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영조실록52권, 영조 16년 1740년 윤6월

싸라리리 2025. 9. 24. 09: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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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6월 1일 경자

좌의정 김재로(金在魯) 등이 백관을 인솔하여 정청(庭請)하고, 낙창군(落昌君) 이탱(李樘)은 종신(宗臣)을 인솔하여 정청하였으나, 모두 윤허하지 않았다.

 

판부사(判府事) 김흥경(金興慶)이 정청(庭請)의 반열에 참여하지 않았다는 것으로 차자(箚子)를 올려 인구(引咎)하기를,
"신은 이 일에 대해 삼가 미견(迷見)이 있습니다. 왕년(往年)에 대의(大議)가 있었을 때 참람되고 망령스러움을 헤아리지 않고 외람되게 겸형(謙亨)144)  의 의리를 인용하여 논열(論列)한 바가 있었으니, 지금에 이르러 구구하게 나라에 충성하고 임금을 사랑하는 정성에 있어 어찌 감히 스스로 전후를 달리할 수 있겠습니까? 지금 성명(聖明)께서 겸손해 하시는 마음은 한결같이 지성에서 나온 것이니, 바라건대, 더욱 초지(初志)를 굳게 지니시어 더욱 실정(實政)에 힘쓰소서."
하니, 우악한 비답을 내렸다.

 

영부사(領府事) 이의현(李宜顯)도 차자를 올려 정청에 참여하지 않았다는 것으로 인구(引咎)하였다.

 

윤6월 2일 신축

병조에서 경과(慶科)145)  인 무과 초시(武科初試)의 액수(額數)를 계품(啓稟)하니, 5백 명을 뽑으라고 명하였다.

 

이덕수(李德壽)를 대사헌으로, 조적명(趙迪命)을 대사간으로, 안상휘(安相徽)를 사간으로, 신수(申燧)를 헌납으로, 한광회(韓光會)를 정언으로, 이휘항(李彙恒)을 장령으로, 홍상한(洪象漢)을 부수찬으로, 김상적(金尙迪)·이성중(李成中)을 수찬으로 삼았다.

 

좌의정 김재로(金在魯) 등이 백관을 인솔하여 정청(庭請)하고, 밀창군(密昌君) 이직(李樴)이 종신(宗臣)들을 인솔하여 정청하였으나, 모두 윤허하지 않았다.

 

윤6월 3일 임인

백관과 종신이 또 정청하여 재계(再啓)하기에 이르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사헌부에서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윤6월 4일 계묘

