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 1일 무인
예조(禮曹)에서 관례대로 봄의 알릉(謁陵)을 아뢰었는데, 하교하기를,
"농민이 봄농사에 전념하게 해야 할 것이니, 내년 봄이 되거든 아뢰라."
하였다.
임금이 승지에게 명하여 죄가 가벼운 죄수를 석방하게 하였으니, 대개 친경(親耕)한 뒤에 사유(赦宥)를 반포하지 않았기 때문에 특은(特恩)을 베푼 것이었다.
2월 2일 기묘
집의(執義) 윤봉구(尹鳳九)가 상소하여 면직을 청하고, 이어서 전일 전위(傳位)한다는 지나친 거조의 잘못을 아뢰었다. 심법(心法)을 엄하게 하고 규모를 크게 하고 성학(聖學)을 강구하고 또 성신(誠信)으로 〈자손을〉 편안하게 하는 계책을 물려주기를 청하였는데, 소(疏)가 들어가니, 임금이 사직하지 말라는 것으로 예사 비답을 내렸다.
주청사(奏請使) 김재로(金在魯) 등이 연경(燕京)에서 왔는데, 《명사(明史)》의 조선 열전(朝鮮列傳)을 고쳐 왔다고 하여 임금이 용정(龍亭)047) 과 고취(鼓吹)를 갖추라고 명하였다. 사신이 배종(陪從)하여 돈례문(敦禮門)에 나아가니 임금이 선정전(宣政殿)에 나아갔다. 김재로가 사책(史冊)을 받들고 꿇어앉아 바치니 임금이 꿇어앉아 받았다.
임금이 다시 희정당(熙政堂)에 나아가 세 사신을 인견(引見)하여 위로하고, 김재로(金在魯) 등에게 말하기를,
"사사(史事)가 순조롭게 이루어져서 다행스러우나, 전질(全帙)을 얻어 오지 못한 것을 유감으로 여긴다."
하였다. 당초 강희(康熙)048) 때의 《황명십륙조기(皇明十六朝記)》를 사 온 자가 있었다. 그 가운데에 실린 인조(仁祖)계해년049) 의 일에 잘못된 것이 많았는데, 청나라에서 바야흐로 《명사(明史)》를 새로 수찬하므로 여러 번 사신을 보내어 고치기를 청하였다. 저들이 그때마다 수사(修史)가 이루어지고 간본(刊本)이 완결되기를 기다리라고 말하였는데, 이때에 이르러 김재로 등이 비로소 얻어 왔다. 그러나 김재로가 또 가져온 책자가 있는데 아조(我朝)의 일을 쓴 것에 또 잘못된 것이 많았다. 임금이 마음 아프게 여겨 여러 신하들에게 물으니 대답하기를,
"정사(正史)가 이제 이미 인간(印刊)되었거니와, 야사(野史)·소설(小說)은 낱낱이 고치기를 청하기가 어렵고, 또 이것은 몰래 사 온 것이니 또한 아뢰어 변명할 수 없겠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사책을 받아 온 것을 종묘(宗廟)에 고하고 경사를 칭하려 하였으나, 우의정 송인명(宋寅明)이 말하기를,
"등본(謄本)을 얻어 왔을 때에 이미 고하였거니와, 이제 인본(印本)을 얻었더라도 그 글은 마찬가지이니, 한 가지 일을 거듭 고하는 것은 번거로울 듯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초본(草本)과 인본이 어찌 차이가 없겠는가?"
하였다. 송인명이 말하기를,
"그렇다면 초본 때에는 인묘(仁廟)께만 고하였는데, 숙묘(肅廟)께서 일찍이 이 일을 아뢰었으므로 이제 고해야 하겠습니다마는, 인묘 이하께는 두루 고할 필요가 없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따랐다. 진하(陳賀)하고 반교(頒敎)하고 반사(頒赦)하라고 명하였는데, 송인명이 사책을 반사(頒賜)하였다 하여 사은사(謝恩使)를 보내기를 청하니, 임금이 진위사(陳慰使)가 겸하도록 명하였다. 이때 황태자의 상(喪) 때문에 진위사를 보내야 했기 때문이었다. 송인명이 말하기를,
"사은사는 으레 1품(品)으로 차출하여 보내는데 진위사 이관(李梡)은 자급(資級)이 못 미치니, 품계(品階)를 바꾸어 보내소서."
하니, 임금이 따랐다. 송인명이 또 말하기를,
"황해 감사(黃海監司) 이익정(李益炡)은 대간(臺諫)의 탄핵 때문에 해직되기를 바라고서 전최(殿最)를 봉진(封進)하지 않았으니, 청컨대 파직하소서."
하니, 개차(改差)하라고 명하였다.
서명형(徐命珩)을 사간으로, 송징계(宋徵啓)를 집의(執義)로, 유건(柳謇)을 장령(掌令)으로, 유언협(兪彦恊)·박치문(朴致文)을 지평(持平)으로, 이명곤(李命坤)·이사관(李思觀)을 정언(正言)으로, 이양신(李亮臣)을 부응교(副應敎)로, 조영국(趙榮國)을 교리로, 송교명(宋敎明)·김상중(金尙重)을 수찬(修撰)으로, 정익하(鄭益河)를 부수찬(副修撰)으로, 밀양군(密陽君) 이관(李梡)을 진위 겸 사은사(陳慰兼謝恩使)로, 서종옥(徐宗玉)을 부사(副使)로, 이덕중(李德重)을 서장관(書狀官)으로 삼았다.
2월 3일 경진
헌부 【지평(持平) 박치문(朴致文)이다.】 에서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공주 판관(公州判官) 박필중(朴弼重)은 백성을 해치고 자기를 살찌우므로 온 지경 안의 사람들이 근심하여 시끄러이 말합니다. 관가에서 쓰는 땔나무와 숯을 값으로 거두고 또 백성을 징발하여 땔나무를 해서 멀리 나르게 하고 사람을 함부로 죽인 것이 예닐곱이나 되니, 청컨대 먼저 파직한 뒤에 나문(拿問)하소서."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정사(正使) 김재로(金在魯)에게 안구마(鞍具馬) 하나를 상으로 내리고, 부사(副使) 김시혁(金始㷜)에게 가자(加資)하고 표피(豹皮) 하나를 내리고, 서장관(書狀官) 이양신(李亮臣)에게 가자하고 호피(虎皮) 하나를 내리고, 역관(譯官) 네 사람에게 가자하고, 나머지에게는 차등을 두어 상주었다.
2월 4일 신사
경기의 환곡(還穀)의 모곡(耗穀) 4천 1백 석을 본도(本道)에 획급(劃給)하여 진자(賑資)에 보태게 하였는데, 비국(備局)에서 청한 바에 따른 것이다.
예조 판서(禮曹判書) 윤순(尹淳)이 상소하여 친경(親耕) 때의 상전(賞典)을 다시 더 재량하기를 청하였다. 처음에 임금이 친경 때의 상전을 크게 벌리지 않겠다고 하교하였으나, 이어서 삼조(三曹)의 간역(看役)한 당상(堂上)·낭청(郞廳)과 원역(員役)을 서계(書啓)하라는 명이 있었고, 또 군교(軍校)를 시사(試射)하고 죄수를 소결(疏決)하는 일이 있었으므로, 윤순이 말하였는데, 임금이 위로하고 기쁘게 하는 데에 뜻이 있었다 하여 따르지 않았다.
2월 5일 임오
임금이 대신(大臣)과 비국 당상(備局堂上)을 인견(引見)하였다. 우의정(右議政) 송인명(宋寅明)이 동조(東朝)께 진연(進宴)하기를 청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친경(親耕)하는 일은 예문(禮文)에 실려 있는 것도 오히려 줄인 것이 많았는데, 경(卿)들은 혹 크게 한다는 염려를 미리 하고 있다. 대저 어버이를 섬기는 예는 잔을 바치는 것보다 더한 것이 없는데, 참으로 간절히 빈다면 혹 감동하여 뜻을 돌리시게 할 수도 있겠으나, 경들도 예판(禮判)의 말처럼 크게 벌리는 것으로 여긴다면 허락받을 희망이 아주 없을 것이다."
하였다. 이때 임금은 친경을 세상에 드문 성대한 전례(典禮)로 여겼으나 여러 신하들은 겉으로는 찬양했지만 마음은 실로 그렇지 않아서 윤순(尹淳)이 상소한 말에 자못 경계하였으므로, 임금의 하교가 이와 같았다. 송인명이 이어서 말하기를,
"친경에 쓴 것이 이미 1만여 냥이나 되거니와, 군병(軍兵)의 시사(試射)를 한다면 또 1만여 필(匹)의 베와 수백 곡(斛)의 쌀을 써야 할 것입니다. 성상의 뜻은 위로하고 기쁘게 하는 데에 있다고 하지만 경비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니, 각도의 올 봄 수조(水操)·육조(陸操)를 멈추라고 명하였는데, 송인명이 지난해의 재해를 말하였기 때문이었다. 임금이 박사수(朴師洙)가 여러 번 상소한 일을 송인명에게 물으니, 송인명이 말하기를,
"박사수는 규모가 매우 비루하기 때문에 이와 같은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대신(大臣)이 처음에 지나치기는 하였으나, 박사수의 상소는 실로 체통에 관계된다."
