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 1일 경자
헌부(憲府) 【장령(掌令) 송시함(宋時涵)이다.】 에서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문과(文科)·무과(武科)의 방방(放榜) 때에 와서 참여하는 경재(卿宰)가 아주 적어서 2품(品)·3품은 각각 한 사람뿐입니다. 기강에 관계되는 일이니, 중추(重推)하는 법을 시행해야 하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5월 2일 신축
밤에 유성(流星)이 익성(翼星) 위에서 나와 서방으로 들어 갔는데, 모양이 주먹 같고 꼬리의 길이가 서너 자였고 빛깔은 흰 색이었다.
함경도 갑산(甲山)에 눈이 내렸다.
잠성 부부인(岑城府夫人)을 장차 천장(遷葬)할 것이므로 중궁전(中宮殿)이 망곡례(望哭禮)를 행하였다. 장례(葬禮) 때에도 이와 같이 하였다.
풍원군(豐原君) 조현명(趙顯命)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듣건대, 세자 저하(世子邸下)가 접때 실족하여 다친 근심이 있었다 합니다. 신명이 도와서 다행히 곧 좋아지기는 하였으나, 깊은 곳에 가거나 높은 곳에 올랐을 때에 이런 일이 있게 되었다면 그 한심한 것이 어떠하였겠습니까? 한때의 우연한 일이라 할지라도 그 관계되는 것은 매우 중대하니, 신은 옆에서 시위(侍衛)를 삼가지 못한 자를 책벌(責罰)하여 뒷날의 경계로 삼고 무릇 일상 동정(動靜)할 때에 전하께서도 특별히 단속하여 조금도 방임하지 마셔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송(宋)나라 효종(孝宗)이 활시위에 다친 상처는 매우 작았으나 진준경(陳俊卿)이 경계를 아뢴 소(疏)는 1천여 마디나 이어졌는데, 애연(藹然)히 충애(忠愛)하는 마음을 지금도 많이 볼 수 있습니다. 장년(壯年)인 때에도 그러하였는데, 더구나 어릴 때이겠습니까? 신은 직분이 보도(輔導)에 있으므로 이미 지난 때일지라도 감히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였는데, 임금이 우악한 비답을 내렸다.
임금이 주강(晝講)과 석강(夕講)을 행하였다. 《춘추집전(春秋集傳)》을 강(講)하였는데, 호전(胡傳)에 국인(國人)이 함께 시해한 것이라 한 글에 이르러 임금이 말하기를,
"소공(昭公)이 무도(無道)하더라도 국인·신민(臣民)으로서 시해하려 하였다 한 것은 군신(君臣)의 의리에 어떠한가?"
하자, 지경연(知經筵) 권적(權𥛚)이 말하기를,
"천경(天經)·지의(地義)를 하루라도 폐기한다면 천리(天理)가 없어지고 인도(人道)가 끊어질 것입니다. 소공이 도(道)를 어지럽히고 덕을 잃었더라도 임금을 섬기는 신하로서 감히 불측(不測)한 마음을 품을 수 있겠습니까? 탕(湯)도 부덕(不德)을 부끄러워한 일이 있고 문왕(文王)도 은(殷)을 섬겼으니, 군신의 의리를 볼 수 있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경연(經筵)의 말이 옳다."
하였다.
헌부(憲府) 【장령(掌令) 송시함(宋時涵)이다.】 에서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비인 현감(庇仁縣監) 이희집(李喜集)의 일에 이르러 임금이 승지(承旨) 홍성보(洪聖輔)에게 물었는데, 홍성보가 말하기를,
"신이 서천(舒川)의 수령(守令)이었을 때에 비인에 가서 석비(石碑)를 날라오는데 민력을 많이 괴롭히는 것을 보고 괴이하게 여겨 이희집에게 물었더니, 도신(道臣)의 집 묘석(墓石)이므로 감히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없다고 대답하였습니다. 대언(臺言)이 과연 옳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백성을 마치 다친 사람처럼 대하고 백성을 때맞추어 부리는 것은 성인의 가르침에 실려 있는 것인데, 자신이 도신이면서 과연 범한 것이 있다면 도신이라 하여 버려둘 수 없다. 모두 해부(該府)를 시켜 나처(拿處)하게 하라."
하였다. 이때의 도신은 바로 윤경룡(尹敬龍)이었다.
조명겸(趙明謙)·한덕후(韓德厚)를 승지로, 채응복(蔡膺福)을 헌납으로, 이규채(李奎采)·홍계희(洪啓禧)를 정언으로, 홍계유(洪敬裕)를 이조 정랑으로 삼았다.
5월 4일 계묘
임금이 소대(召對)를 행하였다. 시독관(侍讀官) 유최기(兪最基)가 문의(文義)에 따라 사대부(士大夫)가 율령(律令)을 모르는 폐단을 말하기를,
"사대부가 이미 법문(法文)을 모르니, 먼 지방의 천한 백성이 어떻게 법문을 알아서 함부로 범하지 않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옳게 여기고, 유신(儒臣)과 대신(大臣)을 시켜 율령(律令)을 초정(抄定)하여 입시(入侍) 때에 품처(稟處)하게 하였다. 대개 바야흐로 《속대전(續大典)》을 수찬(修纂)하기 때문이었다.
5월 6일 을사
임금이 주강(晝講)과 석강(夕講)을 행하였다.
조명리(趙明履)를 교리로 삼았다.
5월 7일 병오
임금이 소대(召對)를 행하였다. 역대(歷代)의 형법(刑法)을 논하고 드디어 하교하여 승지(承旨)로 하여금 법조(法曹)에 가서 경자(黥刺)하는 제구를 가져다 불사르게 하고, 말하기를,
"한 번 손상된 것이 종신토록 없어지지 않으니, 어찌 슬프지 않겠는가? 영을 어기고 다시 쓰는 자는 중벌하겠다."
하고, 또 비국(備局)을 시켜 모든 경외(京外)의 형구(刑具)를 조목조목 벌여 적어서 엄금하게 하였다.
5월 11일 경술
포도청(捕盜廳)에서 아뢰기를,
"유재흥(柳再興)이라는 자가 배흥(裵興)이라는 사람과 함께 명인(名人)이 되어 위에서 잠저(潛邸)에 계실 때의 위호(位號)와 창의궁(彰義宮)의 호(號)로 도서(圖署)를 위조하여 도장 첩문(道掌帖文)을 만들어 매매하였으니, 청컨대 추조(秋曹)076) 에 옮겨 보내어 감률(勘律)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병조 판서(兵曹判書) 김성응(金聖應)이 면직되고 조현명(趙顯命)으로 대신하였다. 윤심형(尹心衡)을 집의로, 김성응을 어영 대장으로, 이의천(李倚天)을 승지로, 조관빈(趙觀彬)을 예조 판서로 삼았다.
지평(持平) 이태중(李台重)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군도(君道)가 날로 가리어지고 언로(言路)가 날로 막혀 가서 한만(閑漫)한 경계를 아뢰는 말과 보통 백관(百官)이 서로 경계하는 것이 고요하여 들리는 것이 없어진 지도 오래 되었습니다. 초봄의 처분이 있고부터 의리가 펴지려다가 펴지지 않고 징토(懲討)가 거행되려다가 거행되지 않으므로 의심하여 망설이며 기다리니, 성상께서 독단(獨斷)하시기를 기다릴 뿐입니다. 선정(先正)의 40여 수차(手箚)는 진실로 이 세상에서 다시 볼 수 없으나, 또한 어찌 이토록 쇠퇴해질 줄 알았겠습니까? 반자(班資)의 고하를 생각하거나 청요(淸要)의 선후를 다투는 것이 아니면 전하의 정신(廷臣)은 장차 한 가지도 할 수 있는 일이 없을 것입니다."
하였는데, 임금이 당습(黨習)이라 하여 배척하였다.
5월 11일 경술
윤대관(輪對官)을 인견(引見)하였다.
5월 12일 신해
이석표(李錫杓)를 응교로, 한익모(韓翼謨)를 교리로, 이성효(李性孝)·김헌철(金漢喆)을 부수찬으로, 민통수(閔通洙)를 수찬으로, 김유경(金有慶)을 좌참찬으로 삼았다.
