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영조실록50권, 영조 15년 1739년 9월

싸라리리 2025. 9. 23. 11: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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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1일 을사

밤에 유성(流星)이 위성(危星) 아래에서 나와 동방으로 들어갔는데, 모양은 주먹 같고, 꼬리의 길이는 2척(尺)이며, 빛깔은 흰색이었다. 3경(三更)에 번개가 쳤다.

 

임금이 자정전(資政殿)에 나아가 상참(常參)을 행하였다. 집의(執義) 이광운(李光運)의 벼슬을 삭탈하였다. 이광운이 전계(前啓)를 다시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계(啓)가 끝나고 신계(新啓)가 없었는데, 임금이 김유(金濰) 등의 죄를 청하지 않은 것을 노여워하여 체차(遞差)하라고 명하였다. 이윽고 다시 삭직(削職)하라고 명하고 승지(承旨)를 불러 나오게 하여 말하기를,
"풍원(豐原)226)  이 업신여기고 깔보는 자를 소리하여 토죄(討罪)해야 할 것이라고 말하였으나 여러 신하들은 오히려 말이 없다. 내가 겸손하고 연약할지라도 태아(太阿)227)  가 내 손에 있으니 마땅히 처분하겠다."
하였다.

 

김흡(金潝)의 아들 김주악(金柱岳)에게 겸사복(兼司僕)을 제수하라고 명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겸사복이 비천하다는 말은 임금에게 고할 말이 아니다. 황일하(黃一夏)의 조카도 오히려 겸사복이 되었는데, 더구나 김유의 조카이겠는가?"
하고, 드디어 이 명을 내렸다. 그러나 겸사복에 관한 말은 김시위(金始煒)의 상소에 나온 말이고 김유의 말이 아니었다.

 

특별히 민형수(閔亨洙)를 석방하라고 명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지난번 성후(聖后)의 기일(忌日)을 당하여 마음이 매우 슬펐다. 이때에 부부인(府夫人)을 위로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고, 특별히 민형수를 석방하라고 명하였다.

 

김유·김시위를 천극(栫棘)228)  하고 좌의정 송인명(宋寅明)을 면직하고, 판부사(判府事) 서명균(徐命均)을 파직하고, 전 참의(參議) 홍용조(洪龍祚)를 삭직하였다. 임금이 김유 등이 업신여기고 깔본다 하여 엄한 분부를 내려 그곳에 천극하고, 송인명은 강박(强迫)할 수 없다 하여 체직(遞職)하고, 서명균은 간밤에 입시(入侍)하였을 때 주대(奏對)를 잘못하였고, 홍용조는 그 형 홍봉조(洪祚鳳)가 전에 사묘(私廟)에 세알(歲謁)막은 것이 그 아우 때문이었다 하여 모두 죄주었다.

 

특지(特旨)로 김재로(金在魯)를 제배(除拜)하여 좌의정으로 삼았다. 당초에 김재로는 이광좌(李光佐) 때문에 정승에서 해면되었는데 임금이 임용하고자 하여 마지않다가 이때에 이르러 또 정승에 제배하였다. 이광좌가 민형수(閔亨洙) 형제가 전후에 상소하여 논한 것 때문에 위태로와하여 스스로 안정하지 못하였는데, 민형수가 특별히 석방되고 김재로가 정승에 복직하게 되니, 더욱 두려워하였다.
사신은 말한다. "임금이 처하는 바는 그 높기가 짝이 없고 그 엄하기가 짝이 없으니, 도리를 어겨 어지럽히고 사납게 거역할 마음을 가진 자가 아니면 대저 누가 감히 임금을 업신여기랴마는, 이제 임금이 신하들을 죄주어 배척하고 재상(宰相)을 바꾸는 까닭은 과연 무슨 명목인가? 참곤(黲袞)의 조금 다른 복색(服色)과 묘호(墓戶)의 종격(終格)이 조금 비슷하다 하여 의심하고 노여워하는 마음을 먼저 일으켜 위견(威譴)을 떨쳐 두렵게 하였고, 서명균이 견벌(譴罰)받은 까닭으로 말하면 임금도 명백히 말하여 죄를 정하지 못하고 그가 이른바 ‘지나치게 높인다.[過隆]’는 두 자의 말은 사전에 경계하여 고하는 뜻에 지나지 않는데, 연대(筵對)에서 겨우 물러가자 배척하여 파직하라는 명이 곧 내렸으니, 이루 한탄할 수 있겠는가?"


【태백산사고본】 36책 50권 6장 B면【국편영인본】 42책 640면
【분류】인사-임면(任免) / 역사-사학(史學) / 사법(司法)
사신은 말한다. "임금이 처하는 바는 그 높기가 짝이 없고 그 엄하기가 짝이 없으니, 도리를 어겨 어지럽히고 사납게 거역할 마음을 가진 자가 아니면 대저 누가 감히 임금을 업신여기랴마는, 이제 임금이 신하들을 죄주어 배척하고 재상(宰相)을 바꾸는 까닭은 과연 무슨 명목인가? 참곤(黲袞)의 조금 다른 복색(服色)과 묘호(墓戶)의 종격(終格)이 조금 비슷하다 하여 의심하고 노여워하는 마음을 먼저 일으켜 위견(威譴)을 떨쳐 두렵게 하였고, 서명균이 견벌(譴罰)받은 까닭으로 말하면 임금도 명백히 말하여 죄를 정하지 못하고 그가 이른바 ‘지나치게 높인다.[過隆]’는 두 자의 말은 사전에 경계하여 고하는 뜻에 지나지 않는데, 연대(筵對)에서 겨우 물러가자 배척하여 파직하라는 명이 곧 내렸으니, 이루 한탄할 수 있겠는가?"

 

9월 2일 병오

밤에 유성(流星)이 묘성(昴星) 아래에서 나와 서방으로 들어갔는데, 모양이 주먹 같고, 꼬리의 길이가 3, 4척이며, 빛깔은 붉은 색이었다.

 

이조 판서 조현명(趙顯命)·참판(參判) 정석오(鄭錫五)를 체직하고, 특지(特旨)로 조상경(趙尙絅)을 이조 판서로, 이익정(李益炡)을 이조 참판으로 삼고, 홍경보(洪景輔)를 특제(特除)하여 도승지로 삼고, 이중경(李重庚)·이정보(李鼎輔)·남태온(南泰溫)·조윤성(曹允成)을 승지로 삼았다.

 

9월 3일 정미

밤에 천둥하고 번개가 치며 우박이 내렸다.

 

9월 4일 무신

판부사(判府事) 이의현(李宜顯) 등이 죄가 같다 하여 차자(箚子)를 올려 인구(引咎)하니, 예사 비답을 내렸다.

 

9월 5일 기유

임금이 하교하기를,
"대신(大臣)을 침모(侵侮)한 자도 오히려 다 투비(投畀)하였는데, 더구나 임금을 업신여긴 자를 삭직(削職)만 하는 것이 마땅한 형률이겠는가? 신하들이 겉으로는 두려워 움츠리는 듯하나 속으로는 실로 불평한다."
하였다.

