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영조실록48권, 영조 15년 1739년 4월

싸라리리 2025. 9. 23. 1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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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1일 정축

판부사(判府事) 서명균(徐命均)·김흥경(金興慶) 등이 구대(求對)하여, 날씨가 매우 나쁘다 하여 친향(親享)을 그만두기를 청하려 하였는데, 임금이 그 뜻을 알고 물리치고 만나지 않았다. 정원(政院)에서 합사(合辭)하여 대신을 대우하는 도리가 아니라고 말하니, 임금이 분부를 내려 매우 꾸짖고 승지를 모두 체직하였다. 우의정 송인명이 차자를 올려 처분이 지나침을 논하고 또 예문관 제학 박사수(朴師洙)가 제문을 지어 바치지 않았다 하여 파직하기를 청하였고, 옥당(玉堂)에서도 청대(請對)하여 대신을 만나지 않는 것은 예우하는 도리가 아니며 박사수는 사정이 있었고 병 때문에 또한 억지로 하기 어려운 상태임을 말하니, 임금의 마음이 조금 풀려서 말하기를,
"영성(靈城)123)  이 있었다면 반드시 이렇게 하지 않고 나를 감동시켜 마음을 돌리게 했을 것이다."
하고, 우상(右相)의 차자(箚子)에게 답하기를,
"내가 정성이 얕기는 하나 뭇 신하를 대우하는 도리는 속으로 의심하면서 겉으로 가식하고 싶지 않다. 더구나 대신이겠는가? 예문관 제학에 대한 처분은 절로 다른 방도가 있는데 어찌 갑에서 일어난 것을 을에게 보이겠는가?"
하였다.

 

이춘제(李春躋)를 특별히 제수하여 도승지로, 임정(任珽)·한현모(韓顯謨)·한덕후(韓德厚)·이세진(李世璡)·김정윤(金廷潤)을 승지로, 윤용(尹容)을 병조 참판으로 삼았다.

 

4월 2일 무인

임금이 태묘(太廟)에 가서 봉심(奉審)하였다. 끝나고서 재실(齋室)에 들어가 복위 부묘 도감 제조(復位祔廟都監提調) 송인명과 신사철(申思喆) 등을 소견(召見)하여 능상(陵上)의 석물(石物)을 새로 만드는지를 묻고 진경(震驚)할 염려가 있다 하여 장릉(莊陵)의 예에 따라 거행하라고 명하였다.

 

4월 3일 기묘

임금이 친히 하향(夏享)을 의식대로 행하고 환궁하였다.

 

4월 4일 경진

이조 판서 박사수(朴師洙)가 면직되고 윤혜교(尹惠敎)로 대신하게 하였는데, 또한 송인명이 천거한 것이다.

 

조최수(趙最壽)를 지의금부사로, 이흡(李潝)을 대사성으로, 홍경보(洪景輔)를 공조 참판으로, 안상휘(安相徽)를 집의로, 조명리(趙明履)를 교리로 삼았다.

 

우의정 송인명이 청대(請對)하여 말하기를,
"온릉(溫陵)은 화소(火巢)124)  의 주위를 너무 넓게 할 필요가 없으니 청룡(靑龍)·백호(白虎) 안의 사(砂)125)  와 바로 마주 보이는 외인(外人)의 무덤을 평평하게 뭉그러뜨릴 수 없고 다만 석물(石物)만을 없애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하고, 또 말하기를,
"사릉(思陵)과 정릉(貞陵)에는 사대석(莎臺石)·병석(屛石)·난석(欄石)을 설치하지 않았으니, 이번에도 두 능의 예에 따르는 것이 편리하겠습니다."
하니, 모두 그대로 따랐다. 송인명이 박사수(朴師洙)를 서용하여 비국 유사 당상(備局有司堂上) 및 경리 당상(經理堂上)으로 삼기를 청하니, 모두 그대로 따랐다.

 

4월 7일 계미

조석명(趙錫命)을 대사헌으로, 박사수(朴師洙)를 형조 판서로, 조현명(趙顯命)을 예문관 제학으로, 이석표(李錫杓)를 부응교로, 홍계유(洪啓裕)·권영(權瑩)을 교리로, 한익모(韓翼謨)를 수찬으로 삼았다.

