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영조실록47권, 영조 14년 1738년 7월

싸라리리 2025. 9. 22. 15:10
반응형

7월 1일 신해

임금이 인정문(仁政門)에 나아가 양시박(楊始搏)을 친국(親鞫)하였다. 양시박은 무신년082)  에 군공(軍功)이 있는 사람 양민후(楊敏垕)의 아들로, 청안(淸安) 증천리(曾川里)에 사는데, 그의 6촌 대부 양취도(楊就道)의 역절(逆節)을 관(官)에 장고(狀告)하려고 했었다. 그 장문(狀文)에 이르기를,
"제 아우 양시유(楊始)가 7촌 숙부 진사 양민익(楊敏益)의 계후자(繼後子)가 되었으므로, 밤낮으로 그 집에 많이 있었습니다. 하루는 양민익이 그의 아비 양취도와 그의 아우 양민관(楊敏觀), 그의 서삼촌 양취형(楊就逈)과 함께 앉아 《고사촬요(考事撮要)》를 펼쳐 놓고 보다가 인종조(仁宗朝)에 이르러 양취도 세 부자가 서로 흉언(凶言)을 주고받았으며, 또한 경종 대왕(敬宗大王)의 일을 인용하고, 또 김일경(金日鏡)이 지은 교문(敎文)을 외며 직필(直筆)이라고 칭찬하였다고 합니다."
하였는데, 대개 경(敬) 자와 ‘일경’의 일(日) 자는 장문에 이같이 잘못 쓴 것이었다. 또 말하기를,
"2월 무렵에 양민익의 무리가 《조감(祖鑑)》을 읽다가 또 흉언을 말하므로, 제가 책망하기를, ‘지금 또 이런 망극(罔極)한 말을 하고 있으니, 천지 사이에서 어찌 용납될 수 있겠습니까? 대부가 일찍이 무신년에 적쉬(賊倅) 정중일(鄭重一)을 들어가 보았으므로, 이 때문에 온 고을이 모두 천하게 여겨 타기(唾棄)하고 있는데, 이제 이런 말을 했으니, 결코 우리 나라 신민(臣民)이 아닙니다.’ 하였더니, 양취도(楊就道) 세 부자가 저를 원수보다 심하게 미워하며 원망하였습니다. 그리고는 저를, 구무(構誣)하여 장차 불측(不測)한 곳에 빠뜨리려고 하므로, 제가 대의 멸친(大義滅親)의 뜻으로 팔을 걷어 붙이고 큰소리로 말하니, 양취도 부자가 도리어 크게 겁을 내어 저를 ‘실성(失性)해서 발광(發狂)하여 문장(門長)을 능욕(凌辱)했다.’고 먼저 관에 정고(呈告)하겠다고 하였습니다."
하였다. 이때에 이르러 양시박이 와서 병조 판서 박문수(朴文秀)에게 고하므로, 박문수가 포도청(捕盜廳)으로 하여금 구류하도록 하고, 우의정 송인명(宋寅明)에게 말하니, 송인명이 아뢰게 된 것이다. 임금이 여러 신하들에게 물으니, 모두 ‘국문해야 한다’고 하였으므로, 마침내 친국(親鞫)의 명을 내린 것이었다. 양시박을 국문하자, 공술(供述)하기를,
"신의 아비가 계묘년083)  의 과방(科榜) 때에 출신(出身)하였고 무신년에 군공(軍功)을 세웠습니다. 양취도(楊就道)는 무신년을 당하여 청안(淸安)의 가쉬(假倅)를 찾아가 만나 본 일을 신득기(申得己)도 또한 알고 있습니다. 대개 신득기의 딸은 곧 양취도의 아들 양민익(楊敏益)의 아내이기 때문입니다. 양취도가 언제나 국가를 원망하는 말을 많이 하기를, ‘만일 호란(胡亂)이 있으면, 노론(老論)·소론(少論)·남인(南人)이 반드시 일시에 모두 망할 것이다.’ 했고, 양취도가 신의 아비의 녹권(錄券)을 보고는, ‘그 속에 악종(惡種)이 있다.’고 하였습니다. 양취도의 아들이 사람들을 따라가 과거(科擧)를 보러 갔는데, 양취도가, ‘이 나라에서 어찌 과거를 볼 수 있느냐?’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신이 매양 책언(責言)하였는데, 이 때문에 유감을 품고 있다가, 2월 무렵에 신이 양취도와 크게 다툰 뒤에 양취도가 신을 미친 사람으로 돌렸습니다. 6월 16일에 비로소 감영(監營)에 고발하려고 길을 가다가, 족인(族人) 양제화(楊濟和)를 청주(淸州) 양가상(楊可爽)의 집에서 만났는데, 극력 만류하므로 이루지 못했습니다."
하였다. 다시 양시박을 국문하니, 공술하기를,
"양취도가 역적 김일경(金一鏡)이 지은 교문(敎文)을 읽다가 무릎을 치면서 잘 지었다고 했고, 양취도가 적쉬(賊倅)와 내통한 실상을 신의 4촌 처남 신명직(愼命稷)이 산골짝에서 함께 피난하다가 보고서 말을 했습니다. 또 흰 옷 네 벌을 만들어 난만(爛漫)하게 같이 반역하는 짓을 신 또한 눈으로 직접 보았습니다. 양취도가 신더러 미쳤다고 하며 청안(淸安) 고을에 입지(立旨)를 바치었기 때문에 신도 또한 정장(呈狀)하여 스스로 변명하려고 했으나, 혹시 갇히게 될까 염려스러워 발고(發告)하지 못하였습니다. 그래서 바로 상경(上京)하다가 도중에 신명직(愼命稷)의 집을 지날 때 신명직이 함께 고발하자고 요구하였으나, 병이 나서 뒤에 떨어졌습니다."
하였다.

 

사헌부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사간원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아니하였다.

