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 1일 임인
임금이 또 소결(疏決)을 행하였는데, 형조(刑曹)의 죄인으로서 귀양가 있는 자는 그대로 두기도 하고 석방하기도 하였다. 이어서 하교하기를,
"덕이 없는 내가 백성을 다스리매 교화가 미치지 못하므로 윤상(倫常)을 손상하고 풍속을 어지럽혀 차마 볼 수 없는 경외(京外)의 범죄가 매우 많으니, 이것이 어찌 죄다 서민의 허물이겠는가? 아! 각도의 도신(道臣)은 이 뜻을 본받아 위에 있는 자가 덕이 없다고 말하지 말고 가르치고 돌보아 우리 백성이 분수를 범하고 의리를 어기게 되지 않게 하고, 또한 옛사람이 도검(刀劍)을 팔고 우독(牛犢)을 사서 식산(殖産)을 힘쓰게 한 의리로 더욱이 어루만지고 돌보아 어진 백성이 되도록 교화해야 한다."
하였다.
3월 2일 계묘
또 하교하여 형조(刑曹)의 도배 죄인(徒配罪人) 중에서 그대로 두었던 자를 석방하라고 명하였다.
사신은 말한다. "사유(赦宥)는 소인(小人)에게 다행한 일이다. 무릇 도형(徒刑)·유형(流刑)의 연한에 미치지 못한 자를 사유가 있을 때마다 석방한다면 법을 내걸고 악을 징계하는 도리가 아닐 것이고, 그 가운데에서 죄가 가벼운 자를 가려서 석방하고 무거운 자를 가려서 그대로 둔다면 이것은 또 사문(赦文)에 이른바 사죄(死罪) 이하를 모두 용서한다는 뜻이 아닐 것이다. 이러나 저러나 다 막히니, 상고(上古)의 성왕(聖王)이 경사라 하여 반사(頒赦)하지 않은 것이 어찌 나라에서 깊이 생각해야 할 것이 아니겠는가?"
【태백산사고본】 37책 51권 12장 A면【국편영인본】 42책 656면
【분류】사법-행형(行刑) / 역사-사학(史學)
사신은 말한다. "사유(赦宥)는 소인(小人)에게 다행한 일이다. 무릇 도형(徒刑)·유형(流刑)의 연한에 미치지 못한 자를 사유가 있을 때마다 석방한다면 법을 내걸고 악을 징계하는 도리가 아닐 것이고, 그 가운데에서 죄가 가벼운 자를 가려서 석방하고 무거운 자를 가려서 그대로 둔다면 이것은 또 사문(赦文)에 이른바 사죄(死罪) 이하를 모두 용서한다는 뜻이 아닐 것이다. 이러나 저러나 다 막히니, 상고(上古)의 성왕(聖王)이 경사라 하여 반사(頒赦)하지 않은 것이 어찌 나라에서 깊이 생각해야 할 것이 아니겠는가?"
임금이 또 대신(大臣)·삼사(三司)·금부 당상(禁府堂上)에게 명하여 금부(禁府)의 죄인들을 소결(疏決)하게 하였다. 무릇 결방(決放)된 자가 1백 50여 인인데, 김유(金濰)·김시위(金始煒)·송익휘(宋翼輝) 등 여러 사람도 다 석방하라고 명하였다. 좌의정(左議政) 김재로(金在魯)가 임인년045) 의 무옥(誣獄) 때에 억울하게 죽은 사람의 죄를 풀어 주려고 아뢰기를,
"임인년의 옥사(獄事)는 오로지 목호룡(睦虎龍)의 무고(誣告)에서 말미암았는데 말이 감히 말할 수 없는 곳에 미쳤고, 김일경(金一鏡)·박필몽(朴弼夢) 등이 또 단련(鍛鍊)하여 그 참혹함을 극진히 하였으니, 근본을 제거하고 나서야 후세에 할 말이 있을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어리석고 무식한 무리가 공훈(功勳)을 바라는 마음을 일으켜 감히 정책 공신(定策功臣)이 되려 하였으니, 이것은 의논할 수 없는 것이다."
하였다. 김재로가 말하기를,
"정책을 공훈으로 여겼다면 그 마음은 워낙 변변치 못합니다마는, 그런 마음이 있었더라도 이것을 어찌 역적으로 단정하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그때 일은 안에는 요사한 종[婢]과 반역한 환관(宦官)이 있고, 밖에는 역적 김일경과 역적 박필몽이 있어서 액례(掖隷) 하윤원(河潤源)을 시켜 서찰을 왕복하였고, 이천해(李天海)가 하윤원의 말을 듣고 흉참(凶慘)한 일까지 하였으니, 이제까지도 생각하면 늘 마음 아프다. 신하가 임금을 선택한다는 말을 나도 들었다."
