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 1일 병술
태학(太學)에 감귤을 하사하고, 도승지(都承旨) 이익정(二益怔)에게 서제(書題)를 가지고 홍문관 제학(弘文館提學) 서종급(徐宗伋)과 함께 태학에 가서 선비에게 시험을 보이라고 명하였다.
12월 2일 정해
감제(柑製)에서 수석을 차지한 생원(生員) 구윤명(具允明)을 직부 전시(直赴殿試)하게 하고 나머지에게는 각각 분수(分數)를 주라고 명하였다.
정언 이회원(李會元)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무릇 승품(陞品)에 관계되는 사람을 좌이(佐貳)가 마음대로 천의(薦疑)함은 끝내 잘못된 규례(規例)가 됨을 면할 수 없습니다. 하물며 이산 부사(理山府使) 윤득징(尹得徵)은 용렬하고 나약하여 변수(邊守)에 적합하지 않으니, 말해 무엇하겠습니까? 그런데 저 동종(同宗)의 전관(銓官)은 천거해 발탁하는 데 급한 나머지 혐의(嫌疑)를 무릅쓴 채 발탁할 것을 아뢰어 법을 소홀히 여기고 사욕(私慾)을 이루었으니, 진실로 지극히 방자합니다. 윤득징은 이미 장계로 파직되었습니다만, 전관에게도 또한 벌이 없을 수 없습니다."
하였는데, 가리킨 전관은 곧 이조 참의(吏曹參議) 윤급(尹汲)이었다. 비답하기를,
"전관을 추고(推考)하라."
하였다. 대개 승탁(升擢)하는 정사(政事)는 반드시 장전(長銓)이 주관하는 법이다. 그런데 윤급은 좌이(佐貳)로서 의망(擬望)을 계청(啓請)하였으니, 이미 정격(政格)을 잃었고 또 물정(物情)을 놀라게 하였다. 그래서 대신(大臣)이 막 추고를 청했던 것이고, 이회원이 또 언급한 것이었다.
12월 3일 무자
이성중(李成中)을 부교리(副校理)로, 윤광의(尹光毅)·원경순(元景淳)을 부수찬(副修撰)으로, 조원명(趙遠命)을 대사헌(大司憲)으로, 서명신(徐命臣)을 집의(執義)로, 김광세(金光世)를 장령(掌令)으로, 어석윤(漁錫胤)·김광국(金光國)을 지평(持平)으로 삼았다.
12월 8일 계사
임금이 날짜를 잡지 말고 삼복(三覆)을 정행(定行)하도록 명하였다. 이때 임금이 현기증 때문에 오랫동안 시조(視朝)하지 못하여 계복(啓覆)은 이미 길일(吉日)을 잡아 놓았지만, 대신(大臣)이 물려서 행할 것을 청하였다. 진대(診對) 때 도제조(都提調) 김재로(金在魯)가 말하기를,
"계복은 예전에도 또한 2,3년간 행하지 않은 전례가 있습니다. 지금 상후(上候)가 여전히 정섭(靜攝)하는 중에 계시니, 비록 행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무슨 해될 것이 있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이것은 왕정(王政) 중에서도 큰 일이니, 마땅히 기한을 넘겨서는 안될 것이다. 또 내년에 현기증이 올해보다 더하지 않으리라는 것을 어떻게 알겠는가? 옥수(獄囚) 가운데 비록 마땅히 부생(傅生)243) 해야 할 자가 있다 하더라도 감옥에서 해를 넘기게 한다면 또한 흠휼(欽恤)하는 왕정이 아닌 것이다. 어찌 날짜를 잡을 필요가 있겠는가?"
하고, 드디어 이달 11일에 초복(初覆)을 행하고 13일에 삼복(三覆)을 행하되, 관사(官司)의 일을 소홀히 하면서 자리만 채우는 것은 이미 형식적인 것에 가까우며 또 정섭(靜攝)하는 데 방해가 된다 하여 단지 시임(時任)·원임(原任)의 정부(政府)·육조(六曹)·경조(京兆)·삼사(三司) 외에는 모두 권도(權道)로 줄여서 조용히 강확(講確)하도록 명하였다. 또 하교하기를,
"양기(陽氣)가 바야흐로 생겨나고 있지만 우리 백성들은 여전히 곤고(困苦)하니, 이것이 어찌 왕정(王政)이겠는가? 1년 내내 부지런히 힘쓰고 겨울이 된 뒤에 쉬어야 비로소 술잔을 드는 즐거움이 있는 것인데, 듣건대 겨울에 비록 창고를 봉해 두었지만 봄에 도리어 적곡(糴穀)을 바친다 하니, 아! 우리 백성들이 어느 때야 편히 쉬겠는가? 생각이 이에 미치면 아픔이 나에게 있는 듯하다. 비국으로 하여금 제도(諸道)의 도신(道臣)에게 신칙(申飭)해서 백성을 위하는 나의 뜻을 깊이 유념하여 시기를 넘기지 않게 하여 이런 폐단이 없도록 하라."
하였다.
