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월 1일 기사
임금이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이보다 앞서 호조 판서 이병상(李秉常)이 아뢰기를,
"전세(田稅)를 감면하면 실제의 혜택은 부호(富戶)에게만 돌아가지만, 환모(還耗)160) 를 감면한다면 견감하여 구휼하는 것이 소민(小民)들에게 두루 베풀어집니다."
하니, 임금이 감세 절목(減稅節目)을 만들어 바치라고 명하였다. 이때에 이르러 여러 신하들에게 순문(詢問)하니, 모두 이병상의 말과 같았다. 임금이 말하기를,
"반드시 명분을 올바르게 해야 한다. 그 의(義)만 바루고 그 이(利)는 도모하지 않는다고 한 것이 이것이다. 백성은 지극히 어리석으면서도 신령(神靈)한 것이다. 처음에 이미 감세(減梲)한다고 하였다가 이제 또 고친다면 어찌 백성을 속이는 것이 아니겠는가? 전대로 하교하는 것이 옳다."
하였다.
우의정 송인명이 아뢰기를,
"고 충신(忠臣) 조헌(趙憲)·송상현(宋象賢)·고경명(高敬命)의 자손들이 영락하니, 마음 아픈 일입니다. 전조(銓曹)로 하여금 찾아서 녹용하게 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7월 2일 경오
헌부에서 전계를 다시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간원에서 전계를 다시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7월 3일 신미
임금이 면복(冕服)을 갖추고 태묘(太廟)에 나아가 가을 전알례(展謁禮)를 거행하였다. 봉심(奉審)과 행례(行禮)를 끝마친 다음 이어 영녕전(永寧殿)에 나아가 봉심하고 나서 드디어 환궁하였다.
7월 4일 임신
필선 정언유(鄭彦儒)와 설서 이창유(李昌儒) 등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현재의 급선무는 예학(睿學)을 성취하는 것보다 더한 것이 없는데 강관(講官)을 접견하는 것이 근래에 너무 드무니, 어찌 안타깝지 않겠습니까? 지금은 처서(處暑)가 이미 지났고 초가을의 서늘한 기운이 조금씩 생기니, 의당 요속(僚屬)들을 자주 접견하여 문자를 토론하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예사 비답을 내렸다.
임금이 소대를 행하였다. 《대학연의보(大學衍義補)》를 강하였는데 유신 김한철(金漢喆)이 문의(文義)에 따라 진언(進言)하면서 중들이 도성으로 들어오는 것을 금하게 할 것을 청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유도(儒道)가 융성해지면 이단(異端)은 저절로 종식되는 것이다. 이는 상하가 함께 힘써야 될 일이다."
하였다.
조원명(趙遠命)을 대사헌으로, 신만(申晩)을 부제학으로, 이윤신(李潤身)을 사간으로, 권일형(權一衡)을 헌납으로, 심악(沈)을 정언으로, 윤용(尹容)을 도승지로, 민형수(閔亨洙)을 우윤(右尹)으로 삼았다.
7월 5일 계유
임금이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임금이 병조 판서 조현명(趙顯命)에게 하문하기를,
"지난번에 어떤 유신이 국출신(局出身)161) 의 요과(料窠)를 증가시키라고 진언하였는데 이 말이 어떠한가?"
하니, 조현명이 아뢰기를,
"국출신을 설치한 본의는 정예(精銳)로 양성하려는 것이 아니라 임진 왜란이 있은 뒤에 선조(宣祖)께서 호종했던 장사(將士)들의 노고를 생각하여 그들에게 부료(付料)162) 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지금은 다만 국가의 비용만 허비할 뿐이니, 혁파하는 것이 제일 좋은 방책입니다."
하였다.
수문장(守門將)의 세 자리는 서류(庶類) 출신들을 허통(許通)시키는 계제로 만들도록 명하였다. 이어 권무인(勸武人)163) 이한응(李漢膺)을 불러서 앞에 세워 놓고 조현명(趙顯命)으로 하여금 나와서 보게 하였다. 조현명이 그의 신수가 좋은 것을 성대하게 칭송하니, 임금이 초관(哨官)으로 계차(啓差)하라고 명하였다. 이조 참판 정우량(鄭羽良)이 아뢰기를,
"전하께서 무변(武弁)에 대하여 조금이라도 한 가지 기예(技藝)가 있다는 것을 들으면 문득 불러서 기용하시는데, 유독 사인(士人)에 대해서는 그런 말을 듣지 못했습니다. 이것이 사류(士類)는 가볍게 여기고 무변은 귀하게 여기는 데에 가까운 것이 아니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재신(宰臣)은 송도(松都)에 있으면서 한 사람의 선비라도 얻어 가지고 왔는가? 내가 일찍이, ‘한(漢)나라 고조(高祖)도 진정한 유현(儒賢)을 만나면 반드시 평상에 걸터않아 있지 않고 평상에서 내려와서 절을 하였을 것이다.’ 했는데, 내가 어찌 유자(儒者)를 경시하여 소홀히 여기겠는가? 시상(時象)을 여기에 이르게 한 것은 모두 유자들의 소치인 것이다. 기사년164) 이후로 사문(斯文)의 싸움이 시작되었는데 선왕(先王) 7년에는 옥체(玉體)가 불편하신 가운데에도 마음을 쓴 것이 매우 수고로웠으니, 이는 내가 일찍이 본 것이었다. 처음에는 현신(賢臣)이라 하고 사신(邪臣)이라고 했다가 끝에 가서는 충신(忠臣)이라하고 역적(逆賊)이라 하였으니, 다만 문신(文臣)만 미워할 뿐만 아니라 산림(山林)에 묻혀 있는 선비들까지도 사랑할 수 없었다. 내가 참으로 유자(儒者)가 그러하다는 것이 아니라 일찍이 마음에 절실히 격동된 것이 있었기 때문에 이런 말을 하는 것이다."
하였다.
헌부에서 전계를 다시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소대를 행하였다. 운관(芸館)165) 에 명하여 《치평요람(治平要覽)》을 인간(印刊)하여 올리라고 명하였다.
7월 8일 병자
서명신(徐命臣)을 이조 좌랑으로 삼았다.
장령 이제담(李齊聃)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신이 듣건대, 이제 삼왕(二帝三王)166) 은 천하의 대성인(大聖人)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도 스스로 성인이라고 여기는 마음이 없었기 때문에 임금은 말하기를, ‘나의 잘못을 그대가 바루어 주어야 하니, 그대는 면전에서 순종하고 물러가서 뒷말이 있어서는 안된다.’ 하였고, 그 신하는 말하기를, ‘마음에 게으름이 없고 일에 황탄스러움이 없게 하며 단주(丹朱)167) 처럼 오만함이 없게 하소서.’ 했으며, 심지어 걸주(桀紂)의 난폭함도 오히려 거론하여 경계하면서 숨길 줄을 몰랐습니다. 위에서는 스스로 성인이고자 하는 마음이 없었고, 아래에서는 하기 어려운 일을 하도록 권면(勸勉)하는 정성이 있었기 때문에, 상하가 서로 미덥게 되어 지치(至治)를 보전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후세의 경우에는 비록 영철(英哲)한 임금이 대강 평안한 정치를 이룬 경우가 있었으나, 스스로 자신의 공을 높이고 스스로 자신의 덕을 과장하여 충간(忠諫)하는 사람을 지나치게 들추어 낸다고 하고 아첨하는 사람을 충애(忠愛)하는 것이라고 하고, 오만스럽게 스스로 즐거워 하며 아무도 지신의 뜻을 어기는 이가 없게 만들었습니다. 따라서 국가를 상망(喪亡)시키는 원인이 몸소 자초한 데에서 오지 않은 것이 없는데, 그 시초를 돌아보면 둘로 자른 것처럼 분명할 뿐만이 아니니, 사람은 스스로 성인으로 여기는 마음 때문에 해를 입게 되는 것입니다.
