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 2일 병진
지진이 발생하였다.
이성중(李成中)을 승지로 삼았다.
3월 4일 무오
임금이 숙빈묘(淑嬪廟)를 배알하였다. 휘신(諱辰)이 이달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3월 5일 기미
하교하기를,
"《수교집록(受敎輯錄)》은 속편을 만들지 않을 수 없다. 이조 낭관(吏曹郞官)과 한천(翰薦)을 변통(變通)한 것과 국청(鞫廳)에서 압슬(壓膝)과 낙형(烙刑)을 없앤 것과 선비로 이름하는 자는 포청(捕廳)에 보내지 말게 한 것과 군무(軍務)가 아닌데 곤장을 쓸 경우 후원(喉院)에서 제주(提奏)하게 한 것과 외방의 둥근 곤장을 신금(申禁)한 것과 일찍이 조관(朝官)을 지낸 자는 번곤(藩閫)이 감히 제멋대로 곤장형을 집행하지 못하도록 한 것과 같은 것들은 이 모두 마땅히 후세에 법으로 삼게 해야 하는 것이다. 그것을 수교(受敎)에 싣고 양관(兩館)의 제학(提學)으로 하여금 간인(刊印)을 주관하게 하라. 그리고 《고사촬요(故事撮要)》 또한 운각(雲閣)으로 하여금 인출(印出)하게 하라. 《오례의(五禮儀)》 또한 첨가해 넣을 것이 많다."
하였다. 또 하교하기를,
"무릇 크고 작은 습의(習儀)는 처음 두 차례는 단지 집사(執事)만 참여하고 세 번째 때는 정일(正日)의 예(例)에 의거해 백관(百官)이 참여 하는 것이 예(禮)이다. 듣건대 관례(冠禮)의 습의를 처음 두 차례의 것을 단지 시민당(時敏堂)에서만 행하고 배관이 모두 참여하였다고 하니, 이것은 잘못된 예(例)이다. 이번에는 처음 두차례는 단지 집사관과 춘방(春坊)·계방(桂坊)에서 참여하고, 세 번째 인정전(仁政殿) 행례(行禮) 때는 백관이 한결같이 정일의 예(例)에 의거하여 행하도록 하라. 그리고 차후로는 이에 의거해 고치는 것이 옳다."
하였다. 도제조(都提調) 김재로(金在魯)가 말하기를,
"왕세자 관례 때의 의주(儀註)는 한결같이 《오례의》를 따라 왕세자의 관석(冠席)은 당(堂) 위 가까운 남쪽에다 서향(西向)으로 설치하였고, 빈석(賓席)은 서쪽 계단에다 동향(東向)으로 주인석(主人席)은 왕세자석(王世子席)의 서남쪽에 서향(西向)으로 설치하였는데, 그 아래 행례(行禮) 때에 관한 글에는 ‘왕세자가 동쪽 계단으로 올라와서 동서(東序)로 들어가면, 빈(賓)은 서쪽 계단에서 올라오고 주인(主人)은 동쪽 계단에서 올라와 자리 뒤에 선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 이하에는 빈과 주인이 당(堂)에 오르는 절차가 없고 곧바로 ‘빈이 읍(揖)하고 왕세자가 자리[筵]에 오른다.’는 글만 있으니, 이것은 반드시 경복궁(景福宮)에서 행례할 때 당과 계단이 서로 이어져 높낮이의 다름이 없어 그런 것일 것입니다. 《춘방일기(春坊日記)》에는 ‘관례 때는 모두 왕세자석을 당 위 동쪽 벽 남쪽 가까이에다 서향으로 설치하고, 빈석을 서쪽 벽 남쪽 가까이에다 동향으로 설치한다.’고 했는데 그 당시를 상상해 볼 수 있으니, 지금 지형을 따라 그러했던 것입니다. 이번에도 또한 한결같이 《춘방일기》에 의거해 빈의 자리를 서쪽 벽에 동향으로 하여 주인과 상대해서 거행에 헷갈리지 않도록 하되, 또한 상세히 기록해 뒷날 참고하도록 하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윤허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관석(冠席)을 서향으로 함은 예문(禮文)을 따름이 마땅하나 평상시 요속(寮屬)을 대할 때 남향하지 아니하는 것이 또한 우리 나라의 고례(古例)이다. 이미 깨달은 뒤이니, 고치는 것이 마땅하다. 사부(師傅)가 뜰 가운데서 서로 절하는 것은 구례(舊例)를 그대로 쓰도록 하고, 세자가 2품, 3품의 절을 받을 때는 한결같이 평상시의 축하하는 예(例)에 의거하여 당(堂) 위에 자리를 설치하도록 하라."
하였다. 또 하교하기를,
"세자가 조알(朝謁)하는 날 훈유(訓諭)를 받을 때는 《오례의》에 의거하여, 후사배(後四拜)를 마치면 필선(弼善)이 인도하여 전(殿)에 올라 훈유를 받은 뒤 다시 사배를 행하게 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훈유는 돈례문(敦禮門)을 거쳐 채여(彩轝)에 담아 세장(細仗)으로 고취(鼓吹)하여 가되, 먼저 시민당(時敏堂)의 정문(正門)으로 가고 세자는 뒤따라 들어온다는 뜻을 의주(儀註)에 첨가해 넣도록 하라."
하였다. 김재로가 또 아뢰기를,
"인군(人君)의 동작에는 본디 정해진 시각이 있습니다. 그런데 며칠 전 숙빈묘(淑嬪墓)에 거둥하실 때는 시각을 앞서 정했는지라, 대가(大駕)를 따르던 대신(大臣)들이 군급(窘急)함을 면치 못하였으니, 이후로 출궁(出宮)할 때는 시각을 앞당기거나 늦추거나 하지 않아야 마땅할 듯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나는 앞당겨 정한 일이 없다. 단지 아뢴 시간이 조금 늦은 듯하여 금루관(禁漏官)에게 물었던 것인데, 아마도 두려워 겁을 낸 나머지 반드시 지레 시각을 앞당긴 소치인 듯싶다."
하였다. 김재로가 말하기를,
"만약 그렇다면 시각을 아뢴 관원을 죄주어야 할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내가 재촉한 것 때문에 벌이 미관(微官)에게 미친다면 또한 지나치지 않겠는가?"
하였다. 김재로가 또 추치(推治)할 것을 청하자, 임금이 답하지 않고 이어 오열하며 말하기를,
"언제나 한번 동가(動駕)할 때마다 곧 한번 사람들의 말을 불러일으키는구나. 전에는 홍봉조(洪鳳祚)·김시위(金始煒)·김유(金濰) 등이 심지어 곤복(袞服)을 입고 묘에 올라가는 것을 그르다고 하기까지 하였다. 지금 내가 서글픈 마음이 드는 것은 영상(領相)의 말 때문이 아니다. 전날의 일들은 이제 생각하니, 느낌이 있어 그런 것이다."
하고, 드디어 한참 동안 편안해 하지 않았다. 김재로가 황공한 나머지 물러나 차자를 올려 스스로를 책망하니, ‘안심하고 사직하지 말라.’고 비답하였다.
박필재(朴弼載)를 사간으로, 심익성(沈益聖)을 장령으로, 신사관(申思觀)을 지평으로, 조호신(趙虎臣)을 북병사(北兵使)로 삼았다.
이조 판서 이기진(李箕鎭)이 향리에 있으며 상소하여 소명(召命)에 응하지 않고 있다가 이때에 와서 또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일전의 연교(筵敎)에서 칭찬이 신의 할아비에게 미쳤으니, 신은 진실로 감읍(感泣)할 뿐입니다. 신의 할아비가 평생을 돈독하게 믿고 몸으로 실천했던 것은 곧 《역경(易經)》의 대과괘(大過卦) 대상(大象)의 말이었습니다. 평일의 언의(言議)·행사(行事)에 한쪽으로 치우친 바가 없었으므로, 남들이 ‘색목(色目)을 표방한다.’는 말을 그에게 더할 수 없었던 것이니, 당시와 후세에 ‘당(黨)이 없었다’고 칭송받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신의 종조(從祖) 고(故) 상신(相臣) 이단하(李端夏)는 항상 《역경》 태서(泰筮) 구이(九二)의 ‘붕망(朋亡)’의 뜻을 주장하며 조정의 논의를 조화시키고자 한 것으로 온세상에서 칭도(稱道)하는 바 되었으며, 신의 중부(仲父) 고 상신 이여(李畬)는 물러나면 장독(章牘) 사이에서 정성을 다하였고, 나아가면 하전(厦氈)에서 지성스럽게 행동하여 말을 할 적이면 반드시 황극(皇極)을 세울 것을 말했던 것이니, 이는 모두 선조(先祖)의 서업(緖業)을 잘 계승한 것이며 그 또한 편당(偏黨)의 폐해와 탕평(湯平)의 근본에 깊은 견해가 있었던 것입니다. 신이 비록 불초하여 여지없이 타락했다고는 하지만, 어려서부터 늙을 때까지 가정에서 익히 들은 것이기 때문에 세상의 못된 붕당을 짓는 바르지 못한 습속을 보기를 마치 더러운 냄새를 맡거나 끓는 물에 대이는 것처럼 여길 뿐만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다만 죄가 명의(名義)에 관계되거나 그 자취가 악역(惡逆)을 범한 경우에 대해서는 신하된 분수로 보아 엄하게 토죄(討罪)하지 않을 수 없다고 생각하여 논사(論思)하는 직임에 있을 때부터 망발함이 많았습니다. 그러나 비록 신은 외로운 충성심을 믿어 나라를 위해 깊이 염려했다고는 하지만 정성이 미치지 못해 말을 하면 번번이 핵심에 맞지 아니하여 당파의 견해에만 힘쓴다고 군부(君父)에게 의심을 받게 되었으니, 이것이 신이 그 죄를 더하게 된 까닭이자 종신토록 자책하는 바입니다.
지금 전하께서 과연 신의 할아비의 유고(遺藁)가 세도(世道)에 도움이 될 것이라고 생각하신다면, 신이 들어 아뢰는 몇 조항을 취해 그 뜻을 궁구해 보소서. 그 행할 바의 일을 가지고 성실하게 미루어 실천하신다면, 반드시 당(黨)을 없애고 황극을 세우는 방도에 작은 보탬이 없지 않을 것입니다. 《중용(中庸)》에서 《시경(詩經)》을 인용하기를, ‘나의 밝은 덕을 큰 소리로 빛내려 하지 않는다.’ 하였습니다. 밝은 덕이란 곧 황극이 있는 곳으로, 덕이 진실로 밝으면 백성은 절로 교화될 것이니, 어찌 반드시 말단적인 성색(聲色)에 애쓸 것이 있겠습니까? 삼가 길에서 전하는 소리를 듣건대, 지난번에 뇌성 같은 위엄이 거듭 진동하여 조정이 물끓듯 어수선하다가 며칠이 지나도 안정되지 않았다고 하였습니다. 신은 비록 그 상세한 곡절은 알지 못하나, 성조(聖朝)의 예사롭지 아니한 지나친 거조였음은 분명합니다. 옛날 성왕(聖王)이 천리(天理)를 밝히고 인심을 바로잡았던 방법은 오로지 상을 주지 않아도 부지런하고 노하지 않아도 위엄이 있는데 있었습니다. 어찌 일찍이 정신을 수고롭게 하고 힘을 지치게 하며, 사기(辭氣)를 많이 허비한 뒤에야 능히 황극의 도리를 얻을 수 있었던 것이겠습니까? 이제부터 이후로 탕평을 이루지 못할 뿐만이 아니라, 아마도 후세에 법으로 삼을 수 있는 것이 아닐 듯합니다."
하니, 임금이 예사 비답을 내리고, 빨리 올라오라고 재촉하였다.
집의 박필부(朴弼簿)가 상소하여 면직(免職)을 바라니, 비답하기를,
"원량(元良)의 관례가 가까운 날에 있다. 이때는 보도(輔導)하는 것이 선무(先務)이니, 사직하지 말고 올라오라."
하였다.
3월 6일 경신
전옥(典獄)의 옥수(獄囚)가 전염병에 걸려 죽었다 하여 옥관(獄官)의 직려(直廬)를 옥문(獄門) 밖으로 옮기고, 치옥 문서(治獄文書)를 들이지 못하게 하라고 명하였으니, 추조(秋曹)의 계청(啓請)을 따른 것이었다.
3월 7일 신유
밤에 검은 기운이 하늘을 가로질렀다.
3월 10일 갑자
영의정 김재로(金在魯)가 엄한 하교 때문에 재차 차자를 올려 사면(辭免)하니, 우악한 비답을 내렸다.
