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영조실록46권, 영조 13년 1737년 12월

싸라리리 2025. 9. 19. 11:06
반응형

12월 1일 갑신

유성(流星)이 소미성(少微星)에서 나와 남방으로 들어갔는데, 모양은 주먹 같았고 꼬리의 길이는 3,4척이었으며 빛깔은 붉었다.

 

하교(下敎)하기를,
"청(淸)나라에 주청(奏請)한 것이 받아들여졌음을 함께 경하하는 뜻으로 멀고 궁벽한 곳부터 먼저 은전을 베풀어야겠다. 무신년414)  에 위협에 못이겨 따랐던 무리로서 그 죄가 곤장을 맞고 방면된 것에 지나지 않는 자와, 변방에서 밀무역을 하다가 도망하여 숨은 무리로서 관청에 자수하거나 혹은 향리에 스스로 돌아간 자에 대해서는 각도(各道)에 유시하여 그 허물을 묻지 말고 상민(常民)으로 대하며 어루만져 교화하도록 하라."
하였다.

 

12월 2일 을유

유성이 남하성(南河星) 아래에서 나왔는데, 모양은 주먹 같았고 꼬리의 길이는 3,4척이었으며 빛깔은 흰색이었다.

 

안상휘(安相徽)를 집의로, 오수채(吳遂采)·김상로(金尙魯)를 교리로, 박사정(朴師正)을 이조 참의로, 홍창한(洪昌漢)·정익하(鄭益河)를 부수찬으로, 남태량(南泰良)·송교명(宋敎明)을 수찬으로, 이석표(李錫杓)를 부교리로, 구택규(具宅奎)를 동래 부사(東萊府使)로 삼았다.

 

12월 3일 병술

유성(流星)이 유성(柳星) 아래에서 나왔는데, 모양은 주먹 같았고 꼬리의 길이는 3,4척이었으며 빛깔은 붉은색으로 빛이 땅을 비추었다.

 

12월 5일 무자

함경도에 큰 돌림병이 들어 소가 많이 죽었다.

 

12월 6일 기축

임금이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우의정 송인명(宋寅明)이 아뢰기를,
"이병상(李秉常)은 병이 깊고, 김취로(金取魯)는 그 어미의 병이 위독하니, 둘 다 가여운 생각이 듭니다."
하니, 임금이 김취로의 석방을 명하고 말하기를,
"이병상은 용서한 것이 이미 많으니, 말하지 말라."
하였다.

 

좌의정 김재로(金在魯)의 정사(呈辭)가 1백 번을 채웠으나, 거듭 마음놓고 조섭하라는 비답을 내렸다.

 

주서(注書) 이형만(李衡萬)이 상소하기를,
"승지(承旨) 신치운(申致雲)은 일찍이 사문(斯文)을 욕되게 하여 의리상 낭속(郞屬)으로 삼을 수 없는데도 배수(拜授)하였습니다."
하니, 사암하지 말라고 비답하였다.

 

윤득징(尹得徵)을 장령으로, 이성중(李成中)을 지평으로, 정이검(鄭履儉)을 부교리로 삼았다.

 