삼가 살피건대, 전하께서는 바야흐로 이제 삼왕을 사범(師範)으로 삼고 후세의 중주(中主)를 감계(鑑戒)로 삼고 계십니다. 그러나 스스로 성인으로 여기는 마음 때문에 간혹 신하들을 경시하는 뜻이 없지 않은 탓으로 한 마디 말과 한 가지 일이라도 간혹 마음에 맞지 않는 것이 있으면 그때마다 위노(威怒)를 행하기가 일쑤입니다. 이런 때문에 말을 진달하는 신하가 감히 마음에 품은 것을 다 아뢰지 못하고, 일을 맡은 신하도 좌우를 둘러보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장차 온 세상이 아첨하면서 구차스럽게 용납되려는 사람으로 빠르게 변해 가고 있습니다. 전하께서 스스로 성인으로 여기지 않으시더라도 신하들이 장차 모두 전하께서 스스로 성인이 되도록 만들 것입니다. 옛날 우리 선조(宣祖)께서 연신(筵臣)들에게 하문하시기를, ‘나를 어떠한 임금에게 견줄 수 있겠는가?’ 하니, 모두 대답하기를, ‘요순(堯舜)과 같은 임금입니다.’ 하였으나, 유독 정언 김성일(金誠一)만이 아뢰기를, ‘요순(堯舜)도 될 수 있고 걸주(桀紂)도 될 수 있습니다.’라고 했습니다. 선조께서 하문하시기를, ‘무슨 뜻인가?’ 하니, 김성일이 대답하기를, 전하께서는 타고난 바탕이 영준(英濬)하니 요순을 배울 수 있습니다. 그러나 간언을 거절하고 스스로 성인으로 여기는 병통이 있으니 이는 걸주가 망한 이유인 것입니다.’ 하자, 선조께서는 얼굴빛을 고치셨습니다. 대저 김성일의 말은 망령되어 이치에 맞지 않는 것이라고 할 만합니다만 성조(聖祖)께서는 이에 노여워하지 않고 가납(嘉納)하셨습니다. 지금 전하께서도 성조(聖祖)의 마음을 마음으로 삼아 비록 김성일 같은 사람이 있을지라도 노여워하지 않고 겸허한 마음으로 기꺼이 듣는다면, 태평스럽고 형통한 정치를 이룰 수 있을 것입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마땅히 유의하겠다."
하였다.
대사성 심성희(沈聖希)가 상소하여 태학(太學)을 변통시킬 것을 진달하고, 묘당으로 하여금 품처하게 할 것을 청하니, 그대로 따랐다. 이때 태학의 장의(掌議)가 거재(居齋)하기를 즐겨 하지 않았고 선비를 배양하는 설비(設備)가 또 넉넉하지 못하였다. 그리하여 심성희가 절목(節目)을 만들었는데 원점법(圓點法)168) 을 엄중히 하여 원점이 법규에 미달될 경우에는 한 번의 과거를 정거(停擧)시키고, 선비를 배양하는 데 드는 수용(需用)은 조가(朝家)에서 이미 절수(折受)하여 획급(劃給)한 것이 있으니, 다시 이정(釐正)하게 해 달라고 청하였다. 이렇게 조항에 따라 부진(附陳)했는데, 소장을 내리자 비국에서 복계(覆啓)하여 혹은 따르기도 하고 혹은 따르지 않기도 하였다. 그러나 일이 모두 미세한 것들이었다.
7월 9일 정축
소대를 행하였다.
7월 11일 기묘
소대를 행하였다.
7월 12일 경진
특별히 이조 참판 정우량(鄭羽良)을 이천 부사(利川府使)로, 이조 좌랑 민통수(閔通洙)를 성환 찰방(成歡察訪)으로 제수하고, 신만(申晩)을 이조 참판으로 삼았다. 이때 민통수와 정우량이 사사로운 혐의가 있어 패소(牌召)를 어기고 정사(政事)를 행하지 않았기 때문에 임금이 분의(分義)에 의거하여 꾸짖고 모두 외읍(外邑)에 보임시켜 내보내면서 당일로 부임(赴任)하게 하였다.
헌부에서 전계를 다시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교리 원경하(元景夏)가 학유(學儒)들이 부황(付黃)169) 한 일로 상소하여 스스로 변명하였다. 처음 원경하가 상소하여 임금에게 탕평(蕩平)의 정치를 권하면서 문성공(文成公) 이이(李珥)와 문원공(文元公) 김장생(金長生)의 말을 인용하여 자기의 말을 꾸몄으므로, 이에 사론(士論)이 떠들썩하게 일어나 공격하였다. 그리하여 청금 유안(靑衿儒案)170) 을 가져다가 원경하의 이름에 황첨(黃籤)을 붙였는데, 급진(急進)하려는 계책을 써서 세상에 아첨하고 패려한 말로 선현(先賢)을 무함했다는 벌목(罰目)을 써서 학사(學舍)에 걸어 놓았다. 또 그의 소장에 선정(先正)과 관작(官爵)·시호(諡號)를 쓰지 않은 것은 선현을 폄모(貶侮)하려는 뜻이 있었던 것이라고 하면서 장차 상소하여 논척(倫斥)하려 하니, 원경하가 크게 노하여 드디어 상소하며 다시 문원공의 소장에 있는 홍범(洪範)의 건극(建極)에 대한 말을 인용하여 실증하기를,
"지금 신의 혈성(血誠)은 아홉 번을 죽는다고 하더라도 후회함이 없을 것입니다. 감히 다시 선정(先正)의 말을 인용하여 전하를 위하여 아룁니다."
하였다. 소장을 봉입(捧入)하니, 우악한 비답을 내렸다.
조명교(曺命敎)를 이조 참의로 삼았다.
7월 13일 신사
임금이 친히 도목정(都目政)171) 을 행하였다. 김진상(金鎭商)을 부제학으로, 홍계유(洪啓裕)를 응교로, 송질(宋瓆)을 사간으로, 박준(朴㻐)을 헌납으로, 이재형(李載亨)을 지평으로, 이창유(李昌儒)를 정언으로 삼았는데 이조 판서 조상경(趙尙絅)과 병조 판서 조현명(趙顯命)의 정사(政事)였다. 임금이 친히 행한 정사는 3일에 이르러서야 끝이 났다. 임금이 전관에게 조잔(凋殘)한 고을의 수령은 특별히 가릴 것을 명하고, 또 서전(西銓)에게 황조(皇朝)172) 의 병부 상서(兵部尙書) 전만추(田萬秋)의 후손인 전득우(田得雨)를 곧바로 총부관(摠府官)에 제수하고 싶다고 하유하니, 조현명이 불가하다고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무슨 뜻인가?"
하니, 조현명이 아뢰기를,
"벼슬은 갑자기 제수해서는 안 됩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황조의 상서 후손이 유랑하여 우리 나라에 와서 살고 있는데, 그의 조부가 남긴 기상은 이를 본 사람에게 모두 공경심을 불러 일으키고 있다. 하물며 그의 손자이겠는가? 천하게 보아서는 안된다."
하니, 조현명이 드디어 전득우를 무겸 선전관(武兼宣傅官)으로 삼았다.
동래(東萊)에 있는, 전쟁으로 사망한 사람들의 무덤을 보수하고 비석을 세워 정표(旌表)하게 했는데, 병조 판서 조현명의 말을 따른 것이었다.
