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영조실록47권, 영조 14년 1738년 4월

싸라리리 2025. 9. 22. 14: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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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1일 계미

두 칙사와 다섯 통관이 인삼·초피(貂皮) 등 수십 가지 물건을 따로 구청(求請)하고, 원래의 예단 물건 중에 면주(綿紬)와 초피 등의 물건을 모두 은(銀)으로 바꾸어 주기를 청하였다. 연접 도감(延接都監)에서 계문하니, 시행하도록 윤허하였다.

 

4월 2일 갑신

임금이 모화관에 거둥하여 칙사를 전송했다.

 

4월 4일 병술

임금이 주강에 나아갔다. 지사 송진명(宋眞明)이 아뢰기를,
"졸(卒)한 사람을 애도하여 송종(送終)을 융숭하게 하는 것은 곧 성왕(聖王)의 선정입니다. 동지 부사 김용경(金龍慶)이 만 리의 길에 사명을 받들고 나갔다가 이역(異域)에서 몸이 죽었으니, 왕사(王事)를 위해 죽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선왕조(先王朝)에 고 판서 이광하(李光夏)가 정사(正使)로서 연경(燕京)에 갔다가 죽었기 때문에 특별히 포증(褒贈)을 더한 적이 있었으니, 마땅히 이 전례대로 해야 할 듯합니다."
하니, 임금이 전례대로 초증(超贈)하도록 명하였다. 검토관(檢討官) 정익하(鄭益河)가 아뢰기를,
"지나간 해에 서종하(徐宗廈)의 아들이 초시에 입격했을 적에 특별히 발거(拔去)하도록 명했었습니다. 제방(隄防)은 진실로 마땅히 이와 같이 하여야 하는데, 이번에 이광찬(李匡贊)은 이진유(李眞儒)의 조카로서 직부(直赴)했습니다. 10여 년 동안 여러 차례 전시(殿試)를 겪으면서 끝내 감히 부거(赴擧)하지 못하다가 오늘날 무릅쓰고 부거한 것은 또한 무슨 뜻이겠습니까? 예조에서 초기(草記)하여 부거하기를 재촉한 것은 상례의 격식에 어그러진 것이니, 경책이 없을 수 없습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널리 유시한 이후 비록 서종하의 아들이라 하더라도 과거에서 발거한 것은 부당하다. 하물며 이광찬은 이진급(李眞伋)의 아들이니, 숙질과 부자와는 다른 것이다. 조가에서 이미 부시(赴試)하도록 허락했으면, 이광찬이 어찌 응시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이진급은 신축년038)  과 임인년039)   이후에 중신이 건백(建白)하여 복과(復科)하였으니, 마땅히 의기 양양하게 행세할 듯한데도 마침내 출각(出脚)하지 않았다. 이광찬이 오래도록 방(榜)에 응하지 않고 있는 것을 만일 내가 알았다면 마땅히 신칙하여 부거하게 했을 것이다. 유신이 이를 들어 말하고 예조 판서가 이를 들어 계청한 것은 모두 널리 유시하기 이전의 풍습에 연유한 것이다. 그러나 예조 판서의 초기가 상례의 격식에 어그러진 것이 있으니 추고하는 것이 옳다."
하였다.

 

석강을 행하였다.

 

4월 5일 정해

주강을 행하고, 도원수(都元帥) 장만(張晩)과 금남군(錦南君) 정충신(鄭忠信)의 후손을 녹용(錄用)하도록 명하였는데, 유신 정익하(鄭益河)의 말에 따른 것이었다.

 

박필주(朴弼周)를 집의로, 최규태(崔逵泰)를 장령으로, 성범석(成範錫)을 정언으로, 이정보(李鼎輔)를 교리로, 남태온(南泰溫)·이주진(李周鎭)을 승지로 삼았다.

 

장령 권현(權賢)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남살(濫殺)의 법금(法禁)을 거듭 엄중하게 하지 않는 것이 아닌데, 공홍 감사(公洪監司) 이보혁(李普赫)이 한 임신부에게 장형을 가하여 곧 쌍태아(雙胎兒)를 낙태하고 공문(公門) 안에서 운명하게 하였습니다. 비록 어떠한 죄를 범했는지 알 수는 없습니다만 한 차례의 장형으로 세 사람이 죽었으니, 일이 지극히 놀랍고도 참혹합니다. 또 범마(犯馬)040)  한 과실 때문에 나이 70이나 된 사인(士人)에게 엄한 형벌을 가했습니다. 70이면 형벌을 면제하는 분명한 국법이 있으니, 마땅히 도신을 나문(拿問)하여 처벌해야 합니다. 수령이 말미를 받고 돌아오지 않은 채 흉년에 직임을 게을리하고 있는데, 도신이 이미 돌아오도록 재촉하지도 않았고, 또한 파직을 청하지도 않았으니, 양남(兩南)041)  의 감사 또한 추고해야 합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호서(湖西)의 일은 풍문을 어찌 믿을 수 있겠는가마는, 우선 종중 추고하여 함답(緘答)한 말을 보아 처분하겠다. 나머지는 모두 그대로 시행하도록 하라."
하였다.

