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영조실록53권, 영조 17년 1741년 1월

싸라리리 2025. 9. 25. 09:54
반응형

1월 1일 정묘

팔도와 양도(兩都)에 권농(勸農)하는 윤음(綸音)을 내리고, 또 비국(備局)에 명하여 여러 도(道)에 신칙하게 하였다.

 

1월 2일 무진

지평(持平) 김한운(金翰運)이, 이휘항(李彙恒)이 상소하여 배척한 것을 가지고 스스로 변명하기를,
"이른바 이진유(李眞儒)에 대한 계사(啓辭)를 마음대로 고쳤다고 하는 것은 ‘빨리 국가의 형정(刑政)을 바로잡아야 한다.’는 것을 ‘엄중히 국문하여 처단해야 한다.’는 것으로 고친 것에 불과합니다. 그리고 마침내 처분이 엄중하게 국문하는 데로 돌아갔는데, 지금에 와서 뒤따라 제기하여 신의 죄안(罪案)을 삼는 것은 참으로 뜻밖입니다."
하니, 임금이 예사 비답을 내렸다.

 

1월 3일 기사

각 능관(陵官) 및 작은 각 관사의 관제(官制)를 개정하였는데, 좌의정 송인명(宋寅明)의 의논을 따른 것이었다. 건원릉(健元陵)·정릉(貞陵)·헌릉(獻陵)·현릉(顯陵)·사릉(思陵)·경릉(敬陵)·창릉(昌陵)·공릉(恭陵)의 능관(陵官) 1원(員)을 승진시켜 영(令)으로 삼되, 남행(南行)001)  , 5품과(五品窠)로 정하고, 다섯 달이 되면 날짜를 계산한 뒤에 비로소 천전(遷轉)을 허락하도록 하였다. 상의원(尙衣院)의 직장(直長) 1원을 승진시켜 주부(主簿)로 삼고, 종묘서(宗廟署)의 직장 1원을 승진시켜 영(令)으로 삼고, 사직서(社稷署)의 직장 1원을 승진시켜 영으로 삼고, 선공감(繕工監)의 직장 1원을 승진시켜 주부로 삼되 남행 참상과(參上窠)로 정하고, 태릉(泰陵)의 봉사(奉事) 1원을 직장으로 승진시키게 하였다. 효릉(孝陵)·강릉(康陵)·목릉(穆陵)·휘릉(徽陵)·숭릉(崇陵)·명릉(明陵)·익릉(翼陵)·혜릉(惠陵)의 8봉사(奉事)는 이름을 별검(別檢)으로 고치되, 장녕전(長寧殿)의 예(例)에 의거하여 승문원의 참하과(參下窠)로 정하고, 24개월이 되면 출사(出仕)한 날짜를 계산하여 6품으로 승진시키게 하였다. 종묘서 영(宗廟署令)·사직서 영(社稷署令)·영희전 영(永禧殿令)·평시서 영(平市署令) 등 네 자리는 능령(陵令)의 대신으로 문신인 5품과(五器窠)로 정하되 모두 일찍이 병조[騎省]를 거친 사람을 가려 차임하며, 직장을 3원을 줄이고, 봉사는 9원을 줄이고, 남행 참상(南行參上)은 12원을 늘리고, 문신 참상(文臣參上)은 4원을 늘리고, 문신 참하(文臣參下)는 8원을 늘리도록 하였다.

 

광양현(光陽縣)에서 육지로 내보낸 죄인 김성탁(金聖鐸)에게 특별히 급유(給由)002)  를 허락하여 돌아가서 그 어머니의 장례를 치르도록 명하였다. 당시 좌의정 송인명(宋寅明)이 김성탁의 아들이 울면서 호소한 때문에 임금에게 아뢰기를,
"귀양가서 있는 사람으로 부모의 상(喪)을 당한 자는 비록 죄명(罪名)이 지극히 무겁고 대계(臺啓)가 한창 일어나고 있더라도 또한 모두 돌아가서 장례를 치르게 하였으니, 이는 선조(先祖)의 정식(定式)입니다."
하니, 마침내 이 명이 있게 된 것이었다.

 

헌부(憲府)에서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아니하였다.

 

간원(諫院) 【사간 권현(權賢)이다.】 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아니하였다. 또 아뢰기를,
"강진현(康津縣)에 남편을 시해(弑害)한 옥사가 있었는데, 옥사의 정상이 진실로 의심스럽고 분명하지 않은 부분이 많았지만 추관(推官)이 세밀하게 캐물어 실정을 알아내려는 방도는 생각하지 아니하고 오직 수습을 급하게 여겨 죄인 모녀(母女)가 모두 한 차례의 형신(刑訊)에 죽었습니다. 청컨대, 해당 추관을 먼저 파직한 뒤에 잡아오게 하소서. 그리고 대신(臺臣)을 외직(外職)에 보임(補任)하는 것은 바로 한때의 처벌이며, 수령(守令)의 연한(年限)은 바로 금석(金石)처럼 변함이 없는 가치를 지닌 법전입니다. 진도 군수(珍島郡守) 박준(朴㻐)을 당초에 외직에 보임한 것도 지나친 데에 관계되는데, 지금은 나이 또한 70세에 찼으니, 청컨대, 개차(改差)하소서."
하니, 임금이 윤허하였다.

 

1월 6일 임신

검열(檢閱) 김상복(金相福)이 사관(史官)을 추천하는 일로 인하여 상소하여 사직하였다. 김상복이 서지수(徐志修)와 민백상(閔百祥)을 한림(翰林)으로 추천하여 회천(回薦)003)  하였는데, 송교명(宋敎明)에게 이르자 송교명이 민백상을 미워하여 저지시키려고 서지수가 영사(領事) 김재로(金在魯)와 친혐(親嫌)이 있으므로 응강(應講)할 수 없다고 핑계대어 말하였다. 이에 추천이 마침내 실패하게 되었으므로 김상복이 상소하기를,
"그전부터 친혐(親嫌)이 있어 응강(應講)하지 못할 경우 간혹 추천에 든 지 수년이 되어서야 비로소 사관(史官)의 직임을 주었습니다. 그러나 이 때문에 추천에 실패하였다는 것은 듣지 못하였습니다. 그런데 지금 서지수에게만 유독 이와 같이 하니, 어찌 세도(世道)와 인심(人心)이 고금(古今)에 달라서 그런 것이 아니겠습니까?"
하니, 비답(批答)하기를,
"그대가 상소하여 진달하는 것은 경솔하게 앞지른 것이 아닌가?"
하였다.

