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영조실록52권, 영조 16년 1740년 10월

싸라리리 2025. 9. 24. 10: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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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2일 기해

임금이 주강을 행할 것을 명하였으나 경연관(經筵官)이 패초(牌招)를 어기고 들어오지 않았다. 증광 감시(增廣監試)의 시장(試場)을 설행하려 하였으나 시관(試官)이 또한 소명(名命)을 어긴 이들이 많았으므로, 하교하기를,
"기강이 해이해져 패초를 어기는 것이 날로 더욱 심해지고 았다. 임금은 의관을 정제하고 기다리고 있는데, 신하는 오만하게 어기는 짓을 일삼고 있다. 하루에 여섯 번 패초(牌招)했다는 것은 일찍이 들어 보지 못한 일이니, 여섯 번 패초를 어긴 자는 기장 현감(機張縣監)으로 보임하여 내어 보내라."
하고, 네 번 패초를 어긴 사람도 의금부에서 모두 추고하도록 명하였다. 여섯 번 패초를 어긴 자는 서명빈(徐命彬)이었는데, 뒤에 대신이 아뢴 것으로 인하여 기장현(機張縣)으로 보임시켜 내보내라는 명을 정지하고, 다시 삭출(削黜)하라고 명하였다. 또 비국에서 아뢴 것으로 인하여 예조 당상(禮曹堂上)을 파직하도록 명하였는데, 시관(試官)을 잘 의망(擬望)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삼학(三學)의 재임(齋任)들을 모두 정거(停擧)하도록 명하였다. 이때 대사성 심성희(沈聖希)가 원경하(元景夏)의 벌을 풀어 주라고 한 명을 받들고 태학(太學)에 들어가서 사학(四學)의 재임들을 불렀으나, 모두 병을 핑계대고 오지 않고, 남학(南學)의 재임인 신경민(申景閔)만 들어왔었다. 심성희가 드디어 신경민을 시켜 두루 사학에 가서 원경하의 벌을 풀어 주게 하고 그 일을 아뢰니, 임금이 드디어 모두 정거하도록 하였다. 신경민은 원경하와 인아(姻婭) 사이였기 때문에 혼자서 무릅쓰고 나와서 그의 벌을 풀어 주었다.

 

영의정 김재로(金在魯), 좌의정 송인명(宋寅明)이 순서에 따라 승진되었다 하여 차자(箚子)를 올려 사직하고, 우의정 조현명(趙顯命)도 신복(新卜)이라 하여 상소하여 사직하니, 모두 우악한 비답을 내렸다.

 

소대를 행하였다

 

10월 4일 신축

천둥하고 번개가 쳤다.

 

김시형(金始炯)을 형조 판서로, 윤순(尹淳)을 지경연사로 삼았다.

 

임금이 소대에 나아갔다. 강하기를 마치자, 검토관 정이검(鄭履儉)이 재변을 당하여 수성(修省)하는 경계를 진달하고, 또 북로(北路)에 흉황(凶荒)이 들었다는 것을 말하였다. 또 북로의 인재가 적체되었다는 것을 말하고, 이어 위창조(魏昌祖)·이재춘(李載春)·이격(李格)·주형리(朱炯离) 등 4, 5인을 천거하니, 임금이 전조에 명하여 수용(收用)하게 하였다. 정이검이 새로 고산 찰방(高山察訪)에서 소명을 받들었기 때문이다.

 

임금이 소대를 행하였다. 하교하기를,
"우리 동방은 단군(檀君) 이후 기성(箕聖)235)  이 팔조(八條)의 가르침을 폈으므로, 예로부터 예의의 나라로 일컬어져 왔다. 구준(丘濬)의 《대학연의보(大學衍義補)》에 이미 예의의 나라라고 하였는데, 또 이맥(夷貉)의 종자에 편입시켰으니, 이는 매우 정명(正名)의 의리가 아니다. 하편(下篇)에 이 글귀가 있는 것은 영사(領事)에게 문의하여 모두 세초(洗草)하도록 하라."
하였다. 영의정 김재로(金在魯)도 성교에 따라 이개(釐改)할 것을 청하니, 임금이 옳게 여겼다.

 

날씨가 추웠기 때문에 숙위 군병(宿衛軍兵)에게 유의(襦衣)를 지급하도록 명하였다.

 

영의정 김재로가 원보(元輔)의 중임을 감히 감당하지 못하겠다 하여 다시 상소하여 사직하였으나, 우악한 비답을 내리고 윤허하지 않았다.

 

10월 6일 계묘

화성(火星)이 귀성(鬼星)으로 들어갔다.

 

임금이 영상과 좌상을 불러서 접견하였다. 하교하기를,
"조현명(趙顯命)은 내가 평소 그의 인품을 알고 있다. 호판도 그의 염개(恬介)함과 지조를 지키는 것을 칭찬하였다. 따라서 부망(副望)에 오른 그를 임용(任用)한 것은 국사를 위한 조처였다."
하였다. 이때 호조 판서 이병상(李秉常)이 수망(首望)으로 매복(枚卜)에 들었고, 조현명은 부망에 들었기 때문에 하교하여 언급한 것이었다.

 

신택하(申宅夏)를 승지로, 서종급(徐宗伋)을 대사헌으로, 윤휘정(尹彙貞)을 대사간으로, 안상휘(安相徽)를 집의로, 이윤신(李潤身)을 사간으로, 권해(權賅)·주형리(朱炯离)를 장령으로, 유우기(兪宇基)를 지평으로, 이광식(李光湜)을 헌납으로, 남태기(南泰耆)를 정언으로, 윤순(尹淳)을 예조 판서로, 권적(權𥛚)을 예조 참판으로 삼았다.

 

우의정 조현명이 다시 상소하여 사직하기를,
"신이 듣건대, 그릇이 가득 차면 기울고 말이 빨리 달리면 엎어진다고 했는데, 이는 사리에 있어 당연한 것입니다. 신은 용렬한 사람으로 잘못 세상에 드문 우악한 은혜를 받았습니다. 문직(文職)과 무직(武職)으로 좌우에서 분주하게 일한지 지금까지 10년이 되었는데, 악이 하늘까지 찼으니 반드시 신을 의논하는 사람이 이미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다시 높은 자리에 오른 것이 여기에 이르렀으니, 이것이 어찌 슬기로운 사람을 기다려 길상(吉祥)과 선사(善事)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이겠습니까? 이미 가득 찬 그릇에다 물을 더 붓고 달리고 있는 말에 채찍질을 하는 형세이니, 이러고도 기울어지지 않고 엎어지지 않기를 바란다면 반드시 그런 요행은 없을 것입니다. 하늘이 내려다보는 아래에서는 혹 죄륙(罪戮)을 면한다 하더라도 동산의 꽃처럼 먼저 시들고 아침 이슬처럼 갑자기 없어지게 되어 산 같고 바다 같은 은덕을 마침내 만분의 일도 갚지 못하게 될까 두렵습니다. 조용히 생각하는 것이 여기에 이르니, 신은 실로 스스로 슬퍼할 뿐입니다."
하니, 우악한 비답을 내려 면유(勉諭)하였다.

