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 1일 기사
임금이 송도에서 출발하려 할 적에 예방 승지 조명겸(趙明謙)을 남아 있게 하여 어제(御題)를 가지고 대제학 오원(吳瑗)과 함께 내일 만월대에서 시사(試士)한 다음 시권(試券)을 거두어 놓고 대가(大駕)가 돌아오기를 기다리도록 명하였다.
임금이 연(輦)을 타고 가면서 시신(侍臣)들을 돌아보고 이르기를,
"부조현(不朝峴)이 어느 곳에 있으며, 그렇게 명명(命名)한 것은 또한 무슨 뜻인가?"
하니, 주서 이회원(李會元)이 아뢰기를,
"태종(太宗)께서 과거를 설행했는데, 본도의 대족(大族) 50여 가(家)가 과거에 응하려고 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 이름이 생긴 것입니다. 그리고 문을 닫고 나오지 않았으므로, 또 그 동리를 두문동(杜門洞)이라고 했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부조현 앞에 이르러 교자(轎子)를 정지하도록 명하고, 근신에게 말하기를,
"말세에는 군신의 의리가 땅을 쓴 듯이 없어졌는데 이제 부조현이라고 명명했다는 뜻을 듣고 나니, 비록 수백 년 뒤이지만 오히려 사람으로 하여금 눈으로 보는 것처럼 마음이 오싹함을 느끼게 한다."
하고, 이어 승지에게 명하여 칠언시(七言詩) 한 구를 쓰게 하니, 이르기를, ‘고려의 충신들처럼 대대로 계승되기를 힘쓰라. [勝國忠臣勉繼世]’ 하였다. 수가(隨駕)하는 옥당과 승지·사관으로 하여금 시(詩)를 이어서 지어 올리게 하였으며, 또 직접 부조현이라는 세 글자를 써서 그 터에다 비석을 세우게 하였다.
대가가 제릉(齊陵)215) 에 도착했는데, 임금이 천담복(淺淡服) 차림에 익선관(翼善冠)을 쓰고 의식대로 전알(展謁)하고 봉심(奉審)하였다. 이어 후릉(厚陵)에 나아가 전알하고 봉심하였으며, 이어 의식대로 친제(親祭)하였다. 행례(行禮)를 마치고 회가(回駕)했는데, 저녁에 풍덕(豐德)의 행궁(行宮)에 도착하였다. 강화 유수 윤득화(尹得和)·풍덕 부사(豐德府使) 이중태(李重泰)를 인견하고 하문하기를,
"강화에 저축돤 군향(軍餉)이 얼마나 되는가?"
하니, 윤득화가 아뢰기를,
"기록되어 있는 것은 18만 곡(斛)입니다만, 현재 있는 것은 5, 6만 곡에 불과합니다."
하자, 임금이 말하기를,
"어찌하여 그렇게 적은가? 보장(保障)에 대한 준비가 너무 허술하니 안타깝다."
하였다.
부교리 남태제(南泰齊), 수찬 정휘량(鄭翬良)·김상적(金尙迪) 등이 차자를 올렸는데, 대략 이르기를,
"원릉(園陵)의 거둥 때 고도(故都)에 들어가 폐허가 된 옛 성터를 두루 열람하셨고, 전궐(殿闕)의 유허(遺墟)에 올라가서 전조(前朝)의 흥망에 대한 까닭을 또한 반드시 깊이 생각하여 개연히 탄식하셨습니다. 《시경(詩經)》에 이르기를, ‘하늘은 매우 밝은 법이어서 천명(天命)을 얻기가 쉽지 않다.’ 하였고, 《서경(書經)》에 또 이르기를, ‘은감(殷鑑)은 먼 곳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하후(夏后)216) 의 세상에 있다.’ 하였습니다. 아! 고려 태조(太祖)가 온갖 어려움을 극복하고 천신 만고 끝에 후삼국(後三國)을 통합하여 왕업(王業)을 이루었는데, 중엽 이후부터 놀고 즐기기만 일삼아 몸은 관음사(觀音舍)에 맡기고 뜻은 연등회(燃燈會)에 빠졌습니다. 임용된 신하도 난잡하고 꺼릴 줄 모르는 무리가 아니면 곧 아첨하거나 속이는 부류들이어서 백성들이 거꾸로 매달린 것 같은 고통을 받고 있는데도 구휼할 줄을 몰랐고, 권병(權柄)이 아래에 옮겨졌는데도 스스로 깨닫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비록 그 사이에 현인(賢人)·지사(志士)가 있어 충분(忠憤)을 억누르면서 탄식하고 눈물을 흘리며 슬퍼하였지만 또한 어찌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오늘날 전대(殿臺)의 유허(遺墟)에 시든 풀만 눈앞에 가득 보일 뿐이어서 부질없이 뒷사람으로 하여금 자취만 어루만지며 서글픈 감회만 불러 일으키게 하니, 어찌 슬픈 일이 아니겠습니까? 이제 전하께서는 천명(天命)이 옮겨짐에 따라서 육비(六轡)의 어가(御駕)를 타고 구경(舊京)을 두루 열람하셨으니, 징비(徴毖)의 계획을 마련함에 있어 신 등의 말을 기다릴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만, 권강(權綱)을 총람(總攬)하고 상벌을 엄중히 하고 관방(官方)을 신중히 하고 민력(民力)을 너그럽게 하고 염치를 면려하고 사치를 금지하는 여섯 가지 조항은 오늘날의 급선무요 감계(鑑戒)하는 실제의 정사인 것입니다. 그러나 그 근본은 오직 전하의 한 마음에 달려 있는데, 하늘에 국명(國命)이 영구해지기를 비는 방도가 이밖에 다른 길이 없으니, 성명(聖明)께서는 환히 살피소서."
하니, 우악한 비답을 내리고 원소(原疏)는 유중(留中)하도록 명하였다.
9월 2일 경오
임금이 풍덕(豐德)의 행궁(行宮)에 나아가 어사 김상적(金尙迪)을 불러서 풍덕에 대한 일을 하문하니, 김상적이 부사 이중태(李重泰)가 불법을 저지른 일 두어 가지를 진달하고, 아뢰기를,
"이는 신이 들어서 아는 것이고, 직접 눈으로 본 것으로는 관주(官廚)에 소를 잡아 배열하여 놓은 것이 낭자하고 다담(茶啖)은 40여 그릇이나 되었는데, 이는 바로 대신과 명관(名官)으로서 대가를 수행하고 있는 자들에게 선물을 보내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또 어떤 여인이 자신의 남편이 구타당하여 장차 죽게 되었다고 울면서 추치(推治)하여 주기를 청하였는데도 물리치고 들어주지 않으면서 말하기를, ‘지금은 그럴 때가 아니다.’ 하였으니, 그의 죄가 큽니다."
