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 1일 계유
허옥(許沃)을 사간으로, 이성중(李成中)을 정언으로, 이제담(李齊聃)을 장령으로, 정실(鄭實)을 지평으로, 이덕중(李德重)을 응교로, 홍계유(洪啓裕)를 수찬으로, 신사철(申恩喆)을 예조 판서로 삼았다.
임금이 선정전(宣政殿)에 나아가 상참(常參)을 행하였다. 김중만(金重萬)에게 벼슬을 제수(除授)하라고 명하였다. 김중만은 무신년281) 에 고변(告變)하여 녹훈(錄勳)된 자인데 일찍이 첨사(僉使)를 제수하였으나 하고(下考)를 받았으므로, 파산(罷散)된 지 자못 오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친공신(親功臣)을 오래 버려두고 쓰지 않으면 누가 다시 나라를 위하여 힘을 다하겠는가?"
하고, 양전(兩銓)에 명하여 벼슬을 제수하게 하였다. 헌납(獻納) 조정(趙侹)이 전계를 다시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임금이 주강(晝講)을 행하였다. 《춘추전(春秋傳)》을 강독(講讀)하였는데, 진 목공(秦穆公)의 일에 이르러 시강관(侍講官) 이덕중(李德重)이 말하기를,
"《서경(書經)》에 진서(秦誓)를 실은 것은 허물을 뉘우친 것을 취한 것인데, 마음에서 뉘우친 지 오래지 않아 또 군사를 일으켰으므로 비난하였습니다. 그러므로 군자(君子)는 허물을 거듭하지 않는 것을 귀하게 여깁니다. 《역경(易經)》 복괘(復卦)에는 멀지 않아 돌아오는 것을 귀하게 여겼는데, 돌아오는 일에 마음이 현혹되면 어려워질 것입니다. 신이 봄에 아뢴 바가 있거니와, 전하께서도 허물을 거듭하지 않는 것에 유의하시면 좋겠습니다."
하였는데, 임금이 말하기를,
"사람이 누구인들 허물이 없겠는가? 고치는 것이 귀중하다. 유신(儒臣)이 허물을 거듭하지 않는 것을 말할지라도 봄에 있었던 일은 시기가 아니라고 말해야 옳았을 것이다. 지나친 거조라고 한다면 내가 승복하지 않을 것이다."
하니, 여러 신하들이 잠시 물러갔다. 이어서 석강(夕講)을 명하였다.
12월 3일 을해
임금이 희정당(熙政堂)에 나아가 삼복(三覆)을 행하였다. 옥당(玉堂) 이덕중(李德重)·홍계유(洪啓裕)가 곧 들어오지 않았다 하여 종중 추고(從重推考)하라고 명하였다. 이덕중 등이 인의(引義)하여 지레 나갔다. 이때 사형으로 결단된 자가 7인이고 감면받은 자가 4인이었다. 상주(尙州)의 죄인 김재태(金再太)는 주토(朱土)로 인적(印符)을 본떠 종이에 칠하여 간사한 짓을 하였다. 일이 드러나 본주(本州)의 목사가 인부(印符)를 위조한 죄로 감사(監司)에게 신보(申報)하니, 감사가 사율(死律)로 견주어 조정에 올렸다. 삼복에 이르러 임금이 종이에 칠하여 인형(印形)을 만든 것은 위인(僞印)을 새겨 만든 것과 차이가 있고 또 그 정상이 궁급(窮急)한 데에서 말미암았으므로 불쌍하다 하여 특별히 차율(次律)에 두고 여러 신하들에게 하문하였는데, 여러 신하들이 다 임금의 뜻과 같다고 대답하였다. 대관(臺官) 이재담(李齊聃)도 그렇게 말하였는데, 이판(吏判) 조상경(趙尙炯)이 말하기를,
"양사(兩司)는 옥당(玉堂)과 다르므로 의당 다투어야 할 것인데 다투지 않고 있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법을 집행하는 관원일지라도 어찌 다투지 말아야 할 것을 다툴 수 있겠는가?"
