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월 2일 병오
집의 윤득징(尹得徵)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근래 재이가 거듭 나타났으나, 근일처럼 사나운 바람이 진동하고 종일 성내어 울어 나무를 꺾고 지붕을 뽑아 사람을 죽게 만들기까지 한 적이 없으니, 지금은 참으로 덕을 닦고 허물을 살피며 전이(轉移)해야 할 기회입니다마는, 무릇 동정(動靜)하고 일을 할 즈음에 더욱 경계하고 삼가야 할 것인데 궁(宮)을 옮기는 명이 며칠 안되는 동안에 내려졌으니, 마침내 너무 갑작스러운 데로 돌아가는 것을 면하지 못합니다."
하고, 또 말하기를,
"일전에 대신(臺臣)이 남위로(南渭老)가 납언(納言)에 주의(注擬)된 잘못을 논하였는데, 이판(吏判)의 대소(對疏)는 도리어 꾸짖는 말이었으니, 경책(警責)이 없어서는 안되겠습니다."
하였는데, 예사 비답(批笭)을 내렸다.
이수해(李壽海)를 정언으로, 이기진(李其鎭)을 부제학으로, 오수채(吳遂采)·이성효(李性孝)를 부교리로, 능창군(綾昌君) 이숙(李橚)을 동지 겸 사은 정사(冬至兼謝恩正使)로, 이광덕(李匡德)을 부사(副使)로, 이광운(李光運)을 서장관(書狀官)으로, 윤광신(尹光莘)을 북병사(北兵使)로 삼았다.
임금이 소대를 행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송(宋)나라 임금의 묘호(廟號)에 이종(理宗)이 있는데 두 자를 합하면 인조(仁祖)의 성휘(姓諱)와 음이 서로 비슷하다. 한유(韓愈)가 휘변(諱辯)을 지은 뒤로는 반드시 지나치게 기휘(忌諱)할 것이 없으나, 이것은 한 번 강정(講定)해야 하겠다."
하였는데, 시독관 조명리(趙明履)가 말하기를,
"마음에 불안하면 의리에 해로운데, 어찌 읽을 수 있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본자(本字)는 기휘해야 하므로 윤화정(尹和靖)의 이름은 서연(書筵)에서 고쳐 읽었으나, 서로 비슷한 음은 중신(重臣) 중에도 그런 이름이 있다."
하였다. 참찬관 임정(任珽)이 말하기를,
"자음(字章)이 같은 것은 전에 기휘하지 않았습니다. 입에 익은 것은 갑자기 기휘하기 어렵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그렇다. 이 뒤에 글을 대할 때 생각나면 고칠 것이다."
하였다. 조명리가 또 말하기를,
"이황(理皇)과 선정(先正) 이황(李滉)은 이름이 서로 비슷하여 기휘하여 이제(理帝)라 하였습니다."
하니, 임금이 웃었다.
7월 3일 정미
수찬 유최기(兪最基)가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이번의 큰 바람은 예전에 없던 것이어서 천지가 뒤흔들리고 나무를 꺾고 지붕을 뽑고 기와·자갈이 다 날리고 새와 짐승이 떨어지고 빠지고 눌리어 죽은 사람이 부지기수(不知其數)입니다. 예전 선묘조(宣廟朝) 신묘년182) 7월에 큰 바람이 분 지 얼마 안되어 임진년의 난리가 있었고 인묘조(仁廟朝) 을해년183) 7월에 큰 바람이 불고 이듬해에 병자년의 병화가 있었으므로 지난 경험의 분명함이 놀랍다 할 수 있거니와, 성고(聖考) 임술년184) 8월에 바람과 홍수의 재변이 있었을 때에 신묘년·을해년의 일을 인용하여 하유하여 양도(兩都)와 남한(南漢)에 신칙하여 양향(糧餉)을 조치하게 하시고 또 특지(特旨)를 내려 직언을 널리 구하셨습니다. 더구나 이번에 금원(禁苑)의 나무가 꺾이고 중관(中官)이 눌려 죽은 것은 또한 전에 없던 일인데, 임금과 신하 상하가 태연히 근심하지 않고 예사로 여기니, 신은 이 때문에 근심하고 한탄합니다."
하니, 예사 비답을 내렸다.
7월 5일 기유
임금이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이조 판서 윤혜교(尹惠敎)와 호조 판서 유척기(兪拓基)가 면직되었다. 윤혜교는 윤득교(尹得敎)가 상소한 뒤로 인퇴(引退)하여 출사하지 않다가 또 윤득징(尹得徵)에게 탄핵받았으므로 잇달아 상소하여 면직을 청하였고, 유척기도 병을 핑계하여 오랫동안 출사하지 않았는데, 우의정 송인명이 임금께 아뢰어 모두 체직하였다. 송인명이 말하기를,
"신하들을 외직에 보임하고 투비(投畀)한 것은 마침내 지나치게 무겁습니다."
하고, 이어서 김낙증(金樂曾)에게 여든 된 늙은 어머니가 있다고 말하니, 임금이 특별히 석방하라고 명하고 신사건(申思建)·이석표(李錫杓)도 아울러 석방하였다. 병조 판서 조상경(趙尙絅)이 말하기를,
"옥구 현감(沃溝縣監) 임경관(任鏡觀)은 군미(軍米)를 미납하였기 때문에 갇히고 삭직되었는데, 고을 백성이 임경관이 잘 다스렸기 때문에 그를 잃을까 염려하여 미납된 군미를 남자는 지고 여자는 이고 와서 한꺼번에 관가에 운반해 들이고 서로 이끌고 와서 비국에 하소하였습니다. 이것은 동해(東海)의 아관(兒寬)185) 의 일과 다름 없으니, 국가에서 먼 지방 백성의 희망에 부응해야 하겠습니다."
하고, 송인명도 말하니, 임금이 따랐다.
조현명(趙顯命)을 이조 판서로, 김시형(金始炯)을 호조 판서로, 서명구(徐命九)를 대사간으로, 박추(朴樞)를 집의로, 유건(柳謇)을 장령으로, 정준일(鄭俊一)을 지평으로, 윤혜교(尹惠敎)를 우참찬으로 삼았다.
7월 6일 경술
정언 이수해(李壽海)가 상소하여 민형수(閔亨洙)를 구해(救解)하고, 또 말하기를,
"오수채(吳遂采)는 일찍이 이현일(李玄逸)을 구원하여 명의(名義)를 배반하였고, 자신이 강상(江上)에 있으면서 목상(木商)과 체결하고 뗏목을 내려 보내려고 학사(學舍)를 수리한다고 핑계대어 사학(四學)의 교수(敎授) 가운데에 모록(冒錄)하고 서명(署名)하여 비국에 서장(書狀)을 바쳤으니, 청컨대 사판(仕版)에서 삭제하소서, 정언유(鄭彦儒)는 ‘사경(私逕)’ 두 자로 조명겸(趙明謙)을 느닷없이 단정하여 억지로 헐뜯었으니, 견파(譴罷)하는 법을 시행해야 하겠습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남이 협잡하는 것을 알고 자신도 그렇게 하면, 이것이 어찌 자신을 책망하기를 엄격하게 하고 남을 책망하기를 관대하게 하는 뜻이겠는가?"
하였다. 대개 이수해는 본디 비루한 사람으로서 조명겸을 위하여 정언유를 공박하였으므로 임금이 그 정상을 알고 배척한 것이었다.
