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영조실록47권, 영조 14년 1738년 6월

싸라리리 2025. 9. 22. 14: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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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2일 계미

오원(吳瑗)을 대사성으로, 심성진(沈星鎭)을 부응교로, 이현망(李顯望)을 수찬으로, 정형복(鄭亨復)을 부수찬(副修撰)으로, 송수겸(宋守謙)을 장령으로, 김상적(金尙迪)을 지평으로, 송창명(宋昌明)·이섭원(李燮元)을 정언으로 삼았다.

 

6월 4일 을유

임금이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우의정 송인명(宋寅明)이 수령(守令)을 가려서 임용해야 한다는 일을 말하고, 이어 폐기(廢棄)되어 있는 사람을 소통(疏通)시킬 것을 청하기를,
"등과(登科)한 지 20년이 되도록 의망(擬望)받지 못한 사람이 있어 기한(飢寒)이 몸에 절박하고 처자가 추위에 떨며 굶주리고 있으니, 어찌 원망이 조정에 돌아가지 않겠습니까? 남인(南人)들로 말하더라도 재지(才智)와 문예(文藝)가 있는 선비들이 불행하게 연루되어 있는 사람이 있으니, 마땅히 참작해서 임용해야 합니다. 대정(大靜)·정의(旌義)·연일(延日)·장기(長鬐) 등의 고을은 지역이 멀고 좋지 아니하여 아까울 것이 없으니, 이들을 차임(差任)하여 보내되 치적(治績)이 있기를 기다려서 조금 좋은 곳으로 옮겨 주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이르기를,
"강필신(姜必愼)·강필경(姜必慶)은 무슨 일 때문에 지색(枳塞)되었는가?"
하자, 송인명이 아뢰기를,
"강필신은 경술년072)  에 그의 이름이 목호룡(睦虎龍)의 종의 공초(供招)에 나왔었는데, ‘강필신이 늘 그의 처족(妻族)들을 정지하도록 경계했었다.’라고 했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이르기를,
"정지시켰음은 옳은 일인데, 이를 어찌하여 죄로 삼는 것인가?"
하자, 송인명이 아뢰기를,
"정지시킨 것은 그 실정을 알고 있었던 데에 가깝기 때문입니다."
하였는데, 호조 판서 송진명(宋眞明)이 아뢰기를,
"강필경은 탕평(蕩平)을 공격한 상소로 지색당하였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이르기를,
"이진유(李眞儒)와 권익관(權益寬)의 일을 정계(停啓)한 사람은 누구이었는가?"
하자, 송인명이 아뢰기를,
"이진유의 논계를 정계한 사람은 임광(任珖)이고, 권익관의 논계를 정계한 사람은 홍상용(洪尙容)인 듯합니다. 이외에 지색당한 사람은 이태원(李太元)·김홍석(金弘錫)·강박(姜樸) 등입니다. 강박은 곧 이순관(李順觀)의 생질(甥姪)인데, 이순관의 죄는 한(漢)나라 법으로 논한다면 구족(九族)을 베어야 했습니다."
하니, 비국 당상 이종성(李宗城)이 아뢰기를,
"대신이 실언(失言)하고 있습니다. 구족까지 베는 것을 어찌 성명(聖明)한 조정에서 할 수 있는 말입니까?"
하였다. 임금이 이르기를,
"대신이 장독(瘴毒)이 있는 고을의 수령으로 제배하려고 한 것 또한 왕정(王政)이 아니다. 어찌 그들이 집에서 굶주리고 있는 것이 민망하다 하여 수토병(水土病)을 앓게 해서야 되겠는가? 강필신(姜必愼)은 경술년073)   국옥(鞫獄) 때에 지적하여 진달한 바가 많았으니, 한결같이 지색하면 누가 기꺼이 권선(勸善)하려고 하겠는가?"
하였다. 송인명이 아뢰기를,
"윤봉조(尹鳳朝) 또한 주목(州牧)이 되기에 넉넉하니 마땅히 거두어 서용(敍用)해야 합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윤봉조가 비록 방만규(方萬規)의 소장을 지어 주지는 않았지만, 그는 자못 편당하는 마음이 있는 사람이다. 그래서 ‘거의 나를 오도(誤導)할 뻔했다.’는 하교가 있었던 것이다."
하였다. 송인명이 또 아뢰기를,
"황당선(荒唐船)이 와서 평신진(平薪鎭) 앞 바다에 정박했었는데도 치보(馳報)를 지체했으니, 공홍 수사(公洪水使)를 파직하고 지방관(地方官)도 마땅히 나문(拿問)해야 합니다."
하니, 그대로 따랐다.