 

부수찬 이천보(李天輔)가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천하의 걱정은 언로(言路)가 막힌 것보다 더 큰 것이 없습니다. 시험삼아 오늘날의 일을 보건대, 언로가 열렸다고 여기십니까, 열리지 않았다고 여기십니까? 삼사(三司)의 언의(言議)하는 자리를 위태로운 곳으로 여겨 교묘하게 피하는 것을 일삼고 있고, 삼사에서는 합계(合啓)하고서 정계(停啓)하지도 않고 연계(連啓)하지도 않은 채 인원만 갖출 것을 걱정하고 있습니다. 아! 국가에서 삼사를 설치한 것이 어찌 진실로 그렇게 하기 위한 것이겠습니까? 이는 진실로 전하께서 인도하여 그렇게 된 것입니다."
하고, 또 아뢰기를,
"전하께서 붕당을 미워하시는 것이 너무 지나치셔서 일을 논함에 있어서는 교격(矯激)하는 것인가 의심하고, 사람을 논함에 있어서는 경알(傾軋)하는 것인가 의심하십니다. 아! 붕당을 제거하지 않으면 반드시 나라가 망하지만 시비를 논쟁하는 것을 붕당으로 의심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붕당은 사사로운 것이지만 시비는 공변된 것입니다. 간사함을 금하기 위해 타고난 본심까지 아울러 무시해서야 되겠습니까? 전하께서 진실로 나에게 있는 사물을 판별하는 마음의 잣대를 먼저 바루어 사물에 따라 적당하게 대응할 수 있다면 10년이 못되어 모든 것이 황극(皇極)으로 돌아가게 될 것이며, 전하께서 추구하시는 정치도 뜻대로 완성시킬 수 있을 것입니다."
하고, 또 아뢰기를,
"임인년236)  의 옥사로 말하건대, 전하께서 이미 대신에게 의논하여 정하라고 명하셨고 대신들도 여러 번 의견들을 진달했습니다. 대저 선조(先朝)에게 역적인 것은 곧 전하에게도 역적인 것이고 전하에게 역적인 것은 곧 선조에게도 역적인 것이니, 천하의 악은 한가지인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나누어서 둘로 만들 수 있겠습니까? 고발한 것은 역적 목호룡(睦虎龍)인데, 역적 목호룡은 이미 무고했다는 것으로 법에 의거하여 처단되었으니, 그 옥사는 무옥(誣獄)인 것입니다. 그 가운데 비록 한두 사람이라도 역안(逆案)에 그대로 둔다면, 이는 역적 목호룡의 고발이 무고가 되지 않는 것입니다. 어떤 이들은 그 사람들의 평일의 행동을 문제삼고 있습니다만 이는 그렇지가 않습니다. 오늘날 다투는 것은 그 옥사가 무옥인지 아닌지 하는 것인데, 어떻게 사람에 따라 저앙(低仰)할 수가 있겠습니까? 대신들이 이미 성명(成命)을 받들고도 아직껏 봉행하지 않고 있는 것에 대해 삼가 개연(慨然)하게 여깁니다."
하고, 또 아뢰기를,
"임금의 덕을 성취시키는 것은 그 책임이 경연에 있습니다. 판서 신(臣) 이재(李縡)와 찬선 신 박필주(朴弼周) 같은 이들을 성례(誠禮)를 극진히 하여 초치하면 어찌 번연(幡然)히 마음을 고치지 않겠습니까? 유현을 초치하여 강학에 도움이 있게 한다면 그 도움되는 점이 클 것입니다. 삼가 유의하시기 바랍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면려한 것은 마땅히 유념하도록 하겠다. 임인년의 옥안을 아직 수정하지 않은 것은 일이 많아서일 뿐만 아니라, 그때의 판금오를 지금 막 정승에 임명하였으므로, 지금은 행공(行公)하는 사람이 없다. 그대의 말이 앞서지도 뒤지지도 않은 것이라 할 수 있으나, 제때가 아니라는 것은 면할 수 없다."
하였다. 이때 조현명(趙顯命)이 이미 옥안을 이정(釐正)하라는 명을 받들었으나, 미루면서 봉행(奉行)하지 않다가 이어 정승에 임명되었으므로 이천보가 공격하려 한 것이다. 그러나 임금이 당론이라고 지척(指斥)할까 두려워 감히 그가 왕명을 어긴 죄를 분명히 말하지 못하고 단지 부드러운 말로 개연하게 여긴다고 은미하게 풍자하였고, 임금도 그의 의도를 알고 특별히 때가 아니라는 것으로 지척하였던 것이다.

 

10월 7일 갑진

감시 회시(監試會試)의 방(榜)을 내었다. 일소(一所)에서 호남 유생(湖南儒生) 두 사람이 액수 이외에 속이고 들어왔다가 일이 발각되어 시관(試官)이 아뢰니, 율(律)에 의거하여 감처(勘處)하라고 명하였다.

 

헌부 【장령 권해(權賅)이다.】 에서 전계를 다시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근래 패초(牌招)를 어기는 것이 진실로 고질적인 폐단이 되었습니다. 시관(試官)이 패초를 어긴 것이 세 번·네 번에 이르러 양소(兩所)에 중신이 한 사람도 없게 되었고, 또한 주문자(主文者)237)  도 없게 되어 시원(試院)이 모양을 이루지 못했다고 합니다. 패초를 어긴 시관은 모도 중추(重推)를 시행해야 됩니다."
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10월 8일 을사

어떤 별이 천원성(天圓星) 아래로 흘러갔는데, 크기는 주먹만 하였고, 꼬리의 길이는 3, 4척쯤 되었으며, 빛깔은 붉은 색이었다.

 

10월 9일 병오

설서 유언국(兪彦國)이 상소하기를,
"춘궁 저하(春呂邸下)께서 이제 이미 6세가 되었으니, 학문을 강론하는 공부가 하루가 시급합니다. 그런데 주연(冑筵)238)  의 신하는 윤직(輪直)하는 것에 불과 합니다. 궁료(宮僚)들을 세 번 입대(入對)하게 하는 규례는 비록 성명(成命)이 있기는 합니다만, 아무래도 사이가 너무 뜨는 것 같습니다. 다시 한 달에 여섯 번으로 정하고, 비록 강하는 날을 당하지 않았더라도 나아가 접견하게 함으로써 온고지신(溫故知新)의 이로움이 있게 해야 합니다. 그리고 아보(阿保)나 환첩(宦妾)의 무리들과 친압하여 놀지 못하도록 하여 옛 성현의 훈계를 따르게 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한 달에 여섯 번 하는 것은 마땅히 날씨를 살펴 가면서 행하게 하겠다."
하였다.

 

주강과 석강을 행하였다.

 

10월 10일 정미

공조 판서 오원(吳瑗)이 졸(卒)하였다. 오원은 충정공(忠貞公) 오두인(吳斗寅)의 손자인데, 일찍이 갑과(甲科)에 급제하여 문학(文學)으로 이름이 났고 벼슬은 대제학에 이르렀다. 사람됨이 깨끗하여 욕심이 없고 소탈하였으므로 꾸미는 것을 일삼지 않았는데, 졸(卒)할 때 나이 41세였다. 임금이 나라를 위한 일편 단심이 있는데도 일찍 죽은 것을 애석히 여겨 차탄하고 애도하였으며, 시호를 내리라고 명하였다.

 

이제담(李齊聃)을 장령으로, 심악(沈)을 지평으로, 이재(李縡)를 지경연사로, 홍경보(洪景輔)를 우윤으로, 이석표(李錫杓)를 광주 부윤(廣州府尹)으로 삼았다. 중비로 교리 원경하(元景夏)를 발탁하여 승지로 삼았다.

 

10월 11일 무신

우의정 조현명(趙顯命)이 세 번째 상소하여 사직하고, 또 이천보(李天輔)의 말을 이유로 인혐(引嫌)하니, 임금이 우악한 비답을 내려 돈유(敦諭)하였다.

 

집의 안상휘(安相徽)가 상소하기를,
"남한(南漢)과 수원(水原) 두 부(府)의 백성들이 이런 흉년을 당하여 다른 일을 할 겨를이 없으니, 의당 시재(試才)하라는 명령을 정지하여 공사(公私)의 낭비되는 폐단을 돌보소서."
하였으나, 따르지 않았다.

 

10월 12일 기유

소대를 행하였다. 《주자어류초(朱子語類抄)》를 강하기 시작하였다.

 

10월 13일 경술

우의정 조현명(趙顯命)이 약방 도제조로 왕명을 받고 출사(出仕)하였다. 임금이 인견하고 시상(時象)을 조제(調劑)하는 책임을 가지고 면유(面諭)하니, 조현명이 감히 감당하지 못하겠다고 사양하였다. 그리고 이천 부사(利川府使) 이기진(李箕鎭)을 체직시키고 해조(該曹)로 하여금 식물(食物)을 넉넉하게 지급하게 하여 어미를 모시고 서울로 올라오게 할 것을 청하였다. 이때 이기진이 중신(重臣)으로서 걸군(乞郡)하여 이천 부사가 되었는데, 미처 부임하기 전에 조현명이 지위가 드러난 사람으로서 구차하고 가난하다는 이유로 극력 머물게 할 것을 청하니, 임금이 이를 허락하였다.