7월 9일 계축
송익휘(宋翼輝)를 지평으로, 이명곤(李命坤)을 정언으로, 윤용(尹容)을 호조 참판으로, 서종급(徐宗伋)을 예조 참판으로, 오수채(吳遂采)를 교리로, 한익모(韓翼謨)를 부수찬으로, 김광세(金光世)를 부교리로 삼았다.
7월 11일 을묘
비변사에서 아뢰기를,
"수원 부사(水原府使) 김태연(金泰衍)은 전에 나문(拿問) 때문에 이미 밀부(密符)를 바쳤습니다. 이제 대직(帶職)하고 석방되었더라도 다시 밀부를 전수(傳授)하는 것은 전례가 없으므로 오래 직무를 폐기하도록 버려 둘 수 없으니, 청컨대 파직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임금이 흥정당(興政堂)에 나아가 전경 문신(專經文臣)186) 을 시강(試講)하였다.
7월 12일 병진
임금이 야대를 행하고 선온(宣醞)하였다.
심악(沈)을 수찬으로, 조명리(趙明履)를 부수찬으로, 이덕중(李德重)을 교리로 삼았다.
7월 13일 정사
헌부 【장령 유건(柳謇)이다.】 에서 전제(前啓)를 다시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근래 역관[象譯]·노예의 무리가 혹 원종 공신(原從功臣)에 참여하거나 중추부(中樞府)의 직함을 빌어 청현(淸顯)의 증직(贈職)을 얻기를 꾀하므로 육부(六部)의 좋은 벼슬이 마의(馬醫)187) ·하휴(夏畦)188) 의 귀신에게도 거의 두루 미쳤으니, 청컨대 청현에 증직된 천류를 사정(査正)하고 엄히 금하소서. 전관(銓官)은 죄를 논해야 하겠습니다."
하였으나, 따르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김해(金海) 명지도(明旨島)에는 염분(鹽盆)을 설치하여 염민(鹽民)의 요역(徭役)이 다른 곳보다 훨씬 더한데, 통영(統營)에서는 구습(舊習)에 따라 금령을 범하여 더 거두어 판매하니, 엄히 금해야 하겠습니다."
하였으나, 따르지 않았다.
7월 14일 무오
임금이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이조 판서 조현명이 말하기를,
"도정(都政)189) 이 달을 넘겼는데 이랑(吏郞)의 천망(薦望)이 완결되지 않아서 정사(政事)를 행할 수 없습니다."
하니, 임금이 그 까닭을 물었다. 조현명이 동료 관원 사이에서 의견이 맞지 않는다고 대답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내가 그 뜻을 안다."
하였다. 송인명이 말하기를,
"이랑은 일세(一世)의 극망(極望)이므로 문벌이 있는 자라면 반드시 경쟁하려 할 것이니, 실로 취사(取捨)하기가 어렵습니다."
하고, 조현명이 말하기를,
"민통수(閔通洙)와 심악(沈)은 피차의 극망인데, 저쪽에서는 ‘심악은 일찍이 두 대신을 복시(復諡)할 때에 논한 것이 있으므로 결코 될 수 없다.’ 하고, 이쪽에서는 ‘민통수는 그 형과 함께 연명하여 상소하였는데, 형이 이미 죄받아 적소(謫所)에 있으니 그 아우가 어찌 청선(淸選)에 다시 들어갈 수 있겠는가?’ 하므로, 신이 뭇 의논을 배제하고 둘 다 통의(通擬)하려 하였더니, 저쪽이 ‘하나는 될 수 있으나 하나는 될 수 없다.’ 합니다. 이 때문에 버티니, 장차 하늘에 사무치는 풍란을 일으킬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내가 짐작하는 것이 있으니, 곧 의망하여 들이라."
하였다. 장령 유건(柳謇)이 전계(前啓)를 다시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명지도의 일은 아뢴 대로 하게 하였다.
임금이 육조(六曹)·경조(京兆)에서 입직한 낭청 모두 10여 인을 인견하여 생각하는 바를 물었는데, 다들 별로 아뢸 만한 것이 없다고 대답하니, 임금도 굳이 묻지 않았다. 이병태(李秉泰)의 아들 이헌중(李獻重)이 상서원(尙瑞院)의 관원으로서 입시하였는데, 임금이 나오라고 명하여 말하기를,
"네 아버지는 번번이 직도(直道)로 임금을 섬겨 생각이 있으면 숨기지 않았고 또 그 청백(淸白)이 가상하므로 죽은 뒤에 잊을 수 없었는데, 오늘 너를 보니 내 마음이 슬프다."
하였다. 물러가려 할 때에 임금이 하교하기를,
"아까 이헌중에게 ‘직(直)’자를 말하였거니와, 너희들은 아직 등과하지 못하였더라도 뒷날에는 수령이 될 것인데, 수령의 폐단은 명예를 바라는 것보다 큰 것이 없다. 위로는 나라에 해를 끼치고 아래로는 백성에게 폐를 끼치니, 내가 매우 통탄하는 바이다. 너희들은 힘쓰라."
하였다.
7월 17일 신유
헌부 【장령 유건(柳謇)이다.】 에서 전계를 다시 아뢰고, 또 아뢰기를,
"약원의 서약(署藥)을 대내(大內)로 들여가는 것을 중관(中官)이 여러 번 위에서 분부한 것이라고 속였으니, 엄히 국문하여 정상을 알아 내소서. 감찰(監察) 원득문(元得文)은 시골의 비천한 자이니, 청컨대 태거하소서. 문화 현령(文化縣令) 목천수(睦天壽)는 마음이 혼란하여 전념하지 못하니, 파직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번거롭게 하지 말라."
하였다. 유건은 여러 번 대간이 되어 문득 사람을 논하였으나 실은 주견이 없고 흔히 남의 지휘를 받았으므로, 임금이 본디 경시하여 처음부터 가부를 말하지 않았다.
임금이 소대를 행하였다. 대정(大政)은 이달을 넘길 수 없다 하여 하교하여 신칙하였다.
7월 18일 임술
진위 사은 정사(陳慰謝恩正使) 밀양군(密陽君) 이관(李梡)·부사(副使) 서종옥(徐宗玉)·서장관(書狀官) 이덕중(李德重)이 복명(復命)190) 하였다. 임금이 인견하여 사책(史冊)이 인쇄되었는지를 물었는데, 서종옥이 대답하기를,
"13투(套) 중에서 12투는 이미 인쇄하였으나 1투는 황제가 대내(大內)로 들여가고 아직 인쇄하지 말게 하였다 합니다."
하였다. 임금이 피중(彼中)의 일을 물었는데, 서종옥이 말하기를,
"옹정(雍正)은 가혹하고 각박하다는 이름이 있으나 건륭(乾隆)은 관대한 정치를 행합니다. 구언조(求言詔)를 보면 과궁(寡躬)의 궐실(闕失)과 대신(大臣)의 시비(是非)를 논하지 않았다 하여 대간을 죄주기까지 하였으니, 어진 임금이라 하겠습니다."
하였다.
7월 19일 계해
임금이 소대를 행하였다. 하교하여 도정(都政)을 빨리 행하고 전조 당상(銓曹堂上)을 추고하게 하였다.
