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영조실록57권, 영조 19년 1743년 4월

싸라리리 2025. 9. 26. 13: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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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1일 갑신

어떤 별이 진성(軫星) 아래로 흘러갔다.

 

임금이 장차 태묘(太廟)의 하향(夏享)을 지내고자 인정전(仁政殿) 남쪽 계단에서 서계(誓戒)117)  를 받았다.

 

왕세자에게 태묘를 전알(展謁)하라고 명하였다.

 

지평 김상복(金相福)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전하의 총명과 예지는 백왕(百王)보다 훨씬 뛰어나시어 군신(群臣)들이 족히 성심(聖心)을 당할 수 없다고 여기시며, 드디어 ‘군하(群下)의 학문은 나만 못하다.’고 하셨습니다. 임어(臨御)하신 지 20년 동안 전하께서 좋은 말에 절하셨음은 듣지 못하였고, 단지 말하는 자가 그 말 때문에 죄를 얻었다는 것만 들었습니다. 무릇 천하의 일에 구하지 않고도 얻은 경우란 있지 않았습니다. 은(殷)나라 고종(高宗)은 부열(傅說)에 대해, 주(周)나라 문왕(文王)은 여상(呂尙)에 대해, 촉한(蜀漢)의 소열제(昭烈帝)는 제갈양(諸葛亮)에 대해 심히 부지런히 구했던 것이니, 구하지 않았다면 저 세 신하는 반드시 스스로 오지 않았을 것입니다. 지금 전하께서 간언(諫言)을 구하시면 간언이 반드시 이를 것이지만, 간언을 구하지도 아니하는데 절로 이를 그런 이치는 없는 것입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진달한 바를 마땅히 힘쓰겠다."
하였다.

 

수찬 박춘보(朴春普)가 상소하여, 정성과 예를 갖추고 다하여 찬선(贊善) 박필주(朴弼周)를 면류(勉留)하게 할 것을 청하니, 비답하기를,
"마땅히 유의하겠다."
하였다.

 

4월 2일 을유

태학(太學)의 거재 유생(居齋儒生)들이 서치(序齒)를 다투다가 권당(捲堂)하기에 이르니, 대사성 김상로(金尙魯)에게 타일러 들어가도록 전하게 하였다.

 

4월 3일 병술

찬선(贊善) 박필주(朴弼周)가 장차 돌아가려 함을 고하고자 동궁의 서연(書筵)에 입참(入參)하니, 임금이 경극당(敬極堂)에서 인견(引見)하고 앞으로 나아오라 명하였다. 박필주가 천위(天威)와 너무 가깝다며 사양하자, 임금이 말하기를,
"옛사람 중에는 황제의 배에 발을 올린 사람도 있었다. 그런데 지금 앞으로 나아오는 것을 어렵게 여기는가?"
하였다. 박필주가 사양하다가 마지못해 나아가니, 임금이 그 손을 쥐고 말하기를,
"경은 장차 한번 가면 오지 않을 것인가? 아니면 부르면 다시 올 터인가? 어려서 배우고 장성해서 행하는 것이 유자(儒者)의 일이며, 인군을 만나 도(道)를 행하는 것이 유자의 뜻이다. 유자의 뜻이 이미 그 배운 바를 행하고자 하는 것이라면, 어찌 물외(物外)에서 고상(高尙)하게 지내는 자와 같을 수 있겠는가? 나는 학문의 공(功)이 있지 아니한데 이미 늙었다. 경은 장차 조정에 있으면서 내가 보도(輔導)할 만함을 보거든 보도해 주고 보도할 만하지 아니하거든 떠나도록 하라. 지금 원량(元良) 또한 관례를 치렀으니, 바로 학문에 힘쓸 때를 당하였다. 경은 모름지기 좌우에서 보도해 주어 만약 경의 말을 듣지 않거든 나에게 고하고 떠나가도 또한 늦지 않을 것이다. 나는 경을 구속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가고 오는 것을 편하게 맡겨 두려고 하는 것이다."
하였다. 대답하기를,
"병을 스스로 힘써 이길 수 있다면, 감히 명을 받들어 오지 않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비로소 그 손을 놓았다. 박필주가 말하기를,
"선비로 이 세상에 나서 이처럼 세상에 없던 지우(知遇)를 입었습니다. 선비는 자기를 알아 주는 사람을 위해 죽는다 하거늘, 하물며 군부(君父)에 대해서야 말해 무엇하겠습니까? 신이 물러감을 고함은 실로 질병으로 강행하기 어려운 데서 말미암은 것일 뿐입니다. 지금 만약 이재(李縡)를 부르신다면 그 보익(補益)됨이 신에게 견줄 바가 아닐 것이며, 한원진(韓元震) 또한 버릴 사람이 아닙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따라서 마땅히 부르겠노라."
하였다. 이어서 묻기를,
"마음에 언제나 불안정하게 왔다갔다하는 것이 있는데, 어떤 공부를 해야 이 생각을 떨쳐버릴 수 있는가?"
하니, 대답하기를,
"만약 헛된 생각을 아주 없애 버리고자 힘을 너무 지나치게 쓴다면 비단 무익할 뿐 아니라, 또 쉽사리 병이 생기게 됩니다. 대개 혹은 조존(操存)의 공부로 이 생각을 떨쳐버리는 경우가 있는가 하면 혹은 경전(經傳)의 공부로 견식(見識)을 개발(開發)하여 이 생각을 떨쳐버리는 경우도 있으며, 혹은 넓은 들에 초연히 홀로 서서 텅빈 밝은 마음으로 시원스레 벗어남으로써 절로 이 생각을 없애는 경우도 있는데, 모두 실제 그 힘을 쓰는 것이 어떠하냐에 달려 있을 뿐입니다. 또 마음이란 얽매이는 곳이 있어서는 아니되니, 비록 크나큰 백성에 대한 근심과 나라의 계책이라 할지라도 그 분수(分數)에 적절하면 이치와 법도에 맞아 물(物)이 그 평정을 얻을 수 있지만, 그 분수에 지나치면 정령(政令)에 발현되되 정도를 넘음을 면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대저 인군은 포용하는 도량을 확 넓힘이 있고 난 뒤에야 천지와 덕(德)을 합할 수 있을 것인데, 종사(宗社)의 책임을 받고 억조 창생의 위에 처하는 사람이 관대하게 하지 아니하고 무엇을 가지겠습니까? ‘관(寬)’자로 동궁을 면유(面儒)하신 데서 성의(聖意)의 심원(深遠)함을 볼 수 있습니다."
하매, 임금이 가납하였다. 박필주가 또 말하기를,
"우리 나라가 오늘이 있게 된 것은 황조(皇朝)118)  의 은혜인데, 세월이 이미 오래 되자 인심이 점차 함락되어 피폐(皮幣)와 금증(金繒)을 예사로 여기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일분의 ‘아픔을 참고 원통함을 머금은 뜻’이 없으니, 얼마 되지 아니하여 이적(夷狄)과 금수(禽獸)의 영역으로 돌아가지 않겠습니까? 지난 해에 효묘(孝廟)의 휘호(徽號)를 추상(追上)한 것은 성의(聖意)를 둔 곳이 있어 거의 이미 무너진 이륜(彛倫)를 바로잡고 장차 어두워질 의리를 밝힐 수 있었습니다만, 또한 궐전(闕典)이 있었습니다. 선정신(先正臣) 송시열(宋時烈)은 덕을 같이했던 신하로서 한마음으로 협찬(協贊)하며 천리(天理)를 밝히고 인심을 바로잡는 것을 자신의 임무로 삼았습니다. 비록 궁검(弓劍)을 갑작스레 남기심119)  에 연유하여 뜻과 사업을 이루지는 못하였습니다만, 그 마침내 좌임(左袵)120)  을 면하고 사람들이 모두 《춘추(春秋)》의 존양(尊攘)의 의리를 알게 된 것은 그 누구의 공이겠습니까? 송시열은 지우(知遇)가 탁절(卓絶)하고 계합(契合)이 소융(昭融)하였음에도 끝내 묘정(廟庭)에 유식(侑食)될 수 없었으니, 이는 탕(湯)임금의 묘정에 이윤(伊尹)이 없고 소열제(昭烈帝)의 묘정에 제갈양(諸葛亮)이 없는 격입니다. 지금 만약 선정(先正)을 성조(聖祖)에 올려 배향(配享)한다면 세도(世道)를 바로잡고 대의(大義)를 밝힘에 또한 혹시라도 도움이 있을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사체(事體)가 중대하니, 마땅히 조용히 헤아려 하겠노라."
하였다. 박필주가 또 말하기를,
"말을 구하고 간언(諫言)을 받아들이는 데는 별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어떤 말이 있어 너의 뜻에 거슬리거든 반드시 도(道)에 맞는가 살펴 보고, 어떤 말이 있어 너의 뜻을 따르거든 반드시 도에 맞지 않는 말인지를 살펴 보라’고 한 것은 정녕 간측(懇惻)하여 만세토록 인군의 귀감이 됩니다. 성상께서는 이 뜻을 깊이 유념하여 천지와 같은 도량을 넓히시고 사물의 이치에 통달하소서. 그리하여 그 잘못을 없애고 과감히 그 옳은 것을 따르신다면, 천하의 선(善)이 모두 돌아와 나라가 다스려질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옳다고 칭찬하였다.

