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영조실록47권, 영조 14년 1738년 10월

싸라리리 2025. 9. 22. 15: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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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1일 경진

우의정 송인명(宋寅明)이 최성대(崔成大)의 소장으로 인하여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오늘날 탕평책(蕩平策)을 공격하는 사람들은 반드시 말하기를, ‘진정한 탕평이어야 행해질 수 있다.’고 하고 있습니다마는, 진정하고 진정하지 못한 것을 막론하고 진실로 탕평이 행해질 수만 있다면, 이는 세도(世道)를 위해 다행한 일이므로 신은 감히 ‘사린 뇌사(四隣耒耜)’의 의의에 스스로 덧붙이고자 합니다. 그러나 신이 가장 먼저 탕평을 의논하였기 때문에, 신을 죄주고 싶으면 반드시 이를 빙자하여 배척하고 있습니다. 근래에 언관(言官)의 자리에 있는 자들이 함묵(含默)하지 않으면 탕평을 공격하고 있으니, 오직 이 두가지 길이 있을 뿐입니다. 상소 가운데 또한 ‘한두 사람의 일을 담당하고 있는 신하’라고 결론짓고 있는데, 비록 신의 이름을 들어 배척하지는 않았으나, 신이 이미 제일 먼저 탕평을 말하였고, 또 바야흐로 국정에 참여하고 있으니, 이는 심상하게 비난하여 논박한 데 견줄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도 오히려 숨긴 채 스스로 덮어 둘 수 있겠습니까?"
하고, 이조 판서 조현명(趙顯命)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탕평(蕩平)’ 두 글자는 피차(彼此)의 당인(黨人)들이 듣기 싫어한 지 오래입니다. 하물며 이제 원기가 쇠약해져서 업신여김받을 것만 있고 믿을 만한 것이 없어졌으니, 저 길고(桔槹)가 올라갔다 내려갔다 하듯이 시세에 편승하는 무리들이 이에 이르도록 짓밟는 것은 괴이하게 여길 것이 없습니다. 생각하건대, 신의 망형(亡兄)이 처음으로 탕평하는 일로 전하를 섬긴 그 경경(耿耿)한 혈심(血心)은 천지에 질정할 수 있는데, 헐뜯는 논의가 이제 다시 죽은 후에 잇따라 어지럽게 일어나고 있으니, 어찌 비통하지 않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모두 우악한 비답을 내려 위유(慰諭)하였다. 송인명이 또 차자를 올리기를,
"헌신(憲臣)의 소장에 또 한 당(黨)이 생긴다는 말이 나오자, 탕평에 대해 좋게 여기지 않는 자들이 서로 축하하기를, ‘탕평의 두뇌(頭腦)가 이미 깨뜨려졌다.’고 하였으며, 탕평을 위해 근심하는 사람들은 또 말하기를, ‘이것은 이미 시험해 보았으니, 장차 이를 계속할 것인가?’ 하고 있으니, 신이 어떻게 무릅쓰고 출사할 수 있겠습니까?"
하니, 답하기를,
"이미 지적하여 배척하지 않았으니, 너그럽게 생각해야 한다."
하였다.

 

10월 4일 계미

임금이 장차 을유일(乙酉日)에 동향 대제(冬享大祭)의 향(香)을 친히 전하고, 친향(親享) 때의 예대로 2일 동안 치재(致齋)하도록 명하였다.

 

