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 1일 무진
일식(日食)이 있었다. 밤에 어떤 별이 헌원성(軒轅星) 아래로 흘러갔는데, 빛깔은 붉은색이었고, 그 빛이 땅을 비추었다.
11월 2일 기사
임금이 인정문(仁政門)에 나아가 김원재(金遠材)와 김복택(金福澤) 등을 국문하려 하였는데, 먼저 대신들과 판의금에게 악차(幄次)에 입시하라고 명하였다. 임인년 옥사 때의 김성행(金省行)의 일에 대해 말하면서 이어 하교하기를,
"김성행과 김복택이 어찌 그들 스스로 올 수 있었겠는가? 서덕수가 나를 위한다는 말에 마음이 움직이게 되어 속은 것이다. 김복택의 두 글자는 지극히 흉악하고 참혹한 말이었으니 만일 법을 바루지 않는다면 내가 장차 무슨 얼굴로 돌아가서 경종(景宗)을 배알할 수가 있겠는가?"
하고 드디어 김복택에게 하문하기를,
"네가 임금을 범하는 부도한 말을 하는 것을 내가 이미 직접 들었는데, 내가 어찌 감히 숨길 수 있겠는가?"
하니, 김복택이 공초하기를,
"성교(聖敎)에서 이미 직접 들으셨다고 하교하셨으니 신이 감히 발명(發明)할 수 없습니다만, 두 글자는 끝내 기억할 수가 없습니다."
하였다. 잇따라 형문하였으나 공초는 전과 같았다. 임금이 또 ‘위예(違豫)’라고 한 아래의 두 글자와 감히 사적으로 배알할 것에 대해 하문하니, 김복택이 공초하기를,
"가서 배알한 것은 나라를 위한 것이었으며 두 글자는 지금 비로소 생각이 나는데 곧 ‘부침(復寢)’이란 두 글자입니다."
하였다. 잇따라 형신을 가하니, 김복택이 공초하기를,
"김창집(金昌集)과 이이명(李頤命)이 저사(儲嗣)를 세우는 일 때문에 신을 시켜 가서 배알하게 한 것입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이는 자중(藉重)하는 말이다. 너의 흉언(凶言)에 죽은 대신이 무슨 관계될 것이 있겠는가?"
하고, 또 형신을 가하면서 두 개의 ‘불(不)’ 자와 ‘나라를 위해서[爲國]’라고 한 등의 말에 대해 하문하니, 김복택이 공초하기를,
"‘배제(陪祭)에 참여하지 않았고 강연(講筵)을 열지 않았다.’는 등의 말을 신이 과연 했습니다만, 그때 우러러 진달한 것이 어찌 나라를 위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죽는 한이 있더라도 마땅히 변심하지 않는 귀신이 될 것입니다."
하였다. 잇따라 형신을 가하여 2차에 이르니, 임금이 말하기를,
"사람에게 형신을 가하여 죽이는 것을 내가 어찌 즐거워하겠는가? 네가 비록 두 대신을 자중(藉重)하고 있지만 이것이 어찌 나라를 위하는 마음에서 나온 것이겠는가? 이 일은 의리에 관계되는 것으로 군부(君父)의 과실(過失)을 집안에서 사사로이 비평하는 것은 이야말로 부모를 옳게 여기지 않는 마음인 것이다. ‘장차 하려고 한다.’는 등의 말은 더욱 역심(逆心)에서 나온 것이다. 이 뒤에는 다시 감히 충신이나 역적이라는 말을 하지 않은 뒤에야 세도(世道)가 점점 나아질 것이다."
하였다. 이에 대신과 여러 신하들이 모두 마땅히 정법(正法)해야 한다고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이는 공론(公論)이다."
하였다. 또 김원재를 국문하였는데 김원재에게 형신을 가하면서 신문하니, 전의 공초와 같이 백망에게 속았다고 공초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위시(僞詩)는 목호룡이 아니면 곧 이희지가 지은 것이다."
하니, 여러 신하들이 모두 아뢰기를,
"이는 상한(常漢)이 지은 것임을 삼척 동자라도 변별할 수가 있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김원재를 작처(酌處)하기 위해 대신에게 하문하니, 대신들이 임금의 뜻이 살리려는 의논에 붙이고 싶어 하는 것을 알고 또한 감히 쟁론하지 않았다. 드디어 김원재를 해도(海島)에 정배(定配)하고 김복택은 왕부(王府)에 내려 국문하라고 명하였다.
지평 이규채(李奎采)를 대정현(大靜縣)에 천극(栫棘)258) 하였다. 이때 사간 이윤신(李潤身)이 유봉휘(柳鳳輝)·이광좌(李光佐) 등에 대한 합계(合啓)를 정지하려 했으나 지평 이규채가 불가하다고 고집하였다. 이윤신이 아뢰기를,
"합계를 정지하려 하였으나 이규채에게 저지당하였습니다."
하고, 인혐(引嫌)하면서 체직시켜 주기를 청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이의(異議)를 제기한 잘못은 그에게 있으니 사퇴하지 말라."
하였다. 이규채가 또 이윤신의 말 때문에 인피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오늘날 신자(臣子)가 된 사람으로서 감히 이렇게 할 수 있겠는가? 그를 체직시키도록 하라."
하고, 이어 하교하기를,
"오늘의 친국(親鞫)은 관계되는 바가 어떠한가? 그런데 감히 다시 양양하게 거들먹거리니 김용택(金龍澤)의 위시(僞詩)와 김복택(金福澤)의 장심(將心)은 괴이하게 여길 것도 없다."
