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영조실록50권, 영조 15년 1739년 11월

싸라리리 2025. 9. 23. 11: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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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1일 갑진

부교리(副校理) 조명리(趙明履)가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전하의 지나친 거조(擧措)를 전하께서는 다시 생각하셨습니까? 예전에도 간관(諫官)의 말을 그 임금이 또한 어찌 듣기 싫어하는 뜻이 없었겠습니까마는, 역적을 다스리는 형구(刑具)를 그 몸에 가하였다는 말을 듣지 못하였습니다. 간관의 한 마디 말이 합당하지 않았다 하여 문득 삼목(三木)264)  의 벌을 받는다면 어찌 말하는 자가 있겠습니까?"
하였는데, 예사 비답을 내렸다.

 

11월 2일 을사

부사직(副司直) 유건(柳謇)이, 김굉(金硡)이 아뢰어 논한 일 때문에 상소하여 스스로 변명하기를,
"신의 고조(高祖)인 참판(參判) 신(臣) 유숙(柳潚)은 광해(光海)정사년265)  에 아비를 잃고 기미년266)  에 어미를 잃어 6년 동안 잇달아 초토(草土)에 있었는데 멸륜(滅倫)의 논의는 무오년267)  에 있었으니, 흉론(凶論)에 참여하지 않은 것은 본디 저절로 명백합니다. 복을 벗은 뒤에는 대사간(大司諫)으로서 맨 먼저 이이첨(李爾瞻)의 권세를 오로지 하고 도당(徒黨)을 늘리고 윤리를 무너뜨리고 기강을 어지럽힌 죄를 논하되 이임보(李林甫)가 도를 행하는 체하고 붕당을 만든 일을 거론하기까지 하여 극률(極律)을 가하기를 청하였다가 적신(賊臣) 윤인(尹訒) 등에게 무함당하여 도륙(屠㦻)될 뻔하기도 하였습니다. 반정(反正) 뒤에 이르러서는 계부(季父) 유몽인(柳夢寅) 때문에 연좌되어 귀양갔으나 곧 석방되고 병조 참판(兵曹參判)에 제배(除拜)되었으며, 신의 증조(曾祖)와 종조(從祖)도 여러 번 주군(州郡)을 맡았는데 이름이 천섬(薦剡)268)  에 올랐었습니다. 이제 김굉이 버젓이 공교하게 거짓말하여 방자하게 임금을 속였으니, 청컨대 엄히 징계하여 지하의 원통함을 풀어 주소서."
하니, 비답을 내려 환히 풀었다고 유시하였다.

 

11월 3일 병오

밤에 유성(流星)이 동정성(東井星) 아래에서 나와 서방으로 들어갔는데, 모양이 주먹 같고, 꼬리의 길이가 3, 4척이며, 빛깔은 붉은 색이었다.

 

임금이 소대(召對)를 행하고, 동지 정사(冬至正使) 능창군(綾昌君) 이숙(李橚)·부사(副使) 이광덕(李匡德)·서장관(書狀官) 이도겸(李道謙)을 인견하였다. 이광덕이 일 때문에 경계를 아뢰고 희노(喜怒)를 절제하고 심기(心氣)를 화평하게 하고 직언(直言)하는 자를 진용(進用)하고 아첨하는 자를 물리치기를 청하니, 임금이 가납(嘉納)하고 《명사(明史)》 전질(全帙)을 사 오라고 명하였다.

 

11월 4일 정미

임금이 소대(召對)를 행하였다. 임금이 양찬규(梁纘揆)의 일이 있고 나서부터 마음이 늘 편치 않다는 하교가 있었으므로, 시독관(侍讀官) 조명리(趙明履)가 반복하여 권면(勸勉)을 아뢰니, 임금이 말하기를,
"내가 저 역적에게 욕본 것은 뭇 신하가 눈으로 본 바이다. 이 역적의 빌미가 신축년269)  과 임인년270)  의 일에서 말미암았으니, 생각하고 또 생각하여도 어찌 마음이 아프지 않겠는가?"
하였다.