 

4월 4일 정해

찬선(贊善) 박팔주(朴弼周)가 진소(陳疏)하여 돌아갈 것을 고하며, 8조목을 진계(陳戒)하였는데, 첫째 자신을 속이지 말 것, 둘째 자용(自用)하지 말 것, 셋째 사정(事情)에 순응할 것, 넷째 자신의 허물을 반성할 것, 다섯째 희로(喜怒)를 절제할 것, 여섯째 언어와 행동을 신중히 할 것, 일곱째 세자의 덕(德)을 기를 것, 여덟째 당론(黨論)을 평정할 것이었다. ‘자신을 속이지 말 것’에 대해 논하기를,
"성의(誠意) 공부는 오로지 ‘자신을 속이지 않는다[母自欺]’란 세 글자에 있는데, 자신을 속임에도 또한 몇 가지 형태가 있으니, 무심(無心)한 경우가 있는가 하면 의도적인 경우도 있습니다. 대저 무심한 경우란 진실로 흐릿하여 스스로 깨닫지 못한 상태에서 말미암는 것으로 군자(君子)도 또한 면하지 못하는 바가 있으나, 이른바 ‘의도적인 경우로 고의적으로 하는 것’은 더욱 심술(心術)의 해가 됩니다. 신이 며칠 전 등연(登筵)하였을 때 《심경(心經)》을 강(講)함으로 인하여 삼가 성교(聖敎)를 들었는데, 심지어 반생(半生) 동안 자기 자신을 속였다며 자책하셨습니다. 대저 성명(聖明)의 근독(謹獨)한 공부로 어찌 혹시라도 이런 일이 있겠습니까만, 그래도 이처럼 하교하셨던 것입니다. 의도란 남들은 미처 알지 못하고 자신만이 홀로 아는 것이니, 혹시 털끝만큼이라도 성심(聖心)에 만족스럽지 아니함이 있는지요? 오로지 원하건대 성명(聖明)께서는 체인(體認)하소서."
하고, ‘자용(自用)하지 말 것’에 대해 논하기를,
"사람은 비록 지극히 어리석기는 하지만 반드시 한 가지 얻음은 있나니, 만약 그것이 선(善)한 것이라면 취할 뿐이요, 그것이 자기에게서 나오기를 기필할 것은 없는 것입니다. 이것을 일러 ‘자용(自用)하지 않는 것’이라고 하니, 만약 털끝 만큼이라도 자용하려는 뜻이 있다면 곧 성인(聖人)이라고 부를 수 없는 것입니다. 대개 천하의 이치를 공평하게 쓰지 않고 오로지 자기 한 사람의 사견(私見)만을 숭장(崇長)하면 안온하게 스스로 성인인 체하고 오만하게 스스로 대인(大人)이라 하면서 단지 살리기를 좋아하는 작은 밝음을 믿거나 정치를 수행하는 대체(大體)를 잊게 됩니다. 그리하여 심지어 유사(有司)의 일까지 직접 시행하여 서무(庶務)가 번거롭게 몰려들어 충성스럽고 곧은 말을 물리쳐 군정(群情)이 통하지 않게 될 것이니, 치평(治平)으로 나아갈 수 없을 뿐만이 아니라 곧 난망(亂亡)의 지경으로 함께 돌아갈 것입니다. 아! 두렵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하고, ‘사정(事情)에 순응할 것’에 대해 논하기를,
"신은 천하 국가를 다스리는 데 요도(要道)가 있다고 들었으니, ‘사정(事情)’일 뿐입니다. 이것에 순응하면 다스려지고 이것을 거스르면 어지러워집니다. 이른바 사정이란 하늘에 근원을 두고 만물에 갖추어진 것으로서 본디 일정한 이치와 곧은 도리가 있으되, 그 실상은 하나일 뿐입니다. 그런데 후세의 인주(人主)는 왕왕 일정한 이치와 곧은 도리 외에 반드시 별다른 도리를 만들어내고는 하였습니다. 근본은 간단한데 지극히 번쇄한 데서 구하고, 근본은 쉬운 것인데 지극히 어려운 데서 구한 나머지 명덕(命德)과 토죄(討罪)가 모두 다 사곡(私曲)121)  에 관계되었으므로, 일에는 도움이 없고 한갓 그 마음이 수고로운 것만을 보았던 것이니, 이 어찌 이른바 순응한 것이겠습니까? 신이 듣자오니, 전하께서는 효우(孝友)·공검(恭儉)하시고 명달(明達)로 연습(練習)하셨다 합니다. 하지만 능히 사물의 자연스러움에 순응하지 못하시어 마음에 능히 얽매임이 없지 아니하기 때문에 일에 대처할 즈음에 언제나 위곡(委曲)에 지나쳐 인정(人情)을 다할 것을 구하시기도 하고 혹은 도리어 그 일정한 이치를 잃으시기도 합니다. 이는 저 큰 천지와 저 밝은 일월(日月)에 대해 손상되는 바 심히 크니, 아마도 통렬하게 바로 잡아 다스리지 않을 수 없을 듯합니다."
하고, ‘자기의 허물을 반성하는 것’에 대해 논하기를,
"대개 사람이 태어나매 기품(氣稟)은 순수하기 어렵고 심술(心術)은 방종하기 쉽습니다. 안자(顔子)의 사물(四勿)122)  과 증자(增子)의 삼성(三省)123)  과 같은 것은 모두 허물이 있었기 때문에 그런 말을 했던 것입니다. 다만 그 허물을 능히 고쳤던 것이 뭇사람과 다름이 있게 된 까닭입니다. 국가에 사고가 많고 변란(變亂)이 계속 이어지니, 이는 진실로 군하(群下)가 나라를 잘 도모하여 다스리지 못한 소치입니다. 그러나 전하께서 만약 전날 보고 행하셨던 일에 대해 하나하나 그 어떤 것이 득이 되고 그 어떤 것이 실이 되었는지를 돌이켜 생각하시어, 다시는 나 자신의 막힌 고집의 사사로움이 털끝만큼도 그 사이에 누가 되지 않게 하신다면 징창(懲創)124)  이 필시 깊을 것이며, 비신(毖愼)125)  이 필시 이를 것이니, 그것을 나라를 다스리고 보존하는데 베푸신다면 반드시 보통 이상으로 훨씬 뛰어남이 있을 것입니다. 신은 매번 한무제(漢武帝)의 윤대(輪對)의 조서(詔書)126)  를 읽을 때마다 재삼 크게 감동하지 아니한 것이 없었습니다. 대저 ‘광패(狂悖)’란 두 글자는 지극히 올바르지 못한 제목이어서 남들이 만약 이 말을 자신에게 더한다면, 반드시 번민하며 분노를 낯빛에 드러낼 것입니다. 그러나 무제는 조금도 은휘(隱諱)하지 않은 채 그것을 스스로 감당했으니, 진실로 해와 달이 다시 밝아지는 것처럼 사람들이 모두들 우러러 보았던 것입니다. 이런 까닭으로 말미암아 지난날의 허다한 궁독(窮黷)의 과오가 이 한 생각에 의지하여 보완되고 회복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인주(人主)가 허물이 있으되 능히 고친다면, 그 국가에 이익이 됨이 이와 같으니, 어찌 생각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하고, ‘희노(喜怒)를 절제할 것’에 대한 논하기를,
"대저 기쁨에는 당연한 것과 당연하지 아니한 것이 있고, 노여움에도 또한 당연한 것과 당연하지 아니한 것이 있었습니다. 만약 그 두 가지 사이에 일찍 판단을 내려 한결같이 당연한 데서 나오게 하고 당연하지 않는 데서는 나오지 못하게 한다면, 발(發)함이 모두 법도에 맞아 만사가 상궤(常軌)에 순응하지 아니함이 없을 것이니, 이른바 ‘자신을 공손히 하여 남면(南面)하면서 무위(無爲)로 다스린다.’고 하는 것은 이와 같을 따름입니다. 이제 또 한편에 대하여 노여워 한다는 일로 말씀드리자면, 인주의 노여움은 대부분 신하들이 자신을 따르지 아니하는 데서 연유합니다. 대개 뜻은 반드시 행하려는 데 있는데, 말하는 자가 이에 지척(指斥)하여 행할 수 없다고 하니, 이것은 믿지 못하겠다는 비방과 비슷한지라 그 마음을 거슬러서 노여움을 촉발하도록 함이 본디 그러하겠습니다만, 그러나 그런 말을 하게 된 까닭을 따져보면 그 마음은 실로 임금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대저 무슨 노여워할 만한 것이 있겠습니까? 간혹 알직(訐直)127)  이 가증스러운 자가 있기는 하지만, 현명한 임금이 이것조차 또한 일체 용납하는 것은 대개 그 〈허물을〉 들추어내지 아니하는 자가 보고 경계할까 두려워하기 때문입니다. 지금 전하께서는 사람들의 말의 득실이 어떠한가를 논할 것도 없이 언제나 한번 뜻을 거스르기만 하면, 성노(聖怒)가 곧 진동하고 처분이 가볍고 급작스레 내려집니다. 그래서 전후에 걸쳐 말 때문에 죄를 얻은 자가 그 얼마인지 알 수가 없을 정도입니다. 왕왕 곧바로 별것 아닌 과실에 걸려 절도(絶島)로 쫓겨나는가 하면, 혹은 역적을 다스리는 법으로 대우하기도 하십니다. 급박하게 조절(操切)하여 다시는 여지를 남기지 않으시니, 이는 성상의 도량이 넓지 않은 것일 뿐만 아니라, 심할 경우 정치에 누가 있을까 두렵기조차 합니다."
하고, ‘언어와 행동을 신중히 할 것’에 대해 논하기를,
"인주의 일동일정(一動一精)은 국가의 다스려짐과 어지러움에 관계되지 아니함이 없습니다. 그것이 선(善)할 경우 천리 밖에서도 순응하고 그것이 선한지 못할 경우 천리 밖에서도 어기는 것입니다. 삼가 듣건대 근래에 전하께서는 언어와 행동에 심히 신중을 기하지 아니하시어 조금이라도 격뇌(激惱)함이 있으면 뜻밖의 비상한 거조가 많고, 내려진 사륜(絲綸)에는 감히 들을 수 없는 것까지 있다 합니다. 따라서 군하(群下)는 능히 한마디도 진언(進言)하지 못할 뿐 아니라, 모두 두려워 떨고 정신이 혼란하여 성의(聖意)가 있는 데를 알지 못합니다. 조정 신하에게 베푸시는 것으로 말씀드리자면 대신(大臣)처럼 존귀한 사람도 금방 파직시켰다가 돌아서서 곧 복직시키는가 하면, 사마(司馬)128)  처럼 중요한 사람을 무단히 잡아들이기도 하십니다. 아! 저 몇 사람들의 신하 또한 어찌 그 몸을 스스로 존중하지 않겠습니까만, 다만 전하의 지나친 거조로 비상한 일이 많기 때문에 걱정하고 두려워한 나머지 감히 봉승(奉承)하지 않을 수 없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전하의 마음에 기탄하는 바가 없어져 심지어 ‘너니 네니’란 말을 하도록 만들었던 것입니다. 《서경(書經)》에 이르기를, ‘한 사람이 세 번 실수할 수 있나니, 어찌 원망이 분명해지기를 기다리랴? 나타나지 않을 때 조치해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하물며 세 번 정도에 그치지 않는 경우야 말해 무엇하겠습니까? 전하께서는 언제나 지나친 거조가 있고 난 뒤에는 번번이 말씀하기를, ‘최초로 군하(群下) 또한 한 목소리로 유락(唯諾)하였으니, 잘 생각하고 공경하여 전날의 잘못을 고쳐 유신(惟新)을 도모하자.’고 하십니다. 하지만 얼마 되지 아니하여 문득 또 반복하니, 신은 참으로 전하의 ‘최초’가 어찌 그리 많은지 알지 못하겠습니다. 《시경(詩經)》에 이르기를, ‘그대 말을 삼가며 그대 위의(威儀)를 공경하여 훌륭하지 않음이 없도록 하라’ 하였습니다. 바라건대 성명(聖明)께서는 깊이 유의하소서."
