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 1일 신사
임금이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우의정 송인명(宋寅明)이 아뢰기를,
"신은 본래 재능이 없고 인망도 가장 가볍습니다. 시험삼아 살펴보건대, 이번의 대계(臺啓)는 바로 속담에 이른바, ‘팽두이숙(烹頭耳熟)’이란 말과 같은 것입니다. 하물며 지난번 중신 박문수(朴文秀)가 신이 노론(老論)을 두려워한다고 배척하였고, 또한 세사(世事)를 잘 경영한다고 기롱했습니다. 신이 고심(苦心)하는 것은 미륜(彌綸)하는 데 있는데, 피차(彼此)가 모두 비방하고 있으니, 전후에 사람들이 한 말을 또한 알 만합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조중직의 계사(啓辭) 가운데 ‘불충(不忠)’ 등의 말은 지극히 그른 것이다. 만일 ‘마땅히 국문해야 할 사람들을 끝까지 핵실하지 않았다.’고 말했다면, 나는 장차 불효한 사람이 될 것이다. 여러 신하들은 이에 대해 인혐(引嫌)할 필요가 없다. 병조 판서는 말을 가리지 않는 것이 곧 그의 병통인데, 또한 어찌 혐의할 것이 있겠는가?"
하였다. 송인명이 아뢰기를,
"안동(安東)의 유생 가운데 수창한 자는 엄중하게 형벌하여 정배(定配)하라는 명이 있었는데, 유생 5,6인이 잇따라 엄중한 형신을 받고 있으니, 마땅히 도신으로 하여금 즉시 장문(狀聞)하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옳게 여겼다.
고 좌의정 이집(李㙫)에게 증시(贈諡)하도록 명하였다. 이집이 유계(遺戒)로 시호를 청하지 말라고 했었는데, 이때에 이르러 송인명(宋寅明)이 아뢰기를,
"시장(諡狀)을 기다리지 않고 시호를 내릴 것을 신이 비록 감히 앙청(仰請)할 수 없으나, 마땅히 이집을 잘 아는 조신(朝臣)으로 하여금 시장을 짓도록 하여 시호를 내리소서."
하니, 임금이 드디어 시장을 기다릴 것 없이 시호를 내리도록 명한 것이었다.
사신은 논한다. 시장을 기다리지 않고 시호를 내리는 것은 선정신(先正臣) 이황(李滉)으로부터 비롯되었는데, 대개 선정의 도덕(道德)이 시장을 기다릴 것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근세(近世)로 내려오면서 점점 준례가 되어버렸고, 이로 인해 시법(諡法) 또한 근엄하지 못하게 되었다. 송인명이 아뢰기를, "저번에 남위로(南渭老)가 정사(政事) 때 주의(注擬)하는 사이에 통색(通塞)에 대한 일로 상소하여 그 사람을 모욕한 것은 더욱 한심스러운 일이니, 마땅히 파직해야 합니다."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태백산사고본】 35책 47권 36장 B면【국편영인본】 42책 601면
【분류】인사-관리(管理) / 인사-임면(任免) / 사법-탄핵(彈劾) / 역사-사학(史學)
사신은 논한다. 시장을 기다리지 않고 시호를 내리는 것은 선정신(先正臣) 이황(李滉)으로부터 비롯되었는데, 대개 선정의 도덕(道德)이 시장을 기다릴 것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근세(近世)로 내려오면서 점점 준례가 되어버렸고, 이로 인해 시법(諡法) 또한 근엄하지 못하게 되었다.
송인명이 아뢰기를,
"저번에 남위로(南渭老)가 정사(政事) 때 주의(注擬)하는 사이에 통색(通塞)에 대한 일로 상소하여 그 사람을 모욕한 것은 더욱 한심스러운 일이니, 마땅히 파직해야 합니다."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해서 어사(海西御史) 홍창한(洪昌漢)이 복명하였다. 봉산 군수(鳳山郡守) 조윤성(曹允成)의 치적이 가장 우수하다 하여 승자(陞資)하였다.