교리(校理) 오수채(吳遂采)가 상소하여 이수해(李壽海)의 상소에 대하여 변명하여 말하기를,
"소식(蘇軾)이 사염(私鹽)을 팔았다느니 등보(滕甫)가 반역한 자를 도왔다니 하는 것은 근거 없는 비방을 당하는 것을 전철(前哲)도 면하지 못한 것입니다. 신이 왕년에 상소하여 이현일(李玄逸)의 일을 논한 것은 다만 그 아들이 천거한 사람이 추죄(追罪)된 것을 말한 것으로 사마광(司馬光) 등 여러 현인들이 죄인의 아들을 논단(論斷)한 것과는 혹 같지 않을 듯 합니다. 신을 긴요하지 않다고 한다면 이는 가하겠지만 이것을 가지고 명의(名義)를 배반하였다고 말하니 어찌 이러한 사리가 있겠습니까? 신이 서학 교수(西學敎授)이었을 때에 마침 학사(學舍)의 들보와 서까래가 썩고 부러졌으나 호조에서 고치도록 허가하지 않았는데, 비국(備局)의 관문(關文)을 얻어 깊은 골짜기에 보내지 않으면 재목을 얻을 수 없으므로 신이 과연 서장(書狀)에 서명(署名)하였습니다. 공해(公廨)를 수리하는 것을 모두 목상(木商)과 체결한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신은 본디 가난하므로 동기(同氣)의 강가 집 빈 땅에서 부서진 집의 서까래 두어 개를 얻었더니 집을 넓게 지으려는 것이라고 공교하게 맞추어 말을 만들었으니, 누가 속이는 것입니까? 신은 요즈음 문필(文筆)을 잡는 지위에 있으니, 전랑(銓郞)의 통의(通擬)에 관한 취사(取捨)를 참여하여 듣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담에 붙어 엿듣는 귀를 경계하지 못하고 무릎 앞에 다가가 하는 비밀한 말이 먼저 드러나서 혁노(嚇怒)가 사방에서 모이고 위언(危言)이 날로 시끄러워져, 과연 뜻밖의 공박이 앞뒤에서 번갈아 드러났습니다."
하니, 예사 비답을 내렸다.
7월 20일 갑자
임금이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우의정 송인명이 말하기를,
"이형원(李馨遠)의 죄는 관계되는 것이 매우 중대하니, 본부(本府)를 시켜 국청을 설치하여 엄히 심문하게 해야 하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여러 신하들에게 물었다. 다들 말하기를,
"철옹성(鐵甕城)의 일은 이제 이미 거짓말이 되었으므로 이형원은 반드시 가르쳐 유도한 일이 있을 것이니, 국청을 설치하고서야 비로소 그 죄를 밝혀 외간의 의심을 풀 수 있을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국문하라고 명하였다.
금산(錦山)의 관례(官隷)가 자기 아들을 죽였는데, 대신에게 의논하여 처리하라고 명하였다. 금산의 관례 김후문(金厚文)에게 훔치기를 좋아하는 아들이 있어 김후문이 번번이 남의 질타를 당하므로 부끄럽고 분하여 못 견뎌서 그 아들을 난자하여 죽였다. 율문(律文)에 ‘아들을 고의로 죽인 자는 장(杖) 60, 도(徒) 1년에 처한다.’ 하였으나, 갑자년191) 의 수교(受敎)에 ‘죄는 장형(狀刑)에게 그친다.’ 하였고 병인년192) 의 수교에 또 ‘마음을 써서 흉참한 짓을 한 자는 계복(啓覆)을 들이고 그 정범(情犯)에 따라 임시하여 품단(稟斷)한다.’라는 글이 있으므로 감사가 계품하니, 임금이 대신에게 의논하라고 명하였다.
유정(柳綎)을 형조 참판으로, 서종옥(徐宗玉)을 동지 경연사로 삼았다.
이조 판서 조현명·참판 정석오(鄭錫五)·참의 신만(申晩)이 청대(請對)하니, 임금이 인견하였다. 조현명이 심악·민통수를 전랑(銓郞)에 통의(通擬)하려 하였으나 동료의 의논이 들쭉날쭉하다는 것을 전에 이미 아뢰었더니 임금이 빨리 의망하여 들이라고 명하였는데, 서로 이끌어 청대하여 구망(舊望)이 처치되기 전에 다시 친망(親望)을 주의(注擬)할 수 없다고 핑계하고, 이어서 말하기를,
"구망된 홍창한(洪昌漢)이 바야흐로 출보(黜補)되어 있으니, 내직에 의망하도록 윤허하소서."
하니, 임금이 분부를 내려 꾸짖기를,
"이런 소소한 일을 위에 미루면 이는 임금이 신하의 직무를 행하는 것이니, 전조(銓曹)를 두어서 무엇하는가? 홍창한을 내직에 의망하는 것을 윤허하지 않는다."
하고, 신통(新通)을 의망하여 들이라고 명하였다.
사신은 말한다. "전랑의 자리는 세상에서 다투는 바가 된 지 오래다. 심악·민통수는 문벌과 명망이 각각 두 당(黨)에서 추대하는 바이니 전조에서 통의해야 마땅할 것이고 앞세우는 자가 없어야 마땅할 것이나, 신만이 반드시 심악을 막고 민통수를 통의하려 하고 조현명이 처음에 민통수를 허통(許通)하다가 곧 신만이 심악을 막는다 하여 민통수와 아울러 막으려 한 것은 다 각각 사당(私黨)을 따라 서로 자기 의견을 세운 데에서 나온 것이다. 양편이 서로 굽히지 않아 마침내 산란한 지경에 빠지게 되어서는 감히 서로 이끌어 청대하여 우러러 재품(裁稟)을 청하여 스스로 물의에서 면하기를 바라고 구차하게 한때의 미봉을 꾀하였다. 임금이 구차하게 신하들의 면목에 따라 허통하고 막는 사이에 기미를 보였다면 조정의 기강이 파괴되고 신하의 분수가 외람하였을 것이니, 이것이 어찌 작은 일이겠는가? 아! 정석오와 신만은 워낙 말할 것도 못되나, 굳세고 정직한 조현명도 그 서로 함께 결백하고 정직하지 않은 것이 이러하니, 군자가 세도(世道)에 대하여 깊이 두려워하였다."
【태백산사고본】 36책 49권 31장 B면【국편영인본】 42책 634면
【분류】왕실-국왕(國王) / 정론-간쟁(諫諍) / 사법(司法) / 인사-관리(管理) / 역사-사학(史學)
사신은 말한다. "전랑의 자리는 세상에서 다투는 바가 된 지 오래다. 심악·민통수는 문벌과 명망이 각각 두 당(黨)에서 추대하는 바이니 전조에서 통의해야 마땅할 것이고 앞세우는 자가 없어야 마땅할 것이나, 신만이 반드시 심악을 막고 민통수를 통의하려 하고 조현명이 처음에 민통수를 허통(許通)하다가 곧 신만이 심악을 막는다 하여 민통수와 아울러 막으려 한 것은 다 각각 사당(私黨)을 따라 서로 자기 의견을 세운 데에서 나온 것이다. 양편이 서로 굽히지 않아 마침내 산란한 지경에 빠지게 되어서는 감히 서로 이끌어 청대하여 우러러 재품(裁稟)을 청하여 스스로 물의에서 면하기를 바라고 구차하게 한때의 미봉을 꾀하였다. 임금이 구차하게 신하들의 면목에 따라 허통하고 막는 사이에 기미를 보였다면 조정의 기강이 파괴되고 신하의 분수가 외람하였을 것이니, 이것이 어찌 작은 일이겠는가? 아! 정석오와 신만은 워낙 말할 것도 못되나, 굳세고 정직한 조현명도 그 서로 함께 결백하고 정직하지 않은 것이 이러하니, 군자가 세도(世道)에 대하여 깊이 두려워하였다."