하였다. 임금이 이중태를 잡아들이라고 명하고, 그 범죄를 일일이 들어 책망하고 효시(梟示)하려 하였는데, 병조 판서 조현명(趙顯命)이 대신에게 순문(詢問)할 것을 청하였다. 대신에게 순문하니 모두 인구(引咎)하면서 그를 위해 신구(伸救)하니, 임금이 드디어 곤장(棍杖)을 집행하고 먼 지방에 귀양보내었다. 특별히 인평군(仁平君) 이보혁(李普赫)을 부사로 임명하였다. 이는 풍덕이 피폐한 고을이 되었는데 이보혁이 여러 번 주목(州牧)을 맡아서 잘 다스렸다는 명성이 있었기 때문에 이 명령이 있게 된 것이다.
어가가 다시 송도에 주차하였다. 임금이 남문(南門)의 누대(樓臺)에 올라가서 말하기를,
"이곳은 다섯 성조(聖祖)께서 주필(駐蹕)하셨던 곳이다."
하고, 부로(父老)들을 불러 위유(慰諭)하고 또 폐막(弊瘼)에 대해 하문하니, 목소리를 함께 하여 청하기를,
"본부는 지방이 매우 협소하여 사문(四門) 밖은 모두 다른 경내의 사람들이기 때문에 지탱할 수가 없으니, 장단(長湍)의 송서면(松西面)을 편입시켜 주소서."
하니, 임금이 묘당(廟堂)으로 하여금 의논하여 조처하게 하였다. 백성들이 또 오래된 환곡(還穀)과 청채(淸債)를 탕감시켜 줄 것을 청하니, 모두 허락하였다. 또 오래 전에 대여한 쌀·좁쌀 7천여 석(石)과 목면(木綿) 5천 필(疋)을 탕감시키게 하였다.
임금이 만월대에 나아가 직접 문무(文武)의 시험을 보였는데 문과(文科)에는 전명조(全命肇) 등 3인을 뽑았고, 무과(武科)에는 전흥제(田興齊) 등 10인을 뽑았다. 방방(放榜)할 때 헌가(軒架)는 쓰지 않고 단지 고취(鼓吹)만 사용하였다. 예(禮)를 끝내고 나서 임금이 말하기를,
"조가(朝家)에서 북관(北關)217) 를 우대하고 있는 것은 이곳이 풍패(豐沛)218) 의 고장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곳도 또한 풍패의 땅이 아닌가?"
하고, 전조에 견발(甄拔)하여 서용하라고 신칙하였으며, 시사(試射)에서 우등한 사람은 변장(邊將)에 제수하게 하였다. 이날 왕제도(王濟道)를 훈련원 주부로 삼았는데, 왕제도는 고려 왕조의 후예이다. 임금이 왕씨의 쇠미함을 딱하게 여겨 특명으로 부직(付職)케 한 것이다. 또 박규황(朴奎晃)을 훈련원 판관으로 삼았는데, 유수 김약로(金若魯)의 천거를 따른 것이다. 이날 행궁으로 돌아와서 유숙하였다.
특별히 승지 김상로(金堂魯)를 보내어 고려 태조(太祖)의 능에 제사지내게 하였다.
9월 3일 신미
임금이 행궁(行宮)에서 회가(回駕)하기 위해 선죽교(善竹橋)에 이르렀는데 직접, ‘도덕과 정충이 만고에 뻗어갈 것이니[道德精忠亘萬古] 포은공의 곧은 절개는 태산처럼 높구나![泰山高節圃隱公]’라는 열 네 글자를 써서 유수로 하여금 비석에 새겨 세우게 하였다. 또 대제학 오원(吳瑗)에게 명하여 사적을 기술하여 비석의 뒷면에 새기게 하였으며, 군중(軍中)에 명하여 금고(金鼓)의 소리를 중지하게 하였는데, 이는 어진 이를 존경하는 뜻을 보인 것이었다. 성균관(成均館)에 두루 들러 곤복(袞服) 차림으로 선성(先聖)을 알현하였고 도로 명륜당(明倫堂)에 나아가 유생들을 불러 보고 관중(館中)에 목면 1백 필을 하사하였다. 또 직접 ‘존성도(尊聖道)라는 세 글자를 써서 명륜당에 걸고, 또 사서·삼경 각각 1질(帙)을 하사하였다. 임금이 태학(太學)을 두루 관람하고 탄식하기를,
"이렇게 좋은 기지(基址)가 있는데도 사문(斯文)219) 을 숭상하는 정치를 하지 않고 오로지 불교만 숭상하다가 나라가 멸망하는 지경에 이르렀으니, 어찌 애석한 일이 아니겠는가?"
하였다.
임금이 성균관에서 목청전(穆淸殿)으로 나아갔는데 이곳은 곧 조선 태조의 잠저(潛邸)였다. 임금이 연(輦)을 타고 오는 길에 김업(金業)의 효자비(孝子碑)를 보고 감탄하기를,
"한 가문에 네 명의 효자가 났으니 기이한 일이다. 본부(本府)로 하여금 그의 자손들을 찾아서 음식을 지급하게 하라."
하였다.
임금이 저녁에 파평관(坡平館)으로 돌아왔다.
9월 4일 임신
유성(流星)이 규성(奎星)의 성좌 아래에서 나왔는데, 크기는 주먹만 하고, 빛깔은 붉은 색이었다.
임금이 파평관에서 고령(古嶺)의 숙빈(淑嬪) 묘소에 나아가 직접 제사지냈다. 이날은 재실(齋室)에서 유숙하였다.
9월 5일 계유
임금이 고령(古嶺)에서 환궁(還宮)하였다.
경기의 오래된 환곡(還穀)과 군향(軍餉)을 받아들이는 것을 모두 정지하게 하였다. 거둥할 때 지나온 파주(坡州)·장단(長湍)·풍덕(豐德)·개성(開城)의 새 환곡과 군향의 모곡(耗穀)을 모두 감면시키고, 양주(楊州)·고양(高陽)에는 특별히 대동미(大同米)의 절반을 감면하게 하였다. 경기 감사와 여러 고을의 수령들을 불러서 접견하고 말하기를,
"행행을 겪은 곳의 백성들 또한 수고로웠을 것이니, 의당 어깨를 내리고 쉬게 할 방도를 생각해야 한다."
하고, 이어 이러한 명을 내린 것이었다.
9월 6일 갑술
부호군(副護軍) 이광세(李匡世)가 상소하여 자기의 아들 교리 이성효(李性孝)가 이춘제(李春躋)의 연회에 갔다가 중독되어 갑자기 죽었다고 하면서 철저히 조사하여 실정을 알아내어 원수를 갚게 해달라고 청하였다. 처음 이춘제가 아들의 관례(冠禮)를 하기 위해 집에서 연회를 베풀고 조정의 고관과 대신들을 두루 청하였으므로, 경재(卿宰) 가운데 참여한 사람이 많았었다. 연회가 파하고 나서 연석에 참여했던 사람들 가운데 중독되어 돌아온 사람이 많았는데, 폭질(暴疾)로 죽은 사람이 10여 인에 이르렀다, 이렇게 되자 사람들이 모두 의심했는데 단서를 찾을 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포청에서 이춘제의 서제(庶弟) 이하제(李夏躋)와 감주인(監廚人)·판선인(辦膳人)을 구금(拘禁)하여 놓고 장차 구핵(究覈)하려하고 있는 차에 원수진 집안들이 모두 원통함을 호소했기 때문에 이광세가 드디어 상소하게 된 것이었다. 임금이 유사(攸司)에게 명하여 철저히 심문하게 하였으므로, 포청과 형조에서 여러 번 신문하였으나, 끝내 실정을 알아내지 못하였다.