임금이 부총관 김환(金鍰)을 소견(召見)하였는데, 왕세자가 입시했다. 김환이 아뢰기를,
"노신(老臣)이 천안(天顔)을 가까이에서 모시게 되어 죽어도 여한이 없습니다. 청컨대 저하께 가까이 나아가서 삼가 기의(岐嶷)하신 보습을 우러러 뵙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윤허하였다. 김환이 아뢰기를,
"신이 오늘 이러한 은혜와 영광을 받들고도 보답할 길이 없으므로 감히 맥구 노인(麥丘老人)과 같은 말을 올리겠습니다. 우리 국조(國朝)는 나라를 세웠을 적에 오로지 인후(仁厚)로써 하셨으니, 삼가 원하건대, 전하께서는 힘쓰시고 또 힘쓰소서."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아뢴 두 글자는 지극한 것인데, 유의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고, 이어 하교하기를,
"김환은 부자(父子)의 나이가 거의 1백 50에 이르니, 희귀하고 특이한 일이라 할 만하다. 이미 문과에 올랐고 관질(官秩)이 재상의 반열에 이르렀으니, 올려서 기사(耆社)에 들어가게 하는 것이 진실로 연로(年老)한 이를 존대하는 도리에 합당할 것이다. 특별히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를 제수하도록 하라."
하자, 김환이 사사(辭謝)하고 물러가기를 청하니, 시(詩)를 내려 주어 보냈다.
서종옥(徐宗玉)을 부제학으로, 허채(許采)를 지평으로, 신사건(申思建)을 정언으로, 오수채(吳遂采)를 수찬으로, 이광운(李光運)을 필선으로, 윤혜교(尹惠敎)를 판윤으로, 박사정(朴師正)을 우윤으로 삼고, 통덕랑(通德郞) 박호(朴鎬)를 통정 대부(通政大夫)로 가자(加資)하였다. 이보다 앞서 박호의 문생(門生) 이정보(李鼎輔) 등이 상소하기를,
"박호가 교육한 문도(門徒)들이 문과에 오른 자가 3인이고 국학(國學)에 들어간 자가 3인이나 되니, 청컨대 전례에 의거하여 가자하소서."
하였는데, 전조에서 복계(覆啓)하니, 그대로 따른 것이었다.
교리 홍계유(洪啓裕)가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제갈무후(諸葛武侯)가 그의 임금에게 고하기를, ‘궁중(宮中)과 부중(府中)은 함께 일체(一體)가 되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전하께서는 과연 궁중과 부중이 각기 다른 규정이 없게 하였고 내부와 외부가 각기 다른 법이 없게 하셨습니까? 액례(掖隷)들이 내의원에서 소란을 일으켜 의관(醫官)을 후욕(詬辱)한 것은 실로 하나의 변괴입니다. 대신(臺臣)이 들은 말에 따라 그 죄를 다스리기를 청하자, 전하께서 도리어, ‘식노마(式路馬)’ 세 글자로 언자(言者)를 견제하고 액례들을 비호하셨으니, 신은 그윽이 애석하게 여깁니다. 안동(安東) 일에 이르러서는 특히 그 난민(亂民)들이 이미 이루어진 서원을 멋대로 허물어 버렸으니, 누군들 분노(憤怒)하고 질시(嫉視)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연석(筵席) 위에서 도리어 부호(扶護)하는 논의가 있어서 멀리서 성세(聲勢)가 되고 그 말이 공동(恐動)하는 데 가까웠으니, 영남(嶺南)에 대해 근심하는 것이 마치 하삭(河朔)095) 의 번진(藩鎭)은 뜻을 거슬려서는 안된다는 것 같은 것이 있었습니다. 중신의 말은 어찌하여 지나친 근심을 하는 것입니까?"
하니, 임금이 예사 비답을 내렸다.
