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 1일 기해
장령 박수(朴璲)가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파주 목사(坡州牧使) 이사윤(李思胤)은 능행(陵幸) 때의 책응(責應)을 규피(規避)하기 위해 먼저 대신의 행차 때 고의로 나아가 접대하지 않음으로써 예파(例罷)되기를 도모했으니, 종중 감처(從重勘處)하소서. 이번의 대정(大政)이 있은 뒤 성문에 패(牌)을 달아 전관(銓官)에게 추욕을 가했는데 이는 실로 전일에는 있지 않았던 변괴입니다. 포청(捕廳)으로 하여금 기포(譏捕)해서 법을 적용하게 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상참을 행하였다.
임금이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능행(陵幸) 때에 송도(松都)에 들어가서 문관·무관을 시취(試取)하겠다고 명하니, 우의정 송인명이 아뢰기를,
"능행 때 연로의 여러 고을은 윤달에는 월봉(月俸)이 없는데다가 창고의 곡식도 이미 다 없어져서 책응(責應)할 방도가 없으니, 마땅히 선혜청으로 하여금 구획(區劃)하여 경창(京倉)에서 배로 운송하여 지급하게 해야 합니다."
하였다. 송인명이 또 청하기를,
"병조의 돈 3천 민(緡)을 기영(畿營)에 대여하도록 허락하고, 삼군문(三軍門)으로 하여금 각각 돈 2천 민씩을 대여하게 하며, 또 해서(海西)의 상정미 1백 곡(斛)을 송도에 획급하여 책응하는 비용으로 삼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모두 그대로 따랐다. 여러 신하들을 돌아보고 말하기를,
"한번 행행(行幸)하는 데 책응의 번거로움이 이와 같은데, 옛날에는 1년에 다섯 번 순수(巡狩)를 어떻게 했단 말인가?"
하고, 이어 비국에 명하여 모든 과외(科外)의 징렴(徴斂)을 일체 금지하도록 하였다. 또 경기 감사 이익정(李益炡)에게 하유하기를,
"기영(畿營)은 성문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있는데도 외번(外藩)이기 때문에 소명(召命)이 있지 않으면 연대(筵對)할 길이 막혀 민정(民情)을 진달할 수가 없다. 뒷날 빈대(賓對)187) 에는 양도(兩都) 유수(留守)의 예(例)에 의거하여 함께 입시하게 하라."
하였으나, 뒤에 전규(前規)가 없다 하여 그대로 정지하고 행하지 않았다.
함경 감사 박문수(朴文秀)가 병사로 하여금 전정(田政)과 조적(糶糴)을 검찰하게 할 것을 청하였는데, 계문하기에 이르러 여러 신하들이 모두 전일에 없던 일이라고 하니, 임금이 마침내 윤허하지 않았다.
훈련 대장 구성임(具聖任)이 아뢰기를,
"창의문(彰義門)은 바로 인조 반정(仁祖反正) 때 의군(義軍)이 경유하여 들어 왔던 곳이니 마땅히 개수하여 표시해야 합니다."
하니, 임금이 내년 봄에 개수하라고 명하였다.
8월 2일 경자
강화(江華)의 덕적도(德積島)에 진(鎭)을 설치하고 처음으로 첨사(僉使)를 두었다.
임금이 주강에 나아갔다. 검토관 김상적(金尙迪)이 아뢰기를,
"성문에 패(牌)를 단 일에 대해 대신(臺臣)은 당연히 기포(譏捕)할 것을 청해야 하는데, 단지 그 소장 내용에 누가 공평하게 명확히 구분하지 않았겠는가라는 등의 말은 마치 전관(銓官)을 위하여 참서(參恕)하는 것처럼 하였으니, 의태(意態)가 혐오스럽습니다. 대신을 마땅히 먼저 견척(譴斥)하여야 합니다."
하니, 임금이 옳게 여겨 박수(朴璲)를 삭직시키라고 명하였다."
임금이 석강에 나아갔다. 임금이 유신 김상적(金堂迪)·이성중(李成中)에게 말하기를,
"임금은 대공 지정(大公至正)한 마음으로 아랫사람을 대해야 하는데, 지금의 신하들이 누군들 세록(世祿)을 받는 신하가 아니겠는가? 나의 전후의 지나친 거조는 모두 고심(苦心)한 끝에 나온 것인데, 국사를 담당하고 있는 뭇신하들은 또한 어찌하여 이런 나의 뜻을 몸받지 않는가? 간혹 스스로 의심하는 경우가 있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하니, 김상적이 아뢰기를,
"감히 스스로 의심해서 그런 것은 아닙니다. 돌아보건대 지금 국세(國勢)는 어떠하고 세도(世道)는 어떠합니까? 전하께서 전후 지나친 거조가 있었으나. 한갖 실상이 없는 데로 귀결되었습니다. 전하께서는 매양 지나친 거조가 있을 때마다 이를 일초(一初)로 삼는다고 하셨습니다만, 신은 이때가 바로 전하께서 일초로 삼아야 될 때라고 생각합니다. 피차의 시비를 모두 어둑 새벽 이전으로 붙이고, 조정의 마음을 모아 국맥(國脈)을 부지하는 것이 오늘날의 급선무인 것입니다. 인심이 같지 않은 것은 사람의 얼굴이 서로 같지 않은 것과 같은데, 어떻게 일정하지 않은 것이 모두 일정해지기를 바랄 수 있겠습니까? 따라서 전일처럼 널리 하유하려고 사령(辭令)을 허비할 필요는 없습니다. 혹시 대도회(大都會)에 대소신료들을 불러 모아 놓고 종일 바른말을 하게 하고 소회를 끝까지 진달할 것을 허락하신다면, 그 가운데 비록 혹시 지나치거나 미치지 못하는 것이 있다 하더라도 여기에서 양쪽을 잡고 가늠하여 그 중도에 맞는 말을 쓸 경우, 규모를 정하고, 편계(偏係)를 타파할 방도를 강구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번의 대정으로 말한다면 피차를 막론하고 부억(扶抑)하거나 통색(通塞)한 것은 모두 당사(黨私)하는 마음에서 나온 것입니다. 전하께서는 이판·병판을 불러들여 이름에 따라서 하순(下詢)하시어 저들이 막으려고 한 것이 과연 당심(黨心)에서 나온 것이라면 반드시 저들로 하여금 다시 통하게 하도록 하시고, 이쪽에서 막으려고 하는 것이 또한 당심에서 나온 것이라면 반드시 이쪽으로 하여금 다시 통하게 하도록 하소서. 만일 구투(舊套)만 답습하면서 다시 당습(黨習)을 일삼는 자가 있으면, 비로소 일초(一初)의 형정(刑政)을 적용시키소서. 그리하여 정사(政事)와 문학(文學)의 재능을 가진 사람들로 하여금 각기 그 기용을 알맞게 한다면, 전하의 건극(建極)의 공이 이제야 볼 만한 점이 있게 될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폐단에 대해 말하기는 쉽지만 폐단을 구제하기는 실로 어려운 점이 있는 것이다. 비록 여러 신하들을 불러서 묻는다고 하더라도 한바탕 분란만 일으키지 않으리라는 것을 어찌 알겠는가? 나는 여러 신하들이 점점 당습(黨習)을 잊고 오직 국사(國事)만을 생각한다면 서로 화합하여 힘쓸 것을 기대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였다.
