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영조실록47권, 영조 14년 1738년 11월

싸라리리 2025. 9. 22. 15: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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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1일 기유

어떤 별이 실성(失星) 아래로 흘러갔다.

 

지평 박춘보(朴春普)가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전하께서는 간언(諫言)을 구하시는 뜻이 없지 않으나, 마침내 간언을 용납하는 실속이 부족하시니, 전후에 일을 말한 신하로서 뜻에 거슬리어 견책(譴責)받은 사람들이 항배상망(項背相望)하고 있습니다. 지난 가을 이후로 처분이 합당하지 못하고 위노(威怒)가 화평함을 잃어서 더욱 극도로 예사롭지 않았으니, 한 번 처치한 것이 성심(聖心)에는 맞지 않는다 하여 도거(刀鋸)와 정확(鼎鑊)의 형벌에 의율(擬律)하려는 데 이르렀으므로, 온 조정에서 서로 경계하여 말하기를 기휘(忌諱)하고, 대각(臺閣)에 들어가는 것을 마치 사지(死地)처럼 여겨 머뭇거리다가 퇴각(退却)하고는 함묵(緘默)하면서 구차하게 용신하고 있습니다. 간혹 한두 가지 논핵(論劾)하는 일이 있어도 성상께서는 채용하지 않으시며, 사람들은 두려워하여 꺼려함이 없이 공경과 재상의 지위에 있는 사람들은 잠깐 피혐(避嫌)했다가 도로 나오고, 번곤(藩閫)의 직임에 있는 사람들은 처음에는 사양하다가 마침내 부임하곤 합니다. 이로 말미암아 염치가 점점 없어지고 명절(名節)이 모두 휴손되어 권문(權門)과 요로(要路)들이 한갓 권세와 이익만 추구할 줄 알고 구차하게 녹을 먹으며 자리만 채우고 있는 사람들이 직무에 태만함을 허물로 여기지 않고 있습니다. 겉으로는 탕평(蕩平)이란 이름을 가탁하고 속으로는 조급하게 권세를 다투다가 영현(榮顯)이 앞에 닥치면 문득 평소의 지조를 잃어버린 채 비웃음과 욕설이 잇따라 이르러도 태연하게 여기며 부끄러워할 줄을 모릅니다. 아! 명장(名場)에의 진퇴는 염치에 관계되는 것인데, 김유경(金有慶)은 물러가기를 구하다가 도로 와서 영화를 매개(媒介)해 놓고는 도로 돌아가는 등 출처가 의거함이 없었으니, 정직함과 탐독함이 판명되었습니다. 명관(名官)은 본래 거취(去就)를 경솔하게 할 수 없는 것인데, 정익하(鄭益河)는 다른 사람들이 하는 말을 돌아보지 않은 채 혐오(嫌惡)를 무릅쓰고 앞장서서 혼자 추천(推薦)을 담당하였으니, 구차함이 극도에 달했습니다. 진신(搢紳)들 사이에 비웃음과 손가락질이 그치지 않는데도 한 사람도 규경(規警)하는 자가 없었으니, 대관(臺官)의 기풍이 적막함이 한결같이 이에 이르렀습니다. 그러니 다시 어떻게 전하의 위노(威怒)를 범하면서 미치지 못하는 일을 바로잡기를 바랄 수 있겠습니까? 지금 말할 만한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지만, 언로(言路)가 막혀 있지 않음이 없는데, 이는 초래한 까닭이 있습니다. 관방(官方)을 삼가지 않는 것이 근래에 더욱 심해지고 있습니다. 도헌(都憲)의 직임은 지망(地望)이 자별한 것인데, 이수항(李壽沆)은 명론(名論)이 본시 가벼운 사람이므로 물정(物情)이 모두 해괴하게 여기고 있습니다. 번얼(藩臬)의 직임은 그 책임이 매우 무거운 것인데, 이익정(裡益炡)은 자급과 경력이 오히려 낮아서 공론이 모두 그르게 여기고 있습니다. 신은 그때의 전관(銓官)에게 경책(警責)이 없을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하였는데, 상소를 주달했으나, 답하지 아니하였다.
사신은 말한다. 대간(臺諫)이 말을 하지 않은 지 오래 되었는데, 박춘보는 진실로 봉명조양(鳳鳴朝陽)110)  이라고 할 만하다. 이보다 앞서 김유경(金有慶)은 호서(湖西)에 물러가 있으면서 전후의 제명(除命)에 대해 의리가 펴지지 않는다 하여 끝내 부소(赴召)하지 않았었는데, 이에 이르러 올라와서 휴퇴(休退)하게 해주기를 원하다가 인하여 지신사를 제수하는 명을 받았다. 이때에 이광좌(李光佐)가 일 때문에 면관(免冠)하고 대명(待命)하고 있었는데, 김유경이 임금의 명을 받들자 손수 관을 씌워 주었으며, 곧 빈사(儐使)로 승자(陞資)되어 고향으로 돌아갔으니, 이는 진실로 이광좌가 천거하여 발탁(拔擢)한 것이었다. 박춘보의 소장에 이른바, ‘물러가기를 구하다가 도로 와서 영화를 매개해 놓고는 도로 돌아갔으니, 정직함과 탐독함이 판명되었다’고 한 것은 대개 이를 가리켜 말한 것이었다.