 

9월 6일 경술

임금이 숭정문(崇政問)에 나아가 조참(朝參)을 행하였다. 오부(五部)의 부로(父老)를 소견(召見)하여 민폐(民幣)에 대해 물었는데, 경기병(京騎兵)의 폐단을 말한 자가 있었다. 임금이 경조관(京兆官)에게 물었는데, 좌윤(左尹) 이보혁(李普赫)이 아뢰기를,
"경기병의 명목은 국초(國初)로부터 비롯하였고 호액(戶額)은 1천이고 보인(保人)은 3천입니다. 호(戶)는 서울에 있으나 보(保)는 시골에 있으므로, 호와 보를 물론하고 모두 베 두 필을 거두어 서울 각처 역군(役軍)의 고가(雇價)에 대비하였는데, 각 군문(軍門)을 설치한 이래로 양정(良丁)을 채울 수 없으므로 침독(侵督)하여 충정(充定)할 즈음에 도민(都民)이 소요하는 폐단이 있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왕자(王者)는 백성을 위해야 하는데 어찌 그 폐단을 듣고서 돌보지 않을 수 있겠는가? 경기병의 명목은 이제부터 혁파하고, 빨리 비국(備局)으로 하여금 변통하게 하라."
하였다.

 

조현명(趙顯命)을 형조 판서로, 박사수(朴師洙)를 우참찬으로, 민용수(閔應洙)를 판윤으로, 황정(黃晸)을 승지로 삼았다.

 

좌의정 김재로(金在魯)가 상소하여 사직하니, 비답하기를,
"경(卿)의 나라를 위하는 마음을 본디 알거니와, 호서(湖西)의 부도(不道)한 사람을 어찌 잠시라도 살려두랴마는 오히려 대신(大臣)이 없어서 이처럼 날을 넘기는데, 경은 이를 걱정하지 않는가?"
하였다.

 

영의정 이광좌(李光佐)가 사직하는 소(疏)를 올리니, 비답하기를,
"이때에 경에게 바라는 것이 가뭄에 비구름을 기다리는 것과 같다."
하였다.

 

9월 7일 신해

호서(湖西)의 일을 하문(下問)하는 일 때문에 시임(時任)·원임(原任) 대신(大臣)을 명초(命招)하였으나, 모두 사진(仕進)하지 않았다. 전후의 엄한 하교 때문이었다.

 

임금이 비국 당상을 소견하고, 전교(傳敎)를 써서 난전(亂廛)을 금하고, 야금(夜禁)을 엄하게 하고, 좌경(坐更)을 신칙(申飭)하고, 포청(捕廳)에서 기포(譏捕)할 때에 외읍(外邑)에 나가서 백성을 어지럽히지 말게 하고, 금부 도사(禁府都事)를 보내어 호서(湖西)에서 안핵(按覈)한 죄인을 잡아오게 하라고 명하였다. 임금이 이미 남태량(南泰良)을 보내어 호서의 죄인을 안핵하게 하였는데, 별단(別單)으로 서계(書啓)하였다. 승지(承旨)에게 명하여 읽게 하였더니, 그 가운데에 노(盧)·김(金) 두 놈의 가사(歌詞) 중에 일양 청청(一楊靑靑) 등의 말이 있었는데, 양시박(楊始搏)을 비웃는 듯하지만 모두 나라를 원망하는 부도(不道)한 말이었다. 임금이 여러 신하들에게 물었는데, 다들 국문(鞫問)해야 한다 하니, 그대로 따랐다. 이때 대신들이 모두 사진하지 않았으므로, 임금이 하교하기를,
"돈면(敦勉)하여도 나오지 않으니, 도둑을 토죄(討罪)하는 뜻이 어디에 있는가?"
하였다.

 

좌의정 김재로(金在魯)가 대명(待命)하고 영부사(領府事) 김흥경(金興慶)·이의현(李誼顯) 등이 차자(箚子)를 올려 견벌(譴罰)받기를 청하니, 예사 비답을 내렸다.

 

9월 9일 계축

관서 어사(關西御史) 이성효(李性孝)가 복명(復命)하니, 임금이 인견하였다. 전 위원 군수(渭原郡守) 노세정(盧世禎)은 가장 잘 다스렸으므로 가자(加資)하고, 평안 병사(平安兵使) 장태소(張泰紹)는 업기(業嗜)를 능히 처단하였으므로 말[馬]을 내리고, 삭주 부사(朔州府使) 이만유(李萬囿)는 자신이 철권(鐵券)229)  을 지니고서도 보답하려고 생각하지 않고 감히 왕인(王人)을 욕보였다 하여 해부(該府)를 시켜 엄히 사핵(査覈)하여 처치하라고 명하였다. 이때 임금이 수령(守令)의 선치(善治) 여부를 물었는데, 이성효가 아뢰기를,
"신이 삭주의 창고를 봉(封)하려 하였습니다. 이만유가 만상(灣上)230)  의 상인과 약속하여 비단을 사고 쌀 수백 석을 주었다는 말을 들었는데, 신이 몰래 장시(場市)에 들어가 상인이 왕래하는 기녀(妓女)의 집에 가서 문적(文蹟)을 찾으려 할 때에 이만유가 포교(捕校)를 보내어 서리(書吏)를 잡았습니다. 신이 봉고(封庫)를 선언하였으나, 이만유가 나(螺)를 불러 군사를 모아서 또 신의 행장을 수색하여 갔으므로, 신이 말을 타고 본부의 동헌(東軒)에 들어갔더니, 이만유가 등불을 벌이고 중석(重席)에 앉아 검(劍)을 뽑아 큰 소리로 꾸짖기를, ‘변상(邊上)에 밤을 타서 들어온 자는 가짜 어사일 것이니, 내가 단칼에 죽이겠다.’ 하였습니다. 신이 이미 명을 받들었으므로 마음에 믿는 것이 있어서 느린 걸음으로 당(堂)에 올라 서리를 시켜 마패(馬牌)를 풀어 보이게 하였으나, 이만유가 또 믿을 수 없다 하였습니다. 신이 인하여 마패를 이만유 앞에 던지며 말하기를, ‘네가 이것을 보고 마음대로 하라.’ 하였더니, 이만유가 비로소 조금 기가 꺾여 피해 갔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이는 참으로 변괴(變怪)의 일이다. 속담에 ‘음산(陰山)에서 밤마다 장군이 사냥하니 변성(邊城)으로 가면서 범의 행동을 하지 마라.’ 하였다. 이만유가 비슷한 짓을 한 것도 이상하지 않으나, 그 거조(擧措)는 알면서 짐짓한 것인 듯하다."
하고, 이어서 핵사(覈査)하여 처치하라고 명하였다. 승지(承旨) 이중경(李重庚)이 말하기를,
"근래 연중(筵中)에서 있었던 이야기를 일체 금하므로, 영상(領相)이 일국(一國)의 수상(首相)으로서 강상(江上)에 가까이 있어도 연중에서 어떤 이야기가 있었는지 모른다고 합니다. 신의 생각으로는 청주서(廳注書)를 입시(入侍)시켜 파한 뒤에 한 본(本)을 만들어 내어 조신(朝臣)이 볼 수 있게 해야 좋을 듯합니다."
하고, 주서(注書) 남학종(南鶴宗)이 말하기를,
"연중의 이야기를 베껴 내어 바깥에 전파하는 것을 탑전(榻前)에서 결정하기까지 하면 뒷 폐단에 관계되는 것이 있을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주서의 말이 옳다."
하였다.

