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 1일 갑술
밤에 유성(流星)이 헌원성(軒轅星) 아래에서 나와 손방(巽方)으로 들어갔는데, 모양이 주먹 같고, 꼬리의 길이가 4, 5척이며, 빛깔은 붉은 색이었다.
무과 전시(武科殿試)의 과방(科榜)을 내었다.
임금이 금상문(金商門)에 나아가 장섭(張涉)과 양가(梁哥)의 딸인 양영란(梁永蘭)·중 성징(聖澄)·양성맹(梁聖孟)을 친국(親鞫)하였으나, 승복하지 않았다. 양성맹은 잡으러 보낸 자가 아니었으나 양안귀(梁眠龜)의 오촌(五寸)으로 금오랑(金吾郞)이 의심스러운 단서가 없지 않다고 생각하여 아울러 잡아왔다. 양영란은 양안귀의 누이이고 박수초(朴守初)의 아내이다. 양영란에게 물으니, 양영란이 공초하기를,
"제 부모가 귀신(鬼神)을 음사(淫祀)하기를 좋아하므로 제 두 오라비가 다 귀사(鬼邪)에 접하여 광질(狂疾)이 있습니다."
하였다. 죄인들을 본부(本府)에 내리라고 명하였다. 좌의정 김재로(金在魯)가 말하기를,
"대간(臺諫)의 논계(論啓)는 박수초에 일을 쟁집(爭執)합니다마는, 신의 생각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 흉언(凶言)을 듣고 이미 장(杖)을 쳐서 쫓았다면 같이 참여한 것과는 다를 것입니다. 또 지정(知情)으로 정법한다면 왕법(王法)온 본디 사시(四時)처럼 미더워야 할 것입니다."
"뒤미처 역률(逆律)을 시행한 일은 예전에도 있었다."
하였다. 김재로 말하기를,
"어제 정상을 알았다는 공초를 받고 이제 처자를 노비(奴婢)로 삼고 가산(家産)을 적몰(籍沒)하는 율(律)을 시행하여 한때 형정(刑政)이 어그러지는 것을 우선 버려둔다면 뒷날의 끝없는 폐단을 이루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지정(知情)의 율(律)은 마침내 가벼운 듯하나, 대신의 말도 옳다."
하였다. 지평(持平) 이성중(李成中)이 전계를 다시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또 죄인 박수초의 처자를 노비로 삼고 가산을 적몰할 것을 계청(啓請)하였으나, 윤허하지 않고 그 좌죄(坐罪)되어야 할 자를 모두 멀리 정배(定配)하라고 명하였다. 우의정 유척기(兪拓基)가 말하기를,
"비록 그 숙질(叔姪)에게 역률(逆律)을 적용하더라도 정배(定配)에 지나지 않으니, 지금 멀리 정배하는 것은 너무 지나칩니다."
하니, 정배로 고치도록 명하였다. 삼가 살펴보건대, 슬피 여기고 공경하며 자세히 살펴 삼가야 하는 것은 형옥(刑獄)보다 더한 것이 없는데, 죄수를 친국(親鞫)하는 것으로 말하면 사체(事體)가 더욱 중하니, 조금이라도 살피지 못한 것이 있으면 관계되는 것이 매우 커서 법관(法官)이 한때 판결하는 따위와는 다르다. 김재로가 능히 법리(法理)를 짐작하여 의율(議律)이 정확(精確)하고 임금의 뜻을 맞추어 따라서 법을 편리하게 해석할 생각을 하지 않았으니, 또한 대관(大官)이 판결을 의논하는 체모를 잃지 않았다 하겠다.
10월 2일 을해
임금이 금상문(金商門)에 나아가 장섭(張涉)·양영란(梁永蘭)·김석장(金碩章)·양대규(梁大揆)·양의규(梁義揆)·양성맹(梁聖孟)·이유강(李維綱)을 친국(親鞫)하였으나, 승복하지 않았다. 집의(執義) 이도겸(李道謙)이 전계를 다시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사간(司諫) 허옥(許沃)이 전계를 다시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양찬규(梁纘揆)를 살펴 잡은 군관(軍官)과 양안귀(梁眠龜)를 잡아온 가도사(假都事)를 모두 가자(加資)하라고 명하였다.
10월 3일 병자
천둥하고 번개가 쳤다.
이덕수(李德壽)를 형조 판서로, 서명형(徐命珩)을 의주 부윤(義州府尹)으로 삼았다.
임금이 금상문(金商門)에 나아가 김처구(金處九)를 친국하였다. 김처구는 양안귀(梁眠龜)에 관련되어 잡혀 온 자인데, 추문(推問)하였으나 정상을 알아내지 못하고, 본부(本府)에 내리라고 명하였다.
10월 4일 정축
정원(政院)에서 천둥의 이변 때문에 경계를 아뢰니, 예사 비답을 내렸다.
좌의정 김재로(金在魯)·우의정 유척기(兪拓基)가 천둥의 이변 때문에 차자(箚子)를 올려 면직(免職)을 청하니, 예사 비답을 내렸다.
영의정 이광좌(李光佐)가 상소하여 천둥의 이변 때문에 경계를 아뢰니, 예사 비답을 내렸다.
임금이 금상문(金商問)에 나아가 김처구(金處九)를 친국(親鞫)하고 곧 포청(捕廳)에 내렸다. 단서가 분명하지 않기 때문이었다. 양성맹(梁聖孟)·양영란(梁永蘭)·중 성징(性澄)·장섭(張涉)을 국문(鞫問)하였다. 집의(執義) 이도겸(李道謙)이 전계를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10월 5일 무인
임금이 금상문(金商門)에 나아가 양대규(梁大揆)·한동유(韓東愈)·일석(一錫)을 친국(親鞫)하였다.
사직 김유경(金有慶)이 상소하기를,
"지금 국문(鞫問)하는 수인(囚人)의 흉악한 말은 무신년245) 에서 말미암고 무신년의 대란(大亂)은 신축년246) ·임인년247) 에서 말미암아 임금을 속이고 도리에 어그러지는 마음이 일관하여 왔으니, 먼저 뿌리를 베지 않고 가지나 잎이 나지 않기를 바라면 어찌 될 수 있겠습니까? 먼저 신축년·임인년의 역적을 토죄(討罪)하고 벗어나지 못하게 하면 어지러운 근본은 길이 끊어지고 역적의 싹이 절로 사라질 것입니다."