3월 12일 병인
밤에 달이 태미 서원(太微西垣)으로 들어갔다.
3월 13일 정묘
임금이 수서(手書)로 찬선(贊善) 어유봉(魚有鳳)·박필주(朴弼周)에게 하유(下諭)하기를,
"비단 내가 경들을 보고자 할 뿐만이 아니라, 동궁의 관례가 가까운 날 있으니, 경들은 이 미약한 정성을 이해하여 뜻을 돌이켜 올라 오도록 하라."
하였으나, 두 사람이 모두 병으로 사양하였다.
호조 참의 홍상한(洪象漢)을 목릉 향관(穆陵享官)에 차임했는데, 돌아와 상소하기를,
"올해 3월 12일은 곧 인조대왕(仁祖大王)께서 인목 대비(仁穆大妃)를 서궁(西宮)에서 다시 모시고 돌아온 날입니다. 신은 외손(外孫)으로서 제관(祭官)에 차정되었는데, 차가운 계절이라 제수(祭需)가 능히 정결하지 못함을 눈으로 보았기에 감히 전사관(典祀官)과 선부(膳夫)의 죄를 청합니다."
하니, 임금이 해부(該府)와 해조(該曹)에서 종중 과치(從重科治)하라고 명하였다.
3월 14일 무진
임금이 대신(大臣)과 비국 당상(備局堂上)을 인견(引見)하였다. 영의정 김재로(金在魯)가 말하기를,
"관례(冠禮) 때 관(冠)·대(帶)·예(醴)의 자리는 예문(禮文)에 의거하여 남향으로 했습니다만, 왕세자가 꿇어앉아 교서(敎書)를 받아 필선(弼善)에게 줄 때 마땅히 ‘부복(俯伏)·흥(興)·평신(平身)’의 한 절차가 있어야 할 것 같은데, 《오례의(五禮儀)》에는 이 절차가 없습니다. 따라서 이 한 절차를 홀기(笏記)082) 에 첨가해 넣어야 마땅하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아울러 윤허하였다. 김재로가 말하기를,
"동궁은 교서를 받을 때만 사배(四拜)하고, 그 나머지는 모두 재배(再拜)해야 마땅합니다."
하고, 예당(禮堂) 오광운(吳光運)이 말하기를,
"자(字)를 명명(命名)할 때도 또한 재배하여야 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교서를 받들고 자를 명명할 때는 마땅히 사배하여야 한다."
하였다. 김재로가 말하기를,
"사가(私家)에서는 전후에 재배하는 일이 없습니다만, 이 경우는 곧 두 차례의 재배가 되는 것입니다. 아니면 사배란 나누어서 둘로 하는 것입니까?"
하자, 오광운이 말하기를,
"처음의 재배는 명(命)에 절하는 것이고 또 한번의 재배는 자(字)에 절하는 것이니, 사배를 나누어 둘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였다. 김재로가 말하기를,
"동궁이 두 차례에 걸쳐 재배하는데, 신은 서서 받게 되니, 심히 불안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소중한 바가 여기 있고, 또 스승에게 절하는 의리가 있으니, 무슨 편안하기 어려움이 있으랴?"
하였다. 임금이 또 말하기를,
"조알(朝謁)한 뒤 마땅히 진하(陳賀)를 해야 할 것이데, 자전(慈殿)께서 성례(盛禮)한 까닭으로 친히 받으시려 하지 아니하시니, 곤전(坤殿) 또한 마땅히 홀로 받을 수가 없다. 그러나 조알의 예(禮)는 심히 중대한 것이라 폐할 수는 없다. 자전께는 권정례(權停禮)로 행할 것이요, 곤전에는 마땅히 전례에 의거하여 받을 것이니, 양전(兩殿)의 의장(儀仗)을 해조(該曹)로 하여금 전례에 의거해 갖추어 들이게 하라."
하였다.
영의정 김재로(金在魯)가 아뢰기를,
"무신(武臣)이 첩리의(貼裏衣)를 입으려 하지 않고 반드시 직령(直領)을 입으니, 이것은 잘못된 습관입니다. 청컨대 신칙(申飭)을 더하소서."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법을 세움은 무장(武將)으로부터 시작해야 마땅하니, 모두 먼저 추고(推考)하여 다른 무변(武弁)들을 경계토록 하라."
하였다. 김재로가 또 말하기를,
"기랑(騎郞)083) 이 당상 무변(堂上武弁)을 가벽(呵辟)하는 것 또한 조정의 체통을 손상시키는 일입니다. 청컨대 신칙하소서."
하니, 임금이 또한 허락하였다. 병조 판서 서종옥(徐宗玉)이 말하기를,
"서북의 도시(都試)084) 에서 몰기(沒技)085) 한 사람이 심히 많은데, 진실과 거짓이 서로 뒤섞여 있습니다. 청컨대 봄·가을의 매 도시 때 몰기한 사람의 직부(直赴)에 있어 한 사람을 넘지 않게 하는 것을 정식(定式)으로 삼게 하소서."
하니, 대신(大臣)에게 품처(稟處)하라고 명하였다.
3월 16일 경오
세자(世子)에게 내릴 훈유문(訓諭文)을 인판(印板)하는 데 수고하였다 하여, 교리 김한철(金漢喆)·김광세(金光世) 등에게는 가자(加資)하고 나머지에게는 모두 차등이 있게 상을 주라고 명하였다.
어유룡(魚有龍)을 대사간으로, 이정욱(李挺郁)을 사간으로, 윤식(尹植)을 장령으로, 여광헌(呂光憲)을 헌납으로, 임상원(林象元)·한광회(韓光會)를 정언으로, 홍정명(洪廷命)·홍정보(洪正輔)를 지평으로 삼았다.
장령 심익성(沈益聖)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우리 원량(元良)께서 삼가(三加)하실 때가 되었는지라 만백성들이 목을 빼어 바라고 있습니다. 이때야말로 보도(輔導)하는 것이 으뜸가는 급무(急務)가 되기에 친히 수서(手書)를 내리셔서 특별히 두 유신(儒臣)을 부르셨으니, 성조(聖朝)에서 유학(儒學)을 숭상 장려하고 방법을 갖추어 가르치고 인도하는 성대한 뜻을 볼 수 있습니다. 다만 생각건대 지금 경연(經筵)에 참여하는 사람을 뽑아 선발한 것이 또한 많이 있으니, 원하건대 일체로 초치하여 이연(离筵)086) 에 출입케 함으로써 학업을 강권(講勸)하는 방도로 삼게 하소서.
명관(名官)의 거취에는 본디 대방(大防)이 있는 법인데, 문학(文學) 홍중효(洪重孝)는 지난날 향리에 있다 하여 본원(本院)에서 변통(變通)을 청하기까지 했으니, 곧 이미 체직된 관원입니다. 그런데도 아무런 일이 없는 것처럼 공무를 집행하되 조금도 부끄러워 하지 않으니, 경책(警責)이 없을 수 없습니다. 견책(譴責)하고 파직해야 마땅합니다. 살인(殺人)에 관한 법은 얼마나 지엄한 것입니까? 따라서 김윤국(金潤國)의 방석(防釋)은 지나치게 성급하였음을 면할 수 없습니다. 이제 막 대사(大赦)를 거쳤다 하여 지레 용서할 것을 청하였으니, 신은 해도(該道)의 도신(道臣)에게 경책을 베풀어야 마땅하다고 생각합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홍중효의 일은 이미 하교한 바 있다. 도신의 일은 아뢴 대로 하라."
하였다.
임금이 영의정 김재로(金在魯)를 인견(引見)하였다. 하교하기를,
"동궁에게 바야흐로 신절(愼節)함이 있으니, 관례(冠禮)하는 날 배자(拜字) 때 후사배(後四拜)는 전례에 의거하여 권감(權減)하도록 하고, 사부(師傅) 이하 2품 이상 3품 이하의 후사배도 아울러 권감하라. 그리고 조알(朝謁)은 관례 날 행할 것이며, 교서(敎書)를 내린 뒤 사배는 훈유(訓諭)를 받은 뒤에 겸하여 행하도록 하라."
하였다.
3월 17일 신미
왕세자의 관례(冠禮)를 시민당(時敏堂)에서 거행하였다. 영의정 김재로(金在魯)가 빈(賓)에, 예조 판서 정석오(鄭錫五)가 찬(贊)이 되었으며, 여천군(驪川君) 이증(李增)이 주인(主人)의 일을 섭행하였다. 임금이 원유관(遠遊冠)과 강사포(絳紗袍) 차림으로 명정전(明政殿)에 거둥하여 친히 빈·찬 그리고 문무 백관(文武百官) 4품 이상은 조복(朝服)으로, 이하는 흑단령(黑團領)으로 반열에 차서대로 서라고 명하였다. 사배(四拜)를 한 뒷 다시 반열로 돌아와 차서대로 서자, 빈·찬 이하 여러 집사(執事)들이 조복 차림으로 위치로 나아가 사배하였다. 승지가 교서를 내리기를, ‘이제 원자(元子)에게 관(冠)을 씌우노니, 경 등은 일을 맡으라’ 하자, 빈·찬 이하가 사배하고, 빈이 꿇어앉아 교서를 받은 뒤 채여(彩轝)에 실어 세장(細杖)을 고취(鼓吹)하면서 앞을 인도하였다. 시민당에 이르러 관례를 의식대로 거행하였다. 백관이 또 사배하자, 홍려(鴻臚)가 예(禮)가 끝났음을 고하였고, 임금이 대내(大內)로 돌아왔다. 관례 교문(冠禮敎文)에 이르기를,
"왕은 말한다. 왕세자의 길일(吉日) 원복(元服)은 모두 옛법을 따라 의정부 영의정 김재로에게 동궁(東宮)에 나아가 예(禮)를 거행케 한다. 내가 생각건대, 저 옛날의 성왕(聖王)들이 빈(賓)에게 점치게 한 것은 관례를 공경히 하고 예를 중히 여겼기 때문이었다. 그리하여 삼가(三加)로 존엄하게 하고 사행(四行)087) 으로 책임을 지웠던 것이니, 이에 삶의 도리가 이루어지고 나라의 근본이 세워졌던 것이다. 근본이 서고야 도리가 이루어졌나니, 관례의 일은 중대한 것이다. 삼대(三代)로부터 달례(達禮)라 일컬었으며, 더욱이 임금 후사로 조묘(祧廟)를 받들고 울창(鬱鬯)을 주관해야 하나니, 얼굴을 바로 하고 복색을 갖추어야 할 것이다.
예는 관(冠)에서 시작되는 법이니, 중대하지 않겠는가? 너 세자는 타고난 성품이 침중(沈重)하고 기우(氣宇)가 넓고 우뚝하여 어린 나이에 의젓하게 덕기(德器)를 이루었다. 일찍이 이진(离震)의 자리를 바로잡아 어질고 효성스럽다는 소문이 더욱 드러났고, 보부(保傅)를 번거롭게 하지 아니한 채 절로 법도에 맞았다. 아침과 낮에 강(講)하고 외는 것이 날로 달로 성취를 보였으며, 이미 태묘(太廟)에 배알(拜謁)하고 또한 상서(庠序)에 들었다. 단정한 태도로 일을 처리하고 의젓하게 위의를 갖추었다. 부모의 간절히 바라는 마음과 조종(祖宗)의 중대한 부탁이 너 원량 한 사람에게 있으니, 나의 기쁨이 어찌 그 끝이 있으랴? 아름다운 달 좋은 날 조(阼)에서 너에게 관(冠)을 씌우고 원복(元服)을 입히며, 큰복을 축원하고 만수(萬壽)를 누릴 것을 바란다. 너에게 예주(醴酒)를 내리고 자(字)를 지어 주노니, 아름다운 일이 곧 이루어질 것이다. 나의 기쁨이 이미 깊으나 너의 책임은 더욱 크니, 공경히 훈유(訓諭)를 받들어 밤이나 낮이나 어기지 말라.
