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4월 2일 을묘
하교하기를,
"대사례(大射禮)가 끝난 뒤 다음날 진하(陳賀)하는 것이 고례(古例)라 처음 시행할 것을 명했던 것이고, 자리에 나아가 예(禮)를 행하니, 이 마음이 갑절이나 된다. 하지만 위로 선조(先祖)를 추념(追念)하고 아래로 백성을 생각건대, 무슨 마음으로 진하를 받겠는가? 그만 두도록 하라. 제도(諸道)의 전문(箋文)은 탄일(誕日)의 예(例)에 의거해 봉입(捧入)토록 하라."
하였다.
삼각산(三角山)·목멱산(木覓山)·한강(漢江)에서 1차 기우제를 설행(說行)하라고 명하였다.
대사헌 서명빈(徐命彬)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대사례(大射禮)는 국조(國朝) 이래 두 번 있는 성대한 행사입니다만, 오늘날은 아마도 그 때가 아닌 듯합니다. 그러나 지금은 기일이 이미 박두하였고 많은 선비들이 함께 모였으니, 형편상 중간에 그만둘 수 없겠습니다. 하지만 전(殿)에 임하여 진하(陳賀)를 받는 것은 아마도 재앙을 만나 반성하고 몸을 닦는 도리에 어긋날 듯합니다. 만약 전하께서 삼가 깊이 생각하셔서 미리 정지하도록 하심으로써 근심하고 편안하지 못하다는 뜻을 보이시고, 또 유사(有司)에게 명하시어 빨리 기우제를 지내도록 하신다면, 저 밝게 강림하는 하늘이 아마도 그 정성에 감응(感應)하는 효험이 있을 것입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진달한 바에 대해 이미 하교하였다."
하였다.
임금이 대신(大臣)과 비국 당상(備局堂上)을 인견하였다. 좌의정 송인명(宋寅明)이 말하기를,
"청황(淸皇)이 국경에 임함은 중대한 일입니다. 대신이 마땅히 심양(瀋陽)에 가야 할 것이니, 신이 가기를 청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우규(右揆)는 정세(情勢)가 있으니, 왕역(往役)에서 펼 수 있을 것이다."
하였다. 송인명이 또 서장관(書狀官)을 가릴 것을 청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이미 부사(副使)가 없으니, 서장관을 또한 가려서 보냄이 마땅하다."
하였다.
하교하기를,
"이번의 대사례(大射禮)는 곧 2백 년 이후로 처음 있는 일이니, 중외(中外)가 함께 함이 마땅하다. 한량(閑良)은 이미 서울에 모두 모였으니, 당연히 응시(應試)할 것이나, 양도(兩都) 및 제도(諸道)의 출신(出身) 장교(將校)는 도신(道臣)·수신(帥臣)으로 하여금 일순(一巡)으로 시취(試取)케 하되 수석을 차지한 자는 장문(狀聞)하고, 그 다음은 각각 그 도(道)에서 등급을 나누어 시상케 하라."
하였다.
임금이 제언 당상(堤堰堂上) 정우량(鄭羽良)에게 이르기를,
"후원(後苑)의 연지(蓮池)가 바야흐로 가뭄을 당하였으나 그래도 수근(水根)이 있어 또한 능히 갈고 씨뿌릴 수가 있다. 가까운 데서 비롯하여 먼 데에 이르는 법이니, 그 제언의 이로움을 미루어 알 만하다. 경은 힘쓰라."
하고, 제도(諸道)의 제언에 대해 신칙하였다.
조현명(趙顯命)을 심양 문안사(瀋陽問安使)로, 김상적(金尙迪)을 서장관(書狀官)으로, 이대원(李大源)을 장령으로, 송창명(宋昌明)·남혜로(南惠老)를 정언으로, 이광운(李光運)을 집의로, 허옥(許沃)을 사간으로, 신사철(申思喆)을 공조 판서로 삼았다.
우의정 조현명이 재차 상소하여 상직(相職)을 해면(解免)시켜 줄 것을 바라고, 또 말하기를,
"정실(鄭宲)은 민창수(閔昌洙)를 위해 억울함을 하소연하였으니, 장차 대훈(大訓)을 어디에 두려는 것입니까? 그가 다투어 이기고자 하는 사람이 단지 신에게만 있을 뿐이 아닙니다."
하니, 임금이 비답을 내려 면유(勉諭)하였다.
하교하기를,
"정실(鄭宲)의 상소는 당심(黨心)에서 나온 것인데도 대각(臺閣)에서 말하는 사람이 없었으니, 이목(耳目)의 신하를 장차 어디에 쓸 것인가?"
하고, 이어서 서울에 있는 대관(臺官)으로서 말하지 않았던 자들을 삭직(削職)하라고 명하였다. 또 해부(該府)에 엄하게 신칙하여 정실을 배도(倍道)로 적소(謫所)에 도착시키도록 하고, 배소(配所)에 도착한 날 또한 장문(狀聞)하게 하였다.
윤4월 4일 정사
임금이 ‘고전(古典)을 법식(法式)으로 준행하니, 대사례(大射禮)가 이루어졌도다. 문(文)·무(武)를 시취(試取)해 현능하고 빼어난 인재를 등용하니, 예(禮)는 당연히 경하(慶賀)할 바로다.[式遵古典 大射禮成 文武試取 賢俊登庸 禮當慶]’라고 한 20글자를 정원(政院)에 써서 내리고, 예조(禮曹)로 하여금 문무(文武) 창방(唱榜) 때 치사(致詞)의 쓰임에 대비하게 하였다.
가뭄의 기운이 점차 심해진다 하여 재차의 기우제를 지내라고 명하였다.
윤4월 5일 무오
사간 허옥(許沃)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며칠 전 정실(鄭宲)의 상소는 오로지 구무(構誣)만을 일삼고 속으로 무한한 화심(禍心)을 감추어 두었으니, 이것이 전하께서 엄하게 견척(譴斥)을 더하고 심지어 섬에 유배하라는 명이 있게 된 까닭입니다. 하지만 여러 대간(臺諫)들이 하석(下石)143) 을 꺼려 애초 제기하여 논하지 않았던 것이 무슨 큰 죄이길래 갑작스레 삭직·파직의 율(律)을 베푸시는 것입니까?"
하니, 비답하기를,
"눈치만 보는 무리들에게는 그 처분 또한 참작한 것이다."
하였다.
윤4월 7일 경신
임금이 새벽에 태학(太學)에 나아가 작헌례(酌獻禮)를 거행하고, 이어 명륜당(明倫堂)에 거둥하여, ‘희우관덕(喜雨觀德)’으로 글제를 내어 시사(試士)하라고 명하였다. 이때 바야흐로 대단히 가물었는데, 이날 밤에 비가 내려 그 기쁨을 표시한 것이었다. 아침이 되어 비가 개이자, 임금이 하련대(下輦臺)에 거둥하여 대사례(大射禮)를 거행하였다. 승시(乘矢)를 쏘아 세번 맞혔는데, 시사(侍射)한 사람은 밀창군(密昌君) 직(樴) 등 30명이었다. 짝을 지어 활쏘기를 마치자, 그 맞힌 여부에 따라 차등 있게 상과 벌을 내렸다. 그리고 과녁(貫革)으로 거자(擧子)를 시험하여 60명을 뽑았다. 고시(考試)를 마치고, 한광조(韓光肇)·이환(李渙)·박성원(朴盛源)·신회(申晦)·김양택(金陽澤)·최태형(催台衡) 등 6인을 뽑아 즉일로 방방(放榜)하였다.