하고, ‘세자의 덕(德)을 기를 것’에 대해 논하기를,
"신이 듣건대, 태자(太子)를 보익(輔翼)함은 가의(賈誼)의 보부편(保傅篇)에 보인다 하니, 대개 삼대(三代)의 유언(遺言)입니다. 삼가 생각건대, 우리 동궁께서는 의젓하게 높디높은 의표(儀表)가 있어 겨우 입학(入學)할 나이를 넘었는데, 성인(聖人)의 자질이 곧 이미 8, 9분(分)이나 이루어졌으니, 종사(宗社)의 한없는 기쁨이 실로 이에 있습니다. 그런데 고금은 시의(時宜)가 다르고 규모·제도에 구애됨이 있어 삼고(三古)의 법은 이미 후세에 행할 수 없게 되었는지라, 저군(儲君)과 아침저녁으로 함께 거처하는 사람은 빈료(賓僚)에 있지 아니하고, 궁인(宮人)과 내관(內官)에 있으니, 그 물들기 쉬움이 더욱 두려운 바입니다. 신의 생각은 이러합니다. 마땅히 그 중에서 조심스럽고 말이 적으며 노실(老實)·충근(忠勤)한 자를 골라 보호하는 책임을 맡도록 하되, 복색과 기완(器玩)은 모두 법도가 있게 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전하께서는 삼가 열성(列聖)의 밀법(密法)을 지키시고 자기의 동정(動靜)을 신중히 하소서. 한마디 말을 하시면 오로지 어긋남이 있을까 두려워하고 한 가지 일을 행하시면 오로지 그것이 법도에 맞지 않을까 두려워하시어 반드시 진선 진미(盡善盡美)를 기약하심으로써 동궁이 보고 느낄 수 있게 하소서."
하고, ‘당론(黨論)을 평정하는 것’에 대해 논하기를,
"신이 듣건대 자고로 국가의 근심이 되는 것으로 붕당(朋黨)만한 것이 없었으니, 한(漢)나라의 당고(黨錮)129)  , 당(唐)나라의 백마(白馬)130)  , 송(宋)나라의 천(川)·낙(洛)131)   등 이미 지난 일을 소급해 보면 알 수가 있습니다. 전하께서 즉위하신 이래로 탕평(蕩平)의 다스림에 날까로운 뜻을 두시어 지극한 정성으로 붕당을 제거하셨으니, 이것은 황극(皇極)의 요도(要道)이자 지금의 급무(急務)입니다. 대저 지금의 이른바 당(黨)에는 서인과 남인이 있는가 하면 노론과 소론이 있습니다. 그 처음은 한가지 미세한 일에서 일어났으나, 끝내는 막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르러 조정 진신(搢紳)들 사이에 전쟁이 한창 벌어지고 사류(士類)들 사이에 죽이고 치는 것이 참혹하였으니, 비록 사람이 한 것이라고는 하지만, 실제로는 하늘의 운수인 것입니다. 대개 그 원인과 곡절은 몹시 깁니다.
옛날 기사년132)  에 뭇 간인(奸人)들이 뜻을 얻어 인현 성모(仁顯聖母)를 사제(私第)에 물러나 있게 하자, 송시열(宋時烈)·김수항(金壽恒)·오두인(吳斗寅)·박태보(朴泰輔) 등 여러 사람이 비통·분울(憤鬱)해 한 것이 6년 동안 하루 같았습니다. 그러다 갑술년133)   개기(改紀) 때에 이르러 장희재(張希載) 등 여러 역적들을 사형에 처하여 천토(天討)를 바로하려고 생각하지 않음이 없었으니, 비록 세상에서 일컫는 바 소당(少黨)이 낫다고 한 자일지라도 그 처음에 또한 어찌 그러하지 않았겠습니까? 그러나 불행하게도 그 당시의 대신(大臣)이 갑자기 전의 견해를 바꾸어 이의(異議)를 제창하였는데, 그 사람은 평소 명망(名望)이 드러나 세상의 추중(推重)을 받았으므로 그리로 쏠려 따르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절로 하나의 당을 이루었던 것이며, 마침내 세도(世道)의 화(禍)를 이루어 다시는 해결할 수 없게 된 것입니다. 누가 한 사람 한 생각의 잘못이, 그 폐해가 곧 이런데 이르렀다 하겠습니까? 만약 그렇게 된 근본을 거슬러 올라간다면 비록 전적으로 이 한 가지 일에 말미암은 것이라고는 할 수야 없겠지만, 지금 특별히 들어 말하는 것은 근래 화란(禍亂)의 계제(階梯)가 바로 여기에서 말미암았기 때문입니다.
또 생각건대, 갑술년 이래로 조정에서 향용(嚮用)134)  하는 바는 한쪽 편만을 위주로 하는 것 같았습니다. 대저 우리 숙종 대왕께서는 천지처럼 어질고 밝기가 일월과 같으셨으니, 어찌 그것이 혹시라도 편중된 데 관계됨을 모르셨겠습니까? 그럼에도 이렇게 하셨던 것은, 잘못을 절실히 뉘우치고 악을 엄하게 징계하신 나머지 그렇게 하지 않을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만약 당시의 사류(士類)들이 마음을 합치고 한곳으로 돌아가 함께 나랏일은 해나갔더라면 화평(和平)의 복을 아마도 불러왔을 것인데, 단지 사소한 일을 다투느라 앉아서 좋은 기회를 잃고 한 번씩 반복되는 사이에는 뿌리가 깊어지고 바탕이 단단해졌으니, 이것은 비록 요순(堯舜)이 위에 있어도 아마 일조 일석 사이에 그것의 소멸·융합을 책임지울 수 없을 것입니다.
옛부터 당론이 바야흐로 한창일 때 대처하는 방도에는 두 가지가 있었습니다. 하나는 시고 짠 것을 조화시키듯 하는 것이고, 하나는 흑·백을 분별하는 것입니다. 우(虞)나라 조정의 ‘동인 협공(同寅協恭)’과 홍범(洪範)의 ‘무작호오(無作好惡)’는 모두 이 도리를 쓴 것입니다. 신은 알지 못하겠습니다만, 지금 탕평을 주장하는 사람은 과연 이러한 도리를 쓰는 것인지요? 살핌이 이와 같다면 나라는 안정되어 만세토록 영원히 의지할 것이요, 그렇지 아니하여 한갓 그 이름만 얻고 그 이름지은 바 까닭을 얻지 못한다면 세도(世道)의 해(害)는 우려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지난번 성상께서 동궁을 훈유(訓諭)하신 글에 ‘조화시킴은 혼돈에 빠진다.’고 하셨으니, 전하께서 수수(授受)하신 거룩함이 유정 유일(惟精惟一)의 심법(心法)과 다름이 없음을 볼 수 있었습니다. 각각 그 귀속처를 얻게 하소서. 만약 단지 크게 노하시어 겸제(箝制)하고 억지로 나란하지 아니한 입을 나란히 하게 만드신다면 비록 일마다 방비하고 말마다 막는다 하더라도, 장차 동쪽에서 사그라지면 서쪽에서 생겨나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니, 아무리 애를 쓴들 날이 또한 부족할 것입니다. 또 신에게 깊이 염려하는 것이 있습니다. 근래에 당색(黨色)이 이미 나누어져 시비가 분명하지 아니합니다. 삼가 듣건대 전하께서는 악역(惡逆)·대고(大故)에 대해서도 또한 당(黨)으로 그 원인을 돌리신다 합니다. 만약 이러하다면, 난신(亂臣)·적자(賊子)가 장차 어떻게 징계되고 두려워하는 바가 있겠습니까? 이것은 사리(事理)에 심히 해가 되니, 아마도 또한 함께 경계하지 않을 수 없을 듯합니다."
하고, 끝에 가서 또 여덟 조목을 총괄해서 논하며 부연(敷演)하였다. 상소가 들어가자, 유중(留中)하도록 명하고, 비답하기를,
"십여 년 동안 선비를 기다린 마음이 이제야 풀렸으니 깊이 기뻐하노라. 경의 고달픔을 딱하게 여겨 어제 연중(筵中)에서 휴양(休養)을 허락했다만, 간절한 마음이야 밤까지 어이 풀렸으랴? 여덟 조목에 힘쓰고 가슴에 마땅히 새겨 두겠노라. 경은 모름지기 소자(小子)의 은근한 뜻을 깊이 유념하고 원량(元良)을 보도(輔導)하는 중임(重任)을 생각하여 안심하고 사직하지 말라. 모름지기 잘 휴양하고 부름이 있거든 들어와 소자의 지극한 뜻에 부응하고 원량의 장성(長成)을 도우라."
하였다. 춘방(春坊)의 박필재(朴弼載)와 이광운(李光運) 등이 또한 연명(聯名)으로 동궁에게 글을 올려, 대조(大朝)께 여쭈어 지극한 정성으로 면류(勉留)토록 청하게 하였으나, 박필주는 마침내 돌아가고 말았다. 박필주는 명가(名家)의 아들로 일찍부터 과거 공부를 버리고 강고(江皐)에 은거하였다. 경학(經學)에 잠심하여 울연(蔚然)히 당세의 성명(盛名)이 있었다. 숙묘조(肅廟朝) 때부터 초선관(抄選官)으로 누차 대헌(大憲)을 거쳤으며, 금상(今上) 또한 우례(優禮)를 더하여 소명(召命)을 누차 내렸으나 끝내 나오지 않았다. 이때 올린 장소(章疎)는 남들이 말하기 어려운 것을 말하였으므로 사류(士類)들이 모두 칭송하였다. 이때에 와서 임금이 수서(手書)로 돈독히 불러 마지 아니하므로, 박필주가 부득이 명에 응하여 세 번 전석(前席)에 들어왔던 것인데, 그 말한 바는 능히 그 온축했던 바를 다 털어놓지 아니하였다. 또 임금은 단지 불러 한번 보고자 한 것일 뿐이었고, 성실하게 향용(嚮用)하려는 뜻이 없었으므로 박필주가 돌아갈 것을 결심했던 것이다. 그리고 돌아갈 때 임하여 올린 상소 또한 이치를 논한 것이 많고 일을 논할 것은 적어 당시 사람들이 자못 실망하였다 한다.