12월 10일 계사

사헌부(司憲府)  【지평(持平) 이성중(李成中)이다.】 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며칠 전 간신(諫臣)의 상소에 ‘노예(奴隷)’라는 두 자는 큰 망발로서 삼사(三司)로 하여금 함께 배척을 당하여 임금을 경멸하는 길을 열고 재상을 능멸하기에 충분하였으니, 전(前) 정언(正言) 김상중(金尙重)을 파직시켜야 마땅합니다. 이 일로 인해 불결(不潔)한 말을 뒤집어썼다는 등의 말이 도리어 편지에 오르기에 이르렀으니, 어찌 괴롭고 피곤하지 않겠습니까? 전 사간(司諫) 오언주(吳彦胄)를 파직시켜 마땅합니다. 혐의를 받을 길이 너무나 넓고, 또 사문(斯文)이 서로 다투어 마치 쌍방이 인피(引避)할 길을 열어 놓은 것처럼 되었으니, 어떻게 편안할 때가 있겠습니까? 전 주서(注書) 이형만(李衡萬)은 파직시켜야 마땅합니다. 홍호인(洪好人)이 북로(北路)에서 부자가 된 것은 실로 문재(文宰)의 수치인데도 감히 한(漢)·송(宋)의 명신(名臣)의 고사(故事)를 끌어대어 자기의 허물을 꾸며대고 언관(言官)을 함부로 꾸짖었으니, 파직시켜야 마땅합니다. 실직(實職)의 아경(亞卿)이 얼마나 깨끗하고 높은 자리인데 김환(金鍰)과 같이 들어 본 적도 없는 문벌의 사람이 외람되이 의망(擬望)에 들었으며, 병조(兵曹)의 낭관(郞官)을 직통(直通)하는 것은 바로 극선(極選)에 관계되는 것인데도 이덕관(李德觀)처럼 보잘것없고 한미한 사람이 역시 과람하게 참여하였으니, 청컨대 전관(銓官)을 종중 추고(從重推考)하소서.
하니, 모두 아뢴 대로 하게 하였다.

 

12월 12일 을미

이조 판서 조현명(趙顯命)이 대계(臺啓)로 인하여 상소하기를,
"지난번 우의정의 말을 듣건대, 김환(金鍰)은 참의(參議)의 손자요 사간(司諫)의 아들로서 벼슬에서 물러나 쉰 지 30여 년이고, 나이 또한 90으로서 그의 문장과 학식이 범상하지 않다고 말하는 까닭에 여러 차례 한성부(漢城府)에 의망(擬望)했던 것입니다. 사헌부의 신하는 곧 김환이 벼슬에서 물러난 이후의 사람들이기 때문에 미처 들어 알지 못한 것은 형세로 보아 그럴 수 있지만, 안타깝습니다. 그 말이 경솔하고 날카로우니, 노성(老成)한 사람을 업신여기지 말라는 훈계로써 권면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사임하지 말라."
하였다. 뒤에 지평(持平) 이성중(李成中)이 인피(引避)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신은 연소한 일개 신진(新進)에 불과할 뿐입니다. 말한 것이 어리석고 망령되며 처사가 광망되고 경솔한데도 중신(重臣)이 신을 오히려 매순(梅詢)·증치요(曾致堯)415)   무리로 보고 처치한다면, 신을 대접하는 것이 역시 후합니다. 아! 김환의 명성과 덕망이 진실로 노성한 사람으로서 부끄러울 것이 없는데 신이 감히 업신여겼으니, 매우 상서롭지 못합니다. 중신의 말을 기다리지 않더라도 신 역시 스스로 부끄러워하고 있습니다. 또한 듣건대, 오늘 전주(銓注)에서 은대의 구망(舊望)에 들어 있었던 노성한 사람들을 모두 뽑아 버리고 산림(山林)으로서 초선(抄選)된 선비와 세 조정을 내리 섬기며 벼슬한 사람 역시 간삭(刊削)되어 축출되었다 합니다. 모르겠습니다만, 사송 아문(詞訟衙門)의 자리가 혹시 승정원보다는 한가한 때문입니까, 아니면 경로(敬老)의 은전이 혹시 피차(彼此)에 다름이 있어서입니까?"
하니, 예사 비답을 내렸다.

 

12월 13일 병신

서명구(徐命九)를 승지로, 정석오(鄭錫五)를 이조 참판으로, 김시형(金始炯)을 좌참찬으로, 김유경(金有慶)을 부제학으로, 조최수(趙最壽)를 대사헌으로, 김상로(金尙魯)를 집의로, 김중희(金重熙)를 사간으로, 송징계(宋徵啓)를 헌납으로, 조명리(趙明履)·정준일(鄭俊一)을 정언으로, 서명신(徐命臣)을 부교리로, 정형복(鄭亨復)을 수찬으로, 임상원(林象元)을 겸설서(兼說書)로 삼았다.

