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 2일 병자
영의정 이광좌(李光佐)가 서계(書啓)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민통수(閔通洙)의 소(疏)는 민형수(閔亨洙)보다 더합니다. ‘병환을 숨겨 어지럽게 만들었다.[諱疾病致亂]’는 다섯 자는 사람의 도리를 지닌 자라면 또한 차마 마음에서 일으키고 입에서 낼 수 있겠습니까? 성명(聖明)께서 다시 남김없이 분명하게 밝혀 주셨는데도 민통수는 조금도 받아들여 믿으려 하지 않고 더욱 방자하게 도리를 어기고 어지럽히니, 이것이 또한 신하의 분수로서 감히 나올 수 있는 것이겠습니까? 신이 불행히 이 사람들과 서로 마주쳐서 전후에 무함당한 것이 실로 상변(上變)하는 급서(急書)와 같으므로 신이 바야흐로 현옥(縣獄) 밖에서 석고(席藁)하니, 바라건대 신과 민통수를 왕부(王府)에 같이 내려 정상과 죄상을 명백히 정하도록 명하소서. 신에게 죄가 있으면 부월(斧鉞)을 받아야 할 것이고, 그렇지 않으면 민통수가 근거 없이 사람을 무함한 것이 어찌 감히 성세(聖世)의 상법(常法)을 피할 수 있겠습니까?"
하였는데, 하교하기를,
"민형수의 왕년의 소장은 지금과 차이가 없고 또한 그런 일이 없는데, 그 보지도 않은 소장에 대하여 어찌 그런 일을 하는가? 위에서 이미 보지도 않은 것이고 보면 정원(政院)에서 전하여 알게 한 것 또한 불찰인데, 경은 어찌하여 시애(撕捱)208) 하는가?"
하고, 다시 전유(傳諭)하라고 명하였다.
8월 3일 정축
임금이 사직(社稷)에 나아갔는데, 추향(秋享)을 거행하려 한 때문이었다.
영의정 이광좌(李光佐)가 또 명소(命召)를 반납하니, 임금이 또 돈유(敦諭)하였다.
8월 4일 무인
임금이 사단(社壇)에 올라 제사를 거행하였다. 마치고서 환궁(還宮)하다가 건양문(建陽門)에 이르러 어영 중군(御營中軍) 이숙(李潚)이 진두(陳頭)에서 맞이하지 않아 잡아들였는데, 손에 인기(認旗)를 들지 않았다 하여 태거(汰去)하라고 명하였다.
교리 김상석(金相奭)을 폄출(貶黜)하여 고산 찰방(高山察訪)으로 삼았다. 김상석이 인입(引入)하고 수가(隨駕)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임금이 자정전(資政殿)에 나아가 병조 판서(兵曹判書) 조상경(趙尙絅)을 인견(引見)하여 능행(陵幸)할 때에 따르는 군사의 수를 되도록 간략하게 줄이라고 명하고, 또 기백(畿伯)에게 명하여 민력(民力)이 드는 데에는 저치미(儲置米)를 갖추고 기다리게 하였다.
8월 5일 기묘
임금이 대신(大臣)과 비국 당상(備局堂上)을 인견하고, 경기 감사(京畿監司) 윤순(尹淳)을 체직하였다. 당초에 종실(宗室) 남원군(南原君)이 산송(山訟)의 일로 상소하여 윤순을 매우 절박하게 헐뜯어 배척하였고, 윤순도 상소하여 스스로 변명하고 남원군을 공박하였는데, 임금이 비답(批答)을 내려 꾸짖으니, 윤순이 곧 인입(引入)하고 여러 번 상소하여 면직을 청하였다. 우의정 송인명(宋寅明)이 그에게 병이 있음을 아뢰고 체직을 윤허하기를 청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송인명이 또 말하기를,
"남원군이 산송 때문에 상소한 것은 전례가 없는 일이므로 뒷 폐단에 크게 관계되니, 청컨대 정식(定式)하여 금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송인명이 말하기를,
"장령(掌令) 유건(柳謇)이 상소하여 곡산(谷山)의 기자 영당(箕子影堂)에 사액(賜額)하기를 청하였습니다. 기자는 우리 나라에 공이 있으므로, 선유(先儒)가 혹 ‘존숭(尊崇)하여 제사하는 것이 공자(孔子)와 같아야 한다.’고 말하였습니다."
하니, 하교하기를,
"기자가 태학(太學)에 들어가도 팔도에서 같이 제사한다면 혹 괜찮겠으나, 유독 그곳에서만 제사할 필요는 없다."
하였다.
이수항(李壽沆)을 도승지로, 조원명(趙遠命)을 대사헌으로, 김유(金濰)를 대사간으로, 황재(黃梓)를 집의로, 이도겸(李道謙)을 사간으로, 권일형(權一衡)을 헌납으로, 민계(閔堦)를 장령으로, 이수해(李壽海)·김석일(金錫一)을 지평으로, 유언협(兪彦協)을 정언으로, 이광덕(李匡德)을 부제학으로, 김광세(金光世)를 교리로, 서종옥(徐宗玉)을 경기 관찰사(京畿觀察使)로, 김흡(金潝)을 어영 대장(御營大將)으로 삼았다.