효(孝)와 제(悌)는 요(堯)·순(舜)의 도리요, 성(誠)과 경(敬)은 공자·증자의 학문이다. 우리 열조(烈祖)와 문고(文考)께서 본받고 스승으로 삼으신 바이다. 거룩한 모훈(謨訓)이 넓디 넓어 우리 후인(後人)을 열어 인도하니, 언제나 이를 생각하여 너는 힘쓰도록 하라. 대저 군신(君臣)의 지위를 바로 하고, 부자(父子) 사이에 친하며, 장유(長幼)가 화락한 것이 이른바 예의(禮義)가 서는 것이며, 안색과 사령(辭令)은 실로 이 셋의 기틀이다. 정제(整齊)하고 순(順)하여야 덕(德)이 부합(符合)할 것이니, 사람이 되어 남을 다스림은 오로지 여기에 있도다. 만약 네가 마음에 두어야 할 것이 있다면, 그것은 오직 인(仁)일 것이다. 천지가 만물을 낳아 인으로 화육(化育)하니, 총명하다 하더라도 인이 아니면 혹 살펴 따지는 데 실수하기도 하고, 강의(剛毅)하다 하더라도 인이 아니면 혹 엄격한 데 지나치기도 한다. 오직 천하의 지성(至聖)이라야 관유(寬裕)·온유(溫柔)함으로 족히 용납함이 있을 것이다. 일에 임하고 많은 사람을 다스릴 적에 너는 이 도리를 따라야 할 것이다. 혹시라도 장경(莊敬)한 마음이 느슨해지고 완오(玩娛)를 가까이 한다면 편안히 지내려는 마음이 생겨나고 사업은 황폐해지리니, 너는 경계하고 또 경계하라. 아! 변면(弁冕)·보불(黼黻)은 아름다운 것이 아니요, 장차 그 실제를 책임지우는 것이니, 너의 위의(威儀)를 삼가고 너의 덕을 공경하여 한마음으로 인외(寅畏)하되 혹시라도 나태하지 말지어다. 이제 하늘의 경사를 받들었나니, 영원히 지속될 것이다. 그러므로 이에 교시(敎示)하니, 생각건대 잘 알리라 여긴다."
하였다. 【예문 제학(藝文提學) 원경하(元景夏)가 지어 올렸다.】
【태백산사고본】 42책 57권 23장 A면【국편영인본】 43책 90면
【분류】왕실-의식(儀式) / 왕실-국왕(國王) / 어문학-문학(文學)
[註 087] 사행(四行) : 인·의·예·지.
왕세자가 관례 뒤 조알례(朝謁禮)를 행하였다. 임금이 익선관(翼善冠)·곤룡포(袞龍袍) 차림으로 함인정(涵仁亭)에 거둥하였다. 왕세자가 면복(冕服)을 갖추어 입고 보화문(普化門)으로부터 걸어나오자, 필선(弼善)이 앞을 인도하여 배위(拜位)에 이르렀다. 왕세자가 사배(四拜)하고 꿇어앉자, 승지가 교서(敎書)를 내리기를, ‘어버이를 효(孝)로 섬기고, 아랫사람을 인(仁)으로 접하며, 사람을 의(義)로 부리고 은혜로 기를 것이로다.’ 하였으니, 왕세자가 부복(俯伏)했다가 일어난 뒤 조금 앞으로 나아가 대답하기를, ‘신이 비록 불민(不敏)하나 감히 공경히 받들지 아니하오리까?’ 하였다. 필선이 왕세자를 인도하여 전(殿)에 올라 꿇어앉게 하였다. 승지가 훈유함(訓諭凾)을 받들어 왕세자에게 주니, 왕세자가 꿇어앉아 보덕(輔德)에게 주었고, 보덕은 꿇어앉아 받았다. 필선이 왕세자를 도와 부복했다가 일어나 내려가서 다시 위치로 돌아간 뒤 사배하게 하였다. 보덕이 훈유함을 받든 채 정문(正門)으로 나가 채여(彩轝)에 싣고 세장(細杖)과 고취가 앞에서 인도하며 집현문(集賢門)에 이르러 내시(內侍)에게 전하였다. 왕세자는 다시 보화문으로 들어와 내전(內殿)의 조알을 행하였다.
헌부(憲府)에서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3월 18일 임신
임금이 명정전(明政殿)에 거둥하여 백관(百官)의 하례(賀禮)를 받고, 교서(敎書)를 반포하여 중외(中外)의 사죄(死罪) 이하를 용서하고, 백관에게 가자(加資)하였으니, 동궁의 관례를 치렀기 때문이었다. 교서에 이르기를,
"왕은 말한다. 정이(鼎彛)와 비창(匕鬯)을 주관할 사람이 있게 되어 밝고 아름다운 노래가 바야흐로 울려퍼진다. 진위(震闈)088) 에서 빈(賓)을 점쳐 관초(冠醮)의 예(禮)를 행하였으니, 이는 마땅히 팔역(八域)이 함께하는 경사라 어찌 십항(十行)을 널리 선포함이 없겠느냐? 생각건대 보잘것없는 내가 크나큰 기업을 공경히 이어받았는데, 다행히 이 계체(繼體)가 이에 신기(神器)를 맡을 수 있게 되었다. 영원히 자손에게 물려주니 참으로 일색(一索)089) 의 상서에 부합하고 일찍 원량(元良)을 정하니 모두 양리(兩离)090) 의 빛남을 보았다. 효심은 하늘에서 타고난 것이나, 장락(長樂)091) 의 어루만져 사랑하심이 이에 융성하였고 어질다는 소문이 날로 퍼지니, 과인(寡人)의 기대와 바람이 더욱 간절하였다. 이미 청묘(淸廟)에 공경하게 인사를 올렸으며 다시 반궁(泮宮)에 서치(序齒)092) 하였다. 높고 높은 자질은 단정하여 법도를 어김이 없었고 공경(恭敬)·온문(溫文)한 배움은 보사(保師)를 번거롭게 하지 않았다. 생각건대 슬기로운 자질은 어린 나이에 일찍 이루어졌으며, 아름다운 일은 떳떳한 법을 따랐다. 사행(四行)을 책임지웠으니, 훈유(訓諭)가 어찌 중관(重冠)을 소홀히 한 것이겠는가? 삼가(三加)가 더욱 높으니 예(禮)는 복색을 갖춤에서 시작된다. 이에 하수(夏收)093) 의 옛 제도를 살피고 춘서(春序)의 아름다운 날을 가려 이미 본월 17일에 헌(軒)에 임하여 명(命)을 폈고 궁(宮)에 나아가 예(禮)를 행하였다. 자(字)를 불러줌은 그 이름을 높이는 것이요, 축원함은 그 복을 크게 함이었다. 의식을 경건히 하고 덕을 신중히 하니, 곤불(袞黻)이 몸에 맞아 의젖하고, 연(筵)에 올랐다가 계단을 내려가니 잠신(簪紳)들이 목을 늘이고 발돋움을 하였다. 사람의 도리를 이룸은 오직 예(禮)와 의(義)에 있으며, 천휴(天休)를 맞이하여 수를 누리고 창성할 것이다. 현면(玄冕)을 갖추어 낯빛을 바로 하니, 이미 계명(鷄鳴)의 물음이 기쁘고, 푸른 옥돌에 훈유를 새겼으니 연익(燕翼)의 모유(謨猷)를 영원히 물려줌이다. 밝은 조정의 하례(賀禮)를 받고 온나라 끝까지 사륜(絲綸)을 반포하노니, 넓은 은택은 뇌우(雷雨)처럼 쏟아져 모든 때와 허물을 씻어버렸고 지극한 교화가 뭉개뭉개 천지간에 이루어져 세상 만물이 크게 소생할 것이다.
이달 18일 매상(昧爽) 이전의 잡범(雜犯)으로 사죄(死罪) 이하는 모두 용서하여 없애며, 관직에 있는자는 각각 한 자급(資級)을 더하되 자궁(資窮)094) 인 자는 대가(代加)095) 한다. 아! 나라의 근본이 더욱 굳건하니, 한(漢)나라 왕업(王業)이 반석(盤石)처럼 안정되고 아름다운 상서가 몰려드니 주(周)나라 시(詩)에서 끊임없이 이어질 성대함을 노래하였다. 그러므로 이에 교시하노니, 생각건대 마땅히 모두 다 알 것이다."
하였다. 【예문 제학(藝文提學) 원경하(元景夏)가 지어 올렸다.】
【태백산사고본】 42책 57권 24장 A면【국편영인본】 43책 90면
【분류】왕실-행행(行幸) / 왕실-국왕(國王) / 어문학-문학(文學) / 인사-관리(管理) / 사법-행형(行刑)
[註 088] 진위(震闈) : 동궁(東宮).[註 089] 일색(一索) : 《주역(周易)》 진괘(震卦)의 맨 아래에 있는 양효(陽爻)를 가리키는 말로, 일양(一陽)이 생겼다는 뜻에서 장자(長子)를 얻는다는 말로 쓰임.[註 090] 양리(兩离) : 일월(日月).[註 091] 장락(長樂) : 동조(東朝) 즉 대왕 대비(大王大妃)인 인원 왕후(仁元王后)를 가리킴. 장락은 본래 한(漢)나라 고조(高朝) 5년에 모후(母后)를 받들기 위하여 세운 궁전으로 혜제(惠帝) 이후 황제의 모후는 모두 이곳에 거처했는데, 황제가 거처하는 미앙궁(未央宮)은 서쪽에 있었는 데 반해 이 궁은 동쪽에 있었으므로 동조(東朝)라고 하며, 흔히 대왕 대비나 대비전(大妃殿)을 가리키는 말로 쓰임.[註 092] 서치(序齒) : 입학.[註 093] 하수(夏收) : 하(夏)나라 때의 관명(冠名).[註 094] 자궁(資窮) : 품계(品階)가 되어 다시 더 이상 올라갈 자급(資級)이 없이 되는 것. 곧 당하관(堂下官)의 최고위(最高位)에 있는 것을 이름.[註 095] 대가(代加) : 자궁(資窮) 등의 이유 때문에 자급(資級)이 오를 당사자를 갈음하여 아들·사위·아우·조카 등에게 자급을 올려주는 것.
관례 때의 여러 집사(執事)들의 노고에 대해 상을 내렸다. 빈(賓)·찬(贊) 이하는 말을 하사하고, 다른 집사에게는 차등이 있게 아마(兒馬)와 현궁(弦弓)을 하사하였다. 작례(爵醴)인 사옹원 부제조 연성수(蓮城守) 근(槿)과 전교관(傳敎官)인 우승지 이중경(李重庚)에게는 각각 한 자급을 더하였다.
홍중효(洪重孝)·유언국(兪彦國)을 정언으로, 홍창한(洪昌漢)을 응교로, 이종적(李宗迪)을 수찬으로 삼았다.
하교하기를,
"봄볕이 이미 따사롭고 나라에 경사가 또 들어 전(殿)에 임하여 사문(赦文)을 반포하니, 백성을 생각함이 더욱 간절하다. 관대함에 힘쓰는 도리를 이미 훈유(訓諭)에 죄다 밝혔지만, 하전(厦氈)과 오막살이는 그 형편이 서로 현격하니, 비록 질고(疾苦)가 있다 할지라도 어떻게 스스로 알리겠는가? 사령(赦令)은 상례로 거행하는 것에 불과하니, 백성에게 은혜를 베풀 실상이 없기로, 장차 이번 20일에 소결(疏決)을 행하려 한다. 대신(大臣)과 금오(金吾), 그리고 추조(秋曹)의 당상(堂上)은 문안(文案)을 가지고 입시토록 하라."
하였다.
조관빈(趙觀彬)을 지돈녕(知敦寧)으로, 윤동형(尹東衡)을 공조 참판으로 삼았다.
3월 19일 계유
밤에 유성(流星)이 낭위성(郞位星) 위에서 나왔는데, 크기는 주먹만 하고 길이는 4,5척(尺)이었으며, 빛깔은 붉은 색이었다.
임금이 제도(諸道)의 전문 차사원(箋文差使員)을 소견(召見)하여 고을의 폐단과 백성들의 고통에 대해 묻고 하교하기를,
"차원(差員) 중에는 수령(守令)이 있는가 하면 변장(邊將)이 있기도 하고, 우관(郵官)이 있기도 하다. 수령의 경우 민사(民社)의 책임이 있지만, 토병(土兵)과 역졸(驛卒) 또한 나의 적자(赤子)가 아님이 없다. 이번에 동궁의 관례로 인해 백성을 긍휼히 여기는 마음이 전보다 갑절이나 더하니, 너희들은 돌아가 도신(道臣)에게 말하라. 무릇 민폐(民幣)가 있다면 일일이 장문(狀聞)하여 변통(變通)하게 해서 오늘 소견한 일이 문구(文具)가 되지 않게 하라."
3월 20일 갑술
정실(鄭宲)을 정언으로 삼았다.