대사례(大射禮)의 의절(儀節)은 《오례의(五禮儀)》와 《대명회전(大明會典)》 등의 책을 상호 참고하여 정하였으며, 모두 예재(睿裁)에 품(稟)하였다.
대사마(大司馬)가 국자장(國子長)144) ·예관(禮官)과 함께 태학(太學)에서 적절한 땅을 골라 반수교(泮水橋) 서쪽에 후단(帿壇)을 쌓았는데, 사단(射壇)과의 거리는 90보(步)이다. 【웅후단(熊帿壇)은 조금 북쪽이고 미후단(麋帿壇)은 조금 남쪽인데, 그 사이는 10보의 차이다.】 군기시(軍器寺)에서는 예기척(禮器尺)을 만들어 그 척수(尺數)에 의해 웅후·미후를 만들고 【웅후는 곧 대후(大帿)이고 미후는 시사인(侍射人)이 쏘는 것이다. 웅후의 색은 붉고 미후의 색은 푸르다.】 표적을 그 가운데 두되, 곰의 머리를 그리고, 【미후의 경우는 사슴 머리를 그린다.】 둘레에다 삼정(三正)을 그려서 【주색(朱色)·백색(白色)·창색(蒼色)의 차례다. 미후는 2정으로 하는데, 백색·창색을 없애고 주색·녹색(綠色)으로 한다.】 붉은 대나무와 붉은 줄로 단상(壇上)에 벌려서 건다. 【미후는 푸른 대나무와 푸른 줄로 한다.】 그리고 핍(乏)은 동서(東西) 각 10보에, 【화살이 옆으로 달림을 방지하는 것이다.】 홍전문(紅箭門)은 사단 아래 동서 각 40보에, 【사원(射員)의 출입하는 것을 분리해 둔 것이다.】 복(福) 다섯은 사단 아래 조금 서쪽에 설치하였다. 【맞힌 화살을 꼽는 것이다.】 시사(侍射)하는 사람이 장차 활을 쏠 자리는 서쪽 계단 앞에서 동향(東向)하여 북쪽이 위가 되게 설치하고, 병조 판서의 자리는 동쪽 계단 앞에서 서향으로 설치하였다. 시사하는 사람과 성균관 대사성 이상 활쏘는 자리는 사단 위에, 3품 이하의 활쏘는 자리는 사단 아래 있는데, 모두 서쪽에 가까우며 남향하여 가로로 펼쳐져 있었다. 집사관(執事官)과 시사하는 사람, 종친·백관의 절하는 자리는 사단 아래 동서로 설치하고, 【문관(文官)은 동쪽에, 종친과 무신(武臣)은 서쪽에, 시사하는 사람은 서반(西班) 앞에 있다.】 획자(獲者)의 【곧 화살을 줍는 자이다.】 자리는 동서 핍(乏)의 안쪽에다 서로 마주 보도록 설치하였다. 훈련원(訓鍊院)의 관원은 여섯 빛깔의 기(旗)를 가지고 핍(乏)의 동서 양쪽 사이에 있으며, 시사하는 사람이 동쪽을 맞히면 청색 기를 들었다. 각각 그 방색(方色)으로 하되, 홍심(紅心)을 맞히면 홍색 기를, 맞히지 못하면 채색(采色) 기를 들고 정고(鉦鼓)는 사용하지 않았다. 상으로 내릴 물건은 사단 아래 조금 동쪽에 진열해 두었다. 【제용감(濟用監)에서는 표리(表裏)를 관장하고 군기시에서는 궁시(弓矢)를 관장한다.】 벌준(罰尊)을 올려놓은 탁자는 사단 아래 조금 서쪽에 두되, 점(坫)을 설치하여 치(鱓)를 올려놓고 탁(卓)의 서쪽에 풍(豊)을 두었다. 【점·치·풍은 공조(工曹)에서 올리고, 술은 주원(廚院)에서 단술[醴]로 하였다.】 어용(御用)의 궁탁(弓卓)·시탁(矢卓)·결습탁(決拾卓)은 각 하나를 사단 위 조금 동쪽에 서향으로 설치했는데, 모두 함에 담아 놓았다. 상호군(上護軍)은 【무신 정2품이다.】 헌가(軒架)를 받들어 가지고 홍전문 안쪽 넓은 문 중앙의 시도(矢道)에 두었으며, 시사하는 사람은 활과 화살을 갖추어 서쪽 문 밖에서 기다렸다. 【병조 정랑(兵曹正郞)과 차지(次知)가 나란히 서 있었다.】 전의(典儀)가 배설(排設)을 마치자 임금이 익선관(翼善冠)과 곤룡포(袞龍包)를 갖추고 단소(壇所)에 거둥했고 협률랑(協律郞)이 끓어앉았다 부복(復伏)했다가 일어나서 휘(麾)를 들어 음악을 연주하자 헌가의 고취(鼓吹)도 아울러 연주하였다. 임금이 어좌(御座)에 오르고 나서 찬의(贊儀)가 문무 백관에게 사배(四拜)할 것을 창(唱)하자 음악을 그쳤다. 통례(通禮)가 앞으로 나아가 끓어앉아 유사(有司)가 이미 갖추어 졌음을 아뢰자, 상호군 김성응(金聖應)이 결습함(決拾凾)을 받들고 어좌 앞으로 나아가고, 박찬신(朴纉新)은 궁함(弓凾)을, 구성임(具聖任)은 시함(矢凾)을 받들고 차례로 나아갔다. 획자(獲者) 한 사람은 깃발을 들은 후(侯)를 등진 채 북향하여 서고, 시사하는 사람은 모두 활과 화살을 잡고 그 위치로 들어섰다. 병조 판서 서종옥(徐宗玉)이 앞으로 나아가 끓어앉아 ‘획자를 후에서 조금 물러나 있도록 명할 것’을 아뢰고, 또 나아가 끓어앉아 ‘북을 칠 것’을 아뢰자, 훈련 정(訓鍊正)이 북을 세 번 쳤다. 획자 한 사람은, 북소리에 맞추어 후를 등졌던 자가 핍(乏)을 둔 곳으로 도로 달려가고 상호군이 결습(決拾)을 올렸다. 임금이 결습을 마치자 통례가 꿇어앉아 어좌에서 내려올 것을 계청(啓請)하였다. 임금이 내려와 사위(射位)에 서자 음악을 연주하였다. 상호군이 활을 올리자 임금이 활을 쥐고 시험삼아 당겼다. 상호군이 첫 번째 화살을 올리자 음악이 제4절에 이르렀다. 【1장(章)을 1절(節)로 한다.】 상호군이 화살을 쏠 것을 아뢰자, 임금이 첫 번째 화살을 쏘았다. 상호군이 맞혔음을 고하자, 음악의 1절이 끝났다. 두 번째 화살을 쏘자 맞혔음을 고했고, 세 번째 화살은 위로 날아 갔음을 고했으며, 네 번째 화살은 줄을 맞추었다. 