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영조실록49권, 영조 15년 1739년 5월

싸라리리 2025. 9. 23. 1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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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1일 병오

임금이 경덕궁(慶德宮)에 거둥하였다. 단경 왕후(端敬王后)의 신주(神主)를 고쳐 써서 옮겨 모시기 때문이었다. 임금이 위선당(爲善堂)에 나아가 사배례(四拜禮)를 행하고 당(堂)에 올라 신위(神位)를 봉심(奉審)하고 섬돌 위에서 내려와 섰다. 새로 만든 신주를 상(床) 위에 모시니, 임금이 당에 오르고 제주관(題主官)이 들어와 서쪽으로 향하여 서서 주면(主面)을 썼다. 끝마치자, 임금이 사자관(寫字官)에게 명하여 보획(補畫)하게 하고 이어서 내관(內官)을 시켜 옛 신주를 받들어 부방(趺方)134)  을 빼게 하였다. 임금이 함중(陷中)을 봉심한 뒤에 도로 독중(櫝中)에 넣고 그날로 능소(陵所)에 가서 묻어 모시라고 명하고 이어서 작헌례(酌獻禮)를 행하였다. 신주를 받들어 신련(神輦)에 모시니, 임금이 모시고 자정전(資政殿)에 이르러 또 작헌례를 행하고 환궁하였다.

 

5월 2일 정미

부묘(府廟) 때의 축문을 따로 지어야 할 것인지를 대신에게 문의하라고 명하였다. 우의정 송인명이 말하기를,
"무인년135) 단묘(瑞廟)의 승묘(陞廟) 때에는 당초에 당실(當室)이 없었으므로 따로 짓는 것은 논할 만한 것이 아니었습니다마는, 이제는 당실에 추부(追祔)하거니와 위차(位次)에도 옮기는 것이 있으니, 조사(措辭)해야 하겠습니다."
하니, 다른 대신도 모두 송인명의 의논과 같았는데, 임금이 말하기를,
"조상을 섬기는 도리는 간결해야 하고 번거로워서는 안된다."
하고, 무인년의 예를 따르라고 명하였다.

 

공조 판서 윤순(尹淳)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근래 문체(文體)가 날로 낮아지는 것은 대개 시제(試題)를 여러 문제로 번갈아 내므로 두루 익히기 어려워서 표(表)·책(策)의 전공(專工)까지도 포기하기 때문입니다. 삼여(三餘)136)  에 글을 읽는 선비가 없고, 봄·여름에 글짓기를 힘쓰는 무리가 드물어서 급할 때에 임박하여 갑자기 준비하여 허명(虛名)을 면하니, 요행히 남은 힘이 미치는 바도 주객(主客)을 가리기 어렵습니다. 일전에 아뢴 것이 성상의 깊은 속마음에 걸리는 것이 적지 않더라도 현위(弦韋)137)  는 위에 달려 있다는 등의 하교는 신하의 뜻을 의심하시는 것 같으니, 장차 무슨 면목으로 다시 조정에 서겠습니까?"
하니, 사직하지 말라고 비답하였다.

 

이광덕(李匡德)을 대사헌으로, 이석표(李錫杓)를 검상으로, 윤득징(尹得徵)을 장령으로, 박필균(朴弼均)을 수찬으로, 홍창한(洪昌漢)을 부수찬으로, 조호신(趙虎臣)을, 경기 수사로, 구성필(具聖弼)을 황해 병사로, 김협(金浹)을 황해 수사로 삼았다.

 

5월 4일 기유

임금이 경덕궁에 거둥하였다. 장차 단경 왕후의 신련(神輦)이 태묘(太廟)에 가서 고유(告由)하는 제사를 친히 행할 것이기 때문이었다. 이때 임금이 흥정당(興政堂)에 나아갔는데, 병조 판서 조상경(趙尙絅)이 말하기를,
"이 궁궐은 행궁과 다를 것이 없으니 계엄을 풀지 말고 숙위하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내가 선조(先朝)의 고례(故例)를 따르는 것인데, 어찌 번거롭게 하겠는가?"
하고, 들어 주지 않았다.

 

우의정 송인명이 평안 감사의 장계와 피중(彼中)에게 자문(咨文)을 보내는 일 때문에 청대(請對)하고 또 말하기를,
"북백(北伯)138)  을 특별히 가려서 뽑아야 하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그럴 만한 사람을 얻을 수 있겠는가?"
하였다. 송인명이 윤용(尹容)을 천거하고 또 조현명(趙顯命)의 말에 따라 박문수(朴文秀)를 천거하고 조현명이 또 박문수는 사람들의 사력(死力)을 얻을 수 있다고 힘껏 말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내가 특별히 제수하겠다."
하였다.

 

5월 5일 경술

임금이 자정전(資政殿)에 들어가 고동 가제(告動駕祭)139)  를 행하였다. 신위(神位)를 연(輦)에 모시니, 임금이 먼저 숭정문(崇政門) 밖에 나가 서쪽으로 향하여 섰다. 신련(神輦)이 의장(儀仗)을 갖추고 나오니 임금이 지영(祗迎)하고 이어서 따라 모시고 태묘(太廟)에 가서 신련을 악차(幄次)140)  에 모시고, 이어서 걸어서 태묘에 가서 망묘례(望廟禮)를 행하고 봉심(奉審)하고, 또 걸어서 영녕전(永寧殿)에 가서 태묘에서와 같이 예를 행하고 봉심하였다. 막차(幕次)로 돌아가 장차 밤을 지내려 하는데, 대신(大臣)들이 날이 덥다 하여 재전(齋殿)에 들어가기를 청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신위가 밖에서 노처(露處)하는데 내가 재전에 들어가 쉬는 것은 마음에 미안하다."
하고, 따르지 않았다. 신하들이 또 힘껏 청하여 마지않으니, 비로소 억지로 윤허하였다.

 

5월 6일 신해

3경에 임금이 면복(冕服)을 갖추고 신련(神輦)을 모신 악차에 걸어 가서 봉심하고, 봉심이 끝나고서 태묘의 동쪽 섬돌 아래에 있는 판위(版位)에 나아갔다. 신련이 신문(神門)으로 해서 들어오니 부알례(祔謁禮)를 행하고, 예가 끝나고서 신탑(神榻)에 모시고 때가 되니 부묘제(祔廟祭)를 행하였다. 옥책문(玉冊文)에 이르기를,
"요화(瑤華)를 어루만진 자취는 멀어져 남모르는 원한이 오래 억울하셨습니다. 동사(彤史)141)  를 상고하고 의절(儀節)를 갖추어 궐전(闕典)을 크게 하니, 예(禮)에 있어서 마땅하고 정(情)을 헤아려도 마땅합니다. 생각건대, 단경 왕후께서는 명족(名族)에서 덕을 길러 의번(慤藩)에서 빈(嬪)이 되어, 대보(大寶)를 이어받아 사업을 이을 때에 집을 바루고 다스림을 도우며, 중곤(中壼)에 올라 극존(極尊)에 짝하여서는 정도(正道)를 행하고 곤의(坤儀)를 본받으셨으나, 불행히 이론(異論)이 갑자기 일어나 이궁(離宮)에 물러가 계시게 되었습니다. 지란(芝蘭)이 당로(當路)하는 것을 시샘하여 이미 국구(國舅)가 제거되는 것을 보았고, 조강(糟糠)이 하당(下堂)하는 것을 상심하나 슬프고 완곡한 성교(聖敎)를 힘입을 수 없었습니다. 한두 신하 밖에는 공론도 없었으나, 이제 수백 년이 지난 끝에 국민이 연민하고 슬퍼하여 마지 않습니다. 드디어 내 마음을 하늘이 유도하고 신명이 계도하였거니와, 더구나 비색(否塞)이 오래면 태통(泰通)이 돌아오는 물리(物理)이겠습니까? 쓸쓸한 황교(荒郊)에서 구롱(舊壠)의 물색(物色)을 거의 상하였으나, 엄숙하고 아름다운 청묘(淸廟)에 새로 부제(祔祭)하는 의절을 크게 밝힙니다. 오르내리시는 선후(先后)의 영(靈)이 즐거워하고 기뻐하실 것이니, 영고(寧考)께서 계술(繼述)하시는 뜻이 이제야 이루어졌습니다. 황홀한 휘적(翬翟)이 거듭 빛나고 신인(神人)이 함께 경축합니다. 삼가 신(臣) 모관(某官)을 보내어…… 우러러 바라건대, 밝게 살피어 굽어 흠향하소서. 성대히 일어나 임하여 홍조(洪祚)를 몰래 돕고, 다하지 않은 아름다운 공렬(功烈)을 드날려 많은 복을 더욱 내리소서."
하였다. 【전 대제학 이덕수(李德壽)가 지었다.】  예가 끝나고서 임금이 환궁하였다. 임금이 부묘 경과(祔廟慶科)의 전례를 물었는데, 공조 판서 윤순(尹淳)이 증광시(增廣試) 또는 별시(別試)를 행하였다고 대답하니, 임금이 가을이 되거든 정시(庭試)를 설행하라고 명하였다.