 

지평 정기안(鄭基安)이 사직하는 소장을 올리고, 이어 말하기를,
"전라 감사 이수항(李壽沆)은 대관(臺官)의 상소가 있은 뒤 한 번 상소하여 자수(自首)하고는 태연히 그대로 직무에 임하고 있으니, 마땅히 견책하여 파직해야 합니다. 공홍 수사 민창기(閔昌基)는 사람됨이 음흉하고 간사하며 탐음(貪淫)하고 가혹(苛酷)하니, 마땅히 체개(遞改)해야 합니다. 남태량(南泰良)은 북방의 우관(郵官)으로 멀리 출보(黜補)되었다가 얼마 안되어 갑자기 큰 부(府)에 승진되었으니, 이조 당상과 낭관을 마땅히 엄중하게 추고(推考)하고, 안동(安東)에 새로 제수된 부사 남태량은 마땅히 체개해야 합니다. 교동(喬桐)의 곤얼(閫臬)은 해방(海防) 가운데 가장 중요한 곳인데, 김유(金濰)는 단지 한 서생(書生)일 뿐인데, 갑자기 초자(超資)하였으니, 마땅히 체개(遞改)해야 합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호남 방백 및 안동 부사의 일은 아뢴 대로 시행하라."
하고, 나머지는 모두 따르지 않았다.

 

7월 2일 임자

사간원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아니하였다.

 

7월 3일 계축

이주진(李周鎭)을 대사성으로, 이정욱(李挺郁)을 사서로, 정이검(鄭履儉)을 수찬으로 삼았다.

 

임금이 인정문(仁政門)에 나아가 신명직(愼命稷)을 친국(親鞫)하였는데, 공술하기를,
"양시박(楊始博)은 과연 신(臣)의 종매부(從妹夫)입니다. 나이 18세에 매부의 집에 가서 있었을 적에 양민익(楊敏益)이 와서 말하기를, ‘이인좌(李麟佐)의 일은 명정 언순(名正言順)한 것이었다.’ 하자, 양민후(楊敏垕)가 화를 내어 쫓아내려고 하는 실상을 보았습니다. 양취도(楊就道) 부자가 흰 옷을 만들어 적쉬(賊倅)와 교통했었는데, 그때 증천리(曾川里)에서는 ‘박색(縛色)이 맹렬하게 들어왔다.’는 말이 문득 동요(童謠)를 이루었었으니, 대개 ‘박색(縛色)’이란 우리 동방(東方) 풍속이 천연두(天然痘) 자국을 가리켜 얽었다고 하기 때문입니다."
하고, 또 공술하기를,
"신은 나이 어리고, 또 ‘협종망치(脅從罔治)하라.’는 하교가 있었기 때문에 발고(發告)하지 않았다가, 이번에 양시박과 더불어 함께 발고하기로 했는데, 양시박이 평소 말하기를, ‘내가 일찍이 은인(隱忍)한 것은 내 아우 때문이다.’라고 하였습니다."
하였다.

 

7월 4일 갑인

임금이 인정문(仁政門)에 나아가 죄인 양취도(楊就道)·양취형(楊就逈)·양민관(楊敏觀)·양민익(楊敏益) 등을 친국(親鞫)했다. 양취도는 나이가 75세인데, 공술하기를,
"신이 무신년084)  에 1백여 인을 거느리고 읍내(邑內)로 가서 쌀 두 말[斗]을 꾸어 놓고 장차 의병(義兵)을 일으키려고 하다가, 연로한 까닭에 곧장 돌아와 산 속에서 난리를 피했었습니다. 신이 본시 신천영(申天永)을 알고 있었으므로, 두려워서 피란하였는데, 청안(淸安)에 온 역적은 곧 정돈복(鄭敦復)이었습니다. 《조감(祖鑑)》·《고사촬요(考事撮要)》 및 역적 김일경(金一鏡)이 지은 교문(敎文) 등에 대한 말은 모두 애매(曖昧)한 말입니다. 발고(發告)한 사람은 곧 신의 당질(堂姪)의 아들 양시대(楊始大)인데, 양시대는 형수(兄嫂)를 구타하고 어미와 숙모(叔母)를 구타한 실상을 신이 모두 눈으로 직접 보고 통렬하게 책망했기 때문에 평소 여러 사람들이 모여 앉은 자리에서 신을 욕했고, 또한 신을 장살(戕殺)하려고 하다가 발각되기도 하였습니다. 신은 또한 평소 역적 김일경은 곧 이인좌(李麟佐)의 계제(階梯)라고 여겼기 때문에 역적 김일경의 일에 대해 말하지 않아야 한다고 공부해 왔습니다."
하였다. 양시대는 곧 양시박인데, 양취도와 양시박을 대질(對質)시키자, 양시박이 말하기를,
"당신은 김봉지(金鳳至)의 제자 아닙니까?"
하니, 양취도가 답하기를,
"내가 과연 수업(受業)했었다."
하였다. 양시박이 말하기를,
"당신은 어찌하여 마음을 국가에 향하지 않고서 허다하게 부도(不道)한 말을 이천해(李天海)의 말과 같이 하였습니까?"
하니, 양취도가 말하기를,
"이는 네 아비가 한 말이다. 네 아비가 일찍이 토역(討逆)하는 과거(科擧)에 참여했었으나 파방(罷榜)되었기 때문에 이런 말을 했었다."
하였다. 그 나머지 양시박이 하는 말에 양취도는 단지 답하기를,
"너는 진실로 미쳤다. 너는 죽어야 한다. 너는 무상(無狀)할 뿐이다."
하였다. 양민익(楊敏益)을 국문하였으나 자복(自服)하지 않았고, 양민관(楊敏觀)을 국문하니 자복하지 않다가 또 말하기를,
"신의 아비가 무신년에 본고을 교궁(校宮)의 도유사(都有司)이었는데, 그 때에 김보(金保)와 신득기(申得己) 등이 농담하기를, ‘이 역적이 가쉬(假倅)로서 만일 알성(謁聖)하려고 한다면, 도유사는 장차 어떻게 대처하겠느냐?’고 했는데, 이는 한때의 농담에 지나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하였다. 양취형(楊就逈)을 국문하니, 공술하기를,
"양시박이 신의 적형(嫡兄)을 죽이려고 하였는데, 이는 대개 양시박에게 악행(惡行)이 있으므로 신의 형이 연로한 사람으로 항시 지나치게 책망했기 때문입니다."
하였다. 양취형과 양시박을 대질시키자, 양시박이 말하기를,
"당신은 당신의 적형(嫡兄)을 위하여 나에게, ‘네가 우리 적형 부자(父子)를 죽여서 깃대에 매달려고 한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하니, 양취형이 말하기를,
"내가 어찌 역적이냐? 너의 악행을 내가 모두 말하겠다. 네가 숙모와 서모 및 출가한 누이를 구타한 일을 우리들이 항상 책망했기 때문에 네가 분심을 품고서 매양 역적으로 얽어 넣으려고 했었다."
하였다. 양민익(楊敏益)과 양시박을 대질시키자, 양민익이 말하기를,
"네가 항시 우리 부자를 죽이려고 했기 때문에 언제나 네가 불을 지르거나 역적으로 모함할 것을 염려했었다. 올 6월 21일 밤에 네가 우리 집에 와서 풀섶 사이에 엎드려 있다가 쫓겨서 달아났었는데, 이제 이런 일이 있으니, 이것이 어찌 충분(忠憤)이 격동(激動)한 것이겠느냐?"
하자, 양시박이 말하기를,
"당신의 아버지가 어찌 이천해(李天海)의 흉언(凶言)을 말하지 않았습니까?"
하니, 양민익이 말하기를,
"우리가 어찌 그런 말을 했겠느냐? 네가 분심(憤心)을 타고 우리 족속(族屬)을 멸망시키려는 것이다. 그때의 교문(敎文)에 ‘상승(相承)’한다는 구절이 있었기 때문에, 성덕(聖德)이 있음을 알았을 뿐이다."
하였다. 양민익과 신명직(愼命稷)을 대질시키자, 양민익이 말하기를,
"우리의 여러 족속이 20여 인 있고, 양민후(楊敏垕) 부자가 지금 모두 생존해 있으니, 만일 지금 양시박의 형 양시창(楊始昌)과 네 매부 양시진(楊始振)에게 물어 보면 허망한 것임을 알게 될 것이다."
하였는데, 신명직이 말하기를,
"어찌 증천리(曾川里)에 ‘박색(薄色)’이란 말이 없었는가?"
하자, 양민익이 말하기를,
"내가 이미 죽은 사람 장서욱(張瑞郁)의 말을 듣건대, ‘사람들이 모두 자네 아버지가 역적을 들어가 만났다.’고 했었다."
하였다. 이날 임금이 이르기를,
"무신년의 여러 역적들은 오히려 나의 몸을 욕되게 한 것에 지나지 않으나, 인종(仁宗)은 곧 조선의 요순(堯舜)같은 임금이다. 지난번에 우상 또한 명종(明宗)의 묘호(廟號)를 ‘명(明)’자로 한 뜻을 진달했었다. 이번에 흉적(凶賊)들이 한 욕이 양조(兩朝)에 미쳤으니, 자손이 되는 사람의 마음이 어찌 깊이 상심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아까 소차(小次)를 예문관(藝文館)으로 옮겨서 설치하도록 명한 것은 나의 뜻하는 바가 있는 것이었다. 이 일을 결단하기 전에는 내가 이미 결단코 인정전(仁政殿)으로 돌아가지 않을 것을 마음속으로 맹세하고, 그 뜻을 이미 동조(東朝)께 품달(稟達)했다."
하였다.

