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영조실록53권, 영조 17년 1741년 3월

싸라리리 2025. 9. 25. 1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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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1일 병인

판중추부사 유척기(兪拓基)가 상소하여 왕명을 업신여긴 죄를 청하니, 임금이 우악한 비답을 내리고 사관(史官)에게 명하여 함께 오도록 하였다.

 

임금이 소대를 행하였다. 검토관 정휘량(鄭翬良)이 말하기를,
"목천운(睦天運)의 자식이 멋대로 대궐에 들어와 등문고(登聞鼓)를 두드리며 그 아비의 원통함을 호소하였습니다. 제방(隄防)이 엄중하지 못하였으니, 청컨대 병조의 당상관으로 그가 함부로 뛰어들도록 허락한 자를 추문(推問)하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그대로 윤허하였다.

 

3월 4일 기사

목성(木星)이 동정성(東井星)으로 들어갔다.

 

밤 삼고(三鼓)에 임금이 면복(冕服)을 갖추고 의춘문(宜春門)으로 나와 황단(皇壇)에 나아가 친제(親祭)를 행하였다. 예를 마치고 신실(神室)에 들어가 제기(祭器)를 봉심(奉審)하였다.

 

경상 감사 정익하(鄭益河)가 상소하기를,
"본도에는 이순신(李舜臣)·김천일(金千鎰)·송상현(宋象賢)·곽재우(郭再祐)·중 유정(惟政)·이술원(李述原)의 사우(祠宇)가 있는데, 더러 관(官)에서 제사를 지내기도 하고 더러 개인이 제사를 지내기도 합니다. 고 감사 황선(黃璿)이 본도를 안찰(按察)하다가 무신년 난리를 당하여 반역(叛逆)을 토벌하여 평정한 공이 있었는데, 유독 훈적(勳籍)에 누락되었으므로, 도내(道內)의 사민(士民)들이 그를 위하여 사우를 세우고 그 사우의 이름을 민충사(愍忠祠)라고 하였습니다. 이 일곱 곳의 사우에 대해서는 각기 세금을 면제한 전지(田地) 10결(結)을 지급하여 그것으로 수호(守護)하도록 해야 마땅합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마땅히 대신에게 물어서 하교하겠다."
하였다. 그 뒤에 대신에게 묻자, 좌의정 송인명(宋寅明)은 말하기를,
"전지는 허락할 수 없지만 관청에서 제수(祭需)를 지급하는 것은 아마도 불가함이 없을 듯합니다."
하고, 우의정 조현명(趙顯命)은 말하기를,
"서원(書院)의 〈건립을〉 금지하고 있으니, 사우의 건립을 허락할 수 없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사우와 서원은 다르다."
하였다. 마침내 전지의 지급은 허락하지 않았으며, 사우를 처음 세울 때의 도신은 추고하고 수령은 파직하도록 하였다.

 

권현(權賢)을 사간으로 삼고, 좌윤 서종옥(徐宗玉)을 발탁하여 판윤으로 삼았다.

 

3월 6일 신미

임금이 숙빈(淑嬪)의 묘우(廟宇)에 나아가 전배(展拜)하였다.

 

3월 7일 임신

달이 화성(火星)을 가렸다.

 

별겸춘추(別兼春秋) 김한철(金漢喆)·임상원(林象元)·이종적(李宗迪) 등이 황경원(黃景源)·정원순(鄭元淳)을 추천하여 한림(翰林)으로 삼았는데, 황경원은 글을 잘한다는 명성이 있었고, 정원순은 고 상신 정태화(鄭太和)의 손자였다.

 

3월 9일 갑술

지평 유언국(兪彦國)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전하의 국사(國事)는 위(衛)나라 정사가 날로 그릇되었던 데 가깝지 않습니까? 양쪽에서 천거하고 서로 대비(對比)하는 것을 오늘날 제1의 도리로 삼고 있는데, 그 전해지는 해독은 현명한지 어리석은지, 재능이 있는지 없는지에 대한 구별이 없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분배(分排)하고 짝을 지어 양편이 대치하는 것이 마치 음(陰)과 양(陽)의 한쪽을 폐할 수 없는 것과 같음이 있으니, 연산(燕山)에서 나는 옥(玉) 비슷한 돌을 가지고 형산(荊山)에서 나는 좋은 품질의 박옥(璞玉)에 대비(對比)하고, 도척(盜跖)같이 탐욕한 인물로써 백이(伯夷)처럼 청백한 인물에 대비하는 등 서로 뒤섞여서 전혀 분별하는 것이 없습니다. 이로 말미암아 사람에게는 정해진 가치가 없고 세상에는 정해진 의론이 없으니, 이는 진실로 탕평책(蕩平策)의 폐단입니다. 그런데 이 의논을 주장하는 약간의 사람들 또한 성심(誠心)으로 잘해 볼 생각이 없으니, 대전(大殿)에 오르거나 경연(經筵)에 나아가서 모두 탕평책에 대한 말만 하고 있으며, 상소·차자·주문(奏文)·서독(書牘)이 모두 탕평책에 관한 일뿐입니다. 그러나 그 마음은 그전대로 편당을 지어 암암리에 두찬(杜撰)하고 몰래 중상하여 배격하고 있지만, 겉으로는 공평(公平)한 얼굴로 가리고 속으로는 경알(傾軋)하는 수단을 시험하고 있으니, 일컫는 의리는 진정한 의리가 아니며, 논하는 시비(是非)는 공정한 시비가 아닙니다. 더구나 지금 종묘에 고하고 고명(誥命)을 반포하는 것은 체모와 단계가 저절로 다르니, 전하께서 만약 그 처분을 크게 공정하게 하여 탕평(蕩平)하는 도리를 광명(光明)하고 깨끗하게 해서 한 세대를 용동(聳動)할 수 없다면, 천하 후세에 무슨 할 말이 있겠습니까? 요즈음 편당을 만들었다가 죄를 얻은 자를 가지고 시험삼아 말해 보면, 전하의 형정(刑政)은 중도(中道)를 잃은 것이 많습니다.
김상신(金相紳)과 같이 사사로운 뜻으로 협잡하여 조정을 경함(傾陷)하려 했던 자에 대해서는 가볍게 내쫓는 것으로 처분하였다가 곧 다시 조용(調用)하였으며, 조태언(趙泰彦)의 몇 자 어귀(語句)는 대죄(大罪)에 이르지 않는 것인데, 처음에 극률(極律)을 시행하였다가 마침내 절도(絶島)에 귀양보낸 다음 해가 오래 되었는데도 오히려 거두어 녹용(錄用)하지 않고 있습니다. 이규채(李奎采)에 이르러서는 발계(發啓)한 여러 사람이 모두 드러나고 높은 지위에 올랐지만, 유독 변변치 못한 한 사람 이규채만 정체된 것은 정계(停啓)하였을 때 난처한 표정을 지은 것 때문인데, 이는 진실로 불쌍하게 여길 만한 것으로서 깊이 다스릴 것이 못되니, 섬에 천극(栫棘)한 것은 처벌이 너무 무거운 것이었습니다. 이는 모두 마땅히 엄중히 해야 할 경우에는 엄중하게 하지 않고, 마땅히 엄중히 하지 않아야 할 경우에는 엄중히 한 것이니, 신은 매우 애석하게 여깁니다. 신은 생각하기를 이규채는 마땅히 참작이 있어야 하고, 조태언은 영원히 벼슬길을 막을 필요가 없다고 여깁니다.
오늘날의 달고 쓴 것을 조절하고 피차(彼此)를 안정시켜 화합하게 하는 것은 오로지 전형(銓衡)을 관장하는 지위에 달려 있으니, 추천하는 즈음에 별도로 더욱 신중하게 가려 뽑아야 마땅합니다. 며칠 전에 전장(銓長)의 망(望)에 조관빈(趙觀彬) 또한 새로 주의(注擬)하였습니다. 모르기는 하지만, 조관빈은 뱃속에 분노와 독기(毒氣)를 가득 품고 원수처럼 보아온 지 반세(半世)가 되었는데, 조정을 무너뜨려 어지럽힌 옛날의 마음이 지금 과연 얼음이 녹듯 풀려서 변화하여 사심이 없는 이방(李昉)038)  처럼 묘당에서 반드시 이 사람을 이러한 시기에 이러한 직임에다 추천한 것이 신은 성실(誠實)한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그가 돕는 바 전하의 탕평에 대한 정치도 세속(世俗)의 격식과 시상(時象)을 벗어나지 못하였으니, 신은 가만히 애석하게 여깁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그 힘쓸 것은 의당 힘쓰겠지만, 조관빈의 일은 지나치다. 이규채에 대해서도 참작하겠다."
하였다.

