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영조실록51권, 영조 16년 1740년 4월

싸라리리 2025. 9. 24. 09: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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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1일 신미

해에 양이(兩珥)가 있었다.

 

4월 2일 임신

임금이 태묘(太廟)에 나아가니, 장차 하향(夏享)을 거행하려고 한 때문이었다. 묘문(廟門)으로부터 전전(前殿)·후전(後殿)까지의 정로(正路)에 해조(該曹)를 시켜 전석(磚石)을 깔아서 협로(夾路)와 구별하고 향축(香祝)은 정로를 거치라고 명하고 드디어 정식(定式)으로 삼게 하였다.

 

4월 3일 계유

임금이 친히 의식대로 하향(夏享)을 거행하였다. 예(禮)가 끝나고 환궁(還宮)할 때에 수궁(守宮) 가승지(假承旨) 최상정(崔尙鼎)을 소견(召見)하였다. 최상경은 고(故) 상신(相臣) 최규서(崔奎瑞)의 아들이다. 이어서 하교하기를,
"고 상신 최규서의 고요하고 겸양하는 절조와 무신년062)  의 공로는 예전에도 드문 것이다."
하고, 예관(禮官)에게 명하여 치제(致祭)하게 하였다.

 

4월 4일 갑술

임금이 돌아온 동지 정사(冬致正使) 능창군(綾昌君) 이숙(李橚)·부사(副使) 이광덕(李匡德)·서장관(書狀官) 이도겸(李道謙) 등을 소견(召見)하여 원역(遠役)의 노고를 위유(慰諭)하고, 이어서 묻기를,
"사책(史冊)은 사 왔는가?"
하니, 이숙이 말하기를,
"반포하기 전이므로 감히 사 올 수 없었으나, 수역(首譯)이 몰래 사왔다 합니다."
하였다. 이광덕이 말하기를,
"이것은 국체(國體)에 크게 관계되니, 몰래 산 자에게 일률(一律)을 시행해야 하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공과(功過)가 상당한데, 어찌 반드시 매우 꾸짖어야 하겠는가?"
하였다. 임금이 또 묻기를,
"저 나라의 사정은 어떠한가?"
하니, 이광덕이 말하기를,
"국자감(國子監)의 사인(士人)에게서 들으니, 저들이 천하를 얻고부터 대권(大權)은 다 청인(淸人)에게 돌아가고 벼슬을 얻은 한인(漢人)은 적으며 순치(順治)063)   이후로 고변(告變)하는 자가 없는 해가 없어서 죽는 한인이 잇닿고 모두 보전하지 못할 듯이 두려워한다 합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명나라의 후손은 끝내 보지 못하였는가?"
하니, 이광덕이 말하기를,
"거의 남지 않았습니다."
하였다.

 

김상로(金尙魯)를 부응교로, 송교명(宋敎明)·한익모(韓翼謨)를 교리로, 조명리(趙明履)를 부교리로, 서명신(徐命臣)을 수찬으로, 조관빈(趙觀彬)을 홍문 제학으로, 정형복(鄭亨復)을 강원도 관찰사로 삼았다. 정형복은 깨끗하기로 일컫는데 우의정(右議政) 유척기(兪拓基)가 천거하였다.

 

