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영조실록57권, 영조 19년 1743년 1월

싸라리리 2025. 9. 26. 1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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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 1일 병진

임금이 면복(冕服)을 갖추고 인정전(仁政殿) 섬돌 위에 나가 종친(宗親)과 문무 백관을 거느리고 대왕 대비전(大王大妃殿)께 진하(陳賀)하였다. 예식(禮式)이 끝나자 전(殿)에 올라가 백관의 하례(賀禮)를 받았다. 하루 전날 액정서(掖庭署)에서 한 가운데에다 북향으로 판위(版位)를 설치하였고, 헌현(軒懸)과 의장(儀仗)은 보통 의식(儀式) 때와 같이하였다. 북[鼓]을 쳐서 삼엄(三嚴)을 알리자 임금이 판위로 나아가 네 번 절하고 나니, 봉치사관(捧致詞官)이 북향하여 꿇어앉아 고(告)하기를, ‘국왕(國王) 신(臣) 모(某)는 삼가 새해를 맞이하여 애일(愛日)001)  의 정성이 더욱 간절합니다. 대왕 대비 전하께서는 오롯한 덕(德)을 지니시어 자애롭고 순량(順良)하신지라, 4기(紀)002)  동안 적휘(翟褘)003)  를 입으셨습니다. 이제 화창한 봄이 시작되니, 끝없는 큰 복을 누리소서.’ 하였다. 읽기를 마치자, 근시(近侍)가 전해 받들고는 끓어앉아 근시에게 주니, 근시는 상전(尙傳)에게 전하였다. 상전이 받아 가지고 들어갔다가 얼마 후에 나와서 대비전의 답교(答敎)를 근시에게 전하기를, ‘정월 초하루의 기쁨을 전하와 함께 하노라.’ 하니, 임금이 판위에서 내려와 듣고난 뒤 또 네 번 절하였다. 이어 막차(幕次)로 들어가 면복을 벗고 원유관(遠遊冠)·강사포(絳紗袍)로 갈아입은 뒤 보통 의식 때와 마찬가지로 하례를 받았다.

 

예조 판서 정석오(鄭錫五)가 숙묘 경인년004)  의 고사(故事)를 인용하면서 아뢰기를,
"성수(聖壽)가 이미 50이 되셨습니다. 그리고 위로는 동조(東朝)를 모시고 아래로는 동궁(東宮)이 있으니, 칭경(稱慶)하고 잔치를 베푸는 것이 계술(繼述)하는 도리에 참으로 합당하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한 가지 정사(政事)도 행하지 못하였고 한 가지 은혜도 강구하지 못하였으니, 내가 실로 낯이 부끄럽다. 무슨 마음으로 잔치를 받는단 말인가? 선조(先朝) 을유년005)  에는 진연(進宴)을 행할 것을 청하여 병술년006)  에 비로소 행하였으며, 경인년의 고사는 성수(聖壽)가 쉰이 되었기 때문이 아니라 곧 성후(聖候)가 회복된 경사 때문이었으니, 오늘날 끌어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지금 내가 위로 자성(慈聖)을 받들고 있으니, 어찌 칭상(稱觴)007)  하기를 원하지 않으랴마는, 자교(慈敎)가 겸억(謙抑) 하신지라 감히 우러러 청하지 못하고 있다. 나의 지극한 소원은 오직 조용히 지내고 싶은 것일 뿐이니, 경(卿)들은 마땅히 이 일을 청해서는 안될 것이다."
하였다. 대신(大臣) 등이 말하기를,
"‘지극한 소원’이란 하교는 신 등이 감히 받들어 들을 바가 아닙니다. 오로지 진연하는 일을 정성껏 동조께 우러러 청하는 것이 신 등의 소망입니다."
하였다.
사신은 말한다. "성상께서 매번 신축년008)  ·임인년009)  의 무옥(誣獄)이 성궁(聖躬)을 위협하고 핍박한 것 때문에 항상 임금의 지위를 헌신짝처럼 벗어버릴 뜻이 있어 ‘고죽청풍(孤竹淸風)’010)  네 글자를 벽위에 써 걸어 두었는데, 고심(告心)으로 조제(調劑)하기에 미쳐서는 사교(辭敎)에 누차 나타내었지만 조정이 조용하지 아니하고 당의(黨議)가 횡행하니, 서글픈 나머지 즐거워하지 아니하고 심지어 ‘지극한 소원’이란 등의 하교를 여러 신료를 인접(引接)할 때 꺼내기까지 하였으니, 이 어찌 다만 성심(聖心)의 번뇌일 뿐이랴! 곧 뭇 신하들의 죄이니, 통탄스런 마음을 금할 수 있겠는가?".


【태백산사고본】 42책 57권 1장 A면【국편영인본】 43책 79면
【분류】왕실-의식(儀式) / 왕실-국왕(國王) / 역사-사학(史學)


[註 004] 경인년 : 1710 숙종 36년.[註 005] 을유년 : 1705 숙종 31년.[註 006] 병술년 : 1706 숙종 32년.[註 007] 칭상(稱觴) : 헌수(獻壽).[註 008] 신축년 : 1721 경종 원년.[註 009] 임인년 : 1722 경종 2년.[註 010] ‘고죽청풍(孤竹淸風)’ : 백이(伯夷)·숙제(叔齊)의 청풍(淸風)같은 절의(節義)를 뜻함. 고죽(孤竹)은 상(商:殷나라의 처음 이름)나라 때의 제후(諸侯)의 나라 이름인데, 신농씨(神農氏)의 자손이 세웠다고 하며, 백이·숙제는 그 임금[孤竹君]의 아들이라 함.
사신은 말한다. "성상께서 매번 신축년008)  ·임인년009)  의 무옥(誣獄)이 성궁(聖躬)을 위협하고 핍박한 것 때문에 항상 임금의 지위를 헌신짝처럼 벗어버릴 뜻이 있어 ‘고죽청풍(孤竹淸風)’010)  네 글자를 벽위에 써 걸어 두었는데, 고심(告心)으로 조제(調劑)하기에 미쳐서는 사교(辭敎)에 누차 나타내었지만 조정이 조용하지 아니하고 당의(黨議)가 횡행하니, 서글픈 나머지 즐거워하지 아니하고 심지어 ‘지극한 소원’이란 등의 하교를 여러 신료를 인접(引接)할 때 꺼내기까지 하였으니, 이 어찌 다만 성심(聖心)의 번뇌일 뿐이랴! 곧 뭇 신하들의 죄이니, 통탄스런 마음을 금할 수 있겠는가?".

 

권농(勸農)의 윤음(綸音)을 8도와 양도(兩都)011)  에 내리며 말하기를,
"삼양(三陽)012)  이 회태(回泰)013)  하니, 봄철의 농사일이 가까이 닥쳤다. 해마다 세수(歲首)에 반드시 권농하는 뜻을 내렸건만 문구(文具)가 되고 말아 마음속으로 항상 개탄스럽게 생각해 왔다. 나라는 백성을 근본으로 삼고 백성은 먹는 것을 근본으로 삼는데, 먹는 것의 근본이란 농사이다. 아! 제도(諸道)의 도신(道臣)과 양도의 유수(留守)는 공경히 이러한 뜻을 체념(體念)하여 힘쓰고 또 힘쓸지어다."
하였다.

 

1월 2일 정사

왕세자(王世子)가 홍진(紅疹)을 앓았다. 약원(藥院)에 명하여 괴원(槐院)014)  으로 옮겨 숙직하게 하고, 마침내 5일의 조참(朝參)도 정지하게 하였다.

 

1월 3일 무오

영부사(領府事) 서명균(徐命均)이 병 때문에 차자(箚子)를 올려 겸임하고 있던 도제거(都提擧)를 사직하니, 임금이 우악한 비답을 내리고 허락하지 않았다.

 

1월 5일 경신

왕세자의 홍진 증세가 조금 나아졌다. 내국(內局)에 명하여 본원(本院)에서 돌아가며 숙직하게 하였다.

 

약방 제조(藥房提調) 정석오(鄭錫五)가 임금의 환후가 바야흐로 조용히 조섭(調攝)하는 중에 있다 하여 태묘(太廟)의 전알(展謁) 기일을 물려 행할 것을 청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그날은 바로 보춘(報春)하는 날이다. 어찌 조금이라도 물릴 수가 있겠느냐?"
하고, 끝내 허락하지 않았다.