8월 6일 경진
예조 참의(禮曹參議) 오명신(吳命新)과 문학(文學) 조명리(趙明履)가 상소하였으나, 비답(批答)을 내리지 않고 도로 내어 주었다. 당초에 오명신은 경술년209) 옥사(獄事)를 국문(鞫問)할 때 그 이름이 역적의 공초(供招)에 나왔으나, 임금이 오명항(吳命恒)의 아우라 하여 특별히 묻지 않았다. 그 뒤에 조명리가 한림(翰林)으로서 정원(政院)에 들어갔는데, 오명신이 바야흐로 승지(承旨)가 있으므로 조명리가 곧 나가서 피혐(避嫌)하였다. 이때에 이르러 조명리가 이조 정랑(吏曹正郞)으로서 정사(政事)에 참여하여 승지의 망(望)을 낼 때 오명신의 이름에 이르러 쓰지 않았다. 오명신이 상소하여 사직하니, 조명리도 상소하여 그 일을 말하였는데, 임금이 모두 비답을 내리지 않고 도로 내어 주었다. 대개 그 시비를 가려서 돕거나 누르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임금이 소대(召對)를 행하였다. 《대학연의보(大學衍義補)》를 강독(講讀)하였는데, ‘오직 재화(財貨)·공부(貢賦)를 부서(簿書)하는 것을 선무(先務)로 삼고 교화를 파급했다는 말을 듣지 못하였다.’라는 말에 이르러 승지(承旨)에게 명하여 능리(能吏)가 법문(法文)을 남용하고 명예를 바라는 폐단을 극론(極論)할 수백 마디의 하교를 써서 팔도의 도신(道臣)에게 포유(布諭)하게 하고 또 때가 지나도 혼인하지 못한 남녀를 돌보아 혼인을 이루도록 도우라고 명하였다.
함경 감사(咸鏡監司)에게 하유(下諭)하여 이재형(李載亨) 부자를 찾아보고 성의(聖意)를 유시하게 하였다. 이재형은 경성(鏡城) 사람인데 뜻을 도타이 갖고 학문에 힘쓰며 문사(文辭)가 순정(純正)하여 이름이 서울에 알려졌고 전후의 도신(道臣)이 조정에 천거하였으므로 여러 번 벼슬을 제수받아 사헌부 지평(司憲府持平)에 이르렀으나 나이가 늙었다 하여 부름에 나아가지 않았고, 그 아들도 문명(文名)이 있었다. 이때 서북 변방 사람들이 정감(鄭鑑)의 참위(讖緯)한 글을 파다히 서로 전하여 이야기하므로 조신(朝臣)이 불살라 금하기를 청하고 또 언근(言根)을 구핵(究覈)하고자 하기에 이르렀는데, 임금이 말하기를,
"그것이 어찌 진 시황(秦始皇)이 서적을 지니는 것을 금한 것과 다르겠는가? 정기(正氣)가 충실하면 사기(邪氣)는 실로 절로 사라질 것이다. 정기를 도우려면 학문이 아니고서 어찌하겠는가?"
하고, 이어서 수백 마디 말을 하교하여 북백(北伯)을 시켜 이재형 부자를 찾아보고 징소(徵召)하는 뜻을 유시하게 하였다.
8월 7일 신사
병조 판서 조상경(趙尙絅)을 면직하고 김성응(金聖應)으로 대신하게 하였다. 조상경이 여러 번 대정(大政)을 행하고 이 직임에 있은 지 오래 되었다 하여 여러 번 상소하여 면직을 바랐으므로 윤허하였다.
정광제(鄭匡濟)를 장령으로, 조명리(趙明履)를 부수찬으로, 조상경(趙尙絅)을 판돈녕(判敦寧)으로, 유척기(兪拓基)를 판윤(判尹)으로, 이기진(李箕鎭)을 동경연(同經筵)으로 삼았다.
8월 8일 임오
임금이 경기 감사(京畿監司) 서종옥(徐宗玉)을 인견하였다. 19일에 온릉(溫陵)210) 에 갈 것인데 민력(民力)을 번거롭게 하지 말고 넓게 길을 닦지 말라고 명하고 또 순리(循吏)를 장려하고 교화를 숭상하라는 뜻으로 곡진히 하유(下諭)하였다. 서종옥이 지평 현감(砥平縣監) 이경조(李景祚)가 치적(治績)이 있다 하여 잉임(仍任)시키기를 청하니, 그대로 따랐다. 이경조는 인평군(仁平君) 이보혁(李普赫)의 아들인데, 뒤에 이름을 경호(景祜)라고 고쳤다.
8월 9일 계미
저녁에 달이 남두성(南斗星)을 범하였다.
8월 10일 갑신
윤용(尹容)을 평안도 관찰사로, 윤순(尹淳)을 예조 판서로, 조상경(趙尙絅)을 형조 판서로, 이덕중(李德重)을 부응교로, 정이검(鄭履儉)을 교리로 삼았다.
임금의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우의정 송인명(宋寅明)이 말하기를,
"능행(陵幸) 때에 숙빈묘(淑嬪墓)에 들러 배알(拜謁)하신다는 명이 있었는데, 길을 닦을 즈음에 농사를 해치는 일이 많을 것이니, 산 옆의 밭이 없는 데로 길을 내어 닦기를 청합니다."
하니, 그대로 따랐다.
