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 1일 기묘
장령 이의종(李義宗)이 상소하여, 전 공홍 감사 이보혁(李普赫)이 70세가 된 노유(老儒)를 남형(濫刑)한 죄를 논하고, 김유경(金有慶)·홍상한(洪象漢) 등을 신구(伸救)하니, 엄중하게 책망하는 비답을 내렸다.
임금이 희정당(熙政堂)에 나아가 삼복(三覆)을 행하였다. 이날 사수(死囚)로 감단한 자가 4인이고 감사(減死)한 자가 5인이었다. 감옥의 죄수 가운데 노랑(老郞)이란 자는 형제 3인이 모두 군역(軍役)에 속해 있었는데, 족징(族徵)에 지쳐서 아내가 지아비 노랑을 꾸짖자, 술에 취하여 자살(刺殺)했었다. 임금이 죄안(罪案)을 보고 하교하기를,
"이는 이른바 사람을 칼과 정사로 죽인 것인다. 그 아내가 이미 죽었는데 또 그 지아비를 죽인다면, 그 자식은 무슨 죄가 있단 말인가? 차마 법대로 처치할 수 없다."
하고, 본도에 명하여 다시 사핵(査覈)하도록 하였다. 사헌부 【장령 김정윤(金廷潤)이다.】 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삼복(三覆)한 죄인 수랑(守娘)·김득창(金得昌)·신세정(辛世貞)을 감사하도록 하신 명을 도로 정지하고 율에 의거하여 처단하게 하소서."
하였으나, 윤허하지 아니하였다.
12월 2일 경진
번개가 쳤다.
이하원(李夏源)을 대사헌으로, 정준일(鄭俊一)을 지평으로 삼았다.
12월 3일 신사
지아비를 시해(弑害)한 죄인 장덕(長德)에게 형을 집행하고, 살던 고을 충주목(忠州牧)을 강등하여 충원현(忠原縣)으로 삼았다.
12월 4일 임오
번개가 치고, 어떤 별이 천원성(天園星) 아래로 흘러갔다.
12월 6일 갑신
소대를 행하였다.
윤봉구(尹鳳九)·김상신(金相紳)을 장령으로, 김도(金䆃)를 정언으로, 김상중(金尙重)을 부교리로, 송교명(宋敎明)·유최기(兪最基)를 부수찬으로, 조엄(趙儼)을 전라 병사로, 남덕하(南德夏)를 경상 우병사로 삼았다.
박문수(朴文秀)를 출보(黜補)하여 풍덕 부사(豐德府使)로 삼았다. 고향으로 내려가 소명(召命)을 게을리한 때문이었다.
12월 7일 을유
번개가 쳤다.
12월 9일 정해
잠성 부부인(岑城府夫人) 이씨(李氏)가 졸(卒)하였다. 부인은 곧 중전의 사친(私親)이다. 예조에서 아뢰기를,
"《오례의(五禮儀)》에 전하께서 왕비의 부모를 위하여 거애(擧哀)하시는 절차가 있는데, 혹 권정(權停)하기도 하고 혹은 대내(大內)에서 하기도 했습니다."
하니, 하교하기를,
"대내에서 하겠다."
하였다. 또 아뢰기를,
"《오례의》에 왕세자께서 외조부모(外祖父母)를 위해 거애하는 절차가 있으나, 바야흐로 나이가 어리시어 거행하지 못할 것입니다."