백관과 종신이 또 정청하니, 임금이 불러서 접견하였다. 김재로(金在魯)·송인명(宋寅明) 등이 번갈아 아뢰면서 극력 청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내가 애써 따르겠다는 뜻으로 자성(慈聖)께 고한 뒤에야 윤허할 수 있다."
하였다. 임금이 드디어 대내(大內)로 들어가서 수서(手書)로 정청한 계사(啓辭)에 대해 답하기를,
"한더위에 대정(大庭)에서 나의 백료(百僚)들을 지치게 한 지 이제 10일이 되었다. 자전(慈殿)께서 여러 날 정청이 있었다는 말을 들으시고 하교하시기를, ‘그것이 의리가 없는 것이라면 대신 이하의 관원들이 어찌 이 지경에 이르렀겠는가? 더구나 왕년에는 겸덕(謙德)을 돌리어 힘써 따른 적이 있었으니, 어찌 그 유의(遺意)를 우러러 계술(繼述)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시면서 가르쳐 깨우치심이 자상하시었다. 나 소자(小子)가 비록 불초하지만 자전의 마음을 어길 수 없으니, 이것이 내가 힘써야 할 것이다. 따라서 감히 굳게 지키지 못하고 힘써 경들의 청을 따른다. 스스로 처음 먹은 마음을 돌아보니 나도 모르게 부끄러워진다."
하고, 드디어 대신 이하의 관원들에게 명하여 다시 입시하도록 명하였다. 김재로·송인명 등이 번갈아 기뻐하는 뜻을 아뢰고 이어 면계(勉戒)하는 말을 진달하였다. 임금이 김재로에게 하문하기를,
"여덟 글자로 휘호(徽號)를 칭하는 것에 대한 고사가 있는가?"
하니, 김재로가 아뢰기를,
"열조(列朝)에 있었던 일입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자성(慈聖)에게는 두 글자를 올리고 효종(孝宗)에게도 네 글자를 올렸는데 나에게 여덟 글자를 올리는 것은 어찌 지나친 것이 아니겠는가?"
하니, 김재로가 아뢰기를,
"선조조(宣祖朝)와 숙종조(肅宗朝)에는 모두 여덟 글자로 휘호를 올렸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예조 판서 이기진(李箕鎭)에게 하문하기를,
"예관(禮官)은 어떻게 생각하는가?"
하니, 이기진이 아뢰기를,
"큰 덕이 있는 사람은 반드시 그 명호(名號)를 얻게 되는 것입니다. 요순(堯舜)도 수놓은 옷을 입고 거문고를 타는 것을 본디 하던 것처럼 하였으니 전하께서 이를 받는 것도 같은 것입니다. 이는 응당 행해야 할 전장(典章)이고 국조(國朝)의 고사(故事)인 것으로 오늘날의 이 성대한 행사는 마땅히 만대에 전해 보여야 하는 것인데, 어찌하여 이것을 스스로 미안하게 여기십니까?"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내가 이미 존호(尊號)를 받았으니 동조(東朝)146)  께 아울러 올리지 않는다면 정례(情禮)에 있어 서운하다. 옛날에도 그런 일이 있었는가?"
하니, 김재로가 아뢰기를,
"아울러 올리는 예(禮)를 빠뜨려서는 안 될 것 같습니다."
하였는데, 여러 신하들도 모두 김재로의 말과 같았다. 그리고 전례를 상고하여 품(稟)하게 할 것을 청하니, 임금이 입직한 옥당(玉堂) 원경하(元景夏)를 불러서 하문하였다. 원경하가 아뢰기를,
"송(宋)나라 인종(仁宗)은 천성(天聖) 2년에 존호를 받았는데 이어 태후에게도 존호를 올렸으니, 이것이 전례가 될 수 있습니다. 설혹 전거할 것이 없다고 하더라도 동조께는 마땅히 휘호(徽號)를 올려야 합니다."
하니, 임금이 기뻐하면서 말하기를,
"내가 항상 찌푸렸던 눈살을 펼 때가 없었는데 지금 원경하의 말을 듣고서야 비로소 웃음이 나온다."
하였다. 원경하가 《송사(宋史)》를 가지고 와서 승지에게 건네주면서 아뢰기를,
"인종(仁宗) 때 태후(太后)는 있었으나 황후(皇后)는 없었으니, 이는 착간(錯簡)이 아닙니다."
하니, 임금이 기뻐하면서 그가 주밀(周密)하게 고증한 것을 여러 번 칭찬하였다. 이기진이 아뢰기를,
"송나라 때에는 명현(名賢)이 많이 배출되었는데도 이것을 가지고 시비(是非)하지 않았으니, 이는 바로 응당 행해야 할 전례(典禮)인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승지에게 명하여 전교(傳敎)를 써서 내리기를,
"나처럼 재덕(才德)이 부족한 몸으로 어떻게 감히 옛날 성덕(盛德)의 만분의 일이나마 견줄 수 있겠는가? 위로 감히 자전(慈殿)의 뜻을 어길 수 없고, 아래로 여러 사람들의 마음을 거스를 수가 없어서 억지로 힘써 따른다. 그러나 혼자 존호를 받고 자성(慈聖)을 찬양하지 않는다면 마음이 어찌 편안할 수가 있겠는가? 유신으로 하여금 전례(典禮)를 널리 상고하게 하였더니, 송나라 장헌 태후(章獻太后)의 고사가 있었다. 예관으로 하여금 거행하게 하라."
하였다. 김재로가 효종(孝宗)에게도 시호를 올리는 것이 경사(慶事)에 합당하다는 것으로 대증광과(大增廣科)를 설행하기를 청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좌의정 김재로를 존숭 도감 도제조(尊崇都監都提調)로, 공조 판서 신사철(申思喆)·병조 판서 조현명(趙顯命)·호조 판서 이병상(李秉常)을 부제조(副提調)로 삼고, 전 응교(應敎) 김상로(金尙魯)·전 교리(校理) 이덕중(李德重)을 도청(都廳)으로 삼았다.

 

윤6월 5일 갑진

사헌부 【장령 안경운(安慶運)이다.】 에서 전계를 다시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양성 현감(陽城縣監) 여광세(呂光世)는 6월에야 비로소 대동미(大同米)를 징수했는데, 이를 인연하여 아전들이 간사한 짓을 한 탓으로 원망이 떼 지어 일어나고 있으니, 청컨대 파직하소서. 무겸 선전관(武兼宣傳官) 김익신(金翼臣)은 정청(庭請)에 참여하지 않은 채 은밀히 동료들을 사주하여 거짓으로 명첩(名帖)을 만들어 거안(擧案)147)   속에 놓아 두었으니, 청컨대 태거(汰去)하소서. 빙고 별검(氷庫別檢) 이관성(李觀聖)은 사람됨이 어리석고 미련하여 하리(下吏)들에게 모욕을 받았으니, 듣고 본 사람들은 모두 전하여 웃음거리로 삼고 있습니다. 청컨대 태거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여광세의 일은 아뢴 대로 하도록 하라. 김익신의 일은 거조가 비록 놀랍기는 하지만 일이 매우 미세하니, 버려두고 묻지 말라."
하였다.

 

소대(召對)를 행하였다.

 

윤6월 6일 을사

부사직(副司直) 홍호인(洪好人)이 상소(上疏)하여, 상하가 서로 수성(修省)하여 조심스런 마음가짐으로 태평을 보존해 가야 한다는 의리에 대해 말하니, 예사 비답을 내렸다.

