 비답하기를,
"죄를 용서하여 풀어 준 뒤에도 어찌 감히 이와 같이 하는가?"
하였다.

 

임금이 대신과 비국 당상(備局堂上)을 인견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추조(秋曹)362)  에 판부(判付)하기를, ‘나라에 법도가 없다.’고 하교하였는데, 교활한 구실아치들이 매양 뒷날을 염려하여 다른 구실아치들에게 다시 물어 역시 이유창(李裕昌)과 같았고, 예조 판서는 출장(出場)할 기약이 없으니, 나라의 체통으로 어찌 이와 같은 것을 용납하겠는가?"
하니, 영의정 이광좌(李光佐)가 아뢰기를,
"사건을 조사하자니 이미 오래 되었고, 진실을 밝히기도 역시 어려우니 형세로 보아 참작하여 처리하여야 할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이 뒤에 마땅히 하교하겠다."
하였다.

 

10월 11일 을미

번개가 치고 우박이 내렸다. 유성(流星)이 오거성(五車星) 아래에서 나와 서쪽으로 들어갔는데, 모양은 주먹 같았고 꼬리의 길이는 3,4척이었으며, 빛깔은 황색이었다.

 

주원(廚院)363)  에 하교하여 감선(減膳)하게 하였다.

 

송징계(宋徵啓)를 집의로, 이선행(李善行)을 사간으로, 이도겸(李道謙)을 헌납으로, 조상명(趙尙命)과 송질(宋瓆)을 장령으로, 권집(權䌖)을 지평(持平)으로, 정준일(鄭俊一)과 김상중(金尙重)을 정언으로, 윤심형(尹心衡)을 부응교로, 오수채(吳遂采)를 부교리로, 이중경(李重庚)을 승지로, 신사건(申思建)을 사서(司書)로, 윤용(尹容)을 강화 유수(江華留守)로 삼았다.

 

10월 12일 병신

수찬 정이검(鄭履儉)이 성학(聖學)에 힘쓰며 언로(言路)를 열고 풍화(風化)를 돈독히
하며 인재를 가려 뽑고 재용(財用)을 절약하며 변방(邊防)을 튼튼히 해야 한다는 여섯 조목의 차자(箚子)를 올려 경계할 것을 아뢰니, 임금이 가납(嘉納)하였다.

 

하교하기를,
"아! 내가 덕이 모자라고 배운 것이 적어 명령은 조정에 시행되지 아니하고 혜택은 백성에게 미치지 아니하니, 아! 어진 하늘의 면려하고 신칙함은 없는 달이 없는데, 하물며 지금 만물이 폐장(閉藏)될 때이겠는가? 날짜를 헤아려서 감선(減膳)한다는 것도 정성이 부족하여 오히려 부끄럽다. 고굉(股肱)의 대신이 사(私)를 앞세우고 공(公)을 뒤로 미루는 것도 바로 내 자신의 허물이고, 가난한 백성이 거꾸로 매달린 듯한 질곡(桎梏)이 옛과 다름없는 것도 바로 내 자신의 허물이며, 감찰(監察)의 업무를 맡은 관원이 오로지 정목(政目)364)  만 갖추는 것도 바로 내 자신이 흉금을 털어놓지 아니한 소치이고, 초야의 여러 신하가 광유(廣諭)한 뒤에도 오히려 지체하며 배회하는 것 역시 내 자신이 신뢰감을 주지 못한 소치이며, 기강이 엄하지 못하고 풍습이 날이 갈수록 퇴폐해지며 세도(世道)가 날이 갈수록 변하는 것은 모두 아랫사람의 과오가 아니며 역시 내 자신이 신칙하고 격려하지 못한 허물이다. 지난날 내린 유시에 먼 곳에서 응하였는데도 이를 채택하여 시행한 것이 없으니, 그 연유된 바를 헤아려보면 내 자신이 아니고 누구이겠는가? 먼저 감선을 명하여 두려워하고 삼가는 뜻을 보이고자 한다. 대소 신료(大小臣僚)들은 나의 무능만을 말하지 말고 두려운 마음으로 면려하여 오늘의 형세를 만회하도록 하라."
하였다.

 

영의정 이광좌(李光佐)가 뇌성의 재변을 이유로 차자(箚子)를 올려 사직(辭職)을 청하며, 덧붙여 정성을 쌓아 운기(運氣)를 옮겨야 한다는 말을 아뢰었다. 우의정 송인명(宋寅明)도 차자를 올려 자신의 허물을 인책함과 아울러 청하기를,
"직간(直諫)하는 문을 열고, 치국(治國)의 근본이 되는 요체를 살피며, 내외(內外)의 분별을 엄격히 하고, 형벌의 방법을 신중히 하소서."
하니, 모두 가납한다는 비답을 내렸다.

 

사간원(司諫院) 【사간 이선행(李善行)과 정언 정준일(鄭俊一)이다.】 에서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금성(金星)이 달로 들어간 변고가 있었는데도 청대(靑臺)365)  에서 즉시 등문(登聞)하지 않았으니, 청컨대 입직관(入直官)을 나처(拿處)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10월 13일 정유

임금이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호조 판서 박사수(朴師洙)가 아뢰기를,
"현종조(顯宗朝) 무신년366)  ·기유년367)   간에 재상(宰相) 김좌명(金佐明)과 정태화(鄭太和)가 궁중 내외의 용도를 절약하고 참작해 헤아려 식례(式例)를 만들고는 이름하여 무신 등록(戊申謄錄)이라고 하였습니다. 그 당시 위로는 두 동조(東朝)368)  를 받들고 아래로는 여러 공주가 있었지만 국가에서 절약하는 것이 오히려 이와 같았는데, 그 후 쓰임새가 점점 늘어나 무신 식례(戊申式例)는 폐지하여 적용되고 있지 않으며, 지금은 씀씀이가 수십 배뿐만이 아닙니다. 청컨대 그 가운데서 취하고 다시 더 재량(裁量)해 정하여서 용도를 절약하는 방도로 삼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묘당(廟堂)에 명하여 재량하고 참작해 헤아려서 품의하여 정하게 하였다. 임금이 이조 참판 정석오(鄭錫五)에게 명하여 그의 조부 고(故) 동평위(東平尉) 정재륜(鄭載崙)이 저술한 《공사문견록(公私聞見錄)》을 올리게 하였다. 동평위가 일찍이 이것을 저술하면서 위로는 궁중과 조정의 일로부터 아래로는 사대부와 민간의 이야기에 이르기까지 기록하지 않은 것이 없었는데, 일찍이 고리짝에서 꺼내지 않은 것은 대개 세속(世俗)의 실정과 거짓을 언급하지 않은 것이 없어서였다. 이때에 이르러 열람하게 되니, 많은 사람들이 은근히 탄식하였다.