4월 5일 을해

대신(大臣)과 비국 당상(備局堂上)을 인견(引見)하여 금부(禁府)에서 추국(推鞫)하는 일을 묻고, 이어서 하교하기를,
"임금이 옥사(獄事)를 다스릴 때에는 공평하고 마땅하도록 힘쓰거니와, 옥사를 다스리는 것도 오히려 그러한데, 더구나 사람을 등용하는 것이겠는가? 사신(使臣)이 아뢴 것을 들으니, 저 나라가 천하를 얻은 이래로 사람을 등용하는 정사(政事)는 남북이 아주 다르다 한다. 우리 나라로 말하면 기사년064)  에 명의(名義)를 범한 자 외에는 강현(姜鋧)·홍만조(洪萬朝) 같은 자도 다 지위가 숭현(崇顯)에 이르렀으니, 그 가운데에서 무고(無故)한 사람은 수용(收用)해야 한다."
하였다. 우의정 유척기가 말하기를,
"무고한 자는 수용해야 하겠습니다마는, 명의를 바루고 시비를 밝히는 도리도 유의하지 않아서는 안 되겠습니다. 바야흐로 이제 전쟁의 근심이 없고 기근의 걱정도 없어서 국내가 조금 안정되었으나, 민사(民事)가 가장 민망한데, 백성을 구제하는 방책은 먼저 수령을 선택하는 것 만한 것이 없고 수령을 선택하는 직임은 오로지 전관(銓官)에게 있으니, 위에서 번번이 면려(勉勵)하여 반드시 청탁을 끊고 조급히 벼슬을 다투는 일을 억제하고 공도(公道)를 넓히고 엄체(淹滯)된 자를 떨쳐 일으키게 하고 또 도신(道臣)을 신칙(申飭)하여 전최(殿最)065)  하는 법을 엄명(嚴明)하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윤허하였다. 유척기가 말하기를,
"세종(世宗) 때에 포백척(布帛尺)이 삼척부(三陟府)에 있으니, 해조(該曹)를 시켜 가져오게 하여 최천약(崔天若) 같은 솜씨 좋은 자를 시켜 《대전(大典)》 칫수에 따라 교정(較正)하게 하면, 황종척(黃鐘尺)·주척(周尺)·예기척(禮器尺)·영조척(營造尺)도 다 그 제도에 맞아 차이 나지 않을 수 있을 것이고, 완성되고 나면 중외에 반포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유척기가 또 말하기를,
"접때 제언(堤堰)은 가뭄을 생각하여 미리 쌓으라는 하교가 있었으니, 성의(聖意)가 지극하십니다. 효종 대왕(孝宗大王)께서 일찍이 요심(遼瀋)의 수차(水車)의 제도를 외방(外方)에 반포하셨는데 이제는 현존하는 것이 없고 다만 비국(備局)에 있을 뿐이니, 청컨대, 호조(戶曹)를 시켜 그 모양대로 만들어 삼남(三南)에 나누어 보내어 써 보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장령(掌令) 이석복(李錫福)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돌아온 세 사신(使臣)은 저 나라에 있을 때에 작은 일로 각각 분하고 섭섭한 마음을 일으켜 서로 겸종(傔從)을 때려 광경이 이상하였다 합니다. 이웃 나라에 들리게 할 수 없으니, 청컨대, 파직(罷職)하소서."
하고, 또 말하기를,
"강계 부사(江界府使) 이의풍(李義豐)과 희천 군수(熙川郡守) 유집(柳潗)은 탐학(貪虐)을 일삼으므로 원망이 떼 지어 일어나니, 청컨대, 모두 파직하소서."
하였으나, 따르지 않았다. 그 뒤에 연중(筵中)에서 임금이 사신의 일을 대신(大臣)에게 물었는데, 대신이 대신(臺臣)이 잘못 듣고 말한 것이고 실로 그런 일이 없다고 대답하니, 드디어 버려두고 묻지 않았다.

 

4월 7일 정축

이재(李縡)를 대사헌으로, 이하술(李河述)을 장령으로, 박춘보(朴春普)를 지평으로, 서명신(徐命臣)을 헌납으로, 이덕중(李德重)·조명리(趙明履)를 교리로 삼았다.

 

4월 8일 무인

윤심형(尹心衡)을 교리로, 이광운(李光運)을 집의로, 유최기(兪最基)를 부교리로, 한익모(韓翼謨)를 수찬으로, 조상경(趙尙絅)을 공조 판서로 삼았다.

 

임금이 국청 대신(鞫廳大臣)과 금부 당상(禁府堂上)을 인견하였다. 이때 죄인 이덕방(李德芳)은 이미 죽었고 그가 끌어댄 자는 다 허황하므로 임금이 작처(酌處)하려고 대신에게 물었는데, 신하들이 다 임금의 뜻과 같다고 대답하니, 죄인 최태원(崔太元)·성구(聖九)·만현(萬顯)·걸음쇠(乬音金)를 드디어 죄다 석방하라고 명하였다. 그래서 양찬규(梁纘揆)의 옥사(獄事)는 여러 달을 지나도 마침내 실정을 알내지 못하고 체포만 잇달아서 호남(湖南)이 이 때문에 어수선한 지 오래다가 그제서야 안정되었다.