 

병조 참판 권적(權𥛚)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삼원(三元)015)  이 회태(回泰)하여 만물이 다시 살아나기 시작하니, 이는 바로 작은 것은 떠나가고 큰 것이 오는 하나의 큰 기회입니다. 따라서 인군(人君)이 천도(天道)를 본받아 도리를 행하고 옛것을 버리고 새롭게 할 때가 바로 이때입니다."
하고, 이어서 짧은 잠(箴) 8장(章)을 올렸다. 이르기를,
"대저 마음은 만 가지 변화의 본원(本源)이므로, 맨먼저 마음을 바로 잡아야 하고, 뜻은 만 가지 일의 근원이므로 이어 뜻을 세워야 합니다. 그리고 치도(治道)는 공평하게 함을 가장 큰 것으로 여기므로 황극(皇極)을 세움이 그 다음이 되고, 임금의 덕은 마음을 비우고 받아들임을 귀하게 여기므로 간언(諫言)을 받아들임이 그 다음이 되고, 몸을 닦는 요체는 의리(義理)를 강구해 밝히는 것을 넘지 아니하므로 전학(典學)이 그 다음이 되고, 이연(貽燕)016)  의 계책으로는 원량(元良)을 가르치는 것보다 더 큰 것이 없으므로, 저사(儲嗣)017)  를 가르치는 것이 또 그 다음이 됩니다. 나라의 운수를 점치는 것은 민심(民心)의 거취(去就)에 달려 있고, 백성의 목숨을 무겁게 여김은 형옥(刑獄)을 신중히 살핌에 있으므로 또 백성을 애휼(愛恤)하고 형벌을 신중히 하는 것이 그 끝이 됩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경(卿)의 잠을 보건대, 그 정성을 숭상할 만하니, 마땅히 힘쓰겠노라."
하고, 진달한 8장의 잠은 유중(留中)하라고 명하였다.

 

1월 7일 임술

이조 판서 민응수(閔應洙)가, 우의정 조현명(趙顯命)의 ‘사정(私情)을 따랐다.’는 배척 때문에 상소하여 사직(辭職)하였으나, 예사 비답을 내렸다.

 

예조에서 아뢰기를,
"왕세자의 홍진 증세가 다행히도 신명(神明)의 부호(扶護)에 힘입어 빨리 회복되기에 이르렀습니다. 옛날의 예(例)를 참고하건대, 경자년018)   동궁(東宮)의 홍진이 회복된 뒤와 계축년019)   중궁전(中宮殿)의 수두(水痘)가 회복된 뒤와 을묘년020)   원자(元子)의 수두가 회복된 뒤에 모두 고묘(告廟)·반사(頒赦)·진하(陳賀)의 의절(儀節)을 행하였습니다. 이제도 또한 마땅히 이에 의해 거행해야 하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삼가(三加)021)  가 가까운 시일 안에 있고 칭경(稱慶)이 멀지 아니하니, 어찌 겹쳐서 할 필요가 있겠느냐?"
하고, 제도(諸道)에 명하여 전문(箋文)만 봉(封)해 올리고 물선(物膳)은 봉해 올리지 말라고 하여 민폐(民弊)를 덜게 하였다. 경과(慶科) 역시 여러 경사(慶事)를 합쳐서 설행(設行)하게 하였다.

 

경기 감사 박문수(朴文秀)가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조정에는 본디 사체(事體)가 있고 군문(軍門)에는 또한 등급이 엄격한 뒤에야 아랫사람이 윗 사람을 범하지 아니하는 것입니다. 비록 본병(本兵)의 장(長)으로서 각 영문(營門)의 장교(將校)들에게 그[渠]라고 불러도 오히려 사체를 손상시켰다고 할 것인데, 하물며 영문의 장교가 본병의 장관에게 '그'라고 일컬었으니, 그 등급을 무너뜨림이 더욱 어떠합니까? 삼군(三軍)이 이를 듣고 한심하게 여기지 아니함이 없었습니다. 생각건대 우리 조종(祖宗)께서 관제(官制)를 정하시며 문무(文武)의 구별을 엄격히 하신 것은 대개 전날을 돌아보고 뒷날을 염려하신 깊은 뜻에서 나왔던 것입니다. 저 기성(騎省)022)  의 낭관(郞官)은 한 조(曹)의 서료(庶僚)에 지나지 아니하는데도 길에서 당상관인 무신을 만나면 무신이 오히려 말을 돌려 피하는 경우가 있으니 체통의 엄격함을 볼 수 있습니다. 하물며 연석(筵席)에서처럼 체통이 지극히 엄중한 경우야 말해 무엇하겠습니까? 비록 대료(大僚)라 할지라도 미관(微官)더러 또한 전(展) 위에서는 너니 네니 할 수가 없거늘, 하물며 이 본병은 나라의 중임(重任)인데도 무장(武將)이 이에 감히 배척하면서 '그'라고 불러댔으니, 그 무례함이 심하였습니다. 신이 조정을 욕되게 한 것을 어찌 족히 말할 수 있겠습니까? 대저 연석에 올라 의절(義絶)을 잃은 것은 신과 무장(武將)이 죄가 실로 꼭 같습니다. 그런데 그 죄를 의정할 때 한 연신(筵臣)이 추조(秋曹)023)  의 ‘서로 싸운 율(律)’로 의정하였다고 합니다. ‘서로 싸운 것’이란 곧 여항(閭巷)에서 서로 때리고 욕한 경우를 말합니다. 신과 무장은 모두 재신(宰臣)인데 이에 도리어 추조의 율에 비의(非擬)한단 말입니까? 신의 몸과 이름이 이미 모욕을 당했으니, 얼굴을 들고 다닐 길이 없습니다. 오직 부월(鈇鉞)의 죽임을 기다릴 뿐입니다."
하니, 임금이 예사 비답을 내렸다. 대개 박문수가 병조 판서가 되었을 때 훈장(訓將) 구성임(具聖任)과 연석에서 서로 꾸짖고 욕을 하며 너니 네니 하기에 이르렀던 적이 있었으므로, 그 상소가 이와 같았던 것이다. 박문수는 성품이 거칠고 패려궂어 일찍이 윤유(尹遊)와 서로 임금 앞에서 꾸짖고 욕을 하여 대간(臺諫)의 논척(論斥)까지 받았는데, 또 구성임과 서로 싸웠으므로 임금이 둘다 죄를 주었다. 그러나 구성임은 무장으로서 문신 재상을 능욕하였으니, 무신의 교만 방자한 조짐을 식견 있는 사람들이 우려하였다.

 

1월 9일 갑자

왕세자의 홍진 증세가 회복되었으므로, 약원(藥院)에서 직숙(直宿)한 노고에 대해 상을 내렸다. 도제조 김재로(金在魯)에게는 내구마(內廐馬)를 하사하고, 제조        정석오(鄭錫五)·부제조        이익정(李益炡)은 한 자급(資級)을 더하였으며, 한림(翰林)과 주서(注書)는 6품으로 승진시켰다. 그리고 시강원(侍講院)과 의관(醫官) 이하에게도 모두 차등 있게 상을 내렸다.

 

이수항(李壽沆)을 도승지로 삼았다.

 

영의정 김재로(金在魯)가, 태묘(太廟)의 전알(展謁)이 내일로 닥쳤는데 장마가 여러 날 계속되고 있다 하여 차자를 올려 중지할 것을 청하였으나, 임금이 따르지 않았다.

 

장령 민우(閔堣)가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신이 듣건대, 천도(天道)는 10년이 되면 한바퀴를 돌아 변하고 60년이 지나면 끝나서 극(極)에 이른다 합니다. 그리고 변함에 있어서는 반드시 통(通)함이 있고 그 극에 달함에는 반드시 회복함이 있다 합니다. 이것은 이수(理數)의 본디 그러한 바이고 인사(人事)의 당연한 것입니다. 전하께서 즉위하신 지 이미 20년이라 재차 반복된 운수를 당하였고, 올해는 갑자(甲子)가 또 60년이 한번 끝나는 운수이니, 지금은 기기(氣機)를 되돌리고 비태(否泰)함을 서로 이을 때입니다. 이제 그 기회를 어긋나게 할 수 없음에도 돌아보건대 지금 재이(災異)가 거듭 닥치고 기근이 해를 이으니, 오늘날 국가에서 마땅히 설시(設施)하고 강구하는 바가 있어 위로는 하늘의 꾸지람에 답하고 아래로는 민생의 곤고(困苦)함을 늦추어 주어야 할 것입니다. 이는 일시적인 미봉책으로 해결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니, 반드시 크게 경동(警動)하고 크게 진작(振作)한 뒤에야 나랏일을 거의 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오로지 전하께서는 뜻을 굳세게 가지시어 혹시라도 저지되거나 꺾이고 물러나 위축되지 마시고, 처음을 잘 시작하여 훌륭한 끝맺음을 가져오도록 정월 초하루에 체원(體元)한 도리에 더욱 힘쓰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진계한 바를 마땅히 힘쓰겠노라."
하였다.