하고, 또 아뢰기를,
"갑인년115) 에 유신(儒臣)이 진달하고 대신이 헌의(獻議)한 바로 인하여 왕비와 빈궁(嬪宮)의 부모 상사에 있어서 복제(服制)는 13일 동안 공제(公除)하고, 13월 만에 상복을 벗고, 재기(再朞)까지 심상(心喪)하는 것으로 이미 정제(定制)하였었습니다. 따라서 이번에도 이에 의거하여 마련하였습니다. 잠성 부부인의 상사에 부고(訃告)를 들은 날 중궁전(中宮殿)께서 상궁 이하를 거느리고 소복(素服)을 입고서 별전(別殿)에서 거애(擧哀)하시고, 제4일에 성복(成服)하여 자최(齋衰) 【상의원(尙衣院)에서 지어 올린다.】 를 기년(朞年) 동안 입되, 대수(大袖)·장군(長裙) 【차등(次等)의 거친 생포(生布)로 만들어 쓴다.】 ·개두(蓋頭)·두수(頭𢄼) 【조금 가는 생포로 만든다.】 ·죽차(竹釵) 【전죽(箭竹)으로 만든다.】 ·포대(布帶) 【차등의 거친 생포로 만든다.】 ·포리(布履) 【백면포(白綿布)로 만든다.】 를 착용하며, 13일 동안 공제한 뒤 천담색(淺淡色)의 대수·장군에 검은 개두·두수·띠·피혜(皮鞋)를 착용하되 13월 만에 자최의 상복을 벗고, 재기(再朞) 동안에는 언제나 천담복(淺淡服)을 입으며, 상궁(尙宮) 이하는 상복(上服)에 따릅니다. 부고를 들은 날 성상께서도 추포대(麤布帶)를 띠시다가 3일 만에 벗으십니다."
하고, 또 아뢰기를,
"중궁전께서는 공제(公除)하는 날까지 소선(素膳)을 드시고, 세자궁(世子宮)에서는 성복(成服) 날까지 소선을 드십니다."
하였다.
12월 10일 무자
임금이 극수재(克綏齋)에 나아가 우의정 송인명(宋寅明)·이조 판서 조현명(趙顯命)·약방 제조 조상경(趙尙絅)·부제조 조석명(趙錫命)을 인견하고, 서덕수(徐德修)를 신설(伸雪)하도록 명하였다. 이때 잠성 부부인(岑城府夫人)의 상(喪)을 당하여 임금이 송인명 등에게 이르기를,
"서덕수는 사람됨이 어리석어서 속임을 당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감란록(勘亂錄)》에 대해 말한 것도 대개 그 뜻이 있는 것이다. 그러나 김성절(金盛節)이나 조흡(趙洽)과는 차이가 있다. 내전(內殿)께서 평소 남 모르는 아픔이 마음속에 쌓이고 맺혀 있었는데, 사친(私親)의 상사를 만난 뒤로 작수(勺水)도 들지 않고 계시니, 인정상 진실로 그러한 것이다. 만일 이때 신설(伸雪)하여 풀어 주지 않는다면 잠성 부부인의 마음을 위로해 줄 길이 없는데, 경들은 어떻게 생각하는가?"
하자, 송인명이 아뢰기를,
"임인년116) 의 옥사를 신은 자세히 알지 못합니다. 지금 하교를 받들건대, 일이 이와 같은 데 지나지 않으면 진실로 처분이 지당하니, 신들이 어찌 감히 이의(異議)가 있겠습니까?"
하고, 조현명이 아뢰기를,
"지금 하교(下敎)를 듣건대, 종사(宗社)에 관계되는 죄는 아닌 듯한데 어찌 신설(伸雪)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드디어 하교하기를,
"《감란록》 서문 가운데 이른바 서덕수·김성절·조흡이 대개 그때 초사가 모두 무상(無狀)했던 것은 음흉한 마음을 간직한 사람에게 걸리어 있었기 때문인데, 서덕수를 다시 역적으로 처치했던 것은 마음속으로 통탄스럽게 여겼기 때문이었다. 비록 이와 같았으나, 그의 초사가 무상했던 것은 이미 그런 일이 없었지만 형장(刑杖)을 견디지 못해 속여서 공초한 것임을 알 수 있으니, 그를 깊이 미워하는 것 때문에 과중한 율(律)에 두어서 곤심(壼心)을 상하게 하는 것은 의리에 차마 할 수 없는 일이다. 이때에 유시하지 않는다면 다시 어느 때를 기다리겠는가? 을사년117) 의 처분에 의하여 거행하도록 하라."
하였다.