하고, 체직하라고 명하였다. 대사간(大司諫) 유복명(柳復明)이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었다. 안동(安東)에 서원(書院)을 세우는 일에 이르러 유복명이 굳이 청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위에 있는 자가 어찌 향유(鄕儒)의 영수가 되겠는가?"
하였다. 지평(持平) 박치문(朴致文)이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김치후(金致垕)·이성해(李聖海)·한억증(韓億增) 등을 석방하라고 명하였다. 처음에 세 사람은 모두 이광좌(李光佐)에 대해 논하였기 때문에 귀양갔었다. 이때에 이르러 임금이 친경례(親耕禮)를 이루었다 하여 소결(疏決)하라는 명이 있었는데, 이광좌가 차자를 올려 석방하기를 청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이때 전 정랑(正郞) 임덕승(林德升)이 상소하여 존호(尊號)를 올리기를 청하였으나 정원(政院)에서 물리쳤다. 이조 판서(吏曹判書) 조현명(趙顯命)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신이 무신년050) 겨울쯤에 이 일로써 상소한 유생(儒生)을 죄주기를 논하였을 때에 전하께서 이미 가납(嘉納)하셨었고 겸손하여 더욱 빛나는 성덕(盛德)이 10년 동안 하루 같으셨는데, 뜻밖에 이제 또 임덕승이 나왔습니다. 전하께서 임덕승을 있게 한 데에는 참으로 그 까닭이 있습니다. 지난날 비상한 일은 성인(聖人)도 천 가지 생각 중에 한 가지 잘못이 있는 것에 지나지 않는데, 뭇 신하가 함부로 서로 헤아리고 머리를 맞대어 가만히 의논하며 시험해 보려 하였습니다. 선온(宣醞) 때에 대신이 말한 것이 대개 이것을 가리킨 것인데, 임덕승의 상소가 과연 이르렀습니다. 임덕승을 내쳐서 작은 조짐을 막고 더욱 언동을 조심하고 삼가하여 비위를 맞추며 희망하는 무리가 감히 마음을 일으키지 못하게 하셔야 하겠습니다. 또 듣건대, 어사(御史)를 초계(抄啓)하라는 명이 있었다 합니다. 수의(繡衣)는 대각(臺閣)에서 풍문에 따라 논계(論啓)한 것과는 달라서 반드시 의거할 만한 문서를 찾아낸 뒤에야 봉고(封庫)하고 계파(啓罷)하며, 또 조정에 돌아온 뒤에 문서를 봉진(封進)하게 하므로 죄를 입은 자도 억울하게 걸리는 자가 없습니다. 근래에는 풍문이 전하는 것만을 믿고서 헐뜯고 칭찬하며 사람을 장오(贓汚)나 반드시 죽어야 할 죄에 견주는데, 마침내 살펴보면 죄가 없는 것으로 돌아가는 것이 많고, 어사도 직분을 다하지 못한 죄에 걸리는 자가 없으므로, 아주 궁벽한 땅에는 발을 한 번도 들여놓지 않고 귀를 빌고 눈을 빌어 풍문에 따르고 길에서 주워 야비하게 책임만 때우는 자가 도도(滔滔)하니, 이를 마땅히 더욱 신칙(申飭)해야 하겠습니다."
하였는데, 비답(批笭)하기를,
"이러한 시험해 보는 짓을 어찌 감히 하는가? 이제 경이 드러내어 아뢰었으니 스스로 일어났다가 스스로 사라지는 것만 못하다. 그렇기는 하나 이미 상소를 올렸으므로 엄히 금하지 않을 수 없으니, 임덕승은 삭직(削職)하도록 하라. 말단에 아뢴 바는 옳다."
하였다.
하교하기를,
"아! 지난날의 하교가 갑작스러웠다고는 하지만, 평소의 마음이었다는 하교는 하늘에 물을 수 있으니, 평소의 마음을 어긴다면, 또한 말해야 하지 않겠는가? 오늘날의 신하된 자가 마땅히 허물이라고 생각한다면 도와서 바로잡아야 할 것이다. 일이 지난 뒤에 어찌 변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익(益)이 순(舜)을 경계한 것은 단주(丹朱)051) 처럼 오만하지 말라는 것이었고, 자만(白滿)하여 한가로이 지내지 말라는 것은 성인이 드리운 가르침이다. 아! 전에 음식을 물리친 것이 어찌 또한 자만이겠는가? 임금을 이 지경에 이르게 한 것이 누구의 허물이기에 스스로 반성할 줄 모르고 고심(苦心)한 것을 돌이켜보지 않는가? 그 머리를 맞댄다는 것은 무엇이며 시험해 본다는 것은 무엇인가? 아깝게도 총재(冢宰)로서 지위가 숭품(崇品)에 이르렀는데 아래에서 진정시키지 못하고 또한 스스로 사라지게 하지 못하고서 상소에 올리기까지 하는가? 때문에 비지(批旨)에 작은 뜻을 보이고 말하지 않을 수 없어서 내 뜻을 말하고 아울러 세상을 개탄하는 뜻을 보인다."
하였다. 조현명이 또 상소하기를,
"신이 전하를 섬긴 것이 20년입니다. 매우 어리석기는 하나 어찌 감히 천지처럼 크고 일월처럼 밝으신 데에 함부로 의심을 두겠습니까마는, 근래 풍습이 박하고 거짓되어 비·이슬·바람·서리처럼 조화에서 나온 무심한 것도 문득 감히 함부로 엿보고 헤아리니, 신이 스스로 일어났다가 스스로 없어지는 것이 흔적을 남기지 않는다는 것을 모르는 것은 아닙니다마는, 일어났다가 없어질 즈음에 그것이 조정의 불안한 실마리가 되지 않으리라는 것을 보증할 수 없으므로, 신이 미혹한 소견이 이러하였을 뿐입니다. 신은 천성이 좁고 급하여 기질은 거친 것을 바로잡지 못하고 언사는 항상 공손한 것이 부족하며 생각이 있으면 숨기지 않는 것이 충성인 줄 알 뿐이어서 중신(重臣)의 노성(老成)한 체모를 매우 잃었으니, 이것은 참으로 신의 죄입니다."
하니, 예사 비답을 내렸다.
윤혜교(尹惠敎)를 대사헌(大司憲)으로, 김시형(金始炯)을 형조 판서(刑曹判書)로, 홍창한(洪昌漢)을 헌납(獻納)으로, 서명신(徐命臣)을 부수찬(副修撰)으로, 남태온(南泰溫)을 승지로, 유엄(柳儼)을 황해도 관찰사(黃海道觀察使)로 삼았다.
2월 7일 갑신
송성명(宋成明)을 좌참찬(左參贊)으로, 이석표(李錫杓)를 부응교(副應敎)로, 이희하(李喜夏)를 남병사(南兵使)로 삼았다.
