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월 1일 갑인
임금이 권농(勸農)하는 윤음(綸音)을 지어 팔도의 도신과 양도(兩都)의 유수(留守)에게 하유(下諭)하였다.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 이의현(李宜顯)이 나이가 많음을 들어 치사(致仕)하기를 바라는 차자를 올렸으나, 임금이 윤허하지 않았다.
1월 2일 을묘
정언 김낙증(金樂曾)이 인피(引避)하면서 말하기를,
"권집(權䌖)의 한 소장은 협잡(挾雜)에 뜻을 기울인 실상이 밝게 드러나 가릴 수가 없습니다. 당초에 전하께서 투비(投卑)001) 하는 벌을 내리신 것은 진실로 참소하는 짓을 미워하시는 뜻에서 나온 것인데, 곧 도로 놓아 주신 것은 또한 무슨 까닭입니까? 천하의 일은 둘 다 옳거나 둘 다 그른 경우는 없는 법입니다. 권집의 말이 무함한 것이 아니라면 대료(大僚)002) 는 장차 어찌해야 하며, 대료가 무함을 받은 것이라면 권집의 소장은 마땅히 어찌해야 하겠습니까? 당초에 권집을 죄준 것은 무함했기 때문이었고, 나중에 권집을 용서해 준 것은 무함한 것이 아니었기 때문입니까? 아! 상벌(賞罰)이란 천하에 공정해야 하는 것으로서, 군상(君上)이 사정을 둘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신은 아마도 대료가 용서해 주기를 청한 것이나 성상께서 용서해 주도록 윤허하신 것이나, 상하 모두 과실이 됨을 면하지 못할 듯합니다."
하니, 임금이 예사 비답을 내렸다.
영의정 이광좌(李光佐)가 좌의정 김재로(金在魯)의 소장으로 인해 또한 사직하는 상소를 진달하니, 임금이 수서(手書)로 답하기를,
"아! 이것이 무슨 현상인가? 위에 있는 사람은 피차를 가리는 마음이 없는데, 아래에 있는 사람들이 오히려 의심하여 멀리하는 생각을 품고 있으니, 어찌하여 한갓 염우(廉隅)만 앞세우고 국가의 일은 돌아보지 않는 것인가? 만일 지금 심단(尋單)할 양이면 애초에 무엇 때문에 배달(排闥)했단 말인가? 아! 각선(却膳)하던 때를 돌이켜 생각해 보건대, 무슨 면목으로 다시 군민들을 대하겠는가? 간략히 수서(手書)로 나의 심중(心中)을 유시(諭示)하니, 오직 경은 조금 양해하고 들어와서 유시를 듣도록 하라."
하였다.
좌의정 김재로(金在魯)가 차자를 올렸는데, 대략 이르기를,
"오늘날 조정의 신하들이 구습(舊習)을 고치지 않은 채 오래 될수록 더욱 방종하여 한정이 없으니, 어찌 특히 성상께서 하유하여 언급하신 몇 가지 일 뿐이겠습니까? 인정이 위구(危懼)하고 경상(景象)이 괴리(乖離)한 것이 전에 비해 10배나 더할 뿐만이 아닙니다. 이는 비록 아랫사람들의 잘못이기도 합니다마는, 또한 반드시 성상께서 조금도 재성(裁省)하지 않으신 채 전에는 지나치게 엄하게 하시다가 후에는 너무 느슨하게 하신 데 연유한 것이 아니라고 할 수 없습니다. 신이 호당 벌이(護黨伐異)에 대해 배척하여 한 말은 고질에 대한 약석(藥石)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었는데, 성상께서 하교하시며 도리어 죄로 삼으셨으니, 그윽이 생각하건대, 이는 고질을 은휘(隱諱)하여 의원을 기피하는 것과 근사한 것입니다. 신이 앞서 말한 것은 특히 그들이 망령되게 췌탁(揣度)하여 외기(畏忌)함이 없음을 가리킨 것이었는데, 망령되게 췌탁하는 저들 또한 어찌 성상께서 당초에 각선하신 것까지도 고의로 진퇴시키려는 데서 나온 것으로 여기지 않겠습니까? 갈수록 더욱 격뇌(激惱)하게 된 데 대하여 말한 것으로서, 이는 곧 공공연하게 전해진 말이고, 신이 고의로 심각한 문구를 만들어서 다른 사람들에 대해 지나치게 의심하려 한 것이 아니었습니다마는, 바라건대, 망언(妄言)한 데 대한 죄를 주소서."