하였다. 계복(啓覆)이 끝나고서 이제담과 조정(趙侹)이 아뢰기를,
"자신이 법을 집행하는 관원으로서 오히려 가벼운 쪽을 따르는 논의를 하고 중신(重臣)의 말을 듣게 되어서야 비로소 직분을 다하지 못한 잘못을 깨달았습니다."
하고, 인죄(引罪)하고 나갔는데, 사직하지 말라고 명하였다. 황해 수영(黃海水營)의 장계(狀啓)를 훔쳐 고친 죄인 이여관(李汝寬)·김운형(金運亨)과 수영의 아객(衙客)과 장계를 가져가는 사람이 공모하여 계본(啓本)을 뜯어 무시방(務試榜)에 들지 않은 사람의 성명을 방목(榜目) 가운데에 보태어 썼는데 일이 발각되었다. 임금이 여러 신하들에게 하문하였는데, 다들 말하기를,
"이것은 전에 없던 변입니다. 의당 중률(重律)로 논해야 하겠습니다."
하고, 우의정 유척기(兪拓基)가 말하기를,
"율문(律文)을 살펴보면, 각 아문(衙門)에서 올린 글이 어전(御前)에 이르기도 전에 상사관(上司官)으로서 막아 두거나 돌려보낸 자는 참형(斬刑)에 처한다는 글이 있는데, 대개 상사관이 자기에게 해로운 것이 있는 것을 염려하여 막아 두거나 돌려보낸 자는 죄가 죽어 합당하기 때문입니다. 이제 이여관 등은 아객으로서 자기에게 이롭기를 꾀하느라 올리는 글을 막아 두고 고쳐 썼으니, 널리 고율(古律)에 비추어 보더라도 죽어도 남는 죄가 있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일이 발각되었을 때에 그곳에서 효시(梟示)하면 괜찮겠으나, 이미 법사(法司)에 이르렀으니 법외(法外)로 율문을 적용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하고, 대신(大臣)에게 의논하여 품처(稟處)하라고 명하였다.
사신은 말한다. "법은 천하의 공평을 지키는 것이다. 죄인이 범한 것이 무거운데 가볍게 하려 하는 것은 공평을 잃은 것이고, 범한 것이 가벼운데 무겁게 하려 하는 것도 이 또한 공평을 잃은 것이니, 이러한 것은 법을 집행하는 관원이 다투는 것이 옳다. 범한 것이 가벼운데 가볍게 하려 하는 것은 공평을 얻은 것이니, 법을 집행하는 관원이 본디 따르기에 겨를이 없어야 할 것인데, 또 어찌 다툴 수 있겠는가? 그렇다면 법을 집행하는 관원이 다투고 다투지 않는 것은 오직 범한 것이 가볍고 무거운 데에 달려 있을 뿐인데, 이제는 범한 것이 어떠한지를 논하지 말고 법을 집행하는 관원은 다만 무거운 쪽을 따르는 논의를 해야 한다고 하니 또한 그러지 않겠는가? 대저 계복(啓覆)할 때에 반드시 대간(臺諫)이 참여하여 듣게 하는 것은 대개 경중(輕重)에 대하여 가부(可否)를 의논하여 공평을 얻으려는 것이다. 중신이 이미 임금의 뜻과 같다고 대답하였으면 이것은 살리는 의논에 붙여 가벼운 쪽을 따르는 것을 옳게 여긴 것인데, 이미 스스로 가벼운 쪽을 따르는 것을 옳게 여기고서 대간이 쟁집(爭執)하지 않은 것은 배척하고, 대간도 번거로이 직분을 다하지 못하였다고 인죄한 것은 그 또한 주견(主見)이 없는 것이 심하다."