【태백산사고본】 35책 47권 46장 A면【국편영인본】 42책 606면
【분류】정론-정론(政論) / 정론-간쟁(諫諍) / 역사-사학(史學) / 왕실-국왕(國王) / 사법(司法) / 인사(人事)


[註 110] 봉명조양(鳳鳴朝陽) : 직간(直諫)의 명성을 일컫는 말. 당(唐)의 이선감(李善感)이 다른 사람들이 하지 못하는 말을 직간하여, "아침 볕[朝陽]에 봉이 울었다."는 칭찬을 들었음.
사신은 말한다. 대간(臺諫)이 말을 하지 않은 지 오래 되었는데, 박춘보는 진실로 봉명조양(鳳鳴朝陽)110)  이라고 할 만하다. 이보다 앞서 김유경(金有慶)은 호서(湖西)에 물러가 있으면서 전후의 제명(除命)에 대해 의리가 펴지지 않는다 하여 끝내 부소(赴召)하지 않았었는데, 이에 이르러 올라와서 휴퇴(休退)하게 해주기를 원하다가 인하여 지신사를 제수하는 명을 받았다. 이때에 이광좌(李光佐)가 일 때문에 면관(免冠)하고 대명(待命)하고 있었는데, 김유경이 임금의 명을 받들자 손수 관을 씌워 주었으며, 곧 빈사(儐使)로 승자(陞資)되어 고향으로 돌아갔으니, 이는 진실로 이광좌가 천거하여 발탁(拔擢)한 것이었다. 박춘보의 소장에 이른바, ‘물러가기를 구하다가 도로 와서 영화를 매개해 놓고는 도로 돌아갔으니, 정직함과 탐독함이 판명되었다’고 한 것은 대개 이를 가리켜 말한 것이었다.

 

11월 2일 경술

정우량(鄭羽良)을 대간으로, 한현모(韓顯謨)를 대사성으로, 권현(權賢)을 장령으로, 정광제(鄭匡濟)를 헌납으로, 송징계(宋徵啓)를 보덕으로, 정익하(鄭益河)를 지평으로, 남태온(南泰溫)을 승지로, 정우량(鄭羽良)을 승문원 부제조로 삼았다.

 

11월 3일 신해

임금이 선정전(宣政殿)에 나아가 상참(常參)을 행하였다. 이때에 육경(六卿) 가운데 한 사람도 입참(入參)한 자가 없었고, 조신(朝臣)들은 또 질병이 전염된다는 등의 일로 태반이 입조하지 않았다. 그리고 삼사(三司)의 신하들은 늦게야 비로소 대궐에 나와 전좌(殿座)할 때의 시각을 조금 늦추었으므로, 듣는 사람들이 한심하게 여겼다.

 

주강과 석강을 행하였다.

 

11월 5일 계축

심성희(沈聖希)를 대사간으로, 정우량(鄭羽良)을 이조 참의로, 박필기(朴弼琦)를 사간으로, 신사건(申思建)을 지평으로, 이종성(李宗城)을 부제학으로, 홍창한(洪昌漢)을 교리로 삼았다.

 

임금이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우의정 송인명(宋寅明)이 아뢰기를,
"사행(使行)은 곧 왕역(往役)인데, 박문수(朴文秀)가 마침내 명을 받들지 않으니, 마땅히 삭직(削職)해야 합니다."
하니, 그대로 따랐는데, 부수찬 김상중(金尙重)이 아뢰기를,
"사명(使命)을 막 내리었고 기일이 박두하지도 않았는데, 갑자기 변통하는 의논을 내놓았으니, 이는 신하로 하여금 성실하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다시 박문수를 나처(拿處)하도록 명하고, 삭직(削職)하도록 한 분부는 도로 거두었다.