 

9월 10일 갑인

설서(說書) 조중회(趙重晦)가 상소하여 동궁(東宮)을 교양(敎養)하는 방도를 말하고, 임금이 사물을 접할 때에 깊이 살피고 사령(亂令)을 내리거나 시조(施措)가 있을 때에 더욱 신중을 더하여 보고 느껴서 흥기(興起)할 수 있게 하기를 청하니, 예사 비답을 내렸다.

 

좌의정 김재로(金在魯)가 사은(謝恩)하고 청대(請對)하니, 임금이 인견하였다. 김재로가 말하기를,
"호서(湖西)의 죄인을 친림(親臨)하여 국문(鞫問)하면 국체(國體)를 손상할 것이니, 청컨대 본부(本府)에서 거행하게 하소서."
하였으나, 임금이 따르지 않고 내일 아침에 국청(鞫廳)을 설치하라고 명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양시박(楊始搏)은 대개 고약한 사람이다. 양취도(楊就道)가 대역(大逆)이기는 하나, 사사로운 원한 때문에 와서 고하였으므로, 그 자급(資級)을 높혀 줄 때에도 ‘불의후(不義侯)’231)  라고 하교하였다."

 

9월 11일 을묘

조현명(趙顯命)을 판의금으로, 한덕량(韓德良)을 지평으로, 유언협(兪彦協)을 정언으로, 오수채(吳遂采)를 집의로 삼았다.

 

임금이 금상문(金商門)에 나아가 호서(湖西)의 죄인 노광석(盧光錫)·장익호(張翼虎)·황호(黃鎬)·이우송(李友松)·신광직(辛光稷)·김정위(金鼎位)·신석태(辛錫泰) 등을 친국(親鞫)하였는데, 노광석은 복주(伏誅)되었다. 임금이 노광석에게 묻기를,
"역적을 감싸는 것도 역적이다. 양취도(楊就道) 등의 극악(極惡)은 무신년232)  에도 없었던 일인데 왕법(王法)이 이미 밝혀진 뒤에 네가 하찮은 시골의 개미나 이같은 무리로서 역적을 감쌀 뿐더러 여러 가사(歌辭)에 올려서 초부(樵夫)·목동(牧童)이 다 외우니, 네 마음은 양취도가 고한 것보다 더하다. 양시박(楊始搏)은 붕당(朋黨)에 무슨 관계가 있겠는가? 그런데도 편론(偏論)의 시비를 가리지 않는다 한 것은 대체 무슨 뜻인가? 국법을 어지럽힌다 한 것은 또한 무슨 뜻인가? 하시(下施)라 한 것은 무슨 마음인가? 당론(黨論)이 아울러 일어나서 다툼을 서로 준비한다 한 것은, 아! 또한 음참(陰慘)하다. 그 밖에 서로 섞여 혼탁하다고 임금을 헐뜯은 것이 또한 그 단안(斷案)인데 마지막에 비법(非法)으로 억울하게 죽었다고 말한 것은 더욱이 매우 놀랍다. 처음에는 본도(本道)에 명하여 빨리 방형(邦刑)을 바루게 하려 하였으나 여기에 잡아온 것은 그 극악한 마음을 알고자 한 것일 뿐이다."
하였는데, 노광석이 공초(供招)하기를,
"실은 노래를 지은 일이 없는데, 본도에 있을 때에 매를 견디지 못하여 거짓으로 공초하였습니다."
하였다. 김정위·황호·장익호·장익린(張翼麟)·장익붕(張翼鵬)·신석태·신광직 등에게 물었더니, 모두 가사는 노광석이 지은 것이라고 공초하였다. 신석태·신광직과 노광석을 면질(面質)하였더니 노광석의 말이 막혔으므로, 곧 노광석을 처형하라고 명하였다. 노광석은 악역(惡逆)을 돌보고 감싸느라 가요(歌謠)를 지었다고 지만(遲晩)233)  하였으므로 법대로 참형(斬刑)에 처하고 가산(家産)을 적몰(籍沒)하고, 신석태는 특별히 석방하고, 나머지는 모두 본부(本府)에서 다시 추국(推鞫)하게 하였다. 대사간(大司諫) 이춘제(李春躋)가 헌납(獻納)이 권현(權賢)과 내외종(內外從)이 된다 하여 인피(引避)하였다. 장령(掌令) 송수겸(宋守謙)이 전계를 다시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9월 12일 병진

주강(晝講)을 행하였다.

 

윤순(尹淳)을 판윤으료, 유복명(柳復明)을 대사간으로, 이윤신(李潤身)을 집의로, 권현(權賢)을 장령으로, 여광헌(呂光憲)을 헌납으로, 성범석(成範錫)을 정언으로, 원경하(元景夏)를 강화 시재 어사(江華試才御史)로, 한익모(韓翼謨)를 광주 시재 어사(廣州試才御史)로 삼았다.

 

9월 13일 정사

밤에 크게 천둥하고 번개가 쳤다.

 

9월 14일 무오

정원(政院)에서 천둥의 이변 때문에 경계를 아뢰니, 예사 비답을 내렸다.

 

좌의정 김재로(金在魯)가 차자(箚子)를 올려 경계를 아뢰고 면직을 청하니, 우악한 비답을 내렸다.

 

임금이 주강(晝講)을 행하였다. 천둥의 이변으로 수백 마디 말을 하교하여 뭇 신하를 책려(責勵)하고 열흘 동안 감선(減膳)하게 하였다. 지경연(知經筵) 조현명(趙顯命)에게 명하여 앞으로 나오게 하여 하교하기를,
"이종성(李宗城)의 삭직(削職)을 바깥 사람들은 반드시 위징(魏徵)의 비(碑)를 쓰러뜨린 일234)  에 견줄 것이다. 여러 신하들이 김유(金濰) 등의 일에 대하여 신구(伸救)하는 마음이 송익휘(宋翼輝)보다 더하여 뒷걸음질하고 바라보기만 하고 있다. 어찌 위를 범하지 않았는데, 이런 경계를 보이겠는가?"
하니, 조현명이 말하기를,
"이번 천둥의 이변은 생후로 처음 봅니다. 천지가 진탕하여 놀랍고 두려움을 견딜 수 없으니, 생각하건대, 병침(丙枕)이 불안하셨을 것입니다. 잠시 듣건대, 전교(傳敎)하여 위로 책비(責備)하고 아래로 칙려(飭勵)하신 것이 돼지와 물고기까지도 감동시키고 귀신을 울릴 만하다 하니, 기쁨을 금하지 못하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김유·김시위(金始煒)가 임금을 업신여긴 것을 여러 신하들은 반드시 옳게 여길 것이다."
하였다. 시독관(侍讀官) 조명리(趙明履)가 말하기를,
"거경(居敬)하여 함양(涵養)하는 것이 재변(災變)을 당하여 수성(修省)하는 도리입니다."
하니, 임금이 옳게 여겼다.

