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영조실록45권, 영조 13년 1737년 윤9월

싸라리리 2025. 9. 19. 10: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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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9월 1일 병진

임금이 상참(常參)을 행하였다. 형조 판서 김시형(金始炯)이 말하기를,
"주리(廚吏)를 엄중히 추문할 것을 이미 세 차례나 하였는데, 그의 초사(招辭)는 낭관(郞官)과 다름이 없고, 복리(僕吏)의 공사(供辭) 역시 그렇습니다. 말[馬]은 어승마(御乘馬)가 아닌 듯하며, 금오랑(金吾郞)이 강을 건넌 후 즉시 따라가지 않았다는 일은 나졸의 말이 대간(臺諫)의 말과 일치하니, 아래에 물어서 참작해 처리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참으로 대간의 말과 같다면 그 율(律)을 마땅히 어떻게 해야 하겠는가? 대신(臺臣)의 재소(再疏)에 이른바, ‘변마(邊馬) 역시 어승마이다.’라고 한 것이 괴이한데, 아전들이 중신(重臣)을 원망한 소치에 연유한 듯하지만는 또한 어찌 반드시 그런 일이 없었는지 알겠는가? 복리(僕吏)가 만약 실토하지 않는다면 어찌 지레 먼저 참작해 처리하겠는가?"
하니, 영의정 이광좌가 형조 판서의 조사를 행함이 분명치 않은 것으로써 종중 추고(從重推考)하기를 청하고 내일 다시 조사하기를 청하였다.

 

석강(夕講)을 행하였다.

 

윤9월 2일 정사

임금이 조강(朝講)을 행하였다, 영부사(領府事) 송인명(宋寅明)이 말하기를,
"고(故) 판서 이세화(李世華)는 바로 기사년329)  의 명신(名臣)인데 사손(嗣孫)이 무후(無後)하니, 청컨대 고(故) 상신(相臣) 남구만(南九萬) 집의 예에 의해 특별히 입후(立後)하기를 명하소서."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윤9월 3일 무오

박문수(朴文秀)를 도승지로, 정필녕(鄭必寧)을 승지로, 황재(黃梓)를 집의로, 홍봉조(洪鳳祚)·남태제(南泰齊)를 장령으로, 이창의(李昌誼)를 지평으로, 박필재(朴弼載)를 헌납으로, 윤득화(尹得和)를 황해도 관찰사로 삼았다.

 

주강(晝講)을 행하고, 또 석강(夕講)을 행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지금 세상에서는 사람 뽑는 것을 오로지 문벌(門閥)과 과거(科擧)로 하는데, 이렇게 하여 인재를 얻을 수 있겠는가? 조정 사이에 또한 반드시 쓸 만한 인재가 있을 것이나, 내가 이미 공묵(恭默)하게 도(道)를 생각하는 정성이 없어 축암(築巖)의 어진 보필330)  을 얻지 못했고, 또 명철한 지감(知鑑)이 부족하여 한(漢)나라 무제(武帝)가 금일제(金日磾)331)  를 알아보는 것에 미치지 못했으니, 스스로 반성함이 마땅하다. 임금을 섬기게 하는 것은 오로지 묘당에 달려 있으니, 힘쓰도록 하라."
하였다.

 

윤9월 4일 기미

박사수(朴師洙)를 대사헌으로, 임정(任珽)을 승지로, 김상로(金尙魯)를 사예(司藝)로 삼았다.

 

윤9월 5일 경신

천둥하고, 번개가 쳤다.

 

신치근(申致謹)을 사간으로, 이성중(李成中)·서명신(徐命臣)을 정언으로, 이종백(李宗白)을 대사간으로, 남태량(南泰良)을 헌납으로 삼았다.

 

전교하기를,
"아! 대인(大人)의 지위(地位)에 처하여 대인의 덕(德)이 없고 화육(化育)332)  하는 문(文)을 강론하나 화육하는 공로가 없으니, 스스로 부덕(否德)을 돌아보건대, 마음이 일찍부터 부끄러웠다. 그러나 인애(仁愛)한 하늘이 오히려 그 나라를 돌보아 주어 이번에 재이(災異)가 다시 우레가 소리를 거두는 달에 나타나 우르릉거리는 소리가 여름과 다름이 없으니, 밤새도록 두려워함이 마음에 갑절이나 간절하였다. 아! 혼돈(混沌)의 전에는 오히려 말할 수 있지만 개벽(開闢)한 후에 도리어 그만 못하니 이것이 누구의 잘못인가? 오직 나 자신에게 있다. 아! 구오(九五)의 자리에 있는 자가 과연 크고 장구하며 곧은[永貞]333)   덕(德)이 있었다면, 나라와 신하와 백성에게 덕을 입히지 못하고 기강(紀綱)이 서지 못하여 은혜가 미치지 못함이 이와 같겠는가? 오늘부터 10일 동안 감선(減膳)할 것이니, 아! 너희는 위로 대관(大官)에서부터 아래로는 초야(草野)에 이르기까지 잘못과 빠뜨린 것을 바로잡고 보좌해 부덕한 나를 돕도록 하라."
하였다. 이때 우레와 번개의 변이 달마다 생겨 한여름과 다름이 없었고, 별의 재변과 물건의 괴이함이 또 몹시 거듭되어 인심이 편안치 못하고, 삼남(三南) 지방에 큰 기근이 들었으니, 식자들이 깊이 근심하였다.

 

정원(政院)에서 아뢰어 기강(紀綱)을 세우고 언로(言路)를 넓히라고 진계(陳戒)하였고, 대신(大臣)과 삼사(三司)에서 모두 차자를 올려 진계(進戒)하니, 임금이 우악한 비답을 내렸다.