8월 3일 신축
임금이 대신을 인견하고, 능행(陵行) 때 연로(輦路)의 경유하는 곳에 있는 대신과 선현(先賢)의 묘소에 의당 제사지내 주어야 한다고 사신(詞臣)에게 명하고, 미리 제문(祭文)을 찬술하게 하였다.
경상 감사 정익하(鄭益河)가 양재구(梁再九)의 일로 장문(狀聞)했는데, 양재구는 양찬규(梁纘揆)의 옥사(獄事)에 간련(干連)되었다가 방면된 사람이다. 스스로 말하기를,
"상변(上變)하여 무신년188) 의 여당(餘黨)으로서 법망에서 누락된 자를 고하려고 합니다."
하므로, 정익하가 수금(囚禁)하고 누차 문초했으나 실정을 알아내지 못하였는데, 또 말하기를,
"서울에 올라가서야 비로소 말할 수 있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그 계사(啓辭)에 대해 조현명(趙顯命)에게 하문하였는데, 조현명이 체포하여 국문할 것을 청하니, 그대로 따랐다. 나래(拿來)하였더니, 황탄하여 물을 수가 없었으므로, 드디어 연좌율(緣坐律)에 의거하여 흑산도(黑山島)에 귀양보내도록 명하였다.
8월 4일 임인
소대를 행하였다. 검토관 김상적(金尙迪)이 아뢰기를,
"조종조(祖宗朝)의 성대했던 때에는 비록 초야에 한 가지 재주와 한 가지 기예를 가진 사람이 있더라도 모두 기용될 수 있었으므로, 사방에 은거하던 사람으로 현달되지 않은 이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전하께서는 인재를 찾는 방도가 경교(京郊)의 아주 가까운 지역을 벗어나지 않고 있으며, 기용하는 사람은 지벌(地閥)이 있는 자이고 뽑는 사람은 서울의 화족(華族)들일 뿐 초야에 있는 사람으로 세상을 위해 기용했다는 말을 듣지 못했으니, 어찌 개연(慨然)하지 않겠습니까? 원컨대, 전하께서는 인재를 찾는 방도에 유념하소서."
하니, 임금이 옳게 여겼다.
사간원 【정언 이규채(李奎采)이다.】 에서 전계를 다시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오광운(吳光運)의 소장은 사물의 핵심을 조종하는 것이 매우 공교하고 배포(排布)가 매우 주밀합니다. 그가 스스로 근원을 거슬러 논하겠다고 한 것은 오로지 현혹시켜 어지럽히는 것으로, 마음은 실로 부정한 짓을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기사년189) 의 군흉(群凶) 가운데 돌아보아 꺼릴 것이 없는 민암(閔黯)·민종도(閔宗道)를 끄집어내어 끊어 결단하는 뜻을 보임으로써 스스로 공정하다는 이름을 붙이고 있습니다만, 그의 연줄을 타고 권세를 얻었다는 등의 말은 김일경(金一鏡)·박필몽(朴弼夢)을 늦추어 놓아 주려는 의도가 드러나 있습니다. 기타 근거없는 말로 농간을 부린 것은 모두 천청(天聽)을 현혹시키려는 것이었는데, 전하께서는 오히려 통촉하지 못하시고 고비(皐比)190) 를 내리고, 또 도헌(都憲)에 제수하셨습니다. 신은 이로부터 간사한 무리들이 기회를 노리고 날뛰게 될까 두렵습니다. 따라서 사정(邪正)을 엄중히 하고 제방(隄防)을 준엄하게 하는 방도에 있어 버려둘 수 없으니, 청컨대, 삭출(削黜)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위에 있는 사람이 공심(公心)으로 조처하였는데, 아랫사람이 사심(私心)으로 공척하니, 이 또한 현혹시키는 데에 가까운 것이 아니겠는가?"
하였다. 이규채(李奎采)가 인피하니, 옥당(玉堂)에서 출사시킬 것을 계청하였다.
8월 5일 계묘
임금이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좌의정 김재로(金在魯)가 관동(關東)에 흉년이 든 상황을 진달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경 등은 구제할 방책을 강구하도록 하라."
하였다. 김재로가 아뢰기를,
"절약하는 것이 급선무입니다."
하니, 임금이 중외의 불필요한 비용을 일체 줄이라고 명하였다. 우의정 송인명(宋寅明)이 청하기를,
"능행(陵行) 때 백관들이 배종(陪從)하는 것도 마땅히 간략하게 하고, 긴요하지 않은 각사(各司)는 모두 제외시키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병조 판서 조현명(趙顯命)이 능행이 있을 때 숙위가 단약(單弱)하다 하여 향군(鄕軍)을 조발하여 호위하게 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훈국(訓局)의 군졸 4초(哨)를 더 배정하고, 향군은 대가(大駕)가 송도(松都)에 머물 때에만 쓰도록 하고 나머지는 모두 제외하도록 하라."
