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 1일 경오
좌의정 김재로(金在魯)가 아뢰기를,
"태묘(太廟)의 축식(祝式)을 살펴보니, 전전(前殿)의 태조(太祖) 이하 각실(各室)에는 대왕위(太王位)는 모조 모종 모시 대왕(某祖某宗某諡大王)이라고만 쓰고, 왕후위(王后位)는 조비 모시 왕후(祖妣某諡王后)라 쓰고, 또 모두 효증손 사왕 신모(孝曾孫嗣王臣某)라고 썼는데, 사대 친묘(四代親廟)로 말하면 대왕의 묘호(朝號)·시호(諡號) 위에 황고조고(皇高祖考)·황고조비(皇高祖妣)·황증조비(皇曾祖妣)·황조비(皇祖妣)·황비(皇考)라고 썼으며, 효증손·효손·효자라고 칭하는 것도 세대에 따라서 바꾸어 썼습니다. 그러나 효질(孝姪)이라고 칭하는 세대는 황백고(皇伯考)·황백비(皇伯䃾)라고 써야 할 듯하고 효질손(考姪孫)이라고 칭하는 세대는 황백고조(皇伯高考)·황백조비(皇伯祖妣)라고 써야 할 듯합니다. 그러나 예종 때에 쓴 문종실(文宗室)의 축식과 선조 때에 쓴 인종실(仁宗室)의 축식에는 반드시 초년(初年)에 강정(講定)하여 이미 행한 전례가 있을 것이니, 앞으로 사관(史官)이 포쇄(曝曬)114) 하러 갈 때에 실록(實錄)에서 살펴 내게 하여 바로잡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윤허하였다. 김재로가 말하기를,
"후전(後殿)은 사조실(四祖室)의 축식이 모두 전전의 태조실 이하의 축식과 같은데 정종실(定宗室)부터 예종실(睿宗室)까지는 대왕위·왕후위에 묘호·시호만을 쓰고 ‘조비(祖妣)’ 두 자를 쓰지 않았고, 또한 효증손이라고 쓰지 않고 사왕신이라고만 썼으니, 전전과 사조실에 비하여 조금 융쇄(隆殺)를 두는 뜻에서 나온 것인 듯합니다. 덕종실(德宗室)에만 국왕 신(國王臣)이라고 쓴 데에도 반드시 뜻이 있으리라는 것은 참으로 성교(聖敎)와 같습니다마는, 인종실(仁宗室)·명종실(明宗室)·원종실(元宗室)의 조위(祧位)는 한가지인데, 이것은 왕후위에 조비라고 쓰고 또 효증질손(孝曾姪孫)·효증손(考曾孫)이라고 썼으니, 아마도 새로 조천(祧遷)할 때에 다른 각실과 서로 다르다는 것을 살피지 못하고 전의 축사(祝辭)대로 하기만 하였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제 한 가지 예(例)로 바로잡으려면 인종 이하의 세 실(室)의 ‘조비’ 두 자와 효증질손·효증손이라는 속칭(屬稱)을 다 없애야 하겠습니다마는, 사조실에 이미 효증손이라는 속칭을 썼으니 이하에 모두 속칭을 서도 무방하겠습니다. 또 덕종실은 국왕 신이라고만 칭하고 또 ‘조비’ 두 자가 없으니 자손이 선조를 제사하는 의리가 조금도 없습니다. 이 때문에 정종 이하의 각실에도 다 효증손이라고 쓴다면 덕종실에도 효증손 국왕 신이라고 쓰는 것이 정례(情禮)에 있어서 온당할 듯합니다. 다만 인종실의 예에 따른다면 정종실·문종실·단종실(端宗室)에도 다 효증질손이라고 칭해야 하겠고, 덕종실은 국가에 대하여 이미 방친(旁親)이 아니거니와 장적(長嫡)인 세자(世子)로서 추숭(追宗)되셨으므로 질손(姪孫)이라 칭할 수 없으나, 성묘(成廟)께서 예묘(睿廟)에 들어가 이으신 뒤이니 또한 예묘를 방친이라 할 수 없습니다. 덕종·예종 두 실의 축식에는 모두 효증손이라 칭해야 할 듯합니다. 예(禮)를 아는 신하에게 널리 물으셔야 하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모든 일에는 융쇄가 있으니, 조천한 뒤에 효증손이라고 쓰지 않은 데에는 뜻이 있을 듯하다. 후전에 혹 쓰기도 하고 쓰지 않기도 한 것은 널리 묻지 않을 수 없으나, 국왕 신이라고만 칭한 것으로 말하면 대개 승통(承統)한 경우가 아니기 때문일 것이다. 실록에서 살펴 내고 대신(大臣)과 예를 아는 유신(儒臣)에게 다시 물어서 품정(稟定)하도록 하라."
하고, 또 하교하기를,
"이번 거조(擧措)는 절로 부끄럽다. 세 번 사위(辭位)하고 다시 뭇 신하를 대하나 당습(黨習)이 점점 깊어지고 백성이 더욱 괴로워지니, 시작하는 이때에 은혜로운 정사로 백성을 위로하는 것이 곧 하나의 급히 힘쓸 일이다."
하였다. 김재로가 말하기를,
"당습이 어찌 점차 고쳐지지 않겠습니까마는, 백성을 위로하는 방도는 감면하여 은혜를 베푸는 것뿐입니다."
하니, 임금이 올해 대동(大同)115) 의 반을 특별히 줄이라고 명하였다.
판부사(判府事) 유척기(兪拓基)가 죄를 진 신하라고 청하며 상소하고 시골로 내려갔는데, 임금이 예사 비답(批答)을 내리고 굳이 만류하지도 않았다.
6월 2일 신미
좌의정 김재로(金在魯)가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전하의 전에 없던 지나친 거조는 전후에 모두 자주 잘못하였다가 돌아오는 위태로움을 당할 뻔하였으니, 다행히 끝내 허물이 없게 되었더라도 어찌 처음부터 고칠 만한 것이 없는 진선(盡善)한 것만 하겠습니까?"
하였는데, 임금이 우악한 비답을 내렸다.
임금이 정원(政院)에 하교하여, 피차 보안(保安)하고 화합하여 각각 당심(黨心)을 고치라는 뜻으로 뭇 신하에게 칙유(飭諭)하게 하고, 지난 일로 서로 인혐(引嫌)하는 것은 소장(疏章)을 봉입(奉入)하지 말게 하였다.
임금이 석강(夕講)을 행하여 《춘추집전(春秋集傳)》을 강(講)하였다.
6월 3일 임신
임금이 조강(朝講)을 행하였다. 특진관(特進官) 윤양래(尹陽來)가 아뢰기를,
"숙묘(肅廟) 때에 임금과 신하의 복제(服制)를 수의(收議)한 것은 《주례(周禮)》 이후에 처음 있는 일이었는데 아직도 이루어진 서적이 없으니, 박아 내어 반포하게 해야 하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대신(大臣)과 유신(儒臣)에게 물어서 보태어 넣어 《속오례의(續五禮儀)》를 만들도록 하라."
하였다.
헌부(憲府)에서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전라 감사(全羅監司) 권혁(權爀)이 사조(辭朝)하니, 임금이 소견(召見)하였다. 권혁이 밭을 개량(改量)하여 묵정밭은 속전(續田)116) 으로 낮추기를 청하니, 임금이 비국(備局)을 시켜 품처(稟處)하게 하였다.
임금이 대신(大臣)과 비국 당상(備局堂上)을 인견(引見)하고, 특별히 명하여 올해의 전세(田稅)를 모두 감면하게 하고 대동(大同)의 반을 감면하라는 명을 도로 거두었다. 임금이 대동의 반을 감면하는 일을 묻기를,
"혜청(惠廳)에서는 저축이 모자란다 하여 매우 어렵게 여기나, 혜정(惠政)을 시행하려면 어찌 부고(府庫)에 여유가 있기를 기다려서야 비로소 할 수 있는 것이겠는가? 자교(慈敎)를 우러러 받고 뭇 신하를 다시 대하는데, 일찍 베풀지 않으면 다시 어느 때를 기다리겠는가?"
하니, 우의정 송인명(宋寅明)이 대답하기를,
"혜택을 고르게 하려면 전세를 감면하는 것만 못합니다. 또 대동을 감면하면 24만 석(石)이 되고 전세를 감면하면 17만 석이 되니, 또한 다소의 차이가 있습니다."
하고, 좌의정 김재로(金在魯)·병조 판서 조현명(趙顯命)이 말하기를,
"실제의 혜택은 군포(軍布)를 감면하는 것만 못합니다."
하고, 호조 판서 이병상(李秉常) 등이 말하기를,
"전세는 정상 항목으로 바치는 것이므로 모두 감면할 수 없으니, 대동의 반을 감면하는 것만 못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꾀하는 것은 아래에 있으나, 결단하는 것은 위에 달려 있다."
