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 1일 임자
수찬 조명리(趙明履)가 처치하여 아뢰기를,
"당초에 논한 바는 대간(臺諫)의 체례(體例)가 그런 것이니, 차자에 변명한 말은 혐의할 것이 없습니다. 논핵한 바는 대간의 기풍이 있었는데, 노여워하지 않으신 하교를 과당하게 인혐한 것이니, 청컨대 사간 안상휘(安相徽)와 정언 한억증(韓億增)은 나와서 사진(仕進)하도록 하소서."
하니, ‘아뢴 대로 하라.’고 비답하였다. 이때 옥당 윤광의(尹光毅)와 김광세(金光世) 등은 처치를 담당하지 않으려고 모두 어버이의 병환이 있다고 진소하고 들어오지 않았다.
임금이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이때에 몹시 가물어서 임금이 매우 근심하였는데, 우의정 송인명(宋寅明)이 황충(蝗蟲)의 재해가 너무 치성하다 하여 잡아 묻도록 청하였다. 임금이 이르기를,
"오늘날의 국사를 보건대, 황충은 근심할 것이 없다. 내가 하교하려고 경을 기다린 지 오래이다."
하였는데, 송인명이 아뢰기를,
"수상이 도성(都城)을 떠나서 국사가 아득합니다. 사간원의 소장 가운데 시험삼아 한 가지 일을 가지고 보더라도 권집(權䌖)은 영상의 사인이 아니니, 이는 실정 밖의 말입니다. 예조의 서리(胥吏)에게 분부했다는 것도 전혀 근거가 없음이 원보(元輔)의 상소와 예조 판서의 상소에서 알 수 있습니다. 대론(臺論)의 세 가지 사건도 모두 실상이 없는 것이었는데, 성상의 하교에 당초 거론하지 않으셨기 때문에 영상이 불안하여 대명(待命)하기에 이르렀던 것입니다. 사간원의 계사(啓辭) 가운데 ‘권활병국(權猾柄國)’이라는 네 자도 마침내 개석(開釋)하여 돈면(敦勉)하지 않으셨으니, 성의를 알지 못하겠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이르기를,
"내가 마땅히 대략 말하겠다. 권집(權䌖)은 경에게 분명히 사감(私憾)이 있는 사람이고 김치후(金致垕)는 오로지 시상(時象)을 위해서이다. 김치후는 곧 김간(金幹)의 손자이므로, 이로써 그의 조부를 위해 비방을 행하려는 것이니, 비록 가마솥에 삶는다 하더라도 지나칠 것이 없다. ‘채경(蔡京)이 도로 정승이 되었다.’는 등의 말은 암암리에 협잡한 것으로서, 단지 영상뿐만 아니라 아울러 온 조정의 사람들을 모두 제거하려는 것이다. 가장 통탄스러운 것은, ‘대수롭지 않게 논한 것이다.’라고 말한 한마디이다. 배포(排布)하고 있는 본심을 바른 대로 말하지 않고 대수롭지 않게 한 말이라고 핑계한 것이니, 이는 진실로 소인(小人)의 작태(作態)이다. 김치후가 근본이 되고 한억증(韓億增)이 한편이 된 것이니, 지금 김치후와 한억증에게 죄를 주려고 하는데, 경은 어떻게 하면 좋겠다고 생각하는가?"
하자, 송인명이 아뢰기를,
"한억증이 더욱 괴이합니다. 그러나 신이 대신의 자리에 있으면서 어찌 언관을 죄주는 일을 가지고 전하를 인도할 수 있겠습니까?"
하였는데, 임금이 이르기를,
"채경을 도로 정승으로 삼았다는 말은 지극히 의거할 데가 없는 말이니, 임용한 사람은 어떤 임금이 되겠는가?"
하므로, 송인명이 아뢰기를,
"이 말은 무함이 아니면 망발입니다. 영상이 대명(待命)하게 된 것은 오로지 한억증 때문인데, 하교하시며 매번 김치후를 말씀하시는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나는 김치후의 심술(心術)이 더욱 지극히 그르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하였다. 송인명이 아뢰기를,
"동래 부사의 장계에, ‘대차왜(大差倭)의 시봉(侍奉)이 2인이다.’ 하였습니다. 시봉을 1인으로 하는 것은 이미 약조가 되어 있고 거의 50년이나 되었는데, 지금 어떻게 경솔하게 2인으로 허락해 줄 수 있겠습니까? 왜인들은 청나라 사람들과 달라서 혹시라도 과외(科外)의 청을 허락해 주면, 덕으로 여기지 않을 뿐만 아니라 도리어 업신여김을 받게 되고 또한 다시 따르기 어려운 일에 대해 마음을 먹게 되니, 결단코 허락할 수 없습니다. 이번에 변신(邊臣)이 감히 2인으로 하기를 상문(上聞)하였으니 부사 구택규(具宅奎)를 종중 추고하고, 그의 장계는 되돌려 보내는 것이 합당합니다."
하니, 임금이 그 주달을 옳게 여겼다. 또 아뢰기를,
"평안 감사 민응수(閔應洙)가 장계하기를, ‘쇄마(刷馬) 구인(驅人)을 이번에 이미 잡아 왔는데, 호의(胡衣)를 입고 머리도 깎아서 그 정상(情狀)이 몹시 통탄스러웠다.’라고 했습니다. 이는 경인년048) 의 전례가 있으니 마땅히 국경에서 효시(梟示)해야 합니다. 또 피인(彼人)들이 도망한 백성을 용접(容接)하여 의복을 주고 머리를 깎기에 이르고 있으니, 도망한 자를 감추어 주고 간사한 자를 숨겨 주는 폐해를 엄하게 방지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청컨대 의주에서 사리에 의거하여 봉황성장(鳳凰城將)에게 급히 통고하여 뒷날의 폐해를 막도록 하소서."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5월 2일 계축
사간원 【사간 안상휘(安相徽)이다.】 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다. 또 성범석(成範錫)은 삭출(削黜)하고, 김치후(金致垕)의 간명(刊名)과 체직(遞職)은 도로 거두기를 거듭 아뢰었으며, 또 아뢰기를,
"공홍 감사(公洪監司) 이보혁(李普赫)은 기국(器局)이 차서 넘치기 쉽고 재능도 직임에 맞지 않습니다. 대관(臺官)의 상소가 있은 뒤로 오랫동안 공무를 폐하고 있으니, 마땅히 파직해야 합니다."
하였으나, 아울러 비답을 내리지 않았다.
모든 승지에게 입시하도록 명하였다. 사간 안상휘(安相徽) 정언 한억증(韓億增) 수찬 조명리(趙明履)도 함께 입시했다. 임금이 이르기를,
"어제 처치(處置)한 것이 어찌 잘못되었는가?"
하였는데, 조명리가 아뢰기를,
"무릇 간관(諫官)이 한 말은 경솔하게 배척할 수 없는 법입니다. 한억증은 대관(臺官)의 자리에 새로 들어온 사람으로 숨김 없이 바른대로 진달했었습니다. 요사이 당론을 하지 않는 사람은 반드시 작록(爵祿)을 얻게 되는데, 한억증이 만일 조금이라도 이해를 알았다면 반드시 그렇게 하지는 않았을 것이니, 어찌 출사(出仕)시키도록 청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하자, 임금이 이르기를,
"만일 한억증을 정직한 것으로 여겼다면, 유신은 어찌하여 먼저 말하지 않았는가?"
하므로, 조명리가 아뢰기를,
"선유(先儒)의 말에, ‘간관은 규칙(規飭)하는 것을 위주로 하고, 관직(館職)은 성취(成就)하는 것을 위주로 하는 것이다.’ 했습니다. 만일 간관이 없었다면 어찌 신이 말씀드리지 않았겠습니까?"
하자, 임금이 이르기를,
"그만두라. 이병상(李秉常)이 아직 살아 있기 때문에 이런 당습의 말을 초래 하는 것이다. 대저 그들이 매국(賣國)하는 것을 수단으로 삼고 있는데, 이것이 옳은 일인가, 그른 일인가?"
하므로, 조명리가 아뢰기를,
"신은 성상의 하교가 무슨 일을 가리키시는지 알지 못하겠습니다."
하자, 임금이 이르기를,
"신하가 임금을 가려서 섬기는 일이다."
하므로, 조명리가 아뢰기를,
"연명하여 차자를 올려 대리(代理)하게 한 일은 천하 후세에 할 말이 있는 일입니다."
하니, 말이 미처 끝나지도 않았는데, 임금이 이르기를,
"오늘날에도 유신이 다시 이런 말을 하는가?"
하고, 임금이 이르기를,
"신축년049) 일을 돌이켜 생각해 보건대, 오직 나와 황형(皇兄)뿐이었는데, 그들이 임금을 기화(奇貨)로 삼는 짓을 했던 것이다. 매양 생각이 여기에 미칠 때마다 문득 마음이 떨림을 느낀다."
하고, 이어 체차하도록 명하고 이르기를,
"조명리가 이러한데 다른 사람들이야 무슨 말을 하겠는가? 만일 이병상의 머리를 양관(兩觀)에 매달았다면 반드시 감히 이렇게 하지는 못했을 것인데, 저 무리가 모두 말하기를, ‘많은 사람을 어찌 죄다 삶을 수 있겠습니까?’ 하였으므로, 이 지경에 이르게 된 것이다. 사간 안상휘(安相徽)와 정언 한억증(韓億增)을 모두 체차하도록 하라."