형조 참판 정내주(鄭來周)가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계복(啓覆)은 중요한 일이니, 입시(入侍)한 여러 신하들이 각기 의견을 진달하되 대충대충하는 것은 마땅하지 아니합니다. 그리고 이처럼 낮시간이 극히 짧은 때에 반드시 하루 안에 마무리짓고자 한다면, 성체(聖體)의 정섭(靜攝)에 방해가 될 뿐 아니라 옥사(獄事)를 결단(決斷)함에 있어서도 또한 신중하게 살피는데 부족할 듯합니다. 따라서 신은 이번의 초복(初覆)은 이틀로 나누어 행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하였으나, 임금이 허락하지 않았다.
정언 서지수(徐志修)가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돌아보건대 오늘날 기강이 서지 아니하고 시비(是非)가 행해지지 아니하고 언로(言路)가 열리지 아니하는 것은 전적으로 대선(臺選)을 가리지 아니하는 데에서 연유하고 있습니다. 이제 마땅히 그 문지(門地)를 묻지 않고 오로지 그 현능(賢能) 여부만을 논해서 아뢰게 하고 밝게 시험하여 그 공(功)의 등급을 매겨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관직(官職)을 설치해 ‘대리행(臺裏行)’이라 이름하여 무릇 문지(門地)가 괴원(槐院)이나 국자감(國子監)에 기록될 만한 자는 모두 천거하도록 허락하여 군덕(君德)의 궐유(闕遺)와 정령(政令)의 득실(得失)과 백료(百僚)의 현사(賢邪)와 민간(民間)의 질고(疾苦)를 논할 수 있게 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또 윤대관(輪對官)의 규례(規例)와 같이 입시(入試)를 허락하여 차대(次對)나 강연(講筵)에 모두 등대(登對)하여 일을 논하게 함으로써 그 지혜로움과 어리석음과 현능함과 불초(不肖)함을 안 뒤에 한두 해를 채우고 고적(考績)하되, 성상께서 몸소 재량(裁量)하고 선발하여 상고(上考)에 든 사람은 대망(臺望)에 허통(許通)시키고 중고(中考) 및 하고(下考)에 든 자는 그 선발에 들지 못하게 해야 할 것입니다. 이와 같이 한다면 대간(臺諫)은 모든 정인(正人)을 얻게 될 것이고 논하는 바 또한 장차 참다운 시비(是非)가 될 것입니다. 또 이곳을 거쳐 진도(進塗) 【벼슬길로 나아감.】 로 삼게 하되, 대선(臺選) 가운데서 문장(文章)이나 경술(經術)·학행(學行)이 있는 사람을 가려 옥당관(玉堂官)으로 삼고 대선에 들지 못한 자는 비록 바야흐로 대리행에 있다 하더라도 또한 영선(瀛選) 【홍문관 관원의 선발.】 을 허락하지 않는다면, 바로 현인(賢人)의 진도는 모두 대각(臺閣)에서 말미암게 될 것이고, 옥당도 또한 어엿하게 인재를 얻게 될 것입니다. 만약 단지 가세(家世)만 논할 뿐이라면 어찌 관직을 설치한 뜻이 있겠습니까?"
하니, 비답하기를,
"진달한 바는 항상 마음속으로 개탄스럽게 여기고 있던 것이니 마땅히 칙려(飭勵)하겠다."
하였다.
12월 10일 을미
간원(諫院)에서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평안 감사(平安監司) 김약로(金若魯)가 사폐(辭陛)하니, 임금이 불러 관방(關防)을 신칙하고 군량과 무기를 갖추라는 뜻으로 면유(面諭)하여 보냈다.
남태제(南泰濟)를 사간(司諫)으로, 권해(權骸)를 장령(掌令)으로, 조경(趙擎)을 지평(持平)으로, 한덕증(韓德增)을 헌납(獻納)으로, 이명곤(李命坤)을 교리(校理)로, 홍창한(洪昌漢)을 검상(檢詳)으로, 김종태(金宗泰)를 집의(執義)로 삼았다.
12월 11일 병신
임금이 초복(初覆)을 행하였다.
12월 12일 정유
유성(流星)이 남하성(南河星) 아래에서 나와 남쪽 하늘가로 들어갔는데, 빛깔은 붉은 색이었다.
헌부(憲府)에서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이번 경루에 오랫동안 눈이 내리지 않았으므로 임금이 종묘(宗廟)와 사직(社稷) 및 북교(北郊)에 나아가 기도하라고 명하였는데, 이날 마침 큰 눈이 내렸으므로 마침내 그만두라고 명하였다.
12월 13일 무술
임금이 희정당(熙政堂)에서 삼복(三覆)을 행하였는데, 사형수로 감단(勘斷)한 사람이 모두 넷이었다. 인신(印信)을 위조(僞造)하였다고 승복한 자는 법(法)에 있어서 사형에 해당되었지만, 임금이 이르기를,
"한(漢)나라 고조(高祖)의 약법 삼장(約法三章)은 단지 살인죄(殺人罪)에만 엄격할 뿐이었다. 전에도 또한 법에 있어서는 비록 사형에 해당되지만 정리(情理)로 보면 용서해 줄 만한 것이 있다 하여 이미 작처(酌處)를 명하였으니, 지금도 반드시 일체로 법을 적용할 것은 없다."