좌의정(左議政) 김재로(金在魯)가 병 때문에 면직을 청하였다. 대개 수상(首相) 이광좌(李光佐)와 혐의가 있기 때문이었는데, 임금이 말하기를,
"경(卿) 때문에도 고심한다. 사직하지 말라."
하였다. 김재로가 말하기를,
"남양(南陽)의 유생(儒生)들이 상소하여 아뢴 박세희(朴世熹)의 서원(書院)은 이미 거듭 설치한 것이 아니니, 이미 내린 편액(扁額)을 철거하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하니, 그대로 따랐다. 김재로가 또 말하기를,
"고(故) 유일(遺逸) 조욱(趙昱)·조성(趙晟)은 다 선정(先正) 조광조(趙光祖)의 문인(門人)인데 학행이 높아서 다 《동국명신록(東國名臣錄)》에 들었으니, 포증(褒贈)해야 하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3품(品) 벼슬을 추증(追贈)하라고 명하였다. 김재로가 또 임인년077) 무옥(誣獄)의 반안(反案)을 청하고 말하기를,
"신은 김용택(金龍澤)·이천기(李天紀)를 옳게 여기는 것이 아니라 역안(逆案)에서 없애기를 바랄 뿐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이태중(李台重)은 반드시 이들을 숭장(崇奬)하려 한다. 고(故) 판서(判書) 김진규(金鎭圭)가 있다면 어찌 김용택 같은 자가 나왔겠는가? 내게도 권형(權衡)이 있거니와, 천하의 일은 번번이 바삐 처치하면 어긋나니, 천천히 다시 의논하겠다."
하였다.
5월 14일 계축
조명리(趙明履)·김상로(金尙魯)를 교리로, 이덕중(李德重)을 부교리로, 윤광의(尹光毅)를 수찬으로, 권적(權𥛚)을 대사헌으로, 권영(權瑩)을 대사간으로, 홍봉조(洪鳳祚)를 집의로, 민택수(閔宅洙)를 지평으로, 홍용조(洪龍祚)를 승지로 삼았다.
5월 14일 계축
헌부(憲府)에서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5월 15일 갑인
종실(宗室) 하평정(夏坪正) 이무(李懋)가 상소하여 효종(孝宗)의 존호(尊號)를 더 올리기를 청하였다. 대략 말하기를,
"《춘추(春秋)》의 대일통(大一統)의 의(義)는 천지(天地)를 버티고 만고(萬古)에 뻗어 하루도 없어질 수 없는 것입니다. 효종 대왕의 성덕(聖德)·신공(神功)은 천지를 세우고 백세(百世)에 끼쳤는데, 이제 80년이 되어도 이 일을 뒤미처 높여 더 존숭(尊崇)하지 않는다면, 대의(大義)가 오늘날에 밝혀지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 전하께서는 조상을 받들고 뒤미처 섬기는 도리를 모두 극진히 하여 1백년 동안 폐기하였던 전례(典禮)를 한꺼번에 죄다 거행하셨으나 이 한 가지 일만은 아직 겨를이 없었으니, 바라건대 통쾌히 예단(睿斷)하여 빨리 성대한 의례를 거행하소서."
하였는데, 소가 들어가니 임금이 비답(批答)을 내려 칭찬하였다. 이어서 상참(常參)을 행하였다. 예(禮)가 끝나고서 대신(大臣) 이하 재상(宰相)들과 삼사(三司)의 신하에게 명하여 모두 입시(入侍)하도록 하고 하교하기를,
"동방(東方)이 좌임(左袵)078) 을 면할 수 있었던 것은 실로 우리 성조(聖祖)의 공이다. 일찍이 병신년079) 에 약시중을 들 때에 효묘(孝廟)의 존호는 내가 지극히 바라는 것이라는 하교를 친히 받았으므로 늘 생각하면 슬펐는데, 이제 종신(宗臣)의 소가 나왔다. 여러 신하의 뜻은 어떠한가?"
하자, 우의정(右議政) 유척기(兪拓基)가 말하기를,
"우리 나라가 능히 천리(天理)를 높이고 대의를 밝힐 줄 아는 것은 모두 우리 효종 대왕이 내려 주신 것이니 누가 감히 이의가 있겠습니까마는, 이 일은 중대하므로 의당 신하들에게 모여 의논하게 하여 널리 받아들여서 처치해야 하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곧 모여 의논하라고 명하였다. 빈청(賓廳)에서 모여 의논하였는데, 신하들은 이의하는 말이 없었다. 임금이 다시 대신 이하를 인견(引見)하여 하교하기를,
"송(宋)나라 효종(孝宗)·한(漢)나라 소열(昭烈)080) 의 일을 어찌 성조께 뜻하신 일에 견줄 수 있겠는가?"
하니, 좌의정(左議政) 김재로(金在魯) 등이 말하기를,
"선정(先正) 송시열(宋時烈)이 장무(章武)라 의시(議諡)한 것은 한(漢)나라의 연호(年號)를 딴 것입니다마는, 이미 세실(世室)로 정하였고 또 묘호(廟號)를 올렸으니, 이것은 대의가 천하·후세에 드러날 만한 것입니다. 신들은 지식이 미치지 못하고 예(禮)는 매우 중하니, 다시 밖에 있는 대신과 예관(禮官)에게 문의해야 하겠습니다."
하니, 그대로 따랐다. 유척기가 또 임인년081) 옥사(獄事)의 반안(反案)을 청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중대한 일이 앞에 있으니, 우선 버려두는 것이 옳다. 내가 염려하는 것은 신복(伸復)도 모자라서 또 앞으로 정포(旌褒)를 청하는 것이다."
하고, 마침내 윤허하지 않았다.
형조 판서(刑曹判書) 이기진(李箕鎭)이 아뢰기를,
"무신년082) 의 역적 박필현(朴弼顯)의 이름을 유적(儒籍)에서 해묵(解墨)083) 한 자가 있으니, 반유(泮儒)를 사문(査問)하여 죄주어야 하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윤허하였다.
대사헌(大司憲) 권적(權𥛚)이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5월 16일 을묘
석강(夕講)을 행하였다.
헌부(憲府) 【지평(持平) 민택수(閔宅洙)이다.】 에서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이번 회의 때에 사간(司諫) 송질(宋瓆)이 참여하지 아니하였고, 무신(武臣) 송징래(宋徵來)가 패초(牌招)를 어겼으니 모두 파직(罷職)해야 하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윤허하였다.
5월 17일 병진
소대(召對)를 행하였다. 임금이 송(宋)나라 태조(太祖)가 옥사(獄舍)를 청소하고 옥수(獄囚)에게 먹을 것과 약을 준 옛일에 감동하여 하교하기를,
"이것은 송나라가 인후(仁厚)로 나라를 세운 까닭이니, 본받을 만하다. 추조(秋曹)와 금오(金吾)를 신칙(申飭)하여 죄수를 돌보는 뜻을 보이라."
하였다.
도당록(都堂錄)이 이루어졌다. 이태중(李台重) 등 24인을 뽑았는데, 이천보(李天輔)를 홍문 정자(弘文正字)로 삼으니, 세상에서 일컫는 남상 극선(南床極選)이라는 것이었다.
5월 18일 정사
헌부(憲府)에서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5월 19일 무오
송교명(宋敎明)을 사간으로, 서명신(徐命臣)을 헌납으로, 이제원(李濟遠)을 부교리로, 윤득경(尹得敬)을 부수찬으로 삼았다.
