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월 1일 계묘
농사를 권장하는 교서(敎書)를 팔도(八道)와 양도(兩都)001) 에 내렸다.
1월 2일 갑진
임금이 인정전(仁政殿)에서 기곡제(祈穀祭)의 서계(誓戒)002) 를 친히 받았다. 장차 상신일(上辛日)003) 에 친향(親享)을 행할 것이기 때문이었다.
1월 3일 을사
우의정(右議政) 유척기(兪拓基)가 상소하여 사직하니, 임금이 우악한 비답(批答)을 내리고 윤허하지 않았다.
1월 4일 병오
약원(藥院)에서 청대(請對)하여 날씨가 추우므로 기곡 친제(祈穀親祭)를 그만두기를 청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오늘날의 백성은 내 백성이 아니라 조종(祖宗)의 백성이다. 백성에게 이롭다면 어찌 매서운 추위를 두려워하겠는가?"
하고, 끝내 윤허하지 않았다.
헌부(憲府)가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1월 5일 정미
우의정(右議政) 유척기(兪拓基)가 정고(呈告)하니, 임금이 면대하여 이르겠다고 하교하고 사관(史官)에게 명하여 같이 오게 하였다.
1월 6일 무신
임금이 태묘(太廟)에 나아가 춘전알(春展謁)의 예(禮)를 행하고 저녁에 환궁(還宮)하였다.
1월 8일 경술
임금이 사직(社稷)에 나아갔다.
1월 9일 신해
기곡제(祈穀祭)를 행하였다. 예(禮)가 끝나고서 재실(齋室)에 들어가 대신(大臣)에게 명하여 입시(入侍)하게 하였다. 판부사(判府事) 송인명(宋寅明)에게 묻기를,
"바야흐로 동조(東朝)께 존호(尊號)를 올리는 일을 의논하는데, 이것은 예에 어그러지는 것이 아니다. 경(卿)은 어떻게 생각하는가?"
하니, 송인명이 대답하기를,
"이것은 천리(天理)와 인정(人情)의 그만둘 수 없는 것이니, 누가 감히 공경히 받들지 않겠습니까?"
하였다. 임금이 또 말하기를,
"내가 어린 나이 때부터 영빈(寧嬪)을 많이 의뢰하였다. 일찍이 사직(社稷)에 들어왔을 때에 혹 음식을 나에게 먹여 주기도 하였는데, 언뜻 엊그제 일 같다. 그 궁(宮)이 아주 가까우니, 목주(木主)를 한 번 보아 내 회포를 풀고자 한다."
하고, 이어서 영빈궁(寧嬪宮)에 들를 것을 명하였다. 저물녘에 환궁(還宮)하는 길에 청평 위주(淸平尉主) 집에 들러 주련(駐輦)하여 하교하기를,
"선조(先朝)의 어제인 ‘줄행랑 앞에 구슬 발이 드러워졌으니 틀림없이 공주가 내 거둥을 바라보는 것이리라.[長廊下低珠箔垂 分明貴主望羽旄]’라는 시(詩)를 돌이켜 생각하니 갑절이나 흥감(興感)한다."
하고, 그 봉사손(奉祀孫)을 녹용(錄用)하라고 특별히 명하였다.
이제부터 제향(祭享)에 쓸 향축(香祝)을 모시고 지나는 자가 마침 거둥하는 길에 진친 곳을 만났을 때에는 해영(該營)에서 전령(傳令)하여 진(陣)을 열어 정로(正路)를 거쳐 내보내게 할 것을 영구히 정식(定式)으로 삼으라고 명하였다.
임금이 문안 중사(問安中使)를 배행(陪行)하는 액례(掖隷)가 압반 감찰(押班監察)에게 태치(苔治)당하였기 때문에 하교하기를,
"문안(問安)은 봉명(奉命)이고 액례는 왕인(王人)이며 감찰은 서관(庶官)에 지나지 않는데, 배행하는 자가 맞아도 중사가 말이 없었으니, 그 연약하여 직임을 다하지 못한 것은 중추(重推)해야 한다.
하고, 이어서 감찰의 벼슬을 태거(汰去)하라고 명하고, 헌리(憲吏)도 또한 추조(秋曹)로 하여금 감죄(勘罪)하게 하였다. 승지(承旨) 오명서(吳命瑞)가 말하기를,
"액례를 봉명한 사람이라 한다면 감찰뿐만 아니라 대신(大臣)일지라도 물리쳐 막지 말아야 할 것이고, 다만 중관을 배행할 뿐이라 한다면 감찰이 조반(朝班)에서 물리쳐 막는 것은 괴이할 것 없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정원(政院)도 규찰(糾察)하지 못한 잘못을 면하기 어려운데, 한 감찰을 해명하니, 또한 죄주어야 한다."
하고, 드디어 오명서의 벼슬을 체차하라고 명하였다.