 

정언 송창명(宋昌明)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저번에 전 서윤(庶尹) 최상정(崔尙鼎)을 가자(加資)하라는 명이 있었는데, 10년이 지난 뒤에 지난일을 뒤좇아 제기(提起)하며 공로가 있다 하여 승자(陞資)하는 것은 구차하고 소홀한 데 관계되니, 마땅히 도로 거두셔야 합니다. 동래 부사(東萊府使) 구택규(具宅奎)는 신축년074)  ·임인년075)   사이와 무신년076)   이후로 때에 따라 몸이 백억(百億)으로 변화하는 짓을 하였습니다. 처음에 동래 부사에 제배되었을 때에 이미 대관(臺官)의 탄핵을 받았는데도 어찌 재임(再任)임을 핑계하여 의기 양양하게 무릅쓰고 부임할 수 있었겠습니까? 대소의 정령(政令)에 있어 오로지 명예만을 구하였으니, 청컨대, 파직하게 하소서."
하였으나, 임금이 따르지 않았다.

 

대사성 오원(吳瑗)이 상소하여 상적(庠籍)을 수고(搜考)하도록 한 명을 정침하기를 청하니, 임금이 그의 상소를 도로 내주도록 명하였다. 이보다 앞서 상소한 유생(儒生) 이사복(李思復)이 바로 드러나지 않자, 임금이 그가 가명을 기록한 것이 아닌가 의심하여 상적을 고찰하여 유무(有無)를 징험(徵驗)하도록 명했던 것인데, 오원이 상적을 수고(搜考)함은 학교(學校)를 높이고 유적(儒籍)을 중히 여기는 것이 아니라 하여 상소하여 불가함을 논하니, 당시의 공론이 사체에 맞는 일이라고 하였다.

 

6월 6일 정해

수찬 홍중일(洪重一)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국조(國朝) 이래로 인척(姻戚)과 사류(士類)는 그 경로(經路)를 각기 달리해 왔는데, 근래에는 풍습이 날로 떨어져서 조정 위에 한갓 공리(功利)의 논의만 숭상하여 사람을 용사(用捨)할 적에도 대부분 영합(迎合)을 바라는 풍조를 이룬 까닭에 척인(戚姻)을 높여 존숭하는 것 또한 하나의 폐습(弊習)이 되었습니다. 이번에 강화 유수(江華留守)의 일을 말해보면, 도위(都尉)가 한 번 나서서 묘천(廟薦)을 먼저 부탁하고 서차(序次)를 뛰어 넘어 가자(加資)에 오점을 가져오면서 급급하게 어려워함이 없이 하고 있으니, 신은 그윽이 개탄스럽게 여깁니다. 정익하(鄭益河)는 지난날의 묵방(墨謗)이 지금도 가라앉지 않았는데, 투합(投合)하는 것이 습관이 되었으나 논박하고 힐난하는 사람이 없으니, 오늘날의 사기(士氣)는 땅을 쓴 듯이 없어졌다고 할 만합니다. 관서(關西)의 도민(島民)들이 궁방(宮房)과 송사하는 전지(田地)의 일을 추조(秋曹)에서 미룬 채 해가 지나도록 결단하지 않고 있습니다. 궁방에서 도민들과 서로 송사하는 것이 이미 아름다운 일이 아니니, 마땅히 송사를 정지하고 궁방으로 하여금 돌려 주게 하여 시민 여상(視民如傷)077)  하는 뜻을 보이셔야 합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윗조항의 일은 10년 만에 승자(陞資)하여 이미 늦은 처사이며, 정익하의 일은 지나친 말이다. 말단의 일은 그대로 시행하겠다."
하였다. 이어서 하교하여 경알(傾軋)하고 협잡(挾雜)하는 행위임을 책망하고, 홍중일(洪重一)을 내치어 경성 판관(鏡城判官)으로 삼았다. 강화 유수 박사정(朴師正)은 곧 금성위(錦城尉)의 아버지이다.

 

6월 7일 무자

승정원에서 아뢰어 홍중일(洪重一)을 외임(外任)에 출보(黜補)하도록 한 명을 정지하기를 청하였으나, 엄중한 하교를 내리고 윤허하지 않았다.