하고, 특별히 명하여 올해의 전세를 모두 감면하게 하였다. 김재로가 고묘(告廟)·반사(頒赦)를 이미 행하였다 하여 증광과(增廣科)를 설행(設行)하기를 청하였으나, 임금이 윤허하지 않았다.
6월 4일 계유
우의정 송인명(宋寅明)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성상께서 표준을 세우는 일에 대하여 이미 위로 조종(祖宗)께 고하고 아래로 백성에게 이르셨으니, 그 자임(自任)하신 것이 중대하기가 전일에 견줄 것이 아닙니다. 사리를 살피면 반드시 더욱 정밀하게 하고 일에 임하면 반드시 더욱 삼가시며, 아랫사람을 꾸짖지만 말고 반드시 먼저 자신을 반성하시며, 입을 막지만 말고 반드시 먼저 마음을 복종시키시며, 거조(擧措)와 형상(刑賞)을 대공 지정(大公至正)하게 하시어 한결같이 천칙(天則)을 따르되 유구(悠久)하게 지속하셔야 마침내 성지(聖志)를 이루실 수 있을 것입니다."
하였는데, 임금이 우악한 비답(批答)을 내렸다.
사신은 말한다. "송인명의 말은 물론 옳으나, 그 이른바 대공 지정이라는 것은 탕평(蕩平)을 뜻하는데도 피차의 당(黨)을 합치고 충역(忠逆)의 분별을 혼동하여 양편을 임용하여 서로 맞먹게 하는 정사(政事)에 불과하였다. 그리고 그는 권세를 잡고 총애를 굳히려는 생각을 부린 것이니, 어떻게 황극(皇極)을 세워 지치(至治)를 이루겠는가?"
【태백산사고본】 37책 51권 30장 B면【국편영인본】 42책 665면
【분류】정론-정론(政論) / 정론-간쟁(諫諍) / 역사-사학(史學)
사신은 말한다. "송인명의 말은 물론 옳으나, 그 이른바 대공 지정이라는 것은 탕평(蕩平)을 뜻하는데도 피차의 당(黨)을 합치고 충역(忠逆)의 분별을 혼동하여 양편을 임용하여 서로 맞먹게 하는 정사(政事)에 불과하였다. 그리고 그는 권세를 잡고 총애를 굳히려는 생각을 부린 것이니, 어떻게 황극(皇極)을 세워 지치(至治)를 이루겠는가?"
임금이 석강(夕講)을 행하였다.
6월 5일 갑술
정기안(鄭基安)을 지평으로, 민통수(閔通洙)를 헌납으로, 윤득경(尹得敬)을 부교리로 삼았다.
임금이 대신(大臣)과 비국 당상(備局堂上)을 인견(引見)하였다. 임금이 우의정 송인명(宋寅明)에게 말하기를,
"경이 전에 규모를 세운다는 말을 하였는데, 이제 다시 상세히 아뢰라."
하니, 송인명이 말하기를,
"국시(國是)를 정하고 공도(公道)를 넓히고 언로(言路)를 여는 세 가지가 그것입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국시는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
하니, 송인명이 말하기를,
"선조(先朝)에서는 혹 사문(斯文)의 일 때문에 신하들을 진퇴(進退)한 일이 있었는데, 이제는 변하지 않는 논의를 정하여 바꾸지 말게 하는 것이 옳겠습니다. 공도를 넓힌다는 것은 우리 나라는 문관(文官)의 수가 많고 관직의 자리가 좁아서 그 당이 아니면 될 수 없거니와 그러므로 예전에 풍릉(豐陵)117) 의 호대(互對)하게 하였다는 말이 이 때문에 나온 것입니다. 언로를 연다는 것은 일을 하고 일을 논할 때에 백관(百官)이 서로 경계하는 길은 열지 않을 수 없으나, 당론(黨論)으로 남을 무함하는 자는 엄히 막아야 하겠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교리 원경하(元景夏)에게 묻자, 원경하가 말하기를,
"공도를 넓히고 언로를 연다는 말은 대신의 말이 옳습니다. 국시를 정하는 것으로 말하면 신에게도 생각하는 것이 있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말하여 보라."
하였다. 원경하가 말하기를,
"신이 접때 문랑(問郞)으로서 처음으로 임인년118) 의 옥안(獄案)을 보았더니, 제목은 삼수 역안(三手逆案)이라 쓰고 문안 가운데에는 맨 먼저 목호룡(睦虎龍)의 흉악한 글과 흉악한 공초(供招)를 썼는데 혹 수십 자 또는 1백여 자를 삭제하고 주를 달기를, ‘말이 부도(不道)를 범하였으므로 삭제하였다.’ 하였습니다. 부도한 말을 이미 삭제하여 인심을 의혹시키고서 또 이렇게 주를 달았으니, 어찌 불측(不測)하지 않겠습니까? 그때 옥사(獄事)를 안치(按治)한 신하들이 목호룡을 엄히 다스리지 않고 곧바로 부도한 말을 써서 흉악한 글과 흉악한 공초를 금석(金石)에 새겨진 글처럼 여겼으니, 이 옥안은 한때라도 천지 사이에 둘 수 없습니다."
"유신(儒臣)의 말이 옳다. 죄다 말하라."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하였다. 원경하가 말하기를,
"김용택(金龍澤)·이천기(李天紀) 등이 불령(不逞)한 무리이기는 하나, 목호룡의 고변(告變) 때문에 거짓으로 승복하고 죽게 된 것은 참으로 억울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유신의 말이 공정하다. 그때 내가 사위(辭位)한 일이 있는데 경묘(景廟)의 지인(至仁)·성덕(盛德)이 아니었으면 내게 어찌 오늘이 있을 수 있겠는가? 사위한 뒤에 목호룡을 형추(刑推)해야 한다고 말하여도 그때 일을 맡은 자가 그렇게 하지 않았으나, 그때 사람들이 어찌 다 나에게 반역할 마음을 가졌겠는가? 김성절(金盛節)·조흡(趙洽) 등은 참으로 변변치 못하나 그 마음을 캐어 보면 형벌을 견디지 못하여 거짓 승복하였을 것이니, 또한 잔인하다."
하였다. 원경하가 드디어 무안(誣案)을 신설(伸雪)해야 하는 의리를 아뢰었는데, 송인명이 망설이고 막는 뜻이 있으므로, 원경하가 배척하여 말하기를, ‘대신이 춘방(春坊)이었을 때에 이필(李泌)의 일119) 을 가지고 조태구(趙泰耉)를 꾸짖은 것은 보호(保護)한 공이 있다 하겠으나, 정미년120) 의 반안 때에 마음껏 다하지 못한 것은 그르다.’ 하니, 송인명이 사과하여 말하기를, ‘원경하의 말이 옳다.’ 하였다. 임금이 다시 조현명(趙顯命)에게 묻자, 조현명이 말하기를,
"요사한 무리가 깊은 밤에 밀실(密室)에서 은(銀)을 모으고 모의하였으면 무슨 짓인들 하지 않겠습니까마는, 목호룡에게 고발된 것은 임금을 핍박하는 말이 많이 있었으니, 경묘의 역신(逆臣)이 아니면 전하의 역신입니다."
하고, 원경하가 말하기를,
"이들은 목호룡의 흉악한 공초 때문에 죽었는데, 어찌 반역으로 단정할 수 있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유신과 풍원(豐原)121) 이 아뢴 것도 오히려 말단의 일이다. 그때 빚어 낸 말이 누구를 위한 것인가? 김용택 등을 역적으로 여긴다면 이른바 추대한다고 한 것은 누구인가? 서덕수(徐德修)가 이미 신설되었으니 김용택 등이 신설되지 않는 것이 어찌 왕자(王者)의 정사이겠는가? 목호룡의 일을 의리라고 생각하는 자는 그르다. 신축년122) 에 저사(儲嗣)를 세우는 일이 없었다면 우리 나라가 망하였을 것이다. 삼종(三宗)의 혈통은 황형(皇兄)과 내가 있었을 뿐이니, 그들이 애경(愛敬)하는 마음이 있다면 가만히 등지고 떠났어야 할 것인데 이렇게 하지 않고 도리어 공(功)을 탐내는 마음을 일으켜 정책(定策)의 공을 꾀하였으니, 이것은 이심(利心)이다. 또 경묘께서 후사(後嗣)가 없는데 신축년에 저사를 세운 것을 그르게 생각하는 자는 나에게 불충(不忠)하였으니, 역적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하였다. 조현명이 말하기를,
"그들이 어찌 감히 추대한다는 말을 할 수 있었겠는가? 전하께서는 숙묘(肅廟)의 아들이고 경묘의 아우이시므로 종묘(宗廟)와 사직(社稷)을 전하께 부탁해야 할 것이니, 김용택 등이 어찌 감히 공을 마음대로 할 마음을 일으킬 수 있었겠습니까? 국시(國是)를 정한 것은 여기에서 벗어나지 않을 것이니 처분이 한 번 전도(顚倒)되면 나라가 말할 것입니다. 호대하게 한다는 말은 구차하고 어려운 것인 줄 알기는 하나 마지못한 데에서 나온 것입니다."