하였는데, 비답을 내리지 않고 도로 내어 주었다.
10월 6일 기묘
임금이 금상문(金商門)에 나아가 일석(一錫)·양영란(梁永蘭)·중 성징(性澄)·양의규(梁義揆)·김석장(金碩章)을 친국(親鞫)하였다. 죄인을 잡은 포교(捕校) 2인에게 변장(邊將)을 제수하라고 명하였는데, 양찬규(梁纘揆)가 끌어댄 빌어먹는 늙은이를 잡았기 때문이었다. 좌의정 김재로(金在魯)가 말하기를,
"말로 말이암은 옥사(獄事)는 바람을 잡고 그림자를 잡는 것과 같습니다. 이제 천금(千金)을 상으로 걸어 잡게 하면 혹 잡기를 바랄 수도 있을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단서도 아직 얻지 못하였으니, 내 마음이 어찌 한 시각이라도 편안하겠는가?"
하고, 명하여 전교(傳敎)를 쓰게 하기를,
"역적 양찬규의 부도(不道)한 말은 무신년에도 없던 것일 뿐더러 지난 사책(史冊)에도 있지 않았던 것이다. 종일 수인(囚人)을 국문(鞫問)하여도 부추기어 시킨 자를 알아내지 못하였다. 중외(中外)에 포고(布告)하되, 역적 양찬규를 부추긴 자를 잡는 자가 있으면 두 자급(資級)을 올리고 은(銀) 1천 냥의 상을 줄 것이고 일률(一律)을 범하였더라도 탕척하고 상을 줄 것이라는 것으로 경조(京兆)와 제도(諸道)에 반시(頒示)하도록 하라."
하였다. 대사간(大司諫) 심성진(沈星鎭)이 전계를 다시 아뢰고 집의(執義) 이도겸(李道謙)이 전계를 다시 아뢰었으나, 모두 윤허하지 않았다.
10월 7일 경진
임금이 몸이 편찮았으나 이윽고 편안해졌으므로, 조정(朝廷)에 명하여 문안하지 말도록 하였다.
영의정 이광좌(李光佐)가 임금의 몸이 편찮기 때문에 성안에 들어오니, 임금이 사관(史官)을 보내어 함께 오게 하였으나, 이광좌가 병을 이유로 명을 따르지 않고 차자(箚子)를 올려 경계를 아뢰었다.
임금이 금상문(金商門)에 나아가 양성맹(梁聖孟)·장섭(張涉)을 친국(親鞫)하였다. 임금이 현기(眩氣)가 있어 소차(小次)에 들어갔다. 도로 들어가려 할 때에 죄인 우규(宇奎)가 잡혀 오니, 임금이 국문(鞫問)하려 하였으나, 신하들이 도로 들어가기를 힘써 청하니, 임금이 애써 따랐다.
부교리(副校理) 조명리(趙明履)가 상소하여 천둥의 이변 때문에 경계를 아뢰니, 예사 비답을 내렸다.
10월 8일 신사
임금이 금상문(金商門)에 나아가 우규(宇奎)·장섭(張涉)·한동유(韓東愈)를 친국(親鞫)하고 다시 본부(本府)에 내렸다.
호서 안핵사(湖西按覈使) 남태량(南泰良)이 복명(復命)하였다. 임금이 인심(人心)·토속(土谷)을 물으니, 남태량이 말하기를,
"청안(淸安)은 인심이 고약하여 조금이라도 불만이 있으면 가사(歌詞)로 헐뜯는 것이 그 본래의 버릇입니다. 이번에 양시박(楊始搏)이 살해된 것도 큰 길거리의 큰 마을 옆에서 있었는데도 엿새 동안이나 시친(屍親)이 관가에 고하려고 생각하지 않다가, 그 온 고을에서 다 알게 되어 본관(本官)에서 밝히고 살핀 뒤에야 비로소 와서 고하되 조금도 원통히 여기는 뜻이 없고 오로지 다른 양가(楊哥)들이 벗어나려 하였으니, 더욱이 매우 놀랍고 통탄합니다. 양시창(楊始昌)·양시유(楊始)에게는 멀리 귀양보내는 법을 시행해야 하겠습니다."
하였다. 양시유는 양시박의 아우인데, 일찍이 양취도(梁就道)의 손자 노릇을 하던 자였다. 임금이 대신(大臣)에게 물어 모두 형배(刑配)하라고 명하였다. 대사간(大司諫) 심성진(沈星鎭)이 전계를 다시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곡산 부사(谷山府使) 최명주(崔命柱)는 일찍이 영남(嶺南) 고을을 맡았을 때에 역적 양찬규(梁纘揆)를 데려다 두고 환속(還俗)하도록 권하여 종[婢]의 지아비로 삼고 또 체직되어 돌아온 뒤에 데려왔으니, 일이 매우 놀랍습니다. 파직(罷職)하고 서용(敍用)하지 마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10월 9일 임오
임금이 금상문(金商門)에 나아가 우규(宇奎)·형래(亨來)를 친국(親鞫)하였다. 형래(亨來)는 특별히 석방하고 그 나머지는 다시 본부(本府)에 내렸다.
특별히 명하여 제주(濟州)에 사는 문과(文科)에 급제한 사람 김계중(金繼重)을 승륙(陞六)248) 하고 벼슬을 주어 보내게 하였다. 먼 데 사람이고 늙었기 때문에 우대한 것이었다.
10월 10일 계미
임금이 금상문(金商門)에 나아가 우규(宇奎)·장섭(張涉)·양영란(梁永蘭)·양재구(梁再九)·양재팔(梁再八)·양재륙(梁再六)·양재오(梁再五)를 친국하였다. 우규·장섭·양영란은 다시 본부(本府)에 내리고 양재구 등 4인은 내보내어 형조(刑曹)에 넘겼다. 양재구 등은 양찬규(梁纘揆)·양안귀(梁眠龜)의 삼촌인데 남원(南原)에 사는 농부(農夫)이다. 양재팔에게 물으니, 양재팔이 말하기를,
"양안귀는 일명 광총(廣聰)인데 미친 병이 있고, 양찬규는 일명 풍활(風闊)인데, 서울에 올라가 실혼병(失魂病)을 얻어 돌아와 늘 평량자(平凉子)에 용(龍)을 그리고 혹 온전한 옷을 입고 나갔다가 찢어 돌아오기도 하므로, 신 등이 이 때문에 감영(監營)·병영(兵營)에서 죄를 받을 것이라 늘 염려하였습니다."
