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영조실록47권, 영조 14년 1738년 9월

싸라리리 2025. 9. 22. 15: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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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1일 경술

임금이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경상 감사 이기진(李箕鎭)이 아뢰기를,
"절의를 숭상하고 장려함은 국가에서 중시하는 바입니다. 고려(高麗)의 절사(節士) 길재(吉再)가 금오산(金烏山) 밑에서 살았었는데, 태종조(太宗朝)에 밭을 내리고 대나무를 심어 포장(褒奬)하고 찬미(贊美)했었으니, 만일 지금 치제(致祭)하고 시호를 내린다면 거의 온 도를 용동(聳動)시킬 수 있을 것입니다."
하고, 우의정 송인명(宋寅明)이 아뢰기를,
"정몽주(鄭夢周)와 박상충(朴尙衷)에게는 전에 이미 시호를 내리었지만, 길재는 그의 자손들이 쇠퇴한 때문에 유독 빠졌으니, 진실로 결전(缺典)이 되었습니다."
하니, 임금이 치제하고 시호를 의정(議定)하며, 3인의 후손들을 아울러 녹용(錄用)하도록 명하였다. 이기진이 아뢰기를,
"안동(安東)의 일은 요사이 매우 시끄러웠습니다. 그러나 김상헌(金尙憲)과 안동은 백이(伯夷)·숙제(叔齊)의 수양산(首陽山)과 같은 곳인데, 어찌 이 땅에 서원이 없을 수 있겠습니까? 하물며 그의 충절은 원래 피차(彼此)의 당론과 상관이 없는데, 특히 향곡(鄕曲)의 무식한 무리들이 저지한 것이니, 마땅히 조가(朝家)에서 특별히 사우를 세우도록 명하여야 합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잠시 전에 길재(吉再)의 일에 대해서는 가(可)할 것도 불가(不可)할 것도 없었기 때문에 윤허했지만, 이 일에 이르러서는 어찌 사자(士子)들이 시끄럽게 군다 하여 조가(朝家)에서 성취할 수 있겠는가? 경은 서원을 세우지 못한 것을 근심하지 말고 오직 영남 백성을 살리는 데 마음써야 한다."
하였다. 공조 판서 박사수(朴師洙)가 아뢰기를,
"영남 백성들이 지난날 역적의 무리가 되었던 것은 서울 사람들이 망측(罔測)한 말을 조작했었기 때문입니다. 무신년104)  에 정희량(鄭希亮)의 무리를 엄중하게 다스리지 않았기 때문에 권덕수(權德秀)의 무리가 그 고을에서 장의(掌議)가 되었고, 이인지(李麟至)의 무리는 감히 진소하였으니, 이 서원을 아직까지 세우지 못한 것은 오로지 기강(紀綱)이 엄격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만일 그 당시에 몇 사람을 베었더라면 이런 변괴는 없었을 것입니다."
하였다. 사간원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아니하였다.

 

사직 박문수(朴文秀)가 ‘죄를 진 신하’라고 일컬으며 다시 물러가기를 고했다가 등철(登徹)되지 않았던 소장을 진달했는데, 대략 이르기를,
"신이 이양신(李亮臣)의 흉악한 무함을 받게 되면서부터 마음속에 남이 모르는 아픔이 있었습니다. 스스로 사람이라고 여기면서 환득(患得)하는 마음을 가지고 서로 반역(反逆)이라고 하기를 평소 다반사(茶飯事)처럼 하고 있는데도, 듣는 자가 태연하게 부끄러워할 줄 모르고 있으니, 이는 천리(天理)가 없어지고 인도(人道)가 상실된 것입니다. 만일 이 의리를 밝힌다면 물러가 구학(丘壑)에서 죽는 것 또한 보답하는 한 가지 도리가 될 것입니다. 네거리에 익명서(匿名書)가 내걸리고 궁궐 문에 글이 걸리는 변고가 몇 달 동안에 서로 잇따라 일어나고 있으니, 이는 하늘이 우리를 싫어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규결(糾結)한 뜻이 더욱 천만 번 얽혀서 풀리지 않는데, 잔인하게도 요순(堯舜)을 하직하여 떨쳐버리고 떠나기를 마치 인가(人家)에서 길들여 기르던 산야(山野)의 짐승이 주인의 은덕을 돌아보지 않고 끝내 숲 속으로 미친 듯이 달아나듯이 하기에 이르렀으니, 하늘을 우러러보고 땅을 굽어보아도 이 무슨 사람이겠습니까?"
하니, 비답하기를,
"경의 평소 국가에 지향한 마음을 내가 본시 알고 있었다. 내가 비록 경을 버릴 망정 경이 어찌 나를 저버릴 수 있겠는가? 내가 일찍이 경에게 학문에 힘쓰도록 권면하였으니, 일찍 그 기질(氣質)을 변화시켰다면, 어찌 이처럼 조급한 거조가 있었겠는가? 즉시 올라 오도록 하라."
하였다.