하고, 또 하교하기를,
"유신이 과연 소견이 있다면 이의를 제기하는 것이 어찌 어려웠겠는가? 상소를 진달하고 곧장 나가 버렸으니, 몹시 구차하다. 수찬 윤광의(尹光毅) 또한 체차하도록 하라."
하였다. 도승지 정석오(鄭錫五)가 아뢰기를,
"성상의 사기(辭氣)가 평소와 다르시니 성상의 체후(體候)에 해가 될까 두렵습니다."
하였다. 승지가 법강(法講)의 시각이 이미 지났다고 앙주(仰奏)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강(講)은 해서 무엇하겠는가?"
하였다. 그리고 임금이 하교를 입으로 부르기를,
"지난번에 널리 유시했던 것은 구습을 제거하려는 것이었으니, 오늘날 북면(北面)하는 사람들이 어찌 감히 그런 구습을 싹트게 할 수 있겠는가? 김치후(金致垕)는 가슴속에 당습이 가득해서 앙갚음하여 이기려고 힘썼으니, 마땅히 엄중하게 법을 적용했어야 한다. 그러나 겨우 대사(大赦)를 거쳤으므로 아직 활략(濶略)하게 하였는데, 수상이 시애(撕捱)하기 때문에 간략하게 대체(大體)를 효유(曉諭)했던 것이다. 그런데 김치후가 인피한 계사는 갑절이나 장황하였고, 대수롭지 않게 논한 말이라는 말은 임금에게 정직하게 고하는 말이 아니기 때문에 간략히 면칙(勉飭)하는 뜻을 보였던 것인데, 한억증이 신진(新進)의 소신(小臣)으로서 편들기를 달갑게 여겼으니, 칙유(飭諭)하는 비답을 어찌 그만둘 수 있겠는가? 애석하게도 유신 또한 개벽(開闢)이 되지 않았으니, 당습의 맹렬함이 홍수보다도 심하다. 안상휘에 이르러서는 조금도 기탄 없이 감히 잇따라 전계(傳啓)하였으니, 이것이 어찌 신하의 도리이겠는가? 시임(時任)·원임(原任)의 대신과 왕부(王府)의 여러 신하들은 빈청에 모여서 지난날의 사첩(史牒)을 널리 고찰하여 편당하는 사람들이 군부(君父)를 팔아 농간을 부리고 당류를 비호하는 데 달갑게 여기다가 스스로 불경죄에 돌아간 자들의 율(律)이 어떠했는지 자세하게 의논하여 아뢰도록 하라."
하였다.
우의정 송인명(宋寅明)이 차자를 올렸는데, 대략 이르기를,
"즉시 삼가 비망기(備忘記)를 보건대, ‘시임 원임의 대신과 왕부의 여러 신하들은 빈청에 모여서 지난날의 사첩을 널리 고찰하라.’는 명이 계셨습니다. 성상께서 오늘의 시상을 화평하게 하려고 하시는 것은 지극히 공정한 혈성(血誠)에서 나온 것인데, 오늘날 뭇신하들이 끝내 순수하고 결백하게 우러러 받들지 않은 채 당동 벌이(黨同伐異)함이 오히려 구습 그대로이니, 진실로 마음이 아픕니다. 요사이 대신(臺臣)과 유신들이 서로 장황(張皇)한 것을 전하께서 매우 싫어하시는 것은 당연합니다마는, 만약 이를 대불경(大不敬)에 비기신다면 신은 성상께서 실언(失言)하신 것으로 생각합니다. 만일 지금 그들의 죄를 극단적으로 말한다면, 성상의 명에 따르지 않고 성지(聖旨)를 어긴 데 지나지 않는데, 이로써 중전(重典)으로 의율(擬律)한다면, 어찌 뒷날의 폐단과 크게 관계되지 않겠습니까? 하물며 여러 신하들의 그 직임을 묻는다면 간의(諫議)이고 경악(經幄)입니다. 국조(國朝) 이래로 비록 그 말이 승여(乘輿)를 촉범(觸犯)함이 있고 일이 조종에 관계가 되는 것이라 하더라도 또한 모두 광망(狂妄)한 것으로 돌려 용서했었습니다. 하물며 죄상이 이보다 아래에 있는 것이겠습니까? 그들의 죄명을 의논하여도 이미 대벽(大辟)에 적합하지 않다면, 자세히 의논하도록 하신 명은 타당하지 못한 데에 돌아갈 듯합니다. 또한 성상께서 두서너 소신(小臣)에 대해 처분하시는데 무슨 어려워 할 것이 있어서 반드시 신들이 자세하게 의논하기를 기다리신다는 것은 또한 어찌 임금의 위엄이 약함을 보이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마땅히 빨리 명을 도로 거두시고 편안한 마음으로 사리를 관찰하여 거조(擧措)의 중정(中正)을 잃지 않도록 하소서."
하였다.
임금이 여러 승지들을 입시하도록 명하고, 차자에 대한 비답을 쓰게 하기를,
"아! 경들이 나를 그르쳤다. 경들이 나를 그르쳤다. 지난번의 각선했던 뜻은 고심(苦心)한 끝에 편당하는 사람들을 사책(史冊)에서 토죄(討罪)함으로써 선왕께 돌아가서 아뢸 말이 있게 하고, 장차 의거할 데가 있는 임금이 되려고 한 것이었다. 그런데 복선(復膳)한 지 한 해도 안되어 이들 소관(小官)들이 감히 임금을 업신여기는 마음을 품고 임금의 고심을 도리어 권모 술수에 돌렸으니, 장차 무엇을 사책에 보여서 아랫사람들에게 군림(君臨)할 것이며, 또한 장차 무슨 말을 가지고 돌아가서 선왕께 아뢰겠는가? 어찌 경들이 나를 그르친 것이 아니겠는가? 아! 비록 신하가 강성하고 임금은 약한 때를 만났다 하더라도 이러한 처분은 어떻게 자세하게 의논하기를 기다리겠는가? 하교한 것은 대개 이 때문이었다. 하교한 지 몇 시간이 되었으나, 대관(大官)의 지위에 있는 사람이 아직 나오지 않았고, 금오(金吾)의 직임에 있는 사람도 머뭇거리며 관망하고 있을 뿐이다. 세도(世道)가 이러하니, 임금이 되기도 어렵다. 경이 차자를 올린 것은 광보(匡輔)하려는 데에서 말미암았는데, 어찌하여 끝내 함묵(含默)하여 한갓 사체만 손상시키는 것인가? 마땅히 본말(本末)과 경중(輕重)을 헤아려서 합당하게 처분하겠다."
하였다. 승지 이익정(李益炡)이 아뢰기를,
"비답하신 하교 가운데 ‘신강 군약(臣强君弱)’이란 네 글자는 결단코 신하로서 감히 들을 수 있는 바가 아닙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옛부터 어찌 인군(人君)으로서 각선한 사람이 있었는가? 만일 신자(臣子)다운 사람이 있었다면, 반드시 도끼를 지니고 대궐에 엎드리어 편당하는 사람은 베기를 청했을 것인데, 모두 같은 투식에 들어 있으니 누가 이렇게 하려고 하겠는가? ‘신강 군약’이란 말은 지나친 것이 아니다. 그러나 승지의 말이 이러하니, 네 자를 삭제하고 ‘불유군(不有君) 호사당(護私黨)’으로 고치는 것이 옳다."
하였다. 또 하교하기를,
"피차가 모두 그르다. 널리 유시한 뒤에도 이우하(李宇夏)가 김취로(金取魯)를 논계한 것이나 홍정명(洪廷命)이 윤양래(尹陽來)를 논계한 것이 모두 지나간 일 때문이었다."
하였다. 이익정이 아뢰기를,
"국가에서 대각(臺閣)을 대우하는 예모(禮貌)는 지극히 정중해야 하는데 전계(傳啓)에 대해 밤이 지나도록 비답을 내리지 않음은 이전에는 없던 일입니다."
하니, 임금이 이내 사간원의 계사(啓辭)에 대한 비답을 쓰도록 명하기를,
"윤허하지 않는다. 공홍도(公洪道) 도신에 관한 일은 지나치다."
하였다.
김치후(金致垕)·한억증(韓億增)·안상휘(安相徽)·조명리(趙明履) 등을 아주 먼 변방의 해도(海島)에 찬배(竄配)하고 하교하기를,
"김치후가 대신을 공격하여 배척한 것은 또한 당심(黨心)으로 말할 것도 못되며, 군부(君父)의 고심을 저버린 것에 대해 비록 극률은 용서한다 하더라도 어찌 국사를 함께 할 수 있겠는가? 김치후의 조부가 선정(先正)을 사사(師事)하였고, 그 선정이 당심(黨心)을 버린 것 또한 일찍이 들었는데, 이번에 김치후가 방자한 뜻으로 당류를 비호하였으니, 임금의 명만 어긴 것이 아니라 선정을 배반한 것이다. 한억증은 패리(悖理)한 말을 첨입하여 편들기를 달갑게 여겼고, 안상휘는 의기 양양하게 등서(謄書)해서 전하여 임금을 업신여겼으니, 한억증에게 비하여 어찌 율(律)을 다르게 하겠는가? 조명리가 처치(處置)하여 입과(立科)하게 한 것 또한 방자한 데 관계되며, 대리(代理) 등의 말은 오늘날 신자(臣子)로서 어떻게 감히 다시 연석하게 진달할 수 있는 것이겠는가? 이는 한억증과 안상휘에 비해 죄가 갑절이나 된다. 김치후는 흑산도(黑山島)에 귀양 보내어 유북(有北)050) 에 추방하는 뜻을 보이고, 한억증은 기장현(機張縣)에, 안상휘는 해남현(海南縣)에, 조명리는 경성부(鏡城府)의 극변에 투비(投卑)토록 하라."