삼사(三司)에서 합계(合啓)하여 고(故) 좌의정(左議政) 유봉휘(柳鳳輝)·영의정(領議政) 조태구(趙泰耉)의 관작(官爵)을 추탈(追奪)하고 영의정 이광좌(李光佐)를 우선 파직(罷職)하기를 청하였는데, 임금이 우의정(右議政) 유척기(兪拓基)를 특별히 체차하고 삼사의 신하들을 모두 파직하였다. 이때 유척기가 정승이 되어 이미 김창집(金昌集)·이이명(李頣命) 두 대신(大臣)의 관작을 신복(伸復)하였는데, 또 임인년084) 의 무안(誣案)을 복심(覆審)하여 김용택(金龍澤)·이희지(李喜之) 등 여러 사람의 억울한 죄를 신설(伸雪)하기를 여러번 청하였다. 임금이 따르려 하였으나 오래 결정하지 못하였는데 신하들이 ‘무옥(誣獄)이 반안(反案)되지 않으면 성무(聖誣)는 씻을 수 없는데, 유봉휘 등이 무옥의 근본이니, 먼저 유봉휘 등을 토죄(討罪)하지 않으면 또 무옥의 죄안(罪案)을 복심할 수 없다.’ 하였다. 그래서 대사헌 권적(權𥛚), 대사간 이성룡(李聖龍), 집의 홍봉조(洪鳳祚), 응교 김상로(金尙魯), 장령 이휘항(李彙恒)·송시함(宋時涵), 지평 이성해(李聖海)·민택수(閔宅洙), 교리 이덕중(李德重), 정언 이수해(李壽海)·박춘보(朴春普) 등이 드디어 함께 합계하기를,
"접때 성궁(聖躬)을 근거 없는 일로 핍박하고 온갖 계책으로 공동(恐動)한 흉도(凶徒)는 대개 한둘로 셀 수 없습니다마는, 맨 먼저 앞장서서 역적들을 이끈 자는 유봉휘가 아니고 누구이겠습니까? 생각하건대, 우리 선대왕(先大王)께서 종사(宗社)의 대계(大計)를 깊이 염려하여 우리 전하를 저사(儲嗣)로 책림하셨으니, 이것은 대개 숙묘(肅廟)의 유의(遺意)이고 자성(慈聖)의 명교(明敎)에 따른 것입니다. 천지의 귀신이 도와 응하는 것이고 중외(中外)의 신민(臣民)이 함께 추대하는 바인데, 저 유봉휘만이 그 분독(憤毒)을 이기지 못하여 흉소(凶疏)를 바쳐 뜻대로 분격하기에 바빴습니다. 사령(使令)이니 최독(催督)이니 하는 따위 말이 이미 신하로서 감히 말할 수 없는 것이고, 그 밖에 사기(辭氣)가 패만(悖慢)하고 지의(旨意)가 흉참(凶慘)한 것으로 말하면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그 ‘신하의 예가 없다[無人臣禮]’고 한 넉 자는 한(漢)나라 어사(御史) 엄연년(嚴延年)이 곽광(霍光)이 폐립(廢立)한 일085) 을 탄핵한 말입니다. 문자에 어찌 한정이 있겠습니까마는, 반드시 이 어구를 끼워 넣었으니, 이런 일을 차마 할 수 있겠습니까? 그 ‘인심의 의혹이 오래도록 진정되지 않는다.’ 한 것은 또한 무슨 뜻이겠습니까? 종사를 맡길 데가 있어 온 나라 안이 함께 경축하였는데 의혹이 진정되지 않는다고 한 것이 어찌 매우 불측(不測)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 ‘성명(成命)이 이미 내려졌으므로 다시 의논할 수 없다.’ 한 것은 그 지의(指意)를 캐면 더욱이 흉참합니다. 명호(名號)가 이미 정해졌는데도 혼자 이런 말을 하였으니 그 의논할 수 없다고 한 것은 감히 의논하기 위한 것이므로 전하를 임금으로 섬길 마음이 없다는 것을 틀림없이 알 수 있습니다. 대저 유봉휘가 한 번 상소한 것이 실로 국가의 무한한 화근입니다. 신축년086) 에 저사를 세운 뒤로 군강(君綱)·신분(臣分)이 날로 더욱 가벼워지고 역절(逆節)·흉모(凶謀)가 날로 더욱 깊어져서 요환(妖宦)·역비(逆婢)가 안팎에서 체결하고, 조태구(趙泰耉)·최석항(崔錫恒)·김일경(金一鏡)·박필몽(朴弼夢)이 뜻밖의 놀라운 일을 선동하고 역적 목호룡(睦虎龍)의 흉서(凶書)와 무신년087) 의 흉봉(凶鋒)이 차례로 이어 나온 것이 모두 유봉휘가 먼저 시작한 것입니다. 왕법(王法)이 있다면 어찌 하루라도 용서할 수 있겠습니까마는, 전하께서 죄주지 않을 뿐더러 또 따라서 총애하여 발탁하시고, 을사년088) 의 개기(改紀) 때에 귀양보내는 벌을 가볍게 주어서 천벌이 가해지지 않고 마침내 집안에서 죽었고, 정미년089) 이후에는 또 역적을 감싸는 논의에 몰려 복관(復官)하는 은혜를 베풀기까지 하셨으니, 왕강(王綱)이 더욱 해이해지고 여정(輿情)이 오래 울분합니다. 청컨대, 유봉휘의 관작을 추탈하소서."
하고, 또 말하기를,
"조태구의 죄를 이루 다 벌할 수 있겠습니까? 성명(聖明)이 잠저(潛邸)에게 계실 때부터 앞장서서 사설(邪說)을 만들어 넌지시 망측한 데에 빠뜨리려 하였고, 저위(儲位)가 이미 정해지게 되어서는 유봉휘의 흉소(凶疏)가 오로지 위망(危亡)에 관한 일로 공동(恐動)하려는 생각에서 나온 것인데 자신이 대신이면서 앞장서서 편들어 토죄(討罪)를 청하는 논의에 대하여 혈전(血戰)하여 유봉휘를 도와 장려하고 흉도(凶徒)와 비밀히 체결하여 마침내 배반할 계책을 부렸으니, 그 죄는 주벌(誅罰)을 용서할 수 없습니다. 더구나 역적 목호룡의 흉서가 얼마나 흉패(凶悖)한 것이며, 전하께서는 특별히 궁료(宮僚)를 불러 사위(辭位)하려 하시기에 이르렀으면, 놀라 어쩔 줄 모르고 아픔이 절박하여 역적 목호룡을 엄히 국문(鞫問)하여 방형(邦刑)을 바루어야 진실로 마땅하였을 것인데, 도리어 역적 목호룡을 기화(奇貨)로 여겨 그 옥사(獄事)가 이루어지지 않을세라 염려하였습니다. 백망(白望)이 그들의 흉참한 정상을 고발하게 되어서는 꼭 죽게 된 가운데에서 살길을 찾았다고 생각하여 잠시 대명(待命)하고는 태연히 옥사(獄事)를 안치(按治)하되 끝끝내 단련(鍛練)하고, 최석항이 옥안(獄案)에 쓰지 말기를 청하게 만들었습니다. 역적 김일경이 지은 교문(敎文)에 흉참한 말이 있는데 흉도가 구실로 삼아 마침내 무신년의 난에 이르게 하였습니다. 그 지은 죄를 논하면 실로 수악(首惡)인데 집안에서 죽고 벼슬도 여전하였으니, 청컨대, 조태구의 관작을 추탈하소서."
하고, 또 말하기를,
"크게 교활하고 크게 간사한 자가 예전부터 어찌 한정이 있겠습니까마는, 죄가 차고 악이 쌓인 것으로는 이광좌와 같은 자가 없었습니다. 대개 병신신090) 의 처분이 있고부터 원망하는 마음을 오래 품어 오다가 신축년·임인년에 득지(得志)하게 되어서는 드디어 흉당(凶黨)의 우두머리가 되어 무릇 나라를 해치고 남에게 화를 끼치는 일을 주장하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신축년에 내려진 대리(代理)하라는 명은 의리가 광명 정대하여 후세에 할말이 있을 수 있는 것인데, 감히 나라가 반드시 망한다느니 신절(臣節)이 없다느니 하는 따위 말로 연차(聯箚)할 때에 포효(咆哮)하였으니, 조금이라도 신하로서 전하를 섬기는 마음이 있다면 어찌 감히 이 때문에 나라가 망하고 신절이 없다고 할 수 있었겠습니까? 더구나 역적 목호룡의 흉서는 성궁(聖躬)을 위태롭게 하려는 생각에서 나왔으므로 신하로서는 먼저 역적 목호룡을 국문하여 빨리 그 죄를 바루어야 워낙 마땅한데, 오래 옥관(獄官)으로 있으면서 끝끝내 단련하여 그 말이 부실할세라 염려하였습니다. 진선문(進善門)에서 김일경을 친국(親鞫)할 때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목호룡의 일은 아주 원통합니다.’ 한 것은 또한 너무 늦지 않습니까?