 

헌부(憲府) 【지평(持平) 안식(安栻)이다.】 에서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곡산 부사(谷山府使) 오명신(吳命新)은 종적이 더러워서 인심을 진복(鎭服)할 수 없으니, 청컨대, 파직하소서."
하였으나, 임금이 따르지 않고 말하기를,
"오명신은 승지(承旨)와 이조 참의(吏曹參議)가 되었었는데 더럽다고 지목하는 것이 옳겠는가?"
하니, 안식이 말하기를,
"오명신은 이름이 추국 죄인(推鞫罪人)의 공초(供招)에 나왔고 그 뒤에 해백(海伯)에 제수되었으나 저지당하였으니, 어찌 더러운 것이 아니겠습니까? 또 곡산에는 토적(土賊)이 있으니, 이 사람을 제수하여 보내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하였다. 간원(諫院) 【정언(正言) 안경운(安慶運)이다.】 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진주 영장(晋州營將) 신경류(申慶流)는 사람됨이 광패(狂悖)하고 행동이 괴망(怪妄)하니, 청컨대 파직하소서."
하고, 또 아뢰기를,
"손경일(孫景一)이라는 자가 감여(堪輿)를 핑계하여 함부로 한 소(疏)를 올렸는데 말이 매우 요사하고 허황하므로 정원(政院)에서 받아들이지 않았더니, 금문(禁門) 밖에서 소란을 일으키고 승지의 집에서 욕하였습니다. 서울에 두어서는 안 되겠으니, 청컨대, 멀리 정배(定配)하소서."
하니, 모두 윤허하였다.

 

4월 10일 경진

임금이 대신(大臣)과 비국 당상(備局堂上)을 인견(引見)하였다. 우의정(右議政) 유척기(兪拓基)가 또 임인년066)  의 무옥(誣獄)을 신설(伸雪)할 것을 누누이 청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이것은 큰 처분이니, 천천히 의논해야 한다."
하였다. 유척기가 옮겨 의망(擬望)되는 영장(營將)은 그 이름 아래에 달수가 찬 것을 현록(懸錄)하고 또 병비(兵批)067)  의 망단자(望單子)에 영장(營將)이라 쓰지 않고 호군(護軍)이라고만 쓰는 것을 금하여 자주 갈리는 폐단을 막기를 청하니, 그대로 따랐다.

 

4월 11일 신사

주강(晝講)을 행하였다. 《대학연의보(大學衍義補)》를 강(講)하였는데, 시독관(侍讀官) 유최기(兪最基)가 문의(文義)에 따라 역로(驛路)가 조잔(凋殘)한 폐단을 말하고 법외(法外)로 함부로 타는 자를 엄금하기를 청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함부로 타는 것뿐이 아니라 각역(各驛)의 위전(位田)이 다 토호(土豪)에게 들어가서 이 때문에 절로 조잔하게 되었다고 한다."
하니, 우의정 유척기가 말하기를,
"찰방(察訪)은 거의 다 세력이 없는 자이므로 직분을 다할 수 없으니, 통청(通淸)되어야 할 자를 차출하여 보내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였다. 유최기가 또 말하기를,
"도로·교량도 왕정(王政)의 한 가지인데, 도성(都城) 안이 진흙으로 막히고 교량이 무너지니, 모두 사토(沙士)를 파서 없애어 물이 땅속으로 흐르게 해야 하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경조(京兆)에 명하여 신칙(申飭)하게 하였다.

 

오원(吳瑗)을 부제학으로, 이석표(李錫杓)를 수찬으로, 서명신(徐命臣)을 부수찬으로, 유우기(兪宇基)를 지평으로, 신사철(申思喆)을 판윤으로, 이주진(李周鎭)을 대사성으로 삼았다.

 

