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 2일 갑인
반송사(伴送使) 김유경(金有慶)을 그대로 원접사(遠接使)로 차정(差定)하여 서로(西路)에 머무르며 대기하도록 했는데, 비국의 계청에 따른 것이다.
3월 3일 을묘
임금이 대보단(大報壇)에 친제하였다. 임금이 좌우(左右)에 묻기를,
"화양동(華陽洞) 환장암(煥章菴)에서 행사(行祀)하였을 때에는 위판(位版)으로 행례(行禮)하는가?"
하니, 승지 이유신(李裕身)이 아뢰기를,
"숭정 황제(崇禎皇帝)가 쓴 ‘비례부동(非禮不動)’ 네 자를 환장암 곁의 여러 암석에 새겨 놓았는데, 거기에 재실(齋室)이 있어서 지방(紙牓)으로 행사(行祀)한다고 합니다."하였다. 임금이 환궁하여 조종문(朝宗門)으로 나가 돌다리에 머물러 서서 하교하기를,
"이는 곧 선왕조(先王朝)에서 어제(御製)하신 사자교(獅子橋)이다. 이 다리가 비록 작지만 이미 어제가 실려 있으니, 기지(記識)가 없을 수 없다. 마땅히 수서(手書)를 내릴 것이니, 모름지기 돌에 새겨 조종문 곁에 세우도록 하라."
하였다.
3월 4일 병진
유성이 소미성(小微星) 아래로 흘러갔다.
판중추부사 김재로(金在魯)가 상소하여 사직하였으나, 임금이 돈독하게 유시하고 윤허하지 아니하였다.
3월 5일 정사
정우량(鄭羽良)을 이조 참의로, 조영국(趙榮國)을 헌납으로, 김한철(金漢喆)·오수채(吳遂采)를 교리로, 신치근(申致謹)·정익하(鄭益河)를 부교리로, 정이검(鄭履儉)·조명교(曺命敎)를 수찬으로 삼았다.
3월 6일 무오
경기 유학(幼學) 박필일(朴弼一) 등이 상소하여, 고 찬성 정제두(鄭齊斗)의 원우(院宇)에 사액(賜額)하기를 청하였으나, 임금이 윤허하지 않았다.
오원(吳瑗)을 승지로, 남태량(南泰良)을 사간으로, 윤지원(尹志遠)을 장령으로, 이덕중(李德重)·정옥(鄭玉)을 지평으로, 홍창한(洪昌漢)을 부교리로, 정형복(鄭亨復)을 수찬으로, 김광세(金光世)·윤광의(尹光毅)를 부수찬으로, 서명신(徐命臣)을 교리로 삼았다.
3월 10일 임술
달이 헌원성(軒轅星)으로 들어갔다.
임금이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우의정 송인명(宋寅明)이 아뢰기를,
"봉칙(封勅)의 행차가 오래지 않아서 당도할 것이니, 왕세자(王世子)의 교영(郊迎)과 친수(親受)의 절차를 마땅히 미리 강습해 놓아야 할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4세의 충자(沖子)에게 교영하도록 할 수도 없고, 전정에서 친수하는 절차 또한 마땅히 아울러 막아야 할 것이다. 《의주(儀註)》에는 비록 친영한다고 되어 있지만, 곧장 나이가 유충(幼沖)함을 들어 사리에 의거하여 정지하기를 청해야 한다. 고명(誥命) 또한 마땅히 국왕이 대신 받도록 빈신(儐臣)으로 하여금 잘 주선하게 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하였다. 송인명이 아뢰기를,
"봉전칙(封典勅)을 받은 뒤에는 마땅히 귀양간 사람들을 크게 풀어 주어야 하는데, 여러 사람들의 의논이 억울함을 하소연하는 사람들에게 먼저 특은(特恩)을 내리어 하반(賀班)에 참여할 수 있게 해야 한다고 하니, 그리하면 진실로 성덕을 베푸는 일이 될 것입니다."
하자, 임금이 이르기를,
"이병상(李秉常)을 가리키는 것인가?"
하니, 송인명이 아뢰기를,
"그렇습니다."
