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영조실록57권, 영조 19년 1743년 2월

싸라리리 2025. 9. 26. 13: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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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1일 을유

화성(火星)이 헌원성(軒轅星)을 범하였다.

 

2월 2일 병술

윤심형(尹心衡)을 집의로, 허옥(許沃)을 사간으로, 이홍직(李弘稷)·윤광의(尹光毅)를 장령으로, 박춘보(朴春普)를 헌납으로, 홍익삼(洪益三)·이익보(李益輔)를 정언으로, 이성중(李成中)을 교리로, 신만(申晩)을 경기 관찰사로 삼았다.

 

부사과(副司果) 홍계희(洪啓禧)가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박문수(朴文秀)가 일찍이 북번(北藩)을 안찰(按察)했을 때의 탐욕스럽고 불법(不法)했던 정상은 낱낱이 열거하기 어려울 정도입니다. 경신년043)  의 농사는 본디 흉참(凶慘)하지 않았는데도 장황하게 논계(論啓)하여 재물과 곡식을 넉넉히 타내었으며, 또 어염(魚鹽)의 이익을 도거리하여 일도(一道)의 재화(財貨)를 모두 농단하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 갖춘 바를 통틀어 계산해 보면 5만여 민(緡)의 돈이 충분히 되는데도 마침내 백성에게 들어간 것은 아주 적었으니, 그 귀속처가 없는 것이 4만여 냥이란 많은 수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가 체직되어 돌아올 때에는 때마침 막 수재(水災)를 겪어 큰 흉년이 들 것이 판연한지라 인심을 수습하는데 급급하여 뒷날을 생각할 겨를도 없이 진휼하고 남은 곡물을 마치 물처럼 썼으니, 수십 석의 쌀이 향촌의 호우(豪右)에게 두루 미쳤고, 6백 포(包)의 곡식이 영청(營廳)에 체하(帖下)044)  되었습니다. 이 외에도 수만 냥을 싸서 서울로 보냈다는 설이 또한 낭자한데, 그 부서(簿書)를 모두 없애 그 자취를 덮어버렸습니다.
또 막비(幕婢) 권운만(權運萬)은 곧 영남의 영리(營吏)로서 유능하고 교활하다는 것으로 소문이 났고, 영기(營妓) 이매(二梅)는 박문수가 사랑하는 바로서 요악(妖惡)하다는 이름이 났는데, 안팎으로 화응(和應)하면서 정사(政事)에 간여하고 간사한 짓을 하였습니다. 이매에게 아이를 갖게 하고자 하여 명산에 기도할 때마다 번번이 수백 민을 썼고 이매를 위해 산을 구하느라 백성의 산을 빼앗아 주고는 소장도 내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또 회령인(會寧人) 최이준(崔以峻)은 면천(免賤)된 관노(官奴)로서 전부터 박문수에게 찰싹 달라붙어 외람되게 현읍(縣邑)의 자리를 도둑질하고 말[馬]을 바쳐 직임을 얻었다고 사람들이 모두들 말을 전하고 있습니다. 박문수가 도(道)를 안찰하던 날 총애와 신임을 가장 많이 받아 간사한 짓과 폐단이 심히 많았었는데, 전 감사 민형수(閔亨洙)가 순행(巡行)하며 지나갈 때 장살(杖殺)하니, 북도의 사람들이 모두를 시원하게 여겼습니다. 가장 통탄스런 일은, 스스로 반드시 의논이 있을 줄 알았으므로 미봉하는 계책을 꾸미려고 한 것이니, 함흥(咸興)의 반자(半刺)045)  에 흠이 있자 그의 외형(外兄)에게 권하여 차임(差任)되기를 구했고, 본도(本道)의 방백(方伯) 자리가 비자 사우(死友)046)  를 보내려고 도모해 옮겨 차임했던 것입니다.
아! 이번에 특보(特補)하신 명은 북도의 백성을 위하는 거룩한 뜻에서 나왔겠지만 북도의 백성들은 반드시 장차 ‘어찌 조정에 사람이 없어서 또 이 사람이 와서 우리를 다스리게 한단 말인가?’라고 할 것입니다. 신은 전하의 이번 일이 변방을 중히 여기는 바가 아니라, 조정을 가볍게 하기에 꼭 알맞은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였다. 이때 홍계회가 어사(御史)로서 북로(北路)의 진휼 상황을 감독하고 돌아왔는데, 박문수가 척보(斥補)되어 사폐(辭陛)한 것이 마침 이때에 있었으므로, 이런 상소를 했던 것이었다. 임금이 유중(留中)하고 비답을 내리지 않았다. 홍계회의 상소 가운데 지적한 바 ‘반자’는 윤상희(尹尙喜)를 가리키고 ‘방백’은 윤용(尹容)을 가리킨다.

 

이조 참의 윤급(尹汲)이 이회원(李會元)에게 공척(攻斥)을 당한 뒤로 버티며 직무에 이바지하지 않으니, 체직을 허락하였다.

 

2월 3일 정해

객성이 보이지 않았다. 측후관(測候官)을 혁파하였다.

 

2월 4일 무자

헌부 【지평 민광우(閔光遇)이다.】 에서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어버이의 나이가 일흔이 되면 3백리 밖의 외임(外任)에 부임할 수 없는 것이 조정의 법입니다. 통천 군수(通川郡守) 윤득리(尹得履)는 일찍이 남쪽의 고을에 있을 때 이미 어버이의 나이가 한도에 찼다 하여 체직되어 돌아왔는데, 지금 3,4년이 지난 뒤 법을 무릅쓰고 본군(本郡)에 부임하였습니다. 청컨대 파직하소서. 그 땅에 사는 자는 그 고을의 수령이 되는 것을 허락하지 않음은 본디 법을 세운 뜻이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홍원 현감(洪原縣監) 진재박(陳在搏)은 본현(本縣) 사람으로서 갑자기 그 고을에 제수되었습니다. 청컨대 개차(改差)하소서."
하니, 모두 그대로 윤허하였다.

 

정언 이익보(李益輔)가 이선태(李善泰)의 상소 때문에 상소하여 스스로 변명하기를,
"이선태가 상소에서 한 말이 무망(誣罔)한 것임은 신의 두 형의 상소에서 이미 변명하였습니다. 이른바 ‘한원(翰苑)의 변통(變通)’이라 한 것은 다시 천거하여 권점(圈點)한 것을 가리켜 이르는 것인데, 신은 그때 이미 명명(明命)을 준행하여 신제(新制)를 봉행하고 있었으니, 그후 권점 가운데 든 사람의 거취(去就)는 신이 알 바가 아닌데도 이것으로 신을 구함(構陷)했던 것입니다. 또 언의(言議)의 죄목을 신처럼 보잘것없는 일개 신진(新進)에게 더하고는 보이지도 않는 일을 떠벌리고 허무맹랑한 빈발을 해대었습니다. 비단 신의 집안을 아주 결단내려고 했을 뿐만이 아니라 일대의 진신(搢紳)들에게 화(禍)를 전가시킬까 두려우니, 그 뜻이 참으로 참혹합니다."
하니, 예사 비답을 내렸다.

 

평안 감사 김약로(金若魯)가 상소하여 사직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지난번 영성군(靈城君) 박문수(朴文秀)의 상소 가운데 ‘연신(筵臣)이 상투율(相鬪律)로 의율(擬律)한 것은 그 말이 무식합니다.’라고 한 것은 곧 신을 지적하여 한 말입니다. 신은 그날 굽어 하순(下詢)하심에 대하여 단지 전상(展上)에서 서로 싸운 것이 죄가 되는 것만 알아 신심(信心)으로 정직하게 대답하였을 뿐이지 애초 다른 뜻은 없었습니다. 무슨 노여워할 일이 있길래 스스로 반성할 것은 생각하지 아니하고 남을 욕하고 꾸짖음이 이에 이른단 말입니까?"
하니, 비답하기를,
"이 어찌 버틸 일인가?"
하였다.

 

2월 5일 기축

유성(流星)이 대각성(大角星) 아래로 흘러갔는데, 꼬리의 길이는 석 자였고 빛깔은 붉은 색이었다.

 

임금이 대신(大臣)과 비국 당상(備局堂上)을 인견(引見)하였다. 홍계희(洪啓禧)의 상소를 가지고 대신에게 하순(下詢)하고 또 옥당(玉堂) 한억증(韓億增)에게 물었으니, 한억증이 방금 북도의 평사(評事)로 있다가 돌아왔기 때문이었다. 한억증이 말하기를,
"듣건대 박문수가 물고기를 파는 일 때문에 백성들의 원망을 샀다 합니다."
하였다. 좌의정 송인명(宋寅明)이 말하기를,
"북도의 백성들도 또한 당론(黨論)이 있어 박문수를 치켜세우는 자는 반드시 홍계희·한억증을 보지 않는다 하니, 그 소문은 반드시 박문수를 헐뜯는 자의 말일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홍계희는 산함(散銜)으로서 제 분수를 넘어 일을 말하였으니 뜻밖이다."
하였다. 송인명이 박문수를 나문(拿問)하고 홍계희의 상소에 대한 비답을 내릴 것을 청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르고 비로소 홍계희의 상소에 대한 비답을 내리기를,
"북백(北伯)의 일은 이 사람이 결코 이럴 리가 없다. 그리고 면칙(勉飭)함이 어떠했는데 협잡하여 소장을 올리는가? 직분을 넘어 남을 논척했으니, 더욱 놀랄 일이다."
하였다. 송인명이 말하기를,
"북백을 대신 차임하는 일이 급한데, 박문수와 개인적으로 좋게 지내는 사람은 보낼 수 없고, 마음이 공정한 자 또한 얻기 어렵습니다. 오직 심성희(沈聖希)를 대신 보낼 만합니다."
하니, 임금이 고개를 끄덕이고, 하교하기를,
"영성군이 만약 기번(畿藩)에 부임하였더라면 어찌 일이 있었겠는가? 이는 스스로 취한 것이다."
하였다. 영의정 김재로(金在魯)가 북도의 재황(災荒)이 가장 심한 고을과 남한(南漢)의 돌아가며 하는 조련(操鍊)을 정지시켜 줄 것을 청하니, 그대로 따랐다. 김재로가 또 말하기를,
"바야흐로 봄이 되어 민사(民事)가 급하니, 대정(大政) 때 제배(除拜)하는 수령(守令)은 마땅히 한 사(司)의 서경(署經)047)  을 면제하고 보내도록 독촉해야 하겠습니다."
하자, 병조 판서 서종옥(徐宗玉)이 말하기를,
"양사(兩司)의 서경은 옛 법으로서 폐할 수가 없습니다. 전에 민(民)·읍(邑)의 일이 아주 급했을 때 비록 간혹 이런 예가 있기는 했습니다만, 대정 때 제배한 수령은 아마도 이것과는 다른 점이 있는 것 같습니다."
하니, 임금이 서종옥의 말을 따랐다. 김재로가 또 도배 죄인(島配罪人) 이광의(李匡誼)는 도배된 지 이미 해를 넘겼다 하면서 뭍으로 나오게 하여 이배(移配)시킬 것을 청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르고, 이어서 민창수(閔昌洙)도 일체로 뭍으로 나오게 하라고 명하였다. 교리 서명신(徐命臣)이 말하기를,
"민창수는 전에 이미 뭍으로 나왔습니다."
하니, 마침내 다시 이광의와 함께 가까운 땅으로 이배시키라고 명하였다. 대개 작년에 판의금 김시형(金始炯)이 민창수와 이광의를 뭍으로 나오게 할 것을 아울러 거론하였으나 대신(臺臣) 조경(趙擎)의 아룀 때문에 이광의는 도로 전의 배소(配所)에 그대로 있게 되었던 것인데, 이때에 와서 임금이 조경이 부억(扶抑)하는 짓을 한다고 그르게 여겼던 것이다. 수찬 한억증이 말하기를,
"이는 죄명이 같지 않기 때문입니다. 민창수와 이광의는 일체로 논할 수 없습니다. 이광의는 민창수에 비해 죄를 진 것이 더욱 무겁습니다."
하고, 서명신이 말하기를,
"민창수는 그 아우의 상소를 써 올려 그 심사(心事)를 드러내고자 하였으니, 그 마음은 그래도 용서할 만합니다."
하니, 임금이 목소리를 높여 말하기를,
"유신(儒臣)이 감히 당습(黨習)을 부리려 하는가?"
하고, 처음에는 두 사람의 직임을 갈라고 명했다가 곧 문출(門黜)의 법을 베풀게 하였다. 그리고 민창수는 원주(原州)로, 이광의는 공주(公州)로 이배시키라고 명하였다. 송인명이 말하기를,
"신이 일찍이 문충공(文忠公) 정몽주(鄭夢周)의 자손을 녹용(錄用)할 것을 청했습니다. 그런데 그 봉사손(奉祀孫)인 정호(鄭鎬)가 죽어 사우(祠宇)를 맡길 데가 없어졌습니다. 단지 늙은 부인(婦人)이 언단(諺單)을 올려 대신 제사지낼 것을 청하고 있으니, 참으로 딱한 일입니다. 청한 바에 따라 정호의 종제(宗弟)인 정집(鄭鏶)에게 우선 제사를 대신 지내게 하고 종인(宗人)이 장성하기를 기다려 입후(立後)하는 것이 마땅할 듯합니다."
하니, 임금이 허락하였다. 장령 윤광의(尹光毅)가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2월 6일 경인