하였다. 김재로가 말하기를,
"전하께서 일찍이 친히 듣지 못하고 친히 보지 못하였다고 말씀하셨는데 이제 또 이 말씀을 하시는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삼종(三宗)의 혈통은 전하 한 몸이 계실 뿐이니, 효경(梟獍) 같은 무리가 아니면 어찌 다른 마음을 갖겠습니까? 김창집(金昌集)은 반드시 그렇지 않을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나도 대신(大臣)을 그렇게 여기는 것이나, 나에게 전한 자가 있으므로 내가 들었다."
하였다. 우의정(右議政) 유척기(兪拓基)가 말하기를,
"임인년의 옥사는 오로지 목호룡이 흉악한 무리와 체결하고 꾸며서 지어 내어 옥사를 만들어 일망타진할 계책을 부린 것이니, 그 근본을 캐면 바로 역적 김일경 등이 한 짓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목호룡이 감여술(堪輿術)로 나를 범한 것을 내가 보았는데 그 형상이 괴이하였고, 또 목가(睦哥)의 얼족(孼族)이라는 말을 들었으므로 배척하였다. 목호룡이 어느 날 와서 나를 보고 《육오당기문(六吾堂記文)》을 감히 아름답지 않다고 말하므로 내가 그 방자함을 매우 미워하였는데, 변서(變書)가 나왔을 때에 내 당명(堂名)에 언급한 일이 있었다. 목호룡은 배반하여 남인(南人)·소론(小論)에 붙어 역적 김일경과 체결하고 또 김용택(金龍澤)·이천기(李天紀)와 서로 친하였는데, 경들은 이천기·김용택을 위하여 반안(反案)046) 하기를 바라는가?"
하였다. 김재로가 말하기를,
"이천기 등이 역적 목호룡과 서로 친하여 그에게 속았다면 참으로 천시하고 미워할 만한 자입니다마는, 역적이라는 이름으로 말하면 어찌 근거 없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하고, 유척기가 말하기를,
"이천기 등이 목호룡에게 고발당하고 김일경·박필몽에게 죽은 것은 온 세상이 다 아는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심상길(沈尙吉)이 종부랑(宗簿郞)이었을 때에 잠저(潛邸)에서 나를 보았는데, 목호룡의 변서 가운데에 심상길·김성행(金省行)이 잠저에 와서 뵈었다고 말하였다. 김성행도 목호룡이 어떤 사람인지 가리지 않고 함께 좇았으니, 오히려 무엇을 논하겠는가?"
하였다. 김재로가 말하기를,
"그의 처신이 변변치 못하더라도 역적이라는 이름으로 말하면 참으로 억울합니다."
하고, 유척기가 말하기를,
"김성행은 아홉 차례 형신(刑訊)을 받았으나 죽을 때까지 변하지 않았습니다. 혹 형장(刑杖)을 참지 못하여 난초(亂招)하기에 이르렀다면 일이 헤아릴 수 없게 되었을 것이니, 종사(宗社)가 오늘날이 있을 수 있는 것은 또한 김성행의 힘입니다."
하고, 김재로가 말하기를,
"조성복(趙聖復)·이상겸(李尙謙)·백시구(白時耉) 등 여러 사람이 추탈(追奪)된 것도 억울합니다."
하고, 유척기가 말하기를,
"이 일은 관계되는 것이 매우 중대하므로 결코 하루도 역안(逆案)에 두어서는 안 되겠으니, 빨리 처분을 내리시기 바랍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반안은 뒷날을 기다려야 한다."
하였다. 판의금(判義禁) 이병상(李秉常)이 말하기를,
"목호룡이 역적이라면 이들이 역적이 아닐 것이고, 이들이 역적이라면 목호룡이 역적이 아닐 것입니다. 목호룡은 흉언(凶言)으로 처형되었는데, 그 무고(誣告) 가운데에 들어간 자가 오히려 역안에 있으니, 어찌 이러한 의리가 있겠습니까?"
하고, 유척기·김재로 등이 또 번갈아 아뢰었으나, 임금이 윤허하지 않았다. 신하들이 또 서로 잇달아 말한 것이 김재로 등의 말과 같았는데, 임금이 말하기를,
"그만두라."
하였다. 집의(執義) 윤득징(尹得徵)이 나아가 말하기를,
"임인년의 무옥은 관계되는 것이 매우 중대하니, 대신과 금두 당상이 청한 것을 따르시지 않아서는 안 되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이미 대신에게 유시하였다."