 

약방(藥房)에서 입진(入診)하였다. 부제조(副提調) 박문수(朴文秀)가 막 모상(母喪)을 벗었는데, 임금이 말하기를,
"급히 경을 보고자 하여 지신사(知申事)로 명하였다. 경에 대해 아는 자는 경이 나라를 위한다고 하고, 경에 대해 모르는 자는 경이 미쳤다고 하는데, 오랫동안 경의 광당(狂戇)한 말을 듣지 못하였다. 사람들은 비록 미쳤다고 말하나, 나는 실로 취택(取擇)한다."
하니, 박문수가 말하기를,
"신이 이미 나라에 몸을 바쳤는데, 만약 두려워서 말을 하지 않는다면 본심(本心)을 저버리는 것이며, 만약 본심을 저버리지 않는다면 반드시 사람들에게 미움을 받게 됩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3년 사이에 나라의 기상(氣象)이 지난날과 어떠한가?"
하니, 박문수가 말하기를,
"신이 상(喪)을 당한 후에 나라의 거조(擧措) 가운데 잘된 것도 있고 잘못된 것도 있으나 갑작스레 급히 대답하기가 어렵습니다. 지금 이후부터는 마땅히 일에 따라 다 말하겠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경은 자품(姿稟)이 매우 좋은데 모자란 것은 학문일 뿐이다. 나 역시 그런 병통이 있으니, 군신(君臣)이 서로 힘써야 한다."
하니, 박문수가 말하기를,
"신도 학문이 좋은 것임을 모르는 바 아니나, 만약 잘 배우지 못하면 도리어 부모가 주신 진성(眞性)을 잃게 됩니다. 지금의 학문은 한갓 문식(文飾)으로 돌아가고 있으니, 하지 않은 것만 못합니다. 오직 충성되고 간사함을 감별(鑑別)하고자 합니다."
하고, 임금이 말하기를,
"미움을 받는다는 말 역시 어찌 학문이 부족한 소치가 아니겠는가?"
하니, 박문수가 말하기를,
"비록 공성(孔聖)334)  으로 하여금 지금 세상에 살게 하더라도 미움받는 것을 면치 못할 것입니다."
하고, 인하여 말하기를,
"치도(治道)는 마땅히 대체(大體)를 총람(摠攬)해야 하는데, 한정이 있는 정신(精神)으로서 한정이 없는 일에 수응(酬應)해야 하니, 신은 그윽이 생각건대, 전하께서 견식(見識)을 허락하지 않는다고 여깁니다. 또 전하께서 신하를 부리는 도리를 얻지 못하셨습니다. 사람에게는 본디 영리하고 민첩함이 있어 일을 당하면 막힘없이 해결하기도 하지마는 혹 편녕(便佞)에 흐르기도 하는데, 만약 충후(忠厚)하고 돈박(敦樸)한 자가 그 마음이 일정하면 하늘을 관통할 수 있고, 땅도 꿰뚫어 볼 수 있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경의 말이 절실하다."
하였다. 박문수가 말하기를,
"신이 비록 학문은 없으나, 말한 것을 간책(簡冊)에 쓰더라도 옛사람에게 부끄러울 것이 없을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크게 웃으며 말하기를,
"경의 기질(氣質)은 옛사람과 우연히 일치된다."
하였다. 박문수가 말하기를,
"신은 춘방(春坊)에 있을 때부터 전하를 섬겼는데, 일찍이 일심으로 대조(大朝)335)  ·소조(小朝)336)  를 섬기는 말씀을 우러러 진달했었습니다. 신하가 임금을 섬기는데도 일심이 있을 뿐이니, 참으로 조금만 미진하더라도 충심(忠心)이 아닙니다. 신이 스스로를 칭찬하는 것 같지만 10년 사이에 일찍이 권귀(權貴)의 집 문앞에 가 본 적이 없기 때문에 벼슬이 조금도 오르지 않았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내가 이미 경을 알고 있는데, 경이 아니면 누구도 이런 말을 하지 못할 것이다."
하였다.

 

윤9월 6일 신유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임금이 양호(兩湖)337)   백성들의 역(役)을 견감하는 일로 신하에게 물으니, 조정의 의논이 일치되지 않았다. 이에 특지(特旨)로써 양호의 우심(尤甚)한 고을의 군포미(軍布米)를 전부 감하고, 기전(畿甸)의 가장 심한 네 고을 역시 비국에서 계품하여 양호 지방의 예에 의하여 시행하라고 명하였다. 임금이 또 말하기를,
"공물(貢物) 가운데 절약할 수 있는 것은 비국으로 하여금 예(例)를 상고하고 수량을 참작하여 품계하도록 하라."
하고, 또 말하기를,
"육진(六鎭)에 기근이 들었는데 종성(鐘城)의 토졸(土卒)이 굶주림을 견디다 못해 스스로 목을 찔러 죽은 일까지 있었으니, 내수사(內需司) 노비(奴婢)의 공미(貢米) 3백 석을 육진에 떼어 주어 진구(賑救)할 밑천을 삼게 하라."
하였다. 대사간(大司諫) 이종백(李宗白)이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고, 황해 수사(黃海水使) 이우(李玗), 감사(監司) 이성룡(李聖龍)의 일은 아뢴 대로 하라고 하였는데, 이성룡은 파직만 하고 나추(拿推)하지 말도록 명하였다.

 

윤9월 7일 임술

이종적(李宗迪)을 설서(說書)로 삼았다.

 

왕세자가 빈객(賓客)과 상견례를 행하였다.