 

임금이 대신과 제도 구관 당상(諸道句管堂上)을 인견하고 여러 신하들에게 말하기를,
"세초(歲初)에 백성들을 염려하여 특별히 인접(引接)을 명하였다."
하고, 이어서 여러 도의 일을 물었는데, 예조 판서 민응수(閔應洙)가 말하기를,
"관서(關西)에 도적이 횡행(橫行)하고 있는데, 이는 가난한 백성들이 서로 모여 도적질하는 것입니다."
하자, 행 사직 이주진(李周鎭)이 말하기를,
"이는 양서(兩西)004)  에 영장(營將)을 설치하지 않아서 관할하는 바가 없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국가에는 기강(紀綱)이 없고 조정에는 당습(黨習)이 많아 민생(民生)은 서로 잊어버리는 지경에 버려두고 있으니, 백성이 어떻게 의지하고 믿을 수 있겠는가? 양역청(良役廳)은 이름만 있고 실상이 없다. 진실로 항산(恒産)과 항심(恒心)이 있으면 비록 상을 준다 하더라도 도적질하지 않을 것이다. 기포(譏捕)하는 정치를 비록 그만둘 수 없다고 하더라도 다만 기찰(譏察)을 널리 펴서 뒤따라 체포하기를 긴급하게 한다면, 역시 말하기 어려운 염려가 있을 것이다."
하고, 이어서 관서 사람들을 거두어 임용하도록 거듭 신칙하였다. 영의정 김재로(金在魯)가 말하기를,
"영남은 본래 인재의 부고(府庫)라고 일컬어졌는데, 지금 조정에서 벼슬하는 자는 거의 없어지다시피 하였습니다. 지방의 풍속 또한 녹봉(祿俸) 구하는 것을 부끄럽게 여기므로, 과거에 급제하여 더러는 10년, 더러는 20년 만에 까닭없이 〈벼슬을〉 버리는 자가 많습니다. 무신년의 사건005)  은 일종의 그릇된 무리에 불과하며 반드시 사람마다 이와 같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또 그 바탕이 성실한 성품은 예의를 숭상하는 고장에 많이 있으니 위급할 때 힘을 얻음이 여기에 있지 않음을 어떻게 알겠습니까?"
하고, 승지 원경하(元景夏)는 말하기를,
"영남의 풍속은 상도(上道)와 하도(下道)가 각각 달라서 세상에서 간혹 명분과 의리에 죄를 얻는 것으로 책망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기사년006)  의 이동표(李東標) 같은 이는 청의(淸議)를 극력 주장하면서 상소하여 조사기(趙嗣基)의 부범(負犯)을 논핵하고, 또 오두인(吳斗寅) 등 여러 사람을 구원하였으니, 이러한 무리는 각별히 숭장(崇奬)해야 마땅합니다."
하니, 임금이 이동표의 선조가 누구이며 자손이 있는지를 하문하였다. 원경하가 말하기를,
"이동표는 곧 선정신(先正臣) 이황(李滉)의 방손(傍孫)이며, 그의 아들 이제겸(李濟兼)은 과거에 합격하여 일찍이 우관(郵官)을 지냈습니다."
하니, 임금이 이동표는 자급을 뛰어넘어 정경(正卿)으로 추증하고, 이제겸은 6품에 승진시켜 조용(調用)하도록 명하였다. 또 하교하기를,
"일찍이 정형복(鄭亨復)이 바친 선정의 서원도(書院圖)와 유거(幽居)007)  를 그려온 것을 보았는데, 지금 그의 방손(傍孫)이 침체되어 있으니 오히려 애석하게 여길 만한데, 더구나 선정의 자손이겠는가? 그를 즉시 녹용(錄用)하도록 하라."
하자, 원경하가 말하기를,
"선정의 평소 언행을 책자로 만들어 새로 간행한다고 합니다."
하니, 임금이 도신에게 간인(刊印)하여 바치도록 명하였다.

 

소대를 행하고, 《주자어류(朱子語類)》를 강(講)하였다. 임금이 글뜻으로 인하여 하교하기를,
"표(表)를 올려 아뢰는 글은 아랫사람이 윗사람에게 아첨하는 것이고, 고칙(誥勅)하는 글은 윗사람이 아랫사람에게 아첨하는 것이라고 한 것은 참으로 오늘날 깊이 반성해야 할 부분이다. 윗사람과 아랫사람이 서로 아첨한다면, 나라를 다스릴 수 있겠는가? 과문(科文)이나 표문(表文)은 오늘날의 사람이 옛날 일을 말하는 것이므로 그래도 혹 가하겠지만, 대신해서 짓는 즈음에는 더욱 마땅히 신중히 하여야 하니, 거듭 별도로 신칙함이 마땅하다."
하였다.

 

1월 7일 계유

달이 필성(畢星)을 범하였다.

 

헌부에서 전계를 다시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아니하였다.

 

1월 8일 갑술

경상 감사 정익하(鄭益河)가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밀양부(密陽府)의 상하 수백 인이 돈을 모아 계(契)를 만들고 이름을 골동(汨蕫)이라고 하면서 관장(官長)이 체임하거나 향임(鄕任)을 차출(差出)할 때에는 갖가지 계교를 교묘히 부려서 하고 싶어하는 바를 뜻대로 하고 있습니다. 부사 윤무교(尹懋敎)가 마음을 다하여 엄중히 조사해서 흉당(凶黨)을 타파하였는데, 요즈음 대간의 상소에 교자(轎子)를 탔다는 것으로 그의 관직을 파면할 것을 논하였습니다. 그러나 윤무교가 당초 한 번도 서울과 고향에 간 적이 없으며, 풍문이 사실과 어긋나니 어찌 매우 원통하지 않겠습니까? 대간의 상소는 체모가 중대하기에 감히 유임시키도록 장청(狀請)할 수는 없지만, 청컨대 안찰사(按察使)의 살피지 못한 죄를 받게 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이제 풍문이 사실과 어긋남을 알았다."
하고, 이어서 윤무교의 직임을 그대로 유임시키도록 명하였다.

 

소대를 행하였다.

 

1월 9일 을해

달이 동정성(東井星)에 들어갔다.

 

조하망(曹夏望)을 대사간으로, 신수(申𢢝)·박필간(朴弼榦)을 장령으로, 신사건(申思建)·홍계희(洪啓禧)를 교리로, 김상적(金尙迪)을 부교리로 삼았다.

 

1월 10일 병자

임금이 태묘(太廟)에 나아가 전알(展謁)하고 봉심(奉審)하기를 의식대로 하였다.

 

1월 12일 무인

김경연(金慶衍)을 장령으로, 윤양래(尹陽來)를 형조 판서로 삼았다.

 

임금이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引見)하고 특별히 관동(關東)의 방물(方物)과 물선(物膳) 및 재해를 입은 고을의 기보포(騎保布)를 가을까지 기한하여 바치는 것을 정지하도록 명하였다. 임금이 관동을 근심하여 어사 홍상한(洪象漢)을 소견(召見)하고 하문하니, 홍상한이 말하기를,
"굶주린 백성들이 칡을 캐다가 먹고 있으며, 식량이 떨어진 지 이미 오래 되었습니다."
하고, 이어서 대동미(大同米) 및 신포(身布)의 봉납(捧納)을 정지하도록 청하였다. 대신과 여러 신하들이 모두 불가하다고 하였는데, 유독 개성 유수 김약로(金若魯)만이 생령(生靈)이 소중하고 대동미는 대수롭지 않다고 아뢰니, 임금이 말하기를,
"진실로 백성들에게 이롭다면 내가 무엇을 아끼겠는가? 김약로의 말이 옳다."
하고, 이어서 신포 및 진상(進上)은 모두 바치는 것을 정지하도록 명하고, 대동미는 허락하지 아니하였다.