 

영의정 김재로(金在魯)가 조관빈(趙觀彬)을 전장(銓長)의 의망에 새로 추천한 일을 가지고 차자를 올려 유언국(兪彦國)의 상소에 대해 변명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조관빈은 국가에 대하여 본래 혈성(血誠)이 있으며, 본래 준엄하고 과격한 자가 아닙니다. 그런데 지금 뱃속에 분노와 독기(毒氣)를 가득 품었다는 것으로 위태한 지목을 억지로 가하였는데, 가령 의심하여 저지한다면 또한 매우 어질지 못한 것입니다. 조관빈이 이미 경(卿)의 직질(職秩)에 올랐으므로, 으레 동전(東銓)에 의망한 것인데, 그 누가 다른 말이 있겠습니까? 그런데 갑자기 이렇게 비방하고 배척하는 말이 있으니 대신(臺臣)이 비록 탕평책(蕩平策)을 방해하는 것을 근심한다 하더라도 신은 당연히 의망해야 할 사람을 일부러 빼버리는 것은 공정한 탕평의 도리가 아니며, 인심(人心)과 세도(世道)가 어긋나고 분열되는 것이 반드시 이러한 말과 논의에 연유하지 않음이 없을 것이라고 여깁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대관(臺官)의 말이 중도를 지나쳤는데, 경은 어찌하여 자기 주장을 고집하는가?"
하였다.

 

3월 10일 을해

달이 태미 서원(太微西垣)에 들어갔다.

 

교리 윤득경(尹得敬)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조상(朝象)이 안정되지 못함이 어찌 이 지경에 이르게 되었습니까? 경알(傾軋)하는 일이 날로 심해지고, 남을 쳐서 쫓나내는 것이 풍습을 이루었습니다. 시험삼아 유언국(兪彦國)의 상소를 가지고 말하면, 기관(機關)을 많이 허비하며 오로지 기회를 엿보며 농간 부리는 것을 일삼고 있는데, 마치 군덕(君德)의 궐실(闕失)을 바로잡는 듯하지만 뜻은 실제로 찬양하는 데 있고, 시론(時論)의 유폐(流弊)를 배척하는 듯하지만 계책은 도리어 아첨하여 즉겁게 하는 데에서 나왔으니, 이것은 진실로 언론(言論)의 가라지[稂莠]이며 사대부(士大夫)의 수치(羞恥)입니다. 맑은 조정의 대각(臺閣)에서 이러한 말과 의논이 있을 줄은 헤아리지 못하였습니다. 그리고 조태언(趙泰彦)과 이규채(李奎采)를 귀양 보내거나 벼슬길을 막은 것이 어찌 헌신(憲臣)이 한탄하여 애석하게 여길 것이겠습니까? 다른 사람을 반드시 모함하여 죄에 빠뜨리려고 하면, 억지로 끄집어 내어 겉으로는 부축하는 척하면서 속으로는 억눌러 똑같은 죄에 대해 함께 폐고(廢錮)시키는 죄과(罪科)로 몰아넣으려 하니, 그 계책이 어찌 참혹하지 않겠습니까? 조관빈에 이르러서는 화(禍)를 당한 집안의 살아남은 사람으로, 그가 평소 나라를 걱정하고 임금을 사랑하는 정성은 다른 사람의 갑절이 됩니다. 그리고 또 그의 정적(情迹)이 위태로워 교야(郊野)에서 한가하게 살면서 일체의 시의(時議)에 대해 참여하여 들은 바가 없는데, 이른바 분노와 독기란 것은 무슨 일이며, 무너뜨리고 어지럽힌 것은 무슨 일이기에 억지로 위태한 지목을 만들고, 두려워하여 대처하는 자취를 더하는 것입니까? 이는 대개 작년과 금년 이래로 전형(銓衡)하는 권한이 간혹 이 무리가 좋아하지 않는 사람에게 돌아갔기 때문에, 앙갚음하려고 배척하니, 이미 체임(遞任)된 전장(銓長)이 벌써 해독(害毒)을 당하였고, 남은 봉망(鋒芒)이 주의받은 사람에게까지 미쳤으니, 이와 같은 정태(情態)를 신은 진실로 통탄스럽게 여깁니다."
하니, 임금이 예사 비답을 내렸다.