 

11월 5일 무신

임금이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우의정 유척기(兪拓基)가, 이휘항(李彙恒)이 도리어 김굉(金硡)을 욕한 말이 매우 놀랍다 하여 파직(罷職)하기를 청하고 서명균(徐命均)을 특별히 파직한 지 세월이 오래 된 것은 대신을 대우하는 도리가 아니라 하여 서용(敍用)하기를 청하니, 모두 그대로 따랐다. 총융사(摠戎使) 구성임(具聖任)이 말하기를,
"전부터 무변(武弁)은 한 번 방어사(防禦使)를 지내면 반드시 곤망(閫望)271)  에 통하였는데, 근래에는 반드시 변지(邊地)를 겪고 나서야 비로소 곤망에 통하기 때문에 늙은 어버이가 있어서 변지에 부임하지 못한 자는 앞으로 통할 수 없을 것이니, 대신·전관(銓官)에게 하문하여 처치하소서."
하니, 임금이 하문하였다. 모두 방어사와 변지를 겪은 자를 마찬가지로 쓰기를 청하니, 임금이 방어사만을 지낸 자도 곤망에 주의(注擬)하라고 명하였다. 훈련 대장(訓鍊大將) 김성응(金聖應)이 부산(釜山)도 변지로 삼기를 청하니, 또한 그대로 따랐다. 장령(掌令) 한봉조(韓鳳朝)가 전계를 다시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이산 부사(理山府使) 황응수(黃應洙)는 물의가 있으므로 대관(臺官)이 그 배리(陪吏)를 가두었는데도 태연히 무릅쓰고 부임하였으니, 청컨대 파직(罷職)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오수채(吳遂采)를 부응교로, 서종급(徐宗伋)을 이조 참판으로, 이수항(李壽沆)을 예조 참판으로, 서명균(徐命均)을 판부사로 삼았다.

 

11월 6일 기유

밤에 번개가 쳤다.

 

11월 7일 경술

좌의정 김재로(金在魯)가 차자를 올려 병을 이유로 면직(免職)을 청하였다. 대개 이광좌(李光佐)와 자리를 같이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11월 8일 신해

정실(鄭實)을 지평으로, 신수(申𢢝)를 헌납으로, 정석오(鄭錫五)를 호조 참판으로 삼았다.

 

좌참찬(左參贊) 조현명(趙顯命)이 변읍(邊邑)을 겪지 않아도 곤망(閫望)에 주의(注擬)할 수 있게 한 일 때문에 상소하기를,
"법은 천하의 공평한 것입니다. 한두 사람이 사사로이 불편하다고 생각한다 하여 문득 고친다면 법이라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법이 이미 한 번 정해진 뒤에 세력이 있는 자가 옆으로 한 가닥 구차한 길을 파서 신진(新進)이 조경(躁競)을 생각하는 것이 나라의 체모에는 어떠하겠습니까? 인정(人情)은 능가하고 공법(公法)은 무너져 변읍의 법이 장차 폐기되고 곤수(閫帥)가 가족을 데려가는 길이 또한 차차로 열릴 것이니, 어찌 한심하지 않겠습니까? 두 무장(武將)은 경책(警責)해야 하겠고 방어사(防禦使)만을 지내도 곤망에 주의할 수 있게 하라는 명은 빨리 도로 거두어야 하겠습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입시(入侍) 때에 하교하겠다."
하였다.

 

11월 10일 계축

윤득화(尹得和)를 승지로, 송징계(宋徵啓)를 대사간으로, 윤급(尹汲)을 대사성으로 삼고, 남취명(南就明)을 자헌 대부(資憲大夫)로 가자(加資)하였다.

 

헌부(憲府)에서 전계를 다시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소대(召對)를 행하였다.

 

