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영조실록53권, 영조 17년 1741년 2월

싸라리리 2025. 9. 25. 09: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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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1일 병신

송징래(宋徵來)를 통제사로 삼았다.

 

2월 3일 무술

어떤 별이 오거성(五車星) 아래로 지나갔다.

 

임금이 도목정(都目政)025)  을 직접 행하여 이틀 만에 마쳤다. 이조 판서 조상경(趙尙絅)과 병조 판서 정석오(鄭錫五)가 정청(政廳)에 나아가 장차 정사를 행하려 하는데, 이조 좌랑 민통수(閔通洙)·서명신(徐命臣)이 정세(情勢)를 끌어대고 들어가지 않았으므로 날이 저물어서도 정사를 집행할 수가 없었다. 초기(草記)를 재촉 한 것이 세 차례에 이르렀으므로, 임금이 마침내 직접 정사를 집행할 것을 명하였으며, 서둘러 민통수 등을 나가게 하고, 하교하기를,
"낭관(郞官)은 의당 하교를 따라야 한다."
하고, 또 동전(東銓)에 신칙하여 수신(守臣)과 재신(宰臣)을 별도로 가려 뽑도록 하기를,
"능리(能吏)의 폐단이 탐리(貪吏)보다 심하다. 이현필(李顯弼)이 포계(褒啓)에 들었으니 이는 능리의 으뜸인 자인데 이현필을 지워 버리게 한 것은 능리의 폐단을 징계한 것이다. 그러니 반드시 순진하고 선량한 관리를 뽑는 것이 옳다."
하고, 우수채(吳遂采)를 응교로, 김상적(金尙迪)을 수찬으로, 조경(趙擎)을 지평으로, 이철보(李喆輔)를 승지로, 정우량(鄭羽良)을 부제학으로, 송수형(宋秀衡)을 황해도 관찰사로 삼았다.

 

2월 5일 경자

정언 이위보(李渭輔)가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이제겸(李濟兼)은 무신년의 난리 초기에 율봉 찰방(栗峰察訪)이 되어 역마(驛馬)를 조발(調發)하여 이인좌(李麟佐)와 정희량(鄭希亮)에게 내주었고, 심지어 역적으로 하여금 흉악한 관문(關文)을 가지고 동서로 번갈아 달리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는 도망하여 그의 집으로 돌아갔다가 일이 발각되자, 강백(姜栢)과 함께 충군(充軍)되었었는데, 사면(赦免)을 만나 석방되어 돌아왔습니다. 이격(李格)도 또한 난리 초기에 고산 찰방(高山察訪)이 되어 두 필의 큰 말을 역적 유호(柳灝)에게 지급하여 하루 사이에 4일 동안 가야 할 길을 왕복하게 하고, 박창제(朴昌悌)를 시켜 군사를 모으게 하는 등 북로(北路)를 놀라게 하고 소란하게 한 것은 이격이 실제로 수창(首唱)했던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나문(拿問)하여 핵실(覈實)하지 않은 채 이 일로 인하여 석방하였습니다. 그 죄상(罪狀)이 낭자하여 숨기기 어려운데, 전조에서 대간(臺諫)으로 의망(擬望)하였으니, 극도로 무엄(無嚴)합니다. 그러나 그는 죄를 가리고 숨기면서 오히려 대신(臺臣)으로 자처(自處)하고 있습니다. 이 두 사람은 지은 죄가 이와 같이 지극히 무거운데, 한편으로는 출륙(出六)하도록 허락하고 한편으로는 대간의 직함에 흠을 남겨서 형벌과 포상이 정당함에 어긋났으므로, 진신(搢紳)들이 우려하고 분개하게 여기고 있습니다. 그들이 죽을 때까지 사적(仕籍)에서 삭제해야 마땅합니다."
하고, 또 말하기를,
"며칠 전에 몇 사람의 대신(臺臣)이 상소하여 입계(入啓)한 지 여러 날이 되었는데, 반드시 대신이 입시(入侍)하기를 기다렸다가 상의하여 비답을 내리게 되니, 대각(臺閣)은 기운이 없고 대신은 권한이 무거운 편입니다."
하니, 임금이 비답을 내려 엄중히 책망하였다.

 

임금이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좌의정 송인명(宋寅明)이 대정일(大政日)에 전조의 낭청이 의리를 끌어대어 출사하지 않은 것은 체통에 관계가 있다 하여 나처(拿處)하기를 청하니, 임금이 그대로 윤허하였다.

 

이때 한림(翰林)의 추천이 막 실패하여 사관(史官)으로 적당한 사람이 없게 되었다. 영의정 김재로(金在魯)가 김상복(金相福)의 관직을 삭탈하고 별겸춘추(別兼春秋)를 차출하여 완전하게 고쳐 새로 추천하도록 청하니, 그대로 허락하였다.

 