하고, 양재구가 공초하기를,
"광총은 신해년249) 부터 미친 병이 있었는데 혹 옷 속의 솜을 빼어 술을 사기도 하였으며, 풍활도 평량자에 용을 그리고 사람들이 혹 바늘로 두렵게 하면 겁을 내어 달아났습니다."
하고, 양재오·양재륙의 공초도 모두 어그러진 단서가 없었다. 뒤에 임금이 모두 석방하라고 명하였다. 여러 공초로 말미암아 그 미친 것을 비로소 알았으나, 조정(朝廷)의 신하들은 그 미친 것이 참된 것인지 거짓인지 가리기 어렵다고 다투어 말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그가 미치지 않았다면 흉심(凶心)을 품었더라도 어찌 책에 썼겠는가?"
하였다.
형조 판서 이덕수(李德壽)가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옛사람이 임금의 덕(德)을 성취하는 것은 경연(經筵)에 있다고 말하였습니다. 수년 이래로 신이 강연(講筵)에서 가까이 모신 것이 오래지 않다고 할 수 없거니와, 성학(聖學)에 대하여는 글에 따라 부연하여 아뢰지 않은 적이 없고, 사나운 노여움에 관한 일로 말하면 더욱이 반복하여 경계를 아뢰었는데 또한 일찍이 가납(嘉納)하셨습니다. 그러나 모두 다 빈말로 돌아가고 지난번 위노(威怒)는 거의 한낮의 바람·천둥과 같아서 세 유신(儒臣)의 벼슬을 삭탈하고 두 간신(諫臣)을 귀양 보내고 중신(重臣)을 헐뜯어 꾸짖고 대신(大臣)을 배척하여 파면하며 명령이 전도되어 중외(中外)가 죄다 놀라니, 신이 외방(外方)에서 듣고 놀라워하며 계책을 잃었습니다. 신은 일찍이 전하께서는 요순(堯舜)의 자질이 있으므로 어려운 일을 권할 수 있고 정도(正道)로 인도할 수 있고 퇴폐한 풍속을 돌이킬 수 있고 지극한 정치를 이룰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였습니다마는, 지금으로 말하면 후세의 중주(中主)만 못하시니, 신이 어찌 여기에 대하여 한숨 짓고 한탄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전하께서 늘 학문에 종사하시는 것은 그 익히는 것이 강론(講論)에 지나지 않고 조금도 몸소 실천하는 데에서 얻는 것이 없으니, 이것은 모두 신이 의리로 보도(輔導)하지 못하고 한갓 겉치레로 전하를 섬긴 죄입니다. 신이 듣건대, 예전에는 관직을 두고 벼슬을 주되 성적을 나타내지 못하는 자가 있으면 상형(常刑)이 있었다 합니다. 그러므로 신의 죄는 크게는 죽여야 마땅하고 작게는 귀양 보내야 마땅할 것입니다. 신은 전하께서 유사(有司)에 명백히 해명하여 당율을 시행하게 하시기 바랍니다. 신은 부복(俯伏)하여 죽음을 기다리고 원망하지 않겠습니다."
하였는데, 예사 비답을 내렸다.
10월 11일 갑신
밤에 유성(流星)이 유성(柳星) 아래에서 나와 손방(巽方)으로 들어갔는데, 모양이 주먹 같고, 꼬리의 길이가 4, 5척이며, 빛깔은 붉은 색이었다.
임금이 금상문(金商門)에 나아가 양유점(梁有點)·위창(渭昌)을 친국(親鞫)하고 모두 곧바로 석방하였다. 양유점도 양찬규(梁纘揆)의 누이이다.
정언(正言) 성유열(成有烈)을 친국(親鞫)할 것을 명하였다. 성유열은 승지(承旨) 성진령(成震齡)의 친족이다. 상소하기를,
"무신년250) 의 일 이후에 곧 경술년251) 의 일이 있었고 경술년의 일 이후에 또 오늘날의 일이 있어 일란(一亂)을 겨우 감정(勘定)하면 일란이 또 일어났으니, 그 일은 비록 다르더라도 정상은 한 가지입니다. 전하께서 오로지 관용을 일삼고 제거하려 하지 않아서 단지 김일경(金一鏡)·목호룡(睦虎龍)만을 죽이고 그 무리를 진용(進用)하셨으며, 오늘은 유봉휘(柳鳳輝) 등의 관직을 회복하고 내일은 오적(五賊)을 육지로 나오게252) 하셨으니 여항(閭巷)의 무지한 자들이 어찌 충역(忠逆)의 분별을 알겠습니까? 그래서 불궤(不軌)한 무리가 이어서 인심을 속여 꾀는 것입니다. 화란(禍亂)이 잇달아 일어나는 것은 징토가 엄하지 않는 데에서 말미암으니, 오늘날 역적 양찬규(梁纘揆) 이후에 또 장차 일어나는 화기(禍機)가 없을는지 어찌 알겠습니까? 근일 사람을 쓰고 버릴 즈음에 매우 구별이 없거니와, 윤용(尹容)으로 말하면 윤연(尹㝚)·윤수(尹邃)의 지친(至親)으로서 서관(西關)의 쇄약(鎖鑰)에 내쳐졌으므로 물정(物情)이 놀라워하니, 빨리 체개(遞改)해야 하겠습니다. 화란(禍亂)이 일어나는 것은 이륜(彛倫)이 먼저 없어진 데에서 말미암은 것입니다. 이종성(李宗城)이 지난번 당한 것은 그에게는 망극한 변인데 조금도 통한(痛恨)의 마음이 없으니, 인리(人理)가 없어져서입니다. 어버이를 위한 사연(私宴)을 이원(梨院)에서 베풀며 아악(雅樂)을 죄다 내어 종묘 제악(宗廟祭樂)을 다 연주하였으니, 그 교만하고 방자하여 분수를 범한 죄는 멀리 귀양보내는 법을 시행해야 마땅합니다."