경기 유생 이진(李瑨)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안동(安東)에 선정신 김상헌(金尙憲)의 사당을 세운 것은 사문(斯文)과 세도(世道)를 위해 다행한 일인데, 뒤이어 들어보건대, 경헌(景瀗)의 무리가 권세 있는 재상에게 부탁하고는 흉악한 무리들을 선동하여 이미 세운 사당을 무너뜨렸는데, 주쉬(主倅)가 금단하지 못하고 방백(方伯)이 다스리지 못하니, 무욕(誣辱)하는 말이 선정에게 미치게 되었습니다. 아! 그들의 이른바 권세 있는 재상이란 자 또한 병이(秉彛)의 천성(天性)은 있을 것인데, 특히 당동 벌이(黨同伐異)하는 사심 때문에 천성을 잃어버리고 도리어 선정에게 원한을 갚으려고 이 무리들에게 아첨할 계책을 세웠습니다. 그리고는 감히 영남이 근심스럽다는 말로 천폐(天陛) 앞에서 공갈하고 사악한 무리를 난만하게 도와 명교(名敎)와 의리에 죄를 지게 됨을 알지 못하였으니, 그의 광언(狂言)과 패설(悖說)은 참으로 명백히 분변(分辨)할 것도 못됩니다."
하니, 임금이 도로 내주도록 명하였다.
사헌부 【지평 허채(許采)이다.】 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정옥(鄭玉)이 저번에 올린 한 소장은 과연 보복하려는 마음에서 나온 것인지 알 수는 없으나, 혐의를 무릅쓰고 망령되게 논계(論啓)한 잘못을 면할 수가 없습니다. 또한 연로(沿路)에서 종[奴]을 추쇄했다는 것이 과연 대신(臺臣)이 말한 것과 같다면 한 번 구문(究問)하여 사핵(査覈)하는 일은 결단코 그만둘 수 없습니다. 청컨대 파직하고, 도신으로 하여금 분명하게 사핵하게 하여 처분하소서."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전계 가운데 황욱(黃昱)과 김범갑(金范甲)에 관한 일은 정지했다.
호조 판서 송진명(宋眞明)이 졸(卒)하였다. 송진명은 송인명(宋寅明)의 종형(從兄)으로, 조정(調停)하는 논의를 잘했기 때문에 신임받았고, 재주와 학문이 넉넉했으나, 다만 세리(勢利)에 태연하지 못하여 사람들이 단점으로 여겼다.
유척기(兪拓基)를 호조 판서로, 정익하(鄭益河)·홍계유(洪啓裕)를 교리로, 오수채(吳遂采)·이성효(李性孝)를 부교리로, 홍봉조(洪鳳祚)를 수찬으로, 심성진(沈星鎭)을 겸 필선으로, 오수채(吳遂采)를 겸 사서로, 윤동준(尹東浚)을 설서로, 권적(權𥛚)을 발탁하여 강화 유수로, 이주진(李周鎭)을 승지로, 오원(吳瑗)을 대사성으로 삼았다.
8월 6일 병술
사헌부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아니하였다.
8월 7일 정해
예조 판서 윤순(尹淳)을 보내어 영의정 이광좌(李光佐)를 돈유(敦諭)하여 함께 오도록 하였다.
홍창한(洪昌漢)을 교리로, 심성진(沈星鎭)을 부교리로, 송징계(宋徵啓)·윤광의(尹光毅)를 수찬으로, 박필균(朴弼均)을 부수찬으로, 이석표(李錫杓)를 이조 정랑으로, 윤순(尹淳)을 예문관 제학으로, 박사정(朴師正)을 도승지로 삼았다.
8월 9일 기축
사헌부 【지평 허채(許采)이다.】 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예조 좌랑 김성(金聲)은 재작년에 성균관 추쇄관(成均館推刷官)으로서 호우(湖右)를 두루 돌아다녔는데, 곤궁한 백성들은 원통함을 호소하게 하였으나, 부유한 사람들은 많이 빠지게 하였습니다. 지나간 일이라 하여 내버려 둘 수 없으니, 청컨대 파직하소서."
하니, 아뢴 대로 하게 하였다.