 

9월 2일 신해

대사간 오언주(吳彦胄)가 상소하기를,
"요사이 연석(筵席)에서 대신이 아뢰는 말이 자질구레한 데 관계되는 것이 많아서 사면(事面)을 손상시키고 있고, 내외(內外)의 관원을 잇따라 변통함에 이르러서는 자못 곡진하게 따르는 데 가깝습니다. 지금 전장(銓長)이 점차 탕평(蕩平)의 길을 넓히고 적체된 사람을 기용하고 있으나, 다만 발탁하여 주의하는 사이에 오활(迂闊)하고 편벽된 일이 많습니다. 대저 하늘이 인재를 낼 적에 어찌 일찍이 일일이 대대(對待)시켜 놓기를 마치 농부가 종자를 뿌리듯이 한 적이 있었습니까? 이는 곧 근일의 졸렬한 묵은 관습인데도 오히려 벗어나지 못하고 있으니, 신은 그윽이 이를 애석하게 여깁니다. 또 대저 박문수(朴文秀)는 보은(報恩)할 것을 자처(自處)하지 못하고, 도리어 길들일 수 없는 산야의 짐승으로 자처하였음은 또한 무슨 의리입니까? 조용히 고향으로 내려가는 것이 무슨 안될 일이 있어서 동가(動駕)가 임박하였는데 황망한 행동을 하였으니, 견책(譴責)을 결단코 그만둘 수 없습니다."
하니, 임금이 우악한 비답을 내렸다.

 

9월 4일 계축

진선 윤동원(尹東源)이 상소하여 사직하고 오지 않았는데, 임금이 우악한 비답을 내리고 윤허하지 않았다.

 

9월 5일 갑인

주강과 석강을 행하였다.

 

9월 6일 을묘

주강을 행하였다.

 

9월 9일 무오

필선 이광운(李光運)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신이 직숙하는 가운데 우연히 선정신 송준길(宋浚吉)의 문집을 읽어 보았더니, 동궁을 보양(輔養)하는 데 대해 올린 소장이 정녕하고 근간하였는데, 선정신 조광조(趙光祖)가 경연에서 진계한 것과 선정신 이언적(李彦迪)의 진수팔규(進修八規)를 등서하여 예람(睿覽)에 올렸습니다. 대저 송준길의 박학(博學)과 달식(達識)으로 어찌 달리 논설하여 보도(輔導)하는 데 보탬이 없었겠습니까마는, 바로 두 선정이 진달한 것이 제일의 의의가 있는 것으로 간주(看做)하였던 것이니, 이는 바로 오늘날의 사세와 서로 부합하는 바가 있었습니다. 조광조가 말하기를, ‘원자(元子)께서 내년 봄이면 5세가 됩니다. 보통 아이들의 상례로 본다면 겨우 말을 알아들을 시기인데, 기질(氣質)이 특이하시므로, 대신이 더러 나아가 뵙더라도 한갓 예경(禮敬)만 차리고 실질적인 교회(敎誨)를 다하지 못할까 두렵습니다.’라고 했습니다. 또 아뢰기를, ‘원자를 보양하는 것은 그 사체가 지극히 중요한 것이므로, 모름지기 재상 가운데 어진 덕이 있는 사람을 가려서 친근하게 모시며 훈자(薰炙)함으로써 덕성(德性)을 성취시키게 하고, 성상께서도 친히 군자와 소인의 진퇴에 관한 것, 길흉과 안위의 소장(消長)에 관한 것, 의리와 선악의 기미에 관한 것들을 가르치시되, 늘 반복해서 설명해 주신다면, 비록 다 이해 하지는 못하더라도 자연히 지혜와 함께 진보되어 유익한 바가 매우 클 것입니다.’라고 했습니다. 또 아뢰기를, ‘때로는 더러 뒷뜰에서 노닐면서 기(氣)를 양성하게 해야 합니다.’라고 했으니, 긴요한 뜻이 담긴 말이 아니겠습니까? 일찍 일어나고 늦게 자며 열심히 일해야 한다는 잠언(箴言)에 이르기를, ‘독서하는 여가에 간혹 유영(游泳)하기도 하고 정신을 발서(發舒)하기도 하고 정성(情性)을 휴양하기도 한다.’고 했으니, 선정이 아뢴 말도 또한 이런 뜻입니다. 이언적이 올린 진수팔규 또한 모두 선철왕(先哲王)들이 저위(儲位)를 교육하던 방법은 추연(推演)하여 옛 현신(賢臣)들이 진계(陳戒)한 말을 조목별로 열거하였는데, 그 말이 지극히 간곡하고 성의(誠意)가 넘치는 것이었으니, 오늘날 주자(胄子)를 교육하는 방법도 두 선정이 진달한 것보다 더 나을 것이 없습니다."
하니, 임금이 가납(嘉納)하였다.