하고, 원경하가 말하기를,
"탕평(蕩平)의 정사는 아름답지 않은 것이 아닙니다마는, 노론(老論)·소론(少論)을 호대하게 하고 말면 어찌 인심을 복종시킬 수 있겠는가? 동인(東人)·서인(西人)·남인(南人)·북인(北人)을 물론하고 재주에 따라서 쓴 뒤에야 공도(公道)를 넓힌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그 공정함을 칭찬하였는데, 이 뒤부터 임금이 또 남인과 소북(小北)을, 등용하려 하였다. 대개 원경하는 사람됨이 간사하고 누추하며 조정에서 논의하는 것이 자못 느슨하여, 이 때문에 동배(同輩)가 시끄러이 공박하니, 원경하가 용납되지 않을 것이라 염려하여 드디어 무옥(誣獄)을 반안(反案)해야 한다고 말하여 스스로 동배에게 해명하고, 또 남인·북인의 당을 통용(通用)할 것을 말하여 임금에게 영합하려 하였으므로, 당시 사람들이 더럽게 여기고 이를 일컬어 대탕평(大蕩平)이라 하였다.
석강(夕講)을 행하였다.
임금이 야대(夜對)를 행하였다. 선온(宣醞)123) 하고 시각이 삼고(三鼓)가 되어서야 파하였다.
6월 7일 병자
밤에 달이 태미원(太微垣)에 들어갔다.
6월 9일 무인
송수형(宋秀衡)·민형수(閔亨洙)·임정(任珽)을 승지로 이명곤(李命坤)을 부수찬으로 삼고, 김약로(金若魯)를 발탁하여 개성 유수로 삼았다.
임금이 대신(大臣)과 비국 당상을 인견(引見)하여 전세(田稅)를 감면하는 일을 의논하였다. 우의정 송인명(宋寅明)이 말하기를,
"먹을 것을 버리고 믿음을 버리지 않는다는 의리로서는 성지(聖志)가 이미 정해졌으니 어찌 감히 고치기를 굳이 청할 수 있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또 신하들에게 물었는데, 혹 군포(軍布)를 감면하는 것이 실혜(實惠)라고 청하기도 하고, 환곡(還穀)을 감면하는 것이 실정(實政)이라고도 말하여 의논이 같지 않았다. 교리 신사건(申思建)이 말하기를,
"임금의 말이 한 번 나와서 사방에서 전하여 말하는데, 이제 또 고치는 것은 이미 시행한 일을 말살하는 것과 비슷한 듯하니, 전대로 시행하는 것만 못하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반드시 전세를 감면하려는 것은 백성을 위한 지극한 뜻에서 나온 것이다. 군포나 대동(大同)을 감면하더라도 가난한 백성은 어떻게 구제하여 살리겠는가? 공자(孔子)가 ‘반드시 명분을 바룰 것이다.’ 하였거니와, 전세를 감면하면 명분이 바를 것이다."
하고, 또 하교하기를,
"지금은 위태한 것을 바꾸어 잘 다스릴 큰 기회이므로, 군신 상하(君臣上下)가 바로 허름한 옷을 입고 맛없는 음식을 먹기로 마음먹어야 한다. 모든 낭비에 관계되는 것은 일체 줄여야 할 것이니, 모든 영선(營繕)을 우선 멈추고 내년 삼명일(三名日)에 갑옷과 투구를 진상(進上)하는 것도 봉진(封進)하지 말게 하라."
하였다.
헌납(獻納) 민통수(閔通洙)가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이번의 지나치신 거조(擧措)는 천고(千古)의 사책(史冊)에 없던 일입니다. 한 번 불평한 경우를 당하면 문득 스스로 가볍게 여기고 스스로 낮추는 일을 하여 신하가 두려워 어쩔 줄 모르게 하시어 군신 상하(君臣上下)가 소리내어 울며 서로 대하게 되니, 성덕(聖德)의 흠을 끼치고 사방의 소문을 놀랍게 하는 것이 과연 어떠하겠습니까?"
하고, 찬선(贊善) 박필주(朴弼周)도 상소하기를,
"성상께서 일 때문에 몹시 격노(激惱)하시어 뜻밖의 비상한 거조까지 있으므로 대덕(大德)을 어그러뜨리고 저군(儲君)을 두렵게 하며 진하(陳賀)와 고묘(告廟)를 해마다 행하게 되니, 사방에서 전하여 말하는 것이 어찌 놀랍고 어지럽지 않겠습니까? 전하께서 《역경(易經)》의 곧으면 길(吉)하여 뉘우칠 것이 없어진다는 가르침에서 마음을 깨끗하게 하여 일이 없는 가운데에 일이 있게 하는 일을 일체 하지 않으시면 요(堯)임금과 순(舜)임금처럼 훤히 맑고 밝아질 것이니, 자주 고치고 자주 잘못하여 이렇게 어지럽기만 하고 조금도 이익이 없는데, 어찌 같은 날에 말할 수 있겠습니까?"
하였는데, 모두 예사 비답(批答)을 내렸다.
6월 10일 기묘
안경운(安慶運)을 장령으로, 이창의(李昌誼)를 지평으로, 한봉조(韓鳳朝)를 정언으로, 권현(權臣)을 헌납으로 삼았다.
사직(司直) 이응(李膺)이 상소하여 선정신(先正臣) 송시열(宋時烈)과 문정공(文貞公) 김익희(金益熙)를 효종(孝宗)의 묘정(廟庭)에 배향(配享)하기를 청하였는데, 이응의 아비인 이동형(李東亨)은 선정(先正)의 문인(門人)이었다. 소(疏)가 들어가니, 임금이 그 글을 도로 주라고 명하고, 하교하기를,
"이런 버릇을 늘 한심하게 여겨 왔다. 봉입(捧入)한 승지(承旨)를 중추하라. 선정의 종향(從享)을 상소하여 청하는 자가 있으면 일체 봉입하지 말라."
하였다.
임금이 시호 도감 당상(諡號都監堂上)을 인견(引見)하였다. 예조 참판 이익정(李益炡)이 말하기를,
"석위(釋位)를 도로 거두신 일은 실로 종사(宗社)의 막대한 경사이니, 경하하여 과거(科擧)를 설행(設行)하는 것은 그만둘 수 없겠습니다."
하였으나, 임금이 윤허하지 않았다. 이익정이 매우 힘써 말하고, 또 효묘(孝廟)에게 시호(諡號)를 더 올린 일과 합쳐 경하하여 과거를 설행하기를 청하였으나, 또 윤허하지 않았다.
6월 11일 경진
임금이 주강(晝講)에 나아갔다. 임금이 좌의정 김재로(金在魯)에게 말하기를,
"당론(黨論)은 이기려고 힘쓰는 데에서 나온다. 이응(李膺)이 상소한 가운데에서 선정(先正)을 찬양한 말은 매우 지나치다. 효묘(孝廟)께서 심양(瀋陽)에 계실 때부터 원한을 갚고 치욕을 씻는 의리를 이미 성심(聖心)에 크게 정하셨으니, 어찌 선정이 도운 공이겠는가? 묘정(廟庭)에 배향(配享)하는 것은 결코 윤허할 수 없다. 경(卿)들이 이 때문에 시호(諡號)를 올린 것은 선열(先烈)을 빛내고 내 효성을 펴려는 데에서 나온 것인데, 이응이 상소한 것을 보면 중히 여기는 것이 여기에 있는 것인가 저기에 있는 것인가? 경의 조상이 나타낼 만한 명절(名節)이 있어서 바야흐로 나타내려 할 때에 남이 혹 말하기를, ‘네 조상의 명절은 그 벗에게 힘입어서 비로소 나타났다.’고 한다면 경의 마음에 섭섭하겠는가 그렇지 않겠는가?"
하니, 김재로가 말하기를,
"한(漢)나라 소열(昭烈)과 제갈양(諸葛亮)은 광복(匡復)의 공을 함께 꾀하였으니, 이것이 이른바 밝은 임금과 어진 신하가 서로 만났다는 것입니다. 어찌 혹 제갈양이 어 질다 하여 도리어 소열의 덕에 손상이 있겠습니까?"