10월 5일 갑신

소대를 행하였다. 《대학연의(大學衍義)》를 강하였는데, 임금이 이르기를,
"가의(賈誼)는 의지가 경예(輕銳)하고 재주가 소략(疎略)하여 동중서(董仲舒)가 삼대(三代)의 기상을 지닌 것만 못하다."
하자, 검토관 이성효(李性孝)가 아뢰기를,
"진실로 성상의 하교와 같습니다. 가의와 동중서는 말할 것도 없고, 오늘날의 세상에는 독서하는 사람이 전혀 없습니다. 그래서 혹 있다 하더라도 문득 이학(理學)을 한다고 말하고 있는데, 옛날에는 어찌 이학을 일컬은 적이 있었습니까?"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예악(禮樂)은 사람의 한 몸에 근본하는 것으로서, 종고(鍾鼓)와 옥백(玉帛)은 곧 그 의절(儀節)인 것이다. 세종조[英廟朝]에 해주(海州)에서 거서(秬黍)가 나고 남양(南陽)에서 경석(磬石)이 나와 성조(聖朝)의 명신(名臣)이 찬연하게 제작하였으므로, 우리 나라에 일찍이 음악이 없지 않았었다. 다만 지금은 성률(聲律)을 이해하는 사람이 없으므로, 곡조가 매우 번촉(煩促)해졌으니, 여민락(與民樂) 1장(章)만 하더라도 옛날에는 두 대궐에 오르내렸는데, 지금은 절반에도 미치지 못하고 있다. 예법으로 말하면 우리 나라에 《오례의(五禮儀)》가 있지만, 누가 잘 알아서 행할 수 있는 자가 있겠는가? 다만 통례원(通禮院)의 관리가 억견(臆見)으로 그때그때 변통해 가고 있으니, 어찌 한심한 일이 아니겠는가? 조정에 있는 선비들이 문호(門戶)를 분할하여 서로 다투며 다시는 서로 스승으로 본 받는 화기(和氣)가 없으므로, 예악을 아는 선비가 나오지 않는 것이다."
하였다. 이때에 임금이 날마다 경연을 열어 유신과 친근하게 토론하는 즈음에 성학(聖學)이 특출하여 조언을 바라는 뜻이 애연(藹然)했으나 경연에 있는 신하들이 이를 받들어 담당해 계발(啓發)해 갈 만한 사람이 없었으므로, 식견 있는 사람들이 한스럽게 여겼다.

 

10월 6일 을유

임금이 선정전(宣政殿)에 나아가 동향 대제(冬享大祭)의 향(香)을 친히 전하였다.

 

10월 7일 병술

이덕중(李德重)을 지평으로, 박춘보(朴春普)를 문학으로, 이덕수(李德壽)를 좌참찬으로 삼았다.

 

장령 윤지원(尹志遠)이 상소하여 연해(沿海)의 흉년이 든 참상(慘狀)을 진달하고 급재(給災)106)  하고 세금을 감면하여 백성들을 구제하기를 청하니, 비국으로 하여금 품처(稟處)하게 하였다.

 

10월 8일 정해

우의정 송인명(宋寅明) 등이 그전 영릉(英陵)의 신도비(神道碑) 묻은 곳을 간심(看審)하고 돌아와서 아뢰기를,
"신들이 헌릉(獻陵)의 서쪽 등성이 그전의 영릉 자리 곁에 나아가 땅을 3척쯤 파자, 과연 묻어 놓은 신도비를 찾게 되었는데, 글자가 모두 떨어져 나가 변별(變別)할 수 없었고, 유독 용두(龍頭)밑에 ‘세종영릉지비(世宗英陵之碑)’라는 전문(篆文) 여섯 글자만 있었습니다."
하니, 임금이 글자 획이 흐려져서 다시 세울 수 없다 하여 예관(禮官)을 보내어 그전 자리에 묻게 하였다.

 