하였다.
3월 3일 갑진
민응수(閔應洙)를 이조 판서로, 송교명(宋敎明)을 집의로, 송질(宋瓆)을 사간으로, 유최기(兪最基)를 헌납으로, 박춘보(朴春普)를 정언으로, 조상경(趙尙絅)을 예조 판서로, 서명신(徐命臣)을 교리로, 이성중(李成中)을 사서로 삼았다.
3월 4일 을사
임금이 예문 제학(藝文提學) 서종급(徐宗伋)을 명초(命招)하여 반궁(泮宮)에서 선비를 시험하게 하였는데, 태학(太學)의 재임(齋任)과 수재 유생(守齋儒生) 등이 바야흐로 소청(疏廳)을 설치하였으므로 시장(試場)에 나아갈 수 없다고 하므로, 대사성(大司成)이 그 뜻을 아뢰니, 임금이 드디어 선비를 시험하라는 명을 거두고 곧 하교하기를,
"이미 제술(製述)을 명하였다가 도로 거두는 일은 예전에 없던 것이다. 미리 하거나 뒤에 하지 않고 소청을 핑계하여 끝내 시장에 들어가지 않으니, 사습(士習)이 놀랍다. 두 반수(班首)와 장의(掌議)를 모두 정거(停擧)하라."
하였다. 이때 유생들이 대신(大臣)이 임인년047) 의 무옥을 신설(伸雪)하기를 청하였다는 말을 듣고 드디어 상소하여 조태구(趙泰耉)·유봉휘(柳鳳輝) 등 역적들의 죄를 아울러 논하려 하였는데, 소(疏)가 완성되기 전에 과시(科擧)를 설행(設行)하라는 명이 있으므로 유생들이 선조(先朝) 을미년048) 의 전례를 인용하여 과거(科擧)에 나아가지 않으니, 임금이 그들이 당습(黨習)을 부리려 한다고 생각하여 정거를 명하기에 이르렀다.
의금부(義禁府)에서 아뢰기를,
"접때 소결(疏決)할 때에 장령(掌令) 안경운(安慶運)이 일이 장오(贓汚)에 관계된 무리는 같은 예로 석방하여서는 안 된다고 논계(論啓)하여 윤허받았습니다. 전 이산 부사(理山府使) 홍흥무(洪興茂)·전 벽동 군수(碧潼郡守) 신사언(申思彦)·전 삭주 부사(朔州府使) 이만유(李萬囿)·전 어천 찰방(魚川察訪) 이봉명(李鳳鳴)은 다 장오를 범하여 수계(繡啓)049) 에 들어갔는데 사유(赦宥)로 말미암아 석방되었습니다. 대계(臺啓)가 이러하니, 의당 모두 도로 가두어 엄히 핵실(覈實)해야 하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윤허하였다.
헌부(憲府) 【장령(掌令) 안경운(安慶運)이다.】 에서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경상 좌수사(慶尙左水使) 백수일(白守一)은 일찍이 강계(江界)를 맡았을 때에 함부로 삼세(蔘稅)를 받아들이고 오로지 재물을 약탈하는 것을 일삼았고, 본직(本職)에 제수되어서도 옛 버릇을 고치지 않고 어염(魚鹽)의 갖가지를 싼값으로 사들이고 또 토솔 군관(土率軍官) 김성(金姓)인 사람이 송전(松田)을 적간(摘奸)한다는 핑계로 읍진(邑鎭)에 출몰하고 감색(監色)들이 금송(禁松)을 몰래 베어 돈을 만들어 뇌물을 바치기까지 합니다. 이러한 사람은 곤임(閫任)에 둘 수 없으니, 의당 그 벼슬을 파면해야 하겠습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아뢴 대로 하라."
하였다.
3월 5일 병오
임금이 인정문(仁政門)에 친림(親臨)하여 죄수를 국문하였다. 죄인 이덕방(李德芳)이 끌어댄 사람 가운데에 호남(湖南)에서 잡아온 자가 있었는데 그 이름이 김유성(金有聲)이었다. 핵사(覈査)하였으나 실정을 알아내지 못하니, 드디어 석방하라고 명하였다.
홍용조(洪龍祚)를 대사간으로, 이석복(李錫福)을 장령으로, 이병상(李秉常)을 공조 판서로, 황재(寅梓)를 보덕으로 삼았다.