 

우의정 송인명(宋寅明)이 차자를 올려 묘쳔(廟薦)에 대한 일로써 인혐(引嫌)하고, 홍중일을 외임에 출보하라는 명을 도로 정지하기를 청하니, 비답하기를,
"그 말이 무엄(無嚴)하여 군상(君上)을 협지(脅持)하고 대신을 헐뜯어 배척했으며, 하물며 공리(功利)란 말들은 내맥(內脈)이 있으니, 엄중하게 징계하지 않을 수 없다. 외임에 출보한 것 또한 말감(末減)한 것이다. 비록 그렇기는 하나 경의 차자에서 경의 뜻을 알 수 있으니, 특별히 외방에 출보하도록 한 명을 정침하겠다."
하였다.
사신은 말한다. 홍중일의 논한 말이 자못 절실(切實)한 것이었으니, 마땅히 너그럽게 용납하여야 하는데, 엄지(嚴旨)로 척보(斥補)하여 지나치게 의심과 노여움을 가했으니, 성상(聖上)의 총명으로도 유독 사기(士氣)를 손상시키고 성덕(盛德)에 누가 되는 것임은 생각하지 않은 것인가? 비록 대신이 진달한 차자로 바로 성명(成命)을 정침하였으나, 홍중일이 이로부터 임금의 뜻에 거슬리게 되었다.


【태백산사고본】 35책 47권 27장 B면【국편영인본】 42책 597면
【분류】정론(政論) / 인사(人事) / 사법(司法)
사신은 말한다. 홍중일의 논한 말이 자못 절실(切實)한 것이었으니, 마땅히 너그럽게 용납하여야 하는데, 엄지(嚴旨)로 척보(斥補)하여 지나치게 의심과 노여움을 가했으니, 성상(聖上)의 총명으로도 유독 사기(士氣)를 손상시키고 성덕(盛德)에 누가 되는 것임은 생각하지 않은 것인가? 비록 대신이 진달한 차자로 바로 성명(成命)을 정침하였으나, 홍중일이 이로부터 임금의 뜻에 거슬리게 되었다.

 

6월 9일 경인

이덕중(李德重)을 교리로, 홍창한(洪昌漢)을 부교리로, 유최기(兪最基)를 수찬으로, 송교명(宋敎明)·이성효(李性孝)를 부수찬으로, 정석오(鄭錫五)를 함경도 관찰사로, 이정보(李鼎輔)를 이조 정랑으로, 유척기(兪拓基)를 판윤으로, 이종성(李宗城)을 호조 참판으로 삼았다.

 

6월 10일 신묘

임금이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대사성 오원(吳瑗)이 아뢰기를,
"여러 유신들 중에 거짓으로 기록된 자는 자수(自首)한 사람이 많았고, 소두(疏頭) 이사복(李思復) 또한 정단(呈單)하고 스스로 나타났습니다. 청금록(靑衿錄)은 재임(齋任)이 아니고서는 개폐(開閉)할 수 없으며, 유안(儒案)을 고열(考閱)하는 것은 끝내 유학(儒學)을 숭상하고 유생(儒生)을 중히 여기는 도리가 아닙니다."
하고, 우의정 송인명(宋寅明)은 아뢰기를,
"상소한 유생들에게 정거(停擧)의 벌을 베푸는 것은 진실로 가벼운 것입니다. 그 죄가 이보다 더한 것이 있다 해도 자수하여 죄를 면하는 길을 열어 놓는다면, 이는 곧 사풍(士風)을 경박한 방향으로 인도하는 것입니다."
하고, 비국 당상 이종성(李宗城)은 아뢰기를,
"상소의 명록(名錄)에 허위로 착명(着名)한 사람을 어찌 유생으로 대우할 수 있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위착관압율(僞着官押律)’을 고찰하여 아뢰도록 명하고, 뒤에 이사복을 멀리 귀양 보내도록 명하였다.

 

6월 12일 계사

오원(吳瑗)을 부제학으로, 윤순(尹淳)을 판의금부사로, 이덕중(李德重)·정익하(鄭益河)를 교리로, 정이검(鄭履儉)을 수찬으로, 이성효(李性孝)·김상중(金尙重)을 부수찬으로, 허채(許采)·민택수(閔宅洙)를 정언으로, 이한범(李漢範)을 공홍수사(公洪水使)로 삼았다.