 

관동 어사 홍상한을 체임하고 김상적(金尙迪)을 대신하도록 명하였다. 이때 관동에서 한창 굶주린 백성들을 구제하고 있었는데, 홍상한이 어머니의 병으로 사정을 진달하면서 체임되기를 원했기 때문이었다.

 

영의정 김재로(金在魯)가 각도(各道)에 흉년이 들었다 하여 봄철의 조련(操鍊)을 정지하도록 청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좌의정 송인명(宋寅明)이 말하기를,
"수령을 가려 뽑는 것이 가장 시급한 일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수령이 명예를 바라는 것을 내가 매우 미워한다. 그리고 능리(能吏)의 피해는 탐리(貪吏)보다 심하다."
하였다. 우의정 조현명(趙顯命)이 말하기를,
"만약 상을 주거나 처벌하여 권면하거나 징계함이 없다면, 누가 기꺼이 악(惡)을 꺼리고 선(善)에 용감하겠습니까? 10고(考)와 5고(考)에서 상(上)을 차지한 자를 전조(銓曹)에서 검거(檢擧)008)  하지 않는 경우가 많으며, 전최(殿最)009)  에서 하(下)를 차지한 자와 어사나 도신이 파직하도록 논한 자를 번번이 견복(甄復)하거나 승제(陞除)하고 있으니, 상을 주고 처벌하는 것이 규칙이 없는데 어떻게 선을 권면하고 악을 징계하겠습니까? 지금부터 10고와 5고에서 상(上)을 차지한 자는 승제하고 하(下)를 차지하여 장파(狀罷)된 자는 승진을 허락하지 말도록 하여 정규(定規)를 삼게 하소서. 그리고 큰 주목(州牧)과 읍호(邑號)가 강등되어 현(縣)이 된 경우는 반드시 이력(履歷)이 상당한 자를 차출해 보내는 것을 법으로 정하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이를 옳게 여겼다. 송인명이 말하기를,
"다스리는 방도는 인재를 임용하고 버리기를 분명히 하여 옳고 그름을 결정하는 데 달려 있습니다. 인주(人主)가 작은 한 몸으로 번다한 정무(政務)를 통제하니, 뭇신하의 선악(善惡)을 모두 살필 수 없습니다. 그러니 여러 신하들 가운데 공정(公正)한 자를 가려서 가까이 모시는 반열에 배치한다면 도움이 있을 듯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공정한 자가 누구인가?"
하자, 송인명이 원경하(元景夏)라고 대답하고, 또 말하기를,
"비국 부제조에 적합합니다."
하였다. 그런데 당시 원경하가 한창 송인명에게 아부하였으므로, 김재로가 좋게 여기지 않다가, 마침내 저지하여 말하기를,
"부제조는 준망(峻望)으로 드물게 있는 관직인데 한번 이 직임을 거치면 그대로 승품(陞品)하게 됩니다. 따라서 나이가 젊고 겨우 과거에 급제한 자가 또한 갑자기 승진하는 것은 마땅하지 않습니다."
하니, 임금이 자못 그렇게 여겼다. 김재로가 말하기를,
"이성룡(李聖龍)은 선조(先朝)의 시종(侍從)으로 나이 또한 많으니, 가자(加資)하여 기사(耆社)010)  에 들어가도록 허락하심이 마땅합니다."
하니, 송인명이 말하기를,
"나이 많다고 하여 이 길을 여는 것은 아마도 뒷날의 폐단이 있을 듯합니다."
하였다. 송인명이 또 말하기를,
"이하원(李夏源)은 성품이 평온하고 조용하니, 차례를 뛰어넘어 발탁하심이 마땅합니다."
하니, 김재로가 말하기를.
"은전은 경솔하게 시행할 수 없습니다."
하였는데, 임금이 모두 허락하지 않았으니, 대체로 임금이 두 신하가 자기가 좋아하는 사람에게 아첨하는 사정(私情)이 있음을 굽어 통촉하였기 때문이었다.

 

간원(諫院)에서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아니하였다. 교리 윤득경(尹得敬)이 의관(醫官)을 추고하게 한 비망기(備忘記)의 내용이 중도에 지나친 것을 도로 거두도록 청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이보다 앞서 의관 김응삼(金應三)이 임금의 옥체가 불편한 것은 거동에 연유하였다고 말하니, 임금이 엄중히 하교하기를,
"신축년011)   이후로 이 마음이 두려워하여 그대로 괴로워하는 증세를 이룬 것이다. 조정이 화합했다면 내가 어찌 이 지경에 이르렀겠는가? 나에게는 편당(偏黨)을 제거하려는 고심(苦心)이 있으니, 바라고 원하는 것이 모두 펴진 후에야 병은 약을 쓰지 않아도 될 것이며, 수명(壽命)도 혹시 연장될 수 있을 것이다."
하고, 또 하교하기를,
"나의 심기가 불편한 것은 조정의 신하들에게 시달려서 그렇게 된 것이다."
하고, 이어서 의관을 추고하도록 명하였었다. 그래서 윤득경의 말이 이와 같았던 것이다.

 

1월 14일 경진

지진이 있었다.

 

부수찬 이천보(李天輔)가 의관을 추고한 일로 상소하여 경계를 진달하였으나, 임금이 받아들이지 아니하였다.

 

신만(申晩)을 도승지로, 송수형(宋秀衡)을 승지로, 김상적(金尙迪)을 지평으로, 이위보(李渭輔)를 정언으로 삼았다.

 

문학 이광의(李匡誼)와 사서 이하종(李夏宗)이 상소하여 숙묘(肅廟)·경묘(景廟)가 모두 7세에 서연에 나아간 고사(故事)를 인용해서 동궁(東宮)에게 개강(開講)하도록 청하였으나, 윤허하지 아니하였다.

 

임금이 관동 안집 어사(關東安集御史) 김상적(金尙迪)을 소견(召見)하고 백성을 진구(賑救)할 방도를 물으니, 김상적이 영남 연해의 곡식을 옮겨서 주도록 청하고, 또 대동미(大同米)를 바치기 어려운 상황을 말하니, 임금이 편의(便宜)한 대로 종사(從事)하도록 명하였다. 김상적이 이어서 관동에 도적이 많음을 아뢰니, 임금이 말하기를,
"백성이 용사(龍蛇)가 되는 것은 모두 왕화(王化)가 펴지지 않고 수령이 다스리지 못한 때문이다. 저들에게는 상도(常道)를 굳게 지키는 양심이 있는데, 어찌 정말로 도둑이 되고 싶겠는가? 어사가 가서 우후(虞詡)012)  와 공수(龔遂)013)  의 임무를 겸해서 그들을 교화하여 선량한 백성이 되게 힘쓰도록 하라."
하였다.