2월 8일 을유
청나라 사람 1백 57명이 표류하여 제주(濟州)에 이르렀는데 배가 부서져 돌아갈 수 없으므로, 비변사(備邊司)에서 청하기를,
"본주(本州)와 우수영(右水營)의 병선 2척을 주어 바라는 대로 물길을 따라 돌려보내고 또 수영의 베 3동(同)과 쌀 1백 석을 주어 덕의(德意)를 보이고 이어서 자문(咨文)052) 을 갖추어 사행(使行)에 부치는 것이 편하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부응교(副應敎) 이석표(李錫杓)가 북평사(北評事)로 있다가 체직되어 돌아와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성상께서는 지난번의 하교를 무엇 때문에 내렸습니까? 10년 동안 탕평(蕩平)하였으나 조정은 더욱 흐트러졌으니, 전하의 처지로 전하의 국사(國事)를 생각하면 성심(聖心)이 권태하고 쇠퇴하여 드디어 임금으로서의 즐거움이 없어지신 것도 괴이할 것이 없거니와, 전하의 뜻도 또한 슬프실 것입니다. 그렇기는 하나 신의 어리석은 생각에 죽을 죄를 무릅쓰고 감히 말하건대 전하의 일은 성실이 매우 모자란다고 여겨집니다. 왜냐하면, 아! 전하께서 어찌 조종(祖宗)께서 부탁하신 중대한 지위에서 가벼이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모르시겠으며, 또한 어찌 다섯 살인 어린 원량(元良)이 대신하여 노고할 수 없다는 것을 모르시겠습니까? 다만 오랫동안 무너졌던 신하의 기강을 조금 떨쳐 일으키려 하여도 이미 흐트러져 버린 조정의 심지를 조금도 경각시킬 수 없으므로, 우선 며칠 동안 경동(驚動)할 거리를 빌어서 징려(懲勵)할 바탕으로 삼으려 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그 가볍고 잡다한 임금의 말이 임금의 거조(擧措)를 전도시키게 되는 데 돌아가는 것을 스스로 깨닫지 못하셨습니다. 이것으로 말미암아 시상(時象)이 화평해지고 백성이 곤궁한 데에서 회복하게 된다면, 한때의 지나친 거조가 도리어 이미 고친 덕(德)에 무슨 손상이 있겠습니까마는, 상례에 어그러지는 하교가 번번이 성실하지 않은 데에 가깝기 때문에 익히 본 마음이 더욱더 복종하지 않는 것을 전하께서 어찌 지난 일에서 경험하지 않았겠습니까? 전하께서 이미 문을 닫으셨었고 또 음식을 물리치셨었으나, 문을 닫으신 뒤에 무슨 일이 전보다 나아졌으며 음식을 물리치신 뒤에 어떤 사람이 마음을 고쳤습니까? 문을 닫고 음식을 물리치신 것이 모두 보람이 없었으니, 오늘의 하교도 전일과 같은 결과가 되지 않을는지 어찌 알겠습니까? 번번이 무익한 일을 하여 한바탕 시끄럽게 하고만 마는 것보다 차라리 위엄 있게 높이 팔짱 끼고 꼼짝 않고서 하림(下臨)하여 위존(威尊)을 길러 스스로 신중하고 교명(敎命)을 간명히 하고 가벼이 하지 않으시어 뭇 신하가 감히 내 깊이를 엿보지 못하고 자연히 두려워 복종하고 참으로 느끼는 뜻이 있게 하는 것이 낫습니다. 하지만 성상께서 이렇게 되시게 한 것은 또 누구의 죄이겠습니까?
오늘날 조정의 신하가 평소에는 당론(黨論)으로 마음을 삼고 전(殿)에 오르면 아첨하는 이야기로 말을 삼다가 갑자기 일의 기회를 만나면 또 반드시 눈물 흘리는 것을 일삼아 겉으로는 감동한 체하고 속으로는 실로 속이고 업신여기니, 한갓 임금의 마음만 수고롭고 신하의 버릇은 더욱 알랑거려서 임금의 체모는 날로 낮아지고 조정의 기상은 날로 어그러지게 하는 것이 반드시 여기에서 말미암지 않았다고도 할 수 없습니다. 바로 일이 급하면 상대에게 울고 일이 끝나면 술을 따라 경하하는 것과 불행히도 근사한데, 더구나 이제 성명(聖明)께서 위에 계시어 나라 안이 편안한데도 한 가지 거조가 있을 때마다 임금과 신하 상하가 먼저 처참한 모습을 하니, 이것이 어찌 국가가 화평한 기상이겠습니까? 신은 실로 답답합니다. 신이 지난번의 하교를 듣고부터 여관에서 긴 밤이 새도록 자지 못하고 등불을 가져오게 하여 상소를 기초하며 충정(衷情)이 절로 격동하였습니다. 성명께서는 참람됨을 용서하여 어리석은 소견을 살피시기 바랍니다."
하였는데, 비답하기를,
"이미 기구 대신(耆耉大臣)에게 내린 비답에 유시하였다."
하였다.
대사간(大司諫) 유복명(柳復明)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친경(親耕)하신 성대한 일은 실로 세상에 드문 경사입니다마는, 듣건대 근래 소결(疏決)에서 그대로 두기도 하고 석방하기도 하였는데, 다만 가벼운 죄수에게 귀양살이를 경감한 것에 지나지 않을 뿐이고 지하에서 억울한 마음을 품고 억울하여도 죄를 씻지 못한 자는 처음부터 거론하지 않았다 합니다. 아! 전하의 이 일은 대개 억울한 자를 가엾게 여기고 화기(和氣)를 이끌어 드날리려는 성대한 뜻에서 나온 것인데, 어찌 곧바로 소인(小人)의 행복이 되겠습니까? 또한 이제 일월(日月)의 밝음이 밝히지 못하는 어두움은 없는데 억울한 죄를 입은 자만이 두루 빛을 보지 못하게 한다면, 그 어두운 곳에서 원한을 머금어 하늘의 화기를 감상(感傷)하는 것이 어떠하겠습니까? 바라건대, 성상께서는 그 억울함을 모두가 불쌍히 여기는 자에 대하여 특별히 하문하시어 재량하여 가려서 처분하소서."
하였는데, 비답하기를,
"아뢴 것이 무슨 뜻인가? 이러한 협잡을 감히 아뢰는가?"
하였다. 이때 신축년053) 에 세제(世弟)를 세운 대신(大臣) 김창집(金昌集)·이이명(李頣命) 등을 아직도 무안(誣案)에 두고 죄를 벗기지 않았으므로, 유복명의 말이 이러하였다.
진위 겸 사은사(陳慰兼謝恩使) 밀양군(密陽君) 이관(李梡)·부사(副使) 서종옥(徐宗玉)·서장관(書狀官) 이덕중(李德重)이 청대(請對)하였다. 이때 정사와 서장관은 진위사로 차출된 지 시일이 오래 되어 이미 행장을 꾸렸으나 서종옥은 사은 부사로 새로 차출되어 배표(拜表)할 시기가 임박하였는데 떠날 준비를 못하였으므로, 청대하여 아뢰니, 임금이 그믐날 이전으로 시기를 물리라고 명하였다. 이관 등이 또 말하기를,
"사책(史冊)의 일이 끝나면 주선하여 사 올 것도 미리 생각하지 않을 수 없으니, 관은(官銀)을 빌어 가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비국(備局)에 명하여 품처(稟處)하게 하였다.
승지(承旨)를 보내어 고(故) 충신(忠臣) 김응하(金應河)이 사당에 제사하게 하였다. 김응하는 만력(萬曆) 기미년054) 3월 4일에 전사하여 사당이 평안도 창성부(昌城府)에 있는데, 임금이 이 해에 감흥(感興)하여 그날 제사지내라고 명하였다.
2월 9일 병술
달이 동정성(東井星)에 들어갔다.
영의정 이광좌(李光佐)가 상소하여 사직하고 이어서 동작강(銅雀江) 가로 나가니, 사관(史官)을 보내어 전유(傳諭)하였다. 이때 이광좌가 임금의 지나친 일 때문에 들어오기는 하였으나 이미 우상(右相) 송인명(宋寅明)과 화합하지 않았다. 임금이 비록 겉으로 은례(恩禮)를 보일지라도 실은 굳이 머무르게 할 뜻이 없었으므로, 이광좌가 스스로 편안하지 못하여 곧 병이 위독하다고 핑계하여 상소하고 떠났다.
임금이 춘당대(春塘臺)에 나아가 시사(試射)하고 중신(重臣)을 모화관(慕華館)에 따로 보내어 분시(分試)하였다. 대개 친경(親耕)한 뒤에 무사(武士)와 군병(軍兵)을 위로하고 기쁘게 하기 위한 것이었다.
2월 10일 정해
임금이 또 춘당대(春塘臺)에 나아가 시사(試射)하고 서얼(庶孽)인 무인(武人)도 수문장(守門將)이 될 수 있도록 하라고 명하였다. 이에 앞서 우의정(右議政) 송인명(宋寅明)이 말하기를,
"서얼로서 출신(出身)한 자도 소통(疏通)하여 구처(區處)해야 하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하문하여 적당히 처리하겠다고 하교하였다. 이날 송인명이 또 아뢰기를,
"일이 변통하는 것에 관계되므로 익히 강구해야 하는데, 이제 병판(兵判)과 무장(武將)들이 모두 입시(入侍)하였으니, 하문하여 처리하셔야 하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두루 물었는데, 다들 수문장이 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마땅하겠다고 대답하니, 참하(參下) 한 자리를 먼저 차출하라고 명하였다. 지평 박치문(朴致文)이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임금이 바야흐로 시사할 때에 이조 판서(吏曹判書) 조현명(趙顯命)·병조 판서(兵曹判書) 조상경(趙尙絅)에게 명하여 조취총(鳥嘴銃)을 쏘게 하였다. 조현명이 바야흐로 장임(將任)을 겸하였기 때문이었다. 조현명이 말하기를,
"총재(冢宰)는 나라의 중임(重任)이므로 몸소 무예(武藝)를 잡는 것은 사체(事體)를 손상할 듯합니다."
하고, 조상경이 말하기를,
"신은 일찍이 익히지 못하였으므로 도리어 다치게 될 듯합니다."
하였다. 송인명도 말하였으나, 임금은 모두 듣지 않았다. 승지(承旨) 박성로(朴聖輅)가 말하기를,
"사(射)는 육예(六藝)의 하나이지만 총은 사와는 다르니, 굳이 시킬 것이 없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대신(大臣)이 말하는 것이 옳을 듯한데, 승지가 어찌 번거로이 아뢸 수 있겠는가."