 

안경운(安慶運)을 장령으로, 권현(權賢)을 헌납으로, 원경순(元景淳)을 정언으로 삼고, 이석표(李錫杓)를 사인(舍人)에 부직(付職)하였다.

 

임금이 선정전(宣政殿)에 나아가 교서를 반포하고 하례를 아뢰고, 백관이 치사(致詞)하고 전문(箋文)을 바치기를 의식대로 하였다. 교서를 이르기를,
"왕은 이르노라. 궐장(闕章)을 모두 거행하여 종사(宗事)에 유감이 없고 부례(祔禮)를 마치자 대호(大號)를 올렸다. 드디어 신인(神人)이 모두 기뻐하니 전국이 경사를 같이해야 할 것이다. 우리 중묘(中廟)께서 나라를 안정시키신 때에 성비(聖妃)께서 손위(遜位)하신 원통한 일이 있었다. 곤덕(壼德)이 어그러지지 않아서 실로 천지를 다시 이루는 공렬을 도우셨는데, 조정의 의논에 잘못이 많아서 드디어 일월(日月)이 함께 빛나는 빛을 이지러뜨렸다. 처음 시작하는 때를 당하여 뭇 신하의 뜻에 애써 따르셨지만 조강(糟糠)에 관한 하교를 보면 대저 어찌 본심에서 나온 것이겠는가? 아! 그때의 일은 차마 자세히 말할 수 없거니와, 진실로 인심이 잊을 수 없는 것이다. 두 신하가 상소하여 청한 것이 강개하였어도 아깝게도 당시에 행해지지 못하였으나, 백세(百世)의 공론이 분명하여 참으로 뒷날에 기대하신 듯하다. 현묘(顯廟)께서 비로소 수총(守塚)을 두고 조금 표숭(表崇)하려 하셨고, 영고(寧考)께서 특별히 명하여 사당을 세우게 하신 것은 대개 의리로 일으키려 하신 것이겠으나, 사체(事體)가 매우 어렵고도 중대하므로, 전례(典禮)가 거행되어야 할 것인데 겨를이 없었다.
전의 의논을 두루 살펴보면 사람들 사이에 서로 버티는 말이 없지는 않았으나, 자전(慈殿)의 말씀을 우러러 받고서 비로소 무인년142)   이후로 뒤미처 뉘우치신 하교를 징험할 수 없었다. 그런 뒤에 내 뜻이 더욱 결정되고 또 따라서 여론도 다 같았다. 드디어 원후(元后)의 존위를 회복하고 이어서 태실(太室)의 부제(祔祭)를 거행하니, 노(魯)나라 사람이 순서에 따라 제사하는 제도를 본떠 위서(位序)가 정연해지고, 한(漢)나라 선제(宣帝)가 조강지처를 잊지 않은 것을 본받아 정례(情禮)가 갖추어졌다. 남모르는 원한과 오랜 억울함이 죄다 씻기어 천도(天道)가 반드시 펴질 것이고, 신리(神理)와 물정(物情)이 모두 마땅하여 방례(邦禮)에 유감이 없다. 상설(象設)은 원친(園寢)의 숭식(崇飾)을 근엄하게 하고 아름다운 공렬은 완염(琬琰)과 함께 빛을 같이하니, 내 봉헌(奉獻)을 나 소자(小子)가 이른 아침부터 늦은 밤까지 게을리하지 않고 선대의 사업을 계술(繼述)하여 전영인(前寧人)143)  이 뜻한 일이 성취될 것이다. 큰 경사가 참으로 전에 없던 것이니, 큰 은택이 아래에 미치는 것을 어찌 늦추겠는가? 이달 6일 어둑새벽 이전의 사죄(死罪) 이하의 잡범을 모두 사유한다. 아! 조정(祖宗)의 신령께서 말없이 계도하는 바는 성대한 예를 이루었고 강역의 신민이 함께 기뻐하는 바는 왕명을 펴는 것이니, 무릇 관유(寬宥)하는 데에는 구전(舊典)이 있어 원근(遠近)이 새 경사를 함께 할 것이다. 그러므로 교시하니 잘 알아야 할 것이다."
하였다.  【예문관 제학 박사수(朴師洙)가 지어 바쳤다.】


【태백산사고본】 36책 49권 17장 B면【국편영인본】 42책 627면
【분류】왕실-의식(儀式) / 왕실-비빈(妃嬪) / 어문학(語文學)


[註 142] 무인년 : 1698 숙종 24년.[註 143] 전영인(前寧人) : 세상을 편안하게 한 선왕.

 

5월 7일 임자

예조 당상과 도감 당상과 경기 감사에게 명하여 온릉(溫陵)에 가서 화소(火巢)의 경계를 정하게 하였다.

 

부묘(祔廟)의 상전(賞典)을 행하라고 명하였다. 친제(親祭) 때의 아헌관(亞獻官) 김재로 이하에게 모두 말을 내리고 도승지(都承旨) 이춘제(李春躋)와 예방 승지(禮房承旨) 이익정(李益炡)에게 가자(加資)하고 집사자(執事者)에게는 각각 차등을 두어 상을 주고, 부묘 도감 도제조(祔廟都監都提調) 송인명(宋寅明)에게 말을 내리고, 제조(提調) 조현명(趙顯命)·유척기(兪拓基)·홍현보(洪顯輔)와 도청랑(都廳郞) 이정보(李鼎輔)·남태량(南泰良)에게 모두 가자하고, 나머지는 각각 승서(陞敍)하거나 각각 차등을 두어 상주고, 책보(冊寶)를 쓰고 짓고 받든 자들에게 차등을 두어 말을 내리고, 제주관(題主官) 이광세(李匡世)에게 가자하였다.

 

5월 8일 계축

조현명을 우참찬으로 삼았다.

 

5월 9일 갑인

조명리(趙明履)·서명신(徐命臣)을 교리로, 권영(權瑩)을 수찬으로, 김광세(金光世)를 부수찬으로, 이광운(李光運)을 사간으로 삼았다.

 

적전 영(籍田令)이 친경전(親耕田)의 햇보리를 바치니, 태묘에 올리라고 명하였다.

 

5월 10일 을묘

박문수(朴文秀)를 특별히 제수하여 함경도 관찰사로 삼고, 윤순(尹淳)을 경기 관찰사로, 정석오(鄭錫五)를 이조 참판으로, 황재(黃梓)를 응교로, 이이장(李彝章)을 설서로 삼았다.