 

윤6월 7일 병오

하교하기를,
"존호 도감(尊號都監)에서 만드는 것 가운데 자전(慈殿)께 올릴 것 이외에 옥책(玉冊) 장식은 구리로 은을 대신하게 하고, 싸는 물건은 명주로 비단을 대신하게 하며, 삭금(削金)과 화금(晝金) 붙이는 일체 제거함으로써 후왕(後王)으로 하여금 내가 이렇게 하는 것이 후세의 본보기가 되게 하기 위함임을 알게 하라. 방물(方物)과 물선(物膳)도 더욱 절약해야 된다. 자전께서 또 백성을 위하라는 하교가 부지런하고도 정성스러우셨으니, 이것이 바로 양지(養志)하는 도리인 것이다. 서울의 육조에서 봉진(封進)하는 것 이외에는 모두 봉진을 정지하는 것을 허락한다."
하고, 경과(慶科)인 증광과(增廣科)를 고쳐 정시(庭試)로 설행하도록 명하였다. 이때 임금이 대신의 말에 의거하여 경사에 합당한 증광과로 할 것을 명하였는데, 조금 있다가 또 하교하기를,
"선왕(先王)을 위해서는 정시(庭試)를 설행해야 하고 나를 위해서는 증광과(增廣科)를 설행해야 하는데 경중이 전도되었다."
하고, 정시로 고치라고 명하였다.

 

이제원(李濟遠)·원경순(元景淳)·이성중(李成中)을 삭직(削職)시키라고 명하였다. 이때 이제원·원경순이 별겸춘추(別兼春秋)로 한림(翰林)을 천거하는 단자를 올릴 때를 당하여 이천보(李天輔)를 천거하였는데, 이성중은 한 사람만 천거하는 것은 공정하지 못하다고 하여 그 천거를 저지시켰다. 이제원 등이 상소하기를,
"이성중이 자기의 사당(私黨)이 들어 있지 ’않은 것을 분하게 여겨 저지시키면서 기필코 자기 쪽의 사람을 호거(互擧)하게 하려고 하니, 그 계교가 진실로 교묘하고도 주밀합니다."
하였는데, 소장이 들어가자 임금이 교지(敎旨)를 내려 준절히 꾸짖고 3인을 모두 삭직하게 하였다.

 

소대를 행하였다. 시독관(侍讀官) 김한철(金漢喆)이 아뢰기를,
"백관들이 정청을 오래도록 들어주지 않으시다가 끝에 가서 자성의 하교로 인하여 억지로 그 뜻을 굽혀 힘써 따르셨습니다. 그러나 오히려 당초 겸양을 고집한 아름다움만은 못합니다."
하니, 임금이 가납(嘉納)하였다.

 

윤6월 8일 정미

좌의정 김재로, 우의정 송인명이 경재(卿宰)들을 인솔하여 빈청(賓廳)에 모여 앉아서 존호를 의논하여 정하였다. 대전(大殿)은 지행 순덕 영모 의열(至行純德英謨毅烈)이라고 하고, 대왕 대비전(大王大妃殿)은 현익(顯翼)이라고 하고, 중궁전(中宮殿)은 혜경(惠敬)이라고 하였다.

 

부사직(副司直) 이제(李濟)가 상소(上疏)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신은 근일의 조정에서의 의논에 대해 삼가 이해되지 않는 것이 있습니다. 무릇 인신(人臣)이 된 사람은 누군들 임금을 높이고 싶은 마음이 없겠습니까마는, 임금을 높이는 것이 어찌 반드시 존호(尊號)에만 있겠습니까? 당(唐)나라의 신하인 육지(陸贄)의 말을 살펴보더라도, ‘휘칭(徽稱)과 미명(美名)이 성덕에 무슨 이익이 있겠으며, 미문(彌文)과 성절(盛節)은 실정(實政)에 방해만 끼칠 뿐이다.’라고 했으니, 아마도 대소 신료들이 모두 충량(忠良)한 마음을 품고 조석으로 받들어 보필하면서 우리 임금으로 하여금 요(堯)임금과 순(舜)임금이 되게 하여 참으로 임금을 높이는 것만 못할 것입니다. 하물며 성상께서는 작년과 금년 이래로 잇따라 비상한 지나친 거조가 있어 식견이 있는 사람들의 우려가 아직도 없어지지 않았으니, 보필할 책임을 맡고 있는 사람은 의당 성학(聖學)의 증진에 힘써 임금의 마음을 감동시키고 깨닫게 하여 자주 반복되는 재앙을 영원히 단절시키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명령을 취소하고 뒤에 풍형 예대(豐亨豫大)148)  의 일을 가지고 권명하고 인도하여 완성시켰으니, 신은 삼가 개연(慨然)하게 여기고 있습니다. 바라건대, 성상께서는 깊이 지난 잘못을 징계하시고 함양(涵養)하는 공부에 더욱 힘쓰시어 칠정(七情)의 용(用)으로 하여금 모두 올바르게 되게 하여 거칠고 사납고 전도된 거조가 없게 한다면 종사(宗社)를 위하여 매우 다행하겠습니다."
하였다. 소장이 들어가자 임금이 이르기를,
"일이 이루어진 뒤에 오늘날의 조정 신하들을 아첨하는 것이라고 공격하니, 어찌 춘추(春秋)의 존자(尊者)를 위하여 과실을 숨긴다는 뜻에 어긋나는 것이 아니겠는가?"
하고, 예사 비답을 내렸다.

