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월 1일 무신
임금은 창덕궁(昌德宮)에 있었다. 팔도(八道)·양도(兩都)001) 에 하유(下諭)하여 농사를 권장하였다.
임금이 봉상 제조(奉常提調) 박사정(朴帥正)을 불러 하교하기를,
"세수(歲首)에 기곡(祈穀)하는 것은 백성을 위하는 중대한 예(禮)이니, 모든 제물이 정결하도록 힘쓰게 하라."
하니, 박사정이 말하기를,
"예전에는 제조가 감독하여 봉진(封進)하는 규례가 없었습니다마는, 신(臣)이 성의(聖意)를 우러러 본받아 삼가 몸소 살피겠습니다."
하였다. 박사정이 이어서 말하기를,
"영월(寧越)의 호장(戶長) 엄흥도(嚴興道)의 후손이 영남(嶺南)에 있다고 하니, 마땅히 찾아서 거두어 써야 하겠습니다."
하였다. 대개 엄흥도는 장릉(莊陵)002) 이 승하한 때에 혼자 스스로 염습(殮襲)하고 재궁(梓宮)을 갖추어 장사를 지내 준 자였는데, 현종(顯宗) 때에 문정공(文正公) 송시열(宋時烈)이 이를 청하였으나, 있는 곳을 몰라서 드디어 그만두고 시행하지 못하였다. 이때에 이르러 박사정이 말하니, 임금이 윤허하였다.
1월 2일 기유
영의정 이광좌(李光佐)가 사직하는 소(疏)를 올리니, 임금이 우악한 비답(批答)을 내리고 예조 판서(禮曹判書) 윤순(尹淳)을 보내어 함께 오게 하였다.
1월 5일 임자
임금이 인정문(仁政門)에 나아가 조참(朝參)을 행하였다. 우의정 송인명(宋寅明)이 나아가 말하기를,
"전하의 지극하신 정성은 늘 정사에 부지런하고, 학문을 좋아하고, 백성을 돌보고, 붕당(朋黨)을 타파하는 네 가지 일에 있습니다마는, 근년의 규모는 게을러지는 염려가 없지도 않습니다. 대저 천하의 일은 나아가지 못하면 물러가게 되는 것이니, 전하께서는 두렵게 여겨 반성하고 더욱더 분발하여 힘쓰기 바랍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네 가지 일 가운데에서 끝의 일은 내가 고심하는 것이다. 경(卿)의 말이 절실하니, 유의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였다. 송인명이 또 영성(盈盛)을 염려하고 장대(張大)를 경계할 것을 진계(進戒)하니, 가납(嘉納)하였다. 송인명이 또 혼인할 때를 넘긴 남녀는 관가의 힘으로 돕거나 종족(宗族)이 주관하여 나이가 차도 짝을 짓지 못하는 한탄이 없게 하고, 경재(卿宰)로서 늙었거나 늙은 어버이가 있는 자에게는 음식을 내려서 위문하고, 오래 된 중한 옥사(獄事)는 형관(刑官)을 시켜 문안(文案)을 살피고 묘당(廟堂)에 의논하여 등대(登對) 때에 품처(稟處)하게 하기를 청하니, 임금이 모두 옳게 여겼다. 임금이 송인명에게 말하기를,
"한나라 문제(文帝)는 규모와 기상이 참으로 크고 멀다. 봄날이 화창할 때에 진대(賑貸)를 의논하게 하여 덕의(德意)가 애연(藹然)하니, 점점 민물(民物)이 풍부하고 풍속이 도타워졌다. 때문에 촉한(蜀漢)의 말기에 이르러서도 백성들이 오히려 구가하여 잊지 않은 것은 그 보람이다. 우리 나라는 인후(仁厚)로 나라를 세운 것이 송(宋)나라와 비슷한데, 근래 겉치레의 폐단이 점점 너무 잗달아져서 백성들로 하여금 손발을 쓰지 못하게 하니, 내가 참으로 답답하다. 이제 위아래가 함께 힘쓸 것은 반드시 대체(大體)를 닦고 소절(小節)을 더는 것이라야 할 것이다. 그러고서야 백성이 마음 놓고 지낼 수 있을 것이다."
하였다. 송인명이 또 산림(山林) 사람을 불러 오기를 청하고, 이어서 말하기를,
"박필주(朴弼周)·윤동수(尹東洙)가 매우 가난하니, 그들이 있는 고을로 하여금 급한 사정을 구제하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예전에 정자(程子)는 안자(顔子)가 늘 가난하였던 것을 그때 임금의 허물이라 하였다. 이것 또한 임금으로서 만족스럽게 여기지 않는 것이니, 특별히 그 급한 사정을 구제하게 하라."
하였다. 송인명이 또 말하기를,
"전 참판(參判) 이재(李縡)는 벼슬이 높아지기 전에 용감히 물러가서 초야에 있습니다. 아경(亞卿)이 된 지 햇수가 가장 오래이므로 공론이 다들 자급(資級)을 높여야 마땅하다고 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반드시 오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면서 가자(加資)하는 것은 겉치레이므로 윤허하지 않았다."
하였는데, 송인명이 힘써 청하니, 윤허하였다. 임금이 바야흐로 송인명·김재로(金在魯) 등을 임용하여 탕평(蕩平)의 정치를 위하여 당목(黨目)을 없애려 하는데 이재는 이를 매우 그르게 여겼다. 임금이 그러한 줄 알고 불러오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기 때문에 아경이 된 지 수십 년이 되었어도 품계를 올리지 않았다. 송인명이 그가 자기와 뜻을 달리하는 것을 매우 미워하였으나 공론에 몰려서 굳이 청하였고, 임금도 애써 따른 것이었다. 임금이 원춘(元春)의 대조회(大朝會)라 하여 전정(殿庭)에 있는 신하들에게 명하여 다들 생각하는 바를 아뢰게 하였으나, 진언(進言)하는 자가 한 사람도 없었다. 임금이 말하기를,
"제 기예(技藝)의 일을 가지고 규간(規諫)하는 일은 예전부터 있었는데, 근래 조금이라도 잘못이 있으면 곧 추고(推考)를 당하는 까닭에 반열(班列)에 나와 아뢰려 하지 않으니, 이것도 겉치레의 폐단이다."
하고, 이어서 판윤(判尹) 윤혜교(尹惠敎)에게 명하여 오부(五部)의 관원을 거느리고 입시하여 각각 폐해를 아뢰게 하였다. 사람들이 다 응대하려 하지 않았는데, 중부 주부(中部主簿) 남학성(南鶴聲)이 부(部)에 속한 이례(吏隷)의 요포(料布)가 박한 것을 아뢰니, 임금이 말하기를,
"내가 듣고자 하는 것은 민폐인데, 이속(吏屬)의 일을 번거로이 아뢰는가?"
하고, 이어서 승지(承旨)에게 명하여 제도(諸道)에 하유(下諭)하여 모든 민폐를 탐문하여 아뢰게 하였다.
1월 6일 계축
박사수(朴師洙)를 홍문 제학(弘文提學)으로, 남태온(南泰溫)을 대사간(大司諫)으로 삼고, 이재(李縡)를 자헌 대부(資憲大夫)로 올렸다.
홍문 제학(弘文提學) 박사수(朴師洙)에게 명하여 태학(太學)에 가서 황감(黃柑)을 나누어 주고 선비를 시취(試取)하게 하였는데, 탐라(耽羅)에서 지난 가을에 바친 것이 비로소 왔기 때문이었다. 으뜸을 차지한 진사(進士) 오명수(吳命修)에게 급제(及第)를 내렸다.
영의정 이광좌(李光佐)가 상소하여 사직하니, 임금이 우악한 비답(批答)을 내리되 수백 마디 말을 누누이 반복하고, 예조 판서(禮曹判書)에게 명하여 전유(傳諭)하게 하였다.
밤에 소대(召對)하였다. 유신(儒臣)인 검토관(檢討官) 오수채(吳遂采)가 《대학연의(大學衍義)》를 읽었다. 임금이 말하기를,
"연전에 보양관(輔養官) 이진망(李眞望)이 《소학(小學)》에 있는 성현의 아름다운 말을 초록(抄錄)하여 올렸으므로 원량(元良)에게 읽혔다. 지난번 원량이 저녁밥을 먹을 때에 내가 마침 원량을 불러오게 하였는데 입 안의 음식을 뱉어 내므로 옆에 있던 자가 물으니, ‘음식이 입에 있으면 뱉는다.’고 대답하였다. 능히 《소학》의 말을 거론하였으니, 참으로 기특하다."
하자, 오수채가 말하기를,
"동궁의 나이가 이제 겨우 다섯 살인데 이미 글을 읽고 몸소 행하는 보람이 있으니, 예지(睿知)가 보통보다 뛰어남을 상상할 만합니다."
하였다. 오채수가 읽다가, ‘부모가 허물이 있으면’이라는 구절에 이르러 아뢰기를,
"군신 사이는 부자 사이와 같으나, 간쟁(諫諍)할 때에는 임금과 아버지는 차이가 있습니다. 대개 군신 사이에서는 의를 주장하므로 바른 것을 주장하여 범하는 것이 있을지언정 숨기는 것이 없는 것이니, 동렬(同列) 이하에 대해서도 감히 말할 수 없는 것을 감히 임금 앞에서 아뢰는 것은 다 임금을 사랑하는 정성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그렇다. 어버이에게 효성한 자는 반드시 임금에게 충성할 것이니, 그 마음은 한가지이다."
하자, 오수채가 말하기를,
"그 마음은 한가지일지라도 그 의리를 분별하여 지키는 것은 같지 않습니다. 신하가 임금에게 대해서는 맞지 않으면 떠나고 잦으면 욕된다는 경계가 있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지난번 풍원(豐原)003) 이 영기(營妓)를 쇄환(刷還)할 것을 아뢰었는데, 염치를 힘쓰게 하니 도리로서는 막지 않을 수 없었지마는, 상방(尙方)004) ·내국(內局)005) 소속도 첩으로 거느린 자가 있다 하니, 그 폐단이 어찌 단지 영기일 뿐이겠는가?"
하니, 참찬관(參贊官) 이중경(李重庚)이 말하기를,
"관기(官妓)를 첩으로 거느리는 것은 참으로 그릅니다. 그러나 햇수가 오래 지난 뒤에 혼인한 남녀도 쇄환을 면할 수 없다면 가엾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자녀를 낳은 자는 이미 논하지 말라고 하였다. 또 시종(侍從)·선전(宣傳) 이상이 천첩(賤妾)에게서 낳은 자식이 있으면 천구(賤口)를 대신 세우고 천역(賤役)을 면할 수 있게 하는 것이 어찌 법이 아니겠는가?"
하였다. 이중경이 이어서 고성(高城)·용안(龍安)·봉화(奉化) 세 고을의 호장(戶長)이 말한 진상(進上)을 위한 무역(貿易)과 백성이 적고 군사가 많은 폐단을 아뢰니, 임금이 말하기를,
"호장은 미천할지라도 이미 민폐를 물었으니, 어찌 버려둘 수 있겠는가? 비국(備局)을 시켜 본도(本道)에 묻게 하라."