1월 10일 임자
좌의정(左議政) 김재로(金在魯)와 판부사(判府事) 김흥경(金興慶)·송인명(宋寅明) 등이 경재(卿宰)를 거느리고 빈청(賓廳)에 모였다. 임금이 소견(召見)하여 동조(東朝)의 존호(尊號)를 의논하는 일을 묻기를,
"동조께서 모림(母臨)하신 지 이미 39년이 되었고, 더구나 국조(國朝)의 고사(故事)가 있다. 경(卿)들이 그렇게 해야 한다고 하면 도움을 구할 것이고, 그렇지 않다고 하면 심정을 억제해야 할 뿐이다."
하자, 신하들이 다 말하기를,
"이는 거행해야 할 예(禮)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내가 본디 이의가 없을 줄 알았다. 이제는 상하가 다 같으니 동조께 청하겠다. 사람들이 늘 말하기를, ‘자모(慈母)는 엄부(嚴父)와 다르다.’ 하나, 내가 신축년004) 에 대궐에 들어온 뒤부터 이제까지 문후(問候)할 때에 감히 얼굴을 들지 못하다가 접대 동조께서 면부(面部)에 환후가 있으므로 비로소 우러러 뵈었다. 어버이를 섬기는 도리는 뜻을 정성스럽게 하는 데에 힘써야 하는 것이니, 어찌 감히 강박(强迫)할 수 있겠는가? 이것이 내가 도움을 구한다는 하교를 한 까닭이다."
하였다. 신하들이 또 말하기를,
"성상께서 안에서 청하시면 신들도 또한 밖에서 청하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내가 신하들에게 도움을 구한다고 한 것을 사책(史冊)에 쓰면 구차할 줄 잘 알지만, 이렇게 하고서야 자전(慈殿)께서 겸양하시는 덕에 더욱 빛이 있을 것이다."
하였다.
고(故) 상신(相臣) 김창집(金昌集)·이이명(李頣命)의 벼슬을 회복하라고 명하였다. 이날 임금이 대신(大臣)과 비국 당상(備局堂上)을 인견(引見)하여 하교하기를,
"사책(史冊)을 두루 보면 저군(儲君)을 세운 것이 어찌 한정이 있으랴마는, 어찌 내가 겪은 바와 같은 것이 있었겠는가? 네 사람이 연차(聯箚)한 것을 역적으로 몰아 교문(敎文) 가운데에 넣고서 오늘날 그 임금을 섬기는 자가 감히 신축년005) ·임인년006) 의 일을 옳다느니 그르다느니 말할 수 있겠는가? 근년 대신이 입시(入侍)하였을 때에 두 신하 가운데에서 한 사람을 먼저 하교하려 하였으나, 그 뒤에 또 갈등이 있어 매우 탄식하고 내버려 두었다. 두 사람이 아직도 죄적(罪籍)에 있으니, 어찌 공평하다 하겠는가? 대리(代理)를 연차한 의리에 대하여 그 임금을 섬기는 마음이 있는 자라면 누가 감히 그 시비를 다툴 수 있겠는가? 해조(該曹)를 시켜 특별히 복관(復官)하게 하라."
하였다. 판부사(判府事) 송인명(宋寅明)·풍원군(豐原君) 조현명(趙顯命) 등이 말하기를,
"신들은 기유년007) 처분할 때에 가부를 의논하는 데에 참여하여 들었으니, 이제 다른 의견이 없습니다. 성상께서 반드시 고쳐 처분하시려 한다면 국안(鞫案)을 다시 상고하여 아들과 손자의 죄가 용서할 만하고서야 비로소 이 일을 의논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경들이 어찌 친히 보았겠는가? 기유년008) 처분할 때에 모두 복관하였다면 경들이 반드시 다투지 않을 것이다. 그때 하문하였으므로 오늘날의 폐단이 있게 되었거니와, 당초에 아들과 손자에 관한 하교를 한 것이 실로 구차하다. 내 하교를 들은 뒤에는 나를 섬기는 자가 결코 다시 운운하지 말아야 하는데도 풍원(豐原)이 아뢴 것은 참으로 그르다. 국안(鞫案)을 다시 상고한다면 서덕수(徐德修)의 일도 장차 다시 상고할 것인가? 중전(中殿)을 섬기는 자는 이렇게 하여서는 안 된다. 서덕수는 이미 영구히 풀어 주었거니와, 이것은 한 가지이면서 두 가지인 것이다."
하였다.
