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영조실록46권, 영조 13년 1737년 11월

싸라리리 2025. 9. 19. 10: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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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2일 을묘

하교(下敎)하기를,
"초양(初陽)397)  이 다시 생겨나니, 임금이 정사를 펴는 데도 시의(時宜)에 따라야 하리라. 묘당의 신하에게 물어 만물이 생겨 퍼져나가는 자연의 이치를 체득케 하여 밤낮으로 부지런히 힘써 그 마음을 순수하고 깨끗이 하여 백성을 우선으로 삼도록 하고 관찰사에게 물어 백성을 맡긴 뜻을 체득하여 우리 백성을 곤궁에서 건지고 우리 백성의 힘을 키우게 할 것이며, 도민(都民)은 임금의 근본이 되는 곳이니 역시 비국(備局)에 신칙하여 백성을 편안케 하는 정치를 살펴 구하게 하라. 전조의 신하에게 물어 복괘(復卦)의 양(陽)이 자라나고 음(陰)이 소멸해 가는 이치를 체득하여 그 사람을 씀에 있어서 취사 선택을 반드시 삼가야 할 것이다. 이제 막 사람을 천거하라는 명을 내렸는데 재능에는 크고 작은 분별이 있으니, 충후하고 독실하며 깊이와 국량이 있는 자가 으뜸이고 민첩하고 통달하며 구변이 좋은 자가 그 다음이니, 이러한 뜻을 체득하여 천거하도록 하라."
하였다.

 

우의정 송인명(宋寅明)이 또 상소하여 사직하니, 임금이 손수 비답하여 위로 격려하고 승지를 보내어 함께 오게 하였다.

 

11월 3일 병진

병조에 명하여 위사(衛士)의 동옷을 지어 나누어 주게 하였다.

 

수찬 이정보(李鼎輔)가 상소하여 아뢰기를,
"신은 이번 길에 삼남(三南)과 호남(湖南) 연해(沿海)를 두루 돌아보면서 27년 동안 15차례나 구휼(救恤)을 베풀었다는 사실을 알고 참으로 놀랍고 마음 아팠습니다. 영남(嶺南)에 이르러서는 동해(東海)에 적조(赤潮) 현상과 달성(達城)에 지진이 일어난 뒤부터 인심이 흉흉하여 진정할 수 없었으며, 신이 근시(近侍)의 반열에서 나왔다 하여 신의 말고삐를 붙들고 읍소(泣訴)하는데 그들의 굶주리고 곤핍한 형상은 아! 마음이 아팠습니다. 두루 통달하고 일을 익숙하게 아는 두 도(道)의 관찰사(觀察使)가 여섯 달 동안 인입(引入)하여 모든 사무가 적체되어 있으며, 호서(湖西)는 전임 관찰사를 경솔하게 갈아치워서 진휼하는 중임을 경험이 없는 사람에게 맡겼습니다. 삼남은 나라의 근본인데 여러 차례 큰 흉년을 겪고 있으니, 실로 작은 근심이 아닙니다. 서울에 도착함에 이르러서는 하늘의 재변이 매우 혹독하여 천둥 소리가 순음기(純陰期)에 잇달아 일어나고 금성(金星)과 목성(木星)의 살별이 연달아 태음(太陰)을 범하는가 하면 요괴스러운 바람이 땅을 휩쓸고 붉은 기운이 하늘에 뻗쳤으니, 이것은 음(陰)이 성하고 양(陽)이 쇠해지는 형상이 아닌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도 전하께서는 두려워하시며 반성하고 힘쓰심이 며칠간의 감선(減膳)과 간략한 구언(求言)에 불과하시니, 이것으로 어떻게 재앙이 소멸해 그치게 하시겠습니까?"
하고, 부교리(副校理) 오수채(吳遂采) 역시 상소하여 경계할 것을 아뢰니, 임금이 모두 가납(嘉納)하였다.

 

동지사(冬至使) 해흥군(海興君) 강(橿) 등이 사폐(辭陛)하자, 인견하여 보냈다.

 

11월 4일 정사

제주도의 감귤(柑橘) 공인(貢人) 안만적(安萬赤) 등 14인이 배가 전복되어 물에 빠져 죽었으므로, 구휼하는 은전을 베풀도록 명하였다.

 

송수형(宋秀衡)을 승지로, 정석오(鄭錫五)를 대사헌으로, 박사창(朴師昌)을 지평으로, 유수원(柳壽垣)을 정언으로, 김광세(金光世)를 부교리(副校理)로 삼았다.

 

우의정 송인명(宋寅明)이 상소를 올리고 강 밖으로 나가니, 비답하기를,
"경이 만일 도성 안으로 들어오면 국사를 진작시킬 수 있을 것이요 참소하는 소리를 막을 수 있을 것이며 기강을 세울 수 있을 것이니, 오늘 즉시 함께 들어와 기망(企望)에 부응하라."
하였다.