하였다. 파할 때에 임금이 감귤(柑橘) 한 반(盤)을 내리자, 여러 신하들이 각각 소매에 넣었다. 오수채가 이어서 성묘(成廟) 때에 성희안(成希顔)에게 감귤을 내린 고사(故事)를 아뢰니, 임금이 말하기를,
"이제 유신의 말을 들으니 나도 감동이 일어난다. 연신(筵臣) 중에서 누가 늙은 어버이가 있는가? 내일 다시 그 보낼 것을 마땅히 내리겠다."
하였다.
1월 8일 을묘
오언주(吳彦冑)를 승지(承旨)로, 이재(李縡)를 판윤(判尹)으로, 서종옥(徐宗玉)을 부제학(副提學)으로, 송징계(宋徵啓)를 부응교(副應敎)로, 변성우(邊聖佑)를 전라 우수사(全羅右水使)로 삼았다.
1월 9일 병진
임금이 소대를 행하였다.
1월 10일 정사
임금이 태묘(太廟)에 전알(展謁)하였다.
박필기(朴弼琦)를 집의(執義)로, 이광식(李光湜)을 헌납(獻納)으로, 민통수(閔通洙)를 부교리(副校理)로, 조영국(趙榮國)을 응교(應敎)로 삼았다.
1월 11일 무오
임금이 정원(政院)에 비망기(備忘記)를 내리기를,
"아! 내가 즉위한 지 15년이 되었다. 소민(小民)을 말하면 덕이 백성에게 입혀지지 못하였고, 시상(時象)을 말하면 명령이 신하를 따르게 하지 못하였고, 기강을 말하면 한심하다 할 만하고, 세도(世道)를 말하면 근심스럽기가 날로 심해지니, 임금 노릇하기가 어렵다 하겠다. 아! 임금의 자리가 어떤 자리이겠는가마는 나는 초개처럼 여기는데, 송나라 태종(太宗)은 무슨 마음이기에, ‘짐을 어떤 처지에 두는가?’라고 말하기까지 하였는가? 아! 내 평소의 마음은 바로 송나라 영종(英宗)의 마음과 같거니와, 황형(皇兄)에게 후사가 있어 우리 집을 삼가 지키게 하는 것이 바로 내 본심인데, 열조(列祖)께서 도우시어 다행히 원량(元良)이 있어 이제는 다섯 살에 차서 이미 주창(主鬯)006) 이 있다. 아! 효장(孝章)007) 이 살아있다면 어찌 오늘까지 기다리겠는가? 을유년008) 의 일을 돌이켜 생각하면 도리어 나는 올해에 또 만 1년이 지났다.009) 내가 짐을 벗더라도 어찌 백성을 소홀히 하겠으며, 군국(軍國)의 긴요한 일도 어찌 걱정하지 않겠는가? 본디 옛 법이 있으니, 묘당(廟堂)을 시켜 전례에 의거하여 거행하게 하라."
하였다. 이때 임금이 주강(晝講)을 행하였는데, 윤대관(輪對官)도 같이 들어오라고 명하였다. 참찬관(參贊官) 서종옥(徐宗玉)이 문의(文義)를 설명하는데, 끝나기도 전에 승지 오언주(吳彦冑)가 비망기를 가지고 종종걸음으로 달려 들어와 말하기를,
"신(臣)이 청대(請對)해야 마땅하겠으나, 일이 매우 급하므로 감히 지레 들어왔습니다."
하였다. 이에 신하들이 비로소 하교를 보고 다들 놀랍고 두려워하며 도로 거두기를 청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내가 덕이 없기는 하나, 참으로 송나라 태종 같은 마음은 없다. 사람이 누구인들 형제가 없겠는가마는, 어찌 나와 같은 자가 있겠는가? 즉위한 이래로 반드시 시상(時象)을 바로잡으려 하였으나, 대고(大誥)한 뒤에도 오히려 옛 모양으로 되돌아갔으니, 지난 15년 동안을 점검하면 이룬 것이 무엇인가? 내가 태상(太上) 두 자를 들을 수 있고서야 돌아가서 뵐 낯이 있을 것이다."
하였다. 서종옥 등이 도로 거두기를 힘껏 청하고, 오언주가 말하기를,
"신은 탑전(榻前)에 두고 물러가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열 번 올리더라도 내가 열 번 내리겠다."
하였다. 이윽고 대신(大臣)·경재(卿宰)와 삼사(三司)·음관(蔭官)·무변(武弁)·종척(宗戚)·의빈(儀賓) 등 모두 60여 인이 서로 이끌고 와서 힘껏 청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오늘 이 일은 한때 갑자기 나온 것이 아니다. 사람이 누구인들 부자 형제가 없겠는가마는, 어찌 나와 같은 자가 있겠는가? 무신년010) 의 일이 편안하였다면 전에 어찌 나홍언(羅弘彦)이 있었겠으며, 뒤에 어찌 양취도(楊就道)가 있었겠는가? 신해년011) ·임자년012) 의 단련은 그르거니와, 효장이 살아 있다면 내가 태상이 된 지 오래였을 것이다. 오늘 이 일을 하고서야 세자를 대리(代理)하게 한다는 말이 그칠 것이다."
하였다. 우의정(右議政) 송인명(宋寅明)이 말하기를,
"조정(朝廷)에 있는 신하들이 누구인들 성심(聖心)의 근본이 이러한 줄 모르겠습니까? 신해년·임자년·갑인년013) ·을묘년014) 의 일을 신들은 다 잊었는데 전하께서는 오히려 깊은 속마음에 두셨으니, 이런 망극한 일이 있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사람들은 내가 원보(元輔)를 부르고 싶기 때문이라고 생각하겠으나, 내가 어찌 원보 한 사람을 위하여 이런 일을 하겠는가?"
하였다. 송인명이 말하기를,
"신이 전하께서 고심하시는 것을 모른다면 먼저 주륙(誅戮)당해야 할 것입니다. 온 나라 안이 소란스러워진 뒤에 하교를 도로 거두신다면 무슨 이로울 것이 있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이미 나를 임금으로 대우하지 않는데 무슨 소란스러울 일이 있겠는가?"
하였다. 영의정 이광좌(李光佐)가 바야흐로 동작강(銅雀江) 가에 있다가 가장 뒤에 들어와 말하기를,
"나라가 장차 망할 것입니다."
하고, 이어서 이판(吏判) 조현명(趙顯命) 등 수십인과 함께 전(殿)에서 내려가 관(冠)을 벗고 머리를 땅에 두드리며 말하기를,
"신의 죄는 죽어 마땅합니다."
하니, 여러 신하가 또 잇달아서 번갈아 아뢰는 것이 수천 마디 말에 이르렀다. 이에 임금이 위로 자성(慈聖)을 근심시키고 아래로 원량(元良)을 괴롭힌다 하여, 그 명을 거두었다. 이광좌가 드디어 예판(禮判) 윤순(尹淳) 등과 함께 선조(先朝) 을유년의 전례에 따라 경사를 칭하고 진하(陳賀)하기를 청하니, 임금이 윤허하였다. 이날 밤이 깊어도 궐문(闕門)이 닫히지 않고 군호(軍號)가 내려지지 않으므로 여러 신하들이 말하니, 임금이 비로소 내렸다. 집의(執義) 박필기(朴弼琦)가 전계(前啓)를 다시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또 전 지평(持平) 정광운(鄭廣運)이 양녀(良女)를 겁탈하고 돈녕 도정(敦寧都正) 이기익(李箕翊)이 흉족(兇族)과 결혼한 일을 아뢰어 죄파(罪罷)하기를 청하니, 모두 따랐다. 또 대신(大臣)이 전정(殿庭)에 내려가 관을 벗을 때에 따라 내려가지 않은 2품(品) 이하를 모두 중추(重推)하기를 계청(啓請)하였으나, 윤허하지 않고, 이어서 하교하기를,
"내려갈 자는 내려가고 내려가지 않을 자는 내려가지 않은 것을 어찌 세밀히 살필 수 있겠는가? 방금 협심(協心)하라고 하교하였는데, 어찌하여 감히 이런 찌꺼기 말을 아뢰는가?"
하고, 박필기를 체직(遞職)하라고 명하였다.
사신은 말한다. "임금이 무신년의 변란 뒤부터 노론(老論)·소론(小論) 양편 사람을 아울러 써서 탕평(蕩平)의 정치를 하였지만, 당인(黨人)이 마음을 고치지 않은 것을 매우 미워하였으므로, 이따금 일에 따라 몹시 노하여 혹 합문(閤門)을 닫고 조정에 나오지 않거나 음식을 물리치고 먹지 않으며 문득 시상(時象)을 거론하였다. 이때에 이르러 또 전위(傳位)한다는 명을 내렸으나, 여러 신하들은 바로잡고 경계하려고 생각하지 않고 마지막에는 경사를 칭하고 진하(陳賀)하는 것으로 아첨하는 말을 아뢰고 미봉하였으니, 통탄스러워 견딜 수 있겠는가?"
【태백산사고본】 36책 48권 2장 B면【국편영인본】 42책 610면
【분류】왕실-국왕(國王) / 왕실-경연(經筵) / 역사-고사(故事) / 역사-사학(史學) / 사법-치안(治安) / 사법-탄핵(彈劾) / 인사(人事) / 정론-간쟁(諫諍) / 변란-정변(政變) / 윤리-사회기강(社會紀綱)
[註 006] 주창(主鬯) : 울창주(鬱鬯酒)를 맡았다는 뜻으로 울창주는 종묘(宗廟)에 제사지낼 때 태자(太子)가 올리게 되어 있음. 곧 태자를 의미하거나 임금의 후사(後嗣)를 이었음을 뜻함.[註 007] 효장(孝章) : 효장 세자. 후에 추존(追尊)한 진종(眞宗).[註 008] 을유년 : 1705 숙종 31년.[註 009] 올해에 또 만 1년이 지났다. : 숙종 31년(1705)에 숙종이 45세로 선위(禪位)하려 하였는데, 이 해 영조가 46세로 선위하려 하므로 이렇게 말한 것임.[註 010] 무신년 : 1728 영조 4년.[註 011] 신해년 : 1731 영조 7년.[註 012] 임자년 : 1732 영조 8년.[註 013] 갑인년 : 1734 영조 10년.[註 014] 을묘년 : 1735 영조 11년.
사신은 말한다. "임금이 무신년의 변란 뒤부터 노론(老論)·소론(小論) 양편 사람을 아울러 써서 탕평(蕩平)의 정치를 하였지만, 당인(黨人)이 마음을 고치지 않은 것을 매우 미워하였으므로, 이따금 일에 따라 몹시 노하여 혹 합문(閤門)을 닫고 조정에 나오지 않거나 음식을 물리치고 먹지 않으며 문득 시상(時象)을 거론하였다. 이때에 이르러 또 전위(傳位)한다는 명을 내렸으나, 여러 신하들은 바로잡고 경계하려고 생각하지 않고 마지막에는 경사를 칭하고 진하(陳賀)하는 것으로 아첨하는 말을 아뢰고 미봉하였으니, 통탄스러워 견딜 수 있겠는가?"