【태백산사고본】 36책 50권 23장 A면【국편영인본】 42책 649면
【분류】사법-재판(裁判) / 사법-탄핵(彈劾) / 사법-행형(行刑) / 역사-사학(史學) / 출판-인쇄(印刷)
사신은 말한다. "법은 천하의 공평을 지키는 것이다. 죄인이 범한 것이 무거운데 가볍게 하려 하는 것은 공평을 잃은 것이고, 범한 것이 가벼운데 무겁게 하려 하는 것도 이 또한 공평을 잃은 것이니, 이러한 것은 법을 집행하는 관원이 다투는 것이 옳다. 범한 것이 가벼운데 가볍게 하려 하는 것은 공평을 얻은 것이니, 법을 집행하는 관원이 본디 따르기에 겨를이 없어야 할 것인데, 또 어찌 다툴 수 있겠는가? 그렇다면 법을 집행하는 관원이 다투고 다투지 않는 것은 오직 범한 것이 가볍고 무거운 데에 달려 있을 뿐인데, 이제는 범한 것이 어떠한지를 논하지 말고 법을 집행하는 관원은 다만 무거운 쪽을 따르는 논의를 해야 한다고 하니 또한 그러지 않겠는가? 대저 계복(啓覆)할 때에 반드시 대간(臺諫)이 참여하여 듣게 하는 것은 대개 경중(輕重)에 대하여 가부(可否)를 의논하여 공평을 얻으려는 것이다. 중신이 이미 임금의 뜻과 같다고 대답하였으면 이것은 살리는 의논에 붙여 가벼운 쪽을 따르는 것을 옳게 여긴 것인데, 이미 스스로 가벼운 쪽을 따르는 것을 옳게 여기고서 대간이 쟁집(爭執)하지 않은 것은 배척하고, 대간도 번거로이 직분을 다하지 못하였다고 인죄한 것은 그 또한 주견(主見)이 없는 것이 심하다."
12월 6일 무인
좌의정 김재로(金在魯)가 또 차자를 올려 사직하였다. 또 여러 번 상소하여 면직을 청하고 날마다 명소(命召)를 반납하였으나, 임금이 다 우악한 비답을 내리고 윤허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광좌(李光佐)는 더욱 궁박하고 황공해 하였다.
12월 7일 기묘
청(淸)나라 사람이 추자도(楸子島)에 표류하여 왔다. 정원(政院)에서 봉황성(鳳凰城)에 자문(咨文)을 보내기를 청하니, 그대로 따랐다.
12월 10일 임오
간원(諫院) 【정언(正言) 홍계희(洪啓禧)이다.】 에서 전계를 다시 아뢰고, 또 아뢰어 윤급(尹汲)·한익모(韓翼謨)·성유열(成有烈)을 국문한 잘못을 논하고, 또 그때 말하지 않은 삼사(三司)를 파직하기를 청하고, 김굉(金硡)의 계청(啓請)은 정태(情態)가 간사하고 아첨하는 것이어서 언로(言路)의 폐해가 되고 한봉조(韓鳳朝)의 처치(處置)는 조목조목 변명한 것이 장황하여 남을 위하여 신리(伸理)한 것이므로 대각(臺閣)의 체모가 없다 하여 모두 파직하고 서용(敍用)하지 말기를 청하였으나, 모두 윤허하지 않았다.
임정(任珽)을 승지로, 민치룡(閔致龍)을 장령으로, 민계(閔堦)를 헌납으로, 신사건(申思建)을 지평으로, 원경하(元景夏)를 정언으로 삼았다.