약방(藥房)에서 입진(入診)을 청하였는데, 날이 저물도록 여전히 허락하지 않았다. 어두워진 뒤에야 비로소 하교하기를,
"나의 정신이 이미 사그라졌고 힘이 이미 소모되어 버렸다. 내가 겪은 바로 보건대, 어찌 이 지경에 이를 줄 헤아리기나 했겠는가? 몇 해를 고심(苦心)했는데도 당습(黨習)을 뉘우치지 않고 대훈(大訓)을 예삿 일로 보아, 겉으로는 조제(調劑)하는 것 같으면서도 속으로는 실제로 옛날 그대로이니, 민창수(閔昌洙)를 제멋대로 비호하는 데 이르러서 극도에 달하였다. 임금 노릇이 겸연쩍으니, 무슨 마음으로 약을 먹겠느냐? 탕제(湯劑)와 문질(問疾)을 모두 그만둠이 마땅하다."
하였다.

 

우의정        조현명(趙顯命)이 차자를 올렸는데, 대략 이르기를,
"홍계희(洪啓禧)가 박문수(朴文秀)를 논척(論斥)한 상소를 보았더니, ‘북로인(北路人) 최이준(崔以峻)이 외람되게도 현읍(縣邑)의 자리를 절취(竊取)하려고 말[馬]을 바쳐 직임을 얻었다.’라고 말했는데, 최이준이 토산 현감(兎山縣監)에 제수된 것은 곧 신이 동전(東銓)에 대죄(待罪)하고 있을 때입니다. 처음에 최이준은 병조 당상의 군관(軍官)으로 도순무(都巡撫)를 따라 남쪽으로 가서 죽산(竹山)의 적(賊)을 토벌하였습니다. 신이 멀리서 관아 뒷산을 바라보았더니, 어떤 사람이 적과 칼싸움을 벌이고 있었는데, 조금 있다가 적의 머리를 베고는 코끝을 칼에 베어 피를 줄줄 흘리며 돌아왔습니다. 이름을 물어 보았더니 곧 최이준이었습니다. 신은 마음속으로 몹시 장하게 여겼기 때문에 전지(銓地)에 돌아간 뒤 즉시 수령에 의망(擬望)했던 것이니, 대개 포현(褒顯)하여 뒷사람에게 권장을 하려 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 홍계희의 상소가 이와 같으니, 박문수가 동전을 거치지 않았음은 홍계희 또한 알고 있을 것인데, 그 뜻은 대개 최이준이 박문수에게 말을 바치고 신에게서 직임을 얻었을 것이라고 의심했던 것입니다. 이것은 신이 스스로 뇌물을 받아먹고 벼슬을 판 것과 그 차이가 어찌 능히 조금이라도 날 수 있겠습니까? 안성(安城)·죽산의 싸움에서 적의 칼을 맞은 자는 유독 최이준과 훈국 마병(訓局馬兵) 안취장(安就章) 두 사람 뿐이었습니다. 그래서 신이 일찍이 연중(筵中)에서 진달한 바 있었던 것이며, 서전(西銓)에 있을 때는 안취장을 변장(邊將)에 차임했고 동전에 있을 때는 최이준을 수령에 의망했던 것입니다. 이것이 어찌 신이 박문수의 말을 듣고 최이준에게 사사로이 했던 것이겠습니까?"
하니, 비답하기를,
"이런 때 이런 일에 대해 어찌 족히 버틸 것이 있겠느냐.?"
하였다.

 

2월 7일 신묘

약방(藥房)에서 또 구대(求對)하였으나, 허락하지 않았다.

 

2월 8일 임진

약방 도제조(藥房都提調) 김재로(金在魯)가 차자를 올렸는데, 대략 이르기를,
"진대(診對)를 허락하지 않으시니, 군하(群下)들의 마음이 근심스럽고 고민스럽습니다. 또 황단(皇壇)의 친향(親享)이 점차 다가오니, 또한 일찍 섭행(攝行)을 허락하심이 마땅합니다."
하고, 또 말하기를,
"성상께서 이광의(李匡誼)로 인해 특별히 민창수(閔昌洙)도 또한 일체로 가까운 땅으로 옮기라 명하신 것은 실로 덕의(德意)와 공심(公心)에서 나온 것이고, 성교(聖敎) 가운데에도 이미 두 사람의 죄범(罪犯)에 대한 경중을 제기해 논함이 없었으니, 옥당(玉堂)이 경솔하게 진달한 것은 참으로 급하지 아니한 변명이었으니, 성심에 감동되지 아니함이 마땅합니다. 다만 생각건대 이것은 언어의 자질구레한 마디에 지나지 아니하니, 단지 담소하고 깨우쳐 꾸짖으면 적합합니다. 그리고 일이 지나가면 잊어버릴 뿐인데, 이 일로 인해 성충(聖衷)이 격뇌(激惱)하고 사교(辭敎)가 중도에 지나치니, 실로 뜻밖에서 나온 것입니다. 더욱이 옥당에 대해서는 비록 노여워할 만한 것이 있다 하더라도 신 등이야 어찌 간여했겠습니까? 그런데 끝내 잠시의 소견도 허락하지 아니하시어 날마다 서로 이끌고 들어왔다가 서로 이끌고 물러나니, 안자(顔子)의 ‘노여움은 옮기지 않는다.’라고 한 것은 아마도 이와 같지 아니하였을 듯합니다. 그리고 약원(藥院)의 문후(問候)에 대한 비답을 문을 닫은 뒤에 비로소 내리셨으니, 더욱 전에 있지 않던 바입니다. 신처럼 용렬하고 비천하여 능히 성상께 신임을 받지 못하고, 또 감격(感格)하는 정성이 없어 이틀을 연달아 저녁때까지 명을 기다렸지만, 한번도 진대(進對)를 허락받지 못했습니다. 이는 성명(聖明)의 지나친 거조가 신으로 말미암아 초래된 것이니, 신의 죄가 아님이 없습니다."
하였다. 좌의정 송인명(宋寅明)과 우의정 조현명(趙顯命) 등이 또한 연차(聯箚)로 거듭 경계하고 약원의 입대(入對)를 허락할 것을 청하니, 임금이 모두 예사 비답을 내렸다.

 

예조 참판 오광운(吳光運)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삼가 어제 약원(藥院)에 내리신 비답을 보고 신이 홀로 몰래 자탄(自嘆)하기를, ‘우리 임금께서 또 기(氣)에 동요되셨구나.’라고 하였습니다. 작년 겨울 계복(啓覆) 때 신이 ‘이치에 따르고 기에 동요되어서는 안된다.[循乎理不動乎氣]’란 일곱 글자를 우러러 전석(前席)에 바쳤는데, 이제 와서 보건대 전하께서는 기분(氣分)에 대해 성찰(省察)하심이 없고, 신의 말은 성심(聖心)에 편하도록 받아들여지지 못하였습니다. 전하께서는 ‘청심(淸心)’ 두 글자로 하교하셨는데, 이것이 오늘날 제일가는 요결(要訣)입니다. 대개 움직이는 것은 기(氣)요 움직이게 하는 것은 이(理)입니다. 그 움직여 타당함에 지나치고 말하여 중도에 맞지 아니하는 경우는 기가 이의 명령을 듣지 아니하고, 이가 그 기를 관섭(管攝)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이는 임금이고 기는 신하이니, 기가 이를 따름은 신하가 임금을 따르는 것과 같습니다. 따라서 전하의 한 마음의 기가 능히 이의 명령을 따르지 못한다면, 어떻게 한 세상을 관섭하여 극(極)이 있는 곳에 모이게 할 수 있겠습니까? 성인(聖人)의 혈기(血氣)는 때로 쇠하는 경우가 있으되 성인의 지기(志氣)는 쇠할 때가 없습니다. 지기는 이를 위주로 하고 혈기는 기를 위주로 하는데, 전하의 기가 더욱더 지치게 된 것은 그 기를 위주로 하고 그 이를 위주로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소리개가 하늘로 날고 물고기가 연못에서 뛰는 자연(自然)의 도(道)와 자신을 공손히 하여 남면(南面)하는 다스림에 있어서 돌아보건대, 어찌 일찍이 일분(一分)의 기력(氣力)을 쓸 수 있었겠습니까?"
하고, 또 말하기를,
"당론(黨論)의 화(禍)를 어찌 이루 다 말할 수 있겠습니까? 이 단서가 한 번 열리고 이 이름이 한 번 서자 일찍이 나라를 망치지 않은 경우가 없었으며, 그 잘못된 전례가 줄을 이었으되, 황명(皇明)처럼 혹심한 경우는 있지 않았습니다. 신종 황제(神宗皇帝)가 당론이 골수에 박힌 것을 너무나 미워한 나머지 한 사람을 의심하자 온 신료(臣僚)들을 의심하게 되고, 한 가지 일에 노하자 만사에 의심을 옮기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조정 신하들을 두고 족히 더불어 정치를 할 만하지 않다고 생각하며, 나랏 일이 다시는 마음에 들어오지 않는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이에 합문(閤門)을 닫고 깊이 들어앉아 우불(吁咈)048)  하는 바가 없게 되자, 윗 사람과 아랫사람 사이에는 서로 믿는 마음이 없고 임금과 신하 사이에는 서로 존중하는 의리가 없어졌습니다. 그리하여 인심은 흩어지고 온 법도가 허물어져 천하의 일이 한 번 떠나가자 미칠 도리가 없어졌던 것입니다. 오늘날 조정 신하들로 전하를 저버리는 자는 그 죄가 큽니다만, 다행스럽게 여길 것은, 성상께서 군하(群下)가 저버림이 있다 하여 혹시라도 깨우쳐 인도함에 게으르지 않으시고, 성지(聖志)를 따르지 않는다 하여 혹시라도 진쇄(振刷)에 해이하지 않으시는 것입니다. 혹 때로 격뇌(激惱)를 면치 못하시기는 하지만, 또한 모두 멀지 않아 바른 데로 돌아오시니, 이것은 참으로 황천(皇天)이 우리 종팽(宗祊)049)  을 돕고 우리 성충(聖衷)을 열어 주시어 전대에 있었던 당론의 화(禍)와 같은 전철(前轍)로 함께 돌아가지 않게 한 것입니다. 그러나 전하께서 처분(處分)하실 즈음에 기를 움직이심이 이와 같으니, 천리(天理)는 날로 약해지고 객기(客氣)는 날로 왕성해집니다. 따라서 한두 사람의 경우가 군하를 싫어하고 박대하는 데 이르지 않을 줄을 어찌 알겠으며, 한두 일이 성지(聖志)를 굳게 만들어 뒷날 나랏 일이 아득하여 탈가(稅駕)050)  하는 곳이 없게 되지 않을 줄을 어찌 알겠습니까? 더욱 성의(聖意)를 더하여 스스로 힘쓰심이 마땅합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일에 따라 진면(陳勉)하니, 깊이 가상하게 여긴다. 상신(相臣)과 정신(廷臣)은 나를 업신여겼으니, 마음을 맑게 하는 것 외에 다시 무슨 도리가 있겠는가? 정신들을 돌아보건대, 단지 절로 텅 비어 쓸쓸할 뿐이니, 경은 그래도 힘쓰라. 나에게 비록 신하가 있다고는 하지만, 내가 어찌 보잘것 없는 소신(小臣)을 위하여 마음을 쓰겠는가?"
하였다.