관서(關西) 사람 김영준(金英俊)에 대해 정려(旌閭)하게 하였다. 김영준은 곽산(郭山) 사람인데 4세(世)가 한 집에 같이 살았다. 조현명이 관서백(關西伯)으로 있었을 적에 손수 그의 당호(堂號)를 써서 주었다. 이때에 이르러 조현명이 임금에게 아뢰어 포장(褒奬)할 것을 청하였다. 이때 김영준의 아들 김익필(金益弼)이 수문장으로 서울에 있었으므로 임금이 불러서 하문하기를,
"듣건대 너희는 4세(世)가 한 집에서 산다고 하는데 무슨 방법으로 그렇게 할 수 있는가?"
하니, 김익필이 아뢰기를,
"신의 조부가 자손들로 하여금 의식(衣食)을 함께 하되 다투는 일이 없게 하였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이는 바로 오늘날 사대부들이 부끄럽게 여겨야 할 일인 것이다. 서로 문호를 나누어 서로 싸우는 자들이 어찌 이를 본받지 않을 수 있겠는가? 김영준은 오늘날의 장공예(張公藝)이다."
하고, 이어 하교하기를,
"남당(南唐)의 진포(陳褒)는 10세(世)가 한 집에서 밥지어 먹었고, 당(唐)나라의 장공예는 9세(世)가 함께 살았는데, 매양 이것을 볼 적마다 심상하게 칭탄(稱歎)했었다. 그런데 병판이 진달한 말을 듣고 김영준의 일을 들으니, 만약 특별히 포장(褒奬)하지 않으면 그의 돈목(敦睦)을 어떻게 표창할 수 있겠는가?"
하고, 드디어 도신에게 명하여 4세(世)가 함께 산다는 것으로 그 돈목함을 포장하고 특별히 그 사실을 기록하여 정려하도록 명하였다. 이어 특별히 김영준에게 첨지중추(僉知中樞)를 제수하고 김익필에게는 활을 하사하였다. 뒤에 김영준이 서울에 와서 사은(謝恩)하니, 임금이 불러 보고 하문하기를,
"같이 사는 사람이 모두 몇 사람인가?"
하자, 김영준이 대답하기를,
"자손과 노복까지 합쳐 모두 70여 인입니다."
하니, 임금이 가상히 여겨 포장하였다.
7월 15일 계미
이덕중(李德重) 등 38인을 지제교(知製敎)로 삼았다. 대제학 오원(吳瑗)이 선발한 것이었다.
7월 16일 갑신
집의 정희보(鄭熙普)가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진신(搢紳)들이 외읍(外邑)으로 나가기를 구하는 것은 진실로 성세(聖世)의 아름다운 일이 아닙니다. 일찍이 간장(諫長)을 지낸 권영(權瑩)에게는 이미 외직에 보임할 벌이 없었는데, 갑자기 바닷가의 작은 고을의 수령으로 삼았고, 윤광의(尹光毅)는 지난해 막 남읍(南邑)에서 체직되자마자 또 서쪽으로 나가기를 청하였느니, 이는 선배들이 어버이를 위하여 봉양을 편케 하려는 뜻이 아닌 것입니다."
하였다. 이때 권영은 전 대사간으로 평해 군수(平海郡守)가 되었고, 윤광의는 관직(館職)에 있으면서 고을로 나갈 것을 청하여 용강 현령(龍崗縣令)이 되었는데, 물의(物議)가 권영이 먼 고을로 보임되어 나간 것은 전조의 탓이라고 하였고, 윤광의가 해마다 고을로 나갈 것을 청한 것은 기름진 고을을 점유하려는 계획이므로 그르다고 했기 때문에 정희보가 상소하여 논한 것이었다. 임금이 정희보가 권영은 편들고 윤광의는 공척한 것인가 의심하여 교지(敎旨)를 내려 준절히 책망하였다.
7월 17일 을유
소대를 행하였다.
7월 18일 병술
소대를 행하였다. 선정신(先正臣) 조헌(趙憲)의 5세손(世孫) 조혁(趙㷜)을 인견하고 선정의 행적에 대해 하문하였는데, 조혁이 매우 상세하게 대답하자 임금이 가상히 여겼다. 또 하문하기를,
"선정의 문집이 있는가?"
하니 대답하기를,
"있습니다."
하였다. 또 하문하기를,
"간행했는가?"
하니, 대답하기를,
"힘이 부족하여 하지 못했습니다."
하였다. 운각(芸閣)에 명하여 간인(刊印)하여 그의 자손들과 서원에 반급(頒給)하게 하였다.
7월 19일 정해
임금이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좌의정 김재로(金在魯)가 여기(癘氣)가 바야흐로 치성한 때문에 풍덕(豐德)에 있는 두 능(陵)의 거둥을 정지 할 것을 청하니, 임금이 웃으면서 말하기를,
"내가 부덕하나, 어찌 여역을 두려워하겠는가?"
하고 허락하지 않았다. 이는 장차 중추(仲秋)의 전알(展謁)을 행하려 했기 때문이었다.
오수채(吳遂采)를 집회로, 윤득징(尹得徵)을 사간으로, 이하술(李河述)을 장령으로, 남태혁(南泰赫)을 지평으로, 조경(趙擎)·이성효(李性孝)를 정언으로 삼았다.
7월 20일 무자
좌의정 김재로가 백관을 인솔하고 존호(尊號)를 봉상(奉上)하기를, ‘지행 순덕 영모 의열(至行純德英謨毅烈)’이라고 하고, 대비전(大妃殿)에 존호를 올리기를, ‘현익(顯翼)’이라고 하고, 중궁전(中宮殿)에 존호를 올리기를, ‘혜경(惠敬)’이라고 하였다. 진하(陳賀)하고 반교(頒敎)한 다음 나라에 크게 사면령을 내렸다. 이날 임금이 인정전(仁政殿)에 나아가 책보(冊寶)를 받고, 대신(大臣)이 막 예(禮)를 행하는데 하늘에서 큰비가 내렸다. 임금이 백관들이 비를 맞고 서 있는 것을 민망하게 여겨 의절(儀節)을 간략하게 하여 예를 고루 갖추지 말게 할 것을 명하였다. 예를 마치고 임금이 소차(小次)에 들어갔다가 한참 만에 다시 나와서 판위(版位)로 나아가 백관을 거느리고 대비전의 존호와 책보를 받들어 올렸다. 임금이 대내로 돌아와서 또 대내에서 대비전에 예를 행하였다. 임금이 다시 인정전에 나아가 하례를 받고 교서(敎書)를 반포하였으며, 사령(赦令)을 내릴 적에는 대신이 백관들을 거느리고 의식대로 전문(箋文)을 올렸다. 좌의정 김재로가 명정전(明政殿)의 동쪽 뜰 위로 나아가 중궁전의 존호와 책보를 봉상(奉上)하니, 종친과 문무 백관이 의식대로 예를 행하였다. 처음 뭇 신하들이 존호를 올리려 할 적에 선후를 몰라서 임금에 품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존호를 올리는 것은 의당 자전(慈殿)께 먼저 한 뒤에 나에게 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지금 이 존호는 나 때문에 추상하는 것이니, 의문(儀文)의 절차에 있어 내가 먼저 받아야 한다."
하였으므로, 드디어 임금의 하교에 따라 행하였다. 존호를 올리고 나서 존호를 올리는 데 관한 시말(始末)과 의주(儀註)의 절목을 도감(都監)에서 찬집(纂集)하여 책으로 만들고서 《존숭의궤(尊崇儀軌)》라 명명한 다음 예조에 보관하였다.