우의정 유척기(兪拓基)가 두 대신(大臣)을 신복(伸復)하는 일 때문에 다시 차자를 올리기를,
"연차(聯箚)한 것을 죄줄 만하다고 한다면 일을 같이한 네 신하 가운데에서 두 신하는 그 관작(官爵)과 시호(諡號)를 이미 회복하였고, 회복하지 않은 두 신하에게는 다른 죄가 있고 연차 때문이 아니라고 한다면 정미년282) 에 추탈(追奪)하여 이제까지 그대로 둔 것은 다 연차를 죄안(罪案)으로 삼은 것입니다. 대저 연차를 죄안으로 삼은 것은 당초에 역적 김일경(金一鏡)의 입에서 나온 것인데 정미년의 추탈은 또한 그대로 있으니, 이것은 역적 김일경이 그 몸은 전에 처형되었더라도 그 말은 뒤에 실행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의리에 관계되는 것이니 힘써 변명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대저 죽은 자에게서 추탈하는 것은 산 사람에게 일률(一律)에 처하는 것과 같은데, 두 신하가 이제까지 살아 있다면 과연 일률을 시행해야 하겠습니까? 두 사신에게 과연 다른 큰 죄가 있어서 용서할 수 없다면, 오늘 그 관작을 회복하여 그 연차의 옛 죄안을 씻어 주어 의리가 크게 펴지게 하더라도 내일 다시 죄줄 만한 죄로 죄주면 연차한 의리는 백대(百代)를 전하여 어두워지지 않을 수 있을 것이고, 또 그 다른 길로 죄준 것이 과연 사리에 마땅하면 뭇 신하가 감히 의논할 수 없을 것이고 두 신하일지라도 그 죄를 감수하고 감히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이미 면대하여 유시하였다."
하였다.
12월 12일 갑신
좌참찬(左參贊) 윤혜교(尹惠敎)가 졸(卒)하였다. 윤혜교는 고(故) 부제학(副提學) 윤진(尹搢)의 아들인데, 사람됨이 단소(短小)하고 정상(精詳)하며 임금의 사랑을 두텁게 받아 청요직(淸要職)을 두루 지내고 드디어 육경(六卿)에 올랐다.
전 상의 별제(尙衣別提) 이홍원(李弘遠)이 상소하여 동조(東朝)의 존호(尊號)를 올리기를 청하고 또 임금을 찬양하되 아첨하는 말이 많았는데, 임금이 다만 이미 종신(宗臣)에게 유시하였다고 비답하였다.
겸문학(兼文學) 민통수(閔通洙)가 상소하여 이광좌(李光佐)를 변척(辨斥)하였는데, 도로 주라고 명하고 비답을 내리지 않았다.
12월 13일 을유
우의정(右議政) 유척기(兪拓基)가 또 차자를 올려 전후의 아뢴 차자가 윤허받지 못한 것을 인구(引咎)하여 사직하니, 임금이 유시하였다고 비답하였다.
조원명(趙遠命)을 대사헌으로, 유최기(兪最基)를 부교리로, 이흡(李潝)을 승지로 삼았다.
정언(正言) 홍계희(洪啓禧)를 해남(海南)에, 응교(應敎) 이덕중(李德重)을 진도(珍島)에 귀양보내라고 명하였다가 이윽고 도로 거두었다. 이때 임금이 홍계희를 인견하였는데, 홍계희가 신계(新啓)를 여러 날 동안 윤허받지 못하였기 때문에 인피(引避)하려고 원리(院吏)에게 전례를 물었더니 원리가 입시(入侍)하면 먼저 전계(傳啓)한 뒤에 피사(避辭)해야 한다고 대답하므로 홍계희가 드디어 먼저 전계하니, 첫째 계(啓)를 아뢰자 임금이 답하지 않고 피혐(避嫌)하는 까닭이 어디에 있느냐고 물었다. 홍계희가 말하기를,
"생각하는 것을 아뢰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엄한 분부를 내려 매우 꾸짖고 파직하여 서용하지 말라고 명하고 또 해남현(海南縣)의 극변(極邊)에 멀리 귀양보내라고 명하였다. 홍계희가 종종걸음으로 나가니, 임금이 말하기를,
"정태(情態)가 매우 교악(巧惡)하다. 이들의 머리를 달아맨 뒤에야 임금은 임금답고, 신하는 신하다운 도리를 밝힐 수 있을 것이다."
하므로 승지(承旨) 구택규(具宅奎)가 말하기를,
"신은 대신(大臣)과 혐의가 있어 서로 말하지 않으니 신이 감싸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성덕(聖德)에 손상이 있을세라 염려할 뿐입니다."
하였다. 응교 이덕중이 청대(請對)하여 입시(入侍)하였는데, 임금이 묻기를,
"홍계희가 옳은가?"