 

4월 8일 경인

김치후(金致垕)를 대사간으로, 안상휘(安相徽)를 사간으로, 박수(朴璲)를 장령으로, 이덕중(李德重)을 교리로, 심성진(沈星鎭)·김광세(金光世)를 부교리로, 조명리(趙明履)·박필균(朴弼均)을 수찬으로, 정이검(鄭履儉)·남태량(南泰良)을 부수찬으로, 이성해(李聖海)를 지평으로, 한억증(韓億增)을 정언으로 삼았다.

 

4월 9일 신묘

사헌부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4월 10일 임진

소대를 행하였다.

 

4월 11일 계사

소대를 행하고, 윤대관(輪對官)들을 불러 보았다.

 

4월 12일 갑오

임금이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이때 대통관(大通官) 유만권(劉萬權) 이라는 자는 성품이 본시 탐욕이 많아서 칙사를 따라 나왔을 때 증급(贈給)한 것이 뜻에 차지 않는다 하여 증급한 물건을 되돌려 보내기에 이르렀으므로, 반송사가 이를 계문하였다. 임금이 대신에게 묻자, 영의정 이광좌(李光佐)가 아뢰기를,
"여러 신하들의 의논은 모두 가급(加給)하지 않을 수 없다고 하지만, 만약 빈신(儐臣)의 요청이라 해서 가급한다면, 후일의 폐단이 더욱 커질 것이니, 차라리 조가(朝家)의 덕의로 따로 1천 냥(兩)을 내리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고, 판중추부사 김재로(金在魯)는 아뢰기를,
"유만권이 우리 나라 종족으로서 방자하게 한없는 욕심을 부려 국가에서 내려준 은(銀)과 삼(蔘)을 봉환(封還)하기에 이르렀으니, 패만(悖慢)하고 불공함이 매우 통탄스럽고 해괴하여 상리(常理)로 대우할 수가 없습니다. 마땅히 참작하고 요량하여 시행하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1천 냥(兩)을 가급했는데도 오히려 부족하게 여겨 혹시라도 불화를 빚어 오욕을 끼치기에 이른다면, 먼 지역에서 다시 품할 수가 없을 것이니, 대략 빈신과 도신에게 편의하게 가감하도록 허락하는 것이 합당할 것입니다."
하였다. 이광좌가 아뢰기를,
"그들이 상례로 준 것에 불만하여 방자하게 봉환한 것을 수역(首譯)인 자가 어찌 감히 고해 오며, 빈신이나 도신도 어찌 감히 장문한단 말입니까? 수역은 종중 감죄(從重勘罪)하고, 빈신과 도신 또한 마땅히 종중 추고해야 합니다."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이재(李縡)를 대사헌으로, 신만(申晩)을 대사성으로 삼았다.

 

4월 14일 병신

소대를 행하였다.

 

4월 15일 정유

경기 유생 안재희(安載禧) 등이 상소하여 고 의주 부윤 이완(李莞)이 정묘년042)   호란(胡亂)에 순절했음을 진달하고, 시호를 의논하는 은전을 거행하기를 청하니, 임금이 오래된 일은 유생들이 간청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하여 윤허하지 않았다.

 