하고, 체차(遞差)하라고 명하였다. 이제 조현명·조상경 등이 다 한 환(丸)을 쏘았다.
2월 12일 기축
임금이 또 춘당대(春塘臺)에 나아가 시사(試射)하고 마상재(馬上才)와 검수(劍手)도 아울러 시험하였다.
이판(吏判)·병판(兵判)에게 명하여 장전(帳殿)에 입시(入侍)하게 하여 친림(親臨)하여 개정(開政)하였는데, 장차 무사(武士)를 위로하고 기쁘게 하려 하였기 때문이었다. 병판 조상경(趙尙絅)이 말하기를,
"무사 중에 이력은 없으나 품계(品階)가 1품인 자 두 사람이 있는데, 만호(萬戶)에 제수(除授)하라는 명을 받았을 뿐이기 때문에 부끄럽다 말합니다."
하니, 임금이 우상(右相) 송인명(宋寅明)에게 물었는데, 송인명이 말하기를,
"그 사람이 진실로 쓸 만하다면 수령에 제수한들 무엇이 해롭겠습니까?"
하므로, 임금이 수령에 제수하라고 명하였다. 이판 조현명(趙顯命)이 말하기를,
"이력이 없는 자를 곧바로 수령에 제배(除拜)할 수는 없습니다. 정사(政事)의 격례(格例)가 한 번 어지러워지면 뒷 폐단에 크게 관계될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한 사람만을 제수하라고 명하였다. 조현명이 감히 어기지 못하고 뒤에는 관례로 삼지 말기를 청하니, 임금이 윤허하였다. 풍덕 부사(豐德府使) 박문수(朴文秀)를 내직(內職)으로 옮기라고 명하였다. 박문수는 이미 외직(外職)에 보임되었는데, 송인명·조현명 등이 말하기를,
"풍덕은 수토(水士)가 매우 나쁘니, 박문수를 오래 있도록 하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무사(武士)를 시사(試射)하고 친림(親臨)하여 상을 주었다.
심성진(沈星鎭)을 대사간(大司諫)으로, 박찬신(朴纘新)을 판윤(判尹)으로, 신사건(申思建)을 정언(正言)으로, 이정보(李鼎輔)를 응교(應敎)로, 이덕중(李德重)을 부응교(副應敎)로, 박필재(朴弼載)를 수찬(修撰)으로, 이성효(李性孝)를 부수찬(副修撰)으로 삼았다. 이때 시사(試射) 때의 승전(承傳)으로 수령에 단부(單付)된 자가 5인이고 변장(邊將)에 단부된 자가 20인이고, 가자(加資)받고 천전(遷轉)된 자가 10여 인이었다. 장전(帳殿)에서의 친정(親政)으로 상서원(尙瑞院)의 관원을 6품(品)으로 올렸다.
부제학(副提學) 오원(吳瑗)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이제 사책(史冊)의 일을 종묘(宗廟)에 고하고 경사를 칭하는 예(禮)는 이미 날을 잡았습니다. 우리 성조(聖祖)께서 난리를 평정하고 바른 세상으로 돌아가게 하여 인륜을 분명히 내걸으신 공과 덕이 백왕(百王)에 으뜸이신데 야사(野史)의 기록이 잘못되어 차마 들을 수 없는 것이 있으니, 무릇 선왕의 남은 백성이 된 자로서 누군인들 마음 아프지 않겠습니까? 이것이 세 조정을 거치면서 여러 번 사신을 보내어 반드시 정정하여 분명히 씻고야 말려고 한 까닭입니다. 오늘날을 돌이켜보건대, 관(冠)과 신이 거꾸로 놓여 중국에 임금이 없거니와, 혁혁(赫赫)한 명나라는 우리 선왕께서 부모로 섬기신 바인데 이제는 이미 망하여 없어져서 번병(藩屛)인 나라가 의지할 곳이 없으므로 구편(舊編)의 정정은 이역(異域)에서 빌 수밖에 없으니, 어찌 애통하지 않겠습니까? 이 때문에 이런 의논이 처음 나왔을 때에 문충공(文忠公) 신(臣) 김만기(金萬基) 등 여러 사람이 문득 도리와 시세(時勢)를 간절히 말하였는데, 이제 와서는 명나라의 열여섯 황제의 옥판(玉版)·금궤(金櫃)의 서적에 대하여 필삭(筆削)하여 주고 빼앗는 것이 저들의 손에서 이루어지니, 이것은 참으로, 충신(忠臣)·의사(義士)가 눈물을 머금고 애통하는 것입니다. 약한 나라는 믿을 데가 없어 기쁨과 슬픔이 남에게 달려 있는데, 우리 사신을 잇달아 보내어 정정하여 누명을 씻기를 바란 것이 어찌 이것으로 영예를 삼고자 한 것이겠습니까? 이것은 참으로 주자(朱子)가 이른바 ‘아픔을 견디고 원한을 머금으며 절박하여 마지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 경하를 칭하지 않고 교서를 반표하지 않아도 이미 끝난 본사(本事)에 손상이 없겠으나, 우리가 아픔을 견디고 원한을 머금은 뜻은 오히려 이로 말미암아 조금 펼 수 있을 것이니, 이것이 어찌 성조께 빛을 더하고 성덕(聖德)에 빛이 있게 하지 않겠습니까?"
하였는데, 소(疏)가 들어가니, 임금이 우의정(右議政) 송인명(宋寅明) 등에게 말하기를,
"경은 오원의 소를 보았는가? 중국이 멸망하여 귀복(歸服)할 데가 없으니, 천하의 백성이 누구인들 명나라를 생각하지 않겠는가? 그에게 참으로 유악(帷幄)에서 방책을 세워 사막(沙漠)으로 장구(長驅)할 마음이 있다면 괜찮겠으나, 그렇지 않고는 썩은 선비의 글일 뿐이다. 《송사(宋史)》는 금(金)나라 사람의 손에서 이루어졌으나 후세에서 조금도 폐기하지 않았거니와, 이제 이 사책은 명나라의 기사(記事)이므로 내가 친히 받았다. 오원이 소견을 아뢰려 한다면 바야흐로 경연(經筵)의 벼슬에 있으면서 어찌하여 들어와 고하지 않고 이처럼 소장(疏章)에 드러내는가?"
하였다. 임금이 누설될까 염려하여 유중(留中)하고 내리지 않았다.
2월 13일 경인
우의정(右議政) 송인명(宋寅明)에게 명하여 빈청(賓廳)에서 금부(禁府)·형조(刑曹)의 당상(堂上)과 함께 죄수를 소결(疏決)하게 하였다. 송인명이 양사(兩司)가 갖추어지지 않았음을 여쭈니, 그대로 하라고 명하였다.
오원(吳瑗)을 승지로 삼았다.
정언(正言) 신사건(申思建)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융원(戎垣)의 주장(主將)은 책임이 본디 다르므로 활을 쏘아 미늘을 뚫지 못하여도 명장(名將)이 되기에 방해되지 않으니, 이번에 문신(文臣)인 재상(宰相)에게 명하여 총포를 쏘아 보게 하신 것은 참으로 시서(詩書)를 힘써야 하는 의리에 어그러집니다. 총재인 신하와 본병(本兵)의 장관이 힘껏 사양하지 못한 것도 개탄스럽습니다. 벼슬이 근밀(近密)에 있으면 일에 따라 경계를 아뢰는 것이 본디 그 책임인데, 한 마디 말도 받아들여지지 않고 문득 특별히 체차(遞差)하라고 명하셨습니다. 살피건대, 전하께서는 무릇 조치하실 즈음에 오직 자기의 뜻을 힘써 행하는 것을 주장하여 뭇 신하가 감히 어기지 못하게 하시니, 이것이 어찌 성왕(聖王)이 자기 뜻을 버리고 남의 뜻을 따르는 도리겠습니까?"
하니, 비답하기를,
"성(城)에 나아가 적을 대하여도 또한 붓을 쓰겠는가? 이것은 천한 기예(技藝)가 아닌데, 서생(書生)이 동류를 감싸는 것이 아주 가소롭다."
하였다.