 

정언 조명건(趙明健)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북로(北路)는 기근이 거듭 든데다가 전염병까지 겹쳤습니다. 이런 때에 안찰(按察)하는 관원은 참으로 여러 방면으로 구획(區劃)해 주휼(賙恤)하고 안정시키며 보호하는 방도로 삼아야 마땅한 것입니다. 그런데 함경 감사 윤용(尹容)은 작년의 진정(賑政)이 이미 지극히 조잡하고 허술하였으므로 비방을 크게 불러 일으켰으며, 지금처럼 근심거리가 눈에 가득한 날에 이르러서는 팔짱을 끼고 편안히 앉아 있으면서 별달리 시설(施設)하는 일이 없습니다. 그리고 정사(政事)는 총애하는 편비(偏卑)에게 내맡겨 도리에 어긋난 일이 많으니, 체개(遞改)를 명함이 마땅하겠습니다. 세도(世道)가 점차 떨어져 관방(官方)이 갈수록 문란해지고 있습니다. 전 참의(參議) 김우철(金遇喆)은 누차 주군(州郡)을 맡았는데, 오로지 궤휼과 거짓을 행하여 그 추비(麤鄙)하고 탐오(貪汚)한 정상을 사람들이 모두 침을 뱉고 욕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저만 그 추세(趨勢)를 타서 후한 뇌물을 썼기에 외람되게도 그런 사실이 없다는 말을 얻어 곧 쓸 만한 사람이 되었으니, 전후의 통의(通擬)는 남우(濫竽)024)  가 아님이 없습니다. 마땅히 사판(仕版)에서 깎아 버려야 할 것입니다. 곤수(坤帥)의 직책은 책임이 심히 무거운 것입니다. 그런데 통진 부사(通津府使) 이의풍(李義豐)은 북관(北關)에서 당한 바가 비록 뜻하지 아니한 데서 나온 것이라고는 하지만, 자신이 무수(武帥)가 되어 아녀자의 손에 찔려 거의 목숨을 보전하지 못할 뻔하였습니다. 겁이 많고 형편없이 무능하여 융원(戎垣)의 웃음거리가 되었으므로, 해곤(海閫)에 차견(差遣)한 것이 이미 물정(物情)에 어긋났는데 통제사(統制使)에 수의(首擬)하였으니, 더욱 적절하지 아니한 일입니다. 다시는 곤수(閫帥)에 의망(擬望)하지 않음이 마땅하겠습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윤용은 청백리(淸白吏)의 아들로 그 아비의 풍도가 있어 그 직무에 성실하고 부지런하였으며 기민(飢民)을 구제하였으니, 지금 논척(論斥)한 것은 지나친 것이다. 김우철은 이치(吏治)에 부지런하였고, 이의풍이 지난 번에 논척받은 것은 또한 지나친 일이있다. 또 어찌하여 이 전례를 따른단 말인가? 마땅히 공정한 마음을 가지기에 힘써 새해와 더불어 함께 새로워지도록 하라."
하였다.

 

지평 황경원(黃景源)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지난번 이선태(李善泰)의 상소는 신이 사관(史官)으로 대죄(待罪)하고 있을 때 새 제도에 대해 굳게 다툰 일을 가지고 심지어 ‘사당(私黨)에게 명예를 바라고 국론(國論)에 배치된 것이었다.’라고까지 하였습니다. 따라서 참으로 이 말과 같다면 죽어도 남는 죄가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신은 관제(管制)를 새로 고치는 날 감히 고사(故事)를 끌어대었고, 물러나서는 또 상소를 써서 감히 관각(館閣)에서 회권(回圈)025)  하는 잘못을 논하였던 것이니, 그 뜻은 단지 사천(史薦)을 무겁게 여기는 데서 나왔을 뿐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선태는 신을 구함(構陷)하는데 급하여 도리어 억지로 다투었다는 것을 신의 죄로 삼았습니다. 예로부터 인신(人臣)이 진언(進言)한 것은 명예를 바라서가 아니었습니다. 그러니 만약 그 진언한 자취에 집착하여 ‘저 사람은 명예를 바라고 있다.’고 배척한다면, 이 조정에는 아마도 끝내 간쟁(諫爭)하는 신하가 없게 될 것입니다. 신이 가만히 살펴보건대, 근년 이래로 언로가 막힌 지 오래 되었습니다. 대간(臺諫)이나 논사(論事)하는 신하가 한번 윗 사람의 비위를 거스르면, 즉각 위험한 법에 걸려들어 혹은 폐출(廢黜)되고 혹은 멀리 귀양을 가서 몇 해를 지나도록 용서받지 못하는 경우가 자주 있습니다. 이 때문에 오늘날 여러 신하들은 언로를 마치 죽을 곳을 들어가는 것처럼 보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 벼슬에 제수한다는 명(命)이 문전에 닥치면 벌벌 떨며 오로지 면할 수 없음을 두려워합니다. 비록 몇 줄의 사면(辭免)하는 문자(文字)라 할지라도 의심하고 두려워한 나머지 여러 차례 살펴보고 갖가지로 꺼립니다. 그러니 어찌 능히 입을 열고 기(氣)를 내어 어느 한 사람인들 탄핵하고 어느 한 가지 일인들 논박하여 그 책임을 지운 뜻에 부응할 수가 있겠습니까? 이번에 전하께서 특별히 유사(有司)에게 명하시어 무릇 시종(侍從)으로 국사(國事)를 논한 신하에게 고신(告身)을 모두 돌려주게 하셨으니, 심히 성대한 은덕이었습니다. 그러나 신은 그래도 언로가 열리지 않을 것을 두려워하고 있으니, 위에서는 간언(諫言)을 기뻐하는 성실함이 없고 아래에서는 죄를 두려워하는 마음을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원하건대 전하께서는 대각(臺閣)을 예우(禮遇)하시고 언로를 활짝 여시며, 과감하게 말하는 사람에게 상을 두터이 내리시고 광정(匡正)하지 못하는 자에 대한 형벌을 밝히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수시로 마음에 힘쓸 것이니, 반드시 사직할 것은 없다."
하였다.
사신은 말한다. "우리 나라의 관제(官制)는 내한(內翰)을 가장 중요하게 여겨 천거하는 법을 만들어 두었다. 그래서 천거 때가 되면 향(香)을 피우고 하늘에 맹세하는 말이 있으니, 대개 사사(史事)를 중히 여기고 천거하는 법을 엄히 여기기 때문이다. 지난 신유년026)  에 원경하(元景夏)와 정우량(鄭羽良)의 무리가 천거법을 혁파하자는 의논을 주장하자 임금이 그대로 따랐었는데, 황경원은 이때 사국(史局)에 있었는지라 상소에 이이첨(李爾瞻)의 관각 회권(館閣會圈)의 고사를 끌어대며 논척하였다. 이에 원경하가 심히 노여워한 나머지 이선태를 불러 상소케 하고 황경원이 관제(館制)에 대해 억지로 다툰다며 제함(擠陷)하여 죄주고자 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이때에 와서 황경원이 처음으로 대지(臺地)에 들어와 스스로 변명했던 것이다."


【태백산사고본】 42책 57권 3장 A면【국편영인본】 43책 80면
【분류】정론-정론(政論) / 정론-간쟁(諫諍) / 역사-사학(史學) / 인물(人物)


[註 025] 회권(回圈) : 새로 예문관 대제학(大提學) 이하 각급 관원의 적임자를 선출할 때에 전임자 등이 모여서 피선(被選)될 사람의 성명 위에 권점(圈點)을 찍는 것. 이 권점을 많이 얻은 사람이 임명됨을 예로 함.[註 026] 신유년 : 1741 영조 17년.
사신은 말한다. "우리 나라의 관제(官制)는 내한(內翰)을 가장 중요하게 여겨 천거하는 법을 만들어 두었다. 그래서 천거 때가 되면 향(香)을 피우고 하늘에 맹세하는 말이 있으니, 대개 사사(史事)를 중히 여기고 천거하는 법을 엄히 여기기 때문이다. 지난 신유년026)  에 원경하(元景夏)와 정우량(鄭羽良)의 무리가 천거법을 혁파하자는 의논을 주장하자 임금이 그대로 따랐었는데, 황경원은 이때 사국(史局)에 있었는지라 상소에 이이첨(李爾瞻)의 관각 회권(館閣會圈)의 고사를 끌어대며 논척하였다. 이에 원경하가 심히 노여워한 나머지 이선태를 불러 상소케 하고 황경원이 관제(館制)에 대해 억지로 다툰다며 제함(擠陷)하여 죄주고자 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이때에 와서 황경원이 처음으로 대지(臺地)에 들어와 스스로 변명했던 것이다."

 

부응교 이천보(李天輔)가 상호하여 공자(孔子)의 ‘50에 천명(天命)을 알았다.’는 말을 인용해 스스로 게을러지지 말고 성학(聖學)에 더욱 힘쓸 것을 청하니, 임금이 우악한 비답을 내렸다.

 

1월 10일 을축

임금이 태묘(太廟)에 나아가 전알례(展謁禮)를 행하였다.

 

조관빈(趙觀彬)을 판윤(判尹)으로 삼았다.