기유년091) 의 연교(筵敎)에 ‘목호룡의 정상을 당초에 어찌 몰랐겠는가?’ 하셨으면 그런 대로 그 진심을 간파하셨거니와, 역적 김일경의 첫번 상소에 흉심(凶心)이 이미 나타났고 교문의 어구에 역절(逆節)이 다 드러났으므로, 이 역적과 마음이 같은 사람이 아니면 누가 감히 용납하여 감싸고 장려하여 발탁하기를 마지않겠습니까마는, 본병(本兵)092) 의 장(長)에 의망(擬望)하여 문득 상공(賞功)을 같이하는 것인 듯이 하기까지 하였으니, 그 마음이 어디에 있는지는 길가는 사람도 알 것입니다. 정미년093) 에 다시 들어온 뒤에 또 다시 윤태징(尹泰徵)·이사성(李思晟)·이명언(李明彦)·권익관(權益寬) 등을 뽑아 안팎에 벌이고 번곤(藩閫)에 벌여 두어 군사를 일으켜 대궐을 범할 계책을 수행할 뻔하였으므로 생각이 여기에 미치면 기가 막히는데, 또 저사를 세워 대리하게 하기를 청한 차자(箚子)를 다시 역안에 두어 역적 목호룡이 무고(誣告)한 옥사를 충실하게 하였으니, 더욱이 흉참합니다. 갑진년094) 대점(大漸) 때에는 병환을 숨기고 악명(藥名)을 개칭(改稱)하여 국가의 가까운 친족까지도 모르게 하고 마침내 심유현(沈維賢)·이인좌(李麟佐) 등이 앞뒤에서 창응(唱應)하게 하여 하늘에 흘러넘치는 화(禍)를 빚어 냈으니, 아! 통탄합니다. 이광좌가 조정(朝廷)에 선 것이 거의 50년인데 그 평생을 거론하면, 병신년 이후는 나라를 원망한 죄인이고 신축년 이후는 김일경·박필몽의 심복이고, 정미년 이후는 이인좌·정희량(鄭希亮)·심유현의 와주(窩主)이었습니다. 그 범죄를 논하면 실로 용서하지 않는 과조(科條)에 있으니, 옛사람이 이른바 사람이 현륙(顯戮)을 생각하고 귀신이 음주(陰誅)를 의논할 자라 한 것이 참으로 이광좌를 말한 것입니다. 그 죄로 죄주지 않으면 왕법(王法)이 펴지지 못하고 천토(天討)가 행해지지 않을 뿐더러 뒷날 우리 나라의 근심도 이루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청컨대, 이광좌를 우선 파직하소서."
하였는데, 임금이 그 계본(啓本)을 도로 주고 비답(批答)을 내리지 않고 희정당(熙政堂)에 나아가 우의정 유척기를 인견(引見)하였다. 이때 공주(公州) 사람 박동준(朴東俊)이라는 자가 감사(監司)에게 고하기를, ‘영의정 이광좌가 그 아버지를 왕자 산맥(王字山脈)에 묻고 남몰래 지사(地師)에게 경계하여 누설하지 말게 하였다.’ 하였는데, 감사 김성운(金聖運)이 그 일을 계문(啓聞)하였다. 임금이 삼사의 신하들이 박동준과 안팎에서 화응(和應)하여 이광좌를 무함한다고 생각하고 유척기가 참여하여 알 것이라고 의심하여 드디어 유척기를 특별히 불렀다. 유척기가 들어왔는데, 임금이 박동준의 일을 말하지 않고 유봉휘와 역적들이 성궁을 근거 없이 핍박하였으므로 무옥은 신설(伸雪)해야 한다는 뜻을 먼저 말하고, 또 하교하기를,
"두 신하가 복관(復官)된 뒤에 그 밖의 일은 절로 완급(緩急)이 있을 수 있는데, 이번 합계(合啓)가 또 호서(湖西)의 장문(狀聞)이 들어온 날에 나와 앞서지도 뒤지지도 않고 시끄러운 꼬투리를 일으키는 것이 마치 기회를 타서 나온 것 같다."
하였다. 유척기가 말하기를,
"신은 아직 알지 못하니, 호서의 장문을 보이소서."
하니, 임금이 비로소 박동준의 일을 말하였다. 유척기 말하기를,
"삼사(三司)의 논의는 봄부터 있었는데 인원을 갖추기가 매우 어려우므로 드디어 이제까지 늦추어 왔습니다. 삼사가 변변치 못하더라도 어찌 공주 사람과 화응해야 하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이들이 몇 해 동안 벼슬하였기에 이제야 비로소 하는가? 이는 임금을 조롱하려 한 것이다. 널리 타이르던 날에 영상(領相)과 함께 마시고서 이런 행동이 있으니, 어찌 괴이하지 않겠는가? 대개 내 처분에 불만을 가진 까닭이다."
하고, 이어서 삼사를 모두 파직하라고 명하고, 또 유척기의 정승 벼슬을 체차하였다. 대개 유봉휘 등을 추탈하는 것과 김용택 등을 반안(反案)하는 것은 그 일의 앞뒤가 서로 관련되므로 다를 것이 없더라도, 추탈은 성궁(聖躬)에 대한 무함을 변명하기 위한 것이고 반안은 신하들의 억울한 죄를 풀어 주기 위한 것이니, 그 가운데에도 경중(輕重)·선후(先後)의 구분이 절로 있는데, 유척기가 이미 두 신하를 신설(伸雪)하고 나서 또 반안하기를 청하였으나 토죄(討罪)하고 변무(辯誣)하는 일을 먼저 청하지 않았으므로, 임금의 뜻이 워낙 이미 불쾌하였거니와, 삼사가 합계할 때에 임금이 또 그 청하는 것이 워낙 늦었기 때문에 신하들이 번안에 바쁘고 변무에 느린 것이라고 의심하여 조롱한다는 터무니없는 하교까지 있었으니, 이것은 실로 을사년 이후 토역(討逆)한 신하들의 잘못 때문에 군자(君子)의 책망에서 벗어나기 어렵게 된 것이다.
이날 밤 삼고(三鼓)에 임금이 좌의정 김재로(金在魯)·판부사 송인명(宋寅明)·판의금 조현명(趙顯命)·우부승지 홍성보(洪聖輔) 등을 소견(召見)하여 하교하기를,
"유봉휘(柳鳳輝)가 소(疏) 하나를 잘못 바쳐서 신축년095) ·임인년096) 의 일을 빚어 냈고, 목호룡(睦虎龍)이 상변(上變)한 뒤에는 형추(刑推)하여 궁핵(窮覈)해야 워낙 마땅한데 기화(奇貨)로 보고 도리어 장용(奬用)하였고, 그 공초(供招)에 임금을 범하여 부도(不道)한 말이 많이 있었는데 쓰지 말고 지워 없애기를 청하였을 뿐이니, 세제(世弟)를 섬기려는 뜻이 과연 어디에 있었겠는가? 그때의 경황이 위급하여 화를 입은 사람들에게 생각이 미칠 겨를이 없으므로, 저위(儲位)를 간절히 사양한 것은 대개 이 때문이었다. 자성(慈聖)의 조호(調護)와 경묘(景廟)의 우애(友愛)가 아니였다면 내가 어찌 오늘날을 보전할 수 있겠는가? 유봉휘는 당론(黨論)이 심하므로 사람들이 김일경(金一鏡)의 당이라 하나, 정책 대신(定策大臣)이 먼저 보낸 장계가 들어오는 날에 이르러서는 목호룡의 무고(誣告)를 꾸며내어 도강(渡江)하기도 전에 나래(拿來)하였으니, 이것이 어찌할 수 있는 일이겠는가? 이것은 소론(少論)이 제가 그른 줄 알아야 한다."
하였다. 송인명이 말하기를,
"소론도 어찌 그른 줄 모르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소리를 높여 말하기를,
"소론이 어찌 제가 그른 줄 알겠는가? 내가 몇 해 동안 참아 왔으나, 삼수 역안(三手逆案)은 없애려 한 지 오래다. 윤양래(尹陽來)는 질박하고 성실한데도 목호룡과 조태구(趙泰耉)가 일을 같이하였다고 말하였으니, 노론(老論)이 내가 처분한 것을 부족하게 여기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호서(湖西)의 장계(狀啓)가 마침 들어왔는데 곧 이런 거조(擧措)가 있으므로 친히 물으려 하였다. 그러나 존호(尊號)를 올리는 일이 끝난 뒤에는 경들이 나를 보려 하더라도 끝내 마음을 돌리지 않을 것이다."