4월 17일 기해

사간 안상휘(安相徽)가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요사이 대각(臺閣) 안에 간쟁하는 기풍이 아주 없어져 주후혜문(柱後惠文)043)  의 〈말을〉 적적하여 들어볼 수 없는데, 이것이 어찌 시정(時政)의 득실과 관사(官司)의 시비를 하나도 논할 만한 단서가 없어서이겠습니까? 대개 전하께서 조정하는 방도에 힘쓰시며 과격한 근심이 있을 것을 염려하여, 무릇 소장이나 논계하는 사이에 혹 논평하여 바로잡으려는 의논이 있으면 당론으로 의심하여 배척하시니, 어떻게 충직한 말이 나오고 규정(規正)하는 기풍을 볼 수 있겠습니까? 설사 크게 간사하고 사특(私慝)하여 민생과 국가를 좀먹고 해치는 자가 있다 하더라도 전하께서 어디를 통해 들으실 수 있겠습니까?"
하고, 또 말하기를,
"절사(節使)의 서장관 남위로(南渭老)는 피인(彼人)의 행중(行中)에 사서(私書)를 부쳤으니, 청컨대, 삭직(削職)하고 수역(首譯)은 나문(拿問)하소서. 지난번에 연천(漣川)의 수령을 세 차례 체차한 것은 더욱 개탄스러운 일입니다. 연천은 경기의 고을 가운데 가장 박약한 고을입니다. 이미 차정한 뒤 모면하려고 꾀하는 의도에 맡겨둔 채 독촉하여 무임하도록 하지 못했으니, 어떻게 잔약한 고을을 싫어하여 기피하는 풍습을 막을 수 있겠습니까? 마땅히 준기 불서(準期不敍)044)  하소서. 강도 경력(江都經歷) 이윤성(李允成)은 이력(履歷)이 이미 모자라고 또한 매우 노쇠했습니다. 앞서 장례원 낭청으로 있었을 적에도 일을 제대로 하지 못한 것이 많았으니, 마땅히 개차(改差)해야 합니다."
하니, 임금이 우악한 비답을 내리고 그대로 따랐다. 그 뒤에 영의정 이광좌(李光佐)가 차자를 올려 아뢰기를,
"신이 지난 겨울에 바야흐로 태상시 도제거(太常侍都提擧)를 겸임하고 있었을 적에 첨정 신유한(申悠翰)으로 하여금 신실(神室)·신여(神轝)·주포(酒脯)의 고사(庫舍)를 수리하게 했었는데, 뜻밖에 연천에 이배(移拜)되었기 때문에 잉임(仍任)을 계청하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진실로 싫어하여 기피한 것이라고 한다면, 그가 스스로 한 것이 아니라 신이 실로 시킨 것이었습니다."
하니, 비답을 내려 신유한은 추문하지 말도록 명하였다.

 

세 사신(使臣)을 파직하였다. 이때 사행(使行)의 쇄마(刷馬)를 몰고 갔던 사람이 피인(彼人)의 말을 훔쳤다가 발각되어 도망했으므로, 영의정 이광좌(李光佐)가 차자를 올려 사신이 잘 단속하지 못했음을 논하고 파직하기를 청하니, 그대로 따른 것이었다.

 

경상도 유학(幼學) 손경일(孫景一)이 상소하여 전정(田政)·환곡(還穀)·군정(軍政)의 폐단에 대해 수천 마디의 말을 진달하니, 임금이 우악한 비답을 내렸다.

 

4월 19일 신축

지사 김유경(金有慶)이 여러 차례 상소하여 휴치(休致)를 원하였으나, 임금이 편당하는 마음에서 나온 것으로 의심했기 때문에 윤허하지 않았는데, 이에 이르러 또 상소하여 청하자 도로 내주도록 명하였다.

 