헌부(憲府) 【장령(掌令) 안경운(安慶運)이다.】 에서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태학 유생(太學儒生)이 소청(疏廳)을 설치하였다 하고, 명에 따라 과시(科試)하는 마당에 들어가지 않은 것은 미안한 일일지라도 성조(聖朝)에서 사기(士氣)를 배양하는 도리로서는 지나치게 꺾어서는 안 되겠으니, 청컨대 태학의 장의(掌議)를 정거(停擧)하라는 명을 거두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그 처분한 것이 혹 지나치더라도 서둘러 구호하려는 것은 사체(事體)가 미안하다. 이런 버릇은 내가 받아들이지 않는다."
하였다. 안경운이 인혐(引嫌)하니, 곧 특별히 체차하라고 명하였다. 간원(諫院) 【헌납(獻納) 유최기(兪最基)이다.】 에서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반유(泮儒)가 봉장(封章)한다고 말하고 명에 따라 과시(科試)하는 데에 나아가지 않았으므로 일이 미안한 것은 성교(聖敎)와 같습니다마는, 정거하라는 명을 내리시기에 이르렀으니, 안경운은 관직이 대각(臺閣)에 있는데 쟁집(爭執)하지 않는다면 이는 그 직무를 저버리는 것입니다. 인피하자 곧 체차하였으니, 어찌 지나치지 않겠습니까? 신은 반유를 정거하고 대신(臺臣)을 체차하라는 명을 의당 곧 거두셔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그 재제한 것은 현관(賢關)050) 의 선비가 아니라 당론(黨論)하는 선비이고, 그 특별히 체차한 것은 내 대신이 아니라 당론하는 대신이니, 명을 거두기를 청한 것은 참으로 한 번 웃을 만한 것이다. 모두 윤허하지 않는다."
하였다. 유최기가 인피하니, 임금이 또 특별히 체차하라고 명하였다.
응교(應敎) 조명리(趙明履)·교리(校理)·이덕중(李德重) 등이 또 차자를 올려 유생(儒生)과 두 대신(臺臣)을 구제하여 언로(言路)를 열고 사기(士氣)를 도울 것을 아뢰니, 임금이 엄히 비답(批答)하여 꾸짖었다. 좌의정(左議政) 김재로(金在魯)·판부사(判府事) 김흥경(金興慶) 등도 유생을 죄주어서는 안 된다고 말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유생은 성묘(聖廟)를 지키고 학업에 부지런해야 하니, 이러한 행동은 내가 매우 받아들이지 않는다. 유생은 평소 무사할 때에는 팔을 걷어 올리고 큰소리하여 논의가 신속히 일어나지만, 겨를 없이 급박할 때에는 거의 다 죽은 사람처럼 움츠려 엎드린다. 무신년051) 의 역변(逆變)이 일어난 당초에 반유가 다 임금의 원수를 잊고 성묘를 버리고 떠나서 수재(守齋)하는 자가 거의 없었으니, 이러한 사류(士類)를 어디에 쓰겠는가?"
하였다. 김재로 등이 또 반복하여 말하였으나, 임금이 끝내 듣지 않았다.
3월 6일 정미
반유(泮儒)가 임금의 하교 때문에 권당(捲堂)052) 하기에 이르렀는데, 임금이 지관사(知館事)에게 명하여 들어가도록 권하게 하니, 반유가 곧 도로 들어갔다.
3월 7일 무신
밤에 달이 동정성(東井星)에 들어갔다.
윤심형(尹心衡)을 사간으로, 이휘항(李彙恒)을 장령으로, 박필재(朴弼載)를 헌납으로, 원경순(元景淳)을 정언으로, 오수채(吳遂采)·조명리(趙明履)를 응교로, 윤광의(尹光毅)를 수찬으로, 이재(李縡)를 한성 판윤으로 삼았다.
3월 8일 기유
임금이 좌의정(左議政) 김재로(金在魯)·우의정(右議政) 유척기(兪拓基) 등을 인견(引見)하여 임인년053) 무안(誣案)의 일을 논하여 말하기를,
"그때 추대(推戴)하였다고 거짓 공초(供招)한 것을 쓰지 말게까지 하여 마침내 참혹하게 살육하기에 이르렀는데, 내가 어찌 정책(定策)을 사은(私恩)으로 여기겠는가? 서로 역당(逆黨)으로 모는 것은 다 임금을 섬기는 자의 마음이 아니다."