 

사헌부 【장령 권현(權賢)이다.】 에서 전계를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공물(貢物)을 억지로 빼앗은 종신(宗臣)을 파직하고 서용하지 마소서."
하니, 아뢴 대로 하게 하였다.

 

판의금부사 조현명(趙顯命)이 아뢰기를,
"지난번에 김시발(金時發)을 서쪽 칸에 가둔 일로 인해 대신(臺臣)이 비난하여 배척했는데, 본부(本府)에는 원래 일정한 규정이 없으니, 마땅히 이로 인해 품재(稟裁)하여 조신(朝紳) 가운데 살옥(殺獄)에 걸려 아직 형추(刑推)받지 않은 자는 서쪽 칸에 두고, 이미 완결하여 장차 형을 가할 자는 남쪽 칸에 두는 것으로 격식을 정하도록 하소서."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11월 7일 을묘

홍봉조(洪鳳祚)를 헌납으로, 여광헌(呂光憲)을 장령으로, 박사정(朴師正)을 동지 경연사로, 정익하(鄭益河)를 부교리로 삼았다.

 

야대를 행하였다.

 

제도(諸道)에 하교하여 백성을 돌보는 정사를 강구하도록 하였다.

 

11월 8일 병진

사간 박필기(朴弼琦)가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좌참찬 이덕수(李德壽)를 전하께서는 어떠한 신하로 대우하시는 것입니까? 귀가 어두운 사람이 높고 현달한 지위에 이르게 된 경우는 옛날부터 들어보기 드문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유독 이 사람이 두루 화려하고 현달한 벼슬을 역임한 것은 어찌 그의 문장이 화섬(華贍)하고 그의 자질이 충박(忠朴)하다 하여, ‘귀가 어두운 사람을 임용한들 무슨 해로울 것이 있겠느냐?’는 뜻이 아니겠습니까? 종전의 부사(副使)가 오늘날 정사(正使)가 되었는데 무슨 어렵고 쉬운 차이가 있으며, 또한 출발에 임하여 논박하여 체직하게 하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그가 극력 사양할 때를 당해서는 한결같이 돈면(敦勉)하시다가, 나와서 숙배(肅拜)하고 장차 발정(發程)하려는 때에 한번의 논계로 체직을 윤허하셨으니, 성상께서 중신을 대우하시는 도리는 성신(誠信)이 부족하신 듯합니다. 또한 특별히 도헌(都憲)을 파직하도록 하신 성교는 곧 그가 남의 귀가 어두운 것을 논계(論啓)한 때문이었는데, 자기가 도리어 귀가 어두운 것을 죄로 삼으셨으니, 성심에 혹 전계를 옳지 않게 여기셔서 그 이후의 일에 대해 죄를 돌리신 것이 아니겠습니까? 만일 이와 같다면 혹 천노(遷怒)에 가까운 듯합니다."
하였는데, 소장을 들였으나, 답하지 아니하였다.

 

부교리 정익하(鄭益河)가 상소하여 박춘보(朴春普)의 소장에 대변(對辨)하기를,
"신이 세 차례나 혈간(血懇)을 진달했지만 면하지 못하였고 일곱 차례나 냉오(冷圄)에 들어갔지만 면하지 못하였습니다. 그런데도 오히려 거취(去就)가 경솔하여 앞장서서 혼자 담당했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정휘량(鄭翬良)의 총명과 재화(才華), 홍상한(洪象漢)의 문한(文翰)과 기국(器局)에 대해서는 모든 사람의 의논이 똑같았는데, 박춘보는 또한 무슨 마음으로 기필코 저지해 방해하려는 것입니까?"
하니, 임금이 예사 비답을 내렸다.

 

황해 감사 이익정(李益炡)이 대관(臺官)의 말 때문에 진소하여 사직하였으나, 윤허하지 아니하였다.

 

11월 10일 무오

김상적(金尙迪)을 지평으로, 이성효(李性孝)를 교리로, 송교명(宋敎明)을 부교리로, 서명신(徐命臣)을 부수찬으로, 이종백(李宗白)을 광주 부윤으로 삼았다.