4월 14일 갑신

임금이 소대(召對)를 행하였다. 신하들이 문의(文義)에 따라 각각 형옥(刑獄)을 삼가는 뜻을 아뢰었다. 강(講)이 끝나고서 하교하기를,
"임금이 강학(講學)하는 까닭은 장구(章句)를 캐기 위한 것이 아니라 몸소 행하기 위한 것이다. 공자(孔子)가 말하기를, ‘예전에는 옥사(獄事)를 청리(聽理)하는 자가 살릴 까닭을 찾았는데 지금은 청리하는 자가 죽일 까닭을 찾는다.’ 하였는데, 구준(丘濬)이 주해(註解)하기를, ‘옥사를 청리하는 자는 죽일 만한 가운데에서도 살릴 길을 찾고 살릴 길을 찾아도 찾을 수 없고서야 죽여야 한다.’ 하였다. 이것이 바로 상하(上下)의 귀감(龜鑑)이고 이에 따라 하유(下諭)한 것도 없지 않다. 이른바 살릴 길을 찾는다는 것은 불쌍히 여기고 슬피 여기는 뜻에서 말미암아 삼가고 살피는 것이나, 상세히 살피는 것은 구구(區區)한 인(仁)을 가차(叚借)한 것이 아니다. 지금 벼슬하는 자는 처음부터 살피지 않으니, 어떻게 살릴 길을 찾겠는가? 이른바 의심스럽지 않고서야 죽인다는 것은 삼가고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속에 있으므로 상세히 살피고 삼가는 뜻이 여기에서 부지런해지는 것이다. 아! 각도의 도신(道臣)은 내가 임강(臨講)하여 흥감(輿感)한 뜻을 몸받아 삼가고 살피라. 또 이 폐단은 토포영(討捕營)에서 더욱이 심하다. 살인(殺人)과 도(盜)는 법삼장(法三章)에도 있기는 하나, 백성이 목숨이 중한 것을 돌보지 않고 토포(討捕)한 공만을 자랑하며 문득 혹독한 형장(刑杖)을 시행하고 불쌍히 여긴 적이 없으니, 백성이 어떻게 손발을 쓰겠는가? 각별히 신칙(申飭)하는 뜻으로 각도에 하유하라."
하였다.

 

4월 16일 병술

통천 군수(通川郡守) 이명직(李命稷)이 잘 다스렸기 때문에 통정계(通政階)를 주라고 특별히 명하였다. 도신(道臣)이 칭찬하여 계문(啓聞)하였기 때문이었다.

 

서명구(徐命九)를 승지로, 송교명(宋敎明)을 집의로, 윤심형(尹心衡)을 사간으로, 유최기(兪最基)를 헌납으로, 이태중(李台重)·이성해(李聖海)를 지평으로 삼았다.

 

4월 17일 정해

이덕중(李德重)을 교리로, 홍봉조(洪鳳祚)를 부교리로, 한익모(韓翼謨)를 수찬으로, 홍창한(洪昌漢)을 이조 정랑으로 삼았다.

 

임금이 소대(召對)에 나아갔다. 대신(大臣)과 비국 당상(備局堂上)도 함께 입시(入侍)하였다. 임금이 문의(文義)에 따라 역대(歷代)의 법문(法文)을 논하여 말하기를,
"창업(創業)하거나 중흥(中興)한 임금은 번번이 관대(寬大)한 것을 숭상하였으므로 나라의 복이 이어졌으나, 후세의 빨리 망한 나라는 늘 가혹한 법에 말미암았으니, 지금 이 글을 찬수(纂修)하는 자는 이것을 생각해야 한다."
하였다. 이때 바야흐로 《속대전(續大典)》을 찬수하므로 임금의 하교가 여기에 미친 것이었다. 임금이 또 하교하기를,
"한(漢)나라 문제(文帝)가 이미 육형(肉刑)을 없앴으므로, 구준(丘濬)이 이른바 사람들이 그 몸을 보전하고 그 형체를 잘리지 않았다는 것은 문제의 덕인데 한 문제 때에 이미 육형을 없앴으나, 사마천(司馬遷)은 한(漢)나라 무제(武帝) 때에 오히려 그 형벌을 받았다. 한 문제는 이미 없앴는데 한 무제는 다시 썼으니, 어찌 후세의 귀감(龜鑑)이 아니겠는가? 아! 우리 나라는 인후(仁厚)가 서로 이어져서 이러한 형벌이 없기는 하다마는, 압슬(壓膝)·낙형(烙刑) 따위는 육형에 견줄 만한 것이 아니나 그래도 슬프고 상심되는 것이니, 모두 없애라고 명하였다. 그러므로 양찬규(梁纘揆)를 국치(鞫治)할 때에 마음 아픈 일 때문에 다시 낙형하고 싶어도 오히려 윤허하지 않은 것은 뜻이 대개 깊은 것이었다. 위에 있는 자가 한때 마음을 시원하게 하고 아래에 있는 자가 혹 이에 따라 임금에게 권한다면, 문제가 이미 없앤 것을 무제가 다시 쓰는 일이 될는지 어찌 알겠는가? 이미 없앤 형벌을 혹 다시 쓴다면 이것도 모자라서 장차 육형도 다시 있게 될 것이니,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이 하교를 금오(金吾)를 시켜 정식(定式)하게 하여 후세의 귀감으로 삼으라."
하였다. 임금이 또 신하들에게 묻기를,
"근래에도 경법(黥法)068)  이 있는가? 일찍이 장문(狀文)을 보니 자자(刺字)한다는 말이 있었다."
하니, 우의정(右議政) 유척기(兪拓基)가 말하기를,
"우리 나라에서는 오로지 《명률(明律)》을 쓰는데 《명률》에 자자한다는 글이 있으므로 경외(京外)에서 조율(照律)에만 그 글을 인용할 뿐이고, 실로 자자하는 일은 없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이미 그 법이 없는데 글에만 쓰는 것은 뜻이 아주 없고, 후세에서 또한 글에 따라 실용하는 폐단이 없을는지 어찌 알겠는가? 이 뒤로는 장문일지라도 이런 문자를 영구히 없애라는 뜻을 엄히 신칙(申飭)하라."
하였다. 임금이 전가 사변(全家徙邊)069)  의 율(律)은 너무 무겁다 하여 신하들에게 물었는데, 유척기가 말하기를,
"이 율이 예전에는 없었는데 우리 나라에서는 혹 변방의 빈 땅을 채우려는 뜻으로 시행하였으나, 이제는 또한 듣지 못했습니다."
하니, 임금이 상세히 살펴서 다시 품의(稟議)하라고 명하였다.