 

정언 김상중(金尙重)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전하께서는 규모가 크지 못하고 도량이 넓지 못하여 성상의 뜻에 영합하는 사람을 만나면 ‘나를 사랑한다.’라고 하시고 성상의 과실을 지적하는 사람에게는 ‘나를 헐뜯는다.’라고 하십니다. 전하께서 오히려 마음을 환히 열지 못하시면서 어떻게 일세(一世) 사대부의 이미 고질화된 마음을 열 수 있으며, 어떻게 일세 사대부의 이미 가려진 안목을 넓힐 수 있겠습니까? 아! 연경(燕京)의 무역을 그만두자는 청을 사헌부의 신하가 아뢰었는데 초의(草衣)를 입어야 하느냐 비답하셨으니, 그것 하나만 하더라도 어찌 그리도 넓지 못하시며, 진전(眞殿)369)  의 공사를 그만두자는 말을 유신(儒臣)이 논하였는데 애매한 하교를 내리시니 또 얼마나 큰 실언이십니까? 당당한 제왕의 존엄으로 어찌 필서(匹庶)370)  들의 자명한 행동을 본받으려 하십니까? 비록 대신(大臣)을 두고 말하더라도 한두 대신(臺臣)이 새로 언관(言官) 자리에 들어와 허망하게 스스로 부지런히 직분을 다해 보겠다는 뜻을 붙여 말하였다면 대신은 마땅히 일소(一笑)에 붙이고 수용해야 하는데, 어찌 반드시 서로 쟁론해야 합니까? 간신(諫臣)은 대신을 보고 망발한다 하고 대신은 간신을 보고 망발한다고 하니, 안타깝습니다. 왕공 대인(王公大人)으로서 포용하는 덕이 유독 중서성(中書省)이 추밀원(樞密院)에서 도인(倒印)한 것을 불문에 붙인 뜻371)  을 작게 여기십니까?
아! 오늘날 나라의 형세는 정녕코 사심(私心) 없는 마음으로 신하끼리 협력하고 성의를 다해 한데 뭉쳐야 하는데도 지난번의 광유(廣諭)도 모두 한바탕 빈말이 됨을 면하지 못하였습니다. 전하의 사랑함과 미워함이 한결같이 공(公)에서 나와야 하며 조정의 취사선택은 한결같이 정도(正道)에서 나와야 합니다. 그렇게 하고도 오히려 파당(派黨)의 습성에 끌리고 연연하여 국사를 냉담하고 무관심하게 본다면 이는 참으로 불충한 신하이니, 비록 임금을 잊고 나라를 저버린 죄로써 벌을 준다 하더라도 또한 무엇이 애석하겠습니까마는, 전하께서는 그 책임을 다하지 못하시고 한갓 벼슬과 녹봉으로 그들을 잡아매고는 위엄과 형벌로 독려하려고 하시니, 대신(臺臣)이 처치(處置)한 두 글자가 무슨 중죄에 이르기에 아직도 섬의 가시울타리 속에 갇혀 있으며, 중신(重臣)이 한때 병을 끌어댄 것이 무슨 대죄(大罪)에 관계되기에 갑자기 변방으로 귀양보내니, 정법(情法)이 온당함을 잃고서 어떻게 인심을 복종시키겠습니까? 비록 추조(秋曹)에서 사실을 조사하는 것으로 말하더라도, 신하가 어승마(御乘馬)를 참람되이 타는 것이 얼마만한 불경죄(不敬罪)입니까? 논박하는 자는 대신(臺臣)이요 논박을 당한 자는 중신입니다. 대신이 올린 소장을 가지고 중신의 죄를 조사하여 밝힌다는 것은 국가의 형정(刑政)에 이보다 더 중대한 것이 없는데, 당초에 중신에게 직접 심문하지 않고 그가 스스로 해명한 내용을 보고는 단지 서리배의 말만을 증거로 삼아 그 진위를 캐내려 하니, 설령 심문한 뒤에 과연 그러한 자복(自服)을 받았다 하더라도 나라에서는 장차 서리배의 말로써 그 관장(官長)의 불경죄를 곧바로 처벌하게 하시겠습니까? 지금 문제가 이처럼 엎치락뒤치락하던 끝에 심지어 대관(臺官)에게 함문(緘問)372)  하도록 하기에 이르렀으니, 또한 어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습니까? 신은 중신에게 한 번 물어 처리하지 않을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이조 참판 정석오(鄭錫五)는 문벌은 비록 높으나 평판은 대단치 않으며, 경력은 비록 화려하나 식견은 보잘것없어서 정사에 임하여 자기의 견해를 주장하지 못하고 있으니, 벼슬을 갈아 전선(銓選)을 중요시하여야 합니다. 아경(亞卿)이란 곧 덕이 있는 사람에게 주는 벼슬이고 포상(褒賞)이란 바로 교화하고 권장하는 정사(政事)인데, 설사 한때의 노고가 있다고 하여 어찌 거듭 상을 줄 수 있습니까? 지난번 정언섭(鄭彦燮)에게는 동래부(東萊府)의 일로써 처음에 이미 말을 하사하였는데 뒤에 또 증질(增秩)하였으니, 이것은 조정의 법률과 제도를 묘당(廟堂)에서부터 파괴하는 것입니다. 충청도(忠淸道)의 관찰사(觀察使)를 임명하는 것은 그 임무가 백성을 다스리는 데 있는데, 새로 임명된 관찰사 이보혁(李普赫)은 경직(京職)과 외직(外職)을 두루 거쳐 이미 명성과 치적이 있으니 한 방면을 맡기기에 합당한 사람을 얻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미 파직되어 산관(散官)에 관계되고 또 해유(解由)373)  에 구애되었는데도 전조(銓曹)374)  의 장(長) 한 사람이 바로 차자(箚子)를 올려 청한 것이 과연 전례가 있는 일인지 모르겠습니다. 사복시(司僕寺)의 낭관(郞官)이 바야흐로 처벌을 기다리고 있다가 갑자기 의망(擬望)을 받아 군수(郡守)에 제수(除授)된 데 이르러서는 관리의 인사 원칙에 위배되는 것이니, 전조의 관원을 종중 추고(從重推考)의 벌로 다스리는 것이 옳습니다. 동래 부사(東萊府使) 오명서(吳命瑞)는 세삼(稅蔘)의 일로 잡혔을 때에 추한 비방이 낭자하였고, 조정의 고관에게 몰래 준 뇌물 가운데에는 온갖 화려하고 기묘한 장식품이 있었으니 삭파(削罷)의 율로 다스려야 하며, 형조 참판 홍상빈(洪尙賓)은 평소 술로 실수가 많아 직무를 수행하는데 지장이 있으니 역시 벼슬을 갈아야 합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유시에 응하여 조목조목 들어 아뢰니, 참으로 가상하다. 예조 판서의 일은 두루 물어 처리할 것이며, 이조 참판에 대한 일은 너무 지나치다. 정언섭의 일은 이미 지나간 일이며, 오명서의 일은 해부(該府)로 하여금 나처(拿處)하게 하고, 전조의 관원은 추고(推考)하게 하겠으며, 홍상빈의 일은 그대로 시행하겠으며, 그밖에 힘써 아뢴 일들은 어찌 깊이 반성하지 않겠는가?"
하였다. 뒤에 이조 판서 조현명(趙顯命)이 상소하여 인혐(引嫌)하면서 말미에 정석오를 구원하여 아뢰기를,
"연소한 사람의 거리낌 없는 주장이 일의 형편을 짐작하는 데 크게 모자라, 아무런 문제가 없는 것을 공연히 일을 만든 결과를 면하지 못할 것입니다. 신은 동료[僚席]에게 감히 사사로운 뜻을 가질 수 없기 때문에 가만히 탄식만 하고 있습니다."
하였고, 우의정 송인명(宋寅明)도 인혐을 아뢴 차자(箚子)를 올려 정석오를 구원하였다. 또 아뢰기를,
"오명서가 죄에 걸린 것은 또한 몰래 뇌물을 바쳤다는 한 가지 일에 있으니, 물건이 간 곳을 간신(諫臣)은 의당 보고 들은 바가 있을 것인데 어찌 분명히 말하여 아울러 함께 죄를 청하지 않습니까? 이러한 논의가 조정 신하들을 더럽히고 혼탁스럽게 한다는 것을 일찍이 연석(筵席)에서 역시 여러 번 아뢰었는데, 간신을 위하여 매우 안타깝습니다."
하니, 아울러 비답을 내려 위유(慰諭)하였다. 김상중(金尙重)이 또 상소하였다. 대략 이르기를,
"한 사람의 아전(亞銓)375)  을 논한 것이 무엇이 세도(世道)에 크게 관계된다고 지붕만 쳐다보며 탄식하기까지 하며, 마치 신이 일 만들기를 좋아하는 사람처럼 여기니, 안타깝습니다. 전조의 장에게서 이런 말이 나오니, 오명서의 일 같은 데 이르러서는 대신이 아뢴 것은 재간이 되고 신이 논박한 것은 추악한 비방이 되었습니다. 상자 꾸러미로 두루 음식을 보냈다는 것은 동산(東産)을 사용하지 않았다는 것의 착오(錯誤)이고, 패용(佩用)하는 장식품을 몰래 보냈다는 것도 남쪽에서 온 사람의 입에서 전파된 말입니다. 물건이 간 곳은 그것을 준 사람 자신이 밝혀야 할 것인데 대신이 이것으로써 인혐하니, 이것은 참으로 뜻밖입니다."
하니, 임금이 예사 비답을 내려 양쪽을 다 납득시켰다.