 

소대를 행하였다.

 

1월 15일 신사

전 사과 윤봉구(尹鳳九)가 상소하여 춘궁(春宮)을 보도하라는 명을 사양하고, 임금에게 마음을 확립하여 일을 절제하되, 질박하고 정직하며 성실과 신의로 자신을 가르치는 방법을 삼도록 청하니, 임금이 예사 비답을 내렸다.

 

영의정 김재로(金在魯) 등이 지진이 일어난 것으로 차자(箚子)를 올려 면직되기를 원하니, 임금이 예사 비답을 내렸다.

 

1월 16일 임오

정언 남유용(南有容)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간관(諫官)의 책임은 전적으로 시비(是非)를 다투는 것으로 직분을 삼는 것인데, 요즈음 조정에서는 전적으로 시비를 없애는 것으로 임무를 삼아 한 가지라도 시비에 관계되는 경우에는 서로 경계하여 숨기고 있으며, 입을 열어 일을 논할 적에는 오직 성상의 뜻을 헤아리고 순종하면서 죄가 없는 요행만 바라고 있으니, 진실로 이와 같다면 간관을 어디에다 쓰겠습니까? 전하께서는 특별히 조상(朝象)이 어긋나고 무너진다 하여 적절히 조절하는 술책을 힘써 행하면서 지혜를 써서 아랫사람을 제어하여 좋아하기도 하고 미워하기도 하고 있지만, 왕로(王路)가 평탄치 않아서 때에 맞추어 용납되기를 구함에 있어서 마음을 해치고 일을 해치니, 선비의 절개는 날로 무너지고 있습니다. 따라서 대각(臺閣)을 돌아보건대 벙어리 의원이 병을 간호함에 있어서 고칠 수 없는 병임을 알면서도 입으로 말할 수 없는 것과 같으니, 신은 가만히 이를 근심하고 있습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진달한 바는 마땅히 힘쓰겠다."
하였다.

 

의주 부윤(義州府尹) 김상석(金相奭)이 본부에 흉년이 든 것으로 상소하여, 가분창(加分倉)의 곡식 1만여 곡(斛)과 자성(慈城)의 구관목(句管木)을 팔아서 헤아려 처리하도록 허락하고, 전세(田稅)로 거둔 쌀은 상정례(詳定例)에 의거하여 싼값으로 팔도록 허락하여 진자(賑資)에 보충하게 할 것을 청하니, 묘당으로 하여금 품처(稟處)하게 하였다.

 

장령 김경연(金慶衍)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현재 기강(紀綱)이 무너지고 해이해져서 입을 다물고 잠자코 있는 것이 풍습을 이루고 있습니다. 안으로는 모든 관원이 직무를 게을리하고 조급하게 다투면서 시기하는 마음으로 남을 모략하기를 오히려 미치지 못할까 두려워하고 있고, 밖으로는 많은 백성들이 위급한 처지에 놓여 있는데다가 홍수·가뭄과 도적이 갈수록 더욱 심해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륜(絲綸) 가운데 지나치게 스스로 변변치 않게 여기신 전교를 내리고, 강대(講對)하는 즈음에는 드러나게 싫증을 내는 뜻이 있는데, 일은 뜻을 기다리지 않아야 하며 정치는 욕심을 따르지 않아야 하는 것입니다. 원컨대, 성상께서 유념하시어 처음부터 끝까지 신중하게 하소서. 그리고 해서(海西)에 도둑이 발생하는 근심이 자주 있는데, 도로에서 겁탈하는 경우에도 즉시 기포(譏捕)하지 않고 있습니다. 청컨대, 좌우(左右)의 포도 대장(捕盜大將)에게 신칙하고 본도의 토포사(討捕使)도 중추(重推)함이 마땅합니다. 그리고 이번에 관제(官制)를 변통한 것은 진실로 소통(疏通)시키려는 의도에서 나왔는데, 문관도 적체되었지만 무신은 더욱 심합니다. 청컨대, 묘당으로 하여금 더욱 강구(講究)하여 구처(區處)할 방도를 넓히도록 하소서. 그리고 태학에 올라가는 과시(課試)를 매번 끝 겨울에 시행하기 때문에 유생이 작게는 삼여(三餘)014)  의 공부를 포기해야 하며, 크게는 일생의 병통이 되는 매개가 되고 있습니다. 청컨대 봄·여름에 시취(試取)하는 것을 영구히 정식(定式)으로 삼게 하소서."
하니, 비국으로 하여금 품처하게 하였다.

 

1월 17일 계미

임금이 강원 감사 김상로(金尙魯)를 인견하고 본도의 진정(賑政)에서 장차 무엇을 먼저 하겠느냐고 물으니, 김상로가 아뢰기를,
"나누어 진구하는 것에도 부지런하고 게을리함이 있으니, 수령에 대한 상벌(賞罰)을 엄격히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신이 마땅히 추솔(騶率)을 간략하게 하여 직접 가서 조사하고자 하는데, 감사가 법을 마음대로 행할 수 없으니, 청컨대 먼저 떠난 다음 뒤에 아뢰도록 하겠습니다."
하니, 편의에 따라 왕래하도록 명하였다.

 

1월 18일 갑신

사간 권현(權賢)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요즈음 대각(臺閣)에 있는 자가 조금만 저촉되어 거슬리는 일이 있으면 무거울 경우에는 혹 극률(極律)로 협박하거나 혹은 천극(栫棘)으로 위협하며, 가벼울 경우에는 혹 한 해가 지나도 서용(敍用)하지 않거나 혹은 여러 해가 되어도 낙점(落點)하지 않고 있습니다. 인주(人主)의 위엄은 만구(萬句)의 뇌정(雷霆)과 같을 뿐만이 아닌데, 누가 기꺼이 중한 몸으로 위엄을 꺾어 피폐한 곳에 빠져들려고 하겠습니까?"
하고, 또 아뢰기를,
"암행 어사가 영리(營吏)를 데리고 읍저(邑底)에 출입(出入)하므로, 사람들의 말이 매우 많으니, 마땅히 신칙해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청주 목사 안종해(安宗海)는 사람됨이 거칠고 비루하며, 양근 현감(楊根縣監) 이완(李莞)은 늙고 패리(悖理)하여 일컬을 만한 것이 없으니, 모두 개차(改差)하심이 마땅하겠습니다."
하니, 그대로 따랐다.

 

임금이 소대를 행하였다. 시독관 윤득경(尹得敬)과 신사건(申思建) 등이 지진이 일어난 것으로 경계를 진달하니, 임금이 우악한 비답을 내렸다.

 

1월 19일 을유

조명리(趙明履)를 승지로, 정휘량(鄭翬良)을 교리로 삼고, 김석일(金錫一)을 발탁하여 동래 부사로 삼았다.