 

헌부(憲府)에서  【지평(持平) 이창의(李昌誼)이다.】 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선조(先朝)의 구례(舊例)를 본받아 모든 궁위(宮闈)의 수리와 상방(尙方)의 제조(製造), 금액(禁掖)의 사여(賜與), 연경(燕京)의 물화(物貨)를 무역하는 등의 일을 일체 정파(停罷)하고 묘당(廟堂) 및 내외 유사(有司)의 신하에게 신칙하여 경비(經費) 이외에 공사(公私)의 쓸데없는 비용은 청(廳)을 설치해 바로잡고 개혁하여 하늘의 견고(譴告)에 답하소서. 지난번 권적(權𥛚)이 대신의 분부로 곡산(谷山)에 차출되어 부임하였으니, 본디 빛이 나는 일은 못되었으며, 저번 정사(政事)에서 조명겸(趙明謙)을 안악(安岳)에 제수할 때에 또한 상신(相臣)의 말에 힘입었으니, 모두 자중(自重)하지 못해 염의(廉義)에 관계됩니다, 청컨대 아울러 개차하소서.
한덕필(韓德弼)·민익수(閔翼洙)는 청렴하고 사물을 처리하는 데 재행(才行)이 있어 모두 칭찬하나 묘당(廟堂)에서 포장(褒奬)하여 천거(薦擧)함은 이미 너무 과중한 데에 관련되고 한덕필을 외읍(外邑)에서 체직하여 장악원 정(掌樂院正)으로 옮긴 것은 보고 듣기에 좋지 않으며, 유숙기(兪肅基)를 파격적으로 승서(陞叙)하라고 청한 것은 외람됨을 면치 못합니다. 청컨대 장악원 정 한덕필, 군자감 정(軍資監正) 민익수를 개정하고, 주부(主簿) 유숙기의 승륙(陞六)338)  을 중지하소서. 지난번 안세복(安世福)의 일이 터졌을 때 조관(朝官)과 유생(儒生) 5,6명이 이름을 나열하여 서명(署名)해 포청(捕廳)에 보냈으니 자취가 놀랍고 더러워 사람들 모두가 비웃었습니다. 청컨대 포청의 문안(文案) 가운데서 조관으로서 서명한 자를 조사해 내어 도태시키소서.
내수사(內需司)의 액관(掖官)이 추착(推捉)하고 독납(督納)하는 등의 일로 인해 법사(法司)와 외번(外藩)에 이첩한 자를 엄중히 신칙해 무겁게 다스릴 것이며, 대소 문첩(文牒)을 한결같이 구례에 따라 반드시 이조와 호조를 경유하게 하여 액례(掖隷) 등이 방자하게 하는 폐단을 막아야 합니다. 호위(扈衛) 3청(廳)은 정안(正案)의 원액(元額) 이외에 모속(冒屬)된 자 및 각 군문(軍門)의 칠색(七色) 표하(標下)339)  는 성년(成年)이 되기를 기다려 치부(置簿)하는데, 청컨대 빨리 묘당(廟堂)으로 하여금 적당히 헤아려 도태시켜야 합니다.
장주(章奏)하는 일은 사체(事體)가 자별한데, 지난번 어선(御膳)을 물리칠 때를 당해 강화 유수(江華留守) 조명익(趙明翼)의 상소 가운데 죽(粥)을 마시면서 석고 대죄(席藁待罪)했다는 등의 말은 매우 눈에 거슬립니다. 비록 자신이 그렇게 했더라도 어찌 반드시 상문(上聞)해야 하겠습니까? 조명익의 파직을 청합니다. 대정(大政)의 초사(初仕) 역시 대부분 외람되고 난잡하니, 경릉 참봉(敬陵參奉) 권확(權擴)과 선공감 감역(繕工監監役) 홍정도(洪正度)는 개차하고, 전조(銓曹) 당상은 추고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도태시키는 일과 전관(銓官)의 추고와 권확·홍정도의 일은 아뢴 대로 하라. 모속(冒屬)된 자를 도태시키는 일은 바야흐로 비국에서 거행하고 있고, 모든 영선(營繕)은 불가피한 것 외에는 왕년의 예에 의해 정지하라. 나라에는 응당 상(賞)을 주는 법이 있는데 어찌 혁파하겠는가만, 이런 흉년에는 마땅히 참작해야 한다. 연경(燕京) 물화에 대한 일은 한 말이 비록 옳지만 상방(尙方)은 사체가 다른 데 비해 자별하며 이미 초의(草衣)를 입지 않았으니 곤의(袞衣)는 어떻게 하겠는가? 내수사에서 관유(關由)340)  로 해당 조(曹)에 보고하지 않은 것은 이미 구례(舊例)가 있기는 하나, 마땅히 두 조를 경유해야 할 것은 구례에 의해 신칙하도록 하라."
하였는데, 한덕필 등의 일은 비답이 없었다. 후에 영의정 이광좌(李光佐)가 일찍이 천진(薦進)시킨 것으로써 차자를 올려 인피하니, 임금이 우악한 비답을 내렸다. 이창의(李昌誼)가 신진(新進) 대각(臺閣)으로 10여 가지의 일을 논하였는데 비록 득실(得失)을 꼬집어 논하지는 못했으나 온 세상이 입을 다물고 잠자코 있던 때에 또한 쉽지 않은 일이었으므로 사람들이 칭송하는 자가 많았다.

 

하교하기를,
"김성탁(金聖鐸)을 친히 문초하겠다는 명은 대개 의리를 엄히 하려는 것이었다. 그후 짐작해 처리한 것은 옛날 흠휼(欽恤)341)  하던 성대한 뜻을 본받은 것이었으며, 다시 신문(訊問)한 것은 그 일을 중히 여긴 뜻이었다. 여섯 차례 형신(刑訊)했으나 달리 어긋난 단서가 없으니, 전의 하교에 의해 섬에 위리 안치하도록 하라."
하였다.