하니, 이덕중이 대답하기를,
"간신(諫臣)이 아뢰었는데 엄한 분부가 이러하니, 어찌 지나친 일이 아니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이덕중을 엄히 꾸짖고 진도군(珍島郡)에 귀양보내라고 명하였다. 임금이 이미 두 사람을 귀양보내고 나서 구택규와 다른 일에 언급하여 임금의 노여움도 조금 풀렸는데, 구택규가 다시 두 신하를 처분한 것이 지나침을 아뢰니, 임금이 말하기를,
"승지의 성심(誠心)에 실로 감동되었다."
하고, 이어서 홍계희는 삭판(削版)하고 이덕중은 종중 추고(從重推考)하는 것으로 고치라고 명하였다.
12월 14일 병술
우의정 유척기(兪拓基)가 명소(命召)를 반납하고 성밖으로 나가니, 사관(史官)을 보내어 전수(傳授)하고 같이 오게 하였다. 이때 임금이 바야흐로 홍계희(洪啓禧)의 일 때문에 몹시 노하였는데, 유척기의 차자(箚子)가 마침 정원(政院)에 이르렀다. 임금이 받아 보고 비지(批旨)에 엄한 분부를 많이 내리니, 유척기가 황공하여 성을 나갔다. 이날 원임(原任) 김흥경(金興慶)이 말을 하니, 임금이 비지를 도로 가져다가 엄한 분부 30여 자를 지워 없애고 사관에게 명하여 같이 오게 하였다.
좌의정 김재로(金在魯)가 차자를 올려 홍계희(洪啓禧)·이덕중(李德重)에 대한 처분이 지나침을 극진히 논하니, 수백 마디 말의 비답(批答)을 내리되 홍계희의 열 가지 죄를 열거하여 답하였다.
임금이 약원(藥院)의 신하들을 인견하여 김유(金濰)·김시위(金始煒) 등 여러 사람을 전후에 처분한 까닭을 두루 논하고 말하기를,
"나를 걸주(桀紂)283) 라고 한다면 내가 참고 받아들여 그 죄가 추고(推考)에 이르지는 않겠지만, 이제 욕이 조상에게 미쳤는데도 마음에 달가워하여 받아들인다면 어찌 요순(堯舜)의 효제(孝悌)하는 도리이겠는가?"
하였다. 대개 임금이 전후에 말한 자는 사묘(私墓)를 얕보는 마음이 있는 것이라고 의심하여 점점 격노하게 됨을 면하지 못한 것이다.
12월 15일 정해
밤에 달이 토성(土星)을 범하였다. 5경(五更)에 월식(月蝕)이 있었다.
12월 17일 기축
홍계희(洪啓禧)를 교리로, 김광세(金光世)를 수찬으로, 홍창한(洪昌漢)을 이조 좌랑으로, 전운상(田雲祥)을 전라 수사(全羅水使)로 삼았다.
정언(正言) 원경하(元景夏)가 상소하여 붕당(朋黨)은 나라를 망치는 화근이고 탕평(蕩平)은 건극(建極)하는 방법임을 말하고, 또 건적(建儲)·연차(聯箚)의 두 죄안(罪案)을 시원히 풀어 주어야 마땅하다고 아뢰니, 임금이 비답을 내렸다. 원경하가 임금이 바야흐로 탕평의 정사를 하는 것을 보고 드디어 붕당의 폐해를 힘껏 말하고, 또 임금이 연차한 두 신하를 신설(伸雪)할 뜻이 있는 것을 적이 알고는 두 죄안을 풀어 주어야 한다고 넌지시 뜻을 맞추었는데, 임금이 공평하고 치우치지 않는다고 생각하고 자못 마음이 기울어 갑자기 발탁하였다.
종실(宗室) 밀창군(密昌君) 이직(李樴) 등 50여 인이 상소하여 동조(東朝)의 존호(尊號)를 올리기를 청하니, 우악한 비답을 내렸다.
12월 18일 경인
우의정 유척기(兪拓基)가 또 상소하여 사직하니, 우악한 비답을 내리고 사관(史官)에게 명하여 같이 오게 하였다.