8월 11일 을유
공홍 감사(公洪監司) 윤경릉(尹敬龍)을 파직하여 금부(禁府)를 시켜 나문(拿問)하게 하고, 김성운(金聖運)으로 대신하게 하고, 남태량(南泰良)을 호서 안핵사(湖西按覈使)로 삼았다. 이에 앞서 청안(淸安) 사람 양시박(楊始搏)이 상변(上變)하여 그 족속 양취도(楊就道) 등이 나라에 대하여 부도(不道)한 정상을 고하였으므로 체포되어 복법(伏法)되고 양시박은 상으로 가자(加資)되었다. 양취도의 여러 족속들이 매우 미워하고 원망하여 드디어 무리를 이루어 밤에 들어가 양시박을 때려 죽여 냇가에 묻었는데 일이 발각되어 옥에 갇혔다. 수모자(首謀者) 장익호(張翼虎)가 일찍이 가사(歌詞)를 지었는데 조정을 언급한 것이 매우 불측하였고, 또 양시박의 상자 가운데에 고변서(告變書)가 있다고 말하였으므로, 윤경룡이 듣고서 크게 두려워하여 드디어 그 일을 장문(狀聞)하고 죄인을 묶어 경옥(京獄)에 보내고 국문(鞫問)하여 다스리게 하기를 청하였다. 임금이 여러 신하들에게 물었는데, 모두 이것은 살옥(殺獄)에 해당하므로 깊이 구핵(究覈)할 것도 못된다고 대답하니, 임금도 그렇게 여겼다. 이때에 이르러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여 장계(狀啓)를 내어 보였는데, 여러 신하들이 비로소 엄히 구핵하기를 청하니, 임금이 왕자(王者)는 못 속의 물고기까지 죄다 살피지 않는다 하여 본도(本道)로 돌려보내어 구문(究問)하게 하라고 명하고, 윤경룡은 조정의 지휘를 품신하지 않고 이제 양시박이 이미 죽어 계제(階梯)가 이미 끊어진 뒤에 죄수들을 묶어 보냈으므로 도신(道臣)의 체례(體例)를 어겼다 하여 윤경룡을 나문하라고 명하고, 특지(特旨)로 승지(承旨) 남태량을 안핵사로 삼고, 김성운을 감사로 삼고, 이어서 함께 가서 구핵하여 아뢰라고 명하였다.
유척기(兪拓基)를 판의금(判義禁)으로, 서종급(徐宗伋)을 부제학으로, 오수채(吳遂采)를 응교로, 허옥(許沃)을 사간으로, 권현(權賢)을 헌납으로 삼았다.
8월 13일 정해
영의정 이광좌(李光佐)가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신은 나라의 두터운 은혜를 입었으므로 참으로 감히 사람의 도리로 해야 할 일을 폐기할 수 없습니다. 일찍이 고(故) 상신(相臣) 민진원(閔鎭遠)이 성질(聖疾)을 널리 알리기를 청한 죄를 논하여 외딴 섬에 귀양보내기를 청하였으므로 민진원과 그 아들의 무함을 몹시 받은 것은 골육의 원수이기 때문입니다. 성유(聖諭)가 지극히 절실하고 처분이 지극히 엄하셨으나, 민통수(閔通洙)의 방자함은 더욱 심해졌으니, 신은 감히 죽고 싶은 고통을 참고 우선 그가 임금을 속인 죄를 아뢰고 그 다음에 신을 무함한 정상을 논하겠습니다.
신이 무신년211) 정월에 연중(筵中)에서 민진원의 일을 논하였는데, 그 대략은 ‘예전에 한(漢)나라 문제(文帝)가 뭇 신하를 시켜 가서 박소(薄昭)212) 를 위해 곡(哭)하게 하였습니다. 문제는 사람됨이 반드시 윤리에 박하지 않았을 것이니, 어찌 그 외숙을 살리려는 마음이 없었겠습니까? 혹 용서하면 법이 무너져서 한(漢)나라가 한나라답지 않게 될 것이기 때문이었습니다. 박소는 사자(使者)를 죽인 것에 지나지 않았으나, 민진원은 실로 선왕(先王)에 대하여 기강을 범하였습니다. 고금을 두루 보더라도 임금의 승하 뒤에 신하가 한 짓이 어찌 민진원과 같은 자가 있겠습니까? 고묘(告廟)하고 반시(頒示)하려는 의논까지 있었는데, 다행히 만고에 빛나는 타고나신 성덕(聖德)에 힘입어 그 말이 수행되지 못하였습니다마는, 개기(改紀)한 뒤에는 반드시 먼저 그 죄를 바루어야 인기(人紀)를 세울 수 있을 것입니다. 그 죄를 분명히 바루지 못하면 난신 적자(亂臣賊子)가 뒤를 이어 일어나게 될 것이니, 살려 주는 의논에 붙이더라도 반드시 외딴 섬에 귀양보내어 사람들에 끼지 못하게 해야 인심을 복종시킬 수 있을 것입니다.’ 하였습니다.