서종옥이 말하기를, "예(禮)에는 맞히게 되면 맞혔음을 고하고 음악을 그쳤으며, 웅후를 거두고 미후를 펼쳐 걸었습니다." 하니, 임금이 활을 놓았다. 상호군이 활을 받아 탁자에 두었다. 임금이 결습을 풀자 상호군이 또 받아서 탁자 위에 두었다. 화살을 줍는 관원이 어시(御矢)를 받들어 중간 계단 아래로 달려가자, 상호군이 받아 처음과 같이 가로로 받들어 두었다. 음악을 연주하자, 시사하는 사람이 짝을 지어 나아가 사위(射位)에 올랐다. 부복했다가 일어나 두 짝이 서로를 향해 읍하고 비로소 활을 쏘았으며, 쏘기를 마치자 또 서로를 향해 읍하였다. 그리고는 부복했다가 일어났고 물러나 제자리로 돌아갔다. 화살을 줍는 사람이 맞힌 화살을 복(福)에다 얹어놓으니, 병조 판서가 맞힌 사람의 성명과 화살의 수를 가지고 맞힌 사람에게는 상을, 맞히지 못한 사람에게는 벌을 줄 것을 계청(啓請)하였다. 병조 정랑이 맞힌 사람의 직함과 성명을 외쳐 동쪽 계단 아래 서향하여 서게 하고, 맞히지 못한 사람은 서쪽 계단 아래 동향으로 서게 하였다. 이에 음악을 연주하자 사배(四拜)하였다. 음악이 그치자 군기시에서 맞힌 사람에게 상을 매겼는데, 맞힌 사람은 활을 쥐고 들어갔다. 네 대를 맞힌 사람은 표리(表裏) 각 하나, 세 대를 맞힌 사람은 활 하나 화살 1백 개, 하나를 맞힌 사람은 표(表) 하나, 두 대를 맞힌 사람은 활 하나를 상으로 주었다 맞히지 못한 사람에게는 벌을 주었는데, 사옹원(司饔院)의 관원이 사준(沙尊)에다 단술을 가득 담아 작(勺)으로 치(鱓)에 따루어 풍(豊) 위에 두니, 맞히지 못한 사람들이 활을 풀어 팔에 걸고 들어가 끓어앉고는 치를 잡고 서서 마신 뒤 치를 풍 옆에 두었다. 차례로 나아가 마시기를 마치자, 상을 받은 사람들이 각각 그 물건을 어깨 위에 걸었다. 음악을 연주하자 사배(四拜)하였고, 음악이 그치자 물러나 제자리로 돌아갔다. 예(禮)가 끝나자 임금이 예문 제학(藝文提學) 원경하(元景夏)에게 기문(記文)을 지어 그 사실을 서술하고 명륜당에다 걸라고 명하였다. 이어서 사단(射壇)을 헐지 말아서 후세에 보여주게 하였다.
【태백산사고본】 42책 57권 42장 B면【국편영인본】 43책 99면
【분류】왕실-의식(儀式) / 군사-병법(兵法)
[註 144] 국자장(國子長) : 성균관 대사성.
전의(典儀)가 배설(排設)을 마치자 임금이 익선관(翼善冠)과 곤룡포(袞龍包)를 갖추고 단소(壇所)에 거둥했고 협률랑(協律郞)이 끓어앉았다 부복(復伏)했다가 일어나서 휘(麾)를 들어 음악을 연주하자 헌가의 고취(鼓吹)도 아울러 연주하였다. 임금이 어좌(御座)에 오르고 나서 찬의(贊儀)가 문무 백관에게 사배(四拜)할 것을 창(唱)하자 음악을 그쳤다. 통례(通禮)가 앞으로 나아가 끓어앉아 유사(有司)가 이미 갖추어 졌음을 아뢰자, 상호군 김성응(金聖應)이 결습함(決拾凾)을 받들고 어좌 앞으로 나아가고, 박찬신(朴纉新)은 궁함(弓凾)을, 구성임(具聖任)은 시함(矢凾)을 받들고 차례로 나아갔다. 획자(獲者) 한 사람은 깃발을 들은 후(侯)를 등진 채 북향하여 서고, 시사하는 사람은 모두 활과 화살을 잡고 그 위치로 들어섰다. 병조 판서 서종옥(徐宗玉)이 앞으로 나아가 끓어앉아 ‘획자를 후에서 조금 물러나 있도록 명할 것’을 아뢰고, 또 나아가 끓어앉아 ‘북을 칠 것’을 아뢰자, 훈련 정(訓鍊正)이 북을 세 번 쳤다. 획자 한 사람은, 북소리에 맞추어 후를 등졌던 자가 핍(乏)을 둔 곳으로 도로 달려가고 상호군이 결습(決拾)을 올렸다. 임금이 결습을 마치자 통례가 꿇어앉아 어좌에서 내려올 것을 계청(啓請)하였다. 임금이 내려와 사위(射位)에 서자 음악을 연주하였다. 상호군이 활을 올리자 임금이 활을 쥐고 시험삼아 당겼다. 상호군이 첫 번째 화살을 올리자 음악이 제4절에 이르렀다. 【1장(章)을 1절(節)로 한다.】 상호군이 화살을 쏠 것을 아뢰자, 임금이 첫 번째 화살을 쏘았다. 상호군이 맞혔음을 고하자, 음악의 1절이 끝났다. 두 번째 화살을 쏘자 맞혔음을 고했고, 세 번째 화살은 위로 날아 갔음을 고했으며, 네 번째 화살은 줄을 맞추었다. 서종옥이 말하기를,
"예(禮)에는 맞히게 되면 맞혔음을 고하고 음악을 그쳤으며, 웅후를 거두고 미후를 펼쳐 걸었습니다."
하니, 임금이 활을 놓았다. 상호군이 활을 받아 탁자에 두었다. 임금이 결습을 풀자 상호군이 또 받아서 탁자 위에 두었다. 화살을 줍는 관원이 어시(御矢)를 받들어 중간 계단 아래로 달려가자, 상호군이 받아 처음과 같이 가로로 받들어 두었다. 음악을 연주하자, 시사하는 사람이 짝을 지어 나아가 사위(射位)에 올랐다. 부복했다가 일어나 두 짝이 서로를 향해 읍하고 비로소 활을 쏘았으며, 쏘기를 마치자 또 서로를 향해 읍하였다. 그리고는 부복했다가 일어났고 물러나 제자리로 돌아갔다. 화살을 줍는 사람이 맞힌 화살을 복(福)에다 얹어놓으니, 병조 판서가 맞힌 사람의 성명과 화살의 수를 가지고 맞힌 사람에게는 상을, 맞히지 못한 사람에게는 벌을 줄 것을 계청(啓請)하였다.