 

부제학(副提學) 김유경(金有慶)이 상소하여 아뢰기를,
"윤급(尹汲)·한익모(韓翼謨)를 즉시 대명(待命)하게 하지 않으심이 전하께서 국청(鞫廳)을 설치하여 친히 심문하시는 마당에 과연 합당하며, 조태언(趙泰彦)이 두 글자로 처치(處置)한 것도 역시 나라의 형벌을 바로 잡는 데 과연 합당하다고 여기십니까? 전하의 명성(明聖)으로 그것이 지나치다는 것을 어찌 모르셨겠습니까마는, 단지 뭇신하를 위협 통제하여 감히 입을 열지 못하게 하시니, 이는 권모 술수에 가깝고, 그것이 심학(心學)에 끼치는 해는 진실로 적지 않습니다. 대신(大臣)을 욕하고 꾸짖기를 노예와 같이 하시니, 그것이 성덕(聖德)에 끼치는 누(累) 역시 큽니다. 이미 죽은 선정신(先正臣)의 이름을 함부로 불러서 그의 허물을 책함을 드러내 보이는 등 갖가지 하자는 오로지 전하의 기질(氣質)이 아직 순화(純化)되지 않은 데 연유한 것입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윤급 등의 일은 이미 하교하였다. 각선(却膳)하는 마당에 어느 여가에 권모 술수를 쓰겠는가? 비록 그렇다 하더라도 어찌 ‘없다.’라고 말하며 힘쓰지 않겠는가? 다른 일은 이미 유시하였고, 이석표(李錫杓)의 상소는 잘못 전해 들은 것이다."
하였다.

 

11월 5일 무오

유성(流星)이 삼성(參星) 아래에서 나와 곤방(坤方)으로 들어갔는데, 모양은 주먹 같았고 꼬리의 길이는 3,4척이었으며 빛깔은 붉었다.

 

임금이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영의정 이광좌(李光佐)가 아뢰기를,
"인재는 다른 시대에서 빌려 올 수 없는 것이니, 전하께서는 신진(新進) 관원 가운데 가만히 자세하게 관찰하시어 더러는 고문직(顧問職)398)  을 내리시고 더러는 어사(御史)로 차출하시어 능력이 있는지의 여부를 보아 차츰 등용하시면, 뒷날 반드시 효과를 거두고 힘을 얻을 날이 있을 것입니다. 비단 문신만이 아니고 요즈음에는 무신 역시 매우 부족하니, 김광(金洸)·김흡(金潝) 같은 사람은 끌어올려 쓸 만합니다."
하니, 병조 판서 박문수(朴文秀) 역시 이의풍(李義豐)·유순장(柳純章)·김성응(金聖應)·장태소(張泰紹)는 서용할 만하다고 천거하니, 임금이 그럴 듯하게 여겼다. 이광좌가 아뢰기를,
"육진(六鎭)에 재해가 매우 위급하여 얼마 전에 영남(嶺南) 포항창(浦項倉)의 곡식 2만 석을 북관(北關)으로 수송하라는 관문(關文)을 발송하였더니, 관찰사(觀察使) 유척기(兪拓基)가 논보(論報)하기를, ‘포항창의 인근 고을 역시 재해가 심해 지금 진휼하려 하니 2만의 숫자를 지킬 수 없습니다.’라고 하니, 청컨대 1만 5천 석(石)으로 줄여서 배로 실어 보내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예조 판서 송진명(宋眞明)이 아뢰기를,
"함경도 관찰사 서종옥(徐宗玉)이 정릉(定陵)399)  과 화릉(和陵)400)  의 비각(碑閣)을 영건(營建)할 때 그 감동관(監董官)이던 함흥 판관(咸興判官) 심항(沈沆)을 전례를 상고하여 논상(論賞)하기를 앙달하였습니다."
하니, 준직(準職)에 제수하라고 명하였다.

 

11월 7일 경신

조한위(趙漢緯)를 승지로, 임집(任)을 지평으로, 정익하(鄭益河)를 교리(校理)로, 이양신(李亮臣)을 수찬(修撰)으로, 조명리(趙明履)를 부교리(副校理)로 삼았다.

 

여러 승지가 공무를 가지고 입시하니, 유지(諭旨)를 내리기를,
"북도 감진 어사(北道監賑御史)는 겨울이 오기 전에 백성을 무마(撫摩)하고 구제하여 살아나게 하라."
하고, 또 제주(濟州)의 흉황(凶荒)에 대한 보고가 있다 하여 비국으로 하여금 구제 진휼할 방책을 미리 강구하게 하니, 이때 제주의 백성으로 장계(狀啓)를 가지고 온 자가 있었는데, 임금이 내시(內侍)로 하여금 물어 보게 하였더니 제주 백성이 그 뜻을 헤아려 알고는 ‘나뭇잎을 따 먹습니다.’라고 말하였다.

 

11월 8일 신유

윤동형(尹東衡)을 대사간으로, 이양신(李亮臣)을 부응교(副應敎)로, 오수채(吳遂采)를 교리로, 서명신(徐命臣)을 수찬으로, 정이검(鄭履儉)을 부수찬으로 삼았다.