 

헌부(憲府)에서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사간 채응복(蔡膺福)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호서(湖西)의 바다에 가까운 고을들은 본래 토지가 척박함에도 부세(賦稅)는 심히 무거우니, 대개 전날 양전(量田) 때 등급을 나눔이 균등하지 아니한 데서 말미암은 것입니다. 또 작년 바닷가 고을의 진전(陳田)을 변통할 때 감등(減等)시키지 아니하였을 뿐 아니라, 이에 도리어 진전에서 흠축(欠縮)난 수를 시기전(時起田)에 분배하였습니다. 그러므로 그 세(稅)가 전보다 갑절이나 되어 백성들의 원망이 예전보다 더욱 심해지고 있습니다. 방백(方伯)과 수령(守令)으로 하여금 대장을 살펴서 바로잡아 고치도록 하여 호우(湖右)의 잔약(殘弱)한 백성들이 편안히 살 수 있게 해야 마땅하겠습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마땅히 대신(大臣)에게 하교하겠노라."
하였다.

 

4월 5일 무자

김상적(金尙迪)을 사간으로, 이종적(李宗迪)을 부교리로, 조명경(趙命敬)을 수찬으로, 심해(沈瑎)를 경상 좌병사로, 신광수(申光綏)를 영성위(永城尉)로 삼았다. 신광수는 신만(申晩)의 아들로 화협 옹주(和協翁主)에게 장가들었다.

 

임금이 대신(大臣)과 비국 당상(備局堂上)을 인견하였다. 이에 앞서 강화 유수(江華留守) 김시혁(金始㷜)이 벽돌을 구워 성(城)을 쌓는 법을 시행할 것을 청하므로, 임금이 장신(將臣)에게 가서 살펴보라고 명한 적이 있었다. 훈련 대장 김성응(金聖應)이 두루 살펴보고 돌아와 그 형편에 대해 진달하기를,
"강화는 큰 바다로 둘러싸여 있으니, 실로 천참(天塹)입니다. 선두포(船頭浦) 북일곶[北一串]과 같은 곳은 옛날에 돈대(墩臺)가 있었는데, 중간에 허물어졌으니, 다시 설치함이 마땅하겠습니다. 그리고 토성(土城)은 애초부터 높거나 가파르지 않았고, 이번에 벽돌로 쌓은 것은 비록 보기는 좋으나 능히 두껍게 쌓을 수 없고 그 넓이도 겨우 반 길[丈]이라 쉽사리 허물어질 것 같으니, 토성과 이해(利害)가 어떠한 지 알 수 없습니다. 그리고 중류(中流)에서 대포를 쏘아 그 성가퀴를 맞추었더니, 성의 담 하나가 완전히 파괴되었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유수(留守)를 구임(久任)시켜 그 성효(成效)를 책임지워야 마땅하다."
하였다. 김성응이 또 말하기를,
"문수 산성(文殊山城)이 성 안을 굽어보고 있으니, 이는 반드시 싸울 곳이 됩니다. 만약 통진부(通津府)를 문수 산성으로 옮겨 한 진(鎭)을 만들고, 수목을 성 안팎에 심어 울연(蔚然)히 하나의 관방(關防)이 되게 한다면 좋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다시 대신에게 명하여 가서 살펴본 뒤 품처(稟處)하게 하였다. 영의정 김재로(金在魯)가 특별히 고(故) 판서(判書) 김석연(金錫衍)에게 시호를 줄 것을 청하자, 임금이 허락하였다. 여러 신하들이 장차 물러나려 하자, 임금이 삼상(三相)에게 머물러 있도록 명하고, 하교하기를,
"접때 절사(節使)의 말을 들으니, 호황(胡皇)이 그 태후(太后)와 함께 거용관(居庸關)에서 몽고 땅을 지나 심양(瀋陽)에 올 것이라고 하였다. 백년의 운수가 이미 지나갔고 건륭(乾隆)의 사람됨이 강희(康熙)에 미치지 못하는데, 이제 멀리 관외(關外)로 오니, 심히 염려스럽다. 우리 나라는 태평 세월을 보낸 지 오래되었는데, 이번에 이런 기회를 당하였으니, 의당 묘당(廟堂)에서 먼저 자강(自强)의 방도를 다해야 할 것이다. 강변(江邊)의 수령과 서로(西路)의 수신(帥臣) 또한 마땅히 가려서 보내야 할 것이다."
하였다. 김재로가 말하기를,
"강희 때 또한 배묘(拜墓)하는 일로 심양에 행차한 적이 있었으니, 이 또한 구례(舊例)를 따른 것인 듯합니다. 어찌 반드시 지나치게 염려할 것이 있겠습니까? 다만 자강의 방도는 진실로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수령과 수신을 무단히 체개(遞改)하는 것은 인심이 반드시 소란스러워질 것이니, 천천히 도모함이 옳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심양 행차는 비록 고례(古例)가 있기는 하지만, 피국(彼國)의 시상(時象)이 예전에 비할 바 아니어서 끝내 염려할 만한 것이 있다. 무릇 뜻하지 않은 일에 관계되는 것을 묘당에서 미리 조치함이 마땅하다."
하였다.