 

9월 15일 기미

임금이 대신과 비국 당상 및 금부 당상(禁府堂上)을 인견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고금 천하에 부모가 없는 자가 없는데, 저 두 신하는 하늘에서 내려왔는가, 땅에서 나왔는가? 적서(嫡庶)에 관한 말을 들으니 내 마음이 아프다. 이것은 이현일(李玄逸)이 적서를 밝힌 뜻이다. 명류(名流)도 부모가 있는데, 감히 융쇄(隆殺)에 관한 말을 할 수 있겠는가? 내가 이 때문에 마음이 아파서 가슴속에 1백 근의 물건이 짓누르는 것이 있는 듯하니, 근래 쇠약해진 것이 실로 이 때문이다. 나를 모욕한 자는 예판(禮判)이고 나를 비난한 자는 우상(右相)이다. 이광운(李光運)이 전일에는 이현필(李顯弼)의 일 때문에 우상에 대해 논하였는데 지금은 한 마디도 말하지 않으니, 이른바 서인(西人)·남인(南人)·노론(老論)·소론(小論)이 다 같은 마음이다."
하였는데, 예판과 우상은 곧 윤순(尹淳)과 송인명(宋寅明)을 가리킨 것이다. 좌의정 김재로(金在魯) 등이 말하기를,
"뭇 신하는 실로 다른 뜻이 없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이종성을 대율(大律)로 처치하지는 않았으나, 그 말은 매우 그르다."
하였다. 조현명이 말하기를,
"이종성이 무식하다고 말한 것은 대개 박문수(朴文秀)가 ‘재상묘(宰相墓)의 주인(主人)도 다 벼슬하는데, 사묘(私墓)의 주인이 어찌 벼슬해야 하지 않겠는가?’ 하였으므로 그 말을 무식하다고 한 것입니다."
하니, 임금의 뜻이 비로소 조금 풀려 말하기를,
"그 말에 까닭이 있는 것을 비로소 알았다. 말을 듣는 것이 어찌 어렵지 않겠는가?"
하였다. 임금이 또 김유(金濰) 등의 일을 말하니, 김재로가 말하기를,
"그 소(疏) 가운데에 있는 융쇄(隆殺)에 관한 말은 실로 적서(嫡庶)를 가리켜 말한 것이 아닙니다. 능(陵)과 묘(墓)에는 융쇄가 있어야 한다고 한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겸사복(兼司僕)이 비천하다는 말은 실로 업신여기는 마음이다."
하니, 김재로가 또 말하기를,
"겸사복과 대신(大臣)은 그 벼슬을 논하면 이것이 높고 저것이 낮다고 한 것이니, 본디 사묘에 관계되지는 않습니다. 예전부터 제왕(帝王)은 번저(藩邸)에서 들어와 통서(統緖)를 잇는 일이 흔히 있는데, 신하가 어찌 이 때문에 깔보는 뜻이 있겠습니까? 이것은 참으로 매우 억울합니다."
하였다. 임금이 또 말하기를,
"여러 신하들이 내가 송인명을 미워하여 그 조카를 욕보였다 하여 격분한 기운이 현저하게 있다면 옳겠는가?"
하니, 김재로가 또 그렇지 않음을 힘써 말하였으나, 임금이 끝내 돌이켜 깨닫지 못하였다. 임금이 국청(鞫廳)의 수인(囚人)과 호옥(湖獄)의 수인들의 일을 물었는데, 신하들이 모두 법을 바루어야 한다고 말하니, 임금이 하교하기를,
"양시진(楊始振)·양시구(楊始搆)는 장폐(杖斃)되어도 아까울 것이 없으니 엄히 형신(刑訊)하여 승복을 받고, 장활(張活) 등 19인은 양시진이 승복하거든 호서 어사(湖西御史)를 시켜 상세히 살펴서 계문(啓聞)하게 하라."
하였다.

 

김상신(金相紳)을 집의로, 한봉조(韓鳳朝)를 장령으로, 이하종(李夏宗)을 지평으로, 이흡(李潝)을 이조 참의로 삼았다.

 

9월 16일 경신

밤에 유성(流星)이 직녀성(職女星) 아래에서 나와 동방으로 들어갔는데, 모양이 주먹 같고, 꼬리의 길이가 3, 4척이며, 빛깔은 붉은 색이었다.

 

교리(校理) 한익모(韓翼謨)·부교리(副校理) 조명리(趙明履) 등이 천둥의 이변 때문에 차자를 올려 경계를 아뢰고 마지막에 세 잠(箴)을 바치니, 첫째는 존심(存心)이고, 둘째는 명리(明理)이고, 용현(用賢)이었는데, 비답하기를,
"유의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였다.

 