하고, 또 하교하기를,
"인군은 처분을 마땅히 공정하게 해야 하는 법이다. 성범석(成範錫)이 장황하게 갖춰 진달한 뜻 또한 공정하지 못하다. 비록 경중이 있기는 하지만 그 또한 구습(舊習)이다. 특별히 삭출하는 벌을 시행하도록 하라. 윤광의(尹光毅)는 ‘경출(徑出)하였다.’는 품계(稟啓)가 겨우 올라왔는데, 처치한 차자가 급작스럽게 이르렀으니 어찌 경칙(警飭)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파직하고 서용(叙用)하지 말아서, 일에 임하여 구차하게 인피하는 풍습을 가다듬게 하라."
하고, 또 하교하기를,
"각선하고 널리 유시한 뒤 그 먹[墨]이 아직 마르지도 않았는데, 중신이 되어 방자하게 전석(前席)에서 아뢰기를, ‘비록 개벽했다 하나, 사람은 옛사람이다.’라고 하였다. 김치후의 소장 가운데, ‘산상의 소라 껍질[山上螺毅]’이란 말은 곧 이병상(李秉常)의, ‘사람은 옛사람이다.’라는 뜻이며, 유신이 감히 대리(代理)라는 말을 진달한 것은 곧 이병상이 을사년051) 의 상소에 진달한 말이다. 양성(釀成)하고 배치(背馳)되는 일을 한 사람이 이병상이 아니고 누구 이겠는가? 임금이 처분하면서 어찌 근본은 놓아 두고 말단만 다스리겠는가? 이병상을 엄중하게 국문하여 감처(勘處)함으로써 편당을 심기를 달갑게 여기는 무리를 가다듬게 하라."
하였다. 승지 이중경(李重庚) 등이 국문하도록 한 분부를 도로 거두기를 극력 청하니, 임금이 아울러 체차하도록 명하였다.
5월 3일 갑인
도승지 정석오(鄭錫五) 등이 계청(啓請)하기를,
"이병상(李秉常)을 국문하고 두 승선(承宣)을 체차하도록 하신 명을 도로 정지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임금에 대한 기강(紀綱)이 장차 실추되고 당습이 각축(角逐)하고 있는데, 어느 겨를에 형식을 차리겠는가?"
하였다.
우의정 송인명(宋寅明)이 청대(請對)하여 입시했다. 송인명이 아뢰기를,
"성상께서 신이 불초(不肖)한 사람임을 알지 못하시고 보필(輔弼)하는 직책을 부탁하셨는데, 일마다 바로잡아 보필하지 못하고 번번이 타당치 못한 거조만 있었으니, 이는 신의 죄입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남면(南面)하여 임금이 되어 각선하기에 이르렀으나, 뭇신하들이 또 이와 같이 기필코 원보(元輔)를 쫓아내고야 말았으니, 이는 진실로 나의 허물이다."
하였다. 송인명이 아뢰기를,
"이병상(李秉常)은 당시에 정청(庭請)을 파한 사람들이 바야흐로 죄를 받아 귀양살이하고 있는데, 혼자만 스스로 사환(仕宦)하고 있으니, 개두 환면(改頭換面)의 혐의가 없지 않다고 생각하여 그러는 것입니다. 그 소견의 합당한지의 여부는 물론하고 세상에는 간혹 이와 같이 한결같은 절조(節操)를 지닌 사람들도 있습니다."
하니, 임금이 목이 메어 이르기를,
"지난 사첩(史牒)을 두루 살펴보건대, 어찌 임금이 되어 나와 같은 사람이 있었겠는가? 세 조종(祖宗)의 혈맥(血脈)은 오직 황형(皇兄)과 내가 있었을 따름이다. 비록 신축년052) 의 일이 없었다 하더라도 황형의 골육(骨肉)은 오직 나 한 사람뿐이었으니, 필경에는 조선(朝鮮)이 나에게 돌아오지 않고 누구에게 돌아갔겠는가? 저 무리에게 과연 무슨 공이 있었다고 매양 감히 ‘건저(建儲)하여 대리(代理)하게 했다.’는 말로 나를 팔아 농간을 부려서 당수(黨首)가 되게 하려는 것인가? ‘비초즉제(非楚即齊)053) ’라는 말이 내 귀에 들어왔었으니, 이러함을 알지 못하고서 충성했다고 하는 것은 매우 그른 것이다. 만일 어버이를 위해 은휘(隱諱)하는 의리로 말한다면, 오늘날의 신자(臣子)로서 함구(緘口)하는 것이 옳은데, 김치후(金致垕)의, ‘산상의 소라 껍질이다.’라는 말은 아직도 전의 마음이 그대로 있는 것이다. 어제 자세히 의논하도록 한 명은 진실로 경들이 반드시 하지 않을 줄 알았지만, 경이 청대하기를 기다린 다음 처분을 내리려고 했던 것이다. 오늘 유신(儒臣)이 한억증(韓億增)을 정직한 신하로 여기기 때문에 세 글자에 대한 말을 물었더니, 조명리(趙明履)가 연명 차자와 대리(代理) 등의 일을 또 진달하였는데, 이 말을 들을 때마다 문득 놀라서 몸이 떨림을 느끼게 된다."
하였다. 송인명이 아뢰기를,
"성상께서 지키고 계시는 의리는 비록 성인이 다시 나온다 하더라도 반드시 바뀌지 않을 것입니다마는, 마땅히 경중에 따라서 참작하여 처분하셔야 합니다. 이병상은 전에 이미 죄를 받았는데, 이번에 조명리의 일로 인하여 갑자기 공경(公卿)의 반열에 있는 사람에게 국문을 가한다면, 어찌 사람들이 전해 듣고 놀랍게 여기지 않겠습니까? 만일 도로 거두지 않으신다면 신은 마땅히 거취(去就)를 놓고 논쟁하겠습니다."
하고, 판윤(判尹) 김시형(金始炯)이 아뢰기를,
"이번에 여러 대관(臺官)의 일로 엄중히 국문하기에 이른 것은 진실로 지난날의 사첩에 없던 일입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옛날 송(宋)나라 영종(英宗)이 책봉(冊封)되었을 때 정녕하게 돌아보며 말하기를, ‘내집을 삼가 지키는 것이 내 마음이다.’라고 했었으니, 일이 또한 이러해야 한다. 임인년054) 에 출합(出閤)055) 하였을 때에 궁중의 책자(冊子)를 하나하나 봉해 놓았다. 이번에 모름지기 이병상을 구문(究問)하여 분명하게 처분을 가한 다음에야 나의 마음이 명백해질 것이다."
하였다. 송인명이 아뢰기를,
"신은 전일의 지나친 거조(擧措)에 대해 한 번도 천청(天聽)을 돌이키게 한 적이 없었으니, 어떻게 상직(相職)을 무릅쓰고 차지하겠습니까? 옛날에는 한 말이 신임받지 못하면 곧장 궁문(宮門)을 나가 버린 사람이 있었습니다."
하였는데, 임금이 이르기를,
"듣기에 또한 괴롭지 않겠는가?"
하자, 송인명이 아뢰기를,
"김치후는 늙은 어미가 있으니 마땅히 다른 곳으로 옮겨야 합니다."
하고, 승지 이주진(李周鎭)이 아뢰기를,
"안상휘(安相徽)를 멀리 귀양 보내는 것은 더욱 지나친 일입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경들의 누누이 한 말이 이에 이르니, 특별히 이병상을 엄중하게 국문하라는 명은 정침하겠다."
하였다. 송인명이 아뢰기를,
"김치후는 그의 배소(配所)를 변경하여, 그의 어미 소식을 들을 수 있게 하는 것이 효도요 나라를 다스려 가는 국정(國政)에 합당할 듯합니다."
하니, 위도(蝟島)로 변경하고, 안상휘는 삭직(削職)으로 변경하도록 명하였다. 송인명이 아뢰기를,
"붕당(朋黨)이 생긴 이래로 국가의 명맥(命脈)이 손상된 일이 많았습니다. 거실(巨室)은 소민(小民)들이 관첨(觀瞻)하는 바가 되므로 거실이 죄를 받는 것 또한 국가의 복이 아닙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옛적에 김자점(金自點)이 위관(委官)이 되어 임경업(林慶業)에게 형장을 가하여 죽였는데, 지금까지도 시민당(時敏堂) 앞에는 괴이한 풀이 나고 있다. 대궐 안에 옛적부터 전해 오는 말이, ‘어찌 희정당(熙政堂) 앞에 다시 이런 풀이 생겨나게 해서야 되겠는가?’ 하였는데, 나는 도승지의 ‘뒷날 폐단과 관계가 있다.’는 말에 각오(覺悟)한 바가 있다. 우리 나라의 대신들이 예전에는 체모(體貌)를 존중했었다. 갑진년056) 행행(幸行)하려고 하였을 때에 대신이 극력 만류하며 정지하기를 청하는 것을 내가 처음에는 윤허하지 않다가, 자전(慈殿)께서 하교하기를, ‘옛날에는 대신의 말을 따르지 않는 것이 없었는데 오늘날에는 어찌하여 따르지 않습니까?’ 하시므로, 내가 자전의 분부에 감동하여 그대로 따랐었다."
하였다.