교문(敎文)을 반포하기를,
"왕은 말하노라. 처음의 뜻을 굽히고 정청(庭請)을 따라 현호(顯號)를 받았고, 고전(古典)을 상고하여 모의(母儀)를 높임에 있어 성대한 예절을 갖추었다. 이에 은택을 널리 베푸는 뜻을 미루어 성대한 윤음(綸音)을 널리 전한다. 생각하건대, 보잘것없는 자질로 희흡(熙洽)의 대업(大業)을 이어받아 지킴에 있어 영고(寧考)에게 서훈(緖訓)을 받들었지만 어찌 잘 계술(繼述)하는 아름다움이 있을 수 있겠으며, 황형(皇兄)의 큰 부탁을 받았으나 실로 중광(重光)의 아름다움이 부족하였다. 다만 외로운 몸의 지극한 슬픔만이 종신(終身)토록 잊을 수 없을 뿐이고 효우(孝友)가 일컬을 만하다고 한다면 나의 마음에 슬픔만 가중될 뿐이다. 난역(亂逆)을 평정한 것에 이르러서는 어찌 깨끗이 평정한 공이 있다고 할 수 있겠는가? 조종의 덕택이 바야흐로 깊으니 사민(士民)들의 뜻이 화협하고, 천지의 신기(神祇)가 환히 빛나니 요얼(妖孼)이 섬멸되었다. 임어한 지 이미 여러 해가 되었으나, 항상 치화(治化)가 아직도 이루어지지 않은 것이 부끄럽다. 돌아보건대, 신하들이 사랑하여 추대하려는 정성에 있어 열조(列朝)의 융숭한 의식을 따르려고 하지만, 시세(時世)가 어려운 것을 생각하면 진실로 남면(南面)하여 임금 노릇하는 것이 즐러운 줄을 모르겠다. 열조의 높은 공덕을 우러르니 감히 그 뒤를 이을 것을 바랄 수 있겠는가? 조신(朝臣)들이 뜰에 가득 모여 극력 간쟁하는 것이 비록 애타는 정성임을 알고는 있으나, 짐심을 토로하여 많은 말을 한 것은 그것이 지나친 겸손에서 나온 것이 아니었다. 다만 자교(慈敎)의 특별한 권고에 따르게 되어 본심을 끝내 지킬 수가 없었다.
스스로 돌아보건대, 변변치 못한 자질로 외람되게 포양(褒揚)을 감당하게 되었다. 진실로 성인(聖人)이 아니라면 누가 윤리를 극진히 하고 본성을 극진히 할 수 있겠는가? 오직 명철한 임금만이 순수한 덕을 지녔다고 할 수 있는 것인데, 이미 볼 만한 사업(事業)이 없으니 또 어찌 모열(謨烈)이라 일컬을 만한 것이 있겠는가? 아름다운 전례(典禮)를 융숭히 꾸미는 것이 어찌 아름다움을 임금에게 돌리는 마음에 부합된 것이겠는가? 자전(慈殿)의 공덕을 널리 천양(闡揚)함에 있어 융숭하게 하고 싶은 바람이 더욱 간절하다. 어버이를 높이는 것보다 더 큰 것이 없기 때문에 현책(顯冊)을 받들어 올리면서 한없이 기뻐하고, 선조(先祖)에 욕을 끼치는 것을 걱정하기 때문에 이장(彝章)을 어루만지며 두려운 마음을 느낀다. 비록 휘명(徽名)이 걸맞지 않는 것이 부끄럽긴 하지만, 미미한 정성을 스스로 펼 수 있었던 것을 다행스럽게 여길 뿐이다. 경사는 백성들과 함께한다는 상규(常規)를 따르게 되니 예(禮)에 소중한 것이 있고, 대호(夫號)를 만방에 선포하니 유신(維新)할 것을 생각하게 되었다. 이제 이런 기쁨을 찬미하는 때를 당하여 특별히 죄를 탕척(蕩滌)하는 은혜를 베푼다. 이달 20일 어둑새벽 이전의 것은 모두 사유(赦宥)하여 면제하고, 벼슬에 있는 사람은 각각 한 자급(資級)씩 가자(加資)하고 자궁(資窮)인 사람은 대가(代加)하도록 하라. 아! 임심의 기원이 바야흐로 간절하니 나의 회포의 두렵고 조심스러움은 더욱 깊어지고 있다. 때와 기미에 따라 일념(一念)이 혹시라도 해이해질 것을 경계하여, 서로 가르치고 서로 도와서 여러가지 공적이 모두 빛나게 이루어지기를 기약하기 때문에 이에 교시(敎示)하니, 마땅히 알아두어야 할 것이다."
하였다. 【대제학 오원(吳瑗)이 지어 올렸다.】
【태백산사고본】 38책 52권 8장 B면【국편영인본】 42책 673면
【분류】왕실-국왕(國王) / 어문학(語文學)
하교하기를,
"내가 부덕한 몸으로 임어한 지 16년인데, 명령은 여러 신하들을 정제(整齊)할 수 없었고, 은혜는 백성에게 미치지 못하였으므로, 항상 부끄러움을 느끼고 있었다. 그런데 어찌 오늘날 여러 신하들이 나의 마음을 양지(諒知)하지 못하고 열흘이 넘도록 정청(庭請)할 줄 생각이나 했겠는가? 자전의 뜻도 부지런하고 간절하였으므로 감히 고집할 수 없어 감당할 수 없는 청을 마지못해 따르게 되고 감당할 수 없는 호칭을 급히 받게 되었다. 처음 마음을 돌아보건대 부끄러운 마음이 매우 절실하다. 아! 오늘이 나의 초정(初政)이니, 그대 대소 신료들은 나의 이 하교를 체념하여 마음을 씻고 함께 힘을 합해서 우리 나라를 보전시키기 바란다."
하였다.
7월 21일 기축
기청제(祈晴祭)를 행하도록 명하였다.
허옥(許沃)을 집의로, 민계(閔堦)를 사간으로, 이석복(李錫福)·신수(申𢢝)를 장령으로, 정기안(鄭基安)을 지평으로, 박필재(朴弼載)를 헌납으로, 김도(金䆃)를 정언으로 삼았다.
임금이 주강에 나아갔다. 우의정 송인명(宋寅明)이 아뢰기를,
"근일에 대각(臺閣)에서 말이 없을 경우에는 관사(官師)의 법규까지 아울러 무너질 것이고, 말이 있을 경우에는 장차 완전한 사람이 없을 것이니 도리어 혹 폐단이 있게 될 것입니다."
하니, 검토관(檢討官) 홍상한(洪象漢)이 아뢰기를,
"대각은 임금의 이목(耳目)인데, 대신(大臣)이 폐단이 있다고 한 말은 실언을 면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정자(程子)가 말하기를, ‘임금의 궐실(闕失)을 부지런히 공박하여 곤직(袞職)을 보필하는 것은 내가 할 수 있지만, 사대부(士大夫)들이 은미한 일을 들추어 냄으로써 정직하다는 이름을 구하는 것은 내가 차마 하지 못한다.’라고 하였습니다. 대각에 있는 사람으로 하여금 위로 임금의 덕을 보필하고 아래로 관리들의 간사함을 규찰하게 한다면, 그 책임을 저버리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 근래에 언로(言路)가 막혀 있으므로 관사(官師)의 법규를 가탁하여 부정한 방법으로 원한을 갚는 경우가 가끔 있습니다. 그러나 임금의 덕에 대한 궐실에 이르러서는 한 사람도 말하는 사람이 없으니, 이것이 바로 전하께서 스스로 반성해야 할 부분입니다."
하였다.
임금이 영경연사(領經筵事) 송인명(宋寅明)에게 말하기를,
"내가 존호(尊號)를 받은 것은 스스로 돌아보아도 부끄러움이 많다. 그러나 내가 어찌 이것을 가지고 자만하겠는가? 내가 평상시에도 바람이 불거나 비가 올적이면 일찍이 옷을 벗고 잔 적이 없었다. 행례(行禮)한 나머지 내 몸이 어찌 피로하지 않겠는가마는, 피로한 줄 모르고 개강(開講)한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는 것이다."
