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영조실록51권, 영조 16년 1740년 2월

싸라리리 2025. 9. 24. 08: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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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1일 임신

지평(持平) 이성해(李聖海)가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연석(筵席)에서 말한 것은 사체(事體)가 엄하고도 중합니다. 11일의 연교(筵敎)가 명백하고 간절한 것은 관계되는 것이 중대하고 또 중외(中外)에 반시(頒示)하라는 명이 있었으면 그때의 승지(承旨)와 사관(史官)이 실록(實錄)에서 베껴 내어 감히 조금도 차이나게 할 수 없을 것인데, 접때 대신(大臣)이 아뢴 것을 보면 그 허술함을 알 만하니, 해당 승지(承旨)는 파직(罷職)하고 기주(記注)는 나처(拿處)하소서. 이번에 누누이 내리신 성교(聖敎)는 실로 의리를 밝히고 국시(國是)를 장려하려는 뜻에서 나왔으니, 오늘날의 신하로서는 마음을 고치고 받들어 따르기에 겨를이 없어야 할 것인데, 어지러이 상소하여 마치 이기려고 다투는 듯하니, 조금이라도 삼가고 두려워하는 마음이 있다면 어찌 감히 그럴 수 있겠습니까? 징려(懲礪)를 엄중히 하고 제방(隄防)을 준열히 하는 도리로서는 아울러 견책(譴責)을 시행해야 하겠습니다."
하였는데, 비답(批答)하기를,
"피차가 이기려고 힘쓰는 것은 결코 오늘날 행하지 말아야 할 것인데, 한 중신(重臣)이 아뢰거나 상소한 것에 찌꺼기가 없지 않으므로 이미 처분하였다. 어영 대장(御營大將)이 아뢴 것은 결코 다른 뜻이 없었는데, 이제 비난하여 배척하니, 어찌 공평하다 하겠는가? 기주의 착오는 괴이할 것도 없고 승지를 파직하는 것은 또한 지나치다. 마음을 고치지 못한다는 것은 스스로 자신을 말한 것이라 하겠다."
하고, 이어서 이성해의 벼슬을 체차하라고 명하였다.

 

2월 2일 계유

간원(諫院)에서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호조 참판(戶曹參判) 조관빈(趙觀彬)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특별히 두 대신의 벼슬을 회복하여 의리가 다시 밝아지고 정충(貞忠)이 신설(伸雪)된 것은 바로 성상에 대한 무함을 밝힘이고, 간사한 자의 싹을 꺾는 한 단서이니, 장차 천하 후세에 할 말이 있게 되었으며, 신이 다행히 잠시 죽지 않아서 이런 일을 볼 수 있었습니다. 매우 원통한 일이 다 신설되고 국시(國是)가 조금 정해졌으니, 참으로 천폐(天陛)에 한 번 나아가 사은(謝恩)해야 할 것인데, 병이 이미 강행할 수 없게 되었으니 벼슬은 체차해야 마땅하겠습니다."
하였는데, 임금이 예사 비답(批答)을 내렸다. 조관빈은 일찍이 두 대신이 복관(復官)되지 않기 때문에 인의(引義)하여 출사(出仕)하지 않았는데, 이때에 이르러 의리가 이미 펴졌다고 스스로 생각하였으므로 그 말이 이러하였고, 한성부 판윤(漢城府判尹)에 탁배(擢拜)되고서야 비로소 나와서 벼슬하였다.

 

2월 3일 갑술

황정(黃晸)을 대사간으로, 민익수(閔翼洙)를 지평으로, 권현(權賢)을 헌납으로, 한봉조(韓鳳朝)·김상적(金尙迪)을 정언으로, 이석표(李錫杓)를 부교리로, 임정(任珽)·이세진(李世璡)·서명구(徐命九)·남태량(南泰良)을 승지로 삼았다.

 

호조 판서(戶曹判書) 조현명(趙顯命)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대신(臺臣)이 죄를 성토(聲討)한 것이 매우 엄하거니와, 마음을 고치고 제방(隄防)을 준열히 해야 한다는 말로 말하면 다 오랑캐를 처치하는 방법이니, 범하여 짓밟는 것이 어찌 이 지경에 이르렀겠습니까?"
하고, 이어서 성밖으로 나가 명소(命召)를 반납하고, 또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지금의 당인(黨人)은 다 신축년026)  ·임인년027)  의 충안(忠案)·역안(逆案)으로 진퇴(進退)하나, 신은 옳게 여기지 않습니다. 대저 당인이 충이니 역이니 하는 것은 그것이 백세(百世)의 정론(定論)인지 알 수 없고, 충을 역이라 하고 역을 충이라 하더라도 이것은 국가의 형정(刑政)의 한때의 잘잘못에 지나지 않으니, 또한 어찌 신하의 진퇴가 크게 관계되는 것이 될 만하겠습니까? 신이 진퇴하는 까닭은 있습니다. 탕평(蕩平)이라는 것이 이것입니다. 처음에 신의 죽은 형이 이 말을 선정(先正)에게서 듣고 신에게 전해 주었습니다. 대개 일찍이 말하기를, ‘이 말이 행해지면 진신(縉紳)의 화(禍)가 그쳐서 국맥(國脈)이 끝없이 길어질 것이고, 그렇지 않으면 나라의 위망(危亡)을 당장 기다릴 수 있을 것이다.’ 하였는데, 바로 신축년·을사년028)   이래의 일을 살펴 알 수 있습니다. 신이 마음을 정하고 지론(持論)하는 까닭은 본디 이러하기를 바라는 것이므로, 들어가서 전하께 고하는 것이 이것이고 나가서 동료에게 말하는 것도 이것입니다. 정사(政事)를 조치할 때에 나타내는 것도 이것이고 진퇴·취사(取捨)할 때에도 이것을 절도(節度)로 삼지 않을 수 없는 것은 참으로 사리(事理)가 그러한 것입니다. 다만 신이 변변치 못하기 때문에 정성은 사람을 감동시킬 만하지 못하고 명망은 남을 진정시킬 만하지 못하여 10년 동안 행하여도 마침내 보람을 이루지 못하였고, 마침내 성취한 것은 전하의 허다한 작록(爵祿)을 훔친 것에 지나지 않으니, 신하가 이러하면 죄를 이미 용서받을 수 없을 것입니다. 더구나 지난 가을 이후로 조정(朝廷)의 규모가 날로 새로워져서 탕평이라는 것과는 점점 멀어져 가니, 신은 이미 시험하여 보람이 없는 사람으로서 이미 싸움에 진 끝에 용맹을 말할 수 없는 처지인데, 마음을 고치고 생각을 바꾸어 오늘의 시상(時象)에 따라 일하게 한다면, 또한 신이 할 수 있는 것이 아닐 것입니다. 이것이 신이 마지못하여 스스로 안정할 생각을 하는 까닭입니다."
하였는데, 임금이 우악한 비답(批答)을 내려 위유(慰諭)하고 도로 들어오도록 재촉하였다.