하고, 모두 감사(减死)하라고 명하였다. 여러 신하들이, ‘간사한 백성들에게 법을 농락하는 마음을 점차 열어 줄 것이니 율(律)에 의거해 엄하게 징계하지 않을 수 없다.’ 하며 다투었으나, 들어주지 않았다.
간원(諫院) 【사간(司諫) 남태제(南泰齊)이다.】 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또 계청(啓請)하기를,
"인신(印信)을 위조한 죄인 오한명(吳漢明)과 진필만(秦必萬)은 갑작스레 작처(妁處)할 수 없습니다. 청컨대 율(律)에 의거해 처단(處斷)하게 하소서."
하였으나, 임금이 윤허하지 않았다.
헌부(憲府) 【지평(持平) 어석윤(魚錫胤)이다.】 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또 계청(啓請)하기를,
"살옥 죄인(殺獄罪人) 육사성(陸師聖)을 변방에 옮기라는 명을 도로 정침(停寢)하시고 율(律)에 의거해 처단하게 하소서."
하였으나, 임금이 윤허하지 않았다.
이때 금성(金城)에 사람을 죽인 자가 있었는데 정절(情節)이 지극히 참독(慘毒)하였으므로, 드디어 율(律)에 의거하라고 명하고, 이어서 하교하기를,
"옛날 당(唐)나라 현종(玄宗)은 중주(中主)에 불과하였으나, 까치가 감옥의 나무에 둥지를 틀었다고 한다. 돌아보건대 내가 사복(嗣服)한 이후로 교화(敎化)가 행해지지 아니하여 해마다 보고하는 죄수의 숫자가 많아져서 마음속으로 항상 부끄럽게 여겨 왔다. 그런데 이번에 금성의 옥안(獄案)을 보건대 더욱 지극히 참독하니, 이 자는 곧 사람의 마음이 없는 자이다. 산골 백성이 포악하고 독살스러워서 왕화(王化)가 미치지 아니하니, 수령(守令)이 능히 간악함을 금지시키지 못하고 감사(監司)가 널리 교화를 펴지 못하여 그런 것이다. 교화하지 아니하고 죽인다면 어찌 왕자(王者)의 도리이겠는가? 본도(本道)로 하여금 여러 고을에 각별히 신칙하게 하라."
하였다.
권혁(權爀)을 승지(承旨)로 삼았다.
12월 14일 기해
달이 동정성(東井星)으로 들어갔다.
정석오(鄭錫五)를 예조 판서(禮曹判書)로, 윤심형(尹心衡)을 부응교(副應敎)로, 박춘보(朴春普)를 부교리(副校理)로 삼았다. 고(故) 한남군(漢南君) 어(𤥽)에게 정도(貞悼)란 시호(諡號)를, 증(贈) 판서(判書) 박이현(朴而絢)에게 의민(毅愍)이란 시호를, 증 판서 박영서(朴永緖)에게 충장(忠壯)이란 시호를, 증 판서 박지계(朴知誡)에게 문목(文穆)이란 시호를, 좌찬성(左贊成) 정제두(鄭濟斗)에게 문강(文康)이란 시호를, 예조 판서(禮曹判書) 김시환(金始煥)에게 효헌(孝憲)이란 시호를 내렸다. 어(𤥽)는 세종 대왕(世宗大王)의 열세 번째 왕자(王子)인데, 단묘(端廟)가 손위(遜位)한 뒤 함양군(咸陽郡)에 안치(安置)되었다가 세조(世祖)정축년244) 에 화의군(和義君) 영(瓔)·영풍군(永豐君) 전(瑔)과 더불어 금성 대군(錦城大君) 유(瑜)의 화(禍)에 같이 죽었다. 숙묘(肅廟) 때 와서 추부(追祔)하는 예(禮)를 거행하면서 그 당시 절의(節義)를 바쳤던 여러 신하들을 복작(復爵)하고 증시(贈諡)하라는 명이 있었으나 한남군의 자손만은 유독 몰락하여 미처 역명(易名)을 청하지 못하였으므로, 이 때에 와서 비로소 증시한 것이다. 박이현은 순천(順天)사람이고, 박영서는 근의 세 번째 아들이다. 박이현은 임진 왜란 때 포의(布衣)로 성주(星州)에서 창의(倡義)하여 제봉(霽峰) 고경명(高敬命)과 더불어 서로 호응(呼應)하는 형세를 이루어, 누차 왜적(倭賊)과 싸워 참획(斬獲)한 것이 많았는데, 군대가 패배하게 되자 죽고 말았다. 일이 조정에 알려지자 특별히 공조 참의(工曹參議)에 증직(贈職)하였다. 박영서는 무과(武科)에 올라 창성 부사(昌城府使)가 되었으며, 갑자년245) 이괄(李适)의 난(亂) 때 원수(元帥) 장만(張晩)의 군사를 따라 적(賊)의 후미를 쫓아 황주(黃州)의 신교(薪橋)에 이르렀는데, 원수의 군사들이 겁을 내어 감히 진격하지 못하자, 박영서가 홀로 분격(奮擊)하여 용맹을 뽐내며 말을 달려 이괄의 진중(陣中)으로 뛰어들었다. 