하였다. 송인명이 김시찬(金時粲)과 이태중(李台重)을 귀양에서 풀어줄 것을 청하니, 임금이 비로소 허락하였다. 송인명이 또 아뢰기를,
"이광좌(李光佐)는 효행이 있으니, 마땅히 정포(旌褒)하여야 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이광좌가 어찌 모두 선(善)하겠는가? 그러나 그의 효행이 탁이하다고 하고 또 삼사(三事)173) 의 반열에 있었으니, 특별히 정포하도록 하라."
하였다.
제도(諸道)의 도신에게 백성들의 고통을 채방(採訪)하여 아뢰도록 명하고, 승지로 하여금 각사(各司)의 관원을 불러 도민(都民)들의 폐막(弊瘼)을 묻게 하였다. 이때 임금이 이미 존호를 받고 나서 이는 초정(初政)이니 마땅히 먼저 백성의 고통을 구휼해야 한다고 여겨 드디어 도민의 폐막에 대해 하문하였는데, 평시서 영(平市署令) 임행원(任行元)이 폐막이 없다고 대답하자, 임금이 노하여 말하기를,
"어찌 그럴 리 있겠는가? 이는 내 면전에서 아첨하는 것이다."
하고, 드디어 임행원을 삭직(削職)하였다.
패초(牌招)를 어긴 대신(臺臣) 오수채(吳遂采)·윤득징(尹得徵)·박준(朴㻐)·조경천(趙擎天)을 멀고 험한 지방으로 보임시켜 내쫓으라고 명하였다. 이는 조강(朝講)을 하라고 명하였는데, 대관(臺官)이 갖추어지지 않았다 하여 정강(停講)하기에 이르렀기 때문에 이 명이 있었던 것이다.
부사직 오광운(吳光運)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전하께서 지난날 지나친 거조가 있었을 적에 처음에는 근심하다가 나중에는 경하하였는데, 오늘날 초정(初政)에 있어서는 처음에 경하하였다가 나중에 근심하고 있습니다. 아! 왕패(王霸)와 치란(治亂)의 기미가 바로 오늘날에 달려 있습니다. 만일 실착(失着)하는 바가 있으면, 황천(皇天)의 보살핌에 답할 수 없고 백성들의 기대에 부응할 수 없게 될 것입니다. 신은 전하께서 조정하시는 것이 그 요령을 얻지 못한 것이 아닌가 염려스럽습니다. 전하께서는 비상한 거조가 있었으나, 곧바로 천일(天日)174) 이 활짝 개여 하의(賀儀)를 거행하였으니, 신민(臣民)의 경사가 진실로 천고에 드문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경사라는 것을 뭇신하를 위하여 설행한 것만은 아닌 것입니다. 전하의 처지에서 말하여 본다면 전하께서 스스로 행하고 스스로 거두어 들인 것이니 무슨 경사가 될 것이 있겠습니까?
후세 사람 가운데는 반드시 이해하지 못하고 사사로이 의논하는 자들이 있을 것이니, 신이 청컨대 분명히 말하여 후세 사람에게 알려도 되겠습니까? 전하께서 비상한 하교가 있을 때를 당하여 사람들은 모두 전하께서 지나친 거조가 있었다고 했으나, 신은 말하기를, ‘이는 전하의 허물이 아니라 곧 뭇신하의 죄이다.’라고 하였으며, 신민의 더없는 경사가 있음에 이르러서는 사람들은 모두, ‘전하께서 갑자기 마음을 고친 것이다.’ 했으나 신은 말하기를, ‘이는 전하가 고친 것이 아니라 뭇신하가 감화시킨 것이다.’ 하였습니다. 처음에는 뭇신하의 죄로 인하여 점차 지나친 거조를 이루었으나, 마침내 뭇신하가 감화시킨 것으로 인하여 갑자기 마음을 고치기에 이르렀으니, 당일의 경사는 뭇신하의 감화를 따른 것에 대해 스스로 경하하는 것이라고 한다면 옳겠지만, 전하께서 갑자기 마음을 고친 것에 대해 스스로 경하하는 것이라고 한다면 불가합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전하께서는 뭇신하들이 내가 감화를 따랐다고 하는 것을 경사로 삼고 뭇신하는 전하께서 그 감화를 허여한 것을 경하로 삼는 것이 또한 옳지 않겠습니까? 오늘날의 뭇신하가 과연 이 일로 인하여 마음을 고치고 생각을 바꾸어 정백(精白)한 마음으로 봉공(奉公)한다면, 전하의 비상하게 지나친 거조가 반드시 후세의 아름다운 이야기가 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진실로 혹 그렇게 하지 않고, 말로는 감화되었다고 하면서 마음은 감화되지 않고 면전에서는 따르면서 마음으로는 따르지 않음으로써 전하의 거조가 천고에 웃음거리가 되게 할 뿐이라면, 뭇신하의 죄는 진실로 천지 사이에 용납되기 어려울 것이며, 천하 후세에서 전하를 장차 어떤 임금이라고 하겠습니까? 신의 지나친 우려로는 폐합(閉閤)할 때의 전후 여러 신하들도 그 사람들이었고 각선(却膳)하였을 때의 전후 여러 신하들 또한 그 사람들이었습니다. 뇌정(雷霆) 같은 노여움에 익숙해져서 상사(常事)로 여기고, 상설(霜雪) 같은 위엄을 편안하게 보아 넘기니, 군신 백료들의 습성이 어찌 전과 다르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겠습니까? 폐합할 때에는 임금의 위엄이 7, 8등급은 떨어졌으며 각선한 뒤에는 왕강(王綱)이 천백 장(丈)은 실추되었으며, 금년 여름에 이르러서는 임금의 위엄과 왕강이 다시 여지가 없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전하의 지나친 거조가 또한 백척 간두(百尺竿頭)에 이르렀으니, 신이 어찌 통곡하면서 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제왕이 뭇신하에 대해 혹은 덕교(德敎)로 감화시키기도 하고 혹은 위형(威刑)으로 억제시키기도 하는 것입니다만, 역사의 기록이 있어 온 이래 지나친 거조로 뭇신하들을 도제(導齊)했다는 말은 듣지 못했습니다. 전하께서는 성철(聖哲)한 자질로 황극의 존귀한 자리에 있으면서 덕교와 위형의 중도(中道)를 잡고 계시므로, 본디 영위할 수 있는 터전이 있는데, 무엇 때문에 딱하게도 이것은 버리고 저러한 전일에 없던 지나친 거조를 하신단 말입니까?