호조 판서 유척기(兪拓基)가 안동(安東)에서 서원을 허문 일로 인하여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병조 판서 박문수(朴文秀)가 신이 금령(禁令)을 어기고 서원을 세우도록 허락하였다 하여 서원을 허문 난민에 견주어 죄를 같게 하려고 하니, 그 말의 뜻이 위험하여 거의 사람으로 하여금 뼈가 시퍼래지고 혼이 떨리게 합니다. 신이 이 서원을 세우도록 허락한 것은 진실로 그럴 만한 까닭이 있었습니다. 예로부터 사묘(祠廟)를 세워 높이어 보답하는 것은 특히 시골 지방에 있었습니다. 신이 감히 김상헌(金尙憲)을 공부자(孔夫子)나 주문공(朱文公)에 견주려는 것은 아니고, 안동은 진실로 김상헌에게는 곡부(曲阜)096) 나 무원(婺源)097) 과 같았기 때문이었습니다. 또 영외(嶺外)의 인심이 무신년을 겪은 이래로 여지없이 무너져버려 분의(分義)를 침범하고 군상을 능멸하는 등 놀랍고도 가증스러운 일들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으므로, 구구한 미신(微臣)의 생각에 대개 한 지방 사람들의 이목을 새롭게 진작시켜 충의(忠義)의 기상을 고무시키고자 하여 결연히 세우도록 허락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바야흐로 좌수(座首)로 있는 이현일(李玄逸)의 외손과 또한 교임(校任)을 차지하고 있는 정희량(鄭希亮)의 가까운 인척이 널리 성세(聲勢)와 결탁하여 조정을 공갈하고 무뢰배(無賴輩)들을 위협하여 떼 지어 일어나 변란을 일으킨 일에 이르러서는 신이 미리 헤아릴 수 있는 바가 아니었습니다."
하였는데, 임금이 도로 내주도록 명하였다.
병조 판서 박문수(朴文秀)가 안동(安東)에서 서원을 허문 일로 인해 상소하여, 조중직(趙重稷)·이진(李瑨)·홍계유(洪啓裕)의 소장에 대변(對辯)하고, 이어 서원의 폐단에 관하여 극력 진달하기를,
"벼슬이 경상(卿相)에 이르고 현달한 자손이 있으면, 부호(富豪)로서 신역(身役)을 기피하는 무리들이 사우를 세우자는 의논을 수창하고, 본가의 자제들은 영곤(營閫)과 수재(守宰)에게 간청하여 크게 서원을 창건하여 단청(丹靑)을 찬란하게 꾸밉니다. 간사한 백성 가운데 군역에 걸리는 것을 두려워하여 온 서원에 투속(投屬)하는 자들이 많아서 수백에 이르는데, 돈을 거두고 쌀을 모으는 것이 문득 세금을 거두는 관청과 같으며, 닭을 삶고 개를 잡아서 실컷 먹고 마시는 한 장소를 만들고 있습니다. 그러나 수령이 된 자들이 두려워하고 꺼려서 끌리는 대로 돌아보고만 있으므로, 백골(白骨)과 인족(隣族)에게 거두는 폐단이 모두 이에 말미암고 있습니다. 선정신 김상헌(金尙憲)의 후손 김창흡(金昌翕)은 근대의 고사(高士)입니다. 일찍이 시를 짓기를, ‘퇴계가 처음으로 백운 서원 세우니,[退陶初肇白雲祠] 나라 살리고 백성 혁신할 길 여기 있다고 여겼는데,[活國新民謂在斯] 술 고기만 풍성하고 글 읽는 소리 끊겼으니,[酒肉淋漓絃絶] 도도한 온갖 폐단을 후세에 와서 알았네.[滔滔百弊後人知]’ 하였습니다. 선왕조(先王朝) 갑술년098) 에 선정신 박세채(朴世采)가 겹쳐 세우는 것을 금단하기를 청했었는데, 계사년099) 에 특별히 금단하도록 하교하셨습니다. 저 조중직·홍계유·이진의 무리가 중요함을 빙자하여 허세를 부려 공갈하며 다른 사람을 무함하고 욕하는 바탕으로 삼으려고 하였는데, 이는 그 무리들의 본래의 기량이니, 어찌 말할 것이 있겠습니까? 아! 조중직은 신에게, ‘사류(士類)들을 무욕(誣辱)하고 절의(節義)를 멸시하였다.’고 했고, 홍계유는 신에게, ‘멀리서 성세(聲勢)가 되어 말이 공동(恐動)시키는 데 가까웠다.’고 하였으며, 이진은 신에게, ‘당동 벌이(黨同伐異)하여 천성(天性)을 잃고 선정에 대해 원한을 갚으려 하고 있다.’고 하였으니, 신이 극력 말하여 그치지 않는 것이 어찌 까닭이 없겠습니까?
