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 1일 병자
큰 비가 내렸다. 이때 달을 넘겨 오래 가물다가 이때에 이르러 비로소 큰 비가 내리니, 임금이 매우 기뻐서 곧 보사제(報謝祭)를 거행하려고 예조를 시켜 전례를 상고하여 품(稟)하게 하였다. 예조에서 아뢰기를,
"태묘(太廟)에서 비를 빌어 친히 제사한 뒤 사흘 안에 비를 얻으면 날을 잡지 않고 바로 보사합니다마는, 외교(外郊)에서 친히 제사하여 비를 얻었을 때에는 보사하는 규례가 없습니다. 《오례의(五禮儀)》의 보사(報祀) 주(註)에 ‘무릇 홍수·가뭄에 빌고 나서 보사는 입추가 되기를 기다린 뒤에 보사한다.’ 하였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가을이 되기를 기다리는 것은 너무 늦으니, 개거든 곧 거행하라."
하였다.
안상휘(安相徽)를 집의로, 박필재(朴弼載)를 헌납으로 삼았다.
임금이 선정전(宣政殿)에 나아가 상참(常參)을 행하였다. 우의정 송인명이 비를 얻은 것을 축하하고 또 끝까지 처음처럼 삼가기를 진면(陳勉)하였다. 영돈녕부사 어유귀(魚有龜)가 말하기를,
"범이 살곳 목장(箭串牧場)에 들어왔으므로 군문(軍門)에서 바야흐로 범을 잡으려 합니다. 으레 근처에 사는 백성을 징발하여 애워싸고 지킵니다마는, 단비가 내린 끝에 모내기가 급한데 혹 농사를 버리게 될까 염려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백성의 일이 바야흐로 급한데 어찌 사람으로 말[馬]을 대신할 수 있겠는가?"
하고, 인하여 하교하기를,
"능원(陵園)에서도 호환(虎患)을 알리는 것이 있으나, 숲이 있으면 범이 있는 것은 사리가 반드시 그러한 것이니, 곡장(曲墻) 근처에서 걱정되는 것이 아니면 번거로이 알리지 말라."
하였다.
6월 2일 정축
큰 비가 내렸다.
임금이 주강을 행하였다. 지경연사(知經筵事) 홍현보(洪鉉輔)가 말하기를,
"민형수(閔亨洙)가 죄받은 뒤에 부부인(府夫人)이 지나치게 마음 아파서 슬피 우는 소리가 이웃 마을에 들리니, 성상께서 어찌 불쌍히 여기시지 않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번거롭고 잗달다 하여 추고하라고 명하였다. 삼가 살피건대, 민형수를 석방해야 할 것인지는 그 죄의 유무에 달려 있고 죄의 유무는 그 말의 시비에 달려 있는데, 임금이 죄줄 때에도 이미 그 말의 시비에 따라 그 죄의 경중을 정하지 않고 문득 성모(聖母)와 부부인을 거론하여 이에 따라 관대한 뜻을 보였거니와, 신하들이 구하려 할 때에도 대개 가엾이 여길 만한 것을 애걸하는 말이 많았고 끝내 한 사람도 항변하여 그의 말이 죄주어야 할 것이 아님을 밝히지 않았으니, 조정의 논의와 거조가 이러하고도 어떻게 나라를 다스리겠는가?
임금이 석강을 행하였다. 하교하기를,
"빗물과 가뭄의 한 가지가 지극히 없거나 지극히 많은 것은 순환하는 이치가 있으나 임금이 덕을 닦고 허물을 살피는 도리는 조금도 소홀히 할 때가 없어야 하는데, 비가 지극히 없을 때를 대비하는 것은 제언(堤堰)보다 나은 것이 없다. 이제 삼복이 아직 지나지 않았으므로 가을 곡식이 성숙하기까지는 오히려 먼데, 그 사이의 홍수와 가뭄을 어찌 미리 헤아릴 수 있겠는가? 비국으로 하여금 각도에 신칙하여 유의해서 물을 모아 두게 하라."
하였다.
사신은 말한다. "제언에 물을 모아 두는 것은 농정(農政)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다. 성상이 그 이익을 깊이 알아서 번번이 방백·수령이 폐사(陛辭)할 때마다 관례에 따라 선유(宣諭)할 뿐이 아니라 정녕히 면대하여 경계하나, 한 사람도 성의(聖意)을 우러러 본받아 수치(修治)에 힘쓰지 않아 거의 다 묻혀 없어지고 심하면 백성이 경작하여 먹도록 허가하고 둔전(屯田)을 만들기를 청하는 자까지 있으니, 참으로 통탄스럽다."