 

12월 14일 정유

유성(流星)이 항성(亢星) 아래에서 나와 동방으로 들어갔는데, 모양은 주먹 같았고 꼬리의 길이는 2척 정도였으며 빛깔은 붉은색이었다.

 

12월 15일 무술

정이검(鄭履儉)·정익하(鄭益河)를 교리로, 김광세(金光世)를 부교리로, 윤광의(尹光毅)·서명신(徐命臣)을 부수찬으로, 이유신(李裕身)을 헌납으로, 김낙증(金樂曾)·이태중(李台重)을 정언으로, 이주진(李周鎭)·신만(申晩)을 승지로 삼았다.

 

사헌부(司憲府)  【장령(掌令) 박이문(朴履文)이다.】 에서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장태소(張泰紹)·윤지(尹志)·신윤정(申潤廷)·김세윤(金世潤)·박경순(朴景淳)의 일은 정계(停啓)하였다.

 

12월 17일 경자

소대(召對)를 행하였다.

 

임금이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이때 익명으로 투서한 글에 병조 판서 박문수(朴文秀)와 호조 판서 박사수(朴師洙)에 관한 일이 있어서 두 신하가 모두 소(疏)를 올리고 인입(引入)하였다. 우의정 송인명(宋寅明)이 아뢰기를,
"이른바 익명서(匿名書)에 쓰인 말이 어떠한 것인지 아직 알 수 없지만, 고(故) 상신(相臣) 이완(李浣)·남구만(南九萬)·민정중(閔鼎重) 여러 사람이 모두 강직하고 엄격하게 법을 집행하고도 일찍이 이런 일을 당한 적이 있었으나, 인입한 적이 없었습니다. 그 뒤 윤지인(尹趾仁) 역시 이와 같은 일을 당하여 대명(待命)까지 하기에 이르렀는데, 대개 투서의 말이 지극히 패악하였다고 합니다. 지금 두 중신이 당한 것은 윤지인과는 다르니, 독촉하여 나오게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내가 비록 한소제(漢昭帝)와 같은 명철함은 없으나, 이것은 곧 이속(吏屬)들이 한 것으로 안다. 옛날에도 화살을 날려 궁중으로 들여보낸 적이 있다고 하니, 이는 오직 위에 있는 자가 억눌러 진정시키는 데 달려 있다."
하고는 비답을 내려 엄중히 신칙하고 소장(疏章)을 받아들이지 말도록 하였다. 장령 박이문(朴履文)이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송인명이 아뢰기를,
"무신년416)  에 죄지은 사람이 지금 10년이 되었으니 차례로 감쇄(減殺)한다 해도 불가할 것이 없으나, 조정의 일이 다른 것은 조금도 효과를 거둔 것이 없으면서 오직 이 역옥(逆獄)에 관계되는 것만은 필경 다 정계(停啓)하고 말았으니 실로 개탄할 일입니다."
하였다. 박이문이 인피(引避)하여 아뢰기를,
"한 해 이상 법을 집행하기를 다투어도 성상께서 윤허를 아끼시는 비답을 내리셨고, 또 윤지(尹志)·신윤정(申潤廷)·김세윤(金世潤)·박경순(朴景淳) 등의 죄목이 민윤창(閔允昌)에 견주어 보아 차이가 없지 않은 까닭에 어제 마침내 구별하여 정계(停啓)하였는데, 대신이 배척하니 편안하게 있을 수가 없습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사임하지 말라."
하였다. 교리(校理) 정익하(鄭益河)가 차자(箚子)로써 처치(處置)하여 아뢰기를,
"윤지 등은 모두 악역(惡逆)에 관계되어 법으로 다스리자는 논계(論啓)는 공의(公議)가 지극히 엄중한데, 일개 대신(臺臣)이 갑자기 독단해 정계한 것은 국법을 어기고 손상시킨 것입니다. 청컨대 박이문을 파직하여 서용하지 마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12월 18일 신축

유엄(柳儼)을 도승지로, 신만(申晩)을 이조 참의로, 조상경(趙尙絅)을 공조 판서로, 이종백(李宗白)을 승지로, 조윤제(曹允濟)를 지평으로 삼았다.