 

우의정 송인명(宋寅明)이 차자를 올려 이조 참판 홍현보(洪鉉輔)를 파직하기를 청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이때에 호남 방백이 비어 있었는데, 홍현보가 와서 천망(薦望)할 사람을 물으니, 송인명이 이진순(李眞淳)·오원(吳瑗)·이주진(李周鎭)을 들었었다. 홍현보가, ‘오원을 외방(外方)에 출보한 것은 애석하게 여길 만하다.’ 하므로, 송인명이 그대로 따랐는데, 또 이진순도 개정하기를 청했으니, 이는 대개 이진순이 일찍이 홍현보의 외숙(外叔)인 고 상신(相臣) 이건명(李健命)을 논계(論啓)하였을 때 참여했기 때문이었다. 송인명이 들어주지 않자 홍현보가 여러 차례 천망을 고치기를 청하므로, 송인명이 드디어 차자를 올려 파직을 청한 것이었다.

 

7월 5일 을묘

임금이 예문관의 소차(小次)에서 나와 장전(帳殿)에 나아가 죄인 양취도(楊就道)·양민익(楊敏益)을 친국(親鞫)하였다. 양취도를 두 차례 형을 가하여 9도(度)에 이르자, 공술하기를,
"역적 김일경(金一鏡)을 정직한 신하라 하고 역적 이인좌(李麟佐)를 명정 언순(名正言順)하다고 말하였습니다. 그리고 《조감(祖鑑)》을 보았을 때 극도로 흉악한 말을 하였음은 곧 모두 스스로 지어낸 것입니다. 처음 공술하였을 적에 양민후(楊敏垕)와 양시박(楊始博)에게 미루어 핑계한 것은 곧 무함하여 보복(報復)하려는 계책이었음을 지만(遲晩)085)  합니다."
하니, 이대로 결안(結案)하였다. 양민익은 두 차례 형을 가하자 또한 자복하므로, 그대로 결안하여 저자에서 아울러 책형(磔刑)086)  하고 노적(孥籍)하였다. 양민관(楊敏觀)은 끝까지 자복하지 않으므로 연좌(緣坐)하여 교형(絞刑)에 처하고, 양취형(楊就逈)은 삼수부(三水府)의 종으로 삼고, 신명직(愼命稷)은 놓아 주었다. 양시박(楊始博)은 가자(加資)하고, 양민익의 아들 양시유(楊始)는 계후(繼後)를 파하고 분간(分揀)하도록 명하였으니, 양시박의 아우이기 때문이었다.

 

사헌부 【장령 이도겸(李道謙)이다.】 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양시유(楊始)는 계후(繼後)한 것을 파하고 분간(分揀)하도록 명하셨는데, 비록 양시박(楊始博)의 공을 기록함이 곡진하게 너그러운 용서를 가하시는 성대한 뜻에서 나왔으나 삼척(三尺)은 굽히기 어려운 것이니, 청컨대, 계후를 파하도록 하신 명을 도로 정지하고, 해부(該府)로 하여금 법에 의해 처치하게 하소서."
하였으나, 윤허하지 아니하였다. 사간원 【정언 이수해(李壽海)이다.】 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양민익(楊敏益)은 비록 이미 형을 집행하였으나, 그의 극도로 흉악한 말들은 그가 혼자 판비한 것이 아닐 것입니다. 양민익이 끌어댄 여러 사람들을 아울러 나문(拿問)하여 정법(正法)하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대신(臺臣)은 어찌하여 이런 논계(論啓)를 하는가? 이렇게 한다면 호서(湖西)가 반드시 어지러워질 것이다."
하고, 윤허하지 않았다.