1월 12일 기미
임금이 인정전(仁政殿)에 나아가 하례를 받고 교서(敎書)를 반포하였다. 사유(赦宥)는 없었다. 의식대로 영의정(領議政) 이광좌(李光佐)가 백관(百官)을 거리고 치사(致詞)하고, 관학유생(館學儒生)도 전문(箋文)을 바쳤다. 제도(諸道)에 명하여 다만 전문만을 바치라고 하였다. 교서에 이르기를,
"왕은 이르노라. 대위(大位)를 떠나려고 생각하여 당초에 교지를 내려 진심을 말하였으나, 뭇사람의 뜻에 애써 따라서 마침내 생각을 고치고 명을 거두어 그대로 보위에 임하여 윤음(綸音)을 내린다. 생각하건대, 내가 백성을 편안하게 하고 돌보려는 마음이 황고(皇考)와 황형(皇兄)의 부탁을 저버릴까 염려하였는데, 몸소 어려움을 겪으면서 15년 동안 임금 노릇한 것이 스스로 부끄럽고, 도타운 정치를 힘썼으나 끝내 한두 가지도 바라는 대로 이룬 것이 없다. 백성의 고달픔은 날로 더욱 심해지는데 잦은 기근 때문에 소생하지 못하고, 시상(時象)은 함께 삼가고 공경할 기약이 없는데, 여러 번 경계하여도 보람이 없다.
여기서 세도(世道)가 모두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국가는 마땅히 날로 더욱 퇴폐하여질 것이다. 보위에 나아가 조정에 임하면 나 혼자만 부끄러울 뿐이거니와, 문을 닫고 음식을 물리친들 누가 마음을 고치겠는가? 그러므로 여러 달 동안 생각하고 드디어 어제 하교하여 겨우 다섯 살인 세자에게 맡기려 하였으니, 어찌 즐거워서 한 일이겠는가? 나이 마흔이 지났을 때에 이런 일을 하는 것은 참으로 부득이한 것인데, 상신(相臣)과 경재(卿宰)·사부(士夫)가 애써 말리되 문을 밀고 들어와 옷자락을 부여잡기까지 하며, 국구(國舅)와 종척(宗戚)·의빈(儀賓)이 모두 앞 다투어 또한 침석에까지 찾아와 무릎 앞에 다가앉아 말리니, 내 뜻이 이미 정해지기는 하였으나 뭇사람의 뜻을 어기기 어려웠다. 더구나 자성(慈聖)께서 근심하는 염려를 감히 받들지 않을 수 있겠는가? 또한 원량(元良)의 나이가 어려 끝내 근심된다. 그러므로 이에 밤이 새기를 기다리지 않고 드디어 마음을 바꾸어 따르기를 결정하고 보위에 그대로 임한다. 어찌 감히 열성(列聖)의 중대한 부탁을 잊겠는가? 앞서 내린 교지를 곧 거두니, 이것은 또한 선조(先朝)의 구법(舊法)을 따른 것이다. 고쳐서 반포하는 새 윤음으로 말하자면 대개 뭇 신하가 합심하여 보필하기를 바라는 것이다. 때마침 정초이니 누가 새로워지기를 꾀하지 않겠는가? 정사(政事)를 처음 시작하는 시기이니 나도 더욱 힘쓰겠다. 아! 만물이 모두 형통하여 더러운 것을 씻어 낼 때이니, 오늘부터 다시 시작하여 정신을 돋우어 잘 다스리기를 꾀할 것이다. 그러므로 이에 교시(敎示)하니, 미루어 잘 알아야 할 것이다."
하였다. 【홍문 제학(弘文提學) 박사수(朴師洙)가 지어 바쳤다.】 예(禮)가 끝나고서, 임금이 문신(文臣)·무신(武臣)·종신(宗臣) 2품 이상은 입시(入侍)하라고 명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법전(法殿)015) 에 친림(親臨)하여 경들을 다시 보니, 이미 애써 따르기는 하였으나 마음은 부끄럽다. 나와 함께 다시 나랏일을 하고 싶다면 마음을 합하여 함께 구제하도록 하라."
하고, 또 말하기를,
"이번 진하(陳賀)에 사유(赦宥)를 내리지는 않았으나, 정월에 노인을 우대하는 은전이 있어야 마땅하니, 사서(士庶)를 막론하고 나이가 1백 살에 찬 자에게는 모두 가자(加資)하도록 하라."
하고, 금오(金吾)016) 와 추조(秋曹)017) 에 명하여 가벼운 죄수를 석방하게 하고, 제도의 군향 환곡(軍餉還穀)으로 아직 받아들이지 못한 것을 모두 받아들이는 것은 멈추게 하였다.
1월 13일 경신
우의정 송인명(宋寅明)이 대명(待命)하니, 임금이 사관(史官)을 보내어 함께 오게 하였다. 송인명이 스스로 자신이 보상(輔相)이 되어 임금에게 뜻밖에 지나친 거조(擧措)가 있게 하였다 하여 인책하고 출사(出仕)하지 않았는데, 승지(承旨)에게 명하여 가서 전유(傳諭)하고 함께 들어오게 하였던 것이다.
봉조하(奉朝賀) 이태좌(李台佐)와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 송성명(宋成明)·김시환(金始煥)이 전선(傳禪)한다는 명이 내려졌을 때에 미쳐 명을 거두기를 같이 청하지 못하였다 하여 상소를 올려 인책하고 이어서 진계(陳戒)하니, 임금이 우악한 비답(批答)을 내렸다.
임금이 주강(晝講)을 행하였다. 지경연(知經筵) 윤순(尹淳)이 말하기를,
"성심(聖心)이 근래 매우 약해지셨습니다. 지난 무신년018) 에는 역적의 관문(關文)과 흉적의 격문(檄文)에도 성상께서 문득 웃으면서 불사르게 하여 거동이 안정되고 중후한 덕이 있음을 보이셨는데, 이제는 때가 지나고 일이 지나간 뒤에도 이렇게 잊지 않고 곳에 따라 촉발되어 번번이 평소의 마음을 말씀하십니다. 신하들 중에서 죄줄 만한 자는 죄주고 쓸 만한 자는 써야 할 따름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시상(時象)이 조화된 뒤에야 임금과 신하가 바르게 될 것인데, 이제 시상을 보면 무너져 터질 걱정이 있는 것 같으니, 나라가 장차 어떠하겠는가? ‘정백일심(精白一心)’ 네 자가 곧 경들의 증세에 맞는 좋은 약이니, 경들이 이를 마음에 간직한다면, 내가 자연히 평소의 마음을 잊게 될 것이다."
하였다. 장령(掌令) 김정윤(金廷潤)이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석강(夕講)을 행하였다.
1월 14일 신유
정언(正言) 홍정보(洪正輔)가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전하께서 매우 미워하시는 것은 당동 벌이(黨同伐異)이고 이루고자 하시는 것은 탕평(蕩平)입니다. 1백 년 동안 묵은 버릇이 이미 고질이 되어 하루 아침에 크게 바뀌어지기를 요구하기 어렵다면 여유를 두고 점점 물들여서 사라지기를 기다려도 본디 안될 것이 없습니다마는, 그 집안의 계책으로 삼아서 끝내 따르지 않는 자라면 참으로 이른바 굳이 친목하지 않는 자이니 성인이 맡게 되더라도 강단으로 다스릴 것인데, 전하께서는 그러지 않고 처음에는 문을 닫고 그들이 스스로 따르기를 바라시고, 문을 닫아도 고치지 않으니 이어서 음식을 물리치시고, 음식을 물리쳐도 따르지 않았기에, 이런 천만 뜻밖의 거조(擧措)가 있으셨습니다. 신하로서 임금의 명령을 따르지 않는 자는 본디 만 번 죽여도 아까울 것이 없는데, 임금으로서 그 신하를 따르게 하지 못하고 어제와 같은 일을 하기까지 하셨으니, 또 그것이 어떠할는지 모르겠습니다. 십수 년 이래로 사대부의 풍습이 더욱 변하고 심술(心術)이 더욱 무너져 청탁(淸濁)이 중간에서 혼동되고 하찮은 일로 서로 다툽니다. 다들 당(黨)이 없다고 하나 실은 모두 당을 짓고 있어 예전에는 오히려 서넛이었던 것이 이제는 대여섯이 되어 가지가지로 온갖 괴이한 꼴을 보이니, 이들은 전하의 조정을 하나의 희극(戲劇) 마당으로 만들었습니다. 전하께서 지나친 거조를 하시면 조금 스스로 움츠려지지만, 며칠이 지나지 않아서 또 전의 버릇대로 따르니, 신은 오늘 이후에도 반드시 조금이라도 보람이 있지는 못하고 전하의 지나친 거조만 연장될까 염려됩니다. 오늘날의 계책으로는 명령에 따르지 않는 자가 있으면 명백히 그 죄를 바루어 그 나머지를 격려해야 하고, 또 연약한 조태언(趙泰彦) 같은 자를 법을 세우는 본보기로 삼아서는 안될 것입니다."
하였는데, 비답(妣答)하기를,
"그 뜻이 처음 정사하는 때를 위한 것일지라도, 감히 대여섯이라는 따위의 말을 임금에게 다시 아뢸 수가 있는가?"
하였다.
임금이 주강(晝講)을 행하였다. 이에 앞서 임금이 친경례(親耕禮)를 행하려고 예조 판서(禮曹判書) 윤순(尹淳)을 시켜 영의정 이광좌(李光佐)에게 가서 묻게 하였다. 이날 윤순이 비로소 이광좌의 의논을 아뢰기를,
"임금의 정치는 백성을 편안하게 하는 것보다 앞세울 것이 없고, 백성을 편안하게 하는 근본은 오로지 농사를 권장하는 데에 있으니, 반드시 널리 백성의 고통을 물어서 그 고통을 없애고, 제도에 하유(下諭)하여 수령(守令)에게 신칙(申飭)해서 농사를 권장하는 데에 마음을 다하도록 하고, 무릇 땅이 없고 소가 없는 자는 잘사는 백성을 시켜 서로 돕게 하고, 종자가 없고 식량이 없는 자는 관가에서 도와 주고, 사자를 자주 보내어 근만(勤慢)을 살피고, 곤궁한 백성과 떠돌아다니는 백성들이 모두 밭에 나아가 일하게 하여 실효가 있게 하고 나서 몸소 친경례를 거행하면 백성이 보고 느끼는 보람이 있을 것입니다. 도리어 지금 농사를 권장하는 정사는 실사(實事)를 다하기도 전에 먼저 성대한 예를 거행하니, 백성을 편안하게 하는 정사에 실효가 없을 듯합니다. 이뿐만이 아니라, 모든 정사는 오로지 실속을 힘쓰기를 바라고서야 처음에 규모를 세우는 도리가 될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대신의 뜻은 친경을 불가하게 여기는 것이 아니지만, 내가 해마다 농사를 권장하는 분부를 내려도 겉치례가 될 뿐이고 마침내 실효가 없으므로, 몸소 쟁기를 잡아서 백성을 권장하려는 것일 뿐이다."
하였다. 윤순이 친경 의절(親耕儀節)을 아뢰고, 이어서 봉상 첨정(奉常僉正) 신유한(申維翰)이 정한 신농위차도(神農位次圖)를 바치니, 임금이 다 보고 나서 외방(外方)에 있는 유신(儒臣)에게 문의하게 하였다.