그리하여 거의 이괄을 잡을 뻔했는데 갑자기 말이 거꾸러져 잡히니 이괄이 항복을 받고자 하였다. 이괄의 장수 한명련(韓明連)이 또 그의 용력(勇力)을 아껴 감언이설로 꾀니, 박영서가 대로(大怒)하여 자기 손으로 타던 말을 베며, ‘내가 너에게 잡히게 된 것은 이 말 때문이다.’ 하고, 마구 꾸짖으면서 꺾이지 않았다. 한명련이 또 초모(貂帽)를 그 머리에 씌워주니, 박영서가 머리를 흔들어 초모를 떨어뜨리며, ‘내 머리는 자를 수 있어도 역적의 초모로 충신의 머리를 더럽힐 수는 없다.’ 하였다. 역적들이 그를 꺾을 수 없음을 알고 긴 칼로 찍어대니 살갗과 살점이 조각조각 땅에 떨어졌는데, 죽을 때까지 여전히 꾸짖는 소리가 끊어지지 아니하였다. 인조(仁祖)가 듣고 탄석(歎惜)해 마지않으며 특별히 병조 참판(兵曹參判)을 증직하고 또 정려(旌閭)하라고 명하였다. 당저(當宁) 을묘년246) 에 사도(四道)의 유생(儒生)들이 함께 그 부자가 사절(死節)한 정상을 하소연하자 마침내 판서로 더 증직하였는데, 이때에 와서 증시(贈諡)한 것이다. 박지계는 함양(咸陽) 사람으로 학문이 독실하고 조행(操行)을 가다듬어 성명(盛名)이 있었다. 인조조(仁祖朝)에 초선(抄選)으로 나아가 대헌관(臺憲官)을 거쳐 승지(承旨)에 이르렀는데, 장릉(章陵)을 추숭(追崇)할 때 전례(典禮)를 잘못 의논하여 사림(士林)에게 비방을 받았다. 김재로(金在魯)의 조부(祖父) 김극형(金克亨)과 원경하(元景夏)의 조부 원두표(元斗杓)가 모두 그의 문인(門人)이었기 때문에 김재로가 연석(筵席)에서 그 덕행을 아뢰어 절혜(節惠)의 은전을 더하고 이조 판서로 증직할 것을 청했던 것이다. 정제두는 고(故) 상국(相國) 정유성(鄭維城)의 손자로 과환(科宦)을 일삼지 아니하여 청아(淸雅)한 절조(節操)가 있었다. 젊어서는 문순공(文純公) 박세채(朴世采)를 좇아 수학(修學)했으며, 왕양명(王陽明)의 학문을 좋아하였다. 숙묘조(肅廟朝) 때에는 여러 번 대헌(臺憲)을 거쳤고, 금상(今上)의 조정에서는 찬선(贊善)과 좨주(祭酒)를 역임했다. 졸(卒)함에 미쳐 연신(筵臣)이 시장(諡狀)을 기다리지 말고 시호를 내려줄 것을 청하였는데, 이 때에 와서 아울러 그 시호를 더했던 것이다. 대저 전례(典禮)를 잘못 의논한 선비와 왕양명의 학문을 존숭(尊崇)한 사람인데도 아름다운 시호를 더하여 시법(諡法)이 점차 타락하니, 식자(識者)들이 자못 비난하였다.
헌부(憲府) 【장령(掌令) 권해(權賅)이다.】 에서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반송방(盤松坊)의 변씨(邊氏) 여인이 동내(洞內) 양반에게 살해당해 사람들의 말이 떠들썩하게 전파되고 있는데도 덮어둔 채 발론(發論)하지 않고 있습니다. 청컨대 해당 부관(部官)은 나문(拿問)하여 엄하게 처분하고, 한성부(漢城府)로 하여금 급속히 검험(檢驗)해 원범(元犯)을 찾아내어 국법(國法)을 바로잡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아뢴 대로 하라고 유허하였다.
12월 16일 신축
헌부 【지평(持平) 어석윤(魚錫胤)이다.】 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전 장령 권우(權祐)는 사람됨이 용렬하고 처의(處義)에 근거가 없어 조정에 일이 있으면 언제나 달아나 관망하면서 체직(遞職)되기만을 도모하니, 풍습이 아름답지 못합니다. 전 정언 민수언은 나약하고 용렬하여 시종신(侍從臣)같지 아니하며, 전후로 대각(臺閣)에 들어가서는 걸핏하면 웃음거리가 되었으므로, 대신(臺臣)들이 그와 더불어 한 반열(班列)에 있는 것을 부끄러워합니다. 공의(公議)가 갈수록 더욱 격렬해지고 있으니, 청컨대 모두 개체(改遞)하소서. 경기 도사(京畿都事) 유언국(兪彦國)은 공사(公私)를 막론하고 곤장(棍杖)을 치는 것이 너무 가혹하니 열음(列邑)이 소요하고 듣는 이들이 놀라고 해괴하게 여깁니다. 청컨대 파직하고 서용하지 마소서."