약원(藥院)에서 입진(入診)할 때에 좌의정 김재로(金在魯)·우포장(右捕將) 구성임(具聖任)이 청대(請對)하여 함께 들어갔는데, 친국(親鞫)을 설행(設行)하고 원임 대신(原任大臣)·금부 당상(禁府堂上)·양사(兩司)를 모두 패초(牌招)하라고 명하였다. 이때 두 남자가 경은 부원군(慶恩府院君)235)  의 집에 이르러 스스로 남원(南原)에 산다고 청하며 척의(戚誼)가 있다고 하며 전하게 하였으나 문을 지키는 자가 밖에서 물리쳤는데, 얼마 안되어 또 서장(書狀)을 가지고 갔다. 종들이 여기는 서장(書狀)을 바치는 곳이 아니라 하고 또 쫓았으나, 그 집에서 심상하지 않은 것으로 의심하여 곧 포청(捕廳)에 말을 전하였다. 포청에서 뒤밟아 그 중의 한 사람을 잡아 그 성명을 물으니 곧 양찬규(梁纘揆)이었다. 그 주머니를 찾아보니 종이 두 개가 있었는데, 하나는 부원군 집에 바치는 글이고 하나는 ‘감고원몽(感故園夢)’이란 부(賦)로 거의 2백 구(句)나 되는 것이었다. 그 정문(呈文)은 요악(妖惡)하고 기괴(奇怪)한 말이 많았고 부 가운데에도 은어가 많았는데 흉패(凶悖)하고 음사(陰邪)한 뜻이 이따금 있으므로, 구성임이 보고 크게 놀라 김재로에게 말하고 함께 청대하였다. 김재로가 임금에게 아뢰기를,
"이는 미친 놈에 지나지 않습니다. 옛사람이 당하였으면 반드시 위에 아뢰지 않았겠으나, 말세(末世)에는 어려울 것입니다. 포장(捕將)이 이미 청대하였으므로 신도 함께 들어왔습니다."
하고, 이어서 글과 부를 올리니, 임금이 보고 말하기를,
"한(漢)나라 때에도 남자가 태자(太子)라 칭하는 자가 있었는데, 이는 더욱이 괴이하다. 송아지가 끄는 수레를 탄 자는 미친 것이 아니므로 주자(朱子)가 《강목(綱目)》에 썼거니와, 이번에 나타난 자는 매우 괴이하다."
하였다. 대개 양찬규가 바친 글 가운데 스스로 왕자(王子)라고 칭한다는 말이 있어서 그 일이 한나라 때의 송아지가 끄는 수레를 탄 남자와 비슷하므로 임금의 하교가 이러하였으나 김재로 등은 모두 미친 것이라 하였다. 임금도 미쳤을 것으로 의심하였으나 그 부에 흉악한 말이 많았기 때문에 일종의 흉도가 부추겼을 것을 염려하여 드디어 국청을 설치하여 친문(親問)하도록 명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포장은 그가 사는 곳을 물었는가?"
하니, 구성임이 말하기를,
"남원에 사는데 양정호(梁廷虎)와는 먼 친족이 되고 그 이름자도 양성규(梁聖揆)의 항렬을 쓰며, 또한 양정호의 집에서 양식을 얻었다고 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양정호가 친족으로 잘못 알고 양식을 준 것은 이상하지 않다."
하였다. 이날 저물어 갈 때에 임금이 금상문(金商門)에 나아가 양찬규를 국문(鞫問)하였다. 양찬규가 공초(供招)하기를,
"을사년236)  에 중이 되었다가 갑인년237)  에 환속(還俗)하여 본군(本郡) 사람 노세침(盧世琛)에게서 수학(受學)하였는데, 올해 6월에 노세침이 ‘감고원몽’으로 출제(出題)하여 부를 짓게 하고 서울에 올라가 그 집에 의탁하라고 권하였습니다."
하였는데, 그 집이란 경은 부원군의 집을 가리켜 말한 것이다. 이에 임금이 신하들에게 물었는데, 김재로가 말하기를,
"도깨비에게 홀린 사람 같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참으로 미쳤더라도 어찌 죽음을 면할 수 있겠는가? 곧바로 처형해야 한다."
하였는데, 여러 신하들이 말하기를,
"이를 먼저 죽이면 옥정(獄情)을 끝까지 밝힐 수 없을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르고, 내일 다시 국문하라고 명하였다. 대사간 유복명(柳復明)이 전계를 다시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임금이 대계(臺啓) 가운데에 있는 김성탁(金聖鐸) 등 3인이 누구인지 물으니 유복명이 말하기를,
"세정(世貞)·박윤창(朴允昌)입니다."
하였다. 대개 말단만을 들었으므로 유복명이 잘못 알았는데, 실은 강세윤(姜世胤)·이헌장(李獻章)이었다. 유복명이 인피(引避)하여 체직(遞職)을 청하니, 체차(遞差)하라고 명하였다. 서원(書院)을 세우는 일을 다시 아뢰었기 때문이었다. 장령(掌令) 한봉조(韓鳳朝)가 전계를 다시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9월 17일 신유

정석오(鄭錫五)을 대사간으로, 구택규(具宅奎)를 승지로, 안경윤(安慶運)을 장령으로 삼았다.

 

임금이 금상문(金商門)에 나아가 양찬규(梁纘揆)를 국문(鞫問)하였다. 형신(刑訊)을 가하였으나 공초(供招)는 전과 같았고 또 노세침(盧世琛) 및 자신의 형 양안귀(梁眠龜)와 팔촌(八寸)인 양의규(梁義揆)·양대규(梁大揆)를 끌어대었는데, 그 공초에 어지러운 것이 많아서 거의 헛소리나 잠꼬대와 같았다. 임금이 결안(決案)을 봉입(捧入)하지 말고 곧바로 대역 부도(大逆不道)로 곧 처형하라고 명하고, 그 부(賦)와 정문(呈文)은 곧 불사르라고 명하였다. 김재로(金在魯)가 말하기를,
"바야흐로 잡으러 보낸 자가 있으니, 잠시 여기에 머물러 있게 하여 기다리는 것이 옳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어찌 한때라도 머물게 할 수 있겠는가?"
하고, 재촉하여 불사르게 하였다. 이 때문에 그 문서가 일기(日記)와 추안(推案)에 실리지 않았다. 임금이 이어서 장익호(鄭翼虎) 등 여러 수인(囚人)들을 국문하였으나, 실정을 알아내지 못하였다. 사간(司諫) 안상휘(安相徽)가 전계를 다시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고, 서원(書院)을 세우는 일을 연계(連啓)하였다 하여 파직(罷職)하라고 명하였다. 지평(持平) 이성중(李成中)이 전례를 다시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남원부(南原府)를 혁파하고 시임(時任) 부사(府使) 권감(權瑊)을 파직하라고 명하였는데, 양찬규 때문이었다. 임금이 여러 신하들에게 유시하기를,
"인요(人妖)·물괴(物怪)가 어느 세대인들 없으랴마는, 지금과 같은 요적(妖賊)을 일찍이 또한 들었겠는가? 이것은 모두 편당(偏黨)이 가져온 것인데, 신하들은 어찌하여 이를 헤아려 마음 아파하지 않고 오히려 당(黨)을 일삼는가? 경(卿) 등이 이러한 욕을 당하였으면 마음이 어떠하겠는가? 내가 남인(南人)·서인(西人)·노론(老論)·소론(少論)에 대하여 무슨 편벽한 마음이 있겠는가? 기사년238)  의 일로 말하면 인현 성모(仁顯聖母)에게 무슨 원망과 미움이 있었겠는가? 다만 그 뜻을 얻고 그 유감을 풀고자 하였을 뿐이다. 무신년239)  의 역적으로 말하더라도 어찌 홀로 역적이 되겠는가? 그 근원은 모두 여러 신하들이 공정하지 않은 탓에서 말미암은 것이다."
하니, 김재로가 말하기를,
"편론(偏論)은 신들이 처음 만든 것이 아니며 그 유래가 오래이므로 이제 와서 어찌할 수 없습니다. 역종(逆種)은 특별히 흉악한 마음을 가진 자이니, 어찌 오로지 편당을 허물할 수 있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이 도둑이 삼남(三南)은 다 도둑의 소굴이라 하였으니, 반드시 나라를 원망하는 무리가 많을 것이다. 호서(湖西)·영남(嶺南)을 고루 다 쓴다면 저들이 어찌 원망하겠는가? 이것은 모두 경들이 한 짓이다. 노론이 많다 하여 소론이 늘 미워하고 영남은 본디 소론이 돕는 바이므로 노론이 또한 미워하거니와, 삼남이 이러하니 국가에서 장차 어디를 믿겠는가?"
하였다.