 

임금이 어필(御筆)로 ‘대공사필(大公史筆)’ 네 글자를 써서 예문관(藝文館) 벽에 걸도록 명하였다. 임금이 예문관에 나아가 우의정 송인명(宋寅明)에게 이르기를,
"누각(樓閣) 위의 사각(史閣)은 곧 열성(列聖)의 실록(實錄)을 봉안(奉安)한 곳이다. 사마광(司馬光)은 대유(大儒)이었지만, 또한 ‘제갈양(諸葛亮)이 입구(入寇)했다.’고 썼었으니, 필법(筆法)은 과연 어려운 것이다. 편당이 생긴 이후 어찌 저앙(低仰)이 없음을 보장할 수 있겠는가? 내가 특별히 ‘대공사필(大公史筆)’ 네 글자를 써서 벽에 걸도록 한 것은 사필이 크게 공정하다는 것이 아니라 곧 사필을 크게 공정하게 하려는 것이다. 경이 바야흐로 본관(本館)의 감사(監事)를 띠고 있으니, 모름지기 이 일을 책자(冊子)에 기록하여 모든 사관(史官)들이 다 나의 뜻을 알도록 하라."
하였다.

 

공조 판서 박사수(朴師洙)가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지금 주문(奏文)을 지어 바치라는 명을 받들었으나, 신이 앞서 제학(提學)으로 있었을 적에도 이미 자획(自畫)하였었으니, 지어 바치기가 어렵습니다."
하고, 또 말하기를,
"사무(史誣)를 간설(刊雪)한 뒤 완성(完成)된 책자를 구득하여 보는 것은 하루가 급한 일인데, 아직 간행(刊行)하는 역사가 끝나는 시기를 듣지 못했으니, 다시 더 자세하게 탐지해서 청하더라도 오히려 늦지 않을 것입니다. 또 평신(平薪)에서 표류(漂流)해 온 사람이 죽은 것은 우리 나라 사람과 서로 박격(搏擊)함으로 말미암아 치사(致死)한 것인데, 병사(病死)한 것으로 수표(手標)를 받았으니, 피국(彼國)에 가서 공초(供招)한 말이 이와 상반될 것은 사리로 보아 필연적인 일입니다. 강희(康熙)임진년087)  에 예부(禮部)에서 주청(奏請)하여 봉지(奉旨)한 내용에, ‘금법을 어기고 어채(漁採)하는 것은 곧 도적(盜賊)에 관계되니, 그 나라에서 곧장 뒤쫓아 잡아다가 살육(殺戮)하되, 천조(天朝)의 사람이라 하여 마침내 지체하거나 의심하는 마음을 품지 말도록 하라,’ 하였고, 또 임인년088)  에 옹정(雍正)이 즉위하였을 때 또, ‘만일 표문(標文) 없이 국경을 넘어가 사단(事端)을 일으킨 자는 이 율(律)에 비추어 징치(懲治)하라.’는 자문(咨文)이 있었습니다. 이번에 표류해온 사람은 이미 표문도 없이 육지에 내려와서 소동을 일으켰으므로, 표문이 있는 사람과 동일하게 볼 수가 없으니, 봉황성(鳳凰城)에 교부(交付)하면 그만입니다. 초도(椒島)에서 변장(邊將)을 구타하고 장련(長連)에서 부녀(婦女)를 약탈한 것은 모두 곧바로 체포하여 죽일 수 있는 경우이니, 마땅히 표류인에 관한 자문을 고쳐서 지어야 합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이미 하교하였다."
하였다. 이 날 임금이 여러 신하들에게 물으니, 판의금부사 윤순(尹淳)이 아뢰기를,
"표류해 온 사람 44인을 이미 모두 교부했으면, 어찌 한 사람이 죽은 것 때문에 의심하겠습니까? 박사수는 지나치게 염려하는 것입니다."
하였다.

 

7월 7일 정사

심성진(沈星鎭)을 사간으로, 남위로(南渭老)를 헌납으로, 박춘보(朴春普)를 지평으로, 이진순(李眞淳)을 전라도 관찰사로, 남태량(南泰良)을 응교로, 박사수(朴師洙)를 홍문관 제학으로 삼았다.

 

7월 8일 무오

북관 감진 어사(北關監賑御史) 조영국(趙榮國)이 복명하였다. 온성 부사(穩城府使) 이희원(李禧遠)에게 가자(加資)하고, 부령 부사(富寧府使) 홍태두(洪泰斗)에게 표리(表裏)를 내렸는데, 선치(善治)한 때문이었다.

 

부총관 김환(金鐶)이 상소하여 성학(聖學)을 돈독히 하고, 성지(聖志)를 세우고, 기강(紀綱)을 진작(振作)시키고, 풍속을 바로잡고, 마음을 가다듬어 생각을 안정시키고, 여색(女色)을 경계하여 정기를 보전시키라는 말을 진달하여 권면하니, 임금이 아름답게 여겨 권장하는 비답을 내렸다. 김환은 나이 90세이고, 그의 아버지 김효건(金孝建)은 만력(萬曆)갑신년089)  에 출생하여 80세에 일생을 마쳤으므로, 부자 2대에 누린 나이가 1백 50여 세가 되었으니, 사람들이 드물게 있는 일이라고 하였다.

 

정언 정형복(鄭亨復)이 상소하여 양민익(楊敏益)이 끌어댔던 사람들을 모두 국청(鞫廳)을 설치하여 엄중하게 국문할 것을 청하고, 또 말하기를,
"이번에 국문하기를 청하는 계사(啓辭)는 양사(兩司)에서 마땅히 똑같이 발론했어야 하는데, 장령 이도겸(李道謙)이 심상하게 여기어 마침내 한 마디 말도 없었으니, 마땅히 견책(譴責)하여 파직하는 벌을 내리셔야 합니다."
하였으나, 임금이 윤허하지 아니하였다.