12월 13일 신묘
강화 유수 권적(權𥛚)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지난 임진 왜란(壬辰倭亂) 때 천장(天將) 이여송(李如松)·이여백(李如栢)·이여장(李如樟)·이여매(李如梅)·이여오(李如梧) 형제가 일시에 동정(東征)하여 번방(藩邦)을 재조(再造)하였는데, 그 풍공(豐功)·위열(偉烈)은 오늘날까지 사람들의 이목(耳目)에 비치고 있으니, 진실로 백세(百世)에 잊어버릴 수 없는 바가 있습니다. 무오년118) 심하(深河)에서 패전(敗戰)했을 때 이여매의 손자 이성룡(李成龍)이 도독(都督) 유정(劉綎)의 휘하(麾下)로서 우리 나라에 표류해 와 고 옥성 부원군(玉城府院君) 장만(張晩)의 막부(幕府)에 몸을 의탁했는데, 그 뒤 쇄환(刷還)하는 일이 있었으나, 장만이 또 숨을 것을 건의하여 호서(湖西)에서 살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아내를 맞이하여 아들을 낳으니, 그 이름이 이번득(李翻得)인데, 무과(武科)에 올라 벼슬이 무겸(武兼)에 그치었습니다. 그의 아들 이동배(李東培)는 고 판서 유득일(兪得一)의 말에 따라 변장(邊將)을 제배(除拜)했다가 남해현(南海縣)의 현감(縣監)이 되었었습니다. 이동재(李東栽)의 아들 이면(李葂)이 종손(宗孫)인데, 어려서 부모를 여의고 빈천하여 바야흐로 지금 본부의 갑곶이진[甲串津] 가에서 유리(流離)하고 있습니다. 비록 여러 신하들의 건백(建白)으로 인해 잇따라 녹용(錄用)하라는 명이 있었지만, 지금에 이르러서는 주림과 추위가 몸에 사무치게 되었습니다. 만일 이사람이 이 땅에서 굶주려 죽는다면 장차 어떻게 천하 후세에 할말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신은 원하건대, 성명께서는 그의 선대의 공렬을 생각하시고 빨리 특별한 은전(恩典)을 베푸셔서 선왕조(先王朝)에서 크게 보답하시려는 의리를 빛내도록 하소서. 또 생각해 보건대, 정축년119) 의 변란 때 본부의 중군 황선신(黃善身)과 천총 강흥업(姜興業)·구원일(具元一) 등 세 사람의 충절(忠節)이 가장 현저하였으므로 모두 충렬사(忠烈祠)에 배향(配享)하였습니다. 다만 그 자손들이 쇠퇴하여 향화(香火)를 받들지 못하고 있으니, 마땅히 선부(選部)로 하여금 특별히 기용(起用)하도록 하소서."
하니, 임금이 위유(慰諭)하는 비답을 내리고, 이어 전조(銓曹)에 신칙하여 모두 견발(甄拔)하여 임용(任用)하도록 하였다.
12월 14일 임진
오언주(吳彦胄)를 대사간으로, 유수원(兪壽垣)을 장령으로, 서명신(徐命臣)을 지평으로, 심악(沈)을 부교리로 삼았다.
12월 15일 계사
부제학 김진상(金鎭商)이 상소하여 사직하고 나오지 아니하였다. 이때 김진상이 여주(驪州)에 물러가 살았는데, 무릇 제배(除拜)의 명이 있어도 모두 간곡하게 사양하고 산수(山水) 사이에서 노닐기를 좋아하여 지역 안의 이름난 곳을 거의 두루 돌아다녔고, 시와 술을 가지고 스스로 즐기니, 사류(士類)들이 모두 칭찬했었다.
12월 16일 갑오
매상(昧爽)에 월식(月食)했다. 이보다 앞서 관상감에서 아뢰기를,
"4편의 역법(曆法)을 고찰해 보건대, 대명력(大明曆)에는 월식하지 않는다 하였고, 시헌역서법(時憲曆書法)에는 당초 묘시(卯時) 초 3각(三刻)에 이지러진다 하였고, 내편법(內篇法)에는 당초 묘정(卯正) 2각에 이지러진다 하였고, 외편법(外篇法)에는 당초 묘정 초각(初刻)에 이지러진다고 하였습니다. 대궐 뜰에서는 후망(候望)하기 어려우니, 목멱산(木覔山)에 올라가 후망하다가, 아직 해가 뜨지 않았을 때 혹시라도 이지러진 데가 있으면 화전(火箭)을 쏘아 서로 보고하여 구식(救食)120) 을 행하게 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김상적(金尙迪)을 지평으로, 신수(申𢢝)를 정언으로, 김상중(金尙重)을 부수찬으로, 양빈(梁彬)을 경상 좌수사로 삼았다.