 

정언 이성중(李成中)이 상소하여 말하기를,
"시험삼아 성상의 병통(病痛)에 대해 말하겠습니다. 규모(規模)가 넓지 못하고 도량(度量)도 넓지 못하여 사람을 임용하면서는 친한 사람을 먼저 하고 소원한 자는 나중에 하며, 말을 살핌은 가까운 데 빠지고 먼 곳의 것은 가리워집니다. 비록 재주와 어짊이 있는 신하라도 뽑아 쓰는 자는 정분(情分)이나 친면(親面)의 사이에서 벗어나지 못하며, 비록 충당(忠讜)한 말이 있더라도 아름답게 여겨 추장(推奬)한 자는 귀근(貴近)의 열(列)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약간 지위나 문벌이 있어 한번 명환(名宦)을 거치면 문학(文學)·정사(政事)에 어디든지 적의(適宜)하지 않은 곳이 없으며, 재주를 품고 있는 무리는 한결같이 박대하여 봉필(蓬蓽)342)  에서 늙어 죽습니다. 연교(筵敎)에서 자주 금일제(金日磾)의 일을 인용하시나, 사람을 임용하는 것이 참으로 한(漢)나라 무제(武帝)에게 부끄러움이 있습니다. 요직(要職)에 갑자기 탁용(擢用)하여 만약 척련(戚聯)과 관계가 있으면 상하가 모두 편벽되게 부호(扶護)하고, 헌장(憲長)이 응지 상소(應旨上疏)하여 묘당(廟堂)에 언급하면 문득 국수(鞫囚)를 영호(營護)한다는 죄과로 몰아붙입니다. 참으로 이런 투식(套式)을 따른다면 신은 오늘의 사륜(絲綸) 역시 허식에 그치고 말까 염려됩니다. 근일의 일로써 말하건대, 임하(林下)에 경술(經術)이 있는 선비가 어찌 그런 사람이 없겠습니까만, 단지 한두 음사(蔭仕)만을 천진(薦進)할 뿐이었으니, 신은 그윽이 대신(大臣)을 위해 겸연(歉然)하게 생각합니다. 일전의 헌소(憲疏)는 일이 국체(國體)에 관련되는데, 재상은 비록 마땅히 물어야 할 일이 있어도 대신이 국체에 관계된다고 말해 사실을 조사하기도 전에 대각(臺閣)을 지레 체직시킨 것은 유독 국체를 손상시킨 것이 아닙니까?"
하고, 인하여 논하기를,
"윤양래(尹陽來)·이수항(李壽恒)을 괴원(槐院)343)  의 제거(提擧)에 혼잡되게 차임하였고, 또 근일의 전랑(銓郞)이 한 번 도정(都政)을 거치면 곧 4품(品)에 오르는 것은 그릅니다."
하고, 또 청하기를,
"중종조[中廟朝]의 구례(舊例)에 의해 대조(大朝)의 개강(開講) 때에 동궁(東宮)이 시좌(侍坐)하여 이야기를 듣게 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조목으로 진달한 바가 체통을 얻었다고 할 만하다. 헌신(憲臣)의 일로써 대신(大臣)을 그르다고 공척함은 과중(過中)함이 없지 않으며, 괴원의 제거(提擧)에 대한 일도 역시 지나치다. 끝에 덧붙여 진달한 것은 참으로 옳으니 마땅히 유의하겠다."
하였다.

 

윤9월 9일 갑자

소대(召對)를 행하였다.

 

부수찬(副修撰) 윤광의(尹光毅)가 상소하여 실제의 도(道)로써 하늘의 견고(譴告)에 응하기를 조목으로 진달하니, 예사 비답을 내렸다.

 

윤9월 10일 을축

임금이 대신과 비국 당상(備局堂上)을 인견하였다. 지평(持平) 이창의(李昌誼)가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으며, 권적(權𥛚)·조명겸(趙明謙)을 개차하는 일은 아뢴 대로 하라고 하였고, 한덕필(韓德弼) 등의 일에 대해서 답하기를,
"사람을 쓰는 데 어찌 상례(常例)에 구애되겠는가?"
하였다. 정언 이성중(李成中)이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유만추(柳萬樞)가 부관(部官)에서 발신(發身)하였고, 이정욱(李廷郁)은 사람됨이 어리석은데 곧바로 지평(持平)·정언(正言)에 통하여 공의(公議)가 마땅하게 여기지 않으니, 청컨대 다시는 검의(檢擬)하지 마소서. 임경관(林鏡觀)·이의종(李義宗)·이선태(李善泰)를 대망(臺望)에 거듭 통할 때에 좌이(佐貳)와 낭관(郞官)이 없었고 모두 1망(望)으로 천거하여 마치 이기기를 다툰 것처럼 되었으니, 전관(銓官)을 엄중히 추고해야 합니다. 황처규(黃處奎)는 명가(名家)의 아들로서 몰래 다른 사람을 거느리고 함부로 과장(科場)에 들어갔다가 추조(秋曹)의 구핵(究覈)에 적발되었으니, 방(榜)에서 뽑아내고 영원히 정거(停擧)해야 합니다."
하니, 아뢴 대로 하라고 하였다.

 

윤9월 11일 병인

김시혁(金始㷜)을 대사간으로, 박필보(朴弼普)를 장령으로, 이기진(李箕鎭)을 예문관 제학으로, 오수채(吳遂采)를 교리로, 조명리(趙明履)·김상중(金尙重)을 부교리로, 김광세(金光世)·김한철(金漢喆)을 수찬으로, 오언주(吳彦胄)를 부응교로 삼았다.

 

윤9월 12일 정묘

소대(召對)를 행하였다.

 

윤9월 13일 무진

이일제(李日躋)를 승지로, 조영국(趙榮國)을 부수찬으로, 조명리(趙明履)를 부교리로, 정이검(鄭履儉)을 수찬으로, 김한철(金漢喆)을 교리로 삼았다.