 

6월 14일 을미

사헌부 【장령 신겸제(申兼濟)이다.】 에서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홍치상(洪致祥)은 죄명(罪名)이 이미 무거워서 전후의 사령(赦令)에서도 이미 거론하지 않았는데, 지금 와서 복관(復官)하도록 하신 명이 비록 우리 성상께서 가뭄을 민망하게 여기시어 소결(疏決)하신 성의(盛意)에서 나왔으나, 경솔하게 의논할 수 없음이 분명합니다. 청컨대 복관하도록 하신 명을 도로 거두소서."
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역적(逆賊)에 연좌(緣坐)된 자에 대한 삼척(三尺)은 지극히 준엄합니다. 이희인(李希仁)은 역적 이희천(李希天)과 비록 적서(嫡庶)가 다르지만, 이미 동기간이라면, ‘원수같이 원망했다’라는 말이 용서해 줄 만한 사단(事端)이 되기에는 부족하니, 놓아 주도록 하신 명을 도로 정지하소서."
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6월 15일 병신

이기진(李箕鎭)을 부제학으로, 이종백(李宗白)을 대사성으로, 유최기(兪最基)·송교명(宋敎明)을 교리로, 박필균(朴弼均)을 수찬으로, 이중경(李重庚)·오언주(吳彦胄)를 승지로, 홍상빈(洪尙賓)을 동지의금부사(同知義禁府事)로 삼았다.

 

겸사서(兼司書) 오수채(吳遂采)가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삼가 생각하건대, 우리 춘궁 저하께서는 천질(天質)이 성미(盛美)하시어 이미 스스로 용관(容觀)의 표면에 나타나고, 입으신 옷은 겨우 몇 척(尺)이지만 글씨의 심화(心畫)가 이미 보통 사람보다 특출하시니, 비록 옛 성왕(聖王)이라 하더라도 이를 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대저 올바르게 보양(輔養)하여 성인(聖人)의 기초를 세움이 유충(幼沖)한 시기에 달려 있지 않는 바가 없습니다. 우리 전하께서 말씀이 율(律)이 되고 거동이 법도가 되는 교육을 반드시 빠뜨림 없이 하실 줄 압니다마는, 보익(保翼)하고 도양(道養)해 가는 공부는 본래 방법이 있는 것입니다. 만일 대조(大朝)의 법강(法講)이 있는 날에는 또한 동궁(東宮)께서도 나와서 보좌(寶座)에 입시(入侍)하도록 명하신다면, 훈도(薰陶)되고 관감(觀感)하는 도움이 장차 자연히 자신도 모르는 속에 있게 될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가납(嘉納)하였다.

 

임금이 소대를 행하였다. 《대학연의보(大學衍義補)》를 진강(進講)했는데, 시독관(侍讀官) 이성효(李性孝)가 글뜻으로 인해 아뢰기를,
"옛날에는 염금(鹽禁)이 없었는데, 관중(管仲)078)   때에 이르러 비로소 이의 금법이 있었고, 그 뒤에 상홍양(桑弘羊)과 공근(孔僅)079)  의 무리가 염리(鹽利)를 가지고 진출(進出)했었으니, 작용(作俑)한 자는 관중입니다."
하였는데, 임금이 이르기를,
"지염(地鹽)이나 정염(井鹽)이 우리 나라에도 있는가?"
하니, 이성효가 아뢰기를,
"북도(北道)에 목염(木鹽)이란 것이 있습니다."
하였다. 시독관 송교명(宋敎明)이 아뢰기를,
"사치하는 폐단이 요사이 같은 때가 없었습니다. 여염(閭閻)의 세민(細民)들도 자녀의 혼인에는 반드시 금장(錦帳)을 사용하고 있는데, 법사(法司)에서 금단하지 못하고 있으니, 이는 마땅히 엄중하게 신칙해야 합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한나라 문제(文帝) 때에는 비록 금법을 세우지 않았지만, 익제(弋綈)080)  만 사용하는 검소한 풍속이 이루어졌었으니, 교화(敎化)가 행해지면 자연히 이런 폐단이 없어지게 될 것이다."
하였다.

