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 1일 정유
내년의 세수(歲首)에 몸소 사직단(社稷壇)에서 상신일(上辛日)의 기곡제(祈穀祭)를 지내겠다고 명하였다.
12월 2일 무술
간원에서 전계를 다시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12월 3일 기해
전 대사성 심성희(沈聖希)가 본관의 물력(物力)이 조잔(凋殘)하다 하여 상소하여 김포(金浦) 등 여덟 고을의 전결(田結)에서 내는 세금을 도로 면세시켜 줄 것을 청하였는데, 비국(備局)에서 복계(覆啓)하니 그대로 허락하였다. 뒤에 호조에서 곤란하다고 복계한 것으로 인하여 정지하고 시행하지 않았다.
12월 5일 신축
전라 감사 권혁(權爀)이 비국에서 양전한 뒤 진전(陳田)을 강속(降續)시키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상소하여 논하니, 그 일을 비국에 내렸다. 비국에서 회계(回啓)하니, 시행하도록 허락하였다.
임금이 소대에 나아갔다. 검토관 이천보(李天輔)가 글뜻으로 인하여 아뢰기를,
"조식(曹植)의 학문은 문로(門路)가 순정(純正)하지 못하기 때문에 그의 문하에서 정인홍(鄭仁弘)이 나왔으니, 이는 순경(筍卿)275) 의 문하에서 이사(李斯)276) 가 나온 것과 같습니다. 조식이 우도(右道)에 살았기 때문에, 우도 사람들은 오로지 기절(氣節)을 숭상하였습니다. 그러나 이황(李滉)이 좌도(左道)에 살았기 때문에 무신년277) 의 난(亂) 때 죄를 범한 사람이 없었고, 지금에 이르기까지 문학(文學)과 행의(行誼)가 있는 자가 많으니, 마땅히 수용(收用)해야 합니다."
하니, 임금이 옳게 여겼다.
12월 6일 임인
임금이 날씨가 추워졌기 때문에 죄가 가벼운 죄수는 석방하도록 명하였다.
12월 9일 을사
임금이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좌의정 송인명(宋寅明)이 관동(廣東)에 거듭 흉년이 들었으니, 남한 산성에 사변에 대비해 저축해 놓은 소금을 이전하여 진휼하게 할 것을 청하니, 그대로 따랐다. 송인명이 또 아뢰기를,
"초사(初仕)의 길이 넓은데다가 또 다시 갑자기 승진(昇進)시키니 선비들이 그 음로(蔭路)가 신속한 것을 이롭게 여겨 전혀 글을 읽지 않기 때문에 풍습이 무너지고 염치가 없어졌습니다. 관제(官制)를 조금 변통하여 이런 폐단을 개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니, 임금이 다시 품의하게 하였다. 송인명이 또 아뢰기를,
"과거의 혼잡스러운 폐단을 마땅히 변통하는 방도가 있어야 합니다."
하고, 우의정 조현명도 더욱 극력 아뢰니, 임금이 말하기를,
"이는 오히려 말절(末節)에 속하는 것이다. 거실 세족(巨室世族)이 문호(門戶)를 나누고 각기 사당(私黨)을 심고 있는 것이 가장 안타까운 일이다."
하였다.
동산(銅山)을 봉치(封置)하고 동점(銅店)을 설치하지 말도록 하였다. 이때 호조 판서 김시형(金始炯)이 아뢰기를,
"생동(生銅)을 유철(鍮鐵)에 첨입(添入)하면 유철이 되고, 상랍(常鑞)에 첨입하면 상랍이 되고, 함석(含錫)을 첨입하면 두석(豆錫)이 되니, 한 가지 물건을 용주(鎔鑄)하여 기용(器用)이 매우 넓어집니다. 영월(寧越)에서 생동이 나는데 그 동맥(銅脈)이 풍성히니, 본조의 낭관을 보내어 살펴보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이를 어렵게 여겨 여러 신하들에게 하문하였는데, 모두 말하기를,
"유용한 물건을 버릴 수는 없습니다."
하였다. 훈련 대장 구성임(具聖任)이 아뢰기를,
"수안군(遂安郡)에도 생동을 캘 만한 곳이 있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이러한 물건은 있으나 없으나 관계되는 바가 없다. 뒷날의 임금이 이로 인하여 사치한 마음이 생긴다면 어찌 뒷 폐단이 되지 않겠는가?"
하고, 드디어 이 명이 있게 된 것이었다.