 

임금이 예조 당상을 인견하여 존호(尊號)를 올릴 때의 의절(儀節)에 대해 의논하고, 이어 하교하기를.
"존호의 자의(字義)가 너무 거창하여 마음이 매우 겸연하다."
하니, 예조 판서 이기진(李箕鎭)이 그렇지 않다는 것으로 극력 진달하기를,
"지나치게 겸연하게 여기는 것이 비록 겸덕(謙德)에서 나온 것이기는 하지만 대성인(大聖人)의 국량(局量)으로는 아마도 이렇게 하는 것은 마땅하지 않을 듯합니다."
하였다. 이기진이 또 아뢰기를,
"지금의 경과(慶科)를 증광과(增廣科)로 실행하지 않고 단지 정시(庭試)로 행한다면 명분이 없게 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전에 동조(東朝)께 존호를 올리고 효종(孝宗)께 시호를 더 올릴 적에도 모두 정시를 설행했는데, 지금 어떻게 내가 존호를 받는 것 때문에 유독 증광과를 설행할 수 있겠는가?"
하였다. 이기진이 또 반복하여 극력 청하기를,
"정시를 설행한다면 제도(諸道)의 거자(擧子)들이 모두 서울에 모여들게 될 것이고 따라서 쌀값이 급등하여 백성들이 편안히 살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하였으나, 임금이 오히려 윤허하지 않았다.
사신은 말한다. "이기진은 당시의 여러 경(卿)들 가운데 가장 이름난 명류(名流)이다. 김재로 등이 바야흐로 존호를 올리기를 청할 적에 이기진이 상소하여 임금에게 받아들이지 말 것을 권하면서 굳세게 정론(正論)으로 자처하였다. 그런데 며칠되지 않아서 전일의 의견을 바꾸어 주대(奏對)에 모두 찬미(贊美)를 일삼는가 하면 심지어 경과(慶科)를 정시(庭試)로 설행하는 것을 가리켜 명분이 없다고 하면서 기필코 증광과(增廣科)로 크게 하려고 하니, 또한 이상하지 않은가? 참으로 김한철(金漢喆)과 이제(李濟)의 죄인인 것이다."


【태백산사고본】 38책 52권 2장 B면【국편영인본】 42책 670면
【분류】왕실-국왕(國王) / 역사-사학(史學) / 인사-선발(選拔)
사신은 말한다. "이기진은 당시의 여러 경(卿)들 가운데 가장 이름난 명류(名流)이다. 김재로 등이 바야흐로 존호를 올리기를 청할 적에 이기진이 상소하여 임금에게 받아들이지 말 것을 권하면서 굳세게 정론(正論)으로 자처하였다. 그런데 며칠되지 않아서 전일의 의견을 바꾸어 주대(奏對)에 모두 찬미(贊美)를 일삼는가 하면 심지어 경과(慶科)를 정시(庭試)로 설행하는 것을 가리켜 명분이 없다고 하면서 기필코 증광과(增廣科)로 크게 하려고 하니, 또한 이상하지 않은가? 참으로 김한철(金漢喆)과 이제(李濟)의 죄인인 것이다."

 

존호를 올릴 때 연여(輦輿)와 의장(儀仗)은 모두 옛것을 그대로 따라서 고치지 말고, 모든 일은 힘써 절약하는 쪽을 따르게 하였다.

 

윤6월 9일 무신

우의정 송인명(宋寅明)이 이제(李濟)의 상소로 인하여 인혐(引嫌)하면서 차자를 올리기를,
"정청(庭請)을 추론(追論)함에 있어 기척(譏斥)이 자못 간절하였습니다만, 신 등의 성실하고 애타는 마음은 신명(神明)에게 질증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모르는 사람은 뒤따라 비난하면서 언자(言者)들로 하여금 신들을 죄주게 하려 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우러러 성덕(聖德)에 누가 되기에 이르지 않는다면 신들의 처지에서는 다행하겠습니다."
하고, 좌의정 김재로도 차자를 올려 스스로 인구(弘咎)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그 허물이 나에게 있으니 더욱 겸연한 마음이 절실하다."
하고, 비답을 내려 위유(慰諭)하였다.
사신은 말한다. "이제(李濟)의 소장은 참으로 나라를 걱정하고 임금을 사랑하는 충언(忠言)이다. 김재로·송인명 등은 인구(引咎)하여 자복(自服)하지 못하였을 뿐만 아니라 이에 감히 신명(神明)에게 질증(質證)하면서 거만하게 잘못이 없음을 자처하고 그의 말을 성덕(聖德)을 더럽히는 것으로 귀결시킴으로써 임금의 노여움을 격발시켜 언자(言者)를 죄주게 하려 하였다. 따라서 진실로 성명께서 허물을 자신에게로 돌리고 특별히 포용을 베풀지 않는다면, 이제는 참으로 남을 비방하고 임금을 무함했다는 주벌(誅罰)을 면할 수 없을 것이니, 어찌 위태롭지 않겠는가?"