신이 또 말하기를, ‘전하께서 임징하(任徵夏)를 죄주신 뒤에 민진원이 죄를 같이 받기를 청하였으니, 여기에서도 민진원의 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글에 써서 곧바로 같이 죄받기를 청한 자가 선왕에 대하여 어찌 여지를 두었겠습니까?’ 하였습니다. 신이 또 말하기를, ‘지난번 성상께서 목이 메어 하교하셨을 때에, 민진원이 선왕께 죄를 지었고 선후(先后)께 의절당하였다는 등의 말을 아뢰었으면 성심(聖心)을 깨우치는 것을 바랄 수 있었을 터인데 신은 다른 사람 중에서 아뢸 자가 있으리라고 생각하여 말하지 않았습니다마는, 이제 와서도 신이 혐의를 피하느라 말하지 않는다면 나라가 나라답지 않게 될 것입니다. 신이 지난번 허다한 사람 가운데에서 민진원만을 죄준들 무엇이 마음에 통쾌하겠습니까? 신이 사사로이 좋아하고 싫어하는 것 때문에 이런 말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였습니다.
임금께서 하교하기를, ‘경(卿)의 말은 단심(丹心)에서 나왔으니 합계(合啓)에 대하여 비답이 있어야 하겠거니와, 처분한 뒤에는 경이 원보(元輔)의 자리에 있으니 조정(調停)에 힘써야 한다.’ 하시고, 또 ‘하우(夏禹)가 수인(囚人)을 보고 눈물을 흘린 것213) 은 수인이 죄가 없기 때문이 아니라 교화가 행해지지 않은 것을 스스로 상심한 것이다. 민진원도 유생(儒生)이므로 성현(聖賢)의 경전(經傳)을 반드시 다 보았을 것인데 마침내 이 지경에 빠졌으니, 어찌 슬프지 않겠는가? 멀리 귀양보내라는 명을 나는 일률(一律)214) 과 마찬가지로 여긴다.’ 하셨습니다. 고(故) 판서(判書) 민진후(閔鎭厚)라면 어찌 이 지경에 이르렀겠습니까? 민진원은 성정(性情)이 괴이하여 경망한 일이 많으니, 이것이 신이 민진원이 죄주기를 청한 대략입니다. 이것을 옆에서 도왔을 뿐이라 할 수 있겠습니까? 이제 또 근거 없이 ‘병환을 숨겼다. [諱疾]’는 두 자를 만들어 내어 억지로 맞추고 법문(法文)을 굽혀서 죄에 빠뜨리는데, 시약청(侍藥廳)을 설치하는 일은 처음에는 차마 전례를 따르지 못하였고 나중에는 망극하여 겨를이 없었는데, 무슨 조금이라도 논할 만한 것이 있기에 오히려 이것에 대하여 말을 하는 것입니까? 기해년215) 에 여러 신하들이 미처 시약청을 설치하지 못한 것도 어지럽게 만든 방도라 할 수 있겠습니까?
가장 마음 아픈 것은 다음(茶飮)에 관한 일입니다. 어찌 차마 제기하여 우리 성상의 마음을 슬프게 할 수 있겠습니까마는, 민형수 등은 입에서 나오는 대로 말하니 마음 아픕니다. 그때 삼차(蔘茶)를 드신 것은 대점(大漸)의 전일에 있었던 일이므로 이때에는 속이 차서 꼭 죽게 되고 음식에 입을 댈 겨를도 없었는데, 소보(小報)를 써 가는 것까지도 모두 점검하고 지휘한 것으로 신을 책망하는 것이 사리에 그럴 듯한 말이겠습니까? 삼차이건 다음이건 물론하고 계사(啓辭)에 나온 것인데 등록(謄錄)에 실린 것에 잘못이 있다면 어찌하여 점검하지 않았느냐고 신을 책망하는 것은 괜찮겠으나, 이제는 성주(星州)에 있을 때에 얻어 보았다는 과거의 어떤 소보를 가지고 신의 죄를 채우려고 이토록 과장하는 것이니, 어찌 사리에 가깝겠습니까? 참으로 통탄스럽습니다. ‘병환을 숨기고 어지럽게 만들었다.[諱疾致亂]’는 넉 자가 어찌 조금이라도 사람의 도리를 지닌 자가 마음 먹을 수 있는 것이겠습니까? 신을 무함하려면 문득 감히 말할 수 없는 데를 끌어 대니, 왕강(王綱)의 손상이 다시 여지가 없습니다."
하였는데, 비답하기를,
"이는 개의할 것도 못된다. 그가 경에게 마음껏 원한을 푸는 것은 상하가 모두 안다. 글로는 뜻을 다할 수 없으니, 같이 들어올 때에 면대하여 유시하겠다."
하였다.
8월 15일 기축
장령(掌令) 민계(閔堦)가 상소하기를,
"고 충신 홍익한(洪翼漢)의 종형(從兄) 홍휼(洪霱)의 아내 윤씨(尹氏)는 병자년216) 의 난리를 당하여 지아비의 가족이 다 죽자, 홍익한의 가족과 함께 동시에 순절(殉節)하였으니, 특별히 정표(族表)하여 그 절개를 나타내야 합니다."
하니, 하문하여 처치하겠다고 비답하였다.
이익정(李益炡)을 예조 참판으로, 이제담(李齊聃)을 장령으로, 조윤제(曹允濟)를 지평으로, 윤득재(尹得載)를 정언으로, 구선행(具善行)을 전라 좌수사(全羅左水使)로 삼았다.
8월 16일 경인
이조 판서 조현명(趙顯命)이 상소하여 사직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지금은 그렇게 할 수 없으니, 그 소(疏)를 도로 주도록 하라."
