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영조실록47권, 영조 14년 1738년 2월

싸라리리 2025. 9. 22. 14: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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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2일 갑신

판중추부사 김재로(金在魯)가 차자를 올려 인죄(引罪)하고, 겸하여 사명(使命)을 사퇴하니, 임금이 우악(優渥)한 비답을 내리고 윤허하지 않았다.

 

2월 3일 을유

주강과 석강을 행하였다. 이보다 앞서 대계(臺啓)에서 남솔(濫率)014)  하는 폐단을 신칙하도록 청하였는데, 전라 감사 이수항(李壽沆)이 인혐하여 사직하였다. 대개 이수항이 먼저 부임하였는데, 죽은 아들의 아내가 가속을 따라 왔으므로, 이수항이 3일 안에 돌아가도록 꾸짖어 명하였었다. 영사 송인명(宋寅明)이 아뢰기를,
"법을 두려워하여 인정을 끊은 것은 가상한 일이니, 마땅히 그대로 직임을 살피도록 해야 합니다."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정우량(鄭羽良)을 부제학으로, 이종연(李宗延)을 지평으로, 송징계(宋徵啓)를 부응교로, 황재(黃梓)를 응교로, 정익하(鄭益河)·조명리(趙明履)를 교리로, 정이검(鄭履儉)을 수찬으로, 신택하(申宅夏)를 사간으로 삼았다.

 

2월 4일 병술

소대를 행하였다.

 

2월 5일 정해

소대를 행하였다.

 

2월 7일 기축

대신이 중신(重臣)들을 거느리고 청대하여 입시하였다. 예조 판서 송진명(宋眞明)이 아뢰기를,
"이번의 칙행(勅行)은 책봉하는 은전(恩典)을 베풀기 위해서 오는 것이 아니었는데, 우리 나라에서 잘못 알고 팔도에 행관(行關)하여 하전(賀箋)을 올리도록 하기에 이르렀으며, 더러 이미 온 것도 있습니다."
하였는데, 임금이 이르기를,
"완전히 속았으니 진실로 부끄러운 일이다."
하니, 송진명이 아뢰기를,
"역관 중에 잘못 전한 자는 마땅히 나처(拿處)하는 율(律)을 시행해야 하고, 또 패문(牌文)에 비록 무슨 일임을 말하지는 않았으나, 변신(邊臣)이 잘 탐문하지 못한 것 또한 죄가 없을 수 없습니다. 올라온 하전은 이미 어찌할 수 없습니다. 한갓 장차 웃음거리만 되겠지만, 우선 그대로 받아 두는 것이 편하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옳게 여겼다. 영의정 이광좌(李光佐)가 아뢰기를,
"원접사(遠接使)가 조현명(趙顯命)에게 글을 보내면서 우상에게도 보여주도록 하였는데, 일이 매우 시급하기 때문에 삼가 가지고 왔습니다."
하였는데, 임금이 이르기를,
"무슨 글인가?"
하자, 우의정 송인명(宋寅明)이 아뢰기를,
"글의 내용은 번거롭게 다 아뢸 수가 없습니다. 대개 칙사가 만부(灣府)에 도착하면, 우리 나라 사람들은 으레 밤을 틈타 몰래 칙서를 보는데, 이번 칙행의 것은 단지 공함(空函)이기 때문입니다."
하니, 임금이 가져다가 보고 나서 말하기를,
"이는 진실로 전에 없던 일이다. 어떻게 해야 하겠는가?"
하므로, 송인명이 아뢰기를,
"혹시 피중(彼中)에 시혐(猜嫌)하는 자가 있어서 두 칙사에게 사단을 만들어 내려고 이런 일을 만든 것이 아니겠습니까? 진실로 그 까닭을 알지 못하겠습니다."
하고, 송진명은 아뢰기를,
"만약 우리 나라 사람들을 속이려고 고의로 다른 곳에 감추어 두었다면 마침내 무사함을 보장할 수 있겠지만 만약 과연 권력을 다투어 사단을 만들어 내려는 데에서 나왔다면, 피인(彼人)들 또한 스스로 해결할 길이 없으므로, 반드시 우리 나라에 핑계댈 것이니, 장차 큰 사단을 낳게 될 것입니다."
하였다. 이광좌가 아뢰기를,
"이 일이 우리에게 있어서는 이미 잘못이 없으니, 마땅히 후일의 추이를 살펴서 임기 응변(臨機應變)해야 합니다. 어찌 우리가 먼저 동요할 수 있겠습니까? 만일 피인(彼人)들이 칙서가 없어진 것을 알고 경동(驚動)한다면, 우리도 역시 경동하며 위로할 뿐입니다. 혹시 그들이 우리가 잃어버렸다고 하면서 우리로 하여금 찾도록 한다면, 우리는 장차, ‘출납(出納)과 봉쇄(封鎖)를 당신들이 모두 주관했는데, 어찌 우리가 잃어버릴 리 있겠는가?’라고 해야 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영상의 말은 바로 나의 생각과 같다."
하였다. 송인명이 아뢰기를,
"칙사가 우리 국경에 들어올 시초에 칙서를 지니고 오는 사람으로 하여금 짐짓 물에 떨어뜨려서 조금 물이 젖게 하고는 이로 인해 열어 보자고 청하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하였는데, 임금이 말하기를,
"이는 윗사람에게 들리게 할 말이 아니다."
하였다.
사신은 말한다. 피국(彼國)이 비록 기강(紀綱)이 없다고 하지만, 어찌 칙서를 잃어버릴 리 있겠으며, 또한 어찌 고의로 감추어 두고 우리에게 뇌물을 요구하겠는가? 가령 도중에서 잃어버렸다면 그 책임은 피인(彼人)에게 있는 것이고, 비장(秘藏)해놓고 뇌물을 요구하면 우리 나라에서는 할 말이 있는 것인데, 이 기별이 한 번 오자 온 조정이 소란스러웠고, 두려워하여 물에 젖게 하고는 열어 보기를 청하자는 계책이 나오기에 이르렀다. 묘당에서 꾀하는 일이 이와 같으니, 식견 있는 사람들이 해연(駭然)해 하였다.