【태백산사고본】 38책 52권 3장 A면【국편영인본】 42책 671면
【분류】정론(政論) / 역사-사학(史學) / 사법(司法)
사신은 말한다. "이제(李濟)의 소장은 참으로 나라를 걱정하고 임금을 사랑하는 충언(忠言)이다. 김재로·송인명 등은 인구(引咎)하여 자복(自服)하지 못하였을 뿐만 아니라 이에 감히 신명(神明)에게 질증(質證)하면서 거만하게 잘못이 없음을 자처하고 그의 말을 성덕(聖德)을 더럽히는 것으로 귀결시킴으로써 임금의 노여움을 격발시켜 언자(言者)를 죄주게 하려 하였다. 따라서 진실로 성명께서 허물을 자신에게로 돌리고 특별히 포용을 베풀지 않는다면, 이제는 참으로 남을 비방하고 임금을 무함했다는 주벌(誅罰)을 면할 수 없을 것이니, 어찌 위태롭지 않겠는가?"

 

하교하기를,
"왕년에 정청하였을 때 겸덕(謙德)을 굳게 지킬 것을 앙청(仰請)한 사람이 있었는데, 오늘날 존호를 정한 뒤에 또 이제(李濟)의 말이 있으니, 내 마음이 진실로 기쁘다. 내가 비록 도량은 얕지만 어찌 한(漢)·당(唐) 때의 임금들이 한때 했던 편협한 짓을 할 수 있겠는가? 이 때문에 우악한 비답(批答)을 내린 것이다. 재신(宰臣)이 비록 연로하지만 어찌 이를 모르겠는가? 내가 힘써 따른 것은 여러 사람의 마음에 핍박당해서일 뿐만 아니라, 실은 위로 자교(慈敎)를 받들어 왕년의 일을 우러러 본받은 것이다. 그러나 겸연한 한 가지 마음은 그치지 않고 있다. 나의 일 때문에 성덕(聖德)을 찬양하고 자전(慈殿)에게까지 미쳤으니, 이는 매우 영광스럽고 다행스런 일이다."
하고, 이어 승지에게 명하여 대신과 예관을 입시하게 하라고 재촉하였다. 이날 존호를 정했다는 것으로 전문(箋文)을 올려야 하는데, 대신들이 이제의 상소로 인하여 인혐하고 들어오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임금이 대신과 예조 당상을 인견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존호 가운데 지행(至行)이란 두 글자는 어찌 스스로 보기에도 겸연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니, 대신들이 반복하여 찬양하면서 그것이 그렇지 않다는 것을 극력 진달하였다.
임근이 말하기를,
"신하가 존호를 정하여 올리고 그 임금이 겸양을 고집하여 고친다면, 나에게 있어서 광영일 뿐만 아니라 경들에게도 임금의 뜻을 이루어 준 것이 되니, 어찌 양쪽 다 아름다운 일이 아니겠는가?"
하니, 좌의정 김재로(金在魯)가 아뢰기를,
"이는 신 등이 감히 봉승(奉承)할 수 없는 것입니다."
하였다. 김재로 등이 또 극력 청하기를,
"존호를 올리고 나서 증광과를 설행하는 것은 바꿀 수 없는 떳떳한 법입니다. 이를 고쳐 정시를 설행한다면 이는 폄손(貶損)에 가까운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이에 증광과를 설행하라고 명하였다.

 

윤6월 10일 기유

교리 원경하(元景夏)가 상소하여 물러가게 해줄 것을 청하였다. 이때 원경하가 바야흐로 탕평론(蕩平論)을 주장하면서 이를 매개로 진출할 계책을 세웠고, 또 객기(客氣)가 많아서 남을 업신여기므로 동류들 가운데 미워하는 사람이 많았고, 비방이 시끄럽게 일어났다. 이에 원경하는 용납받지 못할까 두려워하여 드디어 상소하여 물러가겠다고 고함으로써 임금의 뜻을 시험한 것이었다. 임금이 그의 소장을 보고 특별히 불러서 접견하여 하문하기를,
"하주 떠나려고 하는가?"
하니, 원경하가 아뢰기를,
"신이 임금을 섬기는 도리를 대강 알고 있습니다. 국가에 일이 있으면 비록 신을 쫓더라도 신은 진실로 달려오겠습니다. 이제 성교(聖敎)를 받드니 신이 어떻게 차마 아주 갈 수가 있겠습니까?"
하였다.

 

사직 홍현보(洪鉉輔)가 졸(卒)하였다. 선조(宣祖)의 부마(駙馬) 홍주원(洪柱元)의 현손(玄孫)인데, 젊어서 등제하였으나 병을 앓다가 벙어리가 되어 말을 할 수가 없었고, 또 재능도 없었다. 영안위(永安尉)의 손자로서 여러 관직을 거쳐 판서에 이르렀는데, 이때에 이르러 졸한 것이다.