 

1월 11일 병인

임금이 주강(晝講)을 행하였다. 《심경(心經)》을 강(講)하였는데, 강관(講官)이 ‘성(誠)’자의 뜻을 논하기를,
"사마광(司馬光)의 평생의 일에 남을 대하여 말할 수 없는 것이 없었던 것은 대개 평생을 통하여 ‘성’이란 한 글자에 공력(工力)을 썼기 때문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사마광에게 이미 ‘성’자의 공력이 있었다면 어찌하여 조위(曹魏)를 정통(正統)으로 여겼단 말인가?"
하였다. 시독관(侍讀官) 이성중(李成中)이 말하기를,
"지(知)와 행(行) 두 쪽으로 나아가는 것이 학문의 공부입니다. 그런데 학자중에는 혹 ‘지’쪽이 나은 사람도 있고 혹 ‘행’ 쪽이 나은 사람도 있습니다. 사마광은 조존(操存)은 독실(篤實)하였으되 ‘지’는 혹 미치지 못한 것이 있었기 때문에 그러했던 것입니다."
하였다. 강이 끝나자, 대신(大臣)과 비국(備局)의 당상(堂上)을 소견하였다. 좌의정 송인명(宋寅明)이 말하기를,
"이제 새해를 맞았으니, 청컨대 뜻을 더하여 진려(振勵)해 휴명(休命)을 맞이하고 나라의 근본을 튼튼하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학문에 부지런한 것은 우리 나라의 가법(家法)이므로 오히려 또 그 고달픔을 잊고 힘써 일할 즈음에도 강(講)에 임하고 있다. 그리고 유신(儒臣)이 지어 올린 춘첩자(春帖子)에도 또한 경연(經筵)을 장차 연다는 말이 있어, 그 새해에 첨근(瞻覲)하는 뜻이 있음을 알았으므로 특별히 강(講)을 열도록 명한 것이다. 그리고는 이어서 경(卿) 등을 불렀노라."
하였다. 영의정 김재로(金在魯) 등이 진연(進宴)을 설행(設行)할 것을 거듭 청하자, 임금이 말하기를,
"흉년이 들어 백성들이 곤고(困苦)하다. 진연을 설행하는 것이 비록 예전의 예(例)가 있다고는 하지만 마음에 어찌 감히 편안할 수 있겠는가? 자전(慈殿)의 육순(六旬)이 단지 3년 뒤이니, 지금 만악 자전께만 홀로 행하기를 청한다면 나의 지극한 정을 펼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원조(元朝)의 진하(陳賀)는 다만 나의 애일(愛日)의 정성을 폈던 것일 뿐 아니라 또 경 등에게 진청(陳請)하는 길을 열어 주려고 했던 것이었다."
하였다. 김재로가 말하기를,
"성상께서 동조(東朝)께 청함을 허락받으시고 굽어 군정(群情)을 따르신다면 상하의 지극한 정을 모두 펼 수 있을 것입니다."
하고, 송인명이 말하기를,
"이미 경인년027)  의 고사가 있으니, 전하께서는 매사에 있어서 선조(先朝)를 계술(繼述)함을 생각하심이 마땅합니다. 그리고 성수(聖壽)가 육순(六旬)에 이르렀으니, 또 마땅히 영수각(靈壽閣)에 드셔야 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나는 다른 소원은 없다. 단지 세 가지 일이 있을 뿐이다. 조정에 붕당(朋黨)이 없고 백성이 무사한 것이 지극한 즐거움이고, 고사(故事)를 추술(追述)하여 기사(耆社)028)  에 이름을 쓰는 것이 평소의 소원이며, 원량(元良)이 점차 장성해 국사를 맡기고 짐을 벗어 한가롭게 지내는 것이 고심(苦心)하는 바이다."
하였다. 여러 신하들이 모두들 몸소 동궁(東宮)을 가르치고 일을 만나면 깨우치며 산림(山林)을 초치해 훈도(薰陶)됨이 있도록 할 것을 청하니, 임금이 옳게 여겼다.
우의정 조현명(趙顯命)이 말하기를,
"성상께서 양역(良役)의 인족(隣族)을 침어(侵漁)하는 폐단을 익히 헤아리시어 사정(査正)할 것을 명하셨습니다. 그런데 지금 양역의 궐액(闕額)은 전적으로 백성들이 도피(逃避)하는 데서 말미암는 것으로 혹은 노적(奴籍)에 모입(冒入)하기도 하고 혹은 중이 되기도 하여 그러한 것입니다. 현재 각도(各道) 양정(良丁)의 성책(成冊)에 또한 4,5만 명이 있으니, 이 3만 명의 한민(閑民)을 양역의 도고(逃故)에 충정(充定)시킨다면 인족의 폐단을 제거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제도에 신칙하라고 명하였다. 송인명이 말하기를,
"근래 듣건대 관동(關東) 백성의 습속이 매우 악하다 합니다. 비록 고성(高城)의 관장(官長)을 살해한 변고로 보더라도 또한 그 흉완(凶頑)함을 알 만합니다. 이는 감사(監司)가 능히 오랫동안 직임에 있지 못하여 호령(號令)이 열읍(列邑)에 행해지지 못하고, 전역(田役)이 고르지 아니하여 백성에게 항산(恒産)이 없는 소치에서 말미암는 것입니다. 유척기(兪拓基)가 묘당(廟堂)에 있을 때 감사를 구임(久任)시키고 그 가족을 데려가는 것을 허락하도록 청하였는데, 영수(營需)를 더 줄 수가 없었기 때문에 그냥 그대로 그만두고 말았습니다."
하니, 임금이 영의정 김재로에게 물어 보았다. 김재로가 말하기를,
"외번(外藩)에 가족을 데려가는 것을 허락하지 아니한 데는 또한 보존할 만한 고례(古例)가 있습니다. 또 사력(事力)을 지급하기 어려우니, 반드시 다시 허락할 것은 없겠습니다."
하였다.

 

승지 이명곤(李命坤)이 말하기를,
"신이 서연(書筵)에 사부(師傅)와 빈객(賓客)이 입참(入參)하는 것을 보았더니, 동궁(東宮)이 존경하고 꺼리는 뜻이 있었습니다. 사부는 비록 자주 입참하지 못한다 하더라도 빈객은 번갈아가며 입대(入對)해야 마땅하겠습니다. 그리고 만약 빈객이 없을 경우 서연을 열 수 없다는 뜻을 따라 신칙함이 좋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허락하였다.

 

1월 12일 정묘

다시 원종 공신(原從功臣)의 장손(長孫)은 5대(代)에 한해 승음(承蔭)하게 하였다. 이에 앞서 정훈(正勲)의 자손이 승음할 경우, 장손을 아울러 3세로 한정하는 것이 옛 법이었다. 그런데 뒤에 정훈의 경우를 9세로 한정함에 따라 원종 공신의 적장손(嫡長孫) 또한 5세로 늘렸다가 기유년029)  에 다시 정훈과 원종 공신을 옛 법에 의거하여 시행하였었는데, 이때에 이르러 다시 정훈은 9세로 한하고 원종 공신은 5세로 한하는 제도를 정하였다.

 

헌부 【장령 이광식(李光湜)이다.】 에서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통제사(統制使) 이우(李玗)는 너무 젊어 애초에 중임(重任)을 맡길 때가 아니고, 일을 겪은 것이 오래 되지 아니하여 또 노숙하고 재능 있는 사람을 쓴다는 뜻에도 맞지 아니하므로, 제목(題目)이 내려지자 물정(物情)이 만족하지 아니합니다. 개차(改差)를 명하십이 마땅합니다."
하였으나, 임금이 따르지 않았다.

 

1월 13일 무진

형조(刑曹)에서 아뢰기를,
"지난 번에 대계(臺啓)로 인하여 서부(西部)의 피살된 여자 변씨(邊氏)에 대해 경조(京兆)에서 낭청(郞廳)을 파견하여 양주 목사(楊州牧使)와 함께 안동(眼同)030)  하여 검시(檢屍)하게 하였습니다. 시장(屍帳)과 서계(書啓)를 본조(本曹)에 계하(啓下)한 뒤 변씨의 생질 태일(泰一)에게 반복하여 구문(究問)하였더니, 이른바 변씨 여인을 때려 죽인 사람은 곧 유학(幼學) 이제신(李濟身)의 처 홍씨(洪氏)였습니다. 신 등이 《대전(大典)》을 가져다 상고해 보았더니, ‘사족(士族)의 부녀자가 사죄(死罪)를 범했을 경우 먼저 수금(囚禁)하고 뒤에 아뢴다.’는 글이 있었습니다. 따라서 이제신의 처 홍씨는 마땅히 《대전》에 의해 수금하고 핵처(覈處)해야 할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옳게 여겼다.