 

임금이 또 인정문(仁政門)에 친림(親臨)하여 죄수를 국문(鞫問)하였다. 죄인 재오(再五)·하룡(夏龍)·한구(漢耉)·태성(太成)·태명(兌鳴) 등을 면질(面質)하여 공초(洪招)를 받았으나, 모두 승복하지 않았다. 도로 본부(本府)에 내렸다.

 

헌부(憲府)와 간원(諫院)에서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특지(特旨)로 민익수(閔翼洙)를 체차하였다. 임금이 대신(大臣)에게 묻기를,
"민익수는 음관(蔭官)인가? 초선(抄選)인가? 산림(山林)으로 대우한다면 지나칠 것이다."
하자, 김재로(金在魯)가 말하기를,
"그 문학(文學)과 행의(行誼)가 숭상할 만하니, 방악(方岳)029)  의 직임에 써 보아야 하겠습니다."
하고, 유척기(兪拓基)도 말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이 사람의 재주는 기량에 맞추어 써야 하고 대각(臺閣)으로 쓰지 말아야 할 것이다."
하고, 이어서 그 벼슬을 체차하라고 명하였다. 대개 민익수는 언론에 준열하고 또 인현 왕후(仁顯王后)의 친족이 되기 때문이었다.

 

2월 4일 을해

임금이 또 인정문(仁政門)에 친림(親臨)하여 죄수를 국문(鞫問)하였다. 죄인 하룡(夏龍)·재오(再五)·태명(兌鳴) 등이 모두 승복하지 않았다.

 

집의(執義) 정희보(鄭熙普)가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역적 양찬규(梁纘揆)의 요악(妖惡)함은 전사(前史)에 없던 것인데, 최명주(崔命柱)가 여러 해 먹여 기르는 동안에 머리를 다시 기르게 하여 이름지어 주고 여종[婢]과 만나서 살게 하였고, 향임(鄕任)에 특별히 차출되어서는 그의 청탁을 따랐습니다. 그렇다면 그 체결(締結)하여 잡란(雜亂)한 것은 워낙 이미 놀라운데 역적들의 공초(供招)에도 그 이름이 여러 번 거론되었으니, 흉모(凶謀)와 역절(逆節)은 신도 반드시 그가 참여하여 알았다고는 할 수 없으나, 최명주가 사랑하고 믿어서 장려하고 발탁하지 않았다면 역적 양찬규는 한낱 중에 지나지 않는데 무슨 연유로 전전하여 이렇게까지 되어 뜻대로 임금을 헐뜯었겠습니까? 최명주에게 가벼운 죄만을 준 것을 신은 개탄합니다. 신은 최명주를 한 번 나국(拿鞫)하는 일은 결코 그만 둘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하고, 또 말하기를,
"김굉(金鋐)은 대각(臺閣)에 있을 때에 간언(諫言)을 받아들이느니 직언(直言)을 받아들이느니 하는 따위 말로 임금에게 아첨하는 꼴을 하였고, 논박받아 파직되어서는 대신(大臣)과 전조 당상(銓曹堂上)의 집에 슬피 하소하여 가엾이 여겨 주기를 바랐으니, 대선(臺選)에서 영구히 삭제해야 하겠습니다."
하였는데, 비답(批答)하기를,
"역적 양찬규가 환속(還俗)한 것은 최명주에 연유하였을지라도 그 역절에는 이미 도운 것이 없었으니, 무슨 물을 만한 것이 있겠는가? 김굉의 일은 염치를 힘쓰게 하는 도리로서 어찌 윤허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아뢴 대로 시행하라."
하였다.

 

2월 5일 병자

임금이 인정문(仁政門)에 나아가 죄수들을 국문(鞫問)하였다. 죄인 태성(兌成)은 정형하고 태명(兌鳴)은 물고(物故)되고 재오(再五)·하룡(夏龍)·양성규(梁聖揆)·양의규(梁義揆)·양중형(梁重亨)은 모두 작처(酌處)하여 산배(散配)하고 용문(龍文)은 석방하였다. 이에 앞서 호남(湖南)에 있는 김일경(金一鏡)·박필몽(朴弼夢)의 잔당 중에 괘서(掛書)하여 난언(亂言)한 자가 있었으므로 살펴 잡았으나, 실정을 알아 내지 못하였다. 재오 등이 잡히게 되어서는 옥사(獄辭)가 태성에게 관련되었고 또 무신년030)   이후로 동모(同謀)한 사람의 도목(都目)031)  을 감추어 두었다는 말이 있으므로 이것을 태성에게 물었으나, 태성이 항변하고 오래 승복하지 않았다. 이날 죄수들을 서로 면질(面質)시켰는데, 죄수들이 다 괘서와 도목을 태성이 한 짓으로 돌렸으므로 더 엄하게 형신(刑訊)하였으나, 그래도 승복하지 않고, ‘임금의 형벌도 이러합니까? 하늘이 이 원통한 정상을 살필 것입니다.’라고 불손한 말을 하기까지 하니, 임금이 노하여 말하기를,
"죄인의 말이 매우 흉참(凶慘)하다. 이것은 임금을 범하는 부도(不道)한 것이다."
하고, 결안(結案)을 받으라고 명하였다. 죄인이 또 거역하므로 더 형신하니, 마침내 조금도 말소리를 내지 않았다. 임금이 말하기를,
"형장(刑杖)을 맞다가 죽을 것이 염려스러우니, 장차 어떻게 처치해야 할 것인가?"
하자, 좌의정(左議政) 김재로(金在魯)가 말하기를,
"전에도 전교(傳敎)에 따라 처형하는 규례가 있었으니, 곧바로 처형하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하고, 우의정(右議政) 유척기(兪拓基)가 말하기를,
"옥사(獄事)의 체례(體例)는 본디 이렇게 하지 않아야 할 것이니, 더 형신하여 승복을 받고 결안을 받아서 처형해야 하겠습니다."
하니, 드디어 더 형신하여 공초(供招)를 받았다. 역적 양찬규(梁纘揆)와 주무(綢繆)하여 흉모(凶謀)에 참여하여 알았고, 도목을 감추어 두었다가 두려워서 불살랐으며, 호남의 괘서를 스스로 짓고 스스로 썼다는 등의 일이 재오 등의 공초에 낭자하였으나 반쯤 불어 군색하게 회피하고 다짐을 거역하였고 감히 임금을 범하는 부도한 말을 방자하게 입에 냈다는 것으로 결안을 받아 처형하였다. 이어서 다른 죄인이 잡히기를 기다려 본부(本府)를 시켜 추국(推鞫)하라고 명하였다.
사신은 말한다. "죄인은 결안 뒤에 처형하되 법의(法意)가 엄중하다. 대개 충분히 삼가는 도리를 다하기 위한 것이니, 김재로가 결안을 기다리지 않고 곧바로 처형하기를 바란 것이 어찌 뒤에 폐단을 끼치지 않겠는가? 유척기가 한 마디 말하지 않았으면 법이 이 때문에 무너졌을 것이니, 두렵지 않을 수 있겠는가?"