하였는데, 소(疏)가 들어가니, 비답을 내리지 않고 장전(帳殿)에 나아가 여러 대신(大臣)들에게 명하여 앞으로 나오게 하여 말하기를,
"경(卿)들에게 물어서 처분하려고 한다."
하고, 그 소를 내어 보였다. 여러 신하들이 모두 소장의 말이 지나치다고 말하였으나 또한 그에게 죄가 있다고 말하지 않았는데, 임금이 말하기를,
"그 소에 이처럼 벌여 놓은 것은 장차 한편 사람들을 망측한 죄로 몰려는 것이다. 그가 이종성을 무함하기에 바쁘더라도 어찌 감히 ‘이륜(彝倫)’이란 글자로 오늘날을 견줄 수 있겠는가? 나는 성유열을 국문(鞫問)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하였다. 여러 신하들이 모두 대간(臺諫)은 국문할 수 없다고 힘써 말하니, 임금이 노하여 말하기를,
"이러한 때를 당하여 감히 화란이 일어나는 것이 이륜이 없어진 데에서 말미암는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내일 팽형(烹刑)253) 에 처하겠다."
하였다. 여러 신하들이 또 불가하다고 말하니, 찬선(饌膳)을 줄이고 음식을 바치지 말라고 명하였다. 여러 신하들이 섬돌 아래로 관(冠)을 벗고 대죄(待罪)하니, 임금이 올라오게 하고 말하기를,
"성유열은 이종성이 이륜이 없다고 하였다. 신축년254) ·임인년255) 이후로 황형(皇兄)과 내가 번번이 당인(黨人)의 입에 오르고 괘서(掛書)·작자(作歌)의 변에 이르렀는데, 그가 위에 있는 사람이 이륜이 만일 있다면 이종성이 어찌 이륜이 없겠느냐고 하였다."
하고, 성유열을 엄히 가두라고 명하고 대내(大內)로 돌아갔다.
10월 12일 을유
임금이 금상문(金商門)에 나아가 성유열(成有烈)을 친국(親鞫)하였다. 여러 대신(大臣)들이 그 불가함을 말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이번 역적이 어느 곳에서 나왔기에 내가 빚어 만들었다고 하는가? 이것은 임금을 속이고 부도(不道)한 일이다."
하고, 마침내 국문(鞫問)하였다. 여러 신하들이 또 형신(刑訊)하지 말기를 간청하고, 문사랑(問事郞) 원경하(元景夏)가 소리를 높여 말하기를,
"이태좌(李台佐)는 신의 외구(外舅)이고 성유열은 무함한 신하인데, 어찌 돌보려 하겠습니까? 그러나 성유열은 간관(諫官)인데 이제 성상께서 전정(殿庭)에서 간관을 묶어 놓고 이런 전에 없던 일을 하시니, 간관을 어찌 과연 때려 죽이겠습니까? 신은 대대로 나라의 은혜를 받았으니, 위노(威怒)를 두려워하며 한 마디 말도 아뢰지 않는다면, 신이 살아서는 전하를 저버리고 죽어서는 신의 조상에게 가 볼 수 없을 것입니다. 성유열은 신이 혐의하는 사람인데, 신이 당론(黨論) 때문에 돌보고 감싼다면 이는 신의 어미를 잊어버리는 것입니다. 다만 성상의 지나친 거조를 아까워할 뿐입니다."
하고, 반복하여 힘써 다투었다. 임금이 성유열에게 소장 가운데에 있는 말을 물었으나 대답하지 못하므로, 이어서 소를 지은 자와 부추겨 시킨 자를 물었는데, 그 종형(從兄)인 성대열(成大烈)과 종인(宗人)인 성진령(成震齡)이라고 대답하니, 임금이 드디어 형신(刑訊)을 가하지 않고 말하기를,
"원경하의 말대로 결박을 풀도록 하라."
하고, 이어서 성유열·성대열은 사판(仕版)에서 삭제하고 성진령을 흑산도(黑山島)에 귀양보내라고 명하였다. 임금이 원경하의 착한 말을 여러번 칭찬하고 말하기를,
"박문수(朴文秀)와 서로 닮았다."
하였다. 박문수는 원경하의 이종형이다. 임금이 말하기를,
"성진령은 일찍이 고 상신(相臣) 조태채(趙泰采)를 논하여 배척하더니 을사년256) 에 이르러서는 도리어 군자(君子)를 몰랐다는 말로 굴복하여 사죄했고, 그 뒤에는 또 고 상신 홍치중(洪致中)을 참혹하게 공박하였으므로, 내가 일찍이 마음속으로 미워하여 정망(政望)이 있을 때에 번번이 은점(恩點)을 아꼈다. 승지(承旨)에 제배(除拜)할 때에는 내가 잘못하여 낙점(落點)하였으나 이미 낙점하였다가 도로 말소하는 것은 임금의 똑같이 사랑하는 도리가 아니므로 그대로 두었는데, 마음속으로는 높은 벼슬에는 또한 한정이 있다고 생각하였다. 그리하여 이 뒤로는 다시 벼슬을 제배하지 않았으므로, 그가 원한을 품고서 이렇게 부추겨 시켰을 것이다."
하고, 또 성유열의 대관(臺官)으로 의망(擬望)한 전관(銓官)을 파직(罷職)하라고 명하였다.
김석일(金錫一)을 정언(政言)으로, 조현명(趙顯命)을 좌참찬(左參贊)으로 삼았다.
10월 13일 병술
임금이 금상문(金商門)에 나아가 금부(禁府)의 수인(囚人)을 국문(鞫問)하였다. 먼저 대신(大臣)에게 명하여 앞으로 나오게 하고 하교하기를,
"무릇 일은 당시에는 그 잘못을 모르나 일이 지난 뒤에야 그 잘못을 깨닫는다. 성유열에 대한 처분은 하문하였을 때에 경(卿) 등이 성유열은 변변치 못하다고 하였으면 내가 버려두었을 것인데, 경 등의 말이 너무 느슨하므로 친국하기에 이르렀으니, 이것은 경 등이 격동시켜 만든 것이다."