 

하교하기를,
"대성(大聖)인 공자(孔子)께서도 위(衛)나라 영공(靈公)의 정치를 보좌하려고 하였고, 아성(亞聖)인 맹자(孟子)께서도 제(齊)나라와 양(梁)나라에서 도(道)를 행하려 하였다. 이것이 어찌 다른 이유가 있는 것이겠는가? 임금을 얻은 뒤에야 도를 행할 수 있기 때문인 것이다. 전성(前聖)과 후성(後聖)은 오히려 춘추 시대(春秋時代)에도 도를 행하려는 마음이 간절했는데, 아! 오늘날 정신(廷臣)들은 바로 교목 세신(喬木世臣)이니, 어찌 전국 시대(戰國時代)에다 견줄 수 있겠는가? 이미 몸을 나라에 바쳐 조정에 벼슬하여 지위가 중재(重宰)에 이르렀는데도 서로 돌아보며 머뭇거리고 발을 떼면서도 서로 바라보고 있으니, 이것이 무슨 의미인가? 내가 비록 제나라나 양나라 임금만 못하다고 하더라도 신하들의 처지에서 볼 적에 신하로서의 분수가 있다고 할 수 있겠는가? 지난번 스스로 계칙하라는 하교를 내린 것을 심상하게 여기고 올라오라고 칙려(飭勵)한 말을 휴지(休紙)로 만들었다. 단지 자신을 깨끗하게 하여 고향에 거처할 것만을 생각할 뿐 임금을 사랑하고 나라를 위하는 의리는 생각하지 않고 있으니, 사체와 분의에 있어 매우 한심스럽다. 외방에 있는 재신(宰臣)들을 모두 중추(重推)하고 조속히 올라오게 하라."
하였다.

 

10월 14일 신해

대사간 윤휘정(尹彙貞)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지금의 형세는 유약한데도 정제하지 아니하고 게을리하고 있는데도 경계하지 아니한 채 구차스럽게 조정하면서 진려(振勵)할 방책을 모르는 것이 유독 걱정입니다. 그리하여 군강(君綱)이 실추되고 해이해져 아랫사람은 윗사람을 두려워하지 않고, 인심이 사욕(私慾)에 빠져서 사심(私心)이 공심(公心)을 항상 이기고 있습니다. 이와 같은 것이 극도로 쇠퇴해진 형세이고 장차 망하게 될 징조인데, 이는 일조 일석(一朝一夕)에 생긴 것이 아닙니다.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먼저 한 몸의 사심을 제거한 다음 대공(大公)을 확연히 넓혀 아랫사람들을 통솔하고 큰 일을 하려는 뜻을 더욱 면려하고 동독(董督)하는 방법을 더욱 잘 생각하여 위존(威尊)을 폄손(貶損)시킴으로써 스스로 유약함을 보이지 않도록 하소서. 만약 당습(黨習)이 고쳐지지 않는 것을 근심하신다면 그 가운데 가장 불량한 자를 잡아다가 죄주시고, 죄준 다음에는 갑자기 소석(疏釋)하여 진용(進用)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니, 예사 비답을 내렸다.

 

임금이 영의정 김재로(金在魯)를 인견하고 백마 산성(白馬山城)을 간심(看審)한 일에 대해 하문하였다. 김재로가 아뢰기를,
"땅은 비록 넓지 않으나 또한 많은 사람을 넉넉히 수용할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강도(江都)는 매우 긴요한 곳이어서 성을 축조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니, 임금이 강확(講確)하여 품처(稟處)하게 하였다. 김재로가 또 잇따라 흉년이 들었다는 것으로 기내(畿內)에 있는 산성의 군향을 백성들의 소원에 따라 본읍에다 받아서 유치하게 할 것을 청하니, 임금이 이를 허락하였다.

 

10월 15일 임자

헌부에서 전계를 다시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10월 16일 계축

민응수(閔應洙)를 홍문관 제학으로, 이기진(李箕鎭)을 좌빈객으로, 정휘량(鄭翬良)을 부교리로, 유최기(兪最基)를 대사간으로, 이선행(李善行)을 집의로, 정희규(鄭熙揆)를 헌납으로, 이창의(李昌誼)를 지평으로, 정기안(鄭基安)을 정언으로 삼았다.

 

필선 박필간(朴弼榦)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왕세자의 슬기로운 자질은 하늘에서 타고나신 것으로 덕기(德器)가 날로 성취되어가고 있는데, 서연(書筵)에서의 보도(輔導)는 아직 그 실상이 없습니다. 신이 지나치게 우려하는 것은 감히 알지 못하겠습니다만 저위가 깊숙하고도 은밀하여 가까이 지내는 사람은 어떤 사람이고 보고 듣는 것은 무슨 일일까 하는 것입니다. 보모(保姆)·엄환(閹宦)의 무리들은 오로지 뜻을 받들어 아첨하고 기쁘게 하는 것만을 일삼고 결점을 바로잡고 도와서 제거할 도리는 알지 못합니다. 따라서 예(禮)에 어긋나는 말이 혹시라도 가까이 들리는 일이 없고 올바르지 않은 일이 혹시라도 가까이 보게 되는 일이 없는지 모르겠습니다. 옷이 지나치게 가볍고 따뜻하면 혹 기혈(氣血)을 손상시킬 수도 있고 음식이 지나치게 기름지고 달면 혹 위장(胃腸)을 해칠 수도 있습니다. 기용(器用)을 혹 아름답고 화려한 것을 숭상하면 사치하는 마음을 열기 쉽고, 놀이가 혹 방일(放逸)한 데 이르면 나태해지는 기운을 자라게 하기 쉽습니다. 삼가 바라건대, 성심(聖心)에 깊이 유념하시어 반드시 궁인(宮人)과 내신(內臣)은 특별히 중후하고 소심한 사람을 가려 일상 생활에 배시(陪侍)하여 잠시도 떠나지 않고 몸을 보호하고 기(氣)를 위양(衛養)하게 하며, 의복은 때에 맞게 하고 음식은 절도에 맞게 하여 질고(疾苦)를 막고 호오(好惡)를 살피며 저속한 말이 귀를 혼란시키지 못하게 하고 사치스런 물건이 눈을 현혹시키지 못하게 하여 일에 따라 마음을 다해서 조금도 소홀히 하거나 방심하는 일이 없게 해야 합니다. 만일 아첨하고 간사하고 비위만 맞추는 무리가 그 사이에 끼어 있으면 물리쳐 멀리하여 가까이에서 배시(陪侍)하지 못하게 해야합니다. 이는 모두 외신(外臣)으로서는 감히 참여하여 알 수 있는 일이 아니므로, 오직 성명(聖明)께서 더욱 유념하여 살피고 검속하기에 달려 있습니다."
하고, 문학 한익모도 상소하여 정자(程子)가 궁인과 내신은 선발하여 가려야 한다고 한 말에 의거하여 동궁을 보도할 방도를 세울 것을 청하고, 또 청하기를,
"궁료(宮僚)들이 진현(進見)하는 것에 대해 기일을 미리 정하지 말고 맑고 화창한 때에는 즉시 불러서 접견하게 할 것을 허락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진달한 내용이 모두 옳다. 마땅히 유념하겠다."
하였다.