병조 정랑이 맞힌 사람의 직함과 성명을 외쳐 동쪽 계단 아래 서향하여 서게 하고, 맞히지 못한 사람은 서쪽 계단 아래 동향으로 서게 하였다. 이에 음악을 연주하자 사배(四拜)하였다. 음악이 그치자 군기시에서 맞힌 사람에게 상을 매겼는데, 맞힌 사람은 활을 쥐고 들어갔다. 네 대를 맞힌 사람은 표리(表裏) 각 하나, 세 대를 맞힌 사람은 활 하나 화살 1백 개, 하나를 맞힌 사람은 표(表) 하나, 두 대를 맞힌 사람은 활 하나를 상으로 주었다 맞히지 못한 사람에게는 벌을 주었는데, 사옹원(司饔院)의 관원이 사준(沙尊)에다 단술을 가득 담아 작(勺)으로 치(鱓)에 따루어 풍(豊) 위에 두니, 맞히지 못한 사람들이 활을 풀어 팔에 걸고 들어가 끓어앉고는 치를 잡고 서서 마신 뒤 치를 풍 옆에 두었다. 차례로 나아가 마시기를 마치자, 상을 받은 사람들이 각각 그 물건을 어깨 위에 걸었다. 음악을 연주하자 사배(四拜)하였고, 음악이 그치자 물러나 제자리로 돌아갔다. 예(禮)가 끝나자 임금이 예문 제학(藝文提學) 원경하(元景夏)에게 기문(記文)을 지어 그 사실을 서술하고 명륜당에다 걸라고 명하였다. 이어서 사단(射壇)을 헐지 말아서 후세에 보여주게 하였다.
각(閣)을 지어 대사례 활·화살과 제구(諸具)를 간직케 하라고 명하였다. 그리고 그 각의 이름을 ‘육일각(六一閣)’이라 했으니, 대개 활 쏘기는 육예(六禮)의 하나였기 때문이었다.
유엄(柳儼)을 대사헌으로, 이영복(李永福)을 지평으로, 유우기(兪宇基)를 헌납으로, 박필재(朴弼載)를 집의로, 김한철(金漢喆)을 동래 부사(東萊府使)로 삼았다.
윤4월 8일 신유
하교하기를,
"몇 백년 동안 없었던 법을 이미 거행하였으니, 경외(京外)에 어찌 다름이 있겠느냐? 오군문(五軍門)의 장교(將校)는 외방(外方)의 예에 의해 각각 그 군문에서 시사(試射)하되, 수석을 차지한 사람은 위에 보고하고 그 나머지는 시상하라."
하였다.
대사성 김상로(金尙魯)가 작헌(酌獻) 때의 집사(執事) 95명을 인솔해 와서 대령하니, 임금이 소견(召見)하고 성명을 물었다. 그리고 술과 안주로 대접했는데, 찬(饌)은 5품(品), 술은 세 순배였다. 대개 성묘조(成廟朝)의 그 다음날 궐중(闕中) 사람을 대접해 먹인 고사를 따른 것이었다. 그리고 서책(書冊)과 필묵(筆墨)을 하사했는데, 각각 차등이 있었으며, 이튿날에는 반제(泮製)를 설행하라고 명하였다. 묘당(廟堂)으로 하여금 대전(貸錢)을 구획(區劃)하여 반궁(泮宮)의 노복(奴僕)을 구휼하고 방역(坊役)에 동원되는 것을 엄하게 금하여 마구잡이로 침징(侵徵)당하는 폐단이 없도록 하라고 하였으니, 김상로의 청을 따른 것이었다.
윤4월 9일 임술
전정(殿庭)에서 시사(試士)하였다. 수석을 차지한 유학(幼學) 이정중(李廷重)은 직부 전시(直赴殿試)하게 하고, 강(講)에서 순통(純通)을 받은 이양태(李陽泰)·박상형(朴祥馨) 등도 또한 급제를 내리라고 명하였다.
윤4월 10일 계해
강화 유수(江華留守) 김시혁(金始㷜)이 상소하여 성을 쌓는 역사(役事)에 있어서 벽돌로 쌓는 것의 편의(便宜)와 물력(物力)의 지탱하기 어려움을 진달하니, 묘당(廟堂)에 내려 품처(稟處)하게 하라고 명하였다.
지평 이영복(李永福)이 상소하여 말하기를,
"택궁(澤宮)145) 에서 덕(德)을 봄은 희주(姬周)의 아름다운 제도입니다. 전하께서는 이미 그 글을 행하셨는데, 유독 그 실상은 구하지 않으시는 것입니까? 청컨대 실심(實心)으로 실정(實政)을 행하고 실사(實事)를 조처하소서."
하니, 예사 비답을 내렸다.
구영(九營)의 수리를 정지시키라고 명하였으니, 가뭄의 재해 때문이었다.
삼차의 기우제를 지냈다.
이천보(李天輔)를 부응교로, 심확(沈鑊)을 교리로, 원경순(元景淳)을 수찬으로, 여광헌(呂光憲)을 헌납으로 삼았다.
임금이 대신(大臣)과 비국 당상(備局堂上)을 인견(引見)하였다. 봉상시(奉常寺) 제조(提調) 원경하(元景夏)가 연천 현감(漣川縣監) 신유한(申維翰)을 불러 《태상지(太常誌)》를 찬성(撰成)토록 할 것을 청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이에 앞서 신유한이 태상시의 판관(判官)으로 있을 때 도제조 김창집(金昌集)이 ‘본시(本寺)는 제향(祭享)을 맡은 중요한 곳인데도 무릇 향의(享儀)에 관계된 것에 소루함이 많다.’고 하여 신유한으로 하여금 《태상지》를 찬차(撰次)하게 하였으나, 미처 완성하지 못하고 있었으므로 원경하가 이런 청을 했던 것이니, 신유한은 영남(嶺南) 사람으로 문명(文名)이 있었다.
윤4월 14일 정묘
임금이 내장(內藏)하고 있던 《협기변방서(協紀辨方書)》를 관상감(觀象監)에 내리고, 《예악전서(禮樂全書)》를 장악원(掌樂院)에 내렸다.
윤4월 15일 무진
영의정 김재로(金在魯)가 병을 이유로 차자를 올려 해면(解免)을 원하였으나, 임금이 허락하지 않았다.
윤4월 16일 기사
주강(晝講)을 행하였다.
윤4월 17일 경오
임금이 병조 판서 서종옥(徐宗玉)·예조 참판 오광운(吳光運)·장악원 정(掌樂院正) 이연덕(李延德)을 소견(召見)하고, 오광운에게 대사례(大射禮)의 의궤(儀軌)를 찬출(纂出)해서 사국(史局)과 태학(太學)에 간직케 하라고 명하였다. 그리고 이연덕에게 악장(樂章)의 절(節)·박(拍)·성(成)의 구분에 대해 물으니, 이연덕이 능히 상세히 대답하지 못하였다. 서종옥이 말하기를,
"조금 전에 합문(閤門) 밖에서 태묘(太廟) 제향(祭享) 때의 홀기(笏記)를 보았더니, 12실(室)에 연주하는 악장이 크게 차이가 났습니다."