대저 호서(湖西) 사람들은 심지(心志)가 굳지 못하고 호남 사람들은 교활하여 변하기를 잘하는 것은, 모두 산천(山川)이 흩어져 달려가는 형국(形局)의 소치입니다. 영남(嶺南)에 이르러서는 둘러싸고 있는 산들이 두텁고도 높고 흐르는 냇물이 한 방향으로 돌아가고 있는데, 우리 나라의 대유(大儒) 가운데 사현(四賢)이 모두 이곳에서 나왔고, 극적(劇賊) 견훤(甄萱)·궁예(弓裔) 또한 이곳에서 났으니, 이는 그 산천의 풍기(風氣)가 현인이 나면 반드시 대현(大賢)이 되고 악인이 나면 반드시 대악(大惡)이 되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인재가 전혀 없는데, 이는 조가(朝家)에서 배양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아! 영남을 폐기한 것이 기사년100) 부터 비롯되었는데, 기사년에 편당하는 사람들이 분의(分義)를 침범하고 의리에 어그러진 짓을 한 것은 그 죄가 진실로 하늘에 닿는 것이었으나, 갑술년 이후의 사람들은 죄를 범한 자의 자손이 아니었으니, 뒤섞어 영구히 폐고(廢錮)하는 것은 마땅하지 않습니다. 이번에 안택준(安宅駿)의 무리가 평범한 사람들을 뒤섞어 몰아넣어 온 시골을 견제하고 있어서 영남에 대한 근심이 장차 한정이 없게 되었는데, 듣건대, 안동 겸관(安東兼官) 심정기(沈廷紀)는 사인(士人) 김몽렴(金夢濂)·김경헌(金景憲)·황우청(黃又淸)·유정화(柳鼎和)를 형벌했고, 전 감사(監司) 윤양래(尹陽來) 또한 감영(監營)의 옥(獄)에 옮겨다 가두어 놓고 난민(亂民)으로 다스렸다고 하니, 신은 그윽이 국가를 위하여 민망하게 여기고 있습니다. 아! 속담에, ‘조총(鳥銃)이 나오면 항우(項羽)도 힘을 쓸 수 없고, 치우친 논의가 생겨나면 제갈양(諸葛亮)도 나라를 잘 다스릴 수 없을 것이다.’ 하였습니다. 이런 당동 벌이하는 세상을 당했으니, 신의 말이 비록 지성에서 나왔으나, 그 누가 믿겠습니까?"
하였는데, 소장을 들이자, 임금이 장황함을 책망하고 도로 내주도록 명하였다.
우의정 송인명(宋寅明)이 아뢰기를,
"춘궁 저하께서 덕기(德器)가 날로 성취되어 가고 지려(智慮)가 점점 진보하고 있으니, 보도(輔導)할 책임을 맡을 사람이 하루가 시급하게 되었습니다. 반드시 학식이 고명하고 행의(行誼)가 독실하여 충년(沖年) 시기에 사표(師表)가 될 만한 사람을 경의(敬意)를 다하고 예절을 다하여 기필코 초치(招致)해야 할 것인데, 초치하여 그만두지 않음이 없다면 어찌 갑자기 올라오지 않겠습니까?"
하고, 이조 판서 조현명(趙顯命)이 아뢰기를,
"찬선(贊善)과 진선(進善)의 자리가 지금 바야흐로 비어 있습니다."
하였는데, 임금이 이르기를,
"산림(山林)에서 독서하는 선비는 어렸을 때에 배워서 장년에 실행하는 것이 곧 그의 뜻인 것이다. 어찌 한없이 고도(高蹈)만 일삼을 것인가? 바로 지금 당품(當品)한 사람이 누구인가?"