 

6월 18일 기해

임금이 소대를 행하였다. 검토관(檢討官) 이성효(李性孝)가 아뢰기를,
"우리 나라의 염세(鹽稅)는 일찍이 호조에서 차원(差員)을 보내던 것을 지금은 도신(道臣)에게 귀속(歸屬)했는데, 매양 군관(軍官)을 보내어 많이 거두고 거듭 징수하므로 포구(浦口)의 민생들이 원통함을 호소하고 있습니다. 마땅히 본읍(本邑)에 부여하여 정식(定式)대로 수납하게 해야 합니다."
하자, 임금이 비국으로 하여금 품처(稟處)하도록 했는데, 그 뒤에 비국에서 회계(回啓)하기를,
"염세는 이성효가 진달한 대로 본관(本官)에서 수납하도록 하고, 이어서 삼남(三南)에 일체로 거행하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6월 19일 경자

해서(海西)에 큰 비가 내려서 배가 성(城) 위로 다니고, 익사(溺死)한 사람이 3백여 명이나 되므로, 휼전(恤典)을 시행하도록 명하였다.

 

홍경보(洪景輔)를 도승지로, 송질(宋瓆)을 장령으로, 홍정보(洪正輔)를 지평으로, 이제(李濟)를 우윤으로 삼고, 박필주(朴弼周)를 발탁하여 동부승지(同副承旨)로 삼았다.

 

6월 20일 신축

유성(流星)이 남두성(南斗星) 아래에 있었다.

 

윤동원(尹東源)을 집의(執義)로, 이창의(李昌誼)를 문학(文學)으로 삼았다.

 

공조 판서 박사수(朴師洙)가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선정신(先正臣) 김상헌(金尙憲)은 남한 산성(南漢山城)에서 화의(和議)를 구성(構成)하던 날 자재(自裁)하려 했으나 죽지 않았으므로 안동(安東)의 학가산(鶴駕山)으로 들어갔습니다. 안동은 본시 김상헌의 구묘(丘墓)081)  가 있는 고을이고, 또 만년에 의리를 부식(扶植)해 온 곳입니다마는, 특히 영외(嶺外) 선비들의 추향(趨向)이 본시 달랐기 때문에 아직까지 사당을 세우지 못하고 있습니다. 올해에 김상헌을 존숭하는 본도의 유림(儒林)들이 감영(監營)과 고을에 글을 바치고 사당을 세웠는데, 저번날 박문수(朴文秀)가 연석(筵席)에서 아뢰어 금지하기를 청한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안동 사람들이 온갖 꾀를 내어 저지하고 방해하여 마침내 목재와 기와를 부수어버리고 서까래 등속을 낱낱이 부수는데, 기세가 마치 바람 속의 불과 같아서 감히 가까이 갈 수가 없었습니다. 아! 조가(朝家)에서 겹쳐 세우는 것을 금단한 바가 있었으니, 박문수의 말처럼 하는 것도 혹 옳겠지만, 감사(監司)와 수령(守令)이 이미 세운 것을 사민(士民)들이 떼 지어 마치 도적들이 약탈하듯이 부수어 버렸습니다. 김상헌의 이름이 안동의 향안(鄕案)에 높이 게재(揭載)되어 있고, 그들의 선조들을 또한 일찍이 고을의 원로(元老)로 존대하며 섬겨 왔습니다. 하물며 그의 절의(節義)가 우뚝하여 화이(華夷)가 모두 칭송(稱頌)해 본래 피차(彼此)의 색목(色目)과는 관계되는 바가 없는데, 무엇을 혐오하고 무엇을 싫어하여 이미 이루어 놓은 사당을 밟아서 넘어뜨린단 말입니까? 마땅히 수창한 사람을 적발해 내어 무거운 법으로 죄를 다스려서 난동(亂動)의 조짐을 막아야 합니다."
하였는데, 상소를 입계(入啓)한 지 날이 지나도록 임금이 답하지 않다가, 우상 송인명(宋寅明)의 주달로 인해 비로소 비답을 내리기를,
"비국으로 하여금 품처(稟處)하도록 하겠다."
하였다.

 

임금이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우의정 송인명(宋寅明)이 아뢰기를,
"우리 나라의 해방(海防)은 삼남(三南)에 비록 설치해 놓은 것이 있지만, 서해(西海)는 왕도(王都)와 가장 가까운데도 오히려 매우 허술합니다. 하물며 지금 황당선(荒唐船)은 마침내 염려스러운 바가 있으니, 청컨대, 양남(兩南) 각진(各鎭)의 전선(戰船)이 있는 곳에서 2척씩을 한도로 해서(海西)의 수영(水營)에 이속(移屬)시켜 요해지(要害地)가 되는 진에 배치하고, 그 부근 지역의 물에 익숙한 사람을 가려 단속해서 대오(隊伍)를 만들어 연습하도록 한다면, 거의 힘을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옳게 여겼다.