하였다. 이연덕이 말하기를,
"태묘는 영녕전(永寧殿)과 더불어 연주하는 악장이 서로 같습니다. 목조(穆祖)·익조(翼祖)·도조(度祖)·환조(桓祖) 4조(祖)는 태조(太祖)·태종(太宗)·원경 왕후(元敬王后), 열조(列祖) 및 선조(宣祖)의 악장과 모두 10장(章)이 되는데, 각실에 각각 1장을 연주하기 때문에 각실에 해당 실의 악장을 연주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또 목조·익조 양조(兩祖)의 악장을 11실과 12실에 돌아가면서 연주하고 있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사조의 악장을 영녕전에 씀은 마땅하다. 태묘의 경우, 태조의 공덕(功德)을 악장으로 만들어 12실에 두루 연주한다면 그래도 혹 옳겠지만, 사조와 열조의 악장을 해당 실에 연주하지 않고 차차 옮겨 다른 실에다 연주한다니, 참으로 이상하다."
하였다. 서종옥이 말하기를,
"이는 참으로 흠전(欠典)입니다. 듣건대, 일찍이 묘악(廟樂)의 이정(釐正)을 청하였다 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이미 그 잘못을 알았다면 속히 고쳐야 마땅하다. 대신(大臣)과 유신(儒臣)에게 널리 물어 이정하겠다."
하고, 이어서 하교하기를,
"이미 각실의 악장이 있다면 각실에는 의당 해당 실의 악장을 써야 할 것이다. 만약 각실에서 각 악장을 쓰는 것을 지리하고 번거롭다고 생각한다면, 악장 가운데 영조의 악장이 있으니, 단지 이것을 돌아가며 12실에 연주한다면 옳을 것이다. 그런데 지금은 그렇지 아니하여, 사조의 악장을 영녕전과 태묘에 두루 연주하니, 제1실에서 제4실까지는 사조의 악장을 연주하고 제5실은 곧 제1실의 악장을 연주하여 각실의 악장은 단지 헌릉(獻陵)과 목묘(穆廟)의 악장이 있을 뿐이라 한다. 이 어찌 다만 예문(禮文)의 흠결(欠缺)일 뿐이겠는가? 사체(事體)에 있어서도 크게 공경스러움을 결여한 것이다. 또 각실은 대왕(大王)을 무겁게 여기니, 각각 각실의 악장을 연주할 경우 의당 단지 대왕의 악장을 써야 할 것인데, 지금 묘정(廟庭)의 악장은 단지 원경 왕후의 악장만 있어 지금 제8실에 연주하니 큰 흠결이라 할 만하다. 아! 주(周)나라의 태사(太姒)는 그 덕(德)이 문왕(文王)과 짝하니, 어찌 찬송하는 악장이 없겠는가? 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에 있어서 상가(上歌)는 주나라를 노래하고 하가는 본조(本朝)를 노래하였으니, 이뜻을 따라 제1실에 겸하여 연주하였으나, 그 각실에 대해서는 오로지 대왕의 악장을 써서 궐전(闕典)을 보완하고 흠결을 이정해야 할 것이니, 예(禮)에 있어서 소홀히 여길 수 없는 것이다. 하물며 선정(先正)이 이미 옛날에 진장(陳章)했던 것임에랴! 아! 나라에서 소중히 여기는 것으로 제향(祭享)보다 앞서는 것은 없고, 제향의 의식은 또한 악장보다 앞서는 것이 없다. 예조로 하여금 대신과 예를 아는 유신에게 문의(問議)해 상문(上聞)토록 하라."
하였다.
윤4월 18일 신미
김시형(金始炯)을 호조 판서로, 이재(李縡)를 좌부 빈객(左副賓客)으로, 이덕수(李德壽)를 우빈객(右賓客)으로, 홍창한(洪昌漢)을 사간으로, 박필부(朴弼傅)를 집의로, 권굉(權宏)을 장령으로, 한광회(韓光會)를 지평으로, 김상복(金相福)을 정언으로, 윤광의(尹光毅)를 교리로, 이종적(李宗迪)을 부교리로, 조원명(趙遠命)을 부제학으로, 윤득화(尹得和)를 우윤(右尹)으로, 정휘량(鄭翬良)을 승지로 삼았다.
윤4월 19일 임신
이때 가뭄이 대단히 심하여 4차의 기우제를 지냈지만 효험이 없었으므로 임금이 장차 태묘(太廟)에서 친히 기도하려고 하였다. 영의정 김재로(金在魯)가 친히 기도하겠다는 명을 정지할 것을 청하였으나, 임금이 허락하지 않았다.
한사득(韓師得)·구택규(具宅奎)를 승지로 삼았다.
윤4월 20일 계유
임금이 장차 기우제를 지내려고, 보련(步輦)을 타면서 일산을 펴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대신(大臣)과 승지가 힘써 청하자, 비로소 일산을 펴라고 명했다가 곧 제거하라고 명하였다. 재전(齋殿)에 들어가자 어제(御製)인 조그만 종이 한 장을 꺼내어 승지에게 보이면서 말하기를,
"옛사람 중에는 농사 도구를 자손에게 물려준 사람이 있었다. 이제 이것을 문안관(問安官)에게 주니, 돌아가 동궁에게 주어 백성을 중히 여기고 그 노고를 염려하는 뜻을 알게 하라."
하였다. 그 글에 이르기를,
"백성을 위해 비를 빌어 재전(齋殿)에서 마음을 깨끗이 하고 재계(齋戒)하였건만 비가 올 기미가 아득하여 스스로 정성이 얕음을 탄식하며, 시 한 수를 지어 부치노라. 그윽이 생각건대, 임금이 되어 능히 임금 노릇을 잘할 수 있겠는가? 임금이란 백성을 위해 만든 것이니, 한 끼 밥을 먹을 때나 숨을 한번 쉴 때나 어찌 백성에 대하여 해이한 뜻을 가질 수 있겠는가? 하지만 지나간 역사를 두루 살펴보건대, 백성은 나 한사람을 받들기 위해 있는 것이라 생각하여 백성을 부림에 있어 진실로 혹은 절제가 없어서 백성이 비록 곤궁하다 할지라도 예삿일로 보았으니, 백성들의 불평스런 뜻이 어디에 있었겠는가? 내 비록 덕은 박하나, 우리 백성들을 긍휼하는 마음은 그 법을 선조로부터 받는 것이다. 이제 감개가 일어남으로 인해, 옛사람이 어떤 일을 만나면 가르쳤던 뜻을 본받아 원량(元良)에게 써 주노니, 마음속에 명심하여 간직할지어다."
하고, 그 시에 이르기를,
"임어(臨御)한 지 거의 20년인데,
한결같은 마음은 오직 군민(軍民)에게 있었노라.
이 뜻은 저 푸른 하늘에 질정(質正)할 수 있으나,
무능하고 덕이 박해 선조께 부끄럽네."
하였다.
윤4월 21일 갑술
임금이 친제(親祭)를 행하였다. 초헌례(初獻禮)를 거행할 때 제5실에 이르러 대축(大祝)을 잘못 건드려 작(爵)을 엎질렀다. 임금이 말하기를,
"작이 이미 기울어졌으니, 마땅히 다시 작을 올려야 할 것인가?"