 

1월 14일 기사

이조 판서 민응수(閔應洙)가 또 상소하여 사직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전지(銓地)에 사람을 선발하는 것은 마땅히 사사로움을 용납해서는 안될 것이며, 한 가지라도 혹시 잘못이 있다면 그 죄는 진실로 용서할 수 없는 것입니다. 신이 범한 죄를 대신(大臣)이 아직 낱낱이 들어 지척(指斥)하지 아니하였으나, 사람들의 견해는 각자 다르고 험한 길은 평평히 하기 어려운 까닭에 대신이 만족하지 아니하는 것은 진실로 사세(事勢)가 그러합니다. 그런데 앞서는 그 공정하지 아니함을 논척(論斥)하고 뒤에는 또 그 해이(解弛)함을 경칙(警飭)했다가 끝에 가서는 또 옳지 않다는 죄목을 더하였는데 또한 그 관계된 바의 일을 명백하게 말하지 않았습니다. 이른바 ‘위곡(委曲)·탐경(貪競)’ 등의 말은 또한 반드시 가리키는 바가 있는데, 지척지간에서 굽어 물어보실 때에는 또 어찌하여 사실대로 우러러 대답하지 아니한단 말입니까? 과연 입에 내기 어려운 말이라면 애초에 무슨 까닭으로 장주(章奏)에 올렸습니까? 남을 속박(束縛)하고자 함은 심각하고 팽팽하며, 그 말의 뜻은 은밀하고 모호하여, 남으로 하여금 의아심을 갖고 현혹되게 하니, 스스로 변명할 길이 없습니다. 비단 신의 죄명이 아주 캄캄하여 밝혀지지 못할 뿐 아니라, 또한 대신이 공정함을 지키며 엄정(嚴正)하게 처심하는 체모도 아닌 것입니다. 어찌하여 일찍 처분을 내리지 아니하시고, ‘대신의 심각한 뜻이 없었다.’고 핑계하며 오로지 강박(强迫)만을 일삼아 한갓 나라의 체통을 손상시키시는 것입니까
"
하였다. 참판 원경하(元景夏) 또한 상소하여 스스로 변명하니, 모두 예사 비답을 내렸다.

 

이조 판서 민응수(閔應洙)와 참판 원경하(元景夏)를 체임(遞任)시키라고 명하였다. 대개 조현명(趙顯命)이 차자(箚子)로 논척(論斥)한 것 때문에 누차 소명(召命)을 어기고 나아가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특지(特旨)로 이익정(李益炡)을 이조 참판으로 삼았다.

 

1월 15일 경오

임금이 동궁(東宮)의 홍진 증세가 회복되었다 하여 명정전(明政殿)에서 백관의 하례를 받고, 교서(敎書)를 반포해 중외(中外)에 사령(赦令)을 내렸다. 그 글에 이르기를,
"동궁의 건강이 조화가 잘못되어 그 병에 대해 근심이 바야흐로 절실했는데, 저 하늘이 도움을 내리어 곧 병이 나아 기쁨이 넘친다. 이에 팔방(八方)에 경사를 같이한다고 고명(誥命)에 널리 알리노라. 생각건대 저 뛰어난 슬기로운 자질로 일찍부터 온문(溫文)하다는 좋은 칭찬이 드러나서, 성해(星海)에 상서로움이 엉겨 이미 휘윤(暉潤)의 노래에 올랐고 비창(匕鬯)031)  의 중대한 임무를 맡겼으니, 이는 신·인(神人)의 소망이다. 보양(保養)하는 방도에 잘못이 없었기에 온갖 신령(神靈)이 함께 보호하였고 절선(節宣)의 경계를 해이해지지 않도록 일념(一念)으로 항상 부지런하였는데, 어찌 홍진이 유행하여 수엄(邃嚴)한 청저(靑邸)를 범할 줄 생각이나 하였으랴. 괴원(槐院)에서 직숙처(直宿處)를 옮기자 그제야 중외가 애태우며 허둥지둥하였는데, 약석(藥石)이 효험이 있어 얼마 안가 살갗의 흉이 사라지게 되었으니, 이는 조종(祖宗) 음즐(陰騭)을 내리심으로 말미암아 곧 영위(榮衛)의 한없는 강녕(康寧)을 보게 된 것이로다. 생각건대 육진(六疹)이 빨리 제거되니 천지의 화기(和氣)가 쾌히 회복되고 바야흐로 삼양(三陽)이 처음 열리니 태평한 운수가 한창 닥치는도다. 어찌 다만 나만의 기쁨이랴? 자위(慈闈)의 기쁨이야말로 더욱 다행스럽다. 용루(龍樓)에서 잠자리의 문안을 올리니 아침 저녁으로 아름다운 모습을 볼 수 있고, 학금(鶴禁)에서 서연(書筵)을 여니 아침과 낮에 영명(英明)한 목소리를 듣게 되었도다. 희생(犧牲)과 예주(醴酒)를 공경히 올려 이미 태실(太室)의 제사를 지냈고 관(管)·약(籥)을 번갈아 울려 넓은 전정(殿庭)에서 다시 하례(賀禮)를 올렸도다. 또 삼가(三加)의 예(禮)가 점차 다가옴을 기뻐하여 이에 십항(十行)의 사륜(絲綸)을 먼저 반포하는 것이다. 뇌우(雷雨)와 같은 은택(恩澤)이 흘러 넘쳐 허물과 때를 말끔히 씻을 것이며, 천지와 같은 교화가 두루 흡족하여 가까운 데서부터 먼 곳까지 미칠 것이다. 따라서 이달 15일 매상(昧爽) 이전의 잡범(雜犯) 사죄(死罪) 이하는 모두 용서하여 주노라! 아! 구가(謳歌)를 함께 올리니 아름다움과 상서로움이 몹시 돈독하도다. 기성(箕聖)이 귀주(龜疇)032)  를 내리어 백 가지 복(福)을 말하였고, 주 문왕(周文王)이 연익(燕翼)033)  을 끼쳐주어, 만세토록 영원히 의지할 것이로다. 그러므로 이에 교시(敎示)하노니, 모두 잘 알리라 생각한다."
하였다. 【예문 제학 원경하(元景夏)가 지어 올렸다.】  이어서 백관(百官)에게 가자(加資)하라 명하고, 중·하등(中下等)에 들어 죄를 입은 자를 서용(敍用)하게 하였다.

 

이기진(李箕鎭)을 이조 판서로, 김진상(金鎭商)을 대사헌으로, 윤득징(尹得徵)을 집의로, 조명교(曺命敎)를 헌납으로, 조상경(趙尙絅)을 판의금(判義禁)으로, 서종옥(徐宗玉)·정내주(鄭來周)를 동의금(同義禁)으로 삼았다.

 

평산현(平山縣)을 부(府)로, 통천(通川)·개천(介川) 등 두 읍(邑)을 함께 군(郡)으로 승격시켰다. 세 읍은 삼성 죄인(三省罪人)034)  이 입적(入籍)된 읍으로 모두 현(縣)으로 강등시켰는데, 이때에 와서 10년의 기한이 만료되었으므로 복구한 것이다.

 

1월 16일 신미

우의정 조현명(趙顯命)이 차자를 올렸는데, 대략 이르기를,
"전장(銓長)이 재차 상소한 것은 장황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전장이 과연 능히 위곡(委曲)의 사사로움이나 탐경(貪競)의 습관을 아주 떨쳐버렸다면 신은 망령된 사람이 될 것입니다. 하지만 만약 그러하지 아니하여 혹시라도 신의 말과 비슷한 것이 있다면 다만 스스로 반성하고 스스로 다스려 날로 공정한 길로 나아가야 마땅할 뿐입니다. 신이 지난 번의 차자에서 자초지종을 말하지 아니하고 하순(下詢)하셨을 때 또한 우러러 대답하지 아니했던 것은 대개 일을 지적하여 자거(刺擧)하는 것이 대신의 동칙(董飭)하는 체모가 아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어떤 일의 위곡과 아무개가 탐경한 것은 전신(銓臣)이 마땅히 스스로 알 것이니, 어찌 신의 말을 기다리겠습니까? 이제 그 소어(疎語)에는 마치 신이 뜻을 써서 속박하느라 고의적으로 그 말을 숨겨 의아심을 갖거나 현혹시키려는 계책으로 삼은 것이 있는 것처럼 여겼으니, 어찌하여 그 말의 분박(噴薄)·능가(凌駕)함이 이에 이를 수 있단 말입니까?"
하니, 비답하기를,
"경의 뜻을 이미 알고 있는데, 경은 어찌하여 개의(介意)하고 있는가?"
하였다.

 

1월 17일 임신

달이 태미원(太微垣)으로 들어갔다.

 

내국(內局)에서 입진(入診)하니, 이 때 임금이 담(痰) 증세가 있어 몸이 편치 않았기 때문이었다.