금군(禁軍)을 보내어 일신현(一新縣)의 죄수 김태성(金兌成)·양도규(梁道揆) 등을 호위하여 데려오라고 명하였다. 일신은 남원인데, 양찬규(梁纘揆)가 복법(伏法)되었기 때문에 읍호(邑號)를 고쳐 현(縣)으로 만들었다. 양찬규 등의 국옥(鞫獄)은 이미 끝났으나 임금이 오히려 그 뿌리가 남아 있을 것이라 염려하여 상을 걸고 잡게 하는 명령까지 하였다. 감사(監司) 이주진(李周鎭)이 김태성·양도규 등 여러 사람을 잡아 가두었으나 단서가 드러나지 않아서 올려보내기 어렵고 또 감히 혼자 스스로 안치(按治)할 수 없기 때문에 장계(狀啓)를 급히 보내어 아뢰어 수의(繡衣)와 함께 핵사(覈査)하기를 청하였다. 임금이 그 장계를 보고 말하기를,
"이것이 어떤 일인데 어사(御史)와 도신(道臣)에게 맡기겠는가?"
하고, 날짜를 작정하여 왕부(王府)에 호위하여 올려 보내라고 명하고, 지체될 것을 염려하여 승지(承旨) 이세진(李世璡)에게 물었다. 이세진이 금군을 보내어 말을 타고 달려 가서 호위하여 데려오게 하면 빠를 것이라고 대답하니, 그대로 따랐다.
12월 19일 신묘
오명서(吳命瑞)·한덕후(韓德厚)를 승지로, 홍성보(洪聖輔)를 대사간으로, 이덕중(李德重)을 교리로, 김광세(金光世)를 수찬으로 삼았다.
판윤(判尹) 조현명(趙顯命)이 차자를 올리기를,
"일신(一新)의 죄수는 이미 단서가 없으므로 문득 호위하여 데려오기에 합당하지 않으니, 금군(禁軍)을 보내라는 명을 거두셔야 하겠습니다."
12월 21일 계사
임금이 종신(宗臣)이 상소하여 존호(尊號)를 올리기를 청한 일과 호남(湖南)의 죄수의 일 때문에 대신(大臣)에게 유시하여 들어와 의논하게 하였다. 우의정 유척기(兪拓基)가 상소하기를,
"호남의 여러 죄수들은 아직 실상을 밝혀 알아낸 것이 없으니, 반드시 지레 경옥(京獄)으로 데려올 것이 없다는 것은 참으로 조현명(趙顯命)의 말과 같습니다. 종신들이 동조(東朝)께 존호를 올리기를 청한 것은 전하께서 자전(慈殿)의 뜻이 겸양하시므로 감히 굳이 아뢸 수 없다고 하교하셨거니와, 대저 성왕(聖王)의 효(孝)는 어버이의 뜻을 받들어 기쁘게 하는 일보다 앞세울 것이 없으니, 우선 지극한 뜻을 누르고 겸덕(謙德)을 우러러 본받고 동조께서 회갑의 나이가 되시기를 기다려 잔을 올리고 존호를 바치면 뜻과 몸을 받드는 일을 함께 다하여 능히 갖출 수 있을 것입니다. 이홍원(李弘遠)의 상소로 말하면 자성(慈聖)의 덕을 찬양한다는 핑계로 오로지 성덕(聖德)을 칭송하고 성궁(聖躬)에 아름다움을 돌려, 이렇게 하면 성심(聖心)을 기쁘게 할 수 있고 성지(聖志)를 어지럽힐 수 있다고 스스로 생각한 것이므로 정태(情態)와 의사(意思)를 차마 바로 볼 수 없으니, 의당 곧 죄주어 배척하여 간사한 사람이 돌아보며 엿보는 조짐을 막아야 하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이미 하교하였다고 비답하였다.