 

10월 14일 무술

부교리(副校理) 이석표(李錫杓)가 상소하기를,
"대저 대신은 백관의 우두머리로서 비록 죄가 있어 죽이는 경우라도 역시 반수가검(盤水加劒)376)  의 예우가 있습니다. 지금 전하께서는 얼굴을 맞대고 꾸짖고 욕하는 것이 노복에게 하는 것보다 심하며, 어제 파직시켰다가 오늘 임명하는 것이 말단 관료에게 하는 것과 다름없습니다. 이는 대신들이 평소 임금에게 경시를 당해 온 소치이니, 창랑(滄浪)의 물빛에 따라 거취를 결정한다면 무슨 원망이나 탓이 있으리요마는, 오직 신이 두려워하는 것은 이제부터 진실로 자중자애하는 선비가 있어 자신의 몸과 이름을 아낀다면, 누가 달가운 마음으로 전하의 앞에서 업신여김을 받으며 전하의 굴레에 매여 출입하겠습니까? 그들 중 의관이 부서지거나 찢어지지 않고 가는 사람은 드물 것이니, 그렇게 되면 필경 전하의 뜰에 서는 사람이란 부귀를 탐내는 무리에 지나지 않을 것입니다. 그렇다 하더라도 이는 생존한 대신으로 전하에게 임용(任用)되고 있는 자이지만 4대에 걸쳐 예우를 받던 선정신(先正臣)377)  의 경우에 이르러서도 명자(名字)가 배척해 불리어지고 당파의 괴수로 단정되니, 이는 어찌된 일입니까? 우리 나라의 당론은 이미 3백 년 동안의 고질이요 선정신이 처음 만든 것이 아닙니다. 오늘날처럼 엎치락뒤치락하며 날로 심화된 것은 지금 사람들의 죄에 지나지 않는데, 하필 이미 백골이 된 사람의 행적을 끝없이 캐들어가 주심(誅心)의 의리를 억지로 단절하십니까? 성기(聲氣)의 폭발과 말씀을 가려서 하시지 않은 그것이 전하의 덕에 누가 되는 것이 한두 가지에 그치는 것이 아닌데, 그날 묘당(廟堂)과 삼사(三司)에서 한 사람도 전하의 잘못을 바로잡아 구제하는 사람이 없었으니, 전하께서 꾸짖어 질타하고 업신여겨 짓밟으심이 이와 같이 극도에 이름도 당연합니다.
부끄럽게 여길 만한 일은 한쪽의 유자(儒者)의 이름을 가진 자로서 평상시 아무 일이 없을 때에는 어지럽게 문묘(文廟)에 배향(配享)하자는 청을 중외(中外)에서 번갈아가며 상소를 올리더니 오늘에 이르러서는 한마디도 변명하여 논하는 사람이 없으니, 오늘날 선비의 기풍 역시 모두 죽었다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다만 신이 홀로 근심하고 너무나도 염려되는 것이 있으니, 전하께서 폐합(閉閤)하신 뒤에 당파가 없어질 것 같았는데 없어지지 않았고, 대고(大誥)하신 뒤에도 당파가 없어질 것 같았는데 또한 없어지지 않았으며, 밤에 유시하신 뒤에도 당파가 없어질 것 같았는데도 끝내 없어지지 않아서 마침내 각선(却膳)하시기에 이르렀던 것입니다. 그러나 각선하신 뒤에도 역시 끝내 당파가 없어지리라는 것을 어떻게 알겠습니까? 외관상으로 본다면 평소 당파의 우두머리로 지목되는 사람도 어전(御前)에 나아와 절하며 뵙고 지난날 역적을 비호한다고 손가락질하던 사람도 어깨를 나란히 하고 연석(筵席)에 나아와 마치 옛날의 원한을 서로 잊고 묵은 감정을 모두 풀어버린 듯합니다. 그러나 본래의 울타리를 오히려 마음속에 설치해 놓고, 컴컴한 곳의 무기는 선웃음을 치는 즈음에 먼저 갈무리해 두며, 머리를 숙여 공손히 하고도 물러나서는 주먹을 부르쥐고, 한자리에 앉아 즐기면서도 속으로는 활에 화살을 먹여 당기려 하니, 이는 단지 기회를 타서 유리한 방편을 미처 얻지 못하였을 뿐입니다.
지금 전하께서는 바야흐로 편안한 마음으로 스스로 기뻐하시고 번민 속에서도 만족하시면서 진실로 탕평(蕩平)이 되고 크게 보합(保合)을 이루었다고 여기시나, 다만 당파를 깨뜨리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뭇신하에게 기만당하고 있는 것을 알지 못하시니, 어찌 안타깝지 않겠습니까? 광유(廣諭)를 처음 내리시던 날에는 중외의 인심이 크게 진동하여 눈을 부비고 마음에 새겨 두루 묵은 감정을 말끔히 씻어 없애고 국면을 새롭게 전개하는 공을 이 기회에 결단할 수 있으리라 여기지 아니함이 없더니, 막상 당하고 보니 승지가 소리 내어 읽고 백관은 네 번 절하고 물러가는 데 불과하였으며, 유시하신 내용 역시 전후의 사륜(絲綸)에서 이미 익히 말하고 익히 들었던 것에 불과하였을 뿐입니다. 그러한 까닭에 거조는 천둥과 바람이 휘몰아치지 않은 것이 아니었으나 사람들이 복종하지 않으며, 말씀은 애절하게 거듭거듭 고하지 않은 것이 아니었으나 사람들이 믿지 않으니 안타깝습니다. 전하께서 진실로 그 당시에 옥음(玉音)으로 조서(詔書)를 반포하시되 당론이 결국은 반드시 나라를 망하게 한다고 애통하게 말씀하시어 백관과 군민(軍民)으로 하여금 명확하고 상세히 듣게 하시었다면, 어찌 환하게 밝으며 깨끗하고 시원하게 되어 비록 평소에 파당적인 인습에 고질이 된 사람이라도 역시 어찌 마음을 뜯어고쳐 융합 동화되지 않겠습니까? 이렇게 하지 아니하시고 도리어 한편으로는 각선(却膳)하시고 한편으로는 선온(宣醞)하시니, 존엄을 깎아내리는 거조가 하당(下堂)378)  보다 심하며 유감을 풀라는 하교(下敎)가 애걸에 가깝습니다. 전하께서 약하게 보이어 업신여김을 당하시는 것이 진실로 적지 아니하니, 한편에서 자신의 견해만을 애써 지키며 변화를 알려고 생각지 않는 것 또한 무엇이 괴이합니까? 이러한 방책으로 한다면 전하께서 비록 날마다 각선하시고 날마다 술을 내리신다 하더라도 당파를 제거하는 데 실상 보탬이 되지 않을 뿐 아니라 한갓 전하의 위엄만 스스로 손상될 뿐이니, 신은 실로 개탄스럽습니다. 전하께서 지금 만약 더욱 확고한 마음을 가다듬으신다면, 지난날과 같이 모호한 미봉책을 쓰지 마시며, 지난날과 같이 중단하고 취소하지 마시고 옳고 그름을 분명하게 드러내어 뭇신하로 하여금 모두 믿고 복종하는 것을 알게 하시며, 기강을 엄격하게 세워 세상 사람으로 하여금 모두 두려워하고 권면하도록 하소서. 말을 하는 데에는 간략하고 신중히 하도록 힘쓰시고 일을 처리하는 데에는 반드시 공평을 근본으로 하시어, 나의 속마음을 사람들이 엿보지 못하게 하며 나의 거조를 세상에서 감히 헐뜯지 못하도록 하셔야 합니다. 그러한 뒤에 뭇신하 중에 감히 미련스럽게 뉘우치지 않고 파당적인 인습을 다시 싹틔우는 자가 있다면, 벌을 주어도 옳으며 죽여도 옳습니다. 이것은 이른바 한 사람을 벌주어 천하에 위엄을 보이는 것이니, 구구하게 음식을 절제하고 자질구레하게 술잔이 오고갈 필요가 없이 저절로 믿는 마음이 생기고 저절로 힘쓰고 닦이어 탕평의 기쁨에 이를 것이니, 오늘날 재액을 그치게 하는 방책도 여기에서 벗어나지 않을 따름입니다.
지난번 윤급(尹汲)과 한익모(韓翼謨)가 서명(胥命)하지 않은 것이 어찌 죄가 없겠습니까마는, 액례(掖隷)를 몰래 보내어 간악한 일을 적발하는 것같이 한 데 이르러서는 그것이 체면을 먼저 손상했다는 것을 스스로 깨닫지 못하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역적을 다스리는 죄로써 다스리기까지 하였으니, 이것은 전하께서 형정(刑政)을 조심하고 삼가시지 못한 것입니다. 만약 혹시라도 달리 지극히 미워하는 바가 있어서 이 일을 빙자해 죄를 주었다면 이는 전하께서 양심을 속이고 신하를 속이는 것이니, 대성인(大聖人)의 공정한 마음으로 사물을 처리하는 도리가 어찌 이와 같단 말입니까? 비록 그들에게 죄가 있다 하더라도 석달 동안 귀양보냈으면 징계와 면려에 족한 것이니, 죄를 용서하여 방환(放還)하시는 명을 빨리 내려 주시기 바랍니다. 조태언(趙泰彦)의 죄는 진실로 성상께서 하교하신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어찌 극형에 이르기까지 하며 섬에 안치하기에까지 이르겠습니까? 두루 생각건대, 우리 조종(祖宗)께서는 인후(仁厚)로 나라를 세우시어 직위가 삼사(三司)에 이른 자에게는 일찍이 함부로 형벌을 내린 적이 없었는데, 지금 전하께서는 조그마한 과실이나 뜻을 어기는 일만 있어도 번번이 형구를 가지고 종사하려고 하십니다. 이는 영원토록 무궁한 폐단을 전하께서 몸소 여시는 것이니, 전하를 섬기는 삼사의 신하들이 장차 어떻게 그 손발을 움직이겠습니까? 엎드려 원하건대, 전하께서는 두 번 세 번 다시 생각하시어 처결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힘써 진달한 말들은 모두 옳다. 어찌 지난 일이라고 하여 깊이 반성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아! 당습의 근원을 깊이 개탄하면서 애초 선정신(先正臣)을 들추어 업신여긴 적이 없었으니 역시 잘못 들은 것이 아닌가? 윤급과 한익모의 일은 비록 무상(無狀)한 바가 있으나 아뢴 말도 옳으니, 두루 물어 처결하는 것이 마땅하다. 조태언의 일은 경솔하게 논의할 수 없다."
하였다.