1월 15일 임술
하교하기를,
"나라는 백성에게 의지하고 백성은 먹는 것에 의지하니, 중히 여기지 않을 수 있겠는가? 옛날에 신농(神農)은 처음으로 농사를 가르쳤고, 주(周)의 후직(後稷)은 농사에 근본하였고, 아조(我朝)의 창업도 또한 주나라와 같다. 공자(孔子)가 ‘나는 그 예(禮)를 아낀다.’ 하였으니, 성인의 가르침을 알 수 있거니와, 이제는 권농(勸農)이 문득 겉치레가 되었으나, 몸소 밭에 가지 않으면 어떻게 권장하겠는가? 내가 때맞추어 친히 농기(農器)를 잡아서 뭇 백성을 권장하고 유사(有司)의 신하가 친경(親耕)하는 기구를 갖추어 첫 해일(亥日)에 거행하는 것이 어찌 농사를 중히 여기는 것일 뿐이겠는가? 바로 내 첫 정사 때에 위로 제물을 바치고 아래로 백성을 권장하는 뜻이다."
하였다.
이조 판서(吏曹判書) 조현명(趙顯命)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일전의 뜻밖에 내리신 한 명을 다행히 곧 도로 거두시기는 하였으나, 전하께서 당초에 무엇 때문에 이런 일을 하셨는지 모르겠습니다. 전하께서 임어하신 이후 15년 동안에 이같은 거조가 모두 몇 번 있었습니다. 문을 닫는 것으로 모자라면 음식을 물리치시기에 이르고, 음식을 물리치는 것으로 모자라면 보위를 사양하시기에 이르렀습니다. 한 마디에 한 마디를 더하여 그 안위(安危)와 흥망의 갈림이 오늘에 이르러 막다른 지경에 다다랐습니다. 아! 우리 태조 강헌 대왕(太祖康獻大王)께서 온갖 싸움터에서 분주하게 힘쓰며 어렵게 창업하시고 3백 년 동안 내려오면서 열성(列聖)께서 서로 이어받으시어 드디어 전하의 몸에 이르렀으니, 그 책임의 중대함이 어떠하겠습니까마는, 전하께서는 하루아침의 담소(談笑)로 다섯 살인 원량(元良)에게 맡기려 하셨습니다.
대저 더없이 어려운 것은 천위(天位)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어찌 전하의 장난감이겠으며 경솔히 그렇게 하십니까? 위로는 종묘(宗廟)가 놀라고 자성(慈聖)께서 근심하시게 하고, 아래로는 백관(百官)·군민(軍民)이 어찌할 줄 모르고 울부짖게 하셨으니, 어질다 할 수 있겠습니까? 동궁(東宮)이 지금은 마침 어리지만 뒤에 들어서 알면 반드시 크게 근심할 것이고, ‘오늘날이 어떤 때인가?’ 하는 말을 들은 자는 눈물을 흘렸으니, 자애(慈愛)하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명령이 전도되고 거조가 갑작스러웠으니, 신중하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반드시 이루어질 수 없다는 것을 명백히 알면서 그대로 하셨으니, 성실하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문무(文武) 백관이 분주하고 어찌할 줄 몰라 한밤에 금문(禁門)을 시장처럼 드나들고 임금 앞의 지척에 삼[麻]처럼 벌여 앉거나 서 있었으니, 예(禮)에 맞는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수장(收藏)을 게을리하는 것은 도둑을 부르는 것이 됩니다. 전하께서 성인(聖人)의 대보(大寶)를 헌신짝처럼 여기시니 전하께서 수장을 게을리하시는 것이 또한 심한데, 장차 초창의 혼란한 때에 간사한 도둑이 갑자기 마음을 일으켜 지난번 흉적(兇賊)과 같은 짓을 할 것이니, 또한 지혜롭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만 생각이 어그러져도 여섯 가지의 과실이 따르니, 전하의 성명(聖明)으로서 이런 일을 하시리라고 어찌 생각이나 하였겠습니까? 신은 실로 마음이 아픕니다.
신이 가만히 비망기(備忘記)의 사지(辭旨)와 연석(筵席)의 하교를 가지고 헤아리면 전하께서 이 일을 하실 때에 시상(時象)이라는 말씀과 소심(素心)이라는 두 가지 말씀이 있었는데, 이는 다 그렇지 않은 것이 있습니다. 시상이 화합하지 않는 것은 참으로 신하의 죄입니다마는, 또한 전하께서 명백히 살펴서 정성으로 감동시키고 위엄으로 감독하여 형벌로 다스리시기에 달려 있는 것인데, 어찌하여 반드시 이런 뜻밖의 일을 하셔서야 되겠습니까? 신이 듣건대, 요(堯)·순(舜)의 신하에도 사흉(四凶)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 죄악이 하늘에 사무쳤으나, 요·순이 이를 처치한 방도는 자기를 삼가고 남면(南面)하여 사흉을 죄주는 것에 지나지 않았는데 천하가 따랐으니, 어찌 일찍이 그 신하 때문에 지나치게 스스로 변변치 않게 여겼겠습니까? 요·순뿐이 아니라 한(漢)·당(唐)의 여러 임금들도 반드시 이와 같이 하지 않았을 것인데 전하께서는 즐거이 그렇게 하셨으니, 신은 초야(草野)의 유식한 자의 말과 천고의 어진 사가(史家)의 글이 오늘날의 뭇 신하에게만 죄를 돌리고 말지 않을 듯합니다. 소심(素心)이라는 하교에 대해서는 신이 감히 알 수 없습니다마는 신은 아직도 신축년019) 보위를 사양하시던 날 밤에 전하께서 태백(泰伯)과 중옹(仲雍)020) 에 관한 말씀을 하신 것을 기억하니, 전하의 소심은 태백을 사모하는 마음이 아니겠습니까?
전하께서 생각하여 보소서. 태왕(太王)에게 왕계(王季)021) 와 문왕(文王)022) 이 없었다면 태백이 마침내 형만(荊蠻)으로 도피하려는 뜻을 수행할 수 있었겠습니까? 이미 도피하지 못하고 태왕에게서 물려받았다면 마땅히 그 지위에 안정하여 부지런히 잘 다스리려고 꾀하여도 부족할 것인데, 어찌 젖내 나는 작은아들에게 어려움을 맡기고 한창인 나이에 한가로이 스스로 안락할 수 있었겠습니까? 그 행적을 보면 태백이 참으로 천승(千乘)의 자리를 초개처럼 여기고 훌쩍 속세를 떠날 생각이 있었던 듯하나, 그 마음은 종사(宗社)를 잊지 못하기 때문에 거룩한 문왕에게 나라를 전하여 구방(舊邦)의 운명을 새롭게 하고자 하였던 것입니다. 이제 전하께서는 참으로 종사를 안정시키고 국세(國勢)를 공고히 하실 수 있는데, 이것으로 주(周)나라 8백 년의 사업을 터잡는 것은 또한 태백의 일일 뿐이니, 전하께서 간절히 생각하시는 것이 겉에 보이는 행적을 사모하는 것이라면 또한 어그러지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전하께서는 이제 이미 뉘우쳐 고치셨고, 이미 지난 일은 구름이 하늘을 지나간 것과 같고 바야흐로 싹트는 기쁨은 샘이 비로소 두루 미친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천명(天命)이 돌보는 것이 바야흐로 새로워지고 인심이 바라는 것이 더욱 간절해졌으니, 지금이 바로 비색(否塞)한 것을 다하고 태안(泰安)한 데로 돌아가며 위태한 것을 바꾸어 편안하게 할 큰 기회입니다. 그러나 신이 구구하게 지나친 생각에서 나오는 근심은 또 있습니다. 허물을 고치는 것을 귀중히 여기는 것은 한 번 고치고서 다시는 하지 않는 것을 말하는 것이니, 이것이 안씨(顔氏)023) 가 잘못을 두 번 다시 하지 않으므로 부자(夫子)에게 칭찬받은 까닭입니다. 이제 전하께서 허물을 고치시는 것이 그렇지 않아서, 문을 닫는 데에서 고치고서 음식을 물리치는 데에서 두 번 다시 하고, 음식을 물리치는 데에서 고치고서 보위를 사양하는 데에서 다시 하시니, 다시 할 뿐이 아니라 혹 더 심하십니다. 이것은 바로 복괘(復卦)에 이른바 ‘자주 잃었다가 돌아오는 위태함’이라는 것인데, 자주 잃었다가 돌아와 마지 않으면 형세가 반드시 돌아올 곳을 잃게 될 것입니다.
신은 참으로 죽을 죄를 무릅쓰고 이렇게 말하겠습니다. 이 뒤로는 전하께서 또 앞으로 몇 번의 지나친 일을 하시면 곧 뉘우치고 곧 고치시더라도 성덕(聖德)에 흠이 되고 국맥(國脈)을 손상하는 것이 워낙 이미 많았습니다. 더구나 천심(天心)이 말없이 돕고 성심(聖心)이 돌아오는 것도 또한 어찌 번번이 바랄 수 있겠습니까? 이와 같은데도 나라가 망하지 않는 일은 없으니,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지난 일의 잘못을 깊이 경계하고 뒷일을 선처하기를, 도모하는 데에 힘쓰며, 늘 하늘과 조종(祖宗)께서 부탁하신 중대한 것을 생각하여 실추할까 염려하듯이 두려워하고 조심하며, 허물을 고치는 것은 근주(根株)를 베어 없애서 다시 싹트지 못하게 하듯 하며, 착하게 되는 것은 풍뢰(風雷)처럼 빨리하여 조금도 늦추지 말며, 마음을 두 번 성실하기를 힘쓰며, 사리를 밝히면 반드시 실천하며, 명령은 반드시 살피고 거조는 반드시 삼가며, 안정하고 정중하고 도탑고 굳센 것을 규모로 삼으며, 표준을 세우고 붕당을 깨고 백성을 사랑하고 만물에 은택을 입히는 것을 조목으로 삼아서 자손에게 좋은 계책을 끼쳐 만세에 태평을 여소서. 그러면 전하의 오늘날의 지나친 거조가 살별이 보이는 재앙으로 인해 덕을 입게 되고 옥을 다듬을 다른 돌이 되지 않을지 어찌 알겠습니까?"
하였는데, 비답(批答)하기를,
"이미 기구 대신(耆耉大臣)에게 유시(諭示)하였다."
하였다.
임금이 예조 판서(禮曹判書) 윤순(尹淳)을 인견(引見)하였다. 윤순이 말하기를,
"친경(親耕)은 으레 경칩(驚蟄) 뒤 첫 해일(亥日)에 행합니다마는, 경칩이 정월 27일에 있고 그 이튿날이 곧 해일인데 지맥(地脈)이 굳게 얼어서 쟁기질하기가 편리하지 않으니, 2월의 해일이 되거든 성례(盛禮)를 거행하는 것이 편리하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예(禮)에는 정월로 하였는데, 더구나 절후(節侯)가 이달에 있지 않은가?"