 

예조 판서 윤순(尹淳)이 아뢰기를,
"원주(原州) 백성이 밭을 갈다가 인(印) 1과(顆)를 얻었는데, 【인문(印文)에, ‘동첨 대종정사인(同籤大宗正事印)’이라고 하였다.】  후면에는 ‘천성(天成) 원년(元年)에 만들었다.’고 되어 있는 것을 도신이 계문(啓聞)했습니다."
하니, 임금이 들어오라고 명하였다.

 

7월 9일 기미

공조 판서        박사수(朴師洙)가 상소하기를,
"병조로 하여금 자격에 구애받지 말고 따로 사만(仕滿)이 되지 않은 사람과 한산인(閑散人)을 가려서 각진(各鎭)에 차출하여 보내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7월 11일 신유

집의 정희보(鄭熙普)가 상소하기를,
"풍덕 부사(豐德府使) 정집(鄭檝)은 탐장(貪贓)이 낭자한데, 갑자기 기부(畿府)에 의망하여 낙점받았고, 곽산 군수(郭山郡守) 여필선(呂必善)은 본래 시전(市廛)의 천부(賤夫)였으니, 만일 군공(軍功)이 있었다면 가자(加資)하여 넉넉하게 상을 주면 족합니다. 함부로 자목(字牧)의 직임을 제수(除授)하여 거듭 백성들에게 폐해를 끼치게 할 수 없습니다. 추조(秋曹)의 죄수 이내휴(李乃休)는 한결같이 상례의 형벌만 베풀면서 실정을 알아내는 일을 아직 지체하고 있으니, 각별히 추조의 당상을 신칙하여 엄중하게 형신해서 감죄(勘罪)하게 하소서. 안동(安東)의 사자(士子)들이 멋대로 서원의 사우를 허문 것은 과연 놀라운 일이었는데, 성명께서 내리신 처분은 대개 징려(懲勵)하는 뜻에서 나온 것이었습니다. 신이 일찍이 영남을 왕래하였으므로, 사습(士習)이 고집스럽고 융통성이 없어서 다른 곳과 다른 것은 익히 알고 있습니다. 따라서 한 사람이 형벌을 받게 되면 많은 선비들이 서로 같이 죄받기를 청하니, 거조(擧措)가 갈수록 더욱 시끄러워질 뿐만 아니라, 또한 여러 유생들이 모두 죄망(罪網)에 빠지게 될까 두렵습니다. 신의 생각에는 특별히 엄중하게 형신하도록 하신 명을 정지하시고, 수창한 사람만 편배(編配)하게 하소서. 그리고 나머지 소동을 일으킨 사람들은 경중(輕重)에 따라 정거(停擧)하게 하는 것이 유생(儒生)들을 대우하고 경박한 풍속을 진정시키는 길이 될 듯합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여필선은 군공이 있는 사람으로, 일찍이 그의 사람됨을 보았는데, 무엇이 지나치다는 것인가? 정집의 일은 다시 자세하게 살펴보겠다. 그 나머지의 일은 모두 작량(酌量)해서 처분한 것이다."
하였다.

 

7월 12일 임술

권적(權𥛚)을 승지로, 오수채(吳遂采)·조영국(趙榮國)을 교리로, 이덕중(李德重)·이성효(李性孝)를 수찬으로, 안성(安晟)을 장령으로, 윤경주(尹敬周)를 지평으로, 윤경룡(尹敬龍)을 공홍 감사로, 조영국(趙榮國)을 겸사서(兼司書)로, 유언국(兪彦國)을 설서로, 유최기(兪最基)·정익하(鄭益河)를 부수찬으로 삼았다.

 

헌납 남위로(南渭老)가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신이 납언(納言)에 제배(除拜)되었을 적에 일찍이 전조(銓曹)의 낭관(郞官)을 지낸 사람이 정사(政事)에 참여한 낭관에게 이서(移書)하여 의논을 정지하도록 드러내어 말했다고 하는데, 이는 신이 지난해에 역신(逆臣)을 토죄(討罪)한 한가지 일로 인해 나온 것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김상신(金相紳)이 신을 저욕(詆辱)한 이래로 드러나게 공격하고 몰래 모해하며 으르렁거리기를 그만두지 않으니, 오직 저 편당을 위해 죽음을 각오하고 역적을 비호하는 것을 청의(淸議)로 여기는 자들이 어찌 신을 원수로 보고 이에 이르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하니, 예사 비답을 내렸다.

 

7월 13일 계해

수찬 이덕중(李德重)이 사직하는 소장을 올리기를,
"남위로(南渭老)가 납언(納言)090)  에 통망(通望)되었을 때 신에게 오욕을 받았다 하여 크게 원망과 유감을 품고 멋대로 저욕(詆辱)하고 있습니다. 아! 멋대로 유적(儒賊)을 토죄(討罪)하는 계사(啓辭)를 정지하고는 숙견(宿趼)에 지색(枳塞)당했던 것을 이제 스스로 감추고 도리어 자기를 지색한 사람을 욕할 수 있습니까?"
하니, 예사 비답을 내렸다.

 

7월 14일 갑자

소대(召對)를 행하였다.

 

정언 이수해(李壽海)가 상소하기를,
"정희보(鄭熙普)의 소장에, ‘여러 유생들이 모두 죄망(罪網)에 빠지게 된다.’는 말은 현저하게 그들을 애호(愛護)하고 임금을 공동(恐動)시키려는 자취가 있는 말이니, 마땅히 견책하여 파직하는 벌을 내려야 합니다. 남위로(南渭老)가 멋대로 김일경(金一鏡)의 소하(疏下)인 역적에 대한 계사를 정지하였으니, 지극히 무거운 죄를 진 것입니다. 며칠 전에 전조 낭관 또한 다음의 천망(薦望)에도 지색(枳塞)당했다는 말을 했으니, 그가 어찌 감히 멋대로 패리(悖理)한 말을 하여 도리어 꾸짖을 수 있겠습니까? 마땅히 시급하게 개정(改正)하여 엄중히 제방(隄防)하여야 합니다. 전조의 당상과 낭관도 당초에 잘 살펴서 하지 않았으니, 마땅히 무겁게 추고(推考)해야 합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정희보의 일은 단지 체차(遞差)만 하고, 그 나머지는 그대로 하라."
하였다.