영중추부사 이의현(李宜顯)과 판중추부사 김흥경(金興慶)이 ‘대신의 지위에 있으면서 아직 나오지 않고 있다.’라고 한 하교 때문에 아울러 차자를 올리고 서명(胥命)하니, 임금이 위유(慰諭)하도록 명하였다.
5월 5일 병진
송징계(宋懲啓)를 사간으로, 이성해(李聖海)·조윤제(曹允濟)를 정언으로, 이의종(李義宗)을 장령으로, 정익하(鄭益河)를 교리로, 김광세(金光世)·송교명(宋敎明)을 부교리로, 오수채(吳遂采)·홍중일(洪重一)을 수찬으로, 심성진(沈星鎭)을 부수찬으로, 김시형(金始炯)을 형조 판서로, 윤양래(尹陽來)를 경상도 관찰사로 삼았다.
영의정 이광좌(李光佐)가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지난 가을에 갑자기 망극한 일을 만났을 때 창졸(倉卒)간에 몸을 빼쳐서 나와 10개월 동안 체류(滯留)해 왔습니다. 따라서 종국(宗國)에 조그마한 보탬도 없이 장차 눈앞에 궤결(潰決)만 닥치게 되었습니다. 먼저 스스로 물러나는 것만한 것이 없으므로, 세말(歲末)에 사직 단자를 바치며 반드시 체직되리라 생각하였습니다. 그런데 어가(御駕)를 멈추고 돈소(敦召)하시므로 부득이 승명(承命)하였던 것인데, 김치후(金致垕)의 상소가 갑자기 나온 것입니다. 소장을 남겨 놓고 물러 가기를 고한 다음 하룻 동안 기다리지 않았어야 했습니다. 한억증(韓億增)의 이른바, ‘권활병국(權猾柄國)’이라는 네 자는 진실로 급변(急變)을 고한 글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인신으로서 이런 말을 들었으니 어찌 하루인들 차마 천지간에 살아 있을 수 있겠습니까? 아! 신이 권신(權臣)이 되고 활리(猾吏)가 되어 국가의 권병(權柄)을 잡았다면 천감(天鑑)이 환히 알고 계실 것인데, 신이 어찌 감히 말을 하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우악한 비답을 내리고 즉일로 함께 들어오도록 명하였다.
부수찬 남태량(南泰良)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신이 듣건대, 성문(聖門)의 학문은 천노(遷怒)와 이과(貳過)를 깊이 경계했었습니다. 임금의 덕은 사물(事物)이 닥쳐오면 순응(順應)하는 데 있는 법입니다. 만일 이 사람으로 인해 저 사람에게 노여움을 옮긴다거나 묵은 허물을 들추어 낸다면, 사람마다 누가 감히 스스로 마음을 편히 가질 수가 있겠습니까? 이번에 김치후(金致垕) 등이 다시 당론(黨論)을 일삼아 조정을 괴란(壞亂)시킨 것은 곧 김치후 등의 죄입니다. 만일 편당의 근본을 논한다면 그 근원이 매우 커서 오로지 이병상(李秉常) 한 사람만 책망할 수는 없을 듯합니다. 전하께서 특별히 널리 유시하신 초기에도 오히려 구습(舊習)을 품고 있다 하여 몹시 미워하셔서 통렬하게 배척하셨었습니다. 그러나 이병상이 언제 일찍이 김치후처럼 장황하게 진소(陳疏)하여 방자하게 당습을 품은 적이 있었습니까? 북관(北關)에 찬배(竄配)한 것 또한 중도에 지나쳤다고 할 것인데, 더욱이 다른 사람의 일에 대해 발노(發怒)하여 이미 용서한 뒤에 끌어다가 관련시켜 죄를 구성하고 또 그 율(律)을 무겁게 하였으니, 천노하고 이과함이 큰 것입니다. 이것이 어찌 사물이 닥쳐오면 순응하는 도리이겠습니까? 대저 중신(重臣)이 언어(言語)로 인한 죄과 때문에 왕부(王府)에 나아가 국문(鞫問)을 받는다는 것은 진실로 전대(前代)에는 없던 일입니다. 삼가 바라건대, 화평하신 마음으로 용서하셔서 특별히 이병상을 준엄하게 국문하여 감처(勘處)하도록 하신 명을 거두소서.
또 듣건대, 성왕(聖王)은 국정(國政)을 세워 갈 때 호오(好惡)를 바르게 해야 하나, 인신은 진언(進言)할 때 선악(善惡)의 차이가 있다고 합니다. 그러나 오직 언관(言官)은 죄를 줄 수 없으니, 죄주게 되면 사기(士氣)가 손상되고 언로(言路)가 막히게 되는 법입니다. 김치후가 올린 소장의 뜻이 진실로 무상(無狀)하고 한억증(韓億增)의 계사(啓辭) 가운데 위험한 말이 많으며 안상휘(安相徽)가 급급하게 잇따라 아뢰고 조명리(趙明履)가 처치(處置)하여 사진(仕進)하게 하기를 청한 것들은 모두가 편당을 비호하는 풍습을 면하지 못한 것이니, 물리치시는 것이 마땅합니다. 그러나 그들의 직책을 묻는다면 간쟁(諫諍)하는 관원이고 논사(論思)하는 관원이니, 우선 가벼운 벌에 처하여 분명하게 성의를 보이는 것 또한 족합니다. 어찌 반드시 황량한 변방에 추방하여 언관을 죄주었다는 악명을 얻으시겠습니까? 성범석(成範錫)이 처치(處置)를 부당하게 여겨 상소하여 처분을 청한 것은 진실로 잘못이 있습니다. 그러나 삭출(削黜)하는 벌은 너무 지나침을 면하지 못하니, 아울러 도로 정침하심이 마땅합니다. 어제 빈청(賓廳)에 모여 의논하도록 하신 것은 더욱 지극히 예사롭지 않은 일이었는데, 다행히 대신이 올린 차자에 힘입어 즉시 성명(成命)을 정침하셨습니다. 그러나 뭇신하들이 놀라서 근심하여 거의 성덕에 허물을 끼침을 면하지 못하였습니다. 삼가 원하건대, 징분 질욕(懲忿窒慾)하는 공부에 더욱 힘쓰셔서 더욱 중정(中正)한 도리를 강구(講求)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이병상의 일은 이미 명을 정침했다. 김치후 등의 일은 비록 경중(輕重)이 있기는 하지만 그들의 마음을 구명(究明)해 보면 모두 당습이었으니, 어찌 처분을 그만둘 수 있겠는가?"
하였다.
5월 7일 무오
임금이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우의정 송인명(宋寅明)이 아뢰기를,
"한재(旱災)가 이와 같으니, 절생(節省)하는 도리가 없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청컨대, 호조 병조와 선혜청(宣惠廳)으로 하여금 용도(用度) 가운데 부비(浮費)에 가까운 것을 고찰하여 벌여 적어서 비국에 신보(申報)함으로써 재감하는 바탕으로 삼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5월 12일 계해
윤순(尹淳)을 예문관 제학으로, 오수채(吳遂采)를 교리로 삼았다.
영의정 이광좌(李光佐)가 또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신이 진실로 불행하여 다른 사람들에게 헤아릴 수 없는 참소와 무함을 많이 받았습니다. 자못 상변(上變)하는 급서(急書)와 다름이 없이 한 것이 전후에 거의 수십 차례나 되었는데, 이번의 무함에 이르러 극도에 달하였습니다. 사리로 논하건대, 무함한 자에 대해 만약 반좌(反坐)하지 않는다면, 무함받은 사람이 어떻게 천지 사이에 얼굴을 들 수 있겠습니까? 다만 경탈(傾奪)하는 즈음에 이런 습관은 가끔 있으나, 스스로 법리(法理)로써 일정하게 재단할 수도 없으며, 관직이 대신인 사람들도 남을 죄 받게 하고 자신을 보위(保衛)하는 것을 황공하게 여기기 때문에, 일찍이 끝까지 구핵(究覈)하도록 청하기를 필부(匹夫)나 필부(匹婦)가 격고(擊鼓)하여 억울함을 호소하듯이 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런데 간혹 무릅쓰고 조정의 반열에 들어가 무고(無故)한 사람처럼 하고 있는데 신 또한 더러 이를 면하지 못하니, 보고 듣는 사람들이 해괴하게 여긴 지 진실로 이미 오래입니다. 다행히 성은을 입어 영구히 조적(朝籍)에서 물러난 다음에야 의리가 비로소 펴지고 마음도 비로소 만족해질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비답을 내려 돈독하게 유시하였다.
5월 13일 갑자
가뭄이 대단하여 남쪽 교외(郊外)에는 대신을 보내고 북쪽 교외에는 중신(重臣)을 보내어 기우(祈雨)하도록 명하였다.
5월 14일 을축
부수찬 남태량(南泰良)을 내치어 거산 찰방(居山察訪)으로 삼았다.
5월 15일 병인
화성(火星)이 목성(木星)을 침식(侵食)했다.