 

9월 10일 기미

구일제(九日製)를 설행하여 수석을 차지한 진사 서지수(徐志修)에게 급제를 내리었다.

 

9월 11일 경신

이덕수(李德壽)를 대사헌으로, 윤지원(尹志遠)·주형리(朱炯离)를 장령으로, 박필기(朴弼琦)를 사간으로, 서명신(徐命臣)·송창명(宋昌明)을 지평으로, 신사건(申思建)을 정언으로, 이정보(李鼎輔)·송교명(宋敎明)을 부교리로, 이성효(李性孝)를 부수찬으로, 오명신(吳命新)을 대사성으로, 이익정(李益炡)을 황해도 관찰사로, 남태량(南泰良)을 부응교로, 홍창한(洪昌漢)을 부수찬으로, 권업(權𢢜)을 우참찬으로, 정필녕(鄭必寧)·이중경(李重庚)·이주진(李周鎭)을 승지로 삼았다.

 

임금이 친히 유생들에게 강(講)을 시험하여 생원 이제암(李齊嵒), 유학(幼學) 송덕중(宋德中), 진사 조세선(趙世選)에게 아울러 급제를 내렸다.

 

9월 12일 신유

주강을 행하였다.

 

9월 13일 임술

예조에서 탄일(誕日)이라 하여 하례(賀禮)를 올리기를 청하였으나, 윤허하지 아니하였다.

 

9월 16일 을축

윤득화(尹得和)를 대사간으로, 윤심형(尹心衡)을 사간으로, 최성대(崔成大)를 지평으로, 이명곤(李命坤)을 정언으로, 전운상(田雲祥)을 공홍도 수사로, 이희원(李禧遠)을 황해도 수사로 삼았다.

 

9월 17일 병인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고, 이어 소대를 행하였다.

 

이주진(李周鎭)을 전라도 관찰사로 삼았다.

 

9월 18일 정묘

박성로(朴聖輅)·한현모(韓顯謨)를 승지로 삼았다.

 

9월 19일 무진

임금이 소대를 행하였다. 우의정 송인명(宋寅明)이 입시하여 아뢰기를,
"호남은 새로 도백(道伯)을 상망(喪亡)하여 백성들의 일이 걱정스러우니, 마땅히 어사를 보내어 살피도록 해야 합니다."
하니, 임금이 드디어 남태량(南泰良)을 보내었다. 이때 이진순(李眞淳)이 안찰(按察)한 지 한 달도 못되어 졸(卒)하였기 때문이었다.

 

9월 20일 기사

달이 동정성(東井星)으로 들어갔다.

 

나주 목사(羅州牧使) 유정(柳綎)·진도 군수(珍島郡守) 김인서(金麟瑞)·함평 현감(咸平縣監) 박필재(朴弼載)·무안 현감(務安縣監) 심세우(沈世遇)·해남 현감(海南縣監) 김좌신(金佐臣) 등이 연명해서 상소하여 다섯 고을에 해마다 흉년이 든 실상을 갖춰 진달하고, 당년의 환모(還耗)를 감해 주기를 청하니, 비국에 품처하도록 명하였다.

 

9월 21일 경오

밤에 천둥하고 번개가 쳤다.

 

임금이 주강을 행하고, 또 소대를 행하여 전라 감사 이주진(李周鎭)을 인견하였다. 임금이 이르기를,
"호남에서 재해(災害)를 입었으나, 현재 주관하는 사람이 없어서 민정(民情)이 염려스러웠다. 만일 왕인(王人)이 내려오는 것을 알게 된다면, 거의 진안시킬 수 있을 것이므로, 방금 어사(御史)를 보내어 백성들로 하여금 조정의 덕의(德意)를 알게 하려고 했던 것이다. 경의 부임이 어사와 서로 앞서고 뒤서게 될 듯하니, 경은 재실(災實)의 분등(分等)에 대해 수령을 돌아다보지 말고 실상에 의거하여 계문하도록 하라."
하였다.