【태백산사고본】 35책 47권 4장 B면【국편영인본】 42책 585면
【분류】외교-야(野) / 사법(司法)
사신은 말한다. 피국(彼國)이 비록 기강(紀綱)이 없다고 하지만, 어찌 칙서를 잃어버릴 리 있겠으며, 또한 어찌 고의로 감추어 두고 우리에게 뇌물을 요구하겠는가? 가령 도중에서 잃어버렸다면 그 책임은 피인(彼人)에게 있는 것이고, 비장(秘藏)해놓고 뇌물을 요구하면 우리 나라에서는 할 말이 있는 것인데, 이 기별이 한 번 오자 온 조정이 소란스러웠고, 두려워하여 물에 젖게 하고는 열어 보기를 청하자는 계책이 나오기에 이르렀다. 묘당에서 꾀하는 일이 이와 같으니, 식견 있는 사람들이 해연(駭然)해 하였다.

 

이때 북관(北關)에 우역(牛疫)이 크게 번져서 청나라 차원(差員)과 교시(交市)하는데 쓸 소 6백 마리 중에 죽은 것이 5백 50여 마리나 되었다. 송인명(宋寅明)이 남관(南關)의 소를 옮겨 보내기를 청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다른 소를 들여 보내도 반드시 병들어 죽게 될 것이니, 이는 할 수 없는 일이다. 우역이 없어지기를 기다려서 무역하도록 하라."
하였다.

 

2월 8일 경인

이도겸(李道謙)을 사간으로, 김상구(金尙耉)를 지평으로, 이명곤(李命坤)을 정언으로, 정형복(鄭亨復)을 부수찬으로 삼았다.

 

2월 9일 신묘

임금이 영희전(永禧殿)에 전알하였다.

 

2월 10일 임진

임금이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영의정 이광좌(李光佐)가 아뢰기를,
"칙서(勅書)에 대한 일은 피인(彼人)들이 우리가 미리 등서(謄書)해 놓을 줄 알고 깊이 감춘 듯합니다. 오래되면 반드시 저절로 드러날 것입니다."
하였는데, 임금이 묻기를,
"마땅히 친히 영칙(迎勅)해야 하겠는가, 하지 말아야 하겠는가?"
하므로 이광좌가 아뢰기를,
"신들이 비록 노둔하기는 합니다마는, 칙서가 들어 있지 않음을 확실히 알고 있다면, 어찌 성상을 받들고 출영(出迎)할 리 있겠습니까? 만약, 칙서의 통(筒)이 가벼워서 당초에 이미 의심을 가졌었는데도 분명하게 살피지 않고 그대로 올라온다면, 빈신(儐臣)과 도신은 엄중한 구핵(究覈)을 면하기 어렵고 수역(首譯)도 마땅히 효수(梟首)할 것이라는 뜻으로 엄중하게 관문(關文)을 보내어 분부하신다면, 발각(發覺)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소대를 행하였다.

 

2월 12일 갑오

임금이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빈사의 소식을 물으니, 호조 판서 송진명(宋眞明)이 아뢰기를,
"듣건대, 그 가죽 상자 속에 황색 보자기가 있었다고 하는데, 칙서가 아니라면 황색 보자기는 없었을 것입니다."
하고, 이광좌(李光佐)는 아뢰기를,
"만일 과연 발각하였는데도 칙서가 없다면 마땅히 이로부터 급히 사신을 보내야 합니다."
하였다.

 

감시(監試)의 복시(覆試)를 베풀어 생원 이명덕(李命德)과 진사 박인원(朴麟源) 등 각각 1백 인을 뽑았다.

 

2월 14일 병신

정준일(鄭俊一)을 정언으로, 윤심형(尹心衡)을 부응교로, 정익하(鄭益河)·송교명(宋敎明)을 부교리로, 오수채(吳遂采)를 수찬으로, 임정(任珽)을 대사간으로, 이석표(李錫杓)를 북평사로 삼았다.

 