【태백산사고본】 36책 49권 25장 A면【국편영인본】 42책 631면
【분류】왕실-경연(經筵) / 농업-수리(水利) / 행정-지방행정(地方行政) / 정론-정론(政論) / 역사-사학(史學)
사신은 말한다. "제언에 물을 모아 두는 것은 농정(農政)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다. 성상이 그 이익을 깊이 알아서 번번이 방백·수령이 폐사(陛辭)할 때마다 관례에 따라 선유(宣諭)할 뿐이 아니라 정녕히 면대하여 경계하나, 한 사람도 성의(聖意)을 우러러 본받아 수치(修治)에 힘쓰지 않아 거의 다 묻혀 없어지고 심하면 백성이 경작하여 먹도록 허가하고 둔전(屯田)을 만들기를 청하는 자까지 있으니, 참으로 통탄스럽다."
6월 3일 무인
김상신(金相紳)을 헌납으로, 김시위(金始煒)를 정언으로 삼았다.
임금이 주강을 행하였다. 특진관(特進官) 윤용(尹容)이 말하기를,
"신이 제언사 당상(堤堰司堂上)으로 있으므로 각도에 엄히 경계하고 또 도사(都事)를 제언랑(堤堰郞)으로 특별히 파견하여 살펴보고 치보(馳報)하게 하였는데, 경기가 묵혀 폐기된 것이 가장 많고, 영남은 혹 새로 쌓은 곳이 있고, 양서(兩西)163) 는 이따금 절수하여 개간한 것이 있고 혹 전매하여 민전(民田)이 된 것도 있으니, 품처하지 않을 수 없겠습니다."
하고, 지사(知事) 조현명이 말하기를,
"제언에 관한 정사(政事)는 참으로 농정 중에서 큰 것입니다. 실로 조화(造化)를 바꾸는 방도가 있는 것인데, 어리석은 백성이 먼 계책을 생각하지 않고 수령은 일을 일으키기를 꺼립니다. 둑을 없애고 논을 만드는 것으로 말하면 흔히 간민(奸民)·호족(豪族)의 행위에서 나옵니다. 신이 전에 친히 보건대, 증산(甑山)의 두 둑은 태조(太祖) 2년에 쌓은 것이고 한 고을이 이익을 입는 것인데 소·말의 목장이 맞는다 하여 개간하려 하였으니, 그 밖의 것은 미루어 알 만합니다."
하고, 윤용이 말하기를,
"이미 개간한 전토는 워낙 도로 묵혀 물을 모아 두기 어렵더라도 반드시 크게 경계하는 것이 있고서야 실효가 있을 수 있을 것입니다. 정주(定州)에 일찍이 효장묘(孝章廟)에서 절수한 둑 하나가 있는데 둑 아래에 사는 농부들이 절수한 세를 대납하고 도로 묵혀 물을 모아 두기를 바라니, 이것을 보면 이익을 입는 것이 많고 백성의 뜻이 절실함을 대개 알 수 있습니다. 대신과 함께 상세히 헤아려 뒷날에 품처하겠습나다."
하니, 임금이 윤허하였다.
임금이 석강을 행하였다.
6월 4일 기묘
임금이 주강을 행하였다.
6월 5일 경진
임금이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우의정 송인명이 말하기를,
"제언을 법을 어기고 경작하거나 분할하여 경작하는 것은 궁가들과 각 아문에서 절수한 지 햇수가 오래 되고 누차 전매하여 민전이 된 것입니다. 관서(關西)의 폐기된 둑으로 말하면 고상(故相) 오명항(吳命恒)이 관찰사였을 때에 역마위(驛馬位)로 획급하였다 합니다. 이러한 것들은 모두 도로 묵히기 어려우니, 청컨대 연한을 정하여 햇수가 오래 된 것은 논하지 말고 20년 또는 30년 이후를 한정하여 도로 묵히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송인명이 말하기를,
"양서(兩西)와 관동(關東)의 토포사(討捕使)를 겸하는 고을은 문무 당상관(文武堂上官)을 번갈아 차출하도록 법령에 실으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송인명이 말하기를,
"단묘조(端廟朝)의 육신(六臣)은 증시(贈謚)해야 하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여러 신하들에게 물었다. 다들 송인명의 말과 같았으나 형조 판서 김시형(金始炯)만이 불가하다고 하였는데, 임금이 말하기를,
"육신에게 복관(復官)한 것도 이미 다행하였거니와, 그대로 두라."