 

2월 9일 계사

하교하기를,
"봄추위가 마치 겨울 같으니, 비록 하전(廈氈)051)  에 있다 하나 저 위사(衛士)들이 추위를 견디는 것을 생각하매 슬픔이 내 몸에 있는 듯하다. 해조(該曹)로 하여금 짚자리를 지급하게 하라. 그리고 상번(上番)한 군사 중에서 옷이 얇은 사람에게는 유의(襦衣)를, 서북쪽의 변방에서 수자리 서는 사람에게는 또한 지의(紙衣)를 지급하도록 하라."
하였다.

 

좌의정 송인명(宋寅明)이 오광운(吳光運)에게 내린 비지(批旨) 가운데 있는 ‘상신(相臣)이 나를 업신여겼다.’는 하교 때문에 금오(金吾)에서 대명(待命)하고 명소패(命召牌)를 도로 바치니, 임금이 사관(史官)에게 명하여 도로 주게 하였다.

 

우의정 조현명(趙顯命)이 차자를 올렸는데, 대략 이르기를,
"오광운(吳光運)의 상소에 대한 비지(批旨) 가운데, ‘어찌 보잘것 없는 소신(小臣) 때문에 마음을 쓰겠는가?’라고 하신 하교로 보건대, 아마도 성상의 마음이 격뇌(激惱)하신 바가 단지 유신(儒臣)의 연대(筵對)가 마음에 맞지 아니하는 데만 있지는 않을 듯합니다. 신 등이 불초하여 크건 작건 어느 것인들 죄과(罪過)가 아니겠습니까만, 성심(聖心)이 격뇌하신 바가 꼭 어떤 일에 있는지 진실로 알 수가 없습니다. 그 우매하고 혼둔(昏鈍)하여 족히 명령을 봉행하고 하교를 받들지 못했으니, 진실로 신들의 죄입니다만, 사령(辭令)이 평정을 잃고 거조가 마땅함에서 어긋나 여러 사람들의 청문(聽聞)을 놀라게 하고 뒷날의 비난을 초래하게 하였으니, 또한 아마도 성덕(聖德)의 빛이 아닐 듯합니다."
하고 또 말하기를,
"조금만 부딪쳐 격발(激發)시키는 바가 있어도 감정을 드러냄이 중도(中道)에 맞지 않아 만약 큰소리와 싫어하는 낯빛으로 천지를 뒤흔들지 않는다면, 불안하고 꺼림칙하여 마음속으로 애태운 볶은 나머지 사륜(絲綸)에 누차 드러내어 뜻이 갈수록 어두워지고 위 아래가 서로 뜻이 통하지 못하여 의심과 의혹이 갈수록 심해집니다. 비유컨대 마치 때 아닌 번개가 치고 하늘에 하루 종일 노여움이 있는 것과 같으니, 장차 어떻게 만물(萬物)의 정(情)에 통하고 사시(四時)의 공(功)을 이룰 수 있겠습니까? 합문(閤門)을 닫고 수라를 물리침은 전하께서 스스로 그것이 잘못인 줄 아시고 뉘우치신 지 이미 오래 되었습니다. 이미 뉘우치셨다면 다시 그렇게 하시지 않아야 마땅한 것인데, 원보(元輔)가 구대(求對)할 수 없도록 아직까지 합문을 닫고 계시며, 탕제(湯劑)를 지어 올리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시어 수라를 물리치기에 이르게 되었으니, 한 번 하고 두 번하는 사이에 가면 갈수록 더욱 심해지고 있습니다. 아! 요(堯)·순(舜)에게 이런 일이 있었습니까? 문왕(文王)·무왕(武王)에게 이런 일이 있었습니까? 삼가 바라건대 성명(聖明)께서는 마음을 안정시키고 기(氣)를 낮추시어 다시 삼사(三思)052)  를 더하소서. 그리고는 먼저 약원(藥院)의 입진(入診)을 허락하신 뒤 이어서 신 등을 부르시되, 만약 정신(廷臣)에게 죄가 있다면 크건 작건 명백히 하교를 내리시어 상확(商確)해 엄중히 처분케 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당습(黨習)을 고치지 아니하고, 보잘것 없는 소신(小臣)이야 어찌 족히 말할 것이 있겠는가? 기운이 나으면 마땅히 유시하겠다. 경은 어찌하여 지난날에는 용감하더니, 지금와서는 약해졌는가?"
하였다.

 

장령 윤광의(尹光毅)가 또한 상소하여 진계(陳戒)하니, 비답하기를,
"너 또한 고첨(顧瞻)하고 있다."
하였다.

 

이조 판서 이기진(李箕鎭)이 향리에 있으면서 소명(召命)에 응해 나아가지 아니하고, 또 상소하여 극력 사직하니, 예사 비답을 내렸다.

 

2월 10일 갑오

도승지 이수항(李壽沆)이 상소하여 진대(診對)를 허락할 것을 청하고, 또 비지(批旨) 가운데의 ‘상신(相臣)이 나를 업신 여겼다.[相臣謾我]’라고 한 네 글자를 도로 거둘 것을 청하니, 비답하기를,
"이미 하유(下諭)하였다."
하였다.

 

우의정 조현명(趙顯命)이 비국 당상(備局堂上)을 인솔하여 청대(請對)하고, 옥당(玉堂)에서도 또한 구대(求對)하였다. 이때 영의정 김재로(金在魯)가 병을 이유로 정고(呈告)하고, 좌의정 송인명(宋寅明)이 명(命)을 기다리며 나오지 않자, 임금이 사관(史官)으로 하여금 영상과 좌상에게 가서 전유(傳諭)하고 같이 들어오게 하였으나, 모두 명에 응하지 아니하였다. 임금이 마침내 구대한 여러 신하들을 소견(召見)하고, 조현명에게 이르기를,
"경이 지난 번 민창수(閔昌洙)의 일을 논한 것이 어떠하였던가? 그런데 지금 ‘예예(泄泄)’ 하니, 이것이 ‘지난 날은 동감했으나 지금은 나약하다.’는 비답이 있게 된 까닭이다."
하니, 조현명이 말하기를,
"지금 하교를 받으니, 너무나도 두렵고 부끄럽습니다. 그러나 신은 대관(臺官)이 아니니, 어찌 일마다 매번 참섭(參涉)할 수 있겠습니까?"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이광의(李匡誼)는 단지 한때의 괴물(怪物)일 뿐이다. 그 발계(發啓)한 바는 앞뒤를 돌아보지 아니한 것이었고, 민창수의 경우는 대훈(大訓)을 이미 반시(頒示)한 뒤였으니, 어찌하여 김용기(金龍紀)의 관계됨이 막중함을 알지 못하고 이에 이런 상소를 한단 말인가? 이것은 모두 당심(黨心)이다. 유신(儒臣)이 이광의와 똑같다고 말할 수 없다고 한 것은 비록 감히 그가 옳다는 것을 명백히 말한 것은 아니나, 그 뜻은 민창수를 옳게 여긴 것이다. 그리고 그날 연석(筵席)에서 만약 다른 사람이 있었다면 또 장차 이광의를 몰래 비호하려 했을 것이다. 이미 무안(誣案)을 없앴다면, 의당 대훈(大訓)을 믿어야 할 것인데도, 민창수가 김용기를 들추어 언급했기 때문에 국청(鞫廳)을 설치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그런데 유신은 도리어 민창수를 가볍게 여기니, 이것은 김용기와 더불어 함께 가벼이 여긴 것이다. 그 죄를 돌아보건대, 어찌 단지 삭직(削職)에만 그칠 수 있겠는가? 나는 정국(庭鞠)을 열어 묻고자 한다. 경은 어떻게 생각하느냐?"
하니, 조현명이 말하기를,
"신축년053)  ·임인년054)  의 싸움은 한(漢)·당(唐)·송(宋) 이래로 있지 아니하던 바였습니다. 인심이 각각 한쪽에 치우치게 매임이 있는지라 끝내 변화시키기 어려웠으니, 가짜 시[僞詩]가 나온 데 이르러 극도에 도달했던 것입니다. 신이 그때 눈물을 흘리며 진달했던 것은 대개 천추 만세의 뒤에 이를 위하여 말을 하는 사람이 있다면 질정(質正)할 바가 없을 것이기 때문이었습니다. 대훈(大訓)을 지어 위에 고하고 아래에 전포(展布)함은 실로 만세토록 태평할 기틀에 관계되는지라, 신은 감히 시종 일관 힘껏 도와 혹시라도 대훈을 간범(干犯)하는 자가 있다면 반드시 죽음으로 다투고자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민창수가 감히 김용기 무리를 ‘충(忠)’으로 여겼으니, 이것은 단지 한때의 화심(禍心)일 뿐만 아니었으므로, 신이 과연 목숨을 팽개친 채 배척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 근본이 되는 민창수를 점차 가벼이 여기고 도리어 민창수를 구원한 사람을 정국(庭鞠)을 열어 묻기까지 하게 되었으니, 경중이 어찌 거꾸로 된 것이 아니겠습니까?"
하였다. 임금이 여러 신하들에게 서로 거리낌없이 의논하게 하고, 또 사신(史臣)에게 명하여 영상과 좌상에게 가서 물어 보게 하였다. 좌의정 송인명의 대답은 조현명과 같았고, 영의정 김재로는 서계(書啓)로 덧붙여 아뢰어 오직 반복해 논란(論難)하여 형(刑)과 법(法)이 지당한 데로 귀착되게 할 것을 원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이 일은 다시 의논해야 마땅하다. 그러나 이목(耳目)의 관원들이 잠자코 아무 말도 없이 민창수를 작처(酌處)하라는 명을 작환(繳還)하지 않은 것은 모두 죄가 있다. 모두 삭출(削黜)하라."
하였다. 이날 송인명이 임금의 명으로 인해 입시(入侍)하여 아뢰기를,
"성상의 환후가 바야흐로 조용히 조섭(調攝)하는 가운데 계시니, 청컨대 황단(皇壇)의 향례(享禮)를 섭행(攝行)하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조신(朝臣)들이 임금은 임금다워야 한다는 말의 뜻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나는 존주(尊周)055)  의 의리를 펴고자 한다. 섭행을 명함은 마땅하지 않다."
하였다. 조현명이 말하기를,
"박문수(朴文秀)를 비방한 사람을 본도(本道)로 하여금 조사해 내게 하려고 하니, 박문수를 그대로 가두어 둘 수가 없습니다."
하고, 송인명이 말하기를,
"비방한 사람들 본도로 하여금 조사해 내게 하였으나 조사해 낼 길이 없으니, 해부(該府)로 하여금 엄밀히 조사를 행하게 하는 것이 낫겠습니다."
하고, 수찬(修撰) 김상적(金尙迪)이 말하기를,
"어사(御史)는 염문(廉問)을 임무로 삼고 있으니, 어사가 비록 혹 얻어 듣는 곳이 있다 할지라도 지금 본도에서 비방한 자를 조사해 낸다면 뒷날의 폐단에 크게 관계될 것이고 또한 사체를 손상시킬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옳게 여겨 박문수는 우선 가두어 놓고 홍계희(洪啓禧)에게 함문(緘問)056)  하라고 명하였다.

 

2월 11일 을미

남태제(南泰齊)를 집의로, 권해(權賅)를 장령으로, 이광식(李光湜)을 헌납으로, 어석윤(魚錫胤)을 지평으로, 이영복(李永福)을 정언으로, 이성중(李成中)을 응교로, 김광세(金光世)를 교리로, 박춘보(朴春普)를 부수찬으로, 김시형(金始炯)을 판윤(判尹)으로, 정언섭(鄭彦燮)을 동의금(同義禁)으로 삼았다. 조명교(曺命敎)를 탁용(擢用)하여 개성 유수(開城留守)로 삼고, 심성희(沈聖希)를 함경도 관찰사로 삼았다.