포교(捕校)로 도적을 염탐하는 자가 양민(良民)을 침해하여 괴롭히다가 일이 발각되었는데, 죄가 사형에 해당되었다. 여러 신하들이 모두 효시(梟示)하여 위엄을 보이려고 하였는데, 우의정 조현명(趙顯命)이 더욱 힘껏 말하였으나, 임금이 다시 조사하도록 명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이중태(李重泰)가 풍덕(豐德)의 수령으로 소를 잡아 음식을 차려 놓고 재상(宰相)에게 아첨하면서 군교(郡校)가 멋대로 행동하여 사람을 죽였는데도 염려할 줄 모르니, 이런 수령을 장차 어디다 쓰겠는가? 그러나 이미 효시하지 않았다가 이제야 한 사람의 장교(將校)를 효시한다면 형법이 어찌 전도되지 않겠는가? 대신(大臣)이 탐리(貪吏)를 효시하도록 청하지 아니하고 한 장교를 효시하려고 하니, 어찌 무른 땅에 말뚝을 박는 격에 가깝지 않겠는가?"
하자, 좌의정 송인명(宋寅明)이 조정에 유연(柔軟)한 신하가 많고 지조가 굳어서 사욕을 억제하여 일을 하는 자가 없는 것이 근심된다고 말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제갈양(諸葛亮)이 촉(蜀)나라를 다스리면서 엄중함을 숭상하였는데, 그것 또한 신불해(申不害)와 한비자(韓非子)의 학설이다. 촉나라를 다스리는 경우에는 진실로 그렇게 해야 되겠지만 오늘날의 조정에서 또 어떻게 사람에게 난폭한 형정(刑政)을 쓰겠는가? 경은 다시 말하지 말고 법을 준수하는 자를 기용하는 것이 타당할 뿐이다."
하자, 송인명이 또 말하기를,
"대정(大政) 때에 십고 십상(十考十上)인 자를 단지 3인만 기용했는데, 복직(復職)된 자가 10인이었습니다. 초사(初仕)도 사람을 가려 뽑지 않았으니, 신칙한 하교를 우러러 받들고 공도(公道)를 넓혀서 인재를 기용한 뜻이 아닙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말이 박절(迫切)한 듯하지만, 없으면 더욱 면려해야 할 것이니 양전(兩銓)의 관리들을 모두 추문하도록 하라."
하였다.

 

양양(襄陽)의 문관 최규태(崔逵泰)가 청옥규(靑玉圭)026)  를 우의정 조현명(趙顯命)에게 보내며 말하기를,
"이것은 바로 은(殷)나라의 제도이며 주(周)나라의 제도가 아닙니다. 반드시 이것은 기자(箕子)의 구물(舊物)인데, 임진란(壬辰亂) 때 강릉(江陵)에서 머물며 진(陣)을 쳤던 곳에서 얻었습니다."
하였으므로, 조현명이 그 말을 아뢰니 임금이 취하여 보고 기이하게 여겼다. 길이는 5촌(寸)쯤 되고 빛깔은 청흑색(靑黑色)이었는데, 승정원(承政院)에 보관하도록 명하였다. 뒤에 강연(講筵)에서 최규태가 바친 청옥규의 제도를 승지 조명리(趙明履)에게 하문하니, 조명리가 대답하기를,
"그것이 기자의 규(圭)라는 것은 알 수 없습니다. 규제(圭制)는 《서전(書傳)》과 《주례(周禮)》에 보이는데 대체로 환규(桓圭)는 길이가 9촌이고, 신규(信圭)와 궁규(躬圭)는 길이가 7촌이고, 그 너비는 모두 3촌이며 두께는 모두 반 촌이고 윗 부분은 좌우(左右)로 깎은 것이 모두 반촌이라고 하였습니다. 지금 옛날 그림의 예기척(禮器尺) 및 호조 예기척(戶曹禮器尺)으로 그 규를 재어 보니, 길이는 과연 7촌이고 너비는 2촌에 차지 않았으며, 두께와 깎은 부분은 모두 옛날의 제도와 조금 달랐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나도 역시 동방 어느 국가의 규이고, 반드시 정말 기자의 규는 아닐 것이라고 여겼다. 상방(尙方)027)  으로 하여금 옛날 제도에 의거하여 청옥(靑玉)으로 제후규(諸侯圭) 및 세자규(世子圭)를 만들되, 자는 주척(周尺)을 사용하여 길이는 9촌, 너비는 3촌, 두께는 5푼[分], 빛깔은 푸르게 하도록 하라."
하였는데, 대체로 명나라 성제(成帝)가 내려준 규제(圭制)를 모방한 것이었다.

 

고(故) 징사(徵士) 성수종(成守琮)에게 관직을 추증하도록 명하였다. 영의정 김재로(金在魯)가 아뢰기를,
"성수종(成守琮)은 뜻이 높고 행실이 깨끗하여 기묘 사화(己卯士禍)가 일어나던 해에 과거에 합격하였는데, 남곤(南袞)의 무리가 문리(文理)가 서로 이어지지 않는다고 핑계대어 삭제해 버렸습니다. 그 뒤에 비록 복과(復科)시키도록 명하였지만, 성수종이 이미 죽었기 때문에 직명(職名)이 없었습니다. 과거에 합격하고서도 관직을 제수받지 않고 죽은 자에게는 모두 관직을 내려준 전례가 있는데, 더구나 성수종 같은 사람이겠습니까? 마땅히 포장(褒奬)하여 추종하는 전례(典禮)를 베풀어야 할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그대로 허락하였다. 그리고 또 선정신 박세채(朴世采)의 자손을 녹용하도록 명하였다.

 

간원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아니하였다.

 

2월 8일 계묘

달이 정성(井星)으로 들어갔다.

 

윤경용(尹敬龍)을 승지로 삼았다.

 

임금이 주강과 석강을 행하였다.

 