 

12월 19일 임인

소대를 행하였다.

 

12월 20일 계묘

달이 태미 서원(太微西垣)으로 들어갔다.

 

소대(召對)를 행하였다.

 

12월 21일 갑진

유건기(兪健基)를 승지로, 박필주(朴弼周)을 집의로, 김정윤(金廷潤)·남태량(南泰良)을 장령으로, 조명리(趙明履)를 지평으로, 윤순(尹淳)을 지경연사(知經筵事)로, 윤혜교(尹惠敎)를 홍문관 제학(弘文館提學)으로 삼았다.

 

12월 22일 을사

임금이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무릇 익명서(匿名書)란 부자간에도 서로 전할 수가 없는 것이 곧 나라의 법이다. 이뒤에 비록 큰 길에 걸려 있는 것이 있다 하더라도 먼저 본 사람이 먼저 그것을 없애야 하며, 남에게 전해 준 자는 중죄로써 다스릴 것이다."
하니, 여러 신하들 가운데 이것을 가지고 감히 고집하는 사람이 없었다. 예조 판서 송진명(宋眞明)이 아뢰기를,
"고(故) 감사(監司) 유명응(兪命凝)의 효행이 탁월하니, 청컨대 정려(旌閭)를 세워 포상하게 하소서."
하므로, 임금이 특별히 벼슬을 증직하고 정려를 세우게 하였다. 송진명이 또 아뢰기를,
"무신년417)  에 거창(居昌) 좌수(座首) 이술원(李述原)의 세운 공이 뛰어나니, 청컨대 영남 선비들의 정문(呈文)에 의해 사당의 건립을 허락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경상도 관찰사 유척기(兪拓基)가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영남 지방에서 재해를 입은 것이 신해년418)  과 차이가 없어서 연해의 23고을은 대부분 진휼을 베풀었고, 이 밖의 평야나 산간에 있는 고을로서 진휼을 베풀어야 할 곳이 또 22고을이 됩니다. 또 지금의 공경(公卿)과 시종(侍從)은 호서(湖西) 지방의 사람이 많은 까닭에 호남(湖南)·호서에서 흉년이 들면 쉽게 공론으로 삼지만 영남 고을에서 재해를 입게 되면 묘당(廟堂)에서는 풍년든 해와 같이 보아서 견감(蠲減)이 다른 도(道)와 현격하게 다를 뿐만 아니라 또 포항창(浦項倉)의 곡식을 바닷길로 멀리 수송하도록 독촉하니, 어째서 관북(關北) 지방은 후대하고 영남 지방은 박대하는지 모르겠습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조정에서 내린 명령에 이처럼 장황한 소리를 하니, 이 무슨 사체(事體)인가? 포항창은 오로지 관북 백성을 위한 것인데 버틸 수 있겠는가? 즉시 거행토록 하라."
하였다.

 

12월 23일 병오

유성(流星)이 진성(軫星) 아래에서 나왔는데, 모양은 주먹 같았고 꼬리의 길이는 3,4척이었으며 빛깔은 붉은색이었다.

 

소대(召對)를 행하였다.

 

12월 25일 무신

민원(閔瑗)을 장령으로, 이광식(李光湜)을 헌납으로, 이석표(李錫杓)·이덕중(李德重)을 이조 좌랑(吏曹佐郞)으로, 이언상(李彦祥)을 남병사(南兵使)로, 구성익(具聖益)을 통제사(統制使)로 삼았다.