하였다. 송인명이 또 육신의 아버지도 모두 복관하도록 허가하기를 청하니, 그대로 따랐다. 예조 판서 신사철(申思喆)이 말하기를,
"보사제(報謝祭)는 《오례의》에 ‘홍수와 가뭄에 대하여 빌었을 때에는 입추가 되기를 기다려 설행한다.’ 하였고, 효묘(孝廟) 때에도 입추로 수교(受敎)하여 기고(祈告)를 친행(親行)한 뒤에 보사(報祀)하는 것은 절제(節祭)의 예에 따라 마련하고 관원을 보내어 기고한 뒤에 보사하는 것은 소사(小祀)의 예에 따르는 것으로 정식(定式)하였으니, 이 뒤로는 이에 따라 설행하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올해의 한재(旱災)는 왕년과 다른데 하늘이 백성을 사랑하여 이 단비를 얻었으니, 내가 보사를 설행하는 것을 이 때문에 감히 늦추어 기다릴 수 없는 것이다. 이 뒤에는 한결같이 수교와 정식에 따르라."
하였다. 대개 이 해의 한재가 매우 심하지는 않았으나, 임금이 친히 기도한 끝에 비를 얻었으므로 곧 보사를 설행하였다. 신사철이 예관으로서 고전(故典)을 인용하였으나, 말리지 못하였다. 뒤에 이를 말하여 임금이 정식으로 삼는 것을 윤허하기는 하였으나, 이 뒤에 비를 빌 때마다 작은 비를 얻더라도 문득 곧 보제(報祭)를 설행하고 정식을 쓰지 않았다.
소대를 행하였다.
민정(閔珽)을 승지로, 이광세(李匡世)를 형조 참판으로, 유정(柳綎)을 우윤(右尹)으로, 이도원(李度遠)을 수찬으로 삼았다.
6월 6일 신사
평안 감사 민응수(閔應洙)가 이형원(李馨遠)이 정탐하는 것을 검칙(檢飭)하지 못하였다 하여 상소하여 인책하고 또 전최(殿最)를 감히 봉진(封進)할 수 없는 까닭을 말하였는데, 사직하지 말라고 비답하였다.
6월 9일 갑신
동관왕묘(東關王廟)를 중수하고 관원을 보내어 치제하게 하였다.
강화 유수 권적(權𥛚)이 상소하여 말하기를,
"덕적도(德積島)는 멀리 4백 리 밖에 있으므로 왕래할 즈음에 반드시 시일을 지체하여 직무를 오래 버려 두게 될 것이니, 어찌 보장(保障)을 중히 여기고 문후의 경계를 갖추는 뜻이겠습니까? 또 봉강(封疆)에는 본디 한계가 있으니, 가령 이 섬에 진(鎭)을 설치하더라도 교동(喬桐)의 소관이 되어야 할 것인데 도리어 강도(江都)에서 가서 살피도록 요구하는 것은 불가하겠습니다."
하였다. 이때 조정의 의논은 장차 덕적도에 진을 설치하려고 강화 유수를 시켜 가서 형편을 살피게 하였으나, 권적이 병을 핑계하여 거행하지 않으므로, 대신이 추고하기를 청하니, 권적이 상소하여 논하였는데, 임금이 그 소(疏)를 돌려주고 곧 거행하게 하라고 명하였다.
임금이 석강을 행하였다. 끝나고서 포장(捕將) 구성임(具聖任)에게 명하여 앞으로 나오게 하여 이빈(李濱)을 추핵하는 일을 물었다. 구성임이 말하기를,
"철옹성(鐵甕城)에서 달아난 백성이 둔치고 모여 있다는 말은 예전부터 있습니다. 이빈이 이에 앞서 세 번 왕래하였다고 하면서 끝내 가리켜 보이지 않고, 이제는 또 찾을 수 없다고 말하니, 그 말이 매우 간사합니다."
하니, 임금이 엄히 구문(究問)하라고 명하였다.
윤득징(尹得徵)을 집의로, 김도(金䆃)를 지평으로, 윤득경(尹得敬)을 정언으로, 심성진(沈星鎭)을 승지로 삼았다.
6월 10일 을유
주강과 석강을 행하였다.