하니, 임금이 수서(手書)로 답하기를,
"저번에 내린 비답은 경을 위해 권면하고 신칙하는 뜻에 지나지 않는 것이었는데, 경은 어찌하여 이와 같이 하는가? 하물며 반쪽 조정이라고 일컬은 것은 자연히 근거가 없는 데로 돌아가게 되었는데, 경이 평소에 지켜온 마음으로 어찌 차마 공공연하게 전해진 말이라고 하는 것인가? 이것을 가지고 서로 버틸 것이라고는 헤아리지 못하였다. 옛사람의 말에, ‘거(莒)에 있었을 때의 일을 잊지 말라003) [無忘在莒]’고 했는데, 경은 각선했을 때에 이미 유신에게 돌아가서 선조를 뵐 면목이 없다고 유시한 말을 잊어버린 것인가? 경 또한 무슨 면목으로 돌아가서 선경(先卿)을 보려 하는가? 오직 경은 조금이나마 양찰(諒察)하기 바란다."
하였다.
1월 3일 병진
지평 정옥(鄭玉)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전하께서 이르신 개벽(開闢)이란 구구하게 사온(賜醞)하고 선반(宣飯)하는 것이나 자질구레하게 호령을 발포하고 시행하는 말단을 면하지 못하는 것인데, 스스로 혼돈(混沌)의 초계(初界)를 부판(剖判)하고 개벽하는 신공(神功)을 크게 여는 것으로 여기고 계십니다. 그러나 오늘날의 시상(時象)을 살펴보건대, 혼돈스러움이 거의 전보다 심한 바가 있고, 개벽하는 일은 아득하여 당세에서는 기약할 수 없으므로, 신은 그윽이 개탄스럽게 여기고 있습니다. 전하께서 하늘의 건실(健實)한 운행을 본받고 땅의 순리하는 덕을 본받아, 사물(事物)을 응접(應接)하실 적에 수식(修飾)하지 마시고 한결같이 진실하게 하신다면, 전하의 성심이 자연히 먼저 개벽되어 신화(神化)가 흘러 퍼지기를 마치 천도(天道)는 말이 없어도 세공(歲功)이 스스로 이루어지듯 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당론이 어그러지고 재이(災異)가 겹쳐 이르는 것은 특히 햇빛 앞의 무지개와 같은 것이니, 어찌 족히 성대(聖代)의 허물이 되겠습니까? 그렇게 하지 않으시고 한갓 구설에만 올리어 억지로, ‘개벽’이니 ‘일초(一初)’니 하는 이름을 붙인다면, 또한 말단이 되는 것입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어찌 유의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였다.
1월 4일 정사
임금이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우의정 송인명(宋寅明)에게 이르기를,
"오늘 경들을 소견(召見)한 것은 묘당의 계책을 위해서가 아니라 의도하는 바가 있어서이다. 각선은 곧 용렬한 임금도 하지 않는 것인데 하였고, 그 당시 경들에게 속아서 드디어 복선(復膳)하게 되었었다. 내가 비록 유약하지만 태아(太阿)004) 를 땅에 버리지는 않았다. 지난날 영상과 민진원(閔鎭遠)에게 밤중에 휴퇴(休退)를 윤허한 것을 경들은 모두 지나쳤다고 여겼었지만, 대개 당쟁을 멈추게 하는 방도에서 나온 것이었다. 각선할 때를 당하여 갑자기 생각이 떠올라 즉시 정승으로 제배(除拜)하여 원보(元輔)005) 가 들어온 뒤에 마음이 조금 놓이게 되었었다. 좌상의 부모를 섬기는 마음은 진실로 불가할 것이 없으나, 내가 하교하기를, ‘사사롭게 수작하는 것은 비록 할 수 없더라도 다만 국사(國事)를 위해 함께 일하는 경우에 있어서는 혐원(嫌怨)을 품는 여지가 있도록 한 것이었는데, 그가 심단(尋單)함은 오히려 부모를 섬기는 데 지나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하였는데, 뜻밖에 차자를 올려서 시상(時象)에 대해 언급하였다. 만일 반드시 체직되고 싶었다면, 오로지 부모를 섬기는 마음을 들어 간절하게 진달했어야 옳을 것인데, 이른바, ‘똑바로 보고 싶지 않다.’고 말한 것은 지극히 그른 것이다. 원보가 심단을 하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나 영상이 시애(撕捱)하고 있는 것이 이미 좌상으로 연유한 것이라면 어찌 좌상이 그르지 않겠는가? 재차 올린 차자에 이른바, ‘공공연하게 전해진 것이다.’라고 말한 것은 더욱 그른 것이다."