임금이 시임(時任)·원임(原任) 대신(大臣)을 인견(引見)하였다. 영의정 김재로(金在魯)가 말하기를,
"왕세자가 사부(師傅)와의 상견례(相見禮)를 행할 때 내려오는 계단이 조금 머니, 청컨대 월대(月臺)096) 를 한도로 삼으소서."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성인(成人)이 된 뒤에는 의문(儀文)을 갖추지 않을 수 없다. 이 계단은 스승을 맞이하기 위해 쌓은 것이니, 고례(古禮)를 어찌 폐할 수 있겠는가?"
하였다. 여러 신하들이 몸소 가르치는 방도로 진계(進戒)하니, 임금이 가납(嘉納)하였다. 김재로가 또 임금의 환후가 조용히 조섭하는 중에 있다 하여 종묘(宗廟)의 친향(親享)을 정지할 것을 청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근력이 점차 쇠퇴해 가니, 비록 친향하고 싶어도 뒷날 어떻게 할 수 있겠는가?"
하였다. 김재로가 진연(進宴)을 행할 것을 청하자, 임금이 굳게 거절하고 허락하지 않았다.
왕세자의 관례(冠禮) 뒤의 경과(慶科)는 합경 정시(合慶庭試)로 설행토록 하라고 명하니, 대개 절약하는 뜻을 따른 것이었다.
소결(疏決)을 행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사령(赦令)은 단지 문구(文具)일 뿐이다. 이번 대패(大霈)097) 를 당하여 또 실상이 없다면 이것은 백성을 속이는 것이다. 경 등은 이 뜻을 깊이 유념하여 반드시 두려운 마음을 갖고 죄상을 자세히 조사해 밝히도록 하라."
하였다. 판의금(判義禁) 조상경(趙尙絅)이 여러 죄인들을 두루 들어 아뢰되, 일이 무신년098) 역옥(逆獄)에 관계된 자는 그대로 두고 자취가 의심스런 자는 모두 석방하였는데, 민윤창(閔允昌)은 출륙(出陸)하고 윤지(尹志)는 전리(田里)로 내쫓아 종신토록 금고(禁錮)하였으며, 물고 죄인(物故罪人) 이명언(李明彦)·이관후(李觀厚)는 석방하고 김원재(金遠材)는 감등(減等)하여 출륙하였다. 형조 판서 정우량(鄭羽良)이 또 여러 도(道)의 도배 죄인(徒配罪人)의 성명을 두루 들어 아뢰되, 일이 살옥(殺獄)·강상(綱常)에 관계되어 기강과 법을 어지럽힌 자는 그대로 두고 가벼운 죄수와 도년(徒年)이 찬 자는 모두 석방하였다. 조상경이, 또 격쟁(擊錚)하여 상언(上言)한 자를 복주(覆奏)했는데, 그 하나는 무신년의 역적 종실인 이엽(李燁)099) 과 이전(李琠)100) 의 아들이 그 아비를 위해 억울함을 하소연한 경우였다. 대신(大臣)이 그 외람됨을 진달하자 그대로 두었다. 영의정 김재로(金在魯)가 말하기를,
"북병사(北兵使) 구성익(具聖益)은 말로 도백(道伯)을 핍박했으니, 체통에 관계됩니다. 삭직(削職)해야 마땅합니다."
하고, 우의정 조현명(趙顯命)이 말하기를,
"염피(厭避)의 율(律)을 적용해야 마땅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삭직은 험하고 염피의 율은 과하다."
하고 멀리 유배시키라 명하였다.
전(前) 어사(御史) 홍계희(洪啓禧)를 삭직(削職)하라 명하였다. 처음에 홍계희가 박문수(朴文秀)의 탐욕스런 정상을 논하자, 임금이 박문수를 잡아 가두라고 명하였다. 박문수의 원사(爰辭)가 거의 수만언(數萬言)이었는데, 홍계희가 논한 바 ‘4만 냥’의 설에 대해 상고할 만한 문적(文籍)에 있어 사사로이 쓴 것이 아니었고 그 밖의 조건으로 ‘이매(二梅)와 최이준(催以峻)’ 등의 일은 모두 사실이 없는 것이라고 말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이것은 필시 헐뜯는 자의 말이다."
하고, 박문수를 석방하라 명하였다. 그리고 이어서 홍계희에게 언근(言根)을 함문(緘問)하자, 홍계희가 또 상소하여 박문수의 탐욕스러움을 논했는데, 전번의 상소에 비해 더욱 상세하였다. 그러자 임금이 본도(本道)로 하여금 그 당시의 이교(吏校) 및 말을 지어낸 자를 잡아올려 경사(京師)에서 사문(査問)케 하였고, 박문수의 아들 박구영(朴久榮) 또한 그 아비를 위해 격쟁(擊錚)하여 억울함을 하소연하였는데, 이때에 이르러 해조(該曹)에서 사장(査狀)을 상문(上聞)하자, 임금이 말하기를,
"영성(靈城)이 탐오하다는 것은 절로 근거없는 데로 귀착되었다. 어사(御史)의 논박 또한 뜬말로 비방하는 것을 믿었으니, 마땅히 불문에 부쳐야 하겠다. 하지만 직분을 넘어 글을 올린 것은 뒷날의 폐단에 관계된다. 곧은 사람을 등용하고 굽은 사람은 안 쓴다고 한 성현의 가르침이 환히 있으니, 홍계희를 삭직토록 하라."
하였다.
간원(諫院) 【대사간 어유룡(魚有龍)이다.】 에서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민윤창(閔允昌)은 자신이 한 지역을 지키는 벼슬아치가 되어 토적(討賊)의 의리를 생각치 아니한 채 흉서(凶書)를 베껴 전하고 어휘(御諱)를 맞바로 썼으니, 당초 섬으로 유배시킨 것만 해도 이미 실형(失刑)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번 소결(疏決) 때 또 다시 출륙(出陸)했으니, 여정(輿情)이 분개하고 있음이 마땅히 다시 어떠하겠습니까? 청컨대 출륙하라는 명을 중지하시고 전처럼 절도(絶島)에 다시 유배시키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진달한 것이 체제를 얻었다. 아뢴 대로 하라."
하였다.
임금이 형조 참의 유복명(柳復明)을 불러 풍문으로 들은 금주(禁酒)의 폐단에 대해 묻기를,
"금주를 비록 그만둘 수는 없다 해도, 염문(廉問) 또한 폐단이 많으니, 도민(都民)으로 하여금 연못 속의 물고기가 되지 않게 하는 것이 옳다."
하니, 유복명이 대답하기를,
"신이 신금(申禁)하던 초기에 세 차례에 걸쳐 알아듣도록 하였고, 이어 또 방(榜)을 걸어 효유(曉諭)하였습니다. 그리고 무릇 금법을 범하는 자는 일체 각부(各部)에 맡겨 보고하도록 하였습니다. 또 본조(本曹)에서 금리(禁吏)를 내보내면 빙자하여 침요(侵僥)할 염려가 없지 아니하기 때문에 항상 풍문으로 들어 알아차리고는 빚은 술의 대·중·소·에 따라 율(律)에 의거해 다스리곤 하였습니다. 그러니 어찌 시끄럽고 가혹하며 잗단 폐단이 있겠습니까?"
하였다. 이때 유복명은 금주를 자신의 임무로 삼고 있었는데, 도민 중에 법을 범하여 죄를 받은 자가 많았다. 이날 소결(疏決) 때 추조(秋曹)의 문안(文案) 가운데 한 여인이 있었는데, 주금(酒禁)으로 충군(充軍)된 사람이었다. 임금이 괴이하게 여겨 물으니, 대개 ‘충군’ 두 글자는 ‘정배(定配)’를 잘못 쓴 것이었다. 임금이 그래도 살피지 않은 것이라 하여 유복명을 종중 추고하라고 명하였다.
3월 21일 을해
홍문 제학(弘文提學) 서종급(徐宗伋)에게 명하여 반궁(泮宮)에서 선비들에게 시험을 보여 진사(進士) 윤득민(尹得敏)을 뽑아 직부 전시(直赴殿試)하게 하고 나머지에게 모두 급분(給分)하였다. 삼일제(三日製)를 추후하여 설행한 것이었다.
영부사(領俯事) 유척기(兪拓基)가 상소하여 월름(月廩)을 사양하니, 임금이 우악한 비답을 내렸다.
3월 22일 병자
찬선(贊善) 박필주(朴弼周)가 상소하여, 병 때문에 소명(召命)에 응하지 못했던 사실을 진달하니, 수서(手書)로 답하기를,
"경은 지난날 예대(禮待)하던 유신(儒臣)이다. 소자(小子)가 비록 정성이 얕기는 하지만 보고자 하는 마음이 가슴속에 갑절이나 더하다. 이번에 원량(元良)의 관례(冠禮)로 인해 수서로 불렀던 것이 그 어찌 문구(文具)이겠는가? 이제 경의 글을 보고 한번 분의(分義)를 펴고자 하여, 내 뜻이 절로 갑절이 되었다. 다시 수서로 유시(諭示)하노니, 지척의 강교(江郊)에서 그 어찌 돌아보지 않으려 하는가? 비록 유복(儒服)으로 들어오더라도 또한 어찌 손상될 것이 있겠는가? 경이 들어오기를 기다려 원량과 함께 보고자 하니, 조금이라도 나의 얕은 정성을 헤아려서 뜻을 바꾸어 함께 들어오라. 지금 바야흐로 현기증이 일어나지만, 그래도 수서로 유시하노라."
하였다.
우의정 조현명(趙顯命)이 차자를 올렸는데, 대략 이르기를,
"박문수가 당한 바 억울한 무함(誣陷)은 이번에 다행히도 환히 풀렸으니, 신은 박문수가 장차 전하께 어떻게 보답할 지 알지 못하겠습니다. 그런데 신이 홍계희(洪啓禧)의 세 번째 상소 가운데에 논한 바를 가져다 보니 호마(胡馬)의 필수(匹數)와 말을 받은 사람이란 것은 허황된 점이 많았습니다만 그러나 유독 그 인증한 이혜주(李惠疇)·홍호인(洪好人)의 일은 견해가 없지 않았습니다. 대개 이혜주가 중신(重臣)에게 말을 준 것은 바로 호마를 엄금(嚴禁)할 때 있었던 일이었으므로, 죄를 얻은 것이 자못 무거웠던 것입니다. 홍호인의 일은 곧 금령(禁令)을 느슨하게 한 뒤에 있었는데, 곤신(閫臣)이 말 한 마리 때문에 죄를 얻었기에 지금까지 공의(公議)가 억울하게 여기고 있습니다. 그러나 외면으로 보건대, 다른 사람에 대해서는 죄를 주고 박문수의 경우는 용서해 주었으니, 조정의 처치가 뒤죽박죽이 됨이 면치 못하게 되었으니, 아마도 언자(言者)의 마음을 굴복시킬 수 없을 듯합니다. 신의 생각에는 박문수에게 대략 견벌(譴罰)을 더하여 같은 죄를 받게 한다면, 법리(法理)에 옳을 듯합니다. 그리고 신과 김성응(金聖應) 또한 일체로 죄를 받아야 마땅할 것입니다. 그런 뒤에야 바야흐로 일의 체면이 설것입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경의 차자가 지나치다. 일찍이 장신(將臣)을 지낸 사람이 장신에게 말을 한마리 보낸 것을 어찌 뇌물에 견줄 수 있겠는가? 훈공(勳功)을 함께한 지친(至親)이 바야흐로 장임(將任)에 있으면서 그것을 받았으니, 또한 어찌 이상한 일이겠는가?"
하였다.
3월 23일 정축
왕세자가 태묘(太廟)를 전알(展謁)하였다. 관례(冠禮)를 이제 막 거행했기 때문이다.
3월 25일 기묘
이명곤(李命坤)·김광세(金光世)를 승지로, 윤득징(尹得徵)을 사간으로, 이연덕(李延德)을 헌납으로, 이중조(李重祚)·김상복(金相福)을 지평으로, 민백행(閔百行)·이태중(李台重)을 교리로, 김시찬(金時粲)을 수찬으로 삼았다.
찬선(贊善) 박필주(朴弼周)가 성밖에 이르러 또 상소하여 사직하니, 임금이 또 수서(手書)로 답하기를,
"경의 간절한 글을 보고 경이 성문 밖에 와 있음을 알았으니, 마치 경을 본 것과 같다. 지난날 예우(禮遇)하던 유신(儒臣)이 몇 년이 지난 뒤 겨우 성 밖에 이르렀다가 또다시 향리를 찾아가니, 내가 장차 무슨 얼굴로 신료(臣僚)들을 대하겠는가? 세 차례의 수서에서 소자(小子)의 정성을 볼 수 있을 것이니, 마땅히 즉시 함께 들어와 헌(軒)에 임하여 기다림에 부응토록 하라."