임금이 주강을 행하였다. 강하기를 마치자, 지사 유척기(兪拓基)가 아뢰기를,
"신이 금오(金吾)의 직임에 있으므로 전 군수 김시발(金時發)의 살옥(殺獄)에 대한 검시장(檢屍狀)을 가져다가 고찰해 보았더니, 초검관(初檢官)과 복검관(復檢官)이 모두, ‘주먹으로 구타한 흔적이 이미 뚜렷하게 나타난 데가 없었지만 죽은 사람의 부모가 한 말에 의거하여 주먹으로 구타한 것으로 실인(實因)을 기록하였다.’고 하였고, 동추관(同推官)이 신보(申報)한 것에 비로소 ‘형장으로 정강이를 치고 돌로 입을 구타했다.’는 말이 있었으니, 아마도 이것을 가지고 성옥(成獄)할 수는 없을 듯합니다."
하니, 임금이 문안(文案)을 가져다가 들이도록 명하고, 대신에게 물었다. 우의정 송인명(宋寅明)이 아뢰기를,
"이보혁(李普赫)의 장계(狀啓)에, ‘김시발은 세력이 있는 사람이니, 살인하지 않았다면 잔약한 백성이 어떻게 감히 고발할 수 있었겠습니까?’라고 한 말은 곧 억측(臆測)한 것입니다. 살인에 대한 대벽(大辟)을 어찌 검시장을 믿지 않고서 성안(成案)할 수 있겠습니까?"
하자, 임금이 이르기를,
"다시 검시하게 하고자 한다."
하였는데, 송인명이 아뢰기를,
"이미 매장한 것을 다시 파내는 것은 곧 죽은 사람을 욕보이는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만일 강한 자를 억제하고 잔약한 사람을 붙들어 주는 뜻으로 그렇게 지나친 의심을 하였다면 도신(道臣)이 그른 것이고, 만일 두려워하고 꺼리어 간사하게 그처럼 몽롱(朦朧)하게 하였다면 검시관이 그른 것이다."
하고, 검시관인 이봉령(李鳳齡)과 전운상(田雲祥)은 나문(拿問)하고, 도신 이보혁은 파직하고, 김시발은 정배(定配)하도록 명하였다.

 

10월 9일 무자

주강을 행하였다. 《춘추(春秋)》를 진강하였는데, 부수찬 오수채(吳遂采)가 글뜻으로 인하여 아뢰기를,
"《춘추》에도 전살(專殺)을 비난하였습니다. 오늘날의 방백은 곧 옛적의 제후와 같은 것인데, 요사이 방백이나 수령들이 조가(朝家)의 호생지덕(好生之德)을 본 받지 않고 간혹 한때의 노여움으로 인해 지나치게 형장(刑杖)을 쓰다가 사람을 죽이는 경우가 많으니, 이는 전살과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요사이 방백들이 강맹(剛猛)하여 잘 다스린다는 이름을 얻은 사람들은 대부분 남형(濫刑)과 혹형(酷刑)을 많이 베풀고 있습니다. 사람의 생명은 지극히 중한 것인데, 어떻게 차마 이렇게 할 수 있겠습니까? 마땅히 엄중하게 신칙해야 합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진실로 옳은 말이다. 한 죄 없는 사람을 죽여서 천하를 차지한다 하더라도 맹자는 이를 그르게 여겼다. 임금도 오히려 이러한데 하물며 방백이겠는가? 목을 벤 자는 다시 목을 붙일 수 없고, 죽은 자는 다시 살릴 수 없는데, 관장(官長)들이 손에 익은 버릇으로 눈앞의 통쾌한 것만 취하고 사람의 목숨이 지극히 중하다는데 대해 생각하지 않으니, 왕자(王者)가 형벌을 신중하게 하는 뜻이 어찌 이와 같겠는가? 형장(刑杖)을 따로 만드는 데 이르러서는 크게 법에 벗어난 일이다. 신장(訊杖)의 크기는 본시 정해진 한도가 있는 것이니, 추조(秋曹)에서는 다시 교혈(校穴)107)  을 주조(鑄造)하여 팔도에 나누어 보내고, 무릇 남형을 하는 자는 어사(御史)는 듣는 대로 논계(論啓)하도록 하라."
하였다.

 

10월 10일 기축

김상익(金尙翼)을 승지로, 정우량(鄭羽良)을 이조 참의로, 이수항(李壽沆)을 대사헌으로, 남태량(南泰良)을 집의로, 조영국(趙榮國)을 부수찬으로, 윤용(尹容)을 대사간으로, 민정(閔珽)을 사간으로, 윤득징(尹得徵)을 장령으로, 김도(金䆃)·박춘보(朴春普)를 지평으로, 이광식(李光湜)을 헌납으로, 이명곤(李命坤)·박필균(朴弼均)을 정언으로 삼았다.