1월 11일 계축
또 하교하기를,
"두 신하를 구별한 뜻을 이미 말하였거니와, 처분을 혹 먼저 하거나 뒤로 하는 것이 무엇이 어려우랴마는, 오히려 갈등을 염려하여 말없이 지금에 이르렀으니, 이것은 내 허물이다. 이이명(李頣命)으로 말하면 마음을 아는 사이일 뿐이 아니다. 한밤의 하교(下敎)009) 에 이미 죄다 말하였다. 김창집(金昌集)으로 말하면, 석작(石碏)에게도 석후(石厚)가 있고010) , 왕도(王導)에게도 왕돈(王敦)이 있으니011) , 그 아들과 손자가 어찌 그 조상에게 흠이 되겠는가? 선정(先正)의 충절(忠節)은 그 손자를 보존할 만하니, 화상(畫像)의 어찬(御贊)을 또한 추감(追感)한다. 아! 신축년012) 이후에 대통(大統)을 이은 자가 누구인데 그 일을 다투려 한 자를 어찌 신하라 하겠는가? 이제야 비로소 마음을 푼 것을 중외(中外)에서 모두 들었으니, 모두 마음을 고치라."
하고, 또 좌의정(左議政) 김재로(金在魯)에게 말하기를,
"그때 독대(獨對)에서 경들의 무리에도 또한 헐뜯는 자가 있다고 하였는데, 이것은 선왕(先王)께서 예전에 칠신(七臣)에게 부탁한 일처럼 우리 형제를 부탁하신 것이다. 이 때문에 의심해서 헐뜯는 것은 어찌 그르지 않겠는가? 목호룡(睦虎龍)의 공초(供招) 가운데에 김성행(金省行)이 내심(乃心)을 탐지하였다는 말이 있다. 대개 내 군호(君號)013) 를 파자(破字)한 것인데, 김성행도 승복하였다."
하자, 김재로가 말하기를,
"김성행은 형장(刑杖)을 맞다가 죽게 되었으나 승복한 일이 없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그러한가?"
하였다. 송인명(宋寅明)이 말하기를,
"전하께서 성의(聖意)를 명백히 보이시지 않았으므로 사람들이 다 견문(見聞)에 익숙하니, 이제 이 하교가 있더라도 망발(妄發)이 또 없으리라고 보증하기 어렵습니다. 오직 바라건대, 일체 타일러서 깨달을 수 있게 하소서. 애석히 여기고 보호하여 세신(世臣)을 거두어 쓰는 것이 오늘날 먼저 힘쓸 일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경의 말에서 고심한 것을 알 수 있다. 풍원(豐原)이 지난번 서덕수(徐德修)를 처분(處分)할 때에 찬양한 것을 이제 와서 서덕수와 마찬가지인 사람에 대하여 거론한 것으로 말하면, 어찌 반쯤 올라갔다가 떨어진 것이 아니겠는가? 내가 이 말을 하는 것도 완전하기를 욕하는 것이다. 변변치 못한 많은 무리가 있더라도 그들이 추대하였다고 칭하는 것은 나인데, 신하가 어찌 나를 역안(逆案)에 두려 하겠는가? 오늘의 하교(下敎)를 듣고도 말하는 자가 다시 있으면 마땅히 역률(逆律)로 다스리겠다. 주서(注書)는 연교(筵敎)를 전하여 중외(中外)에서 모두 알게 하라."
하였다.
신만(申晩)·윤경룡(尹敬龍)을 승지로, 이광운(李光運)을 사간으로, 정희규(鄭熙揆)를 장령으로, 민계(閔階)를 헌납으로, 홍정명(洪廷命)을 지평으로, 서명신(徐命臣)·이이장(李彝章)을 정언으로, 이덕중(李德重)·이성효(李性孝)를 교리로, 조현명(趙顯命)을 공조 판서로, 조원명(趙遠命)을 공조 참판으로 삼았다.
사서(司書) 이정욱(李挺郁)이 상소하여, 세자의 보양(輔養)은 일찍 교유(敎諭)하기에 달려 있다고 하여, 선정신(先正臣) 박세채(朴世采)가 지은 《소학독서기(小學讀書記)》를 가까이 두고 노숙한 선비를 불러 덕성(德性)을 훈도(薰陶)하기를 청하니, 비답(批答)하기를,
"아뢴 바를 유의하겠다."
하였다.
헌부(憲府)에서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공조 판서(工曹判書) 조현명(趙顯命)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두 대신(大臣)을 복관(復官)하라는 명이 이미 내려졌습니다. 신은 기유년014) 에도 분등(分等)할 때에 말의(末議)에서 참여하여 들었는데, 대개 신은 이 일에 대하여 스스로 하나의 권형(權衡)이 있었으므로 피차가 서로 주장하는 소견과 같지 않았습니다. 그때 찬성하여 봉승(奉承)한 까닭은 혹 임금이 표준을 세우는 정치에 보탬이 있기를 바랐기 때문인데, 10년 동안 지키다가 이제 다시 고치시니, 신은 전하께서 다툼을 그치게 하시는 방법이 더욱 다투게 하게 될세라 염려됩니다. 전하의 형정(刑政)에 이렇게 어지러이 고치는 꼬투리가 있어서 천하 후세의 웃음이 되게 한 것도 신들의 죄이니, 장차 어떻게 얼굴을 들고 다니겠습니까?"