하였다. 박필주가 또 병으로 내일이 되기를 기다려 명을 받들겠다고 청하니, 하교하기를,
"이미 명을 받들고자 한다면 어찌 내일 아침을 기다릴 것인가? 유신으로 하여금 이틀을 성문 밖에서 머무르게 하는 것은 또한 나의 정성이 얕기 때문이다. 바야흐로 지금 옷깃을 여미고 마땅히 원량과 함께 기다리겠노라."
하였다. 박필주가 찬선의 직임을 갈아주기를 바라며 전함(前銜)으로 입시(入侍)케 할 것을 청하니, 임금이 허락하였다. 박필주가 드디어 당하관(堂下官) 복색으로 예궐(詣闕)하여 사은(謝恩)하였다. 임금이 경극당(敬極堂)에 거둥하였는데, 왕세자가 시좌(侍坐)하였다. 박필주를 인견하고 하교하기를,
"찬선이 처음 연중(筵中)에 들어왔으니 사관(史官)은 좌석을 지시(指示)하라."
하고, 박필주를 돌아보며 말하기를,
"옛날에 경의 이름을 들었으나, 나의 정성이 얕았기 때문에 여태까지 서로 만날 수가 없었다. 경이 이번에 들어왔으니, 내가 심히 기쁘다."
하고, 또 말하기를,
"산야(山野)의 사람은 숙명(肅命)하는 것이 또한 수고롭다. 우리 나라의 임금과 신하는 예(禮)와 제도가 지나치게 엄한데, 삼대(三代)101) 의 제도는 반드시 이렇지 않았을 것이다."
하였다. 박필주가 천안(天顔)을 우러러 뵙기를 청하자, 임금이 허락하였다. 박필주가 인하여 질병이 고질이 된 정상을 진달하자, 임금이 묻기를,
"옛날 유림(儒林)은 은일(隱逸)과 다름이 있었는데, 지금은 유림이 반드시 은일이 되고자 하니, 어찌된 것인가?"
하였다. 박필주가 말하기를,
"신이 비록 식견이 없긴 하오나, 어찌 유림과 은일의 구분을 알지 못하리까? 신은 세록지신(世祿之臣)의 후손이니, 어찌 감히 방외(放外)의 부류와 같이 망세(忘世)에 과감하겠나이까? 실로 병이 고질이 된 것으로 말미암아 그런 것이지, 감히 망령되이 고치(高致)102) 로 삼아 작록(爵祿)을 경시하는 것이 아닙니다. 신이 향리(鄕里)에 있으면서 듣건대, 전하께서는 연달아 현기증으로 편안치 못한 증세가 있다고 하였습니다. 현기증이 병이 되는 것은 심기(心氣)가 손상을 받음에서 비롯됩니다.
대저 사람이 삶을 받는 것은 수(水)·화(火) 두 기운일 뿐인데, 수의 성질은 내려가고 화의 성질은 올라가는 것인지라, 반드시 그 올라오는 것을 내리고 내려가는 것을 올린 연후에야 수·화가 서로 교섭하여 온몸이 두루 편안해집니다. 그렇지 아니하여 올라오는 것이 더욱더 올라오고 내려가는 것이 더욱더 내려가 두 기운이 서로 관계하여 통제하지 못할 경우 병이 이로 말미암아 생겨나게 됩니다. 마음이 물체[物]가 됨은 화(火)와 같아서 그것이 발양(發揚)하여 날며 뛰어오를 적엔 흡사 타오르는 불꽃 같아, 만약 조절하여 줄이는 공(功)이 없이 그 가는 대로 내맡겨 두면 심기(心氣)는 상승하고 진기(眞氣)는 날로 소모될 것이, 현기증은 여기서 일어나는 것입니다. 전하께서는 여러 차례 변고(變故)를 겪으셨는데다가 또 불평스런 일로 인해 언제나 그 심기를 움직임을 면치 못하시니, 이것은 절선(節宣)하는 도리가 아닙니다. 신은 젊어서부터 심기의 병이 있었는데, 우연하게도 수·화의 이치에 대해 깨달은 바 있어 어렵사리 보존하고 조섭해 오늘날에 이르렀는지라 감히 제몸이 직접 경험한 일을 바친 것입니다. 군하(群下)들 중에 설령 봉승(奉承)에 잘하지 못함이 있다 하더라도 반드시 먼저 심기를 안정시키고 조용히 처리하소서. 비록 크게 거슬리어 지극히 견디기 어려운 일이 있다 하더라도 또한 반드시 참으시어 그것에 동요되지 마소서. 한번을 이렇게 하고 또 한번을 이렇게 하며 일마다 이렇게 하신다면 심기가 점차 화평(和平)해져 비단 현기증이 절로 나을 뿐 아니라 수신(修身)·존심(存心)의 요체 또한 이를 벗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경이 한 글자 ‘인(忍)’자를 바치는데, 장공예(張公藝)103) 또한 일찍이 말을 한 적이 있다. 그러나 다만 희노(喜怒)에 동요되지 아니하는 것이 참으로 어렵다."
하자, 대답하기를,
"학문의 도리란 반드시 그 어려운 곳을 뚫고 지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 뒤에야 바야흐로 공부가 되는 것이니, 어찌 그것이 어렵다 하여 행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삼대(三代) 이후에 다시 삼대가 없는 것은 왜인가?"
하니, 대답하기를,
"이것은 힘써 행하는 것이 어떠하냐에 달려 있을 뿐입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후세에 한번도 행한 경우가 없음은 왜인가?"
하니, 대답하기를,
"사람의 기품(氣稟)은 그 종류가 각기 같지 아니하니, 능히 행할 수 없었던 것은 단지 기품이 누(累)가 됨에 연유합니다. 기질(氣質)로써 말씀드리자면, 진실로 성인(聖人)의 온전한 덕이 아닐 경우 그런 덕(德)이 있으면 반드시 그런 병이 있었습니다. 한(漢)나라의 문제(文帝)는 인후(仁厚)하고 공검(恭儉)하여 타고난 자질이 도(道)에 가까왔습다만, 낮추어 ‘그다지 고론(高論)이 없다.’고 하였으니, 그 규모가 낮고 작음을 볼 수 있으며, 당(唐)나라의 태종(太宗)은 영명(英明)·신무(神武)함이 고금에 드물었지만, ‘짐은 장차 어떠한 임금이 되겠느냐?’라는 말에 또한 교만하게 자부하는 습관이 있었습니다. 이것은 대우(大禹)의 뽐내지도 자랑하지도 않아 천하에 능력과 공을 다투지 않았던 것과는 차이가 얼마나 지는 일입니까? 이는 그런 덕이 있으면 그런 병이 있는 것으로 인하지 아니함이 없는 것입니다. 삼대 이후 인군은 비록 타고난 기품이 아름답기는 했지만, 능히 진정(眞正)하게 힘써 배워 그 기질의 병을 변화시키지 아니하였으니, 이것이 다시는 삼대가 있지 아니하였던 까닭입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이미 덕(德)이라 했는데, 또 어찌하여 병으로 여기는 것인가?"
하니, 대답하기를,
"공문(孔門)의 제자 중에 증자(曾子)와 같은 독실(篤實)은 노둔(魯鈍)함을 면하지 못하였고, 자로(子路)와 같은 강용(剛勇)은 거칠고 경솔한 실수를 면하지 못하였으니, 이것은 모두 그 덕으로 인하여 그 병이 있게 된 것입니다. 송(宋)나라 유현(儒賢) 장재(張載)가 말하기를, ‘마음이 크면 백물(百物)이 모두 통하고, 마음이 작으면 백물이 모두 병이 된다.’ 하였는데, 크다는 것은 한갓 크기만 한 것일 뿐만이 아니라, 사물이 접근해 오면 각각 그 이치로 응함이 마치 밝은 거울을 달아놓은 것처럼 아름다움과 추함이 그 형태를 드러내는 것이니, 정자(程子)가 이른바 ‘확연히 크게 공정하여 사물이 접근해 오면 순응(順應)한다.’고 한 것은 바로 이것을 이른 것입니다. 작다는 것은 마음이 이 한 가지 일에 매여 있음이니, 그 밖의 일로 미루어가지 못함을 말합니다. 따라서 그 작고 병됨을 가히 알 수 있습니다. 마음을 잡는 방법은 단지 움직임과 고요함의 두 경지일 뿐이어서 고요하면 맑고 밝음을 함양하고 움직이면 선과 악을 분별할 수 있는데, 선이라면 미루어 확장하고 악이라면 막아서 끊어야 할 것이니, 학문의 공부란 이 둘에 불과할 뿐입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나의 명을 또한 말해 보라."
하니, 대답하기를,
"전하께서는 효제(孝悌)가 간절하시고 자상(慈詳)하게 아랫사람을 대하시니, 성덕(聖德)의 아름다움이 백왕(百王)에 으뜸이십니다. 하지만 오로지 이와 같기 때문에 자세한 데 지나쳐서 일을 처리하는 즈음에 또한 견제되어 쾌활(快活)하지 못한 곳이 있으니, 그 덕이 있으면 그 병통이 있는 것입니다. 성상께서 성질(聖質)의 치우친 곳이 어디에 있는지를 살피셔서 남은 곳은 덜어내고 부족한 곳은 보충하여 지극히 순수하게 그 덕만 있고 그 병이 없도록 하신다면 절로 넉넉하게 성역(聖域)에 들어가실 수 있을 것입니다. 알고 실천함은 참으로 어려운 일입니다만, 어렵다 하여 그냥 버려두지 마시고 실심(實心)으로 실공(實工)을 실천하신다면 비단 성궁(聖躬)에 이로움이 있을 뿐 아니라, 실로 동궁이 취해 본받는 도리가 될 것입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가를,
"말마다 모두 절실하니, 감히 마음속에 새겨두지 않을 수 있겠는가? 우상(右相)이 접때 ‘방심(放心)을 구한다.[求放心]’는 세 글자를 말한 적이 있었는데, 방심을 구하고자 하면 마음속에 언제나 잡념이 생긴다. 정자(程子)의 수주(數珠)104) 도 오히려 마구 달려서 그런 것인가?"
하니, 대답하기를,
"수주란 마음을 잡는 한 법이나, 그래도 잡된 생각이 있으니, 이는 사심(私心)인 것입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만약 사심에 얽매임이 아주 없다고 한다면 이것은 경을 속이는 것이 될 것이다. 그러나 칠정(七情)105) 의 발동하는 바가 반드시 모두 사심은 아닌데, 생각에 언제나 소란스러움이 많으니 어떤 방법으로 제어할 수 있겠는가?"
하니, 대답하기를,
"뜬 생각과 악한 생각은 다름이 있습니다. 악한 생각은 그래도 쉽게 제어할 수 있지만, 뜬 생각은 잠깐 사이에 왔다갔다하기 때문에 가장 제거하기 어렵습니다. 만약 아주 제거하고자 하신다면 고요한 가운데서 함양하는 법을 쓰시는 것보다 나은 것이 없을 것입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함양하는 것이 참으로 좋기는 하지만, 석씨(釋氏)의 공부에 흐르지 않겠는가?"
하니, 대답하기를,
"함양은 천리(天理)를 보존하는 공부로서 석씨의 적멸(寂滅)과는 같지 아니합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비록 고요한 가운데 있다 해도 또한 뜬 생각이 일어나니, 참으로 어렵다."
하니, 대답하기를,
"성경(誠敬)의 공부를 날로 달로 쌓아가면 헛된 생각이 자연히 점차 제거될 것입니다. 마음을 잡는 공부의 요체는 다른 것이 아닙니다. 사물(事物)에 얽매이지 않고 희노(喜怒)에 부림을 당하지 아니하여, 잡은 것이 오래되면 보존되고 보존됨이 오래되면 밝아질 것이니, 헛된 생각은 제거할 것을 기약하지 않아도 절로 제거될 것입니다. 이것이 신이 옛사람에게서 들은 것입니다."
하였다. 임금이 세자에게 글을 읽으라 명하고 박필주로 하여금 글 뜻을 묻게 하였다. 세자가 《소학(小學)》의 서제(書題)를 읽자 박필주가 우러러 묻기를,
"친장(親長)과 사우(師友)는 국가·천하와 명목(名目)이 같지 아니하고 한가지 물사(物事)가 아닌데, 어버이를 사랑하고 어른을 공경하며 어른을 높이고 벗과 친함이 ‘수제치평(修齊治平)’의 근본이 됨은 무슨 까닭입니까?"