 

특별히 찬선 어유봉(魚有鳳)을 가선 대부(嘉善大夫)의 품계에 승진시켰으니, 시종신(侍從臣)의 아비가 나이 70이 되면 가자(加資)하는 것이 나라의 전례인 때문이었다. 그런데 어유봉이 늦겨울의 입춘(立春) 뒤에 출생하였기 때문에 비록 70세가 찼지만 전조에서 즉시 자급을 주지 않았었다. 영의정 김재로(金在魯)가 아뢰기를,
"고 상신 민진원(閔鎭遠)과 고 판서 유명홍(兪命弘)의 연갑(年甲)이 모두 이와 같았지만, 출생한 해를 따라 기사(耆社)에 들어가도록 허락하였었으니, 이는 그 전례로 증거할 만합니다."
하니, 좌의정 송인명(宋寅明)이 말하기를,
"어유봉은 선조(先祖)에서 예를 갖추어 불러들인 신하입니다. 어찌 연한(年限)을 기다릴 필요가 있겠습니까? 특별히 승진시키심이 마땅합니다."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간원 【정언 이위보(李渭輔)이다.】 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아니하였다. 또 아뢰기를,
"괴원 분관(槐院分館)015)  의 공정하지 못함이 이번보다 더 심한 적이 없었으니, 청컨대 주장하여 추천한 자를 엄중히 징계하고, 외람되게 추천된 사람을 빼 버리게 하소서."
하고, 또 아뢰기를,
"배천 군수(白川郡守) 홍응몽(洪應夢)은 해산물을 강제로 사들이고 사정(私情)에 따라 자신의 이욕만 챙겼습니다. 청컨대 파직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임금이 세 대신과 형조의 세 당상관을 인견하고 형조의 죄인 여문표(呂文杓)를 본부(本府)에 이송(移送)하여 국청(鞫廳)을 설치하도록 명하였다. 처음에 여문표가 이격(李格)의 상소로 포도청(捕盜廳)에 송치되어 엄중히 형신받았는데, 포도청에서 그의 봉서(封書)를 올리니, 임금이 열람하고 허황되게 여겨 불에 태우고 형조에 명하여 형신을 가하여 조율(照律)하게 하였었다. 이때에 이르러 형조 판서 윤양래(尹陽來), 참판 김시혁(金始㷜), 참의 홍중징(洪重徵)이 여문표의 공초한 바가 매우 흉악하고 또 끌어댄 것이 많다고 여러 대신들에게 말하자, 마침내 서로 이끌고 구대(求對)하여 말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지금은 의심이 없을 수 없으니, 의금부로 옮겨 추국하도록 하라."
하였다. 뒤에 여문표는 형장(刑杖)을 맞아 죽고 끌어댄 자들은 모두 참작해서 처결하여 섬으로 귀양보냈다.

 

우의정 조현명(趙顯命)이 판중추부사 서명균(徐命均)·유척기(兪拓基)를 후례(厚禮)로 부르도록 청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유 판중추부사는 내가 본디 큰 일을 처리하는 국량이 있음을 알았으며, 또한 그 처분이 너무 경솔했음을 뒤따라 뉘우쳤다."
하였다.

 

금평 도위(錦平都尉) 박필성(朴弼成)의 나이가 90이고, 또 그가 효묘조(孝廟朝)의 도위라 하여 의자(衣資)와 식물(食物)을 후하게 내려 주도록 명하였다.

 

소대를 행하였다. 검토관 신사건(申思建)이 요행을 바라는 과거의 폐단을 진달하고, 초시(初試)의 규례를 마련하여 대면하여 시험하는 법을 시행하도록 청하였으나, 임금이 그것의 박절함을 혐의스럽게 여겨 허락하지 아니하였다.

 

1월 21일 정해

임금이 주강을 하였다. 검토관 정휘량(鄭翬良)이 지진이 일어난 경계를 진달하고, 또 대신(大臣)과 전조(銓曹)를 감독하고 신칙하여 그들로 하여금 성실한 정사로 재변(災變)을 그치게 하는 방도를 다하게 할 것을 청하였다. 또 말하기를,
"요즈음 삼공(三公)이 몸가짐은 엄숙하고 신중하지만, 꾀하는 바는 단지 부서 기회(簿書期會)016)  뿐이고, 한 사람의 현명한 이를 진출시키거나 한 사람의 못난 이를 물러나게 하지 못하고 있으니, 대신의 책무가 어찌 이와 같을 수 있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유신은 비록 대신들이 하는 일이 없다고 말하지만 유신으로 하여금 처지를 바꾸게 하여도 또한 이와 같을 뿐이다."
하였다.

 

중묘조(中廟朝)의 명신 박상(朴祥)의 후손을 조용(調用)하도록 명하였다. 이보다 앞서 온릉(溫陵)을 복위(復位)할 때에 김정(金淨)과 박상의 후손을 녹용하라는 명이 있었는데, 박상의 후손은 아직까지 거두어 임용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이런 명이 있게 된 것이었다.

 

1월 22일 무자

주강을 행하였다.

 

고(故) 봉조하(奉朝賀) 이태좌(李台佐)에게 시호(諡號)를 추증하였다. 이태좌가 이미 죽은 뒤인데도 그의 아들이 시호를 청하지 않으니, 임금이 영(令)을 내려 시호를 내리도록 재촉하기를,
"한웅큼의 충성심으로 오염되지도 않고 편당을 만들지도 않았으니 송백(松柏)과 억센 풀처럼 불의에 굽히지 않은 사람은 이 정승이라고 말할 만하다."
하였다. 이보다 앞서 원경하(元景夏)가 임금에게 아뢰기를,
"이태좌가 임인년017)   무옥(誣獄)을 당하여 옥관(獄官)이 되지 않았고, 또 혼자서만 하례(賀禮)에 참석하지 않았습니다."
하자, 임금이 가상하게 여겨 이런 명이 있게 된 것이었다.

 

간원 【정원 이위보(李渭輔)이다.】 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아니하였다. 또 아뢰기를,
"각 관사의 관원으로 조금이라도 세력이 있는 자는 매번 윤대(輪對)할 차례를 당하면, 혹시라도 추하고 졸렬함이 드러날까 두려워하여 이를 모면하려고 청탁을 도모하고, 단지 시골의 지치고 쇠잔한 부류를 시켜 구차스럽게 수효를 채우니, 관할하는 곳의 폐단을 감히 진달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청컨대, 해조(該曹)로 하여금 다시 가다듬고 정돈을 더하도록 함으로써 차례대로 입대(入對)하여 거듭 법을 제정한 뜻을 밝히게 하소서."
하고, 또 아뢰기를,
"조급하게 권세를 다투는 풍습은 무관[武弁]이 더욱 심합니다. 별천(別薦)의 조목이 갑자기 승진하는 지름길을 크게 열어놓아 젖내나는 어린애를 갑자기 뛰어넘어 곤임(閫任)에 추천하고, 사물을 분별하지 못하는 어리석은 무리를 널리 섬안(剡案)에 두었습니다. 청컨대, 삼군문(三軍門)에 엄중히 신칙하여 무예(武藝)를 권장하는 옛날의 제도를 거듭 밝혀서 외람된 추천을 막도록 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창의문(彰義門)에 초루(哨樓)018)  를 설치하도록 명하였다. 이때 장신(將臣) 구성임(具聖任)이 장차 성문을 수개(修改)하려고 하면서 초루를 세우도록 청하였는데, 이를 그대로 따른 것이었다.