 

임금이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영의정 이광좌(李光佐)가 눈물을 흘리며 아뢰기를,
"성상의 자질이 아름답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분발하시어 크게 진취(進取)하시려 하지 않으시고 구습에 젖어 오늘에 이르렀습니다. 세월은 유수와 같은데 신은 매양 죽기 전에 나라가 잘 다스려지는 것을 보지 못하여 장차 눈을 감지 못하는 한이 되지 않을까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경의 마음을 나 역시 알고 있다."
하였다. 우의정 송인명(宋寅明)이 아뢰기를,
"처리하는 일이 모두 합당한 뒤라야 백성의 마음을 감복시킬 수 있습니다. 만약 위엄과 형벌이 정도에 넘거나 정령(政令)이 번거롭고 좀스러우면 잘 다스려질 수가 없습니다."
하므로, 임금이 말하기를,
"아는 것이 어려운 게 아니라 행하는 것이 어렵다."
하였다. 이광좌가 아뢰기를,
"내년은 곧 충신 김응하(金應河)가 심하(深河)에서 충절을 지켜 죽은 해이니, 청컨대 사제(賜祭)하소서."
하니, 임금이 전망일(戰亡日)에 맞추어 근신(近臣)을 보내 치제(致祭)하게 하였다. 이조 판서 조현명(趙顯命)이 아뢰기를,
"신이 제배(除拜)하던 날 입시하여 오랫동안 벼슬길이 막혀 있던 사람에게 길을 열어 주라는 명을 삼가 받들었으나, 벼슬길이 막히고 버려진 지 햇수가 오래된 사람들을 일개 전관(銓官)이 갑자기 길을 열어 줄 수 있는 것이 아니었으며, 또 대신도 어떤 사람이 어떤 사건으로 죄를 입었는지 모르니 천천히 면밀하게 살피는 것이 타당하다고 이르기에 신이 삼가 관안(官案)을 고찰하여 20여 명을 뽑아 기록하여 왔습니다.
하니, 임금이 아뢸 것을 명하였다. 조현명이 아뢰기를,
"이성조(李聖肇)는 바로 이세우(李世遇)의 조카이며 이세우는 곧 역적 이하(李河)의 친사돈입니다. 이세우가 만약 자백[承款]하였다면 이성조는 자연히 수용(收用)되어야 할 것인데, 이세우가 장하(杖下)에서 죽은 까닭에 중간에 수용되었다가 논박(論駁)을 당하여 벼슬길이 바로 막혔습니다."
하므로, 임금이 말하기를,
"역률(逆律)이 적용되지 않았는데 그 일족의 벼슬길을 막는 것은 지나치다. 원보(元輔)는 항상 힘써 나에게 구신(舊臣)을 임용하도록 도모(圖謀)하라고 하는데, 이성조는 비록 하대부(下大夫)이지만 구신이다."
하였다. 송인명이 아뢰기를,
"성상의 뜻이 비록 지극하시나, 이것은 가볍게 논의할 수 없습니다."
하였다. 조현명이 또 윤봉조(尹鳳朝)·이의천(李倚天)·박치원(朴致遠)·권부(權孚)·강박(姜樸)·여선장(呂善長)·유필원(柳弼垣)·임광(任珖)·강필신(姜必愼)·강필경(姜必慶)·김홍석(金弘錫)·홍상인(洪尙寅)·홍중징(洪重徵)·송택상(宋宅相)·이석신(李碩臣)·이거원(李巨源)·이태원(李太元)·박장윤(朴長潤)·윤서교(尹恕敎)·조정(趙侹)·박내우(朴來羽)·박징빈(朴徵賓)·박사순(朴師順)을 아뢰었다. 임금이 말하기를,
"박치원(朴致遠)의 죄는 바로 탐장(貪贓)이므로 살아 있는 것만도 다행하니, 논의할 수 없다. 그 밖의 여러 사람들은 무슨 일인가?"
하니, 조현명이 아뢰기를,
"강박은 곧 이순관(李順觀)의 적생질(嫡甥姪)인데 이순관 형제의 반역을 범한 사실이 낭자했던 까닭에 강박도 이것으로 말미암아 역시 임용되지 못하고 있습니다. 여선장은 일기(日記)의 일로 지금까지 벼슬길이 막혀 있고, 임광은 윤수(尹邃)의 논계에 의견을 달리하여 전에 피혐(避嫌)한 적이 있었는데 지금 윤수가 살아서 옥문을 나왔으니 어찌 영구히 막을 수 있겠습니까? 강필신·강필경은 특별히 관계한 일이 없습니다. 이거원은 목호룡(睦虎龍)에 대한 교서를 찬술한 일로써 벼슬길이 막혔으나 김일경(金一鏡)이 삭출(削黜)될 때 이진수(李眞洙)와 더불어 신원하여 구제하려 한 적이 있었는데, 지금은 연천 현감(漣川縣監)으로 있습니다. 이태원은 병조 좌랑(兵曹佐郞)으로서 내성(內省)에 입직하여 김일경에 대한 교서를 쓸 때 그 글의 자획(字劃)을 문제삼아 꾸짖은 일이 있었는데, 그뒤에 연속 양사(兩司)에 임용되었다가 조상경(趙尙慶)이 공박하여 귀양을 보내었고, 그다음은 바로 박장윤(朴長潤)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박장윤은 형편없는 사람이다."
하므로, 조현명이 아뢰기를,
"윤서교는 관계되는 바가 매우 중대하며, 또 조정이 있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조정이 지금까지 막혀 있는가? 박징빈은 무슨 일인가?"
하므로, 송인명이 아뢰기를,
"전(前) 공조 판서 윤순(尹淳)을 공박한 일로 그렇게 되었는데, 어찌 말 한마디의 실수로 영구히 벼슬길이 막힐 수 있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박내우는 누구인가?"
하였는데, 송인명이 아뢰기를,
"박만보(朴萬普)의 조카인데 박만보가 이미 신설(伸雪)되었으니, 그의 조카의 벼슬길을 막을 수 없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박사순은 무슨 일인가?"
하므로, 송인명이 아뢰기를,
"박사순은 과거 나주(羅州)의 회진(會津)에 살고 있었는데 역적들의 초사(招辭)에 회진의 박가(朴哥) 등의 말이 있었던 까닭에 막혔었는데, 지금 마전 군수(麻田郡守)로 있습니다."
하니, 조현명이 아뢰기를,
"이 사람들에게 바로 옛 관직에 나가도록 하는 것이 옳겠습니까, 아니면 먼저 고을에 보내어 시험해 보고 점차 거두어 쓰는 것이 옳겠습니까?"
하였는데, 임금이 말하기를,
"이미 전조(銓曹)에 맡겼지만 세상에서 억울하다고 일컫는 사람은 비록 전의 관직을 주는 것도 역시 옳은 일인데, 굳이 먼저 지방관으로 시험해 볼 필요가 있겠는가?"
하였다.