정언 이성해(李聖海)가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대신이 간신(諫臣)의 상소가 나온 뒤 종국(宗國)을 지탱하기 어렵게 되었다는 말로 상청(上廳)을 지극히 번거롭게 하였습니다, 대저 사람들이 바야흐로 나에게 죄를 돌리고 있는데, 도리어 스스로 내가 물러나면 종국이 지탱하기 어렵다고 하고 있는 것이, 옛 재상(宰相) 스스로 허물을 들어 인책(引責)하던 도리에 있어서 과연 어떠합니까? 대신(臺臣)이 일을 논한 소장이 얼마나 엄중한 것인데, 상변(上變)·고급(告急) 등의 말들로 언자(言者)를 협지(脅持)하려는 계책으로 삼았으며, 또 말하기를 ‘엄중하게 허실(虛實)을 구명(究明)해야 한다.’라고 했고, 마지막에 가서, ‘만일 무함한 자를 반좌(反坐)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얼굴을 들 수 있겠습니까?’ 하여 은연중에 언자를 구문해야 한다는 뜻이 있었습니다. 아! 다른 사람들이 자신을 논박한 것을 싫어하여 도리어 언자를 꾸짖는 것은 진실로 식견있는 사람들이 한심하게 여기는 일인데, 어찌 이런 말들이 삼사(三事)의 자리에 몸담고 있는 사람에게서 나올 줄을 생각이나 했겠습니까?"
하였는데, 임금이 하교하기를,
"조금이나마 북면(北面)하는 마음이 있으면 지난번에 하교한 뒤에 감히 이처럼 대신을 기조(譏嘲)할 수 있겠는가? 임금과 승부를 다투려는 마음이 지난날보다 갑절이나 더한데, 만일 엄하게 징계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호리(狐狸)와 같은 무리를 응징할 수 있겠는가? 정언 이성해를 우선 체차(遞差)하여 흑산도(黑山島)에 정배(定配)하도록 하라."
하였다.
임금이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우의정 송인명(宋寅明)이 아뢰기를,
"이처럼 가뭄을 당하였을 때에는 진실로 마땅히 원통하고 억울함을 소통(疏通)시켜 백성의 심정을 위로해 줌이 마땅합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경의 말이 옳다."
하였다. 송인명이 또 아뢰기를,
"남태량(南泰良)을 외직에 출보함은 과중한 일입니다."
하였으나, 임금이 따르지 않았다. 임금이 말하기를,
"한원(翰苑)이 오래 비어 있으니 마땅히 변통해야 하는데, 이제원(李濟遠)은 진실로 긴요하지 않은 사람이고, 윤상임(尹尙任)과 민백행(閔百行)은 의당 행공(行公)하지 않을 것이다."
하였는데, 송인명이 임상원(林象元)·이종적(李宗迪)·이제원을 삭직시켜 별겸춘추(別兼春秋)로 차임(差任)하고, 신천(新薦)을 시행하기를 청하니, 그대로 따랐다.
5월 16일 정묘
김정윤(金廷潤)을 사간으로, 민택수(閔宅洙)·민계(閔堦)를 정언으로, 송질(宋瓆)을 문학으로, 조명신(趙命臣)을 승지로, 김성응(金聖應)을 판윤으로, 조현명(趙顯命)을 예문관 제학으로 삼았다.
영의정 이광좌(李光佐)가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신이 다른 사람들에게 위해(危害)와 모욕을 많이 받아 마음속으로 몹시 원통하게 여겨 일전에 상소하여 범연하게 인신으로서 무함을 받은 자의 처신하는 의리에 대해 거론했었는데, 총론(總論)에서 이른바, ‘반좌(反坐)’라고 한 것은 단지 사리에 있어서 마땅히 그렇게 되어야 함을 말했을 따름입니다. 비록 그렇지만 갑자기 보는 사람이 자세하게 그 어맥(語脈)을 구명해 보지 않는다면 의심하여 비방할 단서가 없지 않으므로, 신 또한 스스로 말할 필요가 없는데도 말한 것을 병폐로 여겼던 것입니다. 간신(諫臣)이 과연 공격하여 논박한 것이 그림자와 메아리보다 빨랐으니, 계책을 빠뜨림이 없다고 할 만하나, 신은 진실로 한 번 웃고 말았습니다. 다만 생각해 보건대, 성상께서 그들을 죄주신 바가 진실로 중도에 지나쳤습니다. 절해(絶海)의 변방으로 정배하는 것은 곧 죽음과의 거리가 약간의 차이만 있는 것입니다. 비록 신을 논박한 몇 가지 조목에 신의 본뜻을 알지 못한 것이 있었으나, 이는 신에게 있어 위축(危蹙)될 뿐이지 어찌 조정에서 번거롭게 처분할 것까지 있겠습니까? 성세(聖世)에 사물에 맞추어 공평하게 시행하는 의리가 아닌 듯합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이성해의 날뛰는 짓은 오로지 법이 해이한 데에서 연유한 것이며, 이 또한 말감(末勘)한 것이다."
하였다.
우의정 송인명(宋寅明)이 아뢰기를,
"옛부터 흑산도(黑山島)에 귀양 보낸 사람은 오직 갑술년057) 의 유명천(柳命天)과 경종조(景宗朝)의 고 참판 홍계적(洪啓迪) 두 사람뿐이었는데, 작년 가을 이후에 정배(定配)된 사람이 세 사람이나 됩니다. 옛사람이 이르기를, ‘이 길에 형극(荊棘)을 비로소 열어 놓았으니, 저 죄를 짓고 귀양 가는 사람들이 비록 스스로 천망(天網)에 걸렸다 하나, 근대에 와서 법망이 점점 엄밀해지고 있다.’라고 했습니다. 흑산도란 섬은 본래 경솔하게 귀양 보낼 곳이 아닌데 성상께서는 누차 귀양 보내고 계시니 어찌 타당치 못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호리(狐狸)가 울부짖고 추선(鰌鱔)이 춤을 춘다고 했는데 이성해에게는 마땅히 이 문구를 사용해야 한다. 지난해에 조태언(趙泰彦)을 응견(應犬)이라 하여 팽형(烹刑)에 처하려 했는데, 김한철(金漢喆)이 ‘이 뒤에도 이렇게 하면 마땅히 극률(極律)에 처해야 한다.’고 했었다."
하였다.
5월 17일 무진
이때에 임금이 장차 사직단(社稷壇)에 기우제(祈雨祭)를 친히 행하려 하였는데, 예문관 제학 윤순(尹淳)이 마땅히 제문(祭文)을 지어 올려야 하는데도 윤순이 여러 차례 소명(召命)을 어기고 명을 받들지 않으므로, 윤순을 체직시키고 조현명(趙顯命)으로 대신하도록 명하였다. 그러나 조현명 또한 나오지 않아서 또 송진명(宋眞明)으로 대신하게 하였는데, 송진명은 처음으로 문임(文任)에 제배(除拜)되었다 하여 인혐(引嫌)하고 출사(出仕)하지 않았다. 임금이 묻기를,
"지제교(知製敎) 또한 지어 올린 예가 있었는가?"
하자, 승정원에서 아뢰기를,
"정사년058) 의 기우제 때에 특별한 하교에 따라 지어 올린 예가 있습니다."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이때에 병조 판서 박문수(朴文秀)도 소명을 어기고 서명(胥命)하므로 비국에서 박문수와 조현명을 종중 추고하기를 계청(啓請)하니, 그대로 윤허했다.
임금이 사직단에 나아갔다.
5월 18일 기사
임금이 기우제를 행하였다. 우의정 송인명(宋寅明)이 아뢰기를,
"오늘 새벽에 자못 비가 내릴 기미가 있었는데, 곧 소멸되어 흩어졌습니다. 하늘이 아득하게 멀어서 진실로 헤아리기 어렵지만, 전하의 형정(刑政)이 반드시 모두 알맞았다고 감히 말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옛부터 천재를 만났을 적에는 문득 소결(疏決)하는 거조가 있었고, 선왕조(先王朝) 무오년059) 에도 한재(旱災)로 인해 크게 소결을 행하였습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지금 듣건대, 선왕조 무오년에 전례가 있었다고 한다. 더욱이 올해가 또한 무오년이니 내 마음에 더욱 감회(感懷)가 있다. 아뢴 말대로 거행하도록 하라."
하고, 먼저 죄가 가벼운 죄수들을 놓아주도록 명하니, 전옥서(典獄署)에서 죄가 가벼운 죄수 1백 20인을 석방했다.
병조 판서 박문수(朴文秀)가 아뢰기를,
"안동(安東)은 곧 우리 나라의 추로(鄒魯)060) 의 고장입니다. 문정공(文正公) 김상헌(金尙憲)이 일찍이 이 곳에서 지내며 유학(遊學)하였기 때문에 오래 전부터 서원(書院)을 세우자는 의논이 있었으나, 본고장 선비들의 의논이 한결같지 아니하여 창건하지 못했었습니다. 이번에 듣건대, 안연석(安鍊石)의 아들 안택준(安宅俊)이란 사람이 앞장서서 담당하고 있다고 합니다. 대저 문정공의 충정(忠情)한 큰 절의를 어느 누가 서원에 향사(享祀)할 수 없다고 하겠습니까마는, 안택준 스스로 사사로이 영건(營建)하는 것은 그 의도가 향권(鄕權)을 쥐고서 자신과 의견이 다른 사람들을 물리쳐 억제하려는 데 있으므로, 온 고을이 모두 불울(怫鬱)하여 진정시킬 수가 없습니다. 일찍이 조현명(趙顯命)과도 언급한 바 있습니다마는, 조현명 또한 두려워하여 감히 말하지 못했었습니다. 만약 하교가 없다면 금지하기 어려울 듯합니다."
하니, 임금이 드디어 하교하기를,
"서원의 창설이 도리어 민폐가 되고 있으니, 을사년061) 이후에 창설한 것은 제도(諸道)로 하여금 조사해서 계문(啓聞)하여 철폐하도록 하라."
하고, 또 하교하기를,
"안연석은 내가 일찍이 임용(任用)할 만하다고 여겼었다."