하였다. 이어서 태명(太明)·여휘(麗輝)·중규(重葵)를 친국(親鞫)하였으나 다 정범(情犯)이 없었다. 태명·중규는 곧바로 석방하고 여휘는 형조에 내리고 관련되어 갇힌 29인은 모두 석방하였다. 또 양연학(梁蓮學)을 국문하였다. 양연학은 양찬규(梁纘揆)의 조카로서 중이 된 자인데 형신(刑訊)하니 숨이 막혔으므로 본부(本府)에 내리라고 명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이 국체(鞫體)는 후왕(後王)이 본받을 만한 것이 아니다."
하니, 판부사(判府事) 김흥경(金興慶)이 말하기를,
"상교(上敎)가 지당합니다."
하고, 도승지(都承旨) 홍경보(洪景輔)가 말하기를,
"발과 등을 때리는 형(刑)도 법정(法庭)에서 시행해야 할 것이 아닙니다. 실정을 알아내기에 바쁘더라도 실은 고례(古例)가 아닙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그렇다. 주장(朱杖)으로 겨드랑이를 찌르는 것도 예전에는 없었는데 신축년257) ·임인년258) 부터 시작하였다."
하였다.
10월 14일 정해
임금이 금상문(金商門)에 나아가 김한성(金漢聲)을 친국(親鞫)하였다. 임금이 기괴(奇怪)하여 물을 만한 자가 아니라 하고 본도(本道)에 보내어 형배(刑配)하라고 명하였다. 임금이 국문(鞫問)하는 일이 이미 끝났고 여러 수인(囚人)들의 정범(政犯)에 다시 구핵(究覈)할 것이 별로 없다 하여 여러 신하들에게 하문하였는데 신하들의 의논이 모두 그러하다 하니, 드디어 참작하여 처치하라고 명하였다. 한동유(韓東愈)·양대규(梁大揆)·양학규(梁學揆)는 모두 원배(遠配)하고, 중 성징(性澄)·김석장(金碩章)은 석방하고, 양성맹(梁聖孟)·장섭(張涉)은 도배(島配)하고, 양연학(梁蓮學)은 좌죄(坐罪)될 것이 없다 하여 석방하고, 전 부사(府使) 최명주(崔命柱)는 삭출(削黜)하고 전 부사 권감(權瑊)은 역적의 공초 가운데에 나온 사람을 위문하였다 하여 삭직(削職)하였다. 하교하기를,
"난역(亂逆)이 일어나는 것이 어느 세대인들 없으랴마는, 어찌 부덕한 내가 당한 것과 같은 것이 있겠는가? 역적 이인좌(李麟佐)와 역적 정도륭(鄭道隆)이 전후하여 일어났고 양취도(梁就道)의 음참(陰慘)한 일은 무신년259) 에도 없던 것인데, 이번 역적 양찬규(梁纘揆)·양안귀(梁眠龜)의 부도(不道)한 말에서 극진하였거니와, 여러 공초를 보면 두 역적이 미친 것을 알 만하다. 아! 교화가 참으로 행해지면 인괴(人怪)가 어찌 나오겠으며, 조정이 굳게 뭉치면 효경(梟獍)260) 이 어찌 횡행하겠는가? 그 말미암은 바를 밝혀 보면 모두가 나의 박덕 때문이다. 국문(鞫問)하는 일이 끝났으니, 먼저 자신을 경계해야 마땅하다. 오늘부터 열흘 동안 찬선(饌膳)을 줄일 것이니, 모든 신하는 모두 이 뜻을 본받으라."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두 역적은 상성(常性)을 가진 사람이 아니다마는, 중외(中外)의 의혹은 점점 더 심해지는 까닭에 오늘 전지(傳旨)에 미친 자라고 쓴 것이다. 어찌 두 역적의 처지를 위한 것이겠는가? 실로 중외의 의혹을 풀려는 것일 뿐이다."
하였다. 그가 미친 줄 알고도 오히려 다스린 것은 무신년의 여얼(餘孼)이기 때문이었다. 임금이 또 말하기를,
"처음에 그가 미친 것을 알았으면 어찌 반드시 잡으러 보냈겠는가? 이것은 내가 살피지 못한 것이다."
하니, 김재로(金在魯)가 말하기를,
"이번 역적의 실상은 우습습니다. 바로 미친 것입니다."
하였다. 임금이 또 명하여 전지(傳旨)를 쓰게 하기를,
"역적의 공초에 끌어댄 것은 그것이 황잡(荒雜)하더라도 구핵(究覈)하지 않을 수 없으므로 체포하여 신문하였으나 일이 상례(常例)와 다르니, 후왕(後王)이 본받을 만한 것이 아니다. 이것을 여러 사관(史官)들에게 넘겨 후세에게 거울로 삼게 하라."
하였다. 이에 임금이 특별히 이이장(李彝章)을 불러 앞으로 나오게 하여 누누이 하교하고 명하여 어사(御史)로 삼아 호남(湖南)에 가서 타일러 진정시키게 하였다. 대개 체포된 사람이 매우 많아서 한 도(道)가 놀라 어지러웠기 때문이었다. 임금이 이미 남원(南原)의 수인(囚人)들을 참작하여 처치하고 나서 호서(湖西) 수인의 공초에도 허황한 것이 많다 하여 본도(本道)에서 안핵(按覈)한 죄인을 모두 흩어 정배(定配)하게 하였다. 장령(掌令) 유건(柳謇)이 전계를 다시 아뢰고, 또 아뢰기를,
"한동유(韓東愈)는 정절(情節)이 있으므로 참작하여 처치하지 않을 수 없으니, 청컨대 다시 국문하소서."
하였으나, 모두 윤허하지 않았다.
이날 밤이 깊었을 때에 임금이 다시 승지를 불러 자전(慈殿)의 위유(慰諭) 때문에 감선(減膳)하라고 한 명을 거두었다.
10월 15일 무자
예조 판서 윤혜교(尹惠敎)가 상소하여, 성유열(成有烈)이 상소하여 이종성(李宗城)이 아악(雅樂)을 참용(僭用)하였다고 논한 것을 변명하기를,
"본원에서 음악을 연습하는 규례는 아악을 연습하여 보기도 하고 속악(俗樂)을 연습하여 보기도 하며 연습할 때마다 바깥 사람들도 으레 와서 볼 수 있는데, 이종성의 아비 이태좌(李台佐)가 마침 연습하는 날에 여러 기로(耆老)들과 함께 와서 참관하였고, 신도 제거(提擧)로서 잠시 가서 모임에 나아갔습니다마는, 무동(舞童)·처용(處容) 같은 속악을 벌였을 뿐이고 아악은 처음부터 연습시키지 않았습니다. 많은 사람의 눈이 본 것인데 어찌 속일 수 있겠습니까?"