 

11월 14일 임술

임금이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이때 지평 이정욱(李挺郁)이 상소하여 세 가지 일을 진달하였으니, 첫째는 세자(世子)의 보익(輔翼)에 관한 것이고, 둘째는 문정공(文正公) 김상헌(金尙憲)의 서원 건립을 청한 것이고, 셋째는 고 충신(忠臣) 정온(鄭蘊)의 후사(後嗣)를 세우기를 청한 것이었는데, 임금이 우악한 비답을 내리고 이어 우의정 송인명(宋寅明)에게 묻기를,
"정희량(鄭希亮)이 복법(伏法)된 뒤 혹시 다른 자손이 있는가?"
하였는데, 송인명이 아뢰기를,
"신이 비록 어느 누가 있는지 알지는 못하나 어찌 자손이 흉역(凶逆)하였다 하여 갑자기 어진 조상의 향화(香火)를 폐하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옳게 여겼다. 송인명이 아뢰기를,
"무신년111)  에 장폐(杖斃)한 죄인 조문보(趙文普)는 곧 선정신 조광조(趙光祖)의 봉사손(奉祀孫)입니다. 문묘(文廟)에 종사(從祀)한 선현(先賢)의 제사가 끊어지는 것은 합당치 않으니, 마땅히 그 후사를 세워야 합니다."
하고, 또 아뢰기를,
"고 충신 임경업(林慶業)과 기사년112)  에 항소(抗疏)한 사람 연최적(延最績)도 똑같이 그 후손을 녹용(錄用)함이 마땅합니다."
하니, 임금이 모두 그대로 따랐다. 송인명이 또 선정신 이황(李滉)의 후손 이세진(李世震)도 녹용하기를 청하니, 그대로 따랐다. 이때 박문수(朴文秀)가 잡혀왔는데 석방하도록 명하였으니, 갑진년113)  의 사초(史草)를 정리하여 바치도록 했었으나 박문수가 아직 한림(翰林) 당시의 사초를 정리하지 않았기 때문에, 송인명이 아뢴 것이었다.

 

11월 15일 계해

달이 동정성(東井星)으로 들어갔다.

 

11월 16일 갑자

오원(吳瑗)을 승지로, 서종옥(徐宗玉)을 대사헌으로, 송창명(宋昌明)을 지평으로, 이정보(李鼎輔)를 겸 문학으로 삼았다.

 

11월 17일 을축

임금이 대신과 비국 당상 및 호남 어사        남태량(南泰良)을 인견하였다. 남태량이 전 부안 현감(扶安縣監)        안복준(安復駿)이 탐오(貪汚)하고 불법(不法)하여 속공(屬公)한 징[錚鉦]을 가져다 부수어 편철(片鐵)을 만들어 사사롭게 소득으로 했음을 논핵(論劾)하니, 임금이 놀라서 잡아다가 죄를 묻도록 명하였다. 남태량이 이어 말하기를,
"전 어사 원경하(元景夏)가 속공(屬公)한 징·북 및 기치(旗幟)는 마땅히 백성들에게 돌려주어야 합니다."
하였는데, 임금이 묻기를,
"농사짓는 사람들이 징을 어디에 쓰는가?"
하자, 우의정        송인명(宋寅明)이 아뢰기를,
"밭이나 논에서 일을 하다가 피로해져 더러 게을리하며 힘써 일하지 않는 자가 있으면, 금고(金鼓)를 두드려 기운을 북돋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민간에서 무기를 감추어 두어 뜻밖의 근심이 있을까 두려워한 때문입니다. 이제 이미 속공하였는데, 돌려주는 것 또한 전도(顚倒)된 일이니, 마땅히 값을 정하여 진제(賑濟)하는 물자(物資)에 보충하거나 아니면 돈을 주조하는 데 쓰게 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그렇지 않다. 진실로 도적이 된다면 호미를 창으로 삼아 모두 팔뚝을 걷어붙이고 일어날 수 있을 것이다. 진승(陳勝)과 오광(吳廣)114)                  이 어찌 일찍이 무기가 있었던가? 당당한 국가에서 어찌 민간의 물건을 자료로 하여 주전(鑄錢)에 보충할 것인가?"
하였다. 남태량이 또 아뢰기를,
"전주 판관 윤호(尹浩)는 구임(久任)하여 솜씨가 간사하고 교활해졌고, 남원 부사        권감(權瑊)은 형장(刑杖)을 과감하게 썼으니, 마땅히 파출(罷黜)하여 나문(拿問)해야 합니다."
하니, 그대로 따랐다.

 

사헌부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아니하였다.