 

좌의정 송인명(宋寅明)이 말하기를,
"국성(國姓)에게 대수(代數)를 제한하지 말고 군역(軍役)을 면제하는 일을 특교(特敎)로 정식(定式)하라 하시니, 이것은 성상의 돈휼(敦恤)하시는 뜻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런데 인심이 간사(奸詐)하여 모록(冒錄)한 자가 많으니, 금후로는 종부시(宗簿寺)에서 무릇 가현 단자(加現單子)가 있을 경우 적통(嫡統)으로 서로 계승한 자 이외에는 해당 도(道)의 해당 고을로 하여금 근파(根派)를 조사해 내어 구전(口傳)을 내도록 허락하게 하소서. 그리고 수령으로서 능히 사실대로 조사해 보고하지 않는 자는 해시(該寺)에 명하여 논죄(論罪)케 함이 마땅하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장령 윤식(尹植)이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정언 엄우(嚴瑀)가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4월 7일 경인

해의 빛깔이 붉은 색이었다.

 

4월 8일 신묘

임금이 태묘(太廟)에 거둥하였다. 장차 하향(夏享)을 지내기 위해서였다.

 

4월 9일 임진

임금이 태묘에 친히 제사를 지냈다. 한밤중까지 한데서 서 있으며 소차(小次)로 들어가지 아니하자, 여러 신하들이 굳이 청하였으나, 그래도 따르지 아니하였다. 집례(執禮)의 홀기(笏記)에 번문(繁文)이 많고 백관의 제복(祭服)이 그 제도가 일치하지 않는다 하여 유신(儒臣)에게 상고해 아뢰라고 명하였다. 환궁(還宮)할 때 태묘의 문 밖을 나오자, 그제야 지나는 길에 향교동(鄕校洞) 인묘(仁廟)의 잠저(潛邸)에 임할 것을 명하였다. 교리 민백행(閔百行) 등이 청대(請對)하고 나아가 말하기를,
"이번 지나는 길에 들르시겠다 하심은 실로 뜻밖에 나온 것입니다. 서반(序班)과 군오(軍伍)가 전도(顚倒)됨을 면치 못하고 있습니다. 신 등이 가만히 생각하건대, 전하의 이 거조는 경솔한 데 가까운 듯합니다."
하니, 임금이 눈물을 흘리며 말하기를,
"이제 계해년135)  의 옛 갑자(甲子)를 당했으니, 내 마음속으로 추모하여 꼭 잠시 들어가고자 한다."
하고, 드디어 지나는 길에 들렀다. 대신(大臣)이 청대하자, 장령 윤식(尹植)이 나아가 말하기를,
"전하께서 길 가는 도중에 갑자기 이런 명을 내리시어 군하(群下)로 하여금 감히 다투지 못하게 하셨으니, 아마도 이번 거조는 군하를 억누른 데서 나온 것인 듯하여 잘못이 작지 아니합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대신(大臣)의 진달한 바가 옳다."
하고, 한 자급을 더해 장려하라고 명하였다. 또 능성 부원군(綾城府院君) 구굉(具宏)에게 치제(致祭)하라고 특별히 명했으니, 대개 정사(靖社)의 공(功)을 추념(追念)한 것이었다. 승지 남태제(南泰齊)가 말하기를,
"정사한 원훈(元勳)으로서 묘정(廟庭)에 철식(腏食)하는 사람은 마땅히 일체로 치제해야 할 것 같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누구인가?"
하였다. 남태제가 말하기를,
"승평 부원군(昇平府院君) 김유(金瑬)·연평 부원군(延平府院君) 이귀(李貴)·평성 부원군(平城府院君) 신경진(申景禛)·완풍 부원군(完豊府院君) 이서(李曙)입니다."
하니, 임금이 일체로 치제하라 명하고 그 자손은 모두 녹용(錄用)하라고 명하였다. 이문(里門) 안에 사는 부로(父老)로서 나이 60인 자에게 또한 쌀과 포(布)를 주었다.

 

4월 10일 계사

간원 【정언 엄우(嚴瑀)이다.】 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니, 윤허하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당후(堂后)의 실관(實官)은 곧 참하관(參下官) 중의 청선(淸選)인데, 어리석고 무식한 박홍준(朴弘儁)과 내력이 분명하지 아니한 이민곤(李敏坤)이 또한 분수에 넘치는 자리를 차지하고 있어, 관방(官方)이 더욱 혼란스러워지고 진신(搢紳)들이 웃음거리로 전하고 있으니, 빨리 개정(改正)해야 마땅합니다."
하고, 또 아뢰기를,
"장단(長單)에 쓰는 말을 감히 너절하게 늘어놓지 못하는 것은 법례(法例)가 본디 그럴 뿐입니다. 그런데 형조 참판 이세진(李世璡)은 지난번 사직 단자의 끝에다 인혐(引嫌)하는 단서를 찔러 넣었으니, 이미 전례(前例)가 아닌데다 또 뒷날의 폐단에도 관계됩니다. 이세진에게 문비(問備)를 베풀어야 마땅합니다."
하였으나, 모두 윤허하지 않았다.

 

4월 11일 갑오

밤에 어떤 별이 대각성(大角星) 아래로 흘러갔다.

 

찬선(贊善) 어유봉(魚有鳳)이 상소하여 함께 오라는 명을 환수(還收)할 것을 청하였으나, 임금이 우악한 비답을 내리고 허락하지 않았다.

 