7월 21일 을축
이조 판서 조현명이 전랑(銓郞)의 통색에 관한 일 때문에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신이 심악과 민통수를 통의(通擬)하려 한 것은 반드시 이렇게 안배하고서야 분쟁을 그치게 하고 물정을 평정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드디어 연중(筵中)에서 번거로이 아뢰기에 이르렀습니다. 변함 없이 고심하는 것은 신명(神明)에게 질증(質證)할 수 있으나 이제 와서 이 생각을 이루지 못하고 또 망극한 분부를 받았으니, 신은 여기에 대해서도 감히 처음의 소견을 굳이 지킬 수 없습니다. 오직 대정(大政)을 빨리 끝내는 것이 급할 뿐이므로 심악이 막히고 민통수만이 통의되더라도 참으로 한 마디 말도 다투려 하지 않았으나, 이 즈음에 오수채의 상소가 또 나왔습니다. 대개 신이 일전에 전 판서 윤혜교(尹惠敎)의 말을 들으니 ‘오전랑(吳銓郞)이 접때 공좌(公坐)에서 뚜렷이 민통수를 막았다.’ 하였고, 이제 오수채의 상소에 이른바 ‘전랑의 통의를 취사하는 사이에 담에 붙어 듣는 귀를 경계하지 못하고 무릎 앞에 다가가 하는 비밀한 말이 먼저 드러났다.’라고 한 것은 바로 윤혜교가 전한 것을 가리켜 말한 것이니, 그렇다면 오수채가 민통수를 막은 것은 그 시비·득실이 어떠한지 모르겠습니다마는, 현임으로 문필(文筆)을 잡은 자가 이미 막았으면 그 사람이 전랑 자리를 떠나기 전에는 통의할 수 없는 것이 곧 정사(政事)의 규례입니다.
어제 구대(求對)하여 감히 홍창한을 의망(擬望)하기를 청한 것은 대개 반드시 이렇게 하고서야 오수채를 구처(區處)할 수 있고 오수채를 구처하고서야 민통수를 전랑에 의망하는 것을 비로소 의논할 수 있기 때문이었는데, 위에서 홍창한의 의망을 윤허하시지 않았으니, 드디어 어찌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정사를 파한 뒤에 신이 두 동료와 상의하기를, ‘엄한 하교를 받은 뒤에 다른 것은 돌아볼 수 없거니와, 민통수를 통의하고 심악을 막는 것도 다 안될 것이 없으나, 다만 전랑의 상소가 또 나왔는데 미처 구처하지 못하였으니, 굳이 의망하기 어려운 형세이다.’ 하였더니, 동료 당상의 뜻은 오히려 전랑의 상소에 민통수의 이름을 가리켜 거론하지 않았다 하여 반드시 의망하려 하므로, 이 때문에 반복하다가 마침내 하나로 돌아가지 못하였습니다. 신은 구차하게 미봉하여 눈앞의 일이 무사하기를 바랐으나, 정사(政事)의 규례를 어길 수 없는 것을 어찌합니까? 신은 변변치 못하면서 외람되게 장석(長席)에 있거니와, 처음에는 심악과 민통수를 모두 통의하려 하였더니 동료의 의논이 막았고, 이제는 심악을 버리고 민통수를 취하려 하였더니 전랑의 상소가 견제하고 또 3백 년 동안 지켜 온 정사의 규례를 폐기할 수 없어서 동료의 말에 굽혀 따랐습니다. 동에서 거꾸러지고 서에서 부딪혀 처치할 바를 모르므로, 장차 때를 넘겨 한 달이 지난 도정(都政)이 끝날 기약이 없고 뼈를 찌르고 골에 사무치는 하교가 죄다 잡초 속에서 시들게 만들 것이니, 불충하고 변변치 못한 죄는 죽음을 피할 데가 없습니다."
하고, 참판 정석오가 상소하여 이르기를,
"어제 전형(銓衡)하는 일 때문에 책유(責諭)를 받고 물러간 뒤에도 서로 거절하는 의논이 오히려 하나로 돌아가지 않아서 이제 상소하는 일까지 있게 되었습니다. 신은 이 일에 대하여 실로 혐의가 있어 가부를 말하기 어려운 의논을 이미 연중(筵中)에서 죄다 아뢰었습니다마는, 중간에서 조정하여 성지(聖旨)에 우러러 부응하지 못한 죄는 신도 만 번 죽어도 갚을 수 없습니다."
하고, 참의 신만이 상소하여 이르기를,
"한 낭관(郞官)의 망(望)이 통하고 막히는 것이 어찌 큰 일이겠습니까마는, 일의 꼬투리가 거듭 일어나 성려(聖慮)를 번거롭히기에 이르렀습니다. 지성스럽게 반복하신 하교가, 자상한 아버지가 미혹한 아들을 가르치는 것과 같을 뿐이 아니었으니 어둡고 완고하기가 목석과 같더라도 어찌 감격하지 않았겠습니다마는, 파대(罷對)한 뒤에 장석(長席)이 곧 새로 통의한다는 뜻으로 오수채(吳遂采)에게 서신으로 물었으나 바야흐로 당한 것이 있으므로 감히 가부를 말하지 못하였습니다. 신들이 이어서 또 물러가 대궐 밖에서 모였는데, 장석이 신에게 말하기를, ‘일이 막다른 지경에 이르렀으니 다른 것을 어찌 헤아리겠는가? 민통수와 다른 한 사람을 오수채와 함께 구전(口傳)으로 의망하여 들여야 하겠는데, 어떠한가?’ 하기에, 신이 대답하기를, ‘아주 좋다. 빨리 비의(備擬)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였더니, 장석이 또 윤혜교와 수작한 말을 거론하여 말하기를, ‘오수채가 이미 뚜렷이 민통수를 막았고 이제 그 상소의 말이 또 이러한데, 오수채를 구처하기 전에 민통수를 통의한다면 정사의 규례에 있어서 어떠하겠는가?……’ 하였습니다.
대개 오수채가 반드시 민통수를 막으려는 데에는 그럴 만한 곡절이 있겠으나, 장석이 이것을 빙자하여 다투는 것은 매우 마땅한 것이 아닌데, 신이 그것이 옳지 않다고 분명히 말하면 끝없는 갈등을 일으킬 듯하므로, 다만 정사의 규례를 가지고 대답하기를, ‘오수채가 이제 문필을 잡고서 막을지라도 소상한 거조가 있어야 할 것인데, 어찌 사사로운 수작과 분명히 하지 않은 상소의 말 때문에 공연히 통의해야 할 사람에게 의심을 갖겠는가?’ 하니, 장석이 잠시 동안 생각하고 말하기를, ‘이 일은 이처럼 구차하게 채울 수 없으니 내일 모일 때를 기다려야 하겠다.……’ 하기에, 신이 대답하기를, ‘이제 거의 순조로이 되어 가는데 또 어찌 다시 헤아릴 것이 있겠는가? 내일 다시 모이더라도 나의 생각은 이미 오늘 다 말하였으니, 다시 의논할 일이 없다.……’ 하고 파하였습니다. 오늘 아침에 장석이 신에게 글을 보내기를, ‘밤새도록 반복하여 자신을 굽혀 성취할 방법을 생각하였으나 마침내 억지로 할 수 없으니, 노장(露章)193) 하여 스스로 처리하겠다.’ 하였는데, 이제 장석의 상소는 오로지 오수채의 말을 가지고 민통수를 막는 도구[資斧]로 삼고 신을 억지로 자기 의견을 세우는 죄로 돌려서 자신을 굽히는 기회로 삼았습니다. 어제와 오늘 사이에 일의 꼬투리가 갑자기 변하여 상소에 갈라진 마디가 거듭 생기니, 민통수가 시론(時論)에 무슨 죄를 얻은 것이 있어서 서로 배척하는 것이 이 지경에 이르렀는지 모르겠습니다. 신이 참으로 반복하여 생각하여도 그 까닭을 모르겠습니다. 그 이른바 정사의 규례라는 것에는 더욱이 말할 만한 것이 있습니다. 낭관의 통의는 사체(事體)가 가볍지 않으므로 반드시 현임 당상·낭청이 합석하여 결정해야 하는 것이 변함 없는 정사의 규례인데, 이제는 그렇지 않아서 신들은 처음부터 오수채와 가부를 의논한 일이 없으니, 어찌 전 전장(銓長)과 수작한 말과 탄핵을 당하여 내뱉은 말을 감히 어기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신은 이 길이 한 번 열리면 세상에 완전한 사람이 없을 뿐더러 쟁탈하는 마당에 격돌하는 논의가 장차 이르지 않는 곳이 없을까 염려되니, 신은 세도(世道)를 위하여 근심합니다."