 

4월 8일 갑신

사간원에서 전계(前啓)를 다시 아뢰었으니, 윤허하지 않았다. 사헌부 【장령 신겸제(愼謙濟)이다.】 에서 전계를 다시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경조(京兆)126)  의 사송(詞訟)은 오로지 낭관(郞官)에게 달려 있는데 서윤(庶尹) 최수적(崔守迪)은 매우 늙어 정신이 어두우니 파직해야 하겠습니다."
하니, 윤허하지 않았다.

 

4월 10일 병술

임금이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우의정 송인명이 말하기를,
"실록을 상고하면 온릉(溫陵)의 기신(忌辰)은 12월 7일입니다. 신귀중(愼龜重)이 아뢴 것보다 이틀이나 뒤지게 차이가 나니, 혹 그때 임금에게 아뢴 뒤에 단자(單子)를 이날 내렸으므로 사관(史官)이 이렇게 적은 것이 아닐까 의심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사관이 뒤미처 적었더라도 계하(啓下)한 날을 기일로 삼지는 않았을 것이다. 신귀중이 아뢴 것이 반드시 다 미덥지는 않을 것이다."
하였다. 송인명이 예관(禮官)에게 물어 의논하여 처치하기를 청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예관도 어떻게 알겠는가? 실록에 의거하여 믿어야 할 것이다."
하였다. 송인명이 또 말하기를,
"관서(關西)에는 어사(御史)를 보내어 염찰하게 해야 하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누가 시킬 만한 자인지를 물었다. 송인명이 이성효(李性孝)와 홍계유(洪啓裕)를 천거하니, 임금이 이성효를 명소(命召)하여 들어오게 하여 면려하고 신칙하여 보냈다. 송인명이 또 말하기를,
"고(故) 찬선(贊善) 정제두(鄭齊斗)가 죽은 뒤에 아들 하나가 있을 뿐이니, 녹용(錄用)해야 하겠습니다. 선정신(先正臣) 송시열(宋時烈)의 봉사손(奉祀孫)인 송문상(宋文相)은 일 때문에 죄에 걸려 파직되었으니, 서용해야 하겠습니다."
하니, 모두 그대로 따랐다. 병조 참판 윤용(尹容)이 말하기를,
"김정(金淨)·박상(朴祥)은 복위의 의논을 앞장섰는데, 이제 폐기하였던 예(禮)를 이미 거행하였으니, 그 자손을 찾아서 녹용해야 하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그 아룀을 옳게 여겼다.

 

4월 11일 정해

예조에서 아뢰기를,
"온릉에서 삭망(朔望)에 분향(焚香)하는 일을 대신에게 의논하였더니, ‘이미 위선당(爲善堂)에서 삭망전(朔望奠)을 행하였으니 능소(陵所)에서도 이에 따라 행해야 할 것이다.’라고 합니다. 능관(陵官)이 시기에 앞서 향을 받아 가게 해야 하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4월 12일 무자

임금이 동조(東朝)에 진연(進宴)하였다. 대비(大妃)가 성품이 겸손하여 성대하게 즐기는 일을 좋아하지 않으므로 임금도 굳이 청하지 못하였는데, 이때에 이르러 조정에서 청하기 때문에 비로소 애써 받으니, 뭇 신하가 상서하여 축하하였다.

 

4월 15일 신묘

진연청(進宴廳)의 당상·낭청(郞廳)에게 상을 주었다. 제거(提擧) 3인에게 말을 주고 종실(宗室) 1인에게 말을 면급(面給)하고 감조관(監造官) 5인을 모두 6품(品)에 올리고 장찬인(掌饌人)에게 말을 주고 나머지도 다 차등을 두어 상을 주었다.