 

임금이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우의정 송인명이 이형원(李馨遠)에게 서북 변방을 살피게 한 명을 거두고 갑산(甲山)·강계(江界)·만포(滿浦)의 세 수신(守臣)을 특별히 가려 뽑고 포청(捕廳)을 시켜 국경을 넘은 사람 이빈(李濱)을 잡아 오게 하기를 청하니, 그대로 따랐다. 당초에 북도(北道)에서 국경을 넘은 사람의 일 때문에 조정에서 서백(西伯)·북백(北伯)에게 명하여 수령 가운데에서 변방의 일을 아는 자를 차출하여 보내어 두 변방을 살피게 하였는데, 평안 감사 민응수(閔應洙)는 숙천 부사(肅川府使) 이형원을 차사원(差使員)으로 삼아서 보냈다. 이형원이 가고 나서 갑산 부사(甲山府使) 신세광(申世洸)이 이형원이 군사 5백 명을 징발하여 스스로 거느리고 세 척의 배를 만들어 곧바로 압록강을 건넜다고 감사 정석오(鄭錫五)에게 보고하니, 정석오가 비국에 전보(轉報)하였다. 이에 송인명이 그 일을 아뢰기를,
"압록강은 넘어갈 곳이 아닙니다. 앞으로 말썽을 일으킬지는 진실로 논할 수 없으나 조정을 속이고 도신(道臣)을 속이고서 마음대로 경계를 넘었으니, 일이 매우 놀랍습니다. 지금의 계책으로는 살피게 한 명을 빨리 거두고 갑산·강계·만포의 세 수신을 가려 보내고 연유를 갖추어 피중(彼中)에게 자문을 보내야 하겠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신세광의 보첩(報牒)을 가져다 보고 나서 신세광가 어떤 사람인지를 물으니, 판윤(判尹) 구성임(具聖任)이 말하기를,
"쓸 만한 사람입니다."
하였다. 임금이 자문을 보내야 할 것인지를 여러 신하들에게 물었는데, 이조 판서 윤혜교(尹惠敎)·병조 참판 윤용(尹容)이 말하기를,
"허실을 모르므로 경솔히 자문을 보낼 수 없겠습니다."
하고, 개성 유수 정우량(鄭羽良)·지평 신사건(申思建)의 의논도 같았으나, 송인명이 힘써 말하기를,
"나랏 일을 꾀하는 도리는 만전을 기하는 것이 귀중하니, 미리 자문을 보내지 않아서는 안되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차사원 이형원·박양좌(朴亮佐)를 잡아오게 하고, 갑산·강계·만포 등의 관원을 가려 보내라고 명하고 또 포청을 시켜 국경을 넘은 죄인 이빈 등 세 사람을 잡아오게 하였다. 송인명이 갑산·강계는 마땅한 사람을 얻기 어렵다 하여 강계에서 이의풍(李義豐)을 천거하고 임금도 윤광신(尹光莘)이 갑산에 맞는다고 말하였는데, 구성임이 힘써 찬성하였다. 정우량이 말하기를,
"송도(松都)는 서울에 버금하는 중요한 곳으로서 재력이 다하였으니, 대신에게 하문하여 구획(區劃)하소서."
하고, 송인명이 말하기를,
"쌀과 베는 지금 구획하여 줄 만한 것이 없는데, 공명첩(空名帖)은 공연히 사단을 일으키는 것이니, 참작하여 주어야 하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1천 장을 주었다. 정우량이 또 말하기를,
"송도의 선비는 학문에 뜻을 두는 것이 타도(他道)와 다르니, 주자(朱子)의 백록동 서원(白鹿洞書院)에 구경(九經)을 반사(頒賜)한 고사(故事)처럼 양남(兩南)의 각도에 명하여 사서(四書)·삼경(三經)과 《소학(小學)》·《근사록(近思錄)》을 인쇄하여 보내게 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5월 11일 병진

오래 가물었기 때문에 삼각산(三角山) 등에 관원을 보내어 비를 빌게 하였다.

 

임금이 판부사(判府事) 김재로를 소견하였다. 김재로가 말하기를,
"단경 왕후의 기신(忌辰)을 본가에서 기록한 것은 12월 5일인데 실록의 간지(干支)를 살피니 7일이었습니다. 상세히 살펴보지 않아서는 안되겠으니, 춘추관(春秋館)의 당상(堂上)·낭관(郞官)을 다시 보내어 실록을 베껴 오게 하소서."
하였는데, 조현명이 말하기를,
"실록에 기록된 간지가 매우 명백하니, 다시 살필 필요가 없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5월 12일 정사

교리 서명신(徐命臣)과 수찬 권영(權瑩)을 변방 먼 곳의 만호(萬戶)로, 응교 송교명(宋敎明)을 찰방(察訪)으로 출보(黜補)하여 그날로 사조(辭朝)하게 하였다. 이때 옥당(玉堂)의 관원들이 다 정세(情勢)를 핑계하여 행공(行公)하지 않아서 정강(停講)이 여러 달에 이르렀으므로, 임금이 하교하여 매우 꾸짖고 특별히 명하여 외직에 보임하게 하였는데, 정원(政院)에서 도로 거두기를 계청하였으나, 따르지 않았다.

 

종실(宗室) 낭제군(琅堤郡) 이섬(李燂) 등 16인이 상소하여 동조(東朝)와 당저(當宁)의 존호(尊號)를 청하기를,
"대왕 대비께서는 지극한 어짐과 아름다운 덕이 문모(文母)144)  보다 못하실 것이 없으므로 휘호(徽號)를 존숭하여 아름다움을 나타내는 것은 그만둘 수 없는 일이며, 우리 전하께서 즉위하신 이래 큰 공과 성대한 덕을 본디 엄폐할 수 없는 것이 있습니다. 사신을 자주 보내어 선대의 피무(被誣)를 분명히 밝히고 대란(大亂)을 평정하여 종묘가 다시 편안해지고 인산(因山)을 새롭게 하여 능히 위호(位號)를 회복하셨으니, 이런 비상한 공으로 호(號)을 받지 않고 고금에 뛰어난 아름다움으로 선왕의 법도를 지키기만 한 임금으로 굽혀 계신 것이 어찌 현용(顯庸)을 나타내어 후세에 전하는 방법이겠습니까? 조정에 있는 신료들이 혐의쩍은 자취에 구차하게 얽매여 머뭇거리는 것이 있으니, 이것이 신들이 서로 이끌고 일제히 호소하는 까닭입니다. 이러한 공덕이 모두 우뚝하다 하겠습니다마는, 변무(辨誣)한 일은 더욱이 중한데 사책(史冊)이 왔을 때에 인묘(仁廟)께만 고하고 열성(列聖)께 고하지 않았으니, 예의에 어그러집니다. 경술년145)  의 변무는 오로지 자신이 충성을 다한 것에 힘입었는데 종묘에 고하는 예를 또 빠뜨리고 거행하지 않았으니, 매우 슬픕니다.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신풍(宸衷)에서 결단하여 전후의 변무를 태묘에 두루 고하고 이어서 사신의 훈로(勳勞)를 책록(策錄)하여 신들이 송축하는 정성을 윤허하소서."
하니, 하교하기를,
"두 존호를 아울러 청하였으나 뜻은 책훈(策勳)에 있으니, 그 마음이 공정하지 않다."
하고, 그 소(疏)를 도로 주라고 명하였다. 이때 조정의 의논은 호를 올릴 생각이 있었으나 스스로 발언하기 어려우므로 종신에게 부탁해서 하였다. 이때에 이르러 또 상소하게 하였는데, 거기에 ‘아첨한다는 비방을 받을까 두려워 혐의쩍은 자취에 얽매일 뿐’이라 한 말이 참으로 그 실상을 말한 것이었다.

 

5월 13일 무오

허옥(許沃)을 사간으로, 채응복(蔡膺福)을 헌납으로, 민선(閔墡)을 장령으로, 이석표(李錫杓)를 부응교로, 오수채(吳遂采)를 부교리로, 유최기(兪最基)를 교리로, 홍봉조(洪鳳祚)·박필균(朴弼均)을 수찬으로, 박사수(朴師洙)를 지경연사로, 오원(吳瑗)을 부제학으로, 홍계유(洪啓裕)를 부수찬으로 삼고, 좌의정(左議政) 익창 부원군(益昌府院君) 신수근(愼守勤)에게 신도(信度)라 증시(贈諡)하고, 금성 대군(錦城大君) 이유(李瑜)에게 정민(貞愍)이라 증시하고, 증 찬성(贈贊成) 이세필(李世弼)에게 문경(文敬)이라 증시하고, 인성군(仁城君) 이공(李珙)에게 효민(孝愍)이라 증시하고, 봉조하(奉朝賀) 최규서(崔奎瑞)에게 충정(忠貞)이라 증시하였다.