 

찬선(贊善) 박필주(朴弼周)가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하늘과 사람은 하나의 이치로서 차이가 없습니다. 옛날 성제(聖帝)·명왕(明王)이 하늘을 섬긴 방법은 저 푸른 것을 하늘로 여기지 아니하고 반드시 자신의 마음속에서 구하되, 천운(天運)이 다시 시작될 때를 당하면 또 반드시 감발(感發)하여 천도(天道)를 공경히 좇아 더불어 새롭게 될 것을 생각하였던 것이니, 역상(易象)이나 월령(月令)에 실린 바에서 볼 수가 있습니다. 삼가 생각하건대, 순수하고 밝은 성심(聖心)으로 이 뜻을 마음속에 간직하여 자만함을 경계하시고 존양(存養)에 공력(工力)을 두어 정령(政令)을 내릴 때는 근면하고 신중히하여 유도(柔道)가 양강(陽剛)한 도에 누가 되지 않게 하고 사욕(私慾)이 천덕(天德)을 해치지 못하게 해서 성학(聖學)이 극(極)에 이르고 지극한 다스림이 뜻을 따라 이루어지게 한다면, 어찌 아름답지 않겠습니까?"
하니, 비답하기를,
"새해에 진면(陳勉)한 것에 마땅히 복응(服膺)하겠노라. 하지만 원량(元良)을 보도(輔導)하는 일이 참으로 급선무이니, 경은 뜻을 바꿔 올라오도록 하라."
하였다.

 

1월 18일 계유

사옹원(司饔院)에서 아뢰기를,
"올해 자기소(磁器所)의 백토(白土)는 전례에 의거하여 본도(本道)에서 차원(差員)을 정해 파서 보내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윤허하였다. 이에 앞서 자기를 굽는 백토는 백성을 부려 강원도 양구(楊口) 땅에서 파내게 하였는데, 몇 해의 재황(災荒) 때문에 본원의 낭관(郞官)을 파견해 상정미(詳定米)를 획급(劃給)하고 백성을 모아 파내게 함으로써 백성의 폐막(弊瘼)을 덜게 하였다. 그런데 이때에 와서 농사가 조금 풍년이 들었으므로 다시 구례(舊例)대로 복구한 것이다.

 

1월 19일 갑술

객성(客星)이 진수(軫宿)의 도수 안에 나타났다.

 

1월 20일 을해

객성이 또 진수의 도수 안의 상진성(常陳星) 남쪽에 나타났는데, 크기는 헌원성(軒轅星)의 우각(右角)만 하였고, 별의 빛깔은 흰 색이었다.

 

1월 21일 병자

객성이 진수의 도수 안의 사세성(四勢星) 남쪽으로 위치를 옮겨 나타났다.

 

김상적(金尙迪)을 집의로, 한광회(韓光會)·이광익(李光瀷)을 지평으로, 김한철(金漢喆)을 장령으로, 유언국(兪彦國)·김상복(金相福)을 정언으로, 원경하(元景夏)를 공조 참판으로 삼았다.

 

교리 이성중(李成中)·수찬 윤광의(尹光毅)·필선 민백행(閔百行)을 측후관(測候官)에 차임하여 관상감의 관원들과 함께 객성을 측후하게 하였다. 대개 살별[彗孛]이 재앙을 알리면 문신(文臣)으로 하여금 측후하게 하는 것이 고례(古例)이기 때문이었다.

 

인일제(人日製)035)  를 추행(追行)하였다. ‘인일(人日)’로 시제(試題)를 내라 명하고 홍문 제학(弘文提學) 서종급(徐宗伋)으로 하여금 원점 유생(圓點儒生)을 명정전(明政殿) 뜰에서 시험보이게 하였는데, 수석을 차지한 진사 유건(柳健)은 직부 전시(直赴殿試)036)  하게 하고 나머지에게는 모두 급분(給分)037)  하라고 명하였다.

 

1월 22일 정축

객성(客星)이 익수(翼宿)의 도수 안의 태양수성(太陽守星)으로 위치를 옮겨 나타났다.

 

정원(政院)에서 성변(星變) 때문에 진계(陳戒)하기를,
"몇 해 이래로 상위(象緯)038)  가 경보(警報)를 알림이 간간이 겹쳐 나타나더니 이제 또 새해 첫달에 있게 되었습니다. 재앙을 부른 단서를 감히 부회(傅會)하지는 못합니다만, 성후(聖候)가 계속 정섭(靜攝) 중에 계시어 인접(引接)을 혹 완전히 궐(闕)하기까지 하는데도 대신(大臣)은 구대(求對)하는 말 한마디 없고 옥당(玉堂)은 광구(匡救)하는 말 한마디가 없으며, 대청(臺廳)은 늘 닫혀 있어 언로(言路)의 막힘이 또 극도에 이르렀습니다. 하늘이 전하께 경보를 알림이 이처럼 깊고도 간절한데, 조정에서는 또한 하늘의 노여움을 돌리고 인심에 합치될 한 가지 일도 하지 아니합니다. 비록 지나간 해의 살별의 이변으로 말하더라도 동북 지방의 기근·흉년과 경외(京外)의 전염병이 발생해 그 응보(應報)가 속일 수 없는 것이었거늘, 지나간 해의 징험된 바를 가지고 오늘 날에는 마침 그런 것이 없다고 하는 자가 있다면, 신은 그 사람이 어리석은 것이 아니면 아첨하는 줄로 알겠습니다. 삼가 원하건대 형식적인 것을 일삼지 마시고, 즐거워하고 편안하게 지내려는 생각을 품지 마소서. 어려움이 조금 해결되었다 하여 곧 분발하여 힘쓰는 방도를 잊지 마시고 춘추(春秋)가 점차 만년(晩年)이 된다 하여 혹시라도 권태로운 생각을 싹틔우지 마소서. 법과 기강은 반드시 양쪽을 다 생각하시고 궁(宮)·부(府)를 반드시 한 몸으로서 보소서. 언로를 부식(扶植)하여 숨기지 아니하는 길을 여시고, 경연(經筵)에 자주 나아가 덕(德)으로 나아가는 공부에 힘쓰소서. 염정(恬靜)을 권장하여 조경(躁競)을 억제하고 염치를 격려하여 풍속을 돈박(敦樸)하게 하소서. 그리하여 위 아래가 서로 힘쓰고 밤이나 낮이나 부지런히 하여 대경동(大警動)·대진작(大振作)의 기틀로 삼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우악한 비답을 내렸다.

 

임금이 제도(諸道)에서 물에 빠진 사람을 구한 자에 대해 상(賞)을 줄 것을 계속 잇달아 청하자, 도신(道臣)과 수신(帥臣)에게 따로 자세히 살펴 그 실상을 알아 낸 뒤에야 알리라고 신칙하였다.

 

제도의 봄철 수조(水操)·육조(陸操)를 정지하라고 명하였다. 기근과 전염병 때문이었다.

 

1월 23일 무인

영의정 김재로(金在魯) 등이 별의 이변 때문에 연명(聯名)으로 차자를 올려 인구(引咎)하였다. 또 말하기를,
"빈대(賓對)를 행하지 아니한 것이 이제 70여 일이 되었는데, 일전에는 와서 모였지만 또 인점(引接)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적체된 서무(庶務)가 많고 군정(群情)은 억울함이 심합니다. 더욱이 지금 재이(災異)가 이와 같은데도 조정에서는 여유가 있고 즐거워하는 것처럼 여김이 있으니, 시인(詩人)이 이른바 ‘하늘이 바야흐로 왕실(王室)을 전복하려 하니 군신(群臣)이 이완(弛緩)하지 말라.’고 한 데 불행히도 가깝습니다."
하니, 임금이 비답을 내려 위유(慰諭)하였다.

 

1월 25일 경진

객성(客星)이 익수(翼宿)의 도수 안에 있는 호분성(虎賁星)의 동쪽으로 위치를 옮겨 나타났다.