 

홍성보(洪聖輔)를 대사간으로, 송징계(宋徵啓)를 집의로, 이광부(李光溥)를 사간으로, 송질(宋瓆)을 헌납으로, 송창명(宋昌明)을 지평으로, 이수해(李壽海)·김낙증(金樂曾)을 정언으로, 황재(黃梓)를 부응교로, 정익하(鄭益河)를 수찬으로, 윤광의(尹光毅)·조명리(趙明履)를 부수찬으로 삼았다

 

4월 16일 임진

나이가 70세인 조신(朝臣)과 나이가 80세이고 자손이 있는 사서(士庶)에게 연수(宴需)를 헤아려 주게 하였다. 임금이 동조(東朝)에 잔을 올리고 나서 은혜를 추시(推施)하여 이 명을 내렸다.

 

의빈부(儀賓府)에서 호남 여산부(礪山府) 나암포(羅巖浦)를 절수(折受)하여 그 선세(船稅)를 받기를 청하니, 임금이 윤허하였다. 우의정 송인명이 그 불가함을 말하니 그 명을 거두었다. 그 뒤에 균역(均役)이 행해지고 절수는 다 폐지되었으나, 균역의 해독이 절수보다 심하여도 감히 말하는 사람이 없었다.

 

이에 앞서 삼남(三南)의 고을들 가운데에서 삼군문(三軍門)의 파총(把摠) 자리를 자벽(自辟)127)  하여 보내면 이조에서 차출하여 보내었는데, 이때에 이르러 금위영(禁衛營)에서 전조(銓曹)에서 대흥군(大興郡)에서 자벽한 후보자를 쓰지 않았다 하여 체개(遞改)하여 본영(本營)의 파총을 차출하여 보내기를 계청(啓請)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4월 17일 계사

형조 판서 박사수(朴師洙)가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바야흐로 해마다 기근이 들어 공부가 많이 줄고 성례(聖禮)는 잦아서 나라에 쓸 것이 비어 있는데, 봄의 가뭄이 매우 심하여 보리 흉년이 이미 분명하므로 온 백성의 마음이 모두 허둥지둥하니, 이런 때에 잔치를 내리는 일은 재변을 삼가고 경비를 돌보는 방도가 아닙니다. 사방의 백성이 곤궁한 것은 왕정(王政)이 먼저 돌볼 일인데 은택이 자손이 있는 사람에게만 미치는 것은 은혜에 치우침이 있는 것이니, 노인에게 연수(宴需)를 내리라는 명을 거두고 전국의 나이 많은 자에게 은혜를 추시하여 등급을 나누어 가자(加資)하소서."
하였다. 이때 친경(親耕)과 진연(進宴) 때문에 크게 쓴 것이 수만 금이었고 또 온릉의 복위 때문에 나라에서 쓸 것이 탕진되었으나, 온 조정의 신하들은 성효를 찬양하고 공덕을 일컬을 뿐이고 박사수만이 이를 말하였는데, 비답하기를,
"효제를 일으키는 것은 자기 마음을 미루어 남의 마음을 아는 도리이다. 예전 병술년128)  에 잔을 올린 뒤에도 늙은 백성에게 의조(儀曹)에서 잔치를 내린 일이 있었는데, 더구나 양로(養老)는 연례(宴禮)에 실려 있는 것이겠는가? 이번에 참작한 것은 두거(杜擧)의 경계129)  일 뿐만이 아니라, 경외(京外)에서 세찬(歲饌)의 예(例)에 따라 조금 주게 하라."
하였다.

 

4월 18일 갑오

궁인(宮人) 58인에게 차등을 두어 여관(女官)에 제수(除授)하라고 명하였다.

 