하였다.
사신은 말한다. "약원(樂院)에서 음악을 연습할 때에 바깥 사람들이 참관하는 것은 본디 관례인데, 본디 속악·아악의 구별이 없고 사연(私宴) 때에 무동·처용을 쓰는 일도 많이 있으니, 이종성이 이것을 빌어 썼더라도 예(禮)를 알지 못한다고 한다면 괜찮겠으나, 종묘 제악(宗廟祭樂)을 연주한 것으로 돌리는 것이 어찌 말이 되겠는가? 성유열을 친국(親鞫)한 것은 워낙 성명(聖明)의 지나친 일이나, 그 말이 기괴(奇怪)한 것은 참으로 한 번 웃을 것도 못된다. 대저 이종성의 죄로 말하면 어찌 할말이 없는 것을 걱정하여 이것을 말하였는가? 성유열이 어리석고 배우지 못한 것은 워낙 꾸짖을 것도 못되나, 그 소를 지어 준 자가 지각이 없는 것도 심하다."
【태백산사고본】 36책 50권 17장 A면【국편영인본】 42책 646면
【분류】정론-정론(政論) / 예술-음악(音樂) / 예술-무용(舞踊) / 사법-탄핵(彈劾) / 역사-사학(史學)
사신은 말한다. "약원(樂院)에서 음악을 연습할 때에 바깥 사람들이 참관하는 것은 본디 관례인데, 본디 속악·아악의 구별이 없고 사연(私宴) 때에 무동·처용을 쓰는 일도 많이 있으니, 이종성이 이것을 빌어 썼더라도 예(禮)를 알지 못한다고 한다면 괜찮겠으나, 종묘 제악(宗廟祭樂)을 연주한 것으로 돌리는 것이 어찌 말이 되겠는가? 성유열을 친국(親鞫)한 것은 워낙 성명(聖明)의 지나친 일이나, 그 말이 기괴(奇怪)한 것은 참으로 한 번 웃을 것도 못된다. 대저 이종성의 죄로 말하면 어찌 할말이 없는 것을 걱정하여 이것을 말하였는가? 성유열이 어리석고 배우지 못한 것은 워낙 꾸짖을 것도 못되나, 그 소를 지어 준 자가 지각이 없는 것도 심하다."
10월 16일 기축
정언(正言) 김석일(金錫一)이 상소하여 안상휘(安相徽)를 멀리 귀양보내고 김유(金濰) 등을 천극(栫棘)하고 서명균(徐命均)을 파직(罷職)하고 이종성(李宗城)을 삭직(削職)한 잘못을 말하였는데, 말이 매우 절실하고 정직하였으나, 엄한 비답을 내리고 파직시켰다.
신만(申晩)을 이조 참의로, 윤급(尹汲)을 대사간으로, 윤봉구(尹鳳九)를 집의로, 조윤제(曹允濟)를 지평으로, 원경하(元景夏)를 정언으로 삼았다.
좌참찬(左參贊) 조현명(趙顯命)이 상소하여 김상신(金相紳)의 소(疏)에 대하여 변명하기를,
"그가 이른바 조정(調停)하여 두루 다스린다는 논의가 시비를 어지럽히고 난역(亂逆)을 점점 이룬다 한 것은 무엇 때문이겠습니까? 말이 그릇된 것입니다. 시비가 치우쳐서 당목(黨目)이 나뉘고, 당목이 나뉘어서 경쟁이 생기고, 경쟁이 생겨서 난역이 일어납니다. 그래서 이른바 조정하여 두루 다스린다는 논의가 일어나는 것이니, 대개 난역을 막기 위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난역을 불러온 데에는 본디 당해야 할 자가 있을 것입니다. 신은 본디 외로워 벗이 드문 몸으로 뜻이 높아 이루기 어려운 논의를 앞장서 말하므로 그 형세가 참으로 뭇사람이 방해하는 가운데에 자립(自立)할 수 없는데, 전후에서 도운 한두 선배와 두세 동지는 잇달아 영락(零落)하여 천지간에 외로이 섰으니, 슬피 사방을 돌아보아도 이 뒤에는 이을 자가 없습니다. 아! 도(道)가 장차 폐퇴할 것이고 신도 늙어 머리가 희었습니다. 몇 해가 지나면 이 몸이 없을 것인데, 아깝게도 그가 어찌하여 조금도 기다리지 못하고 도리어 이처럼 서두릅니까? 그 또한 딱합니다. 그러나 어찌 감히 그의 말이 변변치 못하다 하여 스스로 용서하고 뽐내어 염치없이 좋은 벼슬에 많은 녹을 받으며 무릅쓰고 있을 수 있겠습니까?"
하니, 예사 비답을 내렸다.
10월 17일 경인
향유(鄕儒) 신욱(申煜)을 절도(絶島)에 귀양보내고 태학(太學)의 장의(掌議)를 정거(停擧)하라고 명하였다. 신욱이 성무(聖誣)를 변명하는 글을 올리는 일 때문에 식당(食堂)에서 발론(發論)하였는데, 여러 유생(儒生)들이 그 말에 대하여 물었더니 대답하지 않으므로, 유생들이 거조(擧措)가 놀랍다 하여 벌주었다가 이윽고 풀어 주었다. 신욱이 다시 들어와서 변무(辨誣)하는 글을 올리지 않는다 하여 유생들이 역적을 감싼다고 배척하며 헐뜯고 욕하는 말을 많이 하였으므로, 유생들이 드디어 권당(捲堂)261) 하였다. 임금이 물어서 변무설(辨誣說) 때문인 것을 알고 그것이 양찬규(梁纘揆)의 옥사(獄事)와 서로 관련되었으리라고 생각하였으므로, 밤에 흥정당(興政堂)에 나아가 대신(大臣)과 성균 당상(成均堂上)을 부르고 관유(館儒)와 신욱을 인견하여 변무의 곡절을 물으니, 신욱이 병환을 숨긴 것이라고 대답하였다. 임금이 또 이번 역옥(逆獄)에 대하여 물으니, 신욱이 모른다고 대답하였다. 임금이 신욱이 이 기회를 타서 태학을 어지럽혔다 하여 도배(島配)하라고 명하고, 장의는 경솔히 먼저 권당하였다 하여 정거하였다.