 

10월 11일 경인

지평 김도(金䆃)가 상소하여 살옥(殺獄)의 죄인 김시발(金時發)을 잘못 작처(酌處)하였음을 논하기를,
"인명(人命)을 박살한 자를 마치 가벼운 죄수처럼 보고 전석(前席)에서 영구(營救)하였으니, 어찌 기세를 크게 두려워하여 기강을 돌보지 않는단 말입니까? 만일 검시장(檢屍狀)이 몽롱하여 의심스럽다고 여겼다면, 어찌하여 시체를 파내어 다시 검시하는 것을 어렵게 여겨 구차하게 미봉할 수 있겠습니까? 무릇 살옥에 대한 법규는 의심스러워 밝히기 어려우면 혹 4,5차례 검시하기도 하고 혹은 한 해가 지나 다시 파내어 검시하는 것이니, 마땅히 도신으로 하여금 다시 더 엄중하게 핵실(覈實)하도록 해야 합니다. 또 살옥의 죄인은 남쪽 칸에 가두는 법인데, 김시발은 서쪽 칸에 두어 마치 작은 과실이 있는 듯이 했으니, 금오 당상과 낭관에게도 마땅히 처벌이 있어야 합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처분하였을 때 법을 가볍게 여긴 것이 아니고, 대개 양찰해서 조처한 것이다. 서쪽 칸에 둔 것은 살피지 않은 데 관계되니, 당상은 엄중하게 추고하고 낭관을 태거(汰去)하도록 하겠다."
하였다.

 

10월 14일 계사

공조 판서 박사수(朴師洙)가 상소하여, 북한(北漢)의 창해(倉廨)와 사찰(寺刹)은 마땅히 중수(重修)해야 하고, 올해의 경기(京畿) 고을에 이전할 쌀을 각 고을에서 받아두면 장사(將士)들에게 지방(支放)할 것을 장차 의뢰할 바가 없음을 논하고, 다섯 가지 편의(便宜)한 사항을 조목별로 진달하니, 임금이 비국으로 하여금 품처(稟處)하게 하였다.

 

10월 15일 갑오

임금이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고, 1년 동안 경비로 쓸 공미(貢米)가 얼마나 되는지 물었는데, 우의정 송인명(宋寅明)이 아뢰기를,
"쌀이 14만 석(石)입니다. 면포(綿布)는 수량이 이보다 더한데, 합쳐서 24,5만 석이 됩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옛날에 유사(有司)의 신하들이 전곡(錢穀)의 수효를 아뢰지 않았던 것은 혹시 임금이 재용(財用)이 넉넉한 것을 알게 되면 도리어 예대(豫大)하는 일이 있을까 두려워해서인데,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한 문제(漢文帝) 때 저축이 쌓여 넘치면 가끔 천하의 조세(租稅)를 죄다 견감하는 일이 있었으니, 이것이 어찌 아름다운 일이 아니겠는가? 선혜청(宣惠廳)에서 아뢰는 월말(月末)의 문서는 항시 이런 뜻이 있는데, 근일의 저축은 진실로 한심하다."
하였다.

 

사헌부 【대사헌 이수항(李壽沆)이다.】 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또 계청 하기를,
"김시발(金時發)을 멀리 정배하도록 하신 명을 도로 정지하시고, 도신으로 하여금 다시 사험(査驗)하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어찌 김도(金䆃)와 다르게 하지 않는가? 단지 본사(本事)만 논할 것이지, 어찌 반드시 피차(彼此)를 논할 것이 있느냐? 다시 조사하기를 청한 것은 마땅히 있어야 할 일이니, 아뢴 대로 하겠다."
하였다. 또 아뢰기를,
"동지 정사(冬至正使) 이덕수(李德壽)는 문학과 지조(志操)에 있어서 비록 당세(當世)에 제일 가지만, 다른 나라에 가서 전대(專對)하는 일은 아마도 그 적임(適任)이 아닐 듯합니다. 만약 뜻밖에 수작(酬酌)할 일이 있을 경우 이는 진실로 염려스러우니, 마땅히 체개(遞改)해야 합니다."
하였다. 대개 이덕수는 귀가 어둡기 때문이었는데, 임금이 이르기를,
"한어(漢語)에 대해서는 사람마다 모두 귀머거리인데, 어찌 이를 병폐로 여길 것이 있겠는가마는, 이미 대관(臺官)의 말이 나왔으므로 반드시 가지 않으려고 할 것이니, 아뢴 대로 하라."
하였다.