하였다. 처음에는 이규채를 극변(極邊)에 찬배(竄配)시키라고 명하였는데 다시 잡아다가 국문하라고 명하면서 말하기를,
"죄인 이규채의 상궐 단자(上闕單子)259) 를 올리도록 하라."
하였다. 판의금 신사철(申思喆)이 아뢰기를,
"이규채는 당초 잡아다가 다스린 일이 없는데, 어떻게 상궐 단자를 올릴 수 있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노하여 꾸짖고는 중추(重推)하라고 명하였다. 이에 대신과 여러 신하들이 극력 간쟁하니 마침내 그 명을 중지하고 대정현에 천극하도록 명한 것이다.
11월 5일 임신
김성운(金聖運)을 대사간으로, 송질(宋瓆)을 집의로, 민선(閔墡)·정언유(鄭彦儒)를 장령으로, 이명곤(李命坤)·이구령(李耉齡)을 지평으로 삼았다.
태릉(泰陵)260) 에 도둑이 들어 제기(祭器)와 신욕(神褥)을 훔쳐 갔다. 예조에서 도둑을 기포(譏捕)하고 본릉(本陵)의 능관(陵官)을 죄주기를 계청(啓請)하니, 그대로 따랐다.
임금이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고 빈청에서 위시(僞詩)를 불사르라고 명하였다. 이때 김원재를 막 국문하고 나서 임금이 수일 동안 뭇 신하들을 인접하지 않았으며, 동지 정사(冬至正使) 낙풍군(洛豐君) 이무(李楙)와 부사(副使) 민형수(閔亨洙)가 사폐(辭陛)261) 했는데도 불러서 접견하지 않았다. 대신과 비국 당상이 빈청의 일차(日次) 때문에 합문(閤門) 밖으로 나아가니 한참 있다가 비로소 인견하였는데, 천안(天顔)에 기뻐하지 않는 기색이 있는 것 같았다. 뭇 신하들에게 말하기를,
"오늘 경 등을 보기가 부끄럽다. 예로부터 어찌 승통(承統)한 임금이 없었겠는가마는, 나처럼 곤고(困苦)한 경우는 지난 사첩(史牒)에 없던 것이었다. 지금 이 위시(僞詩)는 나만 무함했을 뿐만 아니라, 감히 말할 수 없는 자리에까지 언급되었으니, 차라리 죽고 싶은 심정이다."
하니, 영의정 김재로(金在魯)가 아뢰기를,
"처분이 엄정하여 일세(一世)의 교무(矯誣)를 일삼는 무리로 하여금 그것이 허위였음을 환히 알게 했으니, 위시가 나온 것은 세도(世道)를 위하여 다행스런 일입니다."
하였다. 전일에 보낸 금오랑(金吾郞)이 김원재의 집에서 위시를 가지고 오니, 임금이 가져오라고 명하였는데, 그 시의 제목은, ‘꿈에서 깬 뒤에 읊는다.[夢後吟]’라고 되어 있었고, 칠언 오운(七言五韻)으로 지어졌으며, 김원재가 외어서 아뢴 것과 내용이 똑같았다. 시의 아래 부분 왼쪽에, ‘경자년 중하(仲夏) 상완(上浣)에 쓴다.’고 되어 있었다. 임금이 그것을 열람하고서 말하기를,
"이는 반드시 그가 스스로 지은 것일 것이다. 제목을 ‘꿈에서 깬 뒤에 읊는다.’라고 한 것이 더욱 교묘하고 간악하다."
하고, 이어 여러 신하들에게 두루 보도록 명하였다. 김재로가 아뢰기를,
"경자년 5월이 어찌 시를 읊을 때이겠습니까? 여기에서 더욱 망령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또 한림(翰林) 김상복(金相福)에게 이를 보도록 명하니, 김상복이 아뢰기를,
"신도 또한 여러 번 신한(宸翰)262) 을 보았습니다만 어찌 이런 체양(體樣)이 있었겠습니까?"
하였다. 김재로가 드디어 그 시를 빈청에서 불사를 것을 청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처음 이이명(李頤命)이 정유년263) 에 독대(獨對)하였을 적에 숙종(肅宗)께서 뒷일을 우려하여 부탁한 것이 선조(宣祖)께서 일곱 신하에게 부탁한 일과 같았다. 경종(景宗)이 즉위하기에 이르러서는 환후가 더욱 극심했으므로, 사대신(四大臣) 등이 저사(儲嗣)를 세울 것을 의논하게 되었고, 드디어 성상을 세워 세제(世弟)로 삼았던 것이다. 이에 김일경(金一鏡)·목호룡(睦虎龍) 등이 무옥(誣獄)을 일으켜 사대신과 김용택 등 여러 사람들을 죄를 씌워 죽이고, 드디어 헤아릴 수 없는 흉언을 가지고 상궁(上躬)에게 무함을 가하였으므로, 종국(宗國)의 위태로움이 한 가닥의 머리털과 같았다. 성상께서 즉위하고 나서 김일경·목호룡 등은 복주(伏誅)되었으나, 그 당여(黨與) 등이 번번이 창언(倡言)하기를, ‘역률(逆律)에 의거하여 김용택 등을 죄주지 않는다면 성상의 무함을 끝내 신설(伸雪)할 수 없을 것이다.’ 하고, 이것으로 협박하며 버티었다. 이 때문에 김용택이 무안(誣案)에 들어 있는 채 오래도록 신원(伸冤)되지 못하였다. 민형수(閔亨洙)는 고 상신 민진원(閔鎭遠)의 아들이다. 항상 김용택을 원통하게 여겨 왔었는데, 그의 집에 숙종(肅宗)께서 내린 어제시(御製詩)가 있다는 말을 듣고 이것을 가지고 그의 원통함을 증명하여 신설하고자 하여 조현명에게 말하였던 것이다. 조현명은 김진옥(金鎭玉)의 사위이고, 김진옥은 김용택의 지친(至親)이다. 조현명이 일찍이 김진옥을 통하여 어시(御詩)가 있다는 말을 들었으나, 그 상세한 것을 알 수가 없었는데, 민형수의 말을 듣게 되자 드디어 송인명 등과 모의한 다음 이에 민형수를 데리고 들어와 청대(請對)하여 그 일을 발론한 것이었다. 