 

소대(召對)를 행하였다.

 

10월 15일 기해

달이 필성(畢星)으로 들어갔다.

 

야대(夜對)를 행하였다.

 

10월 16일 경자

소대(召對)를 행하였다.

 

석강(夕講)을 행하였다.

 

10월 17일 신축

임금이 조강(朝講)을 행하고, 또 대신(大臣)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우의정 송인명(宋寅明)이 아뢰기를,
"옛날 성탕(成湯)은 삼면을 풀어 은혜가 금수에게까지 미치게 하였는데379)  , 우리 나라는 형벌이 너무 무겁습니다. 김성탁(金聖鐸)·조태언(趙泰彦) 같은 경우는 비록 당파에 치우친 주장이었다고는 하지만 본래 사건이 그리 크지 않았는데도 절도(絶島)에 안치(安置)하기에 이르렀고, 이병상(李秉常)도 사소한 일로 멀리 귀양갔으며, 어승마(御乘馬) 사건도 대각(臺閣)에서 소문만 듣고 하리(下吏)에게 형(刑)을 내린 것이 이미 세 차례입니다. 명목은 비록 사실을 자세히 조사하여 밝힌다고 하지만 여러 번 형을 내려도 복죄(伏罪)하지 않는 것은 그럴 듯한 말로써 속일 수도 있는 것이니, 어찌 그가 죽을 때까지 심문할 수 있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이석표(李錫杓)의 상소에 비답하면서 ‘신하들에게 두루 물어 처리하겠다’는 말이 있었으나, 윤급(尹汲)과 한익모(韓翼謨)는 극히 잘못한 일이다. 당시 서명(胥命)한 여러 신하들이 모두가 지난날 일을 맡은 사람들인 까닭에 중도에 벗어나는 거조가 있을까 염려하여 다른 사람들로 하여금 보게 한 것은 역시 나의 너무 인약(仁弱)한 마음의 소치이며 은밀히 엿보아 살핀 거조는 아니었다. 국청(鞫廳)을 설치하기에 이른 것은 당초 형벌을 더 주려고 한 것이 아니고, 단지 위사(衛士)를 보고자 전문(殿門)에 몸소 나갔을 뿐이다. 그러나 그 당시의 일은 이미 혼돈 개벽(混沌開闢)의 유시에 언급하였다. 이병상에 이르러서는 우리의 정사(政事)를 어지럽게 하였고, 조태언의 일은 혼돈 개벽의 유시 이후에 있었으니 모두 용서하기 어렵다."
하니, 송인명이 아뢰기를,
"듣건대, 조태언의 어미의 나이가 일흔이 넘었다고 하니, 효도를 치국(治國)의 근본으로 삼는 정치에서는 깊이 생각하셔야 합니다."
하였고, 영의정 이광좌(李光佐)가 아뢰기를,
"8월 이후의 형정(刑政)은 중도에 벗어난 것이 많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윤급과 한익모는 위리(圍籬)를 거두어 형벌을 감해 주는 것이 옳겠다."
하니, 이광좌가 아뢰기를,
"성상께서 이미 그들의 벌이 과하다는 것을 아셨으니, 바로 풀어 주시는 것이 옳습니다."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임금이 말하기를,
"홍성제(洪聖濟)의 상소는 시관(試官)을 비방하는 것이어서 특명으로 섬으로 유배하였으나, 이것 역시 혼돈 때의 일이다. 같은 일로 귀양간 사람들은 함께 풀어 주어라."
하였다.