사신은 말한다. "대신(大臣)의 직분은 도(道)로 임금을 섬기는 것이니, 유척기의 오늘의 상소는 바람직한 것이다. 대저 동조에게 존호를 올리는 일은 그것이 반드시 의리에 맞는다고 생각하지는 않으나 선조(先朝)에서 이미 행하였거니와, 성상의 휘호(徽號)를 차례로 행해야 한다는 것은 나라 사람의 말이 이미 자자한데, 더구나 이홍원이 말한 것은 넌지시 공렬(功烈)을 찬양하는 뜻이 있으니, 유척기가 사전에 경계를 아뢰고 빨리 이홍원에게 죄주기를 청한 것은 바로잡는 뜻에 매우 알맞은 것이다."
【태백산사고본】 36책 50권 25장 B면【국편영인본】 42책 650면
【분류】왕실-비빈(妃嬪) / 정론(政論) / 사법(司法) / 역사-사학(史學)
사신은 말한다. "대신(大臣)의 직분은 도(道)로 임금을 섬기는 것이니, 유척기의 오늘의 상소는 바람직한 것이다. 대저 동조에게 존호를 올리는 일은 그것이 반드시 의리에 맞는다고 생각하지는 않으나 선조(先朝)에서 이미 행하였거니와, 성상의 휘호(徽號)를 차례로 행해야 한다는 것은 나라 사람의 말이 이미 자자한데, 더구나 이홍원이 말한 것은 넌지시 공렬(功烈)을 찬양하는 뜻이 있으니, 유척기가 사전에 경계를 아뢰고 빨리 이홍원에게 죄주기를 청한 것은 바로잡는 뜻에 매우 알맞은 것이다."
12월 23일 을미
좌의정 김재로(金在魯)가 차자를 올리기를,
"호남(湖南)의 옥사(獄事)는 단서가 드러나지 않았으므로 반드시 성상께서 친히 안문(按問)하실 것이 없고, 끝에 가서 무실(無實)할 것 같으면 남방 사람이 거조(擧措)에 대하여 몰래 비평하지 않지도 않을 것이니, 의당 먼저 대신(大臣)을 시켜 안치(按治)하게 하셔야 하겠습니다."
하였으나, 따르지 않았다.
조석명(趙錫命)을 대사헌으로, 황정(黃晸)을 대사간으로, 송교명(宋敎明)을 집의로, 정희보(鄭熙普)를 사간으로, 권현(權賢)·이광식(李光湜)을 장령으로, 유우기(兪宇基)·남태기(南泰耆)를 지평으로, 안경운(安慶運)을 정언으로, 남태량(南泰良)을 승지로 삼았다.
12월 24일 병신
영의정 이광좌(李光佐)가 상소하기를,
"호남(湖南)의 죄수는 반드시 친히 물으실 것이 없으니, 청컨대 성명(成命)을 거두어 성궁(聖躬)을 보호하는 도리를 다하소서."
하니, 예사 비답으로 회유(回諭)하였다.
12월 25일 정유
이익정(李益炡)을 도승지(都承旨)로 삼았다.
임금이 인정문(仁政門)에 나아가 호남(湖南)의 죄수를 친히 국문(鞫問)하였으나 정상을 알아내지 못하고 우선 본부(本府)에 도로 가두게 하였는데, 장택(張澤)·김태성(金兌成)·김태명(金兌鳴)·양성규(梁聖揆)·양도규(梁道揆)·장처재(張處載) 등 모두 여섯 사람이다. 대사헌(大司憲) 조석명(趙錫命)이 전계를 다시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헌납(獻納) 조정(趙侹)이 전계를 다시 아뢰고 또 홍계희를 삭직(削職)하라는 명을 도로 거두기를 계청(啓請)하였으나, 모두 윤허하지 않았다.
12월 27일 기해
임금이 인정문(仁政門)에 나아가 죄수를 친히 국문(鞫問)하였으나 정상을 알아내지 못하였다. 임금이 대신(大臣)에게 묻기를,
"옥사(獄事)의 체례(體例)로 말하면 본도(本道)에 맡겨 다스리게 하는 것도 괜찮고 한 어사(御史)로도 되겠지만, 본도에 맡겼다가 지나치게 형신(刑訊)을 가하면 말할 수 없는 염려가 없지도 않겠으므로 나래(拿來)하였다."