2월 14일 신묘
헌부(憲府) 【장령(掌令) 유건(柳謇)이다.】 에서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신이 달포 전에 성 서쪽 길가에 누운 주검을 보았는데 보름이 지나도록 거두지를 않았습니다. 다친 흉터가 낭자하여 분명히 남에게 살해된 것인데, 부(部)의 관원과 경조(京兆)055) 에서 오래도록 검험(檢驗)하지 않았으니, 한성부의 당상은 추고(推考)하고 낭청(郞廳)과 부의 관원은 태거(汰去)하소서. 그리고 고양 군수(高陽郡守) 유홍(柳泓)은 급재(給災)하고 장정을 등록하는 일을 하리(下吏)에게 오로지 맡기고 관무(官務)를 버려두고 병을 요양하며 황정(荒政)을 포기하였으니, 청컨대 파직하소서. 경조의 장관 자리는 지망(地望)이 본디 다르므로 무신(武臣)으로 말하면 더욱이 함부로 의망(擬望)할 수 없는데, 박찬신(朴纘新)은 본디 보통 무부(武夫)로서 외람되게 훈작(勳爵)을 받고 점점 자리를 옮겨서 정경(正卿)까지 올랐습니다. 전조(銓曹)에서 경솔히 의망한 것도 이미 상격(常格)에 어그러진 것이며, 낙점(落點)을 잘못하신 것도 뜻밖에 나온 것이니, 청컨대 고쳐 바로잡으소서."
하니, 답하기를,
"추고하는 일과 태거하는 일과 유홍의 일은 모두 아뢴 대로 하도록 하라. 말단의 일은 갑옷을 입고 무기를 들고서 나라를 위하여 공을 세운 것으로 이번에 이 직임을 준 것은 늦었다. 그런데도 보통이라는 것은 매우 지나치다."
하였다.
신만(申晩)을 대사간(大司諫)으로, 이석표(李錫杓)를 교리로, 조원명(趙遠命)을 부제학(副提學)으로, 남태량(南泰良)을 부수찬(副修撰)으로, 이정보(李鼎輔)를 집의(執義)로 삼았다.
이조(吏曹)·병조(兵曹)에 별세초(別歲抄)를 들일 것을 여쭈니, 그대로 따랐다. 사전(赦典)이 있기 때문이었다.
2월 15일 임진
승지(承旨) 오언주(吳彦冑)에게 명하여 영의정(領議政) 이광좌(李光佐)에게 전유(傳諭)하고 같이 오게 하였으나, 이광좌가 병을 핑계하고 나오지 않았다.
헌부(憲府) 【지평(持平) 박치문(朴致文)이다.】 에서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전 원주 목사(原州牧使) 홍중인(洪重寅)이 파직되었을 때에 그 아들 홍정보(洪正輔)가 도신(道臣)에게 유감을 품고 영속(營屬)에게 노여움을 옮겨 헌부의 직함을 빙자하고 함부로 형장(刑杖)을 썼으므로 행동이 도리에 어그러지고 경망합니다. 또 간신(諫臣)이 형벌을 쓰는 것은 더욱이 법에 벗어나니, 청컨대 전 정언(正言) 홍정보를 파직하여 서용(敍用)하지 마소서. 단천 부사(端川府使) 유징귀(柳徵龜)는 정사효(鄭思孝)가 양육하였으므로 세상에서 버림받았는데, 본부(本府)에 제수됨에 이르러서는 오로지 탐학(貪虐)을 일삼아 원산(元山)에 곡물을 날라다가 팔아서 돈을 만들었으니, 청컨대, 파직하여 서용하지 마소서. 지난 겨울 호서(湖西)수곤(水閫)056) 을 잡아올 때에 금오랑(金吾郞)057) 이 교귀(交龜)058) 하는 장소에 가지 않고 지름길로 빈 영문(營門)에 이르러 이례(吏隷)에게서 뇌물을 받고 혹독하게 형장을 썼고, 새 수사(水使)가 이를 것이라는 말을 듣고서야 비로소 뒤미처 교귀(交龜)하고 떠난 뒤에 잡아오라는 명을 선포하였습니다. 표신(標信)을 지닌 사명(使命)은 더욱이 엄중한 것인데, 따라간 선전관(宣傳官)이 굽은 길을 따르고 부신(符信)을 빼앗지 않은 것도 매우 놀랍습니다. 청컨대, 도사와 선전관을 모두 조사해 내어 파직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홍정보의 일은 또한 지나치지 않겠는가?"
하고, 그 나머지는 모두 그대로 따랐다.
서명신(徐命臣)을 교리로 삼았다.
사간(司諫) 서명형(徐命珩)이 상소하기를,
"포천(抱川) 사는 이성(李姓)인 사람이 광릉(光陵)의 나무 하나를 몰래 베었는데 그 크기가 여러 아름이나 됩니다. 청컨대 경옥(京獄)에 잡아다가 율문(律文)에 따라 감안하여 처단하소서."
하니, 임금이 윤허하였다.
임금이 인정전(仁政殿)에 나아가 진하(陳賀)를 받고 사유(赦宥)를 반포하였는데, 주청사(奏請使)가 사온 개간(改刊)한 《명사(明史)》 가운데에 방무(邦誣)059) 가 분명히 씻어졌기 때문이었다. 예조(禮曹)에서 관례에 따라 경과(慶科)를 설행(設行)하기를 청하니, 그만두라고 명하였다.
2월 16일 계사
영의정 이광좌(李光佐)가 상소하여 면직을 청하니, 도승지(都承旨)에게 명하여 돈유(敦諭)하게 하였다.
조영국(趙榮國)을 응교로, 홍봉조(洪鳳祚)를 부응교로, 유최기(兪最基)를 교리로, 홍계유(洪啓裕)를 부교리로, 이성효(李性孝)를 수찬으로, 송수겸(宋守謙)을 장령으로 삼았다.
예조 참판(禮曹參判) 박사정(朴師正)을 보내어 강릉(康陵)을 봉심(奉審)하게 하였다. 포석(鋪石)의 이은 틈새에 비가 괴기 때문이었다.
2월 18일 을미
헌부(憲府) 【장령(掌令) 송수겸(宋守謙)이다.】 에서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또 박치문(朴致文)의 계어(啓語)와 피사(避辭)가 모두 구차하다 하여 체차(遞差)하기를, 청하니, 아뢴 대로 윤허하였다. 홍정보(洪正輔)·박찬신(朴纘新)의 일은 정계(停啓)하였다.
2월 19일 병신
2품(二品) 이상이 대전(大殿)·대왕 대비전(大王大妃殿)·중궁전(中宮殿)·현빈궁(賢嬪宮)에 문안하였는데, 잠성 부부인(岑城府夫人)의 장일(葬日)이기 때문이었다.
2월 20일 정유
대정(大政)을 행하였는데, 지난 12월의 도정(都政)을 이날로 물려 행하였던 것이다. 심성희(沈聖希)를 강원도 관찰사(江原道觀察使)로, 송질(宋瓆)을 집의(執義)로, 송교명(宋敎明)을 이조 정랑(吏曹正郞)으로, 홍창한(洪昌漢)을 부수찬(副修撰)으로, 권일형(權一衡)을 헌납(憲納)으로, 김시위(金始煒)를 정언(正言)으로, 김도(金䆃)를 지평으로, 조중회(趙重晦)를 설서(說書)로, 정익하(鄭益河)를 광주 시재 어사(廣州試才御史)로, 조명리(趙明履)를 강화 시재 어사(江華試才御史)로, 조윤성(曹允成)을 승지(承旨)로 삼았다. 이조 판서(吏曹判書) 조현명(趙顯命)과 병조 판서(兵曹判書) 조상경(趙尙絅)이 정사를 주관하였다.
지평(持平) 유언협(兪彦恊)이 상소하여 최성대(崔成大)가 사사로이 역마(驛馬)를 타고 최수약(崔守約)이 외람되게 쌍교(雙轎)를 탄 일을 논하고 책벌(責罰)을 가하기를 청하니, 그대로 따랐다.
2월 21일 무술
권현(權賢)을 헌납으로, 조익명(趙翼命)을 대사간(大司諫)으로, 이수해(李壽海)·한광회(韓光會)를 정언(正言)으로 삼았다. 대정(大政)은 이틀 만에 비로소 끝났다.
헌부(憲府) 【지평(持平) 유언협(兪彦恊)이다.】 에서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숙천 부사(肅川府使) 이형원(李馨遠)은 탐학(貪虐)하고 법을 어기니, 청컨대 삭직(削職)하소서. 경상 병사(慶尙兵使) 우하형(禹夏亨)은 음흉하고 사나우며 형벌을 남용하니, 파직하여 서용하지 마소서. 햇수가 오래 된 묵정밭은 모두 전세(田稅)를 면제하고, 역적의 집의 전장(田庄)은 상세히 조사해서 적몰(籍沒)하고 서북(西北)의 기안(妓案)을 상세히 살펴 쇄환(刷還)하고, 가족을 거느리고 부임한 우관(郵官) 이덕인(李德寅)·조윤(趙綸)은 파직하소서. 박찬신(朴纘新)이 갑자기 판윤(判尹)에 오른 것은 관방(官方)이 점점 무너진 것이니, 고쳐 바로잡으소서. 송수겸(宋守謙)은 부당하게 박치문(朴致文)에 대한 처지를 담당하여 일을 말한 사람을 몰아 내쫓고 마음대로 법을 지키는 논의를 멈추었으니, 청컨대 파직하소서."