하자, 박문수가 아뢰기를,
"일찍이 양산 군수(梁山郡守)가 되었을 적에 비할 데 없이 탐학(貪虐)하였고, 그의 아들 안택준은 도리에 어긋나서 송사를 좋아하여 무상(無狀)한 소행이 많았습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내가 일찍이 안연석을 임용할 만하다고 여겼는데, 영상이 준열하게 방색했었으니, 반드시 경의 말을 듣고 그랬을 것이다."
하였다.
5월 19일 경오
이종백(李宗白)을 승지로 삼았다.
영의정 이광좌(李光佐)가 한재(旱災)로 인해 상소하여 진계(陳戒)하니, 임금이 가납(嘉納)하였다.
임금이 장차 태묘(太廟)에서 비를 빌려고 하자, 약방 도제조 김흥경(金興慶)·판중추 부사 김재로(金在魯)·우의정 송인명(宋寅明) 등이 한더위에 친히 비를 빌게 되면, 반드시 기력을 손상시킬 염려가 있다 하여 극력 진달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백관은 그래도 나무 그늘에 갈 수 있지만, 군병(軍兵)들은 노천(露天)의 폭양(暴陽)에 서 있어야 하니, 이것이 가엾다."
하고, 대신이 섭행(攝行)하도록 명하였다.
5월 20일 신미
이종연(李宗延)·이수해(李壽海)를 정언으로, 이유신(李裕身)을 장령으로, 정순검(鄭純儉)을 설서로 삼았다.
5월 21일 임신
이중협(李重協)을 승지로, 이광운(李光運)을 사간으로, 정준일(鄭俊一)을 정언으로 삼았다.
임금이 주강을 행하였다. 지평 이종연(李宗延)이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5월 22일 계유
임금이 대신과 금오(金吾)의 여러 당상을 불러 희정당(熙政堂)에서 소결(疏決)을 행하였다. 이현필(李顯弼)·조덕린(趙德隣)·강세윤(姜世胤) 등을 석방하도록 명하고, 김성탁(金聖鐸)은 위리(圍籬)를 철거하여 육지(陸地)로 내보내도록 명하고, 이관후(李觀厚)·목천현(睦天顯)·목성관(睦聖觀)도 육지로 내보내도록 명하였으며, 홍치상(洪致祥)·목지경(睦趾敬)은 복관(復官)하도록 명하였다. 이는 모두 죄가 무거운 사람들이었다. 김치후(金致垕)·이성해(李聖海)·조명리(趙明履)·한억증(韓億增) 등 여러 사람도 혹은 육지로 내보내거나 혹은 양이(量移)했는데, 이는 모두 일을 논한 것 때문에 죄를 얻은 사람들이었다. 의금부 당상이 문안(文案)을 차례로 진달하였는데, 이현필(李顯弼)에 이르자, 임금이 여러 신하들에게 물으니, 도제조 김흥경(金興慶)이 아뢰기를,
"그가 어찌 감히 성궁(聖躬)을 침핍(侵逼)했겠습니까? 그의 뜻은 오로지 결과(決科)062) 하려는 계책이었던 것입니다."
하고, 판중추부사 김재로(金在魯)는 아뢰기를,
"한 말이 더 없이 패리(悖理)하였으나, 처분이 너무 무거웠습니다."
하고, 병조 판서 박문수(朴文秀)는 아뢰기를,
"그가 무상(無狀)하기는 하지만, 국가의 처분이 너무 지나쳤습니다. 한 50년쯤 지난 뒤에 사람들이 모두 말하기를, ‘이현필은 국가를 위하여 곧은 말을 했다가 죄를 얻었다.’라고 한다면, 어찌 성덕에 누(累)가 되지 않겠습니까?"
하고, 김재로는 아뢰기를,
"후세에 그 일이 어떠한 것이었는지 알지 못하고 의논하는 사람이 있을까 두렵습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내가 반유(泮儒)들이 권당(捲堂)한 것에 동요받아 부억(扶抑)할 뜻이 있었으므로, 한 번 처분을 내리려고 하여 마음속으로 요량한 바가 있었다."
하고, 특별히 석방하도록 명하였다. 김성탁의 일에 이르러 김재로가 아뢰기를,
"매우 중대한 데에 관계되니, 어찌 경솔하게 의논할 수 있겠습니까? 다만 듣건대, 그에게는 늙은 어미가 있다고 하니, 긍측(矜惻)한 마음이 있습니다."
하고, 우의정 송인명(宋寅明)은 아뢰기를,
"이현일(李玄逸)의 일에 대해 그가 반드시 알지 못했을 것입니다. 듣건대, 그의 늙은 어미가 매양 해를 향하여 하늘에 빈다고 하니, 정리(情理)가 가긍(可矜)합니다."
하고, 판의금부사 조상경(趙尙絅)은 아뢰기를,
"만약 모자(母子)로 하여금 서로 만나 보게 한다면 어찌 인정(仁政)이 아니겠습니까?"
하고, 박문수는 아뢰기를,
"나학천(羅學川)이 이현일을 위해 복관(復官)시킬 것을 청했었는데, 나학천은 승지가 되고 참의가 되었던 사람입니다. 동일한 이현일인데, 나학천이 말하면 벼슬을 주었고, 김성탁이 말하면 형벌을 베풀고 귀양을 보냈습니다. 만약에 김재로의 말대로라면 반드시 나학천의 벼슬을 추탈(追奪)한 뒤에야 국법(國法)이 행해질 수 있을 것입니다."
하자, 김재로가 아뢰기를,
"박문수가 한 말은 사리에 어긋난 말입니다. 김성탁이 이미 죽지 않았는데, 어떻게 나학천을 죄 줄 수 있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내가 이현일에 대한 문안(文案)을 보았더니, 계유년063) 에 민암(閔黯)과 이의징(李義徵)이 이현일을 사주하고 부탁하여 적서(嫡庶)의 구분을 밝히도록 하였으나, 그때 이미 저위(儲位)가 정해져 있었는데, 무슨 적서에 대해 밝힐 만한 것이 있었겠는가? 이 말은 매우 통탄스러운 것이어서 이관후(李觀厚)의 문안과 견줄 것이 아니었는데, 김성탁이 어찌 이를 알았겠는가? 그가 말하기를, ‘어미가 있으므로 살기를 바란다.’라고 했고, 또한 ‘이현일에 있어서는 증거가 없다.’라고 했었으므로, 단지 한 차례만 형벌을 베풀었을 따름이었다. 왕자(王者)는 효도(孝道)로써 나라를 다스려 가는 것이다."
하고, 특별히 위리(圍籬)를 철거하고 육지로 내보내도록 명하였다. 김치후에 이르러 임금이 이르기를,
"이관후는 대각(臺閣)에 들어와서 과감하게 말하였고, 김성탁은 스승을 위하여 원통함을 호소하였으니, 오히려 용서할 도리가 있다. 그러나 김치후와 같은 자는 오로지 시상(時象)을 위해 말하였으니, 용서할 수가 없다."
하자, 조상경이 아뢰기를,
"김치후 또한 늙은 어미가 있으니, 효도(孝道)로 나라를 다스리는 도리에 있어서 서로 만나도록 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고, 송인명이 아뢰기를,
"신은 조명리(趙明履)에게는 죄가 있지만 세 사람은 죄가 없다고 여깁니다. 김치후의 죄는 당습에 불과하니 유독 참작하는 은전(恩典)을 적용하지 않는다면 신의 마음이 불평할 것이며, 여러 신하들 또한 어찌 그렇지 않겠습니까?"
하고, 박문수는 아뢰기를,
"우상의 말대로 윤허하지 않으신다면 시상이 겹쳐서 격렬해질 것입니다. 만약 이번에 석방하지 않는다면 소결(疏決)하는 사체가 아닐 것입니다."
하고, 동지의금부사 박사수(朴師洙)는 아뢰기를,
"이성해(李聖海)의 일은 사람들이 모두 지나치다고 여깁니다."
하니, 임금이 김치후와 이성해는 육지로 내보내고, 조명리와 한억증은 양이(量移)하도록 명하였다. 조상경이 아뢰기를,
"홍치상(洪致祥)의 손자 홍익종(洪益宗)이 상언(上言)하자, 저번에, ‘등대(登對)하여 진품(陳稟)토록 하라’는 하교가 있었습니다."
하였는데, 송인명이 아뢰기를,
"홍치상은 갑술년064) 에 복관(復官)되었다가 임오년065) 에 고 상신(相臣) 조태구(趙泰耉)의 상소로 인해 추탈(追奪)되었습니다. 이사명(李師命)이 이미 복관되었는데 홍치상만 유독 복관되지 않았으니, 어찌 도치(倒置)된 일이 아니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대신에게 물었다. 여러 신하들이 모두 아뢰기를,
"죄명(罪名)이 분명하지 않았으니 마땅히 처분을 내리셔야 합니다."