하였다. 조현명(趙顯命)이 아뢰기를,
"이병상은 당초에 죽을 죄를 지은 것이 아니었는데 먼 변방에서 해를 넘기었고, 또 질병이 많아서 사람들이 모두 불쌍하게 여기고 있습니다. 지난번에 김취로(金取魯)도 즉시 은혜를 베풀어 석방함으로써 모자로 하여금 영결(永訣)할 수 있게 하셨으므로, 효도로 다스려 가는 정사를 흠탄(欽歎)하지 않은 사람이 없었습니다. 유독 이병상이 혹시라도 살아서 돌아오지 못하게 된다면 유개(帷蓋)031) 의 은덕을 손상시킬까 두렵습니다."
하니, 임금이 드디어 놓아 주도록 명하였다.
제주(濟州)의 시재(試才)하는 날을 가려 거행하고, 서북(西北)과 강도(江都)·남한(南漢)에서도 또한 차례로 품하여 거행하도록 하였는데, 10년의 시한(時限)이 찼기 때문이었다.
병조 판서 박문수(朴文秀)가 아뢰기를,
"금군(禁軍)을 취재(取才)한 뒤에 육조와 정부(政府)의 서벽(西壁)032) 은 으레 일제히 도시(都試)에 나가야 하는데, 근래에는 오랫동안 거행하지 않았습니다. 무신년033) 에 시작했으나 이미 중간에 거두었고, 단지 을사년034) 에 한 번 거행하였을 뿐이니 진실로 법을 세운 본의가 아닙니다. 청컨대, 구제(舊制)를 밝히소서."
하니, 임금이 옳게 여겼다.
조상경(趙尙絅)을 판의금부사(判義禁府事)로, 오수채(吳遂采)를 부교리로, 정익하(鄭益河)를 교리로, 정이검(鄭履儉)을 부수찬으로, 김중희(金重熙)를 집의로, 윤득징(尹得徵)을 사간으로, 이유신(李裕身)을 장령으로, 이명곤(李命坤)을 지평으로, 성범석(成範錫)을 정언으로, 홍덕망(洪德望)을 전라도 우수사로, 이언섭(李彦燮)을 경상도 우수사로 삼았다.
3월 11일 계해
모든 관사의 윤대관(輪對官)들을 소견하였다.
3월 13일 을축
달이 태미 서원(泰微西垣)으로 들어갔다.
3월 14일 병인
검열 이제원(李濟遠)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신이 삭관(削官)된 뒤 2일 만에 하번 이종적(李宗迪)이 신에게 찾아와서 추천하는 일을 의논하며 아무 아무를 두루 지적했는데, 윤연(尹㝚)·윤수(尹邃)의 지친(至親)까지도 거론하는 속에 들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신이 부득이 놀라서 배척했더니, 이종적이 대답하기를, ‘돌아가서 다른 동료들과 다시 소상하게 의논하겠다.’ 하고는 그날 곧바로 마치 미치지 못할 듯이 급급히 회천(回薦)했습니다. 아! 우리 국조(國朝)에서는 사관(史官)의 천거를 가장 중요하게 여겨 비록 일찍이 이 직임을 지낸 사람이라 하더라도 반드시 두루 물어보게 하였으니, 조금이라도 이의(異議)가 있으면 감히 자신의 의견을 세우지 못하는 것입니다. 신이 비록 삭관되었지만, 미처 본관을 떠나지 않았고, 이종적이 묻지 않았으면 그만이겠지만 이미 물어본 뒤에 그 말을 무시해 버렸으니, 이렇게 방자한 풍습은 사관의 추천이 있어 온 이래로 이전에는 들어 보지 못했습니다."
하고, 이어 견책을 내려 체직시켜 주기를 청하니, 임금이 답하기를,
"사직하지 말라."