 

무신년057)  역적에 연좌(緣坐)된 사람 중에서 출계(出繼)하여 강등(降等)한 사람인 경성직(慶聖稷)·경성구(慶聖耉)·경성규(慶聖揆) 등을 놓아주라고 명하여, 좌의정 송인명(宋寅明)의 말을 따른 것이었다.

 

영의정 김재로(金在魯)가 재차 정고(呈告)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지난번 약원(藥院)에 내린 비답에 어찌 다른 뜻이 있었겠는가? 언제나 당습(黨習) 때문에 비단 나만 지칠 뿐만 아니라 경으로 하여금 마음을 수고롭게 한 것이 무릇 몇 차례나 되었다. 더욱이 조정(調停)을 기약하는 것은 원보(元輔)의 임무이다. 그 개연스러움으로 인해 탕제(湯劑)를 그만두게 하고 문후(問候)를 정지시켰던 것은 이것이 당습을 깊이 미워하여 조용히 지내고자 한 것이니, 여기서 또한 이치의 한 단서를 볼 수 있는 것이다. 어찌 경에게 불만스러워함이 있겠는가? 한때의 병 때문에 단자(單子)를 찾을 필요는 없는 것이다. 경이 만약 내 뜻을 본받지 않는다면, 상신(相臣)에게 왕림하여 물었던 전례가 예전에 또한 있었으니, 내가 마땅히 행할 것이다."
하자, 김재로가 황공한 나머지 상소하여 사절하고, 이어서 단자를 거두었다.

 

정언 홍익삼(洪益三)이 양성(陽城)에서 내직(內職)으로 옮겨져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경기의 고을들은 땅이 척박하고 백성들이 가난한데, 양성이 가장 심하여 백성의 호수가 날이 갈수록 줄어들고, 군액(軍額)은 대단히 많아 백성들이 견뎌내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청컨대 그 군액을 줄여 주고 토지를 다시 측량해 주소서."
하니, 임금이 비국(備局)으로 하여금 품처(稟處)하게 하였다.

 

2월 12일 병신

우의정        조현명(趙顯命)이 차자를 올렸는데, 대략 이르기를,
"그저께 박문수(朴文秀)를 좌상에게 언근(言根)을 함문(緘問)하자는 청으로 인하여 비록 옥사(獄事)의 체모 때문에 도로 그대로 가두어 두라고 명하셨습니다마는, 이번에 함문하는 것은 박문수의 탐장(貪贓)에 대한 허실(虛實)을 묻는 것이 아니라, 곧 도민(道民)들이 비방한 그 근본 원인을 묻는 것이니, 박문수를 가두어 무엇을 하겠다는 것입니까? 한편에서는 그 비상한 자를 구핵(究覈)하고 한편에서는 그 비방받은 사람을 가두어 두니, 어찌 이런 법리(法理)가 있을 수 있단 말입니까? 박문수가 이미 범한 바가 없다면 가두어 두는 것은 지나쳤습니다. 하물며 그대로 더 가두어 두는 것이야 말해 무엇하겠습니까? 전의 성명(成命)에 의해 박문수는 방송(放送)하소서. 홍계희(洪啓禧)가 만약 언근(言根)을 현고(現告)한다면 좋겠지만, 그렇게 하지 아니하고 다시 박문수가 탐오(貪汚)했던 정상을 발설한다면 확실하고 명백한 증거가 있은 후에야 다시 박문수를 잡아와 법대로 처치해도 또한 늦지 않을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대사간 송익보(宋翼輔)가 서읍(西邑)에서 돌아와 상소하여 서로(西路)의 사의(事宜)에 대해 대략 말하였는데, 맨 먼저 전달하기를,
"재화(財貨)가 바닥이 난 것은 실로 빚을 놓아 이식을 취하는 데서 말미암은 것이고, 쌓아 둔 곡식이 실제 없는 것은 대개 쌀로 환산해 대납(代納)하는 데서 연유한 것이니, 신칙(申飭)해 개혁함이 마땅합니다"
하고 이어서 논하기를,
"각영(各營)의 군제(軍制)가 일정한 제도가 없고 청천강 이북의 독진(獨鎭)이 사의(事宜)에 맞지 않으니, 청컨대 따로 장령(將領)을 정하되 반드시 정련(精練)하게 하는 데 힘쓰도록 하소서. 그리고 그 사이에 큰 진(鎭)을 두어 체모를 무겁게 하되, 병영(兵營)을 영변(寧邊)의 철옹 산성(鐵瓮山城)으로 옮기고, 병우후(兵虞候)를 심원사(深源寺)의 동구(洞口)에 두어서 기각(掎角)의 형세가 되게 해야 할 것입니다. 강연변의 여러 진(鎭)·보(堡)는 혹은 작은 것들을 합쳐 크게 만들고 혹은 대수롭지 않은 곳을 긴요한 곳으로 옮겨 적(敵)이 엿보는 길을 열어 주지 않도록 해야 할 것이며, 인재를 거두어 써서 완급(緩急)의 쓰임에 대비하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비국으로 하여금 품처(稟處)하게 하라."
하였다.

 

2월 13일 정유

달이 헌원성(軒轅星)을 범하였다.

 

부사과(副司果)        홍계희(洪啓禧)가 또 상소하여 박문수(朴文秀)가 원사(爰辭)에서 되레 꾸짖고 욕한 말에 대해 변명하고, 또 박문수가 무천(貿遷)하여 요판(料販)하고 부서(簿書)를 조작한 정상에 대해 진달하기를,
"박문수는 포(布)로 관서(關西)의 무명을 바꾸고, 무명으로 어물(魚物)을 바꾸었습니다. 그리고는 어물로 영남(嶺南)의 쌀 1만6천여 석을 샀는데, 1석에 6, 7냥의 돈을 받았습니다. 한번 굴리고 두번 굴린 결과 그 이문을 통계해 보면 5만여 냥에 그칠 뿐만이 아닙니다."
하고, 또 말하기를,
"수천 냥의 돈으로 안동(安東)에다 전장(田庄)을 사두었습니다."
하고, 또 말하기를,
"호마(胡馬) 19필을 사서 혹은 재상(宰相)에게 혹은 친구들에게 주었습니다."
하였다. 그리고 어사(御史)에게 언근(言根)을 구핵(究覈)하려는 죄에 대해 말하고, 이어서 우하형(禹夏亨)의 탐장(貪贓)하고 기망(欺罔)한 사실에 대해 논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함문(緘問)하라는 명이 있었으니, 소장(疏章)을 올림은 마땅하지 않다. 그 상소를 돌려 주라."
하였다.

 

고성군(高城郡)의 읍호(邑號)를 강등시켜 현(縣)으로 삼게 하라고 명하였다. 이때 고성의 백성 최린(崔麟)·박흥문(朴興文), 관비(官婢) 행진(行眞) 등이 그 군수(郡守) 이하귀(李夏龜)를 원망한 나머지 고을 장교(將校) 장후순(張後巡)과 더불어 아비(衙婢) 막단(莫丹)에게 뇌물을 주어 사귄 뒤 독약을 쓰게 하니, 이하귀가 중독되어 죽은 일이 있었다. 그래서 대계(臺啓)로 인해 어사(御史)를 파견하여 끝까지 핵실(覈實)하여 자백을 받아내게 했던 것인데, 막단은 왕부(王府)에 회부해서 정법(正法)하고 장후손은 도신(道臣)으로 하여금 그 자리에서 즉시 참형(斬刑)에 처했으며, 최린·박흥문·행진 등은 조리를 돌린 뒤 장살(杖殺)하였다. 막단이 이미 죽자 그 읍호를 강등시켰던 것이었다.

 

2월 14일 무술

달이 태미 서원(太微西垣) 안으로 들어갔다.

 

임금이 대신(大臣)과 비국 당상(備局堂上)을 인견(引見)하고, 하교하기를,
"홍계희(洪啓禧)가 반드시 영성군(靈城君)을 탐장(貪贓)의 죄과(罪科)로 몰아넣으려 하는 것이 어찌 당습(黨習)이 아니겠느냐? 영성에게 참으로 이런 일이 있었다면, 홍계희가 북백(北伯)에 특별히 제수한 뒤에야 비로소 말을 했으니, 참으로 이른바 ‘앞도 뒤도 아닌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함문(緘問)한 뒤에 또다시 의기양양하게 소장(疏章)을 올렸으니, 더욱 무엄하다."
하니, 좌의정        송인명(宋寅明)이 말하기를,
"지금 비록 언근(言根)을 다그쳐 묻는다 해도 홍계희가 지적해 고할 리가 없을 것이니, 함문하란 명을 정침(停寢)함이 마땅하겠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함문은 한갖 나라의 체통만 손상시킬 것이니, 그냥 두라."
하니, 송인명이 또 말하기를,
"우상이 홍계희의 상소 가운데 있는 ‘말을 주었다는 일’ 때문에 인입(引入)하였습니다. 조현명(趙顯命)은 박문수와 함께 맹세한 사이고 서로 장임(將任)에 드나들었기 때문에 완급(緩急) 때의 소용으로 박문수가 보내면 조현명이 받곤 하였습니다. 홍계희는 이것을 은연중에 비추어 말했습니다만, 이것은 무쉬(武倅)의 뇌물과는 다른 것입니다. 그리고 친구들 사이에 거마(車馬)를 서로 빌려주는 것은 본래부터 전배(前輩)들의 호사(好事)였습니다. 이것을 가지고 인혐(引嫌)한다면 어찌 지나친 일이 아니겠습니까?"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제오륜(第五倫)이라면 이별하는 사람의 선물이라 하여 그 주는 것을 물리치고 받지 않겠지만, 같이 장임을 맡은 사람으로서 한 사람은 주고 한 사람은 받았으니, 무슨 나쁠 것이 있겠니가?"
하였다. 송인명이 또 말하기를,
"북도(北道)의 명천(明川)·길주(吉州) 등 여섯 고을을 해를 이어 기근이 들고 전염병이 발생해 백성의 일이 몹시 딱합니다. 진구(賑救)하는 정사를 조금도 늦출 수 없는데, 옛 방백(方伯)은 바야흐로 탄핵을 받아 업무를 중지하고 있고, 새 방백 또한 가까운 시일 내에 부임하기 어려우니, 진사(賑事)를 맡아서 처리할 사람이 없습니다. 청컨대 북평사(北評事)        남태기(南泰耆)로 하여금 새 방백이 부임할 때까지 우선 진사를 감독하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허락하였다. 송인명이 또 말하기를,
"남관(男關)에는 전 장령        이격(李格)이 있어 효행(孝行)으로 소문이 났고, 북관(北關)에는 전 지평        이재형(李載亨)이 있어 학식(學識)으로 이름이 났는데, 색목(色目)이 달라 관장(官長)이 된 사람이 부억(扶抑)하는 것이 아주 다릅니다. 이 때문에 북로(北路)의 당습(黨習)이 점차 더 격화되고 있다 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이것은 조정에 미룰 일이 아니다."
하였다. 송인명이 또 말하기를,
"홍계희의 상소에 ‘민형수(閔亨洙)가 최이준(崔以峻)을 장살(杖殺)했다.’는 말이 있습니다. 이 일의 곡절을 신이 상세히 알지는 못하나, 최이준은 일찍이 토산 현감(兎山縣監)을 지냈으니, 이것은 동반(東班) 정직(正職)입니다. 도신(道臣)이 마음대로 죽여서는 마땅하지 않은 일인 듯합니다."
하니, 임금이 제도(諸道)에 엄하게 신칙하여 일찍이 조관(朝官)을 지낸 사람은 군무(軍務)나 장문(狀聞)하는 일이 아닐 경우 감히 제멋대로 곤장(棍杖)을 쓰지 말도록 하고, 범하는 자는 상명(償命)의 율(律)을 시행할 것을 정제(定制)로 삼게 하라고 명하였다. 또 하교하기를,
"일찍이 무신년058)                  에 금오랑(金吾郞)에게 열 차례 곤장을 치라고 명하여 거의 목숨을 잃게 할 뻔하였으므로 내가 지금 후회하고 있다. 임금의 자리를 잇는 사람이 만약 혹시라도 십수 차례의 곤장도 사람을 다치게 하지 않는다고 여긴다면, 죽지 않는 사람이 거의 드물 것이다. 나는 사복(嗣服)한 초기에 압슬형(壓膝刑)059)                  을 없애도록 했고, 그 뒤 역적들을 다스릴 때도 이형은 쓰지 않았다. 만약 임금의 자리를 잇는 사람이 모두 내 마음 같다면 반드시 함부로 사람을 죽이는 염려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도신이나 수령의 경우 분한 김에 시원하게 다스리려고 할 것이니, 비록 혹 정제(定制)가 있다 하더라도 어찌 이런 폐단이 없을 것을 보장할 수 있겠는가?"
하니, 송인명이 말하기를,
"성상의 이 한마음은 불쌍히 여기심이 애연(藹然)하니, 사직(社稷)이 길이 전해짐은 끝내 반드시 이에 의지할 것입니다. 바라건대 이 마음을 넓히셔서 후손을 위한 계책으로 물려주도록 하소서."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한(漢)과 송(宋)은 인후(仁厚)함으로 나라를 세웠기에 내가 법으로 삼고 있다. 하지만 모든 일에 있어서는 비록 혹 너그러움을 따른다 할지라도 당습에 이르러서는 용서할 수가 없다."
하니, 송인명이 말하기를,
"성교(聖敎)가 비록 고심(苦心)에서 나온 것이기는 하나, 벌이 그 죄에 타당한 것인지는 이미 기필할 수 없으며, 만약 혹시라도 잘못 걸려든다면 더욱 어찌 원통하지 않겠습니까? 설사 마땅히 죄주어야 할 사람이 있다 하더라도 ‘죽인다[殺]’는 한 글자를 성심(聖心)에 두지 마시고, 진실로 징계하고 권려(勸勵)하고자 하신다면 어찌 벌이 없음을 걱정하겠습니까?"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한억증(韓億增)처럼 대훈(大訓)에 불만을 가진 자는 비록 법을 쓰지는 않을 지라도 내가 한번 물어보고자 하고 있다. 이에 대해 엄하지 않게 한다면 뒷날 대훈에 불만을 가진 자가 또 어찌 오늘날과 같지 않을 줄을 알겠는가?"
하니, 송인명이 말하기를,
"한억증은 당심(黨心)은 있습니다만, 불만을 가졌다고 단정하심은 억울합니다."
하였다. 그리고 또 말하기를,
"제주(濟州)의 세 고을에 바야흐로 큰 흉년이 들었으니, 군사의 조련(操鍊)을 우선 정지시켜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시노비(寺奴婢)의 추쇄(推刷)는 가을이 되기를 기다려서 하고, 노비를 추쇄하여 노비 공채(貢債)를 징수하는 것도 아울러 장청(狀請)에 의거해 금단(禁斷)함이 마땅하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허락하였다. 송인명이 또 말하기를,
"춘방(春坊)·계방(桂坊)에는 인원을 가려서 차임해야 마땅한데, 황경원(黃景源)의 문학(文學)과 윤광소(尹光紹)의 경술(經術)과 서지수(徐志修)·민백창(閔百昌)의 언론(言論)은 춘방에 가합하고, 나삼(羅蔘)·이재(李在) 또한 계방에 두되 구임(久任)시켜 성효(成效)를 책임지움이 마땅하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모두 옳게 여겼다.