【태백산사고본】 37책 51권 7장 A면【국편영인본】 42책 654면
【분류】왕실-행행(行幸) / 변란(變亂) / 사법-재판(裁判) / 사법-행형(行刑) / 역사-사학(史學)


[註 030] 무신년 : 1728 영조 4년.[註 031] 도목(都目) : 모아 적은 문서.
사신은 말한다. "죄인은 결안 뒤에 처형하되 법의(法意)가 엄중하다. 대개 충분히 삼가는 도리를 다하기 위한 것이니, 김재로가 결안을 기다리지 않고 곧바로 처형하기를 바란 것이 어찌 뒤에 폐단을 끼치지 않겠는가? 유척기가 한 마디 말하지 않았으면 법이 이 때문에 무너졌을 것이니, 두렵지 않을 수 있겠는가?"

 

2월 7일 무인

달이 필성(畢星)에 들어갔다.

 

2월 8일 기묘

해에 중운(重暈)이 있었는데, 좌우에 극(戟)이 있고 안은 붉고 밖은 푸르렀다.

 

이틀 동안 도정(都政)을 행하였는데, 대개 12월의 대정(大政)을 물려서 행한 것이었다. 한익모(韓翼謨)를 부수찬으로, 홍봉조(洪鳳祚)를 수찬으로, 윤급(尹汲)을 대사성으로, 김희로(金希魯)를 강원도 관찰사로, 오원(吳援)을 강화부 유수로, 홍창한(洪昌漢)을 이조 정랑으로, 이일서(李日瑞)를 장령으로 삼았다. 이조 판서(吏曹判書) 조상경(趙尙絅)의 정사(政事)이었다.

 

지평(持平) 이하술(李河述)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전계(前啓) 가운데에서 동래부(東萊府)의 여인에 관한 일과 동교(東郊)의 이사(尼舍)에 관한 일은 당초에 논계(論啓)한 것이 대간(臺諫)의 체례(體例)에 맞는데 법을 지키는 처지에서 쉽사리 정계(停啓)하였으니, 경책(警責)이 없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추국(推鞫)하는 죄수 양중형(梁重亨)으로 말하면 또한 문득 석방하여서는 안 될 것인데 입시(入侍)한 양사(兩司)가 또한 쟁집(爭執)하는 논의가 없었으니, 양중형을 작처(酌處)하라는 명을 도로 거두셔야 하겠습니다."
하였는데, 비답(批答)하여 윤허하지 않았다.

 

2월 10일 신사

달이 동정성(東井星)을 범하였다.

 

평안도에서 여기(癘氣)가 치열하게 일어나서 사람이 많이 죽었는데, 도신(道臣)이 계문(啓聞)하였다.

 

임금이 소대(召對)를 행하였다. 참찬관(參贊官) 권혁(權爀)이 말하기를,
"정국(庭鞫) 때 죄인을 체포하는 규례가 매우 허술하여 쪽지에 죄인의 이름을 쓸 뿐이고 믿을 만한 도장이 없으니, 그 종이를 조금 넓혀셔 도장을 찍어서 간사하게 속이는 것을 막아야 하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체포하는 일은 비밀스럽고도 급한데, 어느 겨를에 도장을 찍겠는가?"
하였다.

 

2월 12일 계미

정형복(鄭亨復)을 대사간으로, 황재(黃梓)를 집의로, 김상석(金相奭)을 사간으로, 정실(鄭實)을 지평으로, 김시혁(金始㷜)을 형조 참판으로 삼았다.

 