하니, 김재로 등이 또 그들이 신설(伸雪)되어야 한다는 것을 힘껏 아뢰고 말하기를,
"삼종(三宗)의 혈통은 전하 한 몸이 계실 뿐인데, 일종의 불령(不逞)한 무리가 몰래 다른 뜻을 품었으므로 김일경(金一鏡)·목호룡(睦虎龍)의 생각이 실로 감히 말할 수 없는 곳에 있었으니, 어찌 섬뜩하지 않겠습니까? 삼수(三手)054) 에 관한 말은 일찍이 을사년055) 의 반안(反案) 때에 이미 마디마디 드러나서 모두 분명한 증거가 있으니, 그들이 다시 감히 이런 말을 하지 못할 것입니다. 이제 김일경·목호룡이 이미 처형되었는데 무안은 아직 있으니, 어찌 마음 아프지 않겠습니까?"
하였다. 임금이 이희지(李喜之)의 영정행시(永貞行詩)를 물으니, 김재로가 말하기를,
"그 시 가운데에 있는 ‘꼭두각시 줄 끊어지자 진면목이 드러나고[傀儡索絶路眞面]’라는 구(句)는 김일경·박필몽(朴弼夢)을 가리킨 것입니다. 그 뜻은 대개 뭇 간사한 자가 성후(聖候)가 편찮을 때에 내시와 체결하여 마음대로 위권(威權)을 쓰다가 마침내 드러났다고 한 것인데, 역적 김일경이 억지로 풀이하여 감히 말할 수 없는 곳으로 돌렸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영정행시를 지은 까닭을 경이 어찌 알겠는가? 고(故) 판결사(判決事) 서종일(徐宗一)이 명릉 참봉(明陵參奉)이었을 때에 이 꿈을 꾸고 남에게 수작하였으므로 이희지가 듣고 이 시를 지었다."
하니, 김재로가 말하기를,
"이희지는 잡류(雜類)와 서로 체결하고 목호룡과도 서로 왕래하였으니, 그 처신이 착하지 못한 것은 알 만합니다."
하였다. 김재로가 또 을사 사화(乙巳士禍)056) 와 숙묘(肅廟) 때에 강옥(姜獄)057) 을 신설(伸雪)한 일을 인용하고 말하기를,
"임인년의 무옥(誣獄)이 어찌 이것과 다르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천천히 다시 생각하겠다."
하였다.
3월 10일 신해
우의정(右議政) 유척기(兪拓基)가 차자를 올렸는데, 대략 이르기를,
"원릉(園陵)에 거둥할 날이 하루 남아서 승여(乘輿)가 갖추어져야 할 것이므로 모든 신하가 분주한데 군사를 거느리는 신하만이 날마다 소명(召命)을 어기는 것은 기율이 관계되는 것이니, 참으로 한심스럽습니다. 위계(位階)가 높더라도 맡은 것은 군사에 관한 직임인데, 융사(戎事)로 불러도 태연히 움직이지 않으니, 장신(將臣)의 체례(體例)에 어그러집니다. 신은 호조 판서(戶曹判書) 조현명(趙顯命)은 본직(本職)을 체차하고 중추(重推)를 시행하여 그 태만을 경책(警責)하고 곧 나와서 융무(戎務)를 거행하도록 신칙(申飭)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병조 판서(兵曹判書) 김성응(金聖應)은 벼슬이 사마(司馬)일지라도 무장(武將)은 문재(文宰)와 다르거니와 직장(職掌)이 환위(還衛)하고 책응(策應)하는 것이므로 모두 시급한 일에 관계되는데 열흘 동안 소명을 어긴 끝에 어제 비로소 억지로 나와 의젓하면서 거들먹거리고 장신(將臣)의 분의(分義)를 아주 잃었으니, 의당 아울러 경책하여 장래를 격려해야 하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3월 11일 임자
임금이 명릉(明陵)에 나아가 의식대로 작헌례(酌獻禮)를 행하였다. 예가 끝나고서 익릉(翼陵)·경릉(敬陵)에 전알(展謁)하고 예조 참판(禮曹參判) 권적(權𥛚)에게 명하여 순회묘(順懷墓)를 봉심(奉審)하게 하였다. 이어서 회가(回駕)하여 연은문(延恩門)에 이르러 선무사(宣武祠)058) 에 들렀는데, 중국 신하가 상견(相見)하는 예에 따라 읍(揖)하고 절하지 않았다. 칠언 절구(七言絶句)의 시(詩)를 어제(御製)하여 지(志)하기를,
"옛날에 두 공(公)059) 이 명을 받든 때부터
세월 지나 어느덧 백여 년
오늘 사당에서 뵐 줄 어찌 알았으랴
옛날을 추상하니, 눈물 흐르네."