 

부제학 서명빈(徐命彬)을 웅천 현감(熊川縣監)으로 출보(黜補)하였다. 웅천은 가장 멀고 험악하다고 칭하는 무인(武人)의 벼슬자리 인데, 이때 임금이 유신들이 부당하게 작은 혐의를 인책하는 것에 격노하여 서명신(徐命臣) 등을 출보하고 나서 또 칙려(飭勵)를 소관(小官)에게만 베풀어서는 안된다 하여 이어서 이 명이 있었다. 이어서 유신을 용납하여 보호한 승지(承旨)·대신(臺臣)을 모두 체직하였는데, 정언 김낙증(金樂曾)과 지평 신사건(申思建)과 승지 양정호(梁廷虎)·김정윤(金廷潤)·신만(申晩) 등을 모두 갈았다. 부응교 이석표(李錫杓)는 위패(違牌)하였는데, 직산현(稷山縣)에 투비(投卑)하라고 명하였다.

 

황해 감사 유엄(柳儼)이 상소하여 사직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유엄은 중묘(中廟) 때의 훈신(勳臣) 청천군(菁川君) 유순정(柳順汀)의 후손인데, 교리 홍계유(洪啓裕)가 상소하여 유순정이 모후(母后)를 폐위한 죄를 논하고 정향(庭享)에서 내치기를 청하였으므로, 인혐(引嫌)하여 면직을 청하였다.

 

우의정 송인명이 차자를 올려 유신을 출보(黜補)한 처분이 지나침을 말하고 또 말하기를,
"부응교 이석표는 어버이의 병 때문에 위패(違牌)하였는데 또한 귀양갔으니, 너그러이 용서하셔야 하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뜻이 조금 풀렸다.

 

임금이 소대를 행하였다. 시독관(侍讀官) 오수채(吳遂采)가 승지(承旨)·유신(儒臣) 및 이석표(李錫杓)를 처분한 것이 지나침을 말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이것은 기강을 중히 여기기 때문이다."
하고, 승지에 대한 처분만을 거두었다.

 

5월 14일 기미

장령        민선(閔墡)을 진도 군수(珍島郡守)로, 헌납 채응복(蔡膺福)을 정의 현감(族義縣監)으로 출보(黜補)하였다. 민선 등이 상소하여 네 유신(儒臣)을 구하려 하니, 임금이 거만하고 불순한 것이 날로 심해지고 사람들이 모두 붕당을 감싼다 하여 분부를 내려 매우 꾸짖고 이어서 출보하라고 명하고 도임하는 날에 도신(道臣)이 장문하게 하였다. 대개 이때 강관(講官)이 갖추어지지 않아서 법강이 오래 폐기되었으므로 진실로 죄가 없다 할 수 없으나, 임금이 출보한 것도 지나친 거조라 할 수 없으나, 승지·대각이 함께 상소하여 논하고 대신(大臣)까지도 차자를 올려 신구(申救)하였으니, 그 또한 성세(盛世)의 일이다. 이 뒤로는 일을 말한 신하가 혹 중하게 주륙을 받기에 이르러도 대신(大臣)·삼사(三司)는 이따금 궐정(闕庭)에서 호소하여 벌주기를 청하기까지 하고 태연히 부끄러워하지 않고 성궁(聖躬)에 허물을 돌렸으니, 또한 세도(世道)가 변한 것을 볼 수 있다.

 

송수겸(宋守謙)을 장령으로, 한익모(韓翼謨)를 수찬으로, 정이검(鄭履儉)을 부수찬으로, 서종급(徐宗伋)을 부제학으로, 이응협(李應協)을 설서(說書)로 삼고, 북청 부사(北靑府使) 박필정(朴弼正)은 군기(軍器)를 보수하였다 하여 가선(嘉善)에 가자(加資)하였다.

 

임금이 소대를 행하였다. 시독관(侍讀官) 오수채(吳遂采)가 ‘백성이 중하고 사직은 그 다음이고, 임금이 경하다.[民爲重 社稷次之 君爲經]’는 글로써 경계할 것을 아뢰니, 임금이 기뻐하며 말하기를,
"이것은 백세(百世)의 임금들이 경계해야 할 것이니, 내가 덕이 없기는 하나 힘쓰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고, 유신에게 명하여 열 자를 크게 써서 바치게 하였다.

 

5월 15일 경신

임금이 선정전(宣政殿)에서 상참(常參)을 행하였다.

 

주강을 행하였다.

 