하였다. 조현명이 이미 대정(大政)을 지내고서, 스스로 민통수(閔通洙)를 이랑(吏郞)에 통의(通擬)하지 않은 것은 오로지 투쟁을 그치게 할 생각에서 나온 것인데 마침내 서로 다툰 죄로 같이 돌아갔으므로 심사(心事)가 어그러지고 신명(身名)이 욕된다 하여 상소하여 인구(引咎)하고 면직을 청하였는데, 임금도 가부(可否)를 가리고 싶지 않아서 비답을 내리지 않고 도로 주게 하였다.
8월 17일 신묘
예조(禮曹)에서 사묘(私墓)에 배알(拜謁)하는 의주(儀註)를 바치니, 하교하기를,
"묘소(墓所)의 이름은 같을지라도 경중(輕重)에 차이가 있고, 능묘(陵墓)의 예(禮)에는 경중이 있더라도 정은 마찬가지인데, 묘소에 배알하는 복색에 순회묘(順懷墓)의 예를 쓰는 것은 예관(禮官)이 과연 예를 알아서 그런 것인가? 예관과 해방 승지(該房承旨)를 종중 추고(從重推考)하도록 하라."
하였다. 대개 임금이 사친(私親)을 높여 받드는데 뭇 신하가 그 뜻을 받들려 하지 않는 것으로 의심하여 일마다 문득 격노하여 반드시 미안한 하교가 있었다.
8월 19일 계사
임금이 온릉(溫陵)에 나아갔다. 4경(四更)에 임금이 흥화문(興化門)을 나가 말을 타고 주정소(晝停所)에 이르러 교리(校理) 유최기(兪最基)에게 명하여 각무 차원(各務差員)을 암행(暗行)하여 염찰(廉察)하게 하고, 예관(禮官)을 불러 인빈(仁嬪)의 어머니 이씨(李氏)의 묘소가 있는 곳을 묻고, 회가(回鴐)한 뒤에 예관을 보내어 치제(致祭)하라고 명하였다. 일출(日出) 때에 거가(車駕)가 능소(陵所)에 이르러 삼헌(三獻)을 행하였다. 예가 끝나고서 임금이 재랑(齋郞) 신후팽(愼後彭)에게 묻기를,
"익창 부원군(益昌府院君)의 묘소는 어디에 있는가?"
하니, 대답하기를,
"백호(白虎) 밖 5리쯤 있습니다."
하니, 회란(回鑾)한 뒤에 예관을 보내어 치제하라고 명하였다. 회가하다가 고령리(古寧里)에 이르러 사묘(私墓)에 전배(展拜)하고 그대로 머물러 잤다.
8월 20일 갑오
임금이 사묘(私墓)에서 환궁(還宮)하였다. 교자(轎子)를 타려 할 때에 병조 판서 김성응(金聖應)을 불러 목메어 하교하기를,
"신해년217) 이후 이제야 비로소 와 뵈었다. 그 사이가 이미 10년이 되었으니, 내 마음의 슬픈 느낌이 어떠하겠는가? 어린 아이가 넘어지면 먼저 어머니를 부르는 것은 천성이다. 묏자리를 잡을 때에 땅을 바친 사람이 없었더라면 어떻게 이곳을 잡았겠는가? 하교한 것이 있었는데 전조(銓曹)에서 아직도 거행하지 않았다. 왕자(王者)는 사(私)가 없어야 하지만 또한 실신(失信)하여서도 안된다. 근래 명류(名流)가 매우 어려워하나, 명류에게도 부모가 있거니와 어찌 하늘에서 내리고 땅에서 나왔겠는가?"
하니, 여러 신하들이 아뢰기를,
"전하께서 곧바로 전조에 명하여 그 사람을 녹용(錄用)하게 하신들 무슨 해로울 것이 있겠습니까?"
하였다. 이에 김성응이 명을 받고 물러갔다. 임금이 또 의주(儀柱) 가운데에서 사묘를 극행(極行)218) 으로 쓰지 않았다 하여 꾸짖는 하교를 내리고, 예판(禮判) 윤순(尹淳)을 체직하였다. 거가(車鴐)가 주정소(晝停所)에 이르러 경기 감사(京畿監司)와 각무 차원(各務差員)·수령(守令)을 인견하여 농사의 형편과 백성의 고통과, 밟혀 상한 길가의 전곡(田穀)을 묻고 특별히 감세(減稅)하게 하였다. 교리 유최기(兪最基)가 염찰(廉察)한 뒤에 들어와 말하기를,
"김포(金浦)는 잔폐(殘弊)한 고을인데 도신(道臣)이 분정(分定)한 것이 매우 많아서 백성을 소란하게 하는 폐단이 없지 않으니, 도신과 수령은 종중 추고(從重推考)해야 하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유최기가 또 말하기를,
"양성(陽城)에서는 절추(折芻) 2백 석(石)을 민간에서 더 거두었으니, 마땅히 파출(罷黜)해야 하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못 가운데에 있는 물고기까지 살필 수는 없으나, 더 거둔 것은 매우 터무니없다. 일이 매우 잗다니, 도신에게 알려 그가 스스로 교체하도록 하라."
하였다. 임금이 막차(幕次)에서 나와 가교(駕轎)를 타고 금훤랑(禁喧郞)이 누구냐고 물으니, 김성응이 대답하기를,
"위창조(魏昌祖)입니다."