 

장령 유작(柳綽)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신이 삼가 조상유(趙尙綏)의 공사(供辭)를 보건대, 그가 발명(發明)한 것이 군색한 둔사(遁辭)로서 미봉하는 것이었으니, 신이 들은 것과는 아주 달랐습니다. 최덕천(崔德天)이 이미 뇌물을 바치고 벼슬을 구하는 계획에서 나왔다면, 바치지 않았거나 이미 바쳤다는 그 말이 어찌 다르겠습니까? 그리고 신익삼(申益三)은 늙고 잔열(孱劣)하여 영장(營將)에 적합하지 않으며, 신구(申璆)를 부사(府使)에 임명한 것과, 신흡(申)을 부정(副正)으로 옮긴 것과, 신담(申琰)을 재랑(齋郞)에 의망한 것과, 평양(平壤) 사람 김진광(金振光)을 무겸(武兼)으로 유임시킨 것과, 영원(寧遠)의 백도(白徒)인 장씨(張氏) 성(姓)을 가진 사람을 만호에 임명한 것과, 김명신(金命臣)을 동지중추부사로 임명한 것과 권대석(權大碩)이 상전(床廛)039)  의 행수(行首)를 강제로 빼앗은 것은 모두 조상유의 죄입니다. 그런데도 감히 스스로 근신했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신이 삼가 듣건대 유신 윤득경(尹得敬)이 상소하여 신이 앞서 상소한 것을 해독(害毒)을 끼친 것에 돌렸다고 하는데, 실정 밖의 배척에 대해서는 변명을 많이 늘어놓을 것이 못됩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풍문(風聞)을 어찌 모두 믿을 수 있겠는가?"
하였다. 뒤에 그 상소를 대신에게 묻자, 좌의정 송인명(宋寅明)이 조상유를 엄중히 조사하도록 청하고, 또 말하기를,
"조상경(趙尙絅)이 오래도록 전형(銓衡)을 잡았으니 애석하게 여길 도리는 아닙니다."
하고, 우의정 조현명(趙顯命)은 말하기를,
"거짓과 진실이 어떠한지는 모르겠지만 유작이 논핵한 바는 모두 신이 듣지 못하던 괴이한 말입니다."
하였다. 송인명이 말하기를,
"대각(臺閣)에서 재상(宰相)을 논핵하는 것 또한 소대(昭代)의 아름다운 일입니다."
하였다. 이때 송인명은 조상경이 전형하는 지위에 오래도록 있음을 미워하여, 반드시 모함하여 죄에 빠뜨리려고 앞서 이미 여러 번 연중(筵中)에서 배척하였는데, 유작의 상소가 잇따라 나온 것이었다. 조관빈은 단지 전관(銓官)에 통의(通擬)되었는데, 유언국(兪彦國)이 나와서 공격하며 제거하려 한 때문에 윤득경이 상소하여 유작을 독(毒)으로 쏘았다고 말하고, 유언국을 남은 봉망(鋒芒)이라고 말한 것이니, 대체로 지목하는 바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임금이 의금부에 명하여 유작(柳綽)의 상소 내용에 대하여 다시 조사하도록 하였다. 의금부 【판의금부사 윤양래(尹陽來)·지의금부사 민응수(閔應洙)·동의금부사 유정(柳綎)이다.】 에서 조사하여 아뢰기를,
"형조에서 조사한 서류 및 제사(諸司)의 문서에 의거하니, 최덕천(崔德天) 등은 이미 중신의 집에서 잡혀 송치되었고, 그도 또한 형조에서 자복하였으므로 형배(刑配)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신익삼(申益三)·신구(申璆)·신흡(申) 및 신담(申琰)에 대한 일은 이조와 병조의 정초(政草)를 가져다 상고해 보았더니, 전후의 차임과 의망이 다른 전관(銓官)의 손에서 나온 것이었으며, 말초(末梢)의 영장(營將)과 부사(府使)는 비록 조상경(趙尙絅)의 정초에 있었지만 모두 벼슬을 역임한 경력으로 당연히 옮겨야 할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리고 진사 신담은 단지 영남의 유생이라는 것 때문에 우연히 재랑(齋郞)의 말망(末望)에 주의(注擬)받았고, 김진광(金振光)이 무겸(武兼)에 유임된 것과 장헌주(張憲周)가 만호에 임명된 것은 모두 정격(政格)에 적합한 것이었으니, 억지로 사잇길로 승진되었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정읍(井邑) 사람 김명신(金命臣)이 벼 1천 곡(斛)을 바쳐 진자(賑資)에 보충하게 하였으므로, 승전(承傳)이 있기에 이르렀는데, 전조에서 즉시 거행하지 않으므로 대신이 여러 번 추고(推考)하도록 청하자, 전례대로 체아직(遞兒職)인 동지중추부사를 주었던 것이니, 원래 죄를 조상유(趙尙綏)에게 돌릴 일이 아닙니다. 상전(床廛)에 대한 일은 이른바 권대석(權大碩)이 애당초 행수(行首)에 차출된 일이 없으며, 또 중신의 집안에 왕래하지 않은 것이 1차, 2차의 추문(推問)과 추조(秋曹)에 옮겨서 조사하기에 이르러 일이 모두 명백해졌으니, 다시 조사할 단서가 없습니다."
하니, 임금이 마침내 조상유(趙尙綏)를 분간(分揀)하여 석방하게 하였다.
사신은 말한다. "조상경(趙尙絅)이 10년 동안 정병(政柄)을 잡고 있으면서 두루 자세하게 다스린 까닭에 여러 당류(黨類)로 하여금 원망이 없도록 했는데, 송인명 등이 마음속으로 좋아하지 않아 자주 비난하였다. 유작(柳綽)이 송인명의 뜻에 비위를 맞추어 조상경의 서제(庶弟)를 탄핵하였는데, 실제로는 조상경을 공격하여 제거하려는 것이었다."  영의정 김재로가 임금에게 말하기를, "조상경은 어려서 아비를 여의고 서모(庶母)에게 양육되었으므로, 조상유(趙尙綏)와 우애(友愛)가 특이하였습니다. 조상유는 반드시 무상(無狀)한 사람이 아니니, 적형(嫡兄)에게 욕(辱)을 끼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그렇게 여겼다. 조상유가 석방되자, 조상경이 상소하여 벼슬을 버리고 전리(田里)로 돌아가니, 임금이 우악한 비답을 내려 위유(慰諭)하였다. 그 뒤에 임금이 특별히 불러다 어제시(御製詩)를 내렸는데, ‘당인의 협잡한 뜻을 환히 알면서도[洞察黨人挾雜意] 이제야 유시하고 석방하니 더디다 할 만하네.[于今諭釋可云遲]’라는 귀절이 었다.