하였다. 김재로 등이 말하기를,
"유척기(兪拓基)를 정승 벼슬에서 파면한 것은 지나칩니다. 대신을 예우하는 도리가 아니니, 그 명을 도로 거두소서."
하였으나, 임금이 따르지 않았다. 이어서 명하여 전교(傳敎)를 쓰게 하기를,
"면대하여 일렀을 때에도 오히려 시원히 깨닫지 못하고 성(城)을 나간 뒤에는 도리어 당론을 격동하여 일을 만드니, 대신이 이러한데 나머지 당습(黨習)에 빠진 자는 어찌 말한 만하겠는가? 당습이 제 임금보다 중하다는 것을 비로소 알았으니, 신하들은 덕이 없는 임금을 돌보지 말고 각각 스스로 하고 싶은 대로 하라."
하였다.
하교하기를,
"당습(黨習)을 고치지 않고 신하들의 앞장을 선 자는 이태중(李台重)이니 갑산부(甲山府)에 귀양보내고, 권적(權𥛚)·이성룡(李聖龍)은 그 벼슬을 삭탈하라."
하였다. 승지(承旨) 홍용조(洪龍祚)는 유척기(兪拓基)의 정승 벼슬을 파면하라는 명을 작환(繳還)097) 하였다 하여 또한 그 벼슬을 체차하였다.
5월 20일 기미
헌납 서명신(徐命臣)·수찬 윤득경(尹得敬)이 상소하여 대신(大臣)의 정승 벼슬을 파면하고 삼사(三司)를 삭직(削職)·파직(罷職)하고 이태중(李台重)을 투비(投畀)하라는 명을 도로 거두기를 청하였으나, 그 글을 도로 주고 살피지 않았다.
5월 21일 경신
임금이 모든 공사(公事)를 정원(政院)에 머물러 두고 입계(入啓)하지 말라고 명하였다. 그래서 승지들이 명을 도로 거두기를 청하려고 청대(請對)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판부사 김흥경(金興慶) 등이 경재(卿宰)와 함께 빈청(賓廳)에 모여 진대(進對)를 계청(啓請)하였으나, 또한 윤허하지 않았다. 이튿날 또 빈청에서 계청하였으나, 임금이 끝내 윤허하지 않았다.
남태량(南泰良)을 승지로, 윤양래(尹陽來)를 대사헌으로, 이주진(李周鎭)을 대사간으로, 이석표(李錫杓)를 집의로, 허석(許錫)·권해(權賅)를 장령으로, 박치문(朴致文)·이성중(李成中)을 지평으로, 이규채(李奎采)·김시찬(金時粲)을 정언으로 삼았다.
5월 23일 임술
임금이 인정문(仁政門)에서 호서(湖四)의 죄인 박동준(朴東俊)을 친국(親鞫)하였다. 대신(大臣)이 앞에 나아가 문후(問候)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어찌하여 반드시 문후해야 하는가? 합문(閤門)을 닫고 찬선(饌膳)을 물리친 뒤에도 당습(黨習)이 갈수록 더욱 심하니, 날로 어떠한 임금으로 여기기에 신하들이 감히 이렇게 하는가?"
하였다. 판부사 송인명(宋寅明)이 말하기를,
"먼저 성심(聖心)을 진정하고 죄가 있는 자를 죄주셔야 할 따름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신축년098) 과 을사년099) 에 모두 두 당(黨)의 침뇌(侵惱)를 당하였거니와, 귀양 보내려 하면 조정(朝廷)에 사람이 거의 없어질 것이다."
하였다. 정언 김시찬(金時粲)이 나아가 말하기를,
"전하께서는 화평한 마음으로 시비를 살펴보아 당론(黨論)에 관례된 자를 죄주시는 것이 옳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김시찬은 당론이 준열한 자인데, 어찌하여 감히 말하는가?"
하고, 이어서 먼저 벼슬을 체차하고 흑산도(黑山島)에 위리 안치(圍籬安置)하라고 명하였다. 좌의정 김재로(金在魯)가 말하기를,
"김시찬의 시비에 관한 말은 우연히 나온 것이고 마음을 둔 말이 아니니, 처분이 너무 지나치신 듯합니다."
하니, 임금이 소리를 높여 말하기를,
"김시찬의 일을 경은 다시 말하지 말라."
하였다. 이어서 박동준에게 묻기를,
"이 일은 네가 혼자서 처리한 것이 아니다. 누가 과연 시켰는가?"
하자, 박동준이 공초(供招)하기를,
"신은 이광좌(李光佐)의 집에 드나들었는데 본디 미워하고 원망할 것이 없었고, 산지(山地)를 구하는 행차에 따라가서 왕자맥(王字脈)에 관한 말을 얻어들었습니다. 그 산주(山主) 박계순(朴桂純)이라는 자는 신의 육촌 매부인데 신을 시켜 고하게 하였습니다. 서울에 들어와서는 허석(許錫)을 만나서 물었으니 말렸습니다. 신이 와서 고한 데에는 따로 시킨 자가 없습니다."
하였다. 한 차례 형신(刑訊)하였으나 공초는 전과 같았는데, 더 형신하라고 명하였다. 이튿날 또다시 물었는데 또한 달리 숨기는 정상은 없었고 무고(誣告)라고 자복(自服)하니, 왕부(王府)에 명하여 국문(鞫聞)하되 형장(刑杖)을 맞다가 죽을 때까지 형신하라고 명하고, 허석과 충청 감사 김성운(金聖運)의 벼슬을 삭탈하였다.
5월 24일 계해
시임(時任)·원임(原任) 대신(大臣)들이 여러 번 아뢰어 감히 들을 수 없는 하교를 도로 거두기를 청하였으나, 임금이 끝내 윤허하지 않으매, 함께 돈화문(敦化門) 밖에서 대명(待命)하니, 임금이 들어오라고 명하였다. 그래서 대신들이 다 명을 따랐다.
5월 25일 갑자
임금이 또 대신(大臣)에게 봉서(封書)를 내려 말하기를,
"효묘(孝廟)의 지극한 덕과 큰 사업은 만세에 길이 빛날 것이다. 휘호(徽號)에 관한 일은 이미 구례(舊例)가 있거니와, 이번에 추상(追上)하는 것은 또한 영고(寧考)100) 와 현묘(顯廟)의 지극한 효성을 계술(繼述)하는 것이다. 이 일을 이미 자성(慈聖)께 아뢰었다. 예관(禮官)을 시켜 곧 거행하게 하라."
하였다. 이때 임금이 무옥(誣獄)을 반안(反案)하는 일 때문에 점점 몹시 괴로워져서 태상왕(太上王)이 되겠다는 분부까지 있었고, 뭇 신하를 물리치고 만나지 않았으나, 종묘(宗廟)의 예(禮)가 중하기 때문에 이 분부를 내렸다.
판부사 송인명(宋寅明)을 특배(特拜)하여 우의정으로 삼았다.
임금이 석위(釋位)101) 한다는 분부를 내렸다가 곧 도로 거두었다. 이때 임금이 숙묘(肅廟)의 진전(眞殿) 문밖에 가서 남무(南廡) 아래에 자리 하나를 깔고 북으로 향하여 차가운 데에 엎드렸는데, 큰 비가 바야흐로 쏟아져 임금이 진흙탕 가운데에서 어의(御衣)가 죄다 젖었다. 도승지 신만(申晩)에게 명하여 입시(入侍)하게 하자 신만이 달려 들어갔는데, 임금이 바야흐로 부복(俯伏)하여 눈물을 흘리므로 신만이 소리내어 울며 나아가 말하기를,
"전하께서는 어찌하여 차마 이런 일을 하십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내가 시상(時象)을 조제(調劑)하지 못하므로 성고(聖考)께 하직하고 물러가 짐을 벗어 원량(元良)에게 맡기기로 뜻을 결정하였다."
하였다. 신만이 소리내어 울어 마지않으며 주서(注書) 안치택(安致宅)을 불러 말하기를,
"대신(大臣)을 급히 불러오라."
하니, 안치택이 나가서 대신에게 고하였다. 그래서 시임(時任)·원임(原任) 대신들과 경재(卿宰)·승지·삼사(三司)의 신하들이 한꺼번에 달려 들어가 호위하고 소리를 같이하여 말하기를,
"이것이 무슨 일입니까? 편안히 앉아서 하교하시기 바랍니다."