 

2월 15일 기해

우의정        조현명(趙顯命)이 차자를 올렸는데, 대략 이르기를,
"홍계희(洪啓禧)가 이른바 재상(宰相)이란 신을 지적하여 말한 것입니다. 신은 오랫동안 장임(將任)에 있었으나 탈 말이 없었으므로, 일이 생기면 박문수(朴文秀)의 말을 신의 말인 양 빌려서 타고는 하였습니다. 그리자 박문수가 스스로 장신(將臣)이 되어 완급(緩急) 때 대비조차 못한다고 나무랐으므로, 박문수가 북으로 갔을 때 탈 만한 말을 한번 찾아 보내도록 했던 것을 경신년060)                   가을에 비로소 사람을 보내어 가져오게 하였습니다. 신이 이미 장임에서 해임되어 말을 쓸 곳이 없어졌었는데, 처(妻)가 병을 앓아 거의 죽게 되어 삼(蔘)이 든 약을 많이 복용하게 되자, 힘이 넉넉하지 못하였으므로 팔아서 약값에 보탰습니다. 그리고 작년 가을 이후 신의 다리 병이 조금 차도가 있자, 의원이 말을 타서 다리에 힘을 올리도록 권하였으므로, 또 박문수의 말을 가져다가 때때로 말타기를 익혔고, 지금은 바야흐로 마굿간에 있습니다. 붕우 사이에 수레와 말을 통래하였던 것은 옛날부터 있어 온 의리입니다. 신은 박문수와 형제와 같은 정이 있어 비록 수레나 말보다 더 큰 것이라 할지라도 박문수는 신에게 줄 것이고 신은 박문수에게 받았을 것이니, 마땅히 의리에 크게 해로울 것이 없을 듯합니다. 그런데 진실로 박문수가 이 때문에 탐장(貪贓)이란 한 가지 죄안(罪案)을 첨가하게 될 줄은 뜻하지 아니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박문수는 주고 신은 받았으니, 탐장은 실제 신에게 있습니다. 어찌 박문수가 탐장했겠습니까? 홍계희는 상소에서, ‘최이준(崔以峻)이 현감(縣監)을 되었을 때 어떤 사람이 그때의 정관(政官)에게 물어보았더니 「성보(成甫)」에게 핍박을 받아 부득이 의차(擬差)하였다.’고 하였습니다. 성보란 곧 박문수의 자(字)입니다. 또, ‘대신(大臣)이 이 때문에 인혐(引嫌)하였다.’고 했는데, 차자(箚子)의 말은 신이 들은 바와 다릅니다. 그 뜻은 대개 신이 전관(銓官)이 되었을 때 박문수에게 핍박받아 최이준에게 벼슬을 주었고, 지금 와서 박문수를 위해 말을 꾸며 스스로 인혐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최이준을 처음 토산 현감(兎山縣監)에 제수하였을 적에 대계(臺啓)에서, 비천(卑賤)하여 자목(字牧)을 감당할 수 없다.’고 하자, 신은 즉시 상소하여 다투어 최이준이 적(賊)과 힘써 싸우다가 칼에 맞아 피를 흘렸던 상황을 갖추 진달하였습니다. 지금 그 소본(疏本)을 다시 살펴볼 수 있을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우악한 비답을 내렸다.

 

2월 16일 경자

좌의정 송인명(宋寅明)이 차자를 올렸는데, 대략 이르기를,
"신은 지난번 연석(筵席)에서 박문수(朴文秀)의 일에 대해 조사를 해야 한다는 뜻으로 진달한 바 있었습니다. 그런데 물러나와 다시 생각해 보았더니 새 감사(監司)가 언제 부임할지 알 수가 없었습니다. 형세로 보아 장차 지체됨을 면하기 어려울 것인데, 맹부(盟府)의 중재(重宰)로 하여금 오랫동안 대명(待命)하여 진흙 길에서 왔다갔다하게 하는 것은 조정 체모에 마땅하지 아니합니다. 이번 조사 때 응당 물어 볼 자는 요판(料辦) 때의 감색(監色) 및 만적(萬績)·원흥(遠興)의 무리 약각 명일 뿐입니다. 신의 생각으로는, 서울 감옥으로 잡아다 놓고 추조(秋曹)061)  에서 안핵(按覈)한다면 그 유죄 무죄는 절로 공의(公議)를 가릴 수 없을 것이고 또한 가까운 데서 그 자리로 나아갈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따라서 그 조사하는 일을 엄하게 하고 나라의 체통을 무겁게 하는 도리에 있어서도 아마 마땅할 듯합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진달한 바에 의거하여 시행하라."
하였다.

 

임금이 대신(大臣)과 비국 당상(備局堂上)을 인견(引見)하였다. 영의정 김재로(金在魯)가 말하기를,
"이광의(李匡誼)를 이미 생의(生議)에 부쳤는데, 풍토병과 전염병으로 반드시 죽고야 말 땅에 두는 것은 참작하여 처분하신 덕의(德義)가 아닙니다. 그러므로 신이 진달한 바가 있었던 것인데, 처분이 내려지자마자 옥당(玉堂)은 중죄(重罪)에 빠졌고 대관(臺官) 또한 모두 삭직(削職)되었습니다. 이것은 모두 신이 망언(妄言)을 한 죄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지금 어찌하여 이 일로 인혐(引嫌)하는가? 세도(世道)에 믿을 것이 없다."
하였다. 김재로가 말하기를,
"한억증(韓億增)이 진달한 바는 이광의가 민창수(閔昌洙)에 비해 무겁다는 것일 뿐이었습니다. 그런데 성상께서는 대훈(大訓)에 불만을 품은 것으로 의심하시니, 분수(分數)가 참으로 지나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오늘의 이 거조(擧措)가 어찌 단지 한 사람의 한억증 때문이겠는가? 지금 만약 대훈에 대해 범죄(犯罪)한 자를 가볍다고 한다면, 뒷날 한억증과 같은 자가 또 이광의의 죄가 가볍다고 말하지 않을 줄 어찌 알겠는가?"
하였다. 김재로가 말하기를,
"대훈을 내린 뒤 범한 자는 민창수 한 사람인데, 그 아우가 지어 둔 상소를 베껴 올린 데 지나지 않을 뿐이고, 스스로 대훈에 죄를 범한 줄은 알지 못하였습니다."
하자, 우의정 조현명(趙顯命)이 말하기를,
"민창수의 상소 가운데 ‘교통(交通)’했다는 한 구절은 관계됨이 지극히 중대합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민창수 또한 대훈을 옳다 하고 김용기(金龍紀)를 그르다 자복(自服)하였다. 지금 내가 한억증에게 묻고자 하는 것은 김용기의 옳고 그름이다. 만약 김용기가 옳다고 분명히 말한다면, 대훈 또한 마땅히 없애버려야 할 것이다."
하니, 조현명이 말하기를,
"정문(庭問)은 지나칩니다. 무겁게 감죄(勘罪)한들 무엇이 손상되겠습니까?"
하고, 김재로가 말하기를,
"삼목(三木)062)  과 낭두(囊頭)063)  를 악역(惡逆)이 아니라면, 어찌 사람마다 시행할 수 있겠습니까?"
하였다. 임금이 집의 남태제(南泰齊)에게 다시 물으니, 남태제가 말하기를,
"경악(經愕)의 신하이니, 그 직임이 애석합니다. 게다가 밧줄로 묶고 국정(鞫庭)에서 신문하는 것이 어찌 성세(聖世)의 아름다운 일이겠습니까? 전하의 명성(明聖)으로 설령 혹시라도 마땅히 죄주어야 할 자에게 죄를 준다 하더러도, 천망대에 이를 전하의 자손들이 하나같이 전하의 명성과 같을 줄을 어찌 보장할 수 있겠습니까? 뒷날 혹시라도 끌어대어 전례로 삼으며, 삼사(三司)와 대관(大官)을 논할 것 없이 혹시라도 저촉된 바가 있을 경우 곧 정문(庭問)을 설행한다면 전하께서는 장차 어떻게 그 폐단을 해결하시렵니까?"
하니, 임금이 옳게 여기고 드디어 하교하기를,
"이광의의 거조는 관계됨이 무겁고 민창수의 진장(陳章)은 오로지 당심(黨心)에서 말미암았다. 대훈을 내림은 관계됨이 어떠한가? 아! 저 한억증과 서명신(徐命臣)은 당심을 참지 못하고 경중을 비교해가며 방자하게 진달했던 것이다. 아! 몇년 동안 고심(苦心)한 것이 대훈에서 끝났으니, 이때는 정녕 교목 세신(喬木世臣)이 모두들 힘을 합쳐 서로 도울 전기인 것이다. 처음에는 엄하게 신문하고자 하였으나, 여러 신하들이 모두 ‘중도에 지나치다.’ 하였고, 헌신(憲臣) 또한 능히 법을 고집하였다. 비록 뜻을 굽혀 따르기는 한다마는 뒷날의 폐단을 엄하게 방비하는 도리에 있어서 어찌 삭직(削職)에만 그칠까 보냐? 한억증은 원지(遠地)로 유배시키고 서명신은 삭출(削黜)하라."
하였다. 남태제가 이어서 들어오지 아니한 양사(兩司)의 신하를 모두 삭직(削職)시킬 것을 청하니, 임금이 윤허하였다. 남태제가 또 전날의 ‘대각(臺閣)이 적막하다.’는 하교 때문에 마침내 인피(引避)하며 말하기를,
"지난날 두 죄인을 처분한 뒤 법을 집행하는 신하들 중에 여태까지 쟁집(爭執)한 자가 있지 아니하였으니, 전하께서 개탄하시며 이런 하교가 있기에 마땅합니다. 그러나 성상께서 먼저 뜻의 소재처를 보이셨기 때문에 언지(言地)에 있던 자들이 도리어 봉승(奉承)하는 것을 혐의쩍게 여긴 나머지 우물거리며 말을 꺼내어 죄로 삭출됨이 계속되었으며, 목소리와 낯빛이 너무 지나치신지라 대각을 가벼이 보는 데로 돌아감을 면치 못하였습니다. 이것은 신 등이 능히 무거운 신임을 받지 못한 소치가 아닐 수 없습니다. 아! 주(周)나라의 선비가 존귀했고, 진(秦)나라의 선비가 천했던 것을 생각건대, 위에 있는 사람이 어떻게 대우하느냐에 달려 있을 뿐이었습니다. 신은, 그윽이 언책(言責)을 맡은 자가 스스로의 대우를 더욱 천하게 한 나머지 관직 또한 따라서 더러워져 세상에서 조금이라도 자호(自好)하려는 사람이 반드시 장차 그 관직에 있는 것을 부끄러워할까 두렵습니다. 따라서 그것이 성세(聖世)의 근심거리가 됨이 크다 하겠습니다."
하니, 답하기를,
"진달한 바가 체제를 얻었다만, 어찌 지나치게 버티는가?"
하였다.