 

1월 23일 기축

주강을 행하였다.

 

유언통(兪彦通)을 승지로, 조원명(趙遠命)을 대사헌으로, 원경순(元景淳)을 정언으로, 남태제(南泰齊)를 수찬으로, 이기진(李箕鎭)을 좌참찬으로 삼았다.

 

임금이 석강에 나아갔다. 강하기를 마치자 임금이 특진관 구성임을 앞으로 나오게 하고 말하기를,
"문(文)과 무(武)는 갈래가 다르니 문과로 진출한 자는 마땅히 문예(文藝)를 숭상해야 하고 무과로 진출한 자는 마땅히 무예(武藝)를 숭상해야 하는데, 듣건대 지금의 무관[武弁]들이 오로지 활쏘기와 말타기를 익히지 않고 심지어 시가(詩歌)를 읊조리며 세월을 보내는 자가 있다고 한다. 경은 장신이니 모름지기 이 무리들을 신칙하여 무예에 전념하도록 하고, 경도 또한 여러 장신들과 모여서 회사(會射)하는 것이 좋겠다."
하고, 이어서 또 문신이 시사(詩射)를 모면하려는 습관을 신칙하였다.

 

특별히 판중추부사 유척기(兪拓基)에게 하유(下諭)하고, 이어서 사관(史官)에게 그와 함께 오도록 명하였다.

 

1월 24일 경인

장령 김경연(金慶衍)이 상소하여 패초(牌招)를 어겨 외직으로 쫓겨나 보임된 대신(臺臣) 오수채(吳遂采) 등 3인을 용서하여 돌아오게 할 것을 청하고, 또 아뢰기를,
"장단 부사(長湍府使) 조국빈(趙國彬)·인천 부사(仁川府使) 이익형(李益炯), 영평 현령(永平縣令) 윤상원(尹尙遠), 용안 현감(龍安縣監) 서명함(徐命涵), 곤양 군수(昆陽郡守) 임덕전(林德全) 등이 불법(不法)으로 백성들을 학대하여 이익을 차지하는 일을 잘하여 일삼고 있으니, 청컨대 모두 삭출(削黜)해서 백성들의 피해를 제거하소서. 그리고 장원서 별제 이중검(李重儉)은 관사에 숙직하면서 창기(娼妓)를 데리고 잤으며, 귀후서 별제 윤창후(尹昌垕)는 공문서를 위조하여 죄가 불법에 해당하니 마땅히 징계하고 면려함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청컨대, 모두 관직을 삭탈하고 도태시켜 사로(仕路)를 맑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단지 외직(外職)에 전보(轉補)했던 사람을 내직(內職)으로 옮기도록 허락하고, 그 나머지는 풍문은 죄다 믿기 어려운 것이라 하여 모두 따르지 아니하였다.

 

임금이 주강을 행하였다.

 

1월 25일 신묘

경기 감사        이익정(李益炡)이 상소하기를,
"도내의 재해를 입은 고을에 봄을 맞아 기근(饑饉)이 들었는데, 창고의 곡식이 적어서 구제할 수가 없습니다. 청컨대, 삼아문(三衙門)의 모곡(耗穀)019)                  을 가져다 구제하게 하소서."
하니, 묘당(廟堂)에서 헤아려 시행하도록 명하였다.

 

임금이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이때 함경 감사 박문수(朴文秀)가 관서(關西)의 도적이 본도의 지경으로 흘러 들어왔다는 것을 장문(狀聞)하였으므로, 임금이 여러 신하들에게 하문하였다. 좌의정 송인명(宋寅明)이 아뢰기를,
"명(明)나라 말기에 남방에 떠돌아다니는 도적이 많았는데, 제거하는 방도를 생각하지 않았다가 마침내 만연하여 도모하기 어려운 지경에 이르렀었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그렇지 않다. 이것은 임금이 덕을 잘 닦지 않았기 때문일 뿐이다."
하였다. 이때에 서북(西北) 지방에 흉년이 들어 도적이 많았는데, 단적(團賊)이란 칭호도 있는 등 여항(閭巷)에 와전된 말이 많았지만 임금이 조용히 진압시켰으므로, 마침내 아무 일이 없었다.

 

동궁(東宮)에게 서연(書筵)을 열어 《동몽선습(童蒙先習)》을 강독하도록 명하였다. 임금이 춘방(春坊)의 관원이 서연을 열도록 상소하여 청하자, 여러 대신들에게 하문하기를,
"입학(入學)하기 전에 서연을 열어야 하는가?"
하니, 대신 등이 아뢰기를,
"그전에도 입학 전에 개강(開講)하였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무슨 책을 먼저 강독하는 것이 적당한가를 묻자, 사부(師傅)가 《동몽선습》을 진강(進講)할 것을 청하니, 그대로 따랐다.

 

음관(蔭官)인 참하관(參下官)과 잡기(雜技)의 승륙(陞六)하는 법을 다시 정하였다. 천문학 교수(天文學敎授)·지리학 교수(地理學敎授)·명과학 교수(命課學敎授) 및 치종 교수(治腫敎授), 이문 학관(吏文學官), 능마아 낭청(能麽兒郞廳)은 모두 그전에 정한 대로 60개월 만에 승륙시키도록 하고, 의금부의 참하관과 도사는 재직 일수를 계산하여 승륙시키고, 익위사(翊衛司)의 참하관은 그전에 재직한 월수를 통틀어 계산하는 것을 허락하지 말도록 하고, 가인의(假引儀)는 임명된 것의 실무(實務) 관직의 여부를 논하지 말고 60개월 만에 승륙시키는 것을 법으로 정하였는데, 이조 판서        조상경(趙尙絅)의 말을 따른 것이었다.

 

간원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아니하였다.

 

소대를 행하였다.

 

송익보(宋翼輔)를 승지로, 조명겸(趙明謙)을 대사간으로, 이광식(李光湜)을 장령으로 삼았다.

 

1월 26일 임진

흰 무지개가 해를 꿰뚫었다.

 

승정원에서 무지개의 변고로 연명(聯名)하여 진계(陳啓)하고 청하기를,
"본심을 보존하여 힘써 실천하고, 기강을 펴서 법을 밝히고, 덕이 있는 이를 임명하고 재능이 있는 이를 기용하며, 수령을 가려 뽑고 언로(言路)를 열어 성실한 정치를 행함으로써 수양하고 반성하는 방법을 다하도록 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바야흐로 두려워하고 조심하는 일이 절실한 시기에 그것을 힘쓰도록 하니, 옳은 말이다. 마땅히 힘껏 반성하도록 하겠다."
하였다.