하였다.
수원 부사 이정보(李鼎報)가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본부는 평원(平原)의 넓은 들판에 위치하고 있어서 사면(四面)으로 적을 받는 지역이니, 마땅히 부성(府城)을 쌓아 적을 막는 관방(關防)으로 삼게 하소서."
하고, 또 아뢰기를,
"본부의 마군(馬軍)은 각자 말을 갖추게 하고 있는데, 말이 있는 사람은 열에 한둘밖에 없는 형편입니다. 경군문(京軍門)의 예에 의거하여 홍원(洪原)·대부(大阜) 두 목장의 말을 획급하여 준다면 일이 편의할 것입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려면 정군(正軍) 1인마다 보인(保人) 2인씩 획급하여 말을 준비할 수 있는 바탕을 갖추게 하소서."
하고, 또 아뢰기를,
"계묘년191) 에 다시 양전(量田)한 뒤에 세금을 징수한 허결(虛結)의 수효가 거의 3백여 결(結)에 이르고 있으므로, 온 경내의 원망이 백골(白骨)에게 포목(布木)을 징수하는 것보다 더 심합니다. 삼가 바라건대, 신충(宸衷)으로 결단하시어 특별히 탈감(頉減)하고 유사(有司)로 하여금 품처하게 하여 묘당(廟堂)의 휴지가 되지 않게 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묘당으로 하여금 품처하게 하겠다."
하였다.
이조 참의 조명교(曺命敎)가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작록(爵祿)은 한 나라의 공기(公器)이므로 한 사람이 사사로이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며, 용사(用捨)는 한 나라의 공론(公論)에 의해서 하는 것이므로 한 사람이 사사로이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임금이 호오(好惡)로써 또한 사사로이 주거나 빼앗을 수 없으며, 일체 공론에 부쳐야 하는데, 더구나 신하가 된 사람이겠습니까? 성세(聖世)에 사람을 금고(禁錮)하는 것은 본디 아름다운 일이 아닌데, 성상께서는 문득 오랫동안 저지되었던 사람을 소통(疏通)시키라고 전형(銓衡)을 맡은 관원에게 명하셨으나. 아직 한 사람도 폐기되었던 사람을 기용했다는 말을 듣지 못했으니, 이는 왕언(王言)의 미더움을 보이는 방법이 아닙니다. 지금 병조 판서 조현명(趙顯命)이 처음 전장(銓長)이 되었을 적에 신에게 주머니에서 한 장의 종이를 꺼내어 보였는데, 모두 시종신(侍從臣) 가운데 저지당한 사람들의 성명을 기록한 것으로 무려 수십여 명이나 되었습니다. 신은 누가 무슨 일에 관련되어 폐기되었는지 알 수 없습니다만, 그 가운데에는 똑같은 한가지 일인데도 한사람은 허통하고 한 사람은 폐색하였으며, 혹은 전후 한 사람인데도 옛날에는 허통했다가 지금은 폐색하였으며, 혹은 다른 사단이 없는데도 좌죄되어 폐고된 경우도 간혹 있습니다. 오래 폐고된 사람은 20년 된 이도 있고 가까이는 10년 된 이도 있습니다. 조현명이 스스로 파당(派黨)에 끌리지 않겠다고 장담하였으니, 그 단서를 전석(前席)에서 이미 발론하였고, 성명(聖明)께서도 이미 조용(調用)하라고 허락하셨습니다. 그러나 3년 동안 전조에 있으면서 끝내 감히 기용하지 못했는데, 이는 그의 의도가 어찌 여러 신하들이 모두 영원히 금고시켜야 한다고 한 까닭에 성교(聖敎)를 받드는 것은 마땅하지 못하다고 생각한 것이겠습니까? 이는 진실로 당인(黨人)들의 의논을 두려워하여 그후 뭇사람이 발론하는 평판을 한 몸으로 감당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다시 돌아와 벼슬한다는 것은 이 세상에서는 기대할 수 없으며, 비록 허물을 뉘우쳤다고 하더라도 개과 천선(改過遷善)할 길이 또한 없는 것입니다.
옛날 송(宋)나라는 인후(仁厚)로써 나라를 세웠으나 핵실(核實)하는 정사를 폐지한 적이 없었으며, 으레 산치(散置)된 사람의 이름 밑에 공과(功過)를 상세히 기록하여 해마다 장주(狀秦)하는 것을 우리 나리에서 세초(歲抄)192) 하는 규례처럼 하며 좌죄된 것의 경중(輕重)에 따라 승진시키기도 하고 폄출시키기도 하였는데 그 법이 매우 아름답습니다.
신도 여러 신하들의 이름 밑에 각기 좌죄된 사실을 기록하게 하고 혹시 상세하지 않은 것이 있으면 반드시 대신과 여려 신하들로 하여금 함께 의논하여 품정(稟定)하게 하되, 진실로 구애될 것이 없으면 전조로 하여금 그대로 전일의 직책에 임명시키게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만일 좌죄된 것이 매우 중하다고 하더라도 여러 사람의 의논이 마땅하게 여기지 않을 경우에는 또한 마땅히 그의 죄범(罪犯)을 명명하여 진실로 당사자가 변명할 말이 없게 해야 합니다. 그런 뒤에 작록(爵祿)과 용사(用捨)를 한결같이 온 나라의 공의(公議)에 따라서 당론의 사사로움이 다시 그 사이에세 협잡(挾雜)을 부릴 수 없게 한다면 서로 화협하여 힘쓰는 조짐이 있을 뿐만 아니라, 화기(和氣)를 도양(導揚)하는 하나의 실마리가 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신이 듣건대, 작년부터 당론이 더욱 격렬해져서 옛날에 저지하였던 것도 부족하여 또 새로 저지한 사람들이 많다고 합니다마는, 신은 저지당한 이유가 무슨 일 때문인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요컨대 당습(黨習)을 벗어나지 않는 것입니다.