하였는데, 박문수가 아뢰기를,
"신이 이 집안의 일에 대해 상세하게 알고 있습니다. 홍치상의 아들 홍태유(洪泰猷)는 진실로 세상에 드문 선인(善人)이었는데, 가화(家禍)를 만난 이후로 천지 사이의 죄인으로 자처(自處)하여 매우 많은 가산(家産)을 분토(糞土)처럼 여기고, 초려(草廬)에서 거적 자리로 그의 생애를 마쳤습니다. 그의 비애(悲哀)와 고통을 곁에서 본 사람들이 그를 위해 불쌍하고도 가련하게 여겼습니다. 그가 계모(繼母)를 지극한 효성으로 섬기므로, 고 상신 조문명(趙文命)과 이덕수(李德壽)가 모두 사모하여 교분(交分)을 맺었었으니, 그의 사람됨을 알 만합니다. 홍치상의 죄는 복상(卜相)과 성자(姓字)의 두 가지 일에 있는데, 복상에 관한 일은 그 언근(言根)이 이미 다른 사람에게 돌아갔습니다. 성자에 관한 일 한 가지에 이르러서는 모두 벽성(僻姓)이었고 ‘홍(洪)’ 자도 그 가운데 들어 있었으니, 어찌 자기의 성을 아울러 그 가운데 써 넣을 리 있겠습니까? 홍치상은 귀주(貴主)의 한 아들로 효묘(孝廟)의 외손이었으니 교만한 습성이 없을 수 없었습니다. 한 마디로 말하여 교만하고 망령되고 경솔할 뿐이며, 남에게 기만당한 것에 불과 한 것이었지만, 일단 국옥(鞫獄)에 들어가서 불행하게도 질투하여 미워하는 사람이 당국(當國)한 때를 만났었으니, 어떻게 죽지 않을 수 있었겠습니까? 당초 갑술년066) 에 숙묘(肅廟)께서 특별히 그의 관작을 회복하게 했었으니, 이는 의친(議親)과 수목(修睦)하는 성덕(聖德)이었는데, 조태구(趙泰耉)의 상소로 인해 마침내 추탈(追奪)되기에 이르렀던 것입니다. 언근(言根)을 낸 사람도 이미 복관(復官)되었는데, 홍치상에게 복관을 윤허하지 않으신다면, 어찌 원통하지 않겠습니까?"
하자, 임금이 이르기를,
"지금 영성(靈城)의 말을 들어보건대, 홍치상은 교만하고 안일하게 생장(生長)한 소치에 불과하고, 효묘의 외손 혈속(血屬)으로 단지 이 집안이 있을 뿐이니, 여러 신하들이 이의(異議)가 없다면 특별히 복관시키도록 윤허하겠다."
하니, 송인명이 아뢰기를,
"홍치상을 이미 복관시키도록 하셨습니다. 그의 아들 홍태유(洪泰猷)의 효행(孝行)은 온 세상이 다 아는 일이니 정문(旌門)을 세워 포양(褒揚)하게 하는 은전(恩典)이 없을 수 없습니다."
하였다. 송인명이 이어 아뢰기를,
"경술년067) 옥사(獄事)에 목천현(睦天顯) 부자가 연좌(連坐)되어 귀양간 것은 원통한 일입니다."
하니, 양이(量移)하도록 명하였다. 송인명이 또 목지경(睦趾敬)의 원통함을 진달했는데, 대개 그의 아들이 바야흐로 아버지를 위하여 원통함을 호소했기 때문이었다. 임금이 이르기를,
"무신년의 옥사(獄事)에 대해서는 내가 관대하였으나, 경술년에는 너무 준엄하게 했었다."
하자, 박문수가 아뢰기를,
"경술년 옥사도 억울함을 하소연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목지경·심유의(沈游義)·권세장(權世長)이 모두 동일한 일에 연좌되었는데, 심유의는 복관(復官)되고 권세장은 석방되었지만, 유독 목지경은 아직도 단서(丹書)에 남아 있습니다. 또 노미(老味)가 속여서 공술(供述)한, ‘원곡(院谷)에 모였었다.’는 날은 곧 목지경이 엄경우(嚴慶遇)의 잔치에 갔던 날입니다. 엄경우의 아우 엄경하(嚴慶遐)가 승선(承宣)으로서 바야흐로 입시(入侍)했으니, 분명한 증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였는데, 엄경하가 아뢰기를,
"신의 형의 수연(壽宴) 자리에 목지경과 함께 같이 모여서 시를 지으며 단란하게 밤을 새웠습니다. 그 날이 거짓 공술에서 모였다고 칭한 날인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그렇다면 이는 분명한 증거이다. 권세장은 생존해 있기 때문에 전석(全釋)했지만, 죽은 자는 다시 살아날 수도 없는데, 하물며 형장 아래에서 억울하게 죽은 사람이겠는가? 목지경과 심유의는 이동(異同)이 있을 수 없으니 일체로 복관하도록 하라."
하였다.
유생 이사복(李思復) 등이 상소하여 조현명(趙顯命)이 아성(亞聖)068) 을 무욕(誣辱)한 죄를 다스리기를 청하니, 임금이 비답을 내리지 않은 채 도로 내주게 하고, 소두(疏頭)는 연한(年限)을 정하여 정거(停擧)하게 하고, 함께 참여한 여러 유생들은 10년 동안 정거하도록 명하였다. 이에 앞서 조현명이 김치후(金致垕)의 ‘도유(導諛)하였다.’는 배척으로 인하여 상소하여 변명하기를, ‘맹자 또한 재물과 여색(女色)을 위해 도유한 데로 귀착되지 않겠습니까?’라고 하였었는데, 이에 이르러 이사복 등이 ‘그 말은 아성을 무핍(誣逼)한 것이다.’라고 하여 드디어 이런 소장을 올리게 된 것이었다. 임금이 하교하기를,
"풍원(豐原)이 올린 소장에는 본시 아성을 침모(侵侮)한 말이 없었는데, 문자(文字)를 들추어 내어 총재(冢宰)를 구허날무(構虛捏無)한 것이다. 만약 통렬하게 징계하지 않는다면, 그 폐단은 이루 말할 수 없을 것이다."
하고, 드디어 정거하는 명을 내린 것이었다. 판중추부사 김재로(金在魯)가 아뢰기를,
"온당한 처분이십니다. 다만 소장에 관계된 전체의 유생을 정거함은 그런 전례가 없습니다."
하였는데, 정언 정준일(鄭俊一)이 아뢰기를,
"김치후 등 네 사람의 죄도 오히려 귀양중에 있는데, 하물며 이런 괴귀(怪鬼)같은 무리를 어찌 정거에 그칠 수 있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나의 처분에는 뜻한 바가 있다."
하였다. 지평 이종연(李宗延)이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홍치상(洪致祥)은 그 죄명(罪名)이 이미 무겁고 선조(先朝)의 처분도 지극히 준엄하였는데, 이제 와서 복관(復官)함은 성상께서 선왕의 뜻을 따르며 고치지 않아야 한다는 뜻에 어긋납니다. 청컨대 복관하도록 하신 명을 도로 거두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오늘 행한 소결(疏決)에는 논쟁할 만한 것이 많았는데도 마침내 말이 없다가, 유독 홍치상의 일에 대해서만 논하니, 이는 공정한 마음에서 나온 것이 아니다. 그윽이 헌신(憲臣)을 위하여 개탄스럽게 여긴다."
하였다. 정언 정준일(鄭俊一)이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5월 23일 갑술
어떤 별이 제좌성(帝座星) 아래에 있었다.
임금이 대신과 추조(秋曹)의 여러 당상들을 불러 소결(疏決)을 행하였다. 사형수 중에서 감사(減死)하여 정배(定配)한 자가 8인이고, 잡범(雜犯) 중에서 석방된 자가 2백 32인이었다. 이어 홍태유(洪泰猷)의 아들 홍익삼(洪益三)과 심정협(沈廷協)의 아들 심사주(沈師周)를 모두 조용(調用)하도록 명하였는데, 효묘(孝廟)의 외손이기 때문이었다.
이조 판서 조현명(趙顯命)이 상소하여 이사복(李思復)의 상소에 대해 변박(辨駁)하기를,
"선배(先輩)의 문자(文字) 가운데 말을 늘어놓아 사리를 논한 부분에 많은 어법(語法)이 있었습니다. 신이 기억하고 있는 바로는 선정신 송시열(宋時烈)이 문묘에 승사(陞祀)하는 일을 가지고 고(故) 판서 김창협(金昌協)과 왕복(往復)한 글에 이르기를, ‘또 순경(荀卿)과 마융(馬融)069) 을 부호(扶護)한 것을 살펴보건대, 그 말류의 폐단이 장차 곧바로 성(性)은 참으로 악한 것이라고 여겨서 걸주(桀紂)는 참으로 본성대로 했고, 요순(堯舜)은 참으로 위선(僞善)하였으며, 자사(子思)와 맹자(孟子)는 참으로 천하를 어지럽힌 사람이라고까지 이르게 될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신이 한 말은 진실로 전수(傳受)한 바가 있으니, 이제 이사복 등이 장차 요순과 자사·맹자를 무욕(誣辱)한 것으로 선정(先正)을 논박하겠습니까, 아니면 장차 신이 성인들을 무욕하고도 부족하여 또한 선정을 무욕하였다고 하겠습니까? 신이 올린 소장의 지의(指意)는 명백하고 알기 쉬운 것이니, 만일 그들이 알지 못하여 망령된 말을 한 것이라면 그들은 지극히 무식한 사람들이고, 만일 알면서도 짐짓 말을 한 것이라면 그들은 마음이 지극히 상서롭지 못한 것이니, 이 두 가지 중에서 반드시 한 가지에 해당될 것입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이미 환하게 개석(開釋)하였는데 경은 어찌하여 지나친 말을 하는가?"
하였다.
5월 25일 병자
서종옥(徐宗玉)을 대사간으로, 윤득징(尹得徵)을 사간으로, 신겸제(申兼濟)를 장령으로, 조중직(趙重稷)을 지평으로, 김상구(金尙耉)를 정언으로 삼았다.
소대(召對)를 행하였다.