11월 11일 갑인

민통수(閔通洙)가 전 교리(校理)로서 수천 마디 말로 상소하여 이광좌(李光佐)의 대소(對疏)가 거짓임을 변명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아! 선신(先臣)이 을사년272)  에 조정에 돌아와 국세(國勢)와 인심(人心)이 밤낮으로 우려하고 분개하는 것을 보고 한 통의 글을 지어 간흉(奸凶)들이 엄폐하고 마음대로 농간하여 국가를 해친 정상을 종묘(宗廟)에 고하고 반시(頒示)하기를 청한 것은 그 뜻에 주장하는 바가 있으니, 선왕(先王)의 질병을 종묘에 고하려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고한 것은 대개 간흉들의 죄상인데 다만 글 가운데에서 성질(聖疾)을 숨기지 않았을 뿐이었습니다. 무신년273)  의 역변(逆變)으로 보면, 숨기지 않는 것이 반역이겠습니까, 숨기는 것이 반역이겠습니까? 흉악한 글과 역적의 격문이 중외(中外)에서 번갈아 나타나 화란(禍亂)이 일어나는 것이 호흡 사이에 임박하여 있을 때를 당하여 이광좌의 연주(筵奏)가 실로 그 즈음에 있었는데, 위로 전하를 협지하고 아래로 선신을 무함한 것이 모두 역적의 형세를 도와 이루기 위한 것이었고, 선신이 귀양가게 되어서는 대란(大亂)이 곧 일어났습니다. 근년에 윤회(尹會)가 선신을 용서하는 명을 거두기를 청하며 선후(先后)께서 매우 미워하셨다는 말을 하였는데, 이광좌가 억누르고 속이는 것은 윤회보다 열 배나 더하였습니다. 근년에 박필몽(朴弼夢)이 선신의 말을 남의 숨은 흠을 드러내는 것이라 하였는데, 이제 이광좌가 거짓으로 꾸며서 범하는 것은 박필몽과 같은 마음입니다.
시약청(侍藥廳)을 설치하지 않은 일은 이광좌가 스스로 해명하지 못하고 오직 항변만을 일삼을 뿐입니다. 신의 형의 상소에 대해서는 전례에 따라 차마 거론할 수 없었다 하고, 윤섭(尹涉)의 상소에 대해서는 따로 돕는 자가 없어 초조하여 겨를이 없었다 하고, 이흡(李潝)의 상소에 대해서는 또 청명(廳名)을 두는 것도 오히려 딴 일이니 워낙 겨를이 없던 것은 물론이라 하였습니다. 하나는 설치해야 하는 줄 알고도 차마 못하였다는 것이고, 하나는 일깨워 주는 사람이 없어서 잊었다는 것이고, 하나는 다른 일이어서 할 것도 못되는 것으로 알았다는 것이니, 그 말이 여러 번 바뀌어 때에 따라 적당히 처치한 것입니다. 이제 그 말에 또, ‘처음에는 차마 전례에 따를 수 없었고 나중에는 망극하여 겨를이 없었다.’ 하였는데, 그 ‘처음과 나중[初末]’ 두 자로 보면, 성후(聖候)가 이미 시약청을 설치할 지경에 이른 지 대개 또한 여러 날이 되었을 것입니다. 이광좌가 신축년274)  ·임인년275)   이래로 전혀 꺼리지 않아서 전하의 교문(敎文)이 이미 나온 뒤에 역적 김일경(金一鏡)을 초탁(超擢)하여 사마(司馬)276)  의 장(長)으로 주의(注擬)하되 마치 공로를 갚은 것처럼 하였고, 김동필(金東弼)이 비유를 댄 것이 의리에 어그러진다고 한 말은 고요하기 짝이 없는데도 이광좌는 오히려 노하여 전관(銓官)을 시켜 외읍(外邑)으로 내치게 하였으니, 그들 가운데의 우두머리가 되어 나라를 해치는 일에 몰래 주장하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흉악한 말이 심유현(沈維賢)에게서 비롯하였는데 심유현은 곧 이광좌의 내외종질(內外從姪)이며, 임금을 욕한 무리는 거의 다 이광좌의 문생(門生)과 그가 일찍이 천장(薦奬)하던 자입니다. 이광좌가 당초에 숨긴 일이 없다면 이들이 어디를 믿고 이처럼 날뛰겠습니까? 이광좌가 상소하여 아뢰면 으레 신과 함께 사패(司敗)에 내리기를 청하는데, 신이 이광좌와 함께 사패에 내려져 사실과 죄를 명백히 정한다면 실로 밤낮으로 매우 바라던 자입니다."
하였는데, 임금이 도로 주라고 명하였다.

 

종실(宗室) 남양수(南陽守) 이영(李煐)이 상소하여 동조(東朝)의 존호(尊號)를 올리기를 청하니, 임금이 자전(慈殿)의 뜻이 겸양하므로 감히 굳이 아뢸 수 없다고 비답하였다.