사간 민계(閔堦)를 체직(遞職)하도록 명하고, 공홍 감사 조영국(趙榮國)을 추고(推考)하도록 명하였다. 처음에 민계의 집이 직산(稷山)에 있었는데, 사간으로서 휴가를 얻어 집으로 돌아가 있었다. 이때 조영국이 능행(陵行)을 후문(候問)하기 위해 바야흐로 직산에 주둔하게 되었는데, 밤이 되자 원문(轅門)을 여닫는 절차를 행하였다. 민계가 이를 보고 노하여 말하기를,
"내가 대관(臺官)으로 이곳에 있는데 감사가 어떻게 스스로 고각(鼓角)을 지휘한단 말인가? 이는 나를 능멸한 것이다."
하고, 영리(營吏)를 불러 힐문한 다음 노복을 시켜 난타하게 하였다. 조영국이 또한 노하여 말하기를,
"민계는 왕명을 받든 것도 아니고 또 소명(召命)을 받은 사람도 아니다. 단지 휴가를 받은 사행인(私行人)일 뿐이다. 나는 도신으로서 군용(軍容)을 갖추고 경상(境上)에 나와 있는데 민계가 어떻게 나의 고취(鼓吹)의 지휘를 금지시킬 수 있는가?"
하고, 이졸(吏卒)들을 시켜 민계의 집에 들어가서 그의 노비들을 결박하여 끌어다가 몹시 형벌을 가하였다. 드디어 상소하기를,
"이 몸이 도신으로서 거느리고 있는 하리(下吏)가 대신 민계에게 장벌(杖罰)을 받았으니, 모욕을 당한 것이 많습니다. 따라서 그대로 무릅쓰고 관차(官次)에 있을 수가 없습니다."
하자, 민계도 상소하기를,
"신이 비록 하찮은 사람이기는 하지만 직책을 따진다면 전하의 시종(侍從)입니다. 도신의 성위(聲威)가 아무리 성대하다고 하더라도 단지 하나의 변방을 지키는 신하일 뿐인데, 신의 일 때문에 신의 노복이 대신 형벌을 받았으니, 조정을 부끄럽게 하고 대각(臺閣)에 욕을 끼친 것이 극심합니다."
하니, 임금이 민계가 영리에게 태형(笞刑)을 가한 것과 조영국이 민계의 노복(奴僕)에게 형벌을 가한 것은 서로 잘못한 것이라 하여 드디어 이런 명이 있게 된 것이다.
평안 감사 서종옥(徐宗玉)과 병사 장태소(張泰紹)를 파직하였다. 이때 관서(關西)의 백성 가운데 범월(犯越)하여 청(淸)나라로 넘어간 자가 20여 인이나 되었는데, 갑군(甲軍)에게 체포되었다. 서종옥이 장문(狀聞)하기를,
"갑군은 곧 청황(淸皇)과 제왕(諸王)들이 보낸 삼(蔘)을 캐는 군대입니다."
하니, 좌의정 김재로(金在魯)가 아뢰기를,
"범월한 일이 이미 발각되었으니 의당 자문(咨文)을 찬술하여 재자관(䝴咨官)을 보내야 합니다."
하니, 임금이 허락하였다. 그리고 변장과 수령을 모두 나문(拿問)하게 하고 서종옥과 장태소는 모두 파직하였다.
임금이 석강(夕講)에 나아가 《춘추(春秋)》를 강하였다. 회맹(會盟)했다는 글에 이르러 검토관(檢討官) 이천보(李天輔)가 주달하기를,
"지난번 어떤 재신(宰臣)이 아주 가까운 연석(筵席)에서 맹세하였는데, 그 말이 매우 패려하였다고 합니다. 군신(君臣)은 부자(父子)와 같은 것인데, 어찌 아들이 아비에게 맹세하는 일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이는 반드시 윤양래(尹陽來)를 가리키는 것이다. 윤양래가 전일 배를 가르고 창자를 내놓겠다고 말한 적이 있었는데 유신은 이것을 맹세라고 하는 것인가?"
하자, 이천보가 아뢰기를,
"그것을 가리켜 말한 것이 아닙니다."
하였다. 임금이 왕위를 내놓겠다는 전교(傳敎)를 내렸을 적에 윤양래가 전석(前席)에서 스스로 맹세하기를,
"만일 다시 당습을 한다면 바로 목호룡(睦虎龍)의 아들입니다."
했는데, 이 말을 들은 사람들은 놀라 웃음을 터뜨렸기 때문에 이천보의 말이 이러했던 것이다.
9월 7일 을해
어떤 별이 왕량성(王良星) 아래에서 나왔는데, 크기는 주먹만 하였고, 꼬리의 길이는 2, 3척쯤 되었으며, 빛깔은 붉은 색이었다.
9월 9일 정축
임금이 주강에 나아갔다. 검토관 이천보(李天輔)가 아뢰기를,
"지난달 천둥이 치는 변고가 순음(純陰)의 달에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곧 천둥이 폐장(閉藏)되는 계절인 것입니다. 그런데도 상하가 재앙을 숨기고서 윤음(綸音)이나 장주(章奏) 가운데 재앙을 없앨 방책에 대해서 한 마디도 언급한 것이 없었으니, 신은 중외(中外)에서 혹 전하가 수성(修省)하는 방도에 소홀한 것으로 여길까 두렵습니다."
하자, 영경연 김재로(金在魯)가 아뢰기를,
"유신의 말이 옳습니다. 근래에 장주(章奏)하여 전혀 진계(陳戒)하는 사람이 없으니, 이러고도 재앙을 그치게 할 수 있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마땅히 스스로 힘쓰도록 하겠다."
하였다.
해주(海州)의 유생 이정저(李正著) 등이 상소하여 태조가 왜적을 추격하여 승첩한 곳인 해주의 동정(東亭)에 비석을 세워 그 공렬을 칭송하게 할 것과 선조의 주필당(駐蹕堂)과 원종(元宗)의 잠저(潛邸)와 인조(仁祖)가 탄강하신 터에 편액(扁額)을 내리고 궁(宮)을 건립하게 할 것을 청하였다. 임금이 이를 대신에게 문의하였는데, 좌의정 김재로(金在魯)가 불가하다고 하자 마침내 허락하지 않았다. 송도(松都)의 유생 한명상(韓命相) 등도 또한 상소하여 태조의 구기(舊基)에 궁전을 건립하여 어용(御容)을 봉안(奉安)할 것과 문무(文武) 등과인(登科人)에게 특별히 청현직(淸顯職)을 허락할 것을 청하였으나, 임금이 또한 허락하지 않았다.