하였는데, 비답(批答)하기를,
"이미 대신에게 말하였다."
하였다.
지평(持平) 남태기(南泰耆)가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신이 어제 빈연(賓筵)에 들어가 전하께서 19일에 하교(下敎)015) 하신 뜻이 얼마 안 되는 사이에 갑자기 바뀐 것을 눈으로 보았으나, 차마 들을 수 없는 엄한 하교에 몰려 끝내 한 마디 말도 없이 물러났으니, 바로잡지 못한 죄를 스스로 속(贖)할 수 없습니다. 대신(大臣)·중신(重臣)이 어려움을 다시 아뢴 것은 실로 신중히 하려는 뜻에서 나온 것인데, 전하께서 곧바로 다시는 말하지 말라고 굳게 물리치시어 처분이 갑작스럽고 시비가 전도되었으니, 신은 뭇사람의 심정이 믿고 따를 바가 없어 다투는 꼬투리가 더욱 시끄러워져서 전하께서 10년 동안 고심하신 것이 반드시 장차 처음은 있으나 끝이 없게 될 듯합니다. 다시 바라건대, 널리 묻고 살펴 처치하소서."
하였는데, 임금이 엄한 분부를 내려 꾸짖고 그 벼슬을 체차하였다.
호조 판서(戶曹判書) 김시형(金始烱)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신이 전석(前席)에서 두 신하를 복작(復爵)하는 일 때문에 신중히 하려는 뜻을 대략 아뢰었습니다마는, 미처 말을 마치기 전에 문득 엄한 분부를 받고 물러나 불안하였습니다. 기유년016) 이후로 국시(國是)가 크게 정해지고 의리가 밝아졌는데, 10년 동안 지키던 것을 하루아침에 고치니, 이것이 무엇 때문입니까? 신이 친히 하교를 받았으니 어찌 성의(聖意)가 어디에 있는지 모르겠습니까마는, 임금의 강기(綱紀)와 신하의 의리는 관계되는 것이 지극히 중대한데 제방(隄防)이 모두 무너지고 처분이 매우 갑작스러우니, 이것이 어찌 전하께 바라는 바이겠습니까? 오직 바라건대, 시비를 굳게 정하고 십분 신중히 하소서."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일의 중대함을 돌보지 않는 것이 터무니 없으니, 이런 사람을 먼저 경계해야 한다."
하고, 엄한 분부를 내려 그 벼슬을 파면하고, 조현명(趙顯命)으로 대신하였다.
영의정(領議政) 이광좌(李光佐)가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김창집(金昌集)을 복관(復官)하라는 명을 듣고 신은 못견디게 슬프고 생각할 바를 잃었습니다. 김창집이 스스로 범한 바는 19일의 하교를 보며 또한 분명하여 엄폐하기 어렵다 할 수 있습니다. 국가의 큰 권징(勸懲)이 행해지지 않고 큰 기강이 서지 않고도 나라를 다스릴 수 있는 일은 없었습니다. 바라건대, 성상께서는 천리(天理)의 대체가 어디에 있는지를 깊이 생각하시어 명이 이미 내려졌다 하여도 수행(遂行)하지 마소서"
하였는데, 비답(批答)하기를,
"경은 숨기는 것이 없기는 하나 나도 고심(苦心)한다. 경은 승지(承旨)와 함께 들어오라."
하였다.
판부사(判府事) 송인명(宋寅明)이 상소하여 조현명(趙顯命)의 말처럼 인책하였는데, 임금이 온화한 비답을 내리고 윤허하지 않았다.
평안 감사(平安監司) 김유경(金有慶)을 체차하고, 서종옥(徐宗玉)을 대신하라고 명하였다. 김유경은 어릴 때에 아버지의 상(喪)을 당하여 복상(服喪)하지 못한 것을 매우 원통하게 여겼는데, 상을 당한 지 60 주년에 이르러 뒤미처 복상하려고 무덤 옆에 여막(廬幕)을 짓고 조석으로 곡하고 돌보느라 서번(西藩)에 임명된 것을 사양하고 끝내 부임하지 않았다. 좌의정 김재로(金在魯)가 그 일을 아뢰니, 임금이 칭찬하고 말하기를,
"내가 미처 알지 못하였다. 이제 그 말을 들으니, 매우 감동된다."
하고, 그 벼슬을 체차하도록 특별히 윤허하고, 또 본도(本道)를 시켜 먹을 것을 주어 그 효성을 표창하게 하였다.
동조(東朝)에 존호(尊號)를 올리는 일 때문에 도감(都監)을 설치하고, 김재로(金在魯)를 도제조로, 신사철(申思喆)·조현명(趙顯命)·윤양래(尹陽來)를 제조·부제조로, 황재(黃梓)를 도청(都廳)으로 삼았다.