예조 참판 오광운(吳光運)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삼대(三代) 이상은 ‘이(理)’가 승(勝)하였고 삼대 이후는 ‘기(氣)’가 승하였습니다. 요(堯)·순(舜)은 ‘이’의 세계를 당하였고, 공자·맹자·정자·주자는 ‘기’의 세계를 당하였는데, 우리 성상께서는 ‘사(私)’의 세계를 당하셨으니, 무어(撫御)해야 할 운수가 공자·맹자·정자·주자에 비해 더욱 어려움이 있습니다. 다행인 것은 군사(君師)의 지위에 있다는 것이니, 그 ‘사’의 세계를 다스림에 어찌 그 방도가 없겠습니까? 전하께서 대훈(大訓)을 지으시어 한 세대 뒤를 효유(曉諭)하셨으니, 세도(世道)는 전보다 비교적 낫습니다. 그러나 대훈으로 효유한 것은 겉으로 드러난 증세를 다스린 데 불과하고 그 속의 증세는 여전합니다. 전하께서 만약 장위(腸胃)를 씻고 그 고황(膏肓)을 일으켜 세우고자 하신다면, 반드시 본원(本源)을 함양한 나머지를 추연(推演)해 천리(天理)를 밝히고 종지(宗旨)를 표방해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한 책을 저술하여 온 세상에 반포해 보임으로써 군사의 표준을 세우신다면 호걸(豪傑)스런 선비들이 반드시 문왕(文王)을 기다려 일어났던 것처럼 많아질 것입니다. 그윽이 유가(儒家)의 집서(輯書)를 보건대, 여러 제자들이 모으고 도운 데서 나온 것이 많았습니다. 하물며 제왕가(帝王家)의 문자(文字)는 만기(萬機)의 여가에서 이루어지니, 어찌 일일이 모두 어수(御手)에서 나올 수 있겠습니까? 모두 다 한 국(局)을 구성하고 여러 사람의 의견을 모아 찬차(撰次)하는 것입니다.
신이 몰래 마음속에 은괄(隱括)해 둔 것으로 11조목이 있는데, 제1조는 ‘이(理)·기(氣)·심(心)·성(性)·정(情)’이고, 제2조는 ‘존덕성(尊德性)·도문학(道問學)’이고, 제3조는 ‘발(發)하기 전에 함양하고 이미 발했을 때는 성찰(省察)하되, 계신(戒愼)·공구(恐懼)·근독(謹獨)으로 스스로를 속이지 않는 공부’이고, 제4조는 ‘체(體)·용(用)이 한 근원에서 비롯되고 동(動)·정(靜)이 일치하여 천덕(天德)과 왕도(王道)가 안팎으로 차이가 없는 것’이고, 제5조는 ‘태자(太子)를 교양(敎養)하는 법’이고, 제6조는 ‘사람을 쓰는 득실(得失)은 국가의 치란(治亂)과 안위(安危)의 기틀에 관계된다는 것’인데, 과선(科選)·천거(薦擧)의 규례와 관방(官方)·연혁(沿革)의 제도를 덧붙였습니다. 제7조는 ‘백성을 편안히 하는 도리’인데 양역(良役) 변통에 대한 대책을 덧붙였습니다. 제8조는 ‘군제(軍制)·진법(陣法)’이고, 제9조는 ‘산천(山川)의 요해처(要害處), 제로(諸路)의 관방(關防)’이고, 제10조는 ‘남북의 변우(邊憂)’이고, 제11조는 ‘존주 대의(尊周大義)로 열성(列聖)의 뜻과 사업을 밝히는 바입니다. 지금 신이 진열(陳列)한 것은 이러한 제목을 들 수 있다.’고 말한데 불과합니다. 더하고 빼고 모으고 하는 데 이르러서는 반드시 학문이 있는 유신(儒臣)이 붓으로 산삭(刪削)하고 총괄해 재단하기를 기다려 성필(聖筆)의 지휘를 품(稟)함이 마땅하여, 감히 신이 논차(論次)할 바가 아닙니다. 우러러 시행할 것을 청합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그 조목으로 면려한 데 대해 심히 가상히 여기노라. 마땅히 더욱 힘쓰겠다."
하고, 원소(原疏)는 유중(留中)하라고 명하였다.

 

4월 13일 병신

간원 【정언 엄우(嚴瑀)이다.】 에서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가평 군수(加平郡守) 홍치기(洪致期)는 좌수(座首)가 가진 산을 협박해 빼앗아 누대(屢代)의 묘를 이장(移葬)하였습니다. 전라 좌수사(全羅左水使) 유주기(兪胄基)는 어버이의 나이 일흔을 넘었는데도 먼 곤직(閫職)에 무릅쓰고 부임하였습니다. 청컨대 모두 파직하소서."
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4월 14일 정유

임금이 대신(大臣)과 비국 당상(備局堂上)을 인견(引見)하였다. 우의정 조현명(趙顯命)이 말하기를,
"경술년136)   옥안(獄案) 중에서 의논하여 소석(疏釋)시킬 만한 사람을 상고하여 아뢰라는 명이 있었음에도 즉시 상고하여 품(稟)하지 않았으니, 금오(金吾)의 여러 당상관(堂上官)을 추고(推考)해야 마땅합니다."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상채청(償債廳)을 혁파하였는데, 좌의정 송인명(宋寅明)의 말을 따른 것이었다. 상채청을 설치한 지 거의 20년이 되었지만 부채를 진 상역(象譯)들이 가난하여 갚지 못하였으므로, 송인명의 아룀에 따라 이 명이 있었던 것이다. 이어서 각사(各司)에 명하여 급채(給債)의 폐단을 거듭 엄금하게 하였다. 송인명이 또 아뢰기를,
"영풍군(永豊君) 전(瑔)은 금성 대군(金城大君)·한남군(漢南君)·화의군(和義君)과 함께 모두 충(忠)에 죽었으니, 그 절개가 육신(六臣)에 밑돌지 아니합니다. 그러나 영풍군의 경우 후사가 없기 때문에 아직까지도 절혜(節惠)137)  의 은전(恩典)을 입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번에 듣건대 한남군의 자손이 후사를 세울 것을 상언(上言)했다고 하니, 포전(褒典)에 의당 이동(異同)이 없어야 하겠습니다. 일체로 시호를 내림이 마땅합니다."
하니, 임금이 허락하였다.

 

면복(冕服)의 제도를 개정(改定)하라 명하고, 백관(百官)의 조복(朝服)·제복(祭服)도 또한 이정(釐正)하게 하였다. 이에 앞서 임금이 면복과 백관의 조복·제복의 제도를 홍문관(弘文館)으로 하여금 널리 상고하여 아뢰게 하였는데, 이때에 와서 유신(儒臣) 등이 아뢰기를,
"《대명회전(大明會典)》 곤의(袞衣)의 제도를 상고하건대, 길이가 상(裳)을 덮지 아니하였으니, 이제 상의 화보(畫黼)를 밖으로 겉을 드러내게 해야 마땅합니다. 군신(群臣)의 관복(冠服)에 있어서는 《대명회전》에는, ‘관(冠)은 1품(品)은 5량(梁), 2품은 4량, 3품은 3량, 4품 이하는 2량, 7품 이하는 1량이다.’라고 하였습니다. 홀(笏)은 당(唐)·송(宋)의 제도는 품계에 따라 상아(象牙)·대나무와 나무를 썼었는데, 황조(皇朝)에서는 상아(象牙)와 나무를 썼습니다. 【4품 이상은 상아, 5품이하는 홰 나무이다.】  복(服)은, 조복과 제복을 병용(並用)한다는 글이 있습니다."
하니, 임금이 하교하기를,
"면복의 훈상(纁裳)이 현의(玄衣)의 가운데에 가려지니, 상의원(尙衣院)으로 하여금 그 제도를 고치고 그 길이를 줄여 ‘위는 현색(玄色) 아래는 훈색(纁色)’이라는 뜻을 표하게 하라. 백관의 제복은, 의(衣)·상(裳) 이외에 관(冠)·대(帶)·홀(笏)·패옥(佩玉)·후수(後綬)·폐슬(蔽膝)은 모두 조복으로 통용할 것이며, 혹시 구간(苟簡)한 자가 있으면 해감(該監)에 있는 제복을 편리한 대로 착용토록 하라. 홀(笏)은 4품 이상은 상아를 쓰고, 5품 이하는 나무를 쓰는 것으로 정제(定制)하도록 하라."
하였다.  【구제(舊制)의 면복(冕服)에는 강사포(絳紗袍)의 대대(大帶)에 매는 소대(小帶)는 심청색(深靑色)의 실로 땋은 띠를 사용했는데, 숙종 39년 대대를 이정(釐正)할 때 고례(古例)에 의거하여 심청색 광다회(廣多繪)를 씻고, 후수(後綬)는 중국의 홍화금(紅花錦)을 썼다. 금상(今上) 22년에 문단(紋緞)을 금한 뒤 상의원으로 하여금 적(赤)·청(靑)·현(玄)·표(縹)·녹색(綠色)의 비단으로 짜서 만들었으나 무늬는 없었다. 대저 15조(條)의 하단(下端)에 망(網)을 드리우고 이어서 후수(後綬)에 짜서 만든 실로 맺어서 나누어 3단(段)을 하였다.】


【태백산사고본】 42책 57권 38장 B면【국편영인본】 43책 97면
【분류】의생활(衣生活) / 왕실-국왕(國王)

 

4월 15일 무술

개기 월식(皆旣月食)이 있었다.

 