하니, 모두 윤허하였다.
간원(諫院) 【정언(正言) 서지수(徐志修)이다.】 에서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감찰(監察)은 대부(臺府)의 관원으로서 규찰(糾察)하는 임무를 같이 맡고 있어 그 직임이 가볍지 아니하니, 해사(該司)의 속관(屬管)과 같이 임의로 태거(汰去)하거나 잉임(仍任)시킬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지난날 형조(刑曹)에서 초기(草記)로써 곧바로 태거시킬 것을 청하였으니, 그 경멸함이 심하였습니다. 공체(公體)를 엄히 하고 뒷날의 폐단에 신중히 대처하는 도리에 있어서 그대를 둘 수가 없으니, 청컨대 형조의 해당 당상관을 추고(推考)하게 하소서. 수령(守令)을 영격(迎擊)하는 것에 새로 금령(禁令)이 있습니다. 전 서백(西伯)이 이산 부사(理山府使) 윤득징(尹得徵)을 영격하여 파직시킨 것은 조령(朝令)에 어긋남이 있고 또한 법례(法例)에도 관계되니, 청컨대 전 평안 감사 조관빈(趙觀彬)을 추고하게 하소서. 파춘수(坡春守)가 부녀자를 능욕한 것은 도무지 사람의 윤리가 없으니, 내지(內地)로 견벌(譴罸)을 행한 것은 징계하기에 부족합니다. 그리고 사족(士族)의 부녀자를 모욕한 데 대해서는 율(律)에 비의(比擬)할 만한 조문이 없는데, 이번에 원배(遠配)하라는 수교(受敎)를 영갑(令甲)에 실었습니다. 하지만 뒷날 만약 사족의 부녀자를 구타한 자가 있다면 장차 어떻게 그 율을 가볍게 하겠습니까? 청컨대 원배한 죄인 목(穆)을 절도(絶島)에 정배(定配)하게 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윤허하지 않는다. 추고하는 일은 모두 아뢴 대로 하라."
하였다.
12월 17일 임인
헌부와 간원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12월 18일 계묘
헌부(憲府) 【지평(持平) 조경(趙擎)이다.】 에서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전라 우수사(全羅右水使) 노계정(盧啓禎)은 윗사람만 잘 섬겨 발신(拔身)했는데, 외람되게도 곤임(閫任)을 차지하자 불법적인 일로 이익을 그물질하여 하지못하는 짓이 없었습니다. 청컨대 파직하고 서용하지 마소서."
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12월 19일 갑진
달이 태미 서원(太微西垣)으로 들어갔다.
조관빈(趙觀彬)을 대사헌(大司憲)으로, 이정보(李鼎輔)를 부제학(副提學)으로, 이천보(李天輔)를 교리(校理)로, 민백행(閔百行)을 수찬(修撰)으로, 윤심형(尹心衡)을 사간(司諫)으로, 김광세(金光世)·이광식(李光湜)을 장령(掌令)으로, 민원(閔瑗)을 헌납(獻納)으로, 안집(安𠍱)을 정언(正言)으로, 정필녕(鄭必寧)을 승지(承旨)로 삼았다.
집의 김종태(金宗台)가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양국(兩局)에서 한 달에 세 번씩 조련(操鍊)하는 것은 법을 둔 뜻이 있는 것인데, 오랫동안 폐지하고 시행하지 아니하여 실로 장수는 교만해지고 병졸은 게을러질 염려가 있습니다. 해당 대장(大將)을 중추(重推)해야 마땅하겠습니다. 판결사(判決事) 김담(金墰)은 무릇 청송(聽訟)에 관계되는 일이면 사리(事理)의 곡직(曲直)은 묻지 않고 오로지 뇌물의 많고 적음만을 보고 있으니, 파직해야 마땅합니다. 경기 수사(京畿水使) 이행검(李行儉)은 3년 동안 재임(在任)하며 탐학(貪虐)한 짓을 한 것이 비교할 바가 없을 정도이니, 배로 운반한 쌀과 소금을 저가(邸家)에 가득히 쌓아 두고 있습니다. 나문(拿問)하여 엄하게 처치함이 마땅합니다."
하니, 답하기를,
"이행검의 일은 풍문(風聞)이니, 족히 믿을 것이 못된다. 그 나머지는 모두 아뢴 대로 하라."
하였다.
약방(藥房)에서 진대(診對)하였는데, 좌의정 송인명(宋寅明) 등이 같이 입시(入侍)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성묘조(成廟朝) 때는 정조(正朝)와 동지(冬至)에 백관(百官)을 인솔하고 삼궁(三宮)께 하례(賀禮)를 드리고 나서 하례를 받았다. 지금 자성(慈聖)께서 한 나라에 어머니로 임하신 지 또한 40여 년이 되었으니, 애일(愛日)의 정성이 마음속에 갑절이나 간절하다. 정조(正祖) 때에 백관을 인솔하고 먼저 자위(慈闈)께 하례하고 나서 전(殿)에 나아가 하례를 받을 것이니, 그것을 의조(儀曹) 【예조(禮曹).】 로 하여금 거행하게 하라."