하니, 세자가 말하기를,
"효(孝)란 백행(百行)의 근원이기 때문에 이와 같은 것입니다."
하니, 박필주가 대답하기를,
"노사(老師)·숙유(宿儒)의 답도 또한 능히 이에 지나지 않을 것입니다. 종사(宗社)의 복입니다."
하였다. 임금이 동궁에게 이르기를,
"알기는 쉬우나 행하기는 어렵다. 이미 알았다면 반드시 모름지기 행해야 할 것이다."
하였다. 박필주가 세자에게 고하기를,
"동궁께서 이미 효가 백행의 근원이 됨을 알고 계시니, 신이 청컨대 효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전하의 자애심(慈愛心)을 억누르는 어짊으로 저하(邸下)께 기대하고 바라심이 몹시 크니, 성인(聖人)의 자리에 나아가는 것이 곧 전하께서 기대하고 바라시는 마음입니다. 저하께서는 이 뜻을 받드시어 올바른 선비를 친애하고 올바르지 못한 자를 반드시 멀리하소서. 또 반드시 학문 공부에 부지런히 힘쓰시어 우리 전하의 기대와 바람에 부응하신다면 이보다 더 큰 효는 없을 것입니다."
하니, 세자가 답하기를,
"삼가 가르침대로 하겠나이다."
하였다. 박필주가 말하기를,
"신이 이번에 온 것은 우러러 천안(天顔)을 뵙고자 해서였는데, 또 동궁의 이 분부를 들었으니, 즉일로 돌아가 죽어도 아무 한이 없겠나이다."
하였다. 임금이 묻기를,
"선유(先儒)가 ‘경(敬)’으로 《소학》의 궐처(闕處)를 보충한다고 했는데, 어찌 《소학》을 읽지 아니하고 ‘경’으로 보충할 수 있는가?"
하니, 대답하기를,
"진(秦)의 분서(焚書)106) 이후 《소학》은 전해지지 않았고 주자(朱子)에 이르러서 비로소 책을 편하였습니다. 그러므로 한(漢)나라 이후 모두 《효경(孝經)》과 《논어(論語)》만을 말하고 《소학》은 말하지 않았던 것이니, 정자(程子)의 ‘「경」으로 궐처를 보충한다.’는 말은 배움을 잃은 자를 가리켜 말했던 것이고, 그 당시에 《소학》이란 책이 없었음을 또한 알 수가 있는 것입니다. ‘경’이란 성학(聖學)의 처음과 끝을 이루는 것으로 ‘경’이 아니면 《소학》의 공(功)은 시작될 수가 없고 《대학》의 공 또한 마칠 수가 없는 것입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법연(法筵)에서 바야흐로 《심경(心經)》을 강하고 있는데, 어떠한가?"
하니, 대답하기를,
"마음 공부에 지극히 간절한 것입니다. 제일 첫 장에 이른바 ‘상제(上帝)가 너에게 임하고 있으니, 너의 마음을 둘로 하지 말라.’고 한 것은 곧 경외(敬畏)의 공부입니다. 경외하면 자연히 사념(邪念)을 물리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정자·주자의 격언(格言)이 모두 이 책에 있는데, 우리 나라에서는 선정신(先正臣) 이황(李滉)부터 시작하여 존신(尊信)하고 표장(表章)했으므로, 이어서 세상에 성행하게 된 것입니다. 《근사록(近思錄)》은 더욱 강론하기에 좋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박필주에게 앞으로 나아오라 명하니, 박필주가 사양하며 말하기를,
"무릇 사물에는 각기 정해진 자리가 있습니다. 이 진복(進伏)한 자리로 말씀드리자면 여기가 곧 소신(小臣)의 자리이니, 조금이라도 넘을 수가 없습니다. 어찌 감히 다시 한걸음을 더 나아갈 수 있겠슴니까?"
하였다. 임금이 강요하자, 박필주가 말하기를,
"자고로 인신(人臣)이 천위(天位)의 지극히 가까운 곳에 나아가 앉았음을 들어보지 못하였습니다. 죽어도 감히 명을 받들지 못하겠나이다."
하였다. 임금이 그래도 억지로 청하자, 더욱 극력 사양하였다. 임금이 동궁을 돌아 보고 나아오라고 권하게 하니, 박필주가 말하기를,
"전하께서 명하셔도 감히 명을 받들지 못하거는, 세자께서 비록 명하심이 있다 한들 신이 어찌 감히 들어가겠나이까? 또 사관(史官)이 문지방 밖에 있습니다. 사관도 또 감히 문지방을 넘을 수 없거늘, 신이 어찌 감히 신의 자리를 버릴 수 있겠습니까?"
하였다. 임금이 사관에게 먼저 들어오라 명하였으나, 박필주는 여전히 고사(固辭)하였다. 임금이 사관을 시켜 들어올 것을 권해 마지 않자, 박필주가 이에 나아가 엎드렸다. 임금이 그 손을 잡고 서울에 머무르면서 보도(輔導)할 것을 면유(勉諭)하니, 박필주가 병 때문에 지체할 수 없다고 답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다시 법연과 주연(胄筵)에 참석했다가 다시 거취를 정해도 늦지 않다."
하고, 노인을 우대하는 은전으로 땔감과 찬거리를 하사하라 명하였다.
3월 26일 경진
임금이 대신(大臣)과 비국 당상(備局堂上)을 인견(引見)하였다. 대신 등이 내외(內外)의 진연(進宴)을 거듭 청하여 번갈아 아뢰고 다시 진달하였으나, 임금이 재물이 부족한 때에 낭비하는 일이라 하면서 끝내 허락하지 않았다.
채응복(蔡應福)을 사간으로, 이종적(李宗迪)을 헌납으로, 이하종(李夏宗)을 지평으로, 엄우(嚴瑀)를 정언으로, 원경순(元景淳)을 교리로, 박춘보(朴春普)를 수찬으로 삼았다.
범월(犯越)한 사람의 일 때문에 피국(彼國)에서 황지(皇旨)로 특별히 유시한 바 있어 장차 절사(節使)로 사은사(使恩使)를 겸하려 했는데, 영의정 김재로(金在魯)가 그 더딤을 꺼려 먼저 재자관(䝴咨官)을 보내고 또 자문(咨文)에 범월한 사람의 성명을 기록해 먼저 봉성(鳳城)으로 발송한 것을 청하니, 임금이 윤허하였다.
금성 대군(錦城大君)의 연시(延諡) 때 음악을 하사하여 잔치를 돕게 하라고 명하였다. 금성 대군의 이름은 유(瑜)로 세종(世宗)의 여섯 번째 아들이다. 세조조(世祖朝)에 순흥(順興)으로 유배되었는데, 단묘(端廟)를 복위(復位)시키려 도모하다가 어떤 사람에게 고발당해 죽음을 당하였다. 숙묘조(肅廟朝)에 그 관작(官爵)을 복구하고 시호를 내렸는데, 이때에 와서 비로서 연시하였으므로 이 명이 있었던 것이었다.
경기(京畿) 각 고을의 혜청(惠廳)에 바칠 바 군작미(軍作米)로서 미처 상납하지 못한 것을 본읍(本邑)에 남겨 두어 환곡을 타가는 백성들에게 더 주고 가을을 기다려 징납(徵納)하게 함으로써 춘궁기에 소민(小民)들의 식량이 곤란한 근심을 덜어 주라고 명하였다. 좌상 송인명(宋寅明)의 청을 따른 것이었다.
헌부(憲府) 【지평 김상복(金相福)이다.】 에서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춘추(春秋)》의 법은 지극히 엄하고 무거우니, 난신 적자(亂臣賊子)는 그 자신이 이미 죽었다 하여 그 제방(隄防)을 느슨히 할 수 없습니다. 물고 죄인(物故罪人) 이명언(李明彦)은 평소 역적 김일경(金一鏡)과 속셈이 서로 통해 갑진년107) 의 한 상소는 이미 신하로서의 절조가 없었고, 무신년108) 에 이르러서는 역적의 정상이 더욱 드러났습니다. 따라서 섬으로 유배한 것은 이미 실형(失刑)한 것이라 천주(天誅)를 행하지 못해 여정(輿情)이 아직까지도 분개해 하고 있습니다. 이번에 특별히 방송(放送)하라는 명은 비록 다 썩은 뼈에 그 적적(謫籍)을 제거해 준다고 생각하신 것이겠으나, 지은 죄가 지극히 무거워 신인(神人)이 함께 죽이고자 합니다. 살아서 용서하기 어려운 죄를 죽은들 어찌 방송할 수가 있겠습니까? 원배 죄인(遠配罪人) 윤지(尹志)는 윤취상(尹就商)의 아들로서 역적 목호룡(睦虎龍)의 당이 되어 서두창(徐斗昌)과 은밀하게 체결하였고 정절(情節)이 음흉하였습니다. 왕법(王法)을 더하지 않아서 뭇사람들의 분노가 오랫동안 격렬하였으니, 섬에서 출륙(出陸)한 것만 해도 또한 다행이라 할 것입니다. 가령 자신에게 범한 바가 없다 할지라도 그는 윤취상의 아들로 또한 마땅히 연좌율(緣坐律)을 입어 원악지(遠惡地)로 쫓겨나야 할 것인데, 그 전리(田里)로 되돌아가 창가에서 버젓이 누워 숨쉬게 할 수가 있단 말입니까? 청컨대 이명언의 특별한 방송과 윤지를 전리로 놓아 돌려보내어 종신토록 금고(禁錮)하라고 하신 명을 정지하소서. 그리고 그때 능히 쟁집(爭執)하지 못했던 대관(臺官)은 모두 파직을 명하소서."
하였으나, 모두 윤허하지 않았다.
찬선(贊善) 박필주(朴弼周)가 상소하여 식물(食物)의 하사를 사양하며 말하기를,
"열조(列朝)에서 유현(儒賢)을 대우하던 법을 천신(賤臣)에게 베풂은 부당합니다. 성상께서는 잘못된 은혜를 베푸시는 것이고, 신은 외람되게 받는 것이 됩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일찍이 전례가 있었다. 유현을 존중하는 데 뜻이 있는 것이니, 사양하고 말고 받도록 하라."
하였다.
찬선(贊善) 어유봉(魚有鳳)이 상소하여 소명(召命)에 응하지 못했던 죄를 청하니, 우악한 비답을 내렸다.
영성군(靈城君) 박문수(朴文秀)가 또 상소하여 홍계희(洪啓禧)가 세 번의 상소에서 논박하여 헐뜯은 데 대해 변명하니, 비답하기를,
"협잡한 것이 저쪽에 있으니, 어찌 개의할 것이 있는가?"
하였다.
형조 참의 유복명(柳復明)이 금주(禁酒)에 관한 일 때문에 특별히 추고(推考)를 받자, 상소하여 사직하고 이어 주폐(酒弊) 다섯 조항을 논하였다. 또 말하기를,
"신이 삼가 국조(國朝)의 금양(禁釀)에 대한 율(律)을 상고해 보았더니, 태종 대왕(太宗大王)께서는 즉위하신 초년(初年)에 주금(酒禁)을 거듭 엄하게 하시고, 이어서 하교하시기를, ‘비록 금주령을 내리기는 했지만 술을 마시는 자가 그치지 아니하니, 이것은 내가 술을 끊지 아니하여 그렇게 만든 것이다.’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술을 올리지 말라고 명하시자, 나랏사람들 중에 감히 마시는 자가 없었습니다. 세종 대왕(世宗大王)께서는 일찍이 신(臣) 김극핍(金克愊)에게 계주문(戒酒文)을 지으라 명하시고 대소 신민(臣民)들에게 효유(曉諭)하셨는데, 곧 《서경(書經)》의 주고(酒誥)와 표리(表裏)를 이루었습니다.
숙종 대왕(肅宗大王)께서는 일찍이 계해년109) 에 숭상하여 마시는 것을 아주 없애라는 뜻으로써 신료들을 계칙(戒飭)하셨으며, 또 세종의 계주문을 경외(京外)에 반포하셨으니, 전후의 영갑(令甲)110) 이 지극히 엄절(嚴截)하였던 것입니다.