 

11월 9일 임술

호조 판서 박사수(朴師洙)가 상소하여 아뢰기를,
"경기(京畿) 안의 재결(災結)에 대한 조세 감면을 너무 남발하여 호서(湖西)의 가장 기근이 심한 지역보다도 도리어 후합니다. 경기 고을에서 함부로 발급한 것을 만약 엄중히 문책하여 실상대로 환원하지 않는다면 삼남(三南) 지방에서도 장차 반드시 이를 서로 본받아서 세입(歲入)이 크게 줄어드는 것은 전혀 걱정하지 않을 것이고, 묘당(廟堂) 역시 호남(湖南) 고을에서 재결의 감면을 넉넉하게 해준 것을 추인(追認)해 주어 나라의 경비로 함부로 은혜를 남발하고 낭비하여 버리게 될 것입니다. 혹시 불행하게도 다음해에 흉년이 든다면 조정에서 비로소 부지런히 힘쓰고 구휼하려 하여도 경비가 없어 백성들이 죽는 것을 서서 보고도 구제하지 못하게 될 것이 반드시 임자년401)   호남에서의 일과 같이 될 것입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명사(明史)》에 기록되어 있지 않는가? 일을 맡은 신하는 비록 소모하는 것을 걱정하더라도 임금이 백성에 대해서야 그것을 어떻게 아까워하겠느냐?"
하였다.

 

임금이 영의정 이광좌(李光佐)를 인견하였다. 이때 날씨가 매우 추웠는데, 임금은 털옷을 입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솜옷 역시 너무 얇았다. 이광좌가 아뢰기를,
"신이 비록 손으로 만져 보지는 못하였지만 매양 뵈올 때마다 항상 추워 보입니다. 잠시 겉으로 나타나는 병환이 없다고 하여 조심하고 섭양(攝養)하시는 방책을 조금이라도 소홀히 하지 마소서."
하였는데, 임금이 비답하기를,
"천성이 너무 따뜻한 것을 좋아하지 않는 까닭에 그렇다. 경은 비록 너무 얇다고 경계하지만, 부옥(蔀屋)에서 추위와 굶주림에 떨고 있는 정상을 생각하면 내 어찌 차마 혼자서 따뜻하게 지내고 혼자서 배부를 수 있겠는가?"
하니, 이광좌가 아뢰기를,
"하늘의 뜻을 향유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성상께서 마음을 굳게 지키느냐 지키지 않느냐에 달려 있는 것입니다. 어찌 감선(減膳)하는 절도(節度)로써 천재(天災)에 응답할 수 있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비답하기를,
"감선이란 단지 하늘을 모독하는 것임을 역시 알고 있다."
하고, 복선(復膳)을 명하였다.

 

11월 10일 계해

오광운(吳光運)을 호조 참판으로, 신택하(申宅夏)를 응교로, 이석표(李錫杓)·오수채(吳遂采)를 교리로, 정익하(鄭益河)를 수찬으로, 윤광의(尹光毅)·정이검(鄭履儉)을 부수찬으로 삼았다.

 

대신(大臣)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소대(召對)를 행하였다.

 

황감(黃柑)을 성균관 유생(成均館儒生)에게 반사(頒賜)하고 홍문관 제학(弘文館提學) 윤혜교(尹惠敎)에게 명하여 선비에게 시험을 보이게 하였는데, 윤득영(尹得英)이 장원에 뽑혔으므로, 급제(及第)를 내렸다.

 

11월 12일 을축

석강(夕講)을 행하였다.

 

11월 13일 병인

조적명(趙迪命)을 승지로, 김성응(金聖應)을 형조 판서로 삼았다.

 

임금이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영의정 이광좌(李光佐)가 아뢰기를,
"좌의정은 나이 젊고 재주가 많아, 그가 나라 일을 다스림에 있어서 어찌 신(臣)처럼 쇠약하고 혼미한 사람에 비길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그가 신으로 연유하여 인입하였으니, 이것 역시 신이 마땅히 물러나야 할 공안(公案)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국사는 그와 더불어 헤아리고 사담(私談)은 주고받지 않는 것이 의리에 무엇이 해롭겠는가마는, 나의 정성이 박약한 연고로 끝내 마음을 돌리지 않으니, 참으로 부끄러운 노릇이다."
하였다. 호조 판서 박사수(朴師洙)가, 전라도 관찰사(全羅道觀察使)가 공명첩(空名帖)402)  을 청하는 것을 가지고 상주하기를,
"비록 상으로 주는 것이라고 하지만 필경 벼슬을 팔아 곡식과 바꾸는 결과에 이릅니다."
하니, 임금이 시행하지 말라고 명하였다. 임금이 우의정 송인명(宋寅明)이 도성 밖에 와 있다는 말을 듣고 비국 당상 김시형(金始炯)에게 명하여 달려가 유시하고 함께 들어오게 하였다.

 