성상께서 이미 김일경·목호룡의 당여들에게 무함받아 오랫동안 곤욕을 치렀으므로, 조현명이 아뢴 내용을 듣게 되자 마음이 동요되었으나, 주저하면서 즉시 결단하지 못하였다. 조현명이 그것을 헤아려 알고서 즉시 눈물을 흘리면서 말하기를, ‘신 등이 성상께서 순수하여 허물이 없게 하려고 하고 있으나, 이 무리가 스스로 공으로 여기면서 요(堯)임금이 순(舜)임금에게 전수(傳授)한 의리에 누를 끼친 것이 큽니다.’ 하였다. 이에 성상께서 김원재를 국문하라고 명하게 되었는제, 조현명 등이 기필코 김원재를 죽임으로써 김용택의 죄를 실증하려고 했고, 이어 민익수·민형수 등도 아울러 중상하려 했다. 임금이 그런 정상을 알고, 또 그 시는 곧 백망(白望)이 전한 것이므로 김원재는 알 수 있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용서하고 죽이지 않았으며, 또한 민익수 등에게도 연급(延及)시키지 않았다. 송인명이 아뢰기를, ‘민익수가 경솔하게 위시(僞詩)를 믿고 민형수에게 전하였으니, 끝내 죄가 없을 수 없습니다.’ 하니, 드디어 민익수를 삭직(削職)시키라고 명하였다.
김복택(金福澤)이 옥(獄)에서 죽었다. 김복택은 인경 왕후(仁敬王后)의 조카이다. 신축년264) 사대신(四大臣)이 건저(建儲)에 대해 의논하였을 적에 김복택이 서덕수(徐德修) 등과 그 의논에 참여했었다. 그때 경종(景宗)이 오랫동안 미령하였으므로 사대신이 의논하기를, ‘장차 부침(復寢)하여 사속(嗣續)을 얻게 되는 경사가 있기를 바랐었으나, 성후(聖侯)가 점점 침중(沈重)하여져 제전(祭奠)에도 참여할 수 없고 강연(講筵)도 열 수가 없으므로, 억지로 만기(萬機)를 다스리게 할 수 없으니, 제때에 건저(建儲)함으로써 종사(宗社)를 위한 대계(大計)를 세우지 않을 수 없다.’ 하였다. 이리하여 김복택이 서덕수를 통하여 임금을 잠저(潛邸)에서 만났고 그 말을 고하였던 것이다. 임인년 건저(建儲)하였을 적에 이르러 여러 신하들이 모두 무옥(誣獄)에 죽었는데, 유독 김복택만 탈이 없었다. 김복택은 성질이 거칠고 술 마시기를 좋아하였는데, 술에 취하기만 하면 무옥에 죽은 여러 신하들의 원통함을 언급하면서 그때마다 탄식하며 비분 강개하였다. 이때에 이르러 위시(僞詩)의 옥사가 일어나 김원재가 체포되자, 임금이 김복택과 김용택은 이미 일족(一族)의 형제 사이이므로 반드시 그 모의를 알고 있을 것이라고 여겨 이에 사사로이 만났을 적에, ‘부침(復寢)’이라고 한 것과 ‘제사에 참여하지 않고 강연을 열지도 않는다.’는 이야기를 경종(景宗)에게 불만스러워 하는 말로 여겼기 때문에 수서(手書)를 내려 여러 신하들에게 하문하였던 것이다. 이에 조현명 등이 생각하기를, ‘김용택과 김복택은 곧 김일경·목호룡 무옥(誣獄) 사건의 근본인 것이다. 이제 다행스럽게도 성상께서 스스로 발론하셨으니, 김원재를 죽이고 이어 김복택도 죽이면 김일경·목호룡이 고발한 것이 거짓이 아님을 증명할 수 있고, 임인년의 옥안(獄案)도 번복시킬 수 없게 될 것이다.’ 하고, 드디어 송인명과 함께 반드시 죽여야 한다고 극력 말하였다. 김재로는 양단(兩端)을 잡고 분명하게 말하지 않았으며, 원경하(元景夏) 등은 조현명에게 붙어 그 의론을 극력 주장하니, 임금이 이에 김복택을 국문하라고 명하였다. 그러나 김복택은 끝내 자복하지 않았는데, 하옥(下獄)되어 드디어 형신(刑訊)을 받다가 죽었다. 김복택이 바야흐로 형신을 받을 적에 임금이 번번이 눈을 감고 보지 않으면서 말하기를, ‘익릉(翼陵)265) 의 친속(親屬)이 이제 다 없어지는구나. 옛날에도 왕도(王導)와 유하혜(柳下惠)의 일266) 이 있었는데, 어떻게 김복택의 죄 때문에 지친(至親)까지 모두 금고(禁錮)시킬 수 있겠는가? 광성 부원군(光城府院君)의 봉사손(奉祀孫)과 그 형제의 자손은 모두 구애하지 말고 조용(調用)하도록 하라.’ 하였다. 처음 김복택을 추국할 적에 임금이 차마 분명히 말하지 못하고 단지 언자(諺字)로 두 글자를 써서 내리고 질문하였는데, 이는 두 글자가 무슨 글자인지를 숨기기 위한 것이었다. 또 두개의 불(不) 자를 하문하면서 또한 그 어의(語意)가 무엇이라는 것을 말하지 않았기 때문에, 김복택이 어리둥절하여 어떻게 대답할 줄을 몰랐던 것이다. 최후에 임금이 비로소 말의 실마리를 은미하게 말한 후에야 이에, ‘부침(復寢)’과 ‘제전(祭奠)에 참여하지 않고 강연(講筵)도 열지 않았다.’는 등의 말로써 공초(供招)를 바쳤다. 부침(復寢)이란 말에 대해서는 임금도 그 뜻을 알지 못하였으며, 흉언(凶言)인가 의심하여 여러 신하들에게 하문하니, 처음에는 모두 모르겠다고 했는데, 뒤에는 그 말이 《예기(禮記)》에서 나온 것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었다. 임금이 그제야 비로소 의심이 풀렸으나, 김복택은 이미 죽은 뒤였다. 송인명이 임금에게 아뢰기를,
"지금의 두 옥사(獄事)에 대해 외인(外人)은 그 본말(本末)을 상세히 알 수 없을 것이므로, 의혹을 야기시킬까 염려스럽습니다. 조현명의 의견은 문자(文字)로 상세히 중외(中外)에 효유하여야 한다고 합니다만, 신의 의견은 문자로 효유하더라도 또한 반드시 말을 만들기가 어려울 것 같습니다."