10월 18일 신묘
밤에 달이 동정성(東井星)에 들어갔다.
대신(大臣)들과 삼사(三司)의 신하들이 김석일(金錫一)이 바로잡지 못한 잘못을 논하여 배척한 일 때문에 각각 글을 올려 인구(引咎)하니, 예사 비답을 내렸다.
10월 19일 임진
김굉(金硡)을 지평으로, 민백행(閔百行)을 정언으로, 정필녕(鄭必寧)·서명구(徐命九)를 승지로 삼았다.
좌의정(左議政) 김재로(金在魯)가 차자(箚子)를 올리기를,
"김석일(金錫一)의 소(疏)에 대하여는 더욱이 부끄러워 자송(自訟)하는 것이 있습니다. 대관(臺官)을 국문(鞫問)한 지나친 거조는 전에 없던 것인데 정성이 천박하고 말이 졸렬하여 마침내 바로 잡지 못하였고, 안상휘(安相徽)는 절해(絶海)에 투비(投畀)할 때에는 날이 어두웠고 갑작스러워서 쟁집(爭執)할 겨를이 없었습니다."
하니, 예사 비답을 내렸다.
10월 21일 갑오
임금이 창덕궁(昌德宮)에 환어(還御)하였다.
10월 23일 병신
송질(宋瓆)을 사간으로, 한봉조(韓鳳朝)를 장령으로 삼았다.
헌부(憲府) 【지평 김굉이다.】 에서 전계를 다시 아뢰고, 또 아뢰기를,
"하늘이 인재를 내는 것은 여러 가지로 같지 않으나, 어찌 분당(分黨)에 뜻을 두어 낱낱이 서로 적대하도록 인재를 내겠습니까? 한천(翰薦)·홍록(弘錄)을 할 때가 되면 모두 대립하고 전랑(銓郞)의 통색(通塞)이 있을 때는 번거롭게 위에 아뢰게 되었는데, 자신이 대관(臺官)의 지위에 있으면서 아울러 논하지 못하였거니와 ‘당해(當該)’ 두 자는 구차한 데 관계되니, 종중 추고(從重推考)해야 하겠습니다. 【대간은 권현(權賢)을 가리킨 것이다.】 오늘날의 영록(瀛錄)262) 은 단지 세벌(世閥)만을 취하므로 가장 속비고 엉성한 송교명(宋敎命)과 학문이 없이 외람되게 급제한 이주진(李周鎭) 같은 자도 영선(瀛選)에 끼었습니다. 대각(臺閣)은 실로 이목(耳目)을 맡은 것인데, 대북(大北)의 후예인 유건(柳謇)과 먼 지방의 한미한 이휘항(李彙恒)과 어디서 왔는지도 모르는 박성원(朴聖源)과 종적(蹤跡)이 깨끗하지 않은 정기안(鄭基安)도 시종(侍從)·서장관(書狀官)이 되었고, 이광운(李光運)은 빚을 지고도 차출되기를 꾀하였다는 말이 낭자하게 퍼졌으니, 청컨대 개차하소서. 영백(嶺伯) 조명겸(趙明謙)은 남을 위해 꾀하여 홍록에 끼게 하고 대신(大臣)의 거짓 서찰을 만들어 내었으므로, 탄핵을 무릅쓰고 부임한 것은 작은 일일 뿐이니, 청컨대 사판(仕版)에서 삭제하소서. 영달하는 길에 무릅쓰고 있다는 말이 이미 대장(對章)에 드러났으니 오수채(吳遂采)가 천랑(天郞)263) 으로 행공(行公)하는 것은 이미 미안한 일이거니와, 정사(政事)에 임하여 혼란하였다는 말이 이미 탄핵하는 소장에 나왔으며 정석오(鄭錫五)가 태연히 행공하는 것도 자중(自重)하는 것이 아닐 것이니, 청컨대 모두 추고(推考)하소서. 전 참판(參判) 이춘제(李春躋)는 자신이 아경(亞卿)의 자리에 있으면서 더럽고 잗단 짓을 많이 하였으니, 청컨대 파직(罷職)하소서. 호조 좌랑(戶曹佐郞) 김성탁(金聖鐸)은 일찍이 능졸(陵卒)을 학대하여 상언(上言)을 당하기까지 하였으니, 태거(汰去)하소서."
하였으나, 모두 윤허하지 않았다.
임금이 좌의정 김재로(金在魯)를 인견하였다. 김재로가 전후에 유신(儒臣)을 출보(黜補)하고 파직한 일을 말하니, 모두 내천(內遷)하고 서용(敍用)하도록 윤허하였다. 전후에 이것을 말한 자가 매우 많았으나 굳게 지키고 따르려 하지 않았는데, 이때에 이르러 임금의 뜻이 조금 풀려서 비로소 윤허하였다. 약방 제조(藥房提調) 조상경(趙尙絅)이 민통수(閔通洙)의 일을 말하고 승지(承旨) 서명구(徐命九)가 심악(沈)의 일을 말하니, 모두 서용하라고 명하였다. 김재로가 또 송익휘(宋翼輝)·성유열(成有烈)·안상휘(安相徽)의 일을 말하니, 안상휘를 석방하라고 명하였다. 김재로가 또 김석일(金錫一)이 능히 곧은 말을 한 것을 매우 칭찬하였으나, 임금은 그렇게 여기지 않았다. 지평(持平) 김굉(金硡)에게 입시(入侍)하도록 명하여 그가 아뢴 것을 조목조목 물었는데, 김굉이 낱낱이 앙대(仰對)하였다. 그런 뒤에 김굉이 말하기를,
"전하께서 처음에는 신의 말을 옳게 여기셨는데 나중에는 다시 고치셨으니, 신은 참으로 개탄스럽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처음부터 옳게 여긴 일이 없었다."
하였다. 김굉이 인피(引避)하니, 물러가 물론(物論)을 기다리라고 답하였다.