 

2월 17일 신축

특별히 집의 남태제(南泰齊)를 발탁하여 병조 참의로 삼았다가 곧 승지에 제수하였다.

 

2월 18일 임인

옹주를 봉하여 화협 옹주(和協翁主)로 불렀다.

 

박필부(朴弼傅)를 집의로, 홍득후(洪得厚)·최규태(崔逵泰)를 장령으로, 민원(閔瑗)을 헌납으로, 조진세(趙鎭世)·이구령(李耉齡)을 지평으로, 조중직(趙重稷)을 정언으로, 한익모(韓翼暮)를 교리로 삼았다.

 

2월 19일 계묘

달이 저성(氐星)으로 들어갔다.

 

헌부(憲府)에서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예조 참판 오광운(吳光運)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공자께서 조심하신 바는 오로지 제계(齊戒)와 질병이었습니다. 그런데 동시에 겸하여 조심할 수 없을 경우 제사는 대행할 수 있지만, 질병은 조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주(周)나라 천자(天子)가 제(齊)나라에 제사지낸 고기를 내리고 백구(伯舅)064)  는 늙었다 하여 뜰 아래에 내려가 절하지 못하게 하였으니, 천자가 제후(齊侯)의 늙음을 딱하게 여김이 지극하였습니다. 전하의 존주(尊周)하는 정성으로 보건대, 저 하늘이 성궁(聖躬)을 돌보심이 어찌 주나라 왕보다 아래로 가겠습니까? 바야흐로 성후(聖候)를 조용히 조섭하는 때를 당하였으니, 황단(黃壇)에 친히 제사지내겠다는 명을 정지하심이 마땅하겠습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진달한 바는 높이 평가할 만하나 이미 유시하였다. 대행시킬 수 없다."
하였다.

 

부수찬 박춘보(朴春普)가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대저 신국(訊鞫)의 율(律)은 극적(劇賊)을 다스리는 도구입니다. 이 때문에 정국(庭鞫) 때는 반드시 위사(衛士)로 하여금 좌우에서 둘러싸게 하는 것입니다. 그 엄하고 중대함이 이와 같으니, 죄가 악역(惡逆)을 범한 경우가 아니면 신료(臣僚)에게 가볍게 시행할 수가 없음이 명백합니다. 삼사(三司)의 신하가 아침에 전폐(殿陛) 사이에서 일을 논하다가 저녁이 되면 형구(刑具) 아래서 머리에 자루를 뒤집어쓴 채 이리저리 구르며 울부짖으니, 참혹함을 차마 말할 수가 없습니다. 일이 지나가면 비록 후회하지만 후회해도 고치지 않고 자주 반복됨이 그치지 아니합니다. 지난날 전하께서 두 유신(儒臣)의 일 때문에 엄한 하교를 내리시기까지 하시어 정문(庭問)하는 일이 조석간에 닥쳤는지라 그 일을 들었던 사람들이 당황하고 놀라 숨을 죽이며 날을 보냈는데, 처분이 이미 내려지게 되자, 인심이 조금 안정되었습니다. 비록 그렇다고는 하지만 전하께서 내리신 사령(辭令)의 잘못은 아무리 빠른 말[馬]도 쫓아갈 수 없을 정도여서 청사(靑史)에 써서 후세에 전하게 되었으니, 그것이 성덕(聖德)에 허물이 됨은 진실로 작은 근심이 아닙니다."
하고, 또 말하기를,
"국가에서 삼사를 둔 것은 그 직함을 사치스럽게 하고 그 몸을 영화롭게 하고자 함이 아닙니다. 선(善)을 권하고 악(惡)을 버리게 하며 말하여 사리를 밝히고 마음을 써서 생각하여 나랏일에 도움이 되게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비록 말하도록 인도하고 간(諫)하도록 책임지운다 할지라도 오히려 그 곧은 말을 듣지 못할까 두려운데, 하물며 만균(萬勻)의 위세로 위에서 꺾고 누르는 경우야 말해 무엇하겠습니까? 도거(刀鋸)065)  가 앞에 있고 〈귀양길〉 고개와 바다가 뒤에 있는데, 누가 기꺼이 한마디 말로 죽음을 자초하며 전하를 위해 구구한 충성을 바치면서 스스로를 애석해 여기지 않겠습니까? 총명은 날이 갈수록 가려지고 아첨하는 말만 앞다투어 나올 것이니, 나라의 안위(安危)를 알지 못하겠습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당습(黨習)을 시원하게 씻었다면 애당초 이런 일이 있었겠느냐?"
하였다.

 

2월 20일 갑진

비변사에서 아뢰기를,
"평안도의 감영(監營)과 고을에 돈이 많이 쌓여 있는데, 거두어 들이고 나누는 즈음에 심히 민폐가 있습니다. 도신(道臣)이 청한 바대로 백금(白金)으로 바꾸어 사들여 긴급할 때를 대비하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하니, 허락하였다.

 

2월 21일 을사

약방(藥房)에서 입진(入診)하였다. 임금이 담증(痰症)으로 근육이 켕기기 때문이었는데, 하교하기를,
"일찍이 듣건대, 담은 소인과 같다 하더니, 과연 허약함을 틈타 발작하되 왕래(往來)에 일정함이 없으니, 참으로 소인이 용사(用事)하는 모습과 같다."
하였다. 도제조 김재로(金在魯)가 또 날씨가 춥다 하여 황단(皇壇)에 친히 향사(享祀)하는 것을 중지할 것을 청하니, 임금이 억지로 따르고, 대신(大臣)에게 대행 하도록 명하였다.

 

2월 22일 병오

임금이 대신(大臣)과 비국 당상(備局堂上)을 인견(引見)하였다. 영의정 김재로 등이 동궁(東宮)의 가례(嘉禮)를 먼저 행할 것을 청하니, 임금이 화협 옹주(和協翁主)가 나이가 많은데도 시집을 가지 않았다 하여 어렵게 여기고, 여러 신하들에게 묻기를,
"도혼(倒婚)은 세속에서 꺼리는 바가 아닌가?"
하였다. 대신(大臣)이 말하기를,
"남자와 여자는 서차(序次)가 다르고 저위(儲位)의 등급은 더욱 절연(截然)하니, 이 때문에 구애될 수는 없습니다."
하고, 예조 판서 오광운(吳光運)은 말하기를,
"도혼과 재혼(再婚)은 세속에서 꺼린다고 합니다만, 모두 근거없는 말입니다. 동궁은 종묘·사직의 주인이 될 것인 즉, 형제간의 차서는 말할 것이 못됩니다. 온 나라의 신민(臣民)이 모두들 간절히 바라고 있으니, 세속에서 꺼림은 구애할 바가 아닙니다. 청컨대 대신의 말을 좇아 동궁의 가례를 먼저 행하소서."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남자와 여자가 비록 다르고 비창(匕鬯)이 비록 중대하기는 하지만, 형제간의 차서는 뛰어넘을 수 없다. 조혼(早婚)은 나의 뜻이 아니고 늦어진다해도 1년 차이일 뿐이다. 기다리는 데 무슨 어려움이 있겠는가?"
하고, 화협 옹주가 혼인할 날을 먼저 받게 하라고 명하였다.

 

예조에서 아뢰기를,
"이번 왕세자의 관례(冠禮) 때의 교서(敎書)에는 하루 전에 어보(御寶)를 찍어야 합니다. 청컨대 전례에 의거하여 시명지보(施命之寶)를 찍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옳게 여겼다. 또 아뢰기를,
"왕세자의 관례 때에 통례(通禮) 및 예모관(禮貌官)이 비록 의주(儀註)를 익히기는 합니다만, 그래도 생소함을 면하지 못합니다. 그리고 당상(堂上)이 예(禮)를 행할 때는 예모관이 또한 들어갈 수 없고 단지 빈(賓)과 주인(主人)·찬관(贊官)이 예를 행하는데, 각각 맡은 일이 있어 허다한 예절에 아마도 잘못이 발생할 듯합니다. 그러니 전례에 의거하여 춘방(春坊)의 관원 중에서 한 사람을 골라 의주를 가지고 들어가 참여토록 해서 일에 따라 지시함으로써 잘못과 난잡함이 없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윤허하였다.

 

이때 동궁(東宮)이 《효경(孝經)》을 강(講)하였다. 임금이 하교하기를,
"《소학(小學)》의 도는 곧 《대학(大學)》의 근본이다. 원량(元良)의 나이 이미 《소학》을 강할 연수를 넘었고, 관례가 멀지 않은데, 가례(嘉禮)는 또한 차서(次序)에 관한 일이다. 따라서 이때는 마땅히 《소학》을 강하여 그 근골(筋骨)을 세워야 될 것이니 주연(胄筵)으로 하여금 《효경》은 그만두고 《소학》으로 강을 열게 하라."
하였다.

 

평안 감사 김약로(金若魯)가 본도(本道)의 별비(別備)의 이름을 혁파하고 호조에서 취해다 쓰는 것을 허락하지 말 것을 계청(啓請)하였는데, 영의정 김재로(金在魯)가 복주(覆奏)하니 허락하였다. 이에 앞서 송인명(宋寅明)이 탁지(度支)066)  를 관장할 때 임금께 여쭈어 서백(西伯)067)  이 체임되어 돌아올 때면 영문(營門)에서 쓰다 남은 별비 1만 냥을 백금(白金)으로 천류고(泉流庫)에 회록(會錄)하거나 혹은 국용(國用)의 부족에 충당했는데, 호조에서 가져다 쓰는 것을 정식(定式)으로 삼아 곧 연례(年例)가 되었다. 재화(財貨)가 이로 말미암아 점차 고갈되었으므로, 이때에 와서 별비란 이름을 혁파하여 전처럼 저축하게 하고 큰 일이 아니면 지부(地部)068)  에서 가져다 쓰는 것을 허락하지 않게 한 것이다.