 

11월 19일 정묘

유엄(柳儼)을 도승지로, 김유경(金有慶)을 공조 판서로 삼았다.

 

11월 23일 신미

이성룡(李聖龍)을 도승지로, 이중경(李重庚)을 승지로, 민정(閔珽)을 집의로, 이도겸(李道謙)을 사간으로, 김정윤(金廷潤)을 장령으로, 김상구(金尙耉)를 지평으로, 오수채(吳遂采)를 헌납으로, 이덕중(李德重)을 부교리로, 홍계유(洪啓裕)를 부수찬으로, 김시형(金始炯)을 좌참찬으로 삼았다.

 

11월 24일 임신

사헌부 【지평 김상구(金尙耉)이다.】 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궁성에 괘서(掛書)한 변고는 지금까지도 범인을 잡지 못하고 있으니, 청컨대 두 포도청(捕盜廳)의 포도 대장을 모두 파직하게 하소서."
하고, 또 아뢰기를,
"천한 창녀(娼女)가 교자(轎子)를 탄 것을 헌신(憲臣)이 나가서 금지하다가 중간에 뇌물을 받고 바로 놓아주었으니, 청컨대 해당 헌신을 파직하게 하소서."
하고, 또 아뢰기를,
"호우(湖右)한 도에서는 관장(官長)을 아랑곳하지 않고 도신을 능멸하여 대면하여 후욕(詬辱)했으니, 호서(湖西)의 사인(士人)으로 도신을 능욕한 자를 본도로 하여금 먼 지방에 정배하게 하소서."
하고, 또 아뢰기를,
"안렴(按廉)하는 체례(體例)는 마땅히 법금(法禁)에 주력해야 하는 것인데, 수령들의 범법하여 도살(屠殺)한 데 대해 스스로 먼저 축소하기도 하고 과대하기도 했으니, 호남 어사 남태량(南泰良)을 추고(推考)하게 하소서."
하고, 또 아뢰기를,
"일전에 헌장(憲長)이 동래부에서 금법(禁法)을 범하였다 하여 그때의 변신(邊臣)을 삭직(削職)할 것을 청하자, 성상께서 비국으로 하여금 품처(稟處)하도록 하겠다고 비답하셨습니다. 변방의 금법은 지극히 엄격하고 대관(臺官)의 논계(論啓)는 마땅히 따라야 하는 것이니, 청컨대, 전 동래 부사 구택규(具宅奎)를 삭직하게 하소서."
하고, 또 아뢰기를,
"살옥(殺獄)에 대해 검험(檢驗)할 때 부관(部官)이 조종한 것이 많았으니, 해부의 참봉 유채(柳綵)를 태거(汰去)하게 하소서."
하고, 또 아뢰기를,
"대관(臺官)은 욕할 수가 없는 법이니, 총재(冢宰)가 마땅히 자중(自重)했어야 할 것인데, 공좌(公坐)에서 능멸하는 말을 하여 사람들의 전하는 말이 많았습니다. 소장(疏章) 가운데 ‘길고(桔槹)’라는 말도 입밖에 낸 말은 주워담을 수 없는 것이니, 청컨대 이조 판서 조현명(趙顯命)을 추고(推考)하게 하소서."
하고, 또 아뢰기를,
"평사(評事)를 차견(差遣)하는 데 대해 지명(指名)하여 두루 진달한 것은 대체(大體)를 손상함이 있으니, 청컨대, 병조 판서 조상경(趙尙絅)를 추고하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포도 대장을 먼저 종중 추고(從重推考)하고, 나머지는 모두 아뢴 대로 하라."
하였다.

 

11월 26일 갑술

조영국(趙榮國)을 집의로, 이광운(李光運)을 사간으로, 송질(宋瓆)을 헌납으로, 민계(閔堦)를 정언으로, 박필균(朴弼均)을 수찬으로, 이춘제(李春躋)를 병조 참판으로 삼았다.

 

11월 28일 병자

임금이 희정당(熙政堂)에 나아가 초복(初復)을 행하였다.