주강(晝講)을 행하였다. 사간(司諫) 신치근(申致謹)이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아니하였다. 또 아뢰기를,
"청컨대 광유(廣諭)하신 후에 기한이 지나고도 오지 않는 사람은 모두 중죄로 다스리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우의정 송인명(宋寅明)이 금오(金吾)에서 서명(胥命)하니, 임금이 돈독한 유지를 내려 불러 보았다. 송인명이 아뢰기를,
"신은 불행히도 무신년403)  에 오랫동안 언관(言官)의 자리에 있으면서 남의 선두에 서서 계를 올린 것이 많았으니, 어찌 다른 사람들에게 미움을 받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대신(臺臣)이 대신(大臣)을 공박하면 그날로 견책을 당하고 대신(大臣)은 대각으로부터 탄핵을 당하고도 편안하게 직위에 앉아 있다면, 어찌 나라의 체통이 서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위로하여 말하기를,
"내가 한창 경(卿)에게 의지하고 맡기는데, 참소하는 말이 우리 군신(君臣)을 이간시키려 한다. 경이 문언박(文彦博)404)  이 된다는 것은 좋으나, 만약 권집(權䌖)을 당개(唐介)405)  에 견준다면 당개가 억울하지 않겠는가?"
하였다. 송인명이 물러나와서 차자(箚子)를 올려 그 언관(言官)을 용서해 줄 것을 청하니, 비답하기를,
"마땅히 연석(筵席)에서 유시(諭示)하겠다."
하였다.
신(臣)이 삼가 살펴보건대, 권집(權䌖)이 송인명(宋寅明)을 논박한 것이 오로지 공변(公辨)된 마음에서 나왔는지의 여부는 비록 알 수 없으나, 그의 죄상을 나열해 성토한 것은 천고의 소인배로 지목하였는지라 보는 사람이 오히려 그를 대신해 부끄러워하지 않을 수 없었으니, 그 직위가 재상의 자리에 있는 자가 진실로 조금이라도 염치와 부끄러움이 있다면 어찌 남의 비웃음과 질책을 받고도 여전히 그자리에 버티고 있으려는 계책을 할 수 있단 말인가? 송인명이 한차례 출성(出城)하고 한차례 서명(胥命)하면서 의리(義理) 있는 모습을 억지로 모방하다가 아무런 사단도 없이 갑자기 다시 나와 바로 연석에 오르고도 끝내 혐의스러워하지 않으니, 심하도다. 소인의 그 거리낌 없는 행동이 이와 같으니.

 

11월 14일 정묘

임금이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특별히 권집(權䌖)을 방면하고, 우의정 송인명(宋寅明)에게 이르기를,
"어제 이미 하교하였으니, 어찌 경을 속이겠는가?"
하였다. 이때 영의정 이광좌(李光佐)가 황정(荒政)에 대하여 한창 아뢰고 있는데 병조 판서 박문수(朴文秀)가 그 말을 가로채어 다른 말을 하자, 이광좌가 박문수를 추고(推考)하기를 청하였다. 잠시 후 이광좌가 무과(武科)를 자주 보이는 폐단을 아뢰니, 박문수 또한 그런 말을 아뢰는지라, 이광좌가 아뢰기를,
"신이 겨우 입을 열었는데 박문수가 가로질러 나와 장광설(長廣說)을 늘어놓으니, 천성이 그렇다고 말한들 무슨 득이 되겠습니까? 청컨대 연석(筵席)에서 아뢰는 규칙을 정하여 남의 말이 끝나는 것을 기다려서 자기의 의견을 진술하도록 하소서."
하니, 임금이 비답하기를,
"이것은 승지(承旨)에게 책임이 있다."
하고, 승지 이익정(李益炡)을 추고하도록 명하였다. 이광좌가 이어서 아뢰기를,
"청컨대 오군문(五軍門)406)   초관(哨官) 중에서 21자리는 20개월을 복무 기간으로 정하여 6품(品)으로 승진하는 계제(階梯)로 삼도록 하고, 또 매번 도정(都政)에서 무신 겸 선전관(武臣兼宣傳官)과 훈련 도감(訓鍊都監)의 몇 자리를 감제(減除)해 내어 오군문에서 6품으로 승진하는 사람을 거두어 쓰게 하여 인사의 적체를 떨쳐버리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르고 박문수에게 명하여 비국과 의논하여 절목(節目)을 만들게 하였다.

 

장령(掌令) 남태량(南泰良)이 상소하였다. 대략 이르기를,
"신은 명을 받들어 전지를 점검하고 이제 돌아왔습니다. 충청좌도(忠淸左道) 19고을의 재해는 거의 전체가 포기한 상태였는데 우도(右道)보다 더 심하여 제힘으로 살아날 수 없는데도 관찰사(觀察使)는 또 그 고을에 이미 주었던 재결(災結)을 빼앗아다가 우도의 부족분을 채우려 하니, 그것 역시 매우 사려가 없는 조처입니다. 청컨대 명을 내리시어 신이 조사 결정한 바에 따라 감면해 주도록 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비국으로 하여금 품처(稟處)하도록 하라."
하였다.

 

소대(召對)를 행하였다.

 

11월 16일 기사

달이 동정성(東井星)으로 들어갔다.

 

11월 17일 경오

해에 겹무리[重暈]가 있고 양이(兩珥)에 관(冠)과 배(背)가 있었는데, 빛깔은 모두 속은 붉고 겉은 푸르렀으며 흰 기운이 좌이(左珥)에서부터 나와 북방으로 구불구불 흘러갔다.

 

송징계(宋徵啓)를 집의로, 안상휘(安相徽)를 사간으로, 이도겸(李道謙)을 헌납으로, 민선(閔墡)을 장령으로, 권일형(權一衡)을 지평으로, 정준일(鄭俊一)·이명곤(李命坤)을 정언으로, 신치운(申致雲)을 승지로 삼았다.

 

임금이 희정당(熙政堂)에 나아가 초복(初覆)407)  을 행하였다. 우의정 송인명(宋寅明)이 문안(文案)이 많다 하여 이틀에 나누어 행할 것을 청하니, 그대로 따랐다. 집의 송징계(宋徵啓)와 헌납 이도겸(李道謙)이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었으나, 모두 윤허하지 않았다.