 

7월 15일 을축

조석명(趙錫命)을 도승지로, 유건기(兪健基)를 승지로, 윤동원(尹東源)을 집의로, 윤지원(尹志遠)을 장령으로, 이유신(李裕身)을 헌납으로, 이성효(李性孝)·이덕중(李德重)을 수찬으로, 송교명(宋敎明)을 교리로 삼았다.

 

임금이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사간원에서 【사간 심성진(沈星鎭)이다.】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금오랑(金吾郞)은 음로(蔭路)의 청선(淸選)인데, 임환(林瑍)과 이필(李弼)은 모두 천얼(賤孼)로서 매술(賣術)하는 무리인데도 또한 의망(擬望) 받았으니, 마땅히 전조(銓曹)의 당상을 추고(推考)해야 합니다."
하니, 아뢴 대로 하게 하였다. 또 아뢰기를,
"용천 부사(龍川府使) 정세장(鄭世章)은 전혀 이력이 없고, 통진 부사(通津府使) 이진환(李震煥)은 용렬하여 어리석고, 강령 현감(康翎縣監) 상이창(尙履昌)은 사람됨이 너무도 잔약하니, 아울러 개차(改差)하소서."
하였는데, 임금이 이르기를,
"정세장은 어떠한 사람인가?"
하자, 우의정 송인명(宋寅明)이 아뢰기를,
"정세장은 일찍이 아산(牙山)을 맡았을 적에 잘 다스려서 승자(陞資)되었고, 또한 십고 십상(十考十上)091)  에 들었습니다."
하고, 이조 판서 조현명(趙顯命)이 아뢰기를,
"일찍이 표리(表裏)를 하사받기도 했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이진환을 물으니, 송인명이 아뢰기를,
"일찍이 이진환을 보았는데 자못 직책을 거행하려고 하는 뜻이 있었습니다."
하고, 형조 판서 김시형(金始炯)이 아뢰기를,
"신이 영남 방백으로 있었을 때 이진환이 진주 영장(晋州營將)에서 과만(瓜滿)하여 체직되었으므로, 신이 그의 재질을 애석하게 여겨 전관(銓館)에게 서신을 보냈었는데, 이어 칠곡(漆谷)에 제배되었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이르기를,
"간관(諫官)과 재상(宰相)이 서로 왈가 왈부(曰可曰否)하는 마당에 비록 대신이 혹시 말이 있었다 하나, 이조 판서와 형조 판서가 어찌 감히 비답이 내리기도 전에 분소(分疏)할 수 있겠는가? 아울러 추고(推考)하도록 하라. 대관(臺官)이 아뢴 말은 그대로 윤허한다."
하였다. 송인명이 아뢰기를,
"정희보(鄭熙普)의 상소에 이른바 ‘만일 수창한 사람을 형벌한다면, 많은 선비들이 반드시 함께 죄 받기를 청하게 될 것이다.’ 하였는데, 어찌 앞질러 이런 말을 하여 시끄럽게 하는 폐단을 야기(惹起)할 수 있겠습니까? 체차(遞差)하는 데 그칠 수 없으니, 청컨대 파직하소서."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7월 17일 정묘

이익정(李益炡)을 승지로 삼았다.

 

어사(御史) 이도원(李度遠)을 탐라(耽羅)에 보내어 시재(試才)하게 하였다.

 

7월 18일 무진

예조 참의 오명서(吳命瑞)가 상소하여 김상중(金尙重)의 상소에 변명하기를,
"그가 힘을 다하여 뜻을 쏟은 것은 오로지, ‘은밀히 뇌물을 주었다.’는 것에 있었는데, 여러 신하들이 증언한 논계(論啓)를 성감(聖鑑)이 통촉(洞燭)하셨으니, 다시 지적하여 들 것이 없습니다. 세삼(稅蔘)에 대한 일은 동래부(東萊府)는 다른 고을과 달라서 김상중이 이를 인연하여 말한 것은 대개 이 때문이었습니다. 동래의 상인들은 모두 송도(松都) 사람들이므로, 별칭이 송도 상인인데, 〈송도 상인〉 김찬흥(金贊興)이 사람들의 청문(聽聞)을 현혹시키고 있으니, 그 설계한 뜻이 매우 교묘합니다. 그가 또 소금을 무역하는 일을 느닷없이 끄집어내어 말을 하였는데, 신이 과연 소금을 무역하여 진자(賑資)를 삼았으나, 절반을 김해(金海)에서 무역했으니, 다른 고을 백성들이 저렴한 값을 받으려고 했겠습니까? 절반은 과연 지경 안에서 무역했는데, 한결같이 시장 가격에 따라 먼저 가전(價錢)을 주고 미처 소금은 받지 못했으니, 받지 못한 소금이 어떻게 쌀이 되며 무역하지 않은 쌀이 어떻게 돈이 되었겠습니까?"
하니, 예사 비답을 내렸다.

 

7월 20일 경오

임금이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우의정 송인명(宋寅明)이 아뢰기를,
"왜인(倭人)의 연향(宴享)을 만약 전례에 따른다면 부산 첨사(釜山僉使)가 대행(代行)할 수도 있습니다마는, 대차왜(大差倭)의 연향은 대행하는 규례(規例)가 없습니다. 동래 부사(東萊府使) 구택규(具宅奎)는 여러 차례 사장(辭狀)을 바치고 마침내 부임하지 않으려고 하고 있으니, 붙잡아 둘 수가 없습니다. 마땅히 체차해야 합니다."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임금이 이르기를,
"그에 대해 ‘천 가지 만 가지로 행신을 변화한다.’고 한 때문인가?"
하자, 이조 판서 조현명(趙顯命)이 아뢰기를,
"구택규가 당한 바는 원통한 일입니다. 그가 젊었을 때 신축년092)  과 임인년093)  을 당하여 어리석은 짓을 한 일이 있었는데, 그 이후로 일찍이 언의(言議)하는 자리를 담당하지 않았습니다."
하고, 송인명이 아뢰기를,
"잘 고쳐 가면 좋을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우리 조선에는 단지 두서너 색목(色目)이 있을 뿐인데, 어찌 천 가지 만 가지로 행신을 변화하겠는가?"
하였다. 대개 송창명(宋昌明)의 상소에 구택규를 배척하기를 ‘천억화신(千億化身)’이라고 했기 때문에 임금의 하교가 이와 같았던 것이다.