교리(校理) 원경하(元景夏)가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생각하건대, 나라를 다스린다는 것은 조정을 화합시킨다는 것에 지나지 않을 뿐입니다. 대저 조정이라는 것은 한 나라의 근본인데, 근본이 화합하지 않고서 그 나라를 다스릴 수 있다는 말은 신이 듣지 못하였습니다. 이제 전하께서 지극한 정치를 바라신다면 먼저 조정을 화합시키시는 것 만한 것이 없을 것입니다. 대저 천하의 일은 서로 화합하는 것보다 좋은 것이 없고 서로 격돌하는 것보다 좋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먼저 마음 안에 황극(皇極)을 세워서 동서 남북의 사람이 황극을 따르도록 가르치고 행하여 화평한 정치와 교화를 펴고 나서야 황극의 정치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신이 처음 벼슬하였을 때에 성교(聖敎)를 받자옵건대, ‘인종(仁宗)·효종(孝宗) 양조(兩朝)에서 지극한 정성에서 조제(調劑)하셨다는 말을 너도 들었을 것이니, 너는 각별히 우러러 본받아야 한다.’ 하셨는데, 신이 재배(再拜)하고 마음에서 다시 외기를, ‘우리 임금의 이 말씀은 실로 요·순(堯舜)의 지극한 덕과 같으니 나라가 희망이 있다.’ 하였습니다. 생각하건대, 우리 성조(聖祖)께서는 피차를 융합하여 한 세상을 크게 화평한 지경 안에 넣으셨으므로, 당명(黨名)이 있더라도 감히 당이 나타나지 못하고, 당심(黨心)이 있더라도 감히 당전(黨戰)하지 못하였습니다. 그때에 김장생(金長生)·장현광(張顯光)이 도학(道學)으로 등용되고 이원익(李元翼)·신흠(申欽)이 덕망(德望)으로 등용되고 김상헌(金尙憲)·정온(鄭蘊)이 명절(名節)로 등용되고 정경세(鄭經世)·이식(李植)이 문학으로 등용되고 남이공(南以恭)·김신국(金藎國)·민성휘(閔聖徽)가 정사(政事)로 등용되었는데, 어깨를 나란히 하여 조정에서 같이 종사하되 혐의하지 않고 탕평(蕩平)을 표방하여 능히 황극히 정치에 이르렀습니다. 신이 삼가 효종의 말씀을 외는 것은 성상께서 신하들에게 굽어 경계하시기를 우러러 권면(勸勉)하기 위한 것이니, 신이 전하께 바라는 것은 화평 한 가지일 뿐입니다.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능히 성학(聖學)을 힘써 길이 황극의 임금이 되소서."
하였는데, 임금이 아름답게 여겨 받아들이고 원소(原疏)는 금중(禁中)에 두라고 명하였다.
사신은 말한다. "원경하는 젊었을 때부터 지론(持論)이 준엄하여 늘 탕평을 공박하고 권간(權奸)을 배척하는 것을 주장 삼고 큰소리하였으나, 벼슬하게 되어서는 임금이 대간(臺諫)으로 낙점(落點)하지 않으니, 이제는 폐고(廢錮)될 것이라 겁나고 공명(功名)을 얻기에 바빠서 갑자기 평소의 뜻을 바꾸고 시의(時議)에 붙어서 지나친 거조가 있었던 뒤에 이 소(疏)를 올려 위로는 총애를 굳히고 아래로는 계책을 부리려 하였으므로, 사람들이 다 침뱉고 비루하게 여겼다."
【태백산사고본】 37책 51권 32장 B면【국편영인본】 42책 666면
【분류】정론-정론(政論) / 정론-간쟁(諫諍) / 왕실-국왕(國王) / 역사-사학(史學)
사신은 말한다. "원경하는 젊었을 때부터 지론(持論)이 준엄하여 늘 탕평을 공박하고 권간(權奸)을 배척하는 것을 주장 삼고 큰소리하였으나, 벼슬하게 되어서는 임금이 대간(臺諫)으로 낙점(落點)하지 않으니, 이제는 폐고(廢錮)될 것이라 겁나고 공명(功名)을 얻기에 바빠서 갑자기 평소의 뜻을 바꾸고 시의(時議)에 붙어서 지나친 거조가 있었던 뒤에 이 소(疏)를 올려 위로는 총애를 굳히고 아래로는 계책을 부리려 하였으므로, 사람들이 다 침뱉고 비루하게 여겼다."
헌부(憲府)에서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간원(諫院)에서 전계를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6월 12일 신사
홍문 정자(弘文正字) 이천보(李天輔)가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임금과 신하 사이는 독책(督責)을 위엄으로 여기고 승순(承順)을 공경으로 여길 뿐만 아니라, 그 신하가 스스로 지킬 수 있는 것이 있으면 임금이 반드시 굳이 시켜서 그 뜻을 꺾을 것 없고 신하가 반드시 억지로 따라서 그 지키는 것을 바꿀 것 없는 것입니다. 양편에서 각각 그 도리를 다하여 상하가 교제하는 것인데 전하께서 신하들을 대우하실 때에는 어거하는 것은 여유가 있으나 너그러이 용납하는 것은 모자라십니다. 무릇 신하들이 거취(去就)할 즈음에 작록(爵祿)으로 유인하고 위명(威命)으로 협제(脅制)하여 매우 엄하게 속박하며 이따금 신하로서 감히 듣지 못할 말씀을 하여 일세(一世)를 견제하고 뭇 신하를 구사(驅使)하는 방책으로 삼아서, 그 능력을 헤아리지 않고 그 정세를 돌보지 않고 분주할 겨를도 없을세라 염려하게 하십니다. 오직 이렇게 하시므로 영진(榮進)을 조급히 다투는 버릇이 이루어지고 태연히 양보하고 물러가는 풍습이 쇠퇴하여, 사대부(士大夫)의 절조(節操)가 이로부터 점점 없어져서 영화를 탐내고 녹(祿)을 탐내는 무리가 연줄을 따라 영진을 탐내는데, 심하면 아랫도리를 걷고 발을 적시고 담을 넘고 구멍을 뚫기까지 하여 세상에 부끄러운 일이 있는 줄 모릅니다. 조금 자중(自重)하려는 자일지라도 흔히 바른 것을 물들여 더럽히고 모난 것을 깎아서 둥글게 하여 영합하고 구차하게 용납되는 것을 영진을 꾀하는 계책으로 여기고 바른 도리를 하고 바른말을 하는 것을 자신을 망치는 바탕으로 여깁니다. 부형이 가르치고 경계하는 것과 벗들이 책망하고 권면하는 것은 시세에 따라 부침하여 미움받는 것을 면하는 것을 요긴한 방도로 삼는 것입니다. 이것이 어찌 신하들의 죄일 뿐이겠습니까? 실로 전하께서 인도하여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아! 우리 조종(祖宗) 때에 명절(名節)을 부식(扶植)하고 신하들을 예우(禮遇)하여 3백년 동안 국가를 유지한 것이 다 이것인데, 오늘에 이르러 전하께서 무너뜨리시니 신은 참으로 아깝게 여깁니다."
하였는데, 비답(批答)하기를,
"지금 명을 어기는 자는 절조가 바른 것이 아니라 교만하고 불순(不順)한 것이다. 네가 이들을 본뜨더라도 바른 도리가 아니다."
하였다.
주강(晝講)과 석강(夕講)을 행하였다.
6월 13일 임오
임금이 대신(大臣)과 비국 당상(備局堂上)을 인견(引見)하여 임인년124) 옥안(獄案)의 이름과 계묘년125) 정시(庭試)의 과명(科名)을 고치라고 명하였다. 이에 앞서 유척기(兪拓基)가 정승이었을 때에 두 대신(大臣)126) 을 신복(伸復)하기를 청하고 또 무옥(誣獄)을 반안(反案)하기를 청하였으나 임금이 곧 따르지 않으므로 유척기가 다시 깊이 생각하여 윤허할 것을 청하였다. 대개 임금의 뜻을 아닌게아니라 반안하고 싶었으나, 송인명(宋寅明)·조현명(趙顯命) 등이 번번이 무안(誣案) 가운데에 있는 사람을 경묘(景廟)의 역신(逆臣)이라 하여, 쟁집(爭執)하고 또 임금에게 누를 끼친다고 공동(恐動)하였기 때문에 임금이 결단하지 못하였던 것인데, 이때에 이르러 대신과 여러 신하를 소견(召見)하여 옥안의 이름을 고칠 것을 의논하였다. 대개 정미년127) 에 개기(改紀)하였는데도 임인년의 무안을 삼수 역안(三手逆案)이라 하고, 계묘년의 과시(科試)를 토역 정시(討逆庭試)라 하는 것은 그 이름이 바르지 않기 때문에 임금이 고치게 하려 한 것이다. 동의금(同義禁) 오원(吳瑗)이 말하기를,
"역적 목호룡(睦虎龍)의 지극한 흉악은 만고에 없던 것인데, 그 흉악한 공초(供招)에 나온 자를 그 문안(文案)에 그대로 두고 그 역적이라는 이름을 없애지 않는다면 이는 오히려 흉악한 공초를 사실로 여기는 것이 될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전교(傳敎)를 대신에게 내어 보이고 말하기를,
"이 처분도 말단의 일이다."