임금이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임금이 이르기를,
"지난번에 나왔던 서단(西靼)에서 청나라와 화친(和親)을 청한 글을 경들은 보았는가?"
하자, 영의정 이광좌(李光佐)가 아뢰기를,
"신은 보았습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일찍이 듣건대, 피국(彼國)에서 매양 서정(西征)하는 일이 있었다고 하였는데, 지금 이 글을 보니, 사납고 교활하여 억제하기 어려움을 알 만하다."
하였다. 이광좌가 아뢰기를,
"신이 을미년015)  에 부사로 연경(燕京)에 갔었습니다. 비록 사세를 헤아릴 만한 지혜는 없으나, 그윽이 생각하건대, 이후로 중국에서 곧 진주(眞主)가 나오기는 기필할 수 없고, 다시 다른 오랑캐가 나와서 예악과 문물을 탕진한 후에야 비로소 진인(眞人)이 나올 것이라고 여겼습니다. 대개 주(周)나라 때 번잡한 문장이 극도에 달하였다가, 진 시황(秦始皇) 때 분서 갱유(焚書坑儒)의 화(禍)016)  가 있은 후에야 한(漢)나라 초기의 순박한 풍속이 이어졌었습니다. 청나라 사람들이 비록 오랑캐 종족이기는 하지만 모든 일이 극도로 문명화하여, 전장(典章)과 문한(文翰)이 모두 명나라[皇明] 때와 같습니다. 다만 나라의 풍속이 간이(簡易)한 점이 조금 달랐는데, 지금에 와서는 사치하는 폐단이 갈수록 심해져서 여대(輿儓)와 같은 천류(賤流)들도 모두 초피(貂皮)를 입으니, 이로 미루어 본다면 부녀들의 사치는 반드시 더 심할 것입니다. 또, 무속(巫俗)이 매우 치성(熾盛)하여 사묘(祠廟)와 사관(寺觀)이 가는 곳마다 있고, 도교(道敎)와 불교가 아울러 퍼져서 귀주(貴州)에는 음사(淫祠)가 72군데나 되도록 많았으며, 심지어 양귀비(楊貴妃)와 안록산(安祿山)의 사당까지도 있었습니다. 몽고(蒙古)는 여진(女眞)보다 더 굳세고 사나워서 만일 중원(中原)에 들어온다면, 우리 나라를 대우하는 도리가 반드시 청나라 사람들만도 못할 것입니다."
하고, 우의정 송인명(宋寅明)은 아뢰기를,
"청주(淸主)가 법을 간이하게 세워서 원망하는 백성이 없는 듯하니, 반드시 패망을 재촉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하고, 판윤 김시형(金始炯)은 아뢰기를,
"서단(西靼)017)  들이 살고 있는 곳은 연경(燕京)과의 거리가 거의 1만여 리나 됩니다. 강희(康熙)018)   때에 비록 간혹 변방을 침범했었지만 토벌하면 곧장 물러갔었고, 옹정(雍正)019)   때에는 요좌(遼左)의 군사를 모두 징발(徵發)하여 가서 정벌했었습니다."
하자, 임금이 이르기를,
"서단이 몽고보다 강성한가?"
하였는데, 김시형이 아뢰기를,
"몽고나 서단이 모두 청나라 사람들과 10년 동안을 서로 버티어 왔는데, 서단이 먼저 귀순할 뜻이 있으므로 옹정이 군사를 철수하여 돌아오고, 단지 1만 5천명의 군사를 변경(邊境) 위에 주둔시켜 불우(不虞)에 대비하게 하였습니다. 또 아극돈(阿克敦)을 보내어 왕래하게 했다고 합니다."
하고, 이광좌(李光佐)는 아뢰기를,
"여후(呂后)가 묵특(冒頓)020)  의 오만한 글을 용납하여 받아들임으로써 한(漢)나라의 국조(國祚)가 장원(長遠)하게 되었습니다."
하고, 호조 판서 박사수(朴師洙)가 아뢰기를,
"이들은 진실로 강성한 종류들이어서 강희(康熙)신미년021)   무렵에 1만여 리나 출정하였었습니다. 이들은 반드시 천하에 난을 일으킬 자들이니, 우리 나라도 자강(自强)에 유의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였다. 서단(西靼)에서 화친하기를 청한 글에 대략 이르기를,
"삼황(三皇)이 세대를 교체하였고 오제(五帝)가 종통(宗統)을 선양(禪讓)함은, 어찌 특히 중화(中華)에만 임금이 있고 어찌 이적(夷狄)에게는 임금이 없는 것으로 알 일이겠습니까? 호호 탕탕(浩浩蕩蕩)한 천지는 한 사람이 혼자 다스릴 수 있는 것이 아니고, 넓고 거친 우주는 한 사람이 지킬 수 있는 것이 아니니, 무릇 천하란 한 사람의 천하가 아니고, 곧 천하 사람들의 천하인 것입니다. 신은 나약한 나라에 살고 있어서 성지(城池) 수십 자리가 되지 않고 봉강(封彊)도 수천여 리에 미치지 못합니다마는, 항시 만족하게 여기는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만족하게 여길 줄 아는 사람은 항시 만족하고 만족하게 여길 줄 모르는 사람은 항시 부족한 법입니다. 폐하께서는 중원에 사시면서 만승(萬乘)의 임금이 되시어 성지가 수백여 자리나 되고 봉강도 수만여 리가 되는데, 항시 부족하게 여기는 마음을 가지고 또한 멸하여 없애버리려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하늘이 살기(殺機)를 발동하면 귀신이 소리내어 울고 땅이 살기를 발동하면 용(龍)과 뱀이 은복(隱伏)하고, 사람이 살기를 발동하면 온 천하가 치고 죽이는 법입니다. 요(堯)·순(舜) 때에는 도(道)가 있었으므로 사해(四海)에서 와서 조회하였고, 우·탕(禹湯)이 인(仁)을 베푸니 팔방에서 공수(拱手)하였습니다. 신 또한 어찌 궤도(詭道)로 천안(天顔)을 뵈려고 하겠습니까? 순종하는 사람이라 하여 반드시 살기를 바랄 수 없고, 거역하는 사람이라 하여 꼭 죽도록 구속할 수 없는 법이니, 폐하께서는 일으켜 정벌할 군사가 있지만, 신에게는 방비할 대책이 있습니다. 문(文)을 논하면 공자(孔子)·맹자(孟子)의 문장(文章)이 있고, 무(武)를 논하면 여망(呂望)022)  ·손무(孫武)023)  의 병법이 있습니다. 폐하께서 고굉(股肱)과 같은 무사(武士)들을 뽑고 정예(精銳)한 군사를 거느리고 하란산(賀蘭山) 밑에서 서로 만나 한 번 싸움을 벌인다 해도 무슨 두려움이 있겠습니까? 위에서 이미 인자하지 않으면 아래에서도 공손하지 않은 법이고, 군사는 양쪽이 모두 이기는 법이 없고 전쟁이란 양쪽이 모두 패하는 법이 없는 것입니다. 만일 임금이 이기고 신하가 순종하면 상국(上國)으로 일컫는 의리가 생기겠지만, 혹시라도 신하가 이기고 임금이 순종하면 소국(小國)의 수치를 면할 수 없게 될 것입니다. 예로부터 화친을 청하는 것을 위주로 하는 것은 군사를 해산하고 싸움을 중지하고 생령(生靈)들의 질고(疾苦)를 풀어 주고 여민(黎民)들의 간난(艱難)을 없애는 것만 못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해마다 중화(中華)에 진공(進貢)하고 해마다 약소한 곳에서 신하라고 일컬어 왔습니다. 이제 신(臣) 달리마나(達里麻那)를 보내어 단지(丹墀)에 배알(拜謁)하며 진실로 황공(惶恐)한 마음으로 땅에 닿게 머리를 조아립니다."