하였다.
임금이 우의정 송인명·이조 판서 조현명·참판 정석오·참의 신만을 특별히 불러 전랑의 통색에 관한 일을 묻고, 특별히 제수하여 민통수를 광주 부윤으로, 심악을 수원 부사로 삼고, 수백 마디 말을 하교하여 서로 당습을 하는 잘못을 꾸짖고, 전조(銓曹)와 조정에 있는 신하들에게 명하여 구습을 빨리 고치게 하였다. 대개 전랑은 일세의 극선(極選)이다. 주의(注擬)할 때마다 피차가 서로 버티고 서로 다투므로 참으로 한 가지 깊은 폐단인데, 민통수·심악의 일에 이르러 극심하였다. 임금이 어제 이미 조현명과 신만이 말한 것을 들었고 또 그 상소를 보아서 양편이 서로 이기려고 다투어 조정하기 어렵다는 것을 알았다. 송인명과 조현명 등을 특별히 불러서 물었는데, 송인명은 말을 이랬다 저랬다 하여 양편이 다 옳고 양편이 다 그르다 하며 임금에게 관여하지 말라고 권하였고, 조현명은 말하기를,
"신만의 말을 따라 민통수 만을 통의하려 하였으나 오수채에게 저지되었으므로 정사의 격례를 어기면서 굳이 통의할 수 없었습니다."
하고, 신만도 심악을 저지해야 한다는 것을 말하였으나 조현명이 반드시 민통수를 막으려 한다는 것을 분명히 말하지 않았다. 임금도 민통수를 저지하지 말아야 한다고 말하고 또 신만이 심악을 저지하는 것을 그르다 하여, 드디어 품계를 올려서 두 사람을 모두 외직으로 내보내라는 명이 있었다.
7월 22일 병인
지진이 있었다. 우의정 송인명이 차자를 올려 경계를 아뢰고 면직을 청하니, 예사 비답을 내렸다.
보덕(輔德) 김중희(金重熙)가 상소하여 경계를 아뢰기를,
"사령(辭令)은 간단하고 적당한 것이 중요한데 혹 번잡하여 손상되고, 거조(擧措)는 늘 신중해야 하는데 혹 갑작스럽게 나오며, 자상(慈詳)한 것이 너무 지나쳐서 은혜가 치우치고 상주는 것이 외람됨을 면하지 못하고, 위단(威斷)이 서지 않아서 문득 처음에는 엄하다가 마지막에는 느슨해지는 것을 걱정하며, 반드시 당습을 탕척하려 하나 시비가 혹 가려지지 못하고, 반드시 도탑고 질박한 정치를 하려 하나 시행하는 것은 도리어 번잡한 겉치레가 되니, 신하들이 가만히 의논할 뿐더러 명철하신 전하께서도 반드시 깨닫고 뉘우치실 것입니다."
하니, 예사 비답을 내렸다.
7월 23일 정묘
황해도 해주(海州) 등 일곱 고을에 큰물이 져서 빠져 죽은 자가 거의 3백 인이고 표몰된 집이 6백여 호이었는데, 휼전(恤典)을 시행하고 부역을 면제하고 조세를 감면하라고 명하였다.
소대를 행하였다.
7월 24일 무진
한익모(韓翼謨)를 부수찬으로, 조명리(趙明履)를 이조 정랑으로 삼았다.
헌부 【장령 유건(柳謇)이다.】 에서 전계를 다시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중관(中官)을 엄히 국문하는 일과 원득문(元得文)·목천수(睦天壽)를 태거(汰去)하는 일은 아뢴 대로 윤허하였다.
경상 감사(慶尙監司) 조명겸(趙明謙)이 정언유(鄭彦儒)의 상소 때문에 사직하는 상소를 올리고 또 말하기를,
"닷새에 한 번 오는 서울 사자[京价]가 길에서 도둑에게 약탈당하고 그대로 달아났으므로 탄핵하는 글이 이미 나왔는데 모르고서 태연히 도임하였습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사직하지 말라."
하였다.
7월 25일 기사
밤에 달이 동정성(東井星)에 들어갔다.
7월 26일 경오
임금이 태묘(太廟)에 뵈었다. 거가(車駕)가 돌아올 때에 창덕궁에 들러 이판(吏判)·병판(兵判)을 인견하고 하유(下諭)하여 편사(偏私)를 없애고 울체(鬱滯)를 소통하도록 신칙하였다. 이튿날 대정(大政)을 행할 것이기 때문이었다.
7월 27일 신미
이조 판서 조현명·병조 판서 조상경(趙尙絅) 등이 도정(都政)을 행하였다. 이튿날에 끝났다.
영의정 이광좌가 풍변(風變)·지진(地震) 때문에 상소하여 경계를 아뢰기를,
"예전부터 임금은 성덕(聖德)이 지극히 착하기가 반드시 요(堯)·순(舜)·문왕(文王)과 같고서야 재이가 오는 것을 천수(天數)에 미룰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요·순·문왕의 마음은 스스로 만족하게 여기지 않는 것이 다른 임금들보다 훨씬 더하였으므로 매우 스스로 책망하는 것이 반드시 도리어 상림(桑林)의 육책(六責)194) 보다 더하였을 것인데, 상림의 기도(祈禱)가 혹 향응(響應)하지 않았다면 그 이어서 하는 것이 마땅히 어떠하겠습니까? 전하께서 비는 이미 얻으셨으니 이미 천심(天心)에 향합(響合)할 수 있었는데, 어찌하여 풍재(風災)가 매우 이상하며, 또 지진을 더하는 것이 한 번도 심한데 더구나 두 번에 이른 것이겠는가? 이것이 어찌 범연히 유행하는 재이이겠습니까?