 

11월 18일 신미

황재(黃梓)를 부응교로, 이정보(李鼎輔)·정익하(鄭益河)를 부교리로 삼았다.

 

임금이 희정당(熙政堂)에 나아가 이어서 초복(初覆)을 행하였다. 집의 송징계(宋徵啓)와 사간 안상휘(安相徽)가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었으나, 모두 윤허하지 않았다. 안상휘가 아뢰기를,
"조태언(趙泰彦)의 계(啓)를 아직까지 끌고 있어서 세상 사람들이 억울해 하지 않는 사람이 없습니다."
하니, 임금이 엄하게 꾸짖고 특별히 안상휘를 체직(遞職)시켰다. 우의정 송인명이 아뢰기를,
"처분이 지나치십니다."
하였는데, 임금이 말하기를,
"내 뜻은 점차 커지려는 것을 막자는 데 있다."
하니, 송인명이 아뢰기를,
"사물이 오면 이에 순응하는 것만 같지 못합니다."
하므로, 임금이 명을 거두어 들였다.

 

11월 19일 임신

사헌부(司憲府)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11월 20일 계유

사헌부 【지평(持平) 정옥(鄭玉)이다.】 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고, 또 아뢰기를,
"전광도 관찰사(全光道觀察使) 서명구(徐命九)는 평소 인망이 낮아 방백(方伯)으로 합당하지 아니하며, 거조가 소루 오활하고 정령(政令)이 번잡하고 좀스러우니, 벼슬을 갈아 주소서."
하였으나, 모두 윤허하지 않았다.

 

강화 유수(江華留守) 윤용(尹容)을 인견하고 임금이 말하기를,
"강도(江都)는 곧 나라의 보장(保障)이다. 성곽을 수리하고 군량을 모아 비상시에 대비토록 하라."
하니, 윤용이 아뢰기를,
"강도의 군량이 과거에는 10여 만 석(石)이었습니다만, 해마다 소모해 줄어들어 근래에는 3,4만 석에 불과하다고 합니다. 이것은 각도(各道)로 곡식을 옮기면서 가기만 하고 돌아오는 것이 없는 까닭이니, 청컨대, 이제부터는 일체 허락하지 마소서."
하니, 임금이 그럴 듯하게 여겼다.

 

11월 21일 갑술

김한철(金漢喆)을 정언으로 삼았다.

 

임금이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영의정 이광좌(李光佐)가 아뢰기를,
"육진(六鎭)의 재해가 다른 도(道)에 비할 바가 아니여서 겨울 전에 이미 죽은 사람이 있다고 하니, 곡식을 옮겨서 구제하는 일을 일각도 지체할 수 없습니다. 영남(嶺南) 포항창(浦項倉)의 곡식 1만 5천 석과 관동(關東)의 곡식 6천 석을 급히 수송하여 보내라는 뜻으로 분부하심이 타당합니다."
하니, 임금이 윤허하였다. 우의정 송인명(宋寅明)이 아뢰기를,
"해변 백성의 배와 그물로써 살아가는 자가 곳곳에서 침해를 당하고 납세(納稅)도 한정이 없어서 원망과 고통을 이기지 못한다고 하니, 참으로 염려스럽습니다. 신이 일찍이 갑진년408)  에 영의정이 정한 절목(節目)을 가져다 보니, 통제사(統制使)에게 행관(行關)409)  하여 경외 차인(京外差人)으로서 폐단을 만드는 자를 살피고 조사하여 본사(本司)에 보고하도록 하였는데도, 이제까지 한 번도 보고한 적이 없습니다. 꾸짖고 경계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니, 이광좌가 아뢰기를,
"중죄로 다스려 뒷날의 폐단을 징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통제사(統制使) 윤택정(尹宅鼎)을 삭직(削職)시키는 것이 옳습니다."
하였는데, 임금이 윤허하고, 이어서 하교하기를,
"기강이 조정에 행해지지 않으면서 멀리 미친 적은 있지 않았다. 오늘 차대(次對)에 영의정은 병이 있는데도 억지로 일어나 들어왔거늘 비국 당상은 많이 들어오지 않았으니, 바로잡고 경계하는 방도를 여기서 먼저 시행하는 것이 마땅하다. 경들은 조정의 영(令)이 외방에서 시행되지 않는 것을 근심하지 말고 단지 조정의 기강이 어떠한가를 살펴보는 것이 옳다."
하니, 송인명이 아뢰기를,
"성상의 하교가 참으로 옳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하문하기를,
"신치근(申致謹)이 계문한 바 향리(鄕里)에 내려간 사람들을 어떻게 처리해야 하겠는가?"
하니, 송인명이 아뢰기를,
"신은 종중 추고(從重推考)로 다스렸으면 합니다."
하였는데, 임금이 말하기를,
"이미 왕명을 엄격히 한다고 하였으면 어떻게 종중 추고에 그칠 수 있겠는가?"
하므로, 이광좌가 아뢰기를,
"각선(却膳)하신 후에 광유(廣諭)하시고 광유하신 뒤에 선온(宣醞)하시는 등 전후에 반포하신 하교의 지극하신 뜻이 너무나 간절하셨습니다. 신자(臣子)가 된 도리로서 구습(舊習)을 모두 버리고 마음을 합쳐 죽을 힘을 다하여야 마땅한데 도리어 옛날 방식을 답습하여 향리에 내려가 올라오지 않으니, 참으로 개탄스럽습니다. 또 그들 가운데도 여러 계층이 있으니, 혹은 친구에게 이끌리어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없는 사람이 있고, 혹은 구습을 지나치게 지키면서 당연한 것으로 여기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혹은 원래 향리에 거처의 근거를 두고 있어서 형편상 오래 외지(外地)에 머물러 있기 어려운 사람이 있으므로, 이미 구별할 길이 없으니, 일률적으로 죄를 주는 것은 불가합니다. 제왕(帝王)의 도(道)는 널리 포용하는 것을 귀중하게 여기는 것이니, 지금 만약 모두 관대하게 용서한다는 뜻으로 유시를 내리시고 그들이 올라오는 것을 기다려 각각 벼슬을 내리신다면 저절로 성덕의 감화 속에 깊이 젖어들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진실로 식자(識者)가 있다면 어찌 오지 않겠는가? 그들이 하는 대로 맡기는 것이 옳다."
하였다. 지평(持平) 정옥(鄭玉)이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고, 서명구(徐命九)를 체직(遞職)시키자는 청은 그대로 따랐다. 또 아뢰기를,
"강릉 부사(江陵府使) 이봉익(李鳳翼)이 정사(政事)를 하리(下吏)에게 맡기어 백성들이 명을 감당하지 못하니, 청컨대 파직하소서."
하니, 윤허하였다.