하였으나, 임금이 답하지 않았다. 김복택이 죽은 지 6년 만에 임금이 그가 죄없이 죽은 것을 불쌍하게 여겨 특별히 신원(伸寃)하게 하였다.
영의정 김재로가 아뢰기를,
"표류한 중국인들을 도와 보낸 데 대해 피국(彼國)에서 특별히 자문(咨文)을 보내어 장유(奬諭)하였으니, 이는 드물게 있는 일입니다. 사은(謝恩)하는 일이 없을 수 없으니, 마땅히 표문(表文)을 지어 동지사(冬至使)의 사행(使行)에 추부(追付)하여 보내야 할 것입니다."
하니, 그대로 따랐다.
황해 감사 유엄(柳儼)이 장계(狀啓)하여 병사 구성익(具聖益)의 치적(治績)에 대해 포상할 것을 아뢰었다. 영의정 김재로가 아뢰기를,
"감사와 병사는 직질(職秩)이 똑같은데, 포상할 일을 아뢴 것은 전에 듣지 못했던 것입니다. 유엄은 마땅히 추고(推考)해야 하고 그의 계문(啓聞)은 시행하지 마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임금이 이번 국옥(鞫獄) 때 여러 신하들 가운데 외방에 있으면서 분문(奔問)하지 않은 사람이 많았다 하여 여러 번 하교하여 책망하였으며, 이어 나문(拿問)하도록 명하였다. 대신 등이 그 말이 지나치다는 것으로 아뢰기를,
"이는 무신년267) 의 일과는 다른 점이 있습니다."
하니, 임금이 이에 그 명을 정지하고 단지 모두 파직시키라고만 명하였다.
특명(特命)으로 늙은 궁인(宮人)으로서 김성(金姓)을 가진 두 사람을 정표(旌表)하게 하였다. 두 사람 가운데 하나는 김만홍(金滿泓)의 종조모(從祖母)이고 하나는 김찬중(金纘重)의 족속(族屬)이었다. 두 궁인이 궁중에 있으면서 매우 충근(忠勤)한 정성을 바쳤는데도 한쪽의 사람들이 의심하여 이를 구실로 삼아 죄주자고 논하는 것은 곧 망측한 마음이라 하여 임금이 특별히 그 마을에 정표하라고 명하고, 이르기를,
"무식한 상인(常人)도 오히려 이와 같은데, 더구나 교목 세신(喬木世臣)이 도리어 이만도 못해서야 되겠는가?"
하였다.
11월 6일 계유
김시형(金始炯)을 호조 판서로, 한사득(韓師得)을 대사간으로, 권일형(權一衡)을 헌납으로, 윤경주(尹敬周)·남태혁(南泰赫)을 정언으로 삼았다.
11월 7일 갑술
부사직 민형수(閔亨洙)가 사명(使命)을 받들고 연경(燕京)에 가면서 도중에서 상소하여 위시(僞詩)를 경솔하게 믿은 잘못을 진달하고 견벌(譴罰)을 내려달라고 청하니, 임금이 아뢴 것이 국사에 힘입게 된 것이 있으니 인구(引咎)할 필요가 없다는 내용의 우악한 비답을 내렸다.
임금이 주강과 석강에 나아가 《춘추집전(春秋集傅)》을 강하였다. 세경(世卿)의 폐단을 논하는 대목에 이르러 시독관 정휘량(鄭翬良)이 아뢰기를,
"성상께서는 죄가 있는 경우에는 반드시 토죄하고 재능이 있는 경우에는 반드시 기용할 것이요, 세족(世族)이라는 것과 한족(寒族)이라는 것으로 저앙(低昻)이 있게 하지 않으신다면 기강이 확립될 것입니다. 성덕(聖德)이 간혹 인자(仁慈)에 지나친 경우가 있는데, 이 점에 대해 더욱 면려해야 합니다."
하고, 승지 조명겸(趙明謙)은 아뢰기를,
"인자(仁慈)함이 강의(剛毅)함보다 승하면 사직(社稷)이 마침내 반드시 힘입는 것이 있게 될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두 사람 말을 모두 옳게 여겼다.
11월 8일 을해
주강을 행하였다.
홍성보(洪聖輔)·윤경룡(尹敬龍)을 승지로, 이창의(李昌誼)를 교리로 삼았다.