하자, 송인명이 아뢰기를,
"당상관 중에는 윤동수(尹東洙)와 어유봉(魚有鳳)이 있습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승품(陞品)할 만한 사람이 있으면 대신에게 물어서 의망(擬望)하여 차출하도록 하라."
하였다.
8월 10일 경인
김광세(金光世)를 교리로, 이정보(李鼎輔)를 부교리로, 송교명(宋敎明)을 수찬으로, 김상중(金尙重)을 부수찬으로, 정광제(鄭匡濟)를 헌납으로, 유만추(柳萬樞)를 지평으로, 홍정보(洪正輔)를 정언으로, 윤혜교(尹惠敎)를 예문관 제학으로, 이정보(李鼎輔)를 겸 문학으로, 심성진(沈星鎭)을 겸 사서로, 조원명(趙遠命)을 부제학으로, 어유봉(魚有鳳)을 찬선으로, 윤동원(尹東源)을 진선으로, 이덕수(李德壽)를 동지 정사로, 김광세(金光世)를 서장관으로, 조영국(趙榮國)을 이조 정랑으로, 심성진(沈星鎭)을 응교로 삼았다.
사헌부 【지평 허채(許采)이다.】 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정릉령(貞陵令) 변진국(邊鎭國)은 시골의 향품(鄕品)에도 끼지 못하는데, 갑자기 침랑(寢郞)에 끼었으니, 청컨대 태거하소서. 아이 첨사(阿耳僉使) 정운형(鄭運亨)은 보기에 지극히 피잔(疲殘)합니다. 아이는 본시 중진이어서 책임이 매우 긴요한 곳이니, 청컨대 개차(改差)하소서."
하니, 모두 아뢴 대로 하게 하였다.
8월 16일 병신
우참찬 이덕수(李德壽)가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논자(論者)가 ‘우리 나라는 동쪽에 있는 나라로서, 동쪽은 사시(四時)의 봄에 해당되고 오색(五色)의 청(靑)에 해당되는데, 풍속이 흰 옷을 입기 좋아하지만, 마땅히 흰 옷을 금지하고 푸른 옷을 숭상하게 해야 합니다.’라고 하였고, 전하께서도 이미 그 말에 따라 시행하도록 하신 지 여러 날이 되었습니다. 신은 그윽이 생각하건대, 만물(萬物)은 동쪽에서 비롯되어 서쪽에서 이루어지게 되니, 우리 동방(東方) 사람들이 서방(西方) 빛깔을 숭상함은 시작할 때부터 끝까지 변함이 없는 까닭이라고 여깁니다. 《역경(易經)》에, ‘천제(天帝)가 진방(震方)에서 나와 태방(兌方)에서 기뻐한다101) .’고 했으니, 이는 천도(天道)의 시작과 성취를 말하는 것으로서, 곡식이 봄에 심어지고 가을에 열매가 이루어짐은 곡물의 시작과 성취인 것입니다. 우리 동방에서 또 청색을 숭상하게 된다면, 이는 순전히 시작만 있고 성취는 누리지 못하는 것이니, 어찌 될 수 있겠습니까? 선민(先民)들이 조화(造化)의 이치에 대해 관찰한 것이 같았으니, 어찌 신라(新羅)·백제(百濟) 이래로 마침내 한 사람도 박식(博識)한 선비가 없었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우리 동방의 풍속이 흰 옷을 숭상한 것은 전대의 사책(史冊)에 많이 기록되어 있고, 《수서(隋書)》와 《송사(宋史)》 및 황명(皇明)의 동월(董越)의 기록 같은 것은 더욱 명백하게 증험할 수 있는 것입니다. 대저 풍속이 이루어진 지 수천년이 되었는데, 오늘날에 와서 이를 고친다는 것이 옳은 일인지 알 수 없으니, 신은 그만두는 것만 같지 못하다고 여깁니다."
하니, 임금이 답하기를,
"마땅히 생각해 보겠다."