하였다. 또 병랑(兵郞) 가운데에서 전에 시종(侍從)을 지낸 자는 누구냐고 물으니, 대답하기를,
"송익휘(宋翼輝)입니다."
하니, 임금이 송익휘를 잡아들이라고 명하였다. 잡아들이는 것이 지체되었으므로 선전관(宣傳官)을 결곤(決棍)하였다. 임금이 소리를 질러 송익휘에게 묻기를,
"어찌하여 감히 서 있고 꿇어앉지 않는가?"
하고, 드디어 결곤 준10도(決棍準十度)를 명하였다. 교리(校理) 정이검(鄭履儉)이 앞으로 나아가자, 임금이 소리를 질러 말하기를,
"감히 구호하는가?"
하고, 체차(遞差)한 뒤에 금부(禁府)에서 추문(推問)하라고 명하였다. 이에 옥당(玉堂) 이덕중(李德重)·김광세(金光世)·유최기 등이 잇달아 앞으로 나아가니, 모두 체차하라고 명하였다. 송익휘는 송인명(宋寅明)의 종질(從姪)이다. 처음에 송인명이 고령(古寧)의 길 닦는 일 때문에 여러 번 엄한 하교를 받았고 예조(禮曹)에서 마련한 의주 가운데에 극행(極行)으로 쓰지 않은 것도 그가 참여하여 들은 것이므로, 이틀이 지나 송인명이 차자(箚子)를 올려 견책을 청하니, 임금이 예사 비답을 내렸다.
이날 보슬비가 내렸다. 승지(承旨)가 우구(雨具)를 설치하기를 청하였으나, 임금이 윤허하지 않았다. 초혼(初昏)에 환궁하였다.
8월 21일 을미
헌납(獻納) 권현(權賢)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전랑(銓郞)은 극선(極選)이라 할지라도 오직 조용히 상의하여 합당하게 되도록 힘써야 할 것인데, 서로 구대(求對)하는 것이 양조(兩造)219) 와 같으므로 분의(分義)가 매우 야비하고 사체(事禮)가 훼손되니, 해당 전조(銓曹)의 당상을 의당 견벌(譴罰)해야 하겠습니다. 민통수(閔通洙)와 심악(沈)을 아울러 발탁한 것이 다툼을 진정시키려는 뜻에서 나왔더라도, 이미 발탁할 만한 공로가 없거니와 외보(外補)와 견줄 만한 것도 아니므로 은혜가 명목이 없는 데에서 나와 일이 구간(苟簡)하니, 의당 특제(特除)한 명을 거두셔야 하겠습니다."
하였는데, 아뢴 것은 다 옳으나 처분에는 저절로 완급(緩急)이 있는 것이라고 비답하였다.
8월 22일 병신
밤에 달이 동정성(東井星)에 범하였다.
하교하기를,
"송익휘(宋翼輝)의 결곤(決棍)을 어찌 그만둘 수 있겠는가? 대신(臺臣)·유신이 명류(名流)를 돌보아 감쌌으니, 모두 그 벼슬을 삭거(削去)하도록 하라. 송익휘는 의당 삼군(三軍)에 효시(梟示)해야 할 것인데 10도(度)를 결곤하였으니, 말감(末減)이라 하겠다. 태거(汰去)는 매우 경하니 삭직(削職)하도록 하라."
8월 23일 정유
약방(藥房)에서 문안하니, 임금이 엄한 분부를 내리고 입진(入診)을 윤허하지 않았다. 도제조(都提調) 김흥경(金興慶)과 판부사(判府事) 김재로(金在魯) 등이 청대(請對)하니, 하교하기를,
"맡은 자가 소장을 올리면 될 것이다. 신하가 감히 이기려고 겨루는가? 명관(名官)의 결곤(決棍)에 대하여 소장을 어지럽게 올려 감히 구호하니, 군신(君臣)의 분의(分義)에 어떠하겠는가?"
하였다. 이에 김흥경 등이 잇달아 일곱 번 아뢰어 청대하였으나, 모두 윤허하지 않았고 말하기를,
"요순(堯舜)의 도(道)는 효제(孝悌)일 뿐이다. 차마 인접(引接)할 수 없는 데에는 중히 여기는 것이 있다."
하였다.