 

김취로(金取魯)를 무주(茂朱)로 귀양보냈다. 임금이 대신(大臣)에게 말하기를,
"김취로의 사건은 서리(胥吏)의 공술이 어승마(御乘馬)가 아니었다고 하나, 그때는 말을 빌어 곧장 가는 것이 옳았다. 어찌 첩마(帖馬)를 받을 때였던가? 그가 삼가고 조심하지 못했음을 알 수 있다."
하니, 이광좌(李光佐)가 아뢰기를,
"신하로서의 정당한 도리는 엄정(嚴程)을 당하여서는 곧장 떠나야 당연한데도 그 사람은 태복시(太僕寺)의 말을 요구하여 왕명(王命)을 받든 사자(使者)로 하여금 먼저 강을 건너가게 하였으니, 죄를 가볍게 정할 수가 없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이 사람이 무신년380)   이후 먼저 벼슬길에 나서서 저곳에서 욕을 먹고 이곳에서 멸시를 당하여 헐뜯는 말이 떠돈다는 것은 이우하(李宇夏)가 조작한 말이 아니다. 이미 언행을 조심하고 삼가지 않은 것은 기강에 관계되니, 전(前) 예조 판서 김취로는 무주(茂朱)로 특별히 귀양보내고 태복시(太僕寺)의 서리는 멀리 유배하며 사복시 첨정(司僕寺僉正)과 압거 도사(押去都事)는 모두 관작을 삭탈하라."
하였다.

 

10월 18일 임인

주강을 행하였다. 대신(大臣)과 의논하여 진강(進講)할 책을 정하였다. 주강에서는 먼저 《춘추집전(春秋集傳)》을 진강하고 이어서 《심경(心經)》과 《근사록(近思錄)》을 진강하며 소대(召對)에서는 먼저 《대학연의보(大學衍義補)》를, 이어서 《주자어류(朱子語類)》를 진강하기로 하였다.

 