임금이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민형수(閔亨洙)를 해남(海南)에 귀양 보내고 도승지를 보내어 이광좌(李光佐)에게 전유(傳諭)하게 하였다. 우의정 송인명이 말하기를,
"신이 근일 성덕(聖德)의 과실이 큰 것을 먼저 아뢰고 그 다음에 묘당의 일에 대해 언급하겠습니다. 성상께서는 이미 고사(古事)를 널리 아시므로 보상(輔相)이 진퇴할 즈음에 예우하셔야 할 것인데, 더구나 여러 재상들에 비하여 더욱이 중한 수상(首相)이겠습니까? 지금 수상은 기구(耆舊)인 신하로서 성상께서 기대하시는 바가 어떠하겠습니까마는, 강교(江郊)에서 석고(席藁)한 지 이미 석 달이 되었는데 한 자의 비교(批敎)가 없으므로 또한 감히 상소하여 스스로 밝히지 못합니다. 민형수로 말하면 지난번 신이 아뢴 바는 대개 처분이 혹 지나칠 것을 염려한 것이고 전혀 죄가 없다고 한 것이 아닙니다. 그 말이 고상(故相)에게서 나온 것이므로 심하게 죄주려 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어찌 죄주고 죄주지 않는 사이에 버려둘 수 있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경(卿)의 말이 아니라도 본디 처리하려 하였는데 내가 참고 말하지 않았다. 신하들은 각각 제 뜻을 아뢰라."
하였다. 송인명이 말하기를,
"선후(先后)의 친속이기 때문에 법을 굽혔다면 성덕(聖德)에 있어서는 손상될 것이 없을 것입니다."
하고, 예조 판서 신사철(申思喆)도 송인명의 말과 같았다. 좌참찬 조현명이 말하기를,
"민형수가 상소한 것은 하나의 변서(變書)입니다. 그 말이 옳다면 영상(領相)이 역(逆)일 것이고, 영상이 역이 아니라면 그 말이 남을 악역으로 무함한 것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민형수의 말이 아니라 그 아비의 말을 그대로 말한 것이니, 시비·득실은 그 아들에게 대하여 논할 것이 아닙니다."
하고, 이조 판서 윤혜교(尹惠敎)는 은혜와 법률을 참작하는 사이에 시비의 공정한 것을 해치는 것이 없게 하기를 청하였다. 수찬 오수채가 말하기를,
"참으로 민형수의 말과 같다면 이는 대신(大臣)이 역일 것이므로 절로 왕법이 있을 것이고, 그렇지 않다면 죄는 절로 돌아갈 곳이 있을 것입니다. 오직 성상께서 천리(天理)의 공정함을 극진히 하여 처리하시기에 달려 있을 뿐인데, 은혜와 법률이 반드시 중도에 맞게 하셔야 이것이 또한 천하의 공정한 것일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내가 봉조하(奉朝賀)의 말을 슬퍼하고 아깝게 여기는 것은 어진 이에게 완전하기를 요구하는 뜻이다. 그 사람이 살아 있다면 혹 그 시비를 논할 수도 있겠으나, 죽은 뒤에는 다시 제기하여 논하지 않으려는 것이 내 본의이다. 유신(儒臣)의 천리를 다한다는 말도 공정한 것이 아니다. 저것도 극진한 것이라 하고 이것도 극진한 것이라 하니, 극진한 것은 본디 하나인데 이제는 극진한 것이 둘이 되었다. 민형수가 상소한 말은 그가 평소에 익히 들은 것이다마는, 나는 다만 민형수를 그르게 여길 뿐이다. 어찌하여 반드시 그 아비 때문이라 해야 하겠는가?"
하고, 이어서 하교하기를,
"세도(世道)가 날로 낮아지고 인심이 날로 투박해져서 서로 충(忠)을 말하고 역(逆)을 말하며 부끄러워하고 꺼리는 것이 없다. 임금이 음식을 물리친 뒤인데 지금의 신하로서는 어찌 감히 마음에 싹틔우고 입에서 낼 수 있겠는가? 조태언(趙泰彦)에게도 오히려 극률(極律)을 쓰려 하였는데, 더구나 민형수이겠는가? 임금이 잔약한 자에게만 법을 쓴다면 나라의 기강이 있다고 하겠는가? 아! 역이라는 것은 강상에 관계되는 것이니, 배척받은 자가 역이라면 절로 그 형률이 있을 것이고, 배척받은 자가 역이 아니라면 반좌(反坐)되어야 할 것이다. 아! 영상과 봉조하의 지난날의 일은 그때의 상황이 의구하고 막혀서 그렇게까지 된 것인데, 능히 진정시키고 양편을 화해시켰으므로 상직(相職)에 있을 때에 임금과 신하 사이에 다시는 막히는 것이 없었으니, 혹 그 뒤의 말이 있었더라도 그 아들은 감히 임금 앞에 다시 말할 수 없을 것인데, 더구나 그 전에 있었던 일이겠는가? 신하의 죽음을 애도하는 하교에 슬퍼하고 애석히 여기는 것을 대략 보였으니, 아들의 도리로서는 이 하교를 가지고 그 아비의 영전에 울며 아뢰고 매우 스스로 칙려한다면 또한 마땅히 임금의 하교에 감동하고 아비의 충성을 나타내는 것이 될 것이다. 아! 영상의 심사는 내가 남김없이 통촉하여 이미 충성으로 받아들였는데, 임금의 하교를 받은 지 3년이 되어도 고심하는 것을 본받지 못하고 슬퍼하고 애석히 여기는 것을 헤아리지 못하고서 마음대로 말하여 위로 그 임금을 업신여기니, 이것은 불충이다. 강상에 관계되므로 남을 무함한 율로 처치한다면 아버지의 말을 듣고 아버지의 말을 그대로 말하였다 하여 대신 왕법에 빠졌다 할 것이니, 어찌 아들이 차마 할 수 있는 것이겠는가? 이것은 불효이다. 늙은 부모가 집에 있으면 의지하는 것은 손자뿐인데 다반사로 법을 범하려 하니, 이것이 차마 할 수 있는 것이겠는가? 왕년을 추상하는 뜻으로 빨리 말감(末勘)146)  에 따라 민형수를 해남현에 귀양 보내라."
하고, 또 이미 민형수를 죄주었으니 다시는 개의하지 말라고 하교하여 도승지를 보내어 이광좌에게 전유하게 하였다. 송인명이 민형수를 멀리 귀양 보내는 것이 너무 지나치다고 말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극률에 처하려다가 참작하였다."
하였다. 당초 민형수가 상소하여 이광좌를 논하였을 때에 임금이 매우 죄줄 뜻이 없었으므로, 송인명이 그 말을 이랬다 저랬다 하여 이미 죄주어야 한다고 말하고 나서 또 반드시 죄줄 필요가 없다고 말하였고, 이광좌가 외방에 나가게 되어서는 송인명이 수상의 일을 행하였다. 그래서 이광좌의 무리가 비방하는 의논이 시끄러우므로 송인명이 편안하지 않게 생각하였는데, 이때에 이르러 이광좌·민형수의 일을 아뢰었으나 오히려 다시 그 말을 머뭇거렸다. 송인명이 또 말하기를,
"유신에 대한 처분이 너무 지리하고 만연하여 멀리 바다를 건너기에 이르렀으니 마침내 너무 지나치십니다."
하니, 임금이 드디어 고쳐서 채응복(蔡膺福)을 해남 현감(海南縣監)으로 제수하고 이석표(李錫杓)를 율봉 찰방(栗峰察訪)으로 보임하였다. 이에 앞서 삼등현(三登縣)에서 도둑을 안치(按治)하였는데, 수인(囚人) 중에 이빈(李濱)이라는 자가 있었다. 국경을 넘은 일로 옥사(獄辭)에 관련되어 잡혔는데, 이빈이 말하기를, ‘백두산 아래에 1백여 마을이 있는데 그 괴수는 김거사(金居士)이다.’라고 하였다. 송인명이 이 때문에 건백하여 백두산의 정계(定界)를 살펴보기를 청하고 또 이형원(李馨遠)을 보내어 살피게 하였는데, 이형원이 군사를 징발하고 배를 만들었기 때문에 죄주고 변방의 세 수신(守臣)도 체직시키고 도신(道臣)을 시켜 살펴서 아뢰게 하였다. 이때에 이르러 그 문안을 올렸는데 그 말이 허황하였다. 임금이 보고서 여러 신하들에게 물었는데, 신하들이 모두 믿을 만하지 못하다 하여 버려 두기를 청하였다. 송인명이 또 종성 부사(鍾城府使)를 파면하기를 청하였는데, 국경을 넘는 것을 금하지 못하였기 때문이었다. 송인명이 또 말하기를,
"이상집(李尙)은 임인년147)  의 옥사 때에 죽었는데 사람들이 다 억울하다 하니, 금오(金吾)148)  를 시켜 옥안을 상고하여 아뢰게 하소서."
하니, 윤허하였다.

 

5월 16일 신유

경사 좌병사 우하형(禹夏亨)의 벼슬을 파면하고 동래 부사(東萊府使) 정형복(鄭亨復)을 나문(拿問)하였다. 당초에 조정에서 각도에서 봄에 조련하는 것을 멈추고 다만 영장(營將)을 시켜 순점(巡點)하라고 명하였는데, 정형복이 농사에 방해된다고 핑계하여 어기고 행하지 않았으므로, 우하형이 그 일을 아뢰고 경책(警責)하기를 청하였다. 우의정 송인명이 아뢰기를,
"순점은 군율에 관계되므로 영을 어긴 자가 있으면 곧 거론하여 아뢰어야 할 것인데, 이제 우선 느슨히 논계(論啓)하여 곤수(閫帥)149)  의 체모를 잃었으니, 우하형은 파직해야 하겠습니다. 정형복은 천연(遷延)하고 어겨서 장수의 영을 받들지 않았으니, 나문해야 하겠습니다."
하니, 그대로 따랐다.

 

우승지 구택규(具宅奎)가 상소하여 사직하였다. 당초에 대신(臺臣) 송창명(宋昌明)이 구택규의 평생을 거론하여 참혹하게 공박하되 얼굴을 갈고 낯을 바꾸어 천억(千億)으로 변신한다고까지 말하였는데, 임금이 송창명을 배척하고 위유(慰諭)하였다. 그래서 구택규가 이미 출사하고 나서 다시 상소하여 스스로 변명하였다.

 

형조 판서 박사수(朴師洙)가 상소하여, 《선원보략(璿源譜略)》의 발의 발문을 지어 바치라는 명을 사양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박사수는 바야흐로 예문관 제학을 겸하였고 이때 대제학이 없었으므로 박사수에게 명하였는데, 박사수가 고례(故例)를 두루 거론하여 사양하였다.

 

임금이 석강을 행하였다. 승지 이정보(李鼎輔)와 교리 오수채(吳遂采)의 벼슬을 체직시키라고 명하였다. 강독이 끝나고서 이정보가 민형수를 멀리 귀양 보내는 것을 거두기를 청하였는데, 오수채가 이정보를 면전에서 배척하여 말하기를,
"민형수에 대한 처분은 굽혀서 행한 것인데 어찌 거두기를 청할 수 있겠습니까? 소견이 참으로 이러하다면 어찌하여 동료와 함께 합사(合辭)하여 작환(繳還)150)  하지 않습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유신이 민형수가 남을 악역으로 무함한 것으로 여긴다면 이정보를 남을 무함한 자를 옹호한 것으로 배척해야 할 것인데 도리어 작환하지 않은 것을 꾸짖으니, 이정보가 작환하려 하더라도 동료들이 어찌 따르려 하겠는가? 유신의 근거없는 말이 그르다."
하고, 이정보를 아울러 추고하라고 명하였다. 오수채가 급히 말하기를,
"신의 본의는 명을 거두기를 곧바로 청한 것을 그르게 여긴 것입니다."
하였는데, 말이 끝나기 전에 임금이 꾸짖어 물리치고 말하기를,
"한 자리에서 서로 협잡하니 기상이 괴이하다."
하고, 수백 마디 말을 하교하고, 오수채와 이정보는 모두 체직(遞職)하라고 명하였다.