사신은 말한다. "임금이 즉위한 이래 선대(先代)를 숭봉(崇奉)하는 전례(典禮)에 대해 매양 뜻을 다하였기 때문에 향유(鄕儒)들이 번번이 이를 인연하여 은택을 바라는 자들이 매우 많았다."
【태백산사고본】 38책 52권 21장 B면【국편영인본】 42책 680면
【분류】정론-정론(政論) / 인사-선발(選拔) / 왕실-국왕(國王) / 왕실-종사(宗社) / 역사-사학(史學)
사신은 말한다. "임금이 즉위한 이래 선대(先代)를 숭봉(崇奉)하는 전례(典禮)에 대해 매양 뜻을 다하였기 때문에 향유(鄕儒)들이 번번이 이를 인연하여 은택을 바라는 자들이 매우 많았다."
9월 10일 무인
천둥하였다.
어유룡(魚有龍)을 대사간으로, 윤봉구(尹鳳九)를 집의로, 박필재(朴弼載)를 사간으로, 홍득후(洪得厚)를 장령으로, 남태혁(南泰赫)과 유작(柳綽)을 지평으로, 김도(金䆃)와 한봉조(韓鳳朝)를 정언으로, 이제원(李濟遠)을 헌납으로 삼았다.
행 사직 이기진(李箕鎭)이 상소하여 걸군(乞郡)220) 하니, 이를 허락하였다. 이기진의 집은 여주(驪州)에 있었는데, 제수하는 왕명이 있을 적마다 어미가 늙었다 하여 사양하고 오지 않았었다. 임금이 어미를 모시고 올라오라고 명하기에 이르자 이기진이 드디어 이경여(李敬輿)·박장원(朴長遠)이 정경(正卿)으로서 걸군(乞郡)한 전례를 인용하여 상소하여 진정(陳情)하니, 임금이 이를 허락하였다.
9월 11일 기묘
승정원과 옥당에서 천둥한 이변(異變) 때문에 진계(陳戒)하였다. 대신도 차자(箚子)를 올려 사면(辭免)을 청하니, 모두 예사 비답을 내렸다.
헌부에서 전계를 다시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9월 12일 경진
임금이 소대에 나아갔다. 시강관 홍계유(洪啓裕)가 글뜻에 따라 이르기를,
"당(唐)나라 덕종(德宗)이 오이를 바친 사람에게 벼슬을 주려고 하자 육지(陸贄)가 진계(陳戒)한 바가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덕종이 그 말을 경시하고 벼슬을 주었으니 두 번 파월(播越)하는 어려움을 겪은 것이 또한 이유가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옛날 내가 배종(陪從)하고 온천(溫泉)에 거둥하였을 때에 길에서 물건을 바치는 사람을 많이 보았는데, 이번 거둥에는 단지 한 촌구(村嫗)가 바치기를 청하였으나 내가 받지 않았다."
하자, 홍계유가 아뢰기를,
"만일 임금에게 바치는 정성을 가상히 여겨 물건을 받고서 상을 준다면, 이를 본받는 자들이 반드시 뒤를 이어서 나올 것인데, 어떻게 성심인지 거짓인지를 알수 있겠습니까?"
하였다.
헌부에서 전계를 다시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9월 13일 신사
임금의 탄일(誕日)의 진하(陳賀)를 정지하였다.
9월 14일 임오
소대를 행하였다.
임금이 근래 상서(象胥)221) 들이 역학(譯學)에 소홀하다 하여 연소한 문신에게 한어(漢語)를 익히도록 신칙하였다.
9월 15일 계미
지평 남태혁(南泰赫)이 상소하기를,
"감시(監試) 일소(一所)의 거자(擧子)가 많아서 정오가 되어서야 개장(開場)하였는데, 시관(試官)이 시한을 늦추어 줄 것을 청하지 않았고, 또한 시한 뒤의 시권(試券)을 고사(考査)하지도 않았으니, 조정에서 인재를 아끼는 뜻을 본받는 조처가 아닙니다. 의당 견책(譴責)을 시행해야 합니다."
하니, 그대로 따랐다.
임금이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9월 16일 갑신
심성진(沈星鎭)을 승지로, 민익수(閔翼洙)를 장령으로, 이고령(李考齡)과 홍정보(洪正輔)를 지평으로, 이성해(李聖海)를 정언으로, 김진상(金鎭商)을 부제학으로, 원경하(元景夏)를 교리로, 홍상한(洪象漢)을 수찬으로, 이주진(李周鎭)을 이조 참의로, 민응수(閔應洙)를 예문관 제학으로, 홍봉조(洪鳳祚)를 대사간으로, 서명신(徐命臣)을 이조 좌랑으로 삼았다.
임금이 주강과 석강을 행하였다. 우의정 송인명(宋寅明)이 아뢰기를,
"지난번 거둥하셨을 때 어승(御乘)이 엎어질 뻔한 근심이 있었으니, 마땅히 태복시(太僕寺)의 관원을 죄주어야 합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초왕(楚王)은 만이(蠻夷)의 임금이었지만, 오히려 갓끈을 끊은 아름다운 일이222) 있었다. 그 일은 묻지 말고 내버려 두도록 하라."
하였다.
9월 17일 을유
임금이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좌의정 김재로(金在魯)가 흉년 때문에 청하기를,
"각도(各道)의 재결(災結)223) 을 넉넉하게 하여 줄 것과 또 곡식을 이전(移轉)시키는 것 및 환곡을 대신 받아들이는 것을 허락하여 줄 것이며, 군병(軍兵)들의 조습(操習)도 정지하게 하소서."
하니, 모두 윤허하였다. 또 함경 감사 박문수(朴文秀)를 잉임(仍任)시키라고 명하였다. 박문수는 임기가 찼으나 북로(北路)에 흉년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강화 유수 윤득화(尹得和)가 아뢰기를,
"백마 산성(白馬山城)은 승천포(昇天浦)의 주변에 있고 그 길이 송경(松京)으로 통하여 있기 때문에 강도(江都)의 요충지(要衝地)입니다. 마땅히 관방(關防)을 설치하여 문수 산성(文殊山城)과 서로 기각지세(倚角之勢)를 이루게 해야 합니다. 장신(將臣)으로 하여금 가서 형편을 살펴보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판부사 유척기(兪拓基)가 직명(職名)을 쓰지 않고 죄를 진 신하라는 것으로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구구한 혈성(血誠)은 단지 군부(君父)을 위하여 의리를 밝히고 국가를 위하여 시비(是非)를 정하려는 것이었는데, 주대(奏對)할 즈음에 일에 저촉되어 잘못된 탓으로 결국 무겁게 큰 죄려(罪戾)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신의 어리석고 오활하고 옹졸한 성격으로 부끄러워하면서 다시 사진(仕進)한다고 하여도 반드시 일을 훼방하고 촉범(觸犯)하여 자칫 혹과 같은 걱정거리를 만들게 될 것입니다. 그리하여 전의 잘못을 씻기도 전에 새로운 죄가 또 첨가되어 전혀 성조(聖朝)의 탕평(蕩平)을 위한 정치에 도움을 줄 수 없게 되고 일신(一身)의 낭패만 증가시킬 뿐입니다. 항상 염려하고 있는 이 마음은 천일(天日)이 조림(照臨)하고 있으니, 신이 어떻게 차마 털끝만큼인들 속일 수 있겠습니까?"