 

대신(大臣)과 비국 당상(備局堂上)이 구대(求對)하니, 임금이 소견하였다. 영의정 김재로(金在魯)가 말하기를,
"객성의 변괴는 실로 관계됨이 비상하니, 신 등이 비록 전석(前席)에 올랐다고는 하지만, 어떻게 능히 재앙을 그치게 하고 백성을 구제하는 방책을 낼 수가 있겠습니까? 그리고 신년(新年)에 구대하였는데도 늦어진 뒤에야 인접(引接)을 허락하셨으므로 군정(群情)이 모두를 근심하고 의아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성상께서 일찍이 송조(宋祖)의, ‘중문(重門)을 활짝 연다.’는 말로 하교하셨습니다만, 기력이 만약 억지로 하기에 어렵다면 명하심이 마땅하고 만약 불러 보실 수가 있다면 즉시 인접을 허락하실 것이니, 어찌 위 아래가 서로 부응하는 도리가 되지 않겠으며 나랏 일에 있어서도 또한 어찌 심히 불행한 일이 되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오랫동안 인대(引對)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오늘 경(卿) 등을 본 것인데, 또한 억지로 한 것이다. 나를 알지 못하는 사람은 반드시 게을러졌다고 할 것이나, 또한 사실이 아니다. 서서(徐庶)가 말하기를, ‘마음이 어지럽다.’고 했는데, 나의 마음이 이와 같으니, 나 또한 스스로 알지 못하겠다."
하였다. 김재로가 말하기를,
"성상께서는 언제나 신료(臣僚)를 인접하지 않은 지 며칠이 되면 마음이 자못 답답하다고 하교하셨습니다. 그런데 근래에 와서는 성심(聖心)이 전날 하교하신 바와 아주 다르시니, 군하(群下)들이 어찌 걱정하고 의혹스러워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내가 자성(慈聖)께 문후(問候)할 때 부복(俯伏)하고 감히 우러러 쳐다보지 못하는 것을 마치 경동이 내 앞에서 하는 것처럼 하는데, 자성께서는 언제나 더욱 안쓰럽게 생각하시어 번번이 물러나 쉬라고 명하시었다. 또 봄추위가 보리를 손상시킴을 걱정하면, 자성께서는 곧 너그러운 말로 권면하시니 나의 마음을 알아 주는 사람은 오로지 자성뿐이시다."
하였다. 예조 판서 오광운(吳光運)이 말하기를,
"명(明)나라 신하 왕석작(王錫爵)이 말하기를, ‘임금의 정신은 하루라도 천지에 통하지 않음이 없다.’라고 하였는데, 지금 위아래가 서로 교통(交通)하지 못하고 있으니 《역경(易經)》에 있어서 비괘(否卦)가 됩니다. 이처럼 삼양(三陽)이 교태(交泰)하는 날 도리어 비괘를 이루니, 어찌 원춘(元春)에 별의 변괴가 없을 수 있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천지의 기운이 교통하지 아니하여 비괘를 이루지만 나는 태괘(泰卦)를 이루고자 한다. 그런데 여러 신하들은 도리어 비괘를 이루고자 하니, 어찌된 일인가?"
하였다. 여러 신하들이 또 진연(進宴)을 행할 것을 청하여 번갈아 다투어 아뢰니, 임금이 말하기를,
"자성께서는 경자년039)  의 일을 당하신 이후로 오랜 병환으로 몸을 지나치게 손상시키셨고, 또 신축년040)  에도 마음을 쓰신 일이 많았다. 그리고 내가 사위(辭位)하였을 때는 자성께서 나를 위해 염려하심이 지극하지 않음이 없었으니, 크도다! 자성의 은혜야 말로, 갚으려 해도 끝이 없구나!
옛날 증삼(曾參)은 일개 필부(匹夫)로서도 능히 양지(養志)·양체(養體)의 도리를 다하였거늘, 하물며 내가 천승(千乘)의 존귀함으로 능히 증자(曾子)만 못할 수 있겠는가? 사복(嗣服)한 이후로 재차 칭상(稱觴)하는 일을 거행하였는데, 올해는 한편으로 기뻐하고 한편으로 두려워하는 마음이 경들보다 더욱 갑절이나 된다. 그런데 동조(東朝)께 직접 청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나로 하여금 청하게 하는 것은 어찌 심히 성실하지 않은 것이 아니겠는가? 또 원조(元朝) 이후로는 다시는 계속해서 청하지 않았으니, 내가 어찌 진연을 받는 일로 경 등을 부를 수 있겠는가? 동조께서는 바야흐로 사척(私慽)이 있으니, 이 일을 의논할 수 없다. 하지만 가을이 지난 뒤 복(服)이 끝나면, 먼저 칭상의 예를 거행하고 이어 양로연(養老宴)을 베풀어 조금이나마 애일(愛日)의 정성을 펼 수 있을 것이다. 지난 날 경 등의 구대(求對)를 허락하지 않았던 것은 맹자(孟子)가 ‘어제는 병으로 사양했다.’는 뜻이다."
하니, 여러 신하들이 모두 부끄러워하면서 사례하였다. 이때 자전(慈殿)이 막 동기간의 사척을 당했기 때문이었다.

 

강원도 삼척(三陟)의 옥원창(沃原倉)에 불이 일어나 모두 타 버렸다. 타다 남은 조곡(糶穀)은 모곡(耗穀)을 덜어 나누어 주고, 비국(備局)의 회모(會耗)로 창고 건물을 짓는 것을 돕도록 하였으니, 도신(道臣)의 장청(狀請)을 따른 것이었다.

 

함경 감사 윤용(尹容)이 장계로 단천(端川)과 길주(吉州)의 두 수령을 파직시킬 것을 청하였으니, 마천령(摩天嶺)의 좁은 고개에서 불을 냈기 때문이었다. 임금이 하교하기를,
"송전(松田)에는 언제나 간사한 백성이 있기 때문에 불을 지르는 폐단이 있다. 그러므로 수령은 문죄(問罪)하지 않는다는 전례가 있는 것이다."
하고, 마침내 파직시키지 말고 단지 종중 추고(從重推考)하라고 명하였다.

 

좌의정 송인명(宋寅明)이 임금께 아뢰기를,
"동궁(東宮)이 혼진(紅疹) 때문에 오랫동안 서연(書筵)을 정지하였으니, 봄날씨가 조금 따뜻해지기를 기다려 강(講)을 열되, 암혈(岩穴)의 인사를 초빙하고 독서하는 선비를 뽑아 주연(胄筵)에 참석토록 해서 예학(睿學)에 도움이 되게 해야 마땅하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옳게 여겼다.

 

봉조하(奉朝賀) 이의현(李宜顯)에게 식물(食物)을, 그리고 고(故) 상신(相臣) 심수현(沈壽賢)의 부인에게 월름(月廩)을 내리라고 명하였다. 이의현은 청백·소탈한데다 집이 가난하여 지위가 원로(元老)에 올랐지만, 거친 음식조차 자주 못먹을 때가 있었다. 심수현 역시 염근(廉謹)하여 죽었을 때 처자가 먹는 것이 어려울 정도였다. 대신(大臣)이 혜양(惠養)의 은전을 베풀 것을 청하자, 임금이 그대로 따랐던 것이었다. 조신(朝臣) 집안의 부인(婦人)으로 나이 아흔이 넘은 사람에게는 특별히 봉작(封爵)을 허락했는데, 대개 선조(先朝) 때 이미 시행한 전례로 나이 많은 사람을 존대하는 뜻에서 나온 것이었다. 우의정 조현명(趙顯命)이 말하기를,
"작년의 전염병으로 죽은 사람이 참혹하게도 많아 몇 만 명인지도 모를 정도입니다. 온 집안 식구가 몰살한 경우는 환곡(還穀)을 탕감해 주고, 장례와 매장 등에 관한 일을 제도(諸道)의 도신에게 신칙해 조정에서 불쌍히 여기고 애휼(愛恤)한다는 뜻을 보여 주게 함이 마땅하겠습니다. 또 남녀가 혼인하여 같이 사는 것은 인륜의 중대한 바이니, 백성들이 홀로 사는 것을 원망함이 없도록 하는 것은 왕자(王者)의 정치에서 먼저 할 바입니다. 바야흐로 동궁(東宮)의 가례(嘉禮)하는 날을 당하였으니, 태왕(太王)의 같이 즐겼던 것과 같은 은혜를 미루어, 가난하고 궁핍하여 때를 넘기고도 시집 장가 못한 사람을 남자는 30세, 여자는 25세로 한정하여 정밀하게 뽑고 구별하되, 서울은 호조와 선혜청에 지방은 도신과 수령에게 모두 혼인을 돕도록 하여 필부 필부(匹夫匹婦)가 짝을 얻지 못하는 원망이 없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처음으로 정시(庭試) 초시(初試)의 법을 시행하였는데, 그 법은 이러하다. 대정시(大庭試)에서는 8백 명을 뽑되, 모두 서울에 모아 3소(三所)로 나누어 시취(試取)하는데, 예조·한성부·성균관을 시소(試所)로 삼는다. 가선(嘉善)·통정(通政) 각 1명과 당하(堂下) 2명을 이조(吏曹)에서 삼망(三望)을 갖추어 낙점(落點)을 받아 시관(試官)으로 삼으며 대감(臺監) 1명을 차정해 보낸다. 부(賦)와 표(表) 두 시제(試題)로 시취하는데, 시지(試紙)의 봉미(封彌)041)  에는 단지 부명(父名)만 쓴다. 전시(殿試)는, 시험장을 시어소(時御所)의 전정(殿庭)에 설치하고 시관은 승정원에서 의망하여 들임으로써 마침내 분고법(分考法)을 혁파해 고시(考試)를 극진히 하는 방도에 도움이 되게 한다. 시지는 감시(監試)의 시지를 쓰되 3폭을 이어서 봉미하며, 사조(四祖)를 모두 쓴다. 할봉(割封)·사동(査同)·지동(枝同)·역서(易書)는 모두 동당시(東堂試)의 예에 의한다. 이때 선비들의 습속이 날이 갈수록 변천해가고 과거의 폐단이 날로 갈수록 심해졌다. 임금이 그 분잡한 폐단을 고치고자 하여 여러 신하들에게 하문(下問)하고는 비로소 시행할 것을 명하였던 것이나, 시행한 지 십수 년이 지나자 그냥 폐기되어 버리고 시행되지 않았다.