 

임금이 조강(朝講)을 행하였다. 지평 이창의(李昌誼)가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고, 한덕필(韓德弼)·민익수(閔翼洙)·유숙기(兪肅基) 등의 일은 정지하였다. 정언 이성중(李成中)이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공조 좌랑(工曹佐郞) 이경(李坰)은 해서(海西)의 한미(寒微)한 집안이요, 재상(宰相)의 문객(門客)으로서 외람되이 사적(仕籍)에 올랐으니, 마땅히 도태시켜야 합니다."
하니, 아뢴 대로 하라고 하였다.

 

윤9월 14일 기사

조적명(趙迪命)을 승지(承旨)로 삼았다.

 

임금이 주강(晝講)을 행하였다. 지사(知事) 조현명(趙顯命)이 말하기를,
"천도(天道)는 현묘(玄妙)하고 심원하여 비록 무슨 일 때문에 재변을 부르는 단서가 되는지 모르나, 8월 이후로 형정(刑政)이 중도(中道)를 잃음이 많았으니 오늘의 재변이 혹 반드시 이에 말미암지 않은 것인지 어찌 알겠습니까?"
하고, 검토관(檢討官) 조영국(趙榮國)은 말하기를,
"김성탁(金聖鐸)을 죽기를 한하고 형신(刑訊)한 것은 끝내 지나친 일이었는데, 감히 한마디 말도 하지 못하였습니다, 윤급(尹汲) 등이 유독 서명(胥命)하지 않았으니, 유방(流放)함은 본디 애석할 것이 없으나, 국청(鞫廳)을 설치한 데 이른 것은 역시 지나쳤습니다. 안세복(安世福)은 한낱 천인(賤人)인데, 이미 국청을 설치하였으면 마땅히 양조 대면(兩造對面)344)  하여 질문하게 했어야 하는데, 유독 안세복만 물고(物故)되는 데에 이르렀으니 이런 일은 끝내 형정(刑政)이 공평함을 잃은 것입니다."
하였으며, 조현명이 말하기를,
"윤급(尹汲)·한익모(韓翼謨)의 설국(設鞫)은 이미 아주 지나쳤고, 위리 안치한 것도 역시 중(中)을 벗어났으며, 조태언(趙泰彦)·이병상(李秉常)의 일도 역시 아주 지나쳤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유신(儒臣)이 진달한 안세복의 일은 참으로 옳지만, 윤급·한익모에 이르러서는 그들이 그때에 어찌 감히 서명(胥命)하지 않았는가? 조태언은 ‘하필(何必)’이란 두 글자에 실로 무한한 뜻이 있었는데 신임하는 원보(元輔)의 말을 따르지 않을 수 없어 단지 위리 안치의 율을 베푼 것이다. 이병상에 이르러서는 비록 중신(重臣)이기는 하나 어찌 국법을 쓰지 않을 수 있겠는가? 나에게도 안정(顔情)이 없지 않아 너무 관대하게 하였다고 할 수 있다. 나는 형정(刑政)이 엄하지 못해 지금 재변을 부른 단서가 되었다고 여기는데 경은 바로 과중(過中)하다고 하니, 실로 내 뜻과 상반된다."
하였다.

 