 

정언        민계가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근래에 와서 번복(翻覆)되는 일이 조금 그치고 공격(攻擊)하는 것도 그쳤으니, 우리 성상께서 각선(却膳)하신 고심(苦心)을 누가 흠앙(欽仰)하지 않겠습니까마는, 애석하게도 최성대(崔成大)가 다시 한 당(黨)이 생긴다고 말하였는데, 입 밖에 낸 말은 주워 담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의 ‘상전 하전(上殿下殿)’·‘당면 배면(當面背面)’ 등의 말은 정상을 모사(摸寫)하여 비방하며 헐뜯는 것이 극도에 이르렀는데, 전하께서는 그르게 여기지 않으시고, 당사자는 부끄럽게 여기지 않는 채 가한 것도 불가한 것도 아닌 가운데 버려 두었으니, 거듭 개탄스럽게 여기고 있습니다."
하고, 이어 전라 병사        성은석(成殷錫)과 경상 우병사        조동점(趙東漸)을 체개(遞改)하기를 청하니, 비답하기를,
"지난번에 헌신(憲臣)이 진달한 것은 극도로 지나친 것이었으므로 일찍이 대신에게 유시하였지만, 어찌 깊이 다스릴 것이 있겠는가? 두 곤수(閫帥)의 일은 아뢴 대로 하겠다."
하였다.

 

특별히 봉교 임상원(林象元)을 파직하였다. 이보다 앞서 겸춘추 정익하(鄭益河)가 홍상한(洪象漢)을 추천하여 이미 응강(應講)했는데, 이때에 이르러 임상원이 상소하기를,
"홍상한은 행신을 단속하지 않고 또한 새로 추천하였을 때 옛날에 추천했던 사람 민백행(閔百行)과 윤상임(尹尙任)을 먼저 구처(區處)하지 않은 것은 본관의 규제(規制)에 어긋나는 것입니다."
하였다. 소장을 들이자, 임금이 우의정 송인명(宋寅明)에게 물었는데, 송인명이 본관의 규례에 일정한 것이 없다고 대답하였다. 이에 임상원이 크게 한스럽게 여기고 상소하여 대신을 침범해 배척했기 때문에, 이런 명이 있었던 것이다.
사신은 말한다. 난대(蘭臺)는 비지(秘地)이므로 본래 극선(極選)으로 일컬어져 왔는데, 당론(黨論)이 생긴 이래로 그 천거하는 법이 점차 어긋나서 사의(私意)가 멋대로 행해졌었다. 홍상한은 본래 많은 비방을 받던 사람이었으니, 임상원이 논박하여 바로잡는 것은 진실로 불가할 것이 없다. 그러나 윤상임이 저지받은 것 때문에 이렇게 대거(對擧)한 것은 그 마음씀이 기구(崎嶇)하고 공평하지 못한 것이어서 공정한 논의가 될 수 없는 것이었다.


【태백산사고본】 35책 47권 48장 B면【국편영인본】 42책 607면
【분류】인사-임면(任免) / 인사-관리(管理) / 정론-간쟁(諫諍) / 사법(司法) / 역사-사학(史學)
사신은 말한다. 난대(蘭臺)는 비지(秘地)이므로 본래 극선(極選)으로 일컬어져 왔는데, 당론(黨論)이 생긴 이래로 그 천거하는 법이 점차 어긋나서 사의(私意)가 멋대로 행해졌었다. 홍상한은 본래 많은 비방을 받던 사람이었으니, 임상원이 논박하여 바로잡는 것은 진실로 불가할 것이 없다. 그러나 윤상임이 저지받은 것 때문에 이렇게 대거(對擧)한 것은 그 마음씀이 기구(崎嶇)하고 공평하지 못한 것이어서 공정한 논의가 될 수 없는 것이었다.

 

사헌부 【장령 김정윤(金廷潤)이다.】 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동래(東萊)의 여인 계월(桂月)이 관왜(館倭)와 음간(淫奸)하였으니, 청컨대 율(律)에 의해 처단하소서."
하고, 또 아뢰기를,
"인신(印信)을 위조한 죄인 정재태(鄭載泰)를 청컨대 율에 의해 처단하소서."
하였으나, 모두 윤허하지 아니하였다.

 

11월 29일 정축

토성(土星)이 동정성(東井星)으로 들어갔다.

 

김진상(金鎭商)을 부제학으로, 남태량(南泰良)을 부응교로, 유복명(柳復明)을 대사간으로, 이광부(李光溥)를 집의로, 이선행(李善行)을 사간으로, 이의종(李義宗)을 장령으로, 오수채(吳遂采)를 헌납으로, 정익하(鄭益河)를 지평으로, 송교명(宋敎明)을 정언으로, 장태소(張泰紹)를 평안 병사로 삼았다.

 

11월 30일 무인

제도(諸道)에 하교하여 백성을 구제할 방책을 강구(講究)하도록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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