임금이 유수원(柳壽垣)을 소견하였다. 유수원은 유봉휘(柳鳳輝)의 조카로서 폐고(廢錮)된 지 이미 오래 되었으나, 우의정 조현명(趙顯命)이 그의 재주와 학문이 기용할 만하다고 추천하였으므로, 임금이 입시(入侍)하도록 명한 것이었다. 유수원이 마침내 상소하여 그가 지은 관제 서승도설(官制序陞圖說)을 바쳤는데, 임금이 불러서 그 법을 묻자, 유수원이 대답하기를,
"명나라의 관제는 주(周)나라 관제의 정밀한 의의를 가장 잘 터득한 것이었으니, 오늘날에 시행하면 틀림없이 성과가 있을 것입니다. 세상에서 간혹 명나라 조정에서도 당론(黨論)이 있었다고 말하지만, 신은 명나라 조정에는 본래 편당이 없어서 2백 70년 동안 끝내 당론이 멋대로 행해져 어지럽힌 폐단은 없었고 기강(紀綱)도 아주 엄격하였다고 생각합니다. 청(淸)나라 사람이 비록 이적(夷狄)이라 하나, 전적으로 명나라 제도를 적용했으므로 나라를 세운 지 1백 년이 되도록 편당의 폐단이 없었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서승(序陞)의 제도는 인재를 침체되지 않게 할 수 있겠는가?"
하자, 유수원이 귀가 먹어 대답을 하지 못하므로 주서(注書)에게 써서 보여 주도록 명하고, 말하기를,
"동자(董子)와 가생(賈生)028)  같은 인재는 어떻게 조처하겠는가?"
하였는데, 유수원이 말하기를,
"동자와 가생 같은 현인(賢人)은 세상에 많지 않습니다. 비록 간혹 있다고 하더라도 서승법(序陞法)으로 한다면, 정자(正字)가 된 지 3년 만에 수찬(修撰)으로 승진하고, 점차 차례대로 승진하여 15년 만에 당상관인 부제학에 승진하고, 27년 만에 정2품에 승진될 것입니다. 비록 동자와 가생의 현명함이 있다 하더라도 이 관제를 적용하면 역시 침체되었다고 여기지는 못할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만약 이와 같이 한다면 승진하기가 쉬운 방도이기는 하지만 어찌 침체되는 폐단이 없겠는가?"
하였다. 또 글로 써서 보이도록 명하기를,
"정자(正字)를 선발할 때와 세 차례 고과(考課)하여 서승(序陞)할 때에 사정(私情)이 없을 수 있겠는가? 기강이 없으면 법을 따라서 폐단이 생기게 된다."
하였는데, 유수원이 아뢰기를,
"명(明)나라의 전시법(殿試法)에 황제가 직접 거자(擧子)를 시험하였는데, 그 제도가 극도로 엄격하고 주밀하였습니다. 또 정자(正字)를 고선(考選)할 때에도 황제가 직접 과거 시험의 문제를 내었습니다. 전하(殿下)께서도 이 제도에 의거하여 정자를 선발하신다면 어찌 사정이 행해질 근심이 있겠습니까?"
하자, 임금이 말하기를,
"무관(武官)과 음관(蔭官)의 제도는 어떻게 하겠는가?"
하니, 유수원이 말하기를,
"오늘날의 무과(武科)는 그 수효가 몇천만인지 알지 못하니, 전신(銓臣)이 아무리 공도(公道)를 넓히려 하더라도 어떻게 모두 미칠 수 있겠습니까? 지금 만약 글 잘하는 이를 시켜서 강(講)하게 하고 활 잘 쏘는 이를 시켜서 쏘게 하여 이것으로 고선(考選)하며, 내삼청(內三廳) 및 군문 장관(軍門將官)의 소속에 나누어 차임(差任)하되, 중앙과 지방에서 거관(居官)한 것을 관찰하여 고적법(考績法)으로써 서승(序陞)한다면, 비록 곤수(閫帥)에 이르러서도 반드시 적당한 사람을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음관 또한 어찌 고적하고 승서하는 데에서 벗어날 수 있겠습니까?"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마음에 품은 것을 반드시 진달하니 비록 자상하게 여길 만하나, 나는 폐단을 구제하는 것은 기강을 세우고 공도(公道)를 따르는 데 달려 있다고 여기니, 아무리 훌륭한 법과 아름다운 제도가 있다고 하더라도 이와 같이 하지 않고서 행할 수 있겠는가?"
하자, 유수원이 말하기를,
"전하께서는 매번 기강 세우는 것을 급선무로 삼으시는데, 신의 생각에는 기강은 위엄이나 형벌로 세워질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여겨집니다. 기강을 세우고 공도를 넓히는 요령은 실로 서승법(序陞法) 가운데 있습니다. 우리 나라에서 옥당(玉堂)으로 말한다면 오늘 파면시켰다가 내일이면 서용하고 있습니다. 시종(侍從)은 여러 관원의 본보기가 되지만 전혀 근신하며 힘쓰지 않는데 기강이 어디를 따라 세워지겠습니까? 만약 서승하게 한다면 정자가 된 지 3년 만에 수찬으로 승진하고 수찬이 된 지 3년 만에 교리로 승진하며, 교리가 된 지 3년 만에 응교로 승진함으로써 자못 참봉(參奉)·봉사(奉事)가 서승하는 제도와 같게 한다면, 어떻게 패초(牌招)하여도 나아가지 않는 자가 있겠습니까? 서승하는 법이 옛날부터 이와 같았던 것은 대체로 근신하며 힘써 공무를 집행하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요(堯)임금과 순(舜)임금이 사람을 기용할 적에는 반드시 낱낱이 시험해 보고서 기용하였기 때문에 삼고(三考)와 구재(九載)에 출척(黜陟)하는 제도가 있게 된 까닭입니다."
하니, 임금이 칭찬하고 말하기를,
"이 말은 옳으며 이 그림 또한 좋다. 만약 이 법과 같이 한다면 근래의 명관(名官)이 반드시 수령이 되기를 원하지 않을 것이다."
하고, 이어서 말하기를,
"대신과 더불어 묘당에서 계책을 상의한다면 반드시 도움이 많을 것이다."
하고, 비국 낭관으로 임명하도록 명하였다.