전하께서는 어찌하여 정심(精心)·대용(大勇)으로 그 부족한 것을 찾아 매우 스스로 책망하고 바로 육책의 조목처럼 ‘본심을 지키기를 스스로 지극히 긴요하게 하였다고 생각하나 실은 순일(純一)하게 하지 못한 것이 있지 않은가? 자신을 살피기를 스스로 지극히 세밀하게 하였다고 생각하나 실은 닦지 못한 것이 있지 않은가? 사람을 쓸 때에 마음을 다하지 않은 것은 아니나 혹 성위(誠僞)에 현혹되어 살피지 못한 것이 있는가? 일을 처리할 때에 분석하지 않은 것은 아니나 혹 환히 크게 공정하지 못하여 사사로운 뜻이 관계되었는가? 심체(心體)는 지극히 어려워 무시로 출입하고 천리(天理)는 물리기 쉽고 인욕(人欲)을 받아들이기 쉬운데 용사(用事)에 이런 걱정이 있지 않은가?’ 하시지 않았습니까? 전하께서 일찍이 연석(筵席)에서 조용히 병통을 이야기하실 때에 혹 발언이 성실하지 않은 것이 있다 하셨는데, 발언이 이미 성실하지 않으면 말을 받아들이는 것도 알 만한 것입니다. 곧은 말을 하는 자는 날로 멀리하고 부드러운 자는 날로 가까이 하여 드디어 언로가 점점 막히게 되면 또한 어찌 나라를 망칠 만하지 않겠습니까? 우(禹)임금의 덕으로서도 착한 말에 대하여 절하기까지 하고195) 순(舜)임금의 덕으로서도 오히려 단주(丹朱)처럼 오만하지 말라는196) 말을 받아들였으니, 어찌 일찍이 순임금이 한 마디 말이라도 자기가 오만한 것이 없다고 밝히고 뭇 신하가 나를 알아 주지 않는 것을 개탄하였겠습니까? 이것으로 헤아리면 전하께서 말을 받아들이시는 방도에는 순·우의 방법에 어그러지는 것이 많은 것입니다.
신은 반드시 멀리 옛일에서 인용하지 않겠습니다. 삼가 열성(列聖)께서 말하는 자에게 응답하신 것을 헤아리건대, 일찍이 매몰하신 적이 없거니와 고굉(股肱)인 신하에게는 더욱이 그러하셨습니다. 전하께서 과연 요·순의 일과 조정(祖宗)의 일에서 그 말하는 자를 처우하는 방도를 살피신 것이 평소에 혹 여유가 있어 성심(聖心)에 막힌 것을 마치 급히 흐르는 물이 만 길 아래로 향하듯이 문득 모두 쓸어 없애신다면, 성덕(聖德)의 빛이 곧바로 만대를 비추어 교화하여 다스리는 것이 청명하여 천심이 기뻐할 것이니, 어찌 재이를 걱정하겠으며 어찌 위망을 근심하겠습니까? 신은 물러가 있더라도 소원(疎遠)한 신하와는 사체(事體)가 아주 다르므로 반드시 사건(事件)을 조목조목 아뢸 것 없이 다만 이 본원(本源)이 서로 성실하여 불만하지 않은 것을 또한 살펴서 여유가 있을 것입니다."
하였는데, 소(疏)가 들어가니, 임금이 승지를 보내어 돈유(敦諭)하기를,
"전후의 돈면(敦勉)에 사의(辭意)를 이미 다하였으므로 혹 생각을 고쳐 번연(幡然)히 조정에 나오리라 생각하였으나 멀리하는 마음을 돌리지 않으니, 차라리 말하고 싶지 않다. 아! 경이 나를 버린 것이 이제 몇 달인가? 나라의 일이 이처럼 풀려 흩어지기에 이르지 않고, 백성이 이처럼 곤궁하여 초췌해지기에 이르지 않았더라도, 경의 평소에 나를 사랑하고 나를 생각하던 정성으로는 워낙 그리워하고 잊지 못할 것인데, 더구나 이제 재이가 거듭하여 상하가 근심하는 때이겠는가? 이때에 경에게 바라는 것이 어찌 얼굴을 보려는 데에 있을 뿐이겠는가? 종이에 가득히 털어 놓은 말이 참으로 내 병통을 맞혔거니와, 나라와 한 몸이 되는 경의 깊은 생각이 아니면 어떻게 이런 본받을 말을 듣겠는가? 거듭 가슴에 새기고 감탄하여 마지 않는다. 재이로 말미암아 경고하는 것이 어찌 아침저녁으로 좋은 말을 바쳐 나라를 살리고 백성을 구제하여 몰려오는 재앙이 절로 사라지고 미치지 못하는 덕(德)에 보탬이 있게 하는 것만 하겠는가?"
하였다.
이날 밤에 임금이 숭정전(崇政殿)에서 사직 추향(社稷秋享)의 서계(誓戒)를 친히 행하였다. 예가 끝나고서 임금이 경현당(景賢堂)에 나아가 두 전조(銓曹)의 당상을 인견하여 각각 수서(手書)를 내렸는데, 대개 공정을 지키는 도리를 권면하고 신칙한 것이었다.
오수채(吳遂采)를 부응교로, 홍중일(洪重一)을 북평사(北評事)로 삼았다.
7월 29일 계유
광주 부윤(廣州府尹) 민통수(閔通洙)가 상소하여 이광좌의 상소에 대하여 변명하기를,
"이광좌의 상소는 한 편(篇)의 도리에 어그러진 이야기입니다. 이따금 말할 듯 말 듯 괴이하고 비밀하여 그 가리키는 것을 헤아릴 수 없는 것이 있습니다마는, 그 이른바 논해서 귀양 보낸 묵은 원한을 보복하기 위한 것이라는 말은 무신년197) 봄에 선신(先臣)이 합계(合啓) 때문에 원주(原州)에 귀양갔을 때에 이광좌가 옆에서 대간의 말을 도와서 윤허받기에 이르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을사년198) 정청(庭請)할 때에 선신이 이미 이광좌를 절도(絶島)에 안치(安置)하기를 청하였고, 태학생(太學生) 정유(鄭楺)가 이광좌를 토죄(討罪)하기를 청한 소(疏)에 신의 형이 실로 재임(齋任)으로서 같이 참여하였으나, 그때에 선신과 신의 형이 이광좌에게 무슨 원한이 있었겠습니까? 이광좌가 선신을 논하여 귀양 보낸 것은 그보다 4년 뒤에 있었으니, 이것으로 논하면, 신의 집에서 이광좌를 원망하여 보복하였겠습니까? 이광좌가 신의 집을 원망하여 보복하였겠습니까? 이광좌의 이 말은 할말을 찾지 못한 데에서 나온 것입니다. 선신은 전후 두 번 귀양갔는데, 신축년199) 겨울에 성주(星州)에 귀양간 것은 박필몽(朴弼夢)이 아뢰었기 때문이고 이듬해 특별히 석방하였다가 도로 거둔 것은 이진유(李眞儒)가 청한 것이었거니와, 박필몽과 이진유는 그 뒤에 모두 역적으로 벌받아 죽었으나 선신이 보복하여 그렇게 된 것이 아니었습니다. 합계(合啓)로 말하면 어의(語意)가 매우 불측하되 또한 맨 먼저 발론하고 따라서 참여한 여러 사람이 있었는데, 이광좌는 가장 뒤에 조언(助言)하여 윤허를 받았습니다. 선신은 그 맨 먼저 발론한 사람이건 따라서 참여한 사람이건 또한 개의하여 보복한 적이 없는데, 어찌 조언한 이광좌에게만 반드시 보복하려 하였겠습니까? 전하께서 이광좌의 말을 먼저 받아 들이셨으므로 일전의 비지(批旨)에 ‘원한을 품고 보복하는 것을 상하가 다 안다.’라고 말씀하였으니, 신의 마음에 부끄럽고 아픈 것이 더욱이 어떠하겠습니까? 이광좌는 선신이 성무(聖誣)를 변명한 것을 대체(大體)에 미달하다 하였습니다.