하니, 송인명이 말하기를,
"원보가 심단한 것은 진실로 부득이한 것이었습니다. 좌상의 일 또한 무단히 인혐한 것과는 다르지만, 차자 가운데 한 구절의 말은 진실로 지나친 것이었습니다. 이는 상대하지 않으려는 뜻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하였다. 임금이 두루 여러 신하들에게 묻고서 전교를 쓰도록 명하였는데, 이르기를,
"지난번에 각선한 것은 어찌 옛 사첩(史牒)엔들 있었겠는가? 스스로 지나친 거조를 한 것이었으니, 나의 고심을 볼 수 있을 것이다. 위에 있는 사람은 태아를 가지고 뭇신하를 징계하는 것이니, 만일 신하가 무상하다면, 저절로 전헌(典憲)이 있는 것이다. 아! 좌상이 평소 공정을 지켜 왔음은 대소의 사람들이 다 아는 바이고, 평소 진주(陳奏)하는 말 또한 지나치거나 치우침이 없었는데, 지난번의 차자는 어찌하여 그처럼 그릇되었던 것인가? 선주(宣酒)하고 사반(賜飯)한 뒤에 오히려 공사(公事)를 먼저 하지 않고 장황하게 딴 말을 늘어놓은 것은 부모를 섬기는 마음에 손상이 됨을 스스로 깨닫지 못한 것이었다. 지난번에 내린 비답은 경의 마음을 상하게 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향암(鄕闇)으로 처치한 대신(臺臣)은 오히려 중전(重典)으로 처치하려고 하는데, 그보다 몇 배나 되는 대료에게 만약 들리는 말이 없다면 장차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하겠는가? 그 그릇됨을 엄중하게 보여서 신서(臣庶)들로 하여금 모두 임금의 고심을 알도록 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였다. 당초에 임금이 파직하는 벌을 내렸는데, 송인명 등이 극력 청하여 고치니, 김재로(金在魯)가 듣고서 금오(金吾)에서 명을 기다리고 있으므로 임금이 하교하기를,
"이제 와서 가차(假借)하는 것은 또한 예경(禮敬)에 흠이 되므로 특별히 윤허하여 면부(勉副)006) 한다."
하였다.
사간원에서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사헌부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1월 5일 무오
소대를 행하였다.
김유경(金有慶)을 도승지로, 이철보(李喆輔)를 승지로, 송징계(宋徵啓)를 사간으로, 권현(權賢)을 장령으로, 이성해(李聖海)를 정언으로, 남태량(南泰良)을 부교리로, 정익하(鄭益河)를 부수찬으로, 김재로(金在魯)를 판중추부사로 삼았다.
1월 6일 기미
영의정 이광좌(李光佐)가 다섯 차례 정사(呈辭)하였다.
1월 7일 경신
임금이 사직단(社稷壇)에 거둥하였다.
1월 8일 신유
임금이 친히 기곡제(祈穀祭)를 행하였다. 환궁할 때에 영의정 이광좌(李光佐)가 혜정교(惠政橋)에서 지영(祗迎)하므로, 임금이 승지를 보내어 이광좌를 효유하여 거가(車駕)를 따르도록 하였으나, 이광좌가 정세와 병을 들어 간절하게 사양하며 명을 받들지 않고, 이어 관을 벗고 땅에 엎드려 죄주기를 청하였다. 임금이 도승지 김유경(金有慶)에게 명하여 전유(傳諭)하기를,
"지금 내가 연(輦)을 멈춘 것은 경으로 하여금 관을 벗게 하려는 것이 아니다. 경이 만일 지금의 국사와 생민을 생각한다면 어찌 다시 정세를 말할 수 있겠는가?"