 

2월 9일 갑진

임금이 주강에 나아가 《춘추집전(春秋集傳)》을 강(講)하였다. 강하기를 마치자, 임금이 지경연사        이덕수(李德壽)에게 말하기를,
"경은 유수원(柳壽垣)의 관제 서승도(官制序陞圖)를 보았는가? 이것이 붕당(朋黨)을 제거하는 데 한 가지 도움이 될 수 있겠는가?"
하자, 이덕수가 대답하기를,
"명나라 조정의 관제를 비록 상세히 알지는 못하지만, 붕당을 제거하는 데 이르러서는 아마도 쉽지 않을 듯합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명나라에서는 붕당이 없었다고 하는데 그러한가?"
하자, 이덕수가 말하기를,
"어찌 붕당이 없었겠습니까? 동림당(東林黨)029)                   또한 붕당으로서 큰 것이었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비록 유수원의 말을 즉시 채용하지는 않았으나 전조 낭관(銓曹郞官)과 한림추천(翰林推薦)에 이미 경장(更張)할 뜻이 있었다.

 

석강을 행하였다.

 

2월 11일 병오

임금이 영희전(永禧殿)에 나아가 작헌례(酌獻禮)를 의식대로 행하였다. 의식을 마치고 전에 올라가 봉심(奉審)하고, 또 전조(殿竈) 및 제정(祭井)을 직접 살펴보고 준여(餕餘)를 근시하는 여러 신하들에게 내려 주고 저녁에 궁궐로 돌아왔다.

 

2월 14일 기유

남태혁(南泰赫)을 지평으로, 어석윤(魚錫胤)을 정언으로, 한현모(韓顯謨)·홍봉조(洪鳳祚)를 승지로, 이병상(李秉常)을 공조 판서로 삼았다.

 

제주(濟州)의 백성 21명이 바다에서 표류(漂流)하여 유구국(琉球國)에 도착하여 1년 동안 머물다가, 다시 복건성(福建省)으로 옮겨가서 또 1년 동안 머물다가 4년만에 비로소 되돌아왔는데, 한 사람만이 죽었다. 임금이 듣고서 측은하게 여겨 휼전(恤典)을 내리도록 명하고, 살아서 돌아온 자에게는 의복과 식량을 지급하게 하였다.

 

이보다 앞서 임금이 영희전(永禧殿)에 나아갔을 때에 동반과 서반이 말 머리를 나란히 하여 갔는데, 밀창군(密昌君) 이직(李樴)이 우의정 조현명(趙顯命)과 반수(班首)가 되었었다. 그런데 의정부의 관속이 종신(宗臣)은 대신과 말 머리를 나란히 할 수 없다고 하자, 밀창군이 길에서 노하여 말이 대신을 침해하였다. 이에 조현명이 노하여 조정을 욕(辱)하는 것이라고 여겨 차자를 올려 말하자, 직(樴) 또한 상소하여 스스로 변명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왕자 대군(王子大君)은 품계가 없으니 대신에 비교하면 사체(事體)가 더욱 높은데, 대신이 어떻게 구속할 수 있겠는가? 이는 종신이 영체(零替)한 소치이다."
하고, 매우 미안(未安)한 뜻을 보였는데, 영의정 김재로(金在魯)가 이를 위하여 말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밀창군(密昌君)의 이번 일은 반드시 의정부의 하례(下隷)가 꾸짖어 금지한 것으로 인하여 발생한 것이다. 내가 잠저(潛邸)에 있었을 적에 길에서 영중추부사 이유(李濡)를 만났었는데, 이유가 바라보고 즉시 교자(轎子)를 멈추었으며, 나는 본래 근신하였기 때문에 길을 양보하고 갔었다. 그리고 또 일찍이 시위(侍衛)하는 반열에서 윤용(尹容)의 아비 윤지인(尹趾仁)이 본병(本兵)으로 앞 자리에 있으려고 한 때문에 나는 또한 그것을 겨루지 않았었다. 그런데 요즈음에 와서 종영(宗英)이 점차 쇠퇴해지고 조정의 기강이 해이해져서 그렇게 된 것이다."
하였다. 김재로가 또 길에서 말로 침해한 잘못을 말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밀창군도 객기를 부렸음을 면하지 못한다."
하고, 추고(推考)하도록 명하였다.

 

외방에 계성사(啓聖祠)를 영건하도록 한 명을 도로 정지하였는데, 얼마 있다가 그전처럼 영건하도록 명하였다. 이보다 앞서 유신(儒臣)이 외방에 계성사를 국학(國學)030)  의 예와 같이 영건하도록 청하자, 임금이 그대로 따랐었는데, 이때에 이르러 영의정 김재로(金在魯)가 아뢰기를,
"국학에서는 성인(聖人)을 정전(正殿)에서 숭봉(崇奉)하고 있는데, 세 성인(聖人)의 아버지를 동무(東廡)와 서무(西廡)에 배열하는 것은 위에서 누르는 것으로 미안(未安)하다 하여 특별히 계성사를 설립하도록 하였습니다. 그런데 외방에서는 서울과 달라서 성무(聖廡)에 향사(享祀)하는 것은 송(宋)나라 조정 및 우리 나라의 명현(名賢)에 불과할 따름이니, 이미 위에서 누르는 혐의가 없으므로 다시 계성사를 설립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니, 임금이 마침내 그 명을 정지하였다. 조금 있다가 김재로가 또 아뢰기를,
"예조에 물었더니, 지방의 계성사는 큰 조목이 있어 주·부(州府)의 큰 고을에서는 70제자 및 한(漢)·당(唐)·송(宋)의 여러 현인(賢人)을 모두 무향(廡享)한다고 하였습니다. 당초에 대신에게 의논하여 품정(稟定)할 때에 신이 상세히 알지 못하였으니, 지금 도로 정지할 수는 없습니다."
하니, 임금이 이를 옳게 여겼다.

 

주강과 석강을 행하였다.

 

2월 15일 경술

상참(常參)을 행하였다.

 

수안군(遂安郡)에 구리가 산출되는데 산의 둘레는 40리였다. 지부(地部)의 낭관을 파견하여 경계를 정하여 봉표(封標)하되, 점(店)을 설치하지 말고 임시로 채취하여 쓰게 하였다.