6월 11일 병술
정언 윤득경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민형수의 상소는 선지(先志)가 밝혀지지 않은 것을 슬퍼하고 의리가 길이 어두워지는 것을 안타까워하여 그 아비의 유언을 그대로 말하여 성감(聖鑑)의 통찰을 바란 것이니, 그 본의를 살피면 무슨 죄줄 만한 것이 있겠습니까마는, 소가 들어간 지 여러 달 만에 갑자기 귀양 보내라고 명하셨으니, 참으로 그 까닭을 모르겠습니다. 엎드려 바라건대, 빨리 용서하여 돌아오게 하여 세도(世道)를 격려하소서. 삼사(三司)의 신하는 큰 죄가 있지 않으면 가벼이 외방으로 내쳐 보임(補任)할 수 없는데, 유신(儒臣)이 명소(命召)를 어기다가 천리 밖 변방으로 보내지고 대신(臺臣)이 바로잡아 구원하다가 잇달아 내쳐 보임되었습니다. 이런 작은 일에도 오히려 위압하고 기를 꺾으시니, 이보다 큰 것이 있으면 도거(刀鋸)164) 나 정확(鼎鑊)165) 으로 대하실 것입니다. 신은 이제부터 앞으로 전하의 조정에 서는 자는 다 금인(金人)·장마(仗馬)166) 의 무리일까 두렵습니다. 근래에 정주(政注)하는 일들이 물정(物情)에 맞지 않습니다. 전조(銓曹)의 좌이(佐貳)167) 가 원인(援引)하기에 바빠서 사고가 없는 전망(前望)을 마음대로 빼고 해방(該房)의 상피(相避)를 조금도 망서리지 않고 지신(知申)168) 의 아들을 춘방(春坊)에 통의(通擬)하였으니, 따라서 책벌을 주는 일을 결코 그만둘 수 없겠습니다. 안악(安岳)을 제수할 때에 전조 당상(銓曹堂上)의 뜻은 명관(名官)에 있었는데 오수채(吳遂采)가 형을 위하여 몰래 속여서 수의(首擬)로 삼기를 꾀하였으므로 온 세상에서 시끄러이 전합니다. 전신(搢紳)에게 수치를 끼쳤으니, 책벌하지 않아서는 안 되겠습니다."
하였는데, 소가 들어가니, 임금이 그 소를 주강의 연석(筵席)에서 내리고 우의정 송인명에게 물으며 말하기를,
"그 말이 협잡하다."
하니, 송인명이 말하기를,
"예전부터 당전(黨戰)은 반드시 전조에서 비롯하니 어찌 어렵지 않겠습니까? 춘방은 이창유(李昌儒)을 가리키는데 그때 이창유의 아비 이춘제(李春躋)는 지신이었으나 환방(換房)하였으며, 좌이가 전망에서 뺀 것은 김진상(金鎭商)을 가리키는데 시골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아비가 이미 해방에서 갈렸으면 춘방에 무슨 얽매일 것이 있겠습니까? 안악의 일로 말하면 잗단 것이니 말할 것도 못됩니다."
하였다. 임금이 또 묻기를,
"의리가 길이 어두워진다는 말은 반드시 영상(領相)을 가리켰을 것인데, 내가 죄주려 한다."
하니, 송인명이 말하기를,
"어찌 영상을 가리켰겠습니까? 성사께서 너그러이 보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바깥에서 말하는 것은 오히려 민형수를 죄준 것을 지나치게 여깁니다."
하니, 임금이 드디어 비답을 내려 그 협잡을 꾸짖고 죄주지는 않았다. 이조 판서 윤혜교(尹惠敎)가 상소하여 스스로 변명하니, 유중(留中)하라고 비답을 내렸다.
임금이 말하기를,
"예전에 송(宋)나라 태조[藝祖]가 중문(重門)을 활짝 열고 말하기를, ‘바로 내 마음과 같다.’ 하였다. 이 뒤로는 법전(法殿)에 임할 때에는 앞의 삼문(三門)을 활짝 열게 하라."
하였다.
북관(北關)의 내노비(內奴婢)의 신공(身貢)을 받아서 고을 창고에 두는 법을 신명(申明)하였다. 당초에 임금이 변방 백성이 뜻밖에 홍수·가뭄을 당하는 데에 대비하기 위하여 북관의 내노비의 신공을 각각 그 고을에 두라고 특별히 명하고 비국을 시켜 회록(會錄)하게 하였는데, 근년에는 자못 준행하지 않으므로 전에 하교한 것을 다시 신명하여 항식을 정하여 시행하게 하였다.
임금이 야대를 행하였다. 선온(宣醞)169) 하고 친히 오언 율시(五言律詩)를 지어 신하들을 시켜 화답하여 바치게 하였다.
6월 12일 정해
송징계(宋徵啓)를 승지로, 구성임(具聖任)을 병조 판서로 삼았다.