하였는데, 송인명이 말하기를,
"이것은 피차가 다 뜻에 차지 않아서 도리어 갈등을 일으킬 것이니, 아직 버려 두는 것만 못하겠습니다."
하고, 좌의정 김재로(金在魯)가 말하기를,
"이천기(李天紀)·김용택(金龍澤) 등이 범하였다는 것을 문안에서 살펴보면 믿을 만한 것이 없으니, 목호룡이 고한 것만 무고(誣告)로 돌아가야 할 뿐입니다. 삼수라는 말은 이미 거짓말이니, 이것으로 죄를 만들어 목호룡의 말을 믿을 만한 것으로 삼는 것은 참으로 성상께서 거짓을 밝히는 도리에도 미진한 것이 있게 될 듯하니, 어찌 통탄하지 않겠습니까? 신은 거짓 꾸며진 역적이라는 이름을 그대로 두어서는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하고, 송인명이 말하기를,
"신은 목호룡의 흉악한 글은 빨리 없애야 하고, 김용택 등 이미 승복한 자는 근거 없는 말을 하여 임금을 범한 역적으로 따로 역안(逆案)에 두어서 대방(大防)을 보존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하여, 두 정승이 서로 다투었다. 임금이 또 조현명에게 물었는데, 조현명이 말하기를,
"이 옥사(獄事)는 한편으로는 선조(先朝)를 범하고 한편으로는 성궁(聖躬)을 범하였으므로 한 마디 말이 어긋나면 양편에서 문득 사죄(死罪)로 의논하니, 이것이 입을 열기 어려운 까닭입니다. 신이 한림(翰林)으로서 마침 목호령이 고변(告變)하던 날에 김일경(金一鏡)이 패초(牌招)를 기다리지 않고 판의금 심단(沈檀)과 함께 미리 대궐에 들어왔으므로, 신은 역적 김일경 등이 미리 알았으리라고 이미 의심하였고, 김용택이 역적의 공초에 나오게 되어서는 김용택과 신은 팔촌친(八寸親)이므로 그 사람됨이 연약하고 어리석은 줄 알기 때문에 또한 목호룡이 고한 것이 진실하지 않으리라고 의심하였습니다. 옥사가 이루러지게 되어서도 또한 함부로 죽이는 일이 많으므로 신은 마음속으로 무옥이라고 생각하였으나 감히 말하지 못하였습니다. 을사년128) 에 수사(修史)하려고 목호룡의 문안을 가져다 보았더니, 이천기·김용택 등이 무뢰한 자들과 체결하고 교통하며 음흉한 짓을 한 정상이 낭자하게 다 드러났는데, 이미 신축년129) ·임인년의 이후의 일이 아니라 기해년130) ·경자년131) 의 일이기에 그것이 모역(謀逆)의 정절(情節)임을 알 수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신이 과연 처음 소견을 바꾸어 역옥(逆獄)으로 단정한 것은 이 때문입니다. 목호룡의 흉악한 말은 천지처럼 크고 일월처럼 밝은 성덕(聖德)에 손상될 것이 워낙 없겠으나, 이들이 이미 선조를 범하였다면 너그러이 방임(放任)하는 잘못에 빠져서 성덕의 흠이 될세라 염려하기 때문입니다. 무신년132) 옥사를 다스릴 때에 성궁을 범한 자의 죄를 무겁게 하고 가볍게 다스린 것은 살리기를 좋아하는 덕에 해롭지 않고, 선조를 범한 자의 죄를 무겁게 하고 무겁게 다스린 것은 또한 효우(孝友)의 빛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경의 말은 옮지 않다. 법은 조종(祖宗)의 법이고 내 법이 아닌데, 나에게 관계되는 일과 선조에 관계되는 일에 어찌 차이가 있겠는가?"
하였다. 조현명이 말하기를,
"이때에 전하께서 의연(毅然)히 정색(正色)하고 임하시어, 한편 사람이 반안(反案)을 청하면 선조를 범하였으므로 경솔히 의논하지 말아야 한다고 답하시고, 한편 사람이 두 정승을 복관(復官)하는 것이 그르다고 말하면 오늘날 임금을 섬기는 자가 말하여 마땅한 것이라고 답하시어, 이렇게 양편으로 진정시키신다면 안정하여 화합하고 화평하여 보호하는 기틀이 어찌 여기에 있지 않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이것은 정색하여 진정시킬 것이 아니다. 경들도 그러한데, 더구나 다른 사람이겠는가?
내가 세제(世弟)로서 대궐에 들어갔을 때에 어느 곳에서 안식할 것인지 몰라서 생각하게 될 때마다 마음이 놀라고 뼈가 싸늘하였으므로, 이 옥안이 그대로 있으면 내 마음이 상한다마는, 선조에 관계되는 일을 감히 경솔히 의논할 수 없기 때문에 먼저 이름을 고치려는 의논을 하는 것이다."
하였다. 김재로가 말하기를,
"신은 삼조(三朝)의 두터운 은혜를 입었으니, 경묘를 범한 자가 어찌 당심(黨心) 때문에 그들을 풀어 주려 하겠습니까? 삼수에 관한 말은 송인명·조현명도 다 그것이 진실하지 않다는 것을 말하였거니와, 또한 어찌 선조를 범한 일이 있었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이제는 돈연(頓然)히 잊도록 하라."
하고, 이어서 명하여 전교(傳敎)를 쓰게 하여 삼수 역안을 임인 국안(壬寅鞫案)이라 고치고, 계묘 토역 정시(癸卯討逆庭試)를 별과(別科)라 고치고, 김일경·박필몽(朴弼夢)에게 억울하게 단련받아 이름이 죄안(罪案)에 있는 자를 모두 유사(攸司)에 명하여 소석(疏釋)하게 하고, 또 조현명과 동의금(同義禁) 오원(吳瑗)에게 명하고 국안을 바로잡게 하였다. 유척기의 말이 이미 행해졌기 때문에 드디어 돈유(敦諭)를 내리고, 조관빈(趙觀彬)·윤순(尹淳) 등도 정원(政院)을 시켜 올라오도록 신칙하게 하였다.
헌부(憲府)에서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석강(夕講)을 행하였다.
관학 유생(館學儒生) 조엄(趙曮) 등이 상소하여 선정신(先正臣) 송시열(宋時烈)·송준길(宋浚吉)을 효종(孝宗)의 묘정(廟庭)에 배향(配享)하기를 청하였다. 이때 임금이 성균관(成均學)·사학(四學)에서 장차 상소하여 청할 것이라고 생각하여 이미 정원(政院)에 명하여 봉입(捧入)하지 말게 하였는데, 조엄 등이 과연 봉장(封章)하였으므로 승지(承旨)가 여쭈었다. 임금이 성균관·사학은 체례(體例)가 중하다 하여 그 소(疏)를 봉입하라고 명하고, 또 조엄 등을 불러 책유(責諭)하기를,
"너희들이 반드시 끝내 고집하려 하면, 선정(先正)을 위한다는 것이 도리어 선정에게 욕을 끼치게 될 듯하다."
하고, 이어서 비답(批答)을 내리기를,
"이미 불러서 유시하였으니, 가서 학업에 힘쓰라."
하였다.
6월 14일 계미
조명리(趙明履)를 승지로, 이기헌(李箕獻)을 장령으로, 민계(閔堦)를 헌납으로 삼았다.
석강(夕講)을 행하였다.
6월 15일 갑신
윤심형(尹心衡)을 집의로, 윤경주(尹敬周)를 지평으로, 윤광의(尹光毅)를 정언으로 삼았다.
임금이 인정전(仁政殿)의 월대(月臺)에 친림(親臨)하여 서계(誓戒)하였다. 효묘(孝廟)에게 존호(尊號)를 더 올리기 위하여 장차 친제(親祭)할 것이기 때문이었다.
6월 17일 병술
이기진(李箕鎭)을 예조 판서로 삼았다.
주강(晝講)과 석강(夕講)을 행하였다.
6월 19일 무자
관학 유생(館學儒生) 임명주(任命周) 등이 또 상소하여 선정신(先正臣) 송시열(宋時烈)·송준길(宋浚吉)을 효종의 묘정(廟庭)에 배향(配享)하기를 청하였는데, 정원(政院)에서 재계(齋戒) 중이기 때문에 넌지시 여쭈니, 임금이 말하기를,
"처음에 현관(賢關)133) 을 대우하는 도리로 소견(召見)하여 면유(面諭)하고 비답(批答)을 내렸는데, 어찌 감히 이럴 수 있는가?"