성상께서 바야흐로 마음을 씻고 면려하여 신칙하고 계시지만 징계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또 따라서 한층 더 격렬해진 것이 이와 같으니, 이것이 어찌 명명(明命)을 우러러 받드는 뜻이겠습니까? 당론이 중지되지 않으면 그 말류(末流)의 화(禍)가 반드시 나라를 망치고야 말 것입니다. 인후(仁厚)한 사람이 음험하고 야박하게 변하고 유선(柔善)한 사람이 아주 잔인하게 변하였으며, 겁내던 사람이 용감해지고 유약하던 사람이 강해져서 자신과 의견을 달리하는 경우에는 원수처럼 질시하여 배척하고, 자신이 좋아하는 경우에는 형제처럼 사랑하여 끌어들입니다. 그리하여 동류를 널리 모아 서로 기관을 장치해 놓고 있는데, 질투하는 것은 편협한 여자들보다 더 심하고 다투는 것은 시장의 거간꾼보다 더하기 때문에 백 가지 폐단과 천 가지 해독이 모두 여기에서 연유됩니다. 도리어 하늘로 머리를 두고 땅을 딛고 있는 옳은 사람을 당성(黨性)을 지닌 소인(小人)의 지경으로 귀착시키는 것을 달갑게 여기면서 자신의 마음을 속이고 임금을 속이는 등 하지 않는 짓이 없었고, 점차 변하여 난역(亂逆)을 함부로 행하게 되었으나, 갑·을(甲乙)로 나뉘어 의견을 달리하고 있으니, 세도(世道)가 크게 변하고 인심이 서로 빠져들고 있는 것도 여기에 연유한 것입니다. 신의 어리석은 생각에 이는 뭇신하의 죄일 뿐만 아니라, 또한 성명(聖明)의 규모(規模)가 확립되지 않고 요령(要領)이 정하여지지 않은 데 연유한 것으로 여겨집니다. 그래서 당을 미워하면서도 끝내 당을 타파하지 못했고 공력을 허비하면서도 끝내 실공(實功)을 거두지 못하게 된 것입니다.
성명(聖明)께서는 일찍이 《희역(羲易)》을 강하신 적이 있으니, 신이 역괘(易卦)를 가지고 우러러 진달하겠습니다. 지금의 당론은 곧 《주역》의 송괘(訟事)입니다. 송사(訟事)라는 것은 아름다운 일이 아닙니다. 그래서 두려워하는 가운데 분수를 지켜 송사(訟事)를 끝까지 하지 않는 것이 길(吉)하다고 했고, 음험한 일을 행하여 표면을 꾸미고 강건함을 믿고 이기기를 요구하면 흉(凶)하다고 했으므로, 성인(聖人)이 초륙(初六)·육삼(六三)·구사(九四)의 효사(爻辭)에 모두 끝에는 길하다는 말을 붙였으니, 이는 사람들에게 송사하는 일이 없도록 면려하기 위해 이와 같이 한 것입니다. 이는 신이 견강 부회한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마음이 굳세어 송사하기를 좋아하는 사람은 번번이 화를 당하는 경우가 많지만, 유하여 송사하기를 즐겨하지 않는 사람은 그 때문에 재앙이 있은 적이 없으니, 더욱 성인의 훈계가 미덥습니다. 구오(九五)의 효사에, ‘송사를 함에 있어 크게 길하다.’고 했는데, 이를 해석하는 사람이 말하기를, ‘크게 길하다고 한 것은 길하면서도 아주 선(善)한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우리 성명께서는 구오(九五)의 존위(尊位)에 계시니 곧 송사의 주인인 것입니다.
만일 송사가 없게 하기를 문왕(文王)이 우(虞)·예(芮)의 임금을 감동시킨 것처럼193) 한다면 이는 진실로 최상인 것이고, 사리를 분변하여 밝히는 것을 중유(仲由)가 편언(片言)으로 결단한 것처럼194) 하는 것도 송사에 있어 이로움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그렇지 않아서 혹은 갑(甲)과 을(乙)이 서로 상대하여 다툴 적에 둘 다 옳다고도 하고 둘다 그르다고도 하며, 혹 갑은 일분(一分)이 그르고 을은 삼분(三分)이 그른데도 이를 구별하지 않고 똑같이 그르다고 하며, 혹은 전후가 똑같은 송사인데도 불구하고 곡직(曲直)과 입락(立落)이 누차 결단되어도 확정짓지 않기 때문에 승자(勝者)는 기뻐하지 않고 패자(敗者)도 겸연하게 여기지 않아 마치 희풍(熙豐) 연간에 한편의 사람들이 진퇴(進退)를 이와 같이 하던 때195) 와 같습니다. 따라서 국맥이 손상을 입고 세급(世給)이 낙하(落下)되어 점차 여지가 없어져 가는데도 그 마음은 더욱 불평하게 여기도 다툼은 더욱 종식되지 않고 있으니, 이것이 이른바 불을 끄려고 하면서 땔나무를 더 올려 놓는 격입니다. 쟁송이 그치지 않게 되면 군사 행동이 뒤따르게 되는 것은 자연스러운 형세이니, 무신년196) 의 변란이 또한 이미 그러한 증험이 아니겠습니까?
지금 이른바 탕평(蕩平)이라고 하는 것은 곧 《주역》의 비괘(比卦)에 해당됩니다. 군사행동이 있은 뒤에는 반드시 서로 친보(親輔)한 후에야 평안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비괘의 도(道)는 성신(誠信)을 근본으로 하고 있는데, 이를 경계한 것으로는 비인(匪人)에 견준다고 했습니다. 중정(中正)한 사람을 얻지 못한다면 위험한 데에 처하게 됨을 면하지 못할 것이므로, 머리가 없게 된다[无首]고 결말 지었는데, 머리가 없게 된다는 것은 유종의 미가 없게 된다는 뜻이니, 이것이 어찌 오늘날 본받아 감계(鑑戒)해야 될 것이 아니겠습니까? 우리 성명(聖明)께서는 일국에 임어(臨御)하시어 중인(衆人)을 다스리고 계시니, 어떻게 집집마다 찾아다니면서 깨우치고 타일러 주어 사람마다 친비(親比)하게 할 수 있겠습니까? 나라를 몸처럼 여기는 대신을 얻어 친비하는 도리를 드러내는 책임을 맡기고, 경대부(卿大夫)는 대신과 친하게 하고 시종(侍從)하는 여러 신하들은 경대부와 친하게 하여 조정 안에서부터 밖으로 나아가게 하고 큰 것에서부터 작은 것으로 나아가게 하여 쟁론을 없애어 보합(保合)시킴으로써 함께 대도(大道)에 이르게 한다면, 누군들 임금을 높이고 윗사람과 친하여 한결같이 서로 친비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하니, 비답하기를,
"진달한 것은 마땅히 면려하도록 하겠다."