6월 13일 무자
임금이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우의정 송인명이 말하기를,
"피국(彼國)에 자문을 보내는 것은 전에 이미 품정(稟定)하였으니, 이제 자문을 지어 보내야 하겠습니다."
하고, 풍원군(豐原君) 조현명이 말하기를,
"이빈이 왕래하였다는 말을 피인(彼人)이 혹 들었더라도 자취가 없는 일이므로 반드시 주문(奏聞)하지는 않았을 것인데, 우리가 먼저 자문을 보낸다면 저들이 반드시 사문(査問)하는 일이 있을 것이니, 하지 않는 것만 못할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많이 말할 것이 없이, 양변(兩邊)에 신칙(申飭)을 지극히 하지 않은 것은 아니나 국경을 범하는 일이 잦으므로 매우 황공하고 민망하다고만 조사(措辭)하여 자문을 짓도록 하라."
하였다. 임금이 형조 판서 김시형(金始炯)과 행 사직(行司直) 윤용(尹容)을 불러 이빈의 일을 물었는데, 김시형이 말하기를,
"국경을 범한 때에는 본디 정해진 형률이 있으니, 이빈 등 18인은 법에 따라 죄다 죽여야 할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죄 없는 한 사람을 죽이는 것도 임금은 오히려 하지 않는 것인데, 더구나 18인이겠는가?"
하고, 자문에 이빈을 효시하는 일을 거론하지 말라고 명하였다.
6월 15일 경인
월식이 있었다.
각도에 명하여 주부(州府) 등 큰 고을에 태학의 예에 따라 계성사(啓聖祠)를 세우되 풍년이 들거든 거행하게 하였으니, 우의정 송인명의 의논에 따른 것이었다.
6월 16일 신묘
임금이 희정당(熙政堂)에 나아가 유생(儒生)을 시강(試講)하였다. 끝나고서 임금이 우의정 송인명에게 묻기를,
"삼대(三代)의 법은 이제 행하기 어렵더라도 재행(才行)과 학문이 있는 사람을 뽑아 태학(太學)에 들어가게 하면 인재를 배양하는 방도가 있을 것이다."
하였는데, 송인명이 말하기를,
"근래 과장(科場)이 난잡하기가 특히 심하니, 향공(鄕貢)의 법을 대략 회복하여 각 고을을 시켜 글을 자못 아는 자를 뽑아 네 장관(長官)에게 적어 보내게 하고 합시(合試)하여 뽑아 두었다가 설과(設科)하기를 기다려 녹명(錄名)하여 성책(成冊)해서 경시(京試)에 나아가도록 허가하면, 사학(四學)을 시켜 청금록(靑衿錄)170) 을 만들고 재주를 시험한 뒤에 비로소 과시(科試)에 나아가도록 허가하되 강서(講書)·제술(製述)을 모두 이렇게 하면 난잡한 폐단을 막을 수 있을 것입니다."
하였다. 임금이 우참찬 조현명에게 물었는데, 조현명도 그렇게 말하였다.
김진상(金鎭商)을 대사간으로, 정기안(鄭基安)을 지평으로, 정희규(鄭熙揆)를 헌납으로, 김상적(金尙迪)을 정언으로, 조상경(趙尙絅)을 판의금부사로, 김성응(金聖應)을 형조 판서로, 박필재(朴弼載)를 부교리로, 이기진(李箕鎭)을 예조 참판으로 삼았다.
6월 17일 임진
임금이 소대하였다. 사람을 쓰는 도리를 논하였는데, 검토관 김광세(金光世)가 말하기를,
"자격(資格)만을 따르거나 문벌만을 숭상하는 것은 인재를 등용하는 도리가 아닙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그렇지 않으면 관방(官方)이 어지러워질 듯하다."
하였다. 참찬관 민정(閔珽)이 말하기를,
"신이 지난번 들으니, 함경 감사 박문수가 생사당(生祠堂)과 선정비(善政碑)·거사비(去思碑)171) 등을 헐어 없애기를 청하였다 하는데, 신도 이 폐단을 익히 압니다. 일찍이 고원(高原)에 부임하였을 때에 보니 향임(鄕任)들이 관아가 비워 있는 동안에 민간에서 돈을 거두어 본관(本官)과 감사를 위하여 비를 세운다고 핑계하였습니다. 이 폐단은 엄히 금해야 하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지난번 듣건대, 능관(陵官)도 조금 은혜가 있으면 비를 세운다 하니, 수령은 매우 이상할 것도 없다. 능침(陵寢) 옆에 사비(私碑)를 세우는 것은 매우 불경하니. 죄다 뽑아 버리게 하라."