사간 이광부(李光溥)가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이익필(李益馝)은 공신일지라도 그 아들이 이관후(李觀厚)의 일이 일어난 뒤에는 사적(仕籍)에 다시 끼지 말아야 할 것인데 지난번 변방의 수령에 의망하고 차출하여 인정(人情)을 크게 놀라게 하였으니, 전조(銓曹)의 당상은 중추하고 이익필은 내직·외직에 다시 의망하지 말게 해야 하겠습니다. 무신(武臣)은 숭품(崇品)일지라도 감히 패초(牌招)를 어길 수 없는데 허인(許繗)은 시패(試牌)를 어겼으니, 파직해야 하겠습니다. 길주 목사(吉州牧師) 한몽필(韓夢弼)은 인품과 문벌이 합당하지 않아서 물의가 시끄럽고, 흥양 현감(興陽縣監) 이민행(李敏行)은 사람됨이 어리석고 전혀 경력이 없으니, 체직시켜야 하겠습니다. 나주 목사(羅州牧使) 유정(柳綎)은 별다른 업적이 있다는 말을 듣지 못하였는데 칭찬하여 아뢴 것이 지나치게 아름다워 승자(陞資)되기까지 하였으므로 상을 삼가는 도리에 어그러지니, 도로 거두어야 하겠습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이익필은 서용할 것을 이미 하교하였거니와, 아뢴 것이 지나치다. 허인은 아뢴 대로 시행하라. 한몽필·이민행은 어떠한 사람인지 모르겠으나, 어찌 자주 체직시킬 수 있겠는가? 유정은 본디 잘 다스리는 관리이다. 도신(道臣)이 어찌 지나치게 칭찬하였겠는가? 아뢴 것이 지나치다."

 

조하망(曹夏望)·이익정(李益炡)은 승지로, 이도원(李度遠)을 교리로. 유최기(兪最基)를 수찬으로, 박사수(朴師洙)를 예문관 제학으로, 조현명(趙顯命)을 판의금부사로, 신만(申晩)을 대사간으로, 오수채(吳遂采)를 부수찬으로 삼았다.

 

4월 19일 을미

신만(申晩)을 승지로 삼았다.

 

제주 시재 어사(濟州試才御史) 이도원(李度遠)이 시권(試券)을 거두어 돌아왔다. 양덕하(梁德厦)·이수근(李壽根)·이구성(李九成)에게 급제를 내리고 김계중(金繼重)은 나이가 70이 넘었다 하여 또한 급제를 내렸다.

 

혜화문(惠化門)의 지도리와 문짝이 부러지고 상하여 밤 사이에 닫지 못하므로 어영청(御營廳)에서 번군(番軍) 10명을 보내어 파수하게 하였다.

 

4월 21일 정유

비변사에서 수찬 정익하(鄭益河)를 의주 부윤(義州府尹)으로 천거하였다.

 

4월 22일 무술

김성운(金聖運)을 대사간으로, 정희규(鄭熙揆)를 장령으로, 김상신(金相紳)을 헌납으로, 조윤제(曹允濟)를 정언으로, 이태중(李台重)을 지평으로, 홍계유(洪啓裕)를 교리로, 김광세(金光世)를 수찬으로 삼았다.

 