하였다.
주강을 행하였다.
8월 6일 갑진
학유(學儒) 서종욱(徐宗燠) 등 3인의 이름을 유적(儒籍)에서 삭제하고 상학(庠學)197) 에서 방출(放黜)하도록 명하였다. 처음 원경하(元景夏)가 소장에 선정(先正)의 벼슬과 시호를 쓰지 않았다 하여 선현(先賢)을 폄모(貶侮)한 것이라고 공격하며 부황(付黃)의 벌을 시행하였고, 또 그의 소장에서 인용한 고 상신 김육(金堉)에 대해 단지 상신(相臣)이라고만 일컫고 벼슬과 시호를 쓰지 않은 채 김공(金公)이라고 했는데, 이는 당저(當宁)198) 의 외선조(外先祖)이니 벼슬과 시호를 쓰지 않고 성명을 지척한 것은 그 임금에게 무례한 짓을 한 것이라 하여 정인홍(鄭仁弘)에게 견주어 통문(通文)을 돌려 공척하기에 이르렀다. 원경하가 이를 보고 분노하였는데, 또 상소하여 스스로 변명하기를,
"옛날 선정신 이이(李珥)는 경오년199) 에 올린 차자(箚子)에서, ‘심연원(沈連源)은 평소 사의(邪議)에 간여하지 않았습니다.’ 했는데, 심연원은 곧 청릉 부원군(靑陵府院郡) 심강(沈鋼)의 아비로 그의 벼슬은 영의정이었고 그의 시호는 충혜공(忠惠公)이었습니다. 그런데도 선정은 차자에서 단지 성명만을 썼는데, 이는 문세(文勢)가 마침 그러했기 때문입니다. 선정의 차자를 그들도 혹 보았을 것인데, 이제 이에 무례하다는 것으로 신을 무함하는 것은 무슨 까닭입니까? 또 신이 소장에 선정이라고 쓰지 않았다 하여 신의 죄안(罪案)을 얽어서 선현을 무함했다고 했습니다. 대저 선배들은 장주를 그 문세로 보아 쓸 필요가 없는 경우에는 쓰지 않았던 것을 신은 고증할 수가 있습니다. 문정공(文正公) 송준길(宋浚吉)이 정유년200) 에 올린 소장에, ‘선조 때에는 김장생(金長生)·장현광(張顯光) 같은 이들이 특별히 이 예(禮)를 받았습니다.’라고 했고, 신의 소장에서도, ‘김장생·장현광은 도학(道學)으로 진용(進用)된 사람입니다.’라고 했습니다. 신이 진실로 문원공을 경모(輕侮)했다면 어떻게 도학이라고 일컬었겠습니까?"
하고, 이어 사직하고 물러가기를 청했는데, 말이 극도로 격렬하게 질책하는 것이었다. 소장을 봉입하자 임금이 대사성 심성희(沈聖希)와 좌의정 김재로(金在魯)를 인견하고, 원경하의 소장을 보였다. 김재로가 아뢰기를,
"유생이 조사(朝士)에게 벌을 시행할 수 없는 것이 전례인데, 연소한 무리가 무지하여 망령된 짓을 한 것입니다."
하자, 임금이 말하기를,
"원경하가 무슨 마음으로 감히 선현을 업신여겼겠는가? 원경하는 본디 탕평론을 주장한 사람이니 원경하를 비방하는 것은 곧 나를 비방하는 것이다. 유생도 또한 신하이니, 그들을 가르치지 못한 것은 부형(父兄)들의 잘못이다."
하였다. 이때 임금이 매우 노하여 그 부형들을 죄주려 하였는데, 김재로가 부드러운 말로 구해(救解)하였다. 임금이 또 유생들을 국문하려고 형방 승지를 부르도록 명하였는데, 김재로가 반복하여 아뢰니 임금의 뜻이 조금 풀렸다. 드디어 하교하여 그들의 죄를 들어 책망하고, 단지 유적(儒籍)에서 삭제시키고 방출시키라고만 명하였다.
임금이 소대를 행하였다. 시독관 남태제(南泰齊)가 붕당(朋黨)이 나라를 혼란시키는 화에 대해 극언(極言)하고, 검토관 정휘량(鄭翬良)이 원경하는 훌륭한데 당인들에게 배척당하였다는 것을 성대하게 일컬었다. 남태제가 또 잇따라 아뢰니, 임금이 남태제 등이 원경하를 구제하는 것은 공심(公心)에서 나온 것이라 하여 매우 기뻐하고 포유(褒諭)하였다.
8월 8일 병오
임금이 태학(太學)에 나아가 석채례(釋菜禮)를 행하였다. 태학에 나아가서는 직접 칠언 절구(七言絶句)와 소지(小識)를 지어 향관청(享官廳)의 벽에 붙였다. 이는 구전(舊典)을 추모하여 서술하고 사습(士習)을 면려하는 내용이었다.
8월 9일 정미
임금이 석채례를 행하고, 태학(太學)의 장의(掌議)를 불러서 하유하기를,
"내가 군사(君師)의 지위에 있으면서 이제 2백 년 동안의 성대한 전례(典禮)를 수거(修擧)했는데, 이는 겉치레가 아닌 것이다. 사습(士習)이 경박하다는 것은 그대들도 말한 바 있는데, 그것을 알기가 어려운 것이 아니라 행하기가 어려운 것이다. 그대들이 경박한 습성을 제거할 수 있다면 다른 유생들도 본받을 것이다. 원점(圓點)이 과거에 응시하게 하기 위해 설치한 것이라 하나, 내가 반드시 원점을 찍게 하는 것은 공리(功利)로 인도하려는 것이 아니다. 성묘(聖廟)를 지키는 것은 곧 선비로서 당연한 도리이다. 선사(先師)가 여기에 있으니 그대들은 힘쓰도록 하라."