 

헌부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아니하였다.

 

임금이 주강에 나갔다. 문신 30세 이상에게 한어(漢語)를 강하게 하고, 40세 이하에게 이문(吏文)을 강하도록 명하였으니, 대체로 구전(舊典)을 다듬고 밝히려고 한 것이었다.

 

좌의정 송인명(宋寅明)이 고 참판 김유(金楺)·오원(吳瑗)을 고례에 의거하여 증시(贈諡)할 것을 청하였는데, 문형(文衡)031)  을 거쳤기 때문에 임금이 이를 허락하였다. 국조(國朝)의 시법(諡法)에 벼슬이 정2품에 이르러야만 비로소 시호가 있었다. 그런데 문형으로 가선 대부(嘉善大夫)에 그친 이로 앞서 정홍명(鄭弘溟)·조석윤(趙錫胤) 두 사람이 있었는데, 이미 죽은 뒤에 모두 정2품의 예에 의거하여 시호를 내렸었다. 그 뒤로 문형으로 가선 대부에 그친 이가 없었으므로, 시호를 내리는 법이 중간에 폐지되었다가, 이때에 이르러 이런 청이 있었다.

 

2월 16일 신해

김약로(金若魯)를 대사간으로, 이도겸(李道謙)을 사간으로, 김성응(金聖應)을 형조 판서로 삼았다.

 

2월 18일 계축

이조 판서 조상경(趙尙絅)이 또 상소하여 전직(銓職)을 극력 사임하니, 비답하기를,
"대신이 진달한 바는 서로 경계하는 뜻에 지나지 않는데, 어찌 자기 주장만을 고집하는가? 예(禮)로 신하를 부리는 도리에 있어서 억지로 핍박하기는 어렵다."
하고, 마침내 체임하도록 허락하고, 민응수(閔應洙)를 대신하게 하였다.

 

곡산(谷山)의 유학(幼學) 민형천(閔衡天)이 상소하여 각 관사의 노비(奴婢)에게 신공(身貢)을 거두는 폐단 및 도적이 몹시 퍼진 근심을 말하고, 소백산(小白山)의 폐사군(廢四郡) 및 안변부(安邊府)의 폐지한 옛 영풍현(永豐縣)에다 관원을 배치하여 진압하도록 청하니, 비국에 명하여 품처하게 하였다.

 

주강을 행하였다.

 

2월 19일 갑인

서종급(徐宗伋)을 발탁하여 판윤으로 삼고, 조상경(趙尙絅)을 예조 판서로 삼았다.

 

홍문관에서 《심경(心經)》·《근사록(近思錄)》의 강독을 이미 마쳤으므로, 계속하여 강독할 책을 여러 대신들에게 묻는 것이 적합하다고 청하였다. 좌의정 송인명(宋寅明)이 《주례(周禮)》를 진강(進講)하여 성인(聖人)이 제작한 오묘한 이치를 상고해 보도록 청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소대를 행하였다.

 

2월 20일 을묘

헌부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아니하였다.

 

간원 【정언 어석윤(魚錫胤)이다.】 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아니하였다. 또 아뢰기를,
"전 참의 박성로(朴聖輅)는 본래 명성과 인망이 부족하니, 청컨대 간장(諫長)의 의망에서 빼버리게 하소서. 그리고 전 장령 김경연(金慶衍)은 사람됨이 나약하고 용렬하니, 청컨대 대망(臺望)에 주의하지 말게 하소서."
하니, 모두 그대로 윤허하였다.

 

2월 21일 병진

임금이 윤대관(輪對官)을 소견하였다.

 

2월 22일 정사

임금이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영의정 김재로(金在魯)가 황단(皇壇)의 악기(樂器)에 대한 일로 아뢰기를,
"사직(社稷)·종묘(宗廟)·문묘(文廟)의 악기는 옮겨서 사용한 예가 없고, 여러 산천(山川)의 악기는 단지 1건(件)뿐인데, 황단에 친향할 날짜가 선잠제(先蠶祭)와 서로 겹치게 되었으니, 사용할 악기를 미루어 옮길 수 없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어찌 악기를 구비하지 못한다 하여 대제(大祭)를 물려서 행해야 하겠는가? 문묘의 악기를 옮겨다 쓰되, 사체가 구간(苟簡)하니 황단의 악기는 가을이 되기를 기다려 예조로 하여금 즉시 만들게 하여 장악원(掌樂院)에 비치하도록 하라."
하였다. 김재로가 말하기를,
"호남의 나리포(羅里舖)는 포항(浦項)의 예에 의거하여 별장(別將)을 배치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감사(監司)로 하여금 자벽(自辟)032)  하게 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김재로가 또 말하기를,
"광양(光陽)의 송전(松田)을 실화(失火)하였습니다. 지방관과 해당 수사를 죄주는 것이 마땅합니다만, 남방은 인심이 교활하고 포악하여 혹시라도 관장(官長)에게 죄를 얻게 되고 산지기에게 미움을 받게 되면 반드시 송전에 일부러 불을 지를 것입니다. 만약 수령을 죄주면 간사한 주민들의 계교에 걸려 들게 될 것이니 논죄하지 말고 지방관을 곤장으로 다스려 경계시켜야 합니다."
하니, 임금이 옳게 여겼다.