아! 경종(景宗)께서 후사(後嗣)가 없으시어 종사가 귀의할 데가 없었으니, 삼종(三宗)175) 의 부탁은 오직 전하의 한 몸에 달려 있었던 것입니다. 이는 전하께서 비록 잠저(潛邸)에 계실 때일지라도 백성들은 다른 뜻이 없었고 나라에는 다른 말이 없었으니, 계책을 건의할 때를 기다릴 것도 없이 진실로 하늘이 정한 이극(貳極)176) 인 것입니다. 따라서 모든 혈기가 있는 사람이면 누군들 전하를 추대하지 않을 수 있었겠습니까? 만일 전하를 추대할 마음이 없는 자는 효경(梟獍)인 것입니다. 사호(四皓)177) 가 목을 길게 빼고 몹시 기다렸다고 해서 어떻게 이것으로 고제(高帝)에게 두 마음을 품었다고 할 수 있겠으며, 도인(都人)들이 눈을 닦고 몹시 기다렸다고 해서 어떻게 이것으로 진종(眞宗)에게 두 마음을 품었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이희지(李喜之)·김용택(金龍澤)의 무리가 범한 죄는 우리 이극(貳極)을 추대하지 않은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국가를 혼란시킨 데 있는 것이니, 어찌 밖으로 핑계하는 말 때문에 혹시라도 천강(天綱)을 동요시킬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당시의 임금의 토죄가 단지 이희지·김용택의 무리에게만 행해졌을 뿐 흉초(凶招)를 올린 역적 목호룡(睦虎龍)에게는 행해지지 않았으니, 당시에 요권(要權)을 주관하고 있던 자들이 어떻게 그 죄를 변명할 수 있겠습니까? 애석하게도 한 사람의 의사(義士)도 의리를 창도하여 토죄(討罪)하기를 청한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 이후 충성스러운 뜻을 지닌 선비들이 저들에 대한 실형(失刑)을 통분스럽게 여겼으나, 이들에 대한 엄방(嚴防)을 해이하게 하지 않은 것은 진실로 천리(天理)의 정도에 맞는 것이었습니다. 신은 근원을 거슬러서 통렬하게 진달하고자 합니다. 삼가 생각하건대, 화란(禍亂)이 일어나는 것은 반드시 일어나게 된 까닭이 있으니, 일이란 본디 상생 상극(相生相克)의 원리가 있는 것입니다. 만약 50년 동안 일어난 화란의 근원를 논하여 본다면 마땅히 민암(閔黯)·민종도(閔宗道)를 죄의 우두머리로 삼아야 합니다. 진실로 민암·민종도의 변고가 없었다면 이희지·김용택의 무리가 어떻게 점차 배치(背馳)하여 경종(景宗)에 대해 화란을 저지를 수 있었겠습니까? 진실로 흉적 이희지·김용택의 무리가 아니었다면 김일경(金一鏡)·박필몽(朴弼夢)의 무리가 또한 어떻게 연줄을 타서 권세를 얻어 전하에게 역적질을 할 수 있었겠습니까? 그러므로 신은 경종에게 난을 저지른 자는 이희지·김용택의 무리가 아니라 민암의 무리라고 하는 것이며, 전하께 역적질을 저지른 자는 김일경·박필몽의 무리가 아니라 이희지·김용택의 무리라고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김일경의 무리를 다스리려면 먼저 이희지·김용택의 무리를 다스리고, 이희지·김용택의 무리를 다스리려면 먼저 민종도의 무리를 다스리는 것이 곧 천리와 왕강을 바로잡는 것이 될 것입니다. 만일 김일경·박필몽에게 놀란 마음에서 이희지·김용택을 말감(末減)178) 하고, 이희지·김용택에게 분노하여 민암·민종도를 관대하게 다스리는 것은 사리상 올바른 조처가 아닌 것입니다. 천하의 악(惡)은 똑같은 것이므로 인현 왕후(仁顯王后)에게 불충(不忠)하면서 경종에게 충성할 사람이 있다는 것은 이치상 그럴 리가 없는 것입니다. 또 경종에게 불충하면서 전하에게 충성할 사람이 있다는 것 또한 이치상 그럴 리가 없는 것입니다.
신이 삼가 살피건대, 당인(黨人)들이 다투는 것은 충(忠)과 불충(不忠)을 막론하고 모두 악(惡)인 것입니다. 이는 신이 스스로 믿는 것이 매우 독실하며 스스로 생각건대 백세(百世)를 기다려도 의혹되지 않는 것입니다. 아! 천하의 기강(紀綱)은 군신(君臣)보다 더 큰 것이 없고, 천하의 변고는 난역(亂逆)보다 더 큰 것이 없으며, 천하의 법(法)은 난역을 다스리는 것보다 더 큰 것이 없는 법입니다. 그런데 어찌하여 근년 이래로 갑(甲)은 을(乙)을 가리켜 역적이라고 하고 을은 갑을 지목하여 역적이라고 하여 역적이란 말이 곧 다반사가 되어 버렸으니, 이러고도 나라가 망하지 않는 경우는 있지 않았습니다.
제(齊)나라에서 공리(功利)를 숭상하자 주공(周公)이 오히려 후세에 반드시 찬탈하는 신하가 있을 것이라고 했는데, 더구나 역(逆)이라는 글자로 당론(黨論)을 희롱하는 도구로 삼고 있는 것이겠습니까? 대저 시비(是非)는 불변의 도리를 지니고 있는 천성에 있는 것이므로 본디 옮기거나 바뀌어지는 물건이 아닌 것이고, 또 조정에서 정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정인(正人)·군자(君子)는 시비(是非)라는 두 글자를 내어 놓아 천지 사이에 그대로 있게 한 다음 공공(公共)의 의논에 맡기는 것입니다. 따라서 조정에서 취하여 결정을 내릴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그것을 조정에서 취하여 결정하려 하는 자는 모두 득실(得失)에 대해 승부를 다투는 사람들인 것입니다. 갑(甲)과 을(乙)이 서로 시비하는 사이에 영달과 몰락이 곧 판명되기 때문에 대부분 조급하게 서둘러 마치 송정(訟庭)에서 송첩(訟牒)을 안고 있는 사람처럼 하고 있는데, 이는 시비의 여하는 물론하고 요컨대 모두 이익을 구하는 마음에서 나온 것입니다. 이런데 어떻게 진정한 시비가 있을 수 있겠습니까?
우리 전하께서는 기필코 탕평(蕩平)으로 갈등을 없애고 새로운 시상(時象)을 도주(陶鑄)함으로써 환란을 미연에 방지하고, 화란이 닥치기 전에 방지하려 하고 계십니다. 그러나 건단(乾斷)이 부족하고 성지(聖志)가 견고하지 못하여 매양 귀근(貴近)의 지취(志趣)를 살피니, 일이 그 때문에 저앙(低仰)하기도 하고, 스스로 신하의 권투(圈套)에 말려 들어가 조종하는 것이 그 때문에 유이(游移)되어 황극(皇極)을 세워 잘 통솔하지 못하고, 문득 황극을 굽혀서 따르는 까닭에 물에 빠진 것을 건져 준다는 것이 도리어 물결속으로 밀어 넣는 것을 돕는 격이 되고 활쏘기를 가르쳐 준다는 것이 여러 번 구율(彀率)을 개폐(改廢)하는 격이 되어 갖가지 색목(色目)에 대한 말이 연석(筵席) 사이에 넘쳐 흐르고 있으니, 진실로 이미 왕언(王言)의 체통이 아닌 것입니다. 심지어 연신(筵臣)을 가리켜 색목(色目)이 무엇이냐고 묻기도 하고 죄수를 국문할 때 임해서도 당명(黨名)을 힐책하고 있으니, 이렇게 하고도 뭇신하들이 편당하는 것을 금지할 수 있겠습니까? 대저 임금의 존엄으로 위엄과 권병(權柄)이 손에 있고 도용(陶鎔)이 마음에 달려 있는데, 무엇을 금지한들 금지되지 않겠으며 무엇을 가르친들 교화되지 않겠습니까?