대사간 김치후(金致垕)가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천하의 근심은 언로(言路)가 막히는 것보다 큰 것이 없습니다. 지난 가을에 윤급(尹汲)과 한익모(韓翼謨)를 대궐 뜰에서 국문하고 조태언(趙泰彦)을 도배(島配)한 뒤부터 온 세상 사람들이 말을 기휘(忌諱)하고 사람들이 모두 입을 다물고 있으니 저 밤낮으로 승순(承順)과 용열(容悅)로써 계책을 얻은 것으로 여기는 사람들은 굳이 말할 것도 없으며, 조금 사류(士類)로 자허(自許)하던 사람들 또한 목을 움추리고 두려워하여 모가 진 것을 둥글다고 하였습니다. 당관(當官)한 사람들만 이와 같을 뿐만 아니라 친척과 지구(知舊) 또한 그렇게 하기를 권하지 않는 사람이 없으니, 아! 이것이 어찌 국가의 복이겠습니까? 또 윤급의 소장이 세상에 큰 죄가 된 것은 곧 신이 경술년045)   가을에 올린 소장 가운데 있었습니다. 그때에 일번인(一番人)들이 조정에 가득했었지만, 일찍이 한 사람도 스스로 변명하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이제 윤급이 거의 장차 10여 년이 지난 뒤에 답습(踏襲)해 썼는데 진신(搢紳)들이 연명(聯名)하여 떼 지어 일어나 그를 죽이려고 하고 있습니다. 맨 먼저 발언한 신은 재채기나 기침을 하는 재앙도 없는데, 답습해 쓴 윤급은 유리(流離)의 재액(災厄)에 몹시 시달리고 있으니, 신의 마음이 부끄럽고 위축됨이 또한 어떠하겠습니까?
붕당과 시비(是非)는 같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전하께서 시비와 공사(公私)의 구문에 대해 다시 분명하게 살피고 정밀하게 관찰하지 않으시니, 호오(好惡)가 중정(中正)을 잃고 취사(取捨)가 합당하지 못하게 되었는데, 아울러 사람들의 마음속에 시비를 가리는 천성(天性)까지 민멸시키려고 하십니다. 사리를 분별함이 없이 우물쭈물 넘기며 기미(羈糜)하고 겸제(鉗制)함으로써 온 세상을 흑백(黑白)과 음양(陰陽)이 구분되지 않는 지경에 놓이게 하다가, 마침내 다른 제목과 새로운 의리를 만들어내어 혼돈(混沌)을 개벽(開闢)한다고 이르고는 드디어 사람들을 태초의 홍몽(鴻濛)한 가운데 가두어 지난날의 일을 마치 전생의 일처럼 격리해 놓고 계십니다. 주자(朱子)가 산꼭대기에 있는 소라 껍질을 보고, ‘이는 선천(先天)의 물건이다.’라고 했었습니다. 대저 지금 천지가 참으로 개벽된다 해도 선천 시절의 옛 물건들을 마멸(磨滅)할 수 없는데, 하물며 작금(昨今)의 귀에 쟁쟁하고 눈에 선하던 것들을 곧장 천지가 개벽될 때의 세계로 돌릴 수가 있겠습니까? 전하께서 말씀만 하시면 뭇신하들이 호응하여 혹자는 영웅의 수단이라고 하기까지 하니, 아첨을 유도하는 폐습(弊習)이 너무 심합니다. 송(宋)나라에서는 건중(建中) 초기에 일찍이 참작하여 임용하였는데, 그 뒤에 채경(蔡京)046)  이 다시 정승이 되면서 천하가 파괴되었습니다. 군자와 소인(小人)이 함께 진출하면 항상 이기는 형세가 반드시 소인들에게 있었습니다. 따라서 오늘날의 일을 가지고 옛날의 일과 견주어 보면, 전하께서 반드시 그 시비와 취사를 아실 것입니다.
이진유(李眞儒)를 신설(伸雪)하자는 논의가 세상에 크게 행해지더니, 어느 새 이광찬(李匡贊)이 과연 전시(殿試)에 부거하였습니다. 징토(懲討)가 엄중하지 못하고 제방(隄防)이 크게 무너진 까닭에 흉패하고 추악한 여얼(餘孼) 그들이 감히 다시 달리 마음먹게 되었는데도 대관들은 기세를 돕고 대간(臺諫)은 말을 하지 않고 있으니, 세도(世道)가 근심스러워 진실로 한심스럽습니다. 신의 생각에는 이 또한 전하께서 불러들인 것으로 여겨집니다. 관대하게 용서하고 총애하여 임용하는 일은 기강을 범한 족속들에게 많이 베풀어지고, 최격(摧擊)하고 진노하시는 일은 매양 과감하게 말하는 사류(士類)에게 돌아갔으므로, 이 무리들이 주무(綢繆)하고 약속하여 많은 편당의 협조를 끼고 하루의 편의(便宜)함을 엿보고는 차례로 역적들을 신구(伸救)하는 계제로 삼고 있으니, 뜻을 받드는 무리들이 또 당후관(堂后官)으로 제일 먼저 천거하고 방색(榜色)으로 특별히 선발하고 있습니다. 이는 오늘날 안위(安危)의 기틀과 관계가 있기 때문에 살피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고, 이어 면계(勉戒)할 일을 진청(陳請)하기를,
"대덕(大德)을 확장하여 경솔하게 사령(辭令)을 발표하는 일을 삼가고, 염치를 배양(培養)하여 쇠퇴한 세속을 한번 변화하도록 힘쓰며, 유술(儒術)을 높여 숭상하고 궁료(宮僚)들을 잘 선발하소서."
하고, 또 말하기를,
"옹주(翁主)의 이강(釐降)을 되도록 간소하게 하여 지난날의 화순 옹주(和順翁主)의 혼인 때와 같이 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부언하여 진달한 말을 유의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고, 이어 원소(原疎)를 유중(留中)하도록 명하였다.