승지와 홍문관 제학에게 명하여 태학(太學)에 감귤을 반사하고 어제(御題)를 내어 시사(試士)하도록 명하였다. 으뜸을 차지한 유학(幼學) 권숭(權崇)을 직부 전시(直赴殿試)하게 하였다.
11월 9일 병자
헌부에서 전계를 다시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허옥(許沃)을 사간으로, 남태제(南泰齊)를 집의로, 이휘항(李彙恒)·이징하(李徴夏)를 장령으로, 이종적(李宗迪)을 지평으로, 이덕수(李德壽)·윤양래(尹陽來)를 좌참찬·우참찬으로, 이병상(李秉常)을 예조 판서로, 민응수(閔應洙)를 예문관 제학으로 삼았다.
임금이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평안 감사 조관빈(趙觀彬)에게 부임(赴任)하도록 독촉할 것을 명하였으나, 조관빈이 사혐(私嫌)이 있어서 좌상(左相)과 우상(右相)에게 두루 하직할 수 없다고 하면서 사양하고 부임하지 않았다. 이것을 영의정 김재로가 아뢰자, 임금이 우의정 조현명에게 하문하였는데 조현명이 말하기를,
"조관빈이 신의 형에게 참혹한 욕을 했습니다. 그러나 공체(公體)에 있어서는 원수로 삼아야 할 의리가 없습니다."
하니, 임금이 중추(重推)하라고 명하였다. 뒤에 조관빈이 끝내 부임하지 않자, 김재로가 연석(筵席)에서 파직시키기를 청하니, 임금이 이를 윤허하였다.
임금이 조현명에게 말하기를,
"민형수(閔亨洙)가 상소하며 무엇 때문에 지나치게 스스로 변명하여 진달한 것인가?"
하니, 조현명이 아뢰기를,
"사설(辭說)이 변하여 전해져서 외의(外議)가 분분하였는데, 본사(本事)와 내용이 좀 달라졌기 때문입니다."
하였다. 당시 사람들의 말이 떠들썩했는데, 모두 조현명이 민형수를 유인하여 위시(僞詩)로 옥사(獄事)를 구성(構成)했다고 하니, 조현명이 노여워하는 한편 두려워하였다. 뒤에 임금이 조현명에게 하문하자, 조현명의 사기(辭氣)가 분려(奮厲)하여, ‘신에게 일곱 아들이 있는데, 반드시 민형수의 말 때문에 죽지 않을 것입니다.’고 말하기까지 했는데, 임금이 위로하면서 해명하고 서로 잊으라고 면려하였다. 그 뒤에 이언세(李彦世)가 상소하여 조현명이 임금과 지척인 전폐(殿陛) 아래에서 아들을 자랑하면서 떠들었다는 말로 공척(攻斥)하였다.
헌부 【지평 이구령(李耉齡)이다.】 에서 전계를 다시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김원재(金遠材)의 위시(僞詩)에 담겨진 무함이 삼조(三朝)에 파급되었으니, 그 생각해 낸 것이 요사스럽고 사악합니다. 이런 것을 은밀히 전파하여 사사로이 서로 고하여 말하다가 정적(情跡)이 탄로난 뒤에 이르러서는 이에 감히 그 아비에게 미루었습니다만, 아비가 전하고 아들이 이어받았으니, 함께 난역(亂逆)으로 귀착되는 것입니다. 이런데도 주참(誅斬)하지 않는다면 요얼(妖孼)을 징계하고 여정(輿情)을 시원하게 할 수 없으니, 작처(酌處)하라는 명을 도로 중지하고 다시 엄중한 국문을 가하여 정법(正法)하게 하소서."
하였다. 임금이 대신을 돌아보고 하문하기를,
"이 계사(啓辭)가 어떠한가?"
하니, 김재로와 조현명 등이 아뢰기를,
"대각(臺閣)에서는 이런 의논이 없을 수 없습니다."
하였으나, 임금이 윤허하지 않았다.
11월 11일 무인
지평 이구령(李耉齡), 정언 윤경주(尹敬周), 교리 이창의(李昌誼) 등이 삼사(三司)의 합계(合啓)를 정지하였다. 이보다 앞서 대사헌 권적(權𥛚), 대사간 이성룡(李聖龍), 응교 김상로(金尙魯) 등이 유봉휘(柳鳳輝)·조태구(趙泰耉) 등을 추탈(追奪)할 것과 이광좌(李光佐)를 파직시켜야 한다는 계사(啓辭)를 발론했었는데, 이때에 이르러 이구령(李耉齡) 등이 정계(停啓)하였다. 삼사의 합계가 발론되면서부터 임금이 당습(黨習)이라고 지척(指斥)하였으며, 간혹 어떤 일로 인하여 번뇌가 격렬해져 그때마다 중도에 지나친 거조가 있었다. 이런 연유로 이쪽과 저쪽에서 서로 삼사(三司)를 규피(規避)하였으므로, 거의 행공(行公)하는 사람이 없었다. 위시(僞詩)의 옥사가 일어나 김복택(金福澤)이 죽임을 당하자, 이에 이구령 등이 드디어 정계하게 된 것이었다.
11월 13일 경진
경기 광주부(廣州府)에 민치평(閔致平)이란 자가 아비의 첩과 증간(烝奸)한 난륜(亂倫) 때문에 왕부(王府)에서 국문하여 드디어 결안 정법(結案正法)하였다.
헌부에서 전계를 다시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간원에서 전계를 다시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11월 14일 신사
밤에 달이 동정성(東井星)으로 들어가고, 목성(木星)을 범하였다.
소대를 행하였다.
11월 15일 임오
월식(月食)이 있었다.