 

임금이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임금이 삼성 죄인(三省罪人)을 추국하는 것이 마땅한지의 여부(與否)를 여러 신하들에게 하문하였다. 이때 공주(公州)에 양모(養母)를 증간(烝奸)239)  한 자가 있었는데, 감사가 장문하였다. 법에 있어 당연히 추국하여 정형(正刑)하게 되어 있었는데, 임금이 말하기를,
"내가 장유차(牆有茨)240)  의 시(試)를 읽지 않은 것은 그 내용이 추잡하기 때문이었다. 그가 양자(養子)이기는 하지만 일이 매우 흉악하고 추잡하다. 어찌 왕옥(王獄)으로 잡아 와서 서울을 더럽힐 것이 있겠는가? 마땅히 어사(御史)를 특별히 보내어 참(斬)하게 해야 한다."
하니, 영의정 김재로(金在魯)가 아뢰기를,
"아비를 시해(弑害)하고 이미를 시해한 것이 어느 것인들 흉악하고 더럽지 않겠습니까마는, 그래도 모두 잡아다가 추국하는 것은 왕법(王法)을 중히 여기는 까닭입니다. 그러나 《대명률(大明律)》에 아비의 첩(妾)과 적모(嫡母)·계모(繼母)·자모(慈母)·양모(養母)를 간범(奸犯)한 자는 아비의 첩을 간범한 예(例)에 의거하여 참(斬)한다고 되어 있습니다. 지금 이 죄인이 양모를 증간(烝奸)한 것에 대해 참형에만 그치는 것은 부당합니다. 법에 있어서는 능지 처참(凌遲處斬)에 해당이 됩니다만 율문(律文)에 없으므로 또한 새로 만들기가 어렵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드디어 잡아다 국문하여 결안 정법(結案正法)하도록 명하였다.

 

우의정 조현명(趙顯命)이 방심(放心)을 찾는 것이 학문의 근본이 되니, 먼저 자신을 바르게 한 다음 동궁(東宮)을 교양(敎養)할 것을 청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진달한 내용이 절실한 것이다."
하였다. 조현명이 또 아뢰기를,
"사람은 각기 장점을 지니고 있으니, 단점은 버리고 장점만 취한다면 모두 온전한 인재인 것입니다."
하고, 이어 아뢰기를,
"이병상(李秉常)·윤순(尹淳)·이덕수(李德壽)·이광덕(李匡德)·윤양래(尹陽來)는 모두 인재입니다. 이우하(李宇夏)·홍중일(洪重一)·최성대(崔成大)·정실(鄭宲) 등은 모두 말 때문에 금고(禁錮)당하였으니, 마땅히 마음을 써서 수용(收用)해야 합니다."
하고, 또 아뢰기를,
"서명균(徐命均)·유척기(兪拓基)는 모두 정세(情勢) 때문에 외방에 가 있으니, 마땅히 성심으로 힘써 돈소(敦召)해야 합니다."
하니, 임금이 이어 하교하기를,
"오원(吳瑗)은 통절하게 스스로 각책(刻責)하여 구습(舊習)을 고쳤었는데, 지금 사망했기 때문에 원경하(元景夏)를 발탁 기용하여 그를 대신하게 하라. 이주진(李周鎭)도 승질(陞秩)시키기에 합당하니 경 등은 함께 마음을 같이하여 협찬(協贊)하도록 하라.
하니, 조현명이 또 아뢰기를,
"풍속이 쇠퇴하고 사습(士習)이 괴패(壞敗)된 것이 근일과 같은 적이 없었습니다. 차술(借述)하여 과거에 급제한 자가 태연히 부끄러워할 줄 모르고 여러 사람이 모인 좌중에서 창언(唱言)하면서 스스로 자랑하고 있으니. 어찌 하나의 큰 변괴가 아니겠습니까? 이와 같은 부류는 마땅히 전조로 하여금 조사해 내어 기색(枳塞)해야 합니다."
하자, 임금이 자못 어렵게 여기는 뜻을 보였다. 조현명이 또 극력 청하니, 임금이 다시 여러 신하들에게 하문하여 각기 소회를 진달하게 하였다. 김재로(金在魯)가 아뢰기를,
"해조(該曹)에서 변별하기가 어려워 봉행할 수 없다면, 도리어 애당초 이 명이 없었던 것만 못합니다."
하고, 좌의정 송인명(宋寅明)은 아뢰기를,
"이런 내용으로 엄중히 계칙한다면 비록 적발하지는 못하더라도 또한 넉넉히 일세(一世)를 풍려(風勵)시키는 방도가 될 것입니다. 고려조(高麗朝)에도 홍분방(紅粉榜)241)  이 있었는데, 나라의 난망(亂亡)이 과장(科場)의 괴란(壞亂)에서 연유되는 경우가 많으니, 마땅히 변통(變通)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이 말이 연석에서 발론되었으니 외간에 전파되면 스스로 부끄러워하여 징계할 줄을 알 것이다. 어찌 변별할 필요가 있겠는가?"
하였다. 조현명이 또 과규(科規)를 다시 정할 것을 청하였으나 허락하지 않았다.

 

헌부에서 전계(前啓)를 다시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이조 참의 이주진(李周鎭)을 발탁하여 공조 판서로 삼았다. 이주진은 언의(言議)가 평완(平緩)하여 스스로 탕평론(蕩平論)을 따랐기 때문에 임금이 현명하게 여겨 원경하(元景夏)와 함께 발탁한 것이었다.

 

헌부 【집의 이선행(李善行)이다.】 에서 전계를 다시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또 계청(啓請)하기를,
"포장(捕將)에게 명하여 이하제(李夏躋)를 엄중히 신문하게 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10월 18일 을묘

조석명(趙錫命)을 대사헌으로, 권일형(權一衡)을 헌납으로, 이기헌(李箕獻)을 장령으로, 이규채(李奎采)·이구령(李耉齡)을 정언으로, 김도(金䆃)·성범석(成範錫)을 지평으로, 조명교(曺命敎)를 이조 참의로 삼았다.

 

10월 19일 병진

사방이 캄캄하여 마치 티끌이 내리는 것 같았다.

 

민응수(閔應洙)를 예문 제학으로, 정우량(鄭羽良)을 홍문 제학으로 삼았다.

 

사간 이윤신(李潤身)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근래 한번의 과거를 치를 적마다 빈번이 사람들의 말이 있으니, 시관이 데리고 다니는 겸종(傔從)의 출입을 일체 금지하게 하소서. 반궁(泮宮)의 복례(僕隷)도 다른 관사(官司)에 있는 자들로 일체 모두 이차(移差)함으로써 연줄로 서로 통하는 길을 단절시키게 하소서. 시권(試券)을 고사(考査)할 적에 비록 잘못 쓴 시권이 있더라도 본래의 초고(草稿)를 들여오지 말게 하고 장외(帳外)에 있는 대관(臺官)으로 하여금 상세히 고준(考準)하여 농간을 부리는 폐단을 방지하게 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집의 이선행(李善行)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국가에서 인재를 선발하는 길은 과목(科目)을 벗어나지 않으며, 임금이 취사(取捨)하는 권병(權柄)은 단지 낙점(落點)에 있는 것입니다. 지난번의 시관(試官)의 의망은 진실로 한심하게 여길 만한 것이었으니, 거자(擧子)를 위해 시관을 가린다는 말이 여러 사람들의 입에 시끄러웠습니다. 허다한 시관들이 모두 정세(情勢)로 보아 전혀 명을 받들 수 없는 사람들이었는데, 이들로 구차하게 수효를 채우기 위해 당당한 임금의 낙점으로 하여금 패(牌)를 받든 세 사람에 대해 바꿀 수 없게 하였습니다. 출방(出榜)할 때 이르러서는 지목하는 것이 낭자하여 모두 말하기를, ‘과거가 있은 이래 이런 일은 없었다.’ 하였습니다. 이런데도 버려 둔다면 취사(取捨)하는 제도가 이로부터 크게 무너질 것이니, 시관(試官)을 의망(擬望)한 사람에게는 결코 책벌이 없을 수 없습니다. 대신은 백료(百僚)의 우두머리이고 추탈(追奪)은 곧 극죄(極罪)의 율(律)인데, 합계(合啓)가 발론된 지 이제 몇 달이나 되었습니까? 그것이 옳다면 하루도 연계(連啓)를 늦출 수가 없는 것이고 그것이 그르다면 하루도 정계(停啓)를 또한 늦출 수가 없는 것입니다. 연계하지도 않고 정계하지도 않으면서 날마다 규피(規避)만 일삼으며 대각(臺閣)을 함정처럼 여기고 있으므로, 조정이 모양을 이루지 못하고 있습니다. 전하께서 위로 종묘에 고하고 애통해 하는 윤음(綸音)을 널리 내리신 뒤에 과연 한 개 또는 반 개라도 세도(世道)를 구제한 것이 있으셨습니까? 대신(臺臣) 가운데 전후에 규피한 자 또한 모두 견파(譴罷)를 시행해야 됩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진달한 것은 헤아릴 점이 있다. 당초 삼사(三司)에서 조태구(趙泰耉)·유봉휘(柳鳳輝) 등 흉역(凶逆)들에 대해 추탈하자는 계사(啓辭)가 있었으나 그 뒤 연계하지도 정계하지도 않은 채 서로 규피하였으므로, 대각에 거의 행공(行公)하는 사람이 없게 되었다."
하였다. 이선행이 종묘에 고한 말을 가지고 은미하게 임금의 마음을 격동시키면서 시험해 볼 계획으로 마침내 이 소장을 올린 것이었다.