하였다. 시사(試士)한 뒤 이창수(李昌壽) 등 4인을 뽑았다. 임금이 처음에는 3명을 뽑으라고 명했다가 막 성명을 개탁(開拆)할 즈음에 임금이 예차(預差) 가운데 한장의 시권(試券)을 가져다가 열람하고서 말하기를,
"나의 뜻은 인재를 아끼는 데 있다."
하고, 드디어 등급을 쓰도록 명하였는데, 그 이름을 개탁하니 바로 인평군(仁平君) 이보혁(李普赫)의 아들 이중조(李重祚)였다. 임금이 기뻐하면서 말하기를,
"공신에 대한 제목에 훈신(勳臣)의 아들이 입격했으니 기이한 일이다."
하였다.
조명겸(趙明謙)을 대사간으로, 정언유(鄭彦儒)·이석복(李錫福)을 장령으로, 김도(金䆃)·정기안(鄭基安)을 지평으로 삼았다.
8월 10일 무신
임금이 주강에 나아갔다. 검토관 김상적(金尙迪)이 아뢰기를,
"전하께서는 일을 당하면 격정을 촉발하여 번번이 감히 들을 수 없는 교지를 내리십니다. 지난번 유생들에게 처분을 내리셨을 적에도 사령(辭令)이 매우 과중(過中)했다고 합니다. 사령이 번거로우면 도리어 설만한 데로 돌아가니, 이 뒤로는 마땅히 경계해야 할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옳게 여겼다.
석강을 행하였다.
대제학 오원(吳瑗)을 호당(湖堂)201) 에 선발하라고 명하였는데, 하교하기를,
"만일 호당에 선발한다면 명관(名官)도 반드시 더 교만하여질 것이다."
하고, 드디어 그 명령을 정지하였다. 신급제(新及第) 이중조(李重祚)를 인견하고 하교하기를,
"그대가 어제 이전에는 유생이었지만 내일 이후로는 조관(朝官)이다 그대의 아비가 세운 무신년202) 의 훈공에 대해 내가 항상 가상하게 여기고 있다. 옛사람이 말하기를, ‘거(莒)에 있었을 때를 잊지 말라’203) 고 하였으니, 그대도 그대 아비의 훈공을 생각하여 또한 스스로 면려하도록 하라."
하고, 이어 친히 ‘재능을 아껴 승부(陞付)하니 그대 아비의 훈공을 가슴에 새기라.[惜才陞付銘爾父勳]’는 여덟 글자를 써서 하사하였다.
8월 12일 경술
이하술(李河述)을 장령으로, 어석윤(魚錫胤)을 지평으로, 남태기(南泰耆)를 정언으로, 윤심형(尹心衡)을 부응교로, 정이검(鄭履儉)·윤광의(尹光毅)를 수찬으로 삼았다.
성환 찰방(成歡察訪) 민통수(閔通洙)와 이천 부사(利川府使) 정우량(鄭羽良)에게 왕래하면서 근친(覲親)하게 하였다. 외직에 보임된 모든 사람은 감히 도성에 들어오지 못하게 되어 있는데, 임금이 효도로 다스리는 정사에 의거하여 이 명이 있게 된 것이다. 아랫사람에게 인덕(仁德)을 베풀면서 이와 같이 곡진하게 하는 일이 많았다.
8월 16일 갑인
임금이 소대에 나아갔다. 시독관 남태제(南泰齊)가 아뢰기를,
"지금 무과(武科)는 거의 1만여 명이나 되니, 마땅히 인재를 기용하여 답답함을 소통시킬 방도를 생각해야 합니다."
하였는데, 검토관 김상적(金尙迪)이 아뢰기를,
"예로부터 도적이 발생하는 근심이 뜻을 잃은 무리들에게서 나온 경우가 많았는데, 황소(黃巢)204) ·장영(張英)205) 이 이런 자들입니다. 남태제가 무사들이 적체되는 것을 근심하였는데, 그 말이 옳습니다. 이는 모두 과제(科第)가 잦은 데에서 연유한 것입니다. 이름이 사적(仕籍)에 기재되었는데도 일명(一命)206) 도 받지 못하면 그 원망이 도리어 나라에 돌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장차 어찌하면 좋겠는가?"
하자, 김상적이 아뢰기를,
"과거의 액수를 줄이고, 출신청(出身廳)을 설치하여 재주를 시험하여 부료(付料)하였다가, 이어 또 군문에 천전(遷轉)시키고 내삼청(內三廳)에 이의(移擬)하는 것을 문신(文臣)을 분관(分館)207) 하는 예와 같이 한다면, 사로(仕路)를 맑게 할 수 있고 적체를 소통시킬 수 있을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옳게 여겼다.
대사성에게 한 달에 세 번씩 태학(太學)에 들어가서 여러 유생들을 고강(考講)하여 근만(勤慢)을 권면하는 것을 《주례(周禮)》의 승학(升學)하는 예와 같게 하고, 식년(式年)마다 제도(諸道)로 하여금 오경(五經)에 능통한 한 사람을 태학에 천거하여 사학(四學)에 입학하는 것을 허락하도록 명하였다.
조상명(趙尙命)을 대사간으로, 민계(閔堦)를 사간으로, 신수(申𢢝)를 헌납으로, 안집(安𠍱)과 유만추(柳萬樞)를 정언으로, 박필균(朴弼均)을 도승지로, 한사득(韓師得)·이세진(李世璡)·조명리(趙明履)·송교명(宋敎明)·김상로(金尙魯)를 승지로 삼았다.