하였다. 임금이 이르기를,
"이 글은 기두(起頭)가 웅장하고 위엄이 있어서 그들의 기상을 볼 수 있다."
하니, 송인명이 아뢰기를,
"원(元)나라 때에는 정문(正門)의 이름이 대명문(大明門)이었는데 명(明)나라 때에 태청문(太淸門)이라고 고쳤고, 지금 청나라에서는 또 태극문(太極門)이라고 고쳤습니다. 서단(西靼)에서 국호(國號)를 ‘극(極)’이라고 했다 하는데, 이 말이 비록 부회(傅會)한 것 같기는 하지만, 역시 사려(思慮)함이 없지 않은 것입니다."
하였다. 그 뒤에 유신 이성중(李成中)이 아뢰기를,
"서단에서 청나라에 화친을 통지했다는 글은 본시 중국에 서로 전해 오는 고문(古文)으로, 《설부(說郛)》·《홍서(鴻書)》에 수록되어 있는데, 일설에는 토번(吐蕃)에서 중국에 화친을 구한 글이라고도 하고 일설에는 일본(日本)에서 중국에 화친을 구한 글이라고도 합니다. 이번에 피인(彼人)들이 우리 역관들을 속이려고 하여 거짓으로 서단의 글이라고 한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그것이 이미 거짓임을 알았으면 어찌 기록할 수 있겠는가?"
하고, 이어 《승정원일기》에서 삭제하도록 명하였다. 예조 판서 송진명(宋眞明)이 아뢰기를,
"전 동래 부사(東萊府使) 오명서(吳命瑞)의 공사(供辭)에, ‘조정의 고관에게 은밀히 뇌물을 주었다.’고 한 일은 준 사람이나 받은 사람이나 모두 암매(暗昧)하여 대간(臺諫)에게 물어 보지 않으면 진실로 핵실(覈實)할 길이 없습니다."
하니, 임금이 여러 신하들에게 하문하였다. 이광좌가 아뢰기를,
"대간에게 함문(緘問)하면 끝내 후일의 폐단이 있게 될 것입니다. 일찍이 적과자(賊科者)024)  의 옥사(獄事)에 대간을 초문(招問)한 일이 있었지만, 그 뒤에는 다시 행하지 않았습니다."
하고, 송인명은 아뢰기를,
"오명서는 일찍이 시종(侍從)을 지낸 사람입니다. 하물며 소위 조정의 고관을 어찌 아울러 암매(暗昧)한 죄과에 둘 수 있겠습니까?"
하고, 이광좌는 아뢰기를,
"만일 대간을 함문한다면, 풍문을 가지고 일을 논하는 길이 끊어져 버릴 것이니, 어찌 뒷날의 폐단이 되지 않겠습니까?"
하고, 병조 판서 박문수(朴文秀)는 아뢰기를,
"오명서는 사람됨이 지나치게 강직하고 맹렬하여 잠상(潛商)의 길을 엄하게 막았기 때문에, 부임한 뒤에 훼방을 초래하는 사단(事端)이 없지 않았을 것이라고 합니다."
하고, 이광좌가 아뢰기를,
"일찍이 조태억(趙泰億)을 함문한 일이 있었는데, 이는 부자간에 관계되는 일이었습니다. 조정에서 대각(臺閣)을 이와 같이 대우할 수는 없습니다."
하였다. 송인명이 아뢰기를,
"판중추부사 김재로(金在魯)가 일찍이 봉조하(奉朝賀) 최규서(崔奎瑞)의 시호(諡號)에 관한 일로 앙달(仰達)한 바가 있습니다. 그 당시에 시호를 의논하여 ‘충정(忠貞)’을 수망(首望)으로 삼고, ‘문충(文忠)’을 부망(副望)으로 삼은 것은 그 뜻이 비록 충(忠)에 더 비중을 두려는 것이었지만, ‘문(文)’자를 얻지 못한 것은 끝내 결점이 되었습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그렇다면 마땅히 입계(入啓)하기를 기다려 처결하겠다."
하였다. 이광좌가 아뢰기를,
"용인(龍仁)의 유생들이 일찍이 최규서의 사당을 세우도록 청했으나, 윤허받지 못했습니다. 성상의 뜻은 비록 뒷날의 폐단을 염려하시는 데에서 나왔으나, 이사람의 큰 훈로(勳勞)는 분모 열토(分茅裂土)025)  해 주어야 옳은데, 어찌 두어 칸의 사당을 아껴야 하겠습니까?"
하고, 조현명(趙顯命)이 아뢰기를,
"만약 성상께서 사당을 세우는 것은 폐단이 된다고 여기신다면, 따로 하나의 사당을 세우게 하더라도 불가(不可)하지 않습니다."
하니, 임금이 특별히 해조(該曹)에 명하여 그의 집에 따로 사당[別祠]을 세워 영구히 옮길 수 없는 사당으로 삼도록 하고, 충훈부(忠勳府)로 하여금 제전(祭典) 30결(結)을 주게 하였으며, 자손은 충훈부의 전례에 의하여 대대로 조용(調用)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사당을 세운 다음에는 예관을 보내어 치제(致祭)하였다. 이광좌가 아뢰기를,
"최규서의 아들 최상정(崔尙鼎)은 그 당시에 와서 그의 아비의 말을 매우 자세하게 전하였는데, 안호(安鎬)와 안호의 종 막실(莫實)을 데리고 왔었으니, 최상정은 진실로 공이 있는 사람입니다. 다른 사람에 있어서도 또한 마땅히 수록하여야 하겠지만, 더욱이 봉조하의 아들이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특별히 가자(加資)하도록 명하였다. 송진명이 아뢰기를,
"듣건대, 감시(監試)의 회시(會試)에서 유생 한 사람이 시권(試券) 끝에 혈서(血書)하여 시관(試官)에게 애걸하는 짓을 했다고 합니다. 이는 사습(士習)이 아름답지 못할 뿐만 아니라 그의 마음이 지극히 요악한 것이니, 비록 입격(入格)되지 않았다 하더라도 마땅히 적발해서 과죄(科罪)하여 다스림으로써 과장(科場)이 엄격해지도록 해야 합니다."
하고, 송인명이 아뢰기를,
"신의 생각에 시관은 마땅히 종중 추고해야 한다고 여깁니다. 그러나 유생은 비록 요악하지만, 어찌 반드시 조사하여 다스려야 하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옳게 여겼다. 사간 이도겸(李道謙)이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2월 15일 정유