우리 성상께서 임어(臨御)하시자 누차 비망기(備忘記)를 내리시어 내온(內醞)을 특별히 감하셨고 무신년111) 의 ‘술을 크게 빚는 자는 형배(刑配)한다.’는 법이 있었습니다. 기유년112) 에는 ‘여러 궁가(宮家)나 세가(勢家)의 행랑 아래서 술을 파는 자를 먼곳으로 유배시키고 주인(主人)을 입계(入啓)하여 무겁게 감율(勘律)하라.’는 법이 있었으며, 임자년113) 에는 또 ‘술을 크게 빚으면 3차 형추(刑推)하고, 중간 정도는 2차 형추하며, 조금 빚은 자는 형추하거나 태형(笞刑)으로 다스리되, 수십 석(石) 이상 크게 빚은 자는 무신년의 수교(受敎)에 의해 형배(刑配)하라.’는 법이 있었습니다. 우리 성상께서 백성의 고통을 깊이 염려하시어 시폐(時弊)를 통렬히 혁파하고자 하시는 뜻이 보통의 정도를 훨씬 뛰어넘었건만, 명령과 분부를 받들어 행하는 신이 능히 한마음으로 우러러 깊이 유념하지 못한 나머지 혹은 금했다가 혹은 금하지 않았고 잠시 동안은 느슨하게 했다가 잠시 동안은 팽팽하게 하곤 하였던 것입니다. 하지만 신이 원망과 비망을 불러 일으키며 노고를 꺼리지 않았던 것은 오로지 나라를 위하고 백성을 위하는 데서 나왔습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다섯 조목의 주폐(酒弊)는 뜻인즉 옳다만, 지난번의 하교 또한 뜻한 바 있었던 것이다. 의적(義狄)이 술을 만들기 전에는 오로지 현주(玄酒)만 썼으니, 어찌 주폐가 있었겠는가? 하지만 술의 폐해를 이루다 말할 수 있겠는가? 비록 그러기는 하나, 예(禮)에 ‘한 잔을 마시면 백 번 절한다.’ 하였고, 《시경(詩經)》에는 ‘이미 술에 취하였다.’고 하였다. 왕공(王公)과 사부(士夫)는 모두 그 술을 쓰고 어주(御酒)를 바침도 또한 그대로인데, 오직 소민(小民)에 대해서만 술을 금한다면, 이 어찌 윗사람이 행하고 아랫사람이 본받는 도리이겠는가? 아! 사대부는 제사(祭祀) 때 비록 술을 사온 것을 경계한다 하지만, 소민는 술을 산 것이 아닌데, 어찌 그리 엄하게 금하는가? 현주로 제사를 지내게 함이 장차 아래에서만 행해진다면 영(令)이 어찌 행해지랴? 지나해 비록 계주문을 내리기는 하였으되, 금법(禁法)을 두는 것에 대해서 윤허를 아꼈던 것은 대개 이 때문이었다. 술을 많이 빚는 것은 의당 금해야 하고 또 술주정도 단속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법이란 마땅히 삼령 오신(三令五申)해야 하는 것이다. 술을 많이 빚었다 하여 충군(充軍)시킨 경우가 각도(各道)가 모두 그러하니, 많이 빚는 데 대한 율은 변방 유배면 가하지, 충군은 불가하다. 지금 소민들이 자기 힘으로 살아가기 어려운데, 먼저 가르쳐 인도하지도 아니하고 법을 적용하는 것을 시원하게 여기니, 아! 소민들이 어떻게 지탱할 수 있겠는가? 더욱이 여인이 충군된 것은 목란(木蘭)114) 의 경우를 제외하고는 일찍이 들은 적이 없다. 비록 잘못 쓴 것이라고는 하지만, 어찌 문비(問備)로 신칙함이 없을 수 있겠는가?"
하였다.
3월 27일 신사
세 대신(大臣)이 여러 재신(宰臣)들과 빈청(賓廳)에 모여 장차 진연(進宴)을 동조(東朝)께 계청(啓請)하고자 하니, 임금이 소견(召見)하고, 하유하기를,
"자전(慈殿)의 사복(私服)의 월한(月限)이 아직 차지 않았으니, 가을을 기다림이 마땅하다."
하였다. 또 말하기를,
"임어(臨御)한 이후 구전(舊典)을 거행하고자 하였다. 시학례(視學禮)·친경례(親耕禮)와 같은 것은 모두 열조(列朝)에서 이미 행했던 일이고 채 행하지 못한 것은 양로연(養老宴)이다. 가을이 되기를 기다려 동조께 술잔을 올리고 이어서 노인을 노인답게 대접한다는 뜻을 미루어 기로(奇老)에게 잔치를 내리되, 선조(先朝)를 섬겼던 신하들까지 함께 그 잔치의 즐거움을 같이 한다면, 곧 내가 군신(群臣)들에게 잔치를 베풀어 주는 것이 되며, 군하(群下)와 나에게 잔치를 올림이 아니다. 대사례(大射禮)의 경우는 근래에 행했던 의절(儀節)을 따르고 싶다. 글이 본디 《오례의(五禮儀)》에 실려 있을 것이나, 이것은 중묘조(中廟朝)에 이미 행했던 전례(典禮)이니, 《실록(實錄)》을 상고해 오도록 하라."
하였다.
임금이 주강(晝講)을 행하였다. 찬선(贊善) 박필주(朴弼周)가 함께 입시하였다. 임금이 《심경(心經)》을 읽고 박필주에게 문의(文義)를 진달하라고 명하니, 박필주가 먼저 선정신(先正臣) 송시열(宋時烈)이 주강에 입시했을 때 유신(儒臣)으로 하여금 먼저 문의를 진달하게 했던 일을 끌어대어 사양하고 감히 전례를 어길 수 없음을 먼저 진달하였다. 임금이 옥당(玉堂)에 명하여 먼저 단서를 열게 하니, 시독관(侍讀官) 민백행(閔百行)이 문의를 진달하였는데, ‘발(發)하지 아니한 것을 성(性)이라 하고 발한 것을 정(情)이라 한다.’ 하였다. 박필주가 이에 아뢰기를,
"이 단락의 대지(大旨)는 오로지 ‘중(中)을 구한다[求中]’는 두 글자에 있습니다. 대개 ‘중’이란 ‘성’의 체(體)로서 이것은 발하기 전입니다. 발하기 전에는 사려(思慮)가 싹트지 아니하는데, 겨우 ‘구한다.’고 말하면 곧 사려가 있게 되며, 사려가 있으면 발하지 아니한 것이 아니니, 이것은 중을 구함이 불가한 까닭입니다."
하였다. 임금이 묻기를,
"말하기 전에는 어떤 공부를 해야 하는가?"
하니, 대답하기를,
"정자(程子)가 말하기를 ‘겨우 생각하자 곧 이미 발한다고 하였습니다.’ 따라서 구하겠다는 생각이 있으면, 이미 움직이는 데 관계되어 이미 발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발하기 전에 ‘중’을 구하는 것을 불가하다고 하는 것입니다. 단지 존양(存養)이 있을 뿐입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존양은 장차 어떻게 공부해야 하는가?"
하니, 대답하기를,
"이른바 존양이란 곧 ‘존심 양성(存心養性)’이며 사려에 관섭치 아니합니다. 발하기 전의 공부는 이와 같을 뿐입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구한다[求]’는 글자는 점검(點檢)하는 것을 말하는가?"
하니, 대답하기를,
"점검이란 떨어버리고 잊은 것을 깨우침을 말합니다. 사려가 싹트기 전에는 구하여도 오히려 불가한데, 하물며 점검하는 일이겠습니까? 점검은 발하기 전과는 먼 일입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고요한 가운데 물(物)이 있다.’고 한 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하니, 대답하기를,
"고요하되 물이 없으면 공적(空寂)에 빠져 석씨(釋氏)와 같은 데로 귀착되므로, ‘고요한 가운데 모름지기 물(物)이 있다’고 한 것입니다. ‘사려가 싹트기 전’이란 곧 ‘고요한 가운데’를 말한 것이요, ‘지각(知覺)이 어둡지 않다.’고 한 것은 곧 물(物)이 있음을 말한 것입니다."
하고, 또 말하기를,
"이 장(章)의 대지(大旨)는 무릇 다섯 단락인데, 수미(首尾)가 상응하고 있습니다. 두 번째 단락의 ‘도(道)는 잠시라도 떠날 수 없다.’고 한 한 구절은 ‘천명(天命)을 일러 성(性)이라 한다.’는 구절과 상응하고, 세 번째 단락의 ‘은미한 것보다 더 잘 드러나는 것은 없다.’는 한 구절은 ‘성(性)을 그대로 따르는 것을 일러 도(道)라고 한다.’는 것과 상응합니다. 네 번째 단락의 ‘발하지 아니한 것을 ‘중(中)이라 한다.’는 것은 또 ‘경계하고 두려워한다.’와 상응하고, ‘발하되 모두 법에 맞는 것을 화(和)라고 한다.’는 것은 ‘홀로 있을 때 삼간다.’는 것과 상응합니다. 그리고 나서 말절(末節)의 ‘중화(中和)를 이룬다.’고 한 데 이르러 합하여 총괄했으니, 도를 닦는 가르침은 다른 말을 기다리지 않고 절로 그 가운데 있습니다. 대개 이치란 체(體)와 용(用)이 있을 뿐입니다. 이 장(章)은 발하지 않은 데에서 시작하여 이미 발한 데까지 미쳤으미, 이른바 ‘처음의 한 가지 이치를 말했다가 중간에 흩어져 만사(萬事)가 된다.’는 것입니다. 맨끝 장(章)은 이미 발한 데서 시작하여 발하기 전으로 복귀했으니, 이른바 끝에 가서 다시 합쳐 한가지 이치가 되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하였다. 임금이 묻기를,
"심학도(心學圖)의 심사(心思)·심재(心在)를 두고 어떤 이는 그 위차(位次)를 잃었다고 하는데, 무엇 때문인가?"
하니, 대답하기를,
"이 그림은 한쪽은 존양을 위한 공부이고 한쪽은 성찰을 위한 공부입니다."
하였다. 임금이 또 정자(程子)의 《주역(周易)》 곤괘(坤卦)의 전(傳)에 대해 묻기를,
"궁예(窮羿)·한착(寒浞)115) 은 그래도 말할 수 있으나 여왜(女媧)·무후(武后)116) 는 말할 수 없다.’고 했는데, 어찌하여 궁예·한착은 그래도 말할 수 있다고 했는가? 이것이 매우 의심스럽다."
하니, 대답하기를,
"여주(女主)가 음(陰)으로 양(陽)을 억누른 것은 실로 천지의 큰 변괴이니, 궁예·한착을 빌려 그 불가함을 극언했던 것입니다. 어찌 궁예·한착에게 진실로 말할 만한 것이 있다고 생각했겠습니까? 이런 부분은 대범하게 보아야지, 말한 것으로써 뜻을 해칠 필요는 없습니다."
하였다. 박필주가 또 말하기를,
"한 자리의 땅과 한 시각의 시간에도 모두 지극한 이치가 있는 법입니다. 신이 감히 성학(聖學)의 공부를 알지는 못합니다만, 능히 중간에 끊어짐이 없이 희노(喜怒)를 당해서도 능히 모두 이치에 맞게 할 수 있으신지요?"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내 어찌 능히 그렇게 하였겠는가? 언제나 희노에 있어서 능히 중도에 지나친 병이 없지 않건만 그것이 병이 됨을 알고서도 능히 고치지를 못하고 있다."
하니, 대답하기를,
"선유(先儒)가 말하기를, ‘이와 같음을 하는 것이 병이요, 이와 같지 아니함이 약이다.’하였습니다. 전하께서 이미 중도에 지나침이 병이 되는 줄 알고 계신다면 무엇을 꺼리시어 고치지 아니하십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경이 말을 하되 꺼리지 않으니, 바로 맹자(孟子)가 제(齊)나라 선왕(宣王)에게 고한 호재(好財)·호색(好色)에 대한 경계와 같다. 내가 마땅히 삼가 힘쓸 것이다."
하였다. 박필주가 말하기를,
"무엇을 일러 도심(道心)이라 하고 무엇을 일러 인심(人心)이라 하는지요?"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천리(天理)를 따르는 것이 도심인 것 같고, 자기의 사사로움을 따르는 것이 인심인 것 같다."
하였다. 박필주가 말하기를,
"성교(聖敎)에 이른바 ‘자기의 사사로움’이라 했을 때의 ‘사(私)’자는 혹 형기(形氣)에서 생겨나는 ‘사(私)’자와 서로 부합합니다. 대개 이 ‘사’자는 한 개인이 독점하여 다른 사람과 관계가 없는 것을 가리키는 것으로, 추위와 더위, 아픔과 가려움을 인식하는 것과 같으니, 이는 모두 형기(刑氣)가 깨닫는 바로서 한 개인이 독점하기 때문에 ‘사’라 이르는 것인데, 이것이 바로 인심입니다. 그러나 부자(父子) 사이의 인(仁)과 군신(君臣) 사이의 의(義)는 하늘로부터 받아 온 공공(公共)의 물(物)이니, 그 일에 남과 나의 차이가 없으므로 그것이 성명(性命)의 올바른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도심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그렇다면 인심이란 둘 수 없는 것인가?"