하였다. 윤순이 말하기를,
"지금 월령(月令)으로 보면 2월에 비로소 복숭아꽃이 피니, 삼왕(三王) 때에는 춘령(春令)이 오히려 일러서 그런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고금이 마땅한 것을 달리하니, 이대로 따를 수 없겠습니다. 후량(後梁)천감(天監)024) 연간에는 2월에 행사하였고, 조종(祖宗) 때에는 정월에 행하기도 하였고 2월에 행하기도 하였으니, 때에 따라 변통해야 할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2월 초가 어찌 정월 그믐께와 다르겠는가? 이번에는 위로 삼대(三代)를 따르고 다음으로는 아조(我朝)를 따르는 것이다. 어찌하여 반드시 후량의 예(禮)를 써야 하겠는가? 이달 28일에 행하도록 하라."
하였다. 윤순이 이어서 절목(節目)을 여쭈니, 먼저 대신(大臣)을 보내어 적전(籍田)의 친경할 곳을 살펴보게 하라고 명하였다. 드디어 어재실(御齋室) 두 칸을 짓고, 흙으로 담을 쌓고, 호조 판서(戶曹判書)를 경적사(耕籍使)로 삼고, 곡물 종자는 푸른 상자에 담고, 소는 황소를 써서 청색으로 덮고, 교서(敎書)를 반포하고, 선비를 시취(試取)하는 것을 모두 전례대로 하기로 하였다.
1월 16일 계해
약방(藥房)에서 입진(入診)하였다. 도제조(都提調) 김흥경(金興慶)이 말하기를,
"날씨가 추워서 친경(親耕)하실 수 없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예(禮)에 어그러진다고 꾸짖고, 이어서 친경하고 권농(勸農)하는 뜻을 제도의 방백(方伯)과 수령(守令)에게 미리 신칙(申飭)하라고 명하였다.
1월 17일 갑자
신사철(申思喆)을 공조 판서(工曹判書)로, 윤혜교(尹惠敎)를 예문 제학(藝文提學)으로 삼았다.
전 판서(判書) 김시환(金始煥)이 졸(卒)하였다. 김시환은 한미한 집에서 일어나 높은 지위에 이르렀는데, 그의 아우 김시혁(金始㷜), 김시형(金始炯)과 함께 기사(耆社)에 들어갔다. 한 집에서 열 사람이 급제하여 포홀(袍笏)025) 이 상(床)에 가득하였으나, 몸가짐이 성실하고 근신하며 집에서는 우애하고 화목하였으므로, 세상에서 만석군(萬石君)의 풍모가 있다고 일컬었다. 졸하자 효헌(孝憲)이라 증시(贈諡)하였다.
1월 18일 을축
영의정 이광좌(李光佐)가 청대(請對)하여, 날씨가 추운데 친경(親耕)하면 성체(聖禮)를 손상시킬까 염려된다고 누누이 아뢰었으나, 임금이 따르지 않았다.
예조 판서(禮曹判書) 윤순(尹淳)이 청대하여 아뢰기를,
"친경의 의주는 《오례의(五禮儀)》에 대강이 실려 있을 뿐이고 의거할 만한 다른 전고(典故)가 없으므로, 태상(太常)026) 에 문의하여 겨우 두 그림을 만들어 재결을 앙품하였습니다. "
하니, 임금이 그림을 거두어 보았다. 윤순이 말하기를,
"친경하여 쟁기를 다섯 번 미신 뒤에 대신(大臣)과 종신(宗臣)이 좌우에서 나란히 밭을 갑니다마는, 한 이랑 사이에 소 두 마리가 들어가기 어렵습니다. 그러므로 두 본(本)을 그렸는데, 하나는 짝지어 서서 나란히 가는 것이고 하나는 앞뒤로 이루어 가는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짝지어 서고서야 나란히 가는 것이 될 수 있으니, 이것으로 의주를 정하도록 하라."
하니, 윤순이 말하기를,
"노주례(勞酒禮)에 경하(慶賀)하지 않고 상수(上壽)하지 않는다는 글이 있으며, 송(宋)나라의 《정화례(政和禮)》와 《대명집례(大明集禮)》를 상고하면 모두 경하와 사유(赦宥)를 하지 않는데, 아조(我朝)에서는 대개 드문 은전을 거행하기 때문에 경하를 아뢰고 선비를 시취(試取)합니다. 감히 위에서 재결하시기를 청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선농(先農)을 제사하고 친경한 뒤에 어찌 선사(先師)에게 예를 행하지 않겠는가? 선비를 시취하는 일은 이미 반포하였으므로 많은 선비를 속일 수 없는데, 더구나 알성(謁聖)할 해를 당한 때이겠는가? ‘친경후알성(親耕後謁聖)’이라 이름하여 3월에 행하도록 하라."
하였다. 친경 때에는 전례에 대호군(大護軍)이 시위(侍衛)하는 절차가 있었는데, 임금이 복색을 물었다. 윤순이 의거할 만한 것이 없다고 대답하자, 임금이 말하기를,
"전에 보니 총부(摠府)027) 에 전해 오는 갑주(甲冑)가 있었는데, 이제는 철릭[帖裏]028) 으로 바뀌었다. 이미 장군(將軍)이라 칭하였으면 어찌 칠릭을 입을 수 있겠는가? 좌우위(左右衛)의 장군은 갑주를 갖추고 양편에서 시위하게 하라. 그리고 상호군(上護軍)이 운검(雲劍)의 예(例)에 따라 모대(帽帶)를 갖추고 검을 차고 책(策)을 잡으면, 대호군은 궁시(弓矢)를 차고서 편(鞭)을 잡을 수 없을 것이다."
하였다. 윤순이 말하기를,
"친경하는 밭두둑에 둘러서서 호위하는 자가 없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포장을 치면 된다."
하였다. 윤순이 말하기를,
"승지(承旨)가 전해 내리는 것은 외선온(外宣醞)이라 하고 중관(中官)이 전해 내리는 것은 내선온(內宣醞)이라 하여 찬품(饌品)이 각각 다른데, 어떻게 거행해야 하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외선온은 너무 소략하니 내선온으로 거행하되 주원(廚院)029) 을 시켜 다례(茶禮)의 예에 따라 유밀과(油密果)는 제외하게 하고, 선온할 때에 대신(大臣)에게는 녹사(錄事)가 음식을 바치고 경재(卿宰) 이하에게는 서리(書吏)가 임시로 거행하고 기민(耆民)에게는 위졸(衛卒)이 자의(紫衣)·자건(紫巾)을 갖추고서 거행하는 것이 가하다."
하고, 또 하교하기를,
"노주(勞酒) 때에는 마땅히 소를 잡아서 음식을 장만해야 하겠으나, 친경하여 농사를 권장할 때에 농우(農牛)를 죽일 수 없으니 돼지로 갈음하도록 하라."
1월 19일 병인
서종옥(徐宗玉)을 대사헌(大司憲)으로, 이광부(李光溥)를 집의(執義)로, 윤득경(尹得敬)·정준일(鄭俊一)을 지평으로, 심악(沈)을 교리로, 서명신(徐命臣)을 부수찬으로 삼았다.
형조 판서(刑曹判書) 박사수(朴師洙)가 상소하여 사직하였다. 이때 양차만(梁次萬)이라는 자가 무명을 팔면서 시리(市利)를 어지럽히므로 형조(刑曹)의 금리(禁吏)가 잡고자 하였으나, 양차만이 중추부(中樞府)에 숨고 부리(府吏)가 떼 지어 금리를 때렸는데, 소란을 피운 것을 하소연하니 대신(大臣)이 금리를 결장(決杖)하였다. 박사수가 성나서 상소하기를,
"대신의 아문(衙門)이 양차만의 성사(城社)030) 가 되어 숨는 것이 더욱 깊어지고 기세가 더욱 펴지니, 신은 동선(董宣)이 호양 공주(湖陽公主)의 종을 때려 죽인 일031) 을 생각하면 부끄럽습니다."
하고, 판부사(判府事) 서명균(徐命均)·김흥경(金興慶)·이의현(李宜顯)도 사직하는 차자(箚子)를 올리니, 임금이 예사 비답을 내렸다.
1월 20일 정묘
임금이 소대(召對)하였다. 검토관(檢討官) 오수채(吳遂采)가 양역(良役)의 폐단을 말하고 한 필(匹)로 하는 제도를 정하여 행하기를 청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두 필의 역(役)은 본디 무거운 것이 아니다. 이제 한 필로 줄이더라도 또 어떠한 폐단을 일으켜서 점점 반 필이 될는지 모르고 반드시 아주 없어지게 될 것인데, 그러면 어찌할 것인가? 요순(堯舜)도 널리 베풀기를 어려워하였으니, 어찌 덕의(德意)를 두루 펼 수 있겠는가? 나는 인재를 얻는 것을 먼저 힘쓸 일로 여긴다."
하였다.
사신은 말한다. "양역의 폐단은 백성의 큰 고통이니, 오수채가 베[布]를 줄이기를 청한 것은 본디 옳으나, 바로잡을 좋은 방책을 강구하지 않고 감면하는 정사를 갑자기 시행한다면, 장래의 폐단이 또 전보다 갑절이나 더할 것이다. 임금이 가벼이 윤허하지 않고 인재를 얻는 것을 어렵게 여긴 것은 참으로 마땅하다. 이 뒤에 조현명(趙顯命)·홍계희(洪啓禧)가 건의하여 양역을 한 필로 줄이고 어염세(魚鹽稅)·선세(船稅)와 결전(結錢)·선무(選武)의 명색을 따로 창설하여 모자라는 것을 채웠다. 그래서 온 나라 안이 떠들썩하였다."
【태백산사고본】 36책 48권 7장 B면【국편영인본】 42책 612면
【분류】왕실-경연(經筵) / 역사-사학(史學) / 군사-군역(軍役) / 재정-잡세(雜稅) / 재정-국용(國用)
사신은 말한다. "양역의 폐단은 백성의 큰 고통이니, 오수채가 베[布]를 줄이기를 청한 것은 본디 옳으나, 바로잡을 좋은 방책을 강구하지 않고 감면하는 정사를 갑자기 시행한다면, 장래의 폐단이 또 전보다 갑절이나 더할 것이다. 임금이 가벼이 윤허하지 않고 인재를 얻는 것을 어렵게 여긴 것은 참으로 마땅하다. 이 뒤에 조현명(趙顯命)·홍계희(洪啓禧)가 건의하여 양역을 한 필로 줄이고 어염세(魚鹽稅)·선세(船稅)와 결전(結錢)·선무(選武)의 명색을 따로 창설하여 모자라는 것을 채웠다. 그래서 온 나라 안이 떠들썩하였다."
1월 22일 기사
예조 판서(禮曹判書) 윤순(尹淳)이 청대(請對)하여 말하기를,
"친경(親耕)하실 밭이 아직도 굳게 얼어 있는데 그 깊이를 헤아리면 거의 한 자 남짓이나 되므로 반드시 날카로운 도끼로 땅을 갈라야 비로소 쟁기를 넣을 수 있을 것이니, 마땅히 두세 고을의 민정(民丁)을 부려야 하겠습니다."
하고, 승지 양정호(梁廷虎)가 말하기를,
"아조(我朝)의 친경하는 예(禮)는 전에 중춘(仲春)에 거행할 일이 두 번 있었으니와, 이제 2월로 물려서 거행한다면 백성이 일하러 가는 괴로움이 없을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이 예를 거행한 뒤에야 팔도에서 비로소 경작할 수 있으니, 백성을 부리는 것이 어렵기는 하지만 더욱 예를 준수해야 할 것이다."