하니, 비답(批答)하기를,
"하교한 뒤에도 경이 마음을 움직이지 않으니 다시 어떻게 하유하겠는가?"
하였다. 이때 임금이 잇따라 사관(史官)을 보내어 함께 올라오게 하였으나. 유척기가 죄를 핑계대고 끝내 나오지 않은 채 또 상소하여 스스로 인구(引咎)하기를 이렇게 하였다. 임금이 소장에 대한 비답을 내리고 나서 마음이 몹시 노하여 하교하기를,
"내가 비록 부덕하다 하나, 10년 동안 고심한 것은 곧 나라를 위한 것이었다. 지금 조정에서 북면(北面)하여 임금을 섬기는 사람들이 군부(君父)의 명을 믿고 군부의 계칙(戒飭)을 존엄하게 여긴다면 지난번의 거조에 대해 마음을 풀지 않는데, 어떻게 신하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대관(大官)의 몸으로 감히 갑자기 함께 나올 수 없다면 도성(都城) 밖에도 말이 있고 금오(金吾)에도 말이 있으니, 즉시 달려와서 왕명을 기다리면서 지신의 마음을 아뢰었어야 옳다. 그런데 이제 그의 소장을 열람하여 보니 처음의 뜻을 굳게 고집하는 것이 전일과 같다. 아! 저 상신은 교목 세신(喬木世臣)으로서 자신이 대관(大官)이 되었는데도 이러하니, 연소배들을 어떻게 책망할 수가 있겠는가? 법의 시행은 대관으로부터 해야 되는 것이다."
하고, 장차 죄벌(罪罰)을 시행하려 하니, 승지 심성진(沈星鎭)이 아뢰기를,
"대신을 대우하는 도리는 마땅히 이렇게 할 수 없습니다. 처분이 너무 갑작스러운 것이 아닙니까?"
하자, 임금이 말하기를,
"내가 한 사람의 대신을 죄주어 내칠 수 없다면 나를 진(晉)나라 혜제(惠帝)로 여기는 것인가?"
하였다. 심성진이 아뢰기를,
"신은 평소 그 대신과는 모르는 사이이므로 대신을 위하려는 의도에서 그러는 것이 아닙니다. 오로지 전하께서 처분(處分)을 아끼시라는 뜻에서 그런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승선(承宣)224) 의 고집은 진실로 왕명의 출입을 진실하게 한다는 체통에 맞는 것이었다. 그 일을 일단 정지한다."
하였다.
9월 18일 병술
이광덕(李匡德)을 대사헌으로, 이봉령(李鳳齡)을 장령으로, 이창의(李昌誼)를 정언으로, 김성운(金聖運)을 대사간으로, 박치륭(朴致隆)을 지평으로, 홍창한(洪昌漢)을 응교로 삼았다.
임금이 좌의정 김재로(金在魯)를 인견하고 하유하기를,
"유 판부사(兪判府事)는 국량(局量)이 있지만, 그의 고집을 어찌하겠는가? 지금 내가 고심하여 국사를 다스려 가고 있고, 지난번 처분이 있은 뒤 혹 고치기를 도모하고 있을 것이라고 기대했었는데, 그의 소장 내용이 대단치 않은 것 같지만 실상은 준열한 것이었다."
하니, 김재로가 말하기를,
"유척기의 국량과 재식(才識)은 젊었을 때부터 사람들이 모두 대관(大官)이 되리라 기대했었습니다. 단지 그의 기질에 조금 고체(固滯)된 점이 있을 뿐입니다. 그러나 내리신 비지(批旨)는 결단코 대신을 대우하는 도리가 아닙니다. 환수하소서."
하였다. 재삼 극력 청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경의 말이 이러하니 내가 어찌 따르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고, 특명으로 도로 중지하게 하였다.
소대를 행하였다.
9월 19일 정해
조관빈(趙觀彬)을 평안 감사로, 윤택정(尹宅鼎)을 평안 병사로, 권영(權瑩)을 승지로 삼았다.
9월 20일 무자
임금이 춘당대(春塘臺)에 나아가 시사(試射)하였는데, 거둥이 있은 뒤 수가(隨鴐)했던 군교(軍校)들을 위열(慰悅)하기 위한 것이었다. 총융사 박찬신(朴纘新)이 아뢰기를,
"일찍이 곤수(閫帥)225) 를 역임했던 사람을 데리고 가는 군관(軍官)으로 삼는 것은 조정의 체통에 손상되는 점이 있습니다."
하니, 임금이 대신 김재로에게 하문하였다. 김재로가 아뢰기를,
"신이 연경(燕京)에 갔을 적에도 곤수를 지낸 사람을 데리고 갔었습니다. 대신·중신이 어찌 곤수를 역임한 적이 있는 자를 데리고 갈 수 없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곤수는 체통이 중하니, 비록 대신일지라도 데리고 가는 군관으로 삼는 것은 부당하다."
하고, 이어 기록하여 정식(定式)으로 삼게 하였다.
고(故) 상신(相臣) 김구(金構)의 연시(延諡)226) 때 음악을 내라라고 한 명을 도로 정지하라고 명하였다. 김구는 좌의정 김재로의 아비이다. 임금이 장차 연시를 행한다는 말을 듣고 특별히 음악을 내려주도록 명하였는데, 김재로가 임금에게 아뢰기를,
"외조(外朝)의 연시(延諡) 때 음악을 내리는 것은 예전의 전례가 없습니다. 신이 감히 받을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성상께서도 새로운 법규를 만들어서는 안됩니다."
하니, 임금이 그 말을 가상하게 여겨 드디어 그 명령을 정지하였다.
9월 21일 기축
임금이 다시 춘당대(春塘臺)에 나아갔는데 이는 어제의 시사(試射)가 끝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시사를 끝내고 여러 신하들에게 주찬(酒饌)을 베풀었다. 바야흐로 과녁을 쏘라고 명할 적에 갑자기 하늘에서 천둥이 치면서 우박이 내렸으므로 드디어 철시(撤試)하고 환궁(還宮)하였다.
9월 22일 경인
임금이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좌의정 김재로와 우의정 송인명 등이 천둥한 이변 때문에 진계(陳戒)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내가 평시에 중관(中官)에게 말하기를, ‘내가 아무리 깊이 잠들어도 변보(邊報)가 있으면 즉시 고하도록 하라.’ 하였으며, 밤이 새도록 편안히 자본 적이 없었다. 예로부터 어찌 폭풍과 요란한 천둥이 없었겠는가마는, 매양 바람 소리가 조금 일어나고 구름 기운이 조금만 변한 것을 들며면 근심하고 두려워하기를 마지 않았다. 이는 진실로 옛날의 일을 우러러 눈으로 보고서 그런 것이다. 지금의 시사(試射)는 분수에 넘친 행사가 아니었고 주찬을 내린 것도 고락(苦樂)을 함께 한다는 뜻에서 나온 것이다. 좌상의 집에 음악을 내린 것은 또한 분수에 넘친 것에 관계되기 때문에 번영(繁纓)227) 을 아끼는 뜻에 의거하여 또한 정지하였다. 금원(禁苑)에서 환궁할 때 보여(步輿)를 타지 않고 걸어서 돌아온 데 이르러 나의 경계하고 두려워하는 마음을 알 수 있을 것이다."