 

윤6월 12일 신해

헌부 【장령 안경운(安慶運)이다.】 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또 계청(啓請)하기를.
"신천(信川) 등 열두 고을의 상정미(詳定米)149)  를 15두(斗) 이외에 2두를 더 징수하게 하는 잘못된 법규를 속히 혁파함으로써 백성들의 고통을 제거하소서,"
하니, 비국으로 하여금 품처(稟處)하게 하였다.

 

윤6월 14일 계축

수찬 김상적(金尙迪)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전하의 실덕(實德)과 실행(實行)은 여러 신하들이 이미 현양(顯揚)하였습니다만 신이 또 그 끝에 면려하는 말을 해도 되겠습니까? 아! 전하의 전후로 지나친 거조는 진실로 사첩(史牒)에서 보지 못하던 것이고 열조(列朝)에서도 듣지 못하던 것이었습니다. 전하와 같은 상성(上聖)의 자질과 학문을 쌓은 공부로 이것이 무슨 일입니까? 작년 봄에 선위(禪位)를 명한 것은 곧 왕년에 합문(閤門)을 닫고 고심하던 것이고, 이번에 벗어버리겠다고 한 것은 또한 종래 각선(却膳)의 고심에서 나온 것입니다. 전하의 이 거조는 비록 천만고에 있지 않았던 지나친 거조이지만, 전하의 이 마음은 또한 실로 천만고에 있지 않았던 고심입니다. 이러한 전하의 고심으로 전하께서 고심하고 있는 것을 잘 행할 수 없다면, 전하의 전후 거조는 단지 지나친 것일 뿐입니다. 이제 전하께서 고심하고 있는 것을 행하려 한다면 오직 그 실효를 거두는 데 달려 있는 것입니다. 전하께서는 지나친 거조가 있고 난 뒤에는 번번이, ‘이것은 나의 일초(一初)이다.’라고 하교하셨는데 일초라고 하신 하교가 이제 몇 번이나 내려졌습니까? 전하의 국사(國事)에 과연 일분 일초(一分一初)의 효험이 있었습니까? 지나친 거조가 있을 때를 당할 적마다 신하들에게 눈물을 흘리시면서 맹세하고 스스로 마음을 고치겠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일이 한 번 지나가고 나면 도로 전일과 같아졌으므로, 전일에 눈을 닦고 귀를 기울이면서 기대하던 사람들이 이제는 도리어 해이해져 절망하고 있으니, 신이 말한 바 실효를 거두는 것은 오직 거조가 온당하게 되는 데 있는 것입니다.
이제 전하께서 당론(黨論)을 난역(亂逆)의 근원이라고 생각하고, 건극(建極)을 당론을 파기시키는 근본으로 생각하며, 인재를 등용하는 것을 건극의 요점으로 생각하고 계신데, 이는 비록 요순(堯舜)이 다시 나온다고 하더라도 바꿀 수 없는 것입니다만, 아는 것이 어려운 것이 아니라 행하는 것이 어려운 것입니다. 전하께서는 시험삼아 생각하여 보소서. 산중에 은거하면서 글을 읽은 선비들을 정초(旌招)150)  하는 것을 부지런하게 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었으나 한 사람도 초치했다는 말을 듣지 못했습니다. 평일에 지우(知遇)하던 신하들은 은례(恩禮)가 융숭하지 않은 것이 아니었지만, 끝내 실용(實用)을 강구한 적이 없었습니다. 재능의 현부(賢否)는 따지지 않고 먼저 그 사람의 물색(物色)을 살펴 진실로 한 가지 일과 한 가지 말이라도 마음에 맞지 않는 것이 있으면, 어제 예모(禮貌)를 갖추어 대우하던 사람을 오늘은 노예처럼 질타하며, 어제 주석(柱石)처럼 여기던 사람을 오늘은 전제(筌蹄)151)  처럼 버립니다. 그리하여 위에서는 심려(心膂)를 의탁할 데가 없고 아래에서는 지체(肢體)를 펼 수가 없게 되었으니, 맹자(孟子)가 이른바, ‘왕께서는 친근한 신하가 없습니다.’ 한 것과 불행하게도 근사합니다. 이것이 어찌 옛 성왕(聖王)들이 어진이를 구할 적에는 수고롭지만 적격자에게 맡긴 뒤에는 평안하다는 의리이겠습니까? 단지 성상께서 사람을 알아보는 명철함에 누만 끼칠 뿐이고 군신의 마음이 서로 잘 맞는 효험은 볼 수가 없습니다. 전하께서 사람을 쓰고 버리는 것이 이와 같은데, 어떻게 피차의 막힌 간격을 제거하고, 피차의 참다운 인재를 구함으로써 당론을 파기하고 세상을 구제할 수 있기를 바라겠습니까?"
하였다. 소장이 들어가자 도로 내어주라고 명하고, 비답을 내리지 않았다.