헌부(憲府)에서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2월 13일 갑신

임금이 소대(召對)를 행하였다. 《대학연의보(大學衍義補)》를 강(講)하였는데, 권량(權量)을 삼간다는 글에 이르러 검토관(檢討官) 서명신(徐命臣)이 말하기를,
"《서전(書傳)》에 이른바 율도 량형(律度量衡)을 동일하게 한다는 것은 대개 요순(堯舜) 때부터 또한 권형(權衡)을 중하게 여긴 것입니다. 우리 나라의 도량(度量)에는 본디 정제(定制)가 있으나, 근래 간사하게 속이는 것이 날로 심해져서 형척 두곡(衡尺斗斛)이 팔도에서 각각 다르고, 시전(市廛)으로 말하면 폐단이 더욱이 많습니다. 신의 생각으로는 5년에 한 번 살피거나 10년에 한 번 살피는 것을 영구히 정식(定式)으로 삼아 신칙(申飭)하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대저 양형(量衡)이 차이나는 것은 그 폐단이 끝이 없는데, 민간에서 거두어들이는 것으로 말하면 한 치나 한 되라도 결코 더 거두어서는 안 됩니다. 수량이 남게 받아들인 것은 간사한 관리의 이익으로 돌아갈 뿐이므로 나라에는 이익이 없고 백성에게 원망받으니, 이것은 바로잡지 않아서는 안 됩니다."
하고, 겸 춘추(兼春秋) 김정윤(金廷潤)도 말하기를,
"유신(儒臣)이 양형이 다른 것을 아뢴 것은 참으로 그렇습니다. 또 신이 남방의 고을을 맡았을 때에 군포(軍布)와 여러 가지를 상납하면 반드시 40척(尺)에 맞추고 양끝에 도장을 찍었으나 경아문(京衙門)의 군사가 받는 것은 40척에 차지 않았는데, 이것은 기조(騎曹)의 이서(吏胥)가 농간한 탓이니, 엄히 막는 방도가 있어야 하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엄히 신칙하라고 명하고, 이어서 비국(備局)에 명하여 경외(京外)의 두곡(斗斛)을 교정(校正)하게 하였다. 서명신이 또 말하기를,
"정전법(井田法)은 행할 수 없더라도 한(漢)나라 때의 한전법(限田法)을 행한다면, 가난한 백성을 보전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한전법을 행하더라도 한외(限外)의 전토(田土)를 턱없이 빼앗아 가난한 백성에게 줄 수 없거니와, 죄다 공가(公家)에서 사서 줄 수도 없으면 가난한 백성이 어떻게 스스로 사겠는가? 겸병(兼幷)의 걱정은 단지 토호(土豪)뿐이 아니라 사대부(士大夫)도 그러하다. 내가 교하(交河)에 능행(陵行)하였을 때 앞들[前郊]이 심히 넓음을 보고 이를 물었더니, 모두 사대부의 가전(家田)이었다. 이로써 추측한다면 팔도가 다 그러하니, 소민(小民)이 매우 불쌍하다."
하였다. 서명신이 또 말하기를,
"연행(燕行)032)  의 은화(銀貨)에 절제가 없어 한갓 완물(玩物)만 가지고 돌아가서 유익한 것으로 무익한 것을 만들 뿐이니, 이 때문에 나라의 저축이 비게 됩니다."
하니, 임금이 엄히 신칙(申飭)하라고 명하였다.

 

송징계(宋徵啓)를 대사간으로, 신사관(申思觀)을 정언으로, 민통수(閔通洙)를 헌납으로, 이수해(李壽海)를 지평으로, 조명리(趙明履)를 응교로, 송교명(宋敎明)을 교리로 삼았다.

 

2월 15일 병술

정언(正言) 신사관(申思觀)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10년 동안의 국시(國是)를 하루아침에 갑자기 고치고 처분이 여러 번 바뀌면 장차 뒷사람에게 믿음을 받을 수 없고, 금방(禁防)을 미리 세워서 언로(言路)를 막는 것으로 말하면 더욱이 성총(聖聰)을 넓히는 도리가 아닙니다. 참으로 전하의 이 거조(擧措)가 사의(事宜)에 맞는다면 금방을 세우지 않더라도 사람들이 절로 말하지 않을 것이고, 뭇 신하가 쟁집(爭執)할세라 미리 염려하여 먼저 겸제하는 뜻을 보이신다면 그 물정(物情)에 어그러지는 것이 더욱 클 것입니다. 대저 뭇 신하가 말할 만하여도 감히 말할 수 없게 하는 것이 어찌 국가의 복이겠습니까?"
하였는데, 비답(批答)하기를,
"권면하여 아뢴 것을 스스로 힘쓰겠다."
하였다.

 

2월 17일 무자

임금이 인정문(仁政門)에 친림(親臨)하여 죄수를 국문(鞫問)하였다. 이때 양찬규(梁纘揆)의 일을 아직 다 밝혀서 실정을 알아내지 못하였으므로, 호남(湖南)의 도신(道臣)이 잇달아 염탐하였는데, 광주(光州)에 사는 백성 최태원(崔太元)과 이덕방(李德芳)이라는 자가 평소에 양찬규와 서로 친하다는 말을 듣고 그가 정상을 알았으리라고 의심하여 잡아서 물으니, 최태원이 말하기를, ‘이덕방이 양찬규와 서로 친한데 일찍이 주머니 속을 보니 어떤 글이 있는데 원국사(怨國詞)라고 제목한 것이었다.’ 하였다. 드디어 두 사람을 잡고 그 말을 감사(監司)에게 고하니, 감사가 장문(狀聞)하고 잡아보냈다. 임금이 친히 물으니, 최태원·이덕방이 서로 미루며 변명하고 또 다른 사람을 끌어댔다. 이튿날 임금이 또 친히 물었으나, 전과 같이 공초(供招)하고 승복하지 않았다. 그래서 최태원·이덕방을 가두고 관련된 사람들은 정배(定配)하기도 하고 석방하기도 하였다. 대개 무신년033)  의 여얼(餘孼)로서 나라를 원망하는 자인데 다 상한(常漢)이나 미천한 무리이었다.

 

2월 18일 기축

좌의정(左議政) 김재로(金在魯)가 차자를 올려 주서(注書)가 연설(筵說)을 고쳐 쓴 죄를 논하고 파직(罷職)하기를 청하니, 해부(該府)에 명하여 나처(拿處)하게 하였다. 당초 임인년034)  의 무안(誣案) 가운데에 김성행(金省行)의 일이 있었는데 김성행을 김창집(金昌集)의 손자라 하였다. 임금이 번번이 아들과 손자라는 말을 거론하여 김창집의 죄로 삼았고, 김창집을 신복(伸復)할 때에 이르러 또 김성행의 일을 말하므로, 신하들이 함께 그 억울함을 아뢰었다. 그때의 기주(記注)가 김재로의 연주(筵奏)를 기재하였는데, 변환(變幻)하여 고쳐서 마치 김재로가 김성행을 무안(誣案)에 두어야 한다고 한 것처럼 되었다. 그래서 김재로가 차자를 올려 이것을 논하였는데, 임금이 나처하라고 명한 뒤에 또 연중(筵中)에서 복관(復官)에 관한 연교(筵敎)를 변환하여 고쳐서 보내고 뺏다 하여 엄한 분부를 내려 매우 꾸짖고, 주서에게 삭직(削職)하는 법을 시행하였다.