 

우의정 조현명(趙顯命)이 수차(水車) 만드는 사람을 여러 도(道)에 나누어 보내어 백성으로 하여금 각기 만들어 사용하게 할 것을 청하니, 임금이 비용이 많이 들고 효과가 적은 것을 염려하여 허락하지 않았다. 조현명이 임금에게 아뢰기를,
"나라를 다스리는 것은 마땅한 사람을 얻는 데 달려 있으니, 옛날 인조 반정(仁祖反正) 때에 이원익(李元翼)이 영상(領相)이 되어 고향에서 서울로 들어오자 위태롭게 여기고 의심하던 인심(人心)이 비로소 안정되었었습니다. 그리고 정묘년033)   난리에 호병(胡兵)이 평산(平山)에 이르렀다가, 김장생(金長生)·장현광(張顯光)·정경세(鄭經世) 등이 조정에 있음을 듣고 즉시 군대를 거두어 돌아갔습니다. 사직의 안위와 민심의 거취에 그 중대함이 이와 같음이 있으니, 지금 조정에 있는 자가 비록 옛날 사람에게 미치지 못한다 하더라도 어찌 적당한 사람이 없겠습니까? 이병상(李秉常)의 단아함과 이기진(李箕鎭)의 충실한 자질로도 벼슬하기를 좋아하지 않으며, 박문수(朴文秀)와 이광덕(李匡德) 또한 남보다 뛰어난 사람들입니다. 위급할 때에는 반드시 적합한 사람을 얻은 후에야 힘을 얻을 수 있습니다."
하고, 이어서 불러 올 것을 청하였다. 또 말하기를,
"유수원(柳壽垣)·심악(沈)·홍계희(洪啓禧) 등은 경학(經學)과 행의(行誼)가 있으니, 기용할 만합니다."
하였는데, 당시 홍계희가 이재(李縡)의 문인(門人)으로서 도리어 조현명(趙顯命)에게 아부하였기 때문에 조현명이 그를 함께 추천한 것이었다. 임금이 여러 신하들에게 묻기를,
"유수원이 말하기를, ‘옛날에는 이조와 병조의 낭관을 모두 추천한 적이 있었다.’고 하는데, 그러한가?"
하니, 김재로(金在魯)가 말하기를,
"옛날에 낭관(郞官)의 추천이 있으면 곧 옥당(玉堂)을 삼았습니다."
하였다. 조현명이 말하기를,
"병조 낭관 또한 극선(極選)인데, 추천하는 규례는 선묘조(宣廟朝) 때부터 처음으로 없앴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그 요점은 사람을 가려 뽑는 데 있을 뿐이다. 새로운 법을 시행하고 싶지 않는 것이 바로 나의 뜻이다."
하였다. 조현명이 또 아뢰기를,
"유수원이 당론(黨論)의 근본이 관제(官制)에 연유하였다고 말한 것은 식견이 있는 말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이조 낭관과 한림(翰林)을 없앤 후에야 편당을 없앨 수 있을 것이다."
하였다.

 

간원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아니하였다.

 

2월 23일 무오

헌부 【지평 남태혁(南泰赫)이다.】 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아니하였다. 또 아뢰기를.
"갑산 부사(甲山府使) 정즙(鄭檝)이 진자(賑資) 3백 곡(斛)을 초피(貂皮)와 면포로 바꾸어 모두 사복(私腹)을 채우고, 이미 받아들인 환곡(還穀)을 받아들이지 않았다고 핑계대어 취하여 자기가 사용하였습니다. 그런데 도신이 처음에는 정치를 잘하는 것으로 여겨 자급(資級)을 올려 주도록 계청(啓請)하였다가, 곧 뉘우쳐 깨닫고는 장파(狀罷)하였습니다. 청컨대, 함경 감사 박문수(朴文秀)를 종중 추고(從重推考)하고, 정즙에게 가자(加資)했던 것을 도로 거두시고, 그의 관직도 파면하소서. 영흥 부사(永興府使) 성은석(成殷錫)은 우졸(郵卒)에게 무겁게 형벌하여 말값을 억지로 바치도록 하였으니, 청컨대 파직하소서. 구수훈(具樹勳)은 남한 산성(南漢山城)의 중군(中軍)이 된 몸으로 그의 아들 구병원(具秉遠)이 〈활 쏘기 시험에서〉 대신 쏘았던 것으로 잡혔으니, 그의 관직도 파면하소서. 그리고 공홍 도사 안식(安栻)이 작년에 과거(科擧)를 관장하였는데, 사람들의 말이 떠들썩하니, 청컨대 파직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정즙은 나문(拿問)하고 구수훈은 관직을 삭탈할 것이며, 두 건의 일은 모두 아뢴 대로 하라."
하였다.

 

윤동형(尹東衡)·서명형(徐命珩)을 승지로, 이주진(李周鎭)을 대사헌으로, 홍계유(洪啓裕)를 집의로, 유작(柳綽)을 장령으로, 유우기(兪宇基)를 지평으로, 유최기(兪最基)를 대사간으로, 이제원(李濟遠)을 헌납으로, 이천보(李天輔)·이회원(李會元)을 정언으로, 남태제(南泰齊)를 수찬으로, 서명구(徐命九)를 개성 유수로 삼았다.

 