하니, 좌의정 김재로(金在魯)가 말하기를,
"이번 역절(逆節)은 공중(空中)의 물건과 같아서 알 듯도 하고 모를 듯도 한 일인데, 잇달아 형신을 가하는 것이 어떠할는지 염려됩니다."
하고, 여러 신하들이 이어서 말하기를,
"죄수의 공초(供招)에 따라 잡으려 보낸 자가 있으니 오기를 기다려서 참작하여 처치하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장처재(張處載)는 물을 만한 것이 없다 하여 특별히 석방하고 그 나머지는 그대로 가두어 기다리게 하였다. 임금이 또 이여관(李汝寬)의 일을 하문하였는데, 신하들이 모두 죽여야 한다고 말하니, 우선 국문을 멈추라고 명하였다.
어영 대장(御營大將) 김흡(金潝)이 졸(卒)하였는데, 조현명(趙顯命)으로 대신하였다.
사신은 말한다. "김흡은 고(故) 명장(名將) 김응하(金應河)의 방손(傍孫)인데, 문음(門蔭)으로 기신(起身)하여 장임(將任)에 제배(除拜)되기까지 하였으나 부드럽고 착하며 재략(才略)이 없었다. 그러나 그 근칙(謹飭)하고 외신(畏愼)하는 것을 오히려 세상에서 칭찬받았다."
【태백산사고본】 36책 50권 26장 B면【국편영인본】 42책 650면
【분류】인물(人物) / 역사-사학(史學) / 인사(人事)
사신은 말한다. "김흡은 고(故) 명장(名將) 김응하(金應河)의 방손(傍孫)인데, 문음(門蔭)으로 기신(起身)하여 장임(將任)에 제배(除拜)되기까지 하였으나 부드럽고 착하며 재략(才略)이 없었다. 그러나 그 근칙(謹飭)하고 외신(畏愼)하는 것을 오히려 세상에서 칭찬받았다."
12월 28일 경자
지평(持平) 정실(鄭實)이 상소하기를,
"대각(臺閣)의 직임은 조정(朝廷)의 기강을 잡고 국시(國是)를 주장하는 것이므로 그 위임하여 예우하는 바가 중한데, 오늘날을 보면 과연 어떠합니까? 몇 자의 글을 관례에 따라 써도 문득 방형(邦刑)을 바루라는 명을 내리고, 한 마디 말이 마음에 들지 않아도 문득 장해(瘴海)에 천극(栫棘)하는 법을 가하는 일이 지난해에도 올해에도 잇달았으며, 금정(禁庭)에 붙잡아 들여 고략(拷掠)을 적용하기까지 하니, 이것은 성덕(聖德)에 실로 천고(千古)에 없던 지나친 거조입니다."
하였는데, 소(疏)가 들어가니, 정원(政院)에 하교하기를,
"장전(帳殿)에서 하교하겠다."
하였다.
12월 29일 신축
송성명(宋成命)을 대사헌으로, 조명택(趙明澤)을 대사간으로, 민선(閔墡)을 장령으로, 신사건(申思建)을 지평으로 삼았다.
우의정(右議政) 유척기(兪拓基)가 다시 상소하여 인죄(引罪)하고 해직을 청하였으나, 비답을 내리지 않고 승지(承旨)에게 명하여 돈유(敦諭)하게 하였다.
12월 30일 임인
밤에 번개가 쳤다.
'한국사 공부 > 조선왕조실록' 카테고리의 다른 글
| 영조실록51권, 영조 16년 1740년 2월 (0) | 2025.09.24 |
|---|---|
| 영조실록51권, 영조 16년 1740년 1월 (0) | 2025.09.24 |
| 영조실록50권, 영조 15년 1739년 11월 (0) | 2025.09.23 |
| 영조실록50권, 영조 15년 1739년 10월 (0) | 2025.09.23 |
| 영조실록50권, 영조 15년 1739년 9월 (0) | 2025.09.2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