아! 한편 사람은 성무가 망극한 것을, 흉도가 핑계 삼은 것은 병환을 숨겼기 때문이라 생각하여 마음을 썩히고 눈물을 머금으며 반드시 변명하려 하고, 한편 사람은 깊이 숨기지 못할까 염려하여 사람이 혹 말을 제기하면 반드시 죽여서 뭇사람의 입을 막으려 하니, 이것이 실로 오늘날 충역이 크게 갈라지는 것입니다. 흉악한 말이 생긴 까닭과 어지로운 계제가 일어난 까닭을 통렬히 밝혀서 붙좇거나 협박받아 따른 무리가 다시는 흉적에게 근거 없는 일로 꾀임받지 않게 하고서야 기율을 범하고 순리를 범하는 자를 참으로 일소할 수 있을 것이니, 임금을 높이고 나라에 충성하는 대체는 이보다 나은 것이 없을 듯합니다. 이광좌는 또 신의 형이 전후에 상소한 것을 그 말을 세 번 바꾸었다고 하였습니다. 대저 외방에서 전혀 들어 알지 못한 것은 설청(設廳)하지 않았기 때문이며 설청하지 않은 것은 숨기려는 계책이었으니, 본디 같은 말인데 어찌 세 번 바꾸었다 하겠습니까? 이광좌는 근년에 스스로 설청하지 않은 까닭을 말하되 혹 전례가 망극하여 차마 거론할 수 없었다고도 하고, 혹은 다른 정승의 도움이 없어서 목이 타되 겨를이 없었다고도 하여 동에서 패하고 서로 달라며 손발이 황망하고 어지러웠으니, 이러한 것이 참으로 이른바 말을 바꾼다고 하는 것이고, 신의 형의 상소로 말하면 그같은 것이 보일 뿐이고 그 바뀐 것이 보이지 않습니다. 원주(原州)를 수일에 왕복한다느니 금오(金吾)를 처음부터 겸대(兼帶)하지 않았다느니 하는 따위 말은 더욱 아이들의 말과 같아서 한 번 웃을 것도 못 됩니다. 대저 열흘 안에 있는 일이면 다 수일이라 할 수 있는데 원주처럼 가까운 곳을 어찌 수일에 왕복할 수 없었겠습니까? 그가 옥관(獄官)의 장(長)이 된 것이 혹 다섯 달 뒤에 있었더라도 그가 스스로 옥사(獄事)를 안치(按治)한 것도 다섯 달이나 오래 되었다 하였고 그가 위관(委官)으로 오르게 되어서도 시일이 더욱 오래 되어 문무 경재(文武卿宰)로서 그의 손에 죽은 자가 가장 많았으므로, 지난번 조정의 의논이 이광좌가 처음부터 끝까지 옥사를 안치하였다고 말하는 것이 이 때문입니다.
이형좌(李衡佐)의 상소로 말하면 신에게 분노하고 신을 원망하여 도리에 어그러지고 불길하다고 말하기까지 하였으니, 신을 압박하기 위하여 힘을 다한다 하겠습니까마는, 다만 그 상소를 보면 ‘선신과 수작하였다.’ 하고 또 ‘이광좌와 왕복하였다.’ 하고 또 ‘선신이 생각 밖의 일과 사실에 벗어나는 일로 이광좌를 의심하였다.’ 하였는데, 무릇 사람은 남이 생각 밖의 일과 사실에 벗어나는 일로 내 지친(至親)을 의심하면 말의 잘잘못과 의심해야 할 일인지를 논하지 않고 반드시 그 말을 빨리 전하여 당사자에게 알리는 것이 본디 일반적인 마음일 것입니다. 이제 선신이 말한 것이 얼마나 중대한 것이며 선신이 또 이광좌에게 말을 전하기를 바랐으니, 이형조가 이미 이광좌에게 왕복하고도 다만 나라의 일을 같이하기를 권하고 선신이 말한 것을 전혀 거론하지 않았다는 것은 어찌 그럴 이치가 있겠습니까? 여기에서 이형좌가 참으로 상소하게 하려는 일로 이광좌에게 왕복하였다는 것을 환히 알 수 있습니다.
이광좌가 선신의 말을 듣고도 오히려 태연하게 끝내 상소하지 않았으니, 그 마음을 둔 바는 뭇사람의 손이 가리킬 만한 것200) 이 아니겠습니까? 그 수작하고 왕복한 실상은 절로 이처럼 엄폐할 수 없는데 도리어 신을 황당한 이야기로 돌리려 하니, 그 계책이 엉성합니다. 대개 당시에 수작한 것은 역변이 처음 일어났을 때에 있었으므로, 이형좌가 선신에 대하여 말한 것은 전에 상소하여 아뢴 것에 그칠 뿐이 아니며, 또한 이형좌만이 그러하였을 뿐 아니라 그때의 한 무리가 대저 그러하였습니다. 그리고 나서 성심(聖心)이 변하지 않고 징토가 엄하지 않았으니 반년 뒤에 다시는 이런 말을 듣지 못하였거니와, 이제는 모두 덮어 숨기려는 것입니까? 이광좌가 병환을 숨겨 어지럽게 만든 정상은 본디 희미해서 알기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그때 설청하지 않았을 뿐더러 주원(廚院)201) 에 이직(移直)한 것도 이미 망극한 지경에 이른 뒤에 있었고, 독삼차(獨蔘茶)로 말하더라도 다음(茶飮)이라고 소보(小報)에 쓰여져 나왔습니다. 선신이 성주(星州)의 적소(謫所)에 있을 때에 갑자기 국상(國喪)을 듣고 곧 주성(州城)에 들어가 그대로 머물러 성복(成服)할 즈음에 지난 조지(朝紙)를 얻어 보았더니 대점(大漸) 전일의 소보 가운데에 ‘다음을 하셨다.’는 등의 말이 있으므로, 선신이 괴이하게 여겨 ‘이것은 어떤 다음인데, 다명(茶名)을 쓰지 않았는가?’ 하였습니다.
을사년202) 조정에 돌아온 뒤에 내국(內局)에서 돌아와 신에게 말하기를, ‘성주에 있을 때에 소보 가운데에서 본 이른바 다음이라는 것은 이제 약원 일기(藥院日記)에서 상고하니 독삼차였다. 그때 소보에 다음(茶飮)이라고 한 것은 매우 괴이하다.’ 하였습니다. 대저 약원의 규례는 임금이 드시는 약은 소엽(蘇葉)·금은화(金銀花) 같은 것일지라도 반드시 그 이름을 쓰는 것인데, 이제 독삼차를 사용하고도 범연히 다음이라 칭하였으니, 이것이 무슨 뜻이겠습니까? 이렇게 하고도 ‘모두 조보(朝報)에 내서 온갖 사람에게 분명히 알렸다.’고 한 것은 누가 속이는 것입니까? 소보에 난 것이 이러하므로 서울에 있는 조사(朝士) 중에도 성후(聖候)가 독삼차를 쓰기에 이른 것을 모른 자가 있었습니다. 신이 기유년203) 에 우연히 함원 부원군(咸原府院君) 어유귀(魚有龜)와 그때의 일을 언급했을 때에 어유귀가 슬피 말하기를, ‘그때 내가 사친(私親)의 복을 입었으므로 대궐 안에 출입하지 못하고 내간(內間)에서 전하는 것에 따라 성후가 위중함을 알기는 하였으나 조보에 쓴 것이 대수롭지 않으므로 드시는 약물은 막연히 몰랐는데, 하루는 삼차(蔘茶)를 달려 드셨다는 말을 듣고 내국(內局)204) 에 물었더니 과연 그러하였다. 이어서 부부인(府夫人)을 재촉해 들어오게 하라는 명이 있으므로 못 견디게 놀라서 대궐로 달려갔는데, 이날 밤에 큰 슬픔을 당하였다. 내가 국척(國戚)으로서 서울에 있었는데도 알 수 없었으니, 중외(中外)에서 모르고서 놀라 의혹한 것이 마땅할 것이다.’ 하였습니다.