하고, 그 이튿날 하교하기를,
"우참찬이 상소한 말을 묵묵히 생각해 보았더니, 지나치다고 할 만한 것이다. 대저 원형이정(元亨利貞)102) 을 포괄(包括)하고 있는 것은 원(元)이고, 춘하 추동(春夏秋冬)의 근본은 곧 춘(春)이며, 인의예지(仁義禮智)를 포괄하고 있는 것 또한 인(仁)인 것이다. 오직 원(元)이기 때문에 영구히 정정(貞正)할 수 있는 것이다. 가을과 겨울의 기운이 비록 쓸쓸하다고 하지만, 종결을 이루는 것은 또한 곧 춘(春)인 것이다. 이로 미루어 살펴보건대, 가을에 결실이 이루어지고 겨울에 저장하는 것이 인(仁)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우리 나라에서 흰 옷을 숭상해 왔다는 것이 비록 선유(先儒)가 한 말이지만, 숭상하는 바를 말한 것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어찌 근일처럼 심하였겠는가? 경사 대부(卿士大夫)들이 남색(藍色) 옷을 부끄럽게 여기므로 하천(下賤)에 이르기까지 또한 이런 풍습을 본받아 모두 흰 옷을 입는 것이다. 우리 나라는 청구(靑丘)에 위치해 있으므로 나라를 세우고 인(仁)을 전해 온 것인데, 한(漢)나라가 적색(赤色)을 숭상한 것에 비유한다면, 어찌 그 인(仁)을 따라야 하지 않겠는가? 우참찬은 단지 옛날의 사책(史冊)만 보고 근래의 폐단은 살펴보지 않은 것이다. 충(忠)·질(質)·문(文)이 서로 바뀌는 것도 또한 때에 따라 하는 것이다. 돌아보건대, 오늘날 세도(世道)가 각박해지고 생민들이 쓸쓸한데도 조정 위에 인후(仁厚)한 기풍을 듣지 못했으니, 이런 시기를 당하여 인(仁)을 숭상해야 하겠는가, 백(白)을 숭상해야 하겠는가? 요사이 인심이 경박해져서 남색을 바꾸어 백색(白色)으로 하는 자가 반드시 장차 어지럽게 있을 것이니, 중외에 효유(曉諭)하도록 하라."
하였다.
임금이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병조 판서 박문수(朴文秀)를 체직하도록 명하였으니, 여러 차례 소명(召命)을 어기었기 때문이었다. 박문수가 이미 체직이 되자, 드디어 상소하고 고향으로 내려갔다.
이춘제(李春躋)를 도승지로, 조상경(趙尙絅)을 병조 판서로, 윤용(尹容)을 대사헌으로, 임정(任珽)을 대사간으로, 황재(黃梓)를 집의로, 김정윤(金廷潤)을 사간으로, 이광식(李光湜)·권현(權賢)을 장령으로, 윤동준(尹東浚)을 정언으로, 홍창한(洪昌漢)을 부교리로, 이도원(李度遠)을 수찬으로, 오수채(吳遂采)를 부수찬으로 삼았다.
8월 19일 기해
임금이 강릉(康陵)에 전알(展謁)하고 차례로 태릉(泰陵)을 참배하고는 회가(回駕)할 때에 살곶이[箭串]에 좌차(坐次)하여 열무(閱武)하였다.