 

11월 22일 을해

부사과(副司果) 양득중(梁得中)이 상소하여 실질(實質)에 힘쓰는 방도를 아뢰니, 우악(優渥)한 비답을 내렸다.

 

사헌부(司憲府)에서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임금이 영의정 이광좌(李光佐)와 우의정 송인명(宋寅明)을 인견하였다. 이광좌가 아뢰기를,
"주청사(奏請使)가 돌아온다는 장계(狀啓)가 이미 왔고 봉전(封典)이 청한 대로 되었다 하니, 매우 기쁘고 다행스럽습니다."
하고, 송인명이 아뢰기를,
"청컨대 장계를 가지고 오는 용만(龍灣)410)  의 장교(將校)와 재자관(齎咨官)에게 상전(賞典)으로 가자(加資)하소서."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먼저 온 군관(軍官)이 기쁜 소식을 급히 전했으니 상전의 논의는 장계를 받들고 오는 장교보다 먼저 주어야 마땅할 것이요, 재자관은 도착하는 것을 기다려 상을 논하여도 역시 늦지 않다."
하였고, 송인명이 아뢰기를,
"나라에 전에 없던 경사가 났으니, 청컨대 조태언(趙泰彦)을 풀어 주소서."
하니, 임금이 가시 울타리를 철거할 것을 명하였다.

 

11월 23일 병자

사헌부(司憲府)  【지평(持平) 정옥(鄭玉)이다.】 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우포도 대장(右捕盜大將) 장태소(張泰紹)는 사인(私人)의 말만 일방적으로 듣고 강가의 백성에게 성을 내고 혹독한 형벌을 난폭하게 자행하여 이내 장형(杖刑) 아래 죽게 하고도 공공연히 공갈 협박하여 소장(訴狀)을 내지 못하게 하여 억울함을 풀지 못하도록 했다는 것이 원근(遠近)에 널리 전파되었으니, 청컨대 무거운 법에 따라 처벌하소서."
하니, 임금이 따르지 않았다.

 

11월 24일 정축

임금이 희정당(熙政堂)에 나아가 삼복(三覆)을 행하여, 사형자 10인과 감사자(減死者) 3인으로 단정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당태종(唐太宗)은 말세(末世)의 범상한 군주에 지나지 않았는데도 감옥에 죄인이 없어 텅비게 하였는데, 지금은 백성들이 중죄를 범하여 해마다 감옥이 넘치니 내 자신 겸연쩍게 여긴다. 이미 가르치고 이끌어서 백성들로 하여금 죄를 면하게 하지 못하고 또 형법(刑法)을 신중하게 사용하지 못한다면 참으로 흠휼(欽恤)하는 뜻이 아니다. 김두영(金斗永)이 몽둥이를 막으려고 낫을 휘두르다 잘못해 인명을 해친 것이나 지청학(池靑鶴)이 술에 취하여 제 아내를 찌르고 술이 깨자 관(官)에 고한 것은 모두 본마음으로 한 것이 아니니, 사형을 감하여 주어라."
하였다. 지평(持平) 정옥(鄭玉)이 전계를 거듭 아뢰고, 또 아뢰기를,
"사형에서 감면된 이현민(李玄民)·지청학(池靑鶴) 등을 법에 따라 처단하소서."
하고, 헌납(獻納) 이도겸(李道謙)이 전계를 거듭 아뢰고, 또 아뢰기를,
"김두영(金斗永)을 법에 따라 처단하소서."
하였으나, 모두 윤허하지 않았다.

 

11월 25일 무인

오언주(吳彦胄)를 사간으로, 이수항(李壽沆)을 전광도 관찰사(全光道觀察使)로, 김성운(金聖運)을 강춘도 관찰사(江春道觀察使)로, 서명구(徐命九)를 병조 참의로 삼았다.