우참찬 윤양래(尹陽來)도 일찍이 어유귀의 말을 친히 들었으므로, 무신년205) 이후에 안동 부사(安東府使)가 되어 그 이야기로 백성에게 효유(曉諭)하였다 합니다. 아! 그 숨긴 것이 삼차를 다음이라 하기에 이르러 국구(國舅)도 알 수 없었으니, 중외에서 모르고서 놀라 의혹한 것은 실로 사세가 반드시 그렇게 될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선신과 신의 형이 성무(聖誣)를 변명하려 할 때에 반드시 병환을 숨긴 일을 거론하여 말하는 것은 대개 흉악한 말의 근원을 갈라 부수어 중외의 사람마다 환히 알아서 의혹이 없게 하고 흉적이 감히 다시 일어나지 못하게 하려는 것이었으니, 그 고심과 혈성은 아홉 번 죽어도 후회하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이광좌의 한 마디 말을 얻어내려 한 것으로 말하면 혹 그 사실이 분명히 나타나서 흉악한 무함이 통렬히 밝혀지기를 바란 것이었으나 마침내 얻어 낼 수 없었습니다. 그 실정을 알아보면 참으로 또한 슬픈데, 선신이 이 때문에 여러 번 미안한 하교를 받고 마침내 구천 아래까지 한을 품고 가게 되었고, 신의 형이 또 북으로 남으로 귀양가서 거의 장차 길에서 다니다가 죽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신이 밤낮으로 매우 원통하여 하늘에 호소하여 마지않는 까닭인데, 저 이광좌가 전후에 스스로 변명한 상소에는 일언 반구도 이 일의 실제에 미친 말이 없고 다만 ‘숨기지 않았다.’ 하고 또 ‘미처 설청(設廳)하지 못한 것은 전하께서 아시는 것이다.’ 하여 반드시 갑작스러워서 겨를이 없었다는 빛을 보이려 하니, 이것은 마침 적기(賊氣)를 조장할 만한 것입니다. 지난 번 비지(批旨) 가운데에 ‘나를 무함한다.’라고 하신 말씀은 이광좌를 위로하는 데에서 나왔을지라도 이것은 실로 전하께서 우연히 하신 말씀일 뿐이니, 이광좌가 조금이라도 신하의 의리를 안다면 어찌 감히 다시 제기하여 버젓이 나타내어 말하여 마지않고 이제 또 마치 증거가 있는 듯이 벌여서 이야기할 수 있겠습니까?
대저 시약청(侍藥廳)을 설치하지 않은 것은 본디 저군(儲君)에게 품령(稟令)할 것이 아니므로, 기해년206) 대상(大喪) 때에 약원(藥院)의 신하들이 겨를 없이 갑작스러워서 미처 설청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대관(臺官)이 삭출하기를 계청(啓請)하니, 현묘(顯廟)께서 윤허하셨습니다. 진실로 설청하고 안하는 것이 동궁(東宮)에 관계된다면 대관이 어찌 감히 계청을 낼 수 있겠으며 현묘께서 어떻게 윤허하셨겠습니까? 그때의 사세는 그 미처 설치하지 못한 것이 괴이할 것 없는 것이 오히려 이러한데, 이제 이광좌가 병환을 설청하지 않은 것을 어찌 전하께서 아실 수 있는 것이겠습니까마는, 한때의 하교로 말미암아 넌지시 구실로 삼을 생각을 하니, 사람이 매우 간사하기가 이 지경에 이를 수 있겠습니까? 신의 형의 전소(前疏) 가운데에 있는 말은 대개 이광좌가 숨긴 일 때문에 나온 것이니, 어느 신하가 감히 마음에 싹틔우고 입에 담을 자가 있겠습니까마는, 이광좌는 왕법(王法)을 가하지 않은 것을 마음 아프게 여깁니다. 그 크게 외치고 큰 소리로 꾸짖는 것은 오로지 임금이 말하는 자를 죽이도록 인도하여 자기의 분노 때문에 남의 입을 막으려고 힘쓰려는 것입니다. 그가 최초로 서계(書啓)할 때에 ‘조금이라도 신하의 마음이 있다면 어찌 감히 신에게 대하여 한 마디 말이라도 할 수 있겠습니까?’라고 말하였으니, 이광좌가 어떤 사람이기에 전하의 신하가 감히 그에게 대하여 한 마디 말도 할 수 없는지 모르겠습니다. 그가 구구한 흉악하고 더러운 몸으로 존귀한 신류(宸旒)를 외람되게 끌어대고 중대한 왕명을 함부로 칭탁하여 신하가 감히 한 마디 말도 자기에게 할 수 없게 하고, 조금만 거스르는 것이 있으면 문득 왕법을 가하려 하니, 고금 천하에 신하로서 교만하고 방자하며 참람하고 망령되기가 어찌 이처럼 심한 자가 있겠습니까?"
하였는데, 소가 들어가니, 정원(政院)에 하교하기를,
"외관(外官)이 어찌 감히 이러할 수 있는가? 그 소를 도로 주라."
하였다.
임금이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우의정 송인명이 말하기를,
"이빈(李濱)이 이형원(李馨遠)과 면질할 때에 철옹성(鐵甕城)의 일을 이형원에게 미룬 것은 이미 거짓임을 승복하였으니, 이제는 다시 물을 것이 없습니다. 이빈은 본도(本道)에 보내어 처치하게 하고, 이형원이 군인을 많이 거느리고 저들의 지경을 범하여 들어간 죄는 법에 있어서는 죽여 마땅하나 당초에 이미 편의대로 종사하도록 허가하였으니, 극변(極邊)에 정배하소서."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송인명이 또 말하기를,
"이형원이 이미 죄받았으니, 이를 들으면 도신(道臣)이 반드시 스스로 편안하지 못할 것입니다. 평안 감사 민응수(閔應洙)는 체직해야 하겠습니다." 하니, 그대로 따랐다.
개성 교수(開城敎授)를 다시 두었다. 유수(留守) 정우량(鄭羽良)이 본부(本府)의 교관(敎官)을 전례대로 다시 교수로 하고 본부의 문신(文臣)을 자벽(自辟)207) 하여 이조로 보내고 이조에서 차출하여 보내게 하기를 청하니, 임금이 윤허하였다. 정우량이 또 본부의 효자 한순계(韓舜繼)를 정표(族表)하기를 청하였다. 한순계는 2백 년 전 사람인데 고도(故都) 사람들이 다 한 효자라 일컫는 자이므로, 증직(贈職)하라고 명하였다.
7월 30일 갑술
송인명이 차자를 올리기를,
"원로 대신이 병중에 상소한 것은 나라를 근심하고 임금을 사랑하는 혈성(血誠)에서 나왔으니, 특별히 비답을 내려 받아들이셔야 하겠습니다."
하였다. 원로는 이광좌를 가리킨 것이다. 이광좌가 상소한 뒤에 돈유(敦諭)가 있었을 뿐이고 하비(下批)가 없었으므로 송인명의 말이 이러하였는데, 비답하기를,
"상신(相臣)에 대한 비지(批旨)는 하루를 넘겨서는 안되는데, 그때 밤새도록 자지 못하고 한나절 동안 정사(政事)에 수응(酬應)하였으므로 정신이 어지러우려 하였다. 간략한 듯하나 대찬(代撰)하는 것이 낫겠으므로 그렇게 명하였는데, 이제 아뢴 것을 보니 마음이 매우 겸연쩍다."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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