 

이에 앞서 임금이 어사(御史) 이이장(李彝章)에게 명하여 남원(南原)에 가서 살피게 하였는데 이때에 이르러 돌아왔다. 임금이 소견(召見)하여 일신(一新)의 일을 묻자, 이이장이 말하기를,
"일신의 백성이 고을을 혁파(革罷)한다는 것을 듣고 온 경내가 물 끓듯이 어수선하여 길에서 눈물 흘리고 서로 조위(引慰)하기까지 하였는데, 고을을 회복하고 읍호(邑號)만 고친다는 말을 듣고, 또 근시(近侍)가 이민(吏民)을 위유(慰諭)하는 것을 보고는 다시 살아난 듯이 용동(聳動)하였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또 묻기를,
"역적 양찬규(梁纘揆)를 사람들이 어떻게 말하던가?"
하자, 이이장이 말하기를,
"신이 일신에 오래 있었으므로 그 원인을 매우 상세히 알았습니다. 역적 양찬규의 아비와 할아비는 하는 짓이 흉패(凶悖)하여 두 세대에 거쳐 악한 짓을 수행하였으므로 고을 사람들이 독사처럼 여겼는데, 역적 양찬규와 그 아우 양안귀(梁眼龜)가 모두 미치고 실성하였으니, 그 흉망(凶妄)하고 요독(妖毒)한 것은 실로 평판이 나쁘기 때문에 빌미 붙은 데에서 나온 것입니다. 남의 집 재물을 훔치고 길가는 사람에게서 음식을 빼앗으며 감사(監司)를 보면 반드시 ‘오래지 않아 내가 관찰사(觀察使)가 될 것이다.’ 하고 병사(兵使)를 보면 반드시 ‘오래지 않아 내가 절도사(節度使)가 될 것이다.’ 하며 심하면 옹정(雍正)070)  ·건륭(乾隆)071)  을 끌어대어 중원(中原)에 들어가 천자가 된다는 말까지 합니다. 그 형제도 몹시 닮았으므로 고을 사람들이 문질(門疾)이라 하기도 하고 산화(山禍)라 하기도 합니다. 지난 겨울 이후로 체포가 잇달아 인심이 두려워하고 이웃 고을에서는 역향(逆鄕)이라 하여 온 고을을 정거(停擧)하자는 의논까지 있었습니다. 소민(小民)으로 말하면, 사람을 만나면 반드시 사는 고을 이름을 숨기는데 스스로 더럽힐세라 염려하는 것입니다. 대저 남방에서는 괘서(掛書)·봉서(封書) 따위가 흔히 있고 다들 원망하여 남을 무함하는 것을 능사로 여깁니다. 장교(將校)들로 말하면, 오로지 공(功)을 바라고 상(賞)을 바라는 것을 일삼으므로 반하(頒下)된 구포 교서(購捕敎書)를 외워 익혀 반드시 거짓을 꾸미고 없는 것을 꾸며서 발신(拔身)하는 계제로 삼으려 합니다. 이제 위태로워하고 의구하는 백성에게 다시 요행을 바라는 무리가 있으면 장래의 사변을 헤아릴 수 없을 것이니, 조정에서 충분히 진정시킬 방도를 힘써야 하겠습니다."
하고, 이어서 문관(文官)·음관(蔭官) 가운데에서 그 고을의 수령(守令)을 가려 보내기를 청하였다. 대개 역적 양찬규 때문에 무관(武官)인 수령을 차출하여 보내어 찾아 잡기를 요구하였으나, 무인(武人)은 으레 횡포가 많고 어루만져 어거하는 일을 잘하지 못하기 때문이었다. 임금이 드디어 하교하여 전조(銓曹)에서 문관·음관을 가려 보내게 하였다.