 

형조 판서(刑曹判書) 이기진(李箕鎭)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겨울 천둥의 이변이 올 겨울처럼 심한 적이 없었습니다. 천둥의 이변이 있었던 당초에 윤음(綸音)을 크게 내어 반복하여 정녕히 하시어 성궁(聖躬)을 책망하고 뭇 신하를 경계하시는 방도가 뼈를 찌르고 마음을 아프게 하니, 읽는 자는 저절로 훌쩍훌쩍 울고 듣는 자는 거의 눈물을 흘렸습니다. 신은 인정(人情)이 이러하면 천심(天心)을 기대할 수 있다고 생각하였으나, 이변이 다시 일어나고 세 번 일어나게 되어서는 천심이 편안해지기를 바랄 수 없고 인정도 도리어 여러 번 보는 데에 익숙해졌는데, 전일처럼 애통해 하시는 분부는 다시 들리지 않았습니다. 대저 하늘에 성실하게 응답하여 덕을 닦고 허물을 살피는 실속을 다하려면 그 요체는 성학(聖學)에 힘쓰고 유술(儒術)을 숭상하고 언로(言路)를 넓히고 백성의 고통을 돌보고 형상(刑賞)을 삼가고 시비를 밝히는 데에 있을 뿐입니다. 재변(災變)을 그치게 하는 방책으로 어찌 이보다 큰 것이 있겠습니까? 긴 밤을 근심하고 탄식하느라 잠을 이루지 못하고 앉아서 새벽을 기다려 상소하여 우충(愚忠)을 아룁니다."
하였는데, 예사 비답을 내렸다.

 

임금이 소대(召對)를 행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내가 지난번 김굉(金硡)에게 속았다."
하니, 참찬관(參贊官) 윤득화(尹得和)가 말하기를,
"김굉의 용의(用意)는 참으로 통탄스럽고 한봉조(韓鳳朝)의 처치(處置)도 그릅니다. 김굉의 아뢴 말에 대각(臺閣)의 부끄러운 일이 많았는데, 이것은 노하지 않고 다만 논박받은 사람들을 위하여 해명하는 듯하였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요즈음 사람은 소견이 높지 못하다. 한봉조 같은 자는 저편을 배척하기에 바쁘기 때문이다."
하였다.

 

11월 12일 을묘

경상 감사(慶尙監司) 정익하(鄭益河)가 형 정관하(鄭觀河)가 바야흐로 도내(道內) 영천(永川)의 수령(守令)이 되었다 하여 상소하여 면직(免職)을 청하니, 임금이 그 소를 머물게 하여 비답을 내리지 않았다.

 

11월 13일 병진

밤에 달이 필성(畢星)을 범하였다.

 

영의정 이광좌(李光佐)가 민통수(閔通洙)의 상소 때문에 명소(命召)를 반납하고 대명(待命)하니, 사관(史官)을 보내어 전수(傳授)하고 대명하지 말라고 명하였다.

 

우의정 유척기(兪拓基)가 정익하(鄭益河)의 일 때문에 차자를 올려 조카와 아우가 방백(方伯)이 되고 숙부와 형이 수령이 되면 상피(相避)로 대신할 사람을 차출하나 방백은 인혐(引嫌)하는 규례가 없다고 말하고 홍중하(洪重夏)·김시환(金始煥)·윤지인(尹趾仁)의 전례를 인용하여 정익하에게 부임하도록 재촉하기를 청하니, 그대로 따랐다.

 

11월 14일 정사

소대(召對)를 행하였다.

 

정언섭(鄭彦燮)을 도승지로, 신만(申晩)을 부제학으로, 홍봉조(洪鳳祚)를 부응교로, 김유경(金有慶)을 평안도 관찰사로 삼았다.

 

11월 17일 경신

밤에 달이 토성(土星)을 가렸다.

 

임금이 소대(召對)를 행하였다. 이때 조관빈(趙觀彬)이 친국(親鞫)을 분문(奔問)하러 왔다. 참찬관(參贊官) 서명구(徐命九)가 말하기를,
"민형수(閔亨洙) 형제와 조관빈은 나와서 종사(從仕)하여 보답하려고 마음먹고 다시는 전과 같이 상소하지 않을 것입니다."
하고, 또 조관빈은 수작한 말을 아뢰니, 임금이 기뻐하였다. 이 뒤에 민형수가 등용되고 조관빈도 출사(出仕)하였다.