 

헌부(憲府) 【장령(掌令) 이하술(李河述)이다.】 에서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두 대신(大臣)을 복관(復官)하라는 명은 처분이 명백하고 국시(國是)가 이미 정해졌으므로 후세에 할말이 있을 수 있습니다마는, 저 의리에 배치되는 논의가 잇달아 어지러우므로 인심이 빠져 들고 세도(世道)가 어지러워지는 것이 다시 여지가 없는데, 접대 신사관(申思觀)이 상소한 것은 생각이 음흉하고 말이 간사합니다. 금령(禁令)을 핑계하여 본사(本事)를 거론하지 않고 다만 견제하는 뜻을 먼저 보이신다는 따위의 말로 교묘하게 말하여 속여서 오로지 불식(拂拭)하고 협제(脅制)할 생각을 하였으니, 두려워하는 마음이 있으면 어찌 감히 그럴 수 있겠습니까? 청컨대, 신사관의 벼슬을 삭탈하여 문외(門外)로 출송(黜送)하소서."
하니, 윤허하고 이어서 또 대신들을 불러 앞으로 나오게 하여 하교하기를,
"조상의 계통을 잇는 것은 전사(前史)가 고르지 않거니와, 황형(皇兄)께서 한 나라를 부탁하신 중임을 받고 자성(慈聖)께서 삼종(三宗)035)  의 혈통이라고 하신 분부를 받았으니, 붕당(朋黨)이 날로 심해지고 세도(世道)가 날로 떨어지더라도 오늘날의 조정에 서서 나를 임금으로 섬기는 자가 누구인들 감히 이기려고 힘쓰랴마는, 점점 서로 이기려고 힘쓰는 것을 스스로 의리로 삼아 효경(梟獍)036)  의 마음을 열고 무신년037)  의 반역을 빚어냈으니, 통탄하여 견딜 수 있겠는가? 접때의 처분에도 깊은 생각이 있었으니, 예전에 옳다고 한 자가 처분이 이미 정해진 뒤에 또한 무슨 마음으로 지난 일을 제기하겠으며, 예전에 그르다고 한 자도 어찌 감히 방자하게 이기려고 힘쓰겠는가? 삼장(三丈)의 나무038)  도 오히려 그 영(令)을 행하였는데, 더구나 임금의 법이겠는가? 미덥기가 사시(四時)와 같으니, 이미 하교한 뒤에 어찌 믿음이 없을 수 있겠는가?
신사관의 상소가 매우 공교하기는 하나 그가 본사를 제기하여 언급하지 않았으므로, 스스로 힘쓰겠다는 말을 조금 보였다. 대간(臺諫)의 논계(論啓)가 이미 아뢰어진 뒤에 신칙(申飭)이 없어서는 안 되겠으므로 그 논계를 윤허하기는 하였으나, 상소하거나 논계하는 것은 기상(氣像)이 아름답지 않다. 접때 고집한 것은 저들을 위한 것이 아니거니와, 이번의 처분도 이들을 위한 것이 아니다. 복관하라는 명은 뜻이 대개 깊거니와, 역률(逆律)로 다스리겠다고 신칙한 것은 범하는 일이 없기를 바란 것이다. 오늘의 뜻을 본받고, 내 마음을 따라서 공정하게 마음을 고쳐서 우리 원량(元良)을 섬기면, 나라가 바람직할 것이고 신하들도 바람직할 것이다. 양편이 풀리게 하여도 다시 어지럽히기를 일삼으면 어찌 신하들이 임금을 업신여기고 난역(亂逆)을 빚어 내는 것일 뿐이겠는가? 장차 어떤 지경에까지 가게 될는지 모를 것이니, 대대로 녹을 먹는 신하로서 어찌 차마 이런 일을 하겠는가? 두 해에 걸쳐 죄수를 신문한 것이 그 근본이 어디에 있기에 고칠 줄 모르고 오직 붕당을 그치게 될세라 염려하니, 또한 무슨 마음인가? 아! 너희 대소 신료(大小臣僚)는 모두 이 하유(下諭)를 듣고 내 뜻을 어기지 말라."
하였다.

 

2월 19일 경인

임금이 또 인정문(仁政門)에 친림(親臨)하여 죄수를 국문(鞫問)하였다. 이날 포청(捕廳)에서 잡으러 보낸 자가 미처 이르지 않았는데 임금이 문득 인정문에 나왔으므로, 수레와 호위가 갖추어지지 않았고 금부(禁府)의 당상(堂上)·낭청(郞廳)도 미처 알지 못하였다. 임금이 이미 인정문에 임하여 게을러 거행하지 않았다는 것으로 병조(兵曹)의 낭청과 금부의 낭청을 잡아들이라고 명하여 잇달아 두어 사람을 태거(汰去)하고 곤장(棍杖)으로 다스렸다. 임금이 국문을 파하고 대내(大內)로 돌아가려 할 때에 좌의정(左議政) 김재로(金在魯)가 그 정상을 아뢰고 말하기를,
"위에서 움직이시는 데에는 차례를 따르는 것이 있어야 하고, 반드시 신중한 도리를 생각하셔야 할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경의 말이 옳다. 뒤에는 경계하겠다."
하였다.

 

2월 20일 신묘

오명서(吳命瑞)를 대사간으로, 송교명(宋敎明)을 사간으로, 서명신(徐命臣)을 헌납으로, 이태중(李台重)을 정언으로, 이성효(李性孝)·이석표(李錫杓)를 교리로, 서명빈(徐命彬)을 부제학으로 삼았다.

 

2월 21일 임진

판부사(判府事) 송인명(宋寅明)이, 이하술(李河述)이 의리에 배치된다고 배척하였기 때문에 인의(引義)하여 차자를 올려 사직하니, 비답(批答)을 내려 위유(慰諭)하였다.