전 승지 양득중(梁得中)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신이 오늘 감히 나아가지 못하는 것은 단지 강학(講學)하는 실질적인 일에 보탬이 없기 때문이며, 한번 나아가고 물러나는 사이에 조금이라도 허위(虛僞)에 관계된다면 풍속과 교화에 매이는 것이니 그 조짐을 자라게 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또 신이 듣건대, 경연에서 바야흐로 《주자어류(朱子語類)》를 진강(進講)한다고 하는데, 아마도 오늘날의 급선무는 아닌 듯합니다. 대체로 이 책은 바로 그의 문인(門人)이 사사로이 기록한 것으로 그 사람들이 터득한 고하(高下)에 따라서 내용에도 심천(深淺)이 있고, 간혹 옮겨지면서 본뜻을 잃는 경우도 있으니, 이 때문에 빈천한 선비는 이것을 그냥 읽어 넘기는 데 불과하여 가끔 경계하며 계발할 따름인데, 이것이 어찌 제왕이 오로지 일삼아 강독(講讀)할 책이겠습니까?
돌아보건대, 지금 떠돌아다니며 빌어먹는 자가 잇달고 있는 것이 송(宋)나라의 안상문(安上門)에서 본 것034)  과 너무나 같습니다. 그런데 금년에 조세(租稅)를 감해 준 은혜는 바로 수백 년을 내려오는 동안에 없었던 커다란 혜택이었으므로 팔도의 생민이 함께 기뻐하고 있지만, 오히려 구렁에 뒹구는 생명을 구제하지도 못하니 그 까닭은 무엇입니까? 이것은 신이 전일에 상소한 이른바 오늘날에 부족한 것은 강설(講說)이 충분하지 못한 데 있지 않고, 오직 한갓 강설만 하고 시행하지 않은 것이 병통이 된 데 있습니다. 맹자(孟子)가 말하기를, ‘인정(仁政)은 반드시 경계(經界)로부터 시작된다.’고 하였으니, 이에서 인정이 경계에 대해서 방원(方圓)에 대한 규구(規矩)와 같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대우(大禹)가 궁실(宮室)을 낮게 하면서 구혁(溝洫)을 내는 데 힘을 다한 것은 이 때문이었습니다. 대체로 경계가 한 번 정해지면 모든 일이 다 이루어져서 백성들에게는 일정한 직업이 견고해지고, 군사들에게는 조사하여 찾아내는 폐단이 없어짐에 따라 귀천 상하가 각기 그 직업을 얻지 못하는 경우가 없으니, 이것은 오로지 여기에 연유한 것입니다. 그러다가 후세에 경계가 폐지되고 사사로이 차지하는 것이 한계가 없게 되니, 모든 일이 다 피폐해졌습니다. 그러니 비록 다스려지기를 바라는 임금이 있다 하더라도 만약 경계를 바로잡지 못하면 백성들의 재산은 끝내 일정하게 유지할 수 없고, 부역(賦役)은 끝내 균등할 수 없으며, 호구(戶口)는 끝내 분명할 수 없고 군오(軍伍)는 끝내 정돈될 수 없고, 사송(詞訟)은 끝내 그칠 수 없고, 형벌(刑罰)은 끝내 줄어들 수 없고, 뇌물은 끝내 막을 수 없고, 풍속은 끝내 돈후(敦厚)할 수 없을 것이니, 이와 같이 하고서 정치와 교화를 잘 시행한 경우는 없었습니다. 수(隋)나라 왕통(王通)의 이른바 전지(田地)를 정전(井田)으로 주지 않고 사람들을 마을에 살지 못하게 하면, 비록 순(舜)임금이나 우(禹)임금이라도 다스릴 수 없다고 한 것은 참으로 지당한 의론입니다. 다만 그 제도와 절목(節目)에 대한 상세한 것은 주(周)나라 때부터 지금까지 강론하고 연구한 사람이 없었습니다. 송(宋)나라의 장재(張載)도 뜻을 두기는 하였지만 성취시키지 못하고 졸(卒)하였습니다. 근세에 호남의 유사(儒士) 유형원(柳馨遠)은 바로 그것을 잘 강구하였으니, 처음으로 전제(田制)에서부터 설교(說敎), 선거(選擧) 및 관직(官職), 병록(兵祿)의 제도에 이르기까지 미세한 부분을 모두 거론(擧論)하지 않음이 없었으며, 그것을 《수록(隨錄)》이라고 이름을 지었는데 무릇 13권이었습니다. 신이 일찍이 그것을 신의 죽은 스승 윤증(尹拯)의 집에서 보았습니다. 지금 그 사람은 비록 죽었지만 그의 자손이 바야흐로 호남의 부안(扶安)과 경기의 과천(果川)에 살고 있다고 합니다. 삼가 바라건대, 특별히 그 고을의 수령에게 명하여 그 책을 가져다 바치게 하여 을람(乙覽)에 대비하도록 하시고, 곧 중외에 나누어 반포해서 차례대로 시행하게 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전번의 비답에 이미 유시하였는데, 숭상할 것은 그대의 질박하고 신실함이다. 힘써야 할 것은 의당 유념하겠다. 그리고 그 책자는 도신으로 하여금 가져다 바치도록 하겠다."
하였다.

 

2월 26일 신유

소대를 행하였다.

 

임금이 인정전(仁政殿)에 나아가 친히 임어(臨御)하여 서계(誓戒)를 받았으니 황단(皇壇)의 향사(享社) 때문이었다.

 

2월 27일 임술

사간원 【사간 이도겸(李道謙)이다.】 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아니하였다. 또 아뢰기를,
"지난번 대정 때에 두 전조의 낭청이 들어가지 않음으로 인하여 심지어 친히 정사를 행하겠다는 명이 있었으니, 국가의 체모를 무너뜨리고 손상시킨 것이 다시 여지(餘地)가 없었습니다. 청컨대, 민통수(閔通洙)와 서명신(徐命臣)을 모두 삭출(削黜)하소서. 그리고 교자(轎子) 타는 것을 금지한 것은 전후로 엄중히 신칙하여 거듭 밝혔을 뿐만이 아닌데, 지평 현감(砥平縣監) 오지철(吳志哲)과 금교 찰방(金郊察訪) 이희겸(李喜謙)이 모두 중인(中人)과 서얼(庶孽) 출신의 미천한 무리로서 방자하게 금법(禁法)을 범하여 조금도 돌아다보거나 거리낌이 없습니다. 청컨대, 모두 파직(罷職)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민통수(閔通洙)와 서명신(徐命臣)의 일은 아뢴 대로 하고, 그 나머지는 윤허하지 않는다."
하였다.