하고, 이어서 경기 감사(京畿監司)에게 하유(下諭)하여 일하러 갈 백성에게 선포하게 하였다.
1월 24일 신미
지평(持平) 윤득경(尹得敬)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대저 전선(傳禪)하는 일은 세자가 장성한 뒤에도 본디 늘 행하고 으레 있는 일이 아닌데, 더구나 동궁 저하(東宮邸下)는 바야흐로 겨우 다섯 살이므로 보육(保育)하는 사람을 아직 떨어뜨리지 못하니, 요순처럼 거룩하더라도 어떻게 나라를 전해 주겠습니까? 전하의 성명(聖明)으로써 그것이 반드시 될 수 없으리라는 것을 아시면서도 아주 뜻밖의 분부를 갑자기 내리신 것은 무슨 까닭입니까? 다행히 종사(宗社)의 말없는 도움에 힘입어 곧 명을 도로 거두셨지만, 이것이 어찌 처음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번번이 박자(拍子)가 있어 이 조목을 칭할 때마다 초정(初政)이라 하거나 신화(新化)라 하는 것을 보면 눈에 거슬리고 들으면 의혹되니, 신은 참으로 어리석어서 그러한 까닭을 모르겠습니다. 이번에 친경(親耕)하시는 일은 실로 여러 세대 동안 드물게 거행하는 전례(典禮)이니, 모든 신민이 누구인들 앞을 다투어 기꺼이 보지 않겠습니까마는, 천하의 만사는 실심(實心)에 달려 있을 뿐입니다. 전하께서 백성을 아끼는 마음에 과연 부실한 것이 없다면 친경하시지 않더라도 나라의 모든 백성이 모두 성택(聖澤)을 입을 것이니, 이러한 성례(盛禮)도 겉치레가 될 뿐입니다.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그 실속을 다하기를 힘쓰소서."
하였는데, 비답(批答)하기를,
"이번 일은 백성을 위하는 데에 뜻이 있다. 어찌 조금이라도 겉치레의 마음이 있겠는가?"
하였다.
예조 판서(禮曹判書) 윤순(尹淳)을 입시(入侍)하도록 명하여 친경(親耕)할 곳의 역사가 어려운지를 묻자, 윤순이 대답하기를,
"하늘의 조화는 참으로 헤아릴 수 없습니다. 한 밤 사이에 남풍이 잇달아 불어서 지기(地氣)가 상승하여 굳게 얼었던 땅이 절로 일어나 터져 녹아 풀렸으므로 힘을 쓰기가 매우 쉬워서 오늘 일이 끝나 가는데, 상교(上敎)를 선포하고 양식 쌀을 나누어 주니, 일하는 백성이 다 손을 모아 송축하였습니다."
하였다.
1월 25일 임신
유복명(柳復明)을 대사간으로, 송징계(宋徵啓)를 사간으로, 민계(閔堦)를 정언(正言)으로, 오원(吳瑗)을 부제학으로, 조영국(趙榮國)을 부교리로 삼았다.
1월 26일 계유
예조에서, 친경(親耕) 때의 예문(禮文)에 어전 수우(御前隨牛) 두 사람이 있는데, 근시(近侍)·중관(中官)은 다 힘이 약하고 소를 모는 데에 익숙하지 못하다 하여, 서인(庶人) 가운데에서 강의(絳衣)·개책(介幘)을 갖추게 한 두 사람을 더 정하여 돕게 하기를 청하니, 임금이 윤허하였다.
1월 27일 갑술
임금이 법가(法鴐)를 갖추고 선농단(先農壇)에 나아갔는데, 이튿날 선농에게 친제(親祭)하고, 친경례(親耕禮)를 거행할 것이기 때문이다.
1월 28일 을해
임금이 선농단(先農壇)에 친제(親祭)하였다. 헌가악(軒架樂)을 연주하였으나 송신례(送神禮)가 없자 변두(籩豆)를 치우고 말았다. 초헌(初獻)을 행하고 나서 예의사(禮儀使) 윤순(尹淳)이 소차(小次)에 들어가기를 청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백성을 위하여 풍년 들기를 비는데 어찌 노고를 꺼릴 수 있겠는가?"
하고, 따르지 않고 적전 친경(籍田親耕)을 의식대로 거행하였다. 하루 전에 전하의 경적위(耕籍位)를 남유문(南壝門) 밖 동남쪽으로 10보(步) 떨어진 곳에 남쪽으로 향하여 지세의 편의에 따라 설치하였다. 【봉상시(奉常寺).】 악좌(幄座)를 관경대(觀耕臺) 위에, 소차(小次)를 서계(西階) 아래 【조금 북쪽.】 에 다 남쪽으로 향하여 설치하였다. 【전설사(典設司).】 또 판위(版位)를 경적소(耕籍所)에 남쪽으로 향하여 시경위(侍耕位)를 동서계(東西階) 아래에 북쪽이 윗자리가 되게 설치하였다. 【봉상시.】 종경(從耕)하는 종친(宗親)·재신(宰臣) 【대신(大臣).】 의 자리를 동남쪽에 설치하였으며, 육경(六卿)·양사(兩司)의 자리가 그 남쪽에 있는데 다 서쪽으로 향하고, 【북쪽의 윗자리이다.】 서인(庶人)의 자리가 또 그 남쪽의 조금 동쪽 【10보(步) 밖.】 에 있고, 기민(耆民)의 자리가 그 남쪽에 있는데 다 서쪽으로 향하였으며, 친경(親耕)에 쓰는 쟁기의 자리를 종친의 북쪽 조금 서쪽에 남쪽으로 향하여 설치하였다. 【봉상시.】 친경에 쓰는 소를 친경위의 서쪽 조금 북쪽에 세웠다. 【사복 시(司僕寺).】 등가악(登歌樂)을 관경대 위에, 헌가(軒架)를 서인 경위(庶人耕位) 서남쪽에 【모두 북쪽으로 향하여.】 설치하였다. 【장악원(掌樂院).】 경적사(耕籍使)의 자리를 친경위의 동쪽에 【남쪽으로 향하여 북쪽이 윗자리가 되게.】 봉청상관(奉靑箱官)과 집분삽관(執畚鍤官)의 자리를 그 뒤에, 경기 관찰사(京畿觀察使)·읍령(邑令)과 현령(縣令)들의 자리를 서인의 동쪽에 【서쪽으로 향하여 서쪽이 윗자리가 되게.】 설치하였다. 【읍령은 적전(籍田)을 관장하는 고을의 수령이다.】 종경관(從耕官)의 자리를 친경위의 동쪽에 설치하고, 또 종경에 쓰는 쟁기와 소를 그 뒤에, 백관(百官)의 자리를 여러 집사(執事)들의 뒤 【조금 남쪽.】 에 설치하였다.
이날 전하가 대차(大次)에 나아가 장차 경적(耕籍)하려 할 때에 봉상 정이 조복(朝服)을 갖추고서 쟁기를 잡는 자들을 거느리고 먼저 자리에 나아가고, 시경(侍耕)·종경(從耕)하는 여러 집사와 문무 백관(文武百官)아 다 조복을 갖추고 관찰사·읍령과 현령들이 각각 자리에 나아갔다. 【5품(五品) 이하와 현령은 모두 흑단령(黑團領)을 입었다.】 중엄(中嚴)032) 에 전하가 원유관(遠遊冠)을 갖추고 외판(外辦)033) 【중엄·외판 이하는 통례(通禮)가 상의(常儀)대로 계청(啓請)하였다.】 에 전하가 대차(大次)에서 나와 여(輿)를 타니, 헌가악(軒架樂)이 연주되기 시작하였다.
관경대의 남계(南階) 아래에 이르러 여에서 내려 규(圭)를 잡으니, 예의사(禮儀使) 윤순(尹淳)이 앞에서 인도하였다. 경적위에 이르러 남쪽으로 향하여 서자 【음악이 그쳤다.】 윤순이 경례(耕禮)를 거행하기를 계청하였다. 적전 영이 쟁기를 바치고 북으로 향하여 꿇어앉아 집을 벗겨 보습을 내어 동으로 향하여 서서 봉상 정에게 주고 봉상 정이 승지에게 주고 승지가 보습을 바치고 사복 정(司僕正)이 소를 바쳤다. 【수우(隨牛)는 두 사람이다.】 전하가 규를 꽂고 쟁기를 받으니 음악이 연주되기 시작하였다. 【승지 한 사람과 중관(中官) 두 사람이 쟁기를 잡는 것을 도왔는데 중관은 흑단령을 입었다.】 사복 정이 고삐를 잡고 【두 소를 모두 한 고삐로 하여 뒷쪽의 조금 왼쪽에서 잡았다.】 다섯 번 밀었다. 예(禮)가 끝나고 쟁기를 벗기니 음악이 그쳤다. 승지가 쟁기를 받아서 받았을 때처럼 전해 주니 적전 영이 집을 도로 씌웠다. 전하가 규를 잡으니 윤순이 인도하였다. 전하가 관경대에 오르니 헌가악이 연주되기 시작하고, 음악이 그치니 등가악이 연주되기 시작하고 전하가 자리에 가까이 가니 음악이 그쳤다. 종경(從耕)하는 재신(宰臣)인 영의정(領議政) 이하가 친경한 동쪽 이랑에 가고 종신(宗臣)이 서쪽 이랑에 가고 【다 조금 북쪽에 있다.】 쟁기를 잡은 자들이 각각 쟁기를 주니 【조경(助耕)하고 수우(隨牛)하는 사람이 따랐다.】 헌가악이 연주되기 시작하였다. 일곱 번 미는 예를 거행하고 물러나 자리로 돌아왔다. 【음악이 그쳤다.】 종경관(從耕官)인 이조 판서(吏曹判書) 조현명(趙顯命)·대사헌(大司憲) 서종옥(徐宗玉)이 차례로 영상(領相)의 이랑 동쪽 이랑에 가고, 병조 판서(兵曹判書) 조상경(趙尙絅)·대사간(大司諫) 유복명(柳復明)이 종신의 이랑 서쪽 이랑에 가고, 앞에서 한 것처럼 쟁기를 주고 조경(助耕)하니 음악이 연주되기 시작하고 아홉 번 미는 예를 거행하였다. 【음악이 그쳤다.】 시종(侍從)·종경관과 문무 백관이 모두 관경대 아래에 가서 처음으로 서립(序立)하니 봉상 판관(奉常判官)이 서인(庶人)을 거느리고 1백 이랑을 갈았다.