 

고(故) 부제학 이단상(李端相)과 영유 현령(永柔縣令) 송도남(宋圖南)에게 특별히 증직(贈職)을 명하고 아울러 또 시호를 내렸으니, 영의정 김재로(金在魯)의 말을 따른 것이다. 이단상은 고 판서 이명한(李明漢)의 아들이자 좌의정 이정귀(李廷龜)의 손자이다. 숙묘조(肅廟朝)에 등과(登科)하여 극선(極選)을 두루 거쳤다. 깨끗한 조행(操行)을 지키고 곧은 말을 하며 남을 맹종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고, 이른 나이에 도(道)를 찾아 조용히 글을 읽었다. 나이 채 마흔이 되기 전에 이미 염퇴(恬退)의 뜻을 결정하고 임천(林泉)에서 강학(講學)하니, 그 터득한 경지가 정밀하고 깊었다. 선정신(先正臣) 송시열(宋時烈)·송준길(宋浚吉) 등이 번갈아 그 학행(學行)을 천거하여 유현(儒賢)의 직임에 있게 하려 했지만, 하늘이 나이를 주지 않아 끝내 그 학업을 궁구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그 아들 이희조(李喜朝)와 문인(門人) 김창협(金昌協)·임영(林泳)은 모두 그 학문을 전해 세상의 명유(名儒)가 되었다. 숙묘조에 연신(筵臣)의 진달로 인해 이조 참판에 증직하였다. 송도남은 정묘년069)  에 순절(殉節)한 사람이다. 젊어서부터 강개하여 지조가 있었다. 광해군 때 그의 지친(至親)이 다행히 정승이 되자 마치 몸을 더럽히는 것처럼 피하였다. 태학(太學)070)  의 장의(掌議)가 되어서는 정조(鄭造)·윤인(尹訒)·이위경(李偉卿)을 토죄(討罪)할 것을 청했다가 흉당(凶黨)의 눈에 거슬렸는지라, 그가 등제(登第)하자 교서관(校書館)으로 분관(分館)하여 모욕하였다. 인조 반정(仁祖反正) 때는 또 강직하여 당로(當路)에 있는 벼슬아치에게 굽히지 않았으므로 그리 현달(顯達)하지 못하였다. 영유 현령이 되어 정묘년 호란(胡亂)을 당했는데, 군사를 뽑아 병사(兵使) 남이흥(南以興)의 진중(陣中)으로 달려갔다. 병사와 다른 고을 수령들이 그가 서생(書生)이라 하여 돌아가기를 권하니, 송도남이 개연히 ‘난(難)에 임하여 자신의 몸을 잊는 것이 어찌 유독 무부(武夫)만의 일이겠느냐?’고 하였다. 그리고 격문(檄文)을 지어 오랑캐에게 효유(曉諭)하되, 먼저 그 화약(和約)을 저버리고 내침(來侵)한 죄를 낱낱이 꼽고, 우리 나라가 천조(天朝)071)  의 대의(大義)를 저버릴 수 없음을 극력 말하면서 역(逆)·순(順)의 뜻으로 효유하니, 사지(辭旨)가 격렬하였다. 적(賊)이 성(城)에 닥치자 철의(鐵衣)072)  를 벗어 나무에 걸면서, ‘성이 장차 함락될 것인데, 몸을 보호해 무엇 하겠는가?’하고는 손수 그 아들에게 글을 써 보내기를, ‘남아의 사업이 오늘 결판이 났다.’ 하였다. 성이 함락되었는데도 여전히 전포(戰袍)를 입고 성 머리에 서서 활을 당겨 적에게 쏘아댔는데, 적의 화살이 고슴도치 털처럼 몰려들었음에도 끝내 화살을 놓지 않고 마침내 성가퀴를 베고 죽었다. 그 일이 알려지자 예조 참판으로 증직하고 두 아들들에게 벼슬을 내렸다. 숙묘께서 그 마음에 정문(旌門)을 세우고 안주(安州)에 사당을 세워 같은 때에 순절했던 사람인 남이홍·김준(金浚) 등과 같이 향사(享祀)하게 하라고 명하였는데, 그 자질(姿秩)이 맞지 않아 아직도 시호를 받지는 못하였다. 이때에 와서 대신이 아뢴 바로 인해 모두 허락했던 것이었다.

 

이조 판서 이기진(李箕鎭)을 재촉해 불러오라고 명하였다. 이기진은 시골집에 있으면서 여러 차례 상소를 올려 사직(辭職)하고 명(命)에 응하지 아니한 채 있었다. 대개 임금이 일찍이 이기진이 그 할아비의 당심(黨心)이 없었음을 본받지 아니한다.’는 하교를 했기 때문에 이기진이 감히 편안할 수 없었던 것이다. 이때에 와서 김재로(金在魯)가 그 사정을 아뢰자, 임금이 말하기를,
"그때의 하교는 대개, ‘그 손자가 어찌하여 그 할아비와 같지 아니한가?"라고 한 것일 뿐이었다. ‘그 할아비를 본받지 아니한다.’고 한 것은 말을 전한 자의 잘못이다."
하고 드디어 재촉하라는 명이 있었다.

 

우의정 조현명(趙顯命)이 말하기를,
"접때 상기(喪期)를 넘기고도 장례를 지내지 못한 자와 혼기(婚期)를 넘기고도 결혼하지 못한 남녀를 초록(抄錄)하는 일을 오부(五部)에 신칙하였는데, 그 보고한 바를 보았더니, 사대부 집안의 처녀와 남자로서 36, 7세에 이르는 자가 있는가 하면, 한집안 내에서 4, 5차례의 상(喪)이 있었는데도 수렴(收斂)하지 못한 경우가 또한 있었습니다. 서울이 이와 같으니, 지방은 알 만합니다. 이것은 신 등이 우러러 돕지 못한 죄가 아닐 수 없습니다만, 이 일이 어찌 형식적인 데에 그치고 말 일이겠습니까? 성상께서 친히 사륜(絲綸)을 내리시고 혼례와 장례의 비용을 보조해 주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드디어 하교하기를,
"함항(咸恒)073)  의 의지는 인간의 대륜(大倫)이고, 드러난 해골을 묻어 주는 법은 옛 성인께서 먼저 하신 바이다. 접때 대신(大臣)의 진달로 인해 하교한 바 있었는데, 지금 또 듣자니, 나이가 근 마흔이 되도록 짝을 얻지 못한 사람이 있는가하면 상이 났는데도 땅에 묻지 못한 경우가 또 한집안 내에 3, 4명이란 많은 숫자에 달한다고 한다. 이것이 어찌 왕자의 정치에서 참아 할 수 있는 바이겠는가? 서울과 지방에 분부하여 후하게 도와 주도록 하라. 그리고 태만하여 거행을 소홀히 하는 자는 서울에서는 경조(京兆)074)  에서 지방에서는 도신(道臣)이 계문(啓聞)하여 과죄(科罪)토록 하라."
하였다.

 

예조에서 아뢰기를,
"정시(庭試)는 이미 초시(初試)를 설행하였으니, 절제(節製)에 직부(直赴)한 사람에게 의당 전시(殿試)에 나아가는 것을 허락해야 하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윤허하였다.

 

헌부 【지평 이구령(李耉令)이다.】 에서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광흥창(廣興倉)과 군자창(軍資倉)의 관원을 체임시킬 때 번고법(反庫法)075)  을 거듭 엄하게 적용하여 흠축(欠縮)의 폐단을 막게 하소서."
하니, 아뢴 대로 따랐다. 또 아뢰기를,
"벽동 군수(碧潼郡守) 이형원(李馨遠)은 당초에 부범(負犯)한 것이 지극히 요악(妖惡)하여 하마터면 변방에서 일을 일으킬 뻔하였습니다. 맨 마지막에 작처(酌處)한 것은 실로 너그러운 법에서 나온 것인데, 가볍게 유배되었다가 방환(放還)되었으며, 곧 변방 고을에 제수되었습니다. 그러자 스스로 공의(公議)에 용납되지 않을 줄을 알고서는 허둥지둥 난을 무릅쓰고 부임했던 것이니, 청컨대 사판(仕版)에서 삭거(削去)하소서. 강계 부사(江界府使) 정양빈(鄭暘賓)은 난리 때 우물쭈물한 죄가 이미 문서(文書)에 드러났습니다. 그에 의거해 처분하던 날 자급(資級)을 없애고 관직을 뗀 것은 관대한 법에서 나온 것이었는데, 점차 벼슬로 진출할 것을 꾀하여 저절로 보통 사람과 같게 되었습니다. 변방의 방어를 함부로 맡길 수 없으니, 청컨대 개차(改差)하소서."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이형원은 이미 죄를 깨끗이 씻어 수용(收用)하였던 것이다. 진달한 것이 비록 체제는 얻었다만, 삭판은 과중하니 파직만 시키라. 정양빈은 이미 곤수(閫帥)를 거쳤으니, 변방 고을을 맡긴들 무슨 구애될 것이 있겠느냐? 흠을 씻어 수용하는 날 매번 지난 일을 제기하니, 그 누가 스스로 안정될 수 있겠는가?"
하고, 윤허하지 않았다.

 

달성 부원군(達城府院君) 서종제(徐宗悌)에게 시호를 내리는 날 음악과 술을 내리고, 그 봉사손(奉祀孫)은 벼슬을 제수하라고 명하였다.

 

2월 23일 정미

소대(召對)를 행하였다. 《자치통감(自治通鑑)》을 강하였다.

 

날이 춥다 하여 추조(秋曹)의 가벼운 죄수를 풀어주라고 명하였다.

 

2월 24일 무신

예조에서 아뢰기를,
"왕세자의 관례(冠禮) 때 아청색(雅靑色)의 직령(直領)과 조대(條帶)로써 처음 나갈 때의 복색으로 하고, 관례 후의 조알(朝謁)출입은 모두 시민당(時敏堂)을 거치며, 태묘(太廟)와 영녕전(永寧展)의 전알은 예를 거행한 뒤 날을 가려 행하게 하소서"
하니, 윤허하였다.

 

2월 25일 기유

홍경보(洪景輔)를 대사간으로, 이광운(李光運)을 사간으로, 민백행(閔百行)을 헌납으로, 김한철(金漢喆)을 부교리로, 이주진(李周鎭)을 지의금(知義禁)으로 삼았다.

 

관상감(觀象監)에서 가선(嘉善) 안국빈(安國賓)이 역상(曆象)을 환히 이해하고 추보(推步)076)  에 정통하다 하여 가자(加資)할 것을 계청(啓請)하니, 윤허하였다. 우리 나라의 역관(曆官)은 역법(曆法)에 소루하여 일식(日食)·월식(月食)의 시각을 추보한 것이 청나라의 자식(咨式)과 선후가 맞지 않았다. 그래서 일찍이 절사(節使)의 행차 편에 일식·월식을 추보한 책을 사왔는데 안국빈이 연구하여 자세하게 이해하도록 문자를 지어냈으므로 청나라의 역법과 차이가 없게 되었던 것이었다.

 

2월 26일 경술

임금이 시임(時任)·원임(原任) 대신(大臣)과, 정부(政府)·관각(館閣)·육조(六曹)의 당상(堂上)을 빈청(賓廳)에 불러모아 왕세자의 덕을 나타낼수 있는 글자를 의논해 정하게 하라고 명하였다. 삼망(三望)을 갖추었는데, 부망(副望)인 ‘윤관(允寬)’이 낙점을 받았다.

 

헌부에서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2월 27일 신해

별이 헌원성(軒轅星) 아래로 흘러갔는데, 꼬리의 길이는 3, 4척(尺)이었고 빛깔은 붉은 색이었다.

 

2월 28일 임자

임금이 대신(大臣)과 비국 당상(備局堂上)을 인견(引見)하였다. 영의정 김재로(金在魯)가 말하기를,
"숙묘(肅廟)·경묘(景廟)의 관례(冠禮) 때 교서(敎書)는 대제학(大提學)이 찬진(撰進)하였고. 현묘(顯廟)의 관례 때는 대사성(大司成) 황감(黃㦿)가 찬진하였습니다. 이번에는 이미 문형(文衡)이 없으니, 마땅히 홍문관과 예문관의 제학(提學)으로 하여금 찬진하게 해야 하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예문관 제학 원경하(元景夏)에게 찬진토록 하라고 명하였다.