윤9월 15일 경오

교리(校理)        오수채(吳遂采)가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근년에 전하께서 진언(進言)한 자를 위징(魏徵)345)                  으로서 포양(褒揚)하였고 호피(虎皮)를 내리셨는데, 얼마 되지 않아서는 두 신하가 헌언(獻言)함이 한 번 부당함으로 인해 드디어 거듭 은점(恩點)을 아끼셨습니다. 신은 삼가 생각하건대, 위징에 비교한 것은 그의 말을 받아들임만 같지 못하며 호피를 내리심은 그 사람을 임용하는 것만 같지 못하다고 여깁니다. 오늘날의 백성들 일이 참으로 애통(哀痛)할 만한 것이 있습니다. 위로는 승여(乘輿)·복용(服用)·어공(御供)의 수용으로부터 아래로는 궁부(宮府) 내외의 호화스럽고 범람(泛濫)한 도구에 이르기까지 일체 재량(裁量)하여 덜어야 합니다. 여러 궁가(宮家)에서 전후(前後)에 절수(折受)한 모든 산전(山田)·해택(海澤)에 대하여 입안(立案)한 것은 모두 그 숫자를 참작하여 정해 주고 나머지는 모두 혁파할 것이며, 여러 빈어(嬪御)의 복식(服飾)·기완(器玩)을 멀리 연경(燕京)의 저자에서 무역해 오는 것은 엄중히 과조(科條)를 세워 통렬히 금지해야 합니다. 오래 된 공상(供上) 가운데 아직도 명목(名目)이 남아 있어 예전대로 진배(進拜)하는 물건은 마땅히 그 경중(輕重)을 헤아려 유사(有司)에게 나아가 부탁하고, 오래 된 환상(還上)과 여러 해 쌓인 포흠(逋欠)은 신축년346)                  ·임인년347)                   이전을 한정으로 하여 한결같이 탕척(蕩滌)해야 하며 호조(戶曹)·진청(賑廳)의 전세(田稅)와 대동미(大同米)를 내어 파는 규정을 엄히 신칙하여 혁파하소서.
삼가 듣건대, 궁중(宮中)에 어진(御眞)을 봉안하는 전우(殿宇)를 고쳐 짓는 일이 있다고 합니다. 일전 대각의 비답에 불가피한 것 이외에는 역사를 정지하게 했는데, 이 전우의 역사도 그 가운데 들어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지성으로 백성을 근심하는 마음으로 작은 일이라 하여 혹시라도 소홀히 하지 마소서. 요즘에 비국 당상(備局堂上)의 인원이 자그마치 십수 명에 이르고, 도헌(都憲)348)                  을 문득 필요 없는 자리로 만들었으니 이 역시 허위의 한 단서입니다. 김성응(金聖應)과 이익정(李益炡)을 갑자기 초탁(招擢)한 것은 사(私)가 없어야 한다는 성간(聖簡)에 누(累)를 끼칠까 두려우며 한문제(漢文帝)가 두광국(竇廣國)349)                  을 임용하지 않은 것과 다릅니다. 옥당(玉堂)의 동벽(東壁)350)                  과 춘방(春坊)의 겸임은 인선(遴選)이 자별(自別)한데, 조상명(趙尙命)처럼 명성과 논의가 평소 가벼운 자를 단지 옛 규례에 따라 의망하였습니다. 홍성보(洪聖輔)·김정윤(金廷潤)은 얼굴을 바꾼 것이 비열(鄙劣)하여 납언(納言)하는 승지(承旨)의 의망(擬望)에 하나는 두고 하나는 도태시켰으며, 민정(閔珽)·윤득징(尹得徵)·서명형(徐命珩)은 용렬하여 모두 납언(納言)과 아장(亞長)에 합당치 않았는데, 심지어는 상조(常調)351)                  의 늙은 음관(蔭官)이 팔좌(八座)352)                  를 차지하였는데도 끝내 박정(駁正)함이 없었습니다. 이병상(李秉常)의 상소 가운데 있는 미의(微意)는 본디 씻어버리지 못했으나, 병으로 부름에 오지 못한 것에 대해 어찌 찬배(竄配)하는 중벌(重罰)을 가해야 합니까?
또 이재(李栽)를 주장하여 추천한 사람을 추죄(追罪)하는 일에 대하여 신이 그윽이 약간의 소견이 있습니다. 아! 어진 아비라 하여 반드시 패악(悖惡)한 아들이 없지 않으며 훌륭한 아들이라 하여 반드시 완악(頑惡)한 아비가 없지 않습니다. 이현일(李玄逸)의 패역은 사람마다 죽일 수 있는데, 그의 아들이 무신년353)                   적변(賊變)에 공을 세워 이 때문에 여러 신하들이 천진(薦進)하자 조정에서는 격외(格外)로 승륙(陞六)의 은전(恩典)을 베풀었습니다. 저 김성탁(金聖鐸)은 이미 죽은 이재(李栽)에게 무슨 관련이 있기에 주장해 천거한 신하에게 견벌(譴罰)을 추가합니까? 충효(忠孝)의 선비가 나라를 위하여 힘을 다하지 않을 것이 염려됩니다. 영남(嶺南)은 바로 옛날 명현(名賢)이 예의(禮義)를 돈독히 숭상한 고장이어서 후일 급한 일이 있으면 반드시 힘입을 수가 있을 것입니다. 지금 만약 한 지방에 통유(洞諭)하여 어진 인재를 찾아 별도로 거두어 임용하면 영남 70주(州)가 반드시 고무되어 기꺼이 복종할 것이니, 전하께서는 살피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힘써 진달하였으니, 유의하지 않겠는가? 탕감하는 일은 한(漢)나라        문제(文帝)가 전조(田租)를 감한 일이 있으니354)                  , 마땅히 해야 하며, 오래 된 포흠(逋欠)을 〈감해 주면〉 한갓 요행의 길만 틔워 줄 뿐이다. 기타 진달한 바는 혹은 본 일을 살피지 못한 것도 있고, 혹은 과중(過中)한 것도 있으며 혹은 한심스러운 것도 있다. 아! ‘초의(草衣)를 입겠는가?’라는 전교로 일찍이 유시하였다. 내가 임어하는 전우(殿宇)는 비바람만 가려도 충분하다. 임금의 치도(治道)는 의복이나 거처에 달린 것이 아니라 오직 그 덕에 달려 있는 것이다. 내가 비록 박덕(薄德)하지만 대략 이런 도리를 약간 알고 있다. 그러나 위험한 마루끝에 앉지 않음은 옛날 사람이 유시한 바이다. 나무로 버티어 놓은 전우를 어찌 고치지 않겠는가? 은유(恩諭)의 서(書)는 공경하지 않을 수 없으니, 장대(張大)한 것이 아니요, 대략만 고치는 것은 어유(御諭)를 존중해서이지 화상(畫像)을 위해서가 아니다, 이제 이미 다 마쳐가는데 이를 그만두어야 하겠는가? 비국 당상이 너무 많음은 이미 알고 있는데, 뜻에 차지 않는 자는 마땅히 지척(指斥)해야지 어찌 이처럼 흐리멍덩하게 하는가? 아! 어선(御膳)을 물리칠 때 마음이 이미 담담했으니, 어찌 본병(本兵)355)                  과 승지(承旨)에게 사의(私意)를 두었겠는가? 더군다나 우리 나라의 규모로는 장수의 망(望)은 훈신(勳臣)이 아니면 척신(戚臣)으로 하라는 것은 명상(名相)의 진달한 바인데 지금 바야흐로 혼돈(混沌)하니, 국세(國勢)에 어찌하겠는가? 특별히 이 사람을 제수함이 나라를 위해서이겠는가, 사(私)를 위해서이겠는가? 온 조정이 암흑 천지로 들어갔으니, 승선(承宣)이 글을 쓰려면 이 사람을 버려두고 그 누구를 먼저 하겠는가? 두광국(竇廣國)을 인용한 것은 전혀 긴착(緊着)하지 않다. 상조(常調)의 늙은 음관(蔭官)이라느니 얼굴을 바꾸었다는 등의 설은 노인을 대우하는 뜻과 충후한 말이 아니다. 조상명(趙尙命)이 연석(筵席)에 출입한 지 여러 해가 되었는데 어찌 성인(聖人)의 말을 체념하지 않고 남에게 야박하게 하는가? 영남 인사에 대한 일은, 왕자(王者)의 도리는 사물(事物)이 다가오면 순응하는 것이니, 이 처분은 영남 사람을 옥성(玉成)356)                  하기 위해서이다. 이재의 일은 대체는 옳다. 옛날 인재를 아껴 천진한 자를 어찌 심히 그르다고 하였던가? 이 일의 중함을 생각하지 않고 이처럼 장황하게 떠들어대니, 분의(分義)가 한심하다."
하였다.