 

11월 18일 신유

밤에 달무리가 토성(土星)을 둘렀다.

 

예문 제학(藝文提學) 서종급(徐宗伋)에게 명하여 태학(太學)에서 감귤(柑橘)을 나누어 주고 이어서 선비를 시험하게 하였다. 으뜸을 차지한 진사(進仕) 임박(任璞)에게 급제(及第)를 내렸다.

 

11월 19일 임술

정언(正言) 유언협(兪彦協)이 상소하여 임금이 마음을 화평하게 하지 못하여 여러 번 지나친 일을 하고 성색(聲色)이 갑자기 변하므로 뭇 신하가 두려워한다고 경계를 아뢰고, 또 산림(山林)의 유자(儒者)를 널리 불러 의리를 강명(講明)하고 징토(懲討)하는 논의를 막지 말아서 온 세상이 모두 신하의 의리를 알게 하기를 청하니, 예사 비답을 내렸다.

 

임금이 경상 감사(慶尙監司) 정익하(鄭益河)를 인견하여 ‘용사적자(龍蛇赤子)’ 이니 ‘주중적국(舟中敵國)’이니 하는 말로 반복하여 칙유하였다. 대개 영남(嶺南)을 진정시키려 한 것이었다.

 

11월 20일 계해

승지(承旨)를 보내어 가벼운 죄수를 석방하게 하였는데, 날씨가 매우 춥기 때문이었다.

 

11월 21일 갑자

비가 내렸다.

 

정석오(鄭錫五)를 도승지로, 오원(吳瑗)을 이조 참의로, 박수(朴璲)를 장령으로, 홍상한(洪象漢)을 지평으로, 이덕중(李德重)을 응교로, 김상석(金相奭)을 교리로, 유최기(兪最基)를 수찬으로, 권혁(權爀)을 대사성으로 삼았다.

 

주강(晝講)을 행하고 또 석강(夕講)을 행하였다.

 

영의정 이광좌(李光佐)가 상소하여 민통수(閔通洙)의 소(疏)에 대하여 변명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신이 변변치 못하기는 하나 애초에 어찌 민형수 등과 쓸데없는 말을 벌이려 하겠습니까마는, 병환을 숨겼다는 말이 망극하므로 변명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신이 연주(筵奏)한 것은 12년 전의 일이니, 반드시 변명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 세 형제가 다 자라서 벼슬하였는데 어찌 변명할 수 없었기에 12년 동안 감수(甘受)하며 신이 오늘날 두 번 상소한 뒤를 기다리겠습니까? 아버지의 원한을 푼다고 칭하나 하나도 말이 되는 것이 없고 오직 스스로 변화하고 흙탕물 속에서 이랬다저랬다 할 뿐입니다. 더구나 제외(題外)의 참혹한 무함은 또 다 이양신(李亮臣)의 여투(餘套)를 주어 모은 것이고, 전관(銓官)을 부추겨 외보(外補)하게 하였다는 말은 또 근거 없는 가운데에서 갑자기 마련한 것입니다. 고(故) 판서 김동필(金東弼)은 한 소(疏) 가운데에서 이미 역적 김일경(金一鏡)을 논하고 나서 또 신을 구제하였는데, 신이 전관을 부추겨 김동필을 외보하게 할 수 있겠습니까? 그가 이제 신의 연주와 소어(疏語)에 대하여 구절마다 주해(註解)하여 그 아비를 위하여 원한을 씻는다고 하면서 그 아비가 임징하(任徵夏)와 죄를 같이 받기를 바란 일에 대해서는 한 마디도 언급하지 않으니, 신이 이른바 그 마음을 알 만하다고 한 것을 분명하여 엄폐할 수 없을 것입니다."
하였는데, 비답하기를,
"이 사람이 경(卿)에게 마음껏 원한을 갚는 것은 상하가 다 아는데, 어찌 개의할 만하겠는가?"

 

11월 22일 을축

비가 내렸다.

 

11월 23일 병인

겨울 비가 그치지 않았기 때문에 삼명일(三名日)의 방물(方物)과 삭선(朔膳)을 줄이라고 명하였다.