왕도(王道)를 하든 패도(霸道)를 하든 오직 뜻이 향하는 데에 달려 있는 것입니다. 지난번 탕평(蕩平)의 정치는 한때의 권의(權宜)에서 나온 것이므로, 인심을 복종시킬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10년 동안 행하여 왔으므로 사람들이 모두 다투어 들어오고 있으며, 비록 들어오려 하지 않는 사람이 있으나, 이는 저들이 또한 전하의 정역(定力)이 부족한 것을 엿보았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만일 금석(金石)처럼 고치기 어렵다는 것을 안다면 저들도 며칠 안에 들어오게 될 것입니다. 가령 인심이 복종하지 않더라도 또한 감히 따르지 않을 수 없는 것인데, 더구나 대공 지정(大公至正)하여 인심을 복종시키는 것이겠습니까? 대저 탕평에 대해 의견을 달리하는 자들은 두 가지 부류가 있으니, 당인(黨人)으로서 탕평을 공격하는 자들은 그 이익을 독점할 수 없게 될까 두려워해서이고, 식견이 있는 사람으로서 탕평을 싫어하는 자들은 탕평의 정치를 행할 수 없다고 여기기 때문인 것입니다. 진실로 황극(皇極)의 되리를 극진히 할 수 있다면 이는 진실로 국가의 복인 것입니다.
아! 전하께서 감화받으신 근원이 그 공평함을 잃게 되면 당론(黨論)을 타파시킬 수 없고, 당론이 타파되지 않는다면 국사를 다스릴 수 없습니다. 시골의 늙은이도 10만 금의 자산(貲産)이 있으면 자손을 위하여 원대한 계획을 경영하고자 하는 법인데, 이제 전하께서 격렬한 당론의 난장(亂場)을 우리 동궁(東宮)에게 물려주려 하시니, 어쩌면 전하께서는 그리도 생각하지 않으십니까? 예로부터 국가의 위망(危亡)은 권병(權柄)이 편중된 데에서 연유하지 않은 것이 없는데 권병의 소재(所在)가 한두 군데가 아닙니다. 혹은 거실(巨室)에게 돌아가기도 하고 엄시(閹寺)179) 에게 돌아가기도 하는데, 명철하고 슬기로운 임금은 그 기미를 살펴 미리 방도를 강구하는 것입니다. 비유하건대, 말에 물건을 싣거나 배에 물건을 싣는 사람이 좌우를 살펴보고 그 경중(輕重)을 고르게 하여 한쪽으로 치우친데가 없게 한 후에야 엎어지거나 전복되는 실패를 면하게 되는 것과 같습니다. 《시경(詩經)》에 이르기를, ‘그 자손을 위해 좋은 모책(謨策)을 남겨 주어 자손이 편안하도록 도와 준다.’ 하였으니, 전하께서는 유념하소서. 우리 전하의 효우(孝友)와 지행(至行)은 백대(百代)에 보기 드문 것이므로, 성대한 공렬(功烈)과 큰 명예(名譽)가 절로 무궁한 장래에 전하여질 것이니, 어찌 정신(廷臣)들의 유양(揄揚)에 의뢰할 것이 있겠습니까? 전하께서는 털끝만큼이라도 과장할 생각이 있지 않았다면, 무신년180) 이후 마땅히 즉시 거행했어야 하는데, 어찌 13년의 오랜 세월을 기다릴 필요가 있겠습니까?
신은 전하께서 요순(堯舜)처럼 되기를 기대하고 있는데, 정신(廷臣)들이 전하를 받드는 것은 한(漢)나라 광무제(光武帝), 당(唐)나라 헌종(憲宗), 송(宋)나라 진종(眞宗)의 일에 불과하니, 어찌 정신들이 임금을 높이는 정성이 옛사람보다 훌륭해서 그런 것이겠습니까? 신이 매우 염려하는 것은 스스로 겸손해 하다가 지나친 과장에 빠지기 쉽고, 이미 풍성하게 했다가 검약한 데로 돌아가기가 어려운 것입니다. 만일 전하께서 이로 인하여 자만하는 마음이 날로 커지고, 조정에서는 이로 인하여 아름다움을 칭송하는 풍조가 날로 심하여진다면 요순(堯舜)은 우선 논할 것도 없고 국가의 안위(安危) 또한 알 수 없게 될 것입니다. 아! 기사년181) 이후에 어찌 민암·민종도를 베어 죽이려는 사람이 없었겠습니까마는, 끝내 발론할 수 없었던 것은 화복(禍福)을 두려워하였기 때문입니다. 임인년182) 이후에 또한 어찌 김일경·목호룡을 제거하려는 사람이 없었겠습니까마는 끝내 분발하여 말하지 못했던 것은 생사(生死)가 두려웠기 때문인 것입니다. 화복과 생사는 역시 작은 일이 아니므로 지나고 나서는 말하기 쉽지만, 당시에는 변별(辨別)하기가 어려운 것이니, 마음과 말이 서로 틀리는 것은 고금이 똑같습니다. 비록 풍교(風敎)가 격앙된 때에도 오히려 적막하기만 했는데, 하물며 습속이 무너지고 난 뒤에는 누가 다시 스스로 확립시키려 하겠습니까? 설사 크게 간특한 자들이 있다 하더라도 사람들이 감히 국가를 위하여 말하는 이가 없는 것은 종사(宗社)의 복(福)이 아닌 듯합니다. 당론(黨論)을 명절(名節)에 견준다면 곡식에 대한 가라지나 주색(朱色)에 대한 자색(紫色)과 같은 것이니, 이는 변별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시비(是非)가 골동품처럼 되어 버리고 추향(趨向)이 분명하지 않아서 오직 작록(爵祿)만을 기준으로 삼는 것은 탕평의 폐단인 것입니다. 그러나 조정하여 억지로 합치시킴으로써 봉예(鋒銳)를 둔화시켰기 때문에 10년 이래로 한쪽을 어육(角肉)으로 만들려는 마음을 크게 부릴 수가 없었으니, 이는 탕평의 공이 아니라고 할 수 없는 것입니다. 만일 전하께서 당론을 타파시켜서 명절을 숭상하고 그 도리를 극진히 하여 그 이름에 부합되게 한다면, 화란을 없애고 폐단을 제거하여 홀로 그 공을 거두게 될 것이니, 어찌 아름다운 일이 아니겠습니까?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유념(留念)하소서."
하였다. 소장을 봉입하자, 임금이 이를 열람하고 드디어 오광운을 대사헌에 특별히 제수하였다. 이어 명하여 불러들이고서 임금이 말하기를,
"경이 진소한 내용이 절실하였다. 혹시 다 말하지 못한 것이 있으면 다시 전달하라. 전례에 따라 상소에 대한 비답을 내리는 것은 특별히 가상하게 여기는 뜻이 아니므로, 불러서 면유(面諭)하는 것이다."
하니, 오광운이 아뢰기를,
"봉선(封禪)과 존호(尊號)는 삼대(三代) 이상의 일이 아닙니다. 한(漢)나라와 당(唐)나라의 여러 임금들이 봉선과 존호 때문에 문득 자만하는 마음을 갖게 되었습니다. 전하께서는 이미 대호(大號)를 받으셨으니 자만하지 마시고 반드시 백성의 근심을 근심으로 삼은 후에야 치화(治化)를 기약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자. 임금이 말하기를,
"내가 어찌 자만하는 마음을 가지겠는가? 마땅히 경이 면계(勉戒)한 뜻을 유념하도록 하겠다."
하였다. 오광운이 아뢰기를,
"뭇신하들은 번번이 당(黨)이 없다고 하지만 편당하는 것은 처음과 같고, 전하께서는 매양 조제(調劑)한다고 하시지만 조제를 기대할 수가 없습니다. 갑(甲)은 옳다고 하고 을(乙)은 그르다고 하는데, 갑과 을 가운데 또한 어찌 참으로 옳고 그른 것이 없겠습니까? 전하께서 조제(調劑)하려고 하신다면, 시비를 분석하여 옳은 것은 옳다고 하고 그른 것은 그르다고 한 후에야 건극(建極)의 정치를 이룩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고, 또 사람을 임용하고 백성을 구휼하는 방도에 대해 아뢰니, 임금이 말하기를,
"경은 나를 잊지 말라. 나도 경을 가상하게 여기고 있다."