하였다. 송인명이 아뢰기를,
"언양(彦陽) 고을을 옮기는 일은 전에 감사(監司)의 장문(狀聞)으로 인해 시행을 허락하는 명이 있었습니다만, 새 감사가 순행(巡行)하는 길에 이 고을에 이르러 그 고을 터와 성첩(城堞)이 온전하고 튼튼함을 보았고, 고을 백성들도 또한 옮기기를 원하는 뜻이 없었다고 합니다. 이것은 향임배(鄕任輩)들이 관리(官吏)들과 함께 모의하여 이건(移建)을 빙자해 침어(侵漁)하고 뇌물을 받아 먹고자 하는 계책에서 나온 것이었기 때문에 도신(道臣)이 이미 조사하여 다스렸다고 합니다. 따라서 전 감사는 추고(推考)하고 전 현감(縣監)은 파직해야 할 것이며, 고을을 옮기라는 명도 또한 도로 정침(停寢)함이 마땅합니다."
하니, 그대로 따랐다. 송인명이 또 권우(權祐)를 개체(改遞)한 일의 지나침을 말하니, 임금이 옳게 여겼다.
시종(侍從)의 신하로서 죄를 입어 직첩(職牒)을 거둔 자를 정원(政院)으로 하여금 초출(抄出)해서 직첩을 주도록 명하였으니, 영의정 김재로(金在魯)의 말을 따른 것이었다. 이 당시 대각(臺閣)의 신하로서 죄를 입어 여러 해 동안 수서(收敍)되지 못한 자가 매우 많았는데, 이 때에 와서 모두 풀려나게 되었다.
이때 한원(翰苑)의 권점(圈點)을 받은 자들을 이미 모두 부직(付職)하였으나, 유독 오언유(吳彦儒) 한 사람만 아직 소시(召試)하지 않고 있었으므로 임금이 오언유 한 사람만 단독으로 소시하려 하자, 우의정 조현명(趙顯命)이 한 사람만 소시하는 것은 뒷날의 폐단에 크게 관계된다 하여 불가하게 여기므로, 마침내 정침(停寢)하였다.
12월 20일 을사
예조 참판(禮曹參判) 오광운(吳光運)과 행 도승지(行都承旨) 이익정(李益怔)을 비국 당상(備局當上)에 차임(差任)하였으니, 비변사(備邊司)의 아룀을 따른 것이었다. 오광운은 재능이 조금 있었고, 무신년247) 에는 홍경보(洪景輔)와 더불어 민관효(閔觀孝)의 무리들이 역모(逆謀)가 있음을 말하였다. 그리하여 그들이 체포되어 신문을 받고 복법(伏法)되자 임금이 발고(發告)한 공(功)이 있다 하여 마침내 총애하고 기용했던 것이다. 오광운이 또 상소하여 ‘세 당(黨)도 또한 아주 미워하였다. 또 신유년248) 에는 상소하여 신축년249) ·임인년250) 의 일을 논했다가 김한철(金漢喆) 등에게 논척(論斥) 당한 적도 있었다. 그러나 임금은 매번 연석(筵席)에 임할 때마다 그의 재능을 칭찬하였다. 이익정은 종신(宗臣) 밀창군(密昌君) 직(樴)의 아들로서 임금의 두터운 지우(知遇)를 입어 보덕(輔德)으로 있다가 승지(承旨)에 발탁되었고, 또 이조 참판(吏曹參判)에 특별히 제수되었다. 대신(大臣)이 임금의 뜻이 두 사람을 향용(嚮用)하고자 하는 것을 엿보고 마침내 아뢰어 차임한 것이었다.
12월 23일 무신
사학 유생(四學儒生) 서명도(徐命道) 등이 상소하여 윤지술(尹志述)을 사현사(四賢祠)에 다시 향사(享祀)할 것을 청하니, 임금이 엄지(嚴旨)로 승정원을 나무라고 그 상소를 돌려주라고 명하였다. 며칠 뒤 학유(學儒)가 이달중(李達中) 등이 또 상소하여 서명도의 상소와 마찬가지로 청하니, 임금이 그 소장(疏章)을 돌려 주게 하고, 하교하기를,
"지금 몇 년 동안 이 한 가지 일을 빌려 현관(賢關)을 어지럽히려 하고 있다. 아! 사현(四賢)의 사당을 건립한 것은 성충(聖衷)으로 단정(斷定)하셨던 바이니, 어찌 썩은 선비들의 말로 추배(追配)해 마지 아니하여 사현이 십현(十賢)에 이르도록 할 것인가? 반드시 이런 이치는 없는 것이다. 장두(章頭)는 비록 정거(停擧)하지 않는다 해도 정원(政院)은 흐리멍덩하게 봉입(捧入)한 잘못이 있으니, 해방(該房) 승지를 중추(重推)하도록 하라."
하였다.