 

우의정 유척기(兪拓基)가 전 판윤(判尹)으로서 상소하여 사직하고 판부사(判府事) 송인명(宋寅明)도 상소하여 면직을 바랐는데, 상소 가운데에 양찬규(梁纘揆)의 일을 언급하지 않은 것을 임금이 승지(承旨)에게 물으니, 국문에 관한 일이 매우 엄비(嚴秘)하였으므로 그들이 듣지 못한 것이 마땅하다고 대답하니, 임금이 이웃 나라에 역적이 있어도 목욕하고 토죄(討罪)하는 의리240)  를 반복하여 칙유(飭諭)하였다. 이때 영의정 이광좌(李光佐)가 친국(親鞫)하는 거조가 있다는 말을 듣고 병든 몸을 이끌고 강북(江北)에 와서 상소하니, 임금이 우악한 비답을 내리고 어의(御醫)을 보내어 병을 보살피게 하였다.

 

9월 18일 임술

밤에 유성(流星)이 규성(奎星) 아래에서 나왔는데, 모양이 주먹 같고, 꼬리의 길이가 3, 4척이며, 빛깔은 흰 색이었다.

 

사간 안상휘(安相徽)를 해남(海南)에 귀양보냈다. 안상휘가 선정(先正) 김상헌(金相憲)의 서원(書院)을 다시 세우는 일로 전계를 잇달아 아뢰니, 임금이 말하기를,
"이러한 때에도 오히려 사론(士論)이라 칭하는가?"
하고, 특별히 명하여 해남현(海南縣)의 극변(極邊)에 정배(定配)하였다.

 

9월 19일 계해

외방(外方)에 있던 여러 대신(大臣)들이 다 역변(逆變)이 놀랍고 통분스러우며 달려가 묻는 의리가 중하기 때문에 다들 도문(都門) 밖에 나아갔으나, 이광좌(李光佐)만이 감히 들어오지 못하니, 임금이 모두 함께 오라고 명하였다.

 

정희보(鄭熙普)를 사간으로, 허석(許錫)을 장령으로, 구성임(具聖任)을 동의금(同義禁)으로 서종급(徐宗伋)을 예문 제학(藝文提學)으로, 김진상(金鎭商)을 부제학으로 삼았다.

 

임금이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고 호서(湖西)의 죄수 4인을 참(斬)하여 고을 경내(境內)에 전하여 보이게 하라고 명하였다. 임금이 호서 죄수의 일을 물었는데, 여러 신하들이 모두 효시(梟示)해야 한다고 말하니, 명하고 전교(傳敎)를 쓰게 하기를,
"인심이 타락하여 역순(逆順)에 어둡다. 양시박(梁始搏)을 살해한 일로 미루어 말하면, 양시박은 양민후(楊敏垕)의 아들로서 반역을 익히 알고 혐의 때문에 고발하였으나, 그 고한 것이 어떠한 흉역(凶逆)인가? 그 포상(褒賞)한 것은 곧 그 일을 중히 여겼기 때문이니, 윤리를 지키는 마음이 있다면 어찌 감히 살해하겠는가? 양가(楊家)의 친족들이 양취도(楊就道)가 정법(正法)된 뒤에 능히 징계되어 마음을 공쳤으면 양시박도 무엇 때문에 공갈하였겠는가? 양취도가 처형된 뒤에 감히 고한 사람을 살해하였으니, 강상(綱常)·인리(人理)가 없어졌거니와 어찌 보통 살인으로 처치할 수 있겠는가? 그 가운데에서 수담(壽聃)·수함(壽咸)·시희(始禧)·독겁(纛劫) 4인은 도신(道臣)과 안핵사(按覈使)가 관문(官門) 밖에서 위의(威儀)을 벌여 부대시 효시(不待時梟示)241)  하고 본읍(本邑)에 전하여 보이게 하라."
하였다.

 

하교하기를,
"이번 흉적(凶賊) 때문에 통분스러운 마음이 속에 찼으니, 어찌 차마 시사(視事)하겠는가? 이 옥사(獄事)가 끝나기 전에는 특별히 시사를 멈추도록 하라."
하였다.

 

임금이 흥정당(興政堂)에 나아가 대신(大臣) 이하 국문(鞫門)에 참여한 여러 신하들을 인견하고, 금부(禁府)에 갇혀 있는 호서(湖西)의 죄인을 참작하여 처치하는 일을 의논하였다. 이어서 판부사(判府事) 송인명(宋寅明)을 명소(命召)하여 양찬규(梁纘揆)의 일을 말하니, 송인명이 말하기를,
"천하의 역적은 상리(常理)로 헤아리기 어려우나, 어찌 이런 천만리 밖에 벗어난 자가 있겠는가? 이는 반드시 실성하여 미친 사람일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이는 미친 자가 아니다. 반드시 흉도(凶徒)가 시킨 자일 것이다."
하였다. 송인명이 정세(情勢) 때문에 인구(引咎)하니, 임금이 위유(慰諭)하였다.

 

9월 20일 갑자

밤에 달이 동정성(東井星)에 들어갔다.

 

죄인 장익호(張翼虎)는 물고(物故)되고, 신광직(辛光稷)·황호(黃鎬)·김정위(金鼎位)·장익린(張翼麟)·장익붕(張翼鵬)·이우송(李友松)은 모두 극변(極邊)에 정배(定配)하였다.

 

9월 21일 을축

예조(禮曹)에 명하여 창덕궁(昌德宮)에 환어(還御)할 길일(吉日)을 가리게 하였다.

 

우참찬(右參贊) 박사수(朴師洙)가 졸(卒)하였다. 박사수는 송인명(宋寅明) 등과 함께 탕평론(蕩平論)을 주장하고 연차(聯箚)한 대신(大臣)을 역안(逆案)에 두어서는 안된다 하였고 이광좌(李光佐)를 배척하여 함께 일을 하려 하지 않았는데, 임금도 일찍이 그 나라를 위하는 혈성(血誠)을 칭찬하였다. 그 사람됨이 조급하여 뜻에 맞지 않는 것이 있으면 잠시도 참지 못하였는데, 지위가 정경(正卿)의 반열에 이르러서도 거조(擧措)에 경급(輕急)한 것이 많아서 신중하지 못하였으므로, 사람들이 이 때문에 부족하게 여겼다.

 

헌부(憲府) 【장령(掌令) 안경운(安慶運)이다.】 에서 전계를 아뢰고, 또 아뢰기를,
"호서(湖西)의 죄인 수담(壽聃) 등은 다만 효시(梟示)하게 하고 양취일(梁就一)은 사형(死刑)을 감면하여 도배(島配)하는 것은 모두 형벌을 잘못 쓰는 것임을 면하지 못하니, 수담 등은 처자를 노비(奴婢)로 삼고 가산(家産)을 적몰(籍沒)하며 양취일에게도 쾌히 왕법(王法)을 바루어야 하겠습니다."
하였으나, 모두 윤허하지 않았다.

 

9월 22일 병인

임금이 우의정 유척기(兪拓基)를 인견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오늘에야 배상(拜相)한 것도 늦다 하겠다. 유의한 지 이미 오래 되었는데 경(卿)이 이제 들어왔으니, 나랏 일에 다행이다."
하니, 유척기가 참된 마음으로 정사(政事)를 행하고 지나친 일을 하지 말기를 청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별로 지나친 일이 없는데 경의 말이 이러하니, 매우 반성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였다.