 

사간원 【정언 민택수(閔宅洙)이다.】 에서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김성탁(金聖鐸)을 도배(島配)한 것도 이미 실형(失刑)한 것이고, 이제 와서 육지로 내보내는 것은 왕법(王法)에 어긋나는 일입니다. 강세윤(姜世胤)은 여러 차례 역적의 공초(供招)에 나왔을 뿐 아니라, 이천(利川) 쌀 2백여 석(石)을 군향(軍餉)이라 하여 따로 두었던 한 가지 조항도 가릴 수 없이 낭자하게 전파되었습니다. 이헌장(李獻章)은 머리를 보전하게 한 것도 이미 극도로 실형한 것인데, 이제 전석(全釋)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청컨대, 김성탁·강세윤·이헌장 등 세 사람을 모두 배소(配所)로 돌려보내도록 하소서."
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김성탁·강세윤·이헌장 등을 육지로 내보내고 석방하여 돌아가게 하신 명을 집법(執法)하는 관원들이 태연히 그대로 받들었으니, 청컨대, 그날 입시했던 옥관(獄官)을 종중 추고하고 대신(臺臣)은 모두 파직하소서."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또 아뢰기를,
"저번에 소결(疏決)하였을 때의 일은 논할 만한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는데, 전 장령 신겸제(申兼濟)는 대관(臺官)의 자리에 있는 몸으로 단지 조현명(趙顯命)의 소장에 의거하여 이희인(李希仁)에 대한 일 한 가지만 논하면서 마치 색책(塞責)하듯이 초초(草草)하게 논계하였으니, 청컨대 파직하고 서용(敍用)하지 마소서."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또 아뢰기를,
"내포(內浦)에서 돈을 사주(私鑄)하는 폐단이 극도로 낭자(狼藉)한데, 벌열(閥閱)한 사족(士族)들 또한 그 가운데 들어 있다고 합니다. 마땅히 포도청(捕盜廳)으로 하여금 공주(公州) 토포영(討捕營)에 현재 가두어 놓은 죄인들을 잡아다가 준엄하게 구문(究問)을 가하도록 하고, 홍주(洪州)의 전 토포사 조제태(趙濟泰)와 공주 토포사 조휘(趙徽)를 아울러 나문(拿問)하도록 하소서."
하였으나, 임금이 윤허하지 않았다.

 

6월 21일 임인

어떤 별이 심성(心星) 아래로 지나갔다.

 

윤순(尹淳)을 예조 판서로, 이도겸(李道謙)을 장령으로, 윤지태(尹志泰)를 지평으로, 이수해(李壽海)를 사서(司書)로, 송징계(宋徵啓)를 겸사서(兼司書)로 삼았다.

 

호조에서 계청(啓請)하기를,
"충주(忠州) 땅에 새로 생긴 은맥(銀脈)을 지방관(地方官)은 조령 산맥(鳥嶺山脈)과 가깝다고 핑계하고 있지만, 실제로는 거리가 현저하게 머니, 마땅히 점(店)을 설치하고 채취하여 사용해야 합니다."
하니, 임금이 어렵게 여기며 후일에 진품(陳稟)하도록 명하였다.

 

6월 22일 계묘

이정보(李鼎輔)를 이조 정랑으로 삼았다.

 

병조 판서 박문수(朴文秀)가 남구만(南九萬)·이태좌(李台佐)가 병조 판서로 있었을 때에 허지(許墀)와 권영(權穎)을 대관(臺官)의 직임에서 옮기어 도로 낭관(郞官)으로 임용하기를 주청(奏請)했던 예를 들어, 전 지평 윤지태(尹志泰)를 잉임(仍任)하여 부서(簿書)를 정리하기를 청하니, 그대로 따랐다.

 

6월 23일 갑진

어떤 별이 여성(女星) 아래로 흘러갔다.

 

임금이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경기 어사 김상중(金尙重)이 복명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어사가 봉서(封書)를 받을 때에 내가 인천(仁川)을 인동(仁同)으로 잘못 썼었으니, 영남(嶺南) 고을에서 반드시 용동(聳動)하였을 것이다."
하고, 이어 인동 부사(仁同府使) 김수(金穟)와 인천 부사(仁川府使) 이사제(李思悌) 등 다섯 고을의 원을 나문(拿問)하도록 명하였는데, 어사의 장계(狀啓)에 따른 것이었다.