임금이 대신(大臣)과 제도(諸道)의 구관 당상(句管堂上)을 인견(引見)하고 양역(良役)을 사정(査正)하는 일을 의논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물이 맑으면 물고기가 모이지 않는 법이다. 지금 비록 ‘사정(査正)’이라 이름하고 절목(節目)을 반행(頒行)했지만, 어찌 더욱 백성들을 어지럽게 하지 않을 줄을 알겠는가? 만약 그 근본을 구한다면 수령(守令)을 가리고 기강을 세우는 것보다 나은 것이 없을 것이다."
하니, 조현명(趙顯命) 등이 말하기를,
"성교(聖敎)가 이에 이르니 생민(生民)의 복입니다. 국법(國法)을 자주 고치면 능히 행하지 못하니, 반드시 뇌정(雷霆)처럼 진동(振動)하고, 금석(金石)처럼 굳게 지킨 후에야 법이 정해지고 명이 시행될 수 있는 것입니다."
하였다. 또 장차 대정(大政)을 행함에 있어 무신년251) 에 군공(軍功)을 세운 사람들을 유의(留意)하여 견용(甄用)할 것을 청하니, 임금이 허락하였다.
12월 27일 임자
도목정(都目政)을 행하였으니, 이조 판서(吏曹判書) 민응수(閔應洙), 참판(參判) 원경하(元景夏), 병조 판서(兵曹判書) 김시형(金始炯)이 나아가 참여해 이틀 만에 끝냈다. 권적(權樀)을 병조 참판(兵曹參判)으로, 이천보(李天輔)를 응교(應敎)로, 서명신(徐命臣)을 교리(校理)로, 조명건(趙明健)을 정언(正言)으로, 황경원(黃景源)을 지평(持平)으로, 한억증(韓億增)을 부수찬(副修撰)으로, 서종옥(徐宗玉)을 판윤(判尹)으로, 김광세(金光世)를 집의(執義)로, 이우(李玗)를 통제사(統制使)로 삼았다. 또 승지(承旨) 조윤성(曹允成)을 발탁하여 경기 수사(京畿水使)로 삼고, 영성군(靈城君) 박문수(朴文秀)를 경기 관찰사(京畿觀察使)로 삼았다. 조윤성은 이조 참의(吏曹參議) 조명교(曺命敎)의 아들이니, 권무(權武)로서 등과(登科)하여 바야흐로 근밀(近密)에서 모시고 있다가 박문수와 연석(筵席)에서 시끄럽게 싸운 일 때문에 오랫동안 쫓겨나 있었는데, 임금이 다시 쓰고자 하여 마침내 이 직임에 제배(除拜)했던 것이다. 보덕(輔德) 이명곤(李命坤)을 특별히 발탁해 승지로 삼았다.
헌납(獻納) 민원(閔瑗)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시기(時氣)가 조화(調和)에 어긋나 여역(癘疫)이 크게 번지니, 팔로(八路)의 장문(狀聞)이 족히 마음을 놀라게 할 만합니다. 하지만 조정에서 백성을 구제하는 정사(政事)는 기근(饑饉)이 들면 지극한 방도를 쓰지 아니함이 없으나 여역의 경우는 언제나 소략한 듯하니, 다친 자를 불쌍히 여기는 본래의 뜻이 아닙니다. 옛날 송(宋)나라 인종(仁宗)도 오히려 내탕(內帑)의 진귀한 서각(犀角)을 내놓아 민간의 여역을 치료하게 했는데, 하물며 우리 전하의 백성을 자식처럼 애휼(愛恤)하시는 생각으로써, ‘시운(時運)이 때마침 그런 것이다.’라고 하며 구제할 방도를 생각하지 않을 수가 있겠습니까? 두 활인서(活人署)는 오로지 이 때문에 설치한 것인데, 관원(官員)들이 전혀 척념(惕念)하지 아니하고 이례(吏隷)들이 중간에서 제멋대로 방자하게 구니, 비단 구료(救療)하는 방도를 잃었을 뿐만 아니라 갖가지로 침학(侵虐)하기 때문에 병든 백성들이 사방 교외(郊外)에 움막을 치고 해서(該署)에 나아가지 아니한다고 합니다. 그러니 각별히 신칙하고 약물(藥物)을 넉넉히 주어 우휼(優恤)하고 구제하는 뜻을 보임이 마땅할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국가에서 무과(武科)를 보여 액수(額數)를 광범위하게 뽑는 것은 대개 인재를 수습하려는 뜻에서 나온 것입니다. 하지만 사람은 많고 벼슬자리는 적은데다 또 문지(門地)를 취하므로, 밭고랑 사이에서 늙어 죽는 자가 열에서 일고 여덟이나 됩니다. 그리고 경저(京邸)에서 숙식(宿食)하느라 가산을 기울여 재산을 날리기도 하니, 원망하는 소리가 일어나 또한 화기(和氣)를 손상시키고 있습니다. 신의 생각으로는 오 군문(五軍門)의 초관(哨官) 및 교련관(敎鍊官) 등의 직임을 모두 유천 출신(有薦出身)으로 전차(塡差)한다면, 군문(軍門)에는 인재를 얻는 기쁨이 있고 무사(武士)는 향우(向隅)의 탄식252) 이 없을 것이라고 여겨집니다. 대정(大政)을 바야흐로 행하고 있으니, 재처(裁處)하고 신칙하는 방도가 있어야 마땅할 것입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대소(大小) 관제(官制)는 본디 고례(古例)가 있다. 어찌 한 대신(臺臣)이 새로움에 힘써 진장(陳章)할 것이겠는가? 신칙하는 일은 아뢴 대로 시행하라."