판윤 김성응(金聖應)이 청하기를,
"좌경법(坐更法)은 한결같이 가좌(家坐)의 차례에 따라서 하면 고르지 못한 폐단을 없앨 수 있을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대신들에게 묻자 모두 그것이 편하다고 하였다. 영의정 김재로가 아뢰기를,
"맹인(盲人)과 독호(獨戶)도 이미 빼지 않았으니, 공주·옹주·대신·국구의 집도 마땅히 모두 출역(出役)시켜 크게 공평한 뜻을 보여야 합니다."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그리고 맹인과 독호만 빼라고 명하였다.
임금이 소대에 나아갔다. 하교하기를,
"내가 부덕(不德)하니, 산림(山林)에서 글을 읽은 선비들이 조정에 나와 벼슬하려고 하지 않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그러나 공자(孔子)와 맹자(孟子) 같은 성인(聖人)도 오히려 열국(列國)을 수레를 타고 돌아다니면서 제(齊)나라와 양(梁)나라에 간절한 마음으로 도(道)를 행하려 했는데, 더구나 지금은 원량(元良)278) 이 점점 장성하여 취학할 시기가 가까운 것이겠는가? 아! 우리 세신(世臣)들은 어찌하여 보도(輔導)할 것을 생각하지 않는가? 이런 내용으로 여러 초선사(抄選使)에게 하유하여 즉시 역마를 타고 올라오게 하라."
하였다.
12월 10일 병오
소대를 행하였다.
12월 11일 정미
심성진(沈星鎭)·신택하(申宅夏)를 승지로, 김상로(金尙魯)를 대사간으로, 박필부(朴弼傅)를 집의로, 이광의(李匡誼)를 지평으로, 이창수(李昌壽)·남유용(南有容)을 정언으로 삼았다.
12월 12일 무신
밤에 달이 목성(木星)을 범하였다.
장령 이휘항(李彙恒)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금년에 우박의 재해를 입은 곳에서는 전혀 수확할 것이 없으며, 바닷가 개펄땅에도 흉년이 들어 떠돌면서 구렁에 죽어 나뒹굴고 있는 것을 참혹하여 차마 볼수가 없습니다. 서토(西土)가 가장 극심하니 반드시 충분히 진구(賑救)해야만 공사(公私)의 요역(徭役)을 책임지울 수 있습니다. 조속히 묘당으로 하여금 미리 상의하게 하고 이어 도신에게 진정을 강구하도록 계칙하소서. 그리고 흉년에 노비를 추쇄(推刷)하는 것은 새로 제정된 방금(邦禁)이 있는데도 황해 수사 민창기(閔昌基)는 성품이 본디 가혹하고 각박한데다 한정없는 욕심을 이루기 위해 다른 사람의 오래된 노비를 자기가 샀다고 하면서 차인(差人)을 보내어 경계(境界)를 넘어가 억지로 화명(花名)279) 을 봉납(捧納)하게 하고, 집안의 자산(資産)을 수탈하여 배로 영하(營下)에 운반하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도리어 스스로 자신이 횡탈(橫奪)한 자취를 숨기고자 하여 그 노비의 본주(本主)를 추포(追捕)한 무사(武士)의 죄안(罪案)에 억지로 충당시켰습니다. 그가 잔혹한 방법으로 법을 무시한 것에 대해 신이 익히 들어왔으니, 청컨대 민창기를 사판(仕版)에서 삭제하소서. 개천 현감(价川縣監) 손진민(孫鎭民)은 요사한 무당에게 고혹되어 뇌물받는 문을 크게 열어 놓고 형장(刑杖)을 혹독하게 사용하여 인명을 많이 죽였으며, 맹산 현감(孟山縣監) 조중려(趙重呂)는 백성에 대한 일을 완전히 포기하고 밤낮으로 술에 취해 주정을 부리며 전혀 체모(體貌)가 없는 까닭에 사람들이 모두 침을 뱉아 욕하고 있습니다. 청컨대, 두 고을의 수령을 모두 파직하소서. 지평 김한운(金翰運)은 처음 청망(淸望)에 허통되었을 적에 이미 비천(卑賤)하다는 지척(指斥)을 받았으며, 일찍이 대지(臺地)에 들어갔을 적에는 멋대로 이진유(李眞儒)의 계사(啓辭)를 고쳐 죄를 범한 것이 지극히 무거웠기 때문에 오랫동안 저희 무리 가운데에서도 저지당했었습니다. 지금 다시 견발(甄拔)된 뒤에 이르러서는 마땅히 인피(引避)하는 거조가 있어야 할 것인데, 의기 양양하게 무릅쓰고 나갔으니, 이미 상정(常情)을 벗어난 것입니다. 비록 격례(格例)로써 말하더라도 혼자 정사(政事)를 하여 제멋대로 의망(擬望)하면서 조금도 유난(留難)하는 바가 없었으니, 정사에 참여한 신하들을 탄핵한 먹물이 마르기도 전에 전석(銓席)에서 염치를 무릅쓰고 했기 때문에 이러한 견발 서용하는 정사에 있어 스스로 살필 겨를이 없어서 그러했던 것이 아니겠습니까? 신은 김한운은 속히 삭출(削黜)시키고 해당 전관(銓官)도 마땅히 견책하도록 명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민창기·손진민에 대해서 진달한 것은 지나친 데에 관계된다. 조중려는 어떤 사람인지 모르겠으니 마땅히 전최(殿最)를 보도록 하겠다. 김한운과 정관에 대한 일은 대신에게 하교하겠다. 그 나머지 일은 묘당으로 하여금 품처하게 하겠다."