10월 18일 임인

권집(權䌖)을 종성(鐘城)으로 귀양보냈다. 권집이 지평(持平)으로서 상소하기를,
"오직 우리 전하께서 당론은 반드시 끝내 나라를 망치게 한다는 것을 깊이 아시고 10년 동안 한결같은 마음으로 정도(正道)와 권도(權道)를 잘 조화하셨으나, 조정은 날이 갈수록 분열되고 세도(世道)는 날이 갈수록 퇴패해지고 있으니, 이는 유독 무슨 까닭입니까? 오로지 전하께서 신임하는 사람은 주로 전하의 주장이 옳다고 하는 대신들이니, 그 사람됨이 남을 시기하여 해치는 등 거짓되고 바르지 못합니다. 그들의 술수를 살펴보건대, 오로지 경알(傾軋)하여 전횡을 일삼아 어떤 사람의 지위와 명망이 자기보다 조금만 앞서면 반드시 모함하여 죄에 빠뜨려 그 지위를 빼앗습니다. 대저 치밀하고 삼가는 봉조하(奉朝賀) 이태좌(李台佐)와 충직하고 신념에 찬 고(故) 상신(相臣) 오명항(吳命恒)과 청렴 개결(淸廉介潔)한 윤순(尹淳)과 조심성 있는 김동필(金東弼) 등이 어찌 모두 시사로움을 좇아 공(公)을 돌보지 않고 전하를 속여 저버린 사람들이겠습니까? 한 가지 마음에 맞지 않은 것이 있으면 문득 기관을 설치하고 재빨리 농간을 부려 은밀히 사주하고 청탁하여 반드시 전형(銓衡)하는 자리에서 내쫓기게 하니, 세상 사람들이 모두 두려워하여 바로 보지 못하고 기가 죽어 감히 소리를 내지 못합니다. 정부에 대해 말한다면 충직 순실한 고(故) 상신(相臣) 심수현(沈壽賢)과 순수 담백한 판중 추부사(判中樞府事) 서명균(徐命均) 등은 모두 전하께서 의지하고 믿는 사람들인데, 역시 모두 자기와 뜻이 다른 사람에게 손짓으로 은밀히 부추기는 행위를 범하지 않았는데도 차례로 쫓아냈습니다. 그것이 연석(筵席)에서 나타난 것은 근년에 이양신(李亮臣)이 허구 날조(虛構捏造)한 것을 오늘날의 원보(元輔)381)  가 송인명(宋寅明)에게서 들었다고 증언을 하였으니, 이러한 수법을 오늘날 다시 구사하여 홀로 대신(大臣)의 자리를 차지하려는 계책이 아니라는 것을 어찌 알겠습니까? 전하께서는 뛰어나신 총명으로 임하시어 뭇신하의 진실과 거짓을 미세한 것도 밝게 헤아리지 않은 것이 없으신데도 유독 이 사람의 마음 씀씀이에 대해서만은 아직도 다 헤아리지 못하고 계신 것은, 대개 그가 마치 성을 쌓듯이 자기의 속마음을 터놓지 않으면서도 말은 썩 잘하여 막힘이 없고 심중(心中)에는 거짓을 숨겨 두고 겉으로는 대범 소탈하게 보이어, 어떤 경우는 과거의 은미한 말로써 성상의 뜻을 추측하여 헤아리며 어떤 경우는 느닷없이 근거없는 말로써 사람을 함정에 몰아넣으니, 세상이 온통 그의 속박과 휘두르는 채찍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근년에 전조(銓曹)의 낭관(郞官)의 오통(五通)만 해도 그의 의중(意中)은 당파를 심으려는 데 있었으면서 감히 임금의 뜻을 거스르며 힘써 간(諫)하며 다툰 것이라고 말하며, 작년에 네 사람의 판서(判書)가 연이어 차례로 삭직(削職) 또는 파직(罷職)된 것도 그 계략이 전조의 실권을 당종(堂從)382)  에 세우려는 데 있었으면서도 이를 감히 법령을 밝히고 기강을 존중하기 위한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전조에 재직하던 날에는 먼 인척까지 모두 사적(仕籍)에 올랐으니, 계모(繼母)의 제부(弟夫), 중모(仲母)의 오라비, 종고모부(從姑母夫) 등이 모두 감역(監役)에 임명되었고, 심지어는 그 집 이례(吏隷)의 아들 역시 참봉(參奉)이 되었습니다. 무신(武臣)으로서 좌윤(左尹)·우윤(右尹)이 되는 것은 실제로 장임(將任)을 지낸 사람으로 지위와 명망이 두드러진 사람이 아니면 의망(擬望)에 통할 수 없는 것인데, 정수송(鄭壽松)은 그의 매부(妹夫)의 아비인 까닭으로 거리낌 없이 의망에 올려놓았는데도 사람들이 감히 누구냐고 물을 수도 없었습니다. 그리고 그가 항상 말하기를, ‘말세(末世)의 임금은 권모 술수로 섬겨야 한다. 내가 탕평(蕩平)을 어찌 즐겨 하겠는가?’라고 하였으니, 이는 바로 정미년383)   초에 실록청(實錄廳)의 공석에서 한 말입니다. 이익을 좋아하는 무리들이 기회를 타고 붙좇아 당파가 날로 번성하니, 아! 지난날 노론(老論)·소론(少論)·남인(南人)·북인(北人)의 당쟁에서도 나라가 오히려 지탱하기 어려웠는데 오늘날 또 하나의 당파가 생겨났고, 게다가 권력을 탐내고 세도를 즐겨하는 자들이 목대잡고 있으니, 그 무리들이 끼칠 해가 어느 곳에 가서야 그치겠습니까? 그들이 말하는 이른바 원만하게 조제(調劑)한다는 것도 자기와 약간 다른 사람을 서로 엇갈리게 섞어 놓아 외양만 꾸며 전하의 시선을 즐겁도록 하는 것에 지나지 않으며, 사소한 이해 관계가 생기게 되면 역시 그 정체를 모두 드러내는 것을 면하지 못합니다. 조상경(趙尙絅)·김취로(金取魯)·이유(李瑜)가 전석(銓席)에 편안하게 앉아 있을 수 없었던 것 역시 송인명(宋寅明)의 배포(排布)하고 경탈(傾奪)함에 연유한 것입니다. 전하께서 신임하는 자가 이와 같은데 황극 건중(皇極建中)으로써 독책(督責)하려 하시니, 어찌 남의 웃음거리가 되지 않겠습니까? 지난날 대사헌(大司憲)의 논란과 오늘날 유신(儒臣)의 상소에 나열한 정상은 사람으로 하여금 대신해 부끄럽게 하고 있는데도, 전에 이미 자처(自處)할 것을 생각하지 않더니 지금은 또 태연하게 움직이지도 않으니, 어쩌면 그가 이렇게도 거리낌이 없습니까? 신은 생각하건대, 우의정 송인명을 빨리 예우(禮遇)하여 사퇴하게 하여 국사(國事)를 거듭 그르치고 세도(世道)를 심하게 해치지 말도록 하는 것이 타당할 것입니다.
고(故) 군수(郡守) 이정필(李廷弼)은 공(功)은 있어도 죄는 없다는 것이 그 당시의 문안(文案)에 환히 드러나서 한 번만 읽어 보면 파악할 수 있는데도, 여러 해를 봉해 두고 한 사람도 결백함을 밝혀 주는 사람이 없어서 이정필은 결국 원한을 안고 죽었다고 들었습니다. ‘막부(幕府)에서 세 사람의 귀를 베어 오긴 쉬워도 금오(金吾)384)  에서 한 번 봉해 놓은 것을 열기는 어렵다’라는 구절이 학사(學士)의 만사(挽辭)에 나와 세상 사람들이 모두 외어 전하면서 슬퍼하였습니다. 신은 생각건대, 한 번 조사해 바로잡아 지하의 원혼을 위로하는 것은 결단코 그만두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정언섭(鄭彦燮)이 지난날 자신을 변명한 상소는 역시 그의 사람됨을 은폐하기에 충분하며, 같은 때의 고시관(考試官)이 이미 모두 죄를 입었는데 설사 견해가 다른 바를 제기한다고 하더라도 황급하게 소장(疏章)을 올려 기를 쓰고 자신을 해명할 것이니, 중신(重臣)의 상소를 살펴보더라도 또한 정언섭이 속이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신이 생각건대, 그를 청요직(淸要職)의 의망(擬望)에서 뽑아내어야 합니다."
하니, 임금이 그의 상소문을 돌려주고 권집(權䌖)의 입시(入侍)를 명하였다. 임금이 묻기를,
"너의 상소문 한 편에서 정신을 쏟는 것은 오로지 우의정에게 있는데, 공정한 마음에서 나온 것이냐, 아니면 사사로운 마음에서 나온 것이냐?"
하니, 권집이 아뢰기를,
"신에게는 조금도 사사로운 감정이 없습니다. 과거 실록청(實錄廳)의 낭청(郞廳)으로 있을 때 우의정과 한자리에 앉으면 말끝마다 권모 술수로 임금을 섬겨야 한다고 말하므로, 신은 그 뒤부터 왕래를 끊고 마음으로 분개하였더니, 지금 하늘의 재앙으로 인하여 감히 성상의 뜻을 받들어 아뢰는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그 말을 네가 과연 직접 들었는가?"
하니, 권집이 아뢰기를,
"그렇습니다."
하므로, 임금이 말하기를,
"그 뒤에 너는 여러 차례 간관(諫官)이 되었었는데, 이제야 그런 말을 하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하니, 권집이 아뢰기를,
"늙은 조모가 있고 아버지가 만류했기 때문에 이제야 비로소 아뢰는 것입니다. 저 대신(大臣)이 10년 동안 국사(國事)를 맡아 보았지만 조금도 보탬이 된 것이 없고, 재변만 연달아 일어난 것은 여기에 연유된 것이 아닌지 어떻게 알겠습니까?"
하자, 임금이 말하기를,
"너 같은 무리가 있는 까닭에 효과가 없는 것이다. 내가 일찍이 우의정에게 묻기를, ‘권집과 권일형(權一衡)은 근래 왜 검의(檢擬)하지 않는가?’ 하고 물으니, 대답하기를, ‘이는 전조(銓曹)가 완급(緩急)을 헤아려 할 일입니다.’라고 하기에 더 물을 필요가 없었다. 뒤에 권일형을 물으니 권익관(權益寬)의 조카라는 이유로 저지당했다고 하고, 너 또한 대신에게 저지당하였으니 네가 이런 일을 한 것은 반드시 원망을 품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하니, 권집이 아뢰기를,
"신은 일찍이 우의정에게 저지당해 본 적이 없고 여러 차례 그의 손에서 대각(臺閣)의 의망(擬望)에 올랐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이 일이 일어난 것은 누가 앞서지도 처지지도 않았으니, 어제 우의정의 심복이 먼저 궤멸했다는 소리를 과연 너에게서 증험하겠다."
하고, 잇달아 체차(遞差)를 명하였다. 권집이 물러가자, 이조 판서 조현명(趙顯命)이 아뢰기를,
"신과 우의정은 어릴 적부터 서로 친하여 그의 마음을 알고 있으니 소위 살아서는 뜻을 같이하고 죽은 뒤에는 이름을 함께 전하는 사이입니다. 그 사람은 분명히 사람들 앞에서 그런 말을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권집(權䌖)이 직접 들었다는 말은 참으로 간사하고 악독합니다."
하고, 병조 판서 박문수(朴文秀)가 아뢰기를,
"그 상소문은 협잡한 것 같은데, 저 혼자 그 일을 한 것은 분명합니다. 신들이 동요하지 않고 성상께서 또한 동요하지 않으신다면, 다른 무슨 염려가 있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영성(靈城)385)  의 말을 들으니, 나의 마음이 약간 가라앉는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내가 동궁(東宮)에 있었을 때 우의정은 참하(參下)386)  에 있었으므로 그의 사람됨을 잘 알고 장단점도 깊이 살펴보았는데, 권력을 탐내거나 함부로 독단(獨斷)하는 것에는 조금도 근사하지 않으며, 권모 술수로 임금을 섬긴다는 것은 결코 그의 마음이 아닐 것이다. 10년 동안 시끄럽고 경박한 세상에 처하여 많은 사람의 질시를 무릅쓰고 잘 조화 대처하여 왔으니, 아! 그의 먹은 마음은 천지 신명에게 물어 볼 수 있다. 더욱이 혼돈 개벽(混沌開闢)의 유시(諭示)가 있은 후에 저 권집(權䌖)이란 자는 종이 가득히 장황한 말로 몇 길 구덩이에 빠뜨리려 하니, 그가 비록 보호하는 것처럼 하여도 의중(意中)은 모조리 다치게 하려는 데 있고 교묘히 하려고 하여도 수단이 모두 드러나고 말았으니, 아! 귀역(鬼蜮)이 된 무리를 어찌 오늘날 내가 새로이 펼치는 첫 정사(政事)에 보리라고 뜻하였겠는가? 아! 우의정은 곧 이름을 아끼는 한 선비인데 ‘권수(權數)’ 두 글자를 결코 마음속에 걸어두지 않았을 것이며, 설혹 그런 마음이 있다 하더라도 어찌 말로 표현하여 많은 사람이 있는 가운데에서 이야기할 수 있겠는가? 이것은 오척 동자라도 할 수 없는 노릇이다. 전석(前席)의 가까이에서 누구를 속이려 하는가? 《주역(周易)》에 이르지 않았던가? ‘나라를 세우고 집을 잇는 데는 소인을 등용하지 말라.[開國承家 小人勿用]’ 하였고, 전(傳)에 이른바 ‘내쫓은 자와는 국사를 함께 하지 말라.’ 하였으니, 이 사람을 빼고 다시 누가 있겠는가? 권집을 변방(邊方) 종성(鍾城)에 내쫓아 소인을 멀리하고 참소를 제거하는 뜻을 보이도록 하라."
하였다. 송인명(宋寅明)이 상소하여 변명하기를,
"사람들이 신의 죄를 성토한 것이 모두 형체와 그림자가 없어 붙잡을 수 없으나, 이러한 원한과 독을 품은 일들을 초래한 것은 신의 자업 자득(自業自得)이 아닌 것이 없으므로 빨리 도성(都城) 문 밖으로 달려나가 숨어 엎드려 홀로 조용히 있으려 하였는데, 삼가 승지(承旨)의 입을 통하여 선포하신 하교(下敎)에 감격하여 잠시 머물러 있사오니, 바라건대, 신의 죄를 단정하시어 사람들의 말에 보답하게 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경의 이해할 수 없는 것이 세 가지 있으니, 첫째는 참소가 나오는 문을 틀어막는 것이요, 둘째는 소인을 판별하는 것이요, 셋째는 기강이 해이해진 것이다. 안심하고 사양하지 말고 즉시 함께 들어오라."
하였다.