12월 18일 병신
임금이 야대를 행하였다.
12월 20일 무술
임금이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교리 이덕중(李德重)이 아뢰기를,
"삼등현(三登縣)에서는 강도들이 포(砲)를 쏘고 불을 밝히고서 곧장 관부(官府)에 돌입하여 칙수고(勅需庫)에 있는 전화(錢貨)를 약탈해 갔다고 하니, 일이 지극히 놀랍고 해괴합니다."
하였는데, 우의정 송인명(宋寅明)이 아뢰기를,
"도신을 추고(推考)하고 토포사(討捕使)를 나문(拿問)하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비국에서 관문(關文)을 보내어 자세히 탐지한 뒤에 품처하도록 명하였다.
임금이 소대를 행하였다. 《대학연의보(大學衍義補)》를 강(講)했는데, 시독관 이덕중(李德重)이 글뜻을 끌어대어 아뢰기를,
"삼대(三代) 이전에는 뭇신하들을 예절로 부렸으니, 삼고(三孤)·경(卿)에게는 특읍(特揖)하고, 대부(大夫)에게는 여읍(旅揖)하고, 사·상(士商)에게는 삼읍(三揖)하였으며, 태복(太僕)과 종자(從者)는 곧 낮은 말단의 벼슬이었지만 임금이 또한 읍하는 예절이 있었습니다."
하였는데, 임금이 이르기를,
"그렇다. 대개 진 시황(秦始皇) 때부터 임금을 높이고 신하를 억제하기 시작하였는데, 명(明)나라 태조 고황제(太祖高皇帝) 때에 이르러서는 군신(君臣)의 분의가 더욱 지극히 엄격했었다. 삼대 때에는 군신의 사이가 겉으로는 엄격하지 않은 듯하였으나, 정지(情志)는 서로 통했었다. 오늘날에는 등급은 비록 엄격하지만 뭇신하들이 오만하고 무례함은 무엇 때문인가?"
하자, 이덕중이 아뢰기를,
"군신은 부자와 같은 의리가 있고, 빈우(賓友)와 같은 예의가 있는 것인데, 전하께서 뭇신하를 어거하는 도리에 대해 너무 지나치게 박절하시니, 이것이 도리어 엄격하지 못하게 된 까닭입니다."
하니, 임금이 옳게 여기었다. 이덕중이 또 아뢰기를,
"유자(儒者)가 사람과 국가에 유익함은 옛날부터 그러했는데, 근일에는 정초(旌招)하는 일을 전연 듣지 못하였습니다. 이재(李縡) 같은 사람은 곧 수십 년을 임하(林下)에서 독서한 사람이니, 만일 지금 불러다가 시강(侍講)하게 한다면 도움되는 바가 매우 많을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여러 차례 불렀으나 오지 않는데 어찌하겠는가?"
하였다.
12월 21일 기해
해의 빛깔이 붉었다.