끝나고서 경적사(耕籍使) 유척기(兪拓基)가 동계(東階)로 올라가 악좌(幄座) 앞 조금 동쪽에 나아가 서쪽으로 향하여 서고, 배경(陪耕)하는 기민(耆民)이 관경대 아래에 나아가 북쪽으로 향하여 사배(四邦)하고 꿇어앉으니, 도승지 조석명(趙錫命)이 교지(敎旨)를 받아 남계(南階) 동쪽에 가서 서쪽으로 향하여 서서 교지를 선포하기를, 【좌통례(左通禮)가 받아서 선포하였다.】 ‘기민을 공경히 위로한다.’ 하였다. 기민이 사배하고 다 자리로 돌아가니, 윤순(尹淳)이 예가 끝났음을 아뢰었다. 전하가 남계로 해서 내려가니 등가악이 연주되기 시작하고 관경대 아래에 이르니 음악이 그쳤다. 전하가 규를 놓고 여(輿)를 타니 헌가악이 연주되기 시작하고 대차(大次) 앞에 이르니 음악이 그쳤다. 전하가 여에서 내려 대차에 들어가니 봉청상관(奉靑箱官)이 늦벼·올벼의 씨를 봉상 정의 경소(耕所)에 전해주어 뿌렸고 판관이 주부(主簿)를 거느리고 1백 이랑을 마친 것을 살펴보았다. 봉상 정이 일이 끝난 것을 살피고 대차에 이르러 북면(北面)하여 꿇어앉아 일이 끝났음을 아뢰니 임금이 쟁기를 끈 소의 옷을 태상(太常)에 간직하라고 명하고 또 어경우(御耕牛)는 죽을 때까지 태복(太僕)034) 에게 먹여 기르라고 명하였다. 이에 앞서 윤순이 소를 백성에게 돌려주면 잡을 염려가 있을 듯하다고 아뢰니, 임금이 그 산 것을 보고 차마 죽는 것을 볼 수 없다는 뜻으로 이렇게 명한 것이다. 예(禮)가 끝나고 임금이 관경대에 나아가 여러 대신 및 경기 감사(京畿監司)와 수령을 인견하고 경기 감사에게 호피(虎皮)를, 양주 목사(楊州牧使)에게 궁시(弓矢)를 내렸다. 임금이 조정의 신하가 모두 나온 것을 감탄하여 말하기를,
"오늘과 같으면 나라의 일이 될 수 있을 것이다."
하였다. 대신들이 앞에 나아가 예가 끝난 것을 경하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당(唐)나라 현종(玄宗)도 친경(親耕)을 행하였으나 마침내 천보(天寶)의 난(亂)을 가져왔으니, 내 마음도 어찌 끝내 게을러지지 않으리라고 보증하겠는가? 이제부터 앞으로는 경들이 민사(民事)에 대하여 늘 손수 쟁기를 잡았을 때와 같이 여기기를 바란다."
하고, 또 영의정 이광좌(李光佐)에게 말하기를,
"경이 지난 해에 치사(致仕)하였을 때에 어찌 다시 나와 더불어 종경(從耕)할 줄 알았겠는가? 이는 천명일 것이다."
하였다. 한낮에 거가(車鴐)가 돌아가다가 효종(孝宗)의 잠저(潛邸)에 들러 살피고 효종의 외손 정지익(鄭志翼)·홍익준(洪益宗) 등을 불러 보고 모두 승서(陞敍)하게 하였다.
1월 29일 병자
임금이 인정전(仁政殿)에 나아가 교서(敎書)를 반포하고 선온(宣醞)하였다. 교서에 이르기를,
"왕은 이르노라. 천시(天時)에 따라 월령(月令)을 행하되 전사(田事)를 먼저하니, 적전(籍田)에 가서 농사를 가르치되 경례(耕禮)를 크게 거행하였다. 그러므로 돌아와 정전(正殿)에서 연음(宴飮)하고 사방에 포고한다. 생각하건대, 이 어려운 농사는 실로 임금이 힘써야 할 바이다. 종사(宗祀)를 받들되 갖은 제물을 바쳐야 그 덕이 향기롭고, 민산(民産)을 다스리되 섬기고 기르는 물자를 주어야 먹을 것이 넉넉하니, 온갖 예(禮)의 용도는 여기에 힘입고 한 해의 일은 이에 따라 이루어진다. 대개 나라를 넉넉하게 하고 백성을 풍족하게 하는 것이 여기에 달려 있으니 반드시 부지런히 힘써서 거두어야 하는데, 밭에서 일하고 농사에 힘쓰는 것이 매우 고생스러우니 어찌 권장하는 방도를 늦추겠는가? 그러므로 예경(禮經)에 있는 친경(親耕)의 의례를 상고하였는데, 이는 본디 임금이 몸소 솔선하는 교화를 위한 것이다. 대저 하(夏)·은(殷)·주(周)의 성세(盛世)에서는 모두 천하를 앞장서 이끌어 농사를 밝혔고, 한(漢)·당(唐)·송(宋) 같은 중치(中治)의 때에도 큰 근본을 능히 알아서 적전을 닦았다. 이는 다 나라의 중요한 것으로 누구나 때에 따라 행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아! 우리 국가는 더욱이 이 전례(典禮)를 숭상하였다. 열조(列朝)에서 몸소 경작하는 덕에 힘썼으니, 대개 옛일을 본떠 여러 번 거행하셨으나, 영고(寧考)035) 께서 예경의 글을 참작하고 그 의례를 갖춘 것을 탄복하고도 거행하지 못하셨다. 내가 부탁받은 책무를 맡아 뿌리고 거두려는 마음을 게을리하지 아니하여, 한 사람도 굶주리지 않게 하려 하고 도롱이를 입고 근로할 생각을 늘 품었다. 백무(百畝)의 밭을 잘 다스리지 못할까 염려하는 농부 중에서 누가 비단 옷을 입고 좋은 음식을 먹는 사람의 불안함을 알겠는가? 새해 처음에 농사를 권장하는 말이 어찌 나의 겉치레이겠는가? 첫 신일(辛日)에 농사를 비는 예(禮)를 행하여 내가 바르고 밝게 하는데 어찌하여 재앙이 거듭 이르러 농사가 여러 번 흉년이 드는가? 농사를 이미 그르쳐 재삼(載芟)036) 의 노래는 오랫동안 끊겼고, 버려져 여윈 자가 회복하지 못하여 괴롭고 굶주리는 한탄이 늘 많았다. 이는 내가 백성을 부지런히 근심하는 생각이 하늘의 복을 받을 만하지 못하고 내가 농사를 중히 여기는 방도가 땅에서 생기는 이익을 다할 만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백성의 근심이 극심함을 오래도록 생각하더라도 내가 그 노동에 종사하는 것만 같지 못하다.
바야흐로 봄날이 화창하여 바로 밭에서 일을 시작할 때인데 더구나 동교(東郊)의 옛 의례가 있었던 곳이겠는가? 그래서 예조(禮曹)의 신하에게 하교하고 사농(司農)의 관속에게 분부하여, 늦벼·올벼 씨를 바치고 농구(農具)를 가리게 하되 길일은 원진(元辰)037) 에 잡고, 제단에 나아가 선농을 제사하되 음악은 태주(太蔟)038) 에 맞추었다. 청굉(靑紘)039) 을 갖추고 새벽에 거가(車鴐)가 떠나니 적전의 의례를 어기지 않았고, 검푸른 쟁기를 메우고 큰 고삐를 잡으니 신에 흙이 묻는 노고를 꺼리지 않았다. 나란히 밭갈 때에는 너희 공경(公卿)이 서로 자리잡고 쟁기를 밀 때에는 일곱 또는 아홉 번 하는 차례가 있었다. 옥좌에 앉아 뿌리고 심는 어려움을 염려하여도 예전에는 대궐에서 겨를이 없었으나, 현면(玄冕)040) 을 갖추고 농구를 잡고서 이번에는 밭에서 친경하였다. 봄에 무엇을 바라겠는가? 단지 사람의 일에 힘써 농사를 부지런히 할 뿐이다. 그래야 가을에 거둘 것이 있어 신름(神廩)이 차서 겨울·가을 제사에 제물 바치는 것을 볼 것이고, 봄 제단 가에서 꾀꼬리가 울고 쟁기를 단 검푸른 끝채를 보고서 전준(典畯)041) 이 기뻐할 것이니, 백 년 동안 폐지되었던 전례(典禮)를 거행하는 것이 어찌 태평하고 안락한 뜻에서 나왔겠는가? 팔도의 뭇사람이 듣는 바를 용동(聳動)시켜 참으로 권하여 이끄는 뜻을 붙인 것이니, 한 번 밭가는 일이 끝나자 열 줄의 교서를 크게 편다. 아! 내가 이미 몸소 먼저 힘썼으니 조금이라도 버려두고 짓지 않음이 없도록 하라. 근검(勤儉)으로 나라를 이끌어 시초에 새롭게 교화하기를 힘쓰니, 효제(孝悌)하고 농사에 힘써 너희 풍속을 크게 바꾸기 바란다. 그러므로 이에 교시(敎宗)하니 잘 알아야 할 것이다." 【예문 제학(藝文提學) 윤혜교(尹惠敎)가 지어 올렸다.】 하였는데, 선교관(宣敎官) 이덕중(李德重)이 읽었다. 끝나고서 임금이 시위(侍衛)하는 여러 신하들에게 명하여 다 앉게 하여 선온(宣醞)하고, 친경(親耕) 때에 집사(執事)한 신하들이 적전(籍田)에서 밭간 백성과 기로(耆老)를 전정(殿庭)에 인도하여 노주례(勞酒禮)를 거행하였다. 등가악(登歌樂)이 연주되기 시작하니, 기민(耆民)·서인(庶人)이 각각 친경 때의 옷을 입고 차례로 들어와 배위(拜位)에 나아가 창(唱) 없이 사배(四拜)하였다. 끝나고서 각각 동서위(東西位)에 가서 앉으니, 집사자(執事者) 【위군(衛軍).】 가 각각 기민·서인 앞에 찬기(饌器)를 벌여 놓았다. 내자시(內資寺)의 관원이 술 【단술.】 을 따라 집사자에게 주고 집사자가 잔을 돌리니, 기민·서인이 다 자리에서 비켜서 부복하고 꿇어앉아 잔을 받았다. 끝나고서 자리로 돌아가니 두 번째 잔을 돌리고 세 번째 술을 따를 때에 이르러서는 위의 의식과 같이 하였다. 조금 있다가 집사자가 찬기를 치우니, 기민·서인이 배위로 돌아가 창 없이 사배하였다. 끝나고서 좌통례(左通禮)가 동계(東階)로 해서 올라가 어좌 앞에 나아가 부복하고 꿇어앉아 예가 끝났음을 아뢰니, 【찬의(贊儀)가 또한 "예필(禮畢)"이라 창하였다.】 등가악이 그쳤다. 임금이 밭을 간 백성에게 먹인 음식을 가져오라고 명하여 친히 보고 말하기를, "아주 박하지는 않다." 하였다. 대비전(大妃殿)에서 떡 6가(架)와 술 20병(甁)을 특별히 내렸는데, 임금이 백성에게 나누어 내리라고 명하고 말하기를, "오늘의 이 성대한 행사에 너희들은 한껏 취하고 배불리 먹어야 한다." 하고, 또 하교하기를, "임금이 의지하는 것은 백성이고 백성이 의지하는 것은 먹는 것이니, 너희들은 오늘 취하고 배부른 것을 잊지 말고 부지런히 힘쓰라." 하고, 또 입시(入侍)한 여러 신하들에게 명하여 한껏 취하고 즐기고서 파하게 하였다. 좌상(左相) 송인명(宋寅明)이 인책하고 출사(出仕)하지 않았는데, 이때에 이르러 임금이 친경하기 때문에 출사하여 거가(車鴐)를 따라가고 이어서 선온에 참여하였다. 송인명은 탕평(蕩平)의 논의를 주장하여 이광좌(李光佐)와 뜻이 맞지 않았는데, 함께 정승이 된 지 얼마 안 가서 이광좌는 탄핵을 받아 나가고 송인명이 혼자서 조정의 계책을 오로지 하였다가, 전위(傳位)한다는 하교가 내려졌을 때에 이광좌가 조정에 나아가니, 송인명이 핑계삼아 인퇴하였다. 종신(宗臣)인 밀창군(密昌君) 이직(李樴) 등이 나아가 말하기를, "전하께서 여러 조정에서 겨를이 없었던 전례(典禮)를 거행하였으나 아직 동조(東朝)042) 에 상수(上壽)043) 하지 못하셨으므로 신민이 참으로 억울하게 여기니, 동조께 여쭈어 정례(情禮)를 조금 펴소서." 하고, 대신(大臣)·예관(禮官)도 잇달아 말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동조에서 겸손하시니 힘을 얻기 어려울 듯하다." 하였다.