 

김상옥(金相玉)을 대사헌으로, 박필균(朴弼均)을 정언으로, 송징계(宋徵啓)를 응교로, 이덕중(李德重)을 교리로 삼았다.

 

9월 23일 임신

소대를 행하였다. 시독관 오수채(吳秀采)가 성학(聖學)을 닦고, 기강을 진작시키고, 허위를 제거해야 한다는 세 가지 조목을 들어 우러러 면계(免戒)하고, 이어 아뢰기를,
"고사(古事)에는 패초(牌招)하는 법이 없었는데, 우리 나라 조정에서는 계해년105)   이후로 사대부들이 패초해도 나가지 않는 것을 상례로 여기고 있으니, 이는 진실로 나라를 망칠 조짐입니다. 정고(呈告)하거나 병 때문에 사직하는 것에 이르러서는 진실로 하나의 폐습(弊習)입니다. 병을 말한 것을 보면 장차 그 당일에 죽을 것 같은데도 실제로는 그렇지 않으니, 이는 허위의 폐단이 아님이 없습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진달한 말은 옳다. 옛날에는 질실(質實)하고 순후(醇厚)한 풍습이 많았는데, 지금은 볼 수가 없으니, 이는 형식을 앞세움으로 말미암아 그렇게 된 것이다."
하였다.

 

9월 24일 계유

주강과 석강을 행하였다.

 

9월 27일 병자

우참찬 권업(權𢢜)이 졸(卒)하였다. 임금이 듣고서 애도하며 그의 순후함과 근신함을 칭찬하고, 관(官)에서 장사 일을 도와주도록 명하였다. 권업은 재간과 국량이 있어 세상에 쓰일 수 있었으나, 전야(田野)에 물러가 살며 도성 안에 발을 들여놓지 않은 지 10여 년이 되었으므로, 사람들이 그의 조수(操守)를 칭찬하였다. 임금도 이 때문에 중히 여겼는데, 다만 가산(家産)이 천금(千金)이나 되었지만, 자못 소민(小民)들과 이해를 다투었으므로, 식견 있는 사람들이 이를 흠으로 여겼다.

 

9월 28일 정축

신사건(申思建)을 지평으로, 이수해(李壽海)를 정언으로, 이석표(李錫杓)를 응교로, 서명신(徐命臣)을 부교리로, 김상중(金尙重)을 수찬으로, 유최기(兪最基)를 교리로 삼았다.

 

9월 30일 기묘

지평 최성대(崔成大)가 상소하기를,
"조정에 있는 여러 신하들이 겉으로는 미명(美名)을 칭탁하면서 속으로는 사욕(邪慾)을 다스리고, 빙의(憑依)하고 가차(假借)하면서 스스로 탕평(蕩平)하는 도리라고 여기고 있습니다. 그리고 경영하고 췌마(揣摩)하여 한결같이 자신의 호오(好惡)에 따르며 견제를 받아들이지 않는 자는 비록 재질이 있고 현명하다 하더라도 배척하여 멀리 하기에 겨를이 없고, 뜻을 굽히어 아부하는 자는 비록 우매하고 용렬한 사람이라 하더라도 급급하게 등용(登用)하니, 옛 당(黨)이 깨뜨려지지 않아서 하나의 당이 또 생겨나고 있습니다. 저 국사를 담당한 한두 신하들이 단지 자신을 속이고 남을 속일 뿐만 아니라, 간혹 전하를 속이기에 이르러서는 상전(上殿)했을 때나 하전(下殿)했을 때의 마음과 말이 부응하지 못하고, 면전에서 얼굴을 돌리고 있어 태도와 기색이 각기 다르니, 이와 같은데도 오히려 참다운 탕평을 바랄 수 있겠습니까? 박문수(朴文秀)는 마땅히 경솔하게 떠나지 않았어야 하는데 곧장 고향 길을 찾았고, 유척기(兪拓基)는 마침내 한 번 출사해야 할 것인데 앉아서 여러 차례 소명(召命)을 번거롭게 했으니, 또한 오늘날의 기강을 알 만합니다. 액례(掖隷)들이 의관(醫官)을 구타하여 모욕한 것은 진실로 놀라운 일인데, 도리어 언자(言者)를 지척(指斥)하였고, 시장을 기다리지 않고서 곧장 시호를 의정하도록 한 것이 세 신하에 이르렀습니다. 이미 법령에 실려 있지 않은데다가 또한 뒷날의 폐단과 관계되는 것이니, 청컨대 구장(舊章)을 거듭 밝혀 시장을 기다려 시호를 의정하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우악한 비답을 내렸다. 이때에 유척기가 호조 판서에 제배되었으나 여러 달 동안 나오지 않았는데, 대신의 말로 인하여 임금이 하교하여 책망하기를,
"고도(高蹈)하는 선비는 임금이 초빙하기를 기다려야 하는 것인가?"
하고, 특별히 무겁게 추고(推考)하고 패초하여 입시하도록 명하였는데, 유척기가 비로소 명을 받들었기 때문에 대관(臺官)이 상소에 이를 언급한 것이었다.