하였다. 그 뒤에 검열 이종적이 상소하여 변병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사국(史局)의 추천에 대한 규례에 본관의 관료에게는 비록 파직되었더라도 반드시 물어 보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진실로 방해가 되거나 거리낌이 있을 경우에는 조가(朝家)에서 반드시 삭직(削職)해 놓고 추천하는 일을 행하게 하고, 이미 삭직되었으면 간섭하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그런데 삭직당한 자가 도리어 서로 묻지 않았다는 것으로 허물을 삼고 있으니, 만약 전연 염치가 없는 사람이 아니라면 반드시 이렇게 하지 못할 것입니다. 사관(史官) 추천이 당론의 기화(奇貨)가 된 지 오래 되었는데, 하물며 삭직된 사람이 사관의 추천을 망치게 하는 길을 처음으로 열어 놓을 수 있겠습니까? 신이 이제원(李濟遠)을 보러 갔던 것은 본관의 규례 때문이 아니라 단지 동료에 대한 옛 정의에서 나온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제원이 추천하려는 사람을 묻기에 신이 두 사람을 들어 대답했습니다. 이제원이 말하기를, ‘마땅히 신중하게 공론에 따라야 한다.’ 하므로, 신이 대답하기를, ‘이미 잘 협의가 되었다. 그대는 삭직 중에 있으니, 추천하는 일을 언급함은 곧 방해하려는 뜻이 있는 것이 아닌가?’ 했더니, 이제원이 말하기를, ‘이는 곧 사사로이 하는 말이다. 어찌 추천에 방해가 있게 하겠는가?’ 하였습니다. 윤상임(尹尙任) 세 글자는 당초에 이제원의 입에서 나오지도 않았었으니, 그의, ‘배척하지 않을 수 없었다.’고 한 말은 임금께 고하기를 정직하게 하는 도리가 아닙니다. 비록 윤상임이 불행하게도 참으로 가까운 족속과 시마(緦麻)나 대공(大功)·소공(小功)의 친속(親屬)이 있다고 하더라도 오히려 서로 누(累)가 될 것이 없습니다. 진실로 이제원의 말처럼 반드시 남을 해치려고 마음먹는다면 아마도 옛날부터 오늘날까지 완전한 사람이 많지 않으리라고 생각됩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이제원의 말은 지극히 해괴하다. 그대는 사직하지 말라."
하였다.
3월 16일 무진
홍현보(洪鉉輔)를 이조 참판으로, 조명경(曹命敬)을 교리로, 송교명(宋敎明)을 부교리로, 정익하(鄭益河)를 부수찬으로 삼았다.
식년 문과 전시(式年文科殿試)를 보여 한광회(韓光會) 등 33인을 뽑았다.
유학(幼學) 권태두(權泰斗)가 상소하여, 선정신(先正臣) 송시열(宋時烈)과 선정신 송준길(宋浚吉)을 문묘에 종사(從祀)하기를 청하니, 예사 비답을 내렸다.
3월 18일 경오
유건기(兪健基)를 대사간으로, 김상중(金尙重)을 수찬으로 삼았다.
3월 19일 신미
각 관사(官司)의 구임(久任)된 관원을 불러 보았다.
병조 참의 오명서(吳命瑞)가 상소하여 은밀히 뇌물을 주었다는 일에 대하여 변명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한 말이 암담(黯黮)하고, 품은 뜻이 음흉하고 은밀하여 참으로 말세에 남을 모욕하기에 좋은 자부(資斧)입니다. 변파(辨破)할 방도는 대신(臺臣)에게 함문(緘問)하지 않는다면, 조정의 귀인(貴人)에게 두루 물어보는 데 불과할 뿐인데, 지금 이미 두루 물어보고 모함한 것임을 죄다 알았습니다. 그가 이에 대해 말한 적이 있거나 없거나 진실로 신에게 상관이 없으나, 과연 있었다면 그가 반드시 장차 그 때의 날짜에 의거하여 해당되는 사람들의 성명을 제시하여 신과 함께 그 허실(虛實)을 변별해야 할 것입니다."
하니, 예사 비답을 내렸다.