 

12월 26일 기유

소대(召對)를 행하였다.

 

12월 27일 경술

이진순(李眞淳)을 대사헌으로, 김유(金濰)를 대사간으로, 신택하(申宅夏)를 사간으로, 신겸제(申兼濟)를 장령으로 삼았다.

 

주청 상사(奏請上使) 서명균(徐命均), 부사(副使) 유엄(柳儼), 서장관(書狀官) 이철보(李喆輔)가 복명(復命)하였다. 임금이 인견하고 말하기를,
"큰 일을 순조롭게 이루어 내가 웃음을 띠고 맞이한다."
하며, 이어서 피중(彼中)의 사정을 물었는데, 유엄이 아뢰기를,
"건륭(乾隆)419)  은 지금 바야흐로 선제(先帝)의 거상(居喪) 중에 있어서 정사가 자못 유약(柔弱)하다고 합니다. 피인(彼人)이, ‘동궁이 친히 봉전(封典)을 받을 수 있는가?’ 하고 묻기에 신 등은 그저 일을 성취하기에 급하여, ‘친히 받을 수 있다.’라고 대답하였습니다. 그러나 칙사(勅使)가 온 뒤에 정지하자고 청할 수 있을 것입니다. 통관(通官) 유만권(劉萬權)이 힘써 주선한 것이 자못 많았는데 사소한 증여(贈與)는 모두 받지 않았으니, 그의 속뜻은 많이 얻으려는데 있었던 듯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정축년420)  의 전례가 있으니, 그것에 의거하여 주는 것이 좋을 것이다."
하였다. 유엄이 아뢰기를,
"역관(譯官) 한수희(韓壽熙)가 강희(康熙)421)  의 문집(文集)을 얻어 왔는데, 강희는 세 살 때에 태자(太子)에 봉해졌다고 합니다."
하였다. 세 사신과 역관에게 차등을 두어 상을 주었다.