 

연성수(蓮城守) 이근(李槿)이 상소하기를,
"영릉(英陵)에 옛날에는 신도비(神道碑)가 있었는데, 천조(遷厝)하였을 때 묻어버리고 세우지 않았으니, 청컨대 찾아내어 옮겨 세우게 하소서."
하고, 또 말하기를,
"태조(太祖)·태종(太宗)·세종(世宗) 세 능에만 유독 신도비가 있었던 것은 창업(創業)한 공로가 대를 계승한 것과 다르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선조 대왕(宣祖大王)께서 중흥(中興)하신 공로는 창업과 다름이 없어서 민멸(泯滅)할 수 없으니 또한 마땅히 목릉(穆陵)에도 비를 세워야 합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진달한 말에 관해서는 마땅히 하교하겠다."
하였다. 이날 임금이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고 하교하기를,
"제왕가(帝王家)는 백성과 다른 것이다. 많은 공로와 성대한 업적이 사책에 실려 후세에 밝게 전해지지 않는 것이 없는데, 무엇 때문에 신도비를 세울 것인가?"
하고, 이어 여러 신하들에게 묻기를,
"영릉(英陵)의 신도비를 이미 새겼다가 다시 묻은 것은 무엇 때문이었는가?"
하자, 우의정 송인명(宋寅明)이 아뢰기를,
"영릉의 비문이 지장(誌狀) 가운데 기록되어 있는데, 곧 정인지(鄭麟趾)가 지은 것입니다. 옮겨 세우지 않은 까닭은 알지 못하겠습니다."
하니, 대신과 예관(禮官)을 보내어 비를 묻은 곳을 간심(看審)하도록 명하였다. 이날 임금이 이르기를,
"이에 관한 일이 혹 실록(實錄)에 기록되어 있는가? 여러 신하들 가운데 알고 있는 사람이 누구인가?"
하니, 주서 김시위(金始煒)가 아뢰기를,
"일찍이 《필원잡기(筆苑雜記)》를 보건대, ‘태조·태종·세종의 세 능에 모두 신도비가 있었고, 문종(文宗)의 현릉(顯陵)에 장차 신도비를 세우려 하였는데, 그 때의 조정 의논이 제왕(帝王)의 사적은 모두 국사(國史)에 기록되어 있으므로 사가(私家)처럼 비를 세울 것이 없다고 하여 마침내 파하였었으며, 그 이후부터 원릉(園陵)에 다시는 비를 세우지 않았다고 합니다. 영릉의 천조(遷厝)는 예종조(睿宗朝)에 이미 비를 폐지하기로 한 뒤에 있었기 때문에, 세웠던 신도비 또한 묻어 두고 옮겨 세우지 아니하였다.’고 합니다."
하였다.

 

우의정 송인명(宋寅明)이 아뢰기를,
"지난번에 외람되게 상언한 자들은 형벌을 가하여 정배(定配)하도록 특별히 하교하시었습니다. 대저 천하에는 옳지 않은 부모는 없는 법이므로, 비록 그 아비가 무상(無狀)할망정 그 아들이 신원(伸冤)하려고 하는 것은 인정상 그만둘 수 없는 일인 것입니다. 조가(朝家)에서 이미 4건(件)의 일을 허락해 놓고 또한 외람되다 하여 죄를 준다면, 어찌 실신(失信)하는 데로 돌아가지 않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옳게 여겨 상언한 사람을 정배하라는 일을 정지하도록 명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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