수찬 박춘보(朴春普)가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신이 듣건대, 지난번에 연신(筵臣) 중에 황조(皇朝)의 각신(閣臣)이 섭향고(葉向高)의 주소(奏疏)를 예람(睿覽)하실 것을 우러러 청한 사람이 있어 이미 본관(本館)에서 3책을 베껴 올렸다고 합니다. 아! 제왕(帝王)이 나가 다스리는 근본과 성현(聖賢)께서 마음을 전한 법이 간책(簡冊)에 환히 실려 있으니, 만기(萬機)를 돌보시는 여가에 취해다 강(講)하고 열람하심이 어찌 책이 없음을 걱정하겠습니까? 그런데도 반드시 섭향고의 글을 올린 것은 도대체 무슨 뜻인지요? 신이 일찍이 그 선본(選本)을 가져다 살펴보다가 섭향고가 위충현(魏忠賢)의 일을 비호한 데 이르러 책을 덮고 깊게 한숨을 쉬며 그 충(忠)과 사(邪)를 어지럽히고 군청(君聽)을 현혹시킨 것에 대하여 통탄하였습니다. 그런데 저 섭향고란 사람은 자신이 대신(大臣)이 되어 비록 능히 선한 사람들을 부식(扶植)하여 한 가닥 공의(公議)는 못한다 할지라도, 유독 어찌하여 차마 역적 위당(魏璫)을 비호해 정의(正議)를 참구(譖搆)로 돌렸단 말입니까? 그 일생의 기량을 종합해 보건대, 권세가 무겁고 가벼운 사이에서 헤아려 보고, 음양이 드러나고 어두워질 즈음에 우물쭈물하였습니다. 따라서 그 문자(文字)에 드러난 입언(立言)과 지론(持論)은 세태를 따라 안배(安排)하고 구차하게 녹위(祿位)를 보전하려는 계책에서 나오지 아니한 것이 없습니다. 백년이 지난 뒤 그의 글을 보는 사람이면 팔을 휘두르고 침을 뱉으며 욕하지 아니함이 없습니다. 이 글을 전하께 권한 사람은 그 학식에 취한 것이 있었던 것입니까? 그 기절(氣節)에 취한 것이 있었던 것입니까? 아니면 세상에 드물게 서로 느낀 것이 따로 있었다는 것입니까?"
하니, 비답하기를,
"마땅히 하교하겠다."
하였다. 대개 원경하(元景夏)가, 섭향고의 지론이 공정(公正)하여 당의(黨議)가 괴격(乖激)하였을 즈음에 반드시 미륜(彌綸)·보합(保合)하고자 했던 일을 크게 칭송하면서 이어 그 주초(奏草)를 가져다 볼 것을 청하자 임금이 옥당(玉堂)으로 하여금 초하여 베껴 들이게 한 때문에, 박춘보가 이런 상소를 했던 것이었다. 원경하가 또 상소하여 대변(對辯)하기를,
"섭향고는 동림당(東林黨)138)  의 사람으로 재차 상소하여 양연을 구하다가 마침내 위충현의 비위를 거스르게 되자 뜻을 결정하고 물러나 돌아갔습니다. 과연 만약 섭향고가 위충현을 비호한 것이 유신(儒臣)의 말과 같다면, 어찌하여 그런 상소가 있었겠습니까? 그가 선한 사람들을 보전하고 협공(協恭)으로 나라를 다스린 것을 비록 유신은 깊이 미워하지만, 천신(賤臣)은 깊이 사모하고 있습니다. 만약 ‘섭향고의 주소(奏疏)가 외잡(猥雜)하여 바르지 아니하다.’고 한다면, 천감(天監)·점장록(點將錄) 등의 요서(妖書)가 섭향고를 무함한 것이 극도에 달한 것입니다. 유신은 장차 그것을 높여 믿겠다는 것인지요?"
하니, 비답하기를,
"내 뜻도 이와 같다. 장차 하교하려 했던 것은 대개 이것이다."
하였다.

 

4월 16일 기해

임금이 경회루(慶會樓)의 연못을 띄우고 준설토록 하라고 명하였다. 가뭄을 안타깝게 여겼기 때문이었다.

 

관학 유생(館學儒生) 정취하(鄭就河) 등이 상소하여 전 판서(判書) 이재(李縡)를 돈소(敦召)하고 찬선(贊善) 박필주(朴弼周)를 소환(召還)할 것을 청하니, 비답하기를,
"마땅히 유의하겠다."
하였다.

 

4월 20일 계묘

임금이 대신(大臣)과 비국 당상(備局堂上)을 인견(引見)하였다. 임금이 박춘보(朴春普)가 상소로 섭향고(葉向高)의 일을 논한 것을 가지고 좌의정 송인명(宋寅明)에게 물으니, 송인명이 말하기를,
"박춘보가 이처럼 상소하여 배척한 것은 대개 ‘탕평(蕩平)’이란 두 글자를 미워하기 때문입니다."
하였다. 우의정 조현명(趙顯命)이 말하기를,
"수백 년 전의 섭향고도 오히려 조제론(調劑論)을 주장했다는 이유로 지금 물어뜯는 판인데, 하물며 살아 있는 원경하(元景夏)야 말해 무엇하겠습니까?"
하자, 송인명이 말하기를,
"정우량(鄭羽良)·원경하·오광운(吳光運)·서종옥(徐宗玉)의 무리처럼 문학(文學)이 있는 사람을 때때로 와내(臥內)에 불러 경의(經義)를 강론(講論)하신다면, 마땅히 도움되는 바가 있을 것입니다."
하였다.

 

달마다 고(故) 충신 이봉상(李鳳祥)·남연년(南延年)·홍임(洪霖)의 처에게 늠료(廩料)를 하사하라고 명하였다.

 

좌의정 송인명(宋寅明)이 아뢰기를,
"동선(洞仙)·효성(曉星) 두 고개는 곧 서로(西路) 관방(關防) 중에서 으뜸가는 요처(要處)입니다. 종전에는 수목(樹木)이 빽빽하였는데, 요사이 점차 민둥산이 되어가고 있으니, 양도(兩道)의 병사(兵使)를 모두 종중 추고하고 따로 금양(禁養)의 뜻을 엄히 신칙함이 마땅하겠습니다만, 고개의 막힘이 그 험준함을 잃는 것은 전적으로 화전(火田)의 폐해에 연유하고 있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수령이 화전을 금하지 않는 것이 더욱 놀랍다. 묘당(廟堂)에서 관문(關文)을 보내 엄히 신칙하고, 수목은 따로 더욱 금양토록 하라."
하였다.

 

병조 판서 서종옥(徐宗玉)이 아뢰기를,
"대사례(大射禮) 때의 활을 쏘는 짝은 마땅히 품정(稟定)해야 할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대신(大臣)은 정1품 종반(宗班)과 짝이 되고, 그 이하는 문신(文臣)과 무신(武臣)이 차례로 짝이 되는 것이 마땅할 듯하다."
하였다. 서종옥이 말하기를,
"본래의 예(禮)에는 지위가 낮은 사람이 지위가 높은 사람과 짝이 되게 하였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서 있는 차서(次序)에서 쏘되, 좌우의 활은 서로 바꾸어 짝이 되게 함이 마땅하다. 그리고 어사(御射)에 쓸 승시(乘失)139)  는 또한 마땅히 두석(豆錫)140)  을 사용하여 촉을 만들어야 할 것이다."
하였다. 송인명(宋寅明)이 말하기를,
"이조(吏曹)의 낭관(郞官)은 비록 8명으로 한정하나, 정관(政官)은 승품(陞品)을 도모하는 의논에 구애되어 행공(行公)하지 아니하는 사람으로 구차하게 8명이란 숫자를 채우고 있는데, 모두 승품으로 서울에서 행공하는 사람이 아주 적습니다. 이후로는 8명이란 숫자를 행공하는 사람으로 계산하고 절대 승의(陞擬)하지 말며, 또 승품은 반드시 수당(首堂)의 승의한다는 뜻을 기다리도록 정식(定式)함이 마땅하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옳게 여겼다. 또 하교하기를,
"친경(親耕) 때 청우(靑牛)는 푸른 색으로 염색한 무명을 입히고 있다. 그런데 종묘(宗廟)에 청개(靑盖)·홍개(紅盖)란 것이 있으니, 이른바 청개란 곧 흑개(黑盖)이다. 《오례의(五禮儀)》 청우조(靑牛條)는 흑우(黑牛)로 주(註)를 달아 넣는 것이 옳다."
하였다.

 

4월 22일 을사

서명빈(徐命彬)을 대사헌으로, 윤득징(尹得徵)을 집의로, 이광익(李光瀷)을 지평으로, 민백행(閔百行)을 헌납으로, 조명채(曹命采)를 정언으로, 박문수(朴文秀)를 지돈녕(知敦寧)으로, 김상적(金尙迪)을 수찬으로, 이태중(李台重)을 부교리로, 심봉양(沈鳳陽)을 경상 좌수사(慶尙左水使)로 삼았다.

 

4월 24일 정미

밤에 화성(火星)이 토성(土星)을 범하였다.