 

윤6월 16일 을묘

헌부에서 전계를 다시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윤6월 18일 정사

임금이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좌의정 김재로가 옥책(玉冊)을 구리로 꾸미는 것은 마땅하지 않다고 말하면서 금니 옥검(金泥玉檢)152)  이란 글을 인용하여 도금하게 할 것을 청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금니 옥검은 곧 봉선(封禪)할 때의 일이며 삼대(三代) 때의 일이 아니다. 나는 그것을 본받고 싶지 않다."
하였다.

 

통영(統營)과 제도(諸道)의 수영(水營)에 해골선(海鶻船)을 만들라고 명하였다. 이때 전라 좌수사 전운상(田雲祥)이 해골선을 만들었는데, 몸체는 작지만 가볍고 빨라서 바람을 두려워할 걱정이 없었다. 김재로가 통영과 여러 수영으로 하여금 그 제도에 따라 만들게 할 것을 청하니, 그대로 따랐다.

 

이조 판서(吏曹判書) 민응수(閔應洙)를 파면시키고 조상경(趙尙絅)으로 대신 하게 하였다.

 

좌의정 김재로가 아뢰기를,
"조현명(趙顯命)은 품계가 보국 숭록 대부(輔國崇祿大夫)에 이르렀는데도 대신과 서로 읍(揖)을 하니, 조정의 체모(體貌)가 손상됨이 있습니다. 비국(備局)의 유사(有司) 임무에서 체직시켜야 마땅합니다."
하니, 임금이 그대로 허락하였다. 김재로가 아뢰기를,
"임인년153)  의 무안(誣案) 가운데 이희지(李喜之)·김용택(金龍澤) 등을 그대로 두는 것은 또한 마땅하지 않습니다."
하니, 임금이 우의정 송인명(宋寅明)에게 하문하였다. 송인명이 아뢰기를,
"의당 경종(景宗)을 위하여 이들을 그대로 둠으로써 군신의 대방(大防)을 보존 시켜야 합니다."
하였는데, 김재로는 또 그렇지 않다고 변해(辨解)하였으나 임금이 그래도 윤허하지 않았다. 송인명이 이광좌(李光佐)의 장일(葬日)이 멀지 않다는 것으로 사제(賜祭)할 것을 청하니, 그대로 따랐다.

 

윤6월 22일 신유

민응수(閔應洙)을 우참찬으로, 김시형(金始炯)을 형조 판서로, 정우량(鄭羽良)을 이조 참판으로, 이도겸(李道謙)을 사간으로, 서명신(徐命臣)을 헌납으로, 정기안(鄭基安)을 정언으로, 권해(權賅)를 장령으로, 홍봉조(洪鳳祚)를 응교로, 민백행(閔百行)을 교리로, 이종적(李宗迪)·남태제(南泰齊)를 수찬으로 삼았다.

 

윤6월 23일 임술

헌부 【장령 권해(權賅)이다.】 에서 전계를 다시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사전(赦典)이 잦아서 갇혀 있는 죄수가 번번이 모두 사유(赦宥)를 받고 있습니다. 탐리(貪吏)로서 죄가 용서할 수 없는 데 들어 있는 자에 이르러서도 혹은 조사를 행할 적에 깨끗하다는 것으로 벗어나기도 하고 혹은 사면을 받은 것으로 석방되기도 하기 때문에 하나도 죄를 받는 사람이 없으니, 수의(繡衣)154)  를 시켜 탐문하는 의의가 어디에 있겠습니까? 또한 어떻게 탐오(貪汚)를 징계하고 염치를 면려할 수 있겠습니까? 전후에 장죄(贓罪)를 범한 사람을 다시 왕부(王府)155)  로 하여금 엄중한 궁핵(窮覈)을 가하여 율(律)에 의하여 정죄(定罪)하게 하소서."
하니, 그대로 윤허하였다.

 

윤6월 24일 계해

헌부에서 전계를 다시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윤6월 25일 갑자

밤에 목성(木星)이 동정성(東井星)으로 들어가고, 달이 동정성으로 들어갔다.

 

홍계유(洪啓裕)를 응교로, 권현(權賢)을 헌납으로 삼았다.

 