하였다. 김재로가 아뢰기를,
"성상께서는 지나치게 근로(勤勞)하셔서 때로 박촉(迫促)하는 경우가 있기 때문에 끝내 대성인(大聖人)의 기상(氣象)에 부족한 점이 있고, 사령(辭令)도 간혹 번거롭고 설만한 때가 있으니, 이것이 경계해야 될 점입니다."
하고, 송인명은 아뢰기를,
"임금이 춘추(春秋)가 점점 높아지면 또한 그에 따라 완만해지는 병통이 있는데, 성의(聖意)가 구차하게 목전의 편안함만을 일삼는다면 완만한 데에 가깝지 않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좌상은 나의 조급함을 경계하였고 우상은 나의 완만함을 경계하였다. 말은 같지 않으나 그 마음은 같다. 나는 중정(中正)한 도리로 경 등을 면려하는 것이다."
하였다. 병조 판서 조현명(趙顯命)이 아뢰기를,
"근일에 형정(刑政)이 엄숙하지 못합니다. 신이 추조(秋曹)에 있을 적에 하찮은 일을 가지고 금위영(禁衛營)의 일개 군졸을 다스렸었는데, 신이 어영 대장(御營大將)이 됨에 이르러서는 그 군졸이 칼을 빼들고 신의 집에 와서 야료를 부렸습니다. 지금의 어영 대장인 김성응(金聖應)도 본영(本營)의 군졸에게 욕을 당했다고 합니다. 기강이 엄중하지 않은 것이 이와 같으니 이것은 비록 작은 절목이기는 하지만 그 큰 근본은 오직 임금의 한 마음에 달려 있는 것입니다."
하고, 승지와 옥당도 잇따라 면계(勉戒)할 것을 진달하고 언로(言路)를 열고 유술(儒術)을 높일 것을 청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만일 혹시 진실한 대유(大儒)가 있다면 내가 어찌 한(韓)나라 고조(高祖)가 선비를 꺾어 눌렀던 것을 본받겠는가? 단지 산림(山林)에도 또한 당론이 많아 이 때문에 어려운 것이다."
하자, 조현명이 아뢰기를,
"조정이 단전(丹田)의 기운 같아야 합니다. 해기(海氣)가 단전에 모인 뒤에야 사람이 살 수 있고, 사람이 조정에 모인 뒤에야 국가를 잘 다스릴 수 있는 것입니다."
하였다.
대사성 심성희(沈聖希)에게 원경하(元景夏)의 처벌을 풀도록 명하였는데 김상적(金尙迪)의 청을 따른 것이었다. 처음 원경하가 상유(庠儒)들에게 벌을 받았는데, 상유들의 죄를 받고 나서도 원경하의 벌명(罰名)은 그대로 사학의 벽에 걸려 있었으므로 오래도록 공직(供職)하지 않았다. 이때에 이르러 김상적이 아뢰기를,
"선조(先祖) 때 성임(成任)이 부황(付黃)의 벌을 받았을 적에도 특별히 사유장(師儒長)228) 으로 하여금 벌을 풀어 주게 한 규례(規例)가 있었습니다."
하였으므로, 드디어 임금의 이 명령이 있게 된 것이다. 그 뒤 심성희가 아뢰기를,
"신이 사학에 가서 그의 벌방(罰榜)을 철거하려 하였으나 이는 사체에 손상되는 점이 있고, 하리(下吏)를 시켜 철거하게 하려 하였으나 이는 보고 듣는 이에게 놀라운 일이 되겠기에 재임(齋任)에게 권위하여 벌을 풀어 주게 하려 하였더니, 재임 등이 말하기를, ‘전 재임이 이 일로 인하여 죄를 받았으니 지금의 재임이 의리상 그의 벌방을 제거할 수가 없습니다.’ 하였습니다."
하니, 임금이 성임의 벌을 푼 일에 대해 하문하였다 심성희가 아뢰기를,
"그때에는 대사성으로 하여금 유생들에게 효유하게 했으나 유생들이 끝내 명을 받들지 않았기 때문에 먼저 수창(首唱)한 유생에게 정거하게 한 벌을 풀어 주자 성임의 벌도 따라서 풀렸었습니다."
하니, 임금이 엄중하게 하교하여 심성희의 봉급 일등(一等)을 감하게 하고 다시 재임에게 신칙하여 벌을 풀게 하였다.
공홍 좌도에서 문과를 설행했는데, 중장일(中場日)에 소란을 일으킨 자가 있었으므로, 단지 초장(初場)과 종장(終場)에서 납입된 시권(試券)만으로 출방(出榜)하였다. 대신이 과장을 엄중히 해야 한다는 뜻으로 파방(罷榜)하기를 청하고, 또 그 경시관(京試官)을 파직할 것을 청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병조 판서 조현명(趙顯命)이 아뢰기를,
"지난번 동가(動駕)하였을 때 금위군(禁衛軍) 가운데 제 시기에 나오지 않은 자들이 있었으니, 청컨대 그들을 효시(梟示)하게 하소서."
하니, 대신과 여러 신하들에게 하문하였다. 모두 아뢰기를,
"법에 있어 당연히 효시(梟示)해야 합니다."
하였다. 임금이 곤장(棍杖) 1백 도(度)로 집행하려 하니, 김재로(金在魯)가 아뢰기를,
"곤장 1백 도를 치면 살기를 바랄 수가 없습니다. 장살(杖殺)하는 것보다는 차라리 분명하게 군율(軍律)을 적용하여 삼군(三軍)을 면려하는 것이 낫지 않겠습니까?"
하였으나, 임금이 곤란하게 여겼다. 조현명이 극력 청하였으나 끝내 윤허하지 않았다.
9월 23일 신묘
임금이 각사(各司)의 낭관(郞官)을 불러서 접견하고 폐막에 대해 하문하였다. 이어 하교하기를,
"나라에서 중히 여기는 것은 형정(刑政)보다 더한 것이 없다. 만일 이를 공정하게 집행하지 않아서 잘못한 사람을 정직하게 처리하고 정직한 사람을 잘못한 것으로 처리하여 삼척(三尺)229) 이 권세가 강한 자에게는 행하여지지 않고 원통하고 억울함이 유독 쇠잔한 백성들에게만 돌아간다면, 어찌 마음 아픈 일이 아니겠는가? 더구나 당상관(堂上官)과 낭관(郞官)이 각기 자기의 의사대로 결단함으로써 관할하는 사람이 없게 되면 공사(公私)에 협잡이 없을 것을 어떻게 알 수 있겠는가? 엄중히 징계하지 않을 수 없다. 해방(該房) 승지는 추조(秋曹)와 경조(京兆)230) 의 문서(文書)를 가져다가 조사하여 만일 사정(私情)을 가지고 잘못 결단한 것이 있으면 가지고 와서 품주(稟秦)하도록 하라."