 

10월 20일 정사

시강원 관원에게 명하여 세자가 강해야 할 책자를 사부(師傅)에게 문의하게 했는데, 《동몽선습(童蒙先習)》으로 정하였다.

 

헌부에서 전계를 다시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유언국(兪彦國)·박필간(朴弼榦)을 정언으로, 박치륭(朴致隆)·정이검(鄭履儉)을 지평으로, 신수(申𢢝)를 헌납으로 삼았다.

 

10월 21일 무오

이조 참판 신만(申晩)이 이선행(李善行)의 상소 때문에 상소하여 스스로 변명하기를,
"기필코 신에게 앙갚음하고자 하여 곧바로 신을 용의 주도하게 분배(分排)하여 기필코 임금의 낙점을 취하려 했다는 죄과(罪科)에 견주었으나, 오히려 구함(構陷)할 수 없을 것을 두려워하고 있으니, 아! 또한 심한 일입니다."
하니, 임금이 예사 비답을 내렸다. 이는 가을 소과(小科) 초시(初試)에 신만이 전조의 당상으로 시망(試望)을 진배(進排)했었는데 패초받은 사람이 세 사람뿐이므로 임금이 부득이 모두 낙점(落點)하였다. 출방(出榜)하기에 이르러서는 신만의 친지들 가운데 참방(參榜)한 사람이 많았기 때문에 물의가 떠들썩하였으므로, 이선행이 상소하여 이를 논한 것이었는데, 임금이 버려 두고 묻지 않았다.

 

지평 박치륭(朴致隆)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이선행이 과장(科場)의 일을 가지고 장황하게 논설을 늘어 놓으면서 정관(政官)과 시험을 주관한 관원들을 사정(私情)을 쓴 죄과에다 곧바로 몰아 넣었으니, 그의 용의(用意)가 매우 교묘하고도 주밀합니다. 진실로 그의 말과 같다면, 시관과 거자에게는 저절로 해당되는 율(律)이 있는 것이니, 대관(臺官)이 된 사람은 마땅히 분명하게 말하고 드러내어 공척(攻斥)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두루뭉실하게 말함으로써 시험을 주관한 사람만 불측한 말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일방(一榜)의 거자들로 하여금 모두 암매(暗昧)한 지경으로 몰아 넣었습니다. 그가 공의(公議)를 핑계대어 전지(銓地)에 있는 사람을 동요시키려고 한 계획이 환히 드러나 숨길 수가 없는데도 오히려 이를 부족하게 여겨 심지어 사정(私情)을 써서 이름을 더럽혔다는 것으로 시험을 주관했던 사람들에게까지 미치게 했으니 그 정태(情態)의 소재를 알기가 어렵지 않습니다. 그리고 삼사(三司)의 합계(合啓)가 정계(停啓)하지도 않고 연계(連啓)하지도 않은 것은 참으로 대각(臺閣)의 수치이지만, 이른바 옳다면 이렇게 하고 그르다면 이렇게 해야 한다는 등의 말은 매우 모호한 말이고, 한 개 또는 반 개 등의 구어(句語)는 매우 아첨에 관계되는 말인 것입니다. 겉으로는 범론(泛論)을 가탁하고 속으로는 임금의 마음을 시험한 작태 또한 차마 똑바로 볼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마땅히 견벌(譴罰)을 가하여 대각의 체통을 보존시켜야 합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진달한 내용에 대해서 마땅히 하교하겠다."
하고, 드디어 하교하기를,
"근래에 긴요하지 않은 일로 배척하고 부정한 마음을 품고 소장을 진달하니, 시폐(時弊)라고 할 수 있다. 이선행이 시관을 배척한 것이 비록 중도에 지나친 것이었지만, 박치륭이 도리어 배척한 것도 또한 긴요하지 못한 것이 아니겠는가?"
하고, 정신들에게 관사(官師)의 법규를 또한 공평하게 하기를 힘쓰라고 신칙하였다.

 

대사성 심성희(沈聖希)가 상소하기를,
"원경하(元景夏)의 벌방(罰榜)을 이미 풀어 주었으니, 당초 벌을 시행했던 유생에게도 관대히 용서하는 은전을 베풀어야 합니다. 정거(停擧)시킨 삼학(三學)의 재임(齋任)도 마땅히 그 벌을 풀어 주어야 합니다."
하니, 임금이 모두 벌을 풀어 주라고 명하였다.

 

10월 22일 기미

소대를 행하였다.

 

10월 23일 경신

시골에 가 있는 여러 신하들을 중추(重推)하라고 명하였다. 이때 시골에 가 있는 여러 신하들에게 여러 번 칙교(飭敎)를 내렸으나, 끝내 올라오지 않았기 때문에 또 이런 하교를 내린 것이었다.

 

정희규(鄭熙揆)를 헌납으로, 윤상임(尹尙任)을 정언으로, 신사건(申思建)을 교리로, 이연덕(李延德)을 지평으로, 이도겸(李道謙)을 보덕으로, 홍중일(洪重一)을 필선으로, 조중회(趙重晦)를 설서로 삼았다.

 

승지에게 명하여 감옥에 있는 죄가 가벼운 죄수는 석방시키게 했다. 추운 계절에 죄수가 적체되었기 때문이었다.

 

소대를 행하였다.

 

10월 24일 신유

증광 문과 회시(增廣文科會試)의 출방(出榜)이 있었다. 오달운(吳達運) 등 40인을 뽑았다.

 