11월 16일 계미
이덕중(李德重)을 승지로, 서종급(徐宗伋)을 부제학으로, 서명신(徐命臣)·심악(沈)을 교리로 삼았다.
11월 18일 을유
달이 헌원성(軒轅星)을 범하였다.
풍덕 부사(豐德府使) 이보혁(李普赫)이 상소하여 진달하기를,
"본부(本府)는 군액(軍額)이 제일 많아서 호적(戶籍)에 기재된 가호(家戶)가 3천여 호입니다만, 실제로 군역(軍役)에 응할 수 있는 자는 8, 9백 호에도 차지 않습니다. 각색군(各色軍)이 모두 3천 5백여 호인데, 유망(流亡)하거나 천사(遷徙)하는 것이 오로지 여기에 연유하고 있으니, 청컨대, 그 원액(元額)을 감하여 다른 고을에 이속시킴으로써 민폐를 제거하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우악한 비답을 내리고, 묘당(廟堂)으로 하여금 품처(稟處)하게 하였다.
11월 19일 병술
달이 태미 서원(太微西垣)으로 들어갔다.
11월 20일 정해
송교명(宋敎明)을 대사간으로, 김상신(金相紳)을 집의로, 권굉(權宏)을 장령으로, 김상적(金尙迪)·어석윤(魚錫胤)을 지평으로, 임상원(林象元)을 정언으로, 신수(申𢢝)를 헌납으로, 윤급(尹汲)을 대사성 으로 삼았다.
임금이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호서(湖西)에서 시장(試場)을 어지럽힌 유생 송윤철(宋允喆) 등 4인을 극변(極邊)에 찬배(竄配)하고 시관(試官)도 아울러 파직하게 하였다. 이성중(李成中)이 호서(湖西)의 경시관(京試官)이 되어 시험을 관장하였을 적에 홍섭(洪涉)이란 자가 시(詩)로 장원(狀元)을 차지하였는데, 그 시의 말구(末句)에 이르기를,
"우리 임금이 새로 알성례를 거행하니
비루한 장제와 어떻게 견줄 수 있겠는가?"
했는데, 유생과 무뢰배들이 이를 가리켜 역적(逆賊)이라 하면서 말하기를,
"이는 이인좌(李麟佐)의 종제(從弟)가 차술(借述)한 것이다."
하고, 기와 조각과 조약돌을 마구 던지면서 시장(試場)을 어지럽힐 계책을 삼았다. 도신이 이 일을 계달하니, 임금이 여러 신하들에게 하문하였다. 영의정 김재로(金在魯) 등이 말하기를,
"시관이 처음 깨달아 살피지 못하고 고등(高等)에 두었으니, 죄가 없을 수 없습니다."
하고, 좌의정 송인명(宋寅明)은 아뢰기를,
"성상을 위하여 토역(討逆)한다고 한 것은 그 조짐을 자라게 할 수 없습니다. 말세의 인심이 장차 사사로이 작당(作黨)하여 살육하기에 이르게 될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시장을 어지럽힌 율(律)을 시행하려 하였다. 김재로가 아뢰기를,
"선비에게 형신(刑訊)을 가해서는 안됩니다."
하고, 우의정 조현명(趙顯命)은 아뢰기를,
"지기(紙旗)에 시관의 이름을 쓰고 또 호역(護逆)이라는 글자를 썼으니, 이는 형신을 가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그들이 비록 윗사람을 무함했지마는, 무함했다고 의심한다면 무함이 장차 어디로 돌아가겠는가?"
하고, 이어 원배(遠配)시키도록 하고 이성중은 파직하도록 명하였다.
좌의정 송인명이 관동(關東)에 흉년이 들었기 때문에 도신 정형복(鄭亨復)의 임기가 이미 만기가 되었지만 진구(賑救)가 끝날 때까지 잉임(仍任)시킬 것을 청하니, 임금이 그대로 허락하였다.
고(故) 징사(徵士) 박지계(朴知誡)에게 증직(贈職)하고 증시(贈諡)할 것을 명하였는데, 영의정 김재로(金在魯)가 청한 것이었다. 박지계는 인조조(仁祖朝)의 사람으로 예묘(禰廟)를 추숭(追崇)하자는 의논을 주장한 적이 있었는데, 선정신 김장생(金長生)과 의논이 합치되지 않았었다. 그러나 그가 혼조(昏朝)268) 때 벼슬하지 않았기 때문에 김재로가 정경(正卿)에 추증하고 시호를 내려 줄 것을 청하였다. 임금이 두 대신(大臣)에게 하문하니, 송인명·조현명 등이 아뢰기를,
"듣건대, 행실이 독실한 선비였다고 하는데, 마땅히 그 사람이 어질었는지의 여부를 논해야 마땅하며, 예론(禮論)이 합당한지 여부를 논하는 것은 부당합니다."
하니, 임금이 드이어 허락하였다. 이는 김재로의 선조가 박지계에게 수업(受業)했기 때문에 김재로가 이와 같이 극력 청한 것이었다.
수차(水車)를 만들었다 처음 효종(孝宗)이 심관(瀋館)269) 에 있었을 적에 수차로 물을 끌어 올려 논밭에 대는 것을 보고 그 제도를 취하여 가지고 와서 호조로 하여금 제작하게 하고, 이를 장차 제도(諸道)에 나누어 주어서 논농사에 물을 끌어대는 기구로 삼으려 했던 것인데, 그 유제(遺制)가 아직도 호조에 남아 있었다. 유척기(兪拓基)가 정승이 되었을 적에 임금에게 아뢰어 그 제도에 따라 다시 만들게 할 것을 청하였는데, 이 때에 이르러 수차가 완성되었다. 호조 판서 김시형(金始炯)이 아뢰니, 임금이 말하기를,
"이 물건으로 가뭄을 만났을 적에 물을 끌어올릴 수 있겠는가?"