하였다. 환궁한 뒤에 또 관원을 명하여 치제(致祭)하게 하였다
3월 12일 계축
임금이 주강(晝講)을 행하였다. 《춘추(春秋)》를 강(講)하였는데, 연신(筵臣)이 임금이 존주(尊周)하는 생각을 잊지 않는 것을 찬양하고 또 《춘추》의 주실(周室)을 높이고 이적(夷狄)을 물리치는 의리를 우러러 권면(勸勉)하니, 임금이 아름답게 여겨 받아들였다. 친히 감황은시(感皇恩詩) 두 절구(絶句)와 소서(小序)를 지어 새겨서 선무사(宣武祠)에 걸라고 명하고 말하기를,
"명나라가 우리 나라를 재조(再造)한 은혜를 어찌 잊을 수 있겠는가?"
하고, 명하여 중국에서 나온 사람을 물었다. 교리(校理) 서명신(徐命臣)이 이여송(李如松)에게 자손이 있다고 대답하니, 임금이 찾으라고 명하고 또 양경리(楊經理)060) 의 문집(文集)을 사들이라고 명하였다.
이병상(李秉常)을 호조 판서(戶曹判書)로 삼았다.
찬선(贊善) 박필주(朴弼周)가 상소하여 사직하니, 우악한 비답(批答)을 내리고 윤허하지 않았다.
공충(公忠)·전라·경상 세 도의 유생(儒生) 유탄(柳䋎) 등이 상소하여 선정신(先正臣) 문정공(文正公) 송시열(宋時烈)과 문정공 송준길(宋浚吉)을 성무(聖廡)에 종향(從享)하기를 청하였으나, 비답을 내려 윤허하지 않았다.
3월 13일 갑인
강화 유수(江華留守) 오원(吳瑗)이 상소하기를,
"아비의 지위가 극품(極品)에 올랐으므로 더 추증(追贈)할 것이 없으니, 바라건대, 추영(追榮)하는 은전(恩典)을 낳은 부모에게 옮겨 베푸소서."
하니, 임금이 특별히 윤허하였다.
3월 15일 병진
홍성보(洪聖輔)를 대사간으로, 이광운(李光運)을 사간으로, 안경운(安慶運)·이수해(李壽海)를 정언으로, 이덕중(李德重)을 교리로, 이재(李縡)를 공조 판서로, 이광식(李光湜)을 헌납으로, 안식(安栻)을 지평으로 삼았다.
임금이 사묘(私廟)에 전배(展拜)하고 효장묘(孝章廟)에 들렀다.
3월 16일 정사
임금이 소대(召對)를 행하였다. 《대학연의보(大學衍義補)》를 강(講)하였는데, 억사치장(抑奢侈章)에 이르러 시독관(侍讀官) 서명신(徐命臣)이 말하기를,
"동궁(東宮)은 덕성(德性)이 아직 정해지지 않고 지식이 점점 진취하니, 사치를 금하고 검약을 숭상할 시기가 바로 이때입니다. 무릇 부모가 된 백성이 사랑에 빠져 의복·음식의 처음을 경계할 줄 모르고 혹 사치를 다하고 공교하기를 극진히 하면 점점 버릇되어 천성처럼 되는데, 더구나 존귀한 임금이겠습니까?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반드시 몸소 가르치실 것을 생각하여 의복·음식·기용(器用) 등의 물건을 엄하게 금방(禁防)하여 어린 나이의 기질(氣質)이 외물(外物)에 마음쓰지 않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옳게 여겼다.
헌부(憲府)에서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3월 17일 무오
한봉조(韓鳳朝)를 장령으로, 조현명(趙顯命)을 판의금으로, 김상로(金尙魯)를 부교리로, 조관빈(趙觀彬)을 판윤으로 삼았다. 조관빈을 발탁한 것은 묘당(廟堂)에서 천거하였기 때문이었다.
임금이 인정문(仁政門)에서 친림(親臨)하여 죄수를 국문(鞫問)하였다. 죄인 이덕방(李德芳)을 더 형신(刑訊)하였으나, 승복하지 않아서 왕부(王府)에 내려 국문하게 하였다.
호서(湖西)·호남(湖南)·영남(嶺南)의 유생(儒生)들이 또 상소하여 문정공(文政公) 송시열(宋時烈)·송준길(宋浚吉)을 문묘(文廟)에 종사(從祀)하기를 청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헌부(憲府)에서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간원(諫院)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3월 19일 경신
주강(晝講)을 행하였다.
3월 20일 신유
이석표(李錫杓)를 사간으로, 유최기(兪最基)를 헌납으로, 이성해(李聖海)를 정언으로, 신사철(申思喆)을 판의금으로 삼았다.