10월 25일 임술

좌의정        송인명(宋寅明)과 우의정        조현명(趙顯命) 등이 청대(請對)하니, 임금이 희정당(熙政堂)에서 인견하였다. 조현명이 아뢰기를,
"지난번 주좌(籌坐)에서 재신(宰臣) 민형수(閔亨洙)가 신에게 한 말이 있는데, 그 말은 널리 전해진 지 오래 되었지만, 그 일은 관계되는 것이 지극히 중대하기 때문에 민형수도 함께 들어왔습니다."
하니, 임금이 민형수에게 하문하기를,
"무슨 일인가?"
하였다. 민형수가 아뢰기를,
"신이 대신과 말하다가 임인년242)                   옥안을 뒤집는 일에 대해 언급했었는데, 대신이 말하기를, ‘김용택(金龍澤)의 일은 경자년243)                   이후에는 그래도 건저(建儲)하여 대리하게 하는 것에 대해 한 일이 있다고 할 수 있지만, 경자년 이전에는 경종(景宗)께서 바야흐로 저위(儲位)에 있었으니 한 일이 과연 무슨 일인가? 일찍이 이 점에 대해 마음속으로 의심해 왔었는데, 이 의심이 풀린다면 옥안을 뒤집는 것에 대해 어찌 지난(持難)할 필요가 있겠는가?’ 하므로, 신이 드디어 들은 것을 대신에게 전하였더니, 대신도 신의 말을 기다릴 것 없이 이미 들은 바가 있다고 했습니다. 이 일은 선조(宣祖)께서 일곱 신하에게 부탁한 하교와244)                  같은 것이므로, 일기(日記)를 고출(考出)하여 보니 과연 그런 사실이 기재되어 있었습니다. 신은 사람이 미천하고 말이 가볍기 때문에 감히 연석에서 발론하지 못하고 먼저 대신에게 문의하였더니, 대신이 신의 말을 듣고는 놀라 닫는 기색을 지으면서 말하기를, ‘만일 숙종(肅宗)의 유교(遺敎)가 있다는 것을 안다면 국시(國是)를 크게 확정할 수 있다. 비록 천백 대 뒤에라도 의리가 명백하고도 깨끗할 것이니 어찌 다행스런 일이 아니겠는가?’ 하였습니다. 신은 이로써 대신이 공심(公心)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하니, 임금이 조현명을 돌아보면서 말하기를,
"그러한가?"
하자, 조현명이 대답하기를,
"그렇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민형수에게 말하기를,
"그에 대해 끝까지 다 말하라."
하니, 민형수가 아뢰기를,
"정유년245)                   이후 숙종께서 전하를 조신(朝臣)들에게 부탁한 것이 과연 선조 때의 고사(故事)와 같았습니까?"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끝까지 말하기를 기다릴 것도 없이 내가 이미 헤아려 알겠다. 이 일은 사체가 중대하니 마땅히 자전(慈殿)에게 품고(稟告)한 다음 하교하겠다."
하고, 드디어 여러 신하들에게 잠깐 물러가 있으라고 명하였는데, 한참 있다가 다시 입시하라고 명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대신은 진달하라."
하니, 조현명이 아뢰기를,
"신이 민형수의 말을 들으니 정유년 이후 숙종께서 두 왕자를 보전할 방도를 생각하시어 안으로는 동조(東朝)께 부탁하고 밖으로는 대장(大將)        이우항(李宇恒)에게 부탁하였으며, 또 대신을 통하여 두 사람을 얻었는데 곧 이천기(李天紀)와 김용택(金龍澤)이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신이 본디 김용택의 인품이 잔약하고 옹졸한 것을 알았는데 대신이 어찌 이 사람을 천진(薦進)했을 리가 있겠습니까? 더구나 김용택이 죽을 때 털끝만큼도 자중(藉重)하는 말이 없었는데, 지금 20년 뒤에 비로소 이런 말이 나오는 것은 매우 의심스럽습니다. 그리고 김용택의 집에 임금이 하사한 시(詩)가 있다고 하는데, 이 일이 과연 정말이라면 선조(先祖)의 명령으로 성궁(聖躬)을 보호하게 한 사람을 어떻게 역안(逆案)에 그대로 두었겠습니까?"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무슨 시라고 하던가?"
하니, 조현명이 아뢰기를,
"바로 숙종의 어제(御製)인데 전하께서 쓰게 한 것이라고 했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시의 내용은 어떤 것인가? 재신(宰臣)도 그 시를 보았는가?"
하니, 민형수가 아뢰기를,
"신은 아직 보지 못했습니다만 그 시의 내용은, ‘동국의 대현은 사계옹(沙溪翁)246)                  이고[東國大賢沙溪翁] 지극한 행실은 또 서하공이 있다.[至行又有西河公] 서하공의 후손에 김공이 있는데[西河號後有金公] 충효와 절의가 조부와 같다.[忠孝節義乃祖同]’라고 하였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재신이 이미 직접 보지 않았다면 어디에서 들었는가?"
하니, 민형수가 아뢰기를,
"신은 김용택의 집과 연가(連家)이기 때문에 신의 종형(從兄)인 전 장령        민익수(閔翼洙)가 직접 보고서 신에게 말하여 주었습니다. 듣건대, 김용택과 그의 장자는 이미 죽었고 김용택의 아내도 장차 죽게 되었으므로 그 시를 막내아들에게 맡겼다고 하였습니다."
하였다. 조현명이 눈물을 흘리면서 아뢰기를,
"신 등이 고심(若心)하면서 매양 전하로 하여금 순수하여 허물이 없게 하려 하고 있습니다만, 임인년 이후 원가(寃家)에서 자중(藉重)하여 원통함을 하소연하지 않는 것이 없습니다. 방금 성명(聖明)께서는 중천에 뜬 해와 같아서 진실로 이런 무리들이 반드시 감히 계교를 부릴 수 없으리라는 것을 알고 계시지만, 천추 만세(千秋萬歲) 뒤에는 사실이 점점 희미해져 진위를 분변하기가 어렵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전하의 밝은 심사(心事)를 장차 어떻게 후세에 명백히 드러낼 수 있겠습니까? 이 일은 결단코 그대로 방치할 수 없는 것이므로 즉시 구핵(究覈)해야 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옛말에 이르기를, ‘곽광(霍光)247)                  이 되기는 쉽지만 한기(韓琦)248)                  가 되기는 어렵다.’고 했다. 이이명(李頤命)이 독대(獨對)했던 곳은 곧 이 희정당이었다. 선조(先朝)께서는 의자를 버리고 앉으셨고 고 상신은 그 옆에 부복하였는데, 승지와 사관이 문을 열고 들어가려고 하였으나 들어갈 수 없었다. 민형수의 이른바 일곱 신하에 대한 일은 이것을 가리킨 것이다. 이이명은 진실로 성실하여 다른 마음이 없었다. 종래의 사람들도 그때의 사세가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없었다는 것을 알면서도 한결같이 그를 역적에다 몰아 넣고 말았으니, 어찌 무상(無狀)한 일이 아니겠는가? 나는 그때의 대신이 진실로 큰 역량(力量)이 없었다면, 안에는 박상검(朴尙儉)과 지열(池烈)이 있었고 밖에는 부질(斧鑕)249)                  이 있었으니, 어찌 위태롭지 않았겠는가 하고 여겨진다."
하였다. 영의정        김재로(金在魯)가 아뢰기를,
"그때를 당해서는 화색(禍色)이 헤아리기 어려운 지경에 이르렀었기 때문에 조성복(趙聖復)이 청정(聽政)할 것을 청하자, 그의 친우도 도리어 죄줄 것을 청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하고, 조현명은 아뢰기를,
"신의 본의는 신축년250)                  에 건저(建儲)하여 대리(代理)하게 한 것과 임인년251)                  의 국옥(鞫獄)에 대한 전말을 나누어서 둘로 만들고자 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내가 즉위하지 않았으면 삼종(三宗)의 혈맥(血脈)이 끊겼을 것이다. 그때를 당하여 갈수록 더욱 위의(危疑)하였으므로 부득이 함원 부원군(咸原府院君)에게 도움을 청하였더니 그의 답서(答書)에 나로 하여금 먼저 들어가 주달하게 하였었다. 그래서 내가 드디어 들어가 주달하니, 대전께서 흔연히 따르셨고 환시를 방축(放逐)하라는 명이 있었다. 내가 막 창밖을 나오자, 홍수(紅袖)252)                  가 곧바로 탑전(榻前)으로 나아가 말하기를, ‘어찌하여 이렇게 하십니까?’ 하니, 그제야 드디어 문을 닫으시고 마음대로 하라는 하교를 내리셨다. 내가 자전(慈殿)에게 들어가 사양한 후에야 자전께서 비로소 아시고 경동(警動)하였고 그런 후에야 겨우 문을 여셨었다."
하였다. 송인명이 아뢰기를,
"경자년253)                   이후 저들이 자중(藉重)한 말은 모두 거짓이었으니, 어찌 통분스런 일이 아니겠습니까?"
하였다. 임금이 하문하기를,
"김용택의 아들이 있는가?"
하니, 민형수가 아뢰기를,
"지금 생존해 있는 자는 그때 젖을 먹던 자이니, 그가 어떻게 그때의 일을 알수 있겠습니까? 비록 구핵(究覈)하려 해도 혹 어려울 듯합니다."
하였다. 송인명이 아뢰기를,
"민형수가 이미 민익수에게서 직접 들었다고 했고, 민익수는 김용택의 아들에게 직접 들었다고 했으니, 김용택의 아들을 마땅히 발포(發捕)해야 합니다."
하니, 임금이 드디어 김원재(金遠材)를 잡아다가 국문하라고 명하였다. 민형수가 아뢰기를,
"조현명이 그의 장인인 고(故) 감사        김진옥(金鎭玉)의 말을 들으니, 김용택의 아들이 그 시(詩)를 가지고 매양 상문(上聞)하려 했으나 빈번이 김진옥에게 척퇴(斥退)당했다고 했습니다. 그는 반드시 그 시가 위조인지 모르고서 그렇게 했을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금오랑(金吾郞)에게 명하여 위조된 시도 수색하여 가지고 오게 하였다. 또 외방에 가 있는 여러 대신들에게도 모두 올라와서 국문에 참여하라고 명하였다.