하자, 김시형이 아뢰기를,
"지금은 물이 이미 얼었으니, 봄이 되기를 기다려야 시험할 수 있습니다."
하고, 승지 윤경룡(尹敬龍)은 아뢰기를,
"숙종(肅宗) 때 또한 그 제도를 영남에 내렸었는데 백성들이 계속해서 만들지 못했기 때문에 드디어 영원히 폐기되었습니다."
하였다. 이때 의논하는 자들이 말하기를,
"수차를 만드는 데 드는 공력(工力)이 많으므로 시골 백성들이 준비할 수 있는 것이 못됩니다.
하니, 그대로 버려두고 나누어 주지 않았다.
좌의정 송인명(宋寅明)이 회양(淮陽)에서 새로 생산되는 은광(銀礦)이 생겼다는 것을 아뢰니, 임금이 말하기를,
"어찌 말을 오산(吳山)에 세운다는 글귀를270) 듣지 못했는가? 이런 기화(寄貨)가 생산되는 곳이 있다는 것은 나라를 위해 이로운 일이 아닌 것이다. 그리고 회양은 곧 나라의 산맥(山脈)이므로, 파서 허물어서는 안되니 금하게 하라."
하였다.
소대를 행하였다.
11월 21일 무자
임금이 소대를 행하였다. 우참찬 이덕수(李德壽)도 함께 입시할 것을 명했는데, 이덕수는 늙어서도 책을 좋아하여 다방변으로 박식(博識)하였으므로, 임금이 매우 귀하게 여겼다. 《주자어류(朱子語類)》의 글을 진강(進講)했는데, 어려운 것을 묻는 것이 있으면 이덕수가 대답하는 것이 매우 상세하였다. 또 아뢰기를,
"진강하는 글은 마땅히 심성(心性)에 유익함이 있는 것을 취해야 합니다. 이런 글은 비록 진강하지 않더라도 무슨 손상될 것이 있겠습니까?"
하였다. 정문(程門)의 제자들이 선학(禪學)에 유입(流入)된 부분에 이르러 임금이 괴이하게 여겨 하문하니, 이덕수가 불학(佛學)의 영롱(玲瓏)하고 투철(透徹)함을 성대하게 일컫고 이어 아뢰기를,
"송(宋)나라 말기의 구이지학(口耳之學)은 장구(章句) 사이에서 깨끗이 벗어나지 못했으므로, 고명(高明)한 선비들이 간묘(簡妙)하고 조예(造詣)가 깊은 논의를 즐거워하여 선학에 물든 사람이 있기에 이르렀습니다. 그런데 신도 또한 여기에 물든 점이 있습니다."
하고, 또 칠정(七情)을 지나치게 쓰지 말라는 말을 우러러 면려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이단(異端)의 폐해가 주색(酒色)보다 더 심한 것이다. 이런 것으로 유자들을 속이는 경우가 많다."
하였다. 이덕수는 평소 불학을 좋아하였으므로 스스로 자신의 말이 이단에 관계됨을 깨닫지 못하였다. 또 이덕수는 본디 귀머거리 병이 있어 여러 신하들이 강독하는 소리를 들을 수 없었다. 그래서 책만 어루만지면서 부앙(俯仰)하며 좌우를 보면서 대답을 하지 못하였다. 그의 형모(刑貌)가 시세에 맞지 않았으나, 말은 질박하였다. 임금이 하순(下詢)할 것이 있으면 번번이 사관(史官)에게 써서 보이게 하는 등 권대(眷待)가 자못 두터웠으나, 이덕수가 성현(聖賢)의 뜻으로 임금의 마음을 계옥(啓沃)하지 못한 채 불로(佛老)271) 를 이야기하는 곳에 이르러서는 싫어하지 않고 친절히 설명하였으므로, 식자(識者)들이 이를 단점으로 여겼다.
11월 22일 기축
권현(權賢)을 집의로, 이격(李格)을 장령으로, 김한운(金翰運)을 지평으로, 서명신(徐命臣)을 헌납으로, 이수해(李壽海)를 정언으로, 윤심형(尹心衡)을 응교로, 신사건(申思建)을 수찬으로, 민응수(閔應洙)를 수어사(守御使)로, 윤순(尹淳)을 평안도 관찰사로 삼았다.
함경 감사 박문수(朴文秀)와 강원 감사 정형복(鄭亨復)에게 특별히 하유(下諭)하여 진정(賑政)에 마음을 다하여 백성들이 죽는 지경에 이르는 일이 없게 하라고 칙면(飭勉)하였다. 이는 동북(東北) 양도(兩道)의 연사(年事)에 제일 극심한 흉년이 들었으므로, 바야흐로 진정(賑政)을 경영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또 북쪽 변방은 추위가 극심하고 파수군(把守軍)은 정수(征戍)하는 것과 다름이 없다는 것으로 친히 당시(唐詩) 가운데, ‘성 위에 바람이 차고[城上風威冷] 강 가운데는 물 기운이 차다. [江中水氣寒]’고 한 글귀를 외고 나서 비국 당상에게 명하여 지의(紙衣)272) 를 넉넉하게 지급하게 하였다.
11월 23일 경인
어떤 별이 문창성(文昌星) 아래로 흘러갔는데, 빛깔은 붉은 색이었고, 빛이 땅을 비추었다.
박필리(朴弼理)·조상명(趙尙命)을 승지로, 홍계유(洪啓裕)를 사간으로, 이우하(李宇夏)를 헌납으로, 유우기(兪宇基)·김도(金䆃)를 정언으로, 정희보(靜熙普)를 집의로, 김한철(金漢喆)을 교리로, 민응수(閔應洙)를 예조 판서로 삼았다.