수찬 김상중(金尙重)이 또한 상소하여 오명서(吳命瑞)의 일을 말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오명서가 결백하다고 자처(自處)하며 신이 무욕(誣辱)한 것으로 돌리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공술(供述) 가운데 왜인에게 예단(禮單)으로 응당 주게 되어 있는 삼(蔘)을 어찌 송도(松都)의 상인(商人) 김찬흥(金贊興)에게 내주었으며, 또한 어떻게 했기에 차왜(差倭)의 불손한 말이 있게 되었겠습니까? 삼세(蔘稅)는 그래도 상역(商譯)들이 원저(怨詛)하는 것으로 돌릴 수 있겠지만, 소금 1포(包)로 쌀 1곡(斛)을 만들고 쌀 1곡으로 돈 5민(緡)을 만든 일에 이르러서는 원망하는 소리가 길거리를 뒤덮게 한 사람이 누구입니까? 은밀히 준 일에 이르러서는 막비(幕裨) 이익화(李益華)가 감동(監董)하여 만들어 낸 것이 어떤 물건이며, 동래부(東萊府)의 공장(工匠)들이 칭원(稱怨)한 것은 무슨 일이었습니까? 언자(言者)에게 함문(緘問)하자는 공술(供述)로 대각(臺閣)에게 치욕을 끼침이 신에게 이르러서는 극도에 달하였습니다."
하니, 임금이 예사 비답을 내렸다.
3월 20일 임신
교리 송교명(宋敎明)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전 헌납 김정윤(金廷潤)이 여러 선전관을 외방에 출보한 명을 정지하기를 청한 계사에서 한 말은 대체(大體)를 알지 못한 것이었습니다. ‘외방에 출보하는 일을 보잘것없는 무변(武弁)에게 시행하는 것은 사체를 손상시키는 바가 있다.’고 말하지 않고, 혹은 ‘근시(近侍)하는 사람이니, 혹은 경상(景像)이 아름답지 못하다.’는 등 마치 삼사(三司)의 관원을 외방에 출보한 것과 같이 하였습니다. 그의 향암(鄕闇)은 비록 책망할 것이 못되나, 직책으로 논하면 대간(臺諫)이고, 그 한 말을 보면 대계(臺啓)이니, 청납하실 적에 진실로 마땅히 분명한 처분을 내리셨어야 할 것인데, 지금 그 대계를 이미 윤허하신 뒤에 갑자기 환수하라는 명을 내리셨습니다. 만약 그 사람은 업신여길 수 있다 하여 대계의 사체가 중대함을 돌아보지 않으셨다면, 크게 뒷날의 폐단이 있을 것이니, 전도(顚倒)됨을 면하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하니, 임금이 처음에는 도로 내주도록 명했다가, 승정원의 계사로 인하여 뒤좇아 비답을 내리기를,
"이 일은 이미 하교하였다."
하였다.
3월 21일 계유
임금이 숙빈(淑嬪)의 사당을 전배(展拜)하고, 그 길에 효장(孝章)의 사당에 임어하였다.
3월 22일 갑술
경복궁(景福宮) 문에 익명서가 결렸는데, 수어사 조현명(趙顯命)·병조 판서 박문수(朴文秀)·총융사 박찬신(朴纉新)의 이름이 흉서(凶書) 가운데 들어 있다 하여 돈화문 밖에서 대명(待命)하여 명소(命召)를 도로 바치고, 영의정 이광좌(李光佐) 또한 금오문 밖에서 대명하면서 녹사를 시켜 명소를 도로 바치니, 임금이 승지를 보내어 마루 난간에 나아가 기다리겠다고 유시하고 들어오도록 명하였다. 포도 대장 장태소(張泰紹) 또한 함께 입시하도록 명하였다.
임금이 희정당(熙政堂)에 나아갔다. 조현명 등이 사모를 벗고 뜰 아래에 내려가 엎드리니, 임금이 전각(殿閣)으로 올라오도록 하고 묻기를,
"흉서(凶書)를 내가 듣고 싶지는 않지만 대략 무어라고 했는가?"
하자, 조현명이 꿇어앉아 아뢰기를,
"영상 및 신과 박문수(朴文秀)·박찬신(朴纉新)·이종성(李宗城)·이광덕(李匡德)·김광(金洸) 등이 흉서에 들어 있었는데, 쓰여 있는 말들은 차마 앙주(仰奏)할 수 없습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진달할 것 없다. 주서(注書) 또한 기록하지 말라."