하였다.
함경도 유생 주원순(朱遠舜) 등이 상소하여 청하기를,
"선정신 문정공(文正公) 송시열(宋時烈)과 송준길(宋浚吉)을 문묘(文廟)에 종향(從享)하게 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가서 학업을 연마하라."
하였다.
부호군 김유경(金有慶)이 상소하여 치사(致仕)하기를 원하였으나, 임금이 아직 근력이 강장하다 하여 우악한 비답을 내리고 윤허하지 않았다.
12월 14일 경술
임금이 소대에 나아갔다. 시강관 김한철(金漢喆)이 아뢰기를,
"기강이 확립되면 윗사람은 편안하고 한가해져 일이 없게 되는데, 전하께서는 항상 일이 없게 되는 지경에 이르지 못한다고 하교하시지만, 이는 기강이 확립되지 못한 까닭에 불과합니다. 기강의 확립은 오로지 처치(處置)를 마땅하게 하는 데 달려 있는 것입니다. 당(唐)나라의 배도(裴度)280) 가 말하기를, ‘조정의 처치가 마땅하니 한홍(韓弘)281) 이 병든 몸으로 수레를 타고 역적을 쳤고, 왕승종(王承宗)282) 이 손을 거두고 땅을 깎아 바쳤다.’ 했는데, 그 말이 참으로 지극한 말이었습니다. 그렇게 하면 비록 교만한 장수와 사나운 신하일지라도 모두 감화되는 것인데, 어찌 기강이 확립되지 않는 것을 근심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칭찬하였다.
12월 17일 계축
달이 태미원(太微垣)에 들어갔다.
헌납 이우하(李宇夏)가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일이 승여(乘輿)에 관계되고 말이 권귀(權貴)에 관계되면 온 세상 사람들이 머뭇거리면서 입을 여는 사람이 하나도 없습니다. 심지어 요사스럽고 사악한 김원재(金遠材) 같은 자에 대해서도 끝까지 구핵하지 않고 곧바로 먼저 작처(酌處)하게 하였으므로, 신인(神人)이 함께 통분해 하고 여정(輿情)이 오래도록 격앙되어 있습니다. 그런데도 다시 엄중한 국문을 가하라는 청에 대해 아직까지 윤허하지 않고 계십니다. 성상의 형정(刑政)이 이와 같이 관대하고 느슨한 까닭에 비록 흉역으로 복법(伏法)된 김복택(金福澤) 같은 자도 수노 적산(收孥籍産)하도록 청하는 것을 아직 듣지 못했습니다. 이것 또한 일이 척속(戚屬)에 관계된 것이므로 감히 따질 수가 없어서 그렇게 된 것입니까? 당일 입시한 대신(臺臣)은 그 책임을 면할 수 없을 듯합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김원재 등에 대한 일은 처분한 뜻이 깊은 것이었다."
하였다. 수일 후에 임금이 대신에게 말하기를,
"김복택의 일에 대해서는 내가 지금 후회하고 있다. 후회하는 것은 이것이 나의 공심(公心)이다."
하니, 송인명이 아뢰기를,
"이우하의 말은 본일에 대해 몰라서 그러한 것입니다. 노적의 법을 시행하는 것은 마땅하지 못합니다."
하였다. 그후 송인명이 그의 조카 송익휘(宋翼輝)로 하여금 이광의(李匡誼)를 사주하여 김복택에게 노적(孥籍)의 법을 시행하라는 계사(啓辭)를 올리게 했으니, 그의 말이 앞뒤가 같지 않은 것이 이와 같았다.
정언섭(鄭彦燮)·송익보(宋翼輔)를 승지로, 서종옥(徐宗玉)을 대사헌으로, 이석복(李錫福)을 장령으로, 홍경보(洪鏡輔)를 정언으로 삼았다.