하고, 그것을 대신(大臣)에게 문의(問議)케 하였다. 태묘(太廟)의 복례(僕隷) 중에 늙고 그런 일을 경험한 자가 있어 말하기를,
"일찍이 이런 일이 있어 대신에게 문의하는 것을 본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고(故) 상신(相臣) 남구만(南九萬)이 말하기를, ‘헌관(獻官)이 내려와 복위(復位)하기 전에 작이 기울어졌다면 다시 작을 올리겠지만, 내려와 복위한 뒤라면 비록 작이 기울어졌다 해도 다시 올릴 수 없다.’ 하였습니다."
하니, 임금이 옳게 여기고 다시 작을 올리게 하였다.
윤4월 22일 을해
헌부 【지평 한광회(韓光會)이다.】 에서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태묘(太廟)에 친제(親祭)를 거행할 때 반행(班行)을 이루지 못하였으니, 참여하지 않은 사람을 모두 종중 추고(從重推考)하소서. 그리고 제관(祭官)을 가려서 차정(差定)하지 아니함이 많았으니, 제관을 차정한 이조(吏曹)의 낭청(郞廳)은 파직하고 당상(堂上)은 종중 추고하소서. 강계 부사(江界府使) 조동하(趙東夏)가 병조 참판 권적(權樀)을 모욕했다는 말을 사람들이 전파하고 있습니다. 교만하고 방자한 일이니, 징계가 없을 수 없습니다. 청컨대 파직하고 서용하지 마소서. 장흥 부사(長興府使) 남익엽(南益燁)은 진휼(賑恤)한다는 구실로 부민(富民)을 취렴(聚斂)하였고, 덕원 부사(德源府使) 민염(閔諗)은 주색(酒色)에 빠진 나머지 술에 취해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며 밤에서 낮까지 계속하였으니, 청컨대 모두 파직하소서."
하였으나, 모두 윤허하지 않고, 단지 추고(推考)에 대한 아룀만을 윤허하였다.
윤4월 23일 병자
하교하기를,
"덕이 박하고 정성이 얕아 하늘을 능히 감동시키지 못하여 가뭄이 날이 갈수록 심해지니, 민사(民事)가 더욱 딱하다. 실로 나의 비덕(否德)에서 말미암은 것이니, 옥식(玉食)이 어찌 달겠는가? 오늘부터 비가 충분히 올 때까지 어공(御供)하는 쌀을 줄이고 어공하는 술을 정지시키라."
하였다.
임금이 대신(大臣)·비국 당상(備局堂上) 및 금오(金吾)의 여러 당상을 인견(引見)하였다. 영의정 김재로(金在魯)가 말하기를,
"판의금(判義禁)을 입시(入侍)케 하라는 명은 여러 죄인의 집안에서 격고(擊鼓)로 상언(上言)한 것을 회계(回啓)하는 일 때문인 것 같습니다만, 일이 중대한데 관계되니, 대충대충 할 수는 없습니다. 청컨대 좌상(左相)과 우상(右相)이 함께 들어오기를 기다려 상세히 살펴 조사해 품(稟)하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윤허하였다. 판의금 조상경(趙尙絅)이 말하기를,
"임인년146) 옥사(獄事) 때 조이중(趙爾重)·이상집(李尙)·백시구(白時耉)는 모두 평안 병사(平安兵使)를 교대(交代)한 사람으로 무초(誣招)에 들었었는데, 두 사람은 형사(刑死)하였고 조이중은 이미 작고하였으므로 그 벼슬을 추탈(追奪)하였습니다. 백시구 등은 이제 이미 신원(伸冤)했습니다만, 조이중은 아직 복작(復爵)되지 못했기에 그 손자가 지금 바야흐로 상언하여 억울함을 호소하고 있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이미 대훈(大訓)을 이루었으니, 지금 논할 만한 것이 없다. 일체로 복관(復官)시킴이 옳다."
하였다. 김재로가 말하기를,
"태묘(太廟)의 악장(樂章)에 관한 일로 수의(收議)하라는 명이 있으시어, 신이 《오례의(五禮儀)》의 서례(序例)가 있는 권(卷)과 《태묘의궤(太廟儀軌)》의 악장조(樂章條)를 두루 살펴보았더니, 세종조(世宗朝)의 예(禮)·악(樂)을 제작할 당시 초헌 악장(初獻樂章)을 제정하였으니, 이것이 곧 구장(九章)입니다. 대개 음악은 아홉 번 변하여 이루어지기 때문에 그 사(詞) 또한 ‘이미 아홉 번 변하였으니, 진선 진미(盡善盡美)하다.’라고 한 것입니다. 이것을 각실(各室)에 두루 연주하는데, 초헌(初獻) 때는 음악을 이룰 뿐이고 원래 각실에 각각 1장(章)을 연주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만약 각실마다 1장을 연주한다면 초헌 때 태종(太宗)의 악장이 어찌 2장에 이르렀겠으며, 아헌(亞獻) 때 태조(太祖)의 악장이 어찌 5장에 이르렀겠습니까? 더욱이 세종조의 태묘에는 단지 5실만 있었으니, 단지 5장만 찬(撰)함이 마땅합니다. 어찌 반드시 9장을 찬하였겠습니까? 그리고 《오례의》는 성종조(成宗朝)에 이루어졌으니, 세종조·세조조의 악장을 어찌하여 추가로 찬하여 첨가해 넣지 않았던 것입니까? 이로써 보건대, 각실마다 1장씩 연주하지 아니함이 명백합니다.
그리고 초헌 9장을 살펴보건대, 첫째는 목조(穆祖)의 악장, 둘째의 익조(翼祖)의 악장, 셋째는 도조(度祖)의 악장, 넷째는 환조(桓祖)의 악장, 다섯째는 태조의 악장, 여섯째·일곱째는 모두 태종의 악장, 여덟째는 원경 왕후(元敬王后)의 악장 아홉째는 열성(列聖)의 문덕(文德)을 총괄하여 서술한 것으로, 아헌·종헌(終獻) 때는 가장 처음과 가장 끝의 것을 없앱니다. 인입(引入)·인출(引出)할 때 악장 밖의 것이 또한 9장이 되는데, 첫째 목조 악장, 둘째 환조 악장, 셋째·넷째·다섯째·여섯째·일곱째는 모두 태조 악장, 여덟째·아홉째는 모두 태종 악장입니다. 대개 세종조에 제정했던 뜻은 단지 사조(四祖)께서 왕업(王業)의 기틀을 처음 닦으셨음과 태조·태종께서 개국(開國)·창업(創業)하셨음을 칭술(稱述)해 천백대(千百代)에 통용할 악장으로 삼고 가감(加減)하지 못하게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뒷날의 악사(樂師)들이 악장을 제정한 본뜻을 알지 못하여 망령되게도 각실에다 나누어 소속시키자, 그 사(詞)와 해당 실의 공덕(功德)이 서로 들어맞지 않게 되었던 것입니다. 때문에 인조조(仁祖朝)의 여러 신하들이 그 타당함을 깨달아 그 나누어 소속시킨 잘못을 바로잡지 못한 채 범연하게 문란한 것으로 알아 각실에 없는 악장을 추가로 찬할 것을 청하기까지 하였던 것입니다. 하지만 마침내는 일이 중대한 데 관계되는지라 단지 선묘(宣廟)의 악장만 찬해서 쓰고 망령되이 한 번에 9장을 이루는 것 외에 더했던 것이니, 모두가 상고함이 상세하지 아니한 데서 말미암았던 것이고 이른바 문란하다는 것은 더욱 문란해졌던 것입니다. 생각건대 그 나누어 소속시킨 잘못을 바로잡지 않았기 때문에 추가로 찬한 선묘의 악장을 차례에 따라 효종실(孝宗室)에 사용하였던 것이고, 제11실·제12실은 10장이 이미 다 끝났기 때문에 다시 목조·익조의 악장을 써서 더욱 심하게 문란하고 어긋나게 만들었던 것입니다.