하였으나, 임금이 응하지 않았다. 여러번 이러다가 병조 판서 조현명(趙顯命)이 큰 소리로 말하기를,
"오늘 종사(宗社)가 망하는데, 대신은 어찌하여 동조(東朝)께 청대(請對)하여 이 정상을 고하지 않습니까?"
하였다. 그래서 좌의정 김재로(金在魯)가 급히 중관(中官)을 불러 동조에게 청대하였다. 이때 뭇 신하가 둘러서서 소리내어 울고 임금도 눈물을 흘리다가 이윽고 임금이 일어서 걸어 나가므로, 대신 이하가 부축하고 호위하여 따랐다. 임금이 처마밑 툇마루에 이르러 또 북으로 향하여 부복하므로, 신하들이 소리를 같이하여 말하기를,
"이것은 다 신들의 죄이니, 엄한 주벌(誅罰)을 받겠습니다."
하고, 송인명 등이 말하기를,
"이러하여도 참으로 느끼지 못하고 다시 당론(黨論)을 하는 자는, 청컨대 중률(重律)로 논하소서."
하고, 대제학 오원(吳瑗)도 말하기를,
"당을 만드는 자는 역률(逆律)로 논해야 하겠습니다."
하였으나, 임금이 답하지 않았다. 호조 판서 이병상(李秉常)이 말하기를,
"전하께서는 어찌하여 반드시 이렇게 스스로 괴로워하셔야 합니까? 빨리 법전(法殿)102) 으로 돌아가 치도(治道)를 강구하셔야 하겠습니다."
하였는데, 이윽고 동조가 임금에게 수찰(手札)을 내려 이르기를,
"삼종(三宗)의 혈통이 어디에 있기에 여섯 살인 원량이 있는 것을 믿고 이런 일을 하시오?"
하니, 임금이 일어섰다가 다시 꿇었앉아 받들어 읽고 나서 대답하기를,
"신이 불초하기가 이를 데 없어 신하들을 조제(調劑)하지 못한 것이 이석효(李錫孝)·양찬규(梁纘揆)에 이르러 극진하였습니다. 여섯 살인 원량에게 부탁하기가 지극히 어려운 줄 어찌 모르겠습니까마는, 세도(世道)가 어찌 할 수 없는 것을 돌이켜 생각하여 성고(聖考)께 배사(拜辭)하고 깊은 궁중에 고요히 있기로 뜻을 결정하였는데, 자교(慈敎)가 여기게 미쳤으니, 감히 따르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하고, 이어서 짐을 풀겠다는 명을 도로 거두라고 명하였다. 조현명이 양손으로 어축(御軸)을 받들고 천세(千歲)를 세 번 부르니, 윤양래(尹陽來)·정우량(鄭羽良)이 또 계속하였다. 신하들이 울며 청할 때에 윤양래가 말하기를,
"이 뒤에 신하들이 어찌 차마 당론을 하겠습니까?"
하고, 이어서 패려(悖戾)한 말로 스스로 맹세하였으므로 사람들이 다 놀랐다.
임금이 대신(大臣)에게 말하기를,
"경들이 동조(東朝)께 청대(請對)한 것은 어쩔 줄 모르는 때인 까닭에서 나왔더라도, 그 사체(事禮)는 어떠한가?"
하니, 김재로(金在魯) 등이 말하기를,
"대명(待命)해야 하겠습니다."
하고, 곧 물러가 대명하니, 임금이 다시 소견(召見)하였다. 김재로·송인명(宋寅明) 등이 방명(邦命)을 다시 정한 것은 중흥(中興)의 조짐이라 하여 진하(陳賀)하기를 청하니, 임금이 웃으며 말하기를,
"이것이 무슨 경사이기에 축하할 만하겠는가?"
하였다. 김재로 등이 말하기를,
"날을 가려 진하하고 고묘(告廟)하고 반사(頒赦)하는 일을 어찌 그만 둘 수 있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즉일에 길일(吉日)을 가리는 것도 전례는 있으나, 오늘의 일은 내가 좋아서 한 일이 아닌데 어찌하여 반드시 축하해야 하겠는가?"
하였다. 신하들이 소리를 같이하여 힘껏 청하였으나, 임금은 오히려 윤허하지 않았다. 신하들이 또 번갈아 아뢰기를,
"이것은 그만둘 수 없는 천리(天理)이니, 전하께는 따르지 않으시면 빈계(賓啓)103) 해야 할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진하를 받는 것은 당초에 생각한 것이 아니나, 경들이 빈계를 낼 것이라는 말을 들으니 더욱 크게 벌일세라 염려되므로 우선 애써 따르겠다."
하고, 이어서 날을 잡지 말고 고묘하라고 명하고, 또 이튿날 친정(親政)할 것을 명하고 말하기를,
"인묘(仁廟)께서 반정(反正)한 뒤에는 서궁(西宮)에서 친정하셨으니, 이제 이를 이어서 하겠다."
하고, 또 20일 이후에 내린 지나친 분부는 모두 도로 거두라고 명하였다.
5월 26일 을축
임금이 친정(親政)을 행하였다. 이조 판서 민응수(閔應洙)·병조 판서 조현명(趙顯命)이 입시(入侍)하여 개정(開廷)하였는데, 임금이 이판(吏判)·병판(兵判)에게 명하여 앞에 나오게 하여 말하기를,
"오늘의 친정은 계해년104) 에 반정(反正)한 뒤의 고례(古例)이니, 공정하도록 힘써야 한다."
하니, 민응수 등이 대답하기를,
"감히 명대로 따르지 않겠습니까?"
하였다. 이미 정사(政事)를 행하였는데, 끝나기 전에 예조(禮曹)에서 영의정 이광좌(李光佐)의 상(喪) 때문에 조시(朝市)를 멈추기를 청하니, 임금이 놀라고 슬퍼하며 말하기를,
"영상(領相)이 나라를 위하여 고심한 것은 내가 깊이 아는 바이다. 시기하여 배척하는 일을 여러 번 당하여 뜻을 펴지 못하였거니와 그가 행공(行公)한 것은 나라의 일이 어지러웠던 때이고 그가 임용된 것은 찬선(饌膳)을 물리치고 합문(閤門)을 닫았던 때에 지나지 않았는데, 이제는 끝났다. 구재(柩材)를 가려 보내고 월봉(月俸)은 3년 동안 그대로 주고 예장(禮葬) 들의 일은 규례에 따라 거행하게 하라."
하였다.
사신은 말한다. "이광좌는 숙묘(肅廟) 병신년105) 의 처분 이후로 분노하고 원망하여 벼슬하지 않았다. 경묘(景廟)신축년106) 에 비로소 나와 벼슬하게 되어서는 김일경(金一鏡)·목호룡(睦虎龍)을 워낙 나라 사람들이 함께 분하게 여기는 바인데도 징토(懲討)하지 않고 도리어 장려하여 임용하였다. 경묘가 편찮아 대점(大漸)하게 되어서는 의약청(議藥廳)을 설치하지 않아서 무신년107) 의 흉언(凶言)을 만들었다. 정미년108) 에 다시 들어와 정승이 되어서는 연차(聯箚)를 반역이라 하여 사신(四臣)109) 을 역안(逆案)에 두었고, 이명언(李明彦)을 무죄라 하여 용서하여 임용하기를 힘껏 청하였으며, 이사성(李思晟)을 병사(兵使)로 삼고 권익관(權益寬)을 북백(北伯)으로 삼고 정사효(鄭思孝)를 호남백(湖南伯)으로 삼았다. 심유현(沈維賢)·이유익(李有翼)·홍계일(洪啓一) 등과 같은 역적들도 다 그 문인(門人)이었다. 그러므로 사람들이 다 이광좌를 역적의 우두머리로 여긴다. 이때에 이르러 삼사(三司)에서 합사(合辭)하여 토죄(討罪)하였는데, 이광좌가 갑자기 죽었다. 을해년110) 에 이르러 마침내 그 관작(官爵)을 추탈(追奪)하였다."