하였다.
9월 24일 임진
임정(任珽)을 대사간으로, 윤경주(尹敬周)를 지평으로, 원경순(元景淳)을 정언으로 삼았다.
임금이 춘당대(春塘臺)에 나아가 시사(試射)한 군병(軍兵)들에게 상을 반하(頒下)하였다. 이날 임금이 인의(引儀) 박춘우(朴春遇)를 수령에 제수하기 위해 이조 참판 신만(申晩)을 불러 수령의 자리가 있는가 하고 하문하니, 신만이 기장(機張)과 사천(泗川)이 있다고 대답하였다. 임금이 노하여 말하기를,
"신만이 기필코 원악지(遠惡地)를 두루 꼽아서 대답하는데, 벼슬을 위하여 사람을 가릴 것은 생각하지 않고 도리어 사람을 위하여 벼슬을 가리려 하는 것이 아닌가?"
하고, 특별히 중추(重推)하게 한 다음 즉시 선지(善地)에 의망(擬望)하게 하였다. 이리하여 박춘우가 보은(報恩)에 제수되었는데, 이때 나이 겨우 20여 세였다.
9월 25일 계사
천둥하고 번개가 치고 지진(地震)이 일어난다.
장령 홍득후(洪得厚)가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근래 기강이 엄중하지 않은 탓으로 과장(科場)에서 소란을 부리는 폐단이 발생했는데, 이번 호좌(湖左)에서의 일에 이르러 극도에 달하였습니다. 수창(首唱)한 거자(擧子)는 진실로 엄중히 다스려 뒷 폐단을 징계해야 하고, 과거의 주시관(柱試官)도 책임이 없을 수 없으니, 의당 파직해야 합니다. 도신은 사체가 다른 사람과 구별이 있는데, 박문수(朴文秀)는 외직인 번임(藩任)에 보직되어 있다가 이미 내직으로 옮기게 하라는 명을 받았었습니다. 지난번 잉임(仍任)시킬 것을 청한 것도 이미 격외(格外)의 일이었는데 지금 다시 잉임시키는 것은 조정의 체통이 전도된 것으로 중신을 대우하는 도리가 아닌 것 같습니다. 마땅히 잉임시키라는 명을 환수해야 됩니다. 경상좌도 병사 이의익(李義翼)은 일찍이 호곤(湖閫)231) 을 맡았을 적에 함부로 금송(禁松)을 베었으므로 비루하고 잗달다는 비난이 지금도 그치지 않고 있습니다. 따라서 영외(嶺外)의 중곤(重閫)을 맡겨서는 안되니 의당 개직(改職)하여야 합니다. 고산 찰방(高山察訪) 이명곤(李命坤)은 한 번 관직(館職)을 거쳤는데 갑자기 우관(郵官)에 제수하였습니다. 법강(法講)이 잇따라 열리는 때에 이런 사람들을 외직으로 내려 보낼 수는 없으니, 또한 개체(改遞)해야 합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시관(試官)에 대한 일은 이미 처분을 내렸다. 이의익에 대한 일은 진달한 내용이 지나치다. 북백(北佰)을 잉임시킨 것은 백성을 위한 것이니 어찌 소각(銷刻)232) 에 구애할 것이 있겠는가? 이명곤의 일은 아뢴 대로 시행하게 하겠다."
하였다.
부수찬 이천보(李天輔)가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당론은 국가의 고질병입니다. 전하께서 기필코 이를 제거하려 하시는 것은 곧 옛 성왕(聖王)이 건극(建極)하려는 마음인 것입니다. 그러나 전하께서 이를 제거하는 방도에 있어서 오히려 그 근본을 얻지 못하셨기 때문에 아직 당론은 제거하지 못한 채 그 말류(末流)의 폐단만 당론보다 더 심하게 되었습니다. 전하께서는 단지 뭇신하들이 피혐하는 것만 보고서 형적(刑跡)을 멀리하는 것이라고 의심하시고, 사람을 진용(進用)할 경우에는 양쪽을 상대적으로 거용(擧用)하시며, 일을 논할 경우에는 왼쪽을 돌아보고 나서는 또 오른쪽도 돌아보십니다. 이것을 마치 공도(公道)를 확장시키고 치교(治敎)를 두루 시행하는 것으로 여기시지만, 그것이 폐단을 구제할 수는 없다는 것을 모르고 계십니다. 천하의 모든 일은 근본이 있고 말단이 있는 것입니다. 이른바 근본이라는 것은 바로 임금의 한 마음인 것인데 전하께서 진실로 겸허한 마음으로 이치를 살펴 지극히 분명한 자세로 임하시고 대공(大公)의 도량으로 감싸서 안배(安排)되어 있는 사심(私心)과 편폐(偏蔽)된 의혹이 그 사이에 끼어들지 못하게 해야 합니다. 그리하여 미리 억측하는 것을 일삼지 마시고 호오(好惡)를 만들지 마시며, 사람을 임용함에 있어서 진위(眞僞)만 판별하고 영합(迎合)하는 것을 취함이 없어야 하며, 사물(事物)을 접함에 있어서 오직 성신(誠信)만 극진히 하고 겉으로 꾸미는 일이 없어야 합니다. 지조를 지키는 신하를 진용하여 풍속을 면려시키고, 과감하게 간하는 선비를 수용하여 언로(言路)를 열고, 힘써 공의(公議)를 좇아 선입견을 고집하지 말고, 대체(大體)를 유지하도록 힘써 잗단 일에 구애되는 일이 없게 하소서, 그리고 의리를 밝혀 왕강(王綱)을 높이고 시비를 바로잡아 인심을 올바르게 해서 재능이 있는 자는 진용하고 재능이 없는 자는 물리쳐 버리며, 어진 자는 기용하고 어질지 못한 자는 내보내며 명실(名實)을 종합하여 따지고 출척(黜陟)을 분명히 한다면, 대소 신료들이 장차 직무의 수행에 분주하여 겨를이 없게 될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우악한 비답을 내렸다.
수찬 홍상한(洪象漢)이 천둥한 이변(異變) 때문에 상소했는데, 대략 이르기를,
"삼가 근일 전하께서 재변을 당하여 수성(修省)하신 것을 살펴보건대, 대략 이르기를, 점점 전일만 못합니다. 그리하여 자신을 책망하는 하교와 구언(求言)하는 전지(傳旨)가 적막하여 들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대신은 전하의 고굉(股肱)인데도 성신(誠信)으로 믿지 않아 예모(禮貌)가 완전히 쇠잔해졌으며, 대각은 조정의 이목(耳目)인데도 자칫 꺾어 누르기 때문에 언로가 폐색되었으니, 어떻게 치도(治道)를 강구하여 인애(仁愛)하는 하늘의 경계에 우러러 답할 수 있겠습니까?"