경상 감사 정익하(鄭益河)가 상소하기를,
"본도에 오래 묵은 전지에 세금을 징수하는 것이 매우 억울하고 고질적인 폐단이 되었습니다. 비록 필부(匹夫)로서 명성을 얻기 좋아하는 자라도 진실로 그것이 옳은 것이 아니면 털끝만큼이나마 남의 것을 취하지 않는 법인데, 더구나 당당한 천승(千乘)의 나라에서 어떻게 차마 죽음에서 헤어나기에도 겨를이 없는 적자(赤子)에게 백징(白徵)283) 할 수 있겠습니까? 묘당으로 하여금 품지(稟旨)하여 견감시키게 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임금이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관동(關東)에 큰 흉년이 들어 흩어진 백성이 많기 때문에 어사 홍상한(洪象漢)을 보내어 위유(慰諭)하고 안집(安集)시키게 하였다.
금부 도사를 보내어 호남의 죄수 노택(魯澤)을 잡아오게 하였다. 이때 호남에 노택이라는 자가 있었는데, 산송(山訟)으로 인하여 영옥(營獄)에 들어와 장차 형장(刑杖)을 받게 되자, 스스로 고변(告變)한다고 하면서 드디어 박사대(朴師大)와 박사관(朴師寬)을 끌어들여 역적 모의를 했다고 했는데, 두 사람은 곧 무신년284) 의 역적 박필현(朴弼顯)의 아들과 조카였다. 감사가 이런 내용으로 장문(狀聞)하니, 임금이 여러 신하들에게 하문하기를,
"국청(鞫廳)을 설치하는 것은 국체(國體)에 손상이 되니 마땅히 어사를 보내어 구핵해야 하겠다."
하였다. 대신과 여러 신하들이 모두 나국(拿鞫)하기를 청하니, 그대로 따랐다.
임금이 이휘항(李彙恒)이 지평 김한운(金翰運)을 논한 일 때문에 여러 신하들에게 하문하니, 영의정 김재로(金在魯)가 아뢰기를,
"신은 알지 못합니다."
하고, 우의정 조현명(趙顯命)은 아뢰기를,
"이진유(李眞儒)의 계사(啓辭)에 연계(連啓)하는 사람이 없었으므로, 김한운으로 하여금 고쳐서 속히 방형(邦刑)을 바루기 위해 국문(鞫問)하게 한 것입니다. 18일의 처분(處分) 때에 김일경(金一鏡)의 상소에 교통(交通)한 정절(情節)이 있다는 하교가 있었는데, 반드시 이진유를 국문한 후에야 형벌을 바룰 수 있었기 때문에 고치게 한 것은 곧 신 등이 지휘한 것입니다."
하자, 임금이 말하기를,
"그런가?"
하고, 드디어 불문에 붙였다.
홍계유(洪啓裕)의 직첩(職牒)을 도로 돌려주라고 명하였다. 처음 이윤신(李潤身)이 삼사(三司)의 합계(合啓)를 정지하려 하였을 적에 이규채(李奎采)가 불가하다고 하였으므로 드디어 정지하지 못하였는데, 임금이 크게 노하여 이규채를 해도(海島)에 천극(栫棘)하도록 하였다. 오랜 뒤에 홍계유(洪啓裕)가 상소하여 이규채의 일에 대해 송사하니, 임금이 홍계유가 정계하자는 의논에 따르면서도 도리어 신구(伸救)하는 말을 하는 것인가 의심하였다. 그리하여 그의 정태(情態)가 회호(回互)한 데 대해 노하여 삭직(削職)시키도록 하였다. 이때에 이르러 대신들이 모두 그렇지 않다고 아뢰니, 임금이 깨닫고서 즉시 직첩을 돌려주게 하였다.
좌의정 송인명이 개성 유수 김약로(金若魯)를 내직으로 천전(遷轉)시킬 것을 청하니, 그대로 따랐다. 김약로가 송인명에게 붙어서 내직으로 들어와 권병(權柄)의 자리에 기용되기를 요구하자. 송인명이 드디어 아뢰었던 것이었다.
12월 20일 병진
조원명(趙遠命)을 부제학으로, 윤득경(尹得敬)을 교리로, 이성중(李成中)을 부교리로, 이제원(李濟遠)을 헌납으로, 어석윤(魚錫胤)을 정언으로, 안집(安𠍱)을 지평으로 삼았다.