8월 20일 무오
임금이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권신(權賮)을 헌납으로, 홍계유(洪啓裕)를 부응교로, 원경하(元景夏)를 수찬으로, 이천보(李天輔)를 부수찬으로, 박문수(朴文秀)를 대사헌으로, 송질(宋礩)을 집의로, 송시함(宋時涵)을 장령으로, 조윤제(曹允濟)와 홍상한(洪象漢)을 지평으로, 민형수(閔亨洙)를 도승지로, 신덕하(申德夏)를 경상 우병사로, 이의익(李義翼)을 경상 좌병사로, 신만(申漫)을 전라 병사로 삼았다.
주강과 석강을 행하였다.
8월 21일 기미
달이 동정성(東井星)으로 들어갔다.
장령 이하술(李河述)이 상소하여 조명교(趙明敎)의 소장 내용이 그르다고 공척하니, 임금이 협잡(挾雜)한 짓을 하는 것이라고 나무랐다. 이하술이 인피(引避)하기를,
"조명교의 소장에는 조종하는 의도가 환히 드러나 있습니다. 격렬하게 다투다가 실패한 것을 경계하면서 도리어 지색당한 여러 사람들이 기용되기를 바랐고, 그들에게는 음곡(陰谷)에도 봄이 돌아온다고 면려하면서 도리어 화를 당한 집안의 자손들은 막으려 하였는데, 계교가 억양(抑揚)하는 데 있었기 때문에 스스로 그 말이 모순된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고 있습니다. 무신년의 역변(逆變)에 이르러서는 송사(訟事)가 극도에 이르면 군사 행동이 뒤따르게 된다는 데에다 비유하였고, 오늘날은 비도(比道)가 끝이 없는 것과 같으니 뒷날의 군사 행동을 기필할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아! 비유를 끌어댄 것이 어찌하여 이토록 의리에 어긋나는 것입니까? 신은 화심(禍心)를 축적하여 범상(犯上)한 역적은 한때 따뜻하게 보호해 주는 은혜로 감화시킬 수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하니, 예사 비답을 내렸다가, 곧 엄중한 하교를 내려 삭직하게 하고 원소(原疏)는 또한 기록하지 말도록 명하였다.
8월 22일 경신
천둥하고 번개가 치고 우박이 내렸다.
8월 23일 신유
조명리(趙明履)를 대사간으로, 한광회(韓光會)·최성대(崔成大)를 지평으로, 김한철(金漢喆)을 부교리로, 정휘량(鄭翬良)을 수찬으로, 채응복(蔡膺福)을 집의로, 권해(權賅)를 장령으로 삼았다.
8월 27일 을축
집의 채응복이 상소하여 이하술(李河述)을 삭직하라는 명을 환수할 것을 청하니, 엄한 교지(敎旨)를 내려 책망하고 소장을 돌려주게 하였다.
8월 29일 정묘
임금이 후릉(厚陵)208) 에 나아가기 위해 판부사(判府事) 김흥경(金興慶)을 유도 대신(留都大臣)으로 명하였다. 청담(淸潭)에 이르러 길가의 벼이삭을 가져오라고 명하여 직접 살펴보고 하교하기를,
"동풍(東風)에 이삭이 말라 죽었구나. 이삭이 말라 죽었으니 백성들이 어떻게 먹고 살겠는가?"
하였다. 저녁에 파주(坡州)에 주차(駐次)하였다.
8월 30일 무진
임금이 파주에서 출발하여 도중에 선정신 성혼(成渾)의 묘를 보고 교자(轎子) 안에서 허리를 굽혀 예(禮)를 표하고 직접 제문(祭文) 두 구(句)를 지었으니, 말하기를,
"지금 나의 고심(苦心)은 곧 선정의 마음이다. 길가 교자 안에서 허리 굽히니 감개한 마음 한없이 깊도다."
하였다. 이를 치제(致祭)의 제문(祭文)에 첨입(添入)하라고 명하였다. 박석현(朴石峴)에 이르러서는 부로(父老)들을 모아 놓고 농사의 형편을 하문하고 나서 탄식하기를,
"벼 이삭이 된 서리에 손상되어 빈 껍질만 남았으니, 그대들이 어떻게 살아갈 수 있겠는가?"
하고, 한참 동안 가엾게 여겼다. 임진(臨津)에 이르러 교리 김한철(金漢喆)이 아뢰기를,
"이 곳은 서로(西路)의 요충지입니다. 앞으로는 삼면(三面)에 천연의 요새가 있고 또 긴 강이 가로막고 있어 버리기 아까운 곳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이는 스스로 덕정(德政)을 닦기에 달려 있는 것이다. 지세(地勢)가 험준한 데 있는 것이 아니라는 말을 듣지 못했는가?"
하였다. 부교(浮橋)를 건너 북쪽 언덕에 이르러서는 선정신 이이(李珥)의 화석정(花石亭)의 옛터를 하문하니, 승지가 손가락으로 가리키면서 아뢰기를,
"저 남쪽 언덕 위에 소나무와 전나무가 있는 가운데 날아갈 듯이 드러나 있는 것이 그 정자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아까는 우계(牛溪)의 묘를 보았고 지금은 선정이 거처하던 곳을 바라보니, 덕용(德容)을 접한 것 같아 창연(愴然)한 마음이 배나 간절하다."
하고, 또 직접 제문(祭文) 두 구(句)를 지어 치제(致祭)하는 제문에 첨입하도록 명하였다. 저녁에 송도(松都)에 이르러서는 곧바로 추궁(楸宮)209) 에 나아갔다. 임금이 어비(御碑)를 어루만지면서 슬픈 마음을 금하지 못하였으니, 이것은 숙종(肅宗)께서 계유년210) 에 송경(松京)에 거둥하였을 적에 칠언 절구(七言絶句)로 된 시 하나를 직접 돌에 써서 새겨 세운 것이었다. 임금이 그 운(韻)에 따라 지어서 삼절헌(三節軒)에 걸었으니, 그 시에 이르기를,
"오늘 보각을 우러러봄은 얼마나 다행스러운가?
옛날 이곳에 선왕께서 임어하셨다네.
어찌 소자만 창연한 마음 간절할 뿐이겠는가?
지극하고도 깊은 인덕 영원히 끝이 없는데."
하였고, 또 시 두 수를 모두 걸게 했는데, 그 시에 이르기를,
"옛 남루에서 어필을 받들어 읽으니
성심이 유람에 있지 않았음을 알겠네.