 

평안도의 유학(幼學) 최성의(崔省義) 등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본도 강변의 4군(郡)을 없애어 강계부(江界府)에 소속시킨 것이 너비와 둘레가 7백여 리가 되는데, 지세가 험준하여 지키기 쉽고 토양이 비옥하여 경작할 만합니다. 지난날에 없앴던 것은 단지 야인(野人)이 침입하여 핍박한 때문이었는데, 지금은 야인의 피해가 이미 제거되었습니다. 그런데도 땅은 그대로 황폐하게 내버려 두어 1천 리에 가까운 땅이 쑥대밭이 되어 있으니, 어찌 아깝지 않겠습니까? 숙묘조(肅廟朝)에 일찍이 다시 설치하려는 계책을 의논하고, 지나간 해에 어사 이성효(李性孝) 또한 다시 설치하도록 계청(啓請)한 것은 진실로 변강(邊疆)을 소중히 여기고 백성들에게 이로운 길을 열어주려는 뜻이었는데, 도신이 간혹 범월(犯越)하는 근심이 있을까 염려합니다. 그러나 진실로 관부(官府)로 하여금 서로 바라보면서 파수할 곳을 설치하게 한다면, 범월은 조심할 만한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여연(閭延)의 동쪽과 갑산(甲山)의 북쪽에 허항령(虛項嶺)이 있는데, 수천리의 산에 두루 산삼(山蔘)이 생산되니, 만약 4군을 이 허황령과 근접한 곳에다 설치하여 백성으로 하여금 삼(蔘)을 캐어 공물(貢物)에 충당하게 한다면, 백성들은 충실하고 번성해질 것입니다. 지난날의 성곽 규모가 아직도 완전하고, 관례(官隷)의 자손들도 그대로 살고 있으니 하루아침에 관부를 이룰 수 있을 것입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진달한 바는 마땅히 대신에게 물어서 처리하겠다."
하고, 임금이 그 소장을 가지고 대신에게 물으니, 좌의정 송인명(宋寅明)이 말하기를,
"4군(郡)을 다시 설치하는 의논은 중고(中古)에 명신(名臣) 가운데 말하는 이가 많았지만 지역이 피국(彼國)과 경계가 맞닿아 있으니 경솔하게 허락하기는 어렵습니다.
하고, 우의정 조현명(趙顯命)은 말하기를,
"7백 리의 비옥한 들판이 공연히 버려져 있어 아깝게 여길 만하기 때문에 고 상신 남구만(南九萬)이 일찍이 다시 설치해야 한다고 의논했었는데, 고 상신 유상운(柳尙運)은 이를 어렵게 어겼습니다. 신의 뜻은 남구만과 같습니다마는, 시의(時議)가 어렵게 여기고 있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오래된 일을 다시 창설하기는 어렵다."
하자, 마침내 정지되었다.

 

옥당에서도 무지개의 변고로 연명(聯名)하여 차자를 올리기를,
"전하께서는 뭇 신하들의 진실과 거짓, 그리고 시정(時政)의 득실(得失)에 대하여 일이 이르지도 않았는데 미리 헤아리는 경우가 있으며, 상태가 발생하지도 않았는데 앞질러 의심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리고 혼자만의 견해를 분명하게 여기는 것은 자기 생각대로 하는 데 가깝고, 강경하게 결정하는 뜻은 아주 공정하게 하는 데 방해가 됩니다. 그래서 아랫사람이 윗사람을 섬기는 데에도 스스로 그 마음을 다할 수 없어서 상하 사이의 정지(情志)가 막히기에 이르고, 모든 말과 행동하는 바가 거의 성실한 뜻이 없게 되었으니, 이것이 어찌 《역경(易經)》에 이른바 천지가 조화를 이루어 만물이 편안하게 되는 뜻이겠습니까 전하께서 많은 신하들의 말에 대하여 말의 시비(是非)나 일의 곡직(曲直)을 논하지 않고 번번이 시상(時象)으로 의심을 합니다. 그래서 어떤 일이 엎치락뒤치락하다가 간혹 비상(非常)한 과실을 이루기도 하며, 어떤 말이 성심을 촉범(觸犯)하면 거의 헤아릴 수 없는 중률(重律)에 빠뜨리기도 합니다. 이 때문에 대각(臺閣)의 신하는 지기(志氣)가 꺾이고 저지되어 지키는 절개가 없어지거나 수그러져 앞뒤를 돌아 보는데, 좌우(左右)로 견제받아 그들이 논계(論啓)하는 것은 쓸쓸한 음관(蔭官)이나 쇠잔한 무관(武官)의 사면에 거리낌이 없는 일을 간신히 찾아 책임을 모면하는 데 불과할 뿐입니다. 그리고 일이 대관(大官)에 관계되는 데 이르러서는 감히 한마디 말도 내지 못하니, 아! 지금의 대관이 어찌 모두 논할 만한 일이 없겠습니까? 이는 전하께서 그렇게 되도록 하지 않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대저 언로(言路)와 시상(時象)은 멀리 떨어져 같지 않은 것입니다. 만약 시상이 안정되지 않음으로 인하여 언로까지 함께 폐지한다면 목이 메이는 것 때문에 음식을 먹지 않는 것과 거의 가깝지 않겠습니까? 전하께서 마음을 단단히 하며 다스려지기를 도모한 지 이제 17년이 되었습니다만 고식적인 정사와 인순(因循)하는 행정으로 한때를 견제하고 보충하는 계책을 삼은 데 불과합니다. 그러므로 아래에 있는 자들은 직무를 게을리하면서 구차스럽게 세월을 허송하고, 묘당의 여러 신하들은 부서 기회(簿書期會)를 중요한 임무로 삼아 녹봉과 지위를 보전하는 것으로써 계책을 얻은 것으로 여기고 있습니다. 따라서 일찍이 한 마디 말을 하거나 한 가지 대책을 세워 전하의 다스림을 보필하지 못하고 단지 인척(姻戚)의 안면(顔面)과 족당(族黨)의 정호(情好)를 위하여 내외의 권력있는 관원에게 청탁을 꾀하지 않음이 없습니다. 한 벼슬자리가 나올 경우에 대신의 편지가 아니면 반드시 중재(重宰)의 긴절한 청탁이 있으니, 전조의 공도(公道)가 사정(私情)을 이기지 못하여 용사(用捨)가 진실되지 못합니다. 그러나 도리어 어떻게 치우치게 책망할 수 있겠습니까? 전하께서는 그 폐단을 극력 구명하시고 대단한 기세로 분발하기를 먼저 스스로 성궁(聖躬)께서 시작하시고, 이어서 신료를 경계하고 면려하도록 하소서."
하니, 임금이 예사 비답을 내렸다.