하였다. 박문수가 아뢰기를,
"요사이 인심이 극도로 악해져서 변괴가 겹쳐서 발생하고 있는데, 오랫동안 요지(要地)에 있어서 지극히 위구(危懼)합니다. 신이 조현명과 상의하여 물러나려고 했는데, 조현명이 매양 신에게 불충(不忠)하다고 책망했기 때문에, 오늘의 망극한 무함을 초래하였습니다."
하고, 조현명이 아뢰기를,
"이제 다른 도리가 없으니, 원컨대, 전하께서 살길을 열어 보전할 수 있게 해주소서."
하자, 임금이 이르기를,
"그 흉서는 어떻게 발견하였는가?"
하니, 박문수가 아뢰기를,
"구궐(舊闕)의 위장(衛將)과 문졸(門卒)이 발견하여 신에게 가지고 와서 보였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이르기를,
"포도청에서 이내휴(李乃休)에게 형장을 가했는가?"
하니, 박찬신이 아뢰기를,
"당초에 기포(譏捕)할 때 목상(木像)을 철교에 달아 놓은 것이 있었기 때문에 본청 안에 감추어 두고 외부 사람들은 그 형상을 알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뒤이어 이내휴를 체포하고 공초를 받은 후에 그 목상을 내다가 빙험(憑驗)해 보니, 과연 공술한 바와 절절이 서로 부합하였습니다. 따라서 작용(作俑)035) 한 것이 명백하여 의심할 것이 없는데, 끝내 승복하지 않으니 지극히 요망스럽고 흉악합니다. 이내휴는 곧 일찍이 경기 감사 이종성(李宗城)을 모욕했던 자입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익명서는 부자간에도 서로 전하지 못하는 것으로서 법의(法意)가 매우 엄중한 것인데, 수직하던 중관(中官)이 군사에게 지시하여 위장이 받아 두었다가 무함받은 신하들에게 보여준 것은 지극히 의거할 데가 없는 짓이니 우선 삭직하도록 하라. 이른바 익명서는 병조로 하여금 열어 보지 말고 불에 던지도록 하고, 불측(不測)한 무리들이 장수와 재상들을 모함하는 글을 구궐에 걸어 놓았으니 두 포도청으로 하여금 3일 이내에 기필코 잡아내도록 하라."
하였다. 조현명 등이 눈물을 흘리며 사직하니, 임금이 위유하였다. 이광좌가 명을 받고 입시하였는데, 임금이 말하기를,
"내가 이미 알고 있다."
하자, 이광좌가 울며 아뢰기를,
"신이 기박한 운명을 타고나 쌓이는 허물이 그칠 새가 없습니다. 지난날 민형수(閔亨洙)와 배윤명(裵胤命)의 무함하는 말을 만났을 적에도 진실로 갑자기 죽고 싶었는데 지루하게도 죽지 못하고, 또 망극한 변괴를 당하였으니 장차 무슨 면목으로 조정에 설 수 있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경은 물러나 쉬면 아무 일도 없을 것으로 여기는가? 성탁(成琢)·배윤명의 일도 휴치(休致)036) 한 뒤에 있지 않았는가? 경이 만일 이 일을 염두에 두지 않는다면 자연히 순조롭게 마무리될 것이다."
하였다. 이광좌가 아뢰기를,
"신이 비록 마음에 두지 않는다 하더라도 간사한 사람들이 또한 마음에 두지 않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누누이 하교하기를,
"이 뒤에는 익명서를 전하는 사람이 있으면 마땅히 율에 의해 반좌(反坐)한다는 것으로 오부(五部)와 제도(諸道)에 효유하도록 하라."
하였다.
3월 23일 을해
엄경하(嚴慶遐)·신만(申晩)을 승지로, 남태량(南泰良)을 사간으로, 권현(權賢)을 장령으로, 허채(許采)를 정언으로, 김광세(金光世)·정이검(鄭履儉)을 부교리로, 박필균(朴弼均)을 수찬으로 삼았다.