【태백산사고본】 37책 51권 27장 A면【국편영인본】 42책 664면
【분류】왕실-국왕(國王) / 왕실-사급(賜給) / 상업-시장(市場) / 정론-간쟁(諫諍) / 인물(人物) / 역사-사학(史學) / 변란(變亂) / 사법(司法)
[註 104] 계해년 : 1623 인조 원년.[註 105] 숙묘(肅廟) 병신년 : 1716 숙종 42년.[註 106] 신축년 : 1721 경종 원년.[註 107] 무신년 : 1728 영조 4년.[註 108] 정미년 : 1727 영조 3년.[註 109] 사신(四臣) : 경종 원년(1721)에 세제(世第)의 책봉을 주장했던 노론(老論)의 네 대신. 곧 김창집(金昌集)·이이명(李頣命)·이건명(李建命)·조태채(趙泰采).[註 110] 을해년 : 1755 영조 31년.
사신은 말한다. "이광좌는 숙묘(肅廟) 병신년105) 의 처분 이후로 분노하고 원망하여 벼슬하지 않았다. 경묘(景廟)신축년106) 에 비로소 나와 벼슬하게 되어서는 김일경(金一鏡)·목호룡(睦虎龍)을 워낙 나라 사람들이 함께 분하게 여기는 바인데도 징토(懲討)하지 않고 도리어 장려하여 임용하였다. 경묘가 편찮아 대점(大漸)하게 되어서는 의약청(議藥廳)을 설치하지 않아서 무신년107) 의 흉언(凶言)을 만들었다. 정미년108) 에 다시 들어와 정승이 되어서는 연차(聯箚)를 반역이라 하여 사신(四臣)109) 을 역안(逆案)에 두었고, 이명언(李明彦)을 무죄라 하여 용서하여 임용하기를 힘껏 청하였으며, 이사성(李思晟)을 병사(兵使)로 삼고 권익관(權益寬)을 북백(北伯)으로 삼고 정사효(鄭思孝)를 호남백(湖南伯)으로 삼았다. 심유현(沈維賢)·이유익(李有翼)·홍계일(洪啓一) 등과 같은 역적들도 다 그 문인(門人)이었다. 그러므로 사람들이 다 이광좌를 역적의 우두머리로 여긴다. 이때에 이르러 삼사(三司)에서 합사(合辭)하여 토죄(討罪)하였는데, 이광좌가 갑자기 죽었다. 을해년110) 에 이르러 마침내 그 관작(官爵)을 추탈(追奪)하였다."
진사(進仕) 이성술(李聖述)의 이름을 유적(儒籍)에서 삭제하였다. 당초에 태학 장의(太學掌議)가 유안(儒案) 가운데에서 역적 이진유(李眞儒)·윤성시(尹聖時) 등의 성명을 먹[墨]으로 삭제하였는데, 그 뒤에 이성술이라는 자가 장의가 되어 그 묵삭(墨削)을 해면(解免)하였고, 또 사학(四學)의 유안(儒案) 가운데에서 무신년111) 의 역적 박필현(朴弼顯)·박사관(朴師寬)·임상극(林象極) 등의 성명도 묵삭하였는데 그 뒤에 다시 해묵(解墨)한 자가 있었으나 그것이 누구인지 몰랐다. 형조 판서 이기진(李箕鎭)이 아뢴 바에 따라 지성균(知成均) 오원(吳瑗)에게 명하여 살피게 하였는데, 이성술의 이름만을 삭제하고 그 나머지는 문책하지 않았다. 을해년112) 에 이르러 이성술은 역적 으로 주벌(誅罰)되었다.
종실(宗室) 밀창군(密昌君) 이직(李樴)이 종신(宗臣)들을 거느리고 존호(尊號)를 올리기를 청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이직 등이 함께 청대(請對)하니, 임금이 소견(召見)하였다. 이직 등이 아뢰기를,
"우리 전하의 많은 공과 큰 덕은 찬양하기에 합당합니다. 이제 신들이 청하는 것은 실로 온 나라 안의 같은 뜻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경들의 말을 들으니, 내 마음이 매우 부끄럽다."
하였다.
이제담(李齊聃)·권상일(權相一)을 장령으로, 조영국(趙榮國)을 공홍도 관찰사(公洪道觀察使)로, 허옥(許沃)을 집의로, 심성희(沈聖希)를 대사성으로, 정우량(鄭羽良)을 부제학으로, 이덕수(李德壽)를 좌참찬으로 삼았다.
5월 28일 정묘
시임(時任)·원임(原任)인 대신(大臣)과 정부 서벽(政府西壁)113) 과 관각(館閣)의 당상(堂上)과 육조의 참판(參判)이 빈청(賓廳)에 모여 효종 대왕(孝宗大王)의 가상 존호(加上遵號)를 명의 정덕(名義正德)이라 하기로 의논하고, 좌의정 김재로(金在魯)·우의정 송인명(宋寅明)이 청대하니, 임금이 소견하였다. 김재로가 말하기를,
"신들은 존호를 의논하는 일 때문에 청대하였습니다. 효묘(孝廟)께서 선정(先正)과 힘써 종사하여 꾀하신 것은 한결같이 천리(天理)를 밝히고 인심을 바루는 것을 주로 하셨는데, 명의는 곧 천리를 밝히는 것이고 정덕은 곧 인심을 바루는 것이니, 이것은 성조(聖祖)께서 일생 동안 뜻하신 일이므로 이것으로 의정(議定)하였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내 뜻도 의(義)라는 한 자에 있었는데, 이제 과연 그렇다."
하고, 이어서 하교하기를,
"이 일은 오로지 대의(大義)를 위한 것이니, 의호 단자(議號單子) 및 축문(祝文)과 옥책문(玉冊文)에는 모두 청국(淸國)의 연호(年號)를 쓰지 말게 하라."
하였다. 김재로·송인명 등이 말하기를,
"어제 종신(宗臣)이 청한 것은 온 나라 안의 공론입니다. 선조(先朝)에서 이미 행한 전례가 있거니와, 우리 전하의 큰 공과 큰 것은 더욱이 찬양해야 마땅하니, 온 나라 사람의 청을 따르시기 바랍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경들은 종신이 청한 것을 그르게 여기지 않고 도리어 이런 청을 하는가? 내가 매우 부끄럽다."
하였다. 김재로 등이 또 반복하여 힘껏 청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사신은 말한다. "존호라는 것은 말세의 아첨하는 일이다. 이제 대신이 속으로는 임금에게 아첨하려 하면서 겉으로는 나라 사람들에게 스스로 엄폐하려고 ‘종신이 이미 말을 냈으니 신은 말없이 있을 수 없습니다.’ 하였다. 아! 일이 할 만한 것이라면 대신이 곧바로 청할 수 있고, 종신이 말하기를 기다릴 것 없을 것이다. 할 만하지 못한 것이라면 종신이 청한 것은 경망한 것일 뿐이니, 또한 어찌 따라서 청할 만하겠는가? 또 이 일은 임금의 지나친 거조(擧措)가 있었던 이튿날에 있었으니, 이것이 더욱이 어찌 대신이 도리로 임금을 섬기는 의리이겠는가?"
【태백산사고본】 37책 51권 27장 B면【국편영인본】 42책 664면
【분류】왕실-종사(宗社) / 왕실-국왕(國王) / 왕실-종친(宗親) / 역사-사학(史學)
[註 113] 정부 서벽(政府西壁) : 서벽(西璧)은 회좌(會座)할 때 좌석의 서쪽에 앉은 벼슬. 《중종실록(中宗實錄)》 제 24권에 보면, 정부의 동벽(東璧)은 좌우 찬성(左右贊成)이고, 서벽(西璧)은 좌우 참판(左右參贊)이라 하였음.
사신은 말한다. "존호라는 것은 말세의 아첨하는 일이다. 이제 대신이 속으로는 임금에게 아첨하려 하면서 겉으로는 나라 사람들에게 스스로 엄폐하려고 ‘종신이 이미 말을 냈으니 신은 말없이 있을 수 없습니다.’ 하였다. 아! 일이 할 만한 것이라면 대신이 곧바로 청할 수 있고, 종신이 말하기를 기다릴 것 없을 것이다. 할 만하지 못한 것이라면 종신이 청한 것은 경망한 것일 뿐이니, 또한 어찌 따라서 청할 만하겠는가? 또 이 일은 임금의 지나친 거조(擧措)가 있었던 이튿날에 있었으니, 이것이 더욱이 어찌 대신이 도리로 임금을 섬기는 의리이겠는가?"