4월 23일 기해

임금이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우의정        송인명이 아뢰기를,
"북병사(北兵使) 원필규(元弼揆)와 함경 감사(咸鏡監司)        정석오(鄭錫五)가 장문하기를 ‘을묘년130)                  부터 변방 백성으로서 국경을 넘은 자가 5인인데 2인은 이미 잡혔고 3인은 아직도 피중(彼中)에 머물러 있습니다.’ 하였습니다. 만약 저들에게 발각된다면 문제가 생기게 될까 염려되니, 먼저 자문(咨文)을 보내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윤허하고 말하기를,
"변경의 경계가 엄하다면 어찌 국경을 넘는 일이 있겠는가? 을묘년 이후의 지방관과 감사·병사를 모두 파직하라."
하였다. 송인명이 또 말하기를,
"벼슬길이 막힌 지 해수가 오래 된 조관(朝官)은 억울하게 여기더라도 혹 연석(筵席)에 아뢰어 청하거나 장석(長席)이 소상히 하기를 기다려 묘당(廟堂)의 의논을 참여하여 들음으로써 엄외(嚴畏)하고 난신(難愼)한 것을 보인 뒤에야 의망할 수 있는데, 이조 참판        홍현보(洪鉉輔)는 홀로 정사(政事)를 맡았을 때에 어려워하지 않고 의망하였으므로 경계하지 않을 수 없으니, 중추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이에 앞서 음관(蔭官) 안윤중(安允中)이 일 때문에 하옥되었을 때에 송인명이 판의금부사로서 안치(按治)하였는데, 일이 매우 추잡하였으나 끝까지 밝혀내지 못하였다. 그러나 안윤중은 이 죄에 걸려 오래 막혔었는데, 홍현보가 정사를 맡아서 비로소 의망하였으므로 송인명이 이를 거론하였다. 이때 임금이 편추(鞭篘)131)                  에서 많이 맞힌 자라 하여 급제를 내리라는 명이 있었는데, 송인명이 그것이 제도에 어그러짐을 말하였으나, 임금이 여섯 번 맞힌 것을 으뜸을 차지한 것으로 견주어 급제를 내리는 것은 전례가 있다 하여 따르지 않았다. 송인명이 또 말하기를,
"고상(故相) 이태좌(李台佐)에게는 시호를 내리고 구재(柩材)를 주어야 하겠습니다."
하니, 그대로 따랐다. 풍원군(豐原君) 조현명(趙顯命)이 말하기를,
"근래 인삼이 거의 떨어지게 되었는데, 이것은 관서(關西)와 송도(松都)의 잠상(潛商) 탓입니다. 지난번 잠상을 진고(進告)한 자는 대신이 자수하여 면죄할 수 있게 하였기 때문에 그들이 자수하였습니다. 하지만 이들을 모두 풀어 준다면 뒷 폐단을 막기 어려울 것이니, 일률(一律)을 쓰지 않더라도 형배(刑配)해야 하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신하들에게 물었다. 송인명이 말하기를,
"이미 자수시키고서 또 따라서 죄주면 뒤에는 신뢰받을 수 없을 것이니, 식량을 버리고 믿음을 버리지 않는 의리132)                  가 아닙니다."
하였다. 판부사(判府事)        김흥경(金興慶)은 송인명의 말과 같았고, 호조 판서        유척기(兪拓基)는 조현명의 말과 같았는데, 임금이 말하기를,
"대신이 공좌(公坐)에서 자수하면 면죄할 수 있게 하였으면 조정의 명령과 다를 것이 없으니, 자수한 자는 죄를 논하지 말도록 하라."
하니, 그대로 따랐다. 조현명이 또 말하기를,
"남한 행궁(南漢行宮)에 부윤(府尹)이 들어가 있게 하였으므로 영릉(寧陵)에 거둥하실 때마다 불시에 수리하는 폐단이 있으니, 부윤이 옛 경력소(經歷所)에서 나와 있게 하여 폐단을 줄이소서."
하니, 임금이 예전부터 부윤이 들어가 있을 수 있게 한 데에는 성의(聖意)가 있다 하여 윤허하지 않았다.

 

4월 24일 경자

사옹원 주부(司饔院主簿)        김시민(金時敏) 등이 상소하여 그 할머니 이씨(李氏)가 무함당한 일을 변명하고 말을 지어 낸 사람인 이영복(李永福)을 논감(論勘)하기를 청하였다. 당초에 김시민의 할아버지 김수일(金壽一)이 아이 때에 병자란(丙子亂)을 당하여 잡혀서 호중(胡中)에 들어갔다가 돌아와 고(故) 상신(相臣) 이정귀(李廷龜)의 손녀에게 장가들었는데, 김수일의 아들 김성대(金盛大)가 남에게 미움을 받아 이씨가 잡혀갔었다고 말하는 자가 있었다. 이때에 이르러 김수일의 증손 김선행(金善行)이 급제하여 당후(堂后)133)                  에 들어가려 하였는데, 가주서(假注書)        이영복이 이 집에 남들의 말이 있다 하여 그 의망을 막았다. 그래서 온 세상에 전파되어 시끄러웠다. 김시민은 김선행의 종조숙부(從祖叔父)인데 그 형제 자질(兄弟子姪)과 외손을 거느리고 상소하여 변명하였다. 임금이 이것을 신하들에게 물었는데 다들 무함당한 것이라고 말하였고, 또 이영복에게 물었는데 이영복도 머뭇거리고 명백히 말하지 못하니, 임금이 이것은 세도(世道)가 어지러운 탓이라 하여 양편을 타일러 물러가게 하였다.