【태백산사고본】 36책 48권 9장 B면【국편영인본】 42책 613면
【분류】왕실-국왕(國王) / 왕실-사급(賜給) / 왕실-비빈(妃嬪) / 어문학(語文學) / 예술-음악(音樂) / 농업-권농(勸農) / 농업-전제(田制) / 정론(政論) / 사법(司法) / 인사(人事)
[註 035] 영고(寧考) : 숙종을 가리킴.[註 036] 재삼(載芟) : 《시경(詩經)》의 편명(篇名). 이 시는 봄에 적전(籍田)을 갈고 사직(社稷)에 비는 것을 노래하였다 함.[註 037] 원진(元辰) : 정월에 선농(先農)을 제사하는 길일.[註 038] 태주(太蔟) : 십이율(十二律)의 하나. 황종(黃鍾)으로부터 셋째 율, 십이지(十二支) 중의 인(寅), 열두 달 중의 정월에 배정함.[註 039] 청굉(靑紘) : 굉은 관(冠)에 다는 끈. 천자는 주굉(朱紘)을 쓰고 제후(諸侯)는 청굉을 씀.[註 040] 현면(玄冕) : 큰 제사 이외의 제사 때에 입는 검은 면복(冕服).[註 041] 전준(典畯) : 주(周)나라 때 농사를 권장하는 일을 맡는 관원.[註 042] 동조(東朝) : 대비전.[註 043] 상수(上壽) : 헌수(獻壽).
하였는데, 선교관(宣敎官) 이덕중(李德重)이 읽었다. 끝나고서 임금이 시위(侍衛)하는 여러 신하들에게 명하여 다 앉게 하여 선온(宣醞)하고, 친경(親耕) 때에 집사(執事)한 신하들이 적전(籍田)에서 밭간 백성과 기로(耆老)를 전정(殿庭)에 인도하여 노주례(勞酒禮)를 거행하였다. 등가악(登歌樂)이 연주되기 시작하니, 기민(耆民)·서인(庶人)이 각각 친경 때의 옷을 입고 차례로 들어와 배위(拜位)에 나아가 창(唱) 없이 사배(四拜)하였다. 끝나고서 각각 동서위(東西位)에 가서 앉으니, 집사자(執事者) 【위군(衛軍).】 가 각각 기민·서인 앞에 찬기(饌器)를 벌여 놓았다. 내자시(內資寺)의 관원이 술 【단술.】 을 따라 집사자에게 주고 집사자가 잔을 돌리니, 기민·서인이 다 자리에서 비켜서 부복하고 꿇어앉아 잔을 받았다. 끝나고서 자리로 돌아가니 두 번째 잔을 돌리고 세 번째 술을 따를 때에 이르러서는 위의 의식과 같이 하였다. 조금 있다가 집사자가 찬기를 치우니, 기민·서인이 배위로 돌아가 창 없이 사배하였다. 끝나고서 좌통례(左通禮)가 동계(東階)로 해서 올라가 어좌 앞에 나아가 부복하고 꿇어앉아 예가 끝났음을 아뢰니, 【찬의(贊儀)가 또한 "예필(禮畢)"이라 창하였다.】 등가악이 그쳤다. 임금이 밭을 간 백성에게 먹인 음식을 가져오라고 명하여 친히 보고 말하기를,
"아주 박하지는 않다."
하였다. 대비전(大妃殿)에서 떡 6가(架)와 술 20병(甁)을 특별히 내렸는데, 임금이 백성에게 나누어 내리라고 명하고 말하기를,
"오늘의 이 성대한 행사에 너희들은 한껏 취하고 배불리 먹어야 한다."
하고, 또 하교하기를,
"임금이 의지하는 것은 백성이고 백성이 의지하는 것은 먹는 것이니, 너희들은 오늘 취하고 배부른 것을 잊지 말고 부지런히 힘쓰라."
하고, 또 입시(入侍)한 여러 신하들에게 명하여 한껏 취하고 즐기고서 파하게 하였다. 좌상(左相) 송인명(宋寅明)이 인책하고 출사(出仕)하지 않았는데, 이때에 이르러 임금이 친경하기 때문에 출사하여 거가(車鴐)를 따라가고 이어서 선온에 참여하였다. 송인명은 탕평(蕩平)의 논의를 주장하여 이광좌(李光佐)와 뜻이 맞지 않았는데, 함께 정승이 된 지 얼마 안 가서 이광좌는 탄핵을 받아 나가고 송인명이 혼자서 조정의 계책을 오로지 하였다가, 전위(傳位)한다는 하교가 내려졌을 때에 이광좌가 조정에 나아가니, 송인명이 핑계삼아 인퇴하였다. 종신(宗臣)인 밀창군(密昌君) 이직(李樴) 등이 나아가 말하기를,
"전하께서 여러 조정에서 겨를이 없었던 전례(典禮)를 거행하였으나 아직 동조(東朝)042) 에 상수(上壽)043) 하지 못하셨으므로 신민이 참으로 억울하게 여기니, 동조께 여쭈어 정례(情禮)를 조금 펴소서."
하고, 대신(大臣)·예관(禮官)도 잇달아 말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동조에서 겸손하시니 힘을 얻기 어려울 듯하다."
하였다.
우의정(右議政) 송인명(宋寅明)이 차자(箚子)를 올리기를,
"원보(元輔)가 반년 동안 황야에 피하여 있던 끝에 이제 조정을 같이하는 기쁨이 있었으나, 요 며칠 동안 주선하며 사기(辭氣)를 엿보니 끝내 조정에 오래 있을 뜻이 없습니다. 특별히 돈면(敦勉)하여 멀리하는 마음을 돌리게 하여 천직(天職)을 함께하는 보람을 이루시기를 다시 바랍니다."
하고, 이어서 면직을 청하니, 임금이 비답(批答)을 내렸다.
영의정(領議政) 이광좌(李光佐)가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임금의 정치는 백성을 편하게 하는 것을 으뜸으로 삼고, 백성을 편안하게 하는 방법은 오로지 농사를 권장하는 데에 있습니다. 이 때문에 성왕(聖王)이 제도를 정하되 쟁기를 싣고 적전(籍田)에 가서 몸소 밭을 갈아 천하의 백성을 앞서 이끌었습니다. 숙고(肅考)께서 임어하셨을 때에 폐지되었던 전례(典禮)를 거행하려다가 사고가 있어서 그만두셨으니, 오늘날을 기대하신 듯합니다. 성상께서 혁연(赫然)히 명하여, ‘선왕의 뜻을 내가 행해야 한다.’ 하셨는데, 뭇 신하가 처음에는 머뭇거렸으나, 마침내 날씨가 맑고 따뜻하여 땅이 녹아서 성대한 전례를 월령(月令)대로 거행할 수 있었으니, 성심(聖心)이 지극한 정성에서 나오면 하늘의 뜻도 응하기를 마치 북채와 북이 서로 응하듯이 한 것입니다.
아! 천하의 만사가 어찌 전하의 일심(一心)에 달려 있지 않겠습니까? 전하의 일심이 성실하면 만사가 다 다스려지고 일심이 성실하지 않으면 만사가 다 잘못되어 나라의 흥망이 따를 것이니, 매우 두려워할 만합니다. 전하께서 개원(開元)044) ·천보045) 의 일을 매우 경계 삼으시니, 한 마디 말이 나라를 일으킨다는 것이 실로 여기에 있습니다. 필사(拂士)046) 가 경계를 아뢰는 것인들 어떻게 이보다 더하겠습니까? 그러나 마음먹어 능히 지켜서 잃지 않기는 어렵습니다. 한 번 사물에 의하여 변하면 굽어보고 우러러보는 사이에 전에 정사에 부지런하고 조심하던 것이 갑자기 천만 리 밖에 버려져 있게 될 것임을 알지 못하겠습니까마는, 저 천보의 임금도 여기에 걸린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전하의 성질(聖質)을 보건대, 강유(剛柔)를 겸비하여 크게 치우치는 것이 없는 듯합니다마는, 신은 감히 인자하고 측달(惻怛)하신 것은 남음이 있으나 강대(剛大)하고 홍의(弘毅)하신 것은 조금 모자라는 듯하다고 생각합니다. 천하의 정위(正位)에 계시어 할 수 있는 권세를 잡으셨는데도 먼저 과단성 있게 건극(建極)하여 뭇사람의 뜻을 굴복시키지 않으시어 늘 아랫사람의 그 사사로운 뜻을 용납하시고, 그 유폐(流弊)가 점점 불어서 견딜 수 없게 되면 비상한 거조(擧措)를 하여 종사(宗社)가 거의 땅에 떨어질 뻔하다가 겨우 보전되게 하십니다. 그 근본을 밝혀 보면 실로 강대하고 홍의한 것이 조금 모자라는 가운데에서 나온 것이니, 이것을 깊이 살피고 성질의 모자라는 바를 정하게 생각하여 충분히 힘써 반드시 효과가 있도록 하셔야 합니다. 생각하건대, 지난번부터 일초(一初)라고 하교하신 것이 여러 번이었습니다마는, 얼마 안되는 세월 사이에 조정의 기상이 희미하기가 전과 같아지고 전하께서 경계하고 격려하시는 것도 따라서 느슨해지시니, 성의(聖意)를 깊이 두어 지금의 일초가 다시 전일과 같아지지 말게 하시기를 바랍니다."
하였는데, 임금이 우악한 비답(批答)을 내렸다.
장령(掌令) 김정윤(金廷潤)이, 내관(內官) 홍하채(洪夏采)가 말을 타고 어막(御幕)에서 아주 가까운 곳을 불쑥 지나간 것과 돈녕 도정(敦寧都正) 이형종(李亨宗)이 근수(跟隨)가 저지당한 일 때문에 성내어 금훤량(禁暄郞)을 헐뜯어 욕한 것을 논하여 내관은 나처(拿處)하고 이형종은 파직(罷職)하기를 청하니, 아뢴 대로 시행하게 하였다.
한성 판윤(漢城判尹) 이재(李縡)가 상소하여 외방에 있으면서 사진(仕進)하지 않았는데, 공로가 없이 승질(陞秩)되었다 하여 의리를 거론하고 면직을 청하니, 임금이 예사 비답을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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