 

홍계유(洪啓裕)를 헌납으로, 유최기(兪最基)를 부교리로, 홍봉조(洪鳳祚)를 수찬으로, 정희규(鄭熙揆)를 장령으로, 원경순(元景淳)을 정언(正言)으로 삼았다.

 

하교하기를,
"요즈음 호남(湖南)의 도신(道臣)이 아뢴 것을 보니, 이주진(李周鎭)의 성근(誠謹)을 숭상할 만하다. 그 사람은 학문이 부족할지라도 그 아버지의 유풍이 자못 있으니, 내가 매우 아름답게 여긴다."
하고, 쌓인 노고 때문에 그 벼슬을 체차하라고 명하고, 권혁(權爀)을 전라도 관찰사(全羅道觀察使)로 삼았다.

 

4월 18일 무자

임금이 주강(晝講)에 나아갔다. 《춘추집전(春秋集傳)》을 강(講)하였는데, 진(晋)나라에서 사곡(士穀)을 죽었다는 글에 이르러 임금이 말하기를,
"당(黨)을 만든 자는 마침내 서로 살해하게 되니, 이것은 바로 오늘날의 시상(時象)에 대한 약이 되는 것이다."
하자, 지사(知事) 권적(權𥛚)이 말하기를,
"당습(當習)의 해독은 반드시 나라를 망치고야 말 것입니다. 오직 위에 있는 자가 조제(調劑)하기에 달려 있습니다."
하였다. 시독관(侍讀官) 이덕중(李德重)이 말하기를,
"임금은 오직 표준을 세우는 일을 마음에 두어야 하고 하나의 ‘당(黨)’ 자를 먼저 마음에 붙여서는 안 되는데, 번번이 아래에 있는 자를 의심하십니다."
하니, 임금이 웃으며 말하기를,
"근래 각당이 다 표준을 세우기를 청하였는데, 어느 당에서 청한 표준을 따라야 할는지 모르겠다."
하니, 이덕중이 말하기를,
"표준이라 하는 것은 두 가지가 아닙니다. 편당(偏黨)이 없고 치우치지 않는 것이 표준입니다. 갑과 을이 서로 다툴 때에 한결같이 그 갑과 을의 시비를 이단(理斷)하는 것이 참으로 참된 표준입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갑과 을이 모두 옳은 것과 그른 것이 있으면 어찌할 것인가?"
하니, 이덕중이 말하기를,
"천하에 그럴 리가 없습니다. 일에 어찌 양편이 옳고 양편이 그른 것이 있겠습니까?"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혹 그런 것도 있다. 두 사람이 서로 다투는데 혹 매우 그르지 않은 것도 있고 또 혹 매우 옳지 않은 것도 있다."
하자, 이덕중이 말하기를,
"의리의 중요한 곳을 자세히 쪼개어 보고 시비의 권도(權度)를 잃지 않는다면 옳은 듯한 것과 그른 듯한 것도 간파하여 의심할 것이 없을 것입니다. 오직 임금의 사리를 밝히는 공부에 달려 있습니다. 먼저 이것을 힘쓰지 않고 갑과 을이 다투는 것에서만 시비를 가린다면, 시비는 끝내 가릴 수 없고 도리어 어지러워질 것입니다. 위에 있는 사람은 다만 공정하게 듣고 사리에 따라 가려야 하고 억측하여 지나치게 의심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하고, 권적이 말하기를,
"아래에 있는 자들이 각각 당을 만들더라도 위에 있는 사람이 저울처럼 고르고 거울처럼 비어서 공평하게 시비를 가리고 사의(私意)가 그 사이에 끼지 않게 한다면 자연히 심복(心服)할 것입니다. 아래에서 당을 만드는 것은 워낙 그르거니와, 위에서 아래를 의심하는 것도 없애도록 힘써야 할 것입니다."
하였다.