 

교리 홍계유(洪啓裕)가 상소하기를,
"단경 황후(瑞敬王后)께서 이미 복위되고 부묘되셨으니, 도리에 어그러지는 논의를 주장한 박원종(朴元宗)·성희안(成希顔)·유순정(柳順汀) 같은 사람은 중묘 정향(中廟庭享)에서 내쳐야 하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하교하기를,
"이것은 오늘날에 의논할 만한 것이 아니다."
하고, 윤허하지 않았다.

 

지평 신사건(申思建)이 또 박원종(朴元宗) 등을 내쳐야 한다고 논계(論啓)한 것이 홍계유의 상소와 같았으나, 답하지 않았다. 임금이 홍계유가 상소한 것을 신하들에게 물었는데, 승직 신만(申晩)이 말하기를,
"훈명(勳名)을 추탈한다면 익대(翊戴)하고 반정(反正)한 공이 모두 없어질 것이니, 출향(黜享)하되 추탈한 필요는 없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중묘(中廟)께서 훈신들과 함께 난을 다스리고 반정하셨으므로 태묘(太廟)에 들어가시게 되어서는 훈신들도 따라서 제향하는 것이니, 어찌 왕비께서 부묘되셨다 하여 공신을 내칠 수 있겠는가?"
하고, 따르지 않았다.

 

4월 26일 임인

임금이 소대를 행하였다. 승지 이익정(李益炡)이 부묘할 때 신련(神輦) 전부(前部)·후부(後部)의 고취(鼓吹)를 여쭈니, 임금이 말하기를,
"대왕(大王)의 부묘에는 전후의 고취가 있으나, 왕비의 부묘에는 전부만으로 거행한다."
하였다.

 

조한위(趙漢緯)를 대사간으로, 남태량(南泰良)을 사간으로, 송질(宋瓆)을 헌납으로, 서명신(徐命臣)을 교리로, 유최기(兪最基)를 수찬으로, 박필재(朴弼載)를 교리로, 성범석(成範錫)을 정언으로, 오명신(吳命新)을 이조 참의로 삼았다.

 

4월 27일 계묘

형조 판서 박사수(朴師洙)가 상소하기를,
"북청(北靑)의 백성 유수빈(劉壽彬)이 정소(呈訴)하기를, ‘전에 동중추(同中樞) 이진기(李震箕)의 집에 이웃하여 살았는데 이진기의 아들 이양령(李陽齡)이 자기의 계집종을 잃고 유수빈을 의심하여 중추부(中樞府)에서 패(牌)를 내어 가두고 뇌물을 받고서야 풀어 주었으나, 포청(捕廳)에 도모하여 부탁하고 사헌부에서 또 가두어 다스리려 한다.’ 하였습니다. 이양령은 햇수를 제한하지 말고 멀리 정배해야 하겠고 이진기도 죄주어야 하겠고 포청 종사(捕廳從事)는 태거해야 하겠고 헌신(憲臣)은 파직해야 하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모두 따르되, ‘노쇠한 사람은 그냥 두더라도 무엇이 해롭겠느냐?’라고 비답을 하였다.

 

4월 28일 갑진

밤 4경에 임금이 인정전(仁政殿)에 나아가 친림하여 서계(誓戒)하였다. 장차 복위 대향(復位大享)을 행하기 때문이었다.

 

임금이 주강을 행하였다. 논의가 인재를 배양하는 방도에 미치어 여러 신하들이 이어서 과거 시험에서 명(銘)·송(頌)을 취하므로 요행히 급제하는 자가 많으니 사륙문(四六文)으로 실제의 인재를 얻는 것만 못하다는 것을 말하여 반복하여 수백 마디 말을 하였으나, 임금의 뜻은 끝내 그렇게 여기지 않았으니, 서울 선비는 사륙문을 익히나 시골 선비는 못하기 때문이었다. 즉위한 이래로 흔히 사(詞)·부(賦)를 써서 선비를 뽑고 혹 명·송을 섞어 출제하기도 하였는데, 대개 시골 선비도 아울러 뽑으려 한 것이다. 그 뒤에 하교하기를,
"은(殷)나라 탕왕(湯王)의 반명(盤銘)과 주(周)나라 무왕(武王)의 궤장(几杖)도 잡되다고 하겠는가?"
하고, 입시한 신하들을 모두 중추하라고 명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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