 

호조 판서(戶曹判書) 조현명(趙顯命)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접때는 이성해(李聖海)가 헐뜯는 것을 당하였고, 이제는 이하술(李河述)이 이를 계속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대저 의리라는 것은 본디 당인(黨人)이 알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무릇 당인이 의리라고 하는 것과 배치되더라도 신이 사양할 바가 아니므로 웃고 받아야 하겠습니다마는, 그 범하고 알력하며 도리에 어그러지고 남을 깔보는 것은 조정(朝廷)의 체모가 아주 없으니, 이것은 진신(搢紳)의 치욕입니다."
하였는데, 비답하기를,
"접때 비답에 이미 다 유시하였는데, 경은 어찌하여 말하는가?"
하였다.

 

2월 22일 계사

왕대비전(王大妃殿)의 존호(尊號)를 광선(光宣)이라 올렸다. 임금이 인정전(仁政殿)에 백관(百官)을 거느리고 책보(冊寶)를 바치고 휘호(徽號)를 올리며 진하(陳賀)한 뒤에, 임금이 다시 인정전에 나아가 진하를 받고 사령(赦令)을 반포하고 백관의 품계(品階)를 올렸다. 반교(頒敎)하기를,
"왕은 이르노라. 효(孝)는 높이고 나타내는 것보다 큰 것이 없으므로 아름다운 칭호를 드날리고, 예(禮)는 내용과 형식을 극진히 갖추는 것이므로 성대한 의례(儀禮)를 거애하니, 좋은 때를 가려서 포고하여 치렀다. 삼가 생각하건대, 문모(文母)는 성선(聖善)한 바탕이 곤도(坤道)에 맞아 곧고 바르고 크시다. 선왕께 짝하여 오로지 대내(大內)를 다스리시어 아침부터 밤까지 임금을 모시는 데에 어김이 없고, 소자(小子)를 지금까지 보호하시어 종사(宗社)가 힘입었다. 거친 명주 옷을 입고 검소한 덕을 밝히시어 어진 은혜가 뭇 백성에게 미쳤고, 중전(中殿)을 거쳐 동조(東朝)에 계신 것이 전후에 걸쳐 40년이 되어 간다. 천명(天命)을 처음 받아서는 중순(中順)한 도리로 스스로 단속하시고, 집안에 모범을 보여 자손을 도와 편안하게 하고 좋은 계책을 끼치시니, 세상에서 해외(海外)의 도신(塗莘)039)  이라 일컫고 사람들이 여중(女中)의 요순(堯舜)이라 기린다. 보령(寶齡)이 점점 많아지시매 기쁘고도 두려운 정성이 늘 간절하고, 아름다운 풍도가 더욱 밝아지시매 높여 받드는 도리를 다하려고 생각한다. 조롱박으로 바닷물을 헤아리거나 대통 구멍으로 하늘을 내다보는 것 같아서 형용하기에는 부족하더라도, 옥책(玉冊)에 쓰고 금니(金泥)로 봉하면 사랑하고 공경하는 뜻을 조금은 펼 수 있을 것이다. 이미 뭇사람의 뜻을 막기도 어렵거니와, 더구나 구장(舊章)에 의거할 수 있는 일이겠는가?
이미 이달 22일에 책보(冊寶)를 받들어 대왕 대비(大王大妃)께 광선(光宣)이라는 존호를 올렸거니와, 성대한 전례(典禮)가 잘 치러졌으니 큰 복이 곧 모일 것이다. 그래서 진심을 고하고 특별히 명을 내린다. 하우(夏禹)의 천지처럼 만물을 덮고 이는 어진 뜻을 미루어 큰 과오도 용서하거니와 은탕(殷湯)이 백성을 가엾이 여겨 빈 뜻을 본받는데 작은 과오를 어찌 노하겠는가? 이달 22일 어둑새벽 이전에 지은 사죄(死罪) 이하의 잡범(雜犯)을 모두 용서하고, 관직에 있는 자는 각각 한 자급(資級)을 올리되 자궁(資窮)040)  한 자는 대가(代加)041)  한다. 아! 경사는 일인(一人)에게 있을지라도 교화는 팔역(八域)에 행해지는 것이니, 아름다운 칭호가 사방에 통달하면 큰 법도를 나타내어 백성에게 모범을 보일 것이고, 우러러 보아 모두 새로워지는 것이 바람을 따라 쓰러지는 풀처럼 빠를 것이다. 그러므로 교시(敎示)하니 잘 알아야 할 것이다."
하였다.  【대제학(大提學) 이덕수(李德壽)가 지어 바쳤다.】


【태백산사고본】 37책 51권 9장 B면【국편영인본】 42책 655면
【분류】왕실-비빈(妃嬪) / 왕실-종사(宗社) / 왕실-의식(儀式) / 사법-행형(行刑) / 인사-관리(管理)


[註 039] 도신(塗莘) : 도산씨(塗山氏)의 딸인 우(禹)임금의 비(妃)와 유신씨(有莘氏)의 딸인 주 문왕(周文王)의 비(妃)를 가리키는 말. 두 사람은 다 모의(母儀)와 부덕(婦德)으로 이름났음.[註 040] 자궁(資窮) : 당하관(堂下官)이 품계(品階)가 다시 더 올라갈 자리가 없게 되었다는 뜻으로, 당하 정3품(正三品)이 됨을 말함.[註 041] 대가(代加) : 자궁(資窮) 등의 이유로 자급을 올려 줄 당자 대신에 아들·사위·아우·조카 등에게 자급을 올려 주는 것.

 

지평(持平) 이하술(李河述)이 아뢰기를,
"조현명(趙顯命)이 신의 논계(論啓) 가운데에 있는 의리에 배치된다는 한 어구에 성내어 성기(盛氣)가 치솟아 말이 도리에 어그러지고 남을 깔봅니다. 아! 두 대신(大臣)의 복관(復官)은 간계되는 것이 매우 중대한데 중신(重臣)인 자가 의리에 대하여 힘껏 다투어 조금도 삼가는 것이 없으며 굳센 의지가 일을 당하면 곧 움직여 대각(臺閣)을 업신여기고 뜻대로 헐뜯어 욕하니, 이것은 중신의 상서로운 일이 아닙니다. 전에 이미 조덕린(趙德隣)을 잡아오는 일을 늦추었고 다시 김성탁(金聖鐸)이 국문(鞫問)받는 것을 구제하였습니다. 이렇게 하고서야 의리를 아는 사람이 될 수 있는 것입니까? 신이 함부로 한 논계를 아뢰었다가 훈귀(勳貴)의 노여움을 매우 건드렸으니, 어찌 그대로 무릅쓰고 있을 수 있겠습니까? 청컨대, 신의 벼슬을 체차하소서."
하니, 사직하지 말라고 명하였다. 조현명이 금부(禁府)에서 대명(待命)하고 또 장부(將符)를 반납하였다.