5월 29일 무진
정우량(鄭羽良)을 대사헌으로, 원경하(元景夏)·신사건(申思建)을 교리로, 남태제(南泰齊)·이성중(李成中)을 수찬으로, 윤심형(尹心衡)을 응교로, 이성효(李性孝)를 부교리로, 홍득후(洪得厚)를 장령으로, 이이장(李彝章)을 지평으로, 조중직(趙重稷)을 정언으로, 이기진(李箕鎭)을 형조 판서로, 신사철(申思喆)을 공조 판서로, 이명상(李命祥)을 공홍 수사(公洪水使)로 이수신(李守身)을 경상 좌수사(慶尙左水使)로, 민창기(閔昌基)를 황해 수사(黃海水使)로, 김흥경(金興慶)을 가상 시호도감 도제조(加上諡號都監都提調)로, 조현명(趙顯命)·이병상(李秉常)·조관빈(趙觀彬)을 부제조로, 윤심형(尹心衡)·이석표(李錫杓)를 도청으로 삼았다.
장령(掌令) 이제담(李齊聃)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전하께서는 근일에 하신 일은 오로지 여러 해 동안 고심하신 데에서 나온 것이나, 마침내 지나치신 거조(擧措)임을 면할 수 없습니다. 오늘날의 정신(廷臣)이 누구인들 전하의 신하가 아니겠으며 그 할아비와 그 아버지도 누구인들 선조(先朝)에서 충근(忠勤)한 자가 아니었겠습니까? 혹 당습(黨習)에 병들고 견문(見聞)에 빠져서 전하의 표준에 맞지 않고 전하의 마음에 맞지 않는 자라도 전하께서는 또 낯빛을 부드럽게 하여 혹 칭찬하기도 하고 누르기도 하여 조용한 대화(大化)의 지경에 이르도록 힘쓰셔야 할 것이고, 교화하여 편달하는 일에 있어서도 오직 전하께 달려 있을 따름인데, 어찌 성신(聖神)을 힘들이고 성색(聖色)을 크게 하여 스스로 성체(聖禮)를 손상하고 도리어 위덕(威德)을 손상하기까지 하셔야 하겠습니까? 신이 매우 근심하는 것은 시상(時象)의 병폐가 미처 다스려지기 전에 성체의 화평이 이미 먼저 병통을 받으실세라 염려되는 것입니다."
하였는데, 임금이 우악한 비답(批答)을 내렸다.
임금이 태묘(太廟)에서 친히 향축(香祝)을 전하고, 약원 도제조(藥院都提調) 김재로(金在魯)에게 묻기를,
"축문식(祝文式)은 대왕(大王)의 능(陵)에는 사왕 신(嗣王臣)이라 쓰고, 왕후(王后)의 능에는 국왕 신(國王臣)이라 쓰고, 또 인종실(仁宗室)에는 효질손(孝姪孫)이라 쓰는데, 이미 질이라 칭하고 또 손이라 칭하는 것은 또한 이상하지 않은가?"
하니, 김재로가 말하기를,
"예문(禮文)에 효질손(孝姪孫)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하고, 이어서 각실(各室)의 축문식을 상고하여 바로잡기를 청하니, 임금이 윤허하였다.
5월 30일 기사
임금이 인정전(仁政殿)에 나아가 진하(陳賀)를 받고 이어서 교문(敎文)을 반포하고 사령(赦令)을 반포하였는데, 대신(大臣)이 백관(百官)을 거느리고 전문(箋文)을 올리기를 의식대로 하였다. 예(禮)를 마치니 임금은 대내(大內)로 돌아가고 대비전(大妃殿)과 세자궁(世子宮)에서 진하하였다. 교문(敎文)에 이르기를,
"왕은 말하노라. 간사한 붕당이 깨지지 않은 것을 통탄하여 이미 짐을 벗을 마음을 굳혔으나, 매우 슬퍼하시는 자교(慈敎)를 받았으므로 명을 도고 거두는 명을 내리고, 다시 신민에 대하여 교명(敎命)를 편다. 생각하면 내가 덕이 없고 혹 어리석은 자질로 크게 근심스러운 때를 당하니, 열조(列祖)의 큰 기업(基業)을 혹 유기(遺棄)하게 될세라 염려하여 임금의 정사(政事)를 아침부터 밤까지 게을리 할 겨를이 없고, 국가를 보전할 도리를 깊이 생각하여 오직 붕당(朋黨)을 없애는 것을 선무(先務)로 삼았다. 황극(皇極)의 가르침을 지키려고 생각하여도 16년 동안 고심(苦心)이 심하였을 뿐이고, 하북(河北)의 역적을 제거하기는 쉬었어도 2백년 동안의 고질(痼疾)은 고치기 어려우니, 대개 사기(事機)는 여러번 지나가 버리고 신하들은 뉘우치지 못하기 때문이다. 합문(閤門)을 닫고 찬선(饌膳)을 물리친 일을 예전에 어찌 들은 바가 있으랴마는 파벌을 가르는 일을 끝내 그칠 줄 모르니, 한번 혹 말세의 버릇이 어지러워지면 우리 나라가 거꾸러져 떨어질 것을 어찌할 것인가? 오직 간난(艱難)과 험조(險阻)를 갖추 맛볼 뿐이니 임금 노릇에 즐거움이 없고, 도리어 훈고(訓誥)와 교회(敎誨)를 듣지 않으니 나에게 부끄러움이 많다. 그래서 마음을 열어 뭇 신하에게 말하고 뜻을 정하여 임금 자리를 벗어나려고, 모든 군국(軍國)의 기무(機務)는 품재(稟裁)를 죄다 멈추고 경사(卿士)와 종척(宗戚)의 호소도 받아들이지 않았다. 종묘(宗廟)의 부탁이 지극히 중대한데 어찌 감히 스스로 가벼이 여기랴마는, 세도(世道)를 돌이킬 기약이 없어서 참으로 마지못한 것이다. 진전(眞殿)을 바라보며 명을 내리시기를 청하고 내 마음을 어루만지며 자신을 책망하는데, 갑자기 문모(文母)의 간절하신 가르침을 받자오니 실로 소자(小子)의 마음이 근심스러운 것을 깨달았다.
삼종(三宗)의 혈통은 작은 나 한 사람뿐인데, 여섯 살인 원량(元良)에게 어찌 차마 이 큰 책임을 맡길 수 있겠는가? 드디어 다시 임금의 자리에 나아가고, 감히 동조(東朝)께 근심을 끼치지 못하였다. 비가 활짝 개어 천심(天心)은 태평으로 돌아가는 상(象)을 보이고, 신인(神人)이 기뻐하여 국명(國命)은 그지없을 것을 기대한다. 순(舜)임금의 조정(朝廷)은 협심하고 공경하였거니와 다들 당습(黨習)을 고치겠다고 말하니, 기자(箕子)의 홍범(洪範)은 복을 내렸으니, 왕자(王者)의 정도(政道)를 준행(遵行)할 수 있을 것이다. 뭇사람의 청에 몰려 하의(賀儀)를 행한 것은 당초의 뜻에 부끄러우나 정성들여 제사 지내어 태실(太室)에 고하고 이어서 사방에 고하였으니, 장차 바야흐로 올 새로운 복을 맞이할 것인데 은택을 사방에 널리 베풀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이달 30일 이전의 사죄(死罪) 이하의 잡범(雜犯)을 모두 사유(赦宥)하고 관직에 있는 자는 각각 한 자급(資級)을 올리되 자궁(資窮)한 자는 대가(代加)한다. 아! 때는 바로 만물이 움직이고 윤택할 즈음이니 만물이 각각 그 번창(蕃昌)을 이룬다. 징계되는 생각이 바야흐로 새로워지니 인정의 감발(感發)을 볼 수 있고, 안정과 우환의 기미가 여기에 달려 있으니 두려워하고 삼가는 내 마음이 절실하다. 그러므로 교시(敎示)하니, 잘 알아야 할 것이다."
하였다. 【대제학(大提學) 오원(吳瑗)이 지어 바쳤다.】
【태백산사고본】 37책 51권 28장 B면【국편영인본】 42책 664면
【분류】왕실-의식(儀式) / 왕실-종사(宗社) / 정론-간쟁(諫諍) / 사법-행형(行刑) / 어문학(語文學) / 인사-관리(管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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