하였으나, 이광좌가 땅에 엎드려 일어나지 아니하였다. 임금이 또한 김유경에게 명하여 관을 쓰도록 하였지만, 이광좌가 머리를 조아리며 고사(固辭)하였다. 또 사관(史官)에게 명하여 재차 전유하게 하고, 또 종백(宗伯)007) 송진명(宋眞明)에게 명하여 전유하기를,
"경은 각선하던 때를 잊어버렸는가? 만일 끝내 돌아보지 않는다면, 나는 회가(回駕)하지 않겠다."
하니, 이광좌가 부득이 명을 받들었다. 임금이 길에 연을 멈추고서 또한 판중추부사 김재로(金在魯)에게 하교하기를,
"지난번에 경이 올린 차자는 비록 중도(中道)에 벗어난 것이었으나, 경이 상심하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예우하는 뜻에서 면부를 윤허했던 것이다. 서추(西樞)에 임명한 지 지금 며칠이 되었는데도 아직 임명에 사은(謝恩)하지 않고 있으니, 이 또한 마음이 미쁘지 않은 것인가? 다시 개의하지 말고 즉시 임명에 사은하도록 하라."
하였다. 이날 임금이 희정당(熙政堂)에 나아가 영의정 이광좌를 인견하였다. 임금이 이르기를,
"좌상이 부모를 섬기는 마음으로 인해 갈등이 생기기에 이르렀으나, 경의 차자 내용은 지극히 온자(穩藉)하였다. 그가 비록 심각하게 인혐하였으나, 경이 거취를 그와 똑같이 할 의리는 없는 것이다."
하였는데, 이광좌가 아뢰기를,
"좌상이 신으로 연유하여 체직되었는데, 신이 홀로 태연하다면 이는 염치가 없는 것입니다. 신이 어찌 다시 정승의 직임을 행할 수 있겠습니까? 옛적에 임금이 마주 난간(欄干)에 임어하여 아홉 번 사명(使命)을 보낸 것도 오히려 세상에 드문 대단한 영광으로 일컬어 왔는데, 하물며 신은 10여 차례의 은혜로운 소명(召命)을 받은데다가 법가(法駕)가 길에 오랫동안 머무르게 했으니, 신의 죄는 더욱 용서받기 어렵게 되었습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내가 연을 멈추고 경을 부른 것은 만백성으로 하여금 국가에서 보상(輔相)을 소중하게 여기는 것을 알게 하려는 것이었다."
하였다.
1월 9일 임술
이석표(李錫杓)를 교리로, 송교명(宋敎明)·홍창한(洪昌漢)을 수찬으로 삼았다.
비국에 명하여 어사를 뽑아서 아뢰도록 하였다.
1월 10일 계해
조상명(趙尙命)을 승지로 삼았다.
사헌부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1월 11일 갑자
달이 동정성(東井星)으로 들어갔다.
전광도(全光道)를 다시 전라도로, 강춘도(江春道)를 다시 강원도로 하고, 충원(忠原)·금성(錦城)·원성(原城)·남원(南原)·이천(利川)·장흥(長興)·담양(潭陽)·예천(醴泉)·풍기(豐基)·용인(龍仁)·진위(振威) 등의 고을을 모두 다시 본래의 명칭으로 승격해 회복하도록 명하였다. 대개 역적이 태어난 고을이라 하여 명칭을 낮추었던 것인데, 이제 이미 10년의 시한을 채웠기 때문이었다.
임금이 태묘(太廟)에 전알(展謁)하였다.
1월 12일 을축
이도겸(李道謙)을 장령으로, 윤득경(尹得敬)을 지평으로, 오원(吳瑗)을 부제학으로, 김광세(金光世)를 교리로, 이수항(李壽沆)을 전라도 관찰사로, 김성운(金聖運)을 강원도 관찰사로 삼았다.