하고, 그 소(疏)를 도로 주라고 명하고 살펴보지 않고, 이어서 엄한 분부를 내려 장의(掌議)와 소두(疏頭)를 모두 정거(停擧)시켰다. 승지 송수형(宋秀衡)·조명리(趙明履)가 말하기를,
"성균관·사학의 상소에 대하여 비답하지 않고 돌려주는 것은 전에 없던 일이고 정거하라는 명은 더욱이 지나치니, 청컨대 도로 들여오고 비답을 내리고 빨리 정거를 거두소서."
하니, 임금이 노하여 꾸짖었다. 교리 원경하(元景夏)가 또한 청대(請對)하였으나, 수찬 남태제(南泰齊)가 반직(伴直)으로서 망설이고 함께 참여하지 않았으므로 임금이 승지·옥당(玉堂)은 임금을 바루는 데에 뜻이 있는데 남태제는 오히려 구습을 일삼는다 하여 특별히 체차하였다.
6월 21일 경인
임금이 면복(冕服)을 갖추고 태묘(太廟)에 나아가 의식대로 봉심(奉審)하고 이어서 재실(齋室)에서 잤다.
6월 22일 신묘
임금이 태묘(太廟)에서 친제(親祭)를 행하였으니, 효종(孝宗)의 시호(諡號)를 더 올리기 때문이었다. 책보(冊寶)를 바쳐 시호를 올리고, 예(禮)가 끝나고서 도로 인정전(仁政殿)에 나아가 진하(陳賀)를 받고 사령(赦令)을 반포하였다.
반교문(頒敎文)에 이르기를,
"왕은 이르노라. 후왕은 선왕의 도(道)를 크게 따르기를 도타이 해야 하므로 하늘과 같은 큰 아름다움을 사모하고, 만세에 큰 이름을 전해야 하므로 성덕(聖德)을 적어 나타내는 책보를 더 올렸다. 성대한 의례(儀禮)는 이미 의물(儀物)을 갖춘 데에서 거행하였으니, 왕명을 사방에 크게 선포한다. 삼가 생각하건대, 효종 대왕(孝宗大王)께서는 예지(睿智)는 천성으로 타고나고 효제(孝悌)는 도리를 다하셨으니, 능히 임금 노릇하고 어른 노릇하신 것은 계력(季歷)이 태왕(太王)의 기업(基業)을 이는 것134) 과 같고, 유정 유일(惟精惟一)하신 것은 우(禹)임금이 순(舜)임금의 가르침을 받은 것135) 과 같으셨다. 그래서 황고(皇考)의 유지(遺志)를 따라 시운(時運)이 매우 어려운 것을 구제하려고 생각하시니, 무왕(武王) 같은 큰 공렬(功烈)을 드날리고 문왕(文王) 같은 빛나는 덕(德)을 보여 스스로 큰 책임을 맡고, 왕도(王道)를 따르고 패도(霸道)를 물리쳐 능히 큰 규모를 넓히셨다.
아! 성수(聖壽)가 길지 못하셨으니, 어찌하여 하늘이 돌보지 않았는가? 그래도 교화의 길이 세우심에 힘입어 윤상(倫常)이 타락하지 않았다. 우리 나라의 예의가 더욱 나타난 것은 이끌고 도우신 것이 부족하지 않기 때문이고, 선대의 제사가 매우 공경스러웠던 것은 대개 높이고 보답한 것이 이미 융숭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생각하건대, 두어 자의 존호(尊號)는 훌륭한 정치의 큰 공적을 밝힐 수 없다. 성대한 덕과 지극한 선(善)은 모두 찬양을 극진히 하였어도 빛나는 사업과 영특한 모책(謀策)은 오히려 더 나타내야 할 것이 있다. 아! 견줄 데 없는 공렬은 참으로 영구히 잊을 수 없다. 그래서 여정(輿情)을 따라 현호(顯號)를 뒤미쳐 높여서, 이미 타락한 인심을 바로잡아 덕을 만방에 나타내고, 없어져 가는 천리(天理)를 밝혀서 의리를 온 세상에 빛낸다. 아름다움을 나타내어 아름다움을 기린들 어찌 형용을 다할 수 있으랴마는, 높이기를 다하고 존호를 더하여 공경히 스스로 정성을 편다. 세상을 안정시키신 선왕의 소원을 비로소 이룩하니 정문(情文)에 어그러진 것이 없고, 태실(太室)의 구장(舊章)을 징험하자 의물마다 환히 빛나니, 후성(後聖)을 기다려도 의혹되지 않고 감히 선왕을 나타내어 더욱 빛냈다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이해 6월 22일에 효종 대왕의 존시(尊諡)를 명의 정덕(明義正德)이라 더 올렸다. 종묘(宗廟)의 성대한 의례를 막 끝내고 조정(朝廷)의 교명(敎命)을 펴니, 명성(名聲)은 널리 넘쳐 사방의 관청(觀聽)을 용동(聳動)시키고 도타운 은혜는 널리 내려져 뭇사람의 마음이 기뻐하는 데에 보답한다. 이달 22일 어둑새벽 이전의 사죄(死罪) 이하의 잡범(雜犯)을 모두 용서하고, 관직에 있는 자는 각각 한 자급(資級)을 올리되 자궁(資窮)한 자는 대가(代加)한다. 아! 바로잡는 가르침은 멀음이 없이 적시고 덥혀 주는 은택은 그지없으니, 큰 규모를 공경히 이어받아 감히 삼가고 두려워하는 생각을 늦추지 않으면, 모두 끼치신 교화 안에 들어 밝아지는 아름다움에 이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교시(敎示)하니, 잘 알아야 한다." 【대제학(大提學) 오원(吳瑗)이 지어 바쳤다.】
【태백산사고본】 37책 51권 35장 A면【국편영인본】 42책 668면
【분류】왕실-국왕(國王) / 왕실-종사(宗社) / 어문학(語文學) / 사법-행형(行刑) / 인사-관리(管理)
[註 134] 계력(季歷)이 태왕(太王)의 기업(基業)을 이는 것 : 주(周)나라 태왕(太王)에게는 세 명의 아들이 있었는데, 첫째가 태백(泰伯), 둘째가 중옹(仲雍), 셋째가 계력(季歷)임. 태백이 태왕의 의중에 계력을 세우려는 뜻이 있음을 알고 동생인 중옹과 함께 형만(荊蠻)으로 도망하여 문신 단발(文身斷髮)을 하니, 태왕은 막내 아들인 계력에게 양위하였음.[註 135] 우(禹)임금이 순(舜)임금의 가르침을 받은 것 : 유정(惟精)과 유일(惟一)은 요(堯)가 순(舜)에게 심법(心法)을 전수(傳授)한 말로, 《서경(書經)》 대우모(大禹謨)에 "물욕적인 마음은 자칫 나쁜 데로 흘러갈 위험이 있고, 도덕적인 마음은 아주 은미(隱微)하여 찾아보기 어렵다. 이것을 정밀(精密)하게 관찰(觀察)하여 올바른 마음을 전일(專一)하게 지켜야 한다."란 데에서 인용된 것임.
명(明)나라 총병(總兵) 이여매(李如栂) 등 여러 사람에게 치제(致祭)하라고 명하였다. 대개 시호(諡號)를 더 올린 뒤에 존주(尊周)의 의리를 추감(追感)하였기 때문이었다.
이도원(李度遠)을 응교로, 이석표(李錫杓)를 부응교로, 김한철(金漢喆)을 부교리로, 이창의(李昌誼)를 부수찬으로, 김진상(金鎭商)을 이조 참의로, 박문수(朴文秀)를 형조 판서로, 박성원(朴聖源)을 지평으로 삼았다.
6월 23일 임진
사학 유생(四學儒生) 김숙행(金肅行) 등이 상소하여 관학(館學)의 소(疏)를 도로 들이고 비답(批答)을 내릴 것을 청하였으나, 임금이 윤허하지 않았다. 그 뒤에 좌의정 김재로(金在魯)의 말에 따라 특별히 비답을 내리고 이어서 장의(掌議)에게 내렸던 정거(停擧)의 벌을 풀라고 명하였다.
예조(禮曹)에서 시호(諡號)를 올린 것을 경사라 하여 증광과(增廣科)를 설행(設行)하기를 청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성조(聖祖)의 겸덕(謙德)을 몸받아야 하고 겉치레를 크게 벌이지 말아야 한다."
하고, 다만 정시(庭試)를 설행하라고 명하였다.