사간원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서명구(徐命九)를 승지로, 이덕중(李德重)을 교리로, 정이검(鄭履儉)을 수찬으로, 오명신(吳命新)을 이조 참의로, 이종성(李宗城)을 부제학으로, 민응수(閔應洙)를 평안도 관찰사로, 신택하(申宅夏)를 의주 부윤으로 삼았다.

 

2월 17일 기해

영의정 이광좌(李光佐)가 계청(啓請)하기를,
"호조 판서 박사수(朴師洙)를 파직하소서."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대개 과장(科場)의 낙폭지(落幅紙)는 으레 비국으로 갈라 보내어 군병들의 유의(襦衣)를 만들게 하는 것이 있고, 또한 여러 시관(試官)들이 준례로 나누어 가지는 것이 있었는데, 이때 비국에서 과장의 낙폭지의 수량이 적다 하여 되돌려 보내니, 박사수가 당시의 시관으로서 화를 내어 시관들이 으레 나누어 가졌던 것까지 모두 비국에 주었으므로, 이광좌가 체통이 관계되는 일이라 하여 마침내 파직하도록 아뢴 것이었다. 그 이튿날 이광좌가 차자를 올려 박사수를 잉임(仍任)시킬 것을 청하기를,
"사체(事體)를 보존하고 인재의 임용을 생각하는 두 가지에 있어서 서로 방해되지 않습니다."
하였으나, 임금이 윤허하지 않았다.

 

소대(召對)를 행하였다.

 

북관 감진 어사(北關監賑御史) 조영국(趙榮國)이 경원 부사(慶源府使) 구희(具僖)를 내쫓고 그의 인부(印符)를 빼앗아 겸관(兼官)에게 이송(移送)하였다고 계문하니, 조정에서 변방의 지경은 다른 데와 달라서 마땅히 면대하는 법을 준수해야 하며 앞질러 인부를 빼앗아서는 안된다 하여 조영국을 추고하도록 명하였다. 이에 조영국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신이 당초에 처치한 것 또한 작은 소견이 있었던 것입니다. 이런 탐오(貪汚)한 무리를 만일 즉각 물리치지 않고서 호부(虎符)를 지니고 동장(銅章)를 찬 채 관차(官次)에 버티고 있도록 한다면, 부서(簿書)를 미봉(彌縫)하는 동안에 진곡(賑穀)을 숨겨 속이는 염려가 없지 않을까 두려웠습니다. 또한 듣건대, 갑진년026)  에 어사 김시형(金始炯)이 훈융 첨사(訓戎僉使)가 토졸(土卒)들을 침학하였다 하여 그의 인부(印符)를 빼앗아 병영에 이송했었다고 하므로, 신의 생각에 혹 이것이 의거할 만하다고 여겨 이런 부득이한 일이 있었던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예사 비답을 내렸다.

 

2월 18일 경자

유언통(兪彦通)·이흡(李潝)을 승지로 삼았다.

 

2월 19일 신축

칙사가 들어왔다. 임금이 모화관(慕華館)에 거둥하여 칙사를 영접하고, 돌아와서 인정전(仁政殿)에 나아가 상사(上使)와 부사(副使)를 영접하여 다례(茶禮)를 행하고, 그들의 가정(家丁)을 전각 밖으로 불러 술을 내리었다. 지난번에 칙서를 유실했다는 말은 대개 상사가 피상(皮箱) 속에 간직해 놓고 파주(坡州)에 이르러 비로소 싼 것을 내놓았기 때문에 역관(譯官)의 무리가 잘못 알고 잃어버린 것으로 여겼던 것이다. 이때에 산붕(山棚)027)  을 베풀어 칙사를 영접했었는데, 관광하던 사람들 가운데 밟혀 죽은 자가 많았으므로, 휼전을 내리도록 명하였다.