 

우의정(右議政) 유척기(兪拓基)가 차자를 올려 연차(聯箚)한 대신(大臣) 김창집(金昌集)·이이명(李頣命)을 신설(伸雪)하고 그 벼슬을 회복시키기를 청하니, 비답하기를,
"면대하여 유시하겠다."
하고, 이어서 원차(原箚)를 유중(留中)277)  하라고 명하였다.

 

소대(召對)를 행하였다.

 

조현명(趙顯命)을 판윤으로, 이춘제(李春躋)를 호조 참판으로, 윤혜교(尹惠敎)를 지경연(知經筵)으로 삼았다.

 

11월 24일 정묘

임금이 대신(大臣)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이어서 주강(晝講)을 행하였는데, 동궁(東宮)에게 명하여 시좌(侍坐)하게 하였다. 강독(講讀)이 끝나고서 임금이 우의정        유척기(兪拓基)에게 명하여 앞으로 나오게 하여 하교하기를,
"경(卿)이 차자를 올린 대체를 내가 어찌 모르겠는가? 기유년278)                  의 하교에 이미 모두 말하였거니와, 풍원(豐原)279)                  을 같이 들어오게 한 데에는 내 뜻이 있어서였다. 지금의 여러 신하들은 나에게 만족하게 여기지 않는 것이 있으나, 내가 굳게 지키지 않으면 반드시 어지러운 일이 많을 것이다."
하고, 이어서 조현명에게 하문하니, 조현명이 말하기를,
"기유년의 처분 때에도 신이 말의(末議)에 참여하여 들었습니다. 그때의 처분이 옳았다면 오늘날의 신복(伸復)이 옳지 않을 것이고, 오늘날의 신복이 옳다면 신은 본디 대죄(待罪)하기에 겨를이 없을 것인데 어찌 의논할 수 있겠습니까?"
하니, 유척기가 면전에서 배척하여 말하기를,
"조현명이 아뢴 것은 성실하지 않습니다."
하고, 이어서 전일 그의 형 조문명(趙文命)과 수작한 말을 거론하여 아뢰기를,
"조문명이 추탈(追奪)을 지나치다고 말하였으므로 신도 조현명과 이 일을 말하였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풍원이 인혐(引嫌)하고 말하지 않은 것은 갈등이 있는 것으로 염려한 것이다."
하였다. 유척기가 또 말하기를,
"연차(聯箚)한 것은 마찬가지인데, 반은 신복하고 반은 신복하지 않았으니, 사리에 있어서 어찌 크게 어그러지지 않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아직 신복하지 않은 자는 그 아들과 손자의 죄 때문이고 연차한 일 때문이 아니다."
하였다. 유척기가 또 반복하여 힘써 말하고, 승지(承旨)        윤득화(尹得和)·우참찬(右參贊)        윤양래(尹陽來) 등이 잇달아 말하였다. 유척기가 또 말하기를,
"날이 어두워졌으므로 물러갔다가 글로 다시 아뢰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어찌 신복할 만한 때가 없겠는가? 뭇 신하가 번거롭고 시끄럽게 하여 과격한 일이 있으면 도리어 이루어질 수 없을 것이다."
하였다.

 

윤양래(尹陽來)를 대사헌으로, 남태량(南泰良)을 대사간으로, 이광운(李光運)을 사간으로, 정희규(鄭熙揆)·송수겸(宋守謙)을 장령으로, 조정(趙珽)을 헌납으로, 박춘보(朴春普)·김상적(金尙迪)을 지평으로, 유우기(兪宇基)·홍계희(洪啓禧)를 정언으로, 홍현보(洪鉉輔)를 우참찬으로, 유언국(兪彦國)을 설서(說書)로 삼았다.

 

11월 25일 무진

주강(晝講)·석강(夕講)을 행하였다.

 

홍문관(弘文館)에 명하여 신록(新錄)을 행하게 하였는데, 관관(館官)이 외방(外方)에 많이 있으므로 서울에 있는 요원(僚員)만으로 회권(會圈)하기를 청하니, 그대로 따랐다. 부제학 신만(申晩)·응교 이덕중(李德重)·수찬 유최기(兪最基)·교리 조명리(趙明履)·홍계유(洪啓裕) 5인이 회권하여 김시찬(金時粲)·한억증(韓億增) 등 21인을 뽑았다.