 

10월 17일 병신

달이 동정성(東井星)을 범했다.

 

홍현보(洪鉉輔)를 이조 참판으로, 오명신(吳命新)을 이조 참의로, 박문수(朴文秀)를 동지 정사로, 윤휘정(尹彙貞)을 승지로, 정우량(鄭羽良)을 대사성으로, 채응복(蔡膺福)을 장령으로, 이수해(李壽海)·홍정보(洪正輔)를 정언으로, 조영국(趙榮國)을 부응교로, 김상중(金尙重)·이성효(李性孝)를 부수찬으로 삼았다. 사인(士人) 한중조(韓重朝)에게 통정 대부(通政大夫)를 가자(加資)하였는데, 가르친 문도(門徒) 가운데 등제(登第)한 자가 3인이고 생원과 진사가 18인이나 되기 때문이었다.

 

임금이 소대를 행하였다. 임금이 이르기를,
"방금 호남 어사가 두 고을 수령을 파직한 장계(狀啓)를 보았다. 안경운(安慶運)은 청렴하다는 소문이 없었으니 백성을 잘 돌보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신명좌(申命佐)는 유리(流離)하는 민생들을 돌보지 않은 채 말하기를, ‘겨울을 당해 걸식(乞食)하는 자는 봄이 되면 스스로 돌아올 것이다.’라고 하였다 하니, 어찌 차마 이런 말을 할 수 있겠는가? 아울러 나처(拿處)하도록 하라."
하였다.

 

10월 19일 무술

임금이 주강과 석강을 행하였다.

 

10월 20일 기해

조현명(趙顯命)을 판의금부사로, 권현(權賢)을 사서로 삼았다.

 

《무비지(武備志)》 50권을 평안 병영(平安兵營)에서 간행하도록 명하였는데, 지난해 사행(使行) 때 구득해 온 것이었다.

 

10월 21일 경자

달이 헌원 좌각성(軒轅左角星)을 범했다.

 

10월 22일 신축

임금이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우의정 송인명(宋寅明)이 아뢰기를,
"호남 방백이 조목별로 열 가지 일을 진달하였는데, 재해(災害)를 입은 고을에서 작미(作米)하는 일과 연해 고을에 저장해 놓은 쌀을 회록(會錄)하는 일은 윤허하심이 옳고, 경리청(經理廳)의 쌀과 경진청(京賑廳)의 베[布]와 대동미(大同米)를 신해년108)  의 예대로 진제(賑濟)하는 물자(物資)에 보충하는 일은 윤허할 수 없는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옳게 여겼다. 이어 송인명이 백관의 요록(料祿)을 적당하게 요량하여 감하기를 청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충신(忠信)하게 대하고 녹을 후하게 준다.’고 한 것은 구경(九經)에 실려 있는 말이다. 우리 나라의 반록(頒祿)은 본래 넉넉하지 못한데, 또 어떻게 감할 수 있겠는가?"
하고, 윤허하지 않았다.

 

이때 소덕문(昭德門)을 세우는 역사가 준공되자, 그 편호(扁號)를 고치도록 명하였는데, 승지 윤휘정(尹彙貞)이 아뢰기를,
"지난번에 양정합(養正閤)·극수재(克綏齋)라고 옥당(玉堂)에서 편호를 정하여 망(望)을 갖추었습니다마는, 성문은 비교적 중대한 것이므로 마땅히 주문(主文)의 신하로 하여금 찬정(撰定)하게 해야 합니다."
하니, 임금이 옳게 여겼다. 【뒤에 소의(昭義)라고 고쳤다.】


【태백산사고본】 35책 47권 45장 A면【국편영인본】 42책 606면
【분류】군사-관방(關防)

 

10월 23일 임인

달이 태미 서원(太微西垣)으로 들어갔다.

 

10월 24일 계묘

어떤 별이 귀성(鬼星) 아래로 흘러갔다.