 

10월 27일 갑자

피국(彼國)의 장주부(漳州府) 사람 20여명이 상선(商船)을 타고 안흥(安興)의 앞바다에 표박(漂泊)하였는데, 공홍 수사 이명상(李命祥)에게 전례에 따라 장송(裝送)하도록 명하였다.

 

집의 이선행(李善行)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놀라운 기미가 잇따라 발생하고 주먹과 발길질이 마구 가해져서 지붕 위의 노한 벌들처럼 당로자(當路者)에게 발끈하여 죄주기를 청하는 소장이 또 동료인 대각에서 나왔습니다. 대저 조적명(趙迪命)에게 80세가 된 노친(老親)이 있다는 것과 이창의(李昌誼)가 연석(宴席)에서 중독(中毒)되었다는 것은 온 조정이 모두 알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시망(試望)의 주의(注擬)가 과연 성실한 것입니까, 성실하지 않은 것입니까? 출방(出榜)한 뒤 사람들의 말이 온 나라에 떠들썩 했으니 박치륭(朴致隆)도 솥에 귀가 있듯이 다 듣고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자신이 대각에 있으면서 규정(規正)할 것은 생각하지 않고 이에 도리어 규정한 것을 죄로 삼아 동요시키려 한다는 말과 아첨한다는 지목이 있기에 이르렀으니, 진실로 한바탕 웃음거리도 못되는 것입니다. 신은 알지 못하겠습니다만, 전관(銓官)이 잘못이 있는데도 피혐하면서 말하지 않는다는 것이 어느 책에 기재되어 있습니까? 한 개 또는 반 개라는 말에 무슨 아첨과 가까운 것이 있습니까? 설령 신이 변변치 못하여 임금에게 아첨했다고 하더라도 그가 집권자에게 아첨하는 것보다는 오히려 낫지 않겠습니까?"
하니, 예사 비답을 내렸다.

 

10월 28일 을축

밤에 목성(木星)이 동정성(東井星)으로 들어갔다.

 

10월 29일 병인

이규채(李奎采)를 지평으로, 남태제(南泰齊)를 헌납으로, 홍득후(洪得厚)·조윤제(曹允濟)를 정언으로 삼았다.

 

함경 감사 박문수(朴文秀)가 상소하기를,
"본도(本道)의 연사(年事)가 크게 흉년이 든 것은 30년 이래로 없었던 재황(災荒)이니 본영(本營)에 기부(記付)되어 있는 은(銀)으로 영남의 군미(軍米)를 바꾸어 진구(賑救)하게 하소서."
하니, 비국으로 하여금 품처(稟處)하게 하였다.

 

임금이 친히 인정문(仁政門)에 나아가 김원재(金遠材)를 국문하였다. 김원재에게 하문하기를,
"네가 임금을 범하여 근거 없는 시(詩)를 진신(搢紳)들 사이에 전파하였는데, 이는 너같은 어리고 미련한 사람이 지어낼 수 있는 것이 아니고 반드시 사주한 자가 있을 것이다. 사실대로 정직하게 공초하라."
하니, 김원재가 말을 전한 사람과 대질시켜 줄 것을 청하고, 또 말하기를,
"그 시는 백망(白望)이 가지고 온 것으로, 어제(御製)라고 하면서 신의 집에 대한 이야기와 함께 전하여 주었는데, 또한 신의 아비가 세상에 살아 있었을 적에도 들었습니다. 성상께서 이미 이런 일이 없다고 하시니, 신이 어떻게 감히 이런 일이 있었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하였다. 임금이 노하여 말하기를,
"그 말이 매우 외람스럽다. 네가 이른바 위에서 그런 일이 없다고 한다는 말은 현란시킬 계책에서 나온 것이니, 그 마음은 역적인 것이다."
하고, 형신(刑迅)을 가하라고 명하였다. 이어 위시(僞詩)가 나온 곳과 어찌하여 가지고 와서 아뢰지 않았는지의 여부에 대해 하문하니, 김원재가 공초하기를,
"비록 등문(登聞)하려 했었으나 화(禍)를 당할 것이 두려워 감히 하지 못하였습니다. 더구나 이것이 어떤 일인데 감히 거짓으로 지을 수 있었겠습니까? 신의 아비가 직접 국가에서 받은 것이 아니고 백망이 전하여 준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목릉(穆陵)254)                  께서 신의 집에 내사(內賜)한 어필(御筆)과 함께 봉함하여 보관해 두었었습니다. 그러나 당초에 다른 사람에게 전하여 보여 준 일이 없었는데, 김진옥(金鎭玉)·민익수(閔翼洙)는 지친(至親) 사이이기 때문에 보여 주었을 뿐입니다. 신의 아비는 충효(忠孝)의 성품이 있어 항상 눈물을 흘리면서 말하기를, ‘나는 부모가 없으니, 마땅히 국가를 위하여 삼종(三宗)의 혈맥(血脈)을 보전하여야 한다.’라고 했는데, 신의 아비는 이 포장(褒奬)하는 어시(御詩)를 받고 이에 이런 말을 하였습니다. 만일 이것을 백망에게 속은 것이라고 한다면 그만이겠지만, 신의 아비가 거짓으로 만든 것이라고 한다면 실로 이런 일은 없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대신을 돌아보고 말하기를,
"나의 글씨가 아닌데 어필(御筆)이라고 하는 것이 어찌 임금을 범하는 결과가 되지 않겠는가?
하고, 이어 김원재로 하여금 위시(僞詩)를 외어서 고하게 하니, 김원재가 입으로 외어 고하기를,
"동국의 대현은 사계옹이고
지극한 행실은 또 서하공이 있다.
서하공의 후손에 김공이 있는데
충효와 학문이 조부와 같다.
마치 상(商)나라의 부열255)                  이 은거한 것과 같고
남양 땅에 제갈양이 은거한 것에 견줄 만하다.
태산 같은 높은 명성 들었으나 얼굴을 보지 못했는데
지난밤에 갑자기 꿈속에서 만났네.
어느 때나 서로 만나 기쁨을 함께 할거나
태평 연월 누리면서 꽃밭에서 취하고 싶네."
하였는데, 문랑(問郞)이 다 써서 진주(進奏)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이 시는 한번 보고도 그것이 거짓으로 지은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꿈속에서 만났다는 이야기는 더욱 이희지(李喜之)의 영정행시(永貞行詩)와 동일한 뜻이다. 백망(白望)이 비록 요사스럽기는 하지만 반드시 위시(僞詩)를 지어 주지는 않았을 것이다. 네가 이사명(李師命)의 외증손이니, 반드시 이희지와 함께 지어냈을 것이다."
하니, 김원재가 공초하기를,
"이희지는 애당초 이 시가 있다는 것도 알지 못했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너의 아비가 목호룡(睦虎龍)과 서로 알고 지내는 사이였는가?"
하니, 김원재가 공초하기를,
"목호룡(睦虎龍)과는 처음엔 알고 지냈으나 나중에는 소원하게 되었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백망은 시를 짓는 사람이 아니다. 목호룡이나 이희지가 짓지 않았다면 너의 아비가 지어내어 속여서 스스로 죄를 벗어날 계책을 세운 것일 것이다."
하니, 김원재가 공초하기를,
"신의 아비가 백망에게 속은 것인데 백망이 이 시를 어느 곳에서 얻었는지 신은 실로 알지 못합니다. 그리고 그 시를 주고받을 즈음에는 신의 나이가 아직 어렸었으니, 무엇으로 연유하여 그것이 거짓인 줄 알았겠습니까? 단지 신의 집에서 전하여 오는 말만 들었을 뿐인데, 신의 어미가 을사년256)                   뒤에 비로소 이 시를 민익수(閔翼洙)에게 보였었으니, 민익수를 불러 물어 보면 혹시 그 진위를 변별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이 말은 더욱 거짓이다."
하고, 더욱 신문하라고 명하였다. 준차(準次)에 이르자 위관(委官) 김재로(金在魯) 등이 위시(僞詩)를 수색하여 가지고 온 다음 다시 국문할 것을 청하였다. 송인명 등은 민익수도 아울러 국문할 것을 청하였고 또 민형수(閔亨洙)가 위시(僞詩)를 깊이 믿었다는 것으로 죄를 가하려 하였으나, 임금이 모두 윤허하지 않았다. 대사간        유최기(兪最基)와 장령        이기헌(李箕獻)이 전계를 다시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박필재(朴弼載)를 집의로, 김한철(金漢喆)을 부교리로 삼았다.