 

7월 22일 임신

달이 필성(畢星)으로 들어가고, 어떤 별이 누성(婁星) 아래로 흘러 갔다.

 

정언 이수해(李壽海)가 상소하기를,
"고 상신(相臣) 김상헌(金尙憲)의 서원을 안동(安東)에 다시 세워서 영남(嶺南) 사람들로 하여금 절의(節義)는 본받아야 하고 명교(名敎)는 침범하기 어려운 것임을 알게 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충절(忠節)을 숭상하기 위해서는 특별히 명하여 하는 것이 오히려 가하지만, 이는 지난 해에도 오히려 세우지 않았었고, 더욱이 지금은 신칙(申飭)하고 있는 때이겠느냐?"
하였다.

 

병조 판서 박문수(朴文秀)가 상소하여 사직하고, 이어 당선(唐船)이 어채(漁採)하는 근심을 말하며 시급히 묘당(廟堂)으로 하여금 대책을 강구하게 하기를 청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소대(召對)를 행하였다.

 

7월 23일 계유

소대를 행하였다.

 

지평 윤경주(尹敬周)가 상소하기를,
"승문원 제조 이성룡(李聖龍)은 인망(人望)이 적합하지 않습니다."
하고, 또 말하기를,
"액례(掖隷)들이 약원(藥院)에서 교만하고 방자하였는데, 해조(該曹)에서 단지 도배(徒配)로 감단(勘斷)한 것은 너무 가볍게 잘못 감단한 것입니다."
하고, 또 말하기를,
"강화 유수(江華留守) 박사정(朴師正)이 논박(論駁)을 받고도 고집하였으므로, 엄중하게 하교하여 독촉하여 보냈으니, 이는 삼사(三司)를 가볍게 보는 뜻이 있는 것입니다."
하였으나, 비답을 내려 받아들이지 않았다.

 

7월 24일 갑술

소대를 행하였다.

 

7월 25일 을해

진주사(陳奏使) 김재로(金在魯) 등이 사폐(辭陛)하니, 임금이 인견하여 위유(慰諭)하고, 전송하는 어제시(御製時)를 내리었다.

 

진주문(陳奏文)에 대략 이르기를,
"옹정(雍正) 10년 봄에 선황제(先皇帝)께서 은지(恩旨)를 내려 초록(抄錄)한 것을 반시(頒市)하셔서 본국(本國) 밖에서 전해오던 우리 선조(先祖)에 대한 1백년 동안의 무언(誣言)을 일시에 소석(昭晰)하시니, 신사(信史)와 정론(正論)이 명확하게 실상과 부합(符合)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오직 그 사서(史書)의 간각(刊刻)이 또 미처 완성되지 않아서 인본(印本)의 은반(恩頒)이 따라서 지체되고 있으므로, 완성된 서책을 통쾌하게 보지 못한 채 오히려 결말을 짓지 못한 사안(事案)으로 되어 있습니다. 무함받은 원위(原委)는 양선조(兩先祖)에서 진주(陳奏)한 내용에 자세히 갖추어져 있습니다. 이제 간각이 완성된 즈음에 마침내 완질(完帙)의 반사(頒賜)를 받게 된다면, 어찌 유독 소방(小邦)만 다행스러울 뿐이겠습니까? 또한 자소(字小)하시는 은택(恩澤)이 빛나게 될 것입니다."
하였다.

 

홍현보(洪鉉輔)를 이조 참판으로, 이성룡(李聖龍)을 대사간으로, 송징계(宋徵啓)를 사간으로, 이정보(李鼎輔)를 헌납으로, 김상중(金尙重)을 정언으로 삼고, 정형복(鄭亨復)을 발탁(拔擢)하여 동래 부사(東萊府使)로 삼았다.

 

7월 26일 병자

사간원 【정언 이수해(李壽海)이다.】 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고, 또 계청(啓請)하기를,
"안동(安東)에 문정공(文正公) 김상헌(金尙憲)의 서원을 세우소서."
하였으나, 모두 윤허하지 아니하였다.

 

7월 27일 정축

임금이 태묘(太廟)에 전알(展謁)하였다.

 

7월 28일 무인

토성(土星)이 동정성(東井星)으로 들어갔다.

 

사헌부 【지평 조중직(趙重稷)이다.】 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흉언패설(凶言悖說)의 무함이 군상(君上)에 미친 것이 어찌 양취도(楊就道)·양민익(楊敏益)의 두 역적과 같은 경우가 있었겠습니까? 그때에 국문에 참여했던 여러 신하들이 극력 쟁집(爭執)하여 끌어댄 여러 사람들을 잡아다가 역절(逆節)을 끝까지 다스리기를 청하지 못했으니, 매우 불충(不忠)한 일입니다. 의금부 당상과 국문에 참여했던 헌신(憲臣)들을 모두 파직하소서. 고 상신(相臣) 김상헌(金尙憲)의 충절(忠節)은 해와 별처럼 빛나므로, 상재지향(桑梓之鄕)에 사우를 건립한 것은 진실로 사림(士林)들의 정론(正論)에서 나온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저 일종의 괴귀(怪鬼) 같은 무리가 충의(忠義)를 원수처럼 보아 방자하게 허물어버리고, 또 따라서 명리(命吏)를 능멸하여 모욕하고는 편당들과 결탁하여 성문을 닫아버렸습니다. 수창한 자를 징치(懲治)하는 것은 진실로 사악(邪惡)을 배척하여 정의(正義)를 부지하는 성의(聖意)인데, 병조 판서 박문수(朴文秀)는 난민을 도와 공의(公議)와 각축(角逐)하여 대현(大賢)을 존숭하는 사류(士流)들은 배격하여 무욕(誣辱)하고 절의(節義)를 멸시하는 흉도(凶徒)는 사정을 끼고 영호하였습니다. 청컨대 파직하소서. 신이 길에서 영남의 새 방백 윤양래(尹陽來)를 만났더니, 윤양래가 말하기를, ‘서원(書院)은 곧 내가 평생 생각하던 것과 어긋난다. 그래서 일찍이 순흥(順興)의 백운동 서원(白雲洞書院)에서 아주 가까운 곳까지 갔었지만, 그 서원에 입향(入享)된 사람이 곧 우리 동방에 서원을 창건한 사람이었으므로, 서원을 찾고 싶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아! 이 무슨 말입니까? 돌아보건대, 오늘날 영남의 풍속이 퇴패(頹敗)한 날에 이와 같이 무식한 사람에게 선화(宣化)하는 직임을 맡길 수 없으니, 청컨대 경상 감사 윤양래를 파직하소서. 안음 현감(安陰縣監) 황욱(黃昱)과 태천 현감(泰川縣監) 김범갑(金范甲)은 흉론(凶論)을 수창하여 어진이를 무함하고 올바른 사람을 해친 자들입니다. 명교(名敎)에 죄를 얻어 사류(士類)에 낄 수 없으니, 아울러 사판(仕版)에서 삭제해 버리소서. 전 지평 정옥(鄭玉)은 한때의 규계(規戒)에 유감을 품고 다른 사람의 부형에게 노여움을 옮겨서 방자한 뜻으로 모욕하였고, 또 소명(召命)을 받고 오는 길에 다른 사람을 위해 종[奴]을 추쇄(推刷)하였으니, 청컨대 대적(臺籍)에서 삭제하소서."
하였다. 홍치상(洪致祥)에 관한 일은 정계(停啓)했는데, 임금이 타당하지 못하다고 책망하여 윤허하지 않고, 이어 곧 하교하기를,
"시골 유생들이 서로 싸우고 방자한 뜻으로 영호했으니, 특별히 조중직을 파직하도록 하라."
하였다.