하였다. 이어 중관(中官)에게 명하여 호피(虎皮)를 가져다 오광운에게 주게 하였다.
7월 22일 경인
삼전 존호 도감(三殿尊號都監)의 도제조(都提調)와 정사(正使) 이하에게 모두 말을 하사하고 차등있게 시상하였다. 제조 이기진(李箕鎭)·이병상(李秉常), 옥책 서사관(玉冊書寫官) 판서 윤순(尹淳), 수책보관(受冊寶官) 도승지 윤용(尹容), 예방 승지 박필균(朴弼均), 독옥책관(讀玉冊官) 부사과 이석표(李錫杓), 독옥보관(讀玉寶官) 부사과 홍봉조(洪鳳祚), 도청(都廳) 부사과 김상로(金尙魯)·이덕중(李德重)에게는 모두 가자(加資)하였다. 낭청과 감조관(監造官)에게는 말을 하사하기도 하고 준직(準職)183) 하기도 하였다. 제조 조현명(趙顯命)·신사철(申思喆)에게는 모두 가자할 것을 명했는데, 조현명·신사철은 모두 보국 숭록 대부(輔國崇祿大夫)인 까닭에 이조의 계사(啓辭)로 인하여 가자를 정지하고 말을 하사하는 상전(賞典)을 시행하였다.
헌부에서 전계를 다시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7월 23일 신묘
달이 동정성(東井星)으로 들어갔다.
교리 민백행(閔百行)이 상소하여 네 명의 대신(臺臣)을 내쳐서 외읍(外邑)에 보임시킨 것은 너무 지나치다고 말하고, 이어 아뢰기를,
"대성(臺省)을 향하여 한 발자국 내딛는 것도 사람들이 모두 싫어하여 피하고 있으므로, 오늘날의 양사(兩司)는 곧 허함(虛銜)이 되어 고지(故紙)를 등사하여 전하는 것조차 폐각(廢却)하고 있는 실정인데 이는 모두 전하께서 언자(言者)를 싫어하여 야박하게 대한 소치입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구습(舊習)을 씻어 버릴 수 있다면 이런 폐단을 없앨 수 있다."
하였다.
임금이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임금이 오광운(吳光運)의 소장을 가지고 우의정 송인명에게 하문하기를,
"내가 어찌 자만하는 사람이겠는가마는, 오광운의 이 면계(勉戒)를 내가 매우 가상하게 여기고 있다."
하니, 송인명이 아뢰기를,
"그의 소장에서 당을 제거해야 한다는 말은 역시 옳은 말입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오광운·홍경보(洪景輔)는 모두 재능이 있는 사람들인데 다만 국량(局量)이 부족할 뿐이다."
하니, 송인명이 아뢰기를,
"세상에서 신을 의심하는 사람들은 문득 겉으로 탕평을 핑계하고서 안으로 사사로움을 다스리고 있다고 의심하는데 오광운도 또한 그러합니다."
하자, 임금이 말하기를,
"모든 일을 자신에게만 이롭게 하는 일이 없다면, 사람들이 의심하는 것이 나에게 무슨 손상될 것이 있겠는가?"
하였다.
임금이 병조 판서 조현명(趙顯命)에게 하문하기를,
"임인년184) 의 옥안(獄案)은 그 명칭을 고쳤는가?"
하였는데, 대답하기를,
"아직 고치지 않았습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아직도 고치지 않은 것은 잘못이다."
하고, 추고(推考)하라고 명하고, 즉시 고치도록 하였다.
7월 24일 임진
경기 감사 정석오(鄭錫五)를 발탁하여 형조 판서에 임명하였다. 이보다 앞서 우의정 송인명이 정석오 등 3인을 정경(正卿)으로 발탁할 것을 청했었는데, 이때에 이르러 또 아뢰니, 임금이 이를 허락하였다.
채응복(蔡鷹福)을 사간으로, 최성대(崔成大)를 정언으로, 서명신(徐命臣)·원경순(元景淳)을 교리로, 송교명(宋敎明)·한사득(韓師得)을 승지로, 이익정(李益炡)을 경기 감사로 삼았다.
임금이 친히 문묘(文廟)에서 석채(釋菜)를 행하겠다고 명하였다. 이는 성화(成化)185) 경자년186) 의 구전(舊典)을 따른 것이다. 예조 판서 이기진(李箕鎭)이 아뢰기를,
"석전(釋奠)을 친히 행하는 데 대한 의주(儀註)는 작헌례(酌獻禮)를 참작하여 거행하소서."
하니, 임금이 옳게 여겼다.
7월 26일 갑오
임금이 대신과 대사성을 인견하였다. 좌의정 김재로(金在魯)가 석채(釋菜)를 행할 때 동재(東齋)와 서재(西齋)의 유생들이 왕래하면 곤란한 점이 있다 하여 향관청(享官廳)을 어재실(御齋室)로 삼을 것을 청하고, 대사성 심성희(沈聖希)는 본관(本館)이 조잔(淍殘)하다 하여 선혜청(宣惠廳)의 포목(布木)을 획송(劃送)하여 석채의 용도에 보태게 하기를 청하니, 임금이 모두 윤허하였다.
민응수(閔應洙)를 예조 판서로, 홍창한(洪昌漢)을 응교로, 김상적(金尙迪)을 수찬으로, 조태언(趙泰彦)을 집의로, 허옥(許沃)을 사간으로, 정언유(鄭彦儒)를 장령으로, 박치문(朴致文)을 정언으로, 박춘보(朴春普)를 수찬으로 삼았다.
7월 27일 을미
사간 허옥(許沃)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금년에는 과거가 중첩되어 1년 동안 뽑은 선비가 50명에 차게 되었는데, 또 석채 때 시사(試士)하라는 명이 있었습니다. 가을에 비가 곡식을 손상시켜 신곡(新穀)이 영글지 않았는데, 시골의 사자(士子)들이 올라와서 모여들면 폐단이 적지 않을 것입니다. 시사(試士)하는 한 가지 절차는 특별히 정지시키도록 명하시고 시학(視學)할 때의 의절(儀節)에 의거하여 하시더라도 또한 넉넉히 유풍(儒風)을 진작시키고 사림(士林)을 빛내게 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하니, 비답(批答)하기를,
"명을 이미 내렸는데 어떻게 중지할 수 있겠는가?"
하였다.
7월 28일 병신
서명빈(徐命彬)을 대사헌으로, 송수형(宋秀衡)을 대사간으로, 홍창한(洪昌漢)을 집의로, 성범석(成範錫)·이창유(李昌儒)를 지평으로, 이수해(李壽海)를 정언으로, 홍계유(洪啓裕)를 응교로, 이종적(李宗迪)를 교리로, 남태제(南泰齊)를 부교리로, 이성중(李成中)을 부수찬으로, 이덕수(李德壽)를 우참찬으로 삼았다.
간원에서 전계를 다시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7월 29일 정유
석강을 행하였다. 우의정 송인명(宋寅明)이 아뢰기를,
"지난해의 능행(陵幸) 때에 들으니 풍덕 부사(豐德府使)가 횃불을 세우는 데 드는 비용이라고 하면서 과외(科外)로 민결(民結)에 따라 거두어 들인 것이 1천 3백 민(緡)이나 된다고 하니, 엄중히 조사하여 무겁게 다스리소서."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7월 30일 무술
주강을 행하였다.
이기진(李箕鎭)을 대사헌으로, 이성룡(李聖龍)을 대사간으로, 이도겸(李道謙)을 집의로, 박수(朴璲)·이제담(李齊聃)을 장령으로, 이규채(李奎采)를 정언으로 삼았다.
석강을 행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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