 

10월 30일 정묘

임금이 또 인정문(仁政門)에 나아가 김원재를 국문하였다. 하문하기를,
"너의 아비가 사계(沙溪)의 후손이라고는 하지만 사람이 매우 미천한데, 백망이 어찌 시(詩)를 전해 줄 리 있겠는가?"
하니, 김원재가 공초하기를,
"백망이 분명히 전해 주었고, 고 상신 이이명(李頤命)도 부탁을 받았었습니다. 그래서 신의 아비가 고 상신의 지친(至親)인 까닭에 그 일을 참여하여 듣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백망과 교계(交契)가 가장 깊었기 때문에 백망이 시를 전하여 주었던 것입니다. 신의 아비는 반드시 백망이 속일 것으로 여기지 않았기 때문에 시를 받아서 보관하게 되었고, 또한 이를 비밀에 붙여 남에게 보이지 않았던 것입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위시(僞詩)는 전에도 목천임(睦天任)이 지은 것이 있었는데, 목호룡이 이것을 가져다가 자신의 시로 삼았으니, 이것도 틀림없이 목호룡과 동일한 수법일 것이다."
하니, 승지 원경하(元景夏)가 아뢰기를,
"어리석고 미련한 김원재는 비록 책망할 것도 못됩니다. 이 시의 진위는 삼척동자도 판별할 수 있는 것이니 사람들이 누군들 이를 믿겠습니까? 이런 것을 연석에서 언급하기에 이른 것은 국체(國體)에 손상이 있습니다."
하자 임금이 말하기를,
"모두 원경하의 마음 같다면 당초 어찌 김원재의 일이 있었겠는가?"
하였다.

 

김복택(金福澤)을 잡아다가 국문하라고 명하였는데, 김복택은 광성 부원군(光城府院君)의 손자이다. 이때 김원재가 여러 번 형신을 받았는데도 승복하지 않자 이날 임금이 갑자기 수서(手書)를 내려 대신에게 보라고 명하고서 하교하기를,
"이 가운데 두 글자를 경 등도 이해하지 못하는가? 나는 끝내 이해하여 알 수가 없다."
하였다. 내린 수서 가운데 상단의 것은 김복택이 사사로이 만났을 때 아뢴 말들인데, 임금이 하교로 인하여 즉시 임금에게 도로 봉납(捧納)했으며, 두 글자는 부침(復寢)이라는 두 글자였다. 하단에 이르기를,
"경 등인들 이 일을 어찌 작은 일이라고 여기겠는가? 내가 있을 때 그 근본을 통쾌히 제거한 후에야 뒷 폐단을 없앨 수 있으니, 경 등은 깊이 양지(諒知)하기 바란다."
하였다. 영의정 김재로, 좌의정 송인명 등이 아뢰기를,
"이 일은 관계되는 바가 지극히 중대하니, 신자(臣子)의 처지에서는 토죄(討罪)할 것을 청할 뿐입니다."
하고, 우의정 조현명은 아뢰기를,
"위시(僞詩)에 대한 일은 전하는 말이 각기 다른데, 이를 빙자하여 주장(譸張)한 까닭에 드디어 김원재의 일이 나오게 되었으며, 흉역(凶逆)들의 구실이 되기에 이르렀습니다. 이들이 스스로 충신이요 공신이라고 하고 있습니다만, 끝내 요(堯)임금이 순(舜)임금에게 전수(傳授)한 것과 같은 대체(大體)에 누를 끼침을 면하지 못하였습니다. 그리하여 폐부(肺腑)의 지친(至親)인 민형수(閔亨洙) 같은 사람도 또한 미혹됨이 없을 수 없었으니, 어찌 개연(慨然)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김복택이 서덕수(徐德修)를 통하여 사사로이 전하를 알현(謁見)했는데, 이때 전하께서 어찌 상도(常道)에 의거하여 거절하고 만나지 않을 수가 있었겠습니까? 그때의 일이 성덕(聖德)에 있어서는 조금도 허물이 될 것이 없습니다만, 이런 무리가 구실로 삼는 그 근본은 이러한 부분에 있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이들이 은연중 긍벌(矜伐)하는 마음을 지니고 있으니, 어찌 통분스러운 일이 아닐 수 있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효경(梟獍) 같은 자들이 흉역을 저지른 것과 이들 무리가 멋대로 거짓말을 한 것이 전후 같은 맥락이니, 내가 무함받은 것은 똑같다."
하였다. 여러 신하들이 잇따라 엄중히 국문하여 법을 바룰 것을 청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한(漢)나라 송창(宋昌)이 말하기를, ‘말하려는 것이 공변된 것이면 공공연하게 말하라.’ 하였고, 송(宋)나라 태조(太祖)도 말하기를, ‘중문(重門)을 활짝 열어 놓듯이 또한 나의 마음도 이와 같이 할 것이다.’ 하였다. 사람들이 혹시 내가 은연중에 이 무리를 비호하는 것이라 여긴다면, 이들은 바로 효경인 것이다. 이 일을 여러 해 동안 참아 오다가 이제 비로소 환하게 하유(下諭)하는 것은 후세의 시기하고 의심하는 임금이 듣고 본 것으로 세월이 오래 지난 뒤에 경솔하게 감률(勘律)할까 두려워한 때문이다. 비로소 뒷 폐단을 우려하여 이제 이미 다 하유하였으니, 금오랑(今吾郞)으로 하여금 김복택을 잡아 오게 하라."
하였다. 김복택을 잡아 오니 임금이 친히 국문하였다. 김복택에게 하문하기를,
"네가 위를 향해 부도(不道)한 마음을 품고 있는 것을 내가 평소부터 알고 있었는데, 위시(僞詩)를 지어내어 인심을 광혹(誑惑)시키고 감히 말할 수 없는 자리에까지 무함을 가하고 있으니, 이런 짓을 차마 할 수가 있는가? 너와 김원재는 하나이면서 둘이 된 자이다. 부도한 마음을 품은 것을 숨김없이 사실대로 공초하라."
하니 김복택이 공초하기를,
"임금을 무함하는 부도는 평범한 사람도 감히 하지 못하는 것인데, 더구나 신의 처지이겠습니까? 실로 무슨 말과 무슨 일이 무핍(誣逼)에 해당되는지를 모르겠으므로 대답할 수가 없습니다. 더구나 김원재는 곧 칠촌 조카로 살고 있는 곳이 먼데 무엇을 연유하여 김원재의 일을 알 수 있었겠습니까?"
하였다. 임금이 또 묻기를,
"만일 김원재의 일이 없었다면 네가 반드시 이 지경에 이르지는 않았을 것이다. 내가 묻는 것은 위시(僞詩)에 대한 일이 아니라 곧 신축년257)  무렵에 있었던 부도한 말에 관한 것이다. 두개의 불(不)자에 관해 다방면으로 힐문하고 싶지만 차마 제언(提言)할 수가 없다. 그 가운데 두 자에 이르러서는 더욱 차마 말할 수 없는데, 너의 죄를 네가 어찌 모르겠는가?"
하니, 조현명 등이 무함이 선조(先祖)에 미쳤다는 것으로 바로 형신을 가할 것을 청하니, 임금이 드디어 형신을 시행하라고 명하였다. 김복택이 공초하기를,
"두 글자를 끝내 생각해 낼 수가 없으므로 직고(直告)할 수가 없습니다."
하고, 끝내 승복하지 않았으므로 드디어 우선 정지하도록 하였다.

 

장령 이기헌(李箕獻)이 전계를 다시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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