【태백산사고본】 39책 53권 15장 A면【국편영인본】 43책 8면
【분류】사법-재판(裁判) / 인사-임면(任免) / 인물(人物) / 역사-사학(史學) / 왕실-국왕(國王) / 왕실-사급(賜給)
사신은 말한다. "조상경(趙尙絅)이 10년 동안 정병(政柄)을 잡고 있으면서 두루 자세하게 다스린 까닭에 여러 당류(黨類)로 하여금 원망이 없도록 했는데, 송인명 등이 마음속으로 좋아하지 않아 자주 비난하였다. 유작(柳綽)이 송인명의 뜻에 비위를 맞추어 조상경의 서제(庶弟)를 탄핵하였는데, 실제로는 조상경을 공격하여 제거하려는 것이었다."
영의정 김재로가 임금에게 말하기를,
"조상경은 어려서 아비를 여의고 서모(庶母)에게 양육되었으므로, 조상유(趙尙綏)와 우애(友愛)가 특이하였습니다. 조상유는 반드시 무상(無狀)한 사람이 아니니, 적형(嫡兄)에게 욕(辱)을 끼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그렇게 여겼다. 조상유가 석방되자, 조상경이 상소하여 벼슬을 버리고 전리(田里)로 돌아가니, 임금이 우악한 비답을 내려 위유(慰諭)하였다. 그 뒤에 임금이 특별히 불러다 어제시(御製詩)를 내렸는데, ‘당인의 협잡한 뜻을 환히 알면서도[洞察黨人挾雜意] 이제야 유시하고 석방하니 더디다 할 만하네.[于今諭釋可云遲]’라는 귀절이 었다.

 

3월 11일 병자

임금이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좌의정        송인명이 송도(松都)에서 실화(失火)한 것을 가지고 본부의 창고에 비치해 둔 곡식을 경신년040)                  에 실화하였을 때의 전례와 같이 지급하여 마음을 다해 구제할 것을 청하니, 임금이 허락하였다. 송인명이 또 말하기를,
"도감 중군(都監中軍)은 마땅히 아주 정밀하게 골라야 할 것이니, 이후로 평안 병사(平安兵使)·통제사(統制使)·포도장(捕盜將)의 추천을 거치지 않은 자는 주의(注擬)하여 차임할 수 없도록 영구히 정식(定式)을 삼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옳게 여겼다. 송인명이 또 말하기를,
"도성에 떠돌아다니며 빌어 먹는 자가 매우 많으니 오부(五部)의 관원으로 하여금 친히 살펴서 내려가기를 자원하는 자는 양식을 주어 보내고, 떠나기를 좋아하지 않는 자는 진휼청(賑恤廳)으로 하여금 진제(賑濟)하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백성들이 이와 같은데, 군왕(君王)이 그것을 듣고서 떠날 사람은 떠나게 하고 머물 사람은 머물게 하는 것이 옳겠는가? 떠나기를 좋아하지 않는 자는 돌보아 진휼하도록 신칙하라."
하였다. 우의정        조현명(趙顯命)이 말하기를,
"전라도의 서남쪽 해양(海洋) 가운데 멀리 떨어져 있는 섬이 많으므로, 무신년 이후로 우려가 이르지 않는 바가 없으니, 마땅히 사람을 보내어 살펴보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옳게 여겼다.

 

이때 이조 판서 민응수(閔應洙)가, 수어사(守禦使)가 병부(兵符)를 차고서 도성(都城) 밖에 있으면서 여러 번 불러도 명(命)에 응하지 않았다는 것으로 인하여 임금이 장신(將臣)이 병부를 차고서 도성 밖에서 쉬고 있는 것은 군율(軍律)에 관계된다고 하며, 이제부터 장임(將任)을 맡은 자는 병부로 부르는 것을 논할 것 없이 도성 밖에 있지 말도록 명하고, 그대로 정식(定式)을 삼았다.

 

3월 12일 정축

소대를 행하였다.

 

홍경보(洪景輔)를 도승지로, 원경하(元景夏)를 승지로, 김상성(金尙星)을 대사간으로, 이광식(李光湜)·홍득후(洪得厚)를 장령으로, 남유용(南有容)·남태혁(南泰赫)을 지평으로, 원경순(元景淳)을 정언으로, 김한철(金漢喆)을 부교리로 삼았다.

 

특지(特旨)로 김진상(金鎭商)을 발탁하여 대사헌으로 삼았다. 김진상이 고향에 살면서 벼슬하지 않았으며, 무릇 직명(職名)이 있을 때에도 단지 의리를 끌어대어 겸손하게 사양하고 한번도 시사(時事)를 언급하지 않았다. 임금이 언제나 그의 조용하고 깨끗한 성품과 편당에 들지 않는 것을 칭찬하였는데, 이때에 이르러 전교하기를,
"절후가 추운 뒤에야 송백(松柏)은 시들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된다. 김진상이 신축년·임인년 이후로 이편에도 물들지 않고 저편에서도 미움을 받지 않았으며, 글을 올려 아뢰는 즈음에도 끝내 그런 버릇이 없었다."
하고, 마침내 이런 명이 있었던 것이다.

 

3월 13일 무인

판중추부사 유척기(兪拓基)가 또 상소하여 소명(召命)을 사양하니, 임금이 온화한 비답을 내렸다.

 

소대를 행하였다.

 

헌부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아니하였다.

 

3월 14일 기묘

소대를 행하였다.

 

임정(任珽)·이덕중(李德重)을 승지로 삼았다.

 

3월 15일 경진

장령 홍득후(洪得厚)가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요즈음의 조상(朝象)이 어찌 그리도 안정되지 못함이 심합니까? 남의 결점을 찾는 의논은 오로지 교묘하게 적중시키는 것을 일삼고, 공무(公務)를 빙자한 언론은 몰래 당동 벌이(黨同伐異)하여 오직 힘써 제거하지 못할까 두려워하고 있는데, 무슨 기관(機關)으로 도리어 꾸짖는 풍습이 있는지 모르겠으며, 이것 또한 깨끗한 조정에서의 아름다운 일이 아닙니다. 유언국(兪彦國)이 유신과 서로 경계해야 하는 처지에서 발노(發怒)하여 격렬하게 질책하고 욕설을 퍼부어 꾸짖는 것이 자못 거리의 아이들이나 장사꾼들이 주먹을 휘두르며 서로 욕하는 것보다 심했습니다. 그래서 그 소장이 한 번 나오자 진신(搢紳)들이 함께 부끄럽게 여겼습니다. 신은 전 지평 유언국에게 견벌(譴罰)을 가하여 야박한 풍속을 가다듬게 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생각합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헌신(憲臣)이 말을 비록 가리지 않았다 하나, 이번에 주청한 것 또한 지나치다."
하였다. 이때 유언국이, 윤득경(尹得敬)이 상소하여 배척한 것으로 인하여 다시 장황하게 상소하면서 도리어 꾸짖었던 까닭에 홍득후의 말이 이와 같았던 것이다.