하였으나, 임금이 모두 윤허하지 않고 다만 묵정밭의 일과 이덕인·조윤·송수겸의 일만을 윤허하였다.
2월 22일 기해
서명빈(徐命彬)을 대사헌(大司憲)으로, 윤혜교(尹惠敎)를 좌참찬(左參贊)으로, 김시영(金始煐)을 좌윤(左尹)으로, 김정윤(金廷潤)을 집의(執義)로, 송교명(宋敎明)을 사간(司諫)으로, 민원(閔瑗)을 장령(掌令)으로, 이종성(李宗城)을 우윤(右尹)으로, 정우량(鄭羽良)을 개성 유수(開城留守)로 삼았다.
부사직(副司直) 민형수(閔亨洙)·교리 민통수(閔通洙) 형제가 막 상(喪)을 벗고 상소하여 이광좌(李光佐)의 일을 논하였으나, 임금이 답하지 않고 도로 주도록 명하였다. 그 소(疏)에 대략 이르기를,
"선신(先臣)060) 은 당론(黨論)을 좋아하지 않았고 이광좌(李光佐)에게 사사로운 원한이 있지도 않았습니다. 실로 한결같이 나라를 위하는 충성에서 나왔습니다. 선신이 을사년061) 초에 귀양살이에서 돌아와 대배(大拜)를 받았는데, 때마침 무옥(誣獄)의 단련(鍛鍊)과 간흉(奸凶)이 어지럽힌 끝을 당하였으므로, 억울한 자는 신설(伸雪)하지 않을 수 없고 죄가 있는 자는 토죄(討罪)하지 않을 수 없었으나, 신설하기를 청한 자들은 평소에 동류(同類)이었던 사람이고 토죄하기를 청한 자들은 또 다 자기와 뜻을 달리한 무리이었으니, 이것은 연충(淵衷)에 이미 편당(偏黨)하여 보복하는 것이라는 의심이 없지 않았고, 그 자리에서 떠난 뒤에도 나랏일에 간절하여 말을 다하지 않음이 없었으나 전하께서 들으려고 하시지 않았으니, 전하께서 당론이라고 의심하는 것이 이로 말미암아 더욱 깊어졌습니다. 선신이 묘당(廟堂)에서 온화하고 말없이 따르기만 하면 녹과 지위를 보전하고 뒷날에 재앙이 내리 없을 것을 모르는 것은 아니었습니다마는, 참으로 의리의 근원과 역순(逆順)의 분별에 관계되기 때문에 자신이 그 책임을 맡아서 죽더라도 후회하지 않은 것입니다. 비록 서덕수(徐德修)의 일로써 말하더라도 선신이 또한 일찍이 매우 힘써 신설(伸雪)을 청하였는데, 이제 전하께서 특별히 명하여 신설하여 주고, 그때 용사(用事)하던 자가 흉악한 마음을 몰래 품고 큰 옥사(獄事)를 근거 없이 만든 정상으로 인하여 또 힘껏 살피고 명백히 교시하였으니, 선신이 전후에 말한 것이 고심(苦心)에서 나왔고 당론을 위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 이 때문에 더욱 밝혀졌습니다. 선신은 다수(多數)에게 잘하는 자를 평소에 좋아하지 않았으므로, 처음부터 이광좌에 대하여 이미 길상(吉祥)한 착한 사람이 아니라고 의심하였습니다.
신축년062) 정청(庭請) 때에 선신이 신(臣)들에게 말하기를, ‘영공 이태좌(李台佐)가 비국(備局)으로 나를 보러 왔기에 내가 대신(大臣)의 연차(聯箚)를 보였더니, 이 영공이 말하기를, 「차사(箚辭)는 참으로 옳거니와, 오늘날 성상의 몸에 병이 있으므로 대리(代理)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은 우리들도 모르지 않으나, 다만 갑작스러움을 면할 수 없으므로 다투는 것이다.」 하였다. 이 사람은 본래 착하고 그 말도 충정에서 나왔으나, 이광좌는 분려(忿戾)를 멋대로 부리는 객기가 이기려고 다투는 마음을 이루어 묘당에서 으르렁대며 기세가 흉악하고 사나우니, 그 면목에서 그가 화심(禍心)이 있는 자임을 알았다.’고 하였습니다. 을사년에 정승이 된 뒤에도 뭇사람의 의논이 모두 ‘접때 무옥의 단련은 오로지 위로 감히 말할 수 없는 곳까지 미치고자 한 것인데, 이광좌가 처음부터 끝까지 이 옥사를 안치(按治)하였으니, 그 죄가 어찌 유봉휘(柳鳳輝)보다 못하겠는가? 마찬가지로 토죄하기를 청해야 한다.’ 하였으나, 선신만이 어려워하며 말하기를, ‘유봉휘는 명호(名號)가 이미 정해진 뒤에 방자하게 상소하여 마치 공박하여 바로잡는 듯이 하였으나 실은 김일경(金一鏡)·목호룡(睦虎龍)의 종주(宗主)가 되며, 이광좌 이하로 말하면 차별이 굳세어 듣지 않았으므로 선신이 마지못하여 따랐고, 그때 또 유봉휘·이광좌를 모두 일률(一律)에 처하기를 청할 것을 말한 자가 있었으나, 선신이 모두 따르지 않았으니, 이것으로 본디 당심(黨心)이 없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무신년063) 선신이 원주(原州)로 귀양갔을 때에 감사(監司) 이형좌(李衡佐)가 자주 보러 왔는데 하루는 갑자기 말하기를, ‘대감은 오래지 않아 조정에 돌아갈 것인데 영상(領相)과 전의 일을 씻어 버리고 나랏일을 같이 한다면 반드시 즐거워서 따를 것이다. 사대신(四大臣)064) 의 신원(伸冤)으로 말하면 대감이 하고자 하는 일일 것이고 재동(齋洞)의 억울한 죽음은 더욱이 나라 사람이 가엾게 여기는 것이니 어찌 이의가 있겠는가?’ 하였는데, 재동이라 한 것은 고(故) 상신(相臣) 이건명을 가리킨 것입니다. 선신이 대답하기를, ‘내가 약원(藥院)의 갑진년065) 의 일기(日記)를 보니, 그때 위에서 병이 여러 달 동안 낫지 않으셨으나 영상이 도제조(都提調)로서 끝내 숨겨서 심유현(沈維賢) 등이 흉악한 말을 지어 내어 인심을 속여 현혹하게 만든 데에 이르고, 이제 역적의 변란이 이미 일어난 뒤에도 영상이 또 한 마디 말로써도 밝힘이 없었으니, 이것은 내가 매우 의심하는 것이다.
영상이 이제 소장을 올려 스스로 하소연하기를, 「갑진년 대상(大喪) 때에 성상의 병환이 매우 위중해지신 지 이미 오래 되었으나 인심이 의혹하고 위태로워하는 데 이르게 될까봐 염려하여 숨기고 감히 말하지 못하였는데 갑자기 대점(大漸)에 이르렀습니다. 적도(賊徒)가 서로 거짓말을 전하는 것은 대개 중외(中外)의 잘 알지 못하는 데에서 나온 것이니, 신이 그때에 병을 숨긴 것은 진정시키려는 데에서 나오기는 하였으나 이제 어찌 죄를 피할 수 있겠습니까?」 하였다면, 그 마음에 다른 뜻이 없었음을 알 수 있어서 내 의심도 풀릴 수 있겠거니와, 함께 사이좋게 지내는 것도 어찌 안되겠는가?’ 하였습니다. 며칠 뒤에 이형좌가 또 와서 말하기를, ‘내가 영상에게 글로 알렸더니 할 수 없다고 답하였는데, 영상의 말이 참으로 또한 사리에 맞는다.’ 하고 글 가운데에 있는 말뜻은 이어서 명백히 말하려 하지 않고 떠났습니다. 선신이 신들을 돌아보고 말하기를, ‘이광좌가 역적의 모의를 참여하여 들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그 마음은 기어이 역적과 같다. 옛사람에게는 제 배를 갈라서 태자(太子)의 무죄를 밝힌 자가 있는데, 더구나 이제 흉도가 임금을 헐뜯어 욕하여 거짓말하고 도리를 어기는 것이 이 지경에 이른 때이겠는가? 이광좌가 이 지경에 이른 때이겠는가? 이광좌가 한 자쯤 되는 종이에 선왕께서 대점(大漸)에 이르신 본말을 갖추어 말하여 사람들이 환히 알게 한다면 사방에 전하고 후사(後史)에 쓰면 저절로 남김없이 밝혀질 것인데, 한 마디 말을 내어 망극한 거짓을 씻으려 하지 않으니, 그 나라에 충성하지 않고 역적을 몰래 돕는 것이 매우 명백하다.’ 하였습니다. 선신이 임금에 대한 거짓말을 밝히기에 바쁜데도 오히려 그가 하루아침에 크게 깨달아 좋은 말을 생각하기를 바랐는데 그가 듣고 번민하였다면 선신도 다시 어떻게 하였겠습니까?