 

좌의정 김재로(金在魯)가 차자(箚子)를 올리기를,
"신은 영의정에 대하여 지극히 원통한 일이 있었기 때문에 평상시에 똑바로 보고 싶지도 아니하였는데, 지금 위령(威令)이 두려워 공사(公事)를 칭탁하여 어깨를 나란히 하여 무릎을 맞댄 채 난만(爛漫)하게 수작하고 있지만, 이는 진실로 영화를 탐하고 윤리를 업신여기는 매우 염치없는 짓이니, 신이 어찌 차마 이렇게 할 수 있겠습니까? 성상께서는 또 여러 신하들이 망설이고 조정에 나오지 않는데 대해 그 허물을 신에게 돌리셨으나, 신이 나가지 않는 것은 스스로 사의(私義)를 위한 것인데 다른 사람에게 무슨 일을 간범하였다는 것입니까? 대개 지난날 성상의 지나친 거조는 옛 사첩(史牒)에도 없던 일이었는데, 세월이 이미 바뀌고 사륜(絲綸)이 간절하여 붕당을 지어 아부하는 것을 기필코 모두 변화시키려고 하였습니다. 비록 조태언(趙泰彦)은 과거의 예에 의하여 처치(處置)하였으나 오히려 법률로 처벌하려고 하셨기 때문에 온 조정이 놀라고 두려워하여 털끝만한 파당적 습성도 다시 움트지 않은 것 같았는데, 얼마 되지 않아서 조정 위에는 당습(黨習)이 옛과 같은데도 전하께서는 한결같이 관대하게 처분하시고 조금도 제재하고 억누른 사실이 거의 없었습니다. 또한 대열의 사람들을 보건대, 두려워서 감히 숨도 한 번 내쉬지 못하면서도 스스로는 ‘성상의 본의가 애당초 대진퇴(大進退)에 있는 것이다.’라고 이르면서 당색이 같은 자는 옹호하고, 다른 자는 내치기를 더욱 기탄없이 하였으니, 전하의 임조(臨朝)하시어 탄식함이 아니었으면 그 사이에 또 몇 가지의 일이 생겼을지도 모릅니다. 저 여러 신하들이 혹은 몸소 박축(搏逐)을 당하기도 하고, 혹은 위태롭고 약한 처지에 있기도 하고, 혹은 용납되기 어려움을 알기도 하며, 혹은 부끄러운 말로 구차스럽게 머뭇거리어 스스로 불합함을 면하지 못하고 있을 따름입니다. 만일 지극히 명철하심으로 밝게 살피시어 정성을 다해 불러 모으신다면 조정이 갖추어지지 않고 시상(時象)이 어그러져 있음을 걱정할 것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하니, 비답하기를,
"위의 항목에서 아뢴 것은 이미 면유(面諭)하였으니 경이 집착하는 의리는 끝내 대의(大義)와 상반(相反)되며, 아래 항목에서 아뢴 것은 아! 각선(却膳)할 때 여러 신하가 차마 나를 버리지 못하는 것을 보고 이로 인해 거의 만회하리라 바랐는데 이병상(李秉常)이 먼저 반대되는 말을 진달하였고, 그 뒤에 앞서지도 않고 뒤처지지도 않은 일이 일어나서 갈등이 생겼던 것이다. 홍정명(洪廷命)이 배척한 것은 유신(儒臣)이 아뢴 것을 주워 모은 것이었고 그 외에는 제재하고 억누른 적이 거의 없었는데, 민응수(閔應洙)가 망설이며 조정에 나오지 않는 것과 다른 중신(重臣)들이 고향을 찾아간 것이 과연 모두 박축(搏逐)한 것이란 말인가? 하물며 ‘위태롭고 약한 처지에 있다’는 대목 이하의 말들은 경이 어찌 이렇게 말할 수 있는가? 과거 이정보(李鼎輔)의 이른바 ‘반쪽 조정’이란 말은 참으로 비난할 만하다. 경의 평소 편당되지 않는 마음으로서 어찌 차마 다시 당색이 같은 사람을 옹호한다고 말하는가? 그윽이 경을 위해 개탄스럽다. 아! 대진퇴(大進退)를 하려는데 내 비록 나약하지만 어찌 음식을 물리치고 하겠는가? 아! 경을 신임한 지도 오래이고, 경을 익히 알고 있다. 기필코 조정(調停)하려고 하니, 다같이 공경하고 협력하여 사양하지 말고 정부를 보살펴 어려운 시국을 함께 타개하도록 하라."
하였다.