 

헌부(憲府)에서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4월 19일 기축

주강(晝講)을 행하였다.

 

윤급(尹汲)을 대사간으로, 이광운(李光運)을 사간으로, 권현(權賢)을 헌납으로, 이봉령(李鳳齡)·신사건(申思建)을 정언으로, 홍계유(洪啓裕)를 부교리로 삼았다.

 

종묘(宗廟)의 신탑(神榻)을 모두 당주홍(唐朱紅)으로 고쳐 칠하라고 명하였는데, 예조 참판(禮曹參判) 이익정(李益炡)이 아뢰기를,
"각실(各室)의 신탑을 처음에는 번주홍(燔朱紅)으로 칠하였는데 수개(修改)할 때마다 당주홍으로 고쳤으므로 각실의 신탑은 그 색이 같지 않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달라서는 안 되니, 모두 당주홍으로 고쳐 칠하고 이 뒤로는 정식(定式)으로 삼으라."
하였다.

 

석강(夕講)을 행하였다.

 

4월 20일 경인

임금이 대신(大臣)과 비국 당상(備局堂上)을 인견(引見)하였다.

 

헌부(憲府)에서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천장(天將) 이여매(李如梅)의 후손에게 명하여 이여매의 신주(神主)를 세우게 하고 또 조천(祧遷)하지 말게 하였다. 임금이 이여매의 후손이 나라 안에 있다는 말을 듣고 그 신주가 있는지를 물었는데, 우의정(右議政) 유척기(兪拓基)가 말하기를,
"신주를 세우지 않았으나, 제사할 때에는 황명 총병 지휘사(皇明摠兵指揮使)라고 지방(紙榜)에 써서 제사한다 합니다."
하니, 임금이 드디어 이 명을 내린 것이었다.

 

4월 21일 신묘

정시 문과(庭試文科)를 설행하여 정계주(鄭啓周) 등 7인을 뽑았다.

 

4월 22일 임진

헌납(獻納) 권현(權賢)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전하께서는 오늘날 수상(首相)이 당한 처지는 출사(出仕)할 수 없는 형세라고 생각하십니까? 반드시 출사하지 않을 것을 알면서 한갓 허례(虛禮)로 강권하신다면, 이것이 어찌 성실한 뜻이겠으며 또한 어찌 예(禮)로 부리는 도리이겠습니까? 종백(宗伯)072)  과 승지(承旨)·사관(史官)이 차례로 서로 지키며 반드시 같이 들어오려 한 지 한 해가 지나고 두 해가 지나고 이제 세 해가 되었으니, 이와 같은 거조(擧措)는 고사(古史)에서 듣지 못한 것입니다. 예전 세종(世宗) 때에는 황희(黃喜)와 같은 원신(元臣)·석보(碩輔)가 있었으니, 그 제우(際遇)가 융숭하고 공렬(功烈)이 성대한 것이 어찌 지금 사람이 견줄 바이겠습니까마는, 한 번 대언(臺言)을 당하면 정승을 파면하기에 이른 것이 한두 번뿐이 아닙니다. 그 언로(言路)를 붙들어 세우고 대신(大臣)을 예로 임용하는 방도가 아울려 행해져서 어그러지지 않았으니, 이것은 참으로 천고(千古)의 성대한 일이고 후세에서 본받아야 할 것입니다."
하였다. 권현이 수상이라 한 것은 이광좌(李光佐)이었다. 비답(批答)하기를,
"대신의 일은 네가 감히 말할 것이 아니다."
하였다.

 

4월 23일 계사

이휘항(李彙恒)을 장령으로, 윤득화(尹得和)를 강화 유수로 삼았다.

 

4월 25일 을미

신만(申晩)을 도승지로, 송시함(宋時涵)을 장령으로, 박필주(朴弼周)를 찬선으로 삼았다.