경술년066) 에 이르러 장전(帳殿)에서 입시(入侍)하였을 때에 전하께서 좌우로 손을 잡으시고 의심하여 멀리하는 것을 쾌히 풀게 하셨으나, 선신이 역적의 변란이 병을 숨긴 데에서 말미암았으므로 함께 조종에 설 수 없다고 대답하였습니다. 그 뒤에 연중(筵中)에서 또 의심하여 멀리하는 곡절을 자세히 아뢰려 하였으나 전하께서 손을 저어 말리셔서 선신이 말없이 물러갔습니다. 지금 판부사 김재로(金在魯)가 일찍이 선신을 보러 와서 말하기를, ‘전일의 말을 우연히 상신 서명균(徐命均)에게 전하였는데, 서상(徐相)이 이광좌에게 가서 물었더니, 「족형(族兄)이 과연 그 뜻을 전하였는데, 내가 전일에 민상(閔相)을 죄주기를 청한 일을 낱낱이 항복하려 하였다. 내가 어찌 그런 짓을 할 수 있겠는가?」 하였다고 하였다.’ 하므로, 선신이 또 그 말을 갑자기 바꾸어 둘러대어 속이고 정직하지 않은 것을 매우 미워하였습니다. 정미년067) 에 이르러 전하께서는 선신이 을사년 이후에 한 일을 당론이라 하여 모두 뒤집어 임인년068) 에 억울하게 죽은 사람은 모두 다 도로 역안(逆案)에 넣고, 단련하여 죄를 꾸며 만든 무리는 후한 녹을 받는 벼슬에 등용하셨으니, 이것이 선신이 고개를 숙이고 배회하며 곧바로 성상에게 호소하려다가 하지 못한 까닭입니다."
하였다.
우의정(右議政) 송인명(宋寅明)이 경재(卿宰)를 거느리고 청대(請對)하여 동조(東朝)에 진연(進宴)하기를 청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내가 백관(百官)을 거느리고 정청(庭請)한 일을 자성(慈聖)께 아뢰어 다행히 애써 허락을 받았다."
하고, 예관(禮官)에게 명하여 길일을 잡아서 거행하게 하였다. 임금이 민형수(閔亨洙)의 소(疏)를 들여오라고 명하고 신하들은 합문(閤門) 밖에 물러가 있게 하였다가 이윽고 다시 대신(大臣)·경재에게 명하여 입시(入侍)하게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지난번 처분한 뒤로 여러 신하들의 마음에 전보다 고친 것이 있으리라고 생각하였는데, 이제 이 소가 있으니, 또한 나라의 변란이다."
하자, 송인명이 먼저 민형수 등이 그 선부(先父)의 심사를 밝히려 한 것을 말하고 신구(伸救)하려는 뜻을 조금 보이고, 이어서 민진원(閔鎭遠)·이광좌(李光佐)의 일을 말하기를,
"영상(領相)이 갑진년069) 에 병환을 숨겨서 봉조하(奉朝賀)에게 의심받은 것은 그때 놀랍고 갑작스러웠기 때문에 지나지 않고 그 마음은 참되어 다른 뜻이 없었으니, 전하께서 이것으로써 영상의 마음을 아실 것입니다. 봉조하는 귀양가서 외방(外方)에 있을 때에 전파된 흉악한 말을 들었으므로 무신년070) 이후에 드디어 그 처사가 진선(盡善)하지 못한 것을 의심하고 그래서 의심하여 멀리하는 마음이 너무 지나쳤으니, 전하께서 이것으로 봉조하의 마음을 아실 것입니다. 대개 두 사람의 마음은 비록 같지 않았더라도 다 나라를 위하는 공심(公心)에서 나왔으니, 치우치게 돕거나 치우치게 억눌러서는 안될 것입니다. 이제 민형수가 그 아비를 위하여 심사를 밝히되 과격한 말이 많았으므로 이것이 비록 그르기는 하지만, 그 마음은 스스로 확실히 알아서 굳게 지킬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19일 하교에 이미 모두 말하였다. 경의 말이 아니더라도 나도 생각 밖으로 버려두려 하였다. 경의 말은 양편의 다툼을 분해(分解)하는 것이라 하겠다."
하였다. 송인명이 말하기를,
"신은 오늘날 당론에 처한 자는 백정이 소를 해체하고 공수(龔遂)가 엉클어진 노끈을 풀듯이071) 각각 그 사리에 따라야 할 것이라고 늘 생각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신축년072) ·임인년073) 당시에는 영상뿐만이 아니라 모두 다 사정에 어두웠고 그 뒤에 영상이 그 잘못을 스스로 하소연하였으므로 그 마음에 다른 뜻이 없었음을 알 수 있는데, 갑진년의 일을 뒤미처 제기하니, 내 마음이 더욱 감상(感傷)된다. 곧바로 시약청(侍藥廳)을 설치하지 않은 것을 죄로 삼으니, 이것이 어찌 말이 되겠는가? 그때의 일은 내가 친히 본 것이고 옛 기록에도 시약청을 설치하지 않은 때가 많이 있으며 내가 당하였더라도 설치하지 않았을 것인데, 나를 불충(不忠)하다고 할 것인가? 김일경(金一鏡)·박필몽(朴弼夢)을 등용한 것을 사람을 알아보지 못한 것이라 하여 죄준다면 영상도 할 말이 없겠으나, 시약청을 설치하지 않은 것을 죄로 삼는 것은 매우 법문(法文)을 엄하게 해석하는 것이다. 당시 흉당(凶黨)이 흉악한 말을 유포하였으니, 갑진년의 일이 없었더라도 그 뒤에 난역(亂逆)이 있었을 것은 틀림없다. 당초에 시약청을 설치하였다면 이것을 죄로 삼았을는지 어찌 알겠는가? 영상이 이 때문에 번민하여 죄를 칭하려 하니, 이것을 어찌 따를 수 있겠는가? 아까워하는 것은 영상이 색목(色目) 가운데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다. 색목이 아니면 남에게 의심받지 않을 것이다. 사람들이 어찌 확실한 소견이 있겠는가? 늘 버릇된 것을 벗어나기 어려워서 먼저 들어온 것을 주장 삼아 점점 굽은 길로 들어가므로, 봉조하가 스스로 당(黨)이 아니라고는 하나 의심하는 것이 너무 지나쳤던 것이다.
모든 일은 작더라도 서로 닮은 것이 있는데, 봉조하가 영상을 보는 것은 오원(吳瑗)이 오광운(吳光運)을 보는 것과 같아서 사람의 기품(氣稟)이 본디 같지 않고 시론(時論)이 또 따라서 그르친다. 봉조하의 마음을 내가 이미 알았으므로 좌우로 손을 잡은 것이고 피차가 당수(黨首)이기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니니, 이제 민형수가 매우 그르다. 민형수는 사람됨이 자못 너그럽다고 들었는데 역시 그러한가? 지난번 부부인(府夫人)이 자전(慈殿)을 뵈었을 때에 내 마음이 기쁘고 옛일을 뒤미처 생각하였다. 이제 부부인이 의지하는 자는 민형수 형제만이 있을 뿐인데 그들이 이와 같으니, 내가 이 때문에 민형수를 불효자라고 하는 것이다. 남이 맞대어 거론하면 도리어 그 아비를 욕하지 않겠는가? 생각하는 것이 있으면 그 아비의 심사를 밝히기만 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지난번 난역은 이제 이미 모두 다스렸으니, 효경(梟獍)074) 같은 무리가 있더라도 어찌 감히 다시 범할 수 있기에 갑진년의 일을 말하는가? 서덕수(徐德修)의 일은 처분이 있기는 하였으나 이제 와서 감히 말을 제기하니, 또한 국모(國母)를 위하고자 함이 아닌가? 봉조하가 살아서 이 소를 올렸더라도 매우 지나친 것일 터인데, 더구나 민형수는 그 아비가 멀리 귀양갔다 하여 영상에 대하여 원한이 뼈에 사무쳐 여러 재상들을 증거로 삼았으니, 더욱이 매우 해괴하다. 조태언(趙泰彦)도 내가 오히려 삶아 죽이려 하였는데, 삶아 죽이는 법을 민형수에게 쓰지 않을 수 있는가? 이는 배윤명(裵胤命) 못지 않은데 이러한 자를 묻지 않고 어찌하겠는가?"
하였다. 송인명이 말하기를,
"이 어찌 국문(鞫問)할 만한 자이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내가 성후(聖后)에 대하여 감복하고 사모하는 마음이 있으므로 이러한 것이다. 민형수의 죄는 삶아 죽여 마땅하다. 예전에 이른바 법을 굽히고 은혜를 편다는 것을 또한 민형수에게 쓰겠는가?"