1월 12일 갑인
달이 동정성(東井星)에 들어갔다.
신택하(申宅夏)·정형복(鄭亨復)을 승지로, 홍상한(洪象漢)을 지평으로, 유최기(兪最基)를 교리로, 이병상(李秉常)을 판윤으로 삼았다.
1월 14일 병진
예조(禮曹)에서 아뢰기를,
"대왕 대비전(大王大妃殿)에 존호(尊號)를 올리고 진하(陳賀)할 때에 중궁전(中宮殿)의 행례(行禮)를 그만두라고 명하셨더라도 표리(表裏)를 바치는 예는 행해야 할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안에서 행하겠다."
하였다.
1월 15일 정사
이덕수(李德壽)를 다시 대제학으로, 조명리(趙明履)·이덕중(李德重)을 응교로, 홍계유(洪啓裕)를 이조 좌랑으로, 민응수(閔應洙)를 공조 판서로 삼았다.
호조 판서(戶曹判書) 조현명(趙顯命)이 또 전의 일 때문에 상소하여 사직하기를,
"아름다움을 남에게 돌리고 허물을 자기에게 돌리는 것은 군자(君子)가 서로 사귀는 방법으로 오히려 당연한데, 더구나 신하가 임금을 대하는 것이겠습니까? 일을 의논한 당초에 참섭하였는데 일이 번복된 뒤에 스스로 해명하여 뭇사람에게 호소하기를, ‘내가 한 것이 아니라 임금이 한 것이다.’ 한다면, 고금 천하에 어찌 이런 일이 있겠습니까? 대저 오늘의 처분은 바로 전일에 한 일이 의리에 맞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그때의 신하가 바로잡지 못한 것은 워낙 죄가 있거니와, 따라서 찬성한 자가 더욱이 어찌 죄가 없을 수 있겠습니까? 성의(聖意)가 이미 정해졌으니 신하가 감히 다툴 생각을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마는, 자처(自處)하는 방법이 그렇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였는데, 임금이 예사 비답(批答)을 내리고 재촉하여 출사(出仕)하게 하였다.
1월 16일 무오
빈청(賓廳)에서 동조(東朝)의 존호(尊號)를 의논하여 올리니, 광선(光宣)으로 계하(啓下)하였다.
예조(禮曹)에서 아뢰기를,
"동조(東朝)께 존호를 올릴 때에 입으실 적의(翟衣)017) 는 상의원(尙衣院)을 시켜 【자색(紫色)으로 한다.】 지어 바치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윤허하였다.
함원 부원군(咸原府院君) 어유귀(魚有龜)가 졸(卒)하였다. 임금이 하교하기를,
"의릉(懿陵)을 돌이켜 생각하면 매우 슬프다. 상사(喪事)를 돕는 데에 드는 모든 것을 다른 부원군의 예(例)대로 하고 월름(月廩)은 3년 동안 그대로 주어 나의 조의(弔意)를 표하라."
하였다.
사신은 말한다. "어유귀는 선의 왕후(宣懿王后)의 아버지이다. 목호룡(睦虎龍)을 녹훈(錄勳)할 때에 김일경(金日鏡)이 어유귀를 원훈(元勳)으로 삼기를 청하였으므로, 세상에는 그가 신축년018) ·임인년019) 흉당(凶黨)의 모의를 남몰래 주장하였으리라고 의심하였다. 그러나 임금은 척신(戚臣)이기 때문에 도타이 대우하였고, 전후에 군사를 맡아 거느린 것이 거의 20년이었다."
【태백산사고본】 37책 51권 3장 B면【국편영인본】 42책 652면
【분류】인물(人物) / 왕실-비빈(妃嬪) / 왕실-사급(賜給) / 변란-정변(政變)
[註 018] 신축년 : 1721 경종 원년.[註 019] 임인년 : 1722 경종 2년.
사신은 말한다. "어유귀는 선의 왕후(宣懿王后)의 아버지이다. 목호룡(睦虎龍)을 녹훈(錄勳)할 때에 김일경(金日鏡)이 어유귀를 원훈(元勳)으로 삼기를 청하였으므로, 세상에는 그가 신축년018) ·임인년019) 흉당(凶黨)의 모의를 남몰래 주장하였으리라고 의심하였다. 그러나 임금은 척신(戚臣)이기 때문에 도타이 대우하였고, 전후에 군사를 맡아 거느린 것이 거의 20년이었다."
권영(權瑩)을 교리로, 이창의(李昌誼)를 정언으로, 조상경(趙尙絅)을 판의금으로, 정석오(鄭錫五)를 경기 감사로, 민응수(閔應洙)를 수어사(守禦使)로 삼았다.