사헌부 【지평 김상적(金尙迪)이다.】 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성곽(城廓) 밖의 이사(尼舍)는 이미 좌도(左道)를 배척하는 뜻에 어긋나는 것인데, 그 복방(複房)과 유실(幽室)이 문득 여염(閭閻) 과부들이 음분(淫奔)하는 소굴이 되고 있으니, 동대문 밖 교외의 두 이사를 모두 경조(京兆)로 하여금 즉일로 훼철(毁撤)하게 하소서. 근일에 사대부(士大夫)들의 명검(名檢)이 땅을 쓴 듯이 없어졌습니다. 창가(娼家)와 기방(妓房)이 문득 분주하게 출입하는 장소가 되었고, 침비(針婢)와 의녀(醫女)들이 각기 풍류(風流)의 자리를 점유하고 있습니다. 심지어는 여항(閭巷)의 양녀(良女) 가운데 자색(姿色)이 조금 고우면 법종(法從)과 요로(要路)에 있는 몸으로 돈으로 탈취하는 일들이 온 세상에 말이 전파되어 잠신(簪紳)들에게 수치를 끼치고 있습니다. 청컨대 전 지평 정광운(鄭廣運)은 시종의 반열에서 삭제하게 하소서. 지돈녕부사 이기익(李箕翊)은 흉역(凶逆) 심성연(沈成衍)의 친아우와 결구(結媾)하였으니, 청컨대 파직하고 서용하지 말게 하소서. 전 지평 정준일(鄭俊一)은 역적이 처자를 참작하여 처분하였을 때 구차한 일이 많았으니, 청컨대 파직하게 하소서. 이조 당상이 이미 전조 낭관에 통망(通望)된 송교명(宋敎明)을 도로 그의 진출을 저지했으니, 이는 공의를 소중히 여기고 명관(名官)을 대우하는 도리가 아닙니다. 청컨대 무겁게 추고(推考)하게 하소서. 민원(閔瑗)은 용렬하고 잗달며, 조세후(趙世垕)는 기력이 쇠퇴하여 나약하므로 춘방(春坊)에 합당하지 못하니, 청컨대 다시 검의(檢擬)하지 말게 하소서. 서도(西道)의 고을에서 큰 도둑이 공화(公貨)를 약탈해 갔는데, 아직 장문(狀聞)하지 않고 있으니, 청컨대 평안 감사 민응수(閔應洙)는 추고(推考)하고, 지방관(地方官)은 나처(拿處)하며, 영장(營將)은 파직하게 하소서. 기장(機張)·영덕(盈德) 두 고을 수령을 이미 폄관(貶官)하였는데, 그대로 버려 두고 있는 것은 출척(黜陟)을 엄격하게 하는 뜻이 아닙니다. 청컨대 감사 이기진(李箕鎭)은 추고하고 두 고을 수령은 파직하게 하소서. 경상 수사 양빈(梁彬)은 혼모(昏耄)하고 잔열하니, 청컨대 개차(改差)하게 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모두 윤허하지 않는다. 추고하는 일과 말단의 세 가지 일은 아뢴 대로 하겠다."
하였다.
12월 22일 경자
조영국(趙榮國)을 부응교로, 오수채(吳遂采)를 수찬으로 삼았다.
이조 판서 조현명(趙顯命)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저번날 정석(政席)에서 정랑 이정보(李鼎輔)가 홍창한(洪昌漢)·송교명(宋敎明) 두 사람을 대신 천거하므로 신이 과연 허락했었습니다. 그 이튿날 신이 비국에 갔더니, 대신이 세상 길의 간험(艱險)하고 전형(銓衡)의 붓을 잡기가 어려움을 깊이 근심하였고, 또 말하기를, ‘이미 송교명에게 권유하여 출각(出脚)하지 말도록 했다.’고 하였으니, 혹시 대관(臺官)의 말이 이로 인해 뒤집어 전해진 것이 아니겠습니까?"
하니, 예사 비답을 내렸다.