이제 마땅히 한 번 그 근본을 바로잡아야 할 것인데, 근본이란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9장을 한 실 안에 두루 연주하고, 9장 외에 잘못 첨가한 1장을 제거하는 것에 불과합니다. 숙종 갑술년147) 이후 이봉징(李鳳徵)의 상소로 인해, 고 상신 남구만(南九萬)의 차자와 유상운(柳尙運)의 헌의(獻議)에서 처음으로 이런 뜻을 대략이나마 볼 수 있는데, 논한 바가 명백하지만 그래도 환히 분석하지는 못하였으니, 이것이 애석합니다. 선묘의 악장에 이르러서는, 이미 뒷사람이 잘못 첨가한 것이고, 지금 이미 세종조의 뜻을 알았으니, 한결같이 《오례의》를 준행하여 바로잡는다면, 잘못 첨가된 악장은 절로 마땅히 버려져 쓰이지 않을 것입니다. 남구만이 이른바 ‘세실(世室) 안의 경우에 있어서는 취사(取捨)하는 바가 있을 것이니, 선조(宣祖)의 오르내리시는 영혼 또한 생각건대 반드시 불안해 하실 것이다.’라고 한 것이 참으로 절실한 논의가 됩니다. 또 초헌의 ‘대유(大猷)’는 곧 열성의 문덕(文德)을 총괄해 서술한 것이고, 역성(繹成)은 헌관(獻官)을 인출(引出)하는 시(詩)이며, 아헌의 혁정(赫整)은 태종의 악장입니다. 고 참판 이세필(李世弼)이 악정(樂正)이 되었을 때 이것을 심히 명백하게 변정(辨正)하였는데, 인조조의 여러 신하들은 대유·역성·혁정을 모두 세종의 악장이라 했고, 남구만 또한 조종(祖宗)의 공덕을 칭술(稱述)한 것으로 세종께서 왜(倭)를 정벌한 데 그친다고 하였으니, 그 능히 상세히 상고하지 아니하였음이 이와 같습니다. 이 악장은 곧 세종조에 제작한 것이었기 때문에 태종을 혹은 ‘황고(皇考)’ 혹은 ‘성고(聖考)’라 했던 것입니다. 어찌 세종의 시대에 스스로 미리 묘악(廟樂)을 찬할 리가 있겠습니까? 또 《오례의》 문소전(文昭殿) 악장의 경우는 태조·태종·세종·세조·예종 5실에 각각 해당하는 곡(曲)이 있습니다. 그러나 태묘의 경우 각실에 헌작(獻爵)할 때 당초 정한 제도와 한결같이 9장을 통용하였으니, 비록 세종의 대덕(大德)과 세조의 대열(大烈)로도 다시 추가로 찬해 첨가해 넣을 수 없는 것은, 태묘의 엄숙함이 문소전에 비할 바가 아니어서 9장의 수를 더하거나 줄일 수 없기 때문입니다. 또 《오례의》 서례(序例)에 이르기를, ‘영녕전(永寧殿)의 악장은 종묘(宗廟)에 올리는 것과 같다.’고 하였으니, 대개 세종조에 제정한 악장은 왕업의 기틀을 마련한 데서 시작하여 왕업을 이룬 데서 그쳤기 때문이었습니다. 따라서 묘향(廟享)을 처음 시작할 때 영녕전과 종묘에서 같이 썼던 것이니, 그 뜻이 어찌 심원(深遠)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남구만의 차자 가운데 이르기를, ‘사조(四祖)의 시(詩)를 종묘에 쓰는 것은 그래도 조종(祖宗)의 일을 자손에게 노래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겠지만, 영녕전에서 태조·태종의 시를 쓰고 있으니, 이런 까닭으로 자손의 시를 조고(祖考)에게 노래하는 것은 참으로 이해하지 못할 것이 있다.’고 하였으니, 이 또한 능히 깊이 생각하지 아니한 말인 것입니다. 악장을 제정함은 천백대를 위한 계책이었으니, 영녕전이 또한 어찌 태조·태종과 제부(躋祔)함이 없겠습니까? 또 황명(皇明)의 예(禮)에는 단지 태조와 태종의 묘악(廟樂)만 있고, 인종(仁宗) 이하는 통용하였습니다. 우리 나라에서 당초 제도를 정한 것은 실로 종주(從周)의 뜻에서 나왔던 것이니, 더욱 망령되이 변개(變改)할 수 없는 것입니다. 신이 어제 전악(典樂)을 불러 ‘각실에 1장찍 연주하는 잘못’을 말하고, 이어서 ‘지금부터 12실에 한 번 헌작(獻爵)하는 사이에 9장을 통용하여 연주해도 장애됨이 없을 수 있겠느냐?’고 물었더니, ‘조정에서 지금 만약 잘못을 바로잡아 통용해 연주하게 한다면 스스로 의당 이 9장을 12실에 통용하여 연주하겠다.’고 하였습니다. 신의 생각으로는, 마땅히 옛날의 예(禮)로 복구하여 말단의 잘못을 바로잡는 것이 힘도 허비하지 않고 난처한 일도 없을 것 같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경의 말이 참으로 분명하다. 그러나 사체가 지극히 중대하니, 시임(時任)·원임(原任) 대신(大臣)·육조(六曹)와 관각(館閣)의 당상(堂上)·유신(儒臣)이 상의하여 품처(稟處)하도록 하라."
하였다. 이때 여러 신하들이 수의(收議)하였는데, 모두 이르기를,
"억측하여 대답하기 어려움이 있으되, 유독 김재로의 말은 고거(考據)가 자못 상세합니다."
하였다.