 

4월 26일 기유

부응교 정실(鄭宲)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신은 한억증(韓億增) 무리가 죄를 입은 일에 대해 개연스레 여기는 바 있습니다. 전하께서는 그때 양사(兩司)의 여러 신하들이 이미 말하지 않았다 하여 죄주셨으니, 저 유신(儒臣)이 말을 하고서 죄를 얻었던 것은 무엇 때문인지요? 꼭같이 한 가지 일이건만 말하거나 말하지 않거나 모두 죄과(罪過)가 되었으니, 정령(政令)의 어긋남이 이보다 더할 수 없습니다. 이는 다름이 아닙니다. 다만 말이 한억증의 무리에게서 나와 쉽사리 의심을 받았기 때문일 뿐입니다.
대저 민창수(閔昌洙)의 상소는 선부(先父)와 망제(亡弟)의 유지(遺志)를 추념(追念)하여 한번 성명(聖明)의 세상에 진달해 드러내고자 한 것에 불과할 뿐이었습니다. 죄가 있고 없고는 오로지 성감(聖鑑)이 위에 있는데, 그때의 대신(大臣)이 전석(前席)에서 생사를 헤아리지 않고 다투며 죄를 성토(聲討)할 것을 청했던 것은 도대체 무슨 뜻이었는지요? 그날의 거조는 가히 무엄하다 하겠습니다. 대신의 본래 언의(言議)로 보자면, 이른바 ‘요(堯)가 전하고 순(舜)이 받는다 해도 능히 정대(正大)·광명(光明)할 수 없다.’는 등의 말을 방자하게 연중(筵中)에서 진달하였으니, 그가 민창수를 마음대로 하고 군부(君父)를 을러대었던 것은 족히 괴이할 것이 없습니다.
아! 고(故) 봉조하(奉朝賀) 민진원(閔鎭遠)은 임금이 사랑하고 나라를 근심해 지극한 정성으로 답할 것을 생각하였으니, 참으로 이른바 사직지신(社稷之臣)입니다. 그 충성한 자취를 살펴보건대, 비록 십세(十世)가 지난다 하더라도 용서할 만합니다. 지금 그 두 아들이 잇따라 죽고 오직 민창수만이 살아 있는데, 또 헤아릴 수 없는 죄에 빠졌으니, 나라 사람들이 지금까지 슬퍼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어찌 성상께서 마땅히 깊이 생각하실 곳이 아니겠습니까?
홍계희(洪啓禧)의 일과 같은 경우, 그 장죄(贓罪)를 조사한 허실(虛實)은 다른 사람이 알 수 있는 바 아니나, 이번에 추문(推問)한 여러 사람은 단지 박문수(朴文秀)가 신임하는 사인(私人)일 뿐입니다. 한번 평문(平問)141)  하고 대충대충 마무리지었으니, 사체(事體)의 구차스러움은 전에 없던 바입니다. 그 밖에 박문수가 능히 스스로 변명하지 못한 것에 진실로 많은 단서가 있습니다. 3필의 준마를 금법(禁法)을 무릅쓰로 선물로 주고도 끝내 죄책(罪責)이 없었던 것은 받은 사람이 대신(大臣)이어서 그냥 묻지 않았던 소치가 아니겠습니까? 국가의 형정(刑政)의 잘못이 모두 이와 같으므로 신은 그윽이 근심하고 있습니다."
하였다. 상소가 들어가자 우의정 조현명(趙顯命)이 금오문(金五門) 밖에서 대명(待命)하였으므로, 사관(史官)에게 전유(傳諭)하라고 명하였다. 이날 저녁 임금이 엄교(嚴敎)를 내려 정실을 대정현(大靜縣)으로 귀양보내도록 하고, 또 하교하기를,
"오늘 안으로 만약 한강을 건너지 못한다면 금오랑(金吾郞)을 마땅히 일체로 논죄(論罪)하겠다."
하였다. 순식간에 칙교(飭敎)가 무릇 여섯 차례나 내려졌는데, 원례(院隷)가 전하여 외치느라 소리가 궐중(闕中)을 진동시키니, 실색(失色)하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

 

헌부 【지평 이광익(李光瀷)이다.】 에서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일신 현감(日新縣監) 박필중(朴弼重)은 탁핵을 당한 뒤 계략을 써서 비난을 무릅쓴 채 부임하였습니다. 영암 군수(靈岩郡守) 임진하(任震夏)의 경우는 빈민(貧民)들이 치우치게 고통을 받고, 어호(漁戶)들은 소리내어 근심을 말하고 있습니다. 청컨대 모두 파직시키소서."
하니, 모두 아뢴 대로 하게 하였다.

 

헌납 권신(權賮)이 상소하여, 사마광(司馬光)이 ‘흉년에는 예(禮)를 감함’을 논한 차자를 가져다 보고 깊이 유념해 시행함으로써 견휼(蠲恤)의 방도를 다할 것을 청하니, 비답하기를,
"마땅히 헤아려 하교하겠다."
하였다.

 

4월 28일 신해

헌부에서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우의정 조현명(趙顯命)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신이 지리하게도 떠나지 아니하여 위욕(危辱)이 또 이르렀습니다. 갓끈이나 발을 씻음은 모두 창랑(滄浪)이 취한 것이니, 도리어 누구를 나무라겠습니까? 정실(鄭宲)의 상소에 ‘군부(君父)를 을러댔다.’는 말이 있는데, 이것은 민창수(閔昌洙)가 이미 늘어놓았던 것의 추구(蒭狗)142)  입니다. 다만 ‘요(堯)는 전하고 순(舜)은 받았다.’고 운운한 것은 곧 달리 만들어낸 새로운 이야기로, 드러내 놓고 신의 집안을 아주 멸망시키고자 한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이 뜻에 대해서는 대훈(大訓) 가운데 ‘정대(正大)한 전수(傳受)와 무지개와 일월(日月)을 가리고자 한다.’는 등의 하교에 이미 해와 별처럼 환히 게시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그는 대훈을 쓸모없는 것으로 여겨 읽으려 들지 않았으므로, 이런 것이 있는 줄 알지 못한 채 신을 죄주려 했으니, 그 가소로움이 많이 보여 족히 변명할 것도 없습니다. 더욱이 지금 처분이 엄정(嚴正)하여 다시는 남은 유감이 없습니다. 하지만 신은 대신(大臣)이 되어 4년 동안 한 가지 일도 성치(聖治)를 돕거나 두터운 은택에 보답한 것 없이 매년 서명(胥命)만 하니, 저자의 사람에게 부끄러울 뿐입니다. 아! 군부를 을러댐이 어떤 제목(題目)입니까? 그런데 한번 하고 두번 하면서 이처럼 겸제(箝制)하려 합니다. 벼슬을 탐해 연연하면서 머뭇거리고 일찍 그칠 줄을 알지 못한다면 사람들은 반드시 신이 먹다 남은 것을 먹으려 하지 않을 것입니다."
하고, 곧 성 밖으로 멀리 나가니, 비답하기를,
"이번의 일에 이처럼 화를 내니, 경을 위해 개연스럽게 생각한다. 안심하고 사직하지 말며 즉시 성으로 들어오라."
하고, 이어서 사관(史官)에게 전유(傳諭)하여 함께 들어오도록 하라고 명하였다.

 

4월 29일 임자

가뭄이 갈수록 심해졌다. 예조에서 기우제를 지낼 것을 계청(啓請)하였는데, 때마침 비가 왔으므로 우선 정지하라고 명하였다.

 

좌의정 송인명(宋寅明)이 차자를 올렸는데, 대략 이르기를,
"신은 정실(鄭宲)의 상소에 대해 너무나 황공하고 두려워하는 것이 있습니다. 작년 민창수(閔昌洙)의 일에 대해 신이 맨먼저 죄줄 것을 청하였고, 요상(僚相)은 그것을 이었던 것이니, 지금 닥친 위욕(危辱)에 처의(處義)함은 이동(異同)이 없어야 마땅할 것입니다. 그리고 박문수(朴文秀)에 관한 조사를 마무리지었을 때 신이 또 외람되게 전석(前席)에 입시(入侍)하여 우러러 처분을 도왔으니, 대충대충 구차하게 처리했다는 지척(指斥)에 대해 신은 또한 죄가 있습니다,"
하고, 끝에 또 말하기를,
"가뭄이 혹심하니, 기우제를 지내는 일을 천천히 때를 기다릴 수 없습니다. 즉일로 거행함이 마땅합니다. 그런데 한편으로는 기우제를 지내고 한편으로는 대사례(大射禮)의 습의(習儀)를 행한다면, 또한 마음을 한 가지 일에 기울여 정성을 바치는 도리가 아닐 것입니다. 신은 습의는 잠시 물려서 행함이 마땅하다고 생각합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이미 우상(右相)에게 유시하였다. 경이 무슨 개의할 것이 있는가? 진달한 바 일은 비가 올듯올듯 하면서 비가 내릴 기미가 여전히 있어서 이미 정원(政院)에 하교하였다."
하고, 이어서 사관(史官)에게 명하여 전유(傳諭)하게 하였다.

 

병조 판서 서종옥(徐宗玉)이 상소하여 기우제를 지내고 대사례의 습의를 하루전으로 물려 행할 것을 청하니, 비답하기를,
"이미 대신(大臣)에게 내린 비답에 유시하였다."
하였다.

 

4월 30일 계축

임금이 영화당(暎花堂)에 거둥하여 대사례의 습의를 관람하였다. 예조 당상을 입시(入侍)케 하라고 명하여, 대사례 때의 악장(樂章)은 여씨(呂氏)가 추우장(騶虞章)의 뜻을 논한 것에 의거해 1장(章)을 1절(節)로 하여 미리 익히게 하고, 웅후(熊帿)와 미후(麋帿) 또한 고례(古禮)에 의거해 3정(正)·2정의 제도를 쓰도록 의주(儀註)를 강정(講定)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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