영의정 이광좌(李光佐)가 차자를 올려 병을 핑계하니, 임금이 우악(優渥)한 비답을 내렸다.
1월 13일 병인
예조에서 아뢰기를,
"올해는 식년 감시(式年監試)의 복시(覆試)를 2월 초4일로 정했는데, 문묘(文廟)의 석채(釋菜)가 초5일이어서 그 개장(開場)하는 날과 수향(受香)하는 날이 서로 겹치게 되었으니, 청컨대, 복시를 늦추어 거행하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옳게 여겼다.
1월 15일 무진
유성이 동정성(東井星) 아래에서 나왔는데, 크기가 주발만 하였으며, 빛깔은 붉은색이었고 빛이 땅을 비추었다.
1월 16일 기사
이창의(李昌誼)를 지평으로, 서명신(徐命臣)을 정언으로, 이종성(李宗城)을 대사성(大司成)으로 삼았다.
1월 17일 경오
유성이 삼성(參星) 아래에서 나왔다.
이종성(李宗城)을 부제학으로, 이석표(李錫杓)·오수채(吳遂采)를 부교리로, 이성룡(李聖龍)을 공조 참판으로 삼았다.
임금이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이때에 청나라 사람들이 황태후(皇太后) 존호(尊號)와 황후(皇后)를 책봉하는 일로 그 칙패(勅牌)008) 가 먼저 왔었는데, 조정이 세자를 책봉하는 칙명(勅命)으로 잘못 알았다. 좌의정 송인명(宋寅明)이 접대할 도리를 품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어느 칙명을 논할 것 없이 마땅히 우리의 도리를 다해야 한다. 연향에 이르러서는 요사이 제감(除減)하는 사례가 많은데, 이는 칙사가 감하는 것이 아니고, 곧 역관의 무리가 능력을 자랑하려고 중간에서 주선한 것이니, 매우 불가한 일이다."
하였다.
1월 18일 신미
사헌부 【장경 신겸제(申兼濟)이다.】 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고, 또 아뢰기를,
"경상 좌수사 이경철(李景喆)은 오로지 마구 거두어 들이는 것을 일삼아 군정(軍情)이 모두 원망하고 있고 어세(漁稅)를 침학(侵虐)하여 받아들이고 있으므로, 포구의 가호(家戶)가 장차 비게 되었으니 마땅히 파직해야 합니다."
하였으나, 모두 윤허하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전최(殿最)009) 는 얼마나 근엄하게 해야 하는 것입니까? 그런데 공홍 감사(公洪監司) 이보혁(李普赫)이 포폄(褒貶)한 가운데에, ‘제천 현감(堤川縣監) 박필중(朴弼重)은 인기(人器)가 적합하지 않으니 마땅히 반착(盤錯)을 시험해 보아야 한다. 그리고 회덕 현감(懷德縣監) 정석범(鄭錫範)은 우도 할계(牛刀割鷄)010) 하였으니 어찌 또한 부지런하게 힘쓴 것이 아닌가?’ 하였는데, 구어(句語)가 서로 어긋나고 문세(文勢)가 모호하니, 이보혁은 마땅히 종중 추고해야 합니다."
하니, 아뢴 대로 하게 하였다. 사간원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이때에 한림(翰林)을 새로 추천하라는 명이 있었는데, 대교 임상원(林象元)과 겸열 이종적(李宗迪)이 상소하기를,
"요원(僚員) 이제원(李濟遠)을 특별히 삭직하도록 명하셨는데, 비록 본관(本館)의 규례에는 구애됨이 없다고 하더라도 군의를 모으고 중론을 채택하는 것이 아닌 듯합니다."
하였으나, 임금이 재촉하여 거행하도록 하므로, 이종적 등이 민백행(閔百行)·윤상임(尹尙任)을 추천했었다. 영춘추관사 송인명(宋寅明)이 격식을 어겨 억지로 추천한 것이라 하자, 민백행 등이 인혐하고 나오지 않으므로 민백행 등을 잡아다가 가두도록 명하였다. 민백행이 공사(公辭)로 인해 이종적 등을 기척(譏斥)하자, 이종적과 임상원이 진소(陳疏)하여 인혐하니, 예사 비답을 내렸다.