 

임금이 태학(太學) 도기 유생(到記儒生)에게 강독을 직접 시험하고, 다시 제술(製述)을 시험하여 합격한 홍익서(洪益恕)·김한로(金漢老)·임정의(林正誼) 등 3인을 직부 전시(直赴殿試)041)  하게 하고, 나머지는 모두 급분(給分)042)  하도록 명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선비는 죽일 수 있어도 욕을 보일 수는 없다. 이하제(李夏躋)는 일찍이 성균관의 유생으로 유관(儒冠)을 쓰고 이 〈대궐의〉 뜰에 들어온 자인데, 이를 포도청(捕盜廳)으로 송치하여 도둑을 다스리는 율(律)을 시행하였으니, 마침내 중도(中道)에 지나친 데 관계된다. 포도청에서 선비를 다스리는 규례가 나로부터 처음 열리게 되면, 차례로 계승하는 임금이 어찌 본받지 않겠는가? 지금 강독하는 유생을 보니 마음에 느끼는 바가 있다. 지금부터 유생이라고 이름이 붙여진 자에게 다시는 도둑을 다스리는 율을 시행하지 말도록 하라."
하고 이어서 정식(定式)으로 삼았다. 우의정 조현명(趙顯命) 및 여러 신하들이 말하기를,
"거짓으로 유생이라고 일컬으면서 이름이 도둑의 초사(招辭)에 나왔을 경우 어떻게 도둑을 다스리는 율로 다스리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만약 이하제의 무리를 유생이라고 하여 이런 하교를 하셨다면 도리어 유생의 수치가 될 듯합니다."
하였다. 이하제는 바로 이춘제(李春躋)의 서제(庶弟)인데, 일찍이 그의 집안 연회(宴會)의 〈음식에〉 독(毒)을 넣은 일로 포도청(捕盜廳)에 옮겨진 자였다.

 

3월 16일 신사

우의정 조현명(趙顯命)이 아뢰기를,
"태평한 세월이 오래 되어 편한 대로 하는 것이 습성을 이루게 되어 한량(閑良)으로 무예를 익히는 자도 간혹 나귀를 타고 사장(射場)에 오가는 것을 신이 직접 눈으로 보았습니다. 조정에서 무신(武臣)에 대해서는 기력(氣力)을 가지고 뽑는데, 이와 같은 한량이 비록 요행으로 과거에 합격하였다 하더라도 장차 어디에 쓰겠습니까? 청컨대 양국(兩局)으로 하여금 조사해 내어 정거(停擧)하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옳게 여겼다. 이때 무인 집안의 자제들이 대부분 교만하여 출입할 때에 거의 폭건(幅巾)043)  을 쓰고 나귀를 타고 다니며, 가끔 활을 당길 줄도 모르면서 대사(代射)하여 과거에 합격하는 자가 있었기 때문에 조현명이 이와 같이 말한 것이었다.

 

주강을 행하였다.

 

지평 남유용(南有容)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김진상(金鎭商)을 특별히 헌장(憲長)으로 임명하게 한 명(命)을 누군들 귀를 기울여 듣지 않았겠습니까마는, 연중(筵中)에서의 하교가 아마도 성상께서 세상을 권면하는 본뜻에 어긋남이 있는 듯합니다. 김진상은 경학(經學)을 닦아 행의(行誼)가 조용하고 깨끗한 까닭에 지난번 진출하여 임금을 섬기면서 반드시 선(善)한 일을 진달하고 부정(不正)한 것을 막음으로써 조정을 높였고, 반드시 머뭇거리거나 용신(容身)하기를 구하여 세도(世道)를 손상시키지 않은 사람입니다. 오직 그는 일찍이 명예가 있는 지위를 사양하며 세상의 일에 마음을 끊었기 때문에 장독(章牘)을 올리는 즈음에도 일찍이 시비(是非)와 언론(言論)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었는데, 이는 그 정세(情勢)가 그렇게 시킨 것으로서 애당초 부득이한 것이었습니다. 지금 전하께서 관직에 발탁하도록 특별히 명하신 것이 이미 말속(末俗)을 격려하는 성의(盛意)에서 나왔다면, 마땅히 결백한 행실과 진출하기 어려워하는 절개를 장려하여 뭇 신하들에게 분명히 보여 주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가만히 삼가 포상(褒尙)하는 하교를 보건대, 특별히 그가 이편에도 물들지 않고 저편에서도 미움받지 않았음을 취하여 곧 풍헌(風憲)의 장(長)을 제수하셨는데 이것은 김진상의 본말(本末)에 매우 합당하지 않으며, 뭇 신하들로 하여금 망령되게 성지(聖旨)를 헤아리기에 꼭 알맞은 것이었습니다. 성상께서 다시 언론과 시비를 대각(臺閣)에 바라지 않겠다고 생각하신 것이니, 이는 세도(世道)와 국체(國體)에 있어서 관계됨이 작지 않습니다. 삼가 원하건대, 성명(聖明)께서는 전날의 연교(筵敎)를 가져오도록 명하셔서 그 어귀(語句)를 고쳐 오로지 결백한 행실과 진출하기 어려워하는 절개를 칭찬하고, 은총으로 발탁한 뜻을 밝게 드러내어 왕언(王言)에 결점이 없게 하시고, 선비들의 기풍을 한결같이 격려하도록 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옛날의 풍습을 따르려고 하니, 참으로 한심하다."
하였다.

 

3월 18일 계미

토성(士星)이 귀성(鬼星)으로 들어갔다.

 