6월 24일 계사
상시 도감 도제조(上諡都監都提調) 이하에게 차등 있게 상주라고 명하였다. 도제조와 봉책보관(奉冊寶官)·제술관(製述官)·서사관(書寫官)은 모두 말[馬]을 내리고, 제조 조현명(趙顯命)·이병상(李秉常)·서종급(徐宗伋)과 도청(都廳) 송교명(宋敎明)·홍창한(洪昌漢)과 대축(大祝) 박필균(朴弼均)은 모두 가자(加資)하고 감조관(監造官) 세 사람은 승륙(陞六)136) 하였다. 【홍창한이 도청을 맡은 것은 서너 날에 지나지 않고 또 준직(準職)을 지내지 않았으므로, 뒤에 대신(大臣)이 아뢴 바에 따라 가자하라고 한 명을 도로 거두었다.】
【태백산사고본】 37책 51권 35장 B면【국편영인본】 42책 668면
【분류】인사-관리(管理) / 왕실-종사(宗社) / 왕실-사급(賜給)
[註 136] 승륙(陞六) : 7품 이하의 벼슬아치가 6품에 오름.
헌부(憲府)에서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6월 25일 갑오
좌의정 김재로(金在魯)·우의정 송인명(宋寅明)이 경재(卿宰)를 거느리고 빈청(賓廳)에 모여서 존호(尊號)를 올리기를 청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당초에 임금이 석위(釋位)한다는 명을 도로 거두고 나서 김재로 등이 종신(宗臣)을 부추겨 존호를 올리기를 먼저 청하게 하고, 그 이튿날 아뢰기를,
"종신이 청한 것은 온 나라가 함께 하는 공론입니다. 신들도 말없이 있을 수 없으니, 온 나라가 청하는 것을 따르시기 바랍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경들이 종신을 그르게 여기지 않고 이런 청을 하니, 참으로 알 수 없다."
하고, 따르지 않았다. 이때에 이르러 김재로와 송인명 등이 경재를 거느리고 빈청에 모여 아뢰기를,
"전에 무신년137) 이후로 존호를 올리려는 의논이 산지(散地)에서 여러 번 나왔으나, 조정에서는 아직 앙청(仰請)한 자가 없었는데, 어찌 신들이 임금을 존양(尊揚)하는 정성이 남에게 미치지 못해서 그런 것이겠습니까? 늦추기를 꺼리지 않는 까닭은 실로 본디 충애(忠愛)하는 뜻이 있기 때문이었으나, 이제 와서는 해가 점점 오래 갈수록 국론이 더욱 일어나서 거의 상소가 정원(政院)에 어지러이 모이고 질책이 묘당(廟堂)에 미치게 되었으니, 신들도 어찌 감히 늦추려던 당초의 소견을 고수하고 아첨에 가깝다는 작은 혐의를 회피하여 줄곧 뭇사람의 뜻을 막고 아뢰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삼가 생각하건대, 우리 전하께서 잠저(潛邸)에 계실 때부터 천성으로 타고난 효성과 마음에서 말미암은 우애가 애연(藹然)히 순수하고 독실하신 것은 워낙 이미 널리 알려졌거니와, 이극(貳極)에 오르고 지존(至尊)에 임하여서도 여러 번 지극히 어려운 때를 당하셨으나 효성과 우애의 지극한 행실이 더욱더 나타나고 투철하시어 뭇 신하가 모두 감탄하고 팔방이 감화(感化)되었으니, 아! 성대하십니다. 더구나 근년 이래로 종묘(宗廟)의 궐전(闕典)을 모두 다 거행하여 선열(先烈)이 더욱 밝혀지고 성효(聖孝)가 더욱 빛난 것이겠습니까? 요(堯)·순(舜)의 도(道)는 효제(孝悌)일 뿐이거니와, 임금의 덕이 다시 어찌 이보다 더하겠습니까? 자식처럼 사랑하는 은택이 백성에게 널리 미치고, 크게 공정한 마음으로 뭇 신하를 평등하게 사랑하시는 것으로 말하면 이것은 성인(聖人)의 인(仁)입니다. 무릇 이 두어 가지가 모두 기리고 일컫을 만한 것입니다마는, 가장 성대한 것을 말한다면 무신년138) 에 변란을 다스린 공렬(功烈)입니다.
아! 전하께서 즉위하신 처음에 밝게 결단하여 흉역(凶逆)을 주벌(誅罰)하여 제거하고 윤강(倫綱)을 도와 세우셨으나, 여얼(餘孽)이 오히려 마음을 고치지 못하여 몰래 폐족(廢族)과 체결하고 나라를 원망하는 무리가 명호(名號)를 빌어 난을 일으켜서 장수를 죽이고 고을을 함락시키고 안팎에서 화응(和應)하여 흉봉(凶鋒)이 갑자기 닥치므로 종사(宗社)의 위험이 매우 짧은 시간에 임박하였는데, 우리 전하께서는 성색(聲色)을 변하지 않고 장수에게 명하여 군사를 보내자 성모(聖謀)는 귀신 같고 왕려(王旅)는 나는 듯하여 열흘이 못 가서 호남(湖南)의 도둑이 모두 소멸되고 영남(嶺南)의 도둑도 이어서 기가 꺾여서 모두 처형되어 적의 주검의 무덤이 높이 쌓이고 국명(國命)이 길이 공고하여졌으니, 이것은 참으로 하늘이 도운 것이고 사책(史冊)에 실린 것이 드문 일입니다. 전(傳)에 이르기를, ‘큰 덕(德)은 반드시 그 이름을 얻는다.’ 하였고, 이제 전하께서는 이 큰 덕과 큰 공렬을 아울러 가지셨으니, 현호(顯號)를 크게 받으시는 것이 천리(天理)·인심(人心)에 합당한데, 고사(古史)를 살피고 국조(國朝)를 헤아려도 다 의거할 만한 고례(古例)가 있습니다. 대저 임금에 대하여 신하는 아버지에 대한 아들과 같은데 아들의 효성은 어버이를 현양(顯揚)하는 것보다 큰 것이 없으니, 신하가 그 임금을 현양하려 하는 것도 상정(常情)이 워낙 그러한 것입니다. 아! 전하께서 전에 당하신 것은 참으로 천고에 없던 변고이고 역경이므로 늘 임금 노릇에 즐거움이 없는 마음을 갖고 조금도 사치하고 편안할 생각이 본디 없으셨습니다. 신들은 전하를 여러 해 동안 섬겼고, 또한 전하를 조금 안다고 스스로 생각하거니와, 감히 과장하는 일로 성상께서 겸손을 지키시는 덕을 손상하면서 구구하게 이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혹 성상의 참된 덕과 큰 공적이 결손되고 나타나지 않을세라 염려하여 오로지 두어 자로 나타내는 것을 빌어 천백대(千百代) 후세에 밝히려는 것이니, 그 뜻은 깊고 그 심정은 괴로운 것입니다. 바라건대, 조종(祖宗)께서 이미 행하신 전례를 따라 빨리 윤허를 내리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아! 이것이 무슨 일인가? 이것이 경들에게 바라는 것이 아니라는 것은 이미 입시(入侍)하였을 때에 유시하였다. 아! 이른바 요순의 도는 효제에 지나지 않는데, 맹자(孟子)는 증자(曾子)의 효성을 가(可)하다고까지 하였다139) 이에 대해서도 오히려 이러하였는데, 더구나 그보다 못한 자이겠는가? 아! 불효(不孝)·부제(不悌)하기가 누가 나와 같겠는가? 요·순의 효제를 인용하니, 절로 부끄러워진다. 아! 우리 백성의 고통이 이토록 지극하게 되었는데, 자식처럼 사랑한다는 말이 어찌 지나치지 않겠는가? 고심하여 조제(調劑)하여도 다툼이 계속되는 것을 크게 공정하다고 하는 것이 어찌 지나치지 않겠는가? 더구나 무신년에 변란을 다스린 것은 소추(小醜)에 지나지 않는데 어찌 말할 만하겠는가? 아! 임금 노릇을 즐거워하지 않는 마음을 어찌 경들이 알 뿐이겠는가? 신기(神祗)에게 물어도 이것은 부끄러울 것이 없다. 이것은 오히려 작은 일이거니와, 더구나 그 밖의 것이겠는가? 먼 지방의 경솔한 유생(儒生)과 무식한 종신(宗臣)이 혹 이런 짓을 하더라도 보필하는 지위에 있어 내 고굉(股肱)이 된 자가 이런 청을 하기까지 하니, 이것은 다 평소에 진심을 알게 하지 못한 탓이므로 스스로 부끄러울 뿐이다. 반드시 적이 헤아려서 빨리 이런 일을 그만두고 다시는 나를 괴롭히지 말라."
하였다.