 

임금이 박사수(朴師洙)의 상소를 읽고서 여러 신하들에게 묻기를,
"서원(書院)을 겹쳐서 세우게 한 수령(守令)도 진실로 그르지만 어찌 유생(儒生)들의 죄를 묻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였는데, 우의정 송인명(宋寅明)이 아뢰기를,
"절의(節義)가 특이한 사람은 비록 겹쳐서 세우는 것을 제한하지 않았지만, 도신(道臣)이 상문(上聞)하지 않은 것과 유생(儒生)들이 저희들 멋대로 헐어버린 경우 한편으로는 사체를 손상시키고 한편으로는 무엄(無嚴)하였으니, 전 감사(監司) 유척기(兪拓基)와 안동 부사(安東府使) 어유룡(魚有龍)은 마땅히 파직해야 합니다. 사자(士子)들에 대해 혹자는 마땅히 형벌을 베풀어 귀양 보내야 한다고 하고, 혹자는 마땅히 충군(充軍)시켜야 한다고 하니, 작량(酌量)해서 처분하셔야 하겠습니다."
하고, 판중추부사 김재로(金在魯)가 아뢰기를,
"한 번 이인지(李麟至)의 소장이 있고부터 영남의 사습(士習)이 방자하고 기탄함이 없어서 그만 이에 이르렀으니, 반드시 엄중한 처분을 내리셔야 합니다."
하니, 임금이 두루 여러 신하들에게 묻자, 모두 송인명의 의논과 같았다. 박문수(朴文秀)가 아뢰기를,
"저 안택준(安宅駿)은 부사의 힘을 의뢰하여 장차 영남 사람들을 물어 뜯으려고 하였으니, 그의 뜻은 김상헌(金尙憲)을 존숭하여 받들려는 데에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대신이 비록 유생들에게 형벌을 베풀기를 청했지만, 앞서 이인지와 이사복(李思復)도 단지 멀리 귀양 보내도록 한 것은 대개 국가에 선비를 형장하는 법규가 없기 때문입니다."
하였는데, 김재로가 아뢰기를,
"박문수는 영남 사람을 비호하여 오직 힘쓰지 않을까 두려워하고 있으니, 진실로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조가(朝家)에서 영남 사람에 대해 전적으로 함용(含容)하려고 힘쓰고 있는데, 도리어 스스로 방자한 짓을 하고 있으니, 이는 박문수 같은 사람이 주동이 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므로, 박문수가 성이 난 기색으로 아뢰기를,
"나학천(羅學川)은 높이 등용하려고 하고 김성탁(金聖鐸)은 박살(撲殺)하려고 하는 등 조정에서 이와 같이 부호(扶護)하고 억제하고 있으니, 인심(人心)을 복종시킬 수 있겠습니까?"
하자, 김재로가 아뢰기를,
"박문수는 종사(從事)하며 이기려고 힘쓰고 있습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이는 곧 영성(靈城)의 기량(技倆)이다. 박문수와 박사수는 소견이 모두 과격하다."
하였다. 송인명이 아뢰기를,
"박문수는 무식하기 때문에 그 말이 이와 같은 것입니다."
하니, 조현명(趙顯命)이 연석(筵席)에서 소리를 높였다 하여 박문수를 추고(推考)하기를 청하였다. 송인명이 아뢰기를,
"안동에서 김상헌의 서원이 없어서는 안됩니다."
하고, 김재로는 아뢰기를,
"그들이 헐어버린 것으로 인해 그대로 헐어버린다면, 이는 명색은 비록 죄를 입었어도 실제로는 이긴 것이 되니, 마땅히 바로 다시 세워야 합니다."
하고, 조현명은 아뢰기를,
"뒷날의 폐단과 관계가 있는 것이니, 허락해서는 안됩니다."
하니, 임금이 드디어 하교하기를,
"아! 문정공(文正公)의 정충(精忠)과 대절(大節)은 후세에 환하게 빛날 것인데, 그의 서원을 세우는 일에 어찌 사심을 끼고 의논을 주창할 수 있으며, 또한 어찌 사심을 끼고 저지하여 막을 수 있겠는가? 그 허락 여부를 마땅히 조정에 주청(奏請)했어야 할 것인데, 방백(方伯)과 수령(守令)이 된 자는 금령이 내려져 있는데도 앞질러 먼저 멋대로 허락했으니, 이는 이미 금법을 어긴 것이다. 끝내 해괴한 거조가 있었는데도 태연하게 여기며 다스리지 않았으니, 도신과 수령을 아울러 파직하도록 하라. 서원을 세우는 것이 비록 금법을 어기는 일이라 하지만 사자(士子)로서 방자하게 해괴한 짓을 자행하여 국법(國法)을 염두에 두지 않았으니, 이는 난민(亂民)인 것이다. 엄중하게 징계하지 않을 수 없으니, 소란을 일으켰을 때에 수창(首倡)한 유생(儒生)을 본도(本道)로 하여금 엄중하게 형벌하여 멀리 귀양 보내도록 하라."
하였다. 사헌부에서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정언 허채(許采)가 상소하기를,
"금산 군수(金山郡守) 임조(任遭)는 늙어서 정사를 게을리하고, 함안 군수(咸安郡守) 김성후(金聖垕)는 글자를 모르는 무식한 사람이고, 담양 부사(潭陽府使) 윤세관(尹世觀)은 사복만 채운다는 기롱이 있고, 서산 현감(瑞山縣監) 강일규(姜一珪)는 몸을 다스리지 못하는 사람이니, 아울러 파직함이 마땅합니다. 이의풍(李義豐)은 진주영(晋州營)에 있었을 적에 부채 7천 자루를 만들었고, 박태신(朴泰新)은 김해(金海)에 있었을 때 또한 3천 자루나 만들어 놓았다가 체직되어 올 때를 당하여 도리어 사사롭게 행장(行裝)속에 몰래 가지고 왔었으니, 마땅히 삭직(削職)하여 탐관(貪官)들을 경계해야 합니다. 한성흠(韓聖欽)은 장폐(杖斃)한 한순광(韓洵洸)의 친숙(親叔)으로서 은덕(恩德)을 입어 귀양에서 풀리자 서울에 드나들고 있으니, 마땅히 먼 곳에 편배(編配)해야 합니다."
하고, 또 아뢰기를,
"안동(安東)에서 소란을 일으킨 사자(士子)들은 준엄하게 처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수령들의 일은 그대로 시행하겠으나, 강일규의 일은 지나침이 없지 않다. 이의풍과 박태신의 일은 차대(次對)할 때 장차 하교하겠다. 한성흠은 이미 석방하였는데, 다시 무슨 처분을 하겠는가? 영남 유생들은 이미 감단(勘斷)하였다."
하였다.