 

임금이 상참을 행하였다. 영의정 이광좌가 말하기를,
"육진(六鎭)의 민사(民事)가 참으로 몹시 위급합니다. 근래 해마다 진정(賑政)을 베풀어 남은 곡식이 없으니, 지금의 사세로 보아서는 오직 마땅히 급히 어사를 보내어 수령과 함께 진구할 방책을 강구해 불에 타고 물에 빠진 자를 구하듯 해야 합니다."
하니, 임금이 조영국(趙榮國)을 어사로 차출하라고 명하였다. 인하여 전교하기를,
"이제 곧 어사를 보내게 되었으니, 마땅히 진구(賑救)할 일을 강정(講定)해야 한다."
하니, 이광좌가 말하기를,
"북관(北關)의 저축이 많지 않으니, 청컨대 남관(南關)의 곡식을 북관으로 옮기고, 포항(浦項)의 곡식을 남관으로 옮겨야 합니다."
하였는데,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판의금부사(判義禁府事) 조상경(趙尙絅)이 말하기를,
"환곡(還轂)을 더 나누어준 것은 마땅히 율(律)을 정함이 있어야 합니다."
하니, 임금이 명하기를,
"창고를 다 털어 나누어준 자는 원방에 정배(定配)하고, 반만 나누어준 자는 3년을 정배하며 그 외에는 석수(石數)를 논하지 말고 모두 고신(告身)357)  을 빼앗는 것으로 법령을 정하도록 하라."
하였다.

 

윤9월 16일 신미

주강을 행하였다.

 

윤9월 17일 임신

임금이 조강을 행하였다. 지평 이창의(李昌誼)가 나아가 말하기를,
"삼대(三代)의 임금에게는 간(諫)할 만한 것이 무엇이 있었겠습니까만, 삼대 때의 신하는 간하지 않은 말이 없었으니, 간하는 말을 받아들인 덕(德)과 진언(進言)하는 충(忠)을 볼 수 있습니다. 전하께서는 매양 삼대처럼 되기를 기약하시면서도 오수채(吳遂采)의 소비(疏批)에 어찌 미안한 전교가 그토록 많았습니까? 원하건대, 간하는 말을 받아들이는 데에 더욱 마음을 쓰소서."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내가 당장 말하겠다. 크게 흉년이 든 때를 당해서 어찌 영선(營繕)을 할 시기이겠는가만, 이 전우(殿宇)는 바로 태묘(太廟)를 개수(改修)할 때 일찍이 옮겨 봉안(奉安)하던 곳이다. 어유(御諭)와 은서(恩書) 및 어탑(御榻) 역시 이곳에 있는데 세월이 오래 되니 퇴락하여 한 동(棟)이 쓰러졌기 때문에 부득이 수리한 것이다. 그러나 10영(楹)의 전우를 줄여서 6영으로 하였고 체초(砌礎)358)  의 돌은 대내(大內)에서 준비해 써서 탁지(度支)359)  를 번거롭게 하지 않았다. 내가 여기에 네 자로 된 글을 지었는데, ‘들어가 전내(殿內)를 바라보면 마음에 느낌이 있다. 오직 검소함을 본받아야지 어찌 사치스럽고 크게 하겠는가?[入瞻殿內 心有佐焉 惟佐體儉 何用侈大]’라고 하였다. 또 비록 내 자신에 관계되는 일이라도 또한 스스로 가볍게 할 수 없는데, 더군다나 화상(畫像)은 소중함이 있는 것이겠는가? 그러니 오수채의 상소에, ‘그만두어야 하겠습니까, 그만두지 말아야 하겠습니까?’라고 한 것이 어찌 그르지 않은가?"
하였다.

 

오명신(吳命新)을 이조 참의로, 조상경(趙尙絅)을 형조 판서로, 이양신(李亮臣)을 부교리로, 김광세(金光世)를 부수찬으로 삼았다.

 

윤9월 18일 계유

주강을 행하였다.

 

윤9월 19일 갑술

밤에 달이 동정성(東井星)으로 들어갔다.

 

송진명(宋眞明)을 판의금부사(判義禁府事)로, 이덕수(李德壽)를 좌참찬(左參贊)으로, 김상중(金尙重)·이성중(李成中)을 정언으로, 윤심형(尹心衡)을 응교로, 서명신(徐命臣)을 부수찬으로, 황정(黃晸)을 승지로 삼았다.

 

주강을 행하였다.

 

윤9월 20일 을해

임금이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영의정 이광좌가 말하기를,
"병조 판서 김성응(金聖應), 호조 판서(戶曹判書) 윤양래(尹陽來)는 대각의 말로 인해 질질 끌면서 한결같이 서로 버티어 한갓 체모만 손상시키니 우선 체직을 허락해야 마땅합니다."
하니, 임금이 윤허하였다. 인하여 전교하기를,
"대신할 만한 자를 경들이 과연 얻었는가?"
하니, 우의정 송인명(宋寅明)이 말하기를,
"신이 일찍이 박문수(朴文秀)와 박사수(朴師洙)를 천거했는데, 그들은 각기 장점이 있습니다."
하니, 개정(開政)을 명하였는데, 병판(兵判)과 호판(戶判)을 종2품으로 통의(通擬)하였다. 박문수를 병조 판서로, 박사수를 호조 판서로, 김시찬(金時粲)을 지평으로, 김상중(金尙重)을 정언으로, 김광(金洸)을 통제사(統制使)로 삼았다.