 

4월 20일 임인

영의정 이광좌(李光佐)가 차자를 올렸는데, 대략 이르기를,
"삼가 듣건대, 대사간 김치후(金致垕)가 한 소장을 올려서, ‘채경(蔡京)이 다시 정승이 되면서 천하가 파괴되었다.’는 말로 은밀히 영향 밖에서 침욕(侵辱)을 행했습니다. 원소를 유중하여 그 어맥(語脈)이 어떻게 되고 수미(首尾)가 어떤 모양으로 되었는지 전혀 살펴보지 못하였으나, 지금 다시 정승이 된 것을 가지고 말한 것은 마땅히 신이 첫번째에 들게 될 것입니다. 신이 망극한 때를 만났기 때문에 감히 즉일로 물러나 돌아가지 못하고 시일을 끌고 있는 동안에 이제 열 달이 되었으니, 편당하는 마음을 품고 있는 사람들이 근거 없는 사실을 만들어 내려고 한다면 무슨 짓인들 못하겠습니까? 군자와 소인을 여덟 글자로 구분해 말하였으나 이는 완전히 심술에 달려 있는 것이니, 한때의 글이나 구변을 빌어서 꾸며 낼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채경이 되든지 채유(蔡攸)가 되든지 하는 것은 본시 만세의 공안(公案)이 있는 것인데, 어찌 김치후가 어지럽게 현혹할 수 있는 것이겠습니까? 이렇게 하는 즈음에 오직 종국(宗國)이 먼저 지탱하기 어려운 폐해를 받게 될까 두려우니 이것을 마음 아파하는 것입니다. 신은 의리상 감히 잠시도 지체할 수 없어서 새벽에 한강을 건너며 천궐(天闕)을 되돌아 보니 마음이 쥐어짜듯 합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김치후가 전일에 경을 배척했던 것이 비록 해괴하기는 하나, 조금이라도 임금을 마음에 두고 있다면, 어찌 감히 경에게 앙갚음할 수가 있겠는가? 채경을 임용한 것이 어느 임금이었던가? 이는 크게 불경스러운 말이다. 경을 끌고 늘어지는 것은 관계됨이 가볍지 않은 일이다. 유중한 것은 대개 이때문이었는데, 경은 어찌하여 거취를 지나치게 하는가? 경이 도성(都城)에서 나갔다는 말을 듣고 진실로 아무 말도 하고 싶지 않았다. 이에 승지를 보내니, 즉시 함께 들어오도록 하라."
하였다. 김치후가 인피하며 아뢰기를,
"수상의 차본(箚本)을 얻어 보았더니 그 말이 지극히 위험하였고, 이어서 삼가 차자에 비답하신 것을 보았더니 사의(辭意)가 절엄(截嚴)하였습니다. 신의 소장 가운데 채경이 다시 정승이 되었다는 말은 건중 때의 일에 대해 시말(始末)을 논한 것에 불과한 것으로 대수롭지 않게 한 말이었는데, 이번에 대신이 이를 스스로 감당한 것입니다. 종전에도 소장에서 간혹 송(宋)나라 시대의 소인(小人)을 논하는 경우 허다하게 장돈(章惇)과 채경을 들어 말했었지만, 대신이 스스로 의심을 품고 오늘날처럼 스스로 감당했다는 것을 들어 보지 못했으니, 또한 이상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다만 대신이 용사(用事)한 이래로 그의 말이나 행위가 이전의 투식을 고치지 아니하여 그들 가운데 머리와 목이 자못 꿋꿋하여 부리는 데 방해가 되는 사람은 문득 작은 일로 인하여 연석(筵席)에서 논박하고 차자를 올려 파직하게 하였으며, 세력과 지위가 서로 비등하여 스스로 전단(專斷)하는 데 방해되는 사람은 기필코 사인(私人)들을 사주(使嗾)해 논박하여 공격하게 하고 말았습니다. 세월이 이미 오래 되어 제방(隄防)이 점점 무너지니, 드디어 이진유를 신설(伸雪)하려고 꾀하여 이광찬(李匡贊)의 계책을 인용(引用)하였다는 소문이 세상에 전파되어 많은 사람의 입에 떠들썩하게 전해졌습니다. 전시(殿試) 전일에 두 번이나 예조의 서리(胥吏)를 불러 재차 초기(草記)하게 하였는데, 그 정신과 골자(骨子)는 오로지 이광찬이 부시(赴試)하는 바탕을 삼으려는 것이었고, 방색(榜色)을 특별히 선정한 것과 당후관(堂後官)에 수망(首望)으로 주의한 것도 대개 이런 때문이었습니다. 전하께서는 시험삼아 생각해 보소서. 이진유가 신설되고 이광찬이 등용된다면, 세상의 도의에 대한 근심이 과연 어떻게 되겠습니까? 신이 마침 언관(言官)의 자리를 담당하고 있기 때문에 입을 열면 화를 빚게 될 것을 알지 못했던 것은 아니지만, 차마 직임을 저버릴 수가 없어서 죽음을 무릅쓰고 대략 말하였으나, 오히려 감히 분명하게 말하지 못하고, 겨우, ‘대관이 형세를 도왔다.[大官助勢]’는 네 글자만 사용하였으니, 은미(隱微)하고 완곡(婉曲)함이 지극했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과거에 대수롭지 않게 했던 말을 꼬집어내어 한껏 신을 모함하면서도 오히려 솔직하게 침욕(侵辱)했다고 말하지 않고, ‘영향(影響) 밖에서 침욕했다.’고 했습니다. 대저 영향 밖이란 곧 텅 빈 탕탕한 지경인 것입니다. 만약 텅 빈 지경의 말로 인해 문득 과격하게 다른 사람의 죄를 이루는 바탕을 삼는다면, 세상에 모면할 수 있는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온양(醞釀)이니 현란(眩亂)이니 종국 난지(宗國難支)란 말들로 장차 뜻밖의 화를 매개하려고 하니, 이는 어찌 대관이 차마 할 일이겠습니까? 청컨대 신을 체직하여 물리치도록 명하소서."
하니, 임금이 ‘사직하지 말라.’고 답하였다.