 

이진순(李眞淳)을 도승지(都承旨)로, 송진명(宋眞明)을 예조 판서로, 윤양래(尹陽來)를 형조 판서로, 홍경보(洪景輔)를 형조 참판으로, 조상명(趙尙命)을 사간으로, 조영국(趙榮國)을 헌납으로, 남태량(南泰良)·박필재(朴弼載)를 장령으로, 김광세(金光世)·김한철(金漢喆)을 정언으로, 황재(黃梓)를 응교(應敎)로, 김상중(金尙重)을 교리(校理)로 삼았다.

 

10월 19일 계묘

소대(召對)를 행하여 《대학연의보(大學衍義補)》를 강(講)하였고, 석강(夕講)을 행하여 《춘추집전(春秋集傳)》을 강하였다.

 

10월 20일 갑진

임금이 대신(大臣)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영의정 이광좌(李光佐)가 아뢰기를,
"봉상시(奉常寺) 제향(祭享)의 제수(祭需)로 1년간 지출하는 비용이 매우 넉넉하지 못하니, 청컨대 술 빚을 쌀 35석과 밀 7석, 유과(油果) 만드는 데 쓰이는 기름과 꿀을 한 위(位)든 두 위든 가리지 말고 각각 1되씩 더 주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이광좌가 연이어 아뢰기를,
"봉상시 첨정(奉常寺僉正) 신유한(申維翰)은 직임을 잘 감당하고 있으니, 구임(久任)하는 게 옳습니다."
하니, 옳게 여겼다. 공조 참판 이종성(李宗城)이 제향(祭享)할 때의 관복은 정성껏 만들고 깨끗하게 하도록 청하니, 임금이 호조 판서와 제용감 제조(濟用監提調)로 하여금 가서 살펴보도록 하되 한결같이 친제(親祭)할 때의 제관(祭官) 수에 의거하여 헌관(獻官)과 당상관(堂上官)·당하관(堂下官)·전외 집사(殿外執事)의 4등급으로 나누어 정성껏 만들어 4개의 궤에 나누어 보관하였다가 때가 되기 전에 점검하고 살펴 깁고 세탁하여 제향에 쓰도록 하라고 하였다. 이광좌가 또 아뢰기를,
"호서(湖西)의 다섯 고을과 호남(湖南)의 열 고을이 재해를 입은 것이 가장 심하여 비록 겨울이라도 반드시 위급한 백성이 있을 것이니, 청컨대 관찰사(觀察使)에게 유시(諭示)하시어 새해의 조곡(糶穀)을 나누어 주기 전에 형편에 맞게 구제하라는 영을 내리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10월 21일 을사

달이 헌원 우각성(軒轅右角星)을 범했다.

 

임금이 주강(晝講)을 행하였다. 지경연사(知經筵事) 윤순(尹淳)이 아뢰기를,
"이세필(李世弼)이 편집한 《악원고사(樂院故事)》를 지난번에 가져다 올리라는 하교(下敎)가 있었는데, 중간에 틀린 글자가 많아 지금 한창 고치고 있습니다. 대개 태묘(太廟)의 악장(樂章)의 순서에는 이해하지 못하는 데가 많습니다. 우리 세조(世祖)께서 옛 법도를 다시 회복하시고자 세실(世室)에 각각 악장을 사용하였던 까닭에 사조(四祖)387)   및 태조(太祖)·태종(太宗)·세종(世宗)의 세실에는 모두 악장이 있으나 문종(文宗) 이후는 종묘(宗廟)의 악장이 갖추어지지 않았는데, 유독 선조(宣祖)의 세실만은 있었습니다. 삼가 듣자오니, 문소전(文昭殿)388)  이 폐쇄되기 전에는 각전(各殿)마다 각기 악장이 있었는데, 임진 왜란때 잃어버렸다고 합니다. 사조(四祖)를 조천(祧遷)한 후에 악장은 전전(前殿)에만 사용했던 까닭에 차례로 내려오면서 당실(當室)에는 사용할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현종(顯宗) 이후의 여러 세실에 다시 사조의 악장을 사용하고 있으니 예절이 매우 어긋나고 전도(顚倒)되었으므로, 누대에 걸쳐 조정에서 이정귀(李廷龜)·황정욱(黃廷彧)·오윤겸(吳允謙)·송준길(宋浚吉)·이봉징(李鳳徵)이 고치기를 청하였으나, 그 일이 중대하여 아직도 겨를을 얻지 못하였습니다. 이세필이 말하기를, ‘비록 갑자기 고치기는 어려우나 그 가운데서 차츰차츰 차례를 정하는 것이 좋겠다.’라고 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책자를 올리는 것을 기다려 읽어 본 후에 다시 논의하겠다."
하였다.

 

10월 22일 병오

주강(晝講)과 석강(夕講)을 행하였다.

 

제도(諸道)에 신칙(申飭)하여 혼인(婚姻)할 시기를 놓친 자들을 관찰사(觀察使)가 돌보아 주도록 하니, 참찬관(參贊官) 이일제(李日躋)의 말을 따른 것이었다.