 

12월 28일 신해

사헌부(司憲府)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야대(夜對)를 행하였다.

 

12월 29일 임자

유성(流星)이 유성(柳星) 아래에서 나와 손방(巽方)으로 들어갔는데, 모양은 주먹 같았고 꼬리의 길이는 3,4척이었으며, 빛깔은 붉은색이었다.

 

영의정 이광좌(李光佐)가 처음 정사(呈辭)하니, 비답하기를,
"아! 지금이 어떤 때이며 지금의 조상(朝象)이 어떠한데 경 또한 심단(尋單)하는가? 아! 지금 만일 경을 버리면 애초에 어찌 다시 배상(拜相)했겠는가? 국사는 돌아보지 아니하고 단지 염치와 의리만을 돌아본다는 것은 고굉(股肱)의 대신에게 바라는 바가 아니다. 지난번 좌상(左相)의 차자(箚子)가 비록 정도에 지나쳤다 하더라도 경의 너그러운 도량으로 어찌 개의(介意)한다는 말인가? 아침에 두 정승의 단자(單子)를 보고 진실로 말도 하지 않으려고 하고, 함께 오라고 명하려고도 하였으나, 지금 조섭(調攝)중에 있으니 조금 기다렸다가 나의 면유(面諭)를 듣도록 하라."
하였다.

 

도정(都政)을 행하여 오수채(吳遂采)를 이조 좌랑으로, 조명리(趙明履)를 부교리로, 이섭원(李燮元)을 지평으로, 윤심형(尹心衡)을 응교로 삼으니, 이조 판서 조현명(趙顯命)과 병조 판서 박문수(朴文秀)의 정사(政事)였다.

 

사헌부(司憲府)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정언(正言) 김낙증(金樂曾)이 상소하여 10조목을 진달하기를,
"첫째 의리(義理)를 강구하여 임금의 마음을 바르게 할 것이며, 둘째 궁곤(宮壼)과 화합하여 복리(福履)를 누릴 것이며, 셋째 도학(道學)을 숭상하여 선비의 기풍을 진작시킬 것이며, 넷째 충성된 말과 아첨하는 말을 분별하여 좋아하고 미워함을 분명히 할 것이며, 다섯째 옳고 그름을 명백히 하여 제왕의 정도(正道)를 세울 것이며, 여섯째 벼슬 내리는 것을 신중히 하여 사로(仕路)를 맑게 할 것이며, 일곱째 절약과 검소를 숭상하여 나라의 쓰임새를 넉넉하게 할 것이며, 여덟째 수령의 선택을 중히 여겨 나라의 근본을 튼튼히 할 것이며, 아홉째 세자(世子)를 교육하여 덕성(德性)을 기르도록 할 것이며, 열째 하늘의 위엄을 두렵게 여겨 사람으로서의 도리를 닦을 것입니다."
하니, 예사 비답을 내렸다.

 

12월 30일 계축

유성(流星)이 유성(柳星) 아래에서 나왔는데, 모양은 주먹 같았고 꼬리의 길이는 3,4척이었으며 빛깔은 붉은색이었다.

 

사헌부(司憲府)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