장령 이석복(李錫福)이 상소하여 논하기를,
"경기 감사 이익정(李益炡)과 강원 감사 정형복(鄭亨復)은 수령들의 폄목(貶目) 가운데 당연히 하고(下考)에 두어야 할 사람을 중고(中考)에 두었으니, 청컨대 모두 중추(重推)하고 그 수령들도 함께 파출(罷黜)하소서."
하고, 또 아뢰기를,
"소와 술에 대한 법금이 해이해졌으니 다시 신칙하여 엄금하게 하소서. 사사로이 소를 도살하는 자는 전가 사변(全家徙邊)285) 의 율(律)을 시행하고 술을 빚어 파는 자에게도 한 차례 엄형(嚴刑)을 가하는 율을 시행하게 하소서."
하고 또 아뢰기를,
‘"전 병사 조엄(趙儼), 장연 부사(長淵府使) 신겸제(申兼濟), 밀양 부사(密陽府使) 윤무교(尹懋敎)는 법금을 무시하고 교자(轎子)를 탔으니, 모두 파직하소서."
하고, 또 아뢰기를,
"이덕수(李德壽)·정우량(鄭羽良)이 주문(主文)286) 이 된 이후 과체(科體)가 아주 달라져서 글이 험괴(險怪)하고 가식(假飾)이 많은데, 이는 세변(世變)에 관계되기 때문에 식견이 있는 이들이 탄식하고 있습니다. 주문이 된 사람에게 마땅히 경책(警責)을 가해야 합니다."
하고 또 아뢰기를,
"사옹원 첨정 원경운(元慶運)은 늙고 패려하고, 사재감 별제 이귀제(李龜濟)는 혼암하고 용렬하니, 모두 간태(刊汰)하게 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수령 가운데 불법한 자는 듣는 대로 탄박(彈駁)하는 것이 좋겠지만, 전최(殿最)에 대한 것은 승정원과 전조가 있으니, 이목관(耳目官)이 추찰(推察)할 것이 아니다. 사사로이 소를 도살하는 자에 대해서는 본래 해당되는 율(律)이 있으니, 마땅히 신칙하겠다. 조엄 등에 대한 일은 모두 아뢴 대로 시행하겠다. 문체(文體)가 같지 않은 것은 갑자기 이개(釐改)하기 어려운 것인데 협잡(挾雜)이 있다고 진달한 것은 뜻이 불미스러운 데에 관계된다."
하였다.
강원 감사 정형복(鄭亨復)이 상소하기를,
"본도에는 양정(良丁)은 적은데도 군액(軍額)이 많아서 한 사람의 몸에 항상 두서너 가지 신역(身役)을 겸하고 있습니다. 묘당에서 이역(移役)시킬 때를 당할 적마다 번번이 반드시 본도에 획속(劃送)하고 있는데다가, 본도는 원야(原野)가 적고 산협(山峽)이 많아서 여러 궁가(宮家)와 각 아문(衙門)에서 절수(折受)한 화전(火田)이 각 고을에 널려 있으며, 전세(田稅)를 거두는 법규가 원전(原田)보다 무겁습니다. 그런데도 금년에 특별히 감면한 전세(田稅) 가운데 들어 있지 않으니, 묘당으로 하여금 품지하게 하여 다른 도의 군액을 이송시키는 것을 특별히 도로 중지하게 하고, 화전(火田)을 절수한 것도 원전의 예(例)에 의거하여 세금을 감면하게 하소서."
하니, 비국에 내려 품처하게 하였다.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식년(式年)의 대과(大科)·소과(小科)를 오는 가을로 늦추어 시행하게 하였는데, 흉년이 든 때문이었다.
나주 목사(羅州牧師) 이보욱(李普昱)과 진도 현감(珍島縣監) 민선(閔墡)을 나문(拿問)하도록 명하였다. 영의정 김재로(金在魯)가 아뢰기를,
"무신년의 역속(逆屬) 가운데 연좌된 자들에 대해 세월이 오래된 때문에 금방(禁防)이 아주 소홀합니다. 연전에 박사순(朴師純)이 멋대로 배소(配所)를 떠난 것도 이미 매우 놀라운 일인데, 이번에 박사대(朴師大)가 또 멋대로 다닌 일이 있었으니, 나주 목사와 지방관은 마땅히 나문(拿問)하여 정죄(定罪)하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이를 허락하였다.
호조 판서 김시형(金始炯)이 금년의 감세(減稅) 가운데 콩 6만여 곡(斛)의 대가(代價)를 선혜청에서 미리 구획(區劃)하여 경용(經用)에 대비하게 할 것을 청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내가 세금을 감면한 것은 명예를 구해서가 아니다, 내가 부족하게 여기는 것은 평소부터 한(漢)나라 문제(文帝) 때 창고의 곡식이 썩고 뜰 정도였던 효험이 나에게 없으므로 단지 조세를 감면하는 명을 내린 것이다."