 

임금이 승지 조명리(趙明履)를 불러 하문하기를,
"황단(皇壇)의 초헌 악장(初獻樂章)을 삼헌(三獻)에 그대로 쓰는가?"
하니, 조명리가 말하기를,
"그렇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태묘(太廟)와 사직(社稷)에는 모두 곡배(曲拜)035)  하는데, 유독 황단(皇壇)에서는 북쪽을 향하여 직배(直拜)하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이것은 의당 《대명집례(大明集禮)》를 상고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태묘에는 속악(俗樂)을 쓰는데, 황단에는 아악(雅樂)을 쓰니 이것도 알 수 없다."
하자, 조명리가 아뢰기를,
"이것은 바로 황단의 의식을 따라서 그렇게 된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구성(九成)036)  과 신관(神祼)037)  하는 예(禮)는 모두 갖추어졌다. 모든 일은 마땅히 한결같이 묘례(廟禮)를 준수해야 하는데, 유독 악장(樂章)만은 단례(壇禮)를 따르고, 심지어 아헌(亞獻)과 종헌(終獻) 및 영신(迎神)과 송신(送神)에 이르러서는 모두 악장이 빠졌으니, 그것을 이정(釐正)하는 것이 마땅하다. 더구나 제사(祭祀)에는 마땅히 흑우(黑牛)를 써야 하는데, 황우(黃牛)를 쓰는 것 또한 무슨 뜻인가?"
하였다. 뒤에 또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여 황단(皇壇)의 일에 대하여 하문하였다. 승지 조명리가 말하기를,
"《대명집례(大明集禮)》를 상고해 보았더니, 제후(諸侯)가 조현(朝見)하는 의식은 없고, 문무(文武)의 여러 신하들은 모두 북쪽을 향해 절을 하며, 태묘(太廟)의 시향(時享)도 그와 같다고 하였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의심스럽게 여겨 또 영의정 김재로(金在魯)에게 묻자, 김재로가 말하기를,
"《오례의(五禮儀)》에 종묘의 예를 반드시 곡배(曲拜)로 하는 것은 신(神)을 공경하는 예로 섬기기 때문이며, 황단(皇壇)의 예에 직배(直拜)하는 것으로 정한 것은 군신(君臣)의 도리로 행하기 때문입니다."
하였다. 임금이 또 황우를 쓰는 의미를 묻자, 조명리가 말하기를,
"명(明)나라는 화덕(火德)으로 〈나라를 세웠기〉 때문에 성우(騂牛)를 써야 하는데, 성(騂)은 짙은 황색으로, 황색은 성(騂)에 가깝기 때문에 황색을 쓰는 것입니다."
하였다. 김재로가 말하기를,
"마땅히 명(明)나라의 제례(祭禮)를 따라 성색(騂色)으로 쓰는 것이 적당할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그대로 허락하였다. 또 악장(樂章)에 대한 일을 묻자, 김재로가 말하기를,
"아헌(亞獻)·종헌(終獻)·영신(迎神)·송신(送神)에 악장을 쓰지 않음은 조리가 뒤섞인 듯합니다. 그러나 당초에 수의(收議)하던 가운데 고 상신 이여(李畬)가 아홉 번 변하는 음악을 합주(合奏)하였다고 한 것은 바로 영신(迎神)과 구성(九成)의 악(樂)입니다. 황단(皇壇)을 태묘(太廟)와 문묘(文廟)에 비교하면 사체(事體)가 가장 높은데, 가장 높은 것은 오직 국사(國社)이기 때문에 사단례(社壇禮)를 씁니다. 그리고 사단(社壇)은 바로 지신[地祗]이고, 황단은 바로 인신(人神)이기 때문에 아홉 번 변한다는 것은 바로 선농단(先農壇)의 예를 쓴 것이니, 악장을 다시 정하는 것은 지금 경솔하게 의논하기 어렵습니다."
하였다.

 

진도군(珍島郡)에 정배된 죄인 임상악(林象岳)이 마음대로 배소를 이탈하여 새벽을 틈타 배를 타고 나왔다고 감사 권혁(權爀)이 장문(狀聞)하니, 임금이 임상악을 제주(濟州)에 옮겨 정배하도록 명하였다.

 

《신증성경지(新增盛京志)》가 피국(彼國)에서 나왔는데, 인물(人物)과 관작(官爵)이 모두 기재되어 있었다. 영의정 김재로(金在魯)가 예람(睿覽)에 대비할 것을 청하니, 임금이 들여보내도록 명하였다.

 

소대를 행하였다.

 

2월 29일 갑자

임금이 주강과 석강을 행하였다.

 

장령 유작(柳綽)이 상소하기를,
"조상유(趙尙綏)는 곧 전 이조 판서 조상경(趙尙絅)의 서제(庶弟)인데, 중간에서 권세를 파니, 그 집안의 번성함이 전관(銓官)의 집과 다름이 없었으며, 영외(嶺外)에 있는 그의 처족(妻族)인 신성(申姓)의 사람 가운데 양전(兩銓)에 관직을 얻은 자가 거의 십수 인에 이르렀다고 합니다. 신은 조상유가 권력을 구하려고 형을 판 죄는 엄격히 징계하지 않을 수 없다고 여기니, 변방에 정배하는 율(律)을 시행해야 마땅합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과연 이런 일이 있었다면 엄중히 징계하지 않을 수 없다. 두려운 세상에 풍문(風聞)이 간혹 지나치기도 하니 조상유를 해부(該府)로 하여금 엄중히 추문하고 조사하여 처단하도록 하라."
하였다.

 

어유룡(魚有龍)을 대사간으로, 안상휘(安相徽)를 집의로, 이제담(李齊聃)을 장령으로, 유언국(兪彦國)을 지평으로, 신사건(申思建)을 정언으로, 김성운(金聖運)을 승지로, 서종급(徐宗伋)을 예조 판서로, 윤양래(尹陽來)를 판윤으로 삼았다.

 

2월 30일 을축

헌부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아니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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