1월 17일 기미
호남(湖南)의 도신(道臣)이 양찬규(梁纘揆)의 여당(餘黨)을 잡아보냈다. 임금이 인정문(仁政門)에 나아가 친히 필득(必得)·세철(世喆)·소덕정(蘇德貞)·양중형(梁重亨) 등을 국문(鞫問)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이 옥사(獄事)의 요긴한 곳은 서로 아는지에 달려 있는데, 피차가 서로 미루니 괴이하다."
하니, 신하들이 말하기를,
"양찬규는 흉참(凶慘)하였을지라도 이들은 지엽(枝葉)이니, 따뜻한 날을 가려서 친히 물으셔야 하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수인(囚人)들을 왕부(王府)에 내리라고 명하였다. 대내(大內)로 돌아가려 할 때에 부총관(副摠管) 낙풍군(洛豐君) 이무(李楙)가 시위(侍衛)로서 옷이 얇아 추위를 호소하는 빛이 있는 것을 보고, 해조(該曹)에서 옷감을 주어 종친(宗親)을 돈목(敦睦)하는 뜻을 보이라고 명하였다. 지평(持平) 홍상한(洪象漢)이 죄인 한동유(韓東愈)를 작처(酌處)하라는 명을 거두고 다시 국문하기를 청하니, 임금이 대신(大臣)에게 물었는데, 김재로(金在魯)가 다시 물을 만한 것이 없다고 하였다. 홍상한이 물어야 한다는 것을 또 말하였으나, 임금이 윤허하지 않았다.
1월 18일 경신
밤에 달이 태미원(泰微垣)에 들어갔다.
임금이 또 인정문(仁正門)에 나아가 수인(囚人)들을 국문(鞫問)하였으나, 모두 승복하지 않았다. 날씨가 춥기 때문에 우선 끝냈다.
우의정(右議政) 유척기(兪拓基)가 말하기를,
"통영(統營)의 합조(合操)를 설행(說行)하지 않은 지 이제 46년이 되었습니다. 군율(軍律)이 느슨해지고 군정(軍政)이 폐기되니, 설행하게 해야 하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오래 폐기한 것은 민망스러울지라도 백성의 폐해도 또한 생각해야 하니, 이제 우선 멈추도록 하라."
하였다. 유척기가 또 말하기를,
"한원(翰苑)020) 이 빈 지 이미 4년이나 되었으니, 신칙(申飭)하여 새로 천거하게 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한원에서 이익보(李益輔)를 단천(單薦)하였다.
헌부(憲府)에서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1월 19일 신유
평안 감사(平安監司) 서종옥(徐宗玉)이 상소하여 번임(藩任)을 사양하고 또 말하기를,
"두 대신(大臣)을 신복(伸復)021) 하는 것이 얼마나 중대한 일인데 하문하지 않고 하루아침에 이를 고치십니까? 또 연대(筵對)에서 문득 차마 들을 수 없는 분부를 내리시니 보고 들은 자가 모두 근심하고 탄식합니다."
황재(黃梓)를 응교로, 유최기(兪最基)·권영(權瑩)을 교리로 삼았다.
1월 20일 임술
밤에 유성(流星)이 하늘 복판에서 나와 서방으로 들어갔는데, 모양이 주먹 같고 꼬리의 길이가 서너 자쯤 되고 빛깔은 흰 색이었다.
임금이 대신(大臣)과 비국 당상(備局堂上)을 인견(引見)하였다. 우의정(右議政) 유척기(兪拓基)가 말하기를,
"표류하여 저 나라에 이르렀던 우리 나라 해서(海西)의 포민(浦民)을 저 나라에서 자문(咨文)을 보내고 내보냈으니, 청컨대, 괴원(槐院)022) 을 시켜 회자(回咨)를 보내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윤허하였다. 훈련 도정(訓鍊都正) 구성임(具聖任)이 곡산(谷山)의 은점(銀店)·연점(鉛店)을 얻어 군문(軍門)의 총환(銃丸)에 쓰이는 것을 장만하기를 청하니, 임금이 유척기에게 물었다. 유척기가 연점은 훈련 도감(訓鍊都監)에 붙이고 은점은 지부(地部)023) 에 붙이기를 청하니, 임금이 윤허하였다. 유척기가 또 점(店)을 설치하는 폐단을 말하기를,
"경외(京外)에서 조정의 명령을 받지 않고 설치하는 자가 있으면 특별히 엄금해야 하겠습니다."
하였다.
명(明)나라 사람의 자손을 녹용(錄用)하라고 명하였다. 특별히 제수하여 이면(李勉)을 첨지(僉知)로 삼았는데, 이면은 이성량(李成樑)의 후손이다.
1월 21일 계해
송수형(宋秀衡)을 대사간으로, 이성해(李聖海)를 지평으로, 윤심형(尹心衡)·서명신(徐命臣)을 교리로 삼았다.