임금이 친히 유생의 강독을 시험하였는데, 어느 한 유생이 강석(講席)에 들어와 스스로 불통(不通)이라고 쓰고 물러나므로, 임금이 이상하게 여겨 여러 신하들에게 묻기를,
"그가 합격한 사람의 수효가 많아서 강독해도 보탬이 없다고 말하였다면 이상하게 여길 것이 없겠지만, 그렇지 않고 오랫동안 성균관에서 유학(遊學)하면서 공업(工業)을 익히고, 편안한 마음으로 진출하려는 마음이 없었다면, 이는 귀중하게 여길 만하다. 비록 한 가지 작은 재주라도 나는 혹시 그가 세상에서 버려진 진주인 듯하다."
하자, 수찬 이성중(李成中)이 말하기를,
"버려진 진주라는 하교는 진실로 인재를 애석하게 여기는 성의(聖意)에서 나온 것임을 알겠습니다. 그러나 먼 시골의 유생이 과거에 합격한 뒤에 윤락(淪落)한 대로 맡겨둔 채 거두어 임용되지 못하고 있으니, 팔방(八方)에 버려진 진주가 얼마나 되겠습니까? 만약 강독하는 유생을 애석하게 여기는 뜻을 가까운 데에서 미루어 먼 곳에까지 미치게 한다면, 또한 넉넉히 반우(反隅)044)  하는 방도가 될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그렇게 여기고, 이조 판서 민응수(閔應洙)를 앞으로 나오도록 하여 엄체(淹滯)된 사람을 진작하여 발탁하는 정사에 힘쓰도록 명하였다. 승지 원경하(元景夏)가 아뢰기를,
"전하께서 이 전교를 여러 번 하셨습니다만, 실질적인 성과가 있었음을 보지 못하였으니 규모(規模)가 서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탕평(蕩平)하는 도리는 반드시 홍범(洪範)045)  의 삼덕(三德)을 적용해야 하는데, 지금은 바로 서로 대치(對峙)시키는 것으로 탕평하는 정책을 삼으니, 건극(建極)하는 도리가 아닙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황극(皇極)은 하나인데, 저편에서도 극(極)이라 하고 이편에서도 극이라 하니, 극에도 다름이 있는가? 풍원(豐原)046)  이 매번 서로 대치하게 한 것을 옳다고 한 것은 혹시라도 전관(銓官)이 치우치게 기용하는 폐단을 염려해서이다."
하였다. 민응수가 말하기를,
"인군은 마땅히 대공 지정(大公至正)으로 극(極)을 삼아야 하는데, 피차 각각 스스로 극이라고 하는 데 대해 위에 있는 이는 참여하여 알 바가 아닙니다. 만약 양쪽을 기용하여 서로 대치하게 하는 것을 극이라고 한다면, 그 극은 단지 외면(外面)을 꾸미는 것으로 그것 역시 반드시 사사로이 좋아하고 미워함이 있을 것이니, 진실로 참다운 탕평은 아닙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극(極)이란 것은 집에다 비교하면 한편에는 옛날 재목을 쓰고 한편에는 새 재목을 써서 그 위에다 들보를 얹는 것이 바로 극이다."
하였다. 원경하가 말하기를,
"오직 인재를 기용하는 것이 참다운 탕평(蕩平)이라 할 것이니, 비록 거리가 먼 연(燕)나라와 월(越)나라 사람이라도 함께 일할 수 있어야 합니다. 남태제(南泰齊)·홍경보(洪景輔)와 같은 이를 만약 함께 거두어 기용한다면 그것도 규모(規模)를 정하는 방도가 될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훌륭하다고 칭찬하였다.
사신은 말한다. "탕평(蕩平)하는 정사가 서로 대치하는 데에서 나오지 않았기 때문에 원경하(元景夏)가 크게 탕평하는 의논을 주장하면서 언제나 동서남북에서 인재를 끌어다 등용할 것을 청하였었다. 그래서 마침내 은총을 받아 처음 벼슬살이한 지 몇 년 만에 중비(中批)로 갑자기 승진하였다."


【태백산사고본】 39책 53권 17장 A면【국편영인본】 43책 9면
【분류】왕실-국왕(國王) / 인사-선발(選拔) / 역사-사학(史學)


[註 044] 반우(反隅) : 《논어(論語)》 술이장(述而章)에서 공자(孔子)가 말하기를, "배우는 이가 만약 스스로 발분(發憤)하지 않는다면 그를 열어 줄 필요가 없을 것이며, 또 스스로 말에 애쓰지 않는다면 그를 지시해 줄 필요가 없을 것이니, 마치 사각(四角)의 물건이 있는데 한 모퉁이를 가르쳐 주어서 세 모퉁이를 이해하지 못한다면 다시 가르쳐 주지를 아니하였노라.[子曰 不憤不啓 不悱不發 擧一隅 不以三隅反 則不復也]"고 한 것을 인용한 것으로, 가르침을 실시함에는 반드시 배우는 사람으로 하여금 자율적인 활동의 기회를 주어야 한다는 뜻임.[註 045] 홍범(洪範) : 《서경(書經)》의 편명(篇名). 주(周)나라 무왕(武王)이 은(殷)나라를 쳐서 멸(滅)하고 기자(箕子)를 찾아 천도(天道)를 물었을 때, 기자가 천지(天地)의 대법(大法)을 진달하기 위해 서술(敍述)한 것이라 함. 홍(洪)이란 크다는 뜻이고 범(範)이란 법(法)이란 뜻으로, 대법(大法)이란 말임.[註 046] 풍원(豐原) : 조현명(趙顯命)의 봉호(封號).
사신은 말한다. "탕평(蕩平)하는 정사가 서로 대치하는 데에서 나오지 않았기 때문에 원경하(元景夏)가 크게 탕평하는 의논을 주장하면서 언제나 동서남북에서 인재를 끌어다 등용할 것을 청하였었다. 그래서 마침내 은총을 받아 처음 벼슬살이한 지 몇 년 만에 중비(中批)로 갑자기 승진하였다."

 

3월 19일 갑신

임금이 주강과 석강에 나아갔다.

 

암행 어사 임상원(林象元)과 윤득재(尹得載)를 경기와 충청도에 파견하여 민간의 질고와 수령의 현부(賢否)를 살펴보도록 하였다. 임상원이 말하기를,
"찌[栍]를 뽑아 제외된 고을은 비록 아주 다스려지지 않더라도 봉고(封庫)할 수 없습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이런 길이 한 번 열리면 뒷날의 폐단이 되지 않겠는가?"
하였다. 우의정(右議政) 조현명(趙顯命)이 말하기를,
"만일 불법(不法)이 있어 흔적이 드러난 자의 경우는 비록 찌를 뽑아 제외된 고을이라 하더라도 그대로 방치할 수는 없습니다."
하니, 임금이 마침내 봉고 파직(封庫罷職)047)  하도록 허락하였다.

 

3월 20일 을유

주강을 행하였다.

 

정우량(鄭羽良)을 이조 참판으로, 서종급(徐宗伋)을 홍문관 제학으로, 정희보(鄭熙普)를 집의로, 신수(申𢢝)·이봉령(李鳳齡)을 장령으로, 남태제(南泰齊)를 지평으로, 이위보(李渭輔)를 정언으로 삼았다.

 

의금부에서 경성부(鏡城府)의 남편을 죽인 죄인 금례(今禮)가 자복하고 복법(伏法)되었다 하여 본 고을의 수령을 파직하고 그 고을 이름을 강등시킬 것을 청하니, 임금이 옳게 여겼다.

 

3월 21일 병술

소대를 행하였다.

 

3월 22일 정해

풍창 부부인(豐昌府夫人)이 졸(卒)하였다. 임금이 월름(月廩)을 3년 동안 기한하여 그대로 지급하도록 명하고, 또 내수사(內需司)로 하여금 상수(喪需)를 보내어 돕도록 하였다. 임금이 선대의 척속(戚屬)에 은례(恩禮)를 매우 두텁게 하였었는데, 민씨(閔氏)에게는 더욱 후하게 하였다.