10월 24일 정유
헌부(憲府) 【장령(掌令) 한봉조(韓鳳朝)이다.】 에서 전계를 다시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또 김굉이 아뢴 말에 대하여 처치하기를,
"아뢴 여러 일들에는 본디 기관(機關)이 있어서 겉으로는 가볍게 감죄(勘罪)한 듯하나 속으로는 실로 당벌(黨伐)이며 용의(用意)가 공교하고 세밀한 것은 대신(大臣)을 목표로 한 것이니, 파직(罷職)하소서."
하니, 임금이 윤허하였다. 당초 김굉이 논계(論啓)하였을 때에 임금이 그가 논한 사람을 두루 물었는데, 김굉이 응대에 조리가 있고 또 양편 사람을 섞어 거론하여 공평하고 편당(偏黨)이 없는 듯하였으므로, 임금이 함께 성실하게 수작하고 자못 도타이 장려하는 빛을 보였고, 김굉도 거드럭거리며 자득(自得)하였으나, 논박받은 자가 떠들썩하게 모두 일어나 한봉조를 시켜 조목조목 변별(辨別)하여 반박하게 하니, 임금도 김굉이 속인 것으로 의심하여 도리어 그 파직을 윤허하였다. 대개 김굉은 출신(出身)한 뒤에 사람들의 말이 있어서 괴원(槐院)에 분속(分屬)되는 것을 저지당한 것과 성질이 자못 과감하여 시의(時議)에 허여받지 못한 것을 매우 한스럽게 여겼다. 대직(臺職)이 되어서는 드디어 평소에 매우 미워하던 자를 나열하여 탄핵하였으니, 그 마음이 워낙 아름답지 못하였다. 그러나 그가 논한 바는 한두 사람을 제외하고는 또한 세상에서 지목하는 바이어서 논하여도 마땅한 자이니, 한봉조의 반박이 공론이 되지는 못하였으나 김굉은 마침내 이 때문에 여러 해 동안 벼슬길이 저지되다가 죽었다.
한계진(韓啓震)을 헌납으로, 박춘보(朴春普)를 정언으로, 조명리(趙明履)를 부교리로, 한익모(韓翼謨)를 교리로, 이도겸(李道謙)을 동지 서장관(冬至書狀官)으로, 이기진(李箕鎭)을 형조 판서로 삼았다.
이날 큰 바람이 불어 태묘(太廟) 전사청(典祀廳)의 남문이 쓰러졌다. 위안제(慰安祭)를 거행하고 곧 고쳐 세우게 하라고 명하였다.
대사간(大司諫) 윤급(尹汲)이 상소하여 경계를 아뢰니, 예사 비답을 내렸다.
10월 27일 경자
밤에 천둥하고 번개가 쳤다.
장령(掌令) 이휘항(李彙恒)이 상소하여 김굉(金硡)이 논한 것에 대하여 변명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본디 먼 지방에 있었으므로, ‘대대로 선비의 소행을 전하였다.[世傳儒素]’는 넉 자의 구단(句斷)은 워낙 마음에 감수한 바이거니와, 신도 서울의 반명(班名)에 김굉이 있다는 말을 듣지 못하였습니다. 그는 본디 경기(京畿)의 미천한 필부(匹夫)인데 부정하게 사대부 줄에 이름이 들어 소하(疏下)인 역적 정해(鄭楷)의 집에서 길러지고 명의(名義)를 원수로 보는 무리에게 아부하였습니다. 또 이주진(李周鎭)은 호번(湖藩)에 있을 때에 위명(威名)이 있었으나 간사한 자에게 탄핵받고 돈을 모아 쫓으려고 꾀한다는 말이 무명(無名)의 서찰에 나오기까지 하였는데, 논박하여 쫓으려는 계청(啓請)이 문득 이 즈음에 일어났으니, 문로(門路)의 맥락이 서로 잇단 듯합니다."
하니, 예사 비답을 내렸다.
10월 28일 신축
좌의정 김재로(金在魯)가 차자(箚子)를 올려 김굉(金硡)의 치우치고 어그러지며 당벌(黨伐)하는 사사로움을 논하고 또 천둥의 이변을 거론하여 경계를 아뢰니, 예사 비답을 내렸다.
홍계유(洪啓裕)를 교리로, 조명리(趙明履)를 부교리로, 권영(權瑩)을 수찬으로, 서명신(徐命臣)·홍창한(洪昌漢)을 부수찬으로, 이창의(李昌誼)를 지평으로 삼았다.
헌부(憲府) 【장령(掌令) 한봉조(韓鳳朝)이다.】 에서 전계를 다시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풍기 군수(豐基郡守) 홍심(洪瞫)은 석방되어 부임할 때에 스스로 인퇴(引退)하여 체직되지 않았고, 안산 군수(安山郡守) 안건(安健)은 일찍이 동읍(東邑)을 맡았을 때에 명예를 얻으려고 스스로 비(碑)를 세웠고 본읍을 맡게 되어서는 또 산송(山訟)의 탈옥(脫獄)한 자 때문에 사족(士族)의 부녀자를 대신 가두었으니, 청컨대 모두 파직(罷職)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10월 30일 계묘
영의정 이광좌(李光佐)가 상소하여 천둥의 이변 때문에 경계를 아뢰고 또 열아홉 달 동안 헛되이 정승 벼슬에 무릅쓰고 있으며 병이 위독한 정상을 말하니, 예사 비답을 내렸다.
예조 참판(禮曹參判) 박사정(朴師正)이 졸(卒)하였다. 박사정은 금양위(錦陽尉) 박미(朴瀰)의 후손인데, 젊어서 급제하여 화요직(華要職)을 지냈다. 그 아들 박명원(朴明源)이 옹주(翁主)에게 장가들었으므로 묘당(廟堂)에서 아경(亞卿)에 올리도록 천거하니 임금이 바야흐로 등용하려 하였는데, 갑자기 앓다가 졸하였다. 영의정을 증직(贈職)하라고 명하였다.
이기헌(李箕獻)을 장령으로, 이성해(李聖海)를 지평으로, 박필재(朴弼載)를 헌납으로, 유언협(兪彦協)을 정언으로, 송교명(宋敎明)을 교리로, 한익모(韓翼謨)를 수찬으로, 조윤재(曹允濟)를 사서로 삼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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