어찌 송도 백성만 은택을 입었을 뿐이겠는가?
많은 백성 돌보는 마음 팔도에 넘쳤다데."
"물색이 쇠잔한 옛 도읍지 적막기만 한데
만월대 터 하나만 휑덩그렁하게 남았을 뿐이네.
옛날 창업할 당시를 추억하노라니
산천의 경상(景像)이 내 맘을 감동케 하네."
하였다. 임금이 추궁에서 돌아와 만월대(滿月臺)에 나아가니, 관리사(管理使) 김약로(金若魯)가 군례로 알현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서생(書生)은 군려(軍旅)에 대해 익히지 않았는데도 출입하고 배궤(拜跪)함에 있어 갑주(甲冑)를 입은 장군의 풍도가 있다. 그리고 모든 절도(節度)가 경군문(京軍門)에 밑돌지 않으니, 이는 관리사가 융정(戎政)을 수거(修擧)한 효험인 것이다. 특별히 구마(廐馬)를 하사하도록 하라."
하고 이어 여러 신하들을 돌아보고 말하기를,
"50년 뒤에 비로소 이곳에 와서 옛날을 추상(追想)하니, 슬픈 감회가 더욱 간절하다. 나의 이번 행차는 단지 선조(先朝)의 고사를 추모하여 두 능에 전배(展拜)하고 또 고도(故都)를 살펴보기 위해서인 것이다. 그런데 이 만월대에 오르니 계구(戒懼)하는 마음이 도리어 깊어진다. 빙 둘러싸고 있는 성곽과 잘 배포된 궁전이 바둑알이나 별처럼 나열되어 있는 유지가 아직 완연한데, 마침내 나무하고 소나 말을 먹이는 장소로 변하고 말았다. 고려 태조가 창업하였을 때 어찌 오늘날과 같은 상황이 될 줄 알았겠는가? 그 자손이 된 자들이 조종(祖宗)이 어렵게 이루어 놓은 서업(緖業)을 생각하지 않고서 사욕(私慾)을 함부로 부리다가 그 서업을 실추시키는 지경에 이르고 말았으니, 만년 천자(萬年天子)라는 말이 어찌 경계하는 것인 줄 알았겠는가? 생각이 여기에 이르니 나도 모르게 마음이 오싹하여 두려워진다. 경 등은 오늘날의 시상(時象)을 관찰하여 보라. 당론(黨論)의 해독이 신돈(辛旽)211) 보다 더하다. 군신 상하가 척연(惕然)한 마음가짐으로 경계하여 징계하고 고칠 것을 생각하지 않는다면 또 승국(勝國)212) 같은 결과가 되지 않을 줄 어떻게 알겠는가?"
하였다. 좌의정 김재로(金在魯)가 아뢰기를,
"지금 고도(故都)에서 성교를 우러러 받드니 그 계구(戒懼)하는 뜻이 넘쳐 흘러 신명(神明)도 미덥게 하기에 충분합니다. 신은 변변치 못한 자질로 외람되이 삼사(三事)로 있으면서 하루 이틀 세월만 보낼 뿐 전혀 보답한 공적이 없었으므로 매양 부끄럽고 위축되는 마음이 간절했습니다. 신은 선조께서 이곳에 임어하셨을 때 지은 어제시에, ‘인간의 흥망에 대한 일을 알려거든[欲識人間興喪事] 모쪼록 이훈(伊訓)213) 의 내용을 눈여겨 보고 생각하라[須將伊訓翫心思]’고 한 글귀를 기억하고 있습니다만, 그 계구(戒懼)하게 하는 내용을 신은 항상 흠앙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 성교가 선조의 어제시와 똑같은 성의(盛意)이니 신이 감히 우러러 본받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승국(勝國)은 중엽 이후로 군신 상하가 강구한 것이 좌도(左道)214) 뿐이었고, 또 강신(强臣)이 명령을 집행하여 권병(權柄)이 아래에 옮겨졌으니 어떻게 멸망하지 않을 수 있었겠습니까? 우리 나라가 승국과 다른 것은 열성조에서 오로지 유화(儒化)만 숭상한 것입니다. 그 뒤 문(文)이 승한 폐단 때문에 마침내 명분을 내세우는 것이 너무 승한 지경에 이르게 되었는데, 지금의 분열된 당론도 모두 여기에 연유된 것입니다."
하고, 수찬 정휘량(鄭翬良)은 아뢰기를,
"타성에 젖기 쉬운 것이 인심입니다. 일념(一念)으로 계구(戒懼)하여 항상 미래의 일을 과거의 일처럼 여겨 조심한다면 만세토록 태평을 누릴 수 있는 기틀이 여기에서 다져지게 될 것입니다."
하고, 교리 김한철은 아뢰기를,
"오늘 아침 임진(臨津)에 대가(大駕)가 주차했을 적에, ‘덕을 닦는 데 달려 있는 것이지 지세의 험준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다.’라고 한 하교가 있었다는데, 임금이 덕을 닦지 않는다면 성지(城池)가 아무리 공고해도 망하지 않은 경우가 드물었습니다. 과거 고려의 임금들이 덕을 잘 닦았더라면 전하께서 오늘날 어떻게 이 만월대에 임어하실 수 있었겠습니까? 은감(殷鑑)이 여기에 있으니, 전하께서는 더욱 성덕의 연마에 힘쓰시어 뒷사람으로 하여금 또한 오늘날에 옛날을 보는 것처럼 하지 말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안색을 고치고 가상히 여겨 탄식하면서 말하기를,
"신하들이 임금에게 고함에 있어 당연히 이렇게 해야 된다."
하고, 충성스럽고 순박한 것이 가상하다 하여 특별히 고비(皐比)를 하사하였다. 하교하기를,
"군신은 그 소중함이 서로 면려하는 데 있는 것이다. 나는 만월대에서의 면계(勉戒)를 잊지 않겠으니, 유신은 호피(虎皮)의 상을 잊지 말도록 하라."
하였다.
이날 임금이 송도의 삼절헌(三節軒)에 나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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