하자, 대답하기를,
"어찌 그러하겠습니까? 인심은 형기에서 생겨나 사람에게 없을 수 없는 것입니다만, 발하여 법도에 맞으면 곧 도심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선유(先儒)가 진서산(眞西山) 【송(宋)나라 때의 명신 진덕수(眞德秀).】 의 ‘힘을 써 사욕을 이겨 잡념을 다스린다.’는 말을 중도에 지나친 것이라 여겼던 것이 바로 이 때문이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이치에도 법도에도 맞지 아니하는 것을 또한 일러 인심이라 하는가?"
하니, 대답하기를,
"이것은 인욕(人慾)이지 인심이 아닙니다. 인심이 발하여 이치에도 법도에도 맞지 아니하면 비로소 인욕이 됩니다. 이것은 마땅히 이겨 다스려야 하며 둘 수가 없는 것입니다."
하였다. 임금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하기를,
"이제야 비로소 환히 깨달았다."
하였다. 박필주가 또 말하기를,
"성상께서 날마다 하시는 일 가운데 있어서 모두 능히 법도에 맞게 하시는지요?"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법도에 맞지 아니한 것이 많다."
하매, 대답하기를,
"이미 법도에 맞지 아니함을 알고 계신다면 어찌하여 법도에 맞게 할 바를 생각하지 아니하십니까?"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알기가 어렵기 때문이 아니라 행하기가 오로지 어렵기 때문이다."
하니, 대답하기를,
"천하의 이치는 아는 것과 행하는 것 두 가지가 있을 뿐이고, 성의(誠意)의 공부는 단지 그 아는 것을 행하는 데 있는 것입니다. 전하께서 이미 그 법도에 맞지 아니함을 아시고 여전히 다시 행하는 것이 어렵다고 여기시는 것은 성의의 부족이자 스스로 속이는 데로 귀착됨을 면치 못하는 것입니다."
하였다. 임금이 한숨을 쉬며 탄식하기를,
"맹자가 이르되, ‘남의 마음을 내가 헤아려 안다.’고 하였는데, 경 또한 나의 마음을 알고 있다. 나에게 과연 스스로를 속인 잘못이 있다."
하니, 대답하기를,
"스스로를 속인 정상을 신이 마땅히 말하겠습니다. 이와 같은 줄을 아시고도 행함이 이와 같지 아니함은 곧 스스로를 속인 것입니다. 그 해(害)는 사람과 하늘을 속이는 데 이를 것입니다. 전하께서 그것이 병이 됨을 이미 알고 계신다면 이제부터 맹렬히 반성하고 힘써 행하시어 다시는 스스로를 속이는 잘못이 없게 하소서."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나의 스스로를 속임이 이미 반생(半生)을 지났지만, 이제부터 마땅히 힘써 스스로 속이지 않겠노라."
하니, 대답하기를,
"신은 전하의 성덕(盛德)에 대해 가만히 흠탄(欽歎)하는 바 있습니다. 자고로 제왕가(帝王家)에는 으레 시기하고 의심하는 일이 많아 만약 혐의와 유감이 있을 경우 반드시 일에 따라 촉발되었으니, 밝고 슬기로운 임금도 능히 이를 면하는 경우가 드물었습니다. 전하께서 잠저(潛邸)에 계실 적부터 변고(變故)를 겪으심이 어떠하였습니까? 그럼에도 즉위하신 이후로 일체 묻지 않으셨을 뿐 아니라 또 따라 등용하시되 조금도 차별을 두지 않으셨으니, 이러한 성덕(盛德)은 고금에 보지 못한 바입니다."
하였다. 임금이 시간을 조금 두고 있다가 말하기를,
"여러 신하들은 모두 나의 이 일을 그르다고 하는데, 유자(儒者)의 말이 곧 이와 같으니 들뜨고 시끄러운 소리를 진정시킬 수 있겠다."
하니, 박필주가 일어나 대답하기를,
"비록 그러하나 이것은 바로 신이 며칠 전에 아뢴 바로서 그런 덕이 있으면 반드시 그런 병이 있는 경우입니다. 일체로 수용함은 진실로 지정 지공(至正至公)한 것이니 누가 감히 그르다고 말하겠습니까만, 죄범(罪犯)이 지극히 무겁고 관계됨이 가볍지 아니한 자가 또한 법망을 빠져나갈 수 있다면 어찌 실형(失刑) 중에서도 심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국가에서 인심을 복종시키고 세도(世道)를 바로 잡은 방법은 오로지 형(形)과 상(賞)이 중도에 맞는 것에 달려 있습니다. 형과 상이 중도에 맞지 아니하면 사람들을 권장하거나 징계할 방법이 없어지고, 사람들을 권장하고 징계할 방법이 없어진다면 뭇사람들의 마음이 불복(不服)하게 됩니다. 뭇사람들의 마음이 불복한다면 난망(亂亡)을 불러오게 되어 구제할 수가 없게 될 것입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없이 한참 있다가 말하기를,
"대훈(大訓)에 이미 말하였다."
하였다. 박필주가 또 말하기를,
"인주(人主)가 천하 국가를 다스리는 방법은 오로지 현인(賢人)과 인재를 구하는데 있을 뿐입니다. 전하께서 사람을 취하시는 것은 언제나 그 자취로써 하시는데, 조정 신하 가운데 또한 어찌 학문에 종사하는 사람이 없겠습니까만, 전하께서는 과목(科目) 중의 사람이라 하여 곧 가벼이 보십니다. 이것은 사람을 취하는 도리가 아닙니다. 전하의 조정에도 또한 그런 사람이 있으니, 명철(明哲)하심으로 또한 반드시 굽어 통촉하고 계실 것입니다."
하였으니, 대개 이재(李縡)를 지적한 것이었다. 또 말하기를,
"전하께서는 인재를 사랑하고 아끼시어 한 가지 잘못으로 버리지 아니하십니다만, 유사(儒士)의 경우에는 그렇지 아니합니다. 신은 한원진(韓元震)과 평소 서로 알지 못하는 사이나, 대개 듣자오니 순수한 사람이라 합니다. 그런데도 다년간 금고(禁錮)되어 버려져 있으니, 처분이 중도에 지나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경이 한원진을 순수하다고 하는 말은 과연 옳다. 다만 기(氣)가 많아 충분히 안정되지 아니한 사람이다. 맹자의 초개설(草芥說)은 온자(蘊藉)가 결여된 것 같으며, 나의 몸을 전적으로 공격하는 것은 옳겠지만, 이에 고황제(高皇帝)까지 언급한 것은 어찌 존주(尊周)의 의리를 손상시키지 아니하겠는가?"
하였다. 대답하기를,
"맹자의 이 말은 다소 종용(從容)함이 결여되어 있으니, 선현(先賢)이 이른바 ‘영기(英氣)가 일을 해친다.’고 한 것은 바로 이런 종류의 일을 지적한 것입니다. 그러나 고황제의 일은 끝내 지나친 행동이었으니, 지금 한원진의 말을 두고 존주(尊周)에 해가 된다고 여기신다면, 성교(聖敎)가 아마도 지나친 것이 아니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내가 경을 부르고서 경의 말을 쓰지 않는다면, 이는 들어오게 하려 하면서도 그 문을 막는 것이다. 이재는 내가 마땅히 부를 것이며, 한원진 또한 마땅히 그 벌을 풀어 쓰겠노라."
하였다. 박필주가 또 질병을 이유로 돌아감을 고하니, 임금이 또 면류(勉留)하였다. 이때 박필주가 여전히 당하관(堂下官)의 복색(服色)으로 입시하였는데, 임금이 말하기를,
"이미 찬선(贊善)으로 숙명(肅命)했으니, 뒷날의 연석(筵席)에는 마땅히 품계에 맞는 복색으로 등대(登對)해야 할 것이다."
하였다.
3월 28일 임오
어떤 별이 소미성(少微星) 아래로 흘러 갔는데, 크기는 주먹만 하였고, 빛이 땅을 비추었다.
9월에 문무과(文武科)의 정시(庭試)와 전시(殿試)를 설행하라고 명하였다.
임금이 예조 판서 정석오(鄭錫五)와 참판 오광운(吳光運)을 소견(召見)하여 대사례(大射禮)의 의문(儀文)을 강정(講定)하였다. 대개 《오례의(五禮儀)》에는 사단(射壇)에서 활을 쏘는 의식이 있는데 임금과 친히 활을 쏘는 의식이었고, 사단에서 활을 쏘는 것을 보는 의식이 있는데 임금과 백관들이 활을 쏘는 것을 보는 의식이었다. 그리고 웅후(熊帿)·미후(麋帿)는 모두 옛 제도에 따라 만들게 하고, 결(決)과 습(拾)은 그대로 쓰도록 하였다. 그런데 임금이 이는 드물게 있는 예(禮)이므로 의문(儀文)을 대충 갖출 수 없다고 여긴 나머지, 친경례(親耕禮)에 의거해 3차례 습의(習儀)하도록 명하고, 어용(御用)하는 결(決)과 습(拾)은 상방(尙方)에서, 존(尊)·탁(卓)·풍(豊)·치(觶)·점(坫)은 공조(工曹)에서, 웅후·미후·핍(乏)·복(福)·금(金)·고(鼓)·정(旌)은 군기시(軍器寺)에서 만들게 하였다.
3월 29일 계미
임금이 찬선(贊善) 박필주(朴弼周)에게 질병이 있음을 듣자 태의(太醫)에게 약물(藥物)을 가지고 가서 병을 살펴보도록 명하였다.
임금이 또 예조 당상관을 소견(召見)하여 사례(射禮) 때의 악장(樂章)에 대해 물으니, 예조 참판 오광운(吳光運)이 대답하기를,
"어사(御射) 때는 악장을 3절을 먼저 연주하는데, 제1시(矢)와 제4절을 서로 응하게 하여 차례로 서로 응해 나가다가 제4시에 이르러 제7절과 서로 응하게 하고는 그칩니다. 시사(侍射) 때는 매 짝수 때마다 먼저 제1절을 연주한 뒤 제1시와 제2절을 서로 응하게 하고, 제4시에 이르러 제5절과 서로 응하게 하고서는 그칩니다."
하였다. 오광운이 또 말하기를,
"대사례(大射禮)와 사례(射禮)의 이름은 실로 가볍고 무거움이 있습니다. 이미 대사(大射)라 불렀다면 반드시 대사의 의문(儀文)을 갖추어 마땅히 이름과 실상이 서로 부합되게 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삼대(三代) 이후로 예악(禮樂)이 결망(缺亡)되어 개원(開元)의 예(禮)가 옛날의 것과 합하지 아니하는 바가 많습니다.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는 고금의 적절함을 참작하였으니, 오늘날 행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그 편목(篇目)을 살펴보니, 단지 ‘단(壇)에서 활을 쏘고 단에서 활쏘는 것을 본다.’고만 하였고 ‘대사(大射)’란 이름이 없으니, 한결같이 《오례의》를 따라 ‘대(大)’자를 떼버리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대사란 천자(天子)의 예(禮)이니, 만약 참칭(僣稱)한 것이라면 불가하겠지만, 제후(諸侯) 또한 대사례가 있었으니 대사라 불러도 무슨 나쁠 것이 있겠는가? 대사례를 장차 하연대(下輦臺)에서 거행할 것이니, 사유(師儒)의 장관 또한 사원(射員)으로 입참(入參)하게 하라. 사례(射禮)가 끝난 뒤에는 또한 명륜당(明倫堂)에서 마땅히 시사(試士)할 것이니, 시관(試官)으로 낙점을 받은 자 외에 문무(文武)·종친(宗親)으로 20명을 점하(點下)하여 활쏘기를 익히게 하라. 악장 또한 장악원(掌樂院)으로 하여금 익히게 하라."
하였다. 뒤에 중묘(中廟)의 《실록(實錄)》을 상고해 보았더니, 그 당시 사원이 60여명에 이르는 많은 숫자였기 때문에 다시 문무·종친·의빈(儀賓) 중에서 각각 10명을 더하게 하였다.
이달에 큰 추위가 들고 눈이 쏟아져 며칠이 되도록 녹지 아니하여 모맥(牟麥)이 많이 얼어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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