12월 25일 계묘
임금이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우의정 송인명이 아뢰기를,
"우리 나라의 노비에 관한 법은 이미 기자(箕子)의 팔조지교(八條之敎)에 나와 있습니다. 고려(高麗)의 조훈(祖訓)도 이를 소중히 여겼으므로, 고려 말기의 식자(識者)들이 이 노비에 관한 법이 점점 무너져가는 것으로써 장차 망할 조짐으로 여겼습니다. 근래에 빈궁한 양반들이 이른바 추노(推奴)하는 경우 비리(非理)를 저지르는 일이 많이 있습니다. 이 때문에 매양 재해(災害)를 받은 해에는 반드시 추노를 금했으니, 진실로 백성들의 생업(生業)을 안정시키려는 뜻에서 나온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노비에 관한 법이 또한 이로 인해 점점 무너져서 심지어 노비가 주인을 죽이는 변이 있기에 이르러 강상(綱常)에 관계되니, 이 또한 염려스러운 일입니다. 무신년의 역변(逆變) 때 역적이 양반들에게서 많이 나왔으므로 문득 상한(常漢)들이 양반을 후욕(詬辱)하는 구실로 삼았습니다. 외방에서는 명분(名分)이 날로 점점 땅을 쓴 듯이 없어지고 있는데, 일전에 주사(籌司)121) 의 자리에서 보건대, 조가(朝哥)라는 상인(喪人)이 정장(呈狀)하기를, ‘저희 집안 조(祖)·자(子)·손(孫) 3대가 일시에 노속(奴屬)인 적도들에게 살해되었는데, 바야흐로 적도들이 충주 진영에 잡혀서 거의 모두 자복하였으나 아직 정법(正法)하지 않고 있으니, 복수하지 못하고 있다.’고 하였습니다. 또 듣건대, 도신이 일찍이 이 일을 계문(啓聞)하였으므로 신이 그 죄안(罪案)을 가져다가 보았더니, 한결같이 정장한 말과 같았는데, 한두 사람이 승복하지 않은 것으로 인해 아직 정형하지 않고 있었습니다. 도신으로 하여금 격식을 갖추어 계문하게 하고, 어사를 보내어 추핵(推覈)한 다음에 삼성(三省)으로 하여금 법대로 처단하게 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이때에 해서(海西)의 곡산부(谷山府)와 관동(關東)의 이천부(伊川府)에 도둑이 발생하는 근심이 많았다. 임금이 뭇신하들에게 도둑을 없앨 방도를 물으니, 모두 말하기를,
"이천과 곡산은 본래부터 포도지수(逋逃之藪)122) 로 일컬어지고 있는데, 만일 무신을 원으로 차임(差任)하여 보낸다면 없앨 수 있을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그렇지 않다. 도둑을 다스리는 정사는 오직 마땅한 사람인가에 달려 있지 문관이냐 무관이냐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다. 그 시초를 구명해 보면 그들도 양민(良民)이었는데, 남을 위협하여 약탈하고 표절(剽竊)하는 짓을 어찌 즐겨서 하겠는가? 덕(德)으로 선도(善導)하고 예(禮)로 동등하게 대하여, 점차 교화(敎化)하고 서로 관감(觀感)하면서 착해지게 하는 것이 곧 왕정(王政)의 근본인 것이다. 이는 내가 수령들에게 바라는 것이니, 수령이 된 사람들은 내가 이처럼 민망하게 여겨 돌보려는 뜻을 본받아 한갓 잡아내어 엄하게 죄를 다스리는 데만 힘쓰지 말고, 마음을 다해 무마(撫摩)하여 용사(龍蛇)가 변하여 적자(赤子)가 되도록 해야 옳다. 이런 뜻으로 곡산부와 이천부에 하유(下諭)하도록 하라."
하였다.
12월 27일 을사
임금이 소대를 행하고, 제도(諸道)에 분부를 내려 향음주례(鄕飮酒禮)를 거듭 밝히게 하였다.
12월 28일 병오
조영국(趙榮國)을 집의로, 김정윤(金廷潤)을 장령으로, 이수해(李壽海)를 지평으로, 이도원(李度遠)을 부교리로, 정순검(鄭純儉)을 설서로, 정익하(鄭益河)를 부수찬으로 삼았다.
12월 29일 정미
중궁전(中宮殿)에 신년(新年)의 인일(人日)에 공조에서 상례로 바치는 애화 수화(艾花首花)를 정지하도록 명하였다. 사친(私親)의 복(服)을 입었기 때문이었다.
호구(戶口)가 서울 안의 5부(五部)는 가호(家戶)가 3만 5천 5백 76이고 인구(人口)가 19만 4천 4백 32인이었으며, 【남자는 9만 4천 4백 17명이고, 여자는 10만 15명이다.】 팔도(八道)는 가호가 1백 62만 6천 6백 43이고, 인구가 6백 84만 6천 48인이었다. 【남자는 3백 32만 4천 7백 31명이고, 여자는 3백 52만 1천 3백 17명이다.】
【태백산사고본】 35책 47권 51장 B면【국편영인본】 42책 609면
【분류】호구(戶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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