임금이 대신(大臣)과 비국 당상(備局堂上)을 인견(引見)하였다. 호조(戶曹)·공조(工曹)·한성부(漢城府)의 낭청(郞廳)도 또한 사송 아문(詞訟衙門)의 예(例)에 따라 여섯 달이 차야 비로소 수령(守令)에 의망(擬望)하고, 출륙(出六)한 지 여섯 달이 차지 않은 자는 수령에 의망하지 말되 그대로 정식(定式)으로 삼으라고 명하였다. 우의정(右議政) 유척기(兪拓基)의 말을 따른 것이었다.
응교(應敎) 황재(黃梓)를 발탁하여 강원도 관찰사로 삼고, 전 승지(承旨) 신만(申晩)을 발탁하여 한성부 우윤으로 삼았다. 두 사람은 다 우의정 유척기가 천거하였다. 유척기가, 경상 수사(慶尙水使)가 장계(狀啓)하여 수영(水營)을 울산(蔚山)으로 옮기고 병영(兵營)으로 옮기기를 청한 일 때문에 말하기를,
"수영의 선창(船艙)은 수도(水道)가 불편하여 썰물 때마다 배가 뭍에 걸리나 울산의 선창은 매우 좋으니, 수영을 이곳으로 옮겨야 하겠습니다. 병영이 이미 울산에 있고 보면 두 영을 또한 한 곳에 아울러 둘 수 없으니, 병영은 영천으로 옮기는 것이 온편하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신하들에게 물었다. 다들 유척기의 의논과 같이 대답하니, 임금이 경장(更張)에 관계되는 일이라 하여 다시 의논하라고 명하였는데, 곧 그만두고 행하지 않았다.
헌부(憲府)에서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3월 21일 임술
임금이 주강(晝講)과 석강(夕講)을 행하였다.
조석명(趙錫命)을 도승지로, 심성희(沈聖希)를 승지로, 홍현보(洪鉉輔)를 예조 판서로, 정양빈(鄭暘賓)을 경상 좌수사로 삼았다.
3월 23일 갑자
임금이 소대(召對)를 행하였다. 《대학연의(大學衍義)》를 강(講)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구준(具濬)의 《대학연의보(大學衍義補)》는 매우 세밀하다."
하니, 검토관(檢討官) 서명신(徐命臣)이 말하기를,
"진덕수(眞德秀)의 《대학연의》는 제가(齊家)에 그치고 치국(治國)·평천하(平天下)에 미치지 않았으므로 구준이 이 글을 저술하여 보충하였는데, 구준은 경주(瓊州) 사람입니다. 경주는 경사(京師)에서 1만여리 떨어져 있는데 능히 끊어졌던 학문을 앞장서 일으키고 국자 사업(國子司業)으로서 이 글을 지어 바쳤으니, 그 나라를 다스리고 세상을 다스리는 재주를 이 글에서 알 만합니다마는, 그가 세상에서 쓰이지 못한 것이 한스럽습니다. 임금이 사람을 쓰는 도리는 재덕(才德)이 아울러 갖추어진 자를 얻지 못하면 한 재주가 있는 선비일지라도 모두 버려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예전부터 재주가 있는 자는 일을 처리하는 재능이 있으나 그 말류(末流)의 폐해가 반드시 남의 나라에 화를 끼치게 되는데, 임금이 다 취사(取捨)에 현혹하여 진퇴(進退)를 잘못하였으니, 삼대(三代)061) 이후에 잘 다스린 자가 없는 것은 참으로 이 때문입니다. 덕이 있는 자를 얻어서 공경(公卿)의 반열에 두고 재주가 있는 자는 백집사(百執事)의 직임에 벌여 두어 덕이 있는 자가 이미 높임과 믿음을 받고 재주가 있는 자도 버려지지 않는다면, 그 나라를 다스리는 데에 무슨 어려움이 있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칭찬하였다. 서명신이 말하기를,
"우리 나라의 장복(章服)에는 본디 제도가 있는데, 근래 인심이 찬람(僭濫)하여 법금(法禁)이 행해지지 않으므로 귀한 자와 천한 자가 입는 것이 그리 다를 것이 없습니다. 천한 노예(奴隷)도 분수에 넘치게 사치하는 버릇이 많아서 명분(名分)이 아주 없어져 절도가 없으니, 작은 걱정이 아닙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위에 있는 자가 겸종(傔從)의 참람을 금하지 못하였는데 서민에게만 법금을 두니, 참으로 이른바 법이 행해지 않는 것은 위에서 범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능히 덕으로 이끌고 예(禮)로 다스린다면 아래에 있는 자가 자연히 감화(感化)되어 상주더라도 참람하지 않을 것이다. 한갓 법으로 누르려 하면 어려울 것이다."