 

5월 18일 계해

이중경(李重庚)을 승지로, 정언유(鄭彦儒)를 장령으로, 박춘보(朴春普)를 지평으로, 박필재(朴弼載)를 부교리로, 조명겸(趙明謙)을 경상도 관찰사로 삼았다.

 

주강을 행하였다.

 

5월 19일 갑자

오래 가물었기 때문에 이튿날 사직에서 친히 기도하는 일을 거행할 것을 명하였다. 우의정 송인명이 차자를 올려, 가물고 덥다 하여 친히 기도하는 것을 멈추기를 청하였으나, 따르지 않았다.
사신은 말한다. "임금이 가뭄을 민망히 여겨 친히 기도하는 것은 백성을 위한 성대한 뜻이므로 대신(大臣)으로서는 순종하기에 겨를이 없어야 할 것인데, 어찌하여 애써 말하여 힘껏 말리는 것을 그치지 않는가? 이때 임금의 춘추가 바야흐로 장성하므로 가물고 더운 것이 심하더라도 밤에 제사지내는 것이 또한 어찌 성체(聖體)를 손상하기에 이르랴마는, 당시 아첨하여 임금을 섬기는 무리들이 대개 이와 같았으니, 참으로 한탄스럽다."


【태백산사고본】 36책 49권 21장 B면【국편영인본】 42책 629면
【분류】과학-천기(天氣) / 사상-토속신앙(土俗信仰) / 왕실-의식(儀式) / 역사-사학(史學)
사신은 말한다. "임금이 가뭄을 민망히 여겨 친히 기도하는 것은 백성을 위한 성대한 뜻이므로 대신(大臣)으로서는 순종하기에 겨를이 없어야 할 것인데, 어찌하여 애써 말하여 힘껏 말리는 것을 그치지 않는가? 이때 임금의 춘추가 바야흐로 장성하므로 가물고 더운 것이 심하더라도 밤에 제사지내는 것이 또한 어찌 성체(聖體)를 손상하기에 이르랴마는, 당시 아첨하여 임금을 섬기는 무리들이 대개 이와 같았으니, 참으로 한탄스럽다."

 

영의정 이광좌가 민형수의 상소 때문에 상소하여 스스로 변명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민형수 부자가 신을 원망하는 것은 오로지 신이 그 아비를 귀양 보낼 것을 논한 데에서 나온 것인데, 속으로 반드시 보복할 생각을 품고 근거 없이 날조하여 신이 선왕의 성질(聖疾)을 숨겼다고 말하여 반드시 신의 몸과 신의 가족을 멸하려 하였습니다. 그러나 의관(醫官)이 대령하고 약원(藥院)에서 숙직하고 제조(提調)가 모두 입직한 것이 모두 조지(朝紙)151)  에 나와서 만인의 눈에 분명히 반포되었는데, 이러하여도 숨겼다고 말하는 것이 또한 말이 되겠습니까? 유일한 설청(設廳)을 그때에 미처 하지 못하여 겨를 없던 정상은 또한 천감(天鑑)이 통촉하신 바입니다. 계축년152)  의 하교에 경(卿)을 무함한 것이 아니라 실로 임금을 무함한 것이라는 말씀까지 하셨습니다. 신 때문에 무함받으시어 성교(聖敎)가 이에 이르렀으니, 몸둘 곳이 없습니다. 신의 족형(族兄) 이형좌(李衡佐)가 신이 성질을 숨겼다고 생각하지 않았다면 어찌 신에게 상소하여 스스로 변명하라고 권할 리가 있겠습니까마는, 임인년153)  의 국옥(鞫獄)은 3월에 시작되었는데 신이 판금오(判金吾)로 출사한 것은 7월에 있었고, 그 뒤에 또 탄핵받아 외방으로 나갔으니, 처음부터 끝까지 옥사(獄事)를 안치(按治)하였다고 한 것이 전혀 실상이 아닌 것은 나라 사람이 아는 바이고 관서(官書)에 실려 있는 바인데도 오히려 허황하기가 이러하니, 사사로운 글로 억지로 꾸매대어 말을 만든 것을 참으로 어찌 논할 겨를이 있겠습니까?"
하였는데, 임금이 우악하게 비답하기를,
"이것은 이미 상하가 다 아는 바인데 경은 어찌하여 개의하는가?"
하고, 승지에게 명하고 전유(傳諭)하고 같이 오게 하였다.

 

호조 판서 유척기(兪拓基)가 상소하여 민형수를 구하려 하였으나, 답하지 않았다.

 

5월 20일 을축

임금이 사직에 나아갔다. 장차 친히 비를 빌 것이기 때문이었다. 호조 판서 유척기가 천조관(薦俎官)으로서 나오지 않으니, 임금이 말하기를,
"민형수가 중한가? 향사(享祀)가 중한가?"
하고, 추고하라고 명하고 예차(預差)를 시켜 대신하게 하였다.

 

여러 군문(軍門)에 명하여 죽을 장만하고 수가(隨駕)하는 군사들을 먹이게 하였다.

 

5월 21일 병인

임금이 면복(冕服)을 갖추고 단에 올라 예를 행하는데, 가는 비가 바야흐로 내리므로 승지가 소차(小次)154)  에 들기를 청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예가 끝나고 환궁하여 곧 인정전(仁政殿)에 나아가 의금부 형조의 당상을 명소(命召)하여 수도(囚徒)를 소결(疏決)하게 하였다. 신하들이 번갈아 아뢰기를,
"소석(疏釋)이 조금 늦은들 무엇이 해롭겠습니까? 옷을 갈아 입고 성체(聖體)를 조금 쉬소서."
하였으나, 임금이 듣지 않고 말하기를,
"내가 길에서 명하려 하였는데 군사들이 젖는 것을 염려하여 명하지 못하였다."
하였다. 오원(吳瑗)·박필균(朴弼均)·홍계유(洪啓裕)·이영복(李永福)·권집(權䌖)·조명리(趙明履)·홍봉조(洪鳳祚) 등 20인을 석방하라고 명하였다. 안복준(安復駿)도 거기에 끼었는데, 동지의금부사 홍경보(洪景輔)가 말하기를,
"장오(贓汚)에 관계된 안복준과 과장(科場)에서 사정(私情)을 쓴 송재항(宋載恒)·김형일(金衡一) 같은 자는 혼동하여 석방하여서는 안되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법관이 주장하는 바가 옳다. 모두 그대로 두라."
하였다. 또 승지 조윤성(曹允成)에게 명하여 전옥(典獄)에 가서 죄가 가벼운 죄수를 석방하게 하고, 또 포청(捕廳)의 문안을 가져와 그 중에서 가벼운 자를 석방하게 하였다.

 

5월 22일 정묘

비가 내렸다.

 

대제학을 권점(圈點)하라고 명하였다. 이때 박사수는 이미 《선원보략》의 발문을 지으라는 명을 사양하였다. 승지 이중경(李重庚)이 말하기를,
"일찍이 문형(文衡)을 지낸 사람은 윤순(尹淳)·이덕수(李德壽) 두 사람이 있을 뿐입니다. 누가 좋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이덕수는 시골에 있거니와, 윤순은 기백(畿伯)155)  에 제수되었더라도 아직 경계에 도착하지 않았으니, 전 대제학으로서 명초(命招)하여 권점시키도록 하라."
하였다. 대신(大臣) 이하가 이미 빈청(賓廳)에 모였는데, 윤순이 상소하여 아뢰기를,
"신은 이미 전임(前任)이 아니거니와 또 외관인데, 어찌 전임을 버려 두고 신에게 책임을 옮길 수 있겠습니까?"
하고, 명에 따르지 않으니, 전례를 살펴 품계(稟啓)하라고 명하였다.