1월 22일 갑자
헌부(憲府)에서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1월 25일 정묘
임금이 대신(大臣)과 비국 당상(備局堂上)을 인견(引見)하여 존호 도감(尊號都監)의 사역(事役) 속도를 묻고, 이어서 하교하기를,
"옥책문(玉冊文)에는 ‘국왕(國王) 신(臣) 모(某)’라고 쓰는데, 치사(致詞)에는 두사(頭詞)가 없이 곧바로 ‘경유(敬惟)’ 두 자를 쓴다. 이것은 아랫사람이 지어 바치므로 감히 할 수 없는 바가 있어서 그러한 것인지 알 수 없으나, 이제부터는 치사에도 옥책문의 예대로 ‘국왕 신 모’라고 쓰고 계속하여 정식(定式)으로 삼으라."
하였다.
곡산(谷山)과 성천(成川)을 겸영장(兼營將) 고을로 삼으라고 명하였다. 대개 해서(海西)와 관서(關西)에는 영장(營將)이 없으므로 우의정(右議政) 유척기(兪拓基)가 청한 것이다. 임금이 호남(湖南) 사람이 잡술(雜術)을 많이 하기 때문에 하교하기를,
"성인(聖人)도 명(命)을 말하는 일이 드물거니와, 사람의 귀천(貴賤)과 수요(壽夭)가 어찌 여기에 달려있으랴마는, 담명(談命)과 감여(堪輿)의 방술(方術)을 사람들이 다 혹신(惑信)하고 또 흔히 허물하면서도 본뜨니, 내가 매우 근심한다."
하고, 또 하교하기를,
"내가 접때 한 번 추석환(秋石丸)을 먹었는데 사방에서 모두 이를 본떴다. 심지어 고양이의 가죽이 담병(痰病)에 좋다는 말을 듣고 나에게 권하는 사람이 있기에 내가 대답하기를, ‘조선에 남은 것은 고양이뿐인데 내가 한 번 취하면 고양이는 앞으로 남는 것이 없을 것이다.’ 하였다. 이것은 작은 일일지라도 위에서 행하면 아래에서 본뜨는 것이 심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하자, 우의정 유척기가 말하기를,
"윗사람은 삼가지 않아서는 안 됩니다. 유추(類推)하면 그렇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위에서 좋아하는 것을 아래에서는 반드시 더 심하게 본뜨는데, 시상(時象)으로 말하면 이것만은 위에서 좋아하는 것을 따르지 않으니, 이것은 고황(膏肓)의 병이다."
하였다.
전 판서(判書) 김취로(金取魯)가 졸(卒)하였다. 임금이 하교하여 죽음을 슬퍼하고, 상장(喪葬)에 수용하는 것을 주라고 명하였다.
1월 26일 무진
임금이 인정문(仁政門)에 나아가 수인(囚人)들을 친국(親鞫)하였다.
1월 27일 기사
용문(龍文)·양중형(梁重亨) 등을 친국(親鞫)하였다. 모두 형신(刑訊)하였으나, 승복하지 않았다. 임금이 옥사(獄事)를 안치(按治)하는 신하들에게 물었는데, ‘옥정(獄情)이 이미 낡아 꼬투리가 드러나지 않으니 짐작하여 처치해야 한다.’ 하기도 하고, ‘아직은 짐작하여 처치하기를 쉽사리 의논할 수 없으니 다시 신문(訊問)해야 한다.’ 하기도 하여 의논이 같지 않으므로, 드디어 우선 죄수들을 본부(本府)에 내리라고 명하고 신하들에게 말하기를,
"계제(階梯)가 이미 끊어졌는데 잠깐 형신(刑訊)하고 도로 가두면 결말날 기약이 없다. 사체(事體)는 방만(放慢)하거니와, 도사(都事) 유언휘(兪彦徽)가 문서를 수색한 일도 그르다. 수상한 자가 있으면 고하도록 하라. 언찰(諺札)을 풀로 붙인 것은 상앙(商鞅)024) 의 법과 거의 같으니, 이런 공교한 법이 한 번 나오면 백성이 어찌 손발을 쓸 수 있겠는가? 이 뒤로는 금오랑(金吾郞)025) 에게 각별히 신칙(申飭)하여 이렇게 하지 말게 하라."
하였다.
헌부(憲府)에서 전계(前啓)를 다시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정희보(鄭熙普)를 집의로, 박춘보(朴春普)를 정언으로, 이덕중(李德重)을 부응교로, 조명리(曹明履)를 교리로 삼았다.