 

윤9월 21일 병자

임금이 북도 감진 어사(北道監賑御史) 조영국(趙榮國)을 인견하여 백성들의 생명을 구제해 살리고, 인재를 찾아내라고 신유(申諭)해 보냈다.

 

윤9월 22일 정축

김유경(金有慶)을 대사헌으로, 황정(黃晸)을 대사간으로, 윤광의(尹光毅)를 부교리로, 권일형(權一衡)을 문학으로, 오광운(吳光運)을 도승지로, 이현보(李玄輔)를 승지로 삼았다.

 

임금이 양성합(養性閤)에 나아가니, 왕세자(王世子)가 시좌(侍坐)하고, 영의정 이광좌·영부사 이의현(李宜顯)·봉조하 이태좌(李台佐)·판부사 김흥경(金興慶)·우의정 송인명이 입시하였는데, 세자는 겨우 3세인데도 체도(體度)가 아주 뛰어났다. 이태좌에게 명하여 안아서 세자의 경중을 알아보게 하니, 이태좌가 일어나 안았고, 여러 대신들이 차례로 나아가 안았다. 이의현이 말하기를,
"저하(邸下)의 체중이 신처럼 늙은 사람은 아마도 이기지 못하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웃었다. 세자가 이태좌 앞에 나아가 서니, 이태좌가 손을 세자의 정수리 뒤에 대고는 말하기를,
"신의 나이가 지금 80인데 이 나이를 저하께 봉헌(奉獻)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노신(老臣)의 순후(醇厚)함이 귀하다."
하였다. 이광좌가 자신으로써 가르치는 도리를 우러러 힘쓰라고 하니, 임금이 가납하였다. 궁관(宮官)이 글씨를 써 보라고 청하니, 세자가 큰 붓을 들고서 종이 12장에 각기 두 자씩을 썼다. 임금이 말하기를,
"쓴 것을 너의 스승께 드리라."
하니, 세자가 손으로 이광좌에게 주니 이광좌가 여러 대신에게 각기 두 장씩 나누어 주었다.

 

윤9월 23일 무인

주강을 행하였다.

 

윤9월 24일 기묘

소대를 행하였다.

 

윤9월 25일 경진

임금이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영의정 이광좌가 말하기를,
"형조에서 조사하는 일이 지연되어 장차 애매하고 모호한 데에 이르고 말 것이니, 어찌 이런 기강이 있겠습니까? 이서(吏胥)의 초사(招辭)로써 중신(重臣)을 죄주어서는 안 되니, 잘 생각하여 처리하는 것만 같지 못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우리 나라에는 본디 권신(權臣)이 없었으니, 나는 중신을 의심하지 않는데, 복리(僕吏)를 누차 형신해도 불복(不服)하니, 어찌 중신을 애매한 데 두고 대신(臺臣)을 사람을 무함한 데에 둘 수 있겠는가?"
하였다.

 

윤9월 27일 임오

함평(咸平) 유학(幼學) 김재후(金載厚)가 상소하여 8조를 진달하였는데, 첫째는 과거의 규정을 엄중히 하라는 것이었다. 예사 비답을 내리고, 연신(筵臣)에게 말하기를,
"이 무리들의 정신은 여기에 있다."
하였다.

 

전(前) 만호(萬戶) 경지성(景之星)이 상소하여 군정(軍丁)·병기(兵器)·양역(良役) 등의 일을 진달하니, 비답하기를,
"진달한 바가 가상하다. 호구(戶口) 유결(儒結)의 포(布)는 일찍이 상확(商確)했으나, 아직껏 결정되지 못했다."
하였다.

 

윤9월 28일 계미

주강을 행하였다. 호서 어사(湖西御史) 박사창(朴師昌)이 복명(復命)하였다.

 

윤9월 29일 갑신

임금이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호서 어사가 어제 백성들의 일을 진달하였는데, 그림으로 그려 온 것과 다름이 없어 눈물이 나오는 것을 깨닫지 못했다. 이미 도신(道臣)으로서 둔체(鈍滯)하라고 하였으니, 장차 어떻게 할 것인가?"
하니, 영의정 이광좌가 말하기를,
"일찍이 듣건대, 원망과 비방이 많다 하였고 어사의 아룀이 또 이와 같으니, 비록 한 가지 일로 사람을 버리기는 어려우나 이제 체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대사간 황정(黃晸)이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고, 강세윤(姜世胤)·이명언(李明彦)·이하택(李夏宅)의 일을 정계하였는데, 후에 조현명(趙顯命)이 말하기를,
"이명언에 대한 계사는 바로 우상(右相)이 낸 것인데 일이 매우 허황하기 때문에 신이 당일에 다투어 논란한 바가 있습니다마는, 10년이나 연달아 아뢰니 참으로 괴이한 일입니다. 이하택에 이르러서는 박해정(朴海正)을 끝까지 규명하기 전에는 의심된 단서가 풀릴 수 없습니다. 이번에 대사간이 도헌(都憲)이 그의 아비에 대한 계사를 정지함으로 인해 아울러 그 아들까지도 정계함은 잘못입니다."
하니, 황정이 인피하면서 말하기를,
"이미 작처(酌處)했으니, 나국(拿鞫)을 거치지 않은 것과는 차이가 있기 때문에 신이 과연 경솔히 지레 정지한 것입니다."
하였는데, 옥당(玉堂) 조명리(趙明履)가 파직하기를 청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이보혁(李普赫)을 공홍 감사(公洪監司)로, 홍경보(洪景輔)를 병조 참판으로 삼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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