 

10월 23일 정미

한덕후(韓德厚)·조상명(趙尙命)을 승지로, 김유경(金有慶)을 이조 참판으로, 정석오(鄭錫五)를 한성 우윤(漢城右尹)으로, 황재(黃梓)를 집의로, 황상로(黃尙老)를 지평으로, 이명곤(李命坤)을 정언으로, 윤심형(尹心衡)을 동래 부사(東萊府使)로 삼았다.

 

임금이 소대(召對)를 행하였다. 날씨가 춥다 하여 승지(承旨)에게 명하여 급히 달려가 죄가 가벼운 죄수는 석방하게 하고, 이후부터는 혹한이나 혹서에는 수도안(囚徒案)을 살펴 계문(啓聞)하도록 하였다.

 

10월 24일 무신

동방에 불빛 같은 기운이 있었고, 달이 태미 동원(太微東垣) 안으로 들어갔다.

 

우의정 송인명(宋寅明)이 상소하여 아뢰고 도성(都城)을 나가니, 임금이 승지를 보내어 함께 돌아오도록 하였다.

 

임금이 대신(大臣)과 비국 당상(備局堂上)을 인견하였다. 영의정 이광좌(李光佐)가 아뢰기를,
"좌의정은 이미 숙배(肅拜)하고는 도로 들어가고 우의정이 또 도성을 나서려 하니, 국사(國事)가 참으로 아득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주역(周易)》에 ‘소인은 등용하지 말라.’ 하였는데, 권집(權䌖)을 지금 이미 내보냈다. 내가 어떻게 미리 알 수 있었겠는가? 성인이라면 반드시 다른 방법이 있었을 것이다."
하였다. 이광좌가 아뢰기를,
"시험해 써 보기도 전에 어떻게 미리 헤아려 등용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하였는데, 임금이 말하기를,
"사실 그렇다. 만일 그렇게 한다면 그 역시 도리어 폐단이 있을 것이다."
하니, 이광좌가 아뢰기를,
"며칠 전 새벽에 일어나 동쪽을 보니 불꽃 같은 붉은 빛이 있었는데, 그것은 적기(赤氣)였습니다. 올해도 재변이 이처럼 거듭되고 있으니 수성(修省)하는 방법으로는 덕(德)을 닦는 것이 최선이고 인재를 등용하는 것은 차선이니, 청컨대 조정의 신하로 하여금 각각 몇 사람씩 천거하도록 하소서."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시임(時任) 대신과 원임(原任) 대신은 각각 세 사람씩 천거하고, 정부(政府)의 서벽(西壁)389)  과 육조(六曹), 비국 당상, 삼사(三司)390)  의 장관(長官), 양국(兩局)391)  의 대장(大將), 팔도(八道)의 감사(監司), 양도(兩都)392)  의 유수(留守)는 각각 두 사람씩 천거하도록 하라."
하였다. 비국 당상 이종성(李宗城)이 아뢰기를,
"단양 군수(丹陽郡守) 유수원(柳壽垣)이 귀는 비록 먹었으나 문장을 잘합니다. 책을 한 권 지었는데, 나라를 위한 경륜을 논한 것입니다. 헛되이 늙는 것이 아깝습니다."
하였는데, 이광좌가 아뢰기를,
"신 역시 그 책을 보았는데, 책이름을 《우서(迂書)》라 합니다. 주장과 논변이 매우 이채롭습니다."
하니, 임금이 승정원(承政院)에 명하여 구해 올리게 하였다.

 

10월 26일 경술

신치근(申致謹)을 사간으로, 이창의(李昌誼)·남태제(南泰齊)를 정언으로, 이성중(李成中)을 지평으로, 조명리(趙明履)를 교리(校理)로, 조상경(趙尙絅)을 판돈녕부사(判敦寧府事)로 삼았다.

 

10월 27일 신해

임금이 사조(辭朝)하는 관찰사와 수령을 인견하였다. 공홍도 관찰사(公洪道觀察使) 이보혁(李普赫)이 기근을 구휼하는 방책을 진달하고, 이어서 아뢰기를,
"어제 청양(靑陽) 백성 수십 명이 현감(縣監) 정권(鄭權)에게 와서 호소하던 중 홍주 영장(洪州營將) 조태제(趙泰濟)와 더불어 한낱 하찮은 일로 서로 힐난하다가 그 고을 아전에게 곤장(棍杖)을 친 데 성을 내어 인끈을 던지기에 이르렀습니다. 재변이 든 해에 수령을 체파(遞罷)시키게 되면 이는 수령이 원하는 바를 바로 성취하는 것이니, 나문(拿問)하여 공술(供述)하는 것을 보아서 처리하는 것이 옳습니다."
하니, 그대로 따랐다.

 

10월 28일 임자

박사정(朴師正)을 승지로, 김한철(金漢喆)을 수찬(修撰)으로, 김광세(金光世)를 부수찬(副修撰)으로 삼았다.

 

임금이 대신(大臣)과 비국 당상을 인견(引見)하였다. 영의정 이광좌(李光佐)가 아뢰기를,
"함경도(咸鏡道)에 기근이 심하더니 헛소문 또한 많이 나와 사람들이 많이 남쪽으로 옮겨오고 있어 백성들에게 굳은 뜻이 없으니, 매우 근심스럽습니다. 먼저 인심을 수습해야 하니, 청컨대 양조(兩曹)393)  에 신칙하시어 문무의 선비를 골라 임용하소서."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르고, 이어서 명하기를,
"평안도(平安道) 사람 역시 재능에 따라 골라 임용토록 하라."
하였는데, 이광좌가 아뢰기를,
"인재를 천거하는 데 만약 제목(題目)이 없으면 실상 근거를 대기가 어려우니, 청컨대 경행(經行)과 재식(才識)과 담략(膽略) 세 가지를 제목으로 삼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그대로 윤허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유수원(柳壽垣)을 어디에 서용(敍用)하면 실효를 거두겠는가? 단양 군수(丹陽郡守)의 체직(遞職)을 허락하고 곧바로 비국(備局)의 문랑(文郞)394)  으로 차출하는 것이 어떻겠는가?"
하였는데, 이조 판서 조현명(趙顯命)이 아뢰기를,
"비국에는 상고할 만한 문헌이 없어서 일찍이 이희(李憙)를 시켜 이를 수집하게 하였는데, 이루지 못하고 죽었습니다. 지금 유수원에게 그 일을 이어받아 이루게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유수원의 체직을 명하고 비변사의 문랑으로 옮기게 하였다. 조현명이 아뢰기를,
"남한산성과 북한산성에 쌓아 둔 화살이 해가 오래 되어 모두 썩었습니다. 나이 많은 무사의 말을 들으니, 연매(煙煤)395)  가 있으면 화살이 쉽게 상한다고 합니다. 그런 까닭에 윤탁(尹鐸)396)  이 진양(晉陽)에 있을 때 구리로 기둥을 하고 갈대로 담장을 덮었다가 그들이 포위되자 구리로는 화살촉을 만들고 갈대로는 화살을 만들어 때에 임박하여 취하여 사용하니, 화살을 만들어서 미리 저장하는 것보다 나았다는 것입니다. 청컨대 신이 관장하고 있는 수어청(守禦廳)으로 하여금 해마다 받아들이는 쇠와 살대를 계산해 기록하여 저장하게 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좌의정 김재로(金在魯)의 정사(呈辭)가 이미 66차례에 이르렀으나 임금이 윤허하지 않았고, 이어서 사직(辭職)을 아뢰는 소를 올려도 윤허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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