 

2월 20일 임인

영접 도감(迎接都監)에서 아뢴 말에 따라 승문원과 사역원 관원을 보내어 청어(淸語)와 한서(漢書)로 된 삼전도 비문(三田渡碑文) 2권씩을 등서(謄書)하여 상사와 부사에게 주었는데, 대개 그들의 요청에 따른 것이다.

 

송진명(宋眞明)을 호조 판서로 삼았다.

 

임금이 남관(南館)에 거둥하여 칙사를 위문하였다. 이날 상사와 부사가 수역(首譯)을 불러 이와 같이 바람이 불고 비가 내리고 있으니, 거둥을 정지하기를 청하게 하였으나, 임금이 윤허하지 않았다. 영상과 우상 또한 거둥하지 말기를 주청하니,
임금이 답하기를,
"비록 사냥 가기를 기약했더라도 비 때문에 정지할 수 없는데 하물며 칙사를 대접하는 일이겠는가?"
하고, 드디어 거둥하여 다례를 행하니, 칙사가 감사하게 여겼다.

 

2월 21일 계묘

칙사가 수역을 불러 귀로의 연향과 아침 다담(荼啖)을 제감하고, 단지 저녁 다담만 대접하도록 청하게 하였으므로, 준례대로 중사(中使)를 보내어 신사(申謝)하고, 따로 송도(松都)와 양서(兩西) 세 곳의 문안사(問安使)만 정했다. 칙사가 또한 황지로 엄금하였다 하여 단지 원래의 예단(禮單)만 받고 따로 주는 것은 받지 않았으며, 《동의보감(東醫寶鑑)》 및 청심환(淸心丸) 50환과 다리[髢髮] 두 묶음만 구하여 갔다. 이때에 부사가 손수 윤택동번(潤澤東藩)이라고 크게 4글자를 써서 남관(南館)의 벽에 새겨서 걸기를 청하였는데, 관반(館伴) 조상경(趙尙絅)이 역관을 시켜 잘 말하여 거절하게 하고 받지 않았다.

 

2월 22일 갑진

달이 건성(建星)을 범했다.

 

사간원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사헌부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임금이 모화관에 거둥하여 칙사를 전송하며 다례와 주악(奏樂)을 의식대로 하고, 환궁한 다음 승지를 보내어 양경리(楊經理)의 사당에 가서 봉심(奉審)하도록 하였다.

 

윤혜교(尹惠敎)를 예조 판서로, 박사수(朴師洙)를 예문관 제학으로 삼았다.

 

2월 23일 을사

이일제(李日躋)·황정(黃晸)·김상익(金尙翼)을 승지로, 오수채(吳遂采)·정익하(鄭益河)를 교리로, 정이검(鄭履儉)·이덕중(李德重)을 부교리로, 조명교(曺命敎)·서명신(徐命臣)을 수찬으로, 윤광의(尹光毅)·조명리(趙明履)를 부수찬으로 삼았다.

 