 

6월 24일 을사

어떤 별이 하고성(河鼓星) 아래로 흘러갔다.

 

하교하기를,
"문관이나 무관의 통청(通淸)을 어찌 멀고 가까운 것에 차이가 있을 수 있겠는가? 근래에 가까운 데에서만 뽑는 경우가 많고 먼 데에는 소홀히 하고 있다. 비가 내리고 볕이 비치는 것도 한 지방에 치우치지 않는 법이니, 왕자(王者)는 사람을 쓸 적에 서울과 시골을 똑같이 여기는 것이다. 특별히 양전(兩銓)에 신칙하도록 하라."
하였다.

 

도목정(都目政)을 행하여 서종급(徐宗伋)을 경기 관찰사로, 이정보(李鼎輔)를 겸 문학으로, 정광제(鄭匡濟)를 필선으로, 김유경(金有慶)을 판윤으로, 정기안(鄭基安)을 지평으로, 정희보(鄭熙普)를 집의로, 김유(金濰)를 경기 수사로 삼았다. 이조 판서 조현명(趙顯命)과 병조 판서 박문수(朴文秀)의 정사(政事)이었다.

 

6월 25일 병오

이어서 도목정을 행하여 조현명(趙顯命)을 동지 정사(冬至正使)로, 이흡(李潝)을 부사로, 김광세(金光世)를 서장관으로 삼았다. 조현명(趙顯命)이 도목정을 당하여 자신을 의망(擬望)하였으니, 대개 그의 뜻은 이로 인해 국경을 나섬으로써 전조(銓曹)의 권병(權柄)에서 풀려나려고 한 것이었다. 우의정 송인명(宋寅明)이 전지(銓地)를 싫어하여 피하려고 한 것이라 하여 정사(正使)를 체직하기를 청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동부승지 박필주(朴弼周)가 상소하여 사직하니, 비답하기를,
"승진시켜 발탁(拔擢)함이 늦었다. 어찌 지나치게 사양하는가?"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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