 

권영(權瑩)을 교리로, 민통수(閔通洙)를 수찬으로 삼았다.

 

2월 23일 갑오

예조(禮曹)에서 존호 경과(尊號慶科)를 설행(設行)하기를 계청(啓請)하니, 정시(庭試)로 행하라고 명하였다.

 

존호 도감 도제조(尊號都監都提調)·정사(正使) 이하에게는 말[馬]을 내려 차등있게 상을 주고, 옥책 서사관(玉冊書寫官) 윤득화(尹得和)와 도청(都廳) 유최기(兪最基)·권영(權瑩)에게는 가자(加資)하고, 감조관(監造官) 두 사람에게는 6품(品) 벼슬에 올리라고 명하였다.

 

2월 25일 병신

지평(持平) 정실(鄭實)이 상소하여 여섯 조목으로 경계를 아뢰었는데, 그 대략 이르기를,
"임금의 마음을 바루어 근본을 세울 것입니다. 임금이 잘 다스리려면 모두 마음을 바루는 것으로써 지극한 공부로 삼지 않을 수 없고 신하의 진언(進言) 역시도 마음을 바루는 것으로써 요결(要訣)을 삼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니, 참으로 마음을 온갖 교화의 근본으로 삼는데 그것이 바르지 않다면 다스릴 수 없을 것입니다. 전하께서 십수 년 동안 고심하신 혈성(血誠)은 오직 동이(同異)를 보합(保合)하고 피차를 소융(消融)하시려는 데에 있는데, 당로(當路)하여 일을 맡은 자는 일체 분명하지 않은 논의로 편의한 것을 양편으로 엿보는 사의(私意)를 이룰 뿐이므로, 시비가 날로 혼란해지고 논의가 날로 어그러져서 성심(聖心)이 몹시 괴로워 지나친 거조(擧措)가 거듭되게 만들어, 문을 닫고 음식을 물리치시는 것도 모자라서 언관(言官)을 나국(拿鞫)하기까지 하셨으니, 이것이 무슨 일입니까? 이것은 이른바 분노하여 그 바른 것을 얻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성의(誠意)·정심(正心)의 공부에 뜻을 더하여 치우치는 흠이 있기에 이르지 마소서.
동궁(東宮)을 보도(輔導)하여 몽양(蒙養)을 다할 것입니다. 천하의 근본은 태자(太子)에게 달려 있고 태자가 착해지는 것은 일찍 가르치기에 달려 있으니, 바른 도리를 수양하는 방도를 조금도 늦출 수 없습니다. 동궁 저하(東宮邸下)는 바야흐로 어린 때이므로 미처 스승에게 배울 나이가 되지 않았으니, 빈사(賓師)의 직임을 가리고 널리 경술(經術)이 있는 선비를 찾아서 젖어들고 물들 바탕으로 삼고 또 몸소 가르치는 방도를 다해야 하겠습니다. 국시(國是)를 바루어 호오(好惡)를 밝힐 것입니다. 두 대신(大臣)이 복관(復官)되고 의리가 다시 밝혀져서 여정(輿情)이 모두 용동(聳動)하는데, 저 겉으로는 탕평을 가탁(假托)하고 속으로는 자기 사의를 이루는 자는 망설이고 정하지 않은 논의로 좌우를 바라보고 모든 이익을 다 차지하려 하므로, 표준을 세워 탕평하는 정치가 끝내 이루어질 날이 없으니, 신은 두 대신에게 복시(復諡)하는 법을 빨리 시행하여 그 착한 것을 정표(族表)하고 이어서 뭇 간흉(奸凶)을 토죄(討罪)하는 법을 거행하여 그 악한 것을 징계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도학(道學)을 숭상하여 풍교(風敎)를 부식(扶植)할 것입니다. 유(儒)를 숭상하고 도(道)를 중하게 여기는 것은 우리 나라의 가법(家法)입니다. 선정신(先正臣) 송시열(宋時烈)이 마침 효묘(孝廟)를 만났어도 마침내 참화(慘禍)를 당하였으나, 존주 양이(尊周攘夷)042)  는 곧, 송시열의 공로입니다. 전하께서 성고(聖考)의 말년의 처분과 마찬가지로 성심(聖心)을 굳게 갖지 못하시므로, 사문(斯文)이 재앙을 당하고 세도(世道)가 날로 쇠퇴하니, 오직 바라건대, 선왕의 뜻과 사업을 잇고 유현(儒賢)을 예대(禮待)하고 학교를 수명(修明)하고 인재를 배양하소서. 신하를 예대하여 현사(賢士)를 오게 할 것입니다. 현사는 많이 얻기가 쉽지 않은데, 전하께서 신하를 예우(禮遇)하실 때에는 혼자만이 알아서 아랫사람을 어거하는 뜻 때문에 스스로 크게 여기고 남을 작게 여기는 병통이 있어 신하를 거의 노예처럼 꾸짖으시니, 이러하여도 자호(自好)하는 선비가 누구인들 치욕을 받아들이며 오려고 하겠으며, 면전에서 아첨하는 사람이 어찌 틈을 엿보아 오지 않겠습니까? 예(禮)로 부리는 도리에 더 유의하셔야 하겠습니다. 대각(臺閣)을 중하게 여겨서 언로(言路)를 넓힐 것입니다. 전하께서는 고언(苦言)하는 자를 싫어하여 욕하고 배척하여 쫓으시므로, 위에서는 언관(言官)으로 대우하지 않고 아래에서는 언관으로 자처하지 않으니, 이러하고도 오히러 어찌 언로가 열려 임금의 궐실(闕失)이 들리기를 바라겠습니까? 바라건대, 성상께서는 지난 과실을 깊이 징계하고 받아들이는 도량을 더욱 넓히시어 뭇사람의 뜻이 위에 아뢰어지고 언로가 크게 열리게 하소서."
하였는데, 비답(批答)하기를,
"아뢴 것은 유의하겠으나, 그 가운데에 있는 협잡하는 말은 오늘날 행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하였다.