 

성균관에 명하여 거재 유생(居齋儒生)의 원점 절목(圓點節目)을 다시 정하라고 명하였다. 유생으로서 생원(生員)·진사(進士)가 된 사람 1백 명에 한해 거재(居齋)케 하되 방차(榜次)를 선후의 차례로 삼고, 같은 방(榜)일 경우는 나이를 차례로 삼았다. 그리고 아침·저녁 식당(食堂)에 참석한 것을 1점(點)으로 하되 50점을 기준으로 하였다. 장의(掌議) 2명, 색장(色掌) 4명은 1백 명과는 별도로 거재케 하되 일체 50점을 한도로 하여 점수가 기준에 못미치는 경우는 체개(遞改)를 허락하지 말게 하였다. 반시(泮試) 때 태학(太學)의 유생을 시취(試取)하라는 명이 있으면 생원·진사와 점수 기준에 찬 자를 시험에 응시케 하고 생원·진사가 아니거나 점수 기준에 차지 아니한 자는 모임(冒入)하지 못하게 하였으며, 비록 입격(入格)했다 할지라도 계품(啓稟)하여 뽑아 버린 뒤 과장(科場)에 난입(闌入)한 율(律)을 베풀게 하였다. 그리고 거재하는 생원·진사는 그 전공하는 바를 물어보고 ‘제술(製述)’·‘강경(講經)’을 이름 아래 나누어 쓰게 하였다. 만약 도기 유생(到記儒生)을 시취하라는 명이 있으면, 단지 그날의 도기(到記)로써 하고 점수(點數)에 구애되지 말 것이며, 작헌례(酌獻禮)에 친림(親臨)하거나 봄·가을의 석채(釋菜)에 입재(入齋)할 때는 입재하는 유생을 1백 명의 수에 구애하지 말도록 할 것을 정식(定式)으로 삼았다. 이에 앞서 누차 원점(圓點)에 관한 일을 강정(講定)하였으나 결정을 짓지 못하였는데, 이때에 와서 비로소 절목을 계하(啓下)한 것이었다.

 

1월 26일 신사

객성(客星)이 익수(翼宿)의 도수 안에 있는 호분성(虎賁星)의 동쪽에 나타났다.

 

이조 판서 이기진(李箕鎭)이 향리에서 상소하여 사직하니, 임금이 엄한 비답으로 꾸짖었다.

 

홍창한(洪昌漢)을 사간으로, 권굉(權宏)을 장령으로, 민광우(閔光遇)를 지평으로, 홍경보(洪景輔)를 정언으로, 윤심형(尹心衡)·김상적(金尙迪)을 부교리로, 박필재(朴弼載)를 수찬으로 삼았다.

 

1월 27일 임오

객성이 호분성의 동쪽으로 위치를 옮겨 나타났다. 종관성(從官星)의 서쪽에서부터 형체가 점차 희미해졌다.

 

헌부(憲府) 【지평 민광우(閔光遇)이다.】 에서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양덕 현감(陽德縣監) 이희겸(李喜謙)은 병을 핑계로 일을 회피하고 정무(政務)를 봄에 있어서는 명예만을 구하니, 청컨대 파직시키소서."
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응교 남태제(南泰齊)가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신하들은 나태하고 성지(聖志)는 권근(倦勤)하시니, 청컨대 지금부터 경계(儆戒)하고 분발하여 연익(燕翼)의 교훈을 주도록 하소서."
하니, 예사 비답을 내렸다.

 

1월 28일 계미

임금이 경기 감사 박문수(朴文秀)에게 사조(辭朝)할 것을 재촉하였으나, 박문수가 끝내 응하지 않았다. 또 지난 일을 끌어대며 상소하여 사직하니, 임금이 엄한 비답으로 꾸짖었다. 박문수가 또 서명(胥命)042)  하니, 임금이 드디어 함경도 관찰사로 출보(黜補)시키라고 명하였다.

 

정언 홍경보(洪景輔)가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조정에 있는 신하들이 여전히 묵은 습관을 갖고 있으니, 부억(扶抑)하는 한 가지 일, 탄핵하고 논박하는 한 마디 말도 기관(機關) 가운데서 나오지 아니하는 것이 없습니다."
하고, 또 비안 현감(比安縣監) 박사걸(朴師傑)이 남장(濫杖)으로 마구 긁어들인 죄와 영변 부사(寧邊府使) 윤택정(尹宅鼎)이 병든 몸으로 부임한 잘못과 사복 정(司僕正) 이대원(李大源)이 죄를 지은 것이 가볍지 않아 공의(公議)의 버림을 받은 정상을 논하여 모두 파면시킬 것을 청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임금이 대신(大臣)과 비국 당상(備局堂上) 및 경조(京兆) 5부(五部)의 관원을 명소(命召)하여 백성들의 고통에 대해 물어보았다. 부관(部官)이 차례대로 대답하기를,
"방역(坊役)이 균등하지 아니하여 백성들이 명령을 감당해내지 못하므로 전에 절목(節目)을 만들어 이정(釐正)하라는 하교가 있었는데, 전 판관(判官) 김약로(金若魯)가 미처 품정(稟定)하기도 전에 번임(藩任)에 부임하였습니다."
하니, 임금이 경조로 하여금 묘당(廟堂)에 가서 의논하게 하고 절목을 만들어 들이라고 명하였다. 좌의정 송인명(宋寅明)이 말하기를,
"오부가 사송 아문(詞訟衙門)이 됨은 형조와 다를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 형조의 낭관(郞官)은 지난 번의 우상(右相)이 진달한 바로 인해 여섯 달이 지나면 고을 수령에 제수하라는 명이 있었습니다. 오부의 도사(都事) 또한 이 예에 의함이 마땅하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윤허하였다. 영의정 김재로(金在魯)가 유우기(兪宇基)를 내직(內職)으로 옮길 것을 청하니, 임금이 윤허하였다. 유우기는 관직(館職)에 나아가지 않았으므로 외읍(外邑)에 척보(斥補)되어 이미 해를 넘겼었다. 이때에 와서 비로소 내직으로 옮길 것을 명한 것이었다.

 

예관(禮官)에게 묘당(廟堂)에 나아가 동몽(童蒙)이 강(講)할 서책(書冊)과 예강 절목(禮講節目)을 의정(議定)하라고 명하였으니, 예조 판서 오광운(吳光運)의 청을 따른 것이었다.

 

헌부 【장령 민우(閔堣)이다.】 에서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북한 관성장(北漢管城將) 신만(申漫)은 산사(山寺)를 수리한다는 명분으로 나무를 베어 재목으로 만들어서 몰래 서울의 집으로 실어가고 본청(本廳)에는 거짓으로 보고했습니다. 청컨대 파직의 법을 베푸소서."
하니, 임금이 신만의 일과 전에 아뢴 노계정(盧啓禎)의 일을 대신(大臣)에게 물어보았다. 대신들이 모두 노계정은 능력이 있어 직임에 맞고 또 뇌물을 받았다는 비방도 없으며, 신만은 애초 각사(各司)의 수리를 청했다는 보고가 없었으니, 아마도 사실이 아닌 것 같다고 하였다. 그래서 노계정의 일은 윤허하지 아니하고 신만은 단지 나문(拿問)만 하라고 명하였다. 전에 아뢴 일 중에서 양덕 현감(陽德縣監) 이희겸(李喜謙)을 파직하는 일과 평안 도사(平安都事) 송일찬(宋日贊)을 개차(改差)하는 일은 아뢴 대로 하게 하였다.

 

첩가곡(帖價穀)과 자비곡(自備穀) 3천 곡(斛) 및 모곡(耗穀) 1천 곡에서 경기 감사 홍경보(洪景輔)에게 주어 바닷가의 재해를 입은 일곱 고을을 주휼(賙恤)케 하라고 명하였다. 또 영남·호남의 쌀과 콩으로 관동에 봉류(捧留)한 것 1만 곡과 영남의 군작 저치미(軍作儲置米) 1만 곡을 함경 감사 윤용(尹容)에게 대여해 줄 것을 허락하고는 북관(北關)으로 수송해 기민(飢民)을 분진(分賑)케 하였다.

 

평안도 강계(江界)의 백성 20여 명이 호랑이에게 물려 죽었는데, 휼전(恤典)을 베풀라고 명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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