 

4월 22일 갑진

정석오(鄭錫五)를 도승지로, 오수채(吳遂采)를 수찬으로, 윤광의(尹光毅)를 부수찬으로, 민백행(閔百行)을 설서로 삼았다.

 

4월 23일 을사

정언 성범석(成範錫)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묵묵히 요사이의 효상(爻像)을 관찰하건대, 진실로 천정을 쳐다볼 근심거리가 많더니, 과연 김치후(金致垕)의 상소가 나왔는데, 이치에 어긋난 말을 날조해 모아서 기필코 조정을 괴란(壞亂)하려고 하고, 근거가 없는 말을 주장(譸張)하여 기필코 천청(天聽)을 의동(疑動)하게 하려고 하니, 그 기틀은 지극히 미세하나 그 계책은 매우 치밀하여 정신을 차려 주시하는 많은 사람의 눈을 가릴 수가 없었습니다. 하물며 저번에 윤급(尹汲)이 진 죄가 과연 어떠한 것이었으며 성상께서 내리신 처분이 과연 어떠했었는데 이번에 김치후가 감히, ‘정직함은 용납해야 한다.’는 말로써 멋대로 신구하였으니, 이미 지극히 방자(放恣)한 일이었습니다. 또 윤급이 올린 소장의 한 구어(句語)가 과연 경술년047)  에 그가 올린 소장에서 본뜬 것이었다면 그 또한 똑같이 화심(禍心)을 품었던 것이니, 오직 마땅히 움츠리고 엎드려 견벌(譴罰)을 기다려야 마땅할 것인데, 어찌 감히 드러내어 말을 하고 공공연하게 떠들기를 조금도 두려움과 기탄함이 없이 할 수 있겠습니까? 한 번 상소하고 한 번 인피한 것이 끊어 놓은 것처럼 판연(判然)한데, 쓸데없는 말로 농간 부리며 도리어 대수롭지 않게 논한 것이라고 일컬으니, 이러한 정태(情態)는 차마 바로 볼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사 비답을 내리시고 엄중한 배척을 가하지 않으시니, 세도(世道)의 근심이 어느 지경까지 이를지 걱정이 됩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김치후가 석갈(釋褐)하였을 때에 불러서 신칙했던 뜻을 체념(體念)하지 않고서 암암리에 협잡하는 짓을 했으니 그 마음을 알 만하다. 먼저 그를 체직시키고 시종(侍從)의 이름도 깎아버리도록 하라. 그가 처치에 대해 또한 소명에 응하지 아니하고 처분을 구하였으니, 이러한 풍습 또한 그른 것이다."
하였다.

 