8월 20일 경자
우의정 송인명(宋寅明)이 박문수(朴文秀)가 하향하였다 하여 나처(拿處)하기를 청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이조 판서 조현명(趙顯命)이 상차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박문수(朴文秀)가 중신(重臣)으로서 조정의 대체(大體)를 생각하지 않고 거의 광분(狂奔)하듯이 곧이곧대로 망령되게 행동하였으니, 거조가 진실로 해괴합니다. 신이 그가 물러가기를 고하였다가 등철(登徹)되지 않은 소장을 보건대, 산야의 짐승으로 자처(自處)하며 결연히 아주 가버리려는 것이었으니, 이는 반드시 작정한 뜻이 있어서 그런 것입니다. 대저 박문수가 국사(國士)로 대우를 받던 사람으로서 이러한 간우(艱虞)를 당하여 군부(君父)를 기절(棄絶)하는 것을 어렵게 여기지 않았으니, 박문수는 진실로 죄가 있으며, 마땅히 추문해야 합니다. 다만 중신이 하향하였을 때 일찍이 나문(拿問)한 전례가 없었으니, 진실로 신하를 부리는 예법이 말을 매두고 소를 묶어 놓듯이 할 수 없기 때문이었습니다. 하물며 박문수는 그 기질과 성정이 불과 같아서 바야흐로 발동할 때에는 스스로 잘못인 줄 알면서도 안주(按住)하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만일 이번에 결박하여 달려온다면, 신의 생각에는 유익함이 없을 뿐만 아니라, 도리어 격동시킬 듯하니, 마땅히 성명(成命)을 거두셔야 합니다. 또 중신의 거취(去就)는 관계되는 바가 가볍지 않은 것인데, 승정원에서 소장을 물리쳤으니, 마땅히 해당 승지를 추고(推考)해야 합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진달한 말이 옳다. 아뢴 대로 하도록 하라."
하였다.
8월 23일 계묘
심성진(沈星鎭)을 승지로, 이종성(李宗城)을 이조 참판으로, 오원(吳瑗)을 이조 참의로, 윤양래(尹陽來)를 좌참찬으로, 오언주(吳彦胄)를 대사간으로, 이덕수(李德壽)를 홍문관 제학으로, 송징계(宋徵啓)를 부응교로, 유언국(兪彦國)을 설서로, 윤득징(尹得徵)을 장령으로 삼았다.
영남(嶺南)에 가뭄이 들고, 20여 일 동안 크게 안개가 끼었다.
8월 27일 정미
찬선 어유봉(漁有鳳)이 상소하여 사직하고 오지 않았으나, 임금이 우악한 비답을 내리고 윤허하지 않았다.
사간 김정윤(金廷潤)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오늘날 기강이 점차 해이해져서 간사한 무리가 멋대로 횡행(橫行)하고 있습니다. 이영(李瀛)이란 자는 본시 천얼(賤孼)로서 적족(嫡族)을 배반해 버리고 무뢰배(無賴輩)와는 결탁하여 멋대로 여항(閭巷)을 횡행하였는데, 그가 돌보던 창녀(娼女)가 공조에 숨어 있었던 것으로 인하여 칼을 뽑아 들고 낭관의 직소(直所)에 돌입하여 방자하게 소란을 일으키니, 온 공조가 두려워하여 놀란 나머지 이졸(吏卒)들이 사방으로 흩어져 달아났습니다. 그래서 마침내 붙잡지 못했으니, 마땅히 포도청으로 하여금 잡아서 율(律)에 의해 엄중하게 다스리게 해야 합니다. 병조 정랑 정광운(鄭光運)은 양녀를 겁탈하여 듣는 사람들이 크게 해괴하게 여기고 있으니, 삭직(削職)하는 벌을 결단코 그만둘 수가 없습니다."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사헌부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아니하였다.
8월 28일 무신
석강(夕講)을 행하였다.
8월 29일 기유
임금이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우의정 송인명(宋寅明)이 아뢰기를,
"조정의 기강이 해이하고 백관의 태만한 것이 근일보다 심한 적이 있지 않았습니다. 신이 일찍이 선왕조의 고사(故事)를 고찰해 보건대, 처분이 극도로 엄준하였습니다. 병술년103) 무렵에는 의금부 당상을 나문(拿問)한 일이 있기에 이르렀었으니, 가끔 한 사람을 죄주어서 백 사람이 두려워하게 했었습니다. 당면한 지금 모든 관사(官司)가 태만해졌으니, 삼가 원하건대, 진작시켜 가다듬게 하는 방도를 깊이 생각하소서."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오늘날의 기강을 돌아보건대, 말을 할 수가 없다. 신하의 도리가 태만하고 교만한 것은 근심하지 않고 도리어 임금의 도리가 날로 지나치다고 여기고 있으니, 어찌 난처한 일이 아니겠는가?"
하였다. 송인명이 문출(門黜)한 안상휘(安相徽)와 성범석(成範錫)을 석방하기를 청하니, 그대로 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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