임금이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우의정 송인명(宋寅明)이 아뢰기를,
"칙사에게 은밀히 증정하는 것을 저들이 국가의 금령이 있어서 감히 가지고 가지 못하니, 전례대로 다음 칙행 때 실어 보내기를 청했다고 합니다. 이미 증정한 뒤에는 비록 실어 보내 달라는 청을 거절할 수 없으나, 도감에서 경솔하게 계문했으니, 그 당상은 마땅히 종중 추고해야 합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공자가 말하기를, ‘반드시 명분을 바로잡아야 한다.’고 했다. 은밀한 증정은 이미 명분이 올바르지 못한 것이다. 만일 도감에서 사사로이 스스로 증정하는 것이라면 그만이겠지만, 지금 만일 계하한다면, 조가(朝家)에서는 알지 못하는 것으로 할 수 있겠는가? 당초에 도감에서 방색(防塞)하지 못하고 초기(草記)하여 번거롭게 품한 것은 지극히 경솔한 데 관계되는 것이다."
하였다. 병조 판서 박문수(朴文秀)가 아뢰기를,
"만약 은밀히 증정한 일이 드러나면 어찌 유사(有司)에게 핑계대면서 조가에서는 알지 못한 일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이후로는 전례에 의거하여 수역(首譯)에게 부쳐서 실어 보내도록 하고 번거롭게 품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고, 이조 판서 조현명(趙顯命)은 아뢰기를,
"바로 이 한 가지 일에서 건륭(乾隆)의 나라 다스리는 법을 볼 수 있습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이는 건륭의 다스리는 법이 엄해서가 아니라 강희(康熙) 때의 기강(紀綱)이 아직도 남아 있는 것이다."
하였다. 영의정 이광좌(李光佐)가 아뢰기를,
"신이 장악원(掌樂院)의 주악(奏樂)하는 일에 대하여 그윽이 어리석은 소견이 있습니다. 우리 나라 여민락(與民樂)의 음조(音調)는 그 소리가 유원(悠遠)하고 심후(沈厚)하여 조종조(祖宗朝)의 덕택이 사람들의 마음속에 깊이 스며들어 있음을 상상할 수 있습니다. 신이 장악원의 주악을 듣지 못한 지 이미 30여 년이 되었는데, 이번 연향 때에 들어보았더니 부촉(浮促)함이 심했습니다. 피인(彼人)들 중에 음악을 아는 사람으로 하여금 하였다면 우리 나라를 어떻게 생각했겠습니까? 장악원 제조를 종중 추고하고, 전악(典樂)에게 거듭 신칙하여 예전의 소리를 회복하도록 해야 합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경의 말이 옳다. 여민락이 비록 주악하는 소리가 가장 큰 것이기는 하지만, 군악(軍樂) 이외에는 어찌 산을 진동하게 하는 것이 있겠는가? 내가 열무(閱武)할 때에 군문(軍門)의 세악(細樂)을 들어보았더니, 그 소리가 촉급(促急)했었다. 이번 동가(動駕)에서 도감의 취타(吹打)를 들어보았더니, 더욱 예촉(銳促)하여 들을 수가 없었다. 간혹 장악원의 풍악을 점검해 들어보면, 소리가 매우 저미(低微)하였고, 연향 때에 연주하는 이른바 보허자(步虛子)와 영산회(靈山會)의 성음도 길어야 할 부분이 너무 단촉(短促)하고 낮아야 할 부분이 너무 높았으니, 또한 거듭 신칙하지 않을 수 없다. 악관(樂官)은 주의하도록 하고, 반드시 먼저 책벌(責罰)을 가할 필요는 없다."
하였다. 이광좌가 아뢰기를,
"세상에 어찌 음악을 아는 사람이 없겠습니까? 옛날에는 사람을 가려서 구임(久任)했었으니, 지금도 본원의 제거(提擧)로 하여금 따로 가려서 자벽(自辟)028)  하여, 그 부촉(浮促)한 소리를 고치도록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였다. 송인명이 아뢰기를,
"칙사의 하마연(下馬宴)은 의당 서울에 들어온 이튿날에 남별궁(南別宮)에서 베풀어야 하는데, 이번에는 저들이 이미 처음 청한 것을 즉각 승낙하였고, 또한 연향의 음식도 이미 갖추어졌었기 때문에, 첫날에 거행했습니다만, 이 뒤로는 마땅히 이튿날에 하는 예로 준행해야 합니다."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선전관들이 추천을 다투어 소동을 일으켰다. 병조 판서 박문수(朴文秀)가 아뢰기를,
"이것이 당습(黨習)입니다."
하고, 이어 변방의 진에 출보(黜補)하기를 청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훈련원 도정(訓鍊院都正) 구성임(具聖任)이 아뢰기를,
"참하(參下)의 무변(武弁)들을 출보함은 조정의 체통에 흠사(欠事)가 됩니다. 신의 생각에는 곤장(棍杖)을 가하여 태거(汰去)하는 것이 타당할 듯합니다."
하고, 형조 판서 김성응(金聖應)은 아뢰기를,
"선전청(宣傳廳)의 풍조는 그들 스스로 만든 것이 아니라 곧 선왕조(先王朝)의 수교(受敎)에 따른 것입니다. 이번에 왈가 왈부한 것이 반드시 당론에서 나온 것인지 알 수는 없습니다만, 10여 인을 한꺼번에 외방에 출보한다면 이로부터 무변들의 마음도 장차 기세가 꺾이게 될 것입니다. 만약 예기(銳氣)가 있는 사람이 다시 왈가 왈부한다면 어떻게 율을 가하겠습니까?"
하였는데, 영의정 이광좌(李光佐)가 아뢰기를,
"만약 무장(武將)을 척축(斥逐)하는 것을 그르게 여겼다면, 어찌하여 병조 판서가 건백(建白)한 시초에 논쟁하지 않았단 말입니까? 조정의 명령은 한 번 정해진 뒤에 고치는 것은 마땅하지 않습니다. 이번에 외방에 출보한 사람들은 대부분 장신(將臣) 가문의 자제들이기 때문에, 반드시 모면하고자 꾀하여 이런 부의(浮議)를 초래한 것입니다. 전에 윤취상(尹就商)과 이복휴(李復休)를 아울러 첨사로 출보했었지만, 이로 인해 선전청의 규범을 실추시키고 손상시켰다는 말을 들어 보지 못했습니다. 도로 정지하는 것은 합당치 않습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병조 판서가 비방을 돌아보지 않고 이렇게 처리하였으니, 그 거리낌 없는 처사를 가상하게 여겨야 할 것이다. 그런데 장신(將臣)이 고자(顧藉)하려는 마음에서 도리어 곤장으로 다스리기를 청한 것은 잘못이니, 아울러 추고하도록 하라."
하였다.

 

2월 24일 병오

서종급(徐宗伋)을 대사헌으로, 권적(權𥛚)을 대사간으로, 송징계(宋徵啓)를 집의로, 안상휘(安相徽)를 사간으로, 이광식(李光湜)·윤득징(尹得徵)을 장령으로, 이덕중(李德重)을 헌납으로, 한억중(韓億重)·이섭원(李燮元)을 지평으로, 김광세(金光世)·조윤제(曹允濟)를 정언으로 삼았다.

 

2월 25일 정미

홍현보(洪鉉輔)를 이조 참판으로 삼았는데, 묘당(廟堂)의 추천에 따른 것이었다.

 

2월 26일 무신

이진순(李眞淳)을 대사헌으로, 이성룡(李聖龍)을 도승지로, 유수(柳綬)·김유(金濰)를 승지로, 김정윤(金廷潤)을 헌납으로, 황상로(黃尙老)를 지평으로, 민선(閔墡)을 정언으로, 오수채(吳遂采)·정익하(鄭益河)를 교리로, 서명신(徐命臣)·김광세(金光世)를 수찬으로 삼았다.