 

호조 판서(戶曹判書) 조현명(趙顯命)이 또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어제 대간(臺諫)이 인피(引避)한 사연을 보건대, 말이 매우 위태롭고 뜻이 상서롭지 않습니다. 태연히 화심(禍心)으로 서로 대하니, 돌보아 주시는 것이 융숭할수록 위태롭고, 욕된 것이 점점 심해지고 밀치는 것도 모자라서 창칼로 치려합니다. 아! 명이 다하였습니다. 머리 위에는 임금의 은혜가 비추나 마음에는 자기가 기른 자에게 화를 당할 근심이 있고, 위에는 마음을 알아주는 임금이 있으나 아래에는 발을 멈출 땅이 없습니다. 몸이 묶인 듯하여 온갖 일에 신물이 나니, 신도 스스로 여생(餘生)에 싫증이 납니다."
하였는데, 임금이 우악한 비답(批答)을 내렸다.

 

임금이 주강(晝講)을 행하였다. 《춘추집전(春秋集傳)》을 강(講)하였다.

 

우의정(右議政) 유척기(兪拓基)가 말하기를,
"한성 판윤(漢成判尹) 이병상(李秉常)은 여러 번 엄한 분부를 받은 때문에 오래 벼슬할 뜻이 없어 장차 시골에 내려가려 하니, 청컨대, 권하여 머무르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엄한 분부는 출사(出仕)하지 않기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니다. 이미 출사하였으면 무슨 불안할 것이 있는가?"
하였다. 이병상은 마음이 화평하고 단아하며 절개가 있었다. 의리가 펴지지 않았기 때문에 오래 출사하지 않았는데, 두 대신(大臣)이 복관(復官)되기에 이르러 유척기가 임금께 늘 말하니 임금의 뜻이 조금 풀리고 이병상이 비로소 공직(供職)하였다. 유척기가 또 말하기를,
"전 승지(承旨) 박필주(朴弼周)는 경술(經術)과 학식이 동궁(東宮)을 보도(輔導)하게 할 만하니, 청컨대, 찬선(贊善)을 제배(除拜)하소서."
하니, 임금이 따르고 해조(該曹)에 명하여 먹을 것을 내리게 하였다. 유척기가 또 말하기를,
"만포(滿浦)·부산(釜山)·백령(白翎) 세 진(鎭)은 변지(邊地)의 예에 따라 1주년까지 다른 벼슬에 의망(擬望)하지 말고 오래 맡게 하여 성적을 이루도록 요구하소서."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2월 26일 정유

송시함(宋時涵)을 장령으로, 원경순(元景淳)을 정언으로, 이병상(李秉常)을 판의금으로 삼았다.

 

헌부(憲府) 【장령(掌令) 송시함(宋時涵)이다.】 에서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준직(準職)043)  을 지내지 않은 자는 자급(資級)을 높이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 것이 고례(古例)입니다. 일찍이 선조(先朝)에서 문간공(文簡公) 김창협(金昌協)이 이조 정랑(吏曹正郞)으로서 도청(都廳)을 아울러 맡았는데, 처음에는 은명(恩命)이 있었으나, 나중에는 도로 거두었습니다. 이것은 본받아야 할 것이니, 청컨대 도청(都廳) 유최기(兪最基)에게 가자(加資)하라는 명을 도로 거두소서. 사령(赦令)이 내려져서 그때 갇혀 있던 죄인이 모두 은유(恩宥)를 입었습니다마는, 그 가운데에서 일이 장오(贓汚)에 관계된 자도 다 섞여 들어간 것은 장법(贓法)을 중하게 여기는 도리에 어그러지니, 청컨대, 장오를 범한 자를 살펴 내어 모두 도로 거두소서."
하니, 비답(批答)하기를,
"막중한 대사(大赦)에 어찌 탕척을 아끼겠는가? 유최기의 가자를 도로 거두는 일은 아뢴 대로 하라."
하였다.

 

강원 감사(江原監司) 김희로(金希魯)가 음사(蔭仕)로 참의(參議)에 이르렀고, 또 삭녕(朔寧)의 수령(守令)으로서 감사(監司)에 제배(除拜)되었다 하여 스스로 평안하지 못하므로 상소하여 사직하니, 임금이 윤허하였다. 김희로는 좌의정(左議政) 김재로(金在魯)의 형이다.

 

2월 27일 무술

시재 어사(試才御史) 원경하(元景夏)를 강화부(江華府)에 보내어 무예(武藝)를 시험하게 하였다. 식년(式年)에 행해야 할 것인데 올 봄에 물려 행한 것이다.

 

2월 28일 기해

임금이 또 인정문(仁政門)에 친림(親臨)하여 죄수를 국문(鞫問)하였다. 이덕방(李德芳)·최태원(崔太元) 등을 국문하였으나 승복하지 않으니, 다시 본부(本府)에 내렸다.

 

2월 29일 경자

이석표(李錫杓)를 사간으로, 안경운(安慶運)을 장령으로, 민백행(閔百行)·신사건(申思建)을 지평으로, 김상로(金尙魯)·민통수(閔通洙)를 교리로, 이성효(李性孝)를 수찬으로, 이덕수(李德壽)를 대사헌으로, 홍성보(洪聖輔)를 대사간으로, 윤득징(尹得徵)을 집의로, 이정욱(李珽郁)을 헌납으로, 이명곤(李命坤)·홍상한(洪象漢)을 정언으로 삼았다.

 

2월 30일 신축

임금이 대신(大臣)과 삼사(三司)와 형조 당상(刑曹堂上)을 불러 희정당(熙政堂)에서 소결(疏決)044)  을 행하였다. 존호(尊號)를 올렸기 때문에 특별히 은택을 베푼 것이었다.

 

헌부(憲府)와 간원(諫院)에서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었으나, 모두 윤허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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