이날 임금이 대신(大臣)과 경재(卿宰)를 인견(引見)하였을 때에 김재로(金在魯) 등이 전에 청한 것을 누누이 다시 아뢰어 마지않으니, 임금이 말하기를,
"경들은 나를 높이는 것이 아니라 나를 괴롭히기에 알맞다. 접때 신축년140) 의 정청(庭請)을 기사년141) 의 정청에 견준 자가 있었는데, 기사년에 잠시 정청한 것은 참으로 변변치 못하고, 신축년의 정청은 이미 좌우하는 것이 옳으냐는 하교를 받았으니, 황형(皇兄)을 위하는 마음이 있다면 어찌 멈추지 않을 수 있었겠는가? 아래에서 곧바로 대리(代理)를 청하였더라도 괜찮겠으나, 무릇 정청에는 멈출 수 없는 것이 있고 멈추어야 할 것도 있으니, 경들은 각자 실무에 힘쓰고 빨리 이 일을 그만두라."
하였다. 신하들이 또 힘껏 청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헌부(憲府)에서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6월 26일 을미
좌의정 김재로(金在魯)·우의정 송인명(宋寅明) 등이 3품(品) 이상을 거느리고 빈청(賓廳)에 모여 다시 아뢰어 존호(尊號)를 올리기를 청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6월 27일 병신
좌의정 김재로 등이 세 번째 아뢰어 존호를 올리기를 청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6월 28일 정유
좌의정 김재로 등이 백관(百官)을 거느리고 존호를 올리기를 정청(庭請)하니, 비답(批答)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임금과 신하 사이는 마음을 아는 것이 먼저 할 일이므로 마음을 상세히 말하였는데 이처럼 서로 버티는 것을 어찌 마음을 아는 것이라 하겠는가? 상하가 서로 버티는 것이 민사(民事)에는 어떠하겠으며 이 한더위를 당하여 백료(百僚)에게는 어떠하겠는가? 지금까지 주장하는 것은 한낱 고집일 뿐이다."
6월 29일 무술
좌의정 김재로 등이 백관(百官)을 거느리고 정청하고, 이직(李樴)도 종신(宗臣)을 거느리고 정청하였으나, 모두 윤허하지 않았다.
6월 30일 기해
좌의정 김재로 등이 백관(百官)을 거느리고 정청하고, 낙창군(洛昌君) 이탱(李樘)이 종신들을 거느리고 정청하였으나, 모두 윤허하지 않았다.
병조 판서 조현명(趙顯命)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조정(朝廷)에 바야흐로 큰 논의가 있어 백료(百僚)가 일제히 호소합니다마는 신의 어리석은 소견은 일월(日月)의 광명이 만고에 늘 새로운 것은 형용한 공에 의지한 것이 있기 때문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무신년142) 과 정사년143) 에도 그때마다 이 일 때문에 광망(狂妄)한 말씀을 여러 번 드렸으니, 성상께서도 이미 신의 어리석은 마음을 굽어 헤아리셨을 것입니다. 신하가 임금을 섬기는 데에는 그 마음이 한결같아야 하는데, 이제 그 옛것을 죄다 버리고 그 덕(德)을 여러 가지로 바꾸기를 꺼리지 않는다면, 이것이 어찌 신하의 의리로서 감히 나올 수 있는 것이겠으며, 또한 어찌 전하를 공경하고 사랑하는 방도이겠습니니까? 이견이 있어 답답한 마음을 스스로 풀 수 없으므로 마침내 여러 신하의 뒤를 따르지 못하는데, 한 가지 고심하는 것은 오히려 성심(聖心)을 끝내 굳게 지키고 바꾸지 마시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하고, 호조 판서 이병상(李秉常)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존호(尊號)를 올리기를 청하는 것이 이제 이미 엿새째입니다. 신이 조정에서 벼슬한 지 이미 30여 년이 되었는데 의지하여 임금을 섬기는 것은 다만 한낱 성신(誠信)일 뿐입니다. 사심(私心)이 생각하는 것이 있는데 두려워서 감히 스스로 말하지 못한다면, 이는 위로 임금을 속이는 것일 뿐더러 속으로는 실로 스스로 속이는 것입니다. 신은 이 일에 대하여 평소에 의심이 풀리지 않는 소견이 있으므로 일찍이 젊었을 때에 외람되고 경망한 죄를 범하게 되었고, 이제는 나아가 늙고 지위가 극히 높아져 의리를 다하고 충성하기를 바라는 뜻이 더욱더 매우 간절한데, 또 근일의 비답이 겸손하여 덕이 빛나시므로 더욱이 못 견디게 흠송(欽誦)하고 감탄합니다. 바라건대, 성명(聖德)은 실덕(實德)을 더욱 힘써 능히 마지막 성취가 있게 하소서."
하고, 예조 판서 이기진(李箕鎭)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생각하건대, 우리 전하께서는 효제(孝悌)의 행실이 백왕(百王)에 뛰어나고 인후(仁厚)한 덕(德)이 삼대(三代)보다 나으시므로 후세에 끼칠 광휘(光輝)가 앞으로 더욱 오래고 더욱 나타날 것인데 두어 자의 휘칭(徽稱)이 도리어 어찌 경중(輕重)할 만하겠습니까마는, 접때 비상한 거조(擧措)를 겪고 나서 중외(中外)의 인심이 진정된 지 오래지 않았으므로 바로 상하가 함께 덕을 닦고 허물을 살펴야 할 때에 문득 이 의논을 냈으니, 성조(聖朝)의 걱정하는 지극한 뜻에 어그러지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전후의 비답에 굳게 불허하고 굳게 밀리치셨거니와, 부연하여 보이신 것은 매우 은근하셨는데 임금의 명을 따라 세상에 나타내어 알리는 것은 들리지 않습니다. 신하가 임금을 섬기는 것은 아들이 아버지를 섬기는 것과 같거니와, 영현(榮顯)하고 봉숭(奉崇)하기에 바쁘더라고 어찌 뜻을 따라 즐겁게 하는 일을 먼저 하지 않겠습니까?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겸손을 지키는 당초의 뜻을 더욱 굳히고, 감동시키는 지극한 정성을 더욱 힘쓰시어 뭇 신하를 바로잡아 성의(聖意)를 본받아서 한갓 칭송하는 고례(古例)에만 급급하지 말고 오로지 실심(實心)으로 실정(實政)을 돕게 하소서."
하였는데, 모두 우악한 비답을 내렸다.
좌의정(左議政) 김재로(金在魯) 등이 또 청대(請對)하니, 임금이 소견(召見)하였다. 김재로가 말하기를,
"여러 번 정청(庭請)하여 대강을 이미 아뢰었습니다. 조종(祖宗)께서 이미 행하신 고례(古例)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고 뭇 신하의 간절한 청을 살피지 않을 수 없으며, 또 왕세자(王世子)의 억울한 마음도 어찌 묵상(默想)하지 않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어린 아들이 어찌 알겠는가?"
하였다. 이때 세자의 나이는 겨우 다섯 살이었다. 임금이 또 하교하기를,
"두세 중신(重臣)에게 비답한 데에 이미 일렀거니와, 저들의 말이 옳다면 경의 말이 그를 것이다. 이미 저들의 말을 옮게 여겼으니, 어찌 경들의 청을 따를 수 있겠는가? 송(宋)나라 진종(眞宗)이 근거 없는 의논에 움직여 봉선(封禪)하게 되었는데, 이번의 이 일이 또한 진종의 봉선과 비슷하지 않은가?"
하고, 끝내 윤허하지 않았다.
임금이 소대(召對)를 행하였다. 《대학연의보(大學衍義補)》를 강(講)하였는데, 옥사(獄事)를 판결하는 일은 오직 공평하고 선량한 자라야 할 수 있다는 글에 이르러, 유신(儒臣) 중에 형정(刑政)이 공평하고 합당해야 한다는 것을 말한 자가 있었는데, 임금이 말하기를,
"임금인 자는 공평하고 관대해야 할 것이다. 예전에 송(宋)나라 태종(太宗)이 비로소 유사(儒士)를 사리 판관(司理判官)으로 삼았는데, 대개 율문(律文)과 경서(經書)·예법(禮法)의 의리는 다를 것이 없기 때문이다. 송나라는 능히 경술(經術)이 있는 선비를 써서 옥사를 심리하였으므로 공평하고 합당한 보람이 있었으니, 이 방도를 행하면 지금도 예전과 같을 것이다."
하고, 형조의 낭관(郞官)을 가려 써서 무릇 의율(議律)할 때에 오로지 율관(律官)에게만 맡기지 말고, 장관(長官)인 자도 그 능부(能否)를 전최(殿最)에 써서 근만(勤慢)을 칙려(飭勵)하라고 명하고, 또 때가 한더위를 당하였다 하여 승지를 전옥서(典獄署)에 보내어 옥에 있는 가벼운 죄수를 석방하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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