부제학(副提學) 김진상(金鎭商)이 상소하기를,
"생각하건대, 우리 전하께서는 타고난 효성과 세월 가는 것을 아까워하는 정성으로 한 나라의 것을 다하여 보양하신 지도 이미 16년이 되었는데, 어버이의 뜻을 따라 기쁘게 하고 물건으로 봉양하는 데에 갖추지 않은 것이 없었으며, 전에 이미 잔을 들어 수(壽)를 빌고 이제 또 존호(尊號)를 올려 아름다움을 찬양하기 위하여 성대한 의례를 장차 거행할 것이므로 여정(輿情)이 함께 기뻐하니, 실로 국가의 끝없는 복입니다. 신은 이에 대하여 구구하게 비는 정성이 있습니다. 대저 임금의 효도는 서민과 같지 않고 또한 큰 것과 작은 것의 구별이 있습니다. 하루에 세 번 조현(朝見)하여 잠자리를 묻고 음식을 보살피고 풍성한 음식을 차려 올리고 휘호(徽號)를 올리는 것은 효도이고, 성의(聖意)·정심(正心)·제가(齊家)·치국(治國)하여 백성을 편안하게 하고 종사(宗社)를 튼튼하게 하는 것은 큰 효도입니다. 이제 전하께서는 그 작은 것에 대하여 이미 스스로 부족한 것이 없으시니, 그 큰 것에 대하여 어찌 더 힘쓰시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성학(聖學)을 더욱 힘쓰고 성덕(聖德)을 더욱 진취하며, 성실하게 본심을 간직하여 감싸는 사정(私情)을 끊고 정대(正大)하게 일을 처리하여 치우치는 흠을 없애며, 허물을 고치기는 바람·천둥처럼 빨라서 조금도 인색하지 말고 착한 것을 따르기는 급류가 흐르듯이 하여 오직 미치지 못할세라 염려하며, 사령(辭令)을 내면 반드시 신중하기를 힘쓰고 시비를 정하면 반드시 견지(堅持)하기를 힘쓰며, 작은 혐의 때문에 대체를 손상하지 말고 인정 때문에 의리를 해치지 말며, 스스로 비하하여 말을 억측하여 뭇 신하가 혹 나를 업신여기는가 의심하지 말고 말에 따라 비유를 댄 것이 의리에 벗어났다 하여 온 세상이 나를 따르지 않는다고 생각하지 말며, 작은 은혜를 어진 것으로 여기지 말고 잗달게 살피는 것을 밝은 것으로 여기지 말며, 희노(喜怒)에 따라 사람을 상벌(賞罰)하지 말고 이록(利祿)으로 사람을 어거하지 말며, 귀에 거슬리는 말을 싫어하지 말고 도(道)를 지키는 선비를 깔보지 말며, 조종(祖宗)께서 유족(裕足)한 도리를 후손에게 끼친 아름다운 가르침을 능히 본받고 선조(先朝)의 좋은 법을 바꾸어 어지럽힌 것을 뒤미처 바로잡으며, 이에 따라 어진 사람을 등용하고 간사한 자를 물리치고 이에 따라 충신을 권장하고 역적을 징계하며, 내 몸으로 하늘의 뜻을 이어 표준을 세워 사방에서 본받아 바른 데로 돌아가게 하고 조정(調停)하는 폐습을 없애고 탕평(湯平)의 실효를 거두어 백성을 화평하게 하고 영명(永命)을 비는 도리로 삼으소서. 그러면 종묘(宗廟)에 제향하고 자손을 보전한 순(舜)임금의 대효(大孝)와 뜻을 잇고 일을 이은 무왕(武王)의 달효(達孝)도 이보다 더할 수 없을 것이니, 어찌 성대하지 않겠습니까?"
하니, 비답(批答)하기를,
"아뢴 것을 유의하여 더 힘쓰겠다."
하였다.
1월 28일 경오
임금이 인정문(仁政門)에 친히 나아가 수인(囚人)을 국문(鞫問)하였다. 죄인들을 형신(刑訊)하였으나 모두 승복하지 않았다. 임금이 말하기를,
"최명주(崔命柱) 한 사람 때문에 죽은 것이 모두 몇 사람인가? 역적 양찬규(梁纘揆)를 과람(過濫)하게 한 것이 최명주이고 역적 양찬규를 모역(謀逆)하게 한 것도 최명주이다."
하고, 드디어 소덕정(蘇德貞)·박중규(朴重葵)는 석방하고, 그 나머지 죄인은 우선 호남(湖南)의 장문(狀聞)을 기다려서 처치하라고 명하였다.
간원(諫院) 【정언(正言) 신춘보(申春普)이다.】 에서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죄인 박중규(朴重葵)를 작처(酌處)한 것은 살리기를 좋아하는 덕의(德意)에서 나왔을지라도 역전 양찬규(梁纘揆)와 주무(綢繆)한 정상이 이미 드러났는데, 사정을 알고도 고하지 않은 죄를 그가 어찌 감히 벗어날 수 있겠습니까? 청컨대, 박중규를 작처하라는 명을 도로 거두소서."
하였으나, 임금이 윤허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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