지평 정옥(鄭玉)이 단양(丹陽)에서 현도(縣道)를 통해 상소하여 민폐(民弊)와 역폐(驛弊)에 대해 말하고, 또한 공홍 감사(公洪監司) 이보혁(李普赫)과 봉화 현감(奉化縣監) 이매신(李梅臣)의 함부로 사람을 죽인 죄를 말하고, 말미에 말하기를,
"원보(元輔)가 황야(荒野)에 물러가 있고 전지(銓地)가 또한 비어 있으니, 전하의 조정이 또한 안온(安穩)하지 못합니다. 지금 근거없는 말들이 숨었다 나타났다 하는데, 오로지 경알(傾軋)하려는 의도인 것입니다. 윤급(尹汲) 등에 이르러서는 그 저지른 범죄가 어떠한 것인데, 일이 지난 후에 또 무엇 때문에 기탄없이 뒤좇아 제기하는 것입니까? 삼가 듣건대, 이로 인해 격노(激怒)하시어 국청(鞫廳)을 설치하라는 명을 금방 내렸다가 도로 정지하셨다 하니, 대저 국청이 어떠한 거조인데 이처럼 가볍게 사령(辭令)의 사이에 발동하시는 것입니까?"
하니, 비답하기를,
"진달한 말은 비국으로 하여금 품처(稟處)하도록 하겠다. 호서(湖西)의 일은 소문이 지나치다."
하였다.
5월 26일 정축
임금이 양정합(養正閤)에 나아갔다. 세자(世子)가 모시고 앉았는데, 세자에게 글씨를 써서 도제조 이하의 입시한 여러 신하들에게 나누어 주도록 명하였다.
5월 29일 경진
윤심형(尹心衡)을 사간으로, 송교명(宋敎明)을 교리로, 김광세(金光世)·정이검(鄭履儉)을 부교리로 삼았다.
공홍 감사(公洪監司) 이보혁(李普赫)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전후에 여러 대관(臺官)들이 상소한 말들이 마치 한 맥락(脈絡)을 따른 것 같아서 처음에는 놀라 두려워하였으나, 잇따라 일어나니 한 번 웃고 말았습니다. 신이 부임한 지 반 년이 되었으나, 아직 한 여자에게도 형장(刑杖)을 시행한 일이 없었습니다. 범마(犯馬)한 사람에게 형벌을 가한 일에 이르러서는 과연 곡절이 있습니다. 신이 순찰(巡察)하는 도중에 말을 타고 가로질러 지나가는 사람이 있어서 간략하게 10여 도(度)의 형신(刑訊)을 한 일이 있었는데, 세력이 강한 족속(族屬) 하나가 형벌을 받은 것으로 인하여 남장(濫杖)의 죄안(罪案)을 증성(證成)하였으니, 관장(官長)이 된 자가 또한 난처하지 않겠습니까? 도내(道內)의 토호(土豪) 중에 기필코 은밀히 신을 중상하려는 사람이 하나만이 아닙니다. 홍주(洪州)에서 잡은 주전(鑄錢)한 도둑 중에 벌열(閥閱)한 사족(士族)과 연관이 있는 자가 한두 집안뿐만이 아닙니다. 대흥(大興) 사람 박종성(朴宗聖)이 고을 원을 능멸하고 모욕한 것은 풍화(風化)에 관계되는 일이므로, 신이 잡아 가두고 죄를 다스리도록 했더니 도망하여 서울 안에 머물러 있습니다. 결성(結城)에서는 살인 옥사의 문첩(文牒)이 있었는데, 죽은 사람의 부모가 전 군수 김시발(金時發)을 정범(正犯)으로 지목했으므로, 신이 복검(覆檢)을 기다렸다가 사실에 의거하여 등문(登聞)했었습니다. 그런데 겨우 수일 만에 안상휘(安相徽)의 논계(論啓)가 과연 즉시 뒤이어 나왔으니, 신이 그들의 해독(害毒)을 받는 데 대해 어찌 괴이하게 여길 것이 있겠습니까?"
하니, ‘사직하지 말라’고 비답하였다.
5월 30일 신사
임금이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우의정 송인명(宋寅明)이 아뢰기를,
"유학(儒學)을 숭상하고 도(道)를 존중함은 세도(世道)에 이로운 것이지만 결과에는 폐단이 없지 않기 때문에, 숭장(崇奬)하는 방도가 도리어 조종조(祖宗朝)보다 못합니다. 요사이 세도가 점점 떨어지는 것 또한 이와 연관이 있는 것입니다. 박필주(朴弼周)는 삼조(三朝)를 시종(侍從)으로 섬겼는데, 오히려 하나의 자급(資級)을 아끼었으니 마땅히 계급을 뛰어 넘어 발탁(拔擢)해야 합니다. 윤동원(尹東源)의 학문의 천심(淺深)에 이르러서는 신이 비록 알지는 못합니다마는, 간혹 현읍(縣邑)에서 시험해 보니 모두 명성과 공적이 있어 방악(方岳)070) 이 될 만합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마땅히 유의하겠다."
하였다. 송인명이 또 아뢰기를,
"황재(黃梓)는 명도(名塗)에 망설여서 의주 부윤(義州府尹)과 광주 부윤(廣州府尹)을 모두 부임하지 않았으므로, 국가에서는 당론에 지나친 것으로 의아하게 여겼지만, 실제로는 진취(進取)에 대해 염연(恬然)한 것입니다. 듣건대, 그의 청렴한 지조가 매우 뛰어나다고 하니, 가자(加資)하고 진출(進出)시켜 임용(任用)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윤봉조(尹鳳朝)는 서용(敍用)된 뒤에 공조 판서에 낙점(落點)받았는데, 대사헌에 의망(擬望)된 뒤 시사(時事)가 시끄럽자 도로 부표(付標)했으니, 거조(擧措)가 매우 전도(顚倒)되었습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윤봉조는 을사년071) 에 나를 거의 그릇쳤었다. 비록 글은 잘하지만, 재주가 덕을 앞지르는 사람이다."
하였다. 임금이 묻기를,
"호서백(湖西伯)의 소장 가운데 김시발(金時發)이란 사람은 누구인가?"
하니, 송인명이 아뢰기를,
"일찍이 군수(郡守)를 지냈는데, 곧 벌열(閥閱)한 사족(士族)입니다."
하였다. 임금이 이르기를,
"유신일(兪信一)이 선조(先祖)의 시종(侍從)으로서 살인을 한 일이 있었는데, 그 당시 하교하기를, ‘유신일이 살아서 옥문(獄門)을 나가게 된다면 이는 법이 없는 나라가 된다.’라고 했었다. 김시발이 보잘것없는 수령(守令)을 지낸 사람으로서 어찌 감히 그런 짓을 할 수 있는가? 해부(該府)로 하여금 잡아 가두고 엄중하게 핵문(覈問)하도록 하라."
하였다.
이조 판서 조현명(趙顯命)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저번날 소결(疏決)하였을 때 역적 이희천(李希天)의 적형(嫡兄)으로서 연좌(連坐)되어 정배(定配)했던 사람을 대신이 진달하여 석방하였다고 하는데, 신은 그윽이 불가하게 여깁니다. 그전에 김시발(金時發) 형제가 석방된 것도 공론이 지금까지 그르게 여기고 있는데, 어찌 뒤따라 이를 본받을 수 있겠습니까? 마땅히 성명(成命)을 도로 거두셔야 합니다. 금오(金吾)와 대각(臺閣)에서 쟁집(爭執)하는 사람이 하나도 없었으니, 이 또한 경책(警責)해야 합니다. 이어서 생각해 보건대, 신이 올해에 세 차례나 위욕(危辱)을 만났는데, 유사(儒士)들이 소장에 드러내어 말한 것은 익명서(匿名書)에 비할 것이 아닙니다. 신이 듣건대, 정거(停擧)시키라는 명이 내린 뒤 소장에 기록된 가운데 이유문(李裕文)·이철문(李哲文)이라는 사람이 상소하여 자신들은 관여하여 아는 바가 없음을 밝혔는데, 승정원에서 퇴각(退却)했다고 합니다. 이로써 살펴보건대, 요체(要諦)는 신을 좋아하지 않는 두서너 불령(不逞)한 무리가 사람들을 고모(雇募)하여 이런 짓을 한 것입니다."
하니, ‘사직하지 말라.’고 비답하였다. 임금이 연신(筵臣)들에게 이르기를,
"이희천(李希天)의 일은 집법(執法)하는 처지로서는 쟁집(爭執)하는 것이 옳다. 조현명이 처음에는 석방할 것을 청하였었는데, 지금은 대간(臺諫)을 배척할 뿐만 아니라, 금오(金吾)의 당상까지 배척하여 논박하고 있으니 진실로 그르다. 어찌하여 그 말이 앞뒤가 상반(相反)되는가?"
하였는데, 우의정 송인명(宋寅明)이 아뢰기를,
"조현명이 판의금부사이었을 때에는 놓아 주기를 청했었지만, 이번에는 대간이 쟁집하지 않는 것은 대간의 사체(事體)를 잃은 것이기 때문에 개탄스러움을 일으킨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대간의 사체는 그르게 된 것이니, 소결(疏決)하였을 때 입시했던 대간을 모두 체차하라."
하고, 또 하교하기를,
"지금 이조 판서의 소장을 보건대, 지난날 소두(疏頭) 이사복(李思復)은 반드시 가명(假名)일 것이니, 성균관(成均館)으로 하여금 청금안(靑衿案)에서 고찰해 내어 아뢰게 하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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