하니, 예사 비답을 내렸다.
주강을 행하였다.
석강을 행하였다. 시독관 이종적(李宗迪)이 천둥한 재변 때문에 진계(陳戒)하고, 이어 세 가지 조항에 대한 말을 진달했는데, 첫째 경천(敬天)이고, 둘째 성학(聖學)에 힘쓰는 것이고, 셋째 인재(人才)를 기용하는 것이었다. 또 아뢰기를,
"전관(銓官)이 나오지 않으면 특별히 입시하게 하는 명을 내리고, 여러 신하들이 인피하고 떠나면 다시 어느 때를 기다려야 하는가 라는 하교를 내리고, 진실로 비상한 이수(異數)의 경우가 아니면 번번이 차마 들을 수 없는 엄중한 하교를 내리십니다. 그리고 기강은 국맥(國脈)에 관계가 되고 언로 또한 군덕(君德)에 관계되는 것입니다. 변방의 백성이 범월(犯越)하여 청(淸)나라의 질책이 장차 이르게 되었고, 호유(湖儒)들이 시장(試場)을 혼란시켜 국시(國試)가 이루어지지 못하였고, 토민(土民)이 토주(土主)를 무함하여 비방하고, 군졸이 주장(主將)을 꾸짖어 욕보이는 것들은 기강에 관계가 있는 것입니다. 전하께서는 강한 자는 두려워하고 약한 자는 깔보는 병통이 있어서 대체(大體)를 지키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능행(陵行) 때의 일을 가지고 말하여 보더라도 불법을 저지른 죄가 단지 일개 무졸(武卒)에게만 미치고 직무를 제대로 수행하지 않은 벌이 유독 두 명의 우관(郵官)에게만 행하여졌을 뿐입니다. 기영(畿營)의 편비(褊裨)를 곤장으로 결단한 것은 더욱 체모를 손상시키는 한 가지 단서인 것입니다. 언로가 막힌 데 이르러서는 더욱 사람으로 하여금 한심스러움을 느끼게 합니다. 진실로 성조(聖朝)로 하여금 애초에 빠진 일이 없어서 간하는 글이 점점 드물어졌다면 진실로 아름다운 일입니다만. 현재 조정에 어찌 말할 만한 일이 하나도 없어서 과감히 말하는 사람이 하나도 없는 것이겠습니까? 이는 다름 아니라 입을 열어 한마디라도 말을 하게 되면 번번이 시상(時象)으로 의심하기 때문인 것입니다. 한마디 말 때문에 일생 동안 영원히 벼슬길을 저지당하는 경우도 있고, 한 가지 일 때문에 또 종신토록 배제당하는 경우도 있는데, 이것이 말하는 것을 경계하는 이유인 것이니, 또한 성상께서 스스로 면려해야 될 점이 아니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가납(嘉納)하였다.
헌부에서 전계를 다시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9월 26일 갑오
임금이 소대를 행하였다. 시독관 이종적(李宗迪)이 또 진계(進戒)하기를,
"피전(避殿)하고 감선(減膳)하고 자신을 책망하고 구언(求言)하는 것이 비록 겉치레에 가까운 것 같지만 또한 그만둘 수 없는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실정(實政)에 힘쓰지 않고 감선(減膳)에만 힘쓴다면 또한 무슨 이로움이 있겠는가? 왕년에는 각선(却膳)했었고 금년에는 석위(釋位)한다고 했는데도 신하들이 변동할 것을 생각하지 않고 있으니, 음(陰)이 치성하고 양(陽)이 쇠미해서 그런 것이 아닌가?"
하였다. 이때 임금이 뭇신하들의 당습(黨習)에 대한 미움이 누적되어 모든 진계하는 말에 대해 빈번이 책망하는 하교를 내리는 것이 이와 같았다.
파주(坡州)의 유생 이익명(李翼明) 등이 상소하여 청하기를,
"파산(坡山)의 명유(名儒) 성수종(成守琮)을 그의 형인 선정신 문정공(文貞公) 성수침(成守琛)의 서원에 함께 배향(配享)하게 하여 주소서."
하니, 임금이 묘당으로 하여금 품처(稟處)하게 하였다.
9월 27일 을미
임금이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천둥한 이변 때문에 감선(減膳)하고 구언(求言)한다는 전지를 내리고, 또 당습이 굳어지고 기강이 해이해졌다 하여 정신(廷臣)들을 책유하였다. 좌의정 김재로(金在魯)가 아뢰기를,
"지난번 박춘우(朴春遇)의 일 때문에 사람을 위하여 벼슬을 가린다 하여 전관(銓官)을 책망하셨습니다만, 성상께서는 도리어 사람을 위하여 벼슬을 가리는 것을 면하지 못했습니다. 박춘우는 연소한 사람인데, 단지 무기(武技)가 있다 하여 수령의 직임에 제수하였으니, 이것이 이미 남상(濫觴)입니다. 보은(報恩)은 그가 감당할 만한 곳이 아니고 또한 대간의 의논도 있었다고 들었습니다. 이미 제수하는 명이 있었지만, 마땅히 다른 고을에 바꾸어 제수해야 합니다."
하니, 그대로 따랐다. 병조 판서 조현명(趙顯命)이 금오(金吾)의 겸임을 해면시켜줄 것을 청하면서 아뢰기를,
"신이 오원(吳瑗)과 함께 이미 임인년233) 의 옥안을 이정(釐正)하라는 명을 받았습니다만 오원이 마침 병이 들었으니, 신 또한 해면해 주셔야 합니다."
하니, 임금이 조현명이 미루면서 감당하여 하지 않는 것이라고 여겨 윤허하지 않았다.
이천 부사(利川府使) 정우량(鄭羽良)과 성환 찰방(成歡察訪) 민통수(閔通洙)를 체환(遞還)하도록 명하였는데, 우의정 송인명(宋寅明)의 말을 따른 것이었다.
9월 28일 병신
좌의정 김재로(金在魯), 우의정 송인명(宋寅明)을 불러서 복상(卜相)하라고 명하고, 또 가복(加卜)234) 하게 하여 병조 판서 조현명(趙顯命)을 우의정으로 삼았다. 이날 개정(開政)하여 김재로(金在魯)를 영의정으로, 송인명(宋寅明)을 좌의정으로, 이명곤(李命坤)를 부수찬으로, 민선(閔墡)을 장령으로, 이병상(李秉常)을 판의금으로, 정석오(鄭錫五)를 병조 판서로, 조동하(趙東夏)를 전라 좌수사로, 김상적(金尙迪)을 광주 시재 어사(廣州試才御史)로, 홍상한(洪象漢)을 수원 시재 어사로 삼았다.
임금이 개성 유수 김약로(金若魯)를 불러서 접견하고, 고려 태조의 분묘를 수리하라고 계칙하고, 고도(古都)의 인재로서 침체되어 있는 자를 권장하여 발탁해서 장문(狀聞)하게 하였다.
임금이 주강과 석강을 행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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