 

이에 앞서 임금이 병조 판서 박문수(朴文秀)에게 명하여 금군 절목(禁軍節目)을 편수케 하였는데, 이날 임금이 진연(診筵)에 나아가 가져다보고 하교(下敎)하기를,
"지금부터 금군은 이로써 규모가 있게 되었으니, 영구히 준수하도록 하라."
하였다.

 

11월 26일 기묘

사헌부(司憲府)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11월 27일 경진

소대(召對)를 행하였다.

 

11월 28일 신사

소대를 행하였다.

 

11월 29일 임오

부교리(副校理) 이정보(李鼎輔)가 상소하기를,
"하늘은 노여움을 그치지 아니하여 견책하는 뜻을 거듭 알리고 민심은 두려워하고 흉흉하여 진정할 수 없으니, 조만간 화란(禍亂)이 일어난다는 것은 지혜 있는 사람의 말을 기다리지 않더라도 알 수 있는데, 전하께서는 끝내 대오 각성하지 못하시고 한결같이 경진(競進)하시어 그 위망은 앉아서 맞이할 수 있습니다. 삼가 듣건대 며칠 전 밖에 나가 있는 여러 신하가 기한이 넘어도 돌아오지 않는다 하여 대간(臺諫)이 장주(章奏)로 준엄하게 발론하고 성상의 하교(下敎)도 엄절하였다고 합니다. 대저 밖에 나가 있는 여러 신하들이 조정에 나왔다가 다시 물러간 것은 어찌 그들이 마음으로 즐겨 한 것이겠습니까? 근래 조상(朝象)을 잠깐 엿본다면 맨 처음 발단된 일은 엄중히 다스리자는 논계(論啓)를 정지시켜 임금의 권위를 실추시키고 허물게 한 것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내 뜻에 맞지 않는 사람을 해치려는 마음이 점점 심해져서 보이지 않는 곳에 함정을 다시 파 놓고는 아침에 한 사람을 제거하고 저녁에 한 사람을 또 제거하여, 조정 인원의 거의 절반이 비게 되었습니다. 그런데도 혹은 같은 조정에 함께 있기를 즐겨 하지 않는다는 핑계를 대고 혹은 아직도 구습(舊習)을 버리지 못하고 있다고 격동(激動)시켜 나와 다른 사람들은 들추어내 모두 임금의 명을 어긴 죄로 귀착하고, 세상 사람의 절반을 몰아쳐 조정에 앉아 있기가 불안하도록 하여, 종말에는 조정을 나간 여러 신하들을 중죄로 처벌해야 한다는 논계를 내어 그들로 하여금 들볶이게 하여 처신하기가 군색하도록 하였으니, 그 설계가 참으로 교묘하였습니다. 박격(博擊)의 논의가 전라도 관찰사(全羅道觀察使)와 우포도 대장(右捕盜大將)에 대한 논계에 나온 데 이르러서는 극도에 달하였으니, 신은 어떠한 의도가 숨겨져 있는지 알지 못하겠습니다마는, 지평(持平) 정옥(鄭玉)은 견책하여 파직하심이 마땅합니다."
하였다. 상소가 들어가자, 하교하기를,
"인화(人和)가 된 뒤라야 시의(時議)도 조정될 수 있는데, 아! 개벽(開闢)의 유시가 있은 후에도 비단 혼돈(混沌)함이 다름이 없을 뿐만 아니라, 그 공격하고 배척함이 먼저 하지도 않고 뒤에 하지도 않아서, 그 의심하고 막혀 있는 것 역시 지난날과 다름이 없어서 조정이 절반은 비었다는 말을 제가 감히 글로 아뢰었으니, 부교리 이정보는 삭직(削職)하라."
하고, 이어서 하교하기를,
"아! 이정보뿐만 아니라 여러 신하들이 머뭇거리며 아직도 구습을 답습하고 있는 것은 모두 ‘나라도 옛날 나라요 사람도 옛사람이다.’라는 따위의 말에 연유한 것이다. 이것으로 미루어 보건대, 나의 명령을 어지럽히는 자가 누군인가? 태아(太阿)411)  가 무디지 않으니, 먼저 그 뿌리부터 베어버릴 것이다. 대소 신료들에게 자문하니, 지난날의 광유(廣諭)한 바를 마음속으로 더욱 두렵게 생각하여 국사(國事)에 합심 협력할 것이며, 서울에 있는 신하로서 병을 핑계대며 조정에 나오지 않는 자와 지방에 있는 신하로서 머뭇거리며 관망하는 자는 종중 추고(從重推考)할 것이니, 각기 직위에 따라 즉시 올라오도록 하라."
하였다.

 

11월 30일 계미

경기 여주(驪州) 개군산(介軍山)의 신은천(新恩川)의 물이 몇 식경(食頃) 동안 흐르지 않았다.

 

이일제(李日躋)를 승지로, 김광세(金光世)를 교리로, 정언섭(鄭彦燮)을 병조 참판으로, 홍호인(洪好人)을 한성 우윤(漢城右尹)으로 삼았다.