하였다.
6월 18일 계사
헌부 【장령 정언유(鄭彦儒)이다.】 에서 전계(前啓)를 다시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성상께서 임어하신 이후로 겸손히 더욱 간절하시니, 성덕(聖德)이 더욱 빛납니다. 지난번 낭제군(琅堤君) 이섬(李燂)이 존호(尊號)를 올리기를 청할 때에 말이 아첨에 가까웠으니, 파직해야 하겠습니다."
하니, 그대로 따랐다.
6월 20일 을미
임금이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통제사(統制使) 구성익(具聖益)을 잡아서 문초하라고 명하였다. 거제 부사(巨濟府使) 김여호(金汝豪)가 죄가 있어 잡아와야 하므로 의금부에서 부례(府隷)를 보내어 김여호를 압송하게 하였다. 이미 떠났는데, 구성익이 말하기를, ‘거제는 변지(邊地)이므로 교대하기 전에 임지를 떠날 수 없다.’ 하고, 영전(令箭)172) 을 내어 그가 가는 것을 멈추게 하였으므로 김여호가 곧 고을로 돌아갔다가 이윽고 간로(間路)로 떠났는데, 경상 감사(慶尙監司) 이기진(李箕鎭)이 아뢰고 또 교대하기 전에 잡아 오는 것이 규례에 어그러진다고 말하였다. 우의정 송인명이 임금에게 말하기를,
"왕인(王人)이 이미 떠난 뒤에 영전을 내어 마음대로 멈추게 한 것은 사체(事體)에 크게 관계되니, 구성익은 죄주지 않을 수 없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나문(拿問)하여 죄를 정하라고 명하였다. 송인명이 또 말하기를,
"양남은 서북(西北)의 변방 고을과 다르므로 반드시 교대하기를 기다려 잡아 올 필요가 없으니, 신명(申明)하고 항식을 정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송인명이 말하기를,
"홍중일(洪重一)이 척리(戚里)의 일을 논하였다가 벼슬길이 오래 막혔으니, 수용(收用)하소서."
하고, 좌참찬 조현명도 말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조정의 신하가 누구인들 국척(國戚)이 아니겠는가? 《선원보략(璿源譜略)》을 보면 조정에는 벼슬할 만한 사람이 없을 것이다. 홍중일은 임금을 와주(窩主)로 여겼으니, 매우 그르다."
하고, 따르지 않았다. 이때 기묘년173) 의 명신(名臣) 김정(金淨)에게 사제(賜祭)하라는 명이 있었다. 송인명이 말하기를,
"듣건대, 김정이 화를 입은 뒤에 그 부인이 몹시 원망하여 숨질 때에 그 자손에게 유언하여 백대가 지나더라고 김정의 목주(木主)를 묻지 말라고 경계하였다 합니다. 이제 온릉(溫陵)이 복위된 것은 실로 김정이 한 번 상소한 데에서 말미암았으니, 조천(祧遷)하지 않는 사당을 만들도록 특별히 허가하고 그 신주에 사제해야 하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김정의 부인이 유언한 것은 좁은 소견에서 나왔으므로 이는 사의(私意)이다. 이제까지도 조천하지 않은 것은 법외(法外)에 관계되는 것이니, 국가에서 간여하여 알아야 할 일이 아니다. 이제 이 때문에 조천하지 않는 것을 허가하는 것도 구차한 것에 관계되니, 무덤에 치제(致祭)하는 것이 어떠한가?"
하였다. 조현명과 행 사직(行司直) 김시형(金始炯)이 말하기를,
"무덤에 제사해야 하겠습니다."
하고, 행 사직 윤용(尹容)과 장령 정언유(鄭彦儒)가 말하기를,
"조천하지 않는 것을 허가하는 것이 포숭(褒崇)하는 도리에 맞겠습니다."
하였는데, 임금이 말하기를,
"윤용과 정언유의 말이 옳다. 치제한 뒤에 대신에게 의논하여 품처하라."
하였다. 그 뒤에 판부사(判府事) 김재로(金在魯)가 의논하여 말하기를,
"국법에는 절사(節死)한 사람을 조천하지 않는 규례가 없습니다."
하니, 그대로 따랐다. 정언유가 전계(前啓)를 다시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이번 국경을 범한 사람을 처분할 때에 그가 머물었던 주인은 논하지 말라는 명이 있었습니다. 공으로 죄를 면하는 뜻에서 나왔더라도, 징치(懲治)하지 않으면 변방에 대한 금령이 해이해질 것이니, 마땅히 참작하여 죄를 정해야 하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윤허하고, 이어서 칭찬하기를,
"대신(臺臣)이 낭제군을 논한 것은 매우 옳다."