헌부에서 전계를 다시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영의정 김재로가 고(故) 상신(相臣) 홍중보(洪重普)에게 시호(諡號)를 내릴 것을 청하니, 임금이 이를 허락하였다.
11월 24일 신묘
임금이 희정당(熙政堂)에 나아가 초복(初覆)273) 과 여수(慮囚)274) 를 행하였다.
간원에서 전계(前啓)를 다시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헌부에서 전계를 다시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11월 26일 계사
우윤 오광운(吳光運)이 이규채(李奎采)의 말 때문에 상소하여 스스로 변명하기를,
"이규채가 없는 사실을 꾸며서 신을 무함하는 것은, ‘김일경과 박필몽을 관대히 놓아 주었다.[緩縱鏡夢]’는 이 네 글자에 불과한 것입니다. 예로부터 난역(亂逆)의 변고는 모두 연줄을 타고 권세를 얻은 데에서 연유하는 것으로, 동탁(董卓)·조조(曹操)·왕돈(王敦)·유유(劉裕) 같은 역적에게도 이것을 가지고, ‘흉역(凶逆)을 관대히 놓아 주었다.’고 했다는 말은 듣지 못했습니다. 이규채가 이 글귀를 따다가, ‘관대히 놓아 주었다.[緩縱]’라고 지목한 것에 대해 신은 진실로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하니, 예사 비답을 내렸다.
11월 27일 갑오
임금이 희정당(熙政堂)에 나아가 삼복(三覆)을 행하였다. 임금이 죄수들의 문안(文案)을 열람하고 나서 작처(酌處)하고 싶은 몇 사람에 대해 여러 신하들에게 하문하였다. 영의정 김재로 등은 당연히 율에 의거하여 죄를 다스려야 한다고 했고, 좌의정 송인명은 아뢰기를,
"성상의 인덕(仁德)이 이와 같으니, 사직의 복입니다."
하니, 드디어 작처하여 먼 곳에 귀양보내라고 명하였다. 임금이 인자(仁慈)가 지나쳐 매양 사죄(死罪)에 대해 반드시 살릴 방도를 구하였기 때문에 간혹 사죄에 해당되는 데도 산 사람이 있었다.
간원 【 헌납 이우하(李宇夏)이다.】 에서 전계를 다시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또 살옥 죄인 노석주(魯石柱)를 작처하라는 명을 환수할 것을 계청하였으나 임금이 윤허하지 않았다. 노석주는 미친 병이 들어 사람을 죽인 죄를 범했는데도 임금이 특별히 그 정상을 살펴 사형을 용서한 것이다.
사간 홍계유(洪啓裕)가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전하께서 매양 격뇌(激惱)한 때를 당하실 적마다 간혹 포용(包容)하는 방도를 어길 때가 있습니다. 전에는 성유열(成有烈)에 대해서 후에는 이규채(李奎采)에 대해서 3백 년 동안 대신(臺臣)을 대우하는 법규가 다시 여지가 없어져 버렸습니다. 대정(大庭)에서 친국(親鞫)하는 것은 사면(事面)이 본디 특이한 것이므로 진실로 역절(逆節)에 관계된 것이 아니면 일찍이 경솔하게 거행한 적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성유열(成有烈)에 대해서는 구금하여 가두고 결박하여 잡아다가 곤장(棍杖)을 거의 칠 뻔했다가 그만두었으며, 이규채에 대해서는 처음 상궐 단자(上闕單子)를 올리라는 명을 내렸다가 필경에는 말감(末減)하였으나, 또한 해도(海島)에 천극(栫棘)하기에 이르렀으니, 국체(國體)를 손상시키고 성덕(聖德)에 누를 끼친 것이 이보다 더한 것이 없습니다. 신은 삼가 슬프게 여깁니다. 말은 비록 감동하지 않았다 하나, 직책이 대관(臺官)이니 위벌(威罰)로써 구차하게 영합(迎合)할 것을 요구할 수는 없습니다. 이규채로 하여금 난만하게 똑같이 귀착되게 하였다면 그에게 있어서는 진실로 무사했을 것입니다만, 이러한 대관을 장차 어디에 쓰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소장을 열람하고 비답(批答)을 내리지 않았으며, 그의 소장은 도로 내주고 삭직(削職)하도록 명하였다.
11월 29일 병신
교리 김한철(金漢喆) 등이 홍계유(洪啓裕)를 삭직하라는 명령 때문에 연명 차자(聯名箚子)를 올리기를,
"삼가 살피건대, 근일 이래로 말 때문에 죄를 얻은 자들이 다른 사람이 하는 일을 보고 진퇴를 결정하고 있습니다. 지난번 비상한 위명(威命)을 내린 데 이르러서는 더욱 성덕(聖德)에 관계되는 것이 있습니다. 이는 간신(諫臣)이 광구(匡救)하는 정성을 본받으려 한 것이었으니, 간신들이 일시에 죄를 받은 것을 어찌 애석하게 여길 것이 있겠습니까마는, 혹시 언로(言路)가 이로부터 더욱 막히고, 성궁(聖躬)에 궐실(闕失)이 있어도 감히 말하는 사람이 없게 될까 두렵습니다."
하니, 임금이 당여(黨與)를 비호한다고 지척(指斥)하고, 비답을 내려 책망하였다.
헌부에서 전계를 다시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이도겸(李道謙)을 사간으로, 이덕수(李德壽)·서종급(徐宗伋)을 지경연사로, 이병상(李秉常)을 좌빈객으로 삼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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