 

3월 23일 무자

임금이 대신을 인견하였다. 좌의정 송인명이 여질(癘疾)의 기세가 바야흐로 치성하다 하여 태묘(太廟)의 하향 친제(夏享親祭)를 정지할 것을 청하고, 여러 신하들도 번갈아 그것을 아뢰니, 임금이 말하기를,
"뒷날 사책(史冊)에 여질(癘疾)을 두려워하여 친제(親祭)를 정지하였다고 말한다면 나를 그르다고 여기지 않겠는가?"
하고, 허락하지 아니하였다.

 

3월 25일 경인

임금이 하향(夏享)을 친히 행하려 명정전(明政殿)에서 서계(誓戒)하였다.

 

3월 26일 신묘

종묘(宗廟) 및 사직(社稷)의 대제(大祭)에 서계(誓戒)를 받을 적에 천관(天官)048)  은 읽고 형관(刑官)049)  은 임석(臨席)하도록 명하였는데, 모두 고례(古禮)를 따른 것이었다. 당초에 임금이 《대명집례(大明集禮)》를 준행하려 무릇 종묘와 사직에 제사가 있으면 정전(正殿)에 나아가 친히 백관을 경계하고, 승지가 서계문(誓戒文)을 읽었다. 교리 정휘량과 수찬 남태제 등이 차자를 올렸는데, 대략 이르기를,
"신이 삼가 《주례(周禮)》의 천관(天官)을 살펴보니 이르기를, ‘대재(大宰)의 직책은 백관의 서계(誓戒)를 관장하여 기일보다 10일 먼저 집사(執事)를 거느리고 날짜를 가려 서계를 마친다.’ 하였고, 또 추관(秋官)을 살펴보니 이르기를, ‘대사구(大司寇)의 직책은 서계하는 날에 임석하여 백관을 서계하게 한다.’ 하였습니다. 이것으로 미루어 살펴보건대, 승선이 대신해서 서계를 읽는 것과 대사구가 당초에 서계에 임석하지 않는 것은 너무 고례를 준수하는 도리가 아닙니다."
하니, 임금이 좌의정 송인명 등에게 물어서 처음으로 천관으로 하여금 서계(誓戒)를 읽게 하고 형관은 임석하도록 법을 삼았다.

 

대사성 윤급(尹汲)이 상소하기를,
"유생들이 도기(到記)를 칼로 오려낸 다음 그의 이름을 덧붙여 써넣기도 하고, 심지어 전강(殿講)에 함부로 응시하기도 하니, 마땅히 그 사람을 죄주어 선비들의 풍습을 바로잡아야 합니다."
하니, 임금이 허락하고 함부로 뛰어든 율(律)을 적용하도록 명하였는데, 그 유생은 바로 이훈보(李勳普)·이익보(李益普) 형제였다.

 

신사건(申思建)을 교리로, 김상적(金尙迪)·어석윤(魚錫胤)을 지평으로, 이이제(李以濟)·이제담(李齊聃)을 장령으로 삼았다.

 

함경 감사 박문수(朴文秀)가 상소하기를,
"북청(北靑)에 고 영의정 이항복(李恒福)의 서원이 있는데, 선조(先祖)에서 은혜로 편액(扁額)을 내리고 이름을 노덕 서원(老德書院)이라고 하였으며, 그 뒤에 고 상신 민정중(閔鼎重), 고 판서 오두인(吳斗寅)·이세화(李世華) 같은 이와 간혹 본도를 안찰(按察)했던 이와 간혹 본부(本府)에 부임했던 이를 열거하여 배향(配享)하였습니다. 그런데 근간에 고 영의정 이광좌(李光佐)가 본도의 감사를 거쳤다고 하여 각 고을의 많은 선비들이 일제히 노덕 서원에 모여 마침내 종향(從享)하는 의식을 거행하였습니다. 신이 본도를 안찰하면서 이를 만류하여 그치게 할 수 없었으니, 바라건대 유사(有司)로 하여금 신의 죄범(罪犯)을 감단(勘斷)하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박문수 자신이 도신(道臣)이 되어 이광좌를 배향(配享)하는 의논을 참여하여 듣고서도 금지하여 억제하지 못했다 하여 추고(推考)하도록 명하고, 앞장서서 의논한 유생 이교령(李喬齡)은 정거(停擧)하게 하되, 이광좌는 그대로 배향하고 내치지 말도록 하였다.

 

예조 판서 서종급(徐宗伋)이 상소하여 이광좌(李光佐)를 노덕 서원(老德書院)에서 출향(黜享)할 것을 청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조정에서 서원 건립을 엄격히 금지시키는 것은 어찌 다만 경비를 소모한다고 해서 그렇게 한 것이겠습니까? 이렇게 세상이 갈수록 풍속이 어지러워지는 때를 당하여 예전에 없던 것을 지금 둔다면 허다한 폐단이 이를 따라 발생할 것입니다. 새로 건립하는 것과 추가로 배향(配享)하는 것은 진실로 그다지 차이가 없기 때문에 을사년050)  부터 내려오면서 더욱 거듭 엄중히 금지한 것은 대체로 이 때문이었습니다. 그리고 또 조두(俎豆)와 시축(尸祝)은 사체(事體)가 가볍지 않으니, 마땅히 엄중히 해야 하고, 외람되게 해서는 마땅하지 않습니다. 더구나 이광좌가 죽은 지 몇 달 되지도 않았는데, 박문수(朴文秀)는 바로 그의 지친(至親)으로 본도를 안찰(按察)하면서 서둘러 올려서 배향하기를 마치 시기를 놓칠 수 없는 듯이 하였으니, 그 사면의 외람되고 잗단 것이 이와 같을 수 없습니다. 신은 그대로 배향하라는 명을 빨리 정지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하니, 임금이 허락하지 않고 서종급의 소장에 이광좌의 관작(官爵)을 쓰지 않았다 하여 종중 추고(從重推考)하도록 명하였다.

 