지평 김시위(金始煒)가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흉얼 여족(凶孼餘族)이 고한 자를 때려 죽인 것은 전에 없었던 큰 변괴인데 곧 사핵(査覈)하지 않고 본도(本道)에 도로 넘겨준 것은 국체(國體)를 엄하게 하는 도리가 아니니, 의당 국문(鞫問)하여 정상을 알아 내어 전형(典刑)을 바루어야 하겠습니다. 이형원(李馨遠)·이빈(李濱)이 전후의 정상은 마침내 의심스러운 데에 관계되니, 의당 다시 엄히 구명하여 율문(律文)에 따라 죄를 정해야 하겠습니다. 일전에 병판(兵判)이 패초(牌招)를 어겼을 때 표신(標信)을 보냈으니, 이것이 무슨 거조(擧措)입니까? 사진(仕進)하지 않으면 군율(軍律)을 써야 할 것인데, 쓰면 인명(人命)이 회롱될 것이고 쓰지 않으면 군율이 희롱될 것입니다. 송익휘(宋翼輝)의 결곤(決棍)은 과연 무슨 죄 때문입니까? 각기 주관(主管)함이 있고 그 일[庖俎]이 이미 다른데 지금 곧 해장(該掌)220) 을 버려두고 송익휘를 결곤하니, 송익휘가 결곤을 받은 것은 금훤(禁喧)으로서가 아니고 곧 시종(侍從)으로서입니다. 형정(刑政)이 어그러지고 거조가 전도되는 것이 이러하다면 논사(論思)하는 신하가 서로 함께 바로잡는 것은 그 직분인데 체직(遞職)시키고 금부(禁府)에서 추문(推問)하니, 이것이 무슨 거조입니까? 곧 명을 도로 거두어 성덕(聖德)을 빛내셔야 하겠습니다. 의조(儀曹)221) 에서 마련한 절목(節目)으로써 융쇄(隆殺)의 구별이 있어야 마땅한데 위노(威怒)가 갑자기 가해지고 사령(辭令)이 중도를 잃었습니다. 겸사복(兼司僕)이 얼마나 미천하며 대신(大臣)이 얼마나 존중한 자리인데, 하교 가운데에 대신을 겸사복과 대거(對擧)하십니까? 일이 국체에 관계되니 신은 애석하게 여깁니다."
하였다. 대개 일찍이 겸사복의 일로 엄한 하교가 있었으므로 상소하여 언급한 것이었다. 대사간(大司諫) 김유(金濰)도 상소하여 대신과 송익휘의 일을 두루 거론하고 사교(辭敎)가 지나치고 처분이 어그러진 것을 극진히 말하고 마지막에 도로(道路)를 적간(摘奸)한 기랑(騎郞)222) 에게 궁시(弓矢)를 특별히 상준 것은 권징(勸懲)하는 도리에 어그러진다고 논하였다. 말이 매우 간절하고 정직하였는데, 방자하고 무엄하다 하여 비답을 내려 매우 꾸짖고 모두 체직하였다.
8월 24일 무술
약방(藥房)에서 입진(入診)을 청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김흥경(金興慶)·김재로(金在魯)가 차자(箚子)를 올려 입진을 청하였으나, 또 엄한 분부를 내리고 윤허하지 않았다.
8월 25일 기해
밤에 번개가 쳤다.
8월 26일 경자
우의정 송인명(宋寅明)이 명소(命召)를 반납하니, 또 도로 주도록 하였다.
8월 27일 신축
약원 도제조(藥院都提調) 김흥경(金興慶) 등이 입진(入診)을 청하였으나, 또 윤허하지 않았다.
우의정 송인명(宋寅明)이 명소(命召)를 반납하였으나, 또 도로 주라고 명하였다.
8월 28일 임인
약원에서 입진을 청하였으나, 또 윤허하지 않았다.
우의정 송인명이 흥화문(興化門) 밖에 엎드려 관(冠)을 벗고 석고 대죄(席藁待罪)하며 명소를 반납하니, 대죄하지 말라고 명하였다.
판부사(判府事) 김재로(金在魯)·이조 판서 조현명(趙顯命)이 또 청대(請對)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하교하기를,
"아! 요순(堯舜)의 도(道)는 효제(孝悌)일 뿐이다. 하교가 비록 지나치더라도 아랫사람의 도리로서 어찌 감히 장황하게 할 수 있겠는가? 이것은 임금이 이 일에 대하여 감히 신칙(申飭)하지 못하게 하려는 뜻이다. 신하가 이처럼 임금을 강제하니, 남면(南面)하여 임금이라 칭하는 것이 무슨 낯이 서겠는가? 그 방자한 사람을 고가(藁街)223) 에 머리를 매달지 않으면 결코 신하를 대하지 않겠다."
하였다.
외신(外臣)의 청대(請對)를 번거로이 여쭌다 하여 중관(中官)을 도배(徒配)하고 사알(司謁)을 태거(汰去)하라고 명하였다.
판부사(判府事) 김흥경·김재로 등이 차자(箚子)를 올려 구대(求對)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대간(臺諫)으로서 패초(牌招)를 어긴 사람을 앞뒤를 돌아본다 하여 모두 삭직(削職)하였다.
정언섭(鄭彦燮)을 병조 참판으로 삼고, 어필(御筆)로 오수채(吳遂采)를 특제(特除)하여 병조 정랑(兵曹正郞)으로 삼았다.
8월 29일 계묘
임금이 사묘(私廟)에 나아가 전배(展拜)하고 이어서 효장묘(孝章廟)에 나아갔다. 승지(承旨)가 일을 아뢰었으나, 모두 답하지 않았다. 승전색(承傳色)을 시켜 정원(政院)에 하교하기를,
"뭇 신하가 강한 것이 지금과 같은 때가 없었으니, 작으면 결곤(決棍)하여 경계하고 크면 군율(軍律)을 쓰도록 분부하라."
하고, 또 하교하기를,
"실직(實職)이건 군함(軍銜)이건 물론하고 수가(隨駕)하지 않는 자는 우선 금부(禁府)에서 추문(推問)하도록 하라."
하였다.
8월 30일 갑진
밤에 번개가 쳤다.
우의정 송인명(宋寅明)이 명소(命召)를 반납하니, 도로 주도록 하였다.