하였다.
조경(趙儆)을 통제사(統制使)로 삼았다.
집의 윤득징(尹得徵)이 상소하여 말하기를,
"기랑(騎郞)174) 이 결곤(決棍)을 너무 지나치게 한 것은 성덕(聖德)을 손상한 것인데, 남위로(南渭老)가 납언(納言)에 비의(備擬)된 것은 공론에 어그러지니, 전관(銓官)을 책벌해야 하겠습니다. 남양 부사(南陽府使) 한배규(韓配奎)는 재결(災結)을 속여 보고하고 무녀를 첩으로 거느렸으며, 맹산 현감(孟山縣監) 전만추(田萬秋)는 읍기(邑妓)에게 현혹되어 늙은 사람을 장살(杖殺)하였으니, 파직해야 하겠습니다."
하였으나, 모두 따르지 않았다.
이창의(李昌誼)를 지평으로, 유언협(兪彦恊)을 정언으로, 박사수(朴師洙)를 한성 판윤으로, 이수항(李壽沆)을 병조 참판으로, 박필재(朴弼載)를 부교리로, 유최기(兪最基)를 수찬으로 삼았다.
6월 21일 병신
윤대관(輪對官)을 소견하였다.
6월 22일 정유
장령 정언유가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옛 성왕(聖王)은 천하의 이목(耳目)을 모아서 총명(聰明)으로 삼았는데, 오늘날은 하루에 세 번 나아가 뵈어도 ‘예, 예’ 하고 뜻에 순종할 뿐이거니와, 혹 곧은 말을 하고 아첨하려 하지 않는 자가 있으면 멀리하고 버려서 아까와하는 것이 없습니다. 이를테면 이석신(李碩臣)·이우하(李宇夏)·홍중일(洪重一) 등이 말한 것에 혹 성심(聖心)에 맞지 않는 것이 있으면 처분하실 즈음에 기를 꺾는 뜻을 뚜렷이 보이셨으니, 지금 뜻을 정하지 못하고 머뭇거리는 자는 아닌게 아니라 이를 경계 삼을 것입니다. 나라에 양전(兩銓)이 있는 것은 장석(匠石)175) 이 나무를 쓰듯이 장단(長短)이 알맞고 혁추(奕秋)176) 가 바둑을 두듯이 소밀(疎密)이 다 맞게 하기 위한 것인데, 근래 사사로운 뜻이 멋대로 행해지고 분경(奔競)하는 것이 풍습을 이루게 되었으므로 조정에서는 칙려(飭勵)하고 규경(規警)하기에 겨를이 없으나, 도리어 눈앞의 사사로움에 끌리고 청탁을 버젓이 행하므로 주의(注擬)할 즈음에 뜻대로 하지 못합니다. 경군문(京軍門)은 반드시 평소에 스스로 편비(褊裨)177) 를 택해야 급할 때에 믿을 수 있는데, 지금은 흔히 권문(權門)의 지휘에서 나오므로 귀한 집 자제가 군율이 어떠한 것인 줄 몰라서 그 장수를 모욕하고 그 군졸을 학대합니다. 요행을 억제하고 청탁을 막아서 전조(銓曹)와 군문(軍門)이 각각 그 직분을 다하게 해야 하겠습니다. 번유(藩維)178) 의 벼슬은 책임이 지극히 중대한데, 영남의 새 감사 조명겸(趙明謙)은 사사로운 길을 인연하여 전랑(銓郞) 자리를 차지하려 꾀하였다는 말이 여러 번 상소에 나와서 청의(淸議)에 버림받았으니, 방백의 직임을 맡길 수 없겠습니다."
하였는데, 비답하기를,
"아뢴 것이 대체로 옳으니, 모두 아뢴 대로 시행하라, 영백(嶺伯)의 일은 사람에게는 혹 이것에는 모자라나 저것에는 넉넉한 자가 있거니와, 이제 영번(嶺藩)에 대해서도 뜻을 시험하려는 것이다. 전랑을 배척한 것은 그것이 이미 지나쳤거니와, 어찌 그 일 때문에 벼슬을 막을 수 있겠는가?"
하였다.
임금이 야대를 행하였다.
6월 23일 무술
임금이 소대를 행하였다.