 

11월 26일 기사

이덕중(李德重)을 사간으로, 권해(權賅)를 장령으로, 홍계유(洪啓裕)·조윤제(曹允濟)를 지평으로, 윤득경(尹得敬)을 정언으로, 김상철(金尙喆)을 설서(說書)로 삼았다.

 

임금이 희정당(熙政堂)에 나아가 초복(初覆)280)  을 행하였다. 사간(司諫) 이덕중(李德重)이 전계를 다시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지평(持平) 홍계유(洪啓裕)가 전계를 다시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11월 27일 경오

임금이 시민당(時敏堂)에 나아가고 약방(藥房)에서 입시(入侍)하였는데 동궁(東宮)도 시좌(侍坐)하였다. 약방 제조(藥房提調) 김흥경(金興慶)이 동궁의 강독(講讀)·습서(習書)를 묻고 이어서 필적(筆蹟)을 보기를 청하니, 임금이 중관(中官)에게 명하여 종이 셋을 가져다가 보이게 하였는데, 세 제조(提調)가 각각 나누어 가졌다. 임금이 동궁을 돌아보고 말하기를,
"하번 사관(下番史官)은 풍패 고향(豐沛故鄕) 사람이다."
하고, 다시 종이 하나에 써서 내리라고 명하고 말하기를,
"하늘은 땅의 높낮이를 가리지 않고 고루 덮으니, 임금이 신하를 보는 것도 어찌 멀고 가까운 것으로 차이를 두겠는가?"
하였다. 동궁이 ‘효제 충신(孝悌忠信)’ 넉 자를 쓰니, 임금이 승지(承旨)에게 명하여 겸사(兼史) 위창조(魏昌祖)에게 전하여 주게 하였다.

 

11월 28일 신미

유건(柳謇)을 장령으로, 윤상임(尹尙任)을 정언으로, 김광세(金光世)를 교리로, 김진상(金鎭商)을 부제학으로, 송성명(宋成明)을 공조 판서로, 윤혜교(尹惠敎)를 좌참찬으로 삼았다.

 

부사직(副司直) 조명겸(趙明謙)이 상소하여 김굉(金硡)의 말에 대하여 변명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신이 관직(館職)이 있어 신록(新錄)을 당하였을 때에 신이 전 지평(持平) 이수해(李壽海)를 천거하였습니다. 그 뒤에 일종의 근거 없는 말에, ‘이수해가 대신(大臣)의 서찰을 받아 위중(威重)한 데에 의지하려 하였다.’ 하였습니다마는, 이수해는 애초에 글을 받아 전한 일이 없으니, 신이 무슨 글을 동료 관원에게 보였겠습니까? 신은 풍질(風疾)을 앓는 사람이 아니니, 또한 어찌 공회(公會)에서 사서(私書)를 내어 보이겠습니까? 남을 무함하기에 바빠서 변환(變幻)하고 근거 없는 말을 하여 신이 갑자기 거짓 서찰을 내어 제방(制防)하는 묘책(妙策)으로 삼으려 하였다 하니, 어찌 그의 머리 위에도 해와 하늘이 있다는 것을 생각하지 않은 것입니까?"
하였는데, 예사 비답을 내렸다.

 

11월 29일 임신

임금이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우의정 유척기(兪拓基)가 성천 부사(成川府使)를 이제부터 문신 당상(文臣堂上)과 곤수(閫帥)를 지낸 무신(武臣)으로 제배(除拜)하기를 청하였다. 대개 그 체모를 높여서 소속 고을을 억누르려는 것이었다. 또, 덕적도(德積島)에 진(鎭)을 설치하고 첨사(僉使)를 두기를 청하였다. 당초에 송인명(宋寅明)이 이것을 건백(建白)하였는데 유척기의 뜻도 같았으므로 청한 것이다. 모두 그대로 따랐다. 임금이 변지(邊地)를 겪지 않은 사람도 곤망(閫望)에 주의(注擬)할 수 있게 하는 일을 여러 신하들에게 물었는데, 판윤(判尹) 조현명(趙顯命)이 전에 의논한 것을 힘껏 지켜 불가하다고 하니, 전에 하교한 것을 거두라고 명하였다. 유척기가 말하기를,
"변지 수령(守令)의 임기를 스무 달로 하는 것은 너무 머니, 1주년으로 한하되 기한 안에는 옮기지 못하도록 정식(定式)으로 나타내소서."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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