임금이 흥정당(興政堂)에 나아가 시임(時任)·원임(原任) 대신(大臣)과 이판(吏判) 조현명(趙顯命)을 인견하였다. 여러 신하들이 모두 전후의 하교가 두렵고 떨린다 하여 완곡한 말로 인죄(引罪)하고 또 매우 괴로워하는 까닭을 명백히 하교하기를 청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나는 뭇 신하를 볼 낯이 없으나, 자전(慈殿)께서 위안하여 화해시키므로 마지못하여 보는 것이다."
하였다. 여러 신하들이 성의(聖意)를 교시(敎宗)하기를 간청하니, 임금이 비로소 하교하기를,
"한(漢)나라 문제(文帝)가 측실(側室)의 아들이라는 말이 있지만 남월(南越)이 감동하여 제호(帝號)를 버리고 칭신(稱臣)하였다.224) 한당(漢唐)부터 황조(皇朝)까지 오히려 숭봉(崇奉)하는 법이 있는데, 우리 나라는 가법(家法)이 엄정(嚴正)하기가 천고(千古)에 뛰어나므로 사친(私親)이라는 칭호가 있다. 내가 지나치게 높이는 일이 있으면 신하가 반드시 쟁론(爭論)하여 영화(榮華)가 되지 않고 도리어 모욕이 될 것이므로 내가 하려 하지 않는다. 그러나 여러 신하들의 성묘(省墓)에는 오히려 산소에 차릴 제물을 내리는데, 나는 사묘(私墓)에 전배(展拜)할 때에 제수(祭需)를 사사로이 장만하니, 세상에 어찌 나와 같은 자가 있겠는가? 산주(山主) 김성(金姓)인 사람에게 근년에 벼슬을 제수하라는 하교가 있었는데 영성(靈城)225) 이 흥감(興感)한 말을 하니, 이종성(李宗城)이 무식하다고 하였다. 지금 사람들은 ‘사(私)’ 자(字)를 명의(名義)를 범하는 것으로 여기므로, 여러 신하들이 혹 존숭(尊崇) 등의 말로 나에게 아첨하더라도 내가 당(唐)나라 태종(太宗) 봉덕이(封德彝)를 꾸짖은 것처럼 할 것이지마는, 묘소에 전배하는 예(禮)로 말하면 애소(哀素)를 주장 삼는 것인데 순회묘(順懷墓)의 전례를 적용하는가?"
하였다. 판부사 김재로(金在魯)가 말하기를,
"사묘의 의주(儀註)에 참포(黲袍)를 쓰지 않은 것은 우연히 다른 묘소의 전례를 쓴 것이니, 실로 감히 소홀히 한 데에서 나온 것이 아닙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교만한 무리가 사소한 절목(節目)에서도 명자(名字)를 얻으려 한다."
하였다. 판부사 서명균(徐命均)이 말하기를,
"예전부터 임금이 사친에 대하여 지나치게 높이는 일이 있으면 신하 중에는 본디 죽음으로 다투는 자가 있었습니다마는, 이제 전하께서는 애초에 이런 일이 없는데 무슨 다툴 만한 일이 있겠습니까? 더구나 임금을 업신여기는 것은 신하의 지극한 죄인데, 오늘날의 뭇 신하 중에 어찌 이런 일이 있겠기에 성교(聖敎)가 이에 이르렀습니까?"
하고, 조현명이 말하기를,
"업신여기는 신하가 있다면 신들이 소리를 같이하여 토죄(討罪)할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그 명의(名義)를 손상한다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하였다. 조현명이 말하기를,
"두 대간(臺諫)의 본정(本情)이 아닙니다."
하니, 임금이 또 김유(金濰)·김시위(金始煒) 등이 임금을 업신여긴 죄를 반복하여 하교하였는데, 밤이 깊어서야 여러 신하들이 비로소 물러나갔다.
김유를 기장(機張)으로, 김시위를 장기(長鬐)로 귀양보냈다. 임금이 수백 마디 말을 하교하여 김유와 김시위의 죄를 두루 들어 책망하고 귀양보냈다. 승지(承旨)가 전교(傳敎) 가운데에 있는 협지(脅持)·수협(受脅) 등의 어구를 고치기를 청하였는데, 여러 번 아뢰고서야 그대로 따랐다.
전 참판(參判) 이종성(李宗城)의 벼슬을 삭탈하였다. 이종성이 전에 응교(應敎)로서 사묘(私墓)의 산을 바친 사람에게 벼슬을 제수하지 말아야 한다고 논하고 또 박문수(朴文秀)가 흥감(興感)한 말을 배척하였기 때문이었다.
전 판서(判書) 유척기(兪拓基)를 특배(特拜)하여 우의정으로 삼았다. 이때 우상(右相) 송인명(宋寅明)이 명을 기다리고 감히 출사(出仕)하지 못하니, 임금이 우상이 이러하므로 민사(民事)가 민망스럽다고 하교하고 유척기를 특배하여 우의정으로 삼았다. 유척기는 집안에서의 행실이 완전히 갖추어지고 벼슬살이가 청렴하고 근신하여 평소에 명망이 있었는데, 이때에 이르러 배상(拜相)하니, 시론(時論)이 자못 만족히 여겼다.
이기진(李箕鎭)을 대사헌으로, 이광운(李光運)을 집의로, 이창의(李昌誼)를 지평으로, 오명신(吳命新)을 이조 참의로, 한익모(韓翼謨)를 교리(校理)로 삼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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