1월 19일 임신
김시형(金始炯)을 판윤으로, 안중필(安重弼)을 우윤으로, 오원(吳瑗)을 부제학으로, 조명리(趙明履)·이석표(李錫杓)를 교리로, 조명교(曺命敎)를 대사성으로 삼았다.
1월 20일 계유
소대를 행하였다.
1월 21일 갑술
임금이 양정합(養正閤)에 나아가 영의정 이광좌(李光佐) 등을 소견하였다. 이때 동궁도 시좌(侍坐)했는데, 임금이 동궁으로 하여금 글자를 써서 사부(師傅)들에게 주도록 하자, 동궁이 즉시 큰 글자를 써서 이광좌 및 이의현(李宜顯)과 서명균(徐命均) 등에게 주니, 여러 신하들이 일제히 헌하(獻賀)하는 말을 하였다.
1월 22일 을해
주강을 행하였다.
1월 23일 병자
임금이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영의정 이광좌(李光佐)가 아뢰기를,
"도승지 김유경(金有慶)은 비록 나이는 늙었지만 정력이 오히려 강건하고 또한 곧 구차(久次)이니, 청컨대 자급을 올려 반송사(伴送使)로 차정(差定)하게 하소서. 김시혁(金始爀) 또한 구차이고 또 사람됨이 충후(忠厚)하니, 청컨대 후일의 사행(使行) 때 일체로 승진시켜 차송(差送)하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김유경은 연이어 소장을 올려 휴퇴하기를 원하였으나, 내가 윤허하지 않았다. 김시혁은 내가 안 지 이미 오래 되었으니, 비국에 임용하는 것이 옳다."
하였다. 이광좌가 사인(士人) 이양원(李養源)은 과거를 폐지한 채 스스로 학문을 닦았고, 봉산 군수(鳳山郡守) 조윤성(趙允成)은 재식(才識)이 있고, 전 군수 조동진(曹東晋)은 담략(膽略)이 있다 하여 조용(調用)하기를 청하였다. 우의정 송인명(宋寅明)은 진사 이재(李在)가 과거를 폐지한 채 스스로 학문을 닦았고, 유학(幼學) 나삼(羅蔘)은 박학(博學)하여 고금의 일에 통하고, 총융청 장관 권계천(權啓天)은 자못 용력(勇力)이 있다 하여 일체로 조용할 것을 청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대신들이 추천하는 바는 자별(自別)하니, 해조로 하여금 조용하도록 하겠다."
하였다. 사간 송징계(宋徵啓)가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1월 24일 정축
주강을 행하였다.
윤순(尹淳)을 좌참찬으로, 이기진(李箕鎭)을 이조 참판으로, 홍상빈(洪尙賓)을 병조 참판으로, 조명리(趙明履)·정이검(鄭履儉)을 교리로, 송성명(宋成明)을 대사성으로, 정희규(鄭熙揆)를 장령으로, 정석오(鄭錫五)를 도승지로, 조적명(趙迪命)을 승지로, 민백행(閔百行)을 겸 설서로, 유언국(兪彦國)을 설서로, 박사수(朴師洙)를 예문관 제학으로, 김재로(金在魯)를 사은 정사(謝恩正使)로, 김시혁(金始爀)을 가선 대부(嘉善大夫)로 승자(陞資)하여 부사로, 김유경(金有慶)을 자헌 대부(資憲大夫)로 가자하여 반송사로, 이양신(李亮臣)을 서장관(書狀官)으로 삼았다.
사간원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1월 25일 무인
임금이 인정문(仁政門)에 나아가 조참을 행하였다. 임금이 이르기를,
"동자(董子)011) 의 이른바, ‘조정을 바로잡음으로써 백관(百官)을 바로잡고, 백관을 바로잡음으로써 만백성을 바로잡는다.’는 것은 간절하고도 지극한 말이다. 오늘날의 조정은 바로잡혀진 것인가, 바로잡히지 않은 것인가? 조정의 규모를 넓히지 못하는 데 대해 근심하고 있으나, 물이 지극히 맑으면 큰 고기가 없는 법이니, 오직 우리 군신(君臣)이 세월과 더불어 모두 새로워지기를 원할 뿐이다."