 

유엄(柳儼)을 대사헌으로, 홍봉조(洪鳳祚)를 헌납으로, 윤심형(尹心衡)을 겸 보덕으로, 정수송(鄭壽松)을 공홍 수사로 삼았다.

 

10월 25일 갑진

조최수(趙最壽)를 발탁(拔擢)하여 자헌 대부(資憲大夫)로 올려 동지 정사로, 정익하(鄭益河)를 교리로, 윤동원(尹東源)을 진선으로 삼았다.

 

10월 27일 병오

한림(翰林)의 천거를 행하여 정휘량(鄭翬良)·홍상한(洪象漢)을 뽑았다. 별겸춘추(別兼春秋) 정익하(鄭益河)가 천거한 것이었다. 정휘량을 검열로 삼았다.

 

10월 28일 정미

주강과 석강을 행하였다.

 

10월 29일 무신

임금이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우의정 송인명(宋寅明)이 공인(貢人)과 시인(市人)들이 지탱하기 어려운 폐단을 말하고, 공인의 질고(疾苦)는 선혜청 당상을 책망하고, 시인의 질고는 평시서 제조(平市署提調)를 책망하기를 청하였다. 이조 판서 조현명(趙顯命)이 아뢰기를,
"각각 주관하는 사람이 있고 대간(臺諫)이 있으며, 관장하는 해당 관원이 있습니다. 신이 비록 선혜청 당상의 자리에 있지만, 어떻게 소민(小民)들의 질고를 알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신이 공인들의 일에 대해 대략 들은 바가 있습니다. 지나간 해에 효장 세자(孝章世子)를 책봉(冊封)한 뒤 기인(其人) 【기인은 곧 횃불을 공상하는 자들이다.】 의 공물(貢物)을 더 정했었는데, 무신년109)  에 이르러 도로 혁파한 뒤 공인의 무리가 사사롭게 서로 다투며 송사하자, 한 종신(宗臣)이 자기의 물건이라고 칭탁하며 공공연하게 억지로 징수하였었습니다. 공인들이 이 때문에 원통함을 호소하였으니, 이목지관(耳目之官)은 논열(論列)했어야 옳았습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지난날 도헌(都憲)이 귀가 어두워 전대(專對)할 경우 방해된다고 논하여 정사를 체직하였었다. 그런데 유독 이 일은 연곡(輦轂)에서 지극히 가까운 자리에 있으면서 이처럼 잘 듣지 못하고 있었으니, 먼 곳의 일은 잘 살피면서 가까운 곳의 일에 대해서는 소홀하였다고 할 수 있겠다."
하고, 이수항(李壽沆)을 파직하도록 명하였다. 조현명이 또 아뢰기를,
"무신년에 역적(逆賊) 민원해(閔元楷)와 임서호(任瑞虎)가 형장(刑杖)을 참다가 경폐(徑斃)하였으므로, 대신(臺臣) 이중경(李重庚)이 맨 먼저 노적(孥籍)하자는 계사(啓辭)를 발론하니, 문안(文案)을 고찰하여 품처하도록 명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당시 판의금부사였던 서명균(徐命均)이 의심할 만한 실정이 없었다고 진달하니, 대신에게 물어서 처분하라는 하교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10년 동안 아직 거행하지 않고 있으니, 일이 매우 괴이하게 여길 만합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이는 수종(隨從)한 것에 지나지 않으니, 전후의 의금부 당상을 모두 엄중하게 추고(推考)하도록 하라."
하였다. 사헌부 【장령 윤득징(尹得徵)이다.】 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임서호(任瑞虎)는 역절(逆節)이 낭자했었는데, 아직까지 감단(勘斷)하여 처벌하지 않았으니, 해당 당상을 엄중하게 추고하고, 빨리 율대로 처단하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해당 당상은 이미 엄중하게 추고하도록 명했다."
하고, 윤허하지 않았다. 임금이 이르기를,
"한 사람을 빼놓은 것은 무슨 까닭인가?"
하자, 송인명이 아뢰기를,
"오직 대관(臺官)의 소위는 시킬 수가 없습니다."
하였다. 윤득징이 들은 것이 소루하다 하여 인피(引避)하니, 예사 비답을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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