하였다. 서명신이 또 말하기를,
"과거(科擧)의 규례를 조금 바꾸어 증광시(增廣試)와 식년시(式年試) 이외의 모든 과거를 설행(設行)할 때에 다 별시(別試)의 제술(製述)과 강서(講書)의 예를 따른다면 사자(士子)가 먼저 경서(經書)를 읽을 수 있어서 또한 배양하는 한 가지 방도가 될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서울의 사자가 반드시 좋아하지 않을 것이고 또 과거의 규례를 갑자기 고치기 어렵다."
3월 24일 을축
우박이 내렸다.
3월 25일 병인
임금이 인정전(仁政殿)에서 친히 종묘 하향(宗廟夏享)의 서계(誓戒)를 받았다.
시강원 자의(侍講院諮議) 송능상(宋能相)이 상소하여 《춘추(春秋)》의 원수를 갚고 치욕을 씻는 의리를 논하였다. 송능상은 문정공(文正公) 송시열(宋時烈)의 현손(玄孫)인데 초선(抄選)으로 자의에 제배(除拜)되었으나 사양하고 명을 받지 않았고 또 그 관교(官敎)에 청인(淸人)의 연호를 썼기 때문에 인의(引義)하고 받으려 하지 않았다. 비답(批答)하기를,
"이런 일은 늘 지나치다고 생각하였다."
하고, 그대로 소(疏)를 머물러 내리지 않았다. 대개 그것이 누설될까 염려하였기 때문이었다.
이흡(李潝)을 이조 참의로, 황재(黃梓)를 대사간으로, 정실(鄭實)을 정언으로, 조현명(趙顯命)을 우참찬으로, 홍창한(洪昌漢)을 부교리로 삼았다.
3월 26일 정묘
필선(弼善) 한계진(韓啓震)·문학(文學) 유우기(兪宇基)·사서(司書) 윤득경(尹得敬)·설서(說書) 이천보(李天輔) 등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국가 억만년의 영명(永命)을 비는 방도는 저군(儲君)을 보도(輔導)하는 데에 있는데, 궁료(宮僚)가 뵈는 것이 매우 드물어 달을 지내고 시(時)를 지내는 동안에 겨우 한두 번 만나게 되면, 함께 있는 자가 반드시 아보(阿保)나 내시 따위에 지나지 않을 것이니, 동작(動作)·유희(游戲)·언어(言語)·희노(喜怒)를 또한 뜻대로 하는 잘못이 없도록 어찌 보장하겠으며 더구나 따라서 버릇되어 갑자기 바로잡기 어렵게 되는 것이겠습니까? 신들은 이 뒤로는 궁료가 뵈는 절차에 달마다 정식(定式)이 있어 좋은 말을 아뢰고, 일에 따라 규계(規戒)를 아뢰는 것이 마땅하다고 생각합니다."
하였는데, 비답(批答)하기를,
"바야흐로 어린 나이인 것을 헤아려야 하니, 정식할 것이 없다."
하였다.
3월 27일 무진
이에 앞서 경상 감사(慶尙監司) 정익하(鄭益河)가 제언(堤揠)을 없애고 백성에게 갈아 먹게 하기를 계청(啓請)하였는데, 이때에 이르러 비변사(備邊司)에서 아뢰기를,
"제언의 이익은 가무는 해에 크거니와, 요즈음은 또 당상(堂上)·낭청(郞廳)을 따로 차출하여 구관(句管)하게 하므로 자못 실효(實效)가 있어 백성이 많이 힘입습니다. 이번에 제언을 없애고 갈아 먹게 하려는 것은 땅을 아까워하는 뜻에서 나오기는 하였으나, 이 길이 한 번 열리면 혹 토호(土豪)가 부당하게 차지하여 그대로 자기 물건으로 만드는 폐단이 있을세라 염려되는데, 이미 장품(狀稟)하지 않고 지레 마음대로 통지하였으니, 정익하를 중추(重推)하여 경솔한 잘못을 경계하고 없앤 제언은 곧 수축(修築)하여 물을 담게 하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3월 29일 경오
황해도 백령진(百翎鎭)에 청인(淸人)이 표류하여 왔는데, 비변사(備邊司)에서 자문(咨文)을 지어 육로로 봉황성(鳳凰城)에 압송하기를 청하니, 그대로 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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