윤4월 24일 정축
장령 권굉(權宏)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기근이 해마다 거듭 들고 전염병이 계속 발생하고 있는데, 지금 또 큰 가뭄이 들었으니, 불쌍한 우리 백성들은 장차 다 죽고 말 것입니다. 지난날 송(宋)나라 이종(理宗) 때 조경위(趙景緯)가 재이(災異)로 인해 상주(上奏)하기를, ‘옥식(玉食)을 감손하는 것은 내탕(內帑)을 덜어내고 공봉(供奉)을 물리침이 실(實)이 됨만 못하며, 정전(正殿)을 피함은 행문(倖門)을 막고 충간(忠諫)을 넓히는 것이 실이 됨만 못합니다. 죄를 크게 용서해 주는 것 또한 인은(仁恩)을 넓히는 것이겠지만, 또 순량(循良)한 사람을 가리고 탐폭(貪暴)한 자를 내쫓는 것이 실이 됨만 못합니다.’ 하였으니, 이것은 참으로 절실한 논의입니다. 흉년이 들면 예(禮)를 줄이는 것이 옛날부터의 법인데, 근래에 사치가 점차 성해지고 있습니다. 마땅히 상궁(上躬)에서부터 검소한 덕을 환히 보이셔서 사방의 본보기가 되게 하소서. 선조(先祖) 때의 일을 상고해 보면, 무릇 큰 재이가 있을 경우 재열(宰列)과 삼사(三司)를 불러 모아 득실(得失)을 순문(詢問)하셨습니다. 전하께서 사복(嗣服)하신 초기에는 또한 일찍이 준행(遵行)하시더니, 근년 이래로는 이 일 또한 폐지하셔서 여태까지 쓸쓸하기만 합니다. 또한 마땅히 빨리 명지(明旨)를 내리셔서 간언(諫言)이 오는 길을 넓히셔야 할 것입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권면한 것을 더욱 힘쓰겠노라. 덧붙여 아뢴 것은 마땅히 유의하겠다."
하였다.
윤4월 25일 무인
김성응(金聖應)을 판윤으로, 원경하(元景夏)를 좌윤으로, 구성임(具聖任)을 포도 대장으로 삼았다.
이때 오랫동안 비가 내리지 아니하여 임금이 또 장차 북교(北郊)에서 친히 기도하려고 하였다. 약원(藥院)의 제거(提擧)와 승지가 구대(求對)하여 아뢰기를,
"연로(輦路) 곁에는 전염병을 앓고 있는 사람이 막(幕)을 얽어놓은 것이 많이 있습니다. 만약 철거해 옮긴다면 반드시 그 죽음을 재촉할 것이고, 옮기지 않는다면 또 부딪쳐서 범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하고, 몹시 힘써 정침할 것을 청하니, 마침내 명(命)을 고쳐 사단(社壇)에서 기도하였다.
윤4월 26일 기묘
조명리(趙明履)를 승지로 삼았다.
이날 임금이 산개(繖蓋)를 물리치고 사단(社壇)에 나아가 막차(幕次)에 들어가서 장악원정(掌樂院正) 이연덕(李延德)을 불러 묻기를,
"사단에 이미 음악을 썼으니, 또한 시(詩)가 있는가?"
하니, 이연덕이 말하기를.
"있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몇 구(句)인가?"
하니, 이연덕이 말하기를,
"4자 8구(四字八句)입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4자 1구가 1절(節)이 되는가?"
하니, 이연덕이 말하기를,
"1장(章)이 1절입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팔성(八成)은 몇 절인가? 아악(雅樂)은 박(拍)이 없는데, 어떤 곡(曲)으로 마땅히 박을 대신해 쓰는가?"
하니, 이연덕이 전악(典樂)에게 물어보고, 대답하기를,
"북소리로 절(節)을 삼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신관례(神祼禮)는 육성(六成)인가?"
하니, 이연덕이 말하기를,
"팔성(八成)입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아헌(亞獻)·종헌(終獻) 때도 또한 노래가 있는가?"
하니, 이연덕이 말하기를,
"없습니다." 하였다.
"문무(文舞)가 물러나고 무무(武舞)가 나아올 사이에 속악(俗樂)에서는 음악을 연주하는 절차가 없지만 아악에는 있으니, 어떤 까닭인가?"
하니, 이연덕이 말하기를,
"음악을 연주해 춤의 열(列)을 나란하게 하는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이것이 속악과 다르다."
하였다.
윤4월 27일 경진
임금이 친제(親祭)를 행하고 장차 환궁(還宮)하려 하면서 보여(步輿)로 나오니, 대신(大臣) 이하가 연(輦)을 탈 것을 다투어 청하였으나, 임금이 말하기를,
"어제 연을 탄 것이 옳지 않다는 것을 알지 못하는 바 아니었으니, 연로한 대신이 교(轎)를 잡고 굳이 청하였으므로 부득이 허락했던 것이다. 하지만 밤새도록 생각해 보았더니 마음이 몹시 불안하였다. 이와 같이 하고도 능히 하늘을 감동시킬 수 있겠는가? 지금 보여로 환궁하는 것은 어제의 잘못을 보완하고자 하는 뜻이다."
하였다. 의금부 앞길에 이르자 시수(時囚) 및 미처 잡아오지 못한 자를 방송해 주고, 아울러 전옥(典獄)과 포청(捕廳)에 갇혀 있는 자도 방송해 주라고 명하였다.
윤4월 28일 신사
성 안의 개천을 준설(浚渫)하고, 헌현(軒縣)을 철거하라고 명하였다. 또 묘당(廟堂)으로 하여금 중외(中外)에 백성을 동요시키는 정사(政事)를 신칙케 하였다. 이때 화협 옹주(和協翁主)의 혼기(婚期)가 가까이 닥쳤는데, 임금이 가뭄을 걱정하여 물려서 거행하고자 하였다. 대신(大臣)이 말하기를,
"꼭 기일을 물리실 필요는 없습니다. 무릇 온갖 일에 있어서 절약하면 또한 수성(修省)하는 뜻인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옳게 여기고 그 번문(繁文)을 감하라 명하였다. 이어서 원경하(元景夏)에게 부마(駙馬)의 집에 가서 연교(筵敎)를 전하여 연객(宴客)을 접대하는 음식에 또한 유과(油果)를 쓰지 말도록 하였다. 원경하가 때마침 전석(前席)에 입시해 있었는데, 부마 집안의 친척이었기 때문이었다.
임금이 소대(召對)를 행하였다.
헌납 여광헌(呂光憲)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그저께 북교(北郊)에서 친제(親祭)하겠다는 명이 있자, 전염병을 앓는 백성은 그 막(幕)을 옮기고 유사(有司)의 신하는 단유(壇壝)148) 를 청소하였습니다. 그런데 곧 그만둘 것을 명하셨으니, 전하의 가뭄을 걱정하여 경건하게 기도하는 정성은 아마도 처음부터 끝까지 차이가 없게 한다는 뜻에 부족함이 있는 것 같습니다. 이와 같은데 오히려 어떻게 감동시키기를 바랄 수 있겠습니까? 더욱이 약원(藥院) 대신(大臣)의 구대(求對)가 혼시(閽寺)에게 저지당해 반나절을 방황하였으니, 또한 대신을 공경하는 뜻이 어긋남이 있습니다. 비록 지나간 일이기는 하나, 신은 가만히 애석하게 생각합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이제 진달한 것을 보니, 내가 실로 부끄럽다. 마땅히 스스로 힘쓰겠다."
하였다.
윤4월 29일 임오
이달에 8도가 모두 가뭄을 고하였다. 그런데 북관(北關)의 삼수(三水)·갑산(甲山)·경흥(慶興)에서는 서리와 눈이 연달아 내렸고, 경기(京畿)의 교하(交河)·포천(抱川)과, 서관(西關)의 희천(熙川)·맹산(孟山)에서는 비둘기 알만한 우박이 쏟아져 각종 곡식이 크게 손상되었다. 유독 영동(嶺東) 한 도(道)만은 큰 비가 내리 퍼부어 행려(行旅)가 통하지 못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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