사간원 【정언 한억증(韓億增)이다.】 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정언 성범석(成範錫)의 상소에 대한 비답에, ‘대사간 김치후(金致垕)를 먼저 체직하고 시종의 이름도 깎아 버리라.’는 하교가 있었습니다. 아! 전하께서는 오늘날을 어떠한 시기라고 여기십니까? 위로 군도(君道)는 날로 높아지되 곤직(袞職)은 잘못이 많고, 아래로 권활(權猾)이 국정을 쥐고 있어 음사(陰邪)가 날로 더해가고 있습니다. 조정 위에서 말을 기휘(忌諱)하여 한 사람도 전하를 위해 말을 하는 사람이 없었으나, 이번에 대사간 김치후가 국가를 위해 몸을 분기(奮起)하여 조정의 국정(國政)을 항론(抗論)하였는데, 그 말이 개절(剴切)한 것이 많아서 직책을 저버리지 않았으니, 진실로 마땅히 아름답게 여겨 권장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전하께서는 도리어 위노(威怒)를 가하여 지나치게 견벌(譴罰)을 베푸셨으니, 이 어찌 성세(聖世)의 아름다운 일이며, 조정의 길(吉)하고 상서로운 일이 되겠습니까? 하물며 전하께서 처음에는 유의하겠다는 비답을 내리셨다가, 한 사람의 참소와 훼방으로 인하여 전에 없던 벌을 가하셨으니, 신은 편당하는 사람들이 전하의 천심(淺深)을 엿보아 헤아리고 시기를 틈타 계책을 부리면 장차 성범석 같은 사람이 얼마나 더 있을지 알지 못하게 될 듯합니다. 청컨대 급히 김치후를 체직하고 이름을 깎아버리라는 명을 거두소서. 정언 성범석이 언관(言官)을 날조(捏造)해 모함함이 너무도 교묘하고 끔찍합니다. 대저 김치후가 국가를 위해 항언(抗言)하며 권세 있는 정승에게 저촉되었으니, 그 응견(鷹犬)의 무리가 치고 물려고 하는 것은 필연적인 사세입니다. 그리고 또 그 조작한 의도가 음험하여 먼저, ‘천정을 쳐다보게 된다.’는 등의 말로 위구(危懼)하여 동요시키고, 계속해서 이치에 어긋나고 근거가 없다는 등의 말로 의심하여 어지럽히는 등 은밀한 속에 예봉을 감추고 일방적으로 부연(敷演)해 말했습니다. 윤급(尹汲)이 입은 죄는 단지 서명(胥命)하지 않은 데에 있는데, 도리어 상소한 말에 돌려놓았으니, 그들이 화심(禍心)을 품고 있음은 사람들이 모두 아는 바입니다. 그런데도 다른 사람에게 미루고자 하여 사문(私門)을 붙좇아 언자(言者)를 공격하여 몰아세운 죄를 엄하게 징계하지 않을 수 없으니, 청컨대 성범석을 삭출(削黜)하게 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어찌 감히 옛 버릇을 하는가? 지극히 해괴한 짓이다."
하였다.

 

영의정 이광좌(李光佐)가 상소하여 스스로 폭백(暴白)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언자(言者)가 ‘고사를 대수롭지 않게 말한 것이다.’라고 한다면 신은 진실로 다시 변명할 것이 없습니다마는 그가 신의 죄상을 논하면서 따로 조항을 내세웠고, 한 말이 억지로 댄 것이어서 진실로 가소롭습니다. 대저 두 신하의 체직과 파직한 것은 혹 정주(政注) 때문이거나 혹은 사체(事體) 때문인데, 이는 특히 공조(公朝)에서 동칙(董勅)하는 상사이므로, 비록 당사자라 할지라도 가슴속에 두었다가 때때로 사기(辭氣)에 드러낼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곁에 있는 사람이 이를 빙자하여 교묘하게 날조(捏造)하여 신이 용사(用事)한 죄안으로 만들려고 할 줄은 헤아리지 못하였습니다. 권집(權䌖)이 신의 사인(私人)이 아님은 온 세상이 모두 알고 있는 일입니다. 하물며 ‘자전(自專)하는 데 방해가 되므로 사주하여 소장을 올리게 했다.’고 하였는데, 그 말은 너무도 추악하여 이로써 대변(對辨)하는 것은 곧 신의 치욕일 따름입니다. 이광찬(李匡贊)을 취한 초기(草記) 여부는 신이 전혀 들은 바 없는 일이며, 하물며 예조의 서리를 불러서 무엇을 했겠습니까? 춘조(春曹)의 여러 당상이 무고하고 이속들이 모두 그대로 있으니, 한번 물어 보면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신백(伸白)이니 인용(引用)이니 하는 말에 이르러서는 누가 들었으며 또 누가 전했다는 것입니까? 자신이 부르고 자신이 화답한 데서 나와 오로지 듣는 사람들을 의심하여 동요시키기 위한 것으로, 설계의 교묘함이 이에 이르렀습니다. 신이 평생 동안 사람들의 무함과 모욕을 받은 것이 어찌 한이 있겠습니까마는, 상전 벽해(桑田碧海)가 번갈아 변하는 속에서 은혜와 원망 두 가지를 다 잊어버렸고, 김치후가 말한 것 또한 잊은 지 오래입니다. 그 전혀 알지 못하는 것이 본시 괴이한 일이 아닌데, 또한 무엇을 말할 것이 있겠습니까?"
하였다. 소장을 입계(入啓)하니, 수서(手書)로 비답을 내리기를,
"김치후가 지난날에 경을 배척한 뜻은 대개 앙갚음하려는 것이었고, 이번에 협잡하는 것 또한 옛 버릇이다. 수서에 간략히 말하니, 안심하고 함께 들어와 한 번 나의 유시를 듣도록 하라."
하였다.