 

수찬 민백행(閔百行)이 상소하기를,
"천재(天災)가 거듭 이르고 시우(時憂)가 마음에 거리끼니, 바로 군신 상하가 크게 경동(警動)하고 크게 진작(振作)하여 서로 힘써야 마땅합니다. 그러나 전하께서 한 번이라도 분명한 전지를 내려 조심하고 두려워함을 보인 적이 있었음을 듣지 못하였고, 삼사(三司)에서는 한 가지 충성스런 말을 올려 〈천재가〉 없어지거나 그치게 한 성과가 있었음을 듣지 못하였습니다. 만약 천재를 두려워할 것이 없다고 여긴다면 그만이겠지만, 조금이나마 서로 대응해야 한다고 여긴다면, 이와 같이 직무를 게을리하고서 장차 어떻게 성실한 덕을 닦아 하늘의 견책에 답하겠습니까? 위에서 구언(求言)하거나 아래에서 진계(進戒)하면서 진실로 성실이 없으면 비록 형식적임을 면하지 못할 것이나, 서로 가다듬고 경계하면 오히려 삭양(朔羊)020)  도 볼 만한 것이 있을 것인데, 지금은 형식도 아울러 지연하고 있으니, 전하의 정성은 간절하지 않은 것이 아닌데 아래에서 대양(對揚)하지 못하는 것입니까, 아니면 여러 신하들이 비록 충성을 다하려고 하지만 성상께서 채택하여 시행하는 바가 없어서입니까?"
하니, 임금이 예사 비답을 내렸다.

 

대사간 조명겸(趙明謙)이 무지개의 변고로써 상소하기를,
"조정을 바로잡고 백성의 고통을 돌보는 것이 먼저 서둘러야 할 일입니다. 군신 상하가 이것을 강구하여 반드시 실질적인 성과를 얻는다면 진실로 천심(天心)을 감동시킬 수 있을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예사 비답을 내렸다.

 

임금이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고, 마침내 자신을 책망하는 전교를 내리기를,
"소자(小子)의 부덕(否德)으로 외람되게 어려운 시기에 〈왕위를〉 계승하여 정성은 하늘을 감동시킬 수 없고, 덕(德)은 나라를 통치할 수가 없고, 은혜는 백성에게 미치지 못하고, 명령은 조정의 신하들에게 행해지지 않고 있다. 이 가운데 한 가지만 있어도 오히려 두렵게 여겨야 하는데 더구나 겸해서 둔 것이겠는가? 아! 당습(黨習)을 외면(外面)으로 관찰하면 엉기어 모인 듯하지만, 거듭 이면(裏面)을 구명해 보면 옛날 그대로 얼음과 숯 같으니, 이것은 내가 몸소 가르치지 못한 과실이다. 옛말에 이르기를, ‘그 형체를 보지 못하면 그 그림자를 살펴보기 바란다.’고 하였다. 그전 병자년021)  에 무지개가 해를 꿰뚫은 변고를 그려서 궁중(宮中)에 두셨으니, 선왕께서 경계를 전하신 뜻이 매우 절실하였다. 그런데도 지금 단지 7세의 원량(元良)022)  이 있는데, 문관·무관이 편당을 짓는 것은 또한 유독 무슨 마음인가? 나의 고심이 거의 하늘에 이르렀다."
하고, 마침내 10일 동안 감선(減膳)하도록 명하였다. 다시 여러 신하들에게 말하기를,
"인애(仁愛)하신 저 하늘을 정성이 아니면 어떻게 감동시킬 수 있겠는가? 내가 빠뜨린 것과 조정 신하들의 과실을 경 등은 모두 말하라."
하니, 여러 대신들이 모두 책임을 지고 면직(免職)되기를 원하였다. 좌의정 송인명(宋寅明)이 말하기를,
"신 등이 무지개의 변고를 가지고 차자(箚子)를 진달하려고 하였지만, 아마도 형식에 가까운 듯하여 또한 하지 않았습니다."
하고 또 말하기를,
"붕당(朋黨)을 깨뜨리려고 하신다면 이쪽 저쪽과 귀(貴)하고 천(賤)함을 논하지 말고 전하께서 점차로 주장(主張)하심이 마땅합니다."
하였는데, 임금이 묻기를,
"주장이란 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하자, 송인명이 말하기를,
"주장이란 바로 특지(特旨)로 제수하는 것을 말합니다. 만약 한결같이 전관에게 맡긴다면 간혹 사사로운 뜻을 따를 것이니, 어찌 엄준(嚴峻)한 의논이 되지 않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어떻게 내가 번번이 제수할 수 있겠는가? 총재(冢宰)023)  에게 위임하는 것만 못하다."
하였다. 그 뒤에 이조 판서 조상경(趙尙絅)이 송인명이 아뢴 것으로 인하여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대신이 전조에서 사사로운 뜻으로 사람을 임용한다고 논하면서 심지어 성상께서 주장하여 임명하도록 청하였으니, 신을 죄주라는 말이 아님이 없습니다."
하고, 이어서 사직하였으나, 비답을 내려 허락하지 아니하였다.

 

특별히 김유(金濰)·김시위(金始煒) 등을 의직(擬職)하도록 명하였다. 처음에 김유·김시위 등이 숙빈(淑嬪)의 묘우(廟宇)에 관한 일을 말한 것으로 〈임금의〉 뜻을 거슬려 멀리 귀양갔다가 풀려났으나, 임금의 뜻이 아직도 풀리지 않았으므로, 전조에서 감히 주의(注擬)하지 못했었다. 이때에 이르러 여러 신하들이 언로(言路)가 영영 막힌다는 것으로 말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김유와 김시위의 지난날의 상소는 매우 그른 것이었다. 실제로 명예를 좋아한데서 나왔으나, 이렇게 천재(天災)를 만나 언로를 열어야 하는 때를 당하여 옹치(雍齒)를 봉(封)한 뜻024)  으로 먼저 관직에 임명함이 적당하다."
하고, 이 명이 있었다.

 

우윤 정우량(鄭羽良)이 임금에게 아뢰기를,
"명(明)나라 장거정(張居正)도 상소하여 청한 적이 있었습니다만, 지금도 이에 의거하여 무릇 팔도의 벼슬아치 명부에 오른 자는 문관(文官)·음관(蔭官)·무관(武官)을 논하지 말고 모두 그 이름을 기록하되, 이름 아래에 어느 고을 사람이라고 써서 한 권의 첩자(帖子)를 만들어, 어좌(御座)의 오른쪽에 비치해 두고, 그들의 유능하고 무능한 것을 대신에게 물어서 그 용사(用捨)를 전조에 징험한다면 거의 엄체(淹滯)된 것을 진작시키고 재능이 있는 이를 거두어들일 수 있는 희망이 있을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1월 28일 갑오

홍계유(洪啓裕)를 부응교로, 윤득징(尹得徵)을 사간으로, 김유(金濰)를 장령으로, 김시위(金始煒)를 지평으로 삼았다.

 

1월 29일 을미

전 지평 이재형(李載亨)이 졸(卒)하였다. 이재형은 경성(鏡城) 사람이다. 문간공(文簡公) 김창협(金昌協)의 문하(門下)에서 수업(受業)하였으며, 여러 번 임금의 부름을 받았지만 끝내 나아가지 않았다. 부모(父母)를 섬김에 효성을 다하였으며, 성리학(性理學)을 북방 사람들에게 가르쳐 성취한 이가 많았다고 한다.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