 

집의(執義) 김상신(金相紳)의 벼슬을 삭탈하고 문외(門外)로 출송(黜送)하게 하였다. 김상신이 상소하여 호서(湖西)·호남(湖南)의 요역(妖逆)의 분통함을 성대히 말하고 이천해(李天海)·유봉휘(柳鳳輝)·김일경(金一鏡)·목호룡(睦虎龍)의 여러 역적이 근저(根柢)가 됨을 두루 거론하고서 결연히 과단(果斷)하여 근원을 환히 밝히기를 청하고, 또 말하기를,
"근년에 추탈(追奪)을 논의한 합계(合啓)는 실로 여정(輿情)이 함께 분노한 데에서 나온 것인데, 이미 발계(發啓)한 신하를 배척하고 곧 정론(停論)한 무리를 죄주었고, 정대(庭對)에서 분수를 범한 책(策)을 높은 등제에 뽑아 놓은 것이 얼마나 무엄한 것이겠습니까마는, 처음에는 장시(掌試)한 신하를 견벌(譴罰)하고 또 논계(論啓)한 대관(臺官)을 죄주었으므로, 시비가 혼란하고 언로(言路)가 막혀서 쟁론(諍論)을 매우 경계하고 흉적(凶逆)을 작은 일처럼 여깁니다."
하고, 또 말하기를,
"신의 형 대사헌(大司憲) 김상옥(金相玉)이 무신년242)   이후에 의리를 밝히고 시비를 정하는 말을 아뢰었는데, 그 말이 과연 경술년243)  에 증험되었습니다. 지금 요적(妖賊)의 변이 전일보다 훨씬 더하니, 신이 어찌 입을 다물고 죄받는 것을 두려워하겠습니까?"
하였는데, 임금이 비답을 내리지 않고 기회를 타서 무함하는 정상을 매우 꾸짖으며 그 소(疏)를 도로 주고 곧 삭출(削黜)하는 전(典)을 시행하게 하였다.

 

9월 23일 정묘

임금이 금상문(金商門)에 나아가 친국(親鞫)하였다. 양찬규(梁纘揆)가 죄인 박수초(朴守初)·노세침(盧世琛)·중 성징(性澄) 등을 끌어들였으니, 정상을 알아내지 못하고 도로 본부(本府)에 내렸다.

 

남원부(南原府)를 고쳐 일신현(一新縣)으로 삼았다. 임금이 남원 고을을 폐지하고 다른 고을에 옮겨 붙이는 것이 마땅한지를 물었는데, 신하들의 의논이 같지 않아서 혹 영장(營將)을 따로 설치해야 한다고도 하고 혹 운봉(雲峰)·순창(淳昌)에 나누어 붙여야 한다고 하니, 임금이 다만 그 읍호(邑號)를 고치고 현(縣)으로 삼으라고 명하고 신하들을 시켜 읍명(邑名)을 의논하여 정하게 하였다. 좌의정 김재로(金在魯)는 함신(咸新)이라 하고 판부사(判府事) 송인명(宋寅明)은 혁심(革心)이라 하고 판의금(判義禁) 조현명(趙顯命)은 치격(恥格)이라 하였는데, 임금이 일신(一新)이라 고쳐서 3백 60 주(州)의 끝에 두라고 명하였다.

 

경상 감사 조명겸(趙明謙)을 체직하였다. 우의정 유척기(兪拓基)가 말하기를,
"조명겸은 대언(臺言)으로서 오랫동안 인피(引避)하고 있으니 변통이 있어야 하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체직하라고 명하고 대신할 만한 자를 물었는데, 유척기가 사양하고 다시 천거하지 않았다.

 

9월 24일 무진

임금이 금상문(金商門)에 나아가 박수초(朴守初)·노세침(盧世琛) 등을 국문(鞫問)하였으나 정상을 알아내지 못하고 다시 본부(本府)에 내렸다.

 

이도겸(李道謙)을 집의로, 이성룡(李聖龍)을 형조 참판으로 삼았다.

 

9월 25일 기사

임금이 금상문(金商門)에 나아가 양안귀(梁眠龜)와 수인(囚人)들을 국문(鞫問)하였다. 양안귀는 양찬규(梁纘揆)의 형인데, 두 번 중이 되었다가 환속(還俗)한 자였다. 양찬규와 함께 서울에 들어왔다가 먼저 시골로 돌아갔는데 이제 비로소 잡혔다. 그 호패(戶牌)를 살펴보니 관찰사 양안귀라 새겨져 있었다. 양안귀가 공초(供招)하기를,
"올해 7월에 순천 흥국사(興國寺)에서 김첨지(金僉知) 혹 김참봉(金參奉)이라고 하는 자를 만났는데 양찬규에게 말하기를, ‘네 아우는 서울에서 태어났는데 너댓 살 때에 귀양가 남원으로 내려왔다.’ 하고, 이어서 그 집에 가기를 권하였습니다. 정문(呈文)은 신이 스스로 밝혀서 위에 아뢰어지기를 바란 것입니다."
하고, 또 공초하기를,
"주머니 안에 있던 ‘고원감몽(故園感夢)’이란 부(賦)는 지은 것이 거의 2백 구(句)인데 신의 형제가 같이 지은 것입니다."
하였다. 그 문서 중에 왕문책(王文冊)이라 제목한 한 책이 있다 하는데, 이것은 누가 쓴 것인지를 물었더니, 양안귀가 말하기를,
"이것은 신이 쓴 것입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고원감몽’은 지의(指意)가 흉참하다. 그 뜻을 바른 대로 고하는 것이 옳다."
하니, 양안귀가 또 갑자기 말을 바꾸어 말하기를,
"이것은 박수초(朴守初)가 지은 것입니다."
하였다. 또 묻기를,
"책자에 쓴 것이 음참하다. 바른 대로 고하는 것이 옳다."
하니, 양안귀가 공초하기를,
"스스로 지은 재앙입니다."
하였다. 또 묻기를,
"‘고원감몽’이란 부는 네가 박수초가 지은 짓이라 하였는데, 이것으로 면질(面質)하여 말이 막히면 엄하게 형벌하겠다."
하니, 양안귀가 또 말을 바꾸어 말하기를,
"신은 누가 지었는지 모른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이 책을 가지고 박수초에게 물었더니 네가 쓴 것이라 하였다."
하니, 양안귀가 공초하기를,
"이것은 신이 쓰고 양찬규가 지은 것입니다."
하였다. 임금이 또 부(賦)를 지은 뜻을 물으니, 양안귀가 공초하기를,
"다른 사람의 것에서 베껴 냈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네가 이미 스스로 짓고 스스로 썼다고 말하고서 이제 또 베껴 냈다고 말하는 것은 무엇인가?"
하니, 양안귀가 공초하기를,
"과연 역적질을 하였습니다."
하고, 또 말하기를,
"서종진(徐宗鎭)이 남원 부사(南原府使)이었을 때에 백일장(白日場)에 ‘역산황숙(歷山黃熟)’ 따위의 글제를 내걸었습니다."
하고, 또 수인들과 면질하니 그 말에 어지러운 것이 많았는데, 모두 본부(本府)에 내리라고 명하였다. 지평(持平) 이성중(李成中)이 전계를 다시 아뢰고, 정언(正言) 성범석(成範錫)이 전계를 다시 아뢰었으나, 모두 윤허하지 않았다.