임금이 주강에 나아가 《춘추집전(春秋集傳)》을 강하였다. 강하기를 마치자, 대신을 입시하도록 명하고, 붕당(朋黨)을 깨뜨리고 탕평(蕩平)을 행할 수 있는 도리를 논하게 하였다. 좌의정 송인명이 말하기를,
"유수원(兪壽垣)이 한림 추천(翰林推薦)을 혁파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말했는데, 그 말이 옳습니다."
하였는데, 승지 원경하(元景夏)는 말하기를,
"한림 추천뿐만이 아닙니다. 이조 낭관은 바로 지금의 고질적인 폐단입니다."
하자, 우의정 조현명은 말하기를,
"시상(時象)이 여기에 이르게 된 것은 모두 이조 낭관의 폐단입니다."
하고, 마침내 원경하와 더불어 그것을 당연히 혁파해야 한다고 극력 진달하였다. 송인명은 널리 선발하여 그 권한을 가볍게 하고 또 구임(久任)시키지 말도록 청하니, 임금이 그렇게 여겼다. 이보다 앞서 유수원이 관제 서승도(官制序陞圖)를 올렸는데, 그 법은 문관으로 의당 승문원에 들어갈 사람은 모두 고시(考試)에서 등급을 나누되, 장원(壯元)은 홍문관 정자(正字)를 삼고, 그 다음은 예문관 검열을 삼고, 또 그 다음은 승문원 정자를 삼는 것이니, 이와 같이 한다면 명관(名官)이 한림(翰林)을 추천하여 편당을 수립하는 폐단을 혁파해 없앨 수 있을 것이며, 관제(官制)를 모두 3년 만에 서승(序陞)하는 규정을 적용한다면 이조 낭관의 통청(通淸)하는 권한을 공격하지 않더라도 저절로 깨뜨려질 것이라고 하였었다. 송인명과 조현명 등은 모두 탕평을 주장한 때문에 오랫동안 청론(淸論)의 공격과 배척을 받았었다. 원경하 또한 바야흐로 이천보(李天輔)와 서로 버티며 굴복하지 않은 채 명류(名流)의 권한을 빼앗으려 하였다. 그래서 마침내 그 논설을 듣기를 좋아하여 서로 전석(前席)에서 번갈아 진달하니, 끝내 명환(名宦)을 허물어뜨리고 관기(官紀)가 뒤섞여 외람된 데에 이르러 유수원의 말이 시행되게 되었다.

 

이때 경기·황해·강원 세 도의 유민(流民)으로 도성에 들어온 자가 1천 4백여명에 이르렀다. 대신이 그 일을 아뢰자, 임금이 안집(安集)시키고 구제하지 못했다 하여 세 도의 도신을 종중 추고하도록 명하고, 진휼청으로 하여금 죽(粥)을 끓여 구제하게 하였으며, 서북(西北) 양도(兩道)에 하유(下諭)하여 마음을 다하여 구제하도록 하였다.

 

석강을 행하였다.

 

헌부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아니하였다.

 

3월 27일 임진

전 대제학 이덕수(李德壽) 및 대신과 구경(九卿)에게 명하여 빈청(賓廳)에 모여서 문형 권점(文衡圈點)051)  을 행하게 하고, 이광덕(李匡德)을 대제학으로, 정준일(鄭俊一)·한억증(韓億增)을 수찬으로 삼았다.

 

당초에 정2품 이하로 하여금 부패(符牌)052)  를 받은 자는 대궐에 나아가 바치도록 하였는데, 하교하기를,
"무릇 패소(牌召)하는 데 있어서 군명(君命)이 패(牌)에 있으니, 대소의 여러 신하들은 한결같이 직접 선유(宣諭)받는 예(例)에 의거하여 패를 받는 것이 옳다. 부득이해서 위패(違牌)하는 경우 대관(大官) 이외에는 직접 대궐 밖에서 바치되, 직접 바치지 않는 자 가운데 경재(卿宰) 이하는 종중 추고하고, 하대부(下大夫) 이하는 의금부(義禁府)에서 추문(推問)하도록 하라. 무릇 밀부(密符)와 명소(命召)하는 어압(御押)을 이미 패용한 뒤에는 몸에서 떠나지 않도록 해야 하는데, 편비(褊裨)에게 맡기기도 하고, 심지어 4대문 밖에서 대신 바치도록 하니, 이후로는 직접 승정원에 바치게 하라. 그러나 혹시 직명(職名)이 없이 대고(大故)를 당한 자에게는 처음으로 대궐 밖에 와서 바치는 것을 허락한다."
하였다. 이때 검토관 남태제(南泰齊)가 드러누워서 위패(違牌)하는 것은 분수와 의리에 관계가 있다고 하여 거듭 신칙하도록 청하였기 때문에 이런 명이 있게 되었다.

 

대사헌 김진상(金鎭商)이 상소하여 사직하기를,
"편당에 물들지 않아서 미움받지도 않았으므로, 마침내 당습(黨習)이 없었다는 하교는 신이 매우 부끄러움을 금하지 못하겠습니다. 신이 일찍이 한 가지 일도 논하지 않았던 것은 바로 물러난 신하로서의 의리를 자처(自處)한 것이었고, 감히 당습을 미워하여 망설인 적은 없었습니다. 그러나 성상께서 만약 신이 물들지 않고 미움받지도 않은 것을 권장할 만하다고 여겨 기용하셨다면, 전해지는 폐단이 흑백(黑白)이 뒤섞여 있어도 입을 다문 채 잠자코 있는 것이 풍습을 이루어 마침내 어지러이 망하는 데 이르게 될 것이니,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우악한 비답을 내렸다. 김진상이 편당에 들지 않았다 하여 발탁된 것을 부끄럽게 여겨 그의 상소가 이와 같았다.

 

임금이 주강과 석강을 행하였다.

 

평안 감사 윤순(尹淳)이 졸(卒)하였다. 윤순은 마음이 깨끗하고 단아하여 문사(文辭)에 능하였으며, 필법(筆法)으로 세상에 이름이 나서 사람들이 그의 필법을 본받는 이가 많았다. 이때에 이르러 순시(巡視)하던 도중 벽동(碧潼)에 도착하여 졸하였다.

 

3월 29일 갑오

이주진(李周鎭)을 평안 감사로, 원경순(元景淳)을 부교리로, 윤경주(尹敬周)를 정언으로 삼았다.

 

영의정 김재로(金在魯)·좌의정 송인명(宋寅明)·우의정 조현명(趙顯命)에게 명하여 목호룡(睦虎龍)의 무고안(誣告案)을 산정(刪正)하게 하였다. 이보다 앞서 임금이 조현명과 오원(吳瑗)에게 명하여 임인년053)  의 무안(誣案)을 이정(釐正)하도록 하였는데, 얼마 안 되어 오원이 졸(卒)하자, 조현명이 오원이 죽은 것을 핑계대어 기꺼이 이정하지 않았었다. 이때에 이르러 임금이 조현명 및 김재로·송인명 등에게 이정하도록 명하였는데, 무릇 무안(誣案) 가운데 말이 임금을 핍박하는 것은 번번이 모두 삭제하여 고치게 하고, 또 승정원에서 기재한 문안(文案)을 가져다 단락(段落)을 따라 잘라 내도록 하자, 외부의 의논이 떠들썩하게 일어나, ‘목호룡의 흉악한 말을 한결같이 모두 삭제하거나 고쳐버리고 남겨두지 않는다면, 뒷날 무안을 보는 자가 목호룡이 악역(惡逆)을 한 것을 어떻게 알겠는가? 이는 목호룡으로 하여금 죄가 없게 하는 것이다.’ 하자, 송인명이 두렵게 여겨 임금에게 아뢰니, 이에 무안을 태워버리자는 의논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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