하고, 청한 대로 획급하도록 명하였다. 국가의 경용(經用)이 매우 많아서 지부(地部)287) 의 1년 수입이 1년의 경용을 지탱할 수가 없었다. 그런데 세금을 감면한 이후에는 더욱 크게 모자라게 되어 좌우로 힘써 주선해도 매양 넉넉하지 못한 것을 걱정하게 되었다. 김시형이 또 아뢰기를,
"서울에는 돈이 없는데 관서(關西)에는 유독 많이 저축되어 있으니, 호조에서 구관(句管)하는 수미(需米) 가운데 쓰고 남은 것을 관서의 민고(民庫)에 있는 돈과 바꾸어 쓰게 하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하니, 그대로 따랐다.
고(故) 열녀(烈女) 현령(縣令) 조헌주(曹憲周)의 아내 이씨(李氏)를 정려(旌閭)하도록 특별히 명하였다. 이씨는 곧 고 판서 이일상(李一相)의 딸이고 고 참판 조한영(曹漢英)의 자부(子婦)였다. 나면서부터 지극한 품성과 특이한 행실이 있었는데, 그의 남편이 제최(齊衰)와 참최(斬衰)의 상복(喪服)을 잇따라 입어서 병이 날로 위독하여지자, 이씨가 주야로 게을리하지 않고 하늘을 향하여 울부짖으면서 자신을 대신 죽게 해달라고 청하였다. 병이 어떻게 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자, 드디어 먼저 죽을 것을 결심하고 여러 번 칼과 노끈을 잡았었으나, 그때마다 자녀들이 울부짖어 제지하자, 이에 몰래 독약을 구하여 의대(衣帶)에 감추고 몰래 복용하니, 점점 녹아서 죽게 되었다. 이때가 기사년288) 을 당한 뒤였는데 인리(隣里)에서 감읍(感泣)하여 관(官)으로 달려가 신고했으나, 이씨의 본가(本家)가 시배(時裴)들에게 미움을 샀기 때문에 정지하고 아뢰지 않았었다. 이때에 이르러 영의정 김재로가 그 일을 아뢰고 정표할 것을 청하니, 그대로 따랐다.
고 돈녕부 도정 박기조(朴起祖)를 특별히 증직하도록 명하였는데, 박기조는 박지계(朴知誡)의 종손(從孫)이다. 숙종(肅宗)계유년289) 진사(進士)에 합격했을 적에 인현 왕후(仁顯王后)가 중전(中殿)에서 물러나 사제(私第)에 거처하고 있었는데, 박기조가 사제의 문밖에서 숙배하였다. 궁인이 놀라고 괴이하게 여겨 그의 성명을 물었으나 말하지 않고서 물러갔다. 후에 왕후가 복위하자, 벼슬에 임명되어 도정에 이르렀는데, 이때에 영의정 김재로가 그 일을 아뢰고서 증직하여 포장(褒奬)할 것을 청하니, 그대로 따랐다. 우의정 조현명도 그때의 무인(武人)인 채이장(蔡以章)이 군문(軍門)의 초관(哨官)으로서 진소(陳疏)하려 하였으나, 다른 사람에게 고발당하여 형장(刑杖)을 맞고 정배(定配)되기에 이르렀던 것을 아뢰니, 임금이 또한 증직시키라고 명하였다.
12월 21일 정사
임금이 소대를 행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옛날의 학자로서 이윤(伊尹)·여상(呂尙)·제갈양(諸葛亮) 같은 이들은 모두 와서 세상에 기용되었다. 그런데 오늘날의 학자는 기필코 물러가 시골에 사는 것을 고상하게 여기고, 어려서 배우고 장년이 되어 행한다는 것은 생각하지 않고 있으니, 어찌 이것이 위에 있는 사람의 성례(誠禮)가 미진한 데에만 허물이 있는 것이겠는가?"
하였는데, 이는 임금이 초선(抄選)한 사람이 매양 불러도 오지 않았기 때문에 이런 하교가 있었던 것이었다.
조명신(趙命臣)을 대사간으로, 권현(權賢)을 사간으로, 조명경(曹命敬)을 부교리고, 김상로(金尙魯)를 승지로, 서종급(徐宗伋)을 이조 참판으로, 이종백(李宗白)을 이조 참의로, 신만(申晩)을 병조 참판으로 삼았다.
12월 23일 기미
소대를 행하였다.
12월 25일 신유
밤에 어떤 별이 유성(柳星)의 아래로 흘러갔는데, 크기는 주먹한 하였고, 빛깔은 붉은 색이었다.