 

9월 26일 경오

임금이 금상문(金商門)에 나아가 양안귀(梁眠龜)와 여러 수인(囚人)들을 국문(鞫問)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이 도둑이 한 짓은 양찬규(梁纘揆)보다 더하다. 양찬규는 이미 정법(正法)하였는데 이 도둑은 오히려 왕법(王法)에서 피하였으니, 어찌 분개하지 않겠는가?"
하니, 김흥경(金興慶)·조현명(趙顯命)이 모두 말하기를,
"양찬규를 즉시 정법한 것도 오히려 후회되는 것을 깨닫겠는데, 어찌 이 도둑이 끌어대는 것을 기다리지 않고 지레 먼저 정법할 수 있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이 놈이 참으로 고발한 까닭이 있다면 경 등은 장차 살리는 의논에 붙이겠는가? 하루도 살려 둘 수 없으나 신하들의 말이 이러하니, 본부(本府)에 내려 치료하게 하라."
하였다. 임금이 호서(湖西) 죄수의 일을 물으니, 김재로(金在魯)가 말하기를,
"이미 문적(文跡)이 없거니와 계제(階梯)도 끊어졌으므로 실로 구핵(究覈)할 방도가 없으니, 유경지전(惟輕之典)244)  을 따라야 하겠습니다."
하고, 조현명도 그렇다고 말하니, 임금이 안핵사(按覈使)가 올라오거든 도신(道臣)의 영문(營門)에서 처분하도록 본도에 하유(下諭)하라고 명하였다. 김재로가 광주 부윤(廣州府尹) 이종백(李宗白)을 잉임(仍任)시키기를 청하니, 그대로 따랐다.

 

9월 27일 신미

친경 경과 정시(親耕慶科庭試)를 행하였다.

 

임금이 금상문(金商門)에 나아가 노세침(盧世琛)을 국문(鞫問)하였다. 노세침이 공초(供招)하기를,
"신이 과연 일을 같이하였습니다."
하였는데, 임금이 말하기를,
"무슨 일을 같이하였는가?"
하니, 노세침이 공초하기를,
"역적질을 같이하였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역절질한 절차를 물으니, 노세침이 공초하기를,
"양찬규(梁纘揆)가 올라올 때에 신과 함께 일을 꾀하기를 바랐으나, 신이 늙었기 때문에 오지 못하였습니다."
하였다. 밤이 깊었다 하여 모두 본부(本府)에 내리라고 명하였다. 대사헌(大司憲) 이기진(李箕鎭)이 시골에 있으면서 국문(鞫問)에 참여하지 않았으니 인피(引避)하였다. 대사간(大司諫) 심성진(沈星鎭)이 전계(前啓)를 다시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9월 28일 임신

임금이 금상문(金商門)에 나아가 수인(囚人)을 국문(鞫問)하였다. 임금이 노세침(盧世琛)의 일을 여러 신하들에게 물으니, 모두 정법(正法)해야 한다고 말하였다. 또 양안귀(梁眼龜)의 일을 물으니, 모두 말하기를,
"경폐(徑斃)되면 실형(失刑)이 될까 염려되니, 곧 정법(正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노세침의 일은 내 생각으로는 끝까지 의심이 없을 수 없다."
하였으나, 또 모두 의심스러울 것이 없으니 즉시 정법해야 한다고 말하였다. 임금이 양찬규(梁纘揆)가 성(姓)을 바꾼 일과 왕자(王子)라는 말을 가지고 노세침을 다시 국문하니, 노세침이 공초하기를,
"6월 그믐·7월 초에 양찬규가 과연 흉언(凶言)을 말하였는데, 그 말 가운데에 남원(南原)의 한동유(韓東愈)가 그에게 말하기를, ‘너는 능히 글을 아니 서울과 시골을 왕래하며 호걸(豪傑)과 체결하여 왕자가 되기를 꾀하거라. 안팎에서 서로 응하면 좋을 것이다.……’ 하였다 하므로, 신이 그 말이 되지 않는 것을 꾸짖었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더 물을 것이 없다.
하고, 결안(結案)을 봉입(捧入)하라고 명하고 본부에 내렸다. 또 양안귀를 다시 국문하여 결안을 봉입하라고 명하였다. 양찬규를 처치한 율(律)에 따라 거행하여 그날로 양안귀와 노세침에게 형을 행하라고 명하였다. 대사간(大司諫)        심성진(沈星鎭)이 전계를 다시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호서(湖西)의 죄인 양취일(楊就一)이 양시희(楊始禧)에게 억지로 권하여 두 아들을 아울러 보내어 양시박(楊始搏)을 살해하게 한 정상과 그가 반역을 범한 것이 분명하니, 양취일에게 사형을 감면하라는 명을 거두소서."
하고, 또 아뢰기를,
"역적 양찬규의 흉역(凶逆)은 전사(前史)에 없던 것입니다. 죄인 박수초(朴守初)가 이미 처형되었더라도, 같이 참여한 자취가 뚜렷이 있으므로 지정(知情)의 율만을 시행하여서는 안되겠으니, 청컨대 처자를 노비(奴婢)로 삼고 가산(家産)을 적몰(籍沒)하는 법을 더하소서."
하니, 임금이 대신(大臣)에게 물으니, 박수초는 이미 결안(決案)에 간간이 참여되지 않았으니 처자를 노비로 삼고 적몰하는 법을 시행할 수 없다고 대답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율(律)에는 한계(限界)가 있고 지만(遲晩)이 각각 다르니, 법외(法外)의 율을 경솔히 시행할 수 없다."
하고, 윤허하지 않았다.

 

임금이 흥정당(興政堂)에 나아가 정시(庭試)의 시관(試官)인 우의정 유척기(兪拓基) 등을 인견하고 입격(入格)한 시권(試券)을 올리라고 명하여 이기경(李基敬) 등 15인을 뽑았다. 이보다 앞서 제주에서 직부(直赴)한 4인 가운데 김계중(金繼重)이라는 자가 77세이었는데, 임금이 그 나이가 늙었다 하여 특별히 급제(及第)를 내리라고 명하고 또 멀리 절해(絶海)에 있기 때문에 정시에 붙이라고 명하였다. 입격한 시권 가운데에 피인(彼人)이 꺼리는 말을 범하여 쓴 것이 있었으므로, 임금이 그것이 유전(流傳)되어 일을 일으키게 될 것이라 염려하여 빼버리려 하였는데, 대신(大臣) 이하가 모두 다른 염려가 없다고 말하고 또 그 자구(字句)를 먹으로 지워서 베껴 전하지 못하게 하기를 청하니, 임금이 애써 따랐다.

 

9월 29일 계유

민응수(閔應洙)를 대사헌으로, 허옥(許沃)을 사간으로, 이광식(李光湜)을 헌납으로, 유건(柳謇)을 장령으로, 정익하(鄭益河)를 경상도 관찰사로 삼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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