 

4월 24일 병오

정언 한억증(韓億增)이 인피 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김치후(金致垕)의 상소는 진실로 조양(朝陽)에 하나의 봉황(鳳凰)소리와 같은 것인데, 전하께서 한 번 들으시고는 교언(巧言)이라 하여 갑자기 위엄과 견벌을 가하셨습니다. 성범석(成範錫)에 이르러서는 교설(巧舌)을 섬롱(閃弄)하여 정직한 논의를 공격함으로써 기필코 성총을 현혹시키려는 계책을 부린 것이었습니다. 몸이 언책(言責)의 자리에 있는 사람으로서 도로 거두시기를 청하고 규핵(糾劾)하기를 논한 것을, 과연 조금이라도 편당하는 구습에 가깝다고 하겠습니까?"
하니, ‘사직하지 말라.’고 비답하였다.

 

우의정 송인명(宋寅明)이 차자를 올렸는데, 대략 이르기를,
"간장이 인피한 계사 가운데, ‘공격하고야 말았다.’는 등의 말은 지적한 뜻이 어떠한 것인지 알지 못하겠습니다. 혹자는 이르기를, ‘권집(權䌖)의 일을 이른 것이다.’라고 하니, 그렇다면 신에게 관계가 있는 것입니다. 아! 권집이 수상에게 이미 친척도 아니고 또한 문관(門館)의 사호(私好)도 아닙니다. 그런데 그가 신을 모함한 정상을 성감(聖鑑)으로 통촉하고 계시니, 수상에 대해 무슨 간섭이 있다고 이번에 억지로 끌어대어 말하는 것입니까? 세위(勢位) 두 글자는 반드시 신까지 아울러 핍박하려고 한 것입니다. 이것이 비록 서로 어지럽히려는 의도에서 나왔다 하나, 신이 어찌 곤욕스럽지 않겠습니까?"
하니, 비답하기를,
"안심하고 사직하지 말라."
하였다.

 

4월 26일 무신

이익정(李益怔)을 승지로, 김담(金墰)을 장령으로, 김진상(金鎭商)을 대사성으로 삼았다.

 

이조 판서 조현명(趙顯命)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신이 전 대사간 김치후(金致垕)의 소본(疏本)을 얻어 보건대, ‘영웅 수단(英雄手段)’이란 말은 대개 신이 지난 가을에 연석에서 아뢴 말을 가리킨 듯한데, ‘도유(導諛)하는 버릇이다.’라고 하기까지 했으니, 신은 두려움을 금하지 못하겠습니다. 작년 가을에 처분을 내리신 뒤에 신이 처음으로 등연(登筵)했을 적에, ‘일전의 지나친 거조는 즉위하신 이후로 없던 일이었으니 뭇신하들 가운데 누군들 근심하여 탄식하지 않았겠습니까? 그러나 이로 인하여 사람들이 마음속으로 두려워하여 분발해 힘쓰고, 융화(融和)하고 보합(保合)함으로써 황극(皇極)을 세우는 교화(敎化)가 이루어진다면, 영웅 호걸의 군주가 되시는 데 해롭지 않을 것입니다마는,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마침내 위란(危亂)으로 돌아갈까 두렵습니다.’라고 했었습니다. 신의 구구한 뜻은 대개 이미 지난 일에는 경계하는 마음을 가지고 일후(日後)의 일에는 면려를 더하시게 하려는 것뿐이었는데, 거두 절미하고 단지 한 구절만을 제기하여 억지로 시비를 결단한다면 맹자 또한 재물과 여색(女色)을 도유(導諛)한 사람임을 면하지 못하게 되지 않겠습니까?"
하니, 비답하기를,
"무슨 개의(介意)할 것이 있는가?"
하였다.

 

4월 28일 경술

예조 판서 윤혜교(尹惠敎)가 김치후(金致垕)의 소장 가운데 이광찬(李匡贊)의 일로 상소하기를,
"대신이 이미 서리를 부른 일이 없었으니, 알지 못하겠지만 누가 시키고 누가 따랐다는 것입니까? 만일 한차례의 초기를 가지고 신의 죄로 삼으려고 한다면, 많은 변명을 할 것도 없습니다마는, ‘사지(使之)’ 두 글자를 가지고 억지로 사실 이외의 것을 더하니 신은 피열(疲劣)한 사람임을 면하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하니, 임금이 예사 비답을 내렸다.

 

김상중(金尙重)과 홍창한(洪昌漢)을 보내어 경기와 해서를 염찰(廉察)하게 하였다.

 

4월 29일 신해

민원(閔瑗)을 장령으로 삼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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