12월 26일 임술
경기의 유학 민사덕(閔師德) 등 수백 인이 상소하여 조종(祖宗)의 구전(舊典)에 의거하여 다시 기전(畿甸)의 향시(鄕試)를 설행하고, 서인(庶人)이 비단옷을 입는 참람한 짓을 하는 것을 금하여 재물이 축적되게 하고, 백성들이 낭비하는 일이 없게 할 것을 청하니, 비국에 명하여 품처하게 하였다.
약방 도제조 김재로(金在魯)가 임금의 오래 앉아 있는 데에 방해로움이 있을까 우려하여 의자를 만들어 평좌(平坐)하여 기대고 있을 것을 청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으면서 말하기를,
"내가 편하게 앉아 있을 적이 없다. 평생 꿇어 앉는 데 익숙하기 때문에 평좌하면 도리어 불안스러움을 느끼게 된다."
하였다. 임금이 타고난 성품이 검약하여 입은 의복이 투박한 빛깔이고 신도 꿰맨 곳이 모두 터져 있었으며, 심지어 기용(器用)의 물건도 파괴된 것이 많았으나. 일찍이 고치라고 명한 적이 없었다.
국수(鞫囚) 노택(魯澤)을 감사(減死)하여 도배(島配)하라고 명하였다. 이때 노택을 의금부로 잡아다가 국문하니 허망하여 단서가 없었다. 대신이 그 정상을 아뢰었는데 임금이 작처(酌處)하기 위하여 대신에게 하문하니, 모두 절도(絶島)에 원배(遠配)할 것을 청하였으므로 그대로 따랐다. 박사대(朴師大)는 연좌된 죄인으로 멋대로 배소(配所)를 떠나 서울을 출입했기 때문에 제주로 이배(移配)하였다. 박사대의 처부(妻父)인 참판 이춘제(李春躋)는 박사대를 유접(留接)하였다 하여 처음 나처(拿處)한 뒤 또 정배하였다. 이보욱(李普昱)과 민선(閔墡)은 죄적인(罪謫人)이 멋대로 적소(謫所)를 떠났는데도 금하지 않았다 하여 또한 원지(遠地)에 정배하였다.
간원 【사간 권현(權賢)이다.】 에서 전계를 다시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또 죄인 노택(魯澤)을 감사(減死)하여 도배(島配)하도록 한 명을 정지할 것을 계청(啓請)하니, 답하기를,
"그를 작처(酌處)한 것은 율법(律法)에 의거한 것이니, 번거롭게 하지 말라."
하였다.
헌부 【장령 이격(李格)이다.】 에서 전계를 다시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또 계청(啓請)하기를,
"회양 부사(淮陽府使) 이일제(李日躋)와 강원 감사 정형복(鄭亨復)을 파직하소서."
하고, 또 아뢰기를,
"영흥 부사(永興府使) 김후(金𣖔)는 관직에 있으면서 직무를 수행하지 않았으니, 파직하고 서용하지 마소서."
하니, 임금이 이를 모두 윤허하였다. 이때 관동(關東)에 큰 흉년이 들어 굶어 죽는 백성이 많았는데, 이격이 이일제와 정형복이 잘 진구(賑救)하지 못했다고 말하니, 임금이 평소 정형복이 청백(淸白)하지만 사무 처리에는 결점이 있다고 의심했기 때문에 특별히 이격의 말을 따른 것이었다. 이어 대신에게 하문하기를,
"누구를 관동백(關東伯)으로 삼아 백성을 제활(濟活)하는 계책을 맡겨야 하겠는가?"
하니, 좌의정 송인명이 승지 김상로(金尙魯)를 천거하였다. 이때 김상로가 바야흐로 임금에게 총애받고 있었으므로 드디어 김상로를 강원도 관찰사로 삼았다.
12월 27일 계해
원경하(元景夏)를 승지로 삼았다.
12월 28일 갑자
헌부에서 전계를 다시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12월 29일 을축
밤에 토성(土星)이 적시성(積尸星)을 범하였다.
헌부에서 전계를 다시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장령 이격(李格)이 상소하기를,
"다좌(茶坐)에 나아갔을 적에 어떤 과부가 단자(單子)를 올렸는데. 그 내용에 ‘남편의 아우 여문표(呂文杓)가 행실이 패악하다.’고 하면서 그의 죄상을 열거하였습니다. 그래서 감찰(監察)로 하여금 다스리게 하였더니 여문표가 온갖 사악한 말을 다하고, 봉서(封書)로 고변(告變)하겠다는 말까지 하였습니다. 청컨대, 포청(捕廳)에 이송하여 엄중히 신문하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이는 익명서와 다름이 없는 것으로 국체(國體)에 관계되는 것이니, 물을 필요도 없다."