6월 24일 기해
큰 바람이 불어 나무를 꺾고 기와를 날렸다. 광릉(光陵)·영릉(寧陵)의 소나무·노송나무가 꺾어지고 정자각(丁字閣)의 기와를 손상하였으므로, 위안제(慰安祭)를 거행하라고 명하였다.
보략 교정 제조(譜略校正提調) 이하 원역(員役)·공장(工匠) 등에게 차등을 두어 상을 주었다.
6월 25일 경자
의금부에서 회덕 현감(懷德縣監) 서종협(徐宗浹)을 파직하기를 계청하였다. 서종협이 부례(府隷)가 열읍(列邑)에서 폐해를 일으킨다 하여 장치(杖治)하였는데, 의금부에서 아뢰기를,
"나졸(羅卒)이 비록 미천하더라도 이미 왕차(王差)이고 보면 수령으로서 어찌 감히 장치할 수 있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따랐다.
사신은 말한다. "나졸이 왕차라 할지라도 수령은 어찌 왕인(王人)이 아니겠는가? 그 일이 마땅하였는지를 묻지 않고 곧바로 파직하면 뒷 폐단이 장차 어떠하겠는가?"
【태백산사고본】 36책 49권 28장 B면【국편영인본】 42책 633면
【분류】사법-탄핵(彈劾) / 사법-치안(治安) / 역사-사학(史學) / 인사-임면(任免)
사신은 말한다. "나졸이 왕차라 할지라도 수령은 어찌 왕인(王人)이 아니겠는가? 그 일이 마땅하였는지를 묻지 않고 곧바로 파직하면 뒷 폐단이 장차 어떠하겠는가?"
임금이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우의정 송인명이, 평안 감사가 토포영(討捕營)을 더 설치하기를 청한 일에 따라, 평안 병사가 도둑을 다스리는 일을 아울러 맡게 하기를 청하니, 그대로 따랐다. 선혜청(宣惠廳)의 이속 4인을 형배(刑配)하고 그들이 훔친 쌀 1만여 석을 탕감하였다. 선혜청 당상 조현명이 선혜청 이속의 일을 아뢰고 또 말하기를,
"일률(一律)179) 을 쓰기 어려우니, 참작하여 죄를 정해야 하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서리(胥吏)가 훔진 것은 모두 해관(該官)이 해이하여 단속하지 않은 탓인데, 어찌 형벌로 인도하고 법으로 다스릴 수 있겠는가?"
하고, 탕감하고 정배하라고 명하였다. 영광 군수(靈光郡守) 신치운(申致雲)을 파직하고 그 고신(告身)을 삭탈하라고 명하였다. 당초에 신치운이 속오(束伍)와 이노(吏奴)로 대오를 만들고 한산한 업무(業武)180) 인 자들을 관문(官門)에 모아 점고하라고 병사와 순영에 보고하여 청하였으나 모두 금지하는 지령을 내려 허가하지 않았는데, 신치운이 마음대로 군사를 징발한다는 말이 시끄러이 전파되어 그치지 않으므로, 병사 조엄(趙儼)이 잡아다 문초하기를 계청하니, 임금이 신치운이 이미 군율(軍律)을 범하였으니 수신(帥臣)이 곧바로 군율을 시행해야 할 것인데 이처럼 계문(啓聞)한 것은 곤외(閫外)를 절제하는 체례(體例)에 어그러진다 하여 신치운과 함께 나문하라고 명하였다. 신치운이 이미 갇혀서 공초(供招)하였는데, 송인명 등이 힘써 구제하기를,
"다른 뜻이 없고 오활(迂闊)하였던 일이니, 청컨대 고신을 삭탈하는 것으로 감률(勘律)181) 하소서."
하니, 임금이 따랐다. 송인명 등이 또 말하기를,
"신치운은 이미 감률하였거니와, 조엄에게는 물을 만한 것이 없으니, 나문하라는 명을 거두고 잉임(仍任)시키소서."
하니, 임금이 또 따랐다. 장령 정언유(鄭彦儒)가 전계(前啓)를 다시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임금이 소대를 행하였다.
6월 28일 계묘
임금이 경덕궁(慶德宮)에 이어(移御)하였다. 임금이 큰 바람이 나무를 꺾은 이변 때문에 하루 전에 이 명이 있었으므로 기일이 매우 급하여 방옥(房屋) 중에는 미처 수리하지 못한 것이 있었다.
6월 29일 갑진
금성(金星)이 목성(木星)을 범하였다.
영의정 이광좌가 또 상소하여 사직하니, 도승지를 보내어 돈유(敦諭)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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