 

임금이 주강(晝講)에 나아갔다. 《춘추집전(春秋集傳)》을 강(講)하였는데, 송자애(宋子哀)의 일에 이르러 시독관(侍讀官) 홍봉조(洪鳳祚)가 말하기를,
"기미를 보고 행동하되 하루도 기다리지 않는 것을 자애(子哀)가 한 것은 능히 몸을 깨끗하게 하고 도리를 지키기 위한 것입니다. 후세 사람이 이것을 빙자하여 말하되 실상은 혹 구차하게 살려고 화(禍)를 피하여 나라를 떠난다면 그 폐단이 어찌 크지 않겠습니까?"
하고, 검토관(檢討官) 이덕중(李德重)이 말하기를,
"세상 사람들이 몸을 그르치고 뜻을 잃는 것은 아닌게 아니라 영화를 탐내고 조급히 벼슬을 다투는 데에서 말미암습니다마는, 임금이 사람을 등용하는 도리도 반드시 탐련(貪戀)하는 무리를 물리치고 절개가 돌 같은 선비를 발탁하여 쓰고서야 나라를 다스릴 수 있을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지금 기미를 보고 행동하되 하루도 기다리지 않는 자는 한두 신하에 지나지 않을 뿐이다. 이를테면 최규서(崔奎瑞)·김진상(金鎭商) 두 사람은 또한 기미를 보고 떠났다 하겠다."
하였다.

 

교리(校理) 이덕중(李德重)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대신(大臣)이 시정기(時政記)를 날짜를 한정하여 수찬(修纂)하여 바칠 것을 아뢰어 윤허받았는데, 신의 이름도 그 가운데에 있습니다. 신은 일찍이 우사(右史)이었을 때의 시정기는 이미 수찬하여 바쳤고, 지금 신을 시켜 수찬하여 바치게 한 것은 김상로(金尙魯)가 출륙(出六)한 뒤 김시찬(金時粲)이 부직(付職)되기 전 열 다섯 달의 사초(史草)입니다. 한원(翰苑)의 규례는 삭직(削職)되어 사관(史館)을 떠나는 일이 있더라도 또한 반드시 하번(下番)을 시켜 수찬하여 바치게 하는 것이 상례(常例)인데, 김상로는 신의 하번입니다. 김상로가 사관을 떠난 것과 신이 삭직된 것은 같은 달에 있었으니, 그 뒤의 수사(修史)는 김상로의 책임입니다. 신이 어찌 규례를 어기고 대신 담당하여 사례(史例)를 무너뜨리고 관규(館規)를 무너뜨릴 수 있겠습니까?"
하였는데, 비답(批答)하기를,
"본관(本館)을 시켜 다시 상고하여 거행하게 하라."
하였다.

 

4월 26일 병신

경기의 유생(儒生) 한덕봉(韓德鳳) 등이 상소하기를,
"남양(南陽)의 안곡 서원(安谷書院)은 현묘(顯廟)무신년073)  에 창건하여 첨정(僉正) 박세훈(朴世薰)·승지(承旨) 박세희(朴世熹)·영상(領相) 홍섬(洪暹)을 아울러 향사(享祀)합니다. 경묘 신축년074)  에 사액(賜額)하였는데 당저(當宁) 기유년075)  에 조정의 명령으로 은액(恩額)을 철거하였으니, 유사(有司)의 신하에게 다시 하문하여 철거한 은액을 도로 내리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다시 물어서 처치하겠다."
하였다.

 

주강(晝講)을 행하였다.

 

4월 27일 정유

심성희(沈聖希)를 대사간으로, 조명리(趙明履)를 집의로 삼았다.

 

4월 28일 무술

헌부(憲府) 【장령(掌令) 송시함(宋時涵)이다.】 에서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비인 현감(庇仁縣監) 이희집(李喜集)은 장정을 등록하는 일을 해리(該吏)에게 일임하고 또 도신(道臣) 집의 석역(石役)으로 군민(軍民)을 몹시 부리므로 온 경내가 불평하니, 청컨대 파직(罷職)하소서. 영릉 참봉(寧陵參奉) 이수이(李壽頣)는 더럽고 잗단 짓을 많이 하여 스스로 의심받고 비방받게 만들었고, 목릉 참봉(穆陵參奉) 이홍운(李鴻運)은 제 아비가 살아 있는데도 속여서 적장(嫡長)이라 하였으니, 청컨대 태거(汰去)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이때 대각(臺閣)에서 머뭇거리는 자는 문득 죄를 받으므로 모두 피하려 꾀하고, 혹 출사(出仕)하여 일을 논하는 자가 있어도 피폐한 음관(蔭官)이나 세력이 없는 무관(武官)의 일에 지나지 않았다. 그래서 대각의 직임이 더욱 경시되었다.

 

4월 29일 기해

주강(晝講)을 행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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