하였다. 송인명이 말하기를,
"인심은 인현 성모(仁顯聖母)에 대하여 백세(百世)토록 잊지 못하고 또 고(故) 상신(相臣) 민정중(閔鼎重)과 여양 부원군(驪陽府院君) 민유중(閔維重)은 다 사류(士類)가 추중(推重)하는 바이니, 이제 민형수의 일은 지나쳤을지라도 성상께서 성후를 추모하시는 도리로서는 특별히 법을 굽히고 은혜를 파는 것이 마땅할 듯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여러 신하들이 각각 소견을 아뢰는 것이 마땅하겠다."
하였다. 호조 판서(戶曹判書) 유척기(兪拓基)가 말하기를,
"민진원(閔鎭遠)의 마음은 오로지 고심(若心)과 단충(丹忠)에서 나왔는데, 이제 민형수가 그 아비의 심사를 밝히려고 그 근저(根柢)를 극력 말하였으니, 어세(語勢)가 어찌 그렇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성교(聖敎)는 도리어 민형수가 서덕수에 대한 처분을 보고 기회를 타서 불쑥 일어난 것으로 여기십니다마는, 이는 신이 그렇지 않은 줄 압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지난번 처분할 때에 호판(戶判)이 먼저 눈물을 흘리고 진정(陳情)하기에 내가 이 뒤에는 다 전의 버릇이 없으리라고 생각하였는데, 오늘 임금에게 말하는 것은 민형수를 그르게 여기지 않는 것이다."
하였다. 유척기가 말하기를,
"신이 처음에는 봉조하와 서로 친하지 않았으나, 그 뒤에 나랏일을 맡게 되어 함께 일을 같이 하고서는 그가 나라를 위하여 고심하는 것을 깊이 알았습니다. 민형수는 그 아비의 마음을 밝히려 하였을 뿐이고 결코 때를 타서 유감을 부리려는 뜻이 아닙니다."
하고, 송인명과 비국 당상(備局堂上) 서종옥(徐宗玉)이 또 인현 성묘와 동조께 진연할 것을 다시 말하고 그 죄를 가볍게 하기를 청하니, 임금이 처음에는 굳이 따르지 않았으나 나중에는 버려두고 묻지 않고 다만 그 소를 돌려 주게 하였다.
영의정(領議政) 이광좌(李光佐)가 과천 현옥(果川縣獄)에서 대명(待命)하니, 사관(史官)을 보내어 전유(傳諭)하여 대명하지 말도록 명하였다.
2월 26일 계묘
김상신(金相紳)을 장령(掌令)으로, 서종옥(徐宗玉)을 호조 참판(戶曹參判)으로 삼았다.
2월 27일 갑진
이조 판서(吏曹判書) 조현명(趙顯命)이 상소하여 사직하기를,
"신이 전석(銓席)에 무릅쓰고 있던 것이 이미 3년이 되었으니, 나라에서 정사(政事)를 맡는 것을 오로지하고 또 오래하였다 하겠는데, 오히려 전하를 위하여 한 어진 자를 천거하거나 한 불초한 자를 물리치지 못하였습니다. 갈라져 다투는 것은 전일과 같으니 맵고 짠 것을 조제(調劑)하였다 할 수 없고, 두루 다스리는 정사는 구차한 것을 많이 행하였으니 공도(公道)를 확장하였다 할 수 없습니다."
하였으나, 임금이 윤허하지 않았다.
2월 28일 을사
알성 무과(謁聖武科)의 초시(初試)에 양소(兩所)에서 입격(入格)한 자가 겨우 40여 인이었다. 처음에 1백 인으로 액수를 정하였으므로, 시관(試官)이 반액에 미치지 못한 것을 품계(稟啓)하니, 임금이 이미 시험한 두 기예(技藝) 가운데에서 육량전(六兩箭)으로 보수(步數)의 다소를 셈하여 차례로 올려 붙여서 그 액수를 채우라고 명하였다. 시관과 감시(監試)한 대관(臺官)이 혹 상소하거나 혹 아뢰기를,
"영(令)은 미덥지 않아서는 안되고 법은 여러 번 변경해서는 안되니, 액수에 차지 않더라도 입격한 자만을 뽑아서 방(榜)을 내는 것이 과장(科場)을 엄하게 하는 도리에 맞습니다."
하니, 임금이 군부(君父)가 위로하고 기쁘게 하려는 마음을 막는다 하여 꾸짖고 따르지 않았다.
헌납(獻納) 권현(權賢)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근래 우로(雨露)의 은택이 상설(霜雪)의 엄한 것보다 너무 많습니다. 정지익(鄭志翼)·홍익종(洪益宗)을 특별히 승서(陞敍)하고 심사주(沈師周)를 상피(相避)에 얽매이지 말도록 한 것은 구궁(舊宮)에 흥감(興感)하여 추은(推恩)하고 돈목(敦睦)하는 뜻에서 나온 것이기는 하지만, 음관(蔭官)이 공로도 없이 승서되고 초사(初仕)가 차관(次官)에 부당하게 의망(擬望)된 것은 모두 변하지 않는 법을 어기고 뒷날의 폐단에 관계됨이 있으니, 모두 성명(成命)을 거두셔야 합니다. 관무재(觀武才)에 입격(入格)한 사람을 수령(守令)에 제수한 것은 본디 위로하고 기쁘게 하기 위한 일입니다마는, 김만종(金萬鍾)처럼 이력이 아주 없고 인사(人事)를 알지 못하는 자가 호중(湖中)의 폐읍(弊邑)에 제수되었으니, 청컨대 개차(改差)하여 마땅한 벼슬에 옮겨 제수하도록 명하소서. 소결(疏決)과 사전(赦典)을 수일 안에 거듭 행하여 이미 옛사람이 한 해에 두 번 사유(赦宥)하는 데에 대한 경계를 범하였는데, 일이 장오(贓汚)에 관계됩니다. 사장(査狀)이 아직 도착하지 않은 안복준(安復駿)이 또한 석방되고 허전(許琠)·이만백(李晩白)처럼 범한 것이 낭자하여 사형을 감면하여 절도(絶島)에 정배(定配)된 무리도 모두 감등(減等)에 들었으니, 도로 가두고 정배하여 그 죄를 징계해야 합니다. 새로 제수된 영흥 부사(永興府使) 이행검(李行儉)은 잔혹하고 불인(不仁)하며 탐욕이 많기로 유명합니다. 울산 부사(蔚山府使) 오명후(吳命厚)는 어리석고 부끄러움이 없어 사람들이 다 침뱉고 더러워하며, 강진 현감(康津縣監) 이봉환(李鳳奐)은 사람이 미천하고 이력이 짧아서 물의가 매우 많으니, 곧 사판(仕版)에서 삭제해야 합니다."
하였는데, 모두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보다 앞서 호남 어사(湖南御史) 남태량(南泰良)이 돌아와 말하기를,
"호남의 풍속이 쟁고(錚鼓)075) ·기치(旗幟)로 농사일을 감독하고 권장하는 것은 그 유래가 오래 되었습니다. 기치는 금해야 하겠지만, 전 어사 원경하(元景夏)가 쟁고까지도 모두 빼앗아 관가로 옮기게 하였으므로, 백성의 원망이 있는 것을 면하지 못하였습니다."
하였는데, 이때에 이르러 원경하가 사서(司書)로 상소하기를,
"신이 안렴(按廉)할 때에 기쟁(旗錚)을 사사로이 쓴다는 말을 듣고 과연 거두어들이게 하고 연유를 갖추어 장문(狀聞)하였는데, 묘당(廟堂)에서 복계(覆啓)하여 도신(道臣)을 시켜 엄히 금하고 고치지 않는 자는 중률(重律)로 다스리게 하고 거둔 기쟁도 도신을 시켜서 편리한 대로 구처(區處)하게 하였습니다. 이제 와서 수령(守令)이 사사로이 쓰고 원망받는 것은 실로 처음부터 염려한 것이 아닌데, 부정을 막고 대동(大同)을 돕는 것이 남패량의 말과 같다면 칭찬받을 수 있겠으나, 이것은 어사의 직무가 아닙니다. 미주(眉州)의 백성이 북을 울려 무리를 모으는 것은 농사에 힘쓰는 것이라 할지라도 촉중(蜀中)에 변이 많은 것은 반드시 이 때문이 아니라고는 할 수 없습니다. 사람의 소견은 각각 다르므로 반드시 구차하게 같이할 것은 없는데, 신에게 재물을 빼앗아 원망받은 조목을 돌리는 것은 이해할 수 없는 바입니다."
하니, 예사 비답을 내렸다.
2월 29일 병오
토성(土星)이 동정성(東井星)에 들어갔다.
진위 겸 사은사(陳慰兼謝恩使)인 세 사신이 사조(辭朝)하니, 임금이 인견(引見)하고 위유(慰諭)하여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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