하였다.
임금이 예조 판서 정석오(鄭錫五)와 승지 정휘량(鄭翬良)을 불러 《문헌통고(文獻通考)》에서 송(宋)나라 인종(仁宗)이 태후(太后)에게 친히 하례(賀禮)를 올렸을 때의 의절(儀節)을 상고하여 아뢰라고 명하였다. 이 때에 임금이 장차 원조(元朝)에 성묘(成廟)의 옛 일에 의거해 친히 동조(東朝)께 진하(陳賀)하고자 마음먹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12월 29일 갑인
헌부(憲府)에서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12월 30일 을묘
우의정 조현명(趙顯命)이 차자(箚子)를 올렸는데, 대략 이르기를,
"무신년253) 에 출정(出征)한 장사(將士)들 중에 굶주림에 시달려 유리하는 자가 많이 있으니, 심히 국가에서 노고에 보답하고 뒷날을 권장하는 바가 아닙니다. 그래서 이번 도정(都政) 때 변장(邊將)의 숫자가 많았으므로 출정했던 장사들을 차송(差送)하자는 뜻을 이미 연석(筵席)에서 아뢰어 윤허를 받았고, 개정(開政)한 뒤에도 또 특교(特敎)로 신칙했습니다만, 정목(政目)이 나옴에 미쳐서는 좋은 곳의 많은 자리는 반수가 한만(閑漫)하게 수응(酬應)한 데로 돌아갔습니다. 성교(聖敎)를 특별히 내리고 대신(大臣)이 건백(建白)한 바를 전관(銓官)이 성실하게 봉행(奉行)하지 않음이 이와 같으니, 오늘날 나라의 체통이 참으로 또한 한심스럽습니다. 동전(東銓) 【이조.】 의 정사(政事)도 또한 한 가지라도 공명한 데서 나온 것을 보지 못하였습니다. 일이 자질구레한 데 가까워 신이 꼬치꼬치 캐서 말하지는 않겠으나, 위곡(委曲)의 사사로움을 버리고 탐경(貪競)하는 습관을 억제하여 우러러 전하의 칙려(飭勵)하시는 지극한 뜻에 부응한 바가 아닙니다. 신은 병조 판서 김시형(金始炯)에게 빨리 견책(譴責)을 더하고 이조 판서 민응수는 종중 문비(從重問備)해야 마땅하다고 생각 합니다."
하니, 모두 그대로 따랐다. 김시형은 대신이 차자로 청한 것에 걸려 파직되었으므로, 서종옥(徐宗玉)을 병조 판서로 삼았다.
우윤(右尹) 이주진(李周鎭)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내일이면 해가 바뀌고 성수(聖壽)에 해가 더해지니, 성궁(聖躬)을 보양(補養)하는 방도를 조금이라도 소홀히 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옛날에 주희(朱熹)가 말하기를, ‘인주(人主)에게 권면하되 정신(精神)을 보전하고 아끼며 심신(心身)을 수습하게 하는 것을 제일가는 도리로 삼아야 한다.’고 하였는데, 선정신(先正臣) 성혼(成渾)이 이 말을 목릉(穆陵) 【선조(先祖)의 능호(陵號).】 께 진계(陳戒) 하였습니다. 오직 원하건대, ‘정신을 보전하여 아끼고 심신을 수습한다.[保惜精神 收拾身心]는 여덟 글자에 더욱 유의하소서. 이외에 대월(對越)의 정성을 더욱 극진히 하여 경고(警告)하는 하늘을 기쁘게 하는 것, 혜휼(惠恤)의 인덕(仁德)을 더욱더 미루어 굶주림에 시달린 백성들을 조금이라도 편안하게 하는 것, 성학(聖學)을 더욱 진전시키는 것, 서무(庶務)에 더욱 부지런한 것, 강극(剛克)에 더욱 힘써 무너진 기강을 조금이라도 진작시키는 것, 건극(建極)을 더욱 칙려(飭勵)해 당습(黨習)을 영원히 소멸시키는 것, 공도(公道)를 더욱 넓히는 것, 검덕(儉德)에 더욱 힘쓰는 것 등 여덟 가지 일은 수신(修身)·치국(治國)의 요체이니, 원하건대, 전하께서는 더욱 힘쓰소서."
하니, 예사 비답을 내렸다.
경상도 영천(榮川) 등의 고을에 천둥하고 번개가 치고 지진(地震)이 일어났다.
함경도 경성(鏡城)의 바닷물 1백여 리가 얼어붙어 배가 다니지 못한 것이 대엿새나 되었다.
이 달에 경기(京畿)·호서(湖西)·호남(湖南)·영남(嶺南)·해서(海西)·관서(關西)·북도(北道)에서 여역(癘疫)으로 죽은 사람이 수만 명이 되어 거의 셀 수가 없을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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