 

영의정 이광좌가 상소하여 아뢰기를,
"서계(書啓)할 때에 친히 기도하는 것을 멈추기를 청하지 못하였는데, 동료 재상의 차본(箚本)을 보게 되어서는 놀랍고 근심되어 못 견되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경의 나라를 위하는 단심은 하늘에 물어 보증할 수 있다고 비답하였다.

 

임금이 우의정        송인명과 함경 감사        박문수에게 명하여 입시하게 하였다. 송인명이 이빈(李濱)을 사문(査問)하여 아뢸 것을 주청(奏請)하니, 임금이 박문수에게 물었는데, 박문수가 말하기를,
"이빈의 말은 반드시 허망한 대로 돌아갈 것입니다. 청컨대 신의 영문(營門)으로 내려 보내소서."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경은 장차 어떻게 처치하겠는가?"
하니, 박문수가 말하기를,
"그 죄를 밝혀 국경에서 효시하면 민심이 환히 알게 될 수 있고 변방이 진정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였다. 박문수가 또 말하기를,
"근래 북평사(北評事)가 북로(北路)의 백성에게 편론(偏論)을 가르치니, 그 마음쓰는 것이 아주 통탄스럽습니다."
하였는데, 송인명이 말하기를,
"고상(故相) 남구만(南九萬)·민정중(閔鼎重)을 북로의 인사(人士)가 각각 스스로 존경하고 흠모하는 것을 어찌 막을 수 있겠는가?"
하였다. 임금이 서원(書院)이 있느냐고 물으니, 박문수가 말하기를,
"남구만·민정중은 북로에서 끼친 은혜가 있으므로 실로 숭봉하기에 합당합니다마는, 이것을 빙자하여 다툼을 조장하고 육진(六鎭)의 황복(荒服)156)                  에서는 선생이라 칭하게 하여 색목(色目)을 나누기까지 하니, 큰 변괴입니다."
하고, 이어서 사당을 만들고 비를 세우는 폐단을 크게 아뢰었다. 또 말하기를,
"북로에는 마포가 있으나 면포가 없으니, 병조와 기영(箕營)157)                  의 면포 5천 필을 얻어서 순력(巡歷)할 때의 상격(賞格)에 갖추기를 청합니다."
하였는데, 송인명이 말하기를,
"경비가 바야흐로 다하였고 획급한 명목이 없으니 경솔히 허가할 수 없습니다. 어쩔 수 없다면 반을 줄이는 것이 옳겠습니다."
하였으나, 박문수가 또 전부 회급하기를 청하니, 임금이 웃으며 말하기를,
"경도 남에게 굽힐 때가 있는가?"
하였다. 이때 박문수가 자기 직분에서 벗어나는 것을 아뢰었는데. 송인명이 말하기를,
"방백의 체례에 어그러지니 청컨대 추고하소서."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영성(靈城)158)                  이기 때문에 이런 말을 한 것이다."
하고, 그대로 따랐다. 임금이 말하기를,
"북에서 오는 봉수는 번번이 구름 그림자[雲翳]라고 말하니 무슨 까닭인가?"
하니, 박문수가 말하기를,
"일찍이 이삼(李森)의 말 때문에 성상의 생각이 이러하셨겠습니다마는, 봉수를 설치한 것은 오로지 남북의 근심 때문인데, 만약 봉내(封內)에서 도둑이 일어나도 이것을 올린다면 국가에서 어떻게 분별하겠습니까? 또한 감사·병사가 스스로 방어하고 아뢰어야 할 것인데, 어찌 봉수를 올리기를 기다리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봉화는 외구(外寇)를 위한 것이다. 내난(內難)을 위한 것이라면 3백 60주(州)에 죄다 있을 듯하다."
하고, 병조에 명하여 절목을 바로잡게 하였다. 박문수가 이어서 전후에 명을 업신여긴 죄와 억지로 할 수 없었던 정세를 아뢰니, 임금이 말하기를,
"경의 말이 지리하면 우상(右相)이 반드시 추고하기를 청할 것이니, 내가 먼저 이르겠다. 경의 걸출한 성질로 당초에 산림에서 방일(放逸)하여 내가 경의 정상을 몰랐다면 워낙 논할 것이 없겠으나, 이미 몸을 바쳐 임금을 섬겼으니 이러하여서는 안될 것이다. 참언이 날마다 이르러 경이 아픔을 품고 한을 머금게 한다면 허물이 나에게 있을 것이다. 내가 현명하지는 못하나 결코 참언으로 비방하는 것으로 경을 의심하지 않는데, 욕설을 듣기 싫어서 조정에 서려 하지 않는다면 당론(黨論)의 세상에 어찌 벼슬할 사람이 있겠는가?"
하였다. 박문수가 말하기를,
"본병(本兵)이 된 열 달 동안에 자객을 기른다는 말까지 있었으니, 이 말을 듣고도 오히려 태연히 조정에 있을 수 있겠습니까?"
하니, 송인명이 말하기를,
"유성룡(柳成龍)은 발호한다는 참언이 있었고 이덕형(李德馨)은 불궤한다는 참언이 있었으나, 다들 아주 고달프게 분주하였으므로 세상에서 명신이 되었습니다. 박문수가 지키는 것으로 말하면 신이 실로 모르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옛사람이 행하고 또 임금에게 고한다는 말을 하였다. 경에게 북로를 맡기니 경은 힘쓰라."
하였다.

 

5월 23일 무진

수찬 홍창한(洪昌漢)을 경성 판관(鏡城判官)으로 보임하였다. 칙교가 있는 뒤에 위패(違牌)하였기 때문이었다. 이어서 정원에게 외직에 보임한 신하들이 보임한 장계(狀啓)를 살펴보고 정기(程期)를 넘긴 자가 있으면 곧 그곳에 귀양 보내라고 명하였는데, 정원에서 이석표(李錫杓)는 율봉(栗峰)이 3일 거리인데 5일 만에 비로소 부임하였다 하여 정배 전지(定配傳旨)를 입계(入啓)하였다.

 

영의정 이광좌가 서계(書啓)를 올리기를,
"민형수의 무함은 하늘과 땅과 같이 끝이 없습니다. 무신년159)  에 처음으로 발론한 자도 민형수이고 계축년160)  에 다시 발론하되 열 배나 참독(慘毒)하게 한 자도 민형수이고 오늘날에 세 번째 발론하되 만 배나 참독하게 한 자도 민형수인데, 원통함이 뼈에 사무쳐도 스스로 해명할 길이 없으니, 대개 성상께서 민형수를 중죄로 다스려 그 무함을 밝히시기를 바랐으나, 성상께서는 겉으로 은례(恩禮)를 보이시기는 하나 또한 민형수의 말을 참으로 거짓으로 여기시지 않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소대를 행하였다. 근신을 보내어 숭인전(崇仁殿)에 치제(致祭)하게 하고 단군(檀君)·기자(箕子) 이하 여러 왕의 능묘(陵墓)를 수리하라고 명하였으니, 시독관 유최기(兪最基)의 말을 따른 것이었다. 기우제를 다시 거행하라고 명하였다. 이때 날마다 가는 비가 내리다가 곧 개므로 이 명이 있었다. 유최기가 말하기를,
"각도의 감사가 으레 몸소 빕니다마는, 기내(畿內)로 말하면 수령은 행하나 도신은 아니하니, 뭇 신명에게 두루 행한다는 의리로서는 마땅히 예관에게 물어서 행해야 하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방기(邦畿)는 임금의 도읍이므로 압존(壓尊)되어 감히 하지 못하는 것인가?"
하였다. 유최기가 말하기를,
"압존이라 한다면 수령과 도신이 같을 것입니다."
하고, 시독관 조명리(趙明履)가 말하기를,
"수령은 그 경내에서 빌 뿐입니다마는, 기백(畿伯)이 빈다면 기내의 산천(山川)에 두루 제사하는 것일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예관을 시켜 널리 상고하고 대신(大臣)에게 물어서 품처하게 하라."
하였다. 외읍(外邑)에 명하여 각각 사직의 신위(神位)를 설치하게 하였으니, 유최기의 주청(奏請)을 따른 것이었다.