종부시(宗簿寺)에서 아뢰기를,
"신계군(新溪君) 이덕(李德)과 동흥 부수(東興副守) 이훈(李燻)이 다섯 차례나 잇따라 종신(宗臣) 시강(試講)에서 으뜸을 차지하였으니, 근례(近例)에 의거하여 가자(加資)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임금이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좌의정 김재로가 강원 감사에게 가족들을 데리고 가도록 허락했던 명을 정지할 것을 청하였다. 이때 제도(諸道)의 감사에게 모두 가족들을 데리고 가게 하였으나 유독 강원도만 가족들을 데리고 가지 못하게 했으니, 물력(物力)이 조잔한 때문이었다. 이때에 이르러 감사 정형복(鄭亨復)이 물력을 구획(區劃)할 방도를 조목별로 진달하면서 제도에서 가족들을 데리고 가는 준례처럼 해 줄 것을 청하였는데, 김재로가 일에 불편한 점이 많다 하여 그대로 둘 것을 청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김재로가 또 아뢰기를,
"무신년156)  에 절개를 지키다 죽은 사람 홍임(洪霖)을 아산(牙山)에 고장(藁葬)157)  했었는데, 그의 아내가 장차 반장(返葬)하려 하니, 의당 장례에 드는 물품을 돌보아 구휼해야 합니다."
하니, 임금이 이를 윤허하였다. 김재로가 또 아뢰기를,
"나라에 경사가 잇따라 있어서 중죄인이 모두 사유(赦宥)받았으니, 청컨대 이태중(李台重)·김시찬(金時粲) 등도 풀어 주소서."
하고, 우의정 송인명도 아뢰었으나 임금이 윤허하지 않았다. 송인명이 정경(正卿)가운데 죽은 사람이 많기 때문에 재신(宰臣) 가운데서 승진 발탁할 것을 청하니, 임금이 해당자가 누구인가를 하문하였다. 송인명이 드디어 정석오(鄭錫五)·서종급(徐宗伋)·조원명(趙遠命)을 천거하였으나, 임금이 윤허하지 않았다.

 

공신(功臣)의 봉사 자손 가운데 아비가 살아 있으면 적장(嫡長)으로 논할 수 없도록 명하였다. 이때 이홍운(李鴻運)이란 자가 있었는데, 그의 아비가 생존해 있음에도 불구하고 봉사(奉祀)로 현주(縣註)하여 벼슬을 하였다가 대간의 탄핵을 받았다. 임금이 아비가 생존해 있는데도 적장으로 일컫는 것은 윤기(倫紀)에 관계된다하여 특별히 정식(定式)하여 다시는 그런 것을 전례로 삼지 못하게 명하였다.

 

헌부 【장령 안경운(安慶運)이다.】 에서 전계를 다시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근래에 인심이 점점 나빠져서 세변(世變)이 잇따라 발생하는데 흉측한 물건을 묻고서 저주하는 일이 간간이 많이 있으니, 요망하고 간사한 일이 이보다 더 심한 것이 없습니다. 지난번 수구문(守口門)의 수문장(守門將)이, 어떤 여인이 사람의 두골(頭骨)을 몰래 가지고 성문으로 들어오는 것을 체포하고 병조 판서에게 와서 고하였습니다. 포청(捕廳)으로 이송(移送)하여 구핵(鉤覈)하기에 이르렀으나 전례에 따라 자세히 힐문하면서도 엄중한 조사를 가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그가 초사(招辭)에 끌어들인 사람도 포졸을 보내어 체포하지 않았으니 보고 들은 사람으로 놀라고 통분스럽게 여기지 않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해당 포도장에게는 의당 중추(重推)를 시행해야 됩니다. 여자가 끌어들인 사람들도 청컨대 엄중히 사핵(査覈)하여 실정(實情)을 알아낸 다음 율(律)에 의거하여 법을 바루소서."
하니, 아뢴 대로 하게 하고, 포장(捕將)은 파직하였다.

 

윤6월 26일 을축

이보다 앞서 이제(李濟)가 상소하였을 적에 중관(中官)158)  이 이를 봉진(捧進)하면서 인하여 진달하는 말이 있자, 임금이 무엄하다고 꾸짖고 금오(金吾)159)  에 명하여 죄상을 감안하여 처단하게 하였다. 대신 김재로(金在魯) 등이 아뢰기를,
"그것은 은미한 조짐을 막는 도리에 있어 엄중히 감죄(勘罪)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니, 드디어 변방에 귀양보내는 법을 시행하였다. 이때에 이르러 헌납 권현(權賢)이 상소하기를,
"당일 입시한 승지도 의당 엄중한 말로 죄주기를 청하여 그 조짐을 막았어야 했는데, 묵묵히 한 마디의 말도 없이 물러갔으니, 직분을 다하지 못한 잘못에 대해 의당 견책을 가해야 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중관이 진달한 것은 승지가 입시하기 전이었으니 알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하고, 따르지 않았다.

 

윤6월 28일 정묘

장령 권해(權賅)가 상소하기를,
"길주 목사(吉州牧使) 한몽필(韓夢弼)은 대간의 탄핵이 준열하게 발론되었는데도 자처(自處)할 줄을 모르고 있으니, 청컨대 파직하소서."
하였으나, 따르지 않았다.

 

윤6월 29일 무진

정희보(鄭熙普)를 집의로, 이제담(李齊聃)을 장령으로, 성범석(成範錫)·이창의(李昌誼)를 정언으로, 이덕중(李德重)을 응교로, 오수채(吳遂采)를 부응교로, 남태제(南泰齊)를 부교리로, 정휘량(鄭翬良)을 수찬으로, 낙풍군(洛豐君) 이무(李懋)를 사은 겸동지 정사(謝恩兼冬至正使)로, 민형수(閔亨洙)를 부사로, 홍창한(洪昌漢)을 서장관으로 삼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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