 

7월 29일 기묘

주강을 행하였다.

 

석강을 행하였다. 시독관 이덕중(李德重)이 아뢰기를,
"언로(言路)가 막힘이 근일보다 심한 적이 없었습니다. 이번에 대각(臺閣)이 시골에서 올라와 품고 있던 것을 죄다 말했으니, 마땅히 우악하게 용납하시는 뜻을 보이셨어야 하는데, 갑자기 최절(摧折)을 가하셨습니다. 이는 언자(言者)를 대우하는 도리가 아니니, 처분이 매우 과중하였습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그가 서원을 세운 당류로서 직명(職名)을 빙자하여 이와 같이 한 것은 진실로 무상(無狀)하다. 병조 판서의 일이나 황욱(黃昱) 등의 일들은 모두 색목(色目)의 싸움이다."
하였다. 이덕중이 아뢰기를,
"서원을 창건하는 일은 삼사(三司)에서도 또한 합사(合辭)하여 청한 사례가 있었습니다."
하고, 교리 조영국(趙榮國)이 아뢰기를,
"홍치상(洪致祥)의 일은 지극히 중대한 데에 곤계되는 것인데, 갑자기 정지하였습니다. 신도 차자를 올려 논하려고 했습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이덕중이 아뢴 것은 치우치게 비호하는 데로 돌아감을 면하지 못한 것인데, 서원을 다시 세우자는 말을 하기에 이르렀으니, 사체가 지극히 그르다. 특별히 체직하도록 하라."
하였다.

 

우의정 송인명(宋寅明)이 차자를 올려 조중직(趙重稷)의 계사(啓辭)에 대변(對辨)하기를,
"초야(草野)의 기슬(蟣蝨) 같은 무리들이 어지럽게 한 말은 전혀 긴요한 관계가 없는 것이니, 그들이 첫째로 무신년094)  에 이미 정법(正法)한 하나의 시골 품관(品官)을 끌어댄 것으로 보더라도 요란하게 떠드는 짓임을 알 수 있습니다. 신이 진실로 이런 소란스러운 일이 있을 것을 염려하여 논쟁을 마치지 않은 것을 성감(聖鑑)으로 반드시 모두 굽어 통촉(洞燭)하셨을 것입니다."
하고, 또 말하기를,
"영백(嶺伯)이 반드시 이로 인해 인혐(引嫌)할 것입니다. 그러면 백성들이 장차 그 폐해를 받게 될 것이니, 마땅히 체직을 윤허하셔야 합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헌신(憲臣)의 소위는 지극히 해괴한 일이다. 영백에게 장차 하교하려고 하였는데, 진달한 차자의 말이 옳다."
하였다.

 

이기진(李箕鎭)을 경상 감사로, 조영국(趙榮國)을 이조 정랑으로, 허옥(許沃)을 사간으로, 김광세(金光世)·오수채(吳遂采)를 지평으로, 홍계유(洪啓裕)를 교리로 삼았다.

 

7월 30일 경진

정언 김상중(金尙重)이 또 오명서(吳命瑞)의 소장에 대변(對辨)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동래부(東萊府)가 비록 멀지만, 하늘 위에 있는 것은 아니니, 한 차례 안핵(按覈)하면 자연히 금방 결판이 나게 될 것입니다. 신에 대해서는 함문(緘問)하자고 청한 바가 있었는데, 오명서에 대해서는 사핵(査覈)하자는 의논이 없으니, 대각(臺閣)의 공론과 국가의 사체를 신(臣)은 그윽이 개탄스럽게 여깁니다. 만일 효종조(孝宗朝) 때 탐라(耽羅)를 안핵했던 전례에 의거한다면, 신이 무함한 것인지 무함하지 않은 것인지와, 오명서가 원통한 것인지 원통하지 않은 것인지를 어찌 숨길 수 있겠습니까? 왜권(倭券)은 믿기 어렵다는 말을 어찌하여 듣기 싫어하고 말을 기휘(忌諱)하며, 장수(匠手)에게 면역(免役)해 준 일은 무슨 공이 있고 무슨 노고가 있었다는 것인지 알지 못하겠습니다. 세상에 공의가 없어진 지 오래입니다. 남을 논박(論駁)한 사람은 낭패(狼狽)하지 않은 경우가 없고, 논박을 받은 사람은 깨끗이 벗어나지 않은 경우가 없습니다. 신이 비록 열거한다 하더라도 한 바탕의 공언(空言)이 되어버릴 것이어서 어찌할 도리가 없을 따름입니다."
하니, 예사 비답을 내렸다.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