 

이조 판서 조현명(趙顯命)이 시관(試官)의 천망(薦望)에 올라 세 차례나 패초를 어겼다 하여 파직하였다. 영의정 이광좌(李光佐)가 차자를 올려 아뢰기를,
"대저 시관이 세 차례 패초해도 나오지 않으면 파직하는 것이 곧 정식(定式)입니다. 전 판서 조현명이 이미 이 법을 범했으니 파직됨은 당연합니다. 그러나 조현명이 시관 일로 인하여 참달(慘怛)한 말을 당했으므로, 비록 엄한 소명이 있었다 하더라도 감히 나아갈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가 반드시 감히 나아가지 못할 것을 분명히 알면서도 오히려 또 의망하여 그로 하여금 법에 저촉되어 죄에 이르게 하였으니, 어찌 법을 세운 본의이겠습니까? 하물며 성상께서 바야흐로 인재를 가리어 구임(久任)하는 것으로 선치(善治)를 꾀하는 제일의 의(義)로 삼고 계시는데, 조현명이 소임을 받은 지 8삭(朔)도 차지 않아서 지금 파직해 버린다면 어떻게 성효(成效)를 요구할 수 있겠습니까? 이에 감히 우선 천망한 것을 정지할 것을 죽음을 무릅쓰고 경해(警咳)029)  합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진달한 바가 나의 뜻과 같으므로 그 말에 따르겠다."
하였다.

 

2월 28일 경술

사간원 【 헌납 김정윤(金廷潤)이다.】 에서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신이 정목(政目)을 얻어 보았더니, 선전관 12인을 한꺼번에 외방에 출보(黜補)하였으므로, 신은 놀랍고 괴이함을 금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 까닭을 자세히 물어보았더니, 대개 그 선전청(宣傳廳)에서 왈가 왈부한 일 때문이었습니다. 신은 그 까닭이 어떻게 된 것인지 알지 못합니다만, 이는 곧 3백 년을 흘러 내려온 고풍입니다. 사람들의 의견은 같지 않은 것이어서 왈가 왈부할 적에 간혹 참치(參差)한 일이 없지 않은데 이 때문에 논죄한다면 장차 왈가 왈부하는 규례가 없어질 것입니다. 비록 미미한 말단의 무변(武弁)이라 하나, 모두 근시(近侍)하던 사람들인데, 한 사람이 소동을 일으킨 것으로 인하여 많은 사람을 아주 먼 변방에 출보한 것은 경상(景像)이 아름답지 못합니다. 청컨대, 외방(外方)에 출보하게 하신 명을 도로 거두시고, 그 중에 소동을 일으킨 사람을 자수(自首)하게 하여 나처(拿處)하소서."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가 이튿날 도로 정지하도록 명하였다. 이에 김정윤이 인피(引避)하니, 예사 비답을 내렸다.

 

2월 29일 신해

임금이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우의정 송인명(宋寅明)이 아뢰기를,
"임진년030)  에 의병장이었던 중 유정(惟政)은 왜인들을 격퇴하자고 창의(倡義)하여 매우 많은 왜인을 베고 사로잡았고, 또한 풍파를 무릅쓰고 일본에 들어가 마침내 화호(和好)를 이루었으며, 사재(私財)를 내어 사로잡혀 간 사람 수천 명을 쇄환(刷還)해 왔었습니다. 선조(宣祖)께서 내달(內闥)로 불러들여 특별히 가자(加資)하도록 명하여 가의 대부(嘉義大夫)에 이르렀으며, 3대에 걸쳐 포증(褒贈)했었습니다. 듣건대, 그의 영당(影堂)이 영남에 있는데, 선왕조에서 특별히 춘추의 제수(祭需)를 관급(官給)하도록 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근래에 영당이 심하게 무너져 장차 향화(香火)를 폐지하게 되었고, 위전(位田)도 또한 잃어버려서 수호해 갈 수가 없다고 영남 중 수백 명이 연명하여 와서 비국에 호소하였습니다. 청컨대 밭 5결(結)을 급복(給復)해 주어 풍교(風敎)를 수립하소서."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경기의 수령들이 칙사 대접을 잘하지 못했다 하여 하교하기를,
"저들이 장차 국왕(國王)은 우리를 잘 대접했는데, 외방 고을에서는 도리어 박하게 대접하였다고 여긴다면, 국가에 기강이 있다고 할 수 있겠는가? 감사를 종중 추고하고, 수령은 모두 나처하도록 하라."
하였다.

 

호조 판서 송진명(宋眞明)이 아뢰기를,
"탁지(度支)의 1년 경비와 용도가 마땅히 11만 석(石)이어야 지탱하게 되는데, 올해의 세미가 6만 8천여 석에 불과하고, 또 두 차례 칙사가 겹쳐 왔으며, 또 옹주의 가례를 당했으니, 청컨대 우선 선혜청(宣惠廳) 쌀 3만 석을 한도로 나누어 주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옳게 여겼다.

 

2월 30일 임자

조현명(趙顯命)을 이조 판서로, 조상경(趙尙絅)을 좌참찬으로, 박사수(朴師洙)를 공조 판서로, 이주진(李周鎭)을 승지로, 이기진(李箕鎭)을 부제학으로, 이수해(李壽海)를 지평으로, 윤순(尹淳)을 좌빈객으로 삼았다.

 

박사정(朴師正)의 아들 박명원(朴明源)이 화평 옹주(和平翁主)에게 장가들어 금성위(錦城尉)로 봉작되었다.

 

임금이 금평위(錦平尉) 박필성(朴弼成)이 수연(壽宴)을 설행(設行)한다는 말을 듣고 장악원(掌樂院)의 풍악(風樂)을 내리었다. 박필성은 곧 효종(孝宗)의 부마로서 나이 90에 가까운데도 정력(精力)이 아직 왕성하므로 임금이 시(詩)를 지어 내려 칭송하고 연수(宴需)를 도와주고 법악(法樂)을 내리어 호사를 다하니, 한때의 경상(卿相)들이 연회에 가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그리고 시를 지어 찬미하니, 그 당세의 성사(盛事)로 전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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