하고, 그 봉서는 불사르고 그 사람은 포청에 구수(拘囚)하도록 명하였다.
12월 30일 병인
비변사에서 아뢰기를,
"수원(水原)의 마군(馬軍)은 본부로 하여금 1명의 보인을 지급하게 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이보다 앞서 홍상한(洪象漢)이 아뢰기를,
"수원(水原)의 6천 마군(馬軍) 가운데 말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하나도 없으니, 위급한 때에 힘을 쓸 수가 없습니다. 마땅히 금위영(禁衛營)·어영청(御營廳)의 준례에 의거하여 각기 2명의 보인을 지급하게 하소서."
했는데, 비국(備局)에서 2명의 보인은 곤란하다 하여 단지 1명의 보인만 지급하게 하였다.
교리 윤득경(尹得敬)과 수찬 신사건(申思建)·윤광의(尹光毅) 등이 차자(箚子)를 올려 여문표(呂文杓)가 봉서(封書)로 상변하겠다고 한 말을 구핵할 것을 청하였다. 대사간 조명신(趙命臣)도 상소하여 청하였으나, 임금이 이미 처분을 내렸다 하여 윤허하지 않았다. 삼대신(三大臣)과 좌포장·우포장이 여문표의 일로 청대(請對)하니, 임금이 여러 신하들을 인견하고 봉서를 뜯어 보았다. 여문표가 그의 형수와 사이가 좋지 않았는데, 그의 형 여문익(呂文翊)이 인품이 흉악하여 일찍이 역적 김일경(金一鏡)을 위하여 시체를 거두었고, 해(垓)·기(圻)의 비부(婢夫)가 되었으며, 또 남태징(南泰徵)의 군관(軍官)이 되었다가 국옥(鞫獄)으로 죽었다. 여문표의 봉서의 개요는 그의 형의 아내가 구거훈(具巨勳)·윤청장(尹淸章)의 무리와 함께 모의한 적이 있다는 것이었다. 임금이 말하기를,
"여문표의 문서는 허황될 뿐만 아니라, 지친(至親)을 해치려고 하였으니, 이는 윤기(倫紀)의 죄에 관계되는 것이다. 추조(秋曹)에 회부하여 형신을 가한 다음 자복을 받아 조율(照律)해서 처단하도록 하라."
하였다. 무신년 이후 죄수(罪囚)가 된 사람은 당장 형신을 늦출 계책으로 번번이 고변(告變)하겠다고 말하는 사람이 전후에 서로 잇따랐다. 관장(官長)도 그 말을 듣고 실상이 없다는 것을 분명히 알면서도 외의(外議)가 잘못 전하여질까 두려워하여 번번이 그 일을 상주하였으며, 조정에서도 반드시 시끄럽게 떠들면서 국문할 것을 청하였다. 그러나 임금은 그때마다 실상이 없는 것을 싫어하여 끝내 철저히 핵실하지 말도록 하였다.
포청의 죄인 가운데 이하제(李夏躋)의 일로 인하여 체포되어 갇힌 사람들을 모두 석방하도록 명하였다. 이춘제(李春躋)의 집에서 연회가 있은 뒤에 갑자기 죽은 사람의 구가(仇家)에서 조정에 고하였기 때문에, 이춘제의 서제(庶弟) 이하제와 계집종 소정(小貞)을 포청에다 가두고 다스리면서 여러 달 동안 구핵(究覈)하였는데, 이하제와 소정이 모두 죽었으므로 사람들이 혹 억울하게 여겼다. 그리고 독(毒)을 넣은 이유는 끝내 그 단서를 찾아내지 못하였다. 임금이 옥사(獄事)가 이미 오래 되었고 간련(干連)된 죄수들도 신문할 만한 사람이 없기 때문에 이에 포장(捕將)에게 모두 석방하도록 명한 것이었다.
'한국사 공부 > 조선왕조실록' 카테고리의 다른 글
| 영조실록53권, 영조 17년 1741년 2월 (1) | 2025.09.25 |
|---|---|
| 영조실록53권, 영조 17년 1741년 1월 (1) | 2025.09.25 |
| 영조실록52권, 영조 16년 1740년 11월 (0) | 2025.09.24 |
| 영조실록52권, 영조 16년 1740년 10월 (1) | 2025.09.24 |
| 영조실록52권, 영조 16년 1740년 9월 (0) | 2025.09.2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