경상도 유학(幼學) 문이경(文以經)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무신년037) 역적 정희량(鄭希亮)이 안음(安陰)에서 일어났었을 때 그 흉적의 예봉(銳鋒)이 지향하는 곳의 사람들은 모두 두려워하여 떨었습니다. 그런데 이 고을의 아전 이술원(李述原)이 역적들을 매도하고 절의에 죽은 실상이 이미 어사의 장계와 도신의 장계에 자상하게 나와 있습니다. 시퍼런 칼날이 눈앞에 당했는데도 매도하는 말이 입에서 끊어지지 않았으며, 그의 아들 이우방(李遇芳)은 약관이 되지 않았지만 힘을 분발해 자청하여 단번에 역적들을 무찔렀었습니다. 감사 유척기(兪拓基)가 이미 사당의 건립을 장청(狀請)했으니, 삼가 바라건대, 특별히 액호(額號)를 내려 주소서."
하니, 임금이 그대로 윤허하였다.
임금이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판윤 김시형(金始炯)이 아뢰기를,
"신이 《수교집록(受敎輯錄)》을 가져다 고찰해 보건대, ‘익명서가 걸려 있는 집을 발견하고도 즉시 불태워 버리지 아니한 자나 서로 전하여 보인 자는 《대명률(大明律)》의 투서에 관한 율보다 1등을 감하고, 공해(公廨)를 수직하던 사람이 즉시 불태워 버리지 않아서 전파되게 한 경우에는 또한 전가 사변(全家徙邊)한다.’고 되어 있습니다. 청컨대 반좌하도록 하신 하교에 이를 첨가해서 반포하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수교(受敎)를 그대로 반포하도록 명하였다.
3월 25일 정축
홍문관 제학 윤혜교(尹惠敎)에게 명하여 반궁에서 유사(儒士)에게 시험을 보여 수석한 이육(李堉)에게 급제를 내렸다. 삼일제(三日製)를 이날에 물려서 시행한 것이었다.
부사직 권업(權𢢜)이 나이를 들어 휴치(休致)를 원하니, 비답하기를,
"임금이 보고 싶어 하는데 신하는 더욱 돌아보지 않으려 하고 있다. 산림(山林)에 은거(隱居)하여 세상 밖에서 한산(閑散)하게 지내는 사람은 그래도 되겠지만, 세록(世祿)의 신하 또한 어찌 차마 이렇게 할 수 있겠는가? 종중 추고(從重推考)하고, 그의 소장은 도로 보내도록 하라."
하였다.
3월 26일 무인
이중경(李重庚)을 승지로, 구성임(具聖任)을 포도 대장으로 삼았다.
판중추부사 김재로(金在魯)가 시골에서 올라오니, 임금이 돈유하여 하반(賀班)에 참여하도록 하였다. 김재로가 들어와 사은하니, 임금이 위로하고 권면하였다.
3월 27일 기묘
봉전칙(封典勅)이 오니, 임금이 모화관에 나아가 칙사를 영접하였다. 역관이 왕세자의 나이가 어려서 칙서를 친히 받을 수 없음을 칙사에게 말하니, 칙사가 말하기를,
"친히 받는 절차는 비록 임시로 제외하도록 허락할 수 있지만, 우리들이 이미 봉전칙(封典勅)을 가지고 왔는데, 만약 황제께서 세자의 기억(岐嶷)한 모습과 어디에서 고명(誥命)을 전했는지 물으신다면, 무엇이라고 주대(奏對)하겠는가? 한번 보지 않을 수 없다."
하였는데, 역관이 왕세자의 나이가 어려서 이미 중대한 예절도 제외했으므로 사사로이 볼 수 없다고 물리쳤다.
임금이 돌아와 인정전(仁政殿)에 나아가 칙사를 접견하고 연례(讌禮)를 행하였다.
3월 28일 경진
임금이 인정전에 임어하여 하례를 받고 반사(頒赦)하였으며, 다시 남관(南館)에 거둥하여 연례를 행하였다.
3월 29일 신사
소대(召對)를 행하였다.
3월 30일 임오
부사 김용경(金龍慶)이 피인(彼人)의 땅 풍윤(豊潤)에서 졸(卒)하였다. 임금이 듣고서 슬퍼하며 연로(沿路)의 관원으로 하여금 운상(運喪)하도록 하고, 장수(葬需)를 내려 주었다.
소대를 행하였다.
제도(諸道)의 오래 된 포흠(逋欠)을 감해 주도록 명하였는데, 책봉한 경사가 있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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