 

임금이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예조 판서 송진명(宋眞明)이 아뢰기를,
"왕세자 봉전칙(王世子封典勅)이 지금 곧 나올 것이니, 칙사를 영접하는 의주(儀註)를 미리 품정(稟定)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동궁(東宮)이 지금 나이가 어리므로 교영(郊迎)하여 고명(誥命)을 받는 따위의 절차는 모두 임시 방편으로 정지하는 것이 마땅하나, 의주는 예(例)에 따라 문례관(問禮官)이 가는 길에 붙여 보내게 되어 있으니, 원접사(遠接使)로 하여금 말을 잘하여 그만두도록 청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므로, 임금이 옳게 여기고 하교하기를,
"칙사가 기필코 보기를 청한다면 일이 혹시 난처해지지 않겠는가?"
하니, 영의정 이광좌(李光佐)가 아뢰기를,
"나이가 어리다고 핑계대면 무슨 곤란한 일이 있겠습니까?"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이정보(李鼎輔)의 상소는 참으로 괴이하다. 송(宋)나라의 종택(宗澤)이 중원(中原)을 회복하지 못하여 병이 들어 누워 있는 가운데 크게 고함을 질렀다고 하는데412)  , 나 역시 오늘의 기상(氣象)이 정상적이 아님을 염려하고 조정(朝廷)이 인화(人和)를 이루지 못함을 근심하여 거의 고함을 지를 지경이다. 영의정이 비록 늙었으나 치사(致仕)했다가 다시 일어나 원보(元輔)가 되었고, 이조(吏曹)·호조(戶曹)·병조(兵曹)의 세 판서(判書) 역시 적당한 사람을 얻었으므로, 비록 이정보의 말이 있었으나 내가 어찌 얕은 참소를 믿겠는가?"
하니, 이광좌가 아뢰기를,
"오늘날 가장 긴요한 방도로는 성상께서 스스로 강해지시는 것과 재상으로서 적당한 사람을 얻는 것보다 더할 것이 없으니, 신과 같은 사람은 물리쳐 내보내시면 다행하겠습니다."
하므로, 임금이 말하기를,
"내가 만약 경(卿)보다 낫다면 그래도 그렇게 할 수 있겠지만, 사실 경보다 낫지 않다. 경이 고집하는 것도 나라를 위한 고심(苦心)임을 나 역시 알고 있다. 경이 재상이 되고부터는 나의 마음에 얻은 것이 있는 것 같다. 경이 접때 비록 문을 밀고 들어오려고 하여도 만약 흥화문(興化門)을 닫았더라면 경이 어떻게 들어올 수 있었겠는가? 경의 마음을 펴게 하려고 들어오도록 한 것이다. 내가 음식을 먹지 않는 것을 두고 저 당파에 병든 자들은 필시 웃겠지만, 오늘날 바라는 바는 오로지 경들이 부지런히 힘쓰는 데에 있다. 홍정명(洪廷命)이 어떤 사람인지 알지 못하지만 윤양래(尹陽來)를 쫓아냈고, 또 이우하(李宇夏)의 상소와 신치근(申致謹)이 범론(泛論)한 계사(啓辭)가 있었는데, 그것이 이정보의 말을 초래한 까닭이었다."
하니, 이광좌가 아뢰기를,
"광유(廣諭) 후에 인심이 감동하여 거의 돌아섰는데, 오로지 안에서 나무라고 책망한 연유로 끝내 이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하고, 우의정 송인명이 아뢰기를,
"초(楚)나라와 월(越)나라처럼 소원(疏遠)한 사람들이 어떻게 하루아침에 혼합하게 되겠습니까? 진실로 지극히 공정하고 지극히 성실하게 하면 어찌 보합(保合)하는 방법이 없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경들이 부지런히 힘쓸 것 같으면 나는 거의 의지할 바 없는 임금은 되지 않을 것이다."
하였다. 송인명이 아뢰기를,
"청컨대 명나라 장수 이여매(李如梅)의 후손인 이면(李葂)을 녹용(錄用)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이광좌가 아뢰기를,
"훈련 도감(訓鍊都監)의 지구관(知彀官)과 기패관(旗牌官)을 옛날에는 그 항오(行伍)에서 승차(陞差)하였는데 지금은 지방(地方) 사람의 자리가 되어 있으니, 옛날 제도로 환원하는 것이 옳습니다."
하므로, 임금이 말하기를,
"비바람 속에서 조련하며 열심히 근무하고 노고를 쌓은 사람이 자연스럽게 승차(陞差)되어야 마땅한데, 어찌 반드시 지방인을 써야 하는가? 근래 승호 포수(陞戶砲手)413)  가 군첩(軍帖)에 그 이름을 올리려 하지 않는 것도 역시 이 법을 오랫동안 폐지하여 권장할 만한 것이 없는 까닭이다. 훈련 도감에 신칙하여 차례로 가려서 보임하도록 하라."
하였다. 동래 부사(東萊府使) 윤심형(尹心衡)이 병을 핑계로 부임하지 않는다 하여 비국 당상이 개차(改差)하기를 청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윤심형이 그의 숙부 때문에 전부터 벼슬하지 않는 것도 진실로 근거가 없으며 지금 이 외직(外職) 역시 부임하기를 꺼리고 있으니, 만약 조처하지 않으면 나라를 다스릴 수 없을 것이니 즉시 그 곳에 정배(定配)토록 하라."
하니, 이광좌가 아뢰기를,
"만약 풍토병이 있는 바닷가에 정배하면 생명이 염려스럽습니다."
하였는데, 임금이 말하기를,
"왜 이렇게 구차스럽게 용서하려 하는가?"
하며 이어 나처(拿處)하라고 명하였다. 지평(持平) 권일형(權一衡)이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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