하자, 영의정 이광좌(李光佐)가 아뢰기를,
"조광조(趙光祖)가 남곤(南袞)과 심정(沈貞)이 용사(用事)할 때를 당하여 제재와 억압을 너무 지나치게 하다가, 마침내 전패(顚沛)를 초래하였습니다. 세종조(世宗朝)의 명상(名相) 황희(黃喜)와 허조(許稠)는 모두 후덕(厚德)으로 포용해서 풍조(風潮)가 독후(篤厚)하고 규모가 관대했었습니다. 그런데 근래에는 세상이 갈수록 못되어져 풍속이 어지러워져서 규모가 점점 좁아지게 되었습니다. 편당을 깨뜨리는 한 가지 일에 이르러서는 곧 전하께서 고심하시는 것인데, 다만 여러 차례 기회를 놓쳐버림으로 인하여 마침내 고질이 되어버렸습니다. 따라서 하루아침이나 하루저녁에 해소하여 제거할 수는 없겠지만, 만약 능히 한결같은 마음으로 게을리함이 없이 날마다 한결같이 힘쓴다면 거의 실효가 있을 것입니다."
하고, 우의정 송인명(宋寅明)은 아뢰기를,
"일찍이 소결(疏決)하라는 명이 있었으나, 미처 거행하지 못했습니다. 청컨대, 추조(秋曹)012) 로 하여금 옥안(獄案)을 거두어 모아 묘당에 보내어 경중(輕重)을 구분하여 소석(疏釋)하고 처결하게 함으로써 감옥이 비게 한다면, 비록 성강(成康)013) 시대의 형조(刑曹)와는 다르겠지만 또한 한때의 답답함을 소통하는 방도는 될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옳게 여겼다.
고 판서 이정제(李廷濟)의 어머니는 나이 93세가 되었기 때문에 생전에 늠록(廩祿)을 주도록 명하였는데, 대신의 주청에 따른 것이다.
이날 큰 바람으로 태묘의 큰 소나무 세 그루가 부러지는 소리가 전내(殿內)에 진동했는데, 경진일(庚辰日)에 위안제(慰安祭)를 행하도록 명하였다.
1월 26일 기묘
주강을 행하였다.
1월 27일 경진
주강을 행하였다. 시독관(侍讀官) 정익하(鄭益河)가, 번차(番次)가 구간(苟簡)하다 하여 부제학 오원(吳瑗)을 패초(牌招)하기를 청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옥당이 궐직(闕直)한 후에야 비로소 부제학을 패초할 것을 청해야 한다."
하였다. 승지 유건기(兪健基)가 처치하는 일을 규검(糾檢)하지 못하였다 하여 해방 승지를 추고하도록 청하였는데, 임금이 이르기를,
"승지 또한 승지를 추고할 수 있는 것인가?"
하니, 지사 조상경(趙尙絅)이 아뢰기를,
"고례(古例)가 아닙니다."
하였다.
사신은 말한다. 이때에 전장(典章)이 문란해진 것이 많아서 옥당이 부제학을 패초하기를 청하고, 승지가 동료인 관원을 추고하기를 청하는 일이 한때에 아울러 나오니, 사람들이 모두 해괴하게 여겨 한탄했다.
【태백산사고본】 35책 47권 4장 A면【국편영인본】 42책 585면
【분류】왕실-경연(經筵) / 사법-탄핵(彈劾) / 행정-중앙행정(中央行政) / 인사-관리(管理) / 역사-사학(史學)
사신은 말한다. 이때에 전장(典章)이 문란해진 것이 많아서 옥당이 부제학을 패초하기를 청하고, 승지가 동료인 관원을 추고하기를 청하는 일이 한때에 아울러 나오니, 사람들이 모두 해괴하게 여겨 한탄했다.
1월 28일 신사
조영국(趙榮國)을 헌납으로, 한계진(韓啓震)을 장령으로 삼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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