 

하교하기를,
"2품 이상은 시민당(時敏堂)에서 예를 행할 때, 이미 노창(臚唱)하고 동궁(東宮)이 뒤에서 답배(答拜)하기 때문에 또 노창하게 되는데, 이것은 마땅히 이와 같아서는 안될 것이다. 오늘 이후로는 동궁의 답배를 사부(師傅)의 절과 동시에 행하는 것을 정식(定式)으로 삼으라."
하였다.

 

2월 30일 갑인

영의정        김재로(金在魯)와 홍문관·예문관의 제학(提學), 그리고 예조 당상을 부르도록 명하고 묻기를,
"열성(列聖)의 어압(御押)에 ‘달(達)’자가 있는가 없는가? 경묘(景廟)의 어압은 ‘정(靜)’ 자였고, 선조(先祖)의 어압은 ‘수(守)자 였으나, 현묘(顯廟) 이상은 어떤 글자였는지 알지 못하겠다. 어압의 글자는 비록 선조(先祖)나 같이 쓰더라도 의리에 해로움이 없는 것인가?"
하니, 여러 신하들이 말하기를,
"그렇습니다."
하므로, 임금이 말하기를,
"동궁의 압(押)077)                  을 ‘달(達)’자로 정한 것은 그 ‘통달(通達)’이란 뜻을 취한 것인데, 비록 행용(行用)하는 문자이기는 하지만 휘(諱)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이제 장차 문자로 교서(敎書)를 대신하여 세자(世子)가 관례(冠禮)를 치르는 날 훈시(訓示)하고자 하는데, 먼저 경(卿) 등에게 보여 주고 싶어 부른 것이다."
하고, 이어서 첩(帖) 넷을 꺼내어 보였다. 그 첫번째 첩은 겉에 ‘훈유(訓諭)’ 두 자를 썼고, 안에 ‘홍의입지(弘毅立志)·관간어중(寬簡御衆)·공심일시(公心一視)·임현사능(任賢使能)’ 열 여섯 글자를 썼으며, 그 아래에는 바야흐로 쓰기를, ‘충질(忠質)과 문(文)이 비록 아름답기는 하지만, 충질은 박야(樸野)한 데로 흐르고, 문(文)이 승하면 겉만 꾸미는 데로 흐른다. 내가 이 열 여섯 글자를 훈유의 머리에 앞세워 두었으니, 학자들에게 물어본들 어찌 이 도리를 넘겠는가?’라고 하였다. 그 둘째 첩에는 수훈원량(垂訓元良) 네 글자를 썼는데, 그 아래에 쓰기를, ‘손수 그 가르침을 썼노니, 3건을 간행토록 명하노라. 1건은 원량이 관례를 치룬 다음날 조알(朝謁)할 때 직접 내릴 것이고, 1건은 정부(政府)에 부쳐 고굉지신(股肱之臣)에게 스스로 힘쓰도록 권하게 할 것이며, 1건은 판에 새겨 사국(史局)에 간직하게 할 것이다.’라 하였고, 또 한 줄을 낮추어 그 왼쪽에 쓰기를, ‘관례를 치르는 날 훈시하고자 하는 것이 어찌 다만 이것뿐이랴? 예문(禮文)과 교서(敎書)에 그 훈시가 상세할 것이다. 약기운에 눈이 어지럽고 손이 떨리나 간절한 마음으로 쓰노니, 이것이 나의 깊은 뜻이다.’ 하였다. 그 셋째 번 첩에는 ‘저 옛날 제왕(帝王)들 중에서 인후(仁厚)함으로 나라를 세운 경우는 하(夏)·은(殷)·주(周)이래 오로지 한(漢)과 송(宋) 뿐이었다. 한(漢)나라 고조(高祖)의 약법 삼장(約法三章)078)                  은 그 뜻이 관인(寬仁)한데서 비롯되었고 송(宋)나라        태조(太祖)의 관후(寬厚)함은 역사에 환히 실려 있다. 하물며 정사(政事)외 백성에게 관후함은 곧 우리 나라의 가법(家法)임에야? 말속(末俗)에서는 부문(浮文)과 까다롭게 살피는 것을 우선하지만, 이번에 내가 너의 자(字)를 정하면서 부망(副望)의 ‘관(寬)’자로 용공(用工)하고, 장래에는 ‘관(寬)’자로 힘써 행해야 할 것이니, 어찌 한갓 정령(政令)에만 이익이 있으랴? 실로 능히 몸과 마음에 도움이 있을 것이니, 장구하게 나라를 누림이 이에 의지하게 될 것이다.’ 하였다. 그 넷째번 첩은 ‘달(達)자로 그 위에 화압(畫押)하고, 그 아래에 쓰기를, ‘나의 압(押)은 「통(通)」자니, 곧 옛날에 내리신 것을 받은 것이다. 면칙(勉飭)하게 하고자 손수 써서 너에게 주노니, 장래에 쓰도록 하라. 어찌 신하들이 지어 바치는 데 비길까 보냐? 하고, 또 왼쪽에다 쓰기를 ‘공성(孔聖)께서 무왕(武王)과 주공(周公)을 달효(達孝)라 칭송하시며, ‘남의 뜻과 일을 잘 계술(繼述)하였다.’고 하셨으니, 계술을 잘하는 것이 효(孝) 중에서 큰 것이다. 비록 그렇기는 하나 나의 얕은 정성으로 너에게 계술에 힘쓰도록 한다만 어찌 몸소 가르칠 수 있으랴? 요(堯)·순(舜)·문왕(文王)·무왕(武王)의 일이 방책(方冊)에 실려 있으니, 곧 너의 선사(先師)인 것이며, 우리 나라의 가법은 오로지 효제(孝弟)였으니 감히 소홀히 여길 수 있겠느냐? 내가 비록 덕이 박하기는 하지만, 시상(時象)을 조화시키고 동인 협공(同人協恭)케 하는 것이 나의 고심(苦心)이니, 대훈(大訓)이 밝게 있어 국시(國是)가 크게 정해졌다. 남의 아들이 된 사람의 효(孝)란 어버이의 마음을 자신의 마음으로 삼는 것이니, 이것이 달효(達孝)인 것이다. 하지만 어찌 한갓 나의 마음만 깊이 유념할까 보냐? 우러러 열조(列祖)의 가법(家法)을 계술한다면 어찌 나 한 사람만의 다행이겠느냐? 곧 교목 세신(喬木世臣)의 다행인 것이다. 이것을 마음에 새겨두어 공경히 체념(體念)하고 공경히 준행하라.’ 하였다. 이어서 김재로 등에게 하유(下諭)하기를,
"한(漢)나라 소열제(昭烈帝)가 태자(太子)에게 경계하기를, ‘선(善)이 작다 하여 하지 않도록 하지 말며, 악(惡)이 작다 하여 하도록 하지 말라.’고 하였다. 세자의 기품(氣稟)을 경 등이 또한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니, 반드시 관후함으로 인도한 연후에야 비로소 서로 이루는 도리가 있을 것이다. 나의 뇌쇠함이 이와 같은데, 이번에 이렇게 하교 하였으니, 또한 고심(苦心)에서 나온 것이다."
하고, 이어서 처연하게 말하기를,
"옛날 선조(先朝) 때 여러 해 동안 시탕(侍湯)한 적이 있었는데, 온천(溫泉) 거둥 길에 과천(果川)에 닿아 수라를 많이 잡수시는 것을 우러러보고, 한끼 밥에 기뻐했던 것이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다. 하지만 경자년079)                   6월에 이르러서는 아무리 유교(遺敎)를 다시 받들고자 한들 가능했겠는가?"
하고, 한참 동안 오열하였다. 또 하교하기를,
"오늘날의 시상(時象)은 비유컨대 물이 맑아 고기가 없는 것과 같다. 법은 갈수록 가혹하고 까다로와지니, 만약 관대한 도리를 원량을 가르치지 않는다면 백성이 장차 어떻게 할 것인가? 또 내가 세신(世臣) 때문에 고심하여 매번 원량에게 말한 적이 있으나, 원량은 내가 겪은 바와 같지 아니하니, 어찌 나의 마음씀을 알겠는가? 사람을 쓰는 것의 공평 여부에 대해 또한 원량에게 그 뜻을 물어보고자 한다. 경 등은 또한 사부(師傅)이니, 모름지기 그 나머지 일에 힘쓰고 그 모자라는 것을 보태어 나의 원량을 보도(輔導)하라. 내가 믿을 사람은 경 등이다. 무왕(武王)은 단서(丹書)를 3일 동안 재계하고 곤복과 면류관을 갖추고는 상부(尙父)에게서 받았으니, 그 일을 중대하게 여겼던 것이다. 지금 나의 이 훈시를 어찌 감히 단서에 비길 수 있겠는가마는, 또한 동궁이 조알할 때 직접 주고 대면해서 명하고 싶다. 세자는 바야흐로 어린 나이니, 지금은 비록 이해 할 수 없다 하더라도 뒤에는 마땅히 절로 알게 될 것이다. 이 글의 윗 조항은 백성을 위한 것이고 아랫 조항은 여러 신하들을 위한 것으로, 한 편의 가르침이 고심이 아님이 없다. 그 글을 보면 그 아버지를 생각하는 법이니, 어찌 감동하는 것이 없겠는가?"
하고, 관례 때까지 돌에 새겨 인쇄해 들이도록 하여 원본을 직접 줄 수 있게 하라고 명하였다. 김재로가 말하기를,
"조보(趙普)가 금궤(金匱)에 서명(署名)한 것을 그 스스로 배신하였으니, 이것은 간신(奸臣)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선인 태후(宣仁太后)080)                  가 사반(社飯)을 주며 범순인(犯純仁)081)                   등 먼저 물러난 사람에게 하유한 것을 나는 옳게 여기지 않는다. 영상(領相)은 비록 늙었지만 근력이 나보다 나으니, 이로써 훗날 보도(輔導)하는 것이 내가 경에게 바라는 바이다. 황명(皇明)의 고황제(高皇帝)가 동비(銅碑)를 주조(鑄造)하여 후세 자손을 위한 법으로 삼았는데, 그 말엽을 공정한 눈으로 살펴보건대, 동비의 뜻과 같지 않았으니, 내가 염려하는 바는 바로 이것이다."
하였다. 김재로가 말하기를,
"훈유(訓諭)의 원본을 단지 신에게만 하사하신다고 명하시니, 신에게는 비록 영광이 된다 할지라도 어필(御筆)은 사사로이 간직할 것이 아니니, 이것이 심히 불안합니다."
하니, 인본(印本)을 다섯 곳의 사각(史閣)에 나누어 간직하게 하고, 사사로이 인쇄하는 것을 금하지 아니하여 중외(中外)에 널리 배포하는 한편, 간행을 마친 뒤에는 석판(石版)을 춘추관(春秋館)과 사각에 간직하게 하라고 명하였다.

 

북병사(北兵使) 구성익(具聖益)을 나문(拿問)하라고 명하였다. 구성익이 부임할 적에 도신(道臣)을 지나는 길에 찾아가 만났는데, 그때 범월(犯越)한 사람이 있었으나 말이 변방의 일에 미치지 아니하여 심히 노하였다. 그리하여 장계(狀啓)에 다 논척(論斥)하였는데, 불손한 말이 많았으므로, 대신(大臣)이 체통을 무너뜨렸다 하여 죄주기를 청하니, 임금이 허락했던 것이었다.

 

이 달에 영남의 언양(彦陽)·울산(蔚山) 등 고을에 지진이 발생하였다. 호서(湖西)의 공주(公州)·정산(定山)·부여(扶餘)·예산(禮山)에도 또한 지진이 발생하였다.

 

영남의 인동부(仁同府)에 돼지가 새끼를 낳았는데, 발이 여덟 개에 허리가 둘이고 꼬리가 둘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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