 

수찬 홍봉조(洪鳳祚)를 장기 현감(長鬐縣監)으로 출보(黜補)하였다. 홍봉조도 관직(館職)에 취임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 명이 있었다.

 

친경(親耕)한 적전(籍田)의 보리를 태묘(太廟)에 바쳤다. 또 동조(東朝)에 바치고 혜청(惠廳)에서 진상하는 것을 멈추라고 명하였다.

 

5월 24일 기사

김시형(金始炯)을 형조 판서로, 임정(任珽)을 승지로 삼았다.

 

5월 25일 경오

강서 현령(江西縣令) 김낙증(金藥曾)을 그곳에 정배하라고 명하였으니, 기한이 지나서 임지에 도달하였기 때문이었다.

 

임금이 일덕문(一德門)에 나아가 태묘(太廟)에서의 기우제에 쓸 향(香)을 친히 전하였다.

 

5월 26일 신미

좌승지 이익정(李益炡)이 상소하기를,
"외직에 보임된 수령으로서 부임할 기한을 어긴 자는 또한 그곳에 투비(投畀)하라는 명이 있었습니다. 이것은 오늘날 처음 있는 것인데 삼사(三司)에서 귀양간 자가 앞으로 사방의 먼 지방에 두루 있게 될 것이니, 아마도 성세(盛世)의 아름다운 일이 아닐 듯합니다."
하고, 헌납 송질(宋瓆)도 상소하여 아뢰었으나, 모두 따르지 않았다.

 

사직(司直) 박사수(朴師洙)가 상소하여 윤광신(尹光莘)을 갑산 부사(甲山府使)로 특별히 제수한 명을 거두기를 청하였으나, 따르지 않았다. 이때 조정의 의논이 윤광신에게 대장(大將)이 될 재능이 있다 하여 번번이 임금 앞에서 크게 칭찬하였으므로, 이때에 이르러 임금이 국경을 넘은 일 때문에 서쪽 변방을 염려하여 윤광신을 갑산 부사로 특별히 제수하였다. 갑산은 서쪽 변경중에서도 아주 외딴 변방이고 싫어서 피하는 사람이 많았는데, 박사수가 윤광신을 위하여 상소하기를,
"윤광신은 나라의 호신(虎臣)인데 이제 나타나지 않은 외구(外寇) 때문에 갑자기 변방에 보내니, 사방 사람들이 모두 눈이 휘둥그래져 놀라서 혹 변방의 근심이 매우 크므로 이 사람이 이 직임을 맡았다고 생각한다면, 아마도 소요할 근심이 변방에 있지 않고 장차 국내에 두루 있게 될 것입니다."
하였는데, 소(疏)가 들어가니, 아뢴 것이 지나치다고 비답하고 따르지 않았다.

 

유작(柳綽)을 지평으로, 김광세(金光世)를 부수찬으로, 신만(申晩)을 이조 참의로 삼았다.

 

5월 27일 임신

임금이 석강을 행하였다. 우단(雩壇)에서 친히 기도할 것을 명하였다.

 

5월 28일 계유

임금이 장차 우단(雩壇)에 나아가려 하는데, 약방 제조(藥房提調)와 여러 신하가 구대(求對)하여 가는 것을 멈추기를 청하려 하였으나, 임금이 모두 인견하지 않았다. 임금이 여(輿)를 타고 다가니 신하들이 연(輦)을 타고 산(傘)을 펴기를 힘써 청하였으나, 한참 뒤에야 산을 펴는 것만을 윤허하였다.

 

5월 29일 갑술

임금이 우단제(雩壇祭)를 행하였다. 예가 끝나고 환궁할 때에 관왕묘(關王廟)에 들러 재배례(再拜禮)를 행하고, 신상(神像)의 용포(龍袍)를 고쳐 지으라고 명하였다.

 

5월 30일 을해

온릉 봉릉 도감(溫陵封陵都監)의 신하들에게 상을 주었다. 도제조(都提調) 송인명(宋寅明)에게 말을 내리고, 제조(提調) 조최수(趙最壽)·윤양래(尹陽來)·박사정(朴師正)과 도청(都廳) 송징계(宋徵啓)·민정(閔珽)에게 모두 가자(加資)하고, 감조 감역관(監造監役官) 7인과 본릉(本陵)의 참봉(參奉) 1인은 모두 6품에 올리고 이례(吏隷)에게는 차등을 두어 상을 주었다.

 

임금이 조강을 행하였다. 영사(領事) 송인명이 강화 유수(江華留守) 권적(權𥛚)과 교동 수사(喬桐水使) 김유(金濰)의 장계(狀啓)에 따라 아뢰기를,
"덕적도(德積島)는 서울에서 반일정(半日程)이고 중국의 등주(登州)·내주(萊州)와 바로 상대하여 있습니다. 그 옆에 있는 소야도(蘇爺島)라는 작은 섬은 당(唐)나라 장수 소정방(蘇定方)이 주사(舟師)를 거느리고 와서 정박하였던 곳인데 이제까지 진(鎭)을 설치하여 경급(警急)을 알리는 일이 없으니, 서울의 방어가 박약한 것을 생각하면 두렵습니다. 고(故) 판서(判書) 이인엽(李寅燁)이 비로소 청하여 진을 설치한 데에는 참으로 의견이 있는데 계묘년161)  에 까닭없이 철폐하였으니, 한스럽습니다."
하고, 이어 덕적도의 지도를 바치니, 임금이 보고 여러 신하들에게 물었다. 지사(知事) 조현명(趙顯命)이 말하기를,
"섬 안에 사는 백성이 이미 많고 땅도 기름지며 서울의 목구멍과 같으니, 진을 설치하여 방어하는 것이 매우 편리하겠습니다."
하고, 송인명이 두 수신(守臣)을 시켜 형지(形止)를 다시 살피고 논열(論列)하여 아뢰게 하기를 청하니, 임금이 윤허하였다. 송인명이 말하기를,
"왕세자는 내년이면 개강(開講)할 수 있을 것이니, 도학(道學)이 있고 행실이 바른 선비를 뽑아 궁관(宮官)으로 두고 보도(輔導)를 책임지워야 하겠습니다."
하고, 이어 조진빈(趙震彬)·신경(申暻)·송명흠(宋明欽)·이양원(李養源)·송능상(宋能相) 5인을 천거하니, 임금이 차례로 의망하라고 명하고, 또 조현명에게 명하여 시독관 오수채(吳遂采) 등과 함께 《소학(小學)》에서 초절(抄節)하여 동궁(東宮)에게 진강(進講)할 것을 대비하라고 명하였다. 당초에 임금이 동궁에게 계강(繼講)할 글을 신하들에게 문의하였는데 조현명이 《소학》이 매우 요긴하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내가 열 살에 비로소 《소학》을 읽어서 자못 힘을 얻었다. 풍원(豐原)162)  의 뜻이 나와 같다."
하였다. 지평 유작(柳綽)이 전계(前啓)를 다시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근래 포상(褒賞)하는 은전이 너무 지나칩니다. 박필정(朴弼正)·이제담(李齊聃)은 약간의 군기(軍器)를 수개(修改)하였는데, 어찌 문득 덕 있는 자를 명하는 거복(車服)과 비의(緋衣)를 입고 옥관자(玉貫子)를 붙이는 벼슬을 줄 수 있겠습니까? 병사가 포상을 장청(狀請)하는 것도 뒷 폐단에 관계되니, 청컨대 북청 부사(北靑府使) 박필정과 전 판관(判官) 이제담에게 가자(加資)하라는 명을 거두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송인명이 이어서 아뢰기를,
"덕 있는 자를 명하는 반열(班列)에는 한때의 노역(勞役)으로 승수(陞授)할 수 없